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2)
지난 예배에서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라는 중요한 주제를 교제했다.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해 어떤 교제가 있었느냐? (그때 하나님께서 두 가지를 교제해 주셨습니다. 하나는 ‘내려놓기’이고, 다른 하나는 ‘몰입하기’입니다. ‘내려놓기’ 방면으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존재하는 갖가지 부정적 정서를 언급하셨는데, 주요하게는 열등감, 분노, 증오와 같은 부정적 정서가 저희의 본분 이행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교제하셨습니다. 저희는 하나님의 교제를 통해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해 예전과는 다른 인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부정적 정서를 매일 드러내면서도 저희가 항상 그것을 등한시하고, 평소에 부정적 정서를 분별하거나 인식하려 하지 않으며, 자기는 원래 그런 성격이라고 독단적으로 규정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부정적 정서를 가진 채로 본분을 이행하면 그 정서가 본분 이행의 성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저희가 생활 속에서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쳐 진리 추구의 길에 들어서기 어렵게 합니다.) 지난 예배에서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를 교제했다. 실행 방면으로는 크게 두 개의 길이 있었다. 하나는 ‘내려놓기’, 다른 하나는 ‘몰입하기’였다. 첫 번째 길인 ‘내려놓기’를 보겠다. 지난번에 ‘내려놓기’의 첫 번째 내용과 관련된 주요 문제를 정리했고, 갖가지 정서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했다. 이런 정서는 주로 부정적 정서를 가리킨다. 비정상적이고, 비이성적이고, 양심과 이성에 부합하지 않는 정서다. 그중에서도 주로 열등감, 증오, 분노와 같은 부정적 정서, 그리고 이러한 부정적 정서 속에서 사는 모습에 대해 교제했다. 또, 일부 특수한 환경 및 특수한 성장 배경으로 인해 생겨난 갖가지 부정적 정서, 혹은 비정상적인 성격이 반영된 부정적 정서에 대해 교제했다. 왜 이러한 부정적 정서를 내려놓아야 하겠느냐? 이러한 정서가 객관적으로 볼 때 사람에게 부정적인 심리 상태와 관점을 심어 주고, 사람과 일, 사물 앞에서 취하는 입장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려놓기’에서 첫 번째로 실행해야 할 것은 갖가지 부정적 정서를 내려놓는 일이다. 지난번에 우리는 갖가지 부정적 정서에 대해 조금 교제했었다. 물론 지난번에 교제한 열등감, 증오, 분노와 같은 부정적 정서 외에도 정상 인성과 일을 바라보는 관점에 영향을 끼치는 여러 정서가 있다. 이러한 정서는 정상 인성의 양심, 이성, 사유, 판단에 영향을 미치고, 사람이 진리를 추구해 얻는 성과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부정적 정서는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다. 오늘도 이어서 갖가지 부정적 정서를 어떻게 내려놓아야 할지에 관해 교제하겠다. 우선 부정적 정서가 어떤 모습으로 표출되는지 교제하고, 이를 통해 갖가지 부정적 정서를 인식하는 동시에 자신과 대조해 볼 수 있게 하고, 그런 다음 일상생활에서 하나하나 해결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진리를 구하고, 진리를 깨닫고, 이러한 부정적 정서가 사람에게 심어 주는 갖가지 부정적 사상 관점 혹은 일을 바라보는 비정상적인 각도와 비정상적인 입장을 인식하고 분석함으로써 이러한 부정적 정서를 해결하게 될 것이다.
지난번에 ‘의기소침’이라는 부정적 정서를 언급했었다. 먼저, 의기소침이라는 정서가 보통 사람에게 존재하는지 보자. 너희는 의기소침하다는 게 어떤 느낌이며 어떤 마음이고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지 느낄 수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해하기 쉬운 문제다. ‘의기소침’에 대해 폭넓은 이야기를 하지는 않겠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모습 중 어떤 것들이 의기소침이라는 정서로 인한 것인지만 이야기하겠다. ‘의기소침’의 의미가 무엇이냐? 정서가 다운되고, 기분이 안 좋고, 무슨 일을 해도 흥이 안 나고, 의욕과 동력이 없고, 일을 하는 태도가 비교적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며,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의지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모습을 초래한 근원은 무엇이냐?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분석할 주요 문제다. 의기소침이 행동으로 표출되는 다양한 형태와 이러한 부정적 정서가 사람에게 심어 주는 갖가지 심리, 사상, 그리고 일을 처리하는 태도를 알아본 다음에는 이러한 부정적 정서를 일으키는 원인이 무엇인지, 즉 사람에게 이러한 부정적 정서가 생기는 배경에 어떤 근원이 존재하는지 알아봐야 한다. 사람은 왜 의기소침해지느냐? 왜 일을 처리할 동력이 없느냐? 왜 항상 일 처리가 대단히 소극적이고, 수동적이고, 의지가 없는 것이냐?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네가 본 어떤 사람이 일을 처리할 때 언제나 유독 의기소침하고, 수동적이고, 기운이 없다고 치자. 그는 정서와 태도가 그다지 적극적이거나 낙관적이지 않다. 항상 소극적이고, 남 탓만 하며, 자포자기하는 태도를 보인다. 네가 설득해 봐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그도 네가 말한 길이 맞고 네가 말한 도리가 훌륭하다고 인정하지만, 막상 일을 처리할 때는 힘을 못 내고 여전히 소극적이며 수동적이다. 심각할 때는 그의 팔다리가 움직이는 모양과 자세, 걸음걸이, 말하는 톤, 어휘 선택만 봐도 정서가 몹시 의기소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 기운이 없는 게 꼭 소금 먹은 푸성귀 같아서 누구든 그와 오래 같이 있으면 영향을 받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사람이 의기소침한 정서 속에서 살면서 보이는 갖가지 행동, 표정, 말투, 더 나아가 그 사람이 드러내는 일부 사상 관점에서도 소극적인 성질이 묻어난다. 그렇다면 이러한 부정적 현상을 일으킨 그 이면의 원인은 무엇이냐? 그 근원은 어디에 있느냐? 물론, 의기소침이라는 부정적 정서가 생겨난 근원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중 어떤 부류의 사람은 항상 자기 팔자를 탓해서 의기소침한 정서가 생기기도 한다. 이것이 원인 중의 하나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농촌 혹은 빈곤 지역에서 살았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그의 집에는 간단한 가구만 몇 개 있을 뿐, 귀중한 물건은 없다. 옷도 한두 벌이 전부이고, 낡아 빠졌더라도 입어야 한다. 평소에 맛있는 것도 잘 챙겨 먹지 못하고, 고기를 먹으려면 명절까지 기다려야 한다. 아예 헐벗고 굶주릴 때도 있다. 큰 그릇에 고기를 잔뜩 담아 놓고 먹는 것이 꿈이지만, 이루기가 어렵다. 과일 한 번 먹기도 힘들다. 그는 이러한 환경에서 생활하며 대도시에 살면서 능력 있는 부모를 뒀고, 먹고 싶은 것은 다 먹을 수 있고, 입고 싶은 옷도 마음껏 입을 수 있고, 누리고 싶은 모든 것을 손만 뻗으면 얻을 수 있고, 식견도 있는 사람들과 자기는 다르다고 느낀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남들은 팔자가 얼마나 좋아. 그런데 내 팔자는 왜 이 모양이지?’ 그는 항상 두각을 나타내려 하고 운명을 바꾸고 싶어 한다. 그러나 운명을 바꾸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환경에서 태어났는데 바꾼다고 무엇이 얼마나 바뀌겠으며, 좋아진다고 한들 얼마나 좋아질 수가 있겠느냐? 성인이 되어 사회에 진출해서는 뭘 하든 벽에 부딪히고 어디를 가든 꼭 괴롭히는 사람을 만난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재수 없다고 여긴다. ‘나는 왜 이렇게 운이 없지? 왜 항상 저열한 인간을 만나는 거야? 어려서 팔자가 사나웠던 건 그렇다 쳐도, 커서까지 팔자가 이렇게 안 좋다니. 나를 드러내고 싶어도 기회가 없어. 기회가 없는 건 그렇다 쳐. 그냥 열심히 일하고 돈 많이 벌어서 잘 살고 싶을 뿐인데, 그것도 못 이룬단 말이야? 잘 사는 게 나한테는 왜 이렇게 아득한 일인 거지? 상류층의 삶을 바라는 것도 아니잖아. 최소한 도시 사람처럼 살기라도 하고 싶어. 남들한테 무시당하지 않고 2등, 3등 시민 취급을 당하지 않으면서. 적어도 누가 나를 부를 때 ‘어이, 이 자식아, 거기 너, 이리 와!’라고 하는 게 아니라 내 이름을 부르고 존칭을 붙여 줬으면 좋겠어. 하지만 나는 그런 존칭 하나도 못 듣지. 무슨 팔자가 이 모양이람?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고생해야 해?’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고생스러웠지만, 하나님을 믿게 된 후에는 참도임을 알아보고 이렇게 생각한다. ‘예전에 했던 고생은 다 가치 있는 것이었어. 모든 게 하나님의 지배이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야. 하나님의 행사는 너무나 좋았어. 그런 고생이 없었다면 나는 하나님을 믿지 못했을 거야. 하나님을 믿으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 운명도 바뀌겠지. 그리고 교회에서는 형제자매들과 평등하게 생활할 수 있어. 나를 ‘형제’ 혹은 ‘자매’라고 불러 주니 나한테도 존칭이 생긴 거야. 사람들한테 존중받는 기분이 들어.’ 운명이 바뀐 것 같고, 예전처럼 고통스럽지 않은 것 같고, 더는 팔자 사나운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이 든 것이다. 하나님을 믿게 된 그는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열심히 이행하기로 다짐한다. 괴롭고 힘들어도 참고 견디며, 매사에 다른 사람들보다 고생하고, 많은 사람의 지지와 높은 평가를 얻고자 노력한다. 나중에는 리더나 책임자, 또는 팀장으로 뽑힐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그러면 조상과 가문을 빛내는 것 아니냐고, 그러면 운명을 바꾼 것 아니냐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아 그는 실의에 빠진다. ‘나는 하나님을 오래 믿었고 형제자매들과도 잘 어울려 지냈어. 그런데 리더, 책임자, 팀장을 뽑을 때마다 왜 내 차례는 안 오는 거지? 생긴 게 너무 평범한 탓일까? 아니면 사람들 눈에 띌 만큼 비범한 일을 못 해서 그런가? 선거가 있을 때마다 한 줄기 희망을 품은 채 팀장으로 뽑혀도 좋겠다고 생각해. 난 하나님께 보답하고 싶어서 가슴이 뜨거운데, 선거가 있을 때마다 실망하게 돼. 번번이 나와는 인연이 안 닿아. 왜 이렇지? 정말로 나는 한평생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 보통 사람, 눈에 띄지 않는 사람밖에 될 수 없는 건가? 어린 시절, 젊은 시절, 중년 시절을 돌아보면 나는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쭉 이렇게 평범했어. 아무것도 이룬 게 없지. 야심이 없느냐고 하면 그건 아니야. 자질이 떨어지느냐, 그것도 아니야. 노력을 덜 한 것도 아니고 고생을 견디지 못한 것도 아니야. 나한테는 의지가 있고 목표가 있어. 더 나아가 야심이 있다고도 할 수 있지. 그런데 왜 좀처럼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걸까? 결국은 내가 팔자를 잘못 타고났고 운이 나쁘기 때문이야. 하나님께서 이렇게 안배하신 거야.’ 그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기가 팔자를 잘못 타고난 것 같다고 느낀다. 평소에 본분을 이행할 때 어떠한 건의 사항이나 관점을 내놓는 족족 반박당하고, 아무도 듣지 않고 안중에 두지 않는다면, 그는 더 의기소침해져서 이렇게 생각한다. ‘아, 다 내 팔자가 나쁜 탓이야! 어느 그룹에 가든 꼭 저열한 인간이 내 발목을 잡고, 날 짓누르려 들어. 어느 그룹에 가든 존중받지 못하고 두각을 나타내지도 못해. 결국, 한마디로 말해 팔자를 잘못 타고난 거지!’ 어떤 일이 닥치든 그는 항상 자기 팔자 탓으로 돌리며, 팔자를 잘못 타고났다는 점에 집중하고, 더 깊이 인식하고 납득하려 한다. 이러다 보면 그의 정서는 점점 더 의기소침해진다. 본분을 이행하다가 실수라도 하면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어휴! 팔자가 이 모양인데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어?’ 예배 시간에 다른 형제자매들은 모두 교제하는데 자기는 아무리 궁리해 봐도 별로 인식이 없으면 또 같은 생각을 한다. ‘어휴! 팔자가 이 모양인데 무슨 인식이 있겠어!’ 남이 자기보다 말을 잘하고, 교제하는 인식도 분명하며 빛 비춤이 있는 것을 볼 때마다 그의 정서는 더 의기소침해진다. 남이 기꺼이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면서 본분 이행에 성과를 내 형제자매들의 지지를 받고 발탁되는 것을 보면 그는 내심 씁쓸해진다. 남이 리더 일꾼이 된 것을 보면 그의 정서는 더욱더 의기소침해진다. 심지어는 남이 노래를 잘하고 춤을 잘 추는 것만 봐도 자기는 그 사람만 못하다는 생각에 의기소침해진다. 어떤 사람과 일, 사물이 임하든, 어떤 환경이 임하든, 그는 의기소침이라는 정서로 대응한다. 남이 멋진 옷을 입은 것만 봐도, 남의 머리 모양이 보기 좋기만 해도, 그는 속상해하고 질투와 부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결국에는 언제나처럼 의기소침한 정서에 빠진다. 그가 스스로 도출해 낸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어휴! 다 팔자를 잘못 타고난 탓 아니겠어? 내 얼굴이 지금보다 조금만 낫고, 남들처럼 번듯하고, 키가 크고, 몸매가 좋고, 옷도 잘 입고, 돈도 많고, 좋은 부모님이 있었다면 지금 같지는 않았을걸? 그랬으면 남들이 나를 우러러보고, 부러워하고, 질투하지 않았겠어? 결국은 내가 팔자를 잘못 타고난 거야. 누구를 원망하겠어. 팔자가 나쁘면 엎어져도 코가 깨지고 자빠져도 코가 깨지는 법이야. 팔자를 잘못 타고난 걸 어쩌겠어.’ 마찬가지로 그는 책망 훈계가 임하거나 형제자매의 지적, 비판, 건의를 받을 때도 의기소침이라는 정서로 대응한다. 요컨대, 자기한테 벌어진 일이든 아니면 주변의 일이든, 모든 일에 의기소침한 정서로부터 나온 갖가지 부정적 사상 관점과 태도, 입장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항상 자기가 팔자를 잘못 타고났다고 생각하는 이 부류의 사람들은 마음이 커다란 바위에 짓눌려 있는 것과 같다. 자기에게 닥친 일들이 모두 나쁜 운명으로 인한 것이라고 여기는 까닭에 무슨 일이 닥치든 사람의 힘으로는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소극적이 되어 일을 게을리하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에이, 그냥 이렇게 대충 살자!’라는 뜻이다. 다른 사람은 책망 훈계가 임하면 자신을 반성하면서 말한다. ‘왜 내게 책망 훈계가 임했을까? 내가 한 일 중에 어떤 일이 진리 원칙에 위배되는 것일까? 내가 무슨 패괴 성품을 드러냈을까? 나는 충분히 깊게,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인식하고 해결해야 할까?’ 등등의 말을 말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그는 책망 훈계가 임하면 상대가 자기를 얕본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팔자를 잘못 타고났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마음대로 책망한다고 생각한다. 책망하지 않으면 그나마 의기소침함이 덜하지만, 일단 책망했다 하면 그는 훨씬 심각하게 의기소침해진다. 다른 사람은 책망이 임해서 며칠 소극적인 상태에 빠졌다가도 하나님 말씀을 읽고 형제자매들이 도와주고 붙들어 주면, 진리를 받아들이고 점차 돌아서서 소극적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팔자를 잘못 타고났다고 여기는 부류는 소극적인 정서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 팔자가 나쁘다고 더 강하게 확신한다. 어째서냐? 그는 하나님 집에 와서도 자기가 능력을 펼치지 못하고 번번이 책망이나 받으며 희생양이 된다고 생각한다. ‘봐, 남들은 똑같은 일을 해도 책망받지 않는데 왜 나만 책망받는 거냐고! 이게 다 팔자를 잘못 타고난 탓 아니겠어?’ 