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5)

요새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한 첫 번째 측면인 내려놓기에 관한 내용을 교제하였다. 그리고 내려놓기의 첫 번째 내용으로서 여러 가지 부정적 정서를 내려놓는 것을 이야기하였다. 부정적 정서를 내려놓는 것을 몇 번이나 이야기했느냐? (네 번 이야기했습니다.) 어떻게 여러 가지 부정적 정서를 내려놓아야 하는가에 대해 너희는 길이 좀 보이느냐? 우리가 교제하고 해부한 여러 부정적 정서는 겉으로 보면 하나의 정서이자 생각이지만 사실 근본적으로는 사람의 잘못된 인생관과 가치관, 잘못된 생각과 관점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며, 물론 사람의 패괴 성품으로 야기되는 여러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생각과 관점 그리고 부정적 정서로 인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여러 가지 부정적 정서가 생기는 것은 그 근원과 원인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교제한 여러 부정적 정서는 사람의 일시적이고 즉흥적인 생각의 일종이 아니며 단순한 의미에서의 생각과 관점 혹은 일시적 심정이 아니다. 또한 사람의 생활 방식과 실행, 사람의 생각과 관점, 사람이나 일을 바라보는 시각과 태도를 좌우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과 사람의 생각 속에 숨어 시시각각 사람의 일상생활을 따라다니며 여러 가지 사람과 일, 사물을 바라볼 때에 갖는 시각과 입장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부정적 정서는 사람의 일상생활과 처신, 인생의 방향을 선택하는 데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며 은연중 사람에게 갖은 부작용을 낳는다. 그러니 이런 부정적 정서는 진리 추구를 통해 차차 인식하고 해결하여 차차 내려놓아야 한다. 이런 부정적 정서를 내려놓는 것은 사실 사람이 물질적인 것을 내려놓는 것처럼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든가 그것에 점령당하지 않는다든가 혹은 단순히 들었다가 내려놓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내려놓기는 무슨 의미겠느냐? 주로 잘못된 생각과 관점 그리고 사람이나 일을 바라보는 잘못된 시각과 태도를 반드시 폭로하고 해부하여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야 진정으로 버릴 수 있다. 어떤 부정적 정서가 생기든 상응하는 진리를 구해 해결함으로써 진리를 실행하는 원칙과 방법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만 부정적 정서의 괴롭힘과 속박, 영향에서 확실하게 벗어나 마지막에는 진리에 순종하고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에 순종할 수 있다. 그러면 굳게 서서 증거할 수 있게 된다.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해야 한다. 그래야만 부정적 정서나 잘못된 생각과 관점을 확실하게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다. 왜 이토록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만 확실하게 내려놓을 수 있겠느냐? 그 이유는 이런 부정적 정서가 물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일시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점령하거나 사람의 마음을 괴롭히는 정서가 아니라 사람 내면에 형성된 이미 정해져 존재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깊이 뿌리내린 생각과 관점으로,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무척 심각하다. 따라서 이런 부정적 정서의 것은 반드시 여러 방식과 절차를 통해서만 내려놓을 수 있다. 이 내려놓기의 과정 역시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부정적 정서를 내려놓는 과정도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이라면 부정적 정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오직 한 가지 길밖에 없다. 진리를 구해 하나님 말씀을 바탕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이 말의 뜻을 이해하겠느냐? (이해합니다.)

여러 부정적 정서를 처음 교제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가 예전에 교제했던 각 측면의 진리는 기본적으로 이 측면의 주제에 관련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너희에게 이것은 매우 생소한 주제였다. 사람은 속으로 부정적 정서는 정상적인 것이고 패괴 성품과는 거리가 있다고 여기고, 부정적 정서를 패괴 성품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둘은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틀린 생각이다. 어떤 사람은 부정적 정서가 단지 일시적인 마음이나 생각이며 사람에게 영향이 별로 없으니 내려놓고 말고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제 여러 번의 교제와 해부를 통해 여러 부정적 정서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실재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우리는 예전부터 계속 패괴 성품에 대해 인식하고 해부하는 교제를 했고 부정적 정서에 속하는 것은 패괴 성품을 폭로할 때만 조금씩 다루고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교제하지는 않았다. 지금 여러 차례 구체적인 교제를 통해 너희가 이 측면의 주제에 주의를 기울여 일상생활에서 이런 부정적 정서의 것들을 해부하고 인식하는 것을 배우기 시작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것의 본질을 인식한다면 그것을 포기하고 저버려 차차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런 부정적 정서의 것을 내려놓아야 진리 추구의 올바른 궤도에 진입할 수 있고 진리 추구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절차인 것이다. 분명히 알겠느냐? (네.) 비록 부정적 정서가 사람의 삶, 생존 그리고 걸어가는 길 측면에서 패괴 성품만큼 심하게 사람을 점령하고 통제하지는 않지만 이런 부정적 정서 역시 피할 수 없으며,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 어느 정도 사람의 생각을 구속하고,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올바른 길을 걷는 것에 영향을 미치니 그 부작용은 사람의 패괴 성품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이 측면은 앞으로 너희가 추구하거나 체험하고 실천할 때 차차 느끼게 될 것이다. 이 주제를 이제 막 접하다 보니 별 지각이나 인식이 없거나 나아가 아무런 느낌이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앞으로 이 측면의 내용을 체험하게 된다면 너는 부정적 정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그것이 사람의 생각 속, 마음속 깊은 곳, 나아가서는 사람의 잠재의식 속에서 매우 큰 지위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부정적 정서는 상당 수준 사람이 패괴 성품 속에서 일을 처리하도록 조장하고 부추기며, 사람에 대한 패괴 성품의 구속과 결박을 조장하고 부추겨 사람이 고집스럽게 패괴 성품에 따라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이런 부정적 정서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실 여러 부정적 정서 속에는 한편으로 수많은 생각과 관점이 숨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여러 부정적 정서는 각각 다른 정도로 사람의 패괴 성품 속에 숨어 있다. 결론적으로 이런 부정적 정서는 사람의 마음을 차지하며 사람의 패괴 성품의 본질과 마찬가지로 소극적인 측면의 것으로서 부정적인 것에 속한다. 그렇다면 이 부정적인 것은 무엇을 뜻하며 무엇을 가리켜 하는 말이겠느냐? 한편으로 이런 부정적 정서는 사람의 생명 진입에 대해 올바른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네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능동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인도하거나 도와줄 수 없다. 여러 부정적 정서가 사람의 내면에 숨어 있으면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하나님을 경계하고 피한다. 심지어 마음속으로 은밀하게 은근히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을 의심하고 부인하며 판단한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이런 부정적 정서는 긍정적인 사물이겠느냐? (아닙니다.) 이것이 한 측면이다. 다른 측면으로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진리에 순종하게 하지 않는다. 그것이 사람이 걷는 길, 이루고자 하는 목표와 방향을 진리와 배치되고 대치되게 만든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확실하다. 이런 부정적 정서가 사람의 내면에서 하는 역할이라고는 사람이 자신을 보전하게 하고 육의 이익과 사람의 허영심과 체면 그리고 지위를 지키게 하는 것뿐이다. 그것은 시시각각 너를 속박하고 결박하여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지 못하게 하며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게 한다. 네가 진리를 실행하면 손해를 보고 체면이 서지 않으며 지위를 잃고 조롱당하며 자신의 진면목이 남에게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런 부정적 정서가 사람의 내면에서 사람을 통제하고 사람의 생각을 주도하여 사람이 부정적인 것만 생각하게 하니 이런 부정적인 것의 본질은 진리에 위배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래서 부정적 정서는 시시각각 너를 일깨우는 동시에 네가 진리를 실행하고 추구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그것은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데 하나의 벽이자 네가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데 하나의 걸림돌이다. 네가 진리를 실행하고자 할 때나 네가 정직한 말 한 마디를 하고자 할 때, 네가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고자 할 때나 네가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자 할 때, 네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대가를 치러 충성을 다하고자 할 때면 곧바로 그런 부정적 정서가 튀어나와 네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그것은 네 생각 속에서 끊임없이 떠오르고 네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스치면서 네가 그렇게 하면 잃는 것이 무엇인지, 그 결말이 어떨지, 그 결과는 어떨지, 또한 그렇게 하면 얻는 것이 무엇인지 반복해서 너를 일깨우고 경고하여 진리를 받아들이거나 진리를 실행하거나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게 하고 대신 자신을 위해 생각하게 하며 자기 이익을 고려하게 만든다. 그럼 너는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순식간에 네 생각은 이런 부정적 정서에 속박되고 통제된다. 원래 너는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을 만족게 하려 했지만 부정적 정서가 생기면서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따르고 그것에 통제된다. 그것에 의해 입이 닫히고 손발이 묶여 해야 할 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한다. 오히려 거짓말과 기만하고 판단하는 말만 내뱉고 진리에 위배되는 일을 하게 된다. 너는 마음이 곧바로 어두워지고 괴로움에 빠지는 것이다. 본래는 생각도 잘하고 계획도 잘하며, 진리를 실행하고 본분 이행에 충성을 다하고자 하여 마음속에 동기와 소망, 그리고 진리를 실행하려는 의지가 있었지만 중요한 순간 부정적 정서가 주도권을 잡는다. 자신에게는 그것을 저버릴 능력도 거부할 능력도 없어 결국 부정적 정서에 두 손 들고 항복해 버리는 것이다. 이런 부정적 정서가 사람을 농간하고 교란할 때, 부정적 정서가 사람의 생각을 통제하고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을 가로막을 때 사람에게 보여지는 모습은 그토록 무력하고 무방비하며 가련하다. 큰일이 터지지 않거나 아무런 원칙에도 관련되지 않을 때 사람은 온몸에 힘이 넘치고, 의지와 믿음, 동기도 충만하여 하나님을 더없이 사랑하고 자신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고 잘못된 일을 행하지 않고 방해하거나 교란하는 일을 하지 않으며 나아가 고의로 악을 행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일만 터지면 어찌하여 그렇게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것이냐? 그렇게 자신도 어쩔 수 없이 한 일들은 자기가 계획한 일도 자기가 원한 일도 아니지만 어쨌든 일어났고 현실이 되었으며 전혀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런 일이 일어나고 이런 현상이 반복되는 것은 부정적 정서로 초래되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부정적 정서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 사람에 대한 통제가 사람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며 쉽게 해결할 수도, 쉽게 내려놓거나 저버릴 수도 없다는 것을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사람이 평소에 구호를 얼마나 힘차게 외치든, 얼마나 강한 의지와 큰 소망을 품든,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그 믿음이 얼마나 크든 상관없다. 사실로 임했을 때 그런 의지와 소망, 이상, 믿음은 어찌하여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것이냐? 어찌하여 일시적인 부정적 정서에 의해 영향받고 저지당하는 것이냐? 여기에서 부정적 정서가 사람의 생명에 뿌리내려 사람의 패괴 성품과 공존하며 사람의 패괴 성품처럼 사람의 생각과 관점을 좌우하고 통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며 매사에 사람이 가지는 모든 생각과 행동들을 통제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부정적 정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부정적 정서는 긍정적인 사물이 아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첫 번째 측면으로 그것은 사람이 능동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게 인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측면으로 그것은 사실로 임했을 때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순조롭게 진리를 실행하여 진리에 진입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데 걸림돌이고 사람이 진리를 구하고 실행하는 것을 가로막기 때문에 부정적 정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부정적 정서의 역할과 본질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긍정적인 사물이 아니며 그것의 본질은 일정 정도로 사람의 패괴 성품보다 사람을 더 속박하고 통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런 부정적 정서가 존재하는 것이 심각한 문제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부정적 정서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겠느냐? 확실한 것은 그것이 사람을 오랫동안 소극적으로 살게 하고 나아가 사람을 더 구속하고 속박하며 진리 추구를 가로막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심각한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않겠느냐? 해결해야만 한다. 사람은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동시에 자신의 부정적 정서도 해결해야 한다. 부정적 정서와 패괴 성품을 해결해야만 사람은 비로소 별다른 방해 없이 순조롭게 진리를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패괴 성품은 사람의 겉모습이나 행동 방식, 내적 상태에 잠재해 있다. 그럼 부정적 정서는 어떻게 분별하느냐? 부정적 정서와 패괴 성품은 어떻게 구분하느냐? 너희는 묵상해 본 적이 있느냐? (묵상해 보지 않았습니다.) 성품과 정서는 서로 다른 것이다. 그저 성품과 정서를 이야기한다면 문자적으로 구별하기 쉽지 않으냐? 성품이란 사람의 본성 본질에서 드러나는 것이고, 정서는 기본적으로 사람이 일을 처리할 때의 심리 상태이다. 문자적으로 어떻게 해석하든 결론적으로 사람의 정서, 특히 부정적 정서 속에 많은 부정적인 생각들이 존재한다. 사람의 마음속에 이런 부정적 정서가 있으면 그런 부정적 정서는 사람이 부정적 내적 상태로 살게 하고, 여러 가지 부정확한 사상 관점에 지배되어 살게 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 부정적 정서가 장기간 사람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지만,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도무지 그것을 의식하지도 못하고 그것의 존재를 느낄 수도 없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패괴 성품처럼 시시각각 사람을 쫓아다니게 된다. 이 부정적 정서가 사람의 여러 부정확한 사상 관점 속에 잠재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부정확한 생각과 관점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을 의심하게 되고 진실한 믿음을 잃게 되며 심지어 하나님에게 갖은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되고, 정상적인 이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런 부정적 정서는 여러 이유와 사상 관점으로 포장되어 사람의 패괴 성품과 여러 부정확한 사상 관점 속에 잠재해 있으며, 완전하게 사람의 본성 본질을 대변한다. 패괴 성품은 사람이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여러 내적 상태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나타나며, 이 내적 상태에는 사람의 패괴 성품이 들어 있다. 부정적 정서와 패괴 성품은 비록 차이는 있지만, 어떤 측면에서 그것들은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며 서로 끊어지지 않고 얽혀 있다. 어떤 측면에서는 상호 보완적으로 서로를 조장하면서 의존한다. 예컨대, 저번에 우리가 교제했던 근심, 염려, 걱정은 부정적 정서의 일종이며, 이 부정적 정서는 사람이 근심, 염려, 걱정 속에 살게 한다. 사람이 이런 정서에 빠지면 자연스럽게 사상 관점이 생겨 하나님을 의심하고 추측하며, 경계하고 오해하며 심지어는 판단하고 공격하게 하며, 하나님에게 무리한 요구나 거래의 요구를 하게 한다. 이 정도에 이르면 부정적 정서가 패괴 성품에까지 발전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예를 통해 너희는 무엇을 깨달았느냐? 부정적 정서와 패괴 성품을 분별할 수 있겠느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부정적 정서는 그릇된 사상 관점을 야기하고, 패괴 성품은 더 깊은 차원의 것으로서 사람이 하나님을 오해하고 경계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보자. 근심, 염려, 걱정 등의 부정적 정서의 경우, 사람이 병에 걸리면 병의 고통을 염려하고, 병 때문에 근심, 염려, 걱정이 생긴다. 이런 것들은 사람의 마음을 통제하여 병이 악화되는 것을, 임박한 죽음으로 초래되는 여러 결과를 두려워하게 한다. 그래서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거부하며 죽음을 피하고 싶어 하게 된다. 이런 일련의 생각과 사고방식은 모두 병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이런 병 때문에 사람에게 여러 쓸데없는 생각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 생기는 근원은 모두 사람의 육의 이익에 뿌리를 두는 것이며,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한다는 사실이나 진리를 근거로 하는 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것을 부정적 정서로 규정한다. 사람이 병 때문에 마음은 편하지 않지만, 병에 걸리면 그것을 마주해야 하지 회피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아, 어떻게 마주하지? 치료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치료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고, 치료하면 어떻게 될까?’ 생각하면 할수록 근심되고, 병에 대한 여러 사상 관점이 사람을 근심과 염려, 걱정 속에 빠지게 한다. 이런 부정적 정서가 움트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병을 겪게 되어 치료를 시도하자니 부적절한 것 같고, 믿음에 의지하여 살아가면서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하자니 병이 악화될까 걱정이다. 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적절한 것이냐? 길이 보이지 않는다. 부정적 정서에 지배되어 사람은 계속 이 일로 근심하고 염려하며 걱정한다. 그렇게 근심, 염려, 걱정이 생기면 내려놓지 못한다. 병에 시달리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이냐? 사람은 ‘괜찮아. 난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실 거야. 내겐 믿음이 있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도 차도가 없고 하나님도 치료해 주지 않으면 사람은 곧이어 이 일로 근심하고 염려하며 걱정한다. ‘하나님이 치료해 주실까? 기다려 보자.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실 거야. 내겐 믿음이 있어.’ 입으로는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사실 그 내면은 부정적 정서 속에 살고 있다.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시지 않아 내 병이 악화되어 죽게 되면 어쩌지? 그럼 예전에 내가 이행한 본분은 헛수고가 되는 거 아닌가? 복도 못 받는 거고? 그래도 하나님께 치료해 달라고 구해 보자.’ 그는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나님, 제가 다년간 본분을 이행한 걸 봐서라도 제 병을 거두어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고는 고민한다. ‘하나님께 이렇게 구하는 것은 옳지 않아. 하나님께 이런 지나친 요구를 하면 안 돼. 믿음을 가져야지.’ 믿음이 있을 때는 차도가 좀 있는 것 같지만, 한동안 지나면 ‘내 병이 호전된 것 같지 않아. 오히려 악화된 것 같은데 어쩌지? 본분 이행하는 데 좀 더 힘을 내고 노력하고, 좀 더 수고하며 대가를 치르자.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시도록 말이야. 하나님께 내 충성심과 믿음, 그리고 이 시련을 능히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 드려야지.’라고 생각한다. 또 한동안 지나면 병이 호전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되어 점점 괴로워진다. ‘하나님이 치료도 안 해 주시니 어쩜 좋지? 하나님은 대체 치료해 주시긴 하는 거야?’ 