그는 이렇게 의기소침해지고 자포자기한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 줘도 듣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은 책망을 받아도 그때뿐이지만, 저는 아니에요. 저는 뭘 어떻게 해도 잘 안된다고요. 애초에 타고나길 책망받을 팔자니 누굴 탓하겠어요. 팔자를 잘못 타고난 걸 탓할 수밖에요.” 그는 항상 자기 팔자가 나쁘다고 여기며 한평생 그냥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 집에서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고, 어떻게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본분 이행에 합격할지 알려 줘도 귀담아듣지 않는다. 그는 시종일관 자기 팔자가 나쁘다고 믿으므로 진리를 추구해 구원받는 것처럼 좋은 일은 틀림없이 자기와 관계가 없으리라 여긴다. 그래서 본분도 그다지 열심히 이행하지 않는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굳게 믿는다. ‘팔자가 나쁜 사람은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없어. 본분을 잘 이행하는 건 다 팔자가 좋은 사람들이야. 팔자가 좋은 사람은 어딜 가나 환영받고 만사형통이지. 나처럼 팔자가 나쁜 사람은 번번이 저열한 인간과 부딪치고 본분을 이행하면서도 기분이 안 좋아. 하는 일마다 재수가 없다고!’ 스스로 팔자가 나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정서가 저조하고 의기소침하다. 진리를 추구한다는 건 입에 발린 소리일 뿐이고 자기처럼 팔자가 나쁜 사람은 어차피 결실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기는 진리를 추구해 봤자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리라 여기며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팔자 나쁜 사람이 무슨 수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겠어? 팔자 나쁜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데?’ 스스로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자기를 이렇게 규정한다. ‘나는 팔자를 잘못 타고나서 처음부터 운명이 기구했어. 그러니까 마지막에 살아남아 힘쓰는 자가 될 수 있어도 다행이야. 그것만 해도 조상님이 덕을 쌓아서 얻은 경사지. 나는 팔자가 나쁘니까 눈에 안 띄는 본분이 어울려. 밥을 한다든지, 청소한다든지, 형제자매들의 아이를 돌본다든지, 자질구레한 잡무를 한다든지, 그런 것 말이야. 하나님 집에서 얼굴을 내미는 일은 아마 한평생 나와 인연이 없을 거야. 봐, 뜨거운 가슴으로 하나님 집에 왔지만 결국은 어떻게 됐지? 밥하고 힘을 내는 사람이 됐어. 아무리 힘들고 고생스러워도 그걸 아는 사람도 없고, 봐 주는 사람도 없고, 관심을 갖는 사람도 없어. 이게 팔자가 사나운 게 아니면 뭐겠어? 남들은 주연도 맡고, 단역도 하고, 영화며 영상물을 연달아 찍어 얼마나 체면이 서겠어! 하지만 난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 이 얼마나 기구한 팔자인지! 난 팔자가 너무 안 좋아! 팔자 잘못 타고났다고 누구를 원망할 수 있겠어? 나밖에 더 있어? 그래, 이번 생은 그냥 되는대로 살자.’ 그는 이러한 부정적 정서 속으로 점점 더 깊게 빠져든다. 그는 자신의 부정적 정서가 무엇이고, 왜 생겨났으며, 그것이 팔자의 좋고 나쁨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반성하거나 인식하지 못한다. 진리를 구해 이러한 문제를 명확히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팔자가 나쁜 게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는 생각을 덮어놓고 고집한다. 그 결과, 그런 소극적인 정서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어 스스로 헤어 나올 수 없게 된다. 결국에는 자기가 팔자를 잘못 타고났다는 생각에 자포자기하고 그럭저럭 되는대로 밥만 축내고 살아가면서 죽을 날을 기다린다. 그럼으로써 진리를 추구하고, 본분을 잘 이행하고, 구원받는 등 하나님의 요구에 흥미가 점점 떨어지고, 심지어는 갈수록 배척하고 거부하게 된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자기 팔자가 안 좋은 것을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이자 근거로 삼는다. 그는 자기에게 임한 환경 속에서 자기의 패괴 성품과 부정적 정서를 분석하여 그 패괴 성품을 인식하고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늘 팔자가 안 좋다는 점을 내세워 자기에게 임하고 자기가 체험한 모든 사람과 일, 사물에 대응한다. 그 결과 의기소침한 정서에 더 깊이 빠져든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팔자를 잘못 타고났다고 생각하는 의기소침한 정서가 옳은 것이냐? (옳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 옳지 않으냐? (제 생각에 그러한 정서는 비교적 편향적입니다. 그는 어떤 일이 닥치든 무조건 팔자가 안 좋아서 그런 것으로 해석하고 규정합니다. 일이 닥쳤을 때 자기한테 왜 그런 문제가 생겼는지 반성하거나 정리하지 않으며, 구하거나 묵상하지도 않습니다. 완전히 규정하는 것이자 편향적인 대처법입니다.) 어째서 이렇게 편향적이고 터무니없는 대처법이 나온 것이겠느냐? 그에게 그런 의기소침한 정서가 생긴 근원이 무엇이겠느냐? (제 생각에는 그에게 그러한 정서가 생겨난 근원은 그가 걷는 길과 추구의 근원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내면에는 야심과 욕망이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남과 경쟁하고, 남과 자신을 비교합니다. 야심과 욕망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 그의 내면에 그런 부정적인 정서가 생깁니다.) 너희는 이 문제의 본질을 간파하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팔자’에 대한 그의 견해가 잘못됐다는 점이다. 그는 항상 팔자가 좋거나 운이 형통하고 순조롭기를 추구하며, 늘 사람의 팔자를 본다. 그런 것을 추구하다 보면 무엇이 뒤따라오느냐? 갖가지 환경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남이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무엇을 즐기는지 보고 자기 상황과 대조한다. 각 방면에서 자기가 뒤지고 남보다 못한 것 같으면 팔자를 잘못 타고났다고 생각한다. 사실, 반드시 그의 조건이 가장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도 그는 항상 대조하고 비교한다. 언제나 ‘팔자’에 대해 열심히 궁리하고, 관찰하고, 깊이 연구한다. 무슨 일이든 팔자의 좋고 나쁨이라는 각도로, 그러한 관점으로 가늠한다. 그렇게 가늠하다가 자기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게 되고, 길이 없으면 결국 소극적인 상태에 빠진다. 그는 늘 팔자가 좋은지 나쁜지의 관점으로 모든 일의 겉모습만 따져 보며, 일의 본질은 보지 않는다. 이는 어떤 잘못을 범한 것이겠느냐? 그의 사상 관점은 한쪽으로 치우쳐 있고, 운명에 대한 견해 역시 올바르지 않다. 사람의 운명은 무엇보다도 심오한 것이다. 명확히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간단한 사주나 생시만으로 한 사람의 팔자가 좋은지 나쁜지 설명할 수는 없다. 거기에는 비밀이 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예정한 운명이 대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는 사람의 육적 안목이나 무속인의 안목으로 보고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한 사람이 일생 동안 부귀영화를 얼마나 누렸고, 고생을 얼마나 했으며, 명리와 장래를 추구하는 과정이 순조로웠는지 아니었는지에 근거해 가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자기가 팔자를 잘못 타고났다고 하는 부류의 사람들은 바로 이 심각한 오류를 범한다. 물론, 이는 많은 사람이 자기 팔자가 좋은지 나쁜지를 가늠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어떻게 가늠하더냐? 세인들이 무엇으로 한 사람의 팔자가 좋은지 나쁜지를 가늠하더냐? 주요한 근거는 그 사람의 일생이 순조로웠는지, 부귀영화를 누렸는지, 상류층의 삶을 살았는지, 평생 고생을 얼마나 했는지, 얼마나 즐겼는지, 그리고 수명이 얼마나 길었는지, 어떤 직업에 종사했는지, 힘들게 살았는지 아니면 편안하게 살았는지 등등이다. 이러한 것들로 한 사람의 팔자가 좋은지 나쁜지를 가늠한다. 너희도 이렇게 가늠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그래서 너희 다수는 잘 풀리지 않는 일이 닥치거나, 고난의 날들이 임하거나, 혹은 상류층의 삶을 누리지 못하면 자기 팔자가 나쁘다고 생각하면서 의기소침에 빠진다. 자기가 팔자를 잘못 타고났다는 사람의 팔자가 정말로 나쁘리라는 법은 없고, 자기가 팔자를 잘 타고났다는 사람의 팔자가 정말로 좋으리라는 법도 없다. 여기서 좋고 나쁨을 도대체 어떻게 가늠하겠느냐? 하나님을 믿으면 팔자가 좋고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팔자가 나쁘다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이겠느냐?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너희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 중에 정말 팔자가 안 좋은 사람도 있고 좋은 사람도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중에도 팔자가 좋은 사람이 있고 팔자가 안 좋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맞는 말이냐? (아닙니다.) 너희의 이유를 말해 보아라. 어째서 틀린 말이냐? (제 생각에 팔자가 좋고 나쁘고는 하나님을 믿는 것과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맞는 말이다. 팔자가 좋고 나쁘고는 하나님을 믿는 것과 관계가 없다. 그렇다면 무엇과 관계가 있겠느냐? 사람이 걷는 길과 관계가 있겠느냐, 아니면 사람이 추구하는 것과 관계가 있겠느냐? 진리를 추구하면 팔자가 좋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팔자가 사나운 것이냐? 과부의 팔자는 좋은지 나쁜지 말해 보아라. 세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과부의 팔자는 좋지 않다. 만약 삼사십 대에 과부가 됐다면 팔자가 좋지 않고 심히 사나운 것이다! 하지만 과부가 혼자 살며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하나님을 믿게 됐다면, 그래도 팔자가 사나운 것이냐? (사납지 않습니다.) 과부가 되지 않은 사람들은 형편이 좋고, 뭐든 뜻대로 되고, 기댈 곳이 있고, 생활 조건이 풍족하고, 자손이 많고, 삶이 여유롭고, 고난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고, 정신적으로 필요한 것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네가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그들은 안 믿는다. 어느 쪽의 팔자가 좋은 것이겠느냐? (과부 쪽이 팔자가 좋습니다. 하나님을 믿게 됐기 때문입니다.) 보아라. 과부는 세인들이 보기에 팔자가 좋지 않고 고생이 심했기에 돌아서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즉, 하나님을 믿고 따른 것이다. 이는 팔자가 좋아지고 복을 누리게 된 것이냐? (그렇습니다.) 원래 좋지 않았던 팔자가 좋아졌다. 팔자가 좋지 않다고 하면 평생 운명이 순탄치 않을 것이며, 이는 바꿀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변화가 일어난 것이냐? 하나님을 믿게 됐기 때문에 팔자가 바뀐 것이냐? (아닙니다. 일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뀐 것입니다.) 일을 대하는 관점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팔자’라는 객관적인 사실은 바뀌었느냐? (바뀌지 않았습니다.) 과부가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남편이 있는 여자들을 내심 부러워했다. ‘저 여자는 팔자가 정말 좋네. 남편이 있고, 가정이 있고, 생활이 단란하고, 삶이 행복하고, 과부로 사는 고통을 안 당하잖아.’ 하나님을 믿게 된 후에는 ‘난 하나님을 믿게 됐어. 하나님께서 택하셨기에 난 하나님을 따르고, 본분을 이행하고, 진리를 얻을 수 있어. 나중에는 구원받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어. 내 팔자가 얼마나 좋은지 봐! 저 여자는 과부가 아니지만, 저게 무슨 팔자야? 늘 삶의 즐거움을 추구하고 명리와 지위를 추구해. 사회에서 잘나가고 부귀영화를 누리지만, 나중에 죽으면 지옥에 갈 거야. 저 여자는 팔자가 안 좋아. 내 팔자가 저 여자보다 나아!’라고 깨닫는다. 시각이 변했지 객관적인 사실이 변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여자는 여전히 이렇게 생각한다. ‘흥, 내 팔자가 당신보다 좋거든! 당신은 과부지만, 난 아니야. 내 삶이 당신 삶보다 나아. 난 팔자가 좋아!’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보기에 그녀의 팔자는 좋지 않다. 그렇다면 이 변화는 어떻게 해서 일어난 것이냐? 객관적인 환경이 변했느냐?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시각이 변한 것이냐? (사물의 좋고 나쁨을 가늠하는 기준이 변한 것입니다.) 그렇다. 사물을 가늠하고 일을 대하는 관점이 변했다. 과부가 아닌 사람의 팔자를 좋게 보다가 안 좋게 보는 것으로 바뀌었고, 자기 팔자가 안 좋다고 생각하다가 팔자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 두 가지 견해가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완전히 뒤집힌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객관적인 사실과 환경은 그대로인데 어째서 일을 바라보는 최종 결과는 변한 것이냐? (진리를 받아들이고 긍정적인 것을 받아들인 후 일의 좋고 나쁨을 가늠하는 관점에 정확한 기준이 생긴 것입니다.) 일을 바라보는 관점은 변했다. 하지만 사실은 변했느냐? (아닙니다.) 과부는 여전히 과부고, 행복하게 사는 여자는 여전히 행복하게 산다. 객관적인 사실은 전혀 변한 게 없다. 그렇다면 결국 누구의 팔자가 좋고 누구의 팔자가 안 좋은 것이냐? 명확하게 말할 수 있겠느냐? 예전에 과부가 자기 팔자가 안 좋다고 생각한 것은 한편으로는 객관적인 생활 환경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객관적인 환경이 그녀에게 심어 준 일종의 사상 관점 때문이었다. 하나님을 믿게 된 이후에는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며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달음에 따라 그녀의 사상에도 변화가 생겼고 일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졌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게 된 후에는 자기를 더는 팔자가 안 좋은 사람이 아닌 팔자가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일 기회를 얻고 진리를 깨달아 구원받을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이 예정한 일이고, 이는 누구보다도 복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하나님을 믿게 된 이후 오로지 진리 추구에만 집중한다. 추구하는 목표가 예전과는 달라졌다. 생활 조건, 생활 환경, 생활의 질은 여전히 예전과 같고 바뀐 게 없지만, 일을 바라보는 관점에 변화가 생겼다. 사실상 그녀의 팔자가 정말로 하나님을 믿게 된 것으로 인해 좋아진 것이냐? 그건 아직 장담할 수 없다. 다만 그녀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희망이 생겼고, 심리적인 만족감을 얻었을 뿐이다. 추구하는 목표도 달라졌고, 일을 바라보는 관점도 바뀌었다. 그래서 현재의 생활 환경으로부터 행복, 만족, 기쁨, 평안을 느끼는 것이다. 그녀는 자기 팔자가 꽤 좋다고, 과부가 아닌 여자보다 훨씬 낫다고 여긴다. 이제야 자기 팔자가 안 좋다고 생각했던 예전의 관점이 틀렸다고 느끼게 된다. 여기에서 너희는 무엇을 깨달았느냐? 팔자가 좋고 나쁘다는 것이 과연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하지 않는다.
일생의 운명이 어떨지는 하나님이 이미 오래전에 정했으므로 바꿀 수 없다. 팔자가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서도 다르고, 환경에 따라서, 사람의 자아 감각, 추구에 따라서도 다르다. 그러므로 ‘팔자’는 좋고 나쁨과 관계가 없다. 너는 아주 힘들게 살면서도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나는 무슨 대단한 걸 바라지 않아. 먹을 것과 입을 것만 있다면 만족해. 살면서 고생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세인들이 자주 하는 말도 있잖아. 비바람을 겪지 않고 어떻게 무지개를 보겠느냐고, 고생하는 것도 값진 일이라고 말이야. 그리고 이 정도가 무슨 고생이야? 이건 팔자가 나쁜 게 아니야. 하늘이 내게 약간의 고통과 고난을 주고 단련시키는 건 나를 중히 여기기 때문이야. 나는 팔자가 좋은 거라고!’ 그런가 하면 고생은 나쁜 일이고 팔자가 좋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고생 없이, 생활이 안락하기만 해야 팔자가 좋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방인들은 이를 두고 개인마다 관점이 다른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팔자’라는 것을 어떻게 보느냐? 팔자가 좋다, 혹은 팔자가 나쁘다는 말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런 말은 없다. 너는 하나님을 믿으니 곧 팔자가 좋은 것이라고 한다면,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바른길을 걷지 않아 징벌을 받고, 드러나고, 도태됐을 때는 대체 팔자가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드러나고 도태될 일도 없다. 이방인들과 종교계에서는 사람을 드러내거나 분별하는 것을 중요시하지 않으며, 제명되거나 도태된다는 말도 없다.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다는 사실만 놓고 보면 그 사람은 팔자가 좋은 것이겠지만, 마지막에 징벌을 받는다면, 그렇다면 다시 팔자가 안 좋아진 것이냐? 한순간 팔자가 좋았다가, 또 한순간 팔자가 나빴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느 쪽인 것이냐? 팔자는 좋다 나쁘다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논할 수 없는 일이다. 전부 하나님이 행한 것이다. 하나님의 안배는 모두 훌륭하다. 다만, 사람마다 운명의 궤적이라든지 처한 환경이 다르고, 각자에게 임하는 사람과 일이 다르며, 한평생 경험하는 인생의 궤적이 다른 것이다. 저마다 차이가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각각 다른 생활 환경과 성장 배경을 안배했다. 한평생 겪는 일도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이른 바 좋은 팔자나 나쁜 팔자는 없다. 하나님이 모두 다 안배해 두었으며, 전부 하나님의 행사다. 하나님의 행사라는 관점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하나님이 하는 모든 일은 훌륭하고 옳다. 다만, 개인의 취향, 느낌, 선택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사람은 안락한 생활, 명리, 명망, 세상에서의 성공, 개인적 영달을 선택한다. 그는 이런 것들을 가져야 좋은 팔자라고 생각한다. 평생 제대로 이룬 것도 없이 그저 그렇게 살면서 언제까지나 사회 밑바닥에 머문다면 팔자가 좋지 못한 것이라고 여긴다. 이는 이방인 혹은 세인들이 세상을 추구하는 각도에서, 세상에서의 생존을 추구하는 각도에서 논한 것이다. 그래서 팔자가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하는 말이 생겼다. 팔자가 좋으니 나쁘니 하는 말은 운명에 대한 인간의 편협한 인식과 깊이 없는 감성적 인식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또한 사람이 육적으로 얼마나 고생했는지, 얼마나 누렸는지, 명예와 이익을 얼마나 얻었는지 등등을 논지의 출발점으로 삼는 탓에 팔자가 좋으니 나쁘니 하는 말이 나온 것이다. 사실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안배하고 주재한다는 점에 입각해서 이야기하자면, 팔자가 좋으니 나쁘니 하는 말은 존재할 수가 없다. 맞지 않느냐? (맞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주재라는 각도에서 사람의 운명을 논한다면 하나님의 행사는 전부 훌륭하고 개개인에게 필요한 것이다. 전생과 현생의 인과가 있고, 하나님의 정함과 주재,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과 안배가 있기에 사람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그러면 이러한 방면에서 볼 때, 사람은 자기 팔자가 좋은지 나쁜지를 멋대로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냐? 만약 사람이 이를 멋대로 평가한다면 지극히 심각한 잘못을 범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계획, 안배, 주재를 사람이 판단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이는 심각한 잘못이 아니냐? 사람이 한평생 걷는 길에 영향을 줄 수도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러한 잘못이 사람을 망쳐 버린다.
사람의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대해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선은 왜 너에게 이러한 운명과 이러한 생활 환경을 안배했는지, 왜 너에게 이러한 일이 닥치게 하고 너로 하여금 이러한 일을 겪게 했는지, 네 운명이 왜 이러한지를 창조주에게 구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네가 마음속으로 갈구하고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한편,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인식해야 한다. 알아보고 인식한 다음에 사람이 할 일은 반항도, 선택도, 거부도, 반발도 아니며 도피도 아니다. 하나님과 흥정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사람이 할 일은 순종하는 것이다. 왜 순종해야 하느냐? 너는 피조물이고 네 운명을 지배할 수도, 주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네 운명은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 너는 운명 앞에서 수동적이고 선택권이 없다. 네가 해야 할 일은 오로지 순종뿐이다. 선택하려 들지 말고 도피하려 들지 마라. 하나님과 흥정하려 들지도 말고 맞서거나 불만을 품지도 마라. “하나님께서 안배해 주신 팔자가 안 좋습니다. 저는 팔자가 사나워요. 제 팔자는 남들만 못해요.”라거나 “저는 타고나길 팔자가 별로라서 복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좋게 안배해 주시지 않았어요.” 등의 말은 당연히 더더욱 해서는 안 된다. 이는 모두 판단하는 말이며 주제넘은 말이다. 피조물이 할 말이 아니고, 피조물이 가져야 할 관점과 태도도 아니다. 정반대로, 너는 운명에 대한 갖가지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이해와 정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견해와 깨달음을 내려놓는 동시에, 올바른 태도와 입장을 가지고 하나님이 네게 안배해 준 운명 속에서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에 순종해야 한다. 반항해서는 안 되며, 의기소침한 정서를 지닌 채로 불공평하다면서 하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의 안배가 안 좋다고, 네게 최고의 운명을 안배해 주지 않았다고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운명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피조물에게는 선택할 권리가 없다. 하나님은 네게 그럴 의무를 주지 않았으며, 그럴 권리도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는 선택하려 들어서도, 하나님께 따져서도, 하나님께 따로 무언가를 요구해서도 안 된다. 너는 하나님이 안배해 준 대로 거기에 적응하고 직면해야 한다. 하나님이 무언가를 안배했으면 너는 그것에 직면하고, 겪어 보고, 몸소 느껴야 한다. 하나님이 네게 안배해 둔, 네가 반드시 경험해야 할 모든 일에 완전히 순종하고, 하나님이 네게 안배해 둔 운명에 순응해야 한다. 네가 반드시 경험해야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너를 위해 배치한 것이고 하나님이 네게 안배한 것이라면, 설령 네가 그것을 좋아하지 않고, 그것이 너를 고생스럽게 하고, 너의 존엄과 인격을 위협하고 억압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순종해야만 한다. 네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사람의 운명이 하나님이 안배해 놓고 주재하는 것인 이상 사람은 하나님과 무엇도 협의할 수 없다. 그러니 현명한 사람이라면, 정상 인성의 이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항상 본인의 팔자가 좋지 못하다고 탓하거나 자신이 이게 문제네 저게 문제네 불평해서는 안 된다. 팔자를 잘못 타고났다는 생각에 의기소침한 태도로 자기 본분을 대하고, 자기 인생을 대하고, 자기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걷는 길을 대하고, 하나님이 안배한 모든 환경을, 혹은 하나님의 요구를 대해서는 안 된다. 의기소침은 간단하고 일시적인 패역이 아니요, 일시적으로 드러내는 패괴 성품도 아니며, 일종의 패괴된 내적 상태가 드러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소리 없는 반항이고, 하나님이 안배한 운명에 불만을 품고 행하는 소리 없는 반항이다. 일종의 간단한 부정적 정서라고 해도, 그것이 사람에게 초래하는 결과는 패괴 성품보다 더 심각하다. 그러한 정서 속에서는 네가 응당 이행해야 할 본분과 네 생활, 네 인생을 적극적이고 올바른 태도로 마주할 수 없다. 더욱 심각한 것은 네가 의기소침함으로 인해 멸망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슬기로운 사람은 이런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관점을 서둘러 바로잡아야 하며,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반성하고 인식해야 한다. 네가 무엇 때문에 팔자가 좋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는지 살펴봐야 한다. 어떤 일이 네 존엄에 상처를 내거나 심리적으로 자극을 줘 팔자가 안 좋다는 부정적 생각을 하게 했으며 그로써 너를 의기소침이라는 부정적 정서에 빠뜨려 쉽사리 헤어나지 못하고 쭉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는지 살펴봐야 한다. 이는 네가 반드시 반성하고 성찰해야 할 문제다. 네 마음속에 새겨진 어떤 일이나 누구의 악담 한마디가 네 자존심에 상처를 내 팔자가 나쁘다는 생각이 들게 하고, 나아가 너를 의기소침에 빠뜨렸는지, 네 생활과 성장 과정에서 사탄과 사회로부터 온 어떠한 사상 관점이 네게 운명에 대한 착각을 유발하고 운명의 좋고 나쁨에 유달리 민감하게 만들었는지, 혹은 어떤 부분에서 자극을 받아 운명에 대해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고 너무 민감해졌으며, 운명을 바꾸는 일에 유달리 열중하고 공을 들이게 되었는지, 이는 네가 응당 성찰해야 할 것들이다. 단, 어떻게 성찰하든 네가 결국 알아야 할 것은 팔자가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하는 사상 관점으로 네 운명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사람의 한평생 운명은 하나님의 손에 쥐어져 있다. 하나님이 오래전에 안배해 두었기에 사람은 이를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이번 생에 어떠한 길을 걸을지, 값진 삶을 살 수 있을지는 사람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문제다. 너는 값진 삶을 선택할 수 있다. 한평생 값진 일을 위해 살고, 창조주의 계획과 경영을 위해, 인류의 정의로운 사업을 위해 살아갈 수 있다. 물론 긍정적인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명리를 추구하고, 출세를 추구하고, 돈을 추구하고, 사회의 흐름을 추구하기 위해 살아가는 쪽을 택할 수도 있다. 마치 산송장처럼,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일생을 살아가기를 선택할 수도 있다. 이는 전부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교제를 통해 이제 알게 되었느냐? 항상 자기 팔자가 안 좋다고 하는 부류의 사람이 가진 사상 관점이 과연 올바른 것이냐? (올바르지 않습니다.) 명백하게도, 그러한 이들은 극단에 빠져 의기소침한 정서가 생긴 것이다. 극단적인 사상 관점 때문에 극단적으로 의기소침한 정서가 생기면 그는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올바르게 마주하지 못하고, 사람에게 응당 있어야 할 기능을 정상적으로 발휘하지 못하고, 피조물의 본분, 책임,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기 팔자가 안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비록 하나님을 믿더라도, 포기하고 헌신하며 하나님을 따를 수 있더라도, 지난번에 교제했던 몇 가지 유형의 부정적 정서에 빠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집에서 자유롭게, 거리낌 없이, 편안하게 본분을 이행할 수가 없다. 어째서 그럴 수가 없겠느냐? 그의 내면에 존재하는 극단적이고 비정상적인 사상 관점이 그에게 극단적인 정서를 불러일으키고, 이러한 극단적 정서가 그의 사유 판단과 사유 방식, 그리고 일을 바라보는 관점을 극단적이고 올바르지 않은 각도, 치우친 각도에 머무르게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듯 극단적이고 올바르지 않은 각도에서 문제를 대하고 사람을 대하는 탓에 반복적으로 소극적인 정서의 작용과 영향 아래서 생활하며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한다. 그 결과 어떻게 생활하든 지쳐 보이고, 하나님을 믿으며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도 의욕을 느끼지 못한다. 어떠한 생활 방식을 선택하든 그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며, 하나님을 오래 믿었으면서도 마음과 뜻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여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데에 집중해 본 적이 없다. 당연히,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하는 것은 더욱 어림도 없다. 원인이 무엇이겠느냐? 결론은 항상 자기 팔자가 좋지 않다고 생각하다가 극심하게 의기소침한 정서가 생겼고, 사람 자체가 의욕을 잃었고, 무기력해졌고, 산송장 꼴이 되어 활기라고는 없어졌고, 적극적이거나 낙관적인 태도가 하나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본분을 위해, 자기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자기가 마땅히 바쳐야 할 충성심을 바치겠다는 의지나 끈기는 더더욱 없는 탓이기도 하다. 그러기는커녕 무성의한 태도로 마지못해 살아간다. 무지몽매하고 흐리멍덩하게, 심지어는 지각없이 허송세월을 보낸다. 언제까지 그렇게 대충 살아갈 수 있을지 자기도 모른다. 정 안 될 것 같으면 이렇게 자신을 타이른다. ‘어휴, 되는대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그냥 이렇게 살자! 언젠가 버티지 못할 때 교회에서 날 출교시키고 도태시키겠다면 그냥 도태시키라지 뭐. 팔자가 이런 걸 어쩌겠어!’ 보아라. 말하는 것조차 이토록 무기력하다. 의기소침이라는 정서는 단순한 기분일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사상, 마음, 추구하는 바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제때에, 최대한 빨리 의기소침한 정서를 바로잡지 않으면 그것이 네 일생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네 일생을 망치고, 너를 죽음으로 끌고 간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진리를 얻어 구원받을 수 없으며, 결국에는 멸망에 빠진다. 그러니 자기 팔자가 안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빨리 정신을 차려야 한다. 