속으로 더욱 근심하고 염려하며 걱정한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은 줄곧 병 때문에 근심, 염려, 걱정 등의 부정적 정서 속에 살면서 수시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생기고, 충성을 바치며, 의지를 불태운다. 사람이 어떻게 하고 어떤 방법을 취하든 사람은 결과적으로 시종일관 근심, 염려, 걱정 등의 정서에 빠지고, 병에 심각하게 얽매어 행하는 모든 것은 병의 호전과 치유를 위한 것이고, 병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사람이 이런 부정적 정서 속에 살면 단순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부정적 정서에 지배되어 늘 쓸데없는 생각만 한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 실현되지 않거나 사실이 자신의 바람과 다를 경우 수시로 사람은 내면에 자신의 바람에 위배되는 생각, 나아가서는 행동 방식이 떠오른다. 그리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시지 않아도 본분은 이행할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정말 치료해 주시지 않는다면 제가 하나님을 믿어도 소용없으니 제가 알아서 치료해야겠어요.” 보아라. ‘하나님이 치료해 주지 않아도 본분은 잘 이행하겠어. 하나님이 내게 시련을 주신 거잖아.’라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정말 치료해 주시지 않는다면 내가 알아서 치료할 거야. 내가 알아서 치료하게 되면 본분은 이행하지 않겠어. 하나님을 믿는 내가 병도 해결하지 못하는데 굳이 하나님을 믿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남들은 다 치료해 주시면서 왜 내 병은 고쳐 주시지 않지?’라고 생각한다. 계속 부정적 정서에 휩싸이니 그의 올바르지 못한 사상 관점을 돌리거나 고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가 병을 겪는 과정에서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원망, 의심이 차차 생겨난다. 이 과정은 바로 부정적 정서가 점차 패괴 성품으로 전환되고, 패괴 성품에 들어서 행동하는 것이다. 패괴 성품이 주도권을 잡으면 부정적 정서가 생길 뿐 아니라 일부 사상 관점 혹은 판단이나 결심 나아가 행동 방식까지 야기시킨다. 하나의 정서가 하나의 내적 상태로 전환된다면 단순한 부정적 정서가 아니다. 그저 생각만 하거나 하나의 상태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상태에서 사상, 관점, 결심, 행동, 방식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상, 관점, 행동, 방식을 주도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패괴 성품이 주도하는 것이다. 이런 전환 과정이 정리되었느냐?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상황에서 사람에게 부정적 정서가 생긴다. 이 부정적 정서는 단순한 사상 관점, 사고방식에 불과하지만, 이런 사고방식은 모두 부정적인 것이다. 부정적 사고방식이 늘 정서 속에 머무르며 사람에게 여러 가지 그릇된 내적 상태를 야기할 것이다. 사람이 그릇된 내적 상태에서 살아가면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 어떤 방식을 취할지 결심하게 되면, 잘못된 관점과 이론을 형성하게 된다. 이러면 패괴 성품과 관련된다. 이렇게 단순하다. 분명히 알겠느냐? (네,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너희가 말해 보아라. (어떤 상황에서 사람에게 부정적 정서가 생기고, 이런 부정적 정서가 처음에는 그저 부정적인 생각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런 부정적 생각이 더 나아가 여러 가지 그릇된 내적 상태를 야기하여 사람이 무엇을 하고, 어떤 방식을 취할지 결심하게 되면, 하나의 사상 이론이 그를 지배하게 됩니다. 이러면 사람의 패괴 성품과 관련됩니다.) 분명히 깨달았는지 잘 생각해 보아라. 단순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말로는 무척 단순하다. 그럼 분별할 수 있겠느냐? 이론적으로 분별하기가 쉽든 쉽지 않든, 결론적으로 부정적 정서와 패괴 성품 측면의 구분을 너희는 분명히 알게 되었느냐? (네,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전에 교제했던 여러 가지 부정적 정서가 너희 마음속에 존재한다면 분별하고 해부할 수 있겠느냐? (어느 정도 분별할 수 있습니다.) 만약 존재한다면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부정적 정서를 분별하는 목적은 이론적 개요나 의미만 알면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분별한 다음, 부정적 정서의 괴롭힘에서 벗어나고 사람에게 있어서는 안 될 여러 부정적 정서, 예컨대 우리가 예전에 교제했던 그런 부정적 정서를 내려놓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방금 교제했던 부정적 정서와 패괴 성품의 구별에서 봤을 때 부정적 정서가 사람이 패괴 성품을 드러내게 하는 근원이나 배경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병을 예로 들어 보자. 만약 네가 병에 대한 근심이나 염려, 걱정 등 측면의 부정적 정서가 생기지 않는다면, 이는 네가 이 측면의 일에 대해 인식과 체험이 있으며 정확한 사상 관점은 물론 진실한 순종까지 갖추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렇다면 네가 이 측면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진리에 부합할 것이다. 반대로 네가 만약 한 가지 측면의 일에 대해 늘 부정적 정서를 가지고 있고, 늘 한 가지 일 때문에 부정적 정서에 빠진다면, 자연스럽게 그 측면의 부정적 정서 탓에 갖가지 부정적 내적 상태가 생길 것이다. 부정적 내적 상태는 네가 그릇된 내적 상태 속에서 자연스럽게 패괴 성품을 드러내게 한 다음 사탄의 철학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 어디에서든 진리를 어기며 패괴 성품 속에서 살아가게 할 것이다. 그러니 부정적 정서와 패괴 성품을 어떻게 구별하든, 결국 이 둘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특히 그것들에는 공통된 본질이 있으니, 곧 부정적 정서와 패괴 성품 모두 그릇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들의 본질과 그 이면의 사상 관점은 모두 공통된 것이며, 사람에게 부정적 정서를 야기하는 사상 관점은 모두 그릇된 것으로서 사탄의 철학이다. 이 부정적이고 그릇된 것들은 사람이 패괴 성품을 드러내거나 패괴 성품에 따라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게 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지난번에 우리는 근심, 염려, 걱정 등 측면의 부정적 정서에 대해 교제하였다. 이어서 교제할 내용은 다른 측면의 부정적 정서로, 그것은 근심, 염려, 걱정 등 측면의 정서와 본질적으로 거의 같지만 근심, 염려, 걱정보다 더 부정적인 성질의 것이다. 이 측면의 정서는 무엇이겠느냐? 바로 사람이 현실 생활에서 가장 자주 보이는 상태인 억압이다. 다들 억압이라는 말을 들어 보았느냐? (들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억압’이라는 단어로 작문을 하거나 예를 들어 보아라. 내가 먼저 말해 보겠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아, 저는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자주 억압을 느끼며 해방받지 못합니다.” 이것은 맞는 문장이냐? (맞습니다.) 이제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일이 닥치면 항상 패괴가 드러나고 늘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해야 하니, 억압을 느낍니다.) 자신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 너무 많아 억압을 느낀다면, 이 억압의 배경은 무엇이냐? 억압을 야기하는 원인은 무엇이냐? 자기가 아무것도 아님을 인식하여 장래도, 종착지도, 구원받을 희망도 없는 것 같으니 속으로 억압을 느끼는 것이다. 누가 또 말해 보아라. (큰 붉은 용의 나라에서 하나님을 믿으니 억압을 느끼게 됩니다.) 이는 환경에서 억압을 느끼는 것이다. (본분을 이행할 때 리더의 감독을 받으니 억압을 느낍니다.) 잘 말했다. 억압된 정서를 아주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본분을 이행할 때 항상 실패와 좌절에 부딪히니 억압을 느낍니다.) 좌절과 실패는 너희가 억압을 느끼고 궁지에 몰리게 한다. 너희 사역의 진전 속도가 더디면 억압을 느끼지 않더냐? (억압을 느낍니다.) 이는 어느 정도 긍정적인 의미가 있기도 하다. 너희가 또 이야기해 보아라. (본분을 이행하면서 책망과 훈계를 받을 때도 억압을 느낍니다.) 이 역시 실제 상황이다. 그렇지 않으냐? (본분 이행의 결실이 좋지 않으면 억압을 느낍니다.) 억압의 원인이 무엇이냐? 진정 결실이 좋지 않기 때문이더냐? 본분이 조정되거나 도태될까 봐 두려운 것은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구체적인 원인이다. 그리고 또 어떤 억압이 있느냐? 말해 보아라. (주변 동역자가 자기보다 우수하면 억압을 느낍니다.) 이는 질투심의 농간으로 인한 억압이다. 또 어떤 억압의 문제가 있느냐? (업무가 장기간 진전이 없으면 억압을 느낍니다.) 이는 스트레스이겠느냐, 아니면 억압이겠느냐? 이는 스트레스에 가깝다. 이런 스트레스가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 스트레스를 원동력으로 바꾸면 좋지 않겠느냐? 각 팀원의 본분이 자주 조정되니 너희가 억압을 느끼느냐? (그렇습니다.) 억압을 느끼기도 하는구나. 너희가 만든 문장을 보니 너희는 모두 억압이라는 정서를 가지고 있다. 사람의 마음이 매우 불안해 보인다. 마음이 늘 동요하고, 보이지 않는 압박감을 받고 있기 때문에 억압이라는 정서가 생기고 억압이라는 부정적 정서 속에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좋은 현상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현상이 아니다. 그럼 해결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것이 좋은 현상이 아니니 해결해야만 한다. 사람이 항상 부정적 정서 속에 살 때 어떤 정서이든 상관없이 좁게 보면 그것이 사람의 몸과 마음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쳐 사람의 건강한 삶과 튼튼한 성장을 저해할 것이다. 그리고 넓게 보면 여러 부정적 정서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의식주 등 일상생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는 효율이나 진도, 결실에 영향을 미치며, 물론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 본분을 이행한 수확과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있어야 하는 수확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사람이 늘 이런 부정적 정서로 인해 괴로워하고 얽매이면 마음이 늘 방해받고 초조, 불안, 충동 등의 느낌에 빠지게 된다. 사람이 이런 느낌에 빠지게 되면 정상적인 양심과 이성, 정상적인 삶과 본분 이행의 상태가 교란되고 영향을 받으며 파괴된다. 그러니 적시에 이런 부정적 정서를 해결하여 다시는 사람의 정상적인 삶과 사역에 영향을 주지 못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 이야기한 억압과 예전에 말한 여러 가지 부정적 정서의 본질은 동일하다. 사람이 늘 여러 일로 걱정하고 염려하거나 내면 깊은 곳에 불안 요소가 많기 때문에 사람이 억압을 느끼는 것이다. 만약 억압이라는 정서를 오랫동안 해결하지 않는다면, 사람 내면 깊은 곳은 더욱 불안하고 초조해질 것이며, 나아가 특수한 환경과 배경에서 사람은 인성의 양심과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 극단적 방법으로 이런 국면을 깨게 될 것이다. 특정 부정적 정서를 감내할 수 있는 사람의 육적 본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 한계나 정점에 도달하면 사람은 인성과 이성의 제약에서 벗어나 극단적인 방법으로 사람의 정서를 표출하고, 내면 깊은 곳의 여러 가지 비이성적인 생각들을 표출할 것이다.