언제나 팔자의 좋고 나쁨을 자세히 따지고, 운명이 어떤지를 탐구하고, 운명이 어떤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항상 자기 운명에 대해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고, 사소한 변동이 생기거나 무엇이 조금만 마음대로 안 돼도, 혹은 실패, 좌절, 난처함이 임하기만 하면 대번에 자기 팔자가 안 좋아서 생긴 일이라고, 자기는 운이 나쁘다고 생각하면서 자기는 팔자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남들처럼 팔자가 좋지 못하다고 반복적으로 되뇌고, 자꾸만 자신을 의기소침하게 만들고, 의기소침이라는 부정적 정서에 에워싸이고, 결박당하고, 속박당해 헤어 나오지 못한다. 이것은 아주 무서운 일이자 위험한 일이다. 의기소침한 정서가 너를 더 교만하고 간사하게 만들거나 너로 하여금 사악함이며 강퍅함 등의 패괴 성품을 드러내게 하지는 못할 수도 있다. 의기소침한 정서는 네가 패괴 성품을 드러내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만들거나, 패괴 성품을 드러내 진리 원칙을 어기게 하거나, 방해와 교란을 일으키거나, 악을 행하게 만들기에는 역부족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본질을 보자면, 의기소침한 정서는 사람이 현실에 불만이 있을 때 드러내는 가장 심각한 모습이다. 현실에 불만을 드러내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불만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대한 불만은 결국 어떤 결과를 초래하느냐? 그 결과는 아주 심각할 수밖에 없다. 최소한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게 되어 하나님의 말씀과 공급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님의 가르침, 권면, 일깨움, 경고를 알아듣지 못하게 되며, 그것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게 된다. 네 마음이 의기소침한 정서로 가득 차서 하나님의 현실적인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현실적인 역사와 성령의 깨우침, 인도, 도움, 붙들어 줌, 공급도 받아들일 수가 없다. 하나님이 역사해도 너는 느끼지 못한다. 하나님이 역사하고 성령이 역사해도 너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나님에게서 온 긍정적인 것과 하나님에게서 온 요구며 공급을 너는 하나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네 마음은 의기소침한 정서로 가득하며 그것에 점령당한 상태고, 하나님이 행한 것이 네게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결국 너는 하나님의 역사 단계를 모두 놓치고, 하나님이 시기마다 하는 말씀을 놓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시기별 역사를 놓치고, 너를 위한 시기별 공급을 놓친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단계적 사역이 완성되었을 때에도 너는 여전히 네 의기소침한 정서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이며, 의기소침한 정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로 그것에 포위당해 그것으로 가득 차 있다면 너는 하나님의 역사를 완전히 놓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를 완전히 놓치고 나면 네가 마주해야 하는 것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공개적인 심판과 정죄다. 그때는 하나님이 인류의 결말을 선포하는 때이다. 너는 그때가 되어서야 정신을 차린다. ‘아, 나는 자신을 반성해야 해. 의기소침한 정서에서 빠져나와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도와주고 붙들어 달라고 구해야겠어. 하나님의 공급을 구하고, 어떻게 형벌과 심판을 받아들여 정결함을 얻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할 수 있을지 구해야 해.’ 늦었다! 이미 모든 것이 지나갔다. 네가 그때에 가서 깨달아 봤자 너무 늦은 것이다. 무엇이 너를 기다리고 있겠느냐? 통회하고 가슴 치며 슬피 울 일만 남았다. 의기소침한 정서는 비록 일종의 정서에 불과하지만, 그 성질이 심각하고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가 심각하기 때문에 세심하게 성찰해야 한다. 의기소침한 정서가 너 자신을 온전히 점령하게 두지 말고, 네 사상과 네가 추구하는 목표를 좌지우지하게 두지 마라.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 그것이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길의 걸림돌이 되게 두지 말고, 네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때에 그것이 벽이 되게 두지 마라. 네게 이렇게 심각하고 의기소침한 정서가 있다는 것을 네가 확실히 의식하거나 성찰해 낼 수 있다면, 너는 반드시 서둘러 뉘우쳐야 한다. 의기소침한 정서를 내려놓고, 거기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고집스럽게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뭐라고 하든,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나는 어차피 팔자가 안 좋은걸. 팔자가 안 좋으면 의기소침한 게 당연하잖아. 팔자가 안 좋으면 당연히 자포자기하게 되지.’ 매사를 이렇게 소극적으로 대하는 것은 고집스러운 태도다. 자신에게 의기소침한 정서가 있다는 걸 의식했다면, 너는 서둘러 그것을 바로잡고 해결해야 한다. 그것이 너를 완전히 통제할 때까지 기다리지 마라. 그때에 가서 깨닫는다면 너무 늦은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운명을 믿는 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떠한 태도로 운명을 대해야 옳으냐?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를 믿고 거기에 순종해야 합니다.) 맞는 말이다. 언제나 자기 팔자가 좋은지 나쁜지에만 집중한다고 무슨 문제가 해결되겠느냐? 자기 팔자가 좋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 또한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라고 믿으며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관점은 옳은 것이냐? (옳지 않습니다.) 어째서 옳지 않으냐? (그의 관점 속에 여전히 팔자가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하는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규례냐? 여기에서 사람이 깨달아야 할 진리가 무엇이냐? (운명에는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운명적으로 정하신 것은 모두 좋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지배에 순종해야 합니다.) 운명은 하나님이 지배하고 안배한 것임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이 지배하고 안배한 것이므로 운명을 두고 좋고 나쁨을 논할 수는 없는 법이다.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은 사람의 시선, 견해, 선호, 느낌에 기반한 평가일 뿐이다. 이러한 평가는 사람의 상상과 관점을 근거로 하기 때문에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팔자가 정말 좋아요. 하나님을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 이방인 세계 환경의 영향을 안 받았고, 이방인의 풍조에 영향을 받거나 유혹당하거나 미혹되지도 않았어요. 저한테도 패괴 성품은 있지만, 저는 쭉 교회 환경에서 자랐고 비뚤어진 길에는 발도 들여 본 적이 없어요. 제 팔자는 정말 좋다니까요!” 이게 맞는 말이냐? (틀렸습니다.) 어떤 부분이 틀렸느냐? (그가 하나님을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것 또한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이며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입니다. 사람의 팔자가 좋은지 나쁜지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다. 정확히 핵심을 짚었다. 이는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이며,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고 안배하는 방식 중 하나이다. 이는 운명의 한 가지 형식이기에 팔자의 좋고 나쁨을 들어 평가할 수 없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자기는 크리스천 가정에서 태어나 팔자가 좋다고 했을 때 이 말을 어떻게 반박해야겠느냐? “당신이 크리스천 가정에서 태어나서 팔자가 좋다고 한다면 크리스천 가정에서 태어나지 못한 사람은 다 팔자가 안 좋은 것이 되겠군요. 그 말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안배한 운명이 나쁘다는 뜻이 아닌가요?” 이렇게 반박하면 되겠느냐? (맞습니다.) 이러면 옳게 반박한 것이다. 이렇게 반박하면 크리스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은 팔자가 좋다는 그의 말이 성립되지 않고, 진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된다. 이제 너희는 운명의 좋고 나쁨에 대해 조금 더 정확한 견해를 갖게 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운명을 믿는 일에 대해 어떠한 관점을 갖는 것이 가장 올바르고 적절하고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우선, 세인들이 보는 각도에서 운명의 좋고 나쁨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또한, 모든 인류 구성원의 운명이 하나님의 손으로 안배됨을 믿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손으로 안배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직접 안배하신다는 말인가요?”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안배하는 방식, 방법, 경로는 아주 다양하다. 영계에서 복잡하고 섬세한 일이 이뤄지지만,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대단히 복잡한 일들이 수반되기는 하나, 크게 보면 모두 창조주가 안배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안배 중 일부는 하나님이 직접 각 부류의 사람에게 안배하는 것이고, 일부는 하나님이 정한 규정, 행정 법령, 원칙, 제도에 따라 각 부류, 각 집단의 사람에게 저마다 다르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가 속한 유형에 따라서 하나님이 정해 준 운명의 궤적이 영계에서 다 안배되고 정해지면 사람이 태어난다. 여기에는 많은 세부 사항이 존재하지만, 전체적으로 말하면 모두 하나님이 주재하고 안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는 나름의 원칙, 법칙, 규율이 있다. 이는 좋고 나쁨과 관계가 없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모두 당연하며 인과가 있는 것이다. 사람이 운명을 어떻게 느끼는지 보자면 좋게 느낄 수도, 나쁘게 느낄 수도 있다. 순조로울 수도, 순조롭지 않을 수도, 평탄하지 못할 수도, 마음대로 안 될 수도 있겠지만, 좋고 나쁨을 따질 수는 없다. 사람은 어떤 태도로 운명을 대해야 하느냐? 창조주의 안배에 순응하고, 창조주가 이 모든 것을 안배한 목적이 무엇이며 그 의의가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열심히 구해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이 네게 안배해 준 일생에서 네 기능을 최대한 발휘하고 피조물의 본분, 책임, 의무를 다하며, 네 삶을 더욱 유의미하고 값지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창조주가 기쁘게 받아들이고 기억하게 해야 한다. 물론 네가 구하고 노력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장 좋다. 요컨대, 지음 받은 인류가 운명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는 함부로 평론하고 정의하거나 극단적인 방식으로 다루는 게 아니며, 반항하고, 선택하고, 바꾸려 드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마음으로 이해하고, 구하고, 모색하고, 순응한 다음 적극적으로 마주해야 하며,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이 배치한 생활 환경과 인생 여정 속에서 하나님이 네게 가르쳐 준 처신 방식을 구하고, 하나님이 네게 걸으라고 한 길을 구해야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네게 안배한 운명을 경험한다면 마지막에 너는 복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창조주가 네게 안배한 운명을 경험한다면 네가 맛볼 것은 슬픔, 근심, 눈물, 고통, 좌절, 실패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네가 기쁨, 평안, 위안을 체험하고 창조주가 베풀어 주는 진리상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체험하리라는 점이다. 또한, 인생길에서 네가 막막함을 느낄 때, 네가 좌절과 실패를 마주했을 때, 선택을 마주했을 때, 창조주의 인도를 체험하게 된다. 최종적으로 너는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유의미한가에 대한 인식과 경험, 이해를 얻는다. 그때가 되면 너는 살면서 더 이상 막막하지 않을 것이요, 더는 두렵고 불안한 나날을 보내지 않게 될 것이다. 물론 자기 운명이 안 좋다고 불평하지도 않을 것이며, 팔자가 나쁘다는 느낌 때문에 다시금 의기소침한 정서에 빠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만약 네가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이러한 방식으로 창조주가 네게 안배한 운명과 마주한다면 인성 방면에서 더 정상적으로 바뀔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상 인성, 정상 인성의 사유와 관점, 일을 바라보는 원칙도 생길 것이다. 당연히 이방인이 얻을 수 없는, 인생의 의의에 대한 견해와 인식도 얻을 것이다. 보아라, 이방인은 언제나 이런 말을 한다. “사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사람은 왜 사는가?” 반드시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의 최종 답안은 무엇이냐? 답은 없고 물음표 하나뿐이다. 답이 없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나마 조금 똑똑한 사람은 운명을 믿지만, 그런 이들도 운명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 운명 속에서 나타나는 갖가지 난제, 좌절, 실패, 유쾌하지 않은 일 등의 문제를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 혹은 운명 속에서 나타나 자기에게 행복감을 느끼게 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는 일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들 모두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른다. 언제는 자기 팔자가 좋다고 했다가, 또 언제는 자기 팔자가 안 좋다고 한다. 언제는 자기 삶이 행복하다고 했다가, 또 언제는 삶이 불운하다고 한다. 한 입으로 두말하는 것이다. 기분이 좋을 때 하는 말이 다르고 기분이 나쁠 때 하는 말이 또 다르다. 잘 풀릴 때 하는 말이 다르고 잘 풀리지 않을 때 하는 말이 또 다르다. 운이 없다고 불평하는 것도 본인이고 자기 팔자가 좋다고 하는 것도 본인이다. 이렇듯 그들은 뭐가 뭔지 잘 알지도 못한 채로 살아간다. 언제나 안갯속을 헤매느라 삶이 막막하고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떻게 운명을 올바르게 대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이러한 인생의 대사를 어떻게 마주할지, 이에 대해 사람은 뚜렷한 인식과 분명한 방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방면의 문제가 해결되면 기본적으로 운명에 대한 사람의 태도와 관점이 비교적 올바르게 자리 잡고, 진리 원칙에 부합하게 된다. 이 방면에서는 극단적으로 치달을 일이 없을 것이다.