사람에게 억압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원인을 방금 너희가 일부 표현으로 작문해 보았다. 오늘 우리가 교제할 억압이라는 부정적 정서가 사람에게 생기는 원인과 근원에는 주로 세 가지 측면이 있다. 첫 번째 측면은 많은 사람이 일상생활에서든,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첫 번째 원인이다.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무슨 의미이겠느냐? 바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고 싶은 방식으로 하는 것은 일과 삶에 대한 요구이다. 그러나 법률, 혹은 생활 환경, 혹은 특정 집단의 규칙, 제도, 규정, 규율 등의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자기의 바람이나 상상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속 깊이 억압을 느낀다. 이런 억압은 정확히 말하면 사람이 서운함을 느끼는 것이다. 나아가 어떤 사람들은 억울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은 정확히 말해 사람의 성질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여러 원인과 객관적 환경 및 조건의 제약으로 인해 사람이 자신의 성격대로 할 수 없고 자유롭게 방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본분을 늘 건성으로 대충 이행하고 몸을 사리는 사람들이 있다. 가끔 교회 사역을 서둘러야 할 때가 있는데, 그는 제멋대로만 하려 하고, 요즘 컨디션이 안 좋다거나 기분이 좋지 않고 의욕이 없다고 생각되면 수고하며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교회 사역을 하려 하지는 않는다. 너무나도 나태하고 안일을 탐하는 것이다. 그는 마음에 의욕이 없어 축 늘어져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그래도 리더에게 책망을 받거나 형제자매로부터 게으르다는 평판은 받고 싶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다른 사람들을 따라서 한다. 하지만 속으로는 너무나도 원하지 않고, 달갑지 않으며, 내키지 않아 한다. 그리고 억울해하고 서운해하며 분해하면서 사는 것이 피곤하다고 생각한다. 성격대로 하고 싶지만, 하나님 집의 요구와 규정을 감히 뿌리치거나 어기지도 못한다. 그렇게 억압이라는 정서가 차차 생기는 것이다. 이런 억압의 정서가 마음속에 뿌리내리고 시간이 흐르면 사람의 겉모습이 퇴폐적이고 무기력해 보이게 된다. 로봇처럼 자기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어찌 되었든 매일 하라면 하라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손발을 멈추지 않고 하면서 본분을 이행하는 환경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마음은 억압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 피곤하고 답답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가장 큰 바람은 언젠가 더는 사람의 간섭이나 하나님 집 규정의 제약, 하나님 집의 배정을 받지 않는 것이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하고 싶을 때 하고, 기분 좋으면 조금 하고 내키지 않으면 하지 않으며, 그 어떤 질책이나 책망, 훈계도 받지 않고, 그 누구의 감독이나 감시, 간섭도 받지 않는 것이다. 그런 날은 얼마나 좋고 자유로우며 해방감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막상 떠나려니, 내려놓으려니 내키지 않는다. 본분을 이행하지 않다가 언젠가 자신이 정말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자유롭고 해방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되고, 하나님이 원하지 않게 되면 복을 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한다. 어떤 사람들은 진퇴양난에 빠진다. 형제자매에게 고충을 털어놓자니 말하기 부끄럽고, 하나님께 기도하자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원망하자니 자신이 옳지 않은 것 같고, 원망하지 않으려 하니 괴롭다. 자기 삶이 어쩜 이토록 답답하고 마음 같지 않을까,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들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고, 모두와 똑같이 보폭을 맞추기 싫은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고 싶은데 어쩌면 이렇게 어려운 것일까 고민한다. 예전에는 몸이 피곤했는데 이제는 마음마저 힘들다. 자기도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른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는 억압적 정서로 초래된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자유와 해방을 맛볼 수 있고, 사는 것이 실로 즐거우며, 평안과 기쁨이 있다고들 하는데, 왜 저는 남들처럼 행복하거나 평안하지 않을까요? 왜 저는 기쁘지 않을까요? 왜 이렇게 억압과 피로 속에 살아가는 걸까요? 남들은 어떻게 저렇게 행복하게 사는 거죠? 저는 왜 이렇게 불쌍하게 살고 있을까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너희는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그의 이런 억압이 어디서 비롯된 것이냐? (육이 만족을 얻지 못하고 괴롭기 때문입니다.) 육이 괴롭고 억울한데 만약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육의 괴로움은 그다지 괴롭지 않다고 생각되지 않겠느냐? 마음에 안위와 평안, 기쁨이 있어도 억압을 느끼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억압이 육의 괴로움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육의 괴로움이 너무 커서 억압을 느끼는 것이라면, 너희는 괴롭지 않으냐? 너희가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억압을 느끼겠느냐? 너희가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억압이라는 정서에 빠지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너희는 하루 종일 사역으로 분주하지 않느냐? (다소 분주합니다.) 모두가 분주하고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일한다. 하루에 수면 시간,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시간을 컴퓨터 앞에서 보낸다. 눈과 머리가 피로하고 몸도 피곤하지만 억압을 느끼느냐? 이 피로가 너희에게 억압을 가져다주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이런 억압은 어찌하여 생기는 것이냐? 분명 육적인 피로로 인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에서 비롯되는 것이겠느냐? 만약 사람이 늘 육의 안일과 쾌락만을 찾고 추구하며 고생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의 육이 조금이라도 괴롭거나 남보다 더 고생하거나 혹은 평소보다 피로할 때 그는 억압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것이 억압을 야기하는 원인의 하나이다. 만약 사람이 육적인 고생을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해서 육의 안일을 추구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고 본분을 잘 이행하여 하나님을 흡족게 하기를 추구한다면, 육적인 고생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설령 때로 분주하고 피곤하여 지치더라도 한숨 자고 나면 괜찮아진다. 괜찮아지면 계속 분주히 보낸다. 그의 마음은 본분과 사역에 있으니 육적으로 조금 피곤하더라도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의 생각에 문제가 생겨 늘 육의 안일만 추구하고자 한다면, 육적으로 조금 억울하거나 만족을 얻지 못할 때 부정적 정서가 생겨난다. 그렇다면 이렇게 항상 마음대로 하고 육을 방종하며 삶을 즐기려는 부류의 사람이 만족을 얻지 못할 때 늘 억압이라는 부정적 정서에 빠지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겠느냐? (안일과 육의 즐거움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일부 사람의 경우이다. 또 다른 일부의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육의 안일이 아니다. 그들은 어떤 일이든 내키는 대로 하고 자기 기분대로 하는 것을 추구한다. 기분이 좋으면 더 고생할 수도 있다. 하루 종일 일하고 나서도 그에게 피곤하냐고 물으면 그는 “피곤하지 않아요. 본분을 이행하는데 피곤하다니요.”라고 대답한다. 그가 오늘 기분이 좋지 않은데 네가 그에게 1분이라도 더 시간을 내게 한다면 그는 언짢아할 것이고, 만약 그를 질책하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만 좀 하세요. 제가 억압을 느낀단 말이에요. 계속 잔소리하시면 본분을 이행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면 당신을 원망할 거예요. 나중에 복을 못 받으면 당신 탓입니다. 모두 책임지셔야 할 거예요!” 사람의 내적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으면 변덕을 부린다. 고생하며 대가를 치를 수 있을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조금만 고생해도 원망한다. 사소한 일에도 그는 언짢아하고 기분이 상해 본분을 이행하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도 읽으려 하지 않고 찬양도 부르려 하지 않으며 예배 때 설교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저 한동안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한다. 누군가 도와준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며칠 지나면 훌훌 털어내고 괜찮아질지도 모른다. 만족스럽지 않은 일만 있으면 그는 억압을 느낀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너무 제멋대로이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너무 제멋대로이다. 예를 들어, 그는 잠을 자고 싶으면 꼭 자야 한다. “제가 지금 졸려서 자고 싶어요. 의욕이 없으니 자야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10분만 참을 수 있겠어요? 일이 곧 끝날 거예요. 마무리하고 다 같이 쉬는 게 어떨까요?”라고 말하면, “안 돼요. 지금 자야 한단 말이에요!”라고 대꾸한다. 누가 타이르면 마지못해 참아 보지만 속으로는 억압과 반감을 느낀다. 그는 이런 일로 자주 억압을 느끼고 형제자매들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도, 리더의 감독을 받으려 하지도 않는다. 잘못을 저질러도 남들이 책망과 훈계를 하지 못하게 하면서 그 어떤 단속도 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는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인데, 어째서 그렇게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걸까? 삶은 왜 이렇게 힘든 걸까? 사람은 행복하게 살아야 해. 이런 규정, 저런 제도 같은 걸 따질 게 아냐. 열심히 지켜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것을 할 거야. 당신들은 잠자코 있어.’라고 생각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너무 제멋대로이고 방탕하고 단속받지 않는다. 그 어떤 사역 환경에서도 그 어떤 단속도 받으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 집의 규정, 원칙을 지키려 하지 않고, 처신하면서 지켜야 할 원칙 역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양심과 이성으로 해야 할 최소한의 것도 지키지 않는다. 그저 기분 내키는 대로 하고 즐거울 수만 있으면, 자기에게 득이 되거나 편한 일이면 하는 것이다. 그는 그런 단속을 받는 것은 자기답게 사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자학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그렇게 살면 안 되고 자유와 해방 속에서 자신의 육체와 욕망, 자신의 이상과 소원,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방종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가고 싶은 곳을 가며 뒷일이나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자신의 책임과 의무, 하나님을 믿으면 이행해야 하는 본분 혹은 지키고 살아 내야 하는 진리 실제, 걸어야 하는 인생의 길 역시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사회에서나 사람들 속에서 항상 제멋대로 하려 하지만, 어딜 가든 바라는 대로 이루지 못한다. 그는 하나님 집에서 인권을 중시하고 사람들에게 충분한 자유를 주며 하나님 집에서 인성과 인내, 관용을 중시하니 하나님 집에 오면 육체와 욕망을 마음껏 방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 집에도 행정과 규정이 있기에 그는 여전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의 이런 억압의 부정적 정서는 하나님 집에 오고 나서도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이 사는 것은 그 어떤 책임이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진정한 사람이 되기 위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피조물로서의 본분을 잘 이행하고 사명을 완수하여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어떤 무리 속에 있든, 어떤 환경에 처하든,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상관없이 최종 목적은 자아를 찾고 자기만족을 실현하는 것이다. 처신의 취지도 이것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자기만족이 그들 평생의 소원이자 추구 목표인 것이다.

어떤 사람이 접대할 때 형제자매에게 식사를 대접한다면, 형제자매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하나님 집의 원칙과 요구는 무엇인지 물어보고 이 두 가지 원칙에 따라 접대해야 한다. 만약 네가 접대하는 사람이 북부 사람이라면 대부분 찐빵, 꽃빵, 만두 등 밀가루 음식을 준비하고 이따금 쌀밥도 조금씩 해야 할 것이다. 아니면 남부 사람이 좋아하는 쌀국수도 괜찮을 것이다. 만약 네가 접대하는 사람 중 상당수가 남쪽 사람이면, 그들은 밀가루 음식을 좋아하지 않고 쌀밥을 즐겨 먹는다. 한 끼라도 쌀밥을 먹지 않으면 식사를 거른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남쪽 사람을 접대할 때는 쌀밥을 많이 준비하고 요리도 남쪽 사람의 입맛에 맞게 해야 할 것이다. 만약 접대할 사람 중에 남쪽 사람도 있고 북쪽 사람도 있다면, 두 가지 식사를 모두 준비해서 먹고 싶은 대로 먹을 수 있게 선택의 자유를 주어야 한다. 이렇게 접대해야 원칙에 맞는 것이다. 이는 아주 단순한 일이다. 그저 많은 사람이 만족하면 되는 것이다. 만족하지 않는 특이한 사람이 조금 있다 한들 너무 신경 쓸 것 없다. 그렇지만 접대하는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할 줄 모른 채 늘 자신의 기호에 따라 하고 싶은 대로만 하면서 사람들이 그 음식을 좋아할지는 신경 쓰지 않는다면, 이럴 경우 무엇이 문제겠느냐? 이는 너무 제멋대로이고 이기적이다. 어떤 사람은 접대할 사람 다수가 북쪽 사람인데도 본인이 남쪽 사람이라 매일 쌀밥만 하고 다른 사람들의 식습관은 고려하지 않는다. 네가 만약 그를 책망하고 그에게 조언을 해 준다면 그의 마음속에 어떤 정서가 생길 것이고, 거부감이 생기면서 수긍하지 못하고 원망 가득한 목소리로 말할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 밥하기가 어디 쉬운 줄 알아요? 이 사람들 참 까탈스럽네.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고생 고생해서 당신들 밥을 준비했는데 투정이나 하다니요. 쌀밥이 어때서 그래요? 삼시 세끼 먹는 게 쌀밥 아닌가요? 이 정도면 잘 사는 거죠! 당신들보다 건장하고 힘도 세잖아요. 당신들은 대체 뭐가 좋아서 늘 국수나 찐빵만 먹는 거죠? 배가 부르긴 해요? 국수는 아무리 먹어도 맛도 없고 배도 안 부르던데요? 어쩔 수 없죠.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려면 감내하고 자제해야죠. 자제하지 않으면 교체되거나 도태될 테니까요. 그냥 하죠 뭐!” 그는 매일 불만을 품은 채 음식을 하며 속으로 생각한다. ‘쌀밥 한번 먹고 싶어도 먹을 수가 없네. 끼니마다 쌀밥 먹고 싶은데, 난 쌀밥 없이는 못 살아. 쌀밥을 먹어야겠어!’ 비록 그는 매일 억지로 국수와 만두를 만들지만 기분은 극도로 침울하다. 어찌하여 극도로 침울해 있겠느냐? 그가 억압을 느끼기 때문이다. ‘당신들 대접한다고 밥도 내 마음대로 못 하고 당신들 뜻에 따라야 하다니. 어째서 늘 당신들만 만족시켜야 하고 나 자신은 만족하면 안 되냐고?’ 그는 분하고 억압을 느끼며 사는 게 힘들다고 생각한다. 사역이 조금이라도 많아지면 하지 않고, 해도 건성으로 대충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교체되거나 제명당할까 봐 두려워하고, 내키지 않지만 억지로 본분을 이행할 뿐이다. 한순간도 즐겁지 않고 자유와 해방감도 느끼지 못한다. 다른 사람이 “접대하면서 식사 준비를 하니 기분이 어떠세요?”라고 물으면 “피곤하지는 않은데, 억압을 좀 느끼네요.”라고 대답한다. “억압을 느낄 게 뭐가 있어요? 쌀, 밀가루, 채소 뭐든 다 있는 걸요. 사비를 털 일도 없고요. 가끔 피곤하고 남보다 많이 일해서 그런 거죠. 그런데 당연한 거 아닌가요?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자원해서 하는 건데 왜 억압을 느끼나요?”라고 하면, “제가 비록 자원하긴 했지만 항상 쌀밥을 먹을 수 없고, 제가 좋아하는, 제 입맛에 맞는 것을 마음대로 먹을 수 없거든요. 혼자 맛있는 것을 해 먹고 싶어도 남들이 보고 나무랄까 봐 억압을 느끼고 항상 즐거울 수가 없는 거죠.”라고 말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음식에 대한 욕구 불만으로 인해 억압의 정서 속에 살아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농장에서 채소를 재배한다면 어떻게 채소를 심어야겠느냐? 계절, 기후, 온도, 사람 수에 따라 적정량의 채소를 심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 집에는 각종 채소를 심는 데에도 규정이 있는데, 그 규정으로 적지 않은 사람이 힘들어했다. 일상생활에서 사람이 즐겨 먹는 채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채소도 있다. 그리고 규정된 양만큼 먹어야 하는 채소도 있고, 계절에 따라 먹어야 하는 채소도 있으니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에 제한이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한다. ‘아, 항상 실컷 먹을 수가 없고 몇 입 못 먹고 끝나 버리니 양이 너무 적어! 방울토마토만 해도 매번 조금씩 나누어 먹다 보면, 맛을 느낄 사이도 없이 다 먹어 버려. 사발째 먹으면 얼마나 좋아!’ 그래서 그곳에서 생활하는 그들 십여 명이 방울토마토 이백 그루를 심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밤에 잠들기 전까지 사발째 먹는 것이다. 방울토마토와 토마토는 사발째, 오이는 소쿠리째 먹으니 ‘얼마나 신나! 이거야말로 천국의 삶이지! 너무 행복해!’라고 생각했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하나님 집의 규정을 따를 수도, 과학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도 없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 앞세우며 모든 일을 자기만 생각하면서 제멋대로 한다. 결과 하나님 집의 통제와 감독, 관리하에 과일을 한껏 먹으려던 그 사람들은 제재를 받게 되었는데 책망과 훈계를 받은 사람도 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지금 그들 심정이 어떻겠느냐? 이들에게 상실감이 크지 않겠느냐? 인간 세상이 삭막하고 하나님 집에 사랑과 온정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그들이 억압을 느끼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들은 항상 속으로 생각할 것이다.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어때서? 내가 과일 좀 좋아하면 안 되나? 고작 방울토마토 가지고 실컷 못 먹게 하는 건 너무 인색한 거 아냐? 하나님 집에서는 사람에게 자유를 주지도 않고 방울토마토 좀 먹겠다는데 사람 수대로 심으라고 하네. 200, 300그루 좀 심는 게 어때서? 다 못 먹으면 동물들 먹이면 되지.’ 네가 사발째 먹는 것이 적절한 것이냐? 무엇을 먹든 정도와 절제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만들어 준 여러 가지 먹거리를 먹는 비율은 그것의 생산량과 계절을 따라야 한다. 생산량이 많아야 주식이 되고, 생산량이 적거나 계절이나 자라는 기간이 짧고 생산량이 제한되어 있는 것은 적게 먹어야 한다. 심지어 일부 특수 지역에서는 그런 것을 먹지 않아도 별로 부족하지 않다. 이것은 합리적인 것이다. 사람은 항상 욕망이 있어서 식탐을 부리는데 이는 올바른 것이냐? 항상 욕망을 가지고 식탐을 부리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하나님 집에는 하나님 집 규정이 있다. 각 측면의 사역마다 규정과 관리가 있고 적절한 제도가 있다. 네가 하나님 집의 일원이 되고자 한다면 너는 철저하게 하나님 집의 규정을 지켜야 한다. 큰소리쳐서는 안 되고 순종하는 법을 배우고 주변 사람들을 만족게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양심과 이성의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 만든 모든 규정은 어느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집의 모든 사람을 위해 세운 것이다. 이는 하나님 집의 사역과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이 규정과 제도는 모두 정당한 것이며 양심과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지켜야 한다. 그러니 네가 어떤 일을 하든 한편으로는 하나님 집의 규정과 제도를 따라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모든 것을 보호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이다. 매사에 사적인 이익이나 개인적인 시각으로 임할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네가 만약 하나님 집에서 생활하고 사역하면서 억압을 느낀다면 이는 하나님 집의 어떤 규정이나 제도, 관리 방식의 문제라기보다는 네 개인적인 문제이다. 예를 들어, 네가 하나님 집에서 늘 자아를 찾고 자기 욕망만 채우려 하며 늘 억압을 느끼고 자유와 해방감, 평안과 기쁨을 맛보지 못한다고 하자. 또한 늘 마음이 편치 않고 억울한 것 같고, 무슨 일이든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 같다. 밥을 먹든, 옷을 입든, 유행하는 옷을 입거나 섹시하게 화장하는 것도 안 된다는 생각에 날마다 이런 일로 고통스럽고 괴로워한다. ‘이 사람들은 나랑 자꾸 진리를 교제하니 귀찮아 죽겠네! 이런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아. 난 즐겁고 자유롭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나님을 믿는 것이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즐겁지도, 자유롭지도 않은 것 같아. 누구에게도 속박받고 싶지 않아. 근데 나를 단속하고 속박하는 사람이 꼭 있으니 억압을 느껴.’라고 생각하며 형제자매와 함께 지내는 것을 늘 불편해한다. 그는 이런 생활 환경을 싫어하고 이런 생활 환경에 반감을 갖지만 복을 받으려 어쩔 수 없이 그런 환경에 몸담고 지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불만을 표출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며 소리 지르고 싶어도 그러지 못해 항상 마음속으로 억압을 느낀다. 이런 사람을 처리하는 유일하고도 최선의 방법은 그에게 이렇게 알려 주는 것이다. “이곳을 떠나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입고 싶은 옷을 입으며 당신이 원하는 시간을 보내면서 원하는 일을 하고 당신이 하고 싶은 사업을 하며 추구하고 싶은 목표와 방향을 추구하세요. 하나님 집에서는 당신을 말리지 않습니다. 당신의 손과 발 그리고 마음은 해방되어 자유로우며 아무도 당신을 구속하지 않습니다. 당신 스스로 어떤 목적을 위해 하나님 집에 머무는 것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당신에게 이런 규정을 들이밀면서 당신이 반드시, 꼭 하나님 집에 머물지 않으면 안 되며,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집에서 어떻게 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실을 알려 주겠는데 하나님 집에서 너를 어떻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너는 언제든 떠나도 상관없다. 하나님 말씀 책을 교회에 반납하고 맡고 있는 사역만 잘 인계하면 너는 언제든 떠나도 된다. 하나님 집에서는 너를 막지 않는다. 하나님 집은 너의 감옥이나 교도소가 아니다. 하나님 집은 자유로운 곳이고 그 문은 활짝 열려 있다. 네가 만약 억압을 느낀다면 그것은 네가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곳은 네게 적합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네가 속으로 찾고자 하는 안식처도 아니고 네가 머물러야 할 곳도 아니다. 만약 네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너는 떠나야 한다. 알겠느냐? 불신파나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 집에서는 한 번도 강요한 적이 없다. 네가 장사를 하고 싶거나 큰돈을 벌고 싶거나 사업을 하고 싶거나 세상에 나가고 싶다면 그것은 네 개인적 추구이니 세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 집에서는 한 번도 사람의 자유를 제한한 적이 없다. 하나님 집의 문은 활짝 열려 있다. 불신파,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언제든 하나님 집을 떠나도 된다.