조금 전 운명에 관해 교제한 것이 진리에 부합하느냐? (네.) 진리에 부합하는 말에는 어떠한 특징이 있는지 알고 있느냐? (듣고 나면 비교적 분명한 느낌이 들고 마음이 편안합니다.) (꽤 실제적이며 실행 길이 있습니다.) 그렇다. 꽤 실제적이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더 정확하게 말해 볼 사람이 있느냐? (현시점에 존재하는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이는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성과다. 실제적이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사람이 운명을 믿기는 하지만, 팔자가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하는 논조가 늘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깊은 내면은 해방되어 자유롭겠느냐, 아니면 결박당한 상태겠느냐? (결박당한 상태입니다.)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언제나 이러한 논조에 결박당하게 된다. 네가 진리를 깨달은 이후에는 실제적이고 길이 있다는 느낌 외에 또 무엇을 느끼겠느냐? (해방감입니다.) 그렇다. 자유로워지고 해방된다. 네게 실행 길이 생기고 더는 묶여 있지 않게 되면 네 마음이 해방과 자유를 얻지 않겠느냐? 치우치거나 터무니없는 관점이 네 생각을 결박하지 못하고 네 팔다리를 결박하지 못한다. 너는 실행 가능한 길을 얻고 더 이상 치우치거나 터무니없는 관점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사람의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교제를 들은 후, 너는 자유와 해방감을 느끼며 이렇게 말한다. ‘알고 보니 그런 거였구나! 어휴, 예전에 가지고 있던 운명에 대한 인식은 전부 치우치고 극단적인 거였어! 이제 알았으니까 팔자가 좋으니 나쁘니 하는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말 때문에 곤혹스러울 일도 없을 거야. 걱정도 사라졌어. 이걸 알지 못했다면 어느 순간에는 팔자가 좋은 것 같았다가 금방 또 나쁜 것 같고, 내 팔자가 도대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가 없어서 항상 고뇌하겠지.’ 이 방면의 진리를 깨닫고 나면 실행 가능한 길이 생긴다. 이 일에 대해 정확한 견해가 생기고 정확한 실행 길이 생긴다. 그러면 자유로워지고 해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하는 말이 과연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지, 진리가 맞는지 분별하려면 그의 말이 실제적인지 들어 봐야 한다. 또 한편으로는, 다 듣고 난 후 네 어려움과 문제가 해결되었는지 봐야 한다. 만약 해결되었다면 너는 자유롭고 해방된 느낌일 것이고, 홀가분한 기분이 들 것이다. 한 방면의 진리 원칙을 깨달을 때마다 그와 관련된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고 진리를 어느 정도 실행해 낼 수 있으며, 이는 너에게 해방감과 자유를 안겨 준다. 이러한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냐? (네.) 진리가 어떤 작용을 하는지 이제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진리는 어떤 작용을 하느냐? (사람의 마음에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줍니다.) 진리가 하는 작용이 딱 그것뿐이냐? 단지 그런 느낌이 전부냐? (주요하게는 사람의 내면에 존재하는 그릇되고 터무니없고 편향적인, 일을 바라보는 관점을 해결합니다. 사람에게 순수하고 올바르며 진리에 맞게 일을 바라보는 관점이 생기면 마음이 해방되고 자유로워집니다. 사탄에게서 비롯된 부정적인 것들에게 결박당하거나 교란당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자유로워지고 해방되는 것 외에, 핵심은 네가 해당 방면에서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더는 잘못되고 치우친 사상 관점에 얽매이거나 그것에 좌우되지 않는다. 그러는 대신 진리를 실행하는 원칙이 생기고, 그 방면에서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게 된다. 자기 팔자가 안 좋다는 생각 탓에 의기소침한 정서가 생긴 사람들의 모습에 관해서는 여기까지 교제하겠다.
의기소침한 정서를 일으키는 또 다른 원인은 자기 팔자가 그다지 나쁘지는 않지만, 늘 운이 나빠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행운의 신은 항상 나를 비껴간다.”라는 이방인의 표현처럼 말이다. 그는 자기가 가진 조건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키로 보나, 얼굴로 보나, 학력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무엇 하나 빠지지 않고 사역 능력도 좋다. 그런데 어째서 행운의 신은 항상 나를 돌봐주지 않는 것인가?’ 그는 이 점이 늘 불만이고, 자기는 언제나 운이 나쁘다고 생각한다. 대입 시험을 보던 해부터 이야기하자면, 간절한 바람을 안고 응시 원서를 냈으나 시험 당일 감기로 인한 고열 탓에 제대로 실력 발휘를 못 했고, 2~3점 차이로 대입에 실패하고 말았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운이 안 따라 줄 수가 있는가? 공부를 못한 것도 아니고 평소에 노력도 많이 했는데, 하필이면 다른 날도 아니고 대입 시험 날에 열이 나다니, 이건 운이 나빴던 거야. 하아! 인생의 첫 번째 중대사에서부터 좌절을 맛보았으니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앞으로는 부디 운이 좋기를 바랄 수밖에.’ 그러나 그 후에도 생활 속에서 갖가지 난관과 문제를 맞닥뜨린다. 한 예로, 직원을 모집한다는 곳이 있어서 막 지원하려는데 인원이 다 찼다며 필요 없다고 한다. ‘어쩌면 이렇게나 운이 안 좋을 수가 있는가? 왜 좋은 일은 항상 나를 비켜 가는가? 정말 운도 없지!’ 출근 첫날, 남들은 부장으로, 차장으로, 과장으로 승진한다. 자기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 봤자 소용없다. 다음 승진을 기다려야 한다. 일을 잘해서 상사에게 인정받고, 다음 승진은 드디어 자기 차례가 오겠구나 했더니, 난데없이 낙하산 부장이 내려오는 바람에 또 승진에서 제외되고 만다. ‘아아! 정말이지 운이 나쁜가 보다. 좋은 기회는 절대 내게 오지 않고, 행운의 신은 언제나 나를 돌보지 않는구나.’ 그 이후 하나님을 믿게 되는데, 글쓰기를 좋아해서 문서 본분을 이행하길 원하지만, 심사에서 실력을 제대로 보여 주지 못해 떨어진다. ‘평소에는 글을 잘만 쓰면서 왜 심사에서는 실력 발휘를 못 한 것인가? 하나님도 깨우쳐 주시거나 인도해 주시지 않는구나! 원래는 문서 본분을 이행하면 하나님 말씀을 많이 먹고 마시면서 진리도 많이 깨달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아쉽게도 운이 나빴어. 계획은 좋았지만, 이루지 못한 거야’. 어떤 일을 할지 고르고 고르다가 마지막에는 ‘복음팀에 가서 복음을 전하자.’라고 한다. 막 복음팀에 들어가서 처음에는 꽤 좋다고 생각한다. 드디어 자기 자리를 찾은 느낌이고 재능을 살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머리도 좋고, 사역 능력도 있고, 실제적인 일을 하고 싶은 의욕도 있다. 그리하여 노력 끝에 어렵사리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 책임자가 된다. 그런데 잘못을 하나 저질렀다가 리더에게 들켜 그렇게 하는 건 원칙을 어기고 교회 사역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란 소리를 듣는다. 책망 훈계가 임하자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오기 전에는 우리끼리 잘하고 있었어요. 당신이 오고서 처음으로 책망을 받아 본다고요.” 그는 생각에 잠긴다. ‘역시 내가 운이 안 좋은 거겠지?’ 얼마 후, 복음 사역에 변동이 생겨 인원 조정이 이루어진다. 그는 책임자에서 일반 구성원으로 조정되어 새로운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된다. ‘어휴, 승진은커녕 좌천됐어. 내가 오기 전까지는 조정도 없었다더니, 왜 내가 오니까 대규모 조정에 들어가는 거야? 이번 조정으로 발탁될 희망이 또 사라지겠네.’ 새로운 지역에 가 보니 교회도 적고, 인원도 적고, 사역을 펼치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 경험이 부족해서 한동안 모색할 시간이 필요하며, 말도 통하지 않는다. ‘이 일을 어쩌면 좋지? 본분을 팽개치자니 엄두가 안 나고, 잘해 내자니 어렵고 힘들 것 같다. 하아, 역시 난 운이 나빠! 운은 대체 어떻게 바꿔야 하지?’ 그는 여기까지 오는 내내 벽에 부딪쳤고, 줄곧 운이 안 따라 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 걸음 뗄 때마다 장애물을 만나는 탓에 쉽게 내디딘 걸음이 없었다. 가까스로 성과를 좀 내고 희망이 좀 보인다 싶으면 생각지도 못한 환경 변화가 찾아와 희망이 사라지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점점 의기소침해지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성과 좀 내서 인정받는 게 이렇게 힘들 일이야? 한 집단에서 안정적으로 자리 잡는 게 이렇게 힘들 일인가? 남들의 인정과 호감을 받는 사람이 되기가 왜 이렇게나 힘들지? 매사 원하는 대로 잘 풀리기가 왜 이렇게 힘들지? 살면서 생각대로 안 되는 일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삶이 왜 이렇게 험난하지? 왜 번번이 벽에 부딪치는 거야?’ 특히 어디에 배정되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해 교체되거나 도태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심리적으로 대단히 의기소침하고, 항상 자기가 운이 나쁘다고 생각한다. ‘내가 천리마이면 뭐 해. 그 사실을 알아볼 백락을 만날 수가 없는걸. ‘천리마는 많지만 백락은 흔치 않다.’라는 속담도 있잖아. 내가 바로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는 천리마야. 결국은 내 운이 나쁜 거지. 어디를 가도 성과를 내지 못하고 업적을 이루지 못해. 내 강점을 발휘하지도 못하고, 멋지게 실력을 보여 주지도 못하고, 바라는 대로 되는 게 없어. 어휴, 무슨 운이 이렇게 나쁘담! 어떻게 이럴 수 있지?’ 그는 항상 자기가 운이 나쁘다고 생각하며 매일 안절부절못한다. ‘어휴! 본분 조정하면 안 되는데.’ ‘어휴! 무슨 일 생기면 안 되는데.’ ‘어휴! 변동이 있으면 안 되는데.’ ‘어휴! 또 무슨 큰 문제가 터지면 안 되는데.’ 의기소침하기만 한 게 아니라 속으로 특히나 조마조마하고,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애를 태운다. 그는 항상 자기가 운이 나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면이 대단히 의기소침하다. 그 의기소침함은 운이 나쁘다는 그의 주관적인 느낌으로 인한 것이다. 그는 자기가 운이 나쁘고, 늘 발탁되지 못하며, 늘 팀장이나 책임자가 되지 못하고, 늘 앞에 나서지 못하고, 그러한 좋은 기회가 자기한테는 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는 도대체 어째서 그런 것인지 이해하지를 못한다. ‘나한테 특별히 부족한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어딜 가든 다들 못마땅하게 여기지? 누구한테 미움받을 짓을 한 적도 없고 누구를 못살게 굴 생각도 없는데, 어째서 운이 나쁜 거야?’ 항상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탓에 내면에서 의기소침한 정서가 시시각각 그에게 주의를 환기한다. ‘너는 운이 나쁘니까 의기양양하게 굴지 말고 오만 방자하게 굴지도 마. 두각을 나타내겠다는 생각을 버려. 너는 운이 나쁘니까 무슨 리더가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마. 너는 운이 나쁘니까 본분을 이행할 때 조심해야 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둬. 혹시라도 언젠가 드러나서 교체될 수도 있잖아. 혹시라도 누가 뒤에서 고자질하고 네 약점을 잡을 수도 있잖아. 항상 앞에 나서다가 혹시라도 뭔가 잘못해서 책망받을 수도 있잖아. 너는 리더가 되더라도 언제나 칼날 위를 걷듯이 신중하게 행동하고 조심해야 해. 설치지 말고 조용히 있어.’ 이러한 부정적 정서가 조용히 꼬리를 내리고 있으라며, 당당하게 처신하지 말라며 시시각각 그에게 주의를 환기한다. 운이 나쁘다는 생각이, 이러한 사상 관점 혹은 의식이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말고 나서지 말라며, 앞장서서 일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쭉 지금처럼 의기소침하게 있으며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엄두를 내지 말라며, 다들 한 방에 모였을 때도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앉고, 우쭐거리거나 설치지 말라며, 설쳤다가는 불운이 찾아올 거라며 시시각각 주의를 환기한다. 이렇게 의기소침한 정서가 언제나 곁을 맴돌기 때문에, 늘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의 주의를 환기하기 때문에, 그는 무슨 일을 하든 우물쭈물하고 조심스럽다. 가슴속에 언제나 불안감이 있고, 자기 자리가 정확히 어디인지 도통 찾지 못한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 자기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하건만 그러지 못한다. 그는 무언가를 경계하는 것 같고,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다. 불운이 찾아올까 봐 경계하고, 좋지 않은 운이 자기에게 나쁜 일과 모종의 곤란을 가져다줄까 경계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은 마음속으로 발버둥을 치는 것은 둘째 치고, 의기소침이라는 정서가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그의 방식과 방법을 주도한다. 그는 늘 운이 좋았는지 나빴는지로 자기 행동을 가늠하며, 자기가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옳은지 가늠한다. 그래서 자꾸만 의기소침한 정서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그가 말하는 소위 운이 나빴다고 하는 일들을 올바른 사상 관점으로 마주하지 못하며, 그리하여 이른바 ‘악운’을 처리하고 해결하지 못한다. 이러한 악순환 속에서 그는 내내 의기소침한 정서의 통제와 영향을 받는다. 어렵사리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에게 자기 내적 상태와 마음속 생각을 교제했다가도, 예배에서 형제자매가 교제한 말이 고의든 아니든 자기 내적 상태에 꼭 들어맞아 정곡을 찌르는 바람에 자기 체면과 존엄이 상하면, 전처럼 운이 나빠서라고 여긴다. ‘이것 봐. 어렵사리 속마음을 털어놨더니 약점만 잡혔잖아. 진짜 운도 없지!’ 그는 이게 바로 운이 안 좋은 것이며, 운이 안 좋은 사람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고 생각한다.