어떤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하려 하지도 진리를 교제하려 하지도 않는다. 교회 생활에도 적응이 안 되고 적응하지도 못해 항상 너무나도 고통스러워하며 무력감을 느낀다. 그럼 알려 주겠다. 속히 떠나 세상으로 가서 네 개인적 목표와 방향을 추구하고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아라. 하나님 집에서는 한 번도 사람에게 강요한 적 없다. 교회의 모든 규정과 제도 혹은 행정 법령은 너 개인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다. 네가 만약 괴롭고 지키기 힘들고 몹시 고통스럽고 억압을 느낀다면 떠나도 된다. 진리를 받아들이고 원칙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교회에 머물기 적합한 사람이다. 물론 너 스스로가 하나님 집에 머물기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네게 적합한 곳이 없겠느냐? 있다. 세상은 이렇게나 넓으니 네게 적합한 곳이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네가 만약 이곳에서 해방감을 느끼지 못하고 억압을 느끼며 항상 불만을 표출하고 싶고 본성이 폭발할 가능성이 있다면 너는 위험하며 하나님 집에 머물기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세상은 넓어 네게 적합한 곳이 있을 것이니 직접 천천히 찾아보거라. 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으냐? 이렇게 하는 것이 이성적이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 그토록 괴로워하는데도 네가 만류하려 한다면 어리석지 않으냐? 그저 그를 떠나보내고 꿈을 이루길 바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그의 꿈이 무엇이더냐? (방울토마토를 사발째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시 세끼, 1년 내내 쌀밥과 생선, 고기를 먹는 것이다. 그리고 또 어떤 꿈이 있더냐? 매일 저절로 깰 때까지 자는 것이다. 원하는 시간에 일하고, 일하기 싫어해도 누구 하나 간섭하거나 감독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꿈이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꿈이냐! 이 얼마나 웅대한 꿈이더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런 부류의 사람은 앞날이 유망한 것 같으냐? 본연의 일을 하는 사람인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이런 부류의 사람이 늘 억압을 느낀다는 것은 정확히 말해 자기의 육체를 방종하고 자기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 그들의 바람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사심이 너무 커 무슨 일이든 제멋대로, 하고 싶은 대로만 하려 하고 규칙이나 원칙을 지키면서 일을 처리하지 않으며 자기 생각과 기호, 욕망, 사적인 이익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자 한다. 정상적인 인성을 갖추지 못한 이런 부류의 사람은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다.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어디에 가든 억압을 느끼고 혼자 살아도 억압을 느낀다. 좋게 말해서 이런 사람은 앞날이 유망하지 않고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인성이 정상적이지 않고 머리가 약간 아둔한 사람이다. 본연의 일을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더냐? 그는 의식주를 무척 단순하게 여겨 이런 일은 보통이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가 중시하는 것은 인생의 길, 사람의 사명, 인생관, 가치관이다. 앞날이 유망하지 않은 사람은 하루 종일 무엇에 골몰하느냐? 항상 어떻게 하면 게으름을 피우고 요령을 피울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잘 먹고 잘 놀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육의 안위를 확보하고 몸이 편할 수 있을지 고민하지 중요한 일은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니 하나님 집의 본분을 이행하는 장소와 환경에서 그는 억압을 느끼는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는 사람이 본분을 더 잘 이행할 수 있도록 본분 이행에 연관되는 일부 상식과 업무 지식을 배우기를 요구하고, 더 많은 진리를 깨달아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모든 일을 하는 원칙이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사람이 늘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기를 요구한다. 하나님 집에서 교제하고 언급하는 이 모든 것은 사람이 생활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범위에 속하는 주제나 실제의 일과 관련된 것으로, 사람이 본연의 일을 하고 올바른 길을 걷게 한다. 본연의 일을 하지 않고 제멋대로인 사람은 이런 중요한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 제멋대로 해서 이루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육의 안위와 기쁨, 평안이며 구속받지 않고 손해 보지 않으며 먹고 싶은 것을 실컷 먹고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그들의 인성 품격, 그리고 그들이 마음속으로 추구하는 바로 인해 그들은 항상 억압을 느낀다. 그들과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도 그는 바뀌지 않고 자신의 억압을 해결하지도 못한다. 그는 이런 부류의 사람이고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인간이다. 겉으로 보면 그는 단지 원칙이나 규정을 지키지 않을 뿐 그렇게 큰 악행을 저지른 것 같지도,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사실 그의 본성 본질은 본연의 일을 하지 않고 올바른 길을 걷지 않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이 없고 정상 인성의 지능에도 못 미친다. 정상적인 인성에 갖춰져야 할 추구 목표, 생활 태도, 생존 방식은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고심하지도 않으며 추구하지도 않는다. 매일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육의 안일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그런데 교회의 이런 생활 환경에서는 그가 육의 기호를 채울 수 없으니 불편함과 억압을 느끼는 것이다. 그의 이런 정서는 바로 이렇게 생긴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런 부류 사람의 삶은 피곤하지 않겠느냐? (피곤할 것입니다.) 그들의 삶이 가련하지 않으냐? (가련하지 않습니다.) 그렇다. 가련하지 않다. 가볍게 말하면 이런 부류의 사람은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사회에서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망나니, 멍청이, 얼간이, 깡패, 건달, 무뢰한 같은 사람이다. 그들은 기술을 배우거나 역량을 키우려 하지 않고, 제대로 된 직장이나 생계를 도모할 직업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이들이 사회에서 망나니, 무뢰한 같은 사람이다. 그들은 교회로 섞여 들어와 공짜로 무언가를 얻으려 하고 복을 받으려 하는데, 기회주의자에 속한다. 이런 기회주의자는 본분을 전혀 기꺼이 이행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억압을 느낀다. 그리고 늘 자유로운 삶을 꿈꾼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으며,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자고 싶을 때 자는 그런 삶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그는 고통이라면 조금도 받고 싶지 않아 하며, 그저 놀고먹기만 하려 한다. 이런 사람은 사는 것조차 피곤하다고 생각하며 부정적 정서에 얽매여 있다. 그들은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지치고 곤혹스러워하며 본연의 일이나 중요한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 하나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하려 하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본업이나 본분, 의무나 책임으로 여겨 그것을 잘해서 결실을 맺겠다거나 그것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건성으로 임하면서 본분 이행을 빌어 생계를 유지하려 한다. 압박감이나 통제가 조금이라도 생기거나 그에게 조금이라도 엄격히 대하여 약간의 책임을 지우면 그는 마음이 불편해지고 억압을 느낀다. 또한 그런 부정적 정서가 생기면서 사는 것이 너무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고 괴로워한다. 그들이 삶이 피곤하다고 느끼는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는 이런 부류의 사람은 이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성이 불건전한 사람으로, 하루 종일 비현실적인 생각에 빠진 채 뜬구름만 잡으며 꿈속에 살면서 기상천외한 생각만 하니 그들의 억압은 해결되기 어려운 것이다. 진리에 흥미가 없는 그들은 불신파에 속하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 집을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 자신의 안식처를 찾도록 할 수밖에 없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본연의 일을 하며 기꺼이 본분을 이행한다. 그들은 한 가지 사역을 능히 감당할 수 있으며 자신의 자질을 바탕으로 하나님 집의 규정에 따라 사역을 제대로 해낸다. 물론 처음에는 이런 생활에 적응하는 게 좀 어려워서 몸과 마음이 힘들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협력하고자 하는 의지나 정상인, 좋은 사람이 되어 구원받고자 하는 바람이 있다면, 어느 정도 대가를 치러야 하고 하나님이 징계하도록 해야 한다. 네 마음대로 하고 싶을 때 그것을 등지고 내려놓아 제멋대로인 성질과 사리사욕을 조금씩 줄여야 할 것이다. 또 중요한 일과 시기, 사역에서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 네게 의지가 있다면 하나님의 채찍질과 징계를 구하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깨우침을 구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더 좋은 결실을 볼 수 있다. 네게 정말 의지가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로 간구한다면 하나님은 행사할 것이며 네 내적 상태와 사상을 바꿔 줄 것이다. 성령이 약간 역사하여 네게 감동과 깨우침을 주면, 네 마음은 달라질 것이며 네 내적 상태도 변화할 것이다. 네게 변화가 생기면 이렇게 사니 억압받지 않는 것 같다고 느낄 것이며, 억압적인 내적 상태와 정서가 다소 바뀌고 해소되어 예전과는 달라질 것이고, 이렇게 사는 것이 힘들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즐겁다고, 이렇게 살고 처신하고 본분을 이행하고,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며 규칙을 지키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좋다고, 이것이 바로 정상인이 살아야 할 삶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진리에 기대 살고 본분을 잘 이행하면 마음이 놓이고 평안하고 삶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예전에는 왜 몰랐을까? 어쩜 그렇게 제멋대로였을까? 예전에는 사탄의 철학과 사탄 성품으로 살아서 사는 꼴이 말이 아니었지. 그러다 보니 살아갈수록 고통스러웠고. 이제 진리를 깨닫고 나니 패괴 성품을 어느 정도 벗어 버릴 수 있게 되었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진리를 실행하며 사는 삶이 참으로 평안하고 기뻐!’ 이는 마음이 바뀐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자신이 예전에 왜 억압과 고통 속에서 살았는지 깨달으면, 그 근원을 찾고 문제를 해결하면 변화의 희망이 생긴다. 진리에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 말씀에 공을 많이 들이며 진리를 많이 교제하고 또한 형제자매의 체험 간증을 들어 보기도 하면 더 분명한 길이 생길 것이다. 그럼 너는 더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지 않겠느냐? 네 내적 상태가 더 좋게 바뀌고 억압적인 정서도 점점 해소되어 더 이상 너를 옭아매지 않을 것이다. 물론 특수한 환경이나 배경이 닥치면 때때로 억압이나 고통이 찾아오겠지만, 진리를 구해 해결하면 억압적인 정서는 사라질 것이다. 그럼 너는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진심을 다하고 온 힘을 기울이고 충성을 바칠 수 있으며, 구원받을 희망이 생길 것이다. 네가 이렇게 변한다면 하나님 집을 떠날 필요가 없다. 이런 변화가 있다는 것은 네게 아직 희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변화할 수 있는 희망, 구원받을 희망 말이다. 그런 너는 여전히 하나님 집의 사람인 것이다. 그저 여태까지는 각종 사심과 잡념, 나쁜 습관과 사상에 너무 오래, 그리고 깊게 영향을 받아 양심이 무감각해져 느끼지 못하며 이성이 건전하지 못하고 염치가 없었던 것뿐이다. 네게 위와 같은 변화가 생긴다면 하나님 집에서는 네가 머무르면서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사명을 완수하며, 맡은 일을 제대로 해내길 진심으로 바랄 것이다. 물론 부정적 정서가 있는 사람들은 사랑으로 도와줄 수밖에 없다. 시종일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여러 차례 타일러도 고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보내 주어야 한다. 하지만 진정으로 바뀌고 돌아서고 뉘우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머무는 것을 적극 환영할 것이다. 그가 진심으로 머무르면서 과거 자신의 갖가지 행동과 삶의 방식을 바꾸기 원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차차 변화할 수 있고, 본분을 점점 더 제대로 이행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가 머무르길 환영하며 그가 갈수록 좋아지길 바라면서 크게 축복할 것이다. 그가 부정적 정서에서 벗어나기를, 부정적 정서에 얽매이거나 그 그늘에 뒤덮이지 않고 본연의 일을 하며 바른길을 걷기를, 하나님의 요구대로 정상인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정상인이 살아 내야 할 것들을 살아 내며 하나님 집에서 평화롭게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면서 다시는 허송세월하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또 훗날 그가 발전성이 있기를, 다시는 제멋대로 굴지 않고 놀고먹는 육의 즐거움만 생각하지 않기를, 본분을 이행하고 인생의 길을 걷고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과 관련된 일들을 더 많이 생각하기를 바랄 것이다. 이 밖에도 그가 하나님 집에서 즐겁고 자유로우며 해방된 삶을 살면서 매일 평안과 기쁨을 누리기를, 하나님 집에서 살면서 온정과 즐거움을 느끼기를 진심으로 바랄 것이다. 이것이 최고의 축복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내가 축복을 마쳤으니, 너희도 그를 진심으로 축복해 주어라. (그가 하나님 집에서 즐겁고 자유로우며 해방된 삶을 살면서 하루하루가 평안하고 행복하기를, 하나님 집에서 온정과 즐거움을 느끼면서 살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또 무엇이 있느냐? 그가 다시는 억압된 정서 속에서 살지 않기를 진심으로 축복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좋습니다.) 이는 나의 축복이었다. 너희는 그에게 또 어떤 축복을 해 줄 것이냐? (그가 본연의 일을 하고 본분을 갈수록 더 잘 이행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이 축복이 좋지 않으냐? (좋습니다.) 또 어떤 축복을 할 수 있겠느냐? (그가 하루빨리 정상 인성을 살아 내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이 축복은 대단하지는 않아도 매우 실제적으로 보인다. 사람이라면 정상 인성을 살아 내야지 억압적인 느낌을 가져서는 안 된다. 남들이 견뎌 내는 고통을 우리라고 왜 견딜 수 없겠느냐?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 염치가 있고, 정상인이라면 가져야 할 추구나 생존 방식, 올바른 추구 목표가 있으면 억압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이는 무척 좋은 축복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또 무엇이 있겠느냐? (그가 형제자매와 조화롭게 협력하며 하나님 집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하나님 집의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것이 높은 요구더냐? (높지 않습니다.) 높지 않으니 이루기 쉽지 않겠느냐? 하나님 집의 사랑을 느끼는 것은 사실에 부합한다. 이는 그에게 필요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에 대한 요구치는 높지 않다. 먼저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갖추되, 빈둥대고 허송세월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법, 본연의 일을 하는 법, 자신의 책임과 본분을 감당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 다음 어떻게 살지, 어떻게 정상 인성을 살아 내면서 책임과 본분을 다할지를 배운다면 하나님 집에서 위안과 평안, 기쁨을 느낄 것이며, 하나님 집에서 생활하고 본분을 이행하기를 원하게 될 것이다. 억압의 부정적 정서에서 벗어나 조금씩 진리를 추구하며 사람들과 조화롭게 협력하는 것이 이 부류의 사람에 대한 요구이다. 나이를 불문하고 이들에 대한 우리의 바람과 요구는 그렇게 높지 않으며, 그저 이 정도이다. 먼저 본연의 일을 하는 법을 배우고 한 명의 성인으로서, 정상인으로서 가져야 할 책임과 의무를 감당하는 것, 그 후 규칙을 지키는 법을 배우고 하나님 집의 관리, 감독,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여 본분을 잘 이행하는 것, 이것이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이 받아들여야 할 올바른 태도이다. 다음으로는 정상 인성의 양심, 이성과 관련된 책임과 의무 그리고 생각과 관점에 대해 정확한 이해와 인식이 있어야 하며, 네 부정적 정서와 억압을 없애고 삶에서 직면하는 여러 고충을 올바로 마주해야 한다. 그것들은 네게 추가적인 것도 아니고 부담이나 결박도 아니라 한 명의 정상적인 성인으로서 마땅히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다. 즉, 성별과 자질, 능력과 특기를 떠나 성인이라면 누구나 적응해야 하는 생존 환경, 감당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 사명 그리고 짊어져야 할 사역 등을 너는 반드시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이러한 것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남들의 피땀 어린 결실을 거저먹으려 해서는 안 된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규정과 제도, 관리에 적응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법과 하나님 집의 행정 법령을 받아들이는 법, 사람들과 함께 생존하고 생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지니고 주변 사람과 일, 사물을 올바로 대하며, 직면한 여러 문제를 올바르게 처리하고 해결하는 것 등은 정상 인성을 가진 사람이 직면해야 할 부분이다. 또 이는 한 명의 성인으로서 직면해야 할 삶과 생존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한 명의 성인으로서 삶이 아무리 곤궁해도 자기 힘으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 이는 네가 감당해야 할 고통이자 다해야 할 책임이며 완수해야 할 의무이다. 너는 성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얼마나 고생하든, 얼마나 대가를 치르든, 얼마나 가슴이 아프든 너는 그것을 속으로 삭여야지, 부정적 정서를 품거나 누군가를 원망해서는 안 된다. 이는 성인이라면 마땅히 감당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한 명의 성인으로서 이런 일을 반드시 감당해야 하며 원망도, 저항도, 나아가 도피나 거부도 하지 말아야 한다. 허송세월하거나 빈둥대면서 자기 맘대로, 제멋대로, 내키는 대로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는 것은 성인이 가져야 할 생활 태도가 아니다. 모든 성인은 성인으로서의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고난이나 병, 나아가 갖가지 어려움 등의 압박감이 얼마나 크든 그것은 모두가 겪고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다. 이것이 바로 정상인의 삶이다. 그 압박감과 고통을 견디지 못한다면 그것은 네가 너무 연약하고 못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든 살면서 이런 고통을 피할 수 없으며 감당해야만 한다. 사회에서든, 하나님 집에서든 모두가 똑같다. 이것은 네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자 한 명의 성인으로서 짊어져야 할 중임이고 감당해야 할 일이니 피해서는 안 된다. 만약 네가 항상 이 모든 것으로부터 도피하고 벗어나려 한다면 억압적인 정서가 찾아와 너를 계속 옭아맬 것이다. 반면, 네가 올바르게 이해하고 이 모든 것을 받아들여 네 삶과 인생의 일부로 여긴다면 이 문제들은 네게 부정적 정서가 생겨나는 이유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성인으로서 갖고 감당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를 감당하는 법을 배우는 한편, 자기가 처한 삶과 사역의 환경에서 정상 인성으로 타인과 조화롭게 어울리는 법을 배워야지, 제멋대로 굴면 안 된다. 조화롭게 어울리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한 명의 성인으로서 완수해야 할 사역과 이행해야 할 의무, 책임을 더 잘 완수하기 위해서이며, 사역에서 직면한 문제들로 초래되는 손실을 최소화하고 네 사역이 이뤄야 할 성과와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네가 해야 할 일이다. 정상 인성을 갖추고 사람들 속에서 사역할 때 너는 이것을 해내야 한다. 사역으로 인한 압박감의 경우, 그 압박감이 상부에서 오든 하나님 집에서 오든, 아니면 형제자매로부터 오든 그것은 네가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다. “압박감이 있어 못 하겠어요. 하나님 집에서 이행하는 본분과 사역은 한가롭고 자유로우며 즐겁고 쾌적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런 말은 통하지 않는다. 이는 정상적인 성인이 가져야 할 생각이 아니며 하나님 집은 네 안일을 도모하는 곳이 아니다. 모두가 삶과 일에서 어느 정도의 부담과 위험을 감수한다. 