항상 자기 운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부류의 문제점은 대체 무엇이겠느냐? 그는 언제나 운이 좋은지 나쁜지를 기준으로 삼아 자기가 한 일의 옳고 그름을 가늠하고, 자기가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가늠하며, 마땅히 겪어야 할 일과 직면한 모든 문제를 가늠한다. 이것이 옳은 태도냐? (옳지 않습니다.) 나쁜 일은 재수가 없었다고 표현하고 좋은 일은 행운이라든지 이득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러한 관점이 옳은 것이냐? (옳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물을 가늠하는 관점은 틀린 것이다. 이는 극단적이고 올바르지 않은 가늠 방식이자 기준이다. 이러한 가늠 방식은 사람을 늘 의기소침하게 만들고 불안감을 느끼게 만든다.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일이 없고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안 된다는 생각에 그 사람의 심리는 항상 애타고, 초조하고, 불안하다. 이와 같은 부정적 정서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점점 더 의기소침한 상태에 빠져 하나님마저 자기를 돌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남은 선대하면서 자기는 선대하지 않고, 남은 보살피면서 자기는 보살피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이다. ‘왜 나는 항상 불안감을 느끼고 애가 타는 거지? 왜 나쁜 일은 꼭 나한테만 일어나지? 왜 좋은 일은 항상 내 몫이 아니지? 한 번쯤이라도 나한테 좋은 일이 일어나면 좋을걸!’ 이렇게 잘못된 사상 관점으로 일을 바라보면 너는 행운과 불운이라는 굴레에 얽매이게 된다. 이 굴레에 점점 더 단단히 얽매일수록 네 정서는 계속해서 의기소침해진다. 그렇게 계속 의기소침해지는 과정에서 너는 네게 닥친 일이 행운인지 불운인지에 대해 아주 민감해진다. 네가 그렇게 민감해졌다는 것은 이미 행운과 불운이라는 관점 혹은 논조에 지배당했다는 뜻이다. 그러한 관점에 지배당하면 네가 사람, 일, 사물을 대하는 관점과 태도가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의 범위를 벗어나 일종의 극단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극단에 빠지면 너는 의기소침한 정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복적으로 의기소침해진다. 평소에는 전혀 의기소침함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일단 무슨 일이 생기면, 불운한 일이 생겼다는 생각이 들면 너는 곧바로 의기소침해진다. 이러한 의기소침함은 네 정상적인 판단과 결단에 영향을 주고, 더 나아가 네 희로애락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네 희로애락에 영향이 가면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의지와 염원이 전체적으로 교란되고 파괴된다. 이렇게 긍정적인 것들이 파괴되면 네가 깨달은 얼마 안 되는 진리가 연기처럼 사라져 아무런 작용도 못 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악순환에 빠졌을 때 너는 네가 깨달은 얼마 안 되는 진리 원칙을 실행하기가 어렵다. 너는 행운이라고 느낄 때만, 의기소침한 정서에 억눌리지 않았을 때만, 가까스로 네가 하고 싶은 일에서 약간의 대가를 치르고 고생을 조금 한다. 아주 조금이지만, 진심이 있기는 있다. 그러다가 행운이 너를 떠나고 불운이 다시 네게 임했다는 느낌이 들면 의기소침한 정서가 빠르게 너를 다시 지배한다. 진심, 충성심, 그리고 고생하려는 의지가 그 즉시 너를 떠난다. 그러므로 자기가 운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 또는 운을 유달리 따지는 사람은 자기 팔자가 안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극단적인 정서를 가지고 있을 때가 많다. 특히 그들은 의기소침과 같은 부정적 정서에 잘 빠진다. 또한, 지극히 소극적이고 연약하며, 더 나아가 감정의 기복이 지나치게 큰 경우도 흔하다. 운이 좋다고 느낄 때, 그의 가슴은 기쁨으로 가득하고 온몸에는 힘이 넘친다. 고생하고 대가를 치를 수 있으며, 밤에 잠을 덜 자도 괜찮고 낮에 밥을 덜 먹어도 괜찮다. 그 어떤 고난도 마다하지 않고, 흥분하면 자기 목숨도 바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자기가 운이 나쁘다는 생각이 들고 하는 일마다 바라는 대로 되지 않으면, 의기소침한 정서가 바로 그의 마음을 점령한다. 그는 이전에 했던 맹세와 다짐을 몽땅 부정하고 대번에 바람 빠진 고무공처럼 맥을 추지 못하며, 진흙 덩어리처럼 축 처져서 아무 일도, 아무 말도 하려 하지 않는다. ‘무슨 진리 원칙, 진리 추구, 구원받는 것,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전부 나하고는 상관없어. 나는 운이 나쁘니까 진리를 얼마나 실행하든, 대가를 얼마나 치르든 소용없을 거야. 구원받지도 못할 거야. 다 끝장이라고. 나는 재수 없는 놈이고 불운한 인간이야. 될 대로 되라지. 어차피 난 운이 나쁘니까!’ 보아라, 언제는 터질 만큼 부푼 공 같더니 금방 또 바람 빠진 공처럼 된다. 아주 골치 아프지 않으냐? 그렇다면 어쩌다가 이렇게 골치 아픈 상황이 된 것이냐? 근원이 무엇이냐? 그는 언제나 자기 운세에 주목한다. 마치 주식 시장을 보듯이 상승하는지 하락하는지, 강세장인지 약세장인지, 불 마켓인지 베어 마켓인지 보면서 종일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는 운에 대해 유독 민감하고, 또 고집스럽기도 하다.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은 의기소침한 정서에 빠질 때가 많다. 자기 운세에 너무 관심이 많고 기분에 따라 살아가는 게 그 이유다. 아침에 깨서 기분이 안 좋으면 이렇게 생각한다. ‘어휴! 아마 오늘도 운이 안 좋겠어. 왼쪽 눈꺼풀이 며칠째 떨리고 혀도 굳은 느낌인 데다가 머리도 잘 안 돌아가는 것 같아. 밥 먹다가 혀를 깨물었고 밤에 좋은 꿈도 못 꿨어.’ ‘오늘 만난 사람의 첫마디가 아무래도 나쁜 징조인 것 같아.’ 종일 이것저것 의심하느라 제정신이 아니고, 그런 일만 연구한다. 그는 자신의 매일 또는 매 시기의 운세와 추세, 기분에 관심을 아주 많이 기울인다. 교회 형제자매 한 명 한 명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지, 어떤 태도로 대하는지 관찰하고, 심지어는 말투까지도 관찰한다. 그는 마음이 이런 것들에 점령당해 항상 의기소침하다. 자기 내적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진리를 구해 해결할 생각도 없다. 어떠한 패괴 성품을 드러내든 아랑곳하지 않고 별것 아니라는 듯 넘긴다. 이는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항상 운이 좋은지 나쁜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부류의 사람들이 일을 바라보는 관점은 과연 옳으냐? 운이 좋고 운이 나쁘다는 게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근거가 무엇이냐? (매일 만나는 사람들과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재하고 안배하신 것입니다. 운이 좋으니 나쁘니 하는 말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일은 일어나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고, 의의를 지닌 것입니다.) 맞는 말이냐? (맞습니다.) 이 말은 맞는 말이고, 이는 이론적 근거이다. 닥친 일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 모든 것은 정상이다. 각 계절의 날씨처럼, 매일이 맑은 날일 수는 없다. 너는 맑은 날만 하나님이 안배한 날이고 흐리거나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폭풍이 몰아치는 날은 하나님이 안배한 날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전부 다 하나님이 주재하고 안배한 것이며, 자연환경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자연환경은 하나님이 안배하고 제정한 법칙과 규율에 따라 생긴 것이다. 그 전부가 필요한 것이며,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날씨든지 자연법칙에 따라 생기고 나타나는 것이므로 거기에는 좋고 나쁘고가 없다. 그저 사람이 느끼기에 좋거나 나쁠 뿐이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거나 날이 흐리면, 더 나아가 우박이라도 오면 사람은 기분이 나빠진다. 특히 비가 와서 습한 날은 모두가 싫어한다. 그런 날은 관절이 아프고 몸에 기운도 없다. 하지만 네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비 오는 날은 운이 안 좋다고 말할 수 있느냐? 네 운이 좋고 나쁘고는 이 사실 자체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그저 날씨가 사람에게 불러일으키는 느낌일 뿐이다. 너는 맑은 날이 좋다고 한다. 그렇다면 석 달 내내 비 한 방울 내리지 않고 맑은 날씨가 이어진다고 치자. 사람은 좋다고 느낄 것이다. 매일 해를 볼 수 있고 가끔은 바람도 분다. 상쾌하고 따뜻해서 외출하고 싶으면 언제든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식물들은 견디지 못한다. 농작물이 말라 죽게 되고 그 해에는 수확할 게 없어진다. 네 기분이 좋다고 해서 그게 정말 좋은 일이라 할 수 있겠느냐? 가을이 되어 먹을 곡식이 없으면 너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휴, 맑은 날이 너무 오래 이어져도 안 좋네. 계속 비가 안 오면 농작물이 피해를 입고, 곡식을 수확하지 못하면 사람도 굶어야 해.” 그때가 되면 너는 항상 맑은 날인 것도 좋지는 않다고 느낀다. 좋다, 혹은 나쁘다는 사람의 느낌은 사실 자기 사심과 욕망에 기반한 것이요, 자기 이익에 따라 말하는 것이다. 사물 자체의 본질에 근거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떠한 일을 두고 좋으니 나쁘니 할 때, 그의 근거는 정확하지 않다. 근거가 정확하지 않기에 최종적으로 가늠된 결과도 정확하지 않다. 그리고 운이 좋으니 나쁘니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제 다들 운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고 좋고 나쁜 게 따로 없음을 알고 있다. 네게 임한 사람과 일, 사물은 좋든 나쁘든 모두 하나님이 주재하고 안배한 것이므로 올바르게 대해야 한다. 좋은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고, 좋지 않은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좋은 것이 임했다고 자기 운이 좋다고 할 수는 없으며, 좋지 않은 것이 닥쳤다고 해서 운이 나쁘다고 할 수도 없다. 어디에나 자기가 배워야 할 공과가 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사람은 이를 거절해서도 안 되고 도피해서도 안 된다. 좋은 것이 임하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좋지 않은 것이 닥쳐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안배한 까닭이다. 좋은 사람과 일, 사물, 환경에는 자신이 배워야 할 공과가 있기 마련이고, 좋지 않은 것에는 더더욱 자신이 배워야 할 공과가 있다. 전부 다 살면서 반드시 겪어야 할 체험이며, 빠뜨려서는 안 될 부분이다. 사람은 이를 운이라는 말로 가늠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일의 좋고 나쁨을 운으로 가늠하는 사람은 어떠한 사상 관점을 가진 것이냐? 그러한 사람의 본질은 무엇이냐? 그는 어째서 그렇게 운이 좋은지 나쁜지에 집중하는 것이냐? 운에 집중하는 사람은 자기 운이 좋기를 바라느냐, 안 좋기를 바라느냐? (운이 좋기를 바랍니다.) 그렇다. 사실 그는 자기가 운이 좋기를, 온갖 좋은 일이 다 자기에게 임하기를 추구한다. 자기만 실속을 차리고 이익을 얻으면 그만이요, 남들이야 어떤 고통을 받고, 어떤 고생을 하고, 어떤 어려움을 겪든 관심이 없다. 그는 자기가 생각하기에 재수 없는 일이 부디 닥치지 않기를 바란다. 나쁜 일은 하나도 닥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좌절, 실패, 난처함, 책망 훈계, 또는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손해를 보거나 사기를 당하는 등의 일은 닥치지 말라는 것이다. 만약 닥친다면 재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누가 안배한 일이든 간에 좋지 않은 일이 닥치면 곧 재수가 없다는 것이다. 반면 어디 발탁된다든지, 체면이 선다든지, 실속을 차린다든지, 이익을 얻는다든지, 큰돈을 번다든지, 높은 지위를 얻는다든지 등등의 좋은 일은 모두 자기에게 임해야 하며 이는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는 항상 운의 좋고 나쁨으로 자기에게 임한 사람과 일, 사물을 가늠한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나쁜 운이 아니라 좋은 운이다. 무언가가 조금이라도 자기 마음대로 안 되면 화를 내고 불만을 품는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부류는 이기적인 인간들이다. 자기 실속과 이익만 추구하고, 우위를 점하기를 추구하며, 체면을 세우기를 추구한다. 좋은 일은 자기가 혼자 다 차지해야 직성이 풀린다. 이것이 바로 그의 본성 본질이며, 진짜 모습이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수많은 좌절과 실패를 경험한다. 평생 모든 일이 만족스러운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실패와 좌절을 조금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때때로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나 좌절 또는 실패가 임하더라도 이는 운이 안 좋은 것이 아니라 네가 마땅히 경험해야 할 것이다. 사람이 음식을 먹을 때 신맛, 단맛, 쓴맛, 매운맛을 골고루 먹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은 소금 없이는 살 수 없기에 짠 것을 먹어야 한다. 하지만 너무 많이 먹으면 신장이 나빠질 수 있다. 어떤 계절에는 신 것을 먹어 줘야 하지만, 너무 많이 먹어서는 안 된다. 치아와 위에 좋지 않으므로 적당히 먹어야 한다. 신 것, 짠 것, 단것을 모두 먹고 쓴 것도 먹어야 한다. 쓴 음식은 인체의 특정 장기에 좋으므로 먹어 줘야 하는 것이다. 사람의 일생도 이렇다. 인생의 각 단계에서 경험하는 사람, 일, 사물 대다수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 어째서 뜻대로 되지 않느냐? 사람이 다른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만약 네가 명리, 지위, 돈을 추구하고 남들 위에 군림하거나 벼락출세 등등을 추구한다면 99%의 일은 네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운이 나쁘다느니, 재수가 없다느니 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말이다. 그러나 네가 운이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하는 말을 내려놓고 차분한 마음으로 이러한 일들을 올바르게 대할 수 있다면, 많은 일이 그렇게까지 뜻대로 안 되거나 대처하기 힘든 것만은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네 야심과 욕망을 내려놓으면, 어떠한 불행이 닥쳐도 거부하거나 도피하지 않는다면, 운이 좋고 나쁨으로 이러한 일을 평가하지 않으면, 예전에 불행하거나 나쁘다고 생각했던 수많은 일들을 이제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나쁜 일이 좋은 일로 바뀌고, 네가 일을 바라보는 관점과 네 심리 상태가 바뀌면서 너는 인생에서 다른 체험을 하게 되는 동시에 다른 수확을 얻게 된다. 이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체험으로, 네게 생각지도 못한 수확을 안겨 준다. 그것은 나쁜 일이 아니라 좋은 일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항상 높이 평가받고, 발탁되고, 칭찬과 격려를 받고, 형제자매들의 지지도 많이 얻어서 남들로부터 부러운 시선을 받는다. 이것이 좋은 일이냐? 그게 다 운이 좋아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봐요. 저 사람은 자질이 있고 타고나길 복 있게 생긴 데다가, 타고난 것 외에도 자기가 능력을 잘 발휘해요. 게다가 좋은 기회를 만나 발탁됐으니 운이 정말 좋네요!”라며 부러워서 어쩔 줄을 모른다.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은 교체되어 일반 신자가 되고, 울며불며 자살하겠다고 하다가 며칠 만에 제명된다. 이는 운이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 이렇게 보면 그는 운이 너무나 나쁘다. 그의 운이 나쁜 것이 맞느냐? (아닙니다.) 사실 그는 운이 나쁜 것이 아니라 올바른 길을 걷지 않은 것이다. 남들이 운 좋다고 하는 일들이 올바른 길을 걷지 않은 그에게 임해서는 시험이 되고, 함정이 되고, 촉매제가 되어 그의 멸망을 앞당겼다. 이것이 좋은 일이냐? 언제나 발탁되기를, 남보다 뛰어나기를,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모든 일이 잘 풀리고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랐지만, 결국에는 어떻게 되었느냐? 도태되지 않았느냐? 사람이 올바른 길을 걷지 않으면 이런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운이 좋기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올바른 길이 아니다. 운을 추구하는 사람은 좋지 않은 일, 사람이 보기에 뜻대로 되지 않는 일, 사람이 보기에 마음에 들지 않고 육적인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일은 모조리 거부하고 회피하기 마련이다. 그는 이러한 일이 닥치는 것을 겁내고, 피하고, 거부한다. 일이 닥치면 ‘재수 없다’라고 표현한다. 스스로 재수가 없다고 생각할 때, 그가 진리를 구할 수 있겠느냐? (구할 수 없습니다.) 진리를 구하지 못하면서 항상 자기가 재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겠느냐? (걸을 수 없습니다.) 걸을 수 없을 것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항상 운을 추구하고, 운과 씨름하고, 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사람은 올바른 길을 걷는 사람이 아니다. 이런 사람은 본연의 일을 하지 않고 올바른 길을 걷지 않아 언제나 의기소침한 상태에 빠진다. 이는 자업자득이고, 당연한 것이다! 그가 올바르지 못한 길을 걸은 것을 어떡하겠느냐? 그가 의기소침한 정서에 빠지는 것도 마땅하다. 그렇다면 의기소침한 정서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쉬운 일이냐? 사실은 쉽다. 자신의 잘못된 관점을 내려놓는 한편, 매사 잘 풀리고 뜻대로 이루어지고 순조롭기를 추구하지 않으면 된다. 또, 순조롭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겁내고, 반발하고,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반발심을 내려놓고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순종하는 태도로 하나님이 안배한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소위 말하는 ‘행운’을 추구하지 말고, 소위 말하는 ‘액운’을 거부하지도 말고, 자기 마음과 전 존재를 하나님께 맡겨 하나님이 행하고 지배하게 두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네게 필요한 것을 제때 네게 필요한 만큼 베풀어 줄 것이다. 하나님은 네게 필요하고 네게 부족한 것에 따라 네게 필요한 환경과 사람, 일, 사물을 배치하여 네가 자신에게 임한 사람, 일, 사물로부터 마땅히 배워야 할 공과를 배우도록 할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의 전제 조건은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는 네 심리 상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완벽을 추구하지 마라. 뜻대로 되지 않는 일, 난처한 일, 순조롭지 않은 일이 생기는 것을 거부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 또, 이렇듯 의기소침한 정서를 가지고서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에 대해 마음속 깊이 반발심을 느끼지도 마라. 예를 들어, 노래하는 사람이 어느 날 목 상태가 좋지 않아 실력 발휘를 제대로 못 했다고 치자.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어휴, 운도 없지! 하나님께서는 왜 내 목을 지켜 주시지 않는 거야? 평소에 혼자 부를 때는 잘했는데, 오늘 남들 앞에서는 체면을 구겼어. 음 이탈이 나고 박자도 못 맞췄으니 이게 무슨 망신이람!’ 망신당한 것은 좋은 일이다. 네 부족함과 허영심을 알게 하고, 너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게 하며, 너 자신이 완벽한 사람이 아님을 똑똑히 알게 한다. 완벽한 사람은 없고 망신을 당하는 것은 정상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망신당할 때가 있고, 난처할 때가 있다. 사람이라면 모두 실패할 수 있고, 좌절을 겪을 수 있으며, 사람이라면 누구나 연약한 부분을 가지고 있다. 망신당한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다. 네가 망신을 당하고도 창피함을 느끼지 않고 마음이 의기소침해지지 않게 된다면, 이는 네 낯이 두꺼워졌다는 것이 아니라 망신당한 일이 네 평판에 끼칠 영향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고 네 허영심이 더는 네 마음을 점령하지 않는 것이며, 네 인성이 성숙해졌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좋으냐! 이는 좋은 일이 아니냐? 이는 좋은 일이다. 실력 발휘를 못 했다고, 운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마라. 객관적인 이유를 찾지 마라. 전부 정상이다. 너도 망신을 당할 수 있고, 그도 망신을 당할 수 있고, 모두 망신을 당할 수 있다. 결국에는 누구나 똑같음을, 다들 보통 사람이고 평범한 사람임을, 남보다 대단한 사람도 없고 남보다 나은 사람도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다들 망신당할 때가 있으니 누구도 다른 사람을 조롱해서는 안 된다. 수많은 실패를 경험하면서 인성은 점점 성숙해지고 노련해진다. 비슷한 일이 다시 닥쳤을 때 너는 거기에 구애받지 않으며,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데에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너의 인성이 정상이 되고, 인성이 정상이 되면 이성도 정상이 된다.
운을 추구하는 부류의 사람들은 모두 현생의 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고 극단으로 달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잘못된 것을 추구하고 있으니 그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조금 전에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그러한 일을 어떻게 올바르게 대할지를 교제했는데, 이해했느냐? 뭐라고 교제했느냐? (하나님의 지배 일체에 순종하고, 완벽한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지 말고, 난처한 일이나 순조롭지 않은 일이 생길 것을 겁내지 말고, 그러한 일이 생길 때 의기소침한 정서로 반발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그 모든 것을 올바른 심리 상태로 대해야 한다.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 올바른 방식으로 대하고 해결해야 한다. 잘 처리하지 못하더라도 의기소침한 상태에 빠져서는 안 된다. 실패했다면 다시 하면 된다. 실패는 기껏해야 한 차례 교훈에 불과하다. 반발심을 갖고, 대적하고, 거부하고, 회피하는 것보다는 실패가 낫다. 그러니 어떤 일이 닥치든, 네가 미래에 직면해야 할 것이 무엇이든, 거부하거나 도피해서는 안 되며, 운의 좋고 나쁨이라는 관점에서 그것을 판단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지배된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운이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하는 관점과 심리 상태로 모든 일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좋지 않은 일이 생기는 것을 거부해서는 더더욱 안 되며, 좋지 않은 일을 의기소침한 정서로 대하는 것도 당연히 안 된다. 응당 적극적인 태도와 긍정적인 마음으로 그러한 일들을 맞이하고 대해야 하며, 거기에서 어떠한 공과를 배우고 어떠한 인식을 얻어야 할지 살펴봐야 한다. 이것이 네가 할 일들이다. 이러면 네 사상 관점이 올발라지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네게 좋지 않은 일이나 불행한 일이 또다시 생겼을 때는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대할 수 있을 것이다. 네게 올바른 사상 관점이 생기고, 그러면 네 인성과 이성도 정상이 된다. 이를 통해 볼 때 사람이 올바른 관점을 갖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니겠느냐? 하나님 말씀에 따라 운명을 밝히 아는 것이 관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로써 운이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하는 말에 대해서는 충분히 교제했다. 다들 이해했느냐? (네.) 이런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다면 운명에 대해 올바른 관점이 생길 것이다.
의기소침한 정서에 빠지는 데는 또 하나의 원인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성인이 되기 전 또는 성인이 된 이후에 특수한 일을 겪었다. 바로 어떠한 과오를 범했거나 어리석은 일, 우매한 일, 무지한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리고 그 과오, 어리석은 일, 무지한 일 때문에 의기소침한 상태에 빠진다. 그들의 의기소침함은 자신을 정죄하는 것인 동시에 자신이 어떤 사람임을 규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과오는 단순히 욕을 한마디 한다거나 뒤에서 남의 험담을 하는 등의 사소한 일이 아니라 염치, 인격, 존엄, 심지어는 법률에 관계된 일이다. 그 일을 끊임없이 회상하는 과정에서 의기소침한 정서가 마음속 깊은 곳에 조금씩 누적되며 지금까지 왔다. 그러한 과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조금 전에 말했듯이 성인이 되기 전 또는 성인이 된 이후에 저지른 무지한 일, 어리석은 일, 우매한 일들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일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아느냐? 어리석고, 우매하고, 무지한 일에는 남에게 손해를 끼치면서 자기 이익을 챙기는 일, 입에 담기도 거북한 일, 남 보기가 부끄러운 일이 포함된다. 어쩌면 아주 더럽고, 비열하고, 질 낮고, 천박한 일일 수 있다. 그렇기에 사람을 의기소침한 정서에 빠뜨리는 것이다. 그 의기소침한 정서는 단순한 자책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일종의 정죄다. 내가 말한 범위 내에서 생각나는 일이 있느냐? 예를 들어 보아라. (음란한 측면의 일이 있습니다.) 음란도 그중 한 측면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은 정신적 혹은 육체적으로 아내나 남편을 배신한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은 간음하고 음란한 행동을 저지른 뒤에 단념하지 못하고 늘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둔다. 어떤 사람은 남의 돈을 사취한 적이 있고 심지어 그 액수가 거액에 달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남의 물건을 훔친 적이 있다. 또, 어떤 사람은 과거에 남을 모함하거나 남에게 보복한 적이 있다. 이러한 일 중 일부는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 있고, 일부는 위법에 해당하며, 일부는 도덕과 부도덕의 경계에 있고, 일부는 정상 인성의 윤리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런 일들은 사람 내면의 기억 속에 묻혀 있다가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른다. 혼자 있기만 하면, 고요한 한밤중에 잠이 안 올 때면, 자기도 모르게 떠올리게 된다. 마치 영화가 상영되듯 한 장면 한 장면이 머릿속에 재생되며, 지워 버릴 수도, 떨쳐 낼 수도 없다. 매번 떠오를 때마다 의기소침해지고, 얼굴이 화끈거린다. 심장이 떨리고, 곤혹스럽고, 마음도 불안해진다. 하나님을 믿게 되었어도 자기가 저지른 일이 마치 어제 일처럼 느껴지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칠 수도, 숨을 수도 없으며,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그 일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도, 혹은 아무도 모른다고 해도, 네 마음속 깊은 곳에는 어렴풋한 불안감이 존재한다. 그 불안감 때문에 의기소침한 상태가 생기고, 그런 의기소침한 상태는 네가 하나님을 따르고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참소를 느끼게 한다. 참소가 양심에서 비롯됐는지, 법률에서 비롯됐는지, 아니면 도덕과 윤리에서 비롯됐는지는 너 자신도 딱 잘라 말하지 못한다. 아무튼 그러한 일들을 저지른 적이 있는 사람들은 흔히 무심결에, 혹은 어떠한 특수 상황이 발생했을 때 특수한 환경 배경 속에서 불안감을 느낀다. 이 불안감으로 인해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극도로 의기소침한 상태에 빠지며, 의기소침한 상태가 그를 결박하고 제약한다. 설교를 듣거나 진리를 교제할 때마다 머릿속에서, 마음 깊은 곳에서 의기소침함이 서서히 고개를 든다. 그러면 그는 자신을 이렇게 힐책한다. ‘내가 할 수 있겠어? 내가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겠어? 내가 구원받을 수 있겠어? 내가 어떤 인간인데? 과거에 그런 짓을 했으니, 그런 인간이었으니 나는 구제 불능인 게 아닐까? 하나님께서 과연 나를 구해 주실까?’ 때로 어떤 사람들은 의기소침한 정서를 버리고 거기서 벗어나 본인의 진심과 본인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서 본분, 의무, 책임을 다하며, 더 나아가 몸과 마음 전부를 바쳐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 말씀에 공을 들이기도 한다. 그러나 일부 특수한 환경과 배경이 임했다 하면 그런 의기소침한 정서가 다시 우위를 점하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렇게 참소한다. ‘너는 그런 짓을 했었잖아. 과거에 그런 인간이었잖아. 네가 구원받을 수 있겠어? 네가 진리를 실행한들 소용이 있을까? 네가 저지른 그 일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실까? 네가 한 짓을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실까? 네가 이렇게 대가를 치른다고 해서 예전에 범한 과오를 만회할 수 있을까?’ 그의 내면 깊은 곳에는 늘 자책과 참소가 존재하며, 의문과 힐책이 떠나지 않는다. 그는 시종일관 의기소침한 정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기가 저지른 추악한 일 때문에 언제나 내면이 불안하다. 그 때문에 그는 하나님을 몇 년이나 믿었음에도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는지 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구원받는 일이 자기와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자기가 과연 사함과 구속을 받을 수 있을지, 자기한테 과연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고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지, 그는 하나도 알지 못한다. 답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확실한 정론이 없기 때문에, 그의 깊은 내면은 항상 의기소침하다. 그는 마음속으로 자기가 과거에 저지른 짓을 한번 또 한번 떠올리고, 반복적으로 머릿속에서 재생한다. 그 일의 경과를 회상하고, 그 일의 전후를 회상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항상 죄악감이 든다. 그 일 때문에 수년간 시종일관 의기소침한 상태다. 본분을 이행하고 어떤 일의 책임자가 돼도 자기는 구원받을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진리 추구를 무엇보다 올바르고 중요한 일로 생각하고 직시한 적이 없다. 그는 자기가 과거에 범한 잘못, 혹은 자기가 저지른 일이 대부분의 사람이 보기에 몹시 안 좋거나 남들에게 정죄와 버림을 받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도 자기를 정죄하리라 여긴다. 하나님의 사역이 어느 단계까지 진행됐든,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말씀을 했든, 그는 줄곧 진리를 추구하는 일을 올바르게 마주하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이냐? 의기소침한 상태에서 벗어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그런 일을 체험한 뒤에 최종적으로 얻는 결론이다. 그는 올바른 결론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의기소침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크고 작은 과오를 범한 사람들이 많을 테지만, 심각한 과오 또는 도덕적 마지노선을 넘어서는 과오를 범한 사람은 얼마 안 될 것이다. 크고 작은 과오를 범한 사람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고 심각한 과오, 도덕적 마지노선과 윤리에서 벗어난 과오를 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그것만 이야기하겠다. 심각한 과오를 범한 사람들에 관해 내가 말하는 것은 도덕적 마지노선을 넘어선 과오인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성품과 행정 법령을 거스른 것과 관련이 없다. 