어떤 사역이든, 특히 하나님 집에서 이행하는 본분은 모두 최고의 성과를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 거시적으로 보면 이것은 하나님의 가르침이자 요구이고, 미시적으로 보면 이것은 모든 사람이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태도이자 관점, 기준, 원칙이다. 네가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한다면 하나님 집의 규정과 제도를 준수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준수하는 법과 규칙을 배워 착실하게 처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는 사람이 처신할 때 갖추어야 할 덕목 중 하나이다. 이방인처럼 무위도식하고 악행을 일삼으며 허송세월하거나 자신의 삶의 방식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모두가 너를 싫어하게 만들지 말고, 모두의 눈 밖에 나서 눈엣가시가 되지 마라. 또 모두가 너를 멀리하거나 버리게 하지도, 그 어떤 사역의 걸림돌이나 장애물이 되지도 마라. 이는 역시 정상적인 성인이 갖춰야 할 양심과 이성이며, 정상적인 성인이라면 감당해야 할 책임이다. 또한, 이는 그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네가 해야 할 일 중 하나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만약 네가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사람이 감당해야 할 책임과 의무, 정상 인성으로 해야 할 일, 성인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추구의 근본 취지이자 목표로 삼고 자신의 책임을 감당할 수 있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든, 어떤 고통을 겪든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요구이자 뜻임을 확신하는 순간 어떤 고통도 견뎌 낼 수 있고, 자신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네 심경은 어떻겠느냐? 전과는 달라진다. 마음이 평안하고 안정되며 즐거움이 생길 것이다. 보아라. 그저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을 추구하고, 정상 인성으로 감당해야 할 책임과 의무 그리고 짊어져야 할 사명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속에 평안과 기쁨이 생기고 즐거움을 느낀다. 아직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 진리를 얻는 데 이르지도 않았는데 사람에게 어느 정도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이런 사람은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이고 떳떳한 사람이니 어떤 고충이 생겨도 극복할 수 있고, 어떤 사역이든 감당할 수 있다. 이런 자가 바로 훈련을 거친 그리스도의 정예병이니 이겨 내지 못할 고충이 없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렇게 처신하는 것이 어떤 것 같으냐? 강건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탄복스러울 정도로 강건하다. 이런 사람이 억압을 느끼겠느냐?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그는 무엇으로 그 억압적인 정서를 바꾸었느냐? 무슨 이유로 억압의 정서가 그를 옭아매지 않고 그를 찾지도 않겠느냐? (마음속으로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며 본분 이행에 부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이것이 본연의 일을 하는 것이다. 마음속에 올바른 일이 있고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 그리고 책임감과 사명감이 역할을 한다면 이런 사람은 어디에서든 훌륭히 해낼 것이다. 억압이니 근심이니 우울이니 하는 것도 없이 어떤 일이든 성취할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축복하지 않겠느냐? 이런 양심과 이성, 정상 인성을 갖춘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데 어려움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정상 인성의 추구와 관점, 생존 방식 측면에서 보면 진리를 추구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사람이 이 정도에 도달하면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며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도 머지않았다. ‘머지않았다’는 말은 무슨 의미겠느냐? 그가 처신하는 관점과 선택한 생존 방식이 완전히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하나님이 요구하는 정상 인성에 거의 부합함을 의미한다. 이러면 기준에 도달했다. 기준에 도달하면 진리를 알아들을 수 있고 진리 실행의 어려움이 훨씬 줄어드니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과 진리 원칙에 따라 일하는 것이 무척 수월하다. 정상 인성으로 해야 할 일에는 총 몇 가지 측면이 있느냐? 대략 세 가지 측면이 있다. 어떤 세 가지 측면이냐? 말해 보아라. (첫째, 성인으로서 갖추고 감당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배우는 것입니다. 둘째, 정상 인성으로 자신이 처한 생활, 사역 환경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조화롭게 공존하며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셋째, 정상 인성과 이성의 범위 안에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준수하는 법, 처신할 때 가져야 할 태도와 관점, 기준, 원칙을 준수하는 법, 즉 규칙을 준수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측면은 정상 인성에 마땅히 갖춰져야 할 부분이다. 사람이 만약 이런 측면으로 생각하고 신경을 쓰며 노력한다면 본연의 일을 하기 시작할 텐데 부정적 정서가 생길 리 있겠느냐? 억압이 느껴질 리 있겠느냐? 본연의 일을 하고 중요한 일을 하며 성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책임과 의무까지 감당하면 해야 할 일과 신경 써야 할 일이 늘어나니 너무 바빠 정신이 없을 것이다. 특히 지금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에게 억압을 느낄 겨를이 있겠느냐? 그럴 틈이 없다. 그러니 마음 같지 않은 일에 조금 부닥치면 억압을 느끼거나 기분이 가라앉거나 의욕이 없고 의기소침해지는 사람은 뭐가 문제겠느냐? 밥 먹고 할 일이 없는 것이다. 본연의 일을 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태평하게 허튼 생각이나 하다가 궁지에 몰려 억압을 느끼는 것이다. 생각할수록 답답하고 어찌할 방법이 없으며 길도 보이지 않으니, 생각할수록 삶이 가치가 없는 것 같고 사는 것이 즐겁지 않으며 괴롭기만 하다. 스스로 뿌리쳐 벗어날 힘이 없어 결국 억압이라는 정서 속에 빠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사실 이것은 쉽게 해결되는 문제다. 해야 할 일, 생각하고 고려해야 할 중요한 일이 너무 많아 한가하게 그런 쓸데없는 일이나 놀고먹을 생각을 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일을 생각할 여유가 있는 사람은 태평하게 놀고먹으며 빈둥거리면서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다.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늘 억압적인 정서에 빠진다. 그런 사람은 밥 먹고 할 일이 없기에 중요한 일이 한가득 쌓여 있어도 생각하지도 행하지도 않고 틈만 나면 쓸데없는 생각만 한다. 자기 육 때문에 불평하고 앞날 때문에 염려하며 자기가 받은 고통과 치른 대가 때문에 걱정한다.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는데 분출구가 없으니 억압을 느낀다. 하나님 집을 떠나자니 복을 받지 못할까 두렵고 악을 행하자니 지옥에 떨어질까 두려워한다. 그렇다고 진리를 추구하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도 싫으니 억압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바로 그런 것이다. 사람이 본연의 일을 하고 바른길을 걸으면 이런 정서가 생기지 않는다. 한때의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가끔 억압적인 정서가 생긴다고 해도 일시적인 마음에 불과하다. 사람이 올바른 생활 방식과 생존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곧 이런 부정적 정서를 대신할 테니 억압의 정서에 자주 빠지지는 않게 되기 때문이다. 즉, 이 억압적인 정서는 결코 너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일시적으로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있어도 그 안에 갇히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 추구의 중요성이다. 네가 본연의 일을 하기를 추구하고 성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책임을 감당하며 정상적이고 좋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존 방식을 추구한다면 이런 부정적 정서가 생기지 않을 것이며 억압의 정서가 너를 찾아오거나 옭아매지도 않을 것이다.

이제 억압을 해결하는 문제와 이 측면의 고충에 대해서도 교제를 마쳤다. 방금 말한 세 가지 측면이 그것이다. 우리는 한때 억압의 정서에 휩싸였던 사람, 억압의 정서에 빠졌지만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이 억압의 정서에 지배되지 않고 하루빨리 억압이라는 부정적 정서에서 벗어나기를, 정상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정상적이고 올바른 생존 방식을 갖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는 좋은 축복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너희도 축복해 보거라. (억압의 정서에 휩싸였던 사람, 억압의 정서에 빠졌지만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이 억압의 정서에 지배되지 않고 하루빨리 억압이라는 부정적 정서에서 벗어나 정상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정상적이며 올바른 생존 방식을 갖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는 매우 현실적인 축복이다. 우리가 축복하고 나서 그 사람들이 억압의 정서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개인의 선택에 달렸다. 이는 매우 단순한 일일 것이다. 사실 이는 정상 인성에 갖춰져야 할 것으로, 진리를 추구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추구하고자 하는 뜻과 의지가 충분하다면 억압의 정서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으며, 무척 쉽다. 하지만 만약 그가 진리나 긍정적인 사물을 추구하는 것을 꺼리고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지도 않는다면, 억압의 정서에 빠져 있으라고 하자.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고 굳이 축복도 하지 않는 것이 어떻겠느냐? (좋습니다.) 이 역시 하나의 처리 방법이다. 어떤 일이든 해결법이 있으며 진리 원칙과 사람의 실제 상황에 따라 바라보고 해결할 수 있다. 오늘은 축복도 마쳤고 몇 가지 상황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교제하였다. 이 부류의 사람에 대해 언급해야 할 주제는 여기까지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2022년 1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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