알겠느냐? 나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를 거슬렀다고 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모독했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도덕적 마지노선이라는 범위를 벗어난 경우만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과오를 범한 사람이 어떻게 하면 의기소침한 정서에서 헤어 나올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이 걸을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로, 아주 간단한 문제다. 우선, 네가 과거에 저지른 일을 마음속에서 내려놓을 수 있다면, 혹은 상대에게 사과할 기회가 있다면, 상대에게 보상할 기회가 있다면, 가서 상대에게 보상하고 사과함으로써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얻어라. 그럴 기회도 없고 그럴 여건도 되지 않는데 자기에게 문제가 있음을 정말 마음 깊이 깨달았고, 자기가 저지른 일의 성질이 얼마나 심각한지 인식했고, 진정으로 통회한다면, 하나님 앞으로 나와 죄를 인정하고 회개해야 한다. 매번 그 일이 떠올라 마음에 참소가 있을 때가 바로 네가 하나님 앞으로 나와 죄를 인정하고 회개할 때다. 너는 반드시 진심과 진정을 다해 하나님으로부터 사함 받고 용서받아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사함과 용서를 받을 수 있느냐? 이는 네 마음에 달렸다. 네가 진심으로 죄를 인정하고, 자기 잘못과 문제점을 진실로 깨닫는다면, 네가 범한 과오가 됐든 죄업이 됐든, 그 죄를 진실로 인정하는 태도가 네게 있고 네가 정말 그 일을 증오하고 돌아설 의사가 있고, 앞으로 다시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면, 언젠가는 하나님에게 관용과 용서를 받을 수 있다. 즉, 하나님이 네가 과거에 범한 무지하고, 어리석고, 더러운 일을 바탕으로 네 결말을 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정도가 되면 하나님은 네가 저지른 일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다. 너도 다른 정상인과 다를 게 없어진다. 단, 전제는 네게 반드시 진심이 있어야 하며 진정한 태도로 회개해야 한다는 점이다. 마치 다윗처럼 말이다. 다윗은 자기가 범한 과오 때문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느냐? 그 양을 헤아릴 수 없다. 몇 번이나 울었느냐?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흘린 눈물을 한마디로 형용하자면 ‘침대가 눈물에 뜰 정도였다’. 네 과오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몰라도 만약 지나치게 심각하다면 너 역시 침대가 눈물에 뜰 만큼 울어야 할 수도 있다. 그 정도로 죄를 인정하고 회개해서 하나님에게 용서받아야 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네 과오는 하나님이 보기에 죄업이 될 테고, 사함 받을 수 없게 된다. 그러면 너는 심각한 상황에 봉착한다. 나머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함과 용서를 얻는 첫 단계는 바로 네가 진심을 갖추고, 진실로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실제적 행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다른 사람들이 알게 할 필요는 없을까요?” 그럴 필요는 없다. 너 스스로 하나님에게 기도하면 된다. 불안감이 느껴지고 마음에 참소가 있을 때마다 즉시 하나님 앞으로 나와 기도하고 하나님에게 용서받아라.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기도를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셨는지 알 수 있나요?” 그 일이 더는 너를 참소하지 않고 네 내면이 더는 그 일로 인해 의기소침해지지 않는다면 결실을 본 것으로, 하나님이 너의 죄를 사하였음이 증명된 것이다. 그 누구도, 그 어떤 힘도, 그 어느 외부 세력도 너를 방해하지 못하고, 네가 그 어떤 사람, 일, 사물에도 구애받지 않는다면 결실을 본 것이다. 이것이 네가 첫 단계로 해야 할 일이다.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에게 사함 받기를 부단히 간구하는 동시에, 본분을 이행하면서 반드시 준수해야 할 원칙을 적극적으로 구해야 한다. 그래야만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다. 물론 이는 네 과오를 만회하고, 네가 회개하고 돌아섰음을 증명하는 일종의 실제적 행동이자 실제적 모습이고 태도이기도 하다. 이는 네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이 네게 맡긴 부탁과 네 손에 맡겨진 본분을 어떻게 이행하고 있느냐? 의기소침한 태도로 대하고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이 네게 요구하는 원칙대로 대하고 있느냐? 너는 충성심을 바쳤느냐? 하나님이 무엇을 근거로 네 죄를 사해야겠느냐? 네게 회개하는 태도가 있었느냐? 네가 무엇을 보여 줬느냐? 하나님에게 사함 받고 싶다면 우선 네 진심을 꺼내 보여야 한다. 한편으로는 성실하게 죄를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진심을 보이며 네 본분을 잘 이행해야 한다. 그러지 않는 경우는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 두 가지를 해낸다면, 정말 네 진심과 성의로 하나님을 감동시켜 네 죄를 사해 주도록 한다면, 너도 남들과 다를 것이 없어진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을 보는 관점으로 너를 볼 것이요,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으로 너를 대할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행하는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을 네게도 행하고, 너를 불공평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네게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와 염원이 생길 뿐만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똑같은 방식으로 너를 깨우치고, 인도하고, 너에게 공급할 것이다. 당연하게도 네게 이러한 진심과 간절한 태도가 생겼으니 하나님이 너를 불공평하게 대할 리가 없다. 너도 다른 사람들처럼 구원받을 기회를 얻을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심각한 과오를 범한 것은 특수한 경우다. 무서운 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이는 아주 엄중한 문제다. 일반적인 패괴 성품이나 일부 올바르지 않은 사상 관점과 달리 이는 확실히 일어난 일이고, 이미 사실이며, 심각한 결과를 낳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은 특수하게 대해야 한다. 단, 특수하게 대하든 정상적으로 대하든 양쪽 다 실행 가능한 길과 해결할 방법이 있다. 관건은 네가 과연 내가 가르쳐 주고 알려 준 방식과 방법대로 실행할 수 있는지 여부다. 만약 네가 정말 그 방법대로 실행한다면 네가 최종적으로 구원받을 가능성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진다. 물론 이 모두를 해결하는 목적이 단지 사람을 의기소침한 정서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것만은 아니다. 최종 목적은 의기소침한 정서를 해결함으로써 사람에게 어떠한 사람, 일, 사물이 임했을 때 그가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 범위 내에서 그 모든 것을 올바르게 대할 수 있도록 하고, 극단적이거나 고집스럽게 굴 게 아니라 한층 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진리를 구하며, 피조물이 응당 다해야 할 책임과 본분을 다하게 하고, 최종적으로는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실제에 진입하면 사람이 차츰 구원받는 길을 가게 되고, 그러면 구원받을 희망이 생긴다. 이제 심각한 과오로 인해 생겨난 의기소침한 정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그 방법이 분명해지지 않았느냐? (네.)
의기소침한 정서를 해결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냐, 아니냐? 나는 꽤 어렵다고 생각한다. 인생의 중대사와 연결되고, 하나님을 믿으며 걷는 길과 연결되고 훗날 구원받을 수 있을지, 헛되이 믿게 되지 않을지와 관계되기 때문이다. 이는 중대한 일이다. 표면적으로 사람이 드러내는 것은 일종의 정서일 뿐이지만, 사실상 그 정서가 생겨난 데는 근원이 있다. 갖가지 근원에 대해서 오늘 명확히 교제했고, 근원 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생겼다. 그러면 의기소침한 정서가 자연스럽게 해결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론적으로는 해결됐다. 도리를 깨닫고, 도리를 자기가 했던 일과 대조해 보고, 그 도리를 근거 삼아 점진적으로 생활 속의 어려움과 사상 방면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그 길을 꿋꿋하게 걸어간다면 점차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 들어서게 된다. 이렇게 문제를 해결하면 어떠하냐? (좋습니다.) 바로 이렇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렇게 해결하지 않으면 사람 안에 복잡하게 얽힌 문제들, 즉 사상, 마음, 정신상의 문제에 패괴 성품이 더해져 그런 것들이 사람을 단단히 결박한다. 그렇게 결박당하고 얽매인 사람은 언제나 고되고 피곤하게 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끝까지 출구를 못 찾는다. 오늘 교제한 내용을 다 듣고 나서 다시 자세히 되새기고, 도리를 깨달은 후에는 일상생활에서 실제로 경험하고 체험하여 소극적인 정서와 패괴 성품의 각종 내적 상태에서 점차 벗어나야 한다. 거기서 벗어나면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얻고 진리 실제에 진입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네가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얻고 진리 실제를 살아 낼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면 너는 대단히 쓸모 있는 사람이 된다. 네 삶에 가치가 생긴다. 너희도 이렇게 살고 싶으냐? (그러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를 원한다. 육적인 부정적 정서와 육적인 정욕, 세상의 풍조, 패괴 성품 안에서 살기는 대부분 원하지 않는다. 그런 삶은 너무 고되고 피곤하다. 패괴된 성품 안에서, 부정적인 정서 안에서 살며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겠느냐? 부정적 정서 안에서 사는 것은 곧 사탄의 권력 아래에서 사는 것이다. 마치 고기 분쇄기 안에서 사는 것과도 같아서, 언젠가는 갈려 죽게 된다. 빠져나오고 싶어도 쉽지 않다. 하지만 네가 만약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곤혹에서, 고통에서 벗어날 희망이 생긴다. 부정적 정서에 얽매이고 그것 때문에 곤혹스러워지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원래는 한 가지 화제를 더 교제하려고 했으나 의기소침이라는 화제를 교제하는 데에 이렇게나 많은 시간을 썼다. 어떤 종류의 일이든 많은 세부 사항이 있기에 몇 마디 말로 다 밝히 설명할 수는 없는 법이다. 어느 방면의 일을 이야기하든 도리만 명확히 알려 줬다고 끝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많은 방면의 진리와 실정이 관계되어 있고, 사람의 사상 관점이며 처신 방식과 방법, 사람이 걷는 길도 관계되어 있다. 이는 모두 너희가 구원받는 것과 관계가 있다. 어떤 진리나 어떤 화제를 교제하든 대충 할 수는 없기에 갖은 궁리를 하면서 마치 수다쟁이 할머니처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여러 번 되풀이하고 있다. 성가시다거나 장황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어떤 화제는 이미 한 번 이야기한 것 같은데 이번에 왜 또 이야기하느냐? 이미 했던 이야기여도 한 번 더 들으며 복습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결론적으로 진리와 관련된 일, 사람이 걷는 길과 관련된 일은 모두 진지하게 대해야지 대충 대해서는 안 된다. 내가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할수록 너희는 여러 진리 사이의 관계와 세부적인 차이, 연관 등을 더욱 세부적으로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두리뭉실하게 말한다면, 개괄적인 것만 이야기한다면 너희는 깨닫고 진입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너희 스스로 묵상하고 모색하기란 힘들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 이야기한 화제들, 즉 운명과 운, 그리고 사람이 예전에 범했던 특수한 과오로 인해 생겨난 부정적 정서 같은 것들은 너희가 생각해 낼 수 없는 것들이다. 생각해 낸다고 해도 출구를 찾지 못한다. 너는 그 안의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특수한 과오라는 문제에 대한 올바른 답안을 영원히 얻지 못한다. 네게 있어 이 문제는 영원한 수수께끼고, 줄곧 너를 괴롭히고 옭아매며, 네 마음 깊은 곳에 평화와 기쁨, 자유와 해방감이 자리 잡지 못하게 한다. 어쩌면 네가 그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올바른 방법을 갖추지 못한 점 때문에 네가 구원받는 것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결국 어떤 사람들은 버려지고 도태된다. 어째서냐? 그가 예전에 입에 담기 힘든 일을 저질렀고, 스스로 적절하게 처리하지 못했으며, 사함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마음이 항상 그 일에 얽매여 있어 진리를 추구할 생각이 없었고, 본분을 이행할 때도 건성으로 했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했으며, 스스로 자기는 진리를 추구해 봤자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끝까지 그렇게 소극적인 관점을 가진 채 체험 간증을 이야기하지도 못했고, 진리를 얻지도 못했다. 그때야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러니 이러한 일들이 진리에 관계되고 구원받는 데에 관계된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러한 일이 네게 없다고 해서, 그에게 없다고 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없다고 해서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착각하지 마라. 하나 알려 주겠다. 어쩌면 네가 떳떳하지 못한 일을 저지른 적이 있지만 아직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어쩌면 너는 과거에 부정적 정서에 빠졌었거나 지금 이미 부정적 정서에 빠져 있지만 네가 알아차리지 못했거나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정말로 일이 터지면 그러한 정서가 네게 심각한 영향을 끼치고 엄중한 결과를 가져온다. 너는 깊이 성찰해야 비로소 네가 이미 부정적 정서에 빠진 지 수년 또는 더 오래됐음에도 모르고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일은 사람이 부단히 묵상하고, 반성하고, 인식하고, 체득하고, 경험해야만 차츰 발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결국에 이를 발견하는 것은 네게 있어 대단히 좋은 소식이고 구원받을 절호의 기회다. 네가 발견하게 될 때가 네가 벗어날 기회 혹은 벗어날 희망이 있게 될 때이다. 그럼 오늘 한 말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 어떤 진리든, 그 어떤 내용이든, 그 어떤 말이든 사람이 하루 이틀 만에 완벽히 이해하거나 체험할 수는 없는 법이다. 진리와 관계된 이상 곧 인성과 관계되고, 사람의 패괴 성품과 관계되고, 사람이 걷는 길과 관계되고, 사람이 구원받는 것과 관계된다. 그러므로 단 하나의 진리도 소홀히 하지 말고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 당시에는 이 진리를 깨닫지 못했고 이 진리에 근거해 자기한테 어떤 문제가 있는지 성찰하지 못했더라도, 몇 년 후에는 이 진리가 너를 패괴 성품의 통제에서 벗어나도록 구원해 줌으로써 너를 구원하는 귀한 진리가 될 수도 있다. 그때가 되면 이런 진리가 올바른 인생길을 걷도록 너를 인도할 것이며, 8년, 10년 정도 지나면 이런 말이, 이런 진리가 네 사상 관점을 완전히 바꿔 놓고 네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완전히 바꿔 놓을 수도 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교제하자. 다음에 보도록 하자!
2022년 10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