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참된 회개로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얻다(4)

2017.09.29

인류에 대한 창조주의 진심

사람들은 늘 하나님을 아는 것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나는 하나님을 아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항상 자신의 행사를 나타내어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류와의 대화를 멈춘 적이 없고, 인류를 피해 숨거나 감춘 적도 없으며, 그의 마음과 생각, 말씀과 행사를 인류에게 다 공개하였다. 그러므로 인류가 하나님을 알고자 하기만 한다면 다양한 경로와 방식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 가고 이해할 수 있다. 인류는 늘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인류를 피하고 숨는다고, 사람이 그를 알아 가고 이해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여긴다. 하지만 그것은 인류가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하나님을 알고자 하지 않으며, 더욱이 창조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말씀하고 무엇을 행했는지 등등에 대해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틈날 때만이라도 창조주의 말씀이나 행사에 관심을 두고 알려고 하고, 창조주의 생각과 마음의 소리에 조금이라도 주의를 기울인다면, 창조주의 모든 생각과 말씀과 행사가 공개적이고 투명하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창조주가 항상 인류와 함께 있고, 만물, 그리고 인류와 대화하고 있으며, 매일같이 새로운 행사를 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의 본질과 성품은 인류와의 대화에서 나타나고, 그의 마음과 생각은 그의 행사에서 남김없이 드러난다. 그는 언제나 인류와 함께하며 인류를 관찰하고, 소리 없는 언어로 조용히 만물과 인류에게 알려 준다. ‘나는 하늘 위에 있다. 나는 만물 가운데 있다. 나는 수호하고 있다. 나는 기다리고 있다. 나는 바로 네 곁에 있다.’ 그의 두 손은 따뜻하고 힘이 있으며, 그의 발걸음은 가볍다. 그의 음성은 감미로우며, 그의 그림자는 끊임없이 사람의 주변을 맴돈다. 그의 얼굴은 아름답고 온화하다. 그는 떠난 적도 사라진 적도 없으며, 줄곧 그림자처럼 인류와 함께하였다. 인류를 살뜰히 보살피는 정성과 인류에 대한 특별한 ‘감정’, 그리고 진실한 염려와 사랑은 그가 니느웨 성을 구원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드러났다. 특히, 여호와 하나님은 요나와의 대화에서 창조주가 손수 만든 인류에 대한 연민의 정을 오롯이 드러냈다. 여기에서 너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진심을 깊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요나 4장 10절에서 1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이 내용은 여호와 하나님의 원래 말씀으로, 요나와의 대화이다. 이 대화는 짧고 간결하지만, 인류를 아끼고 염려하는 창조주의 마음이 가득 담겨 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피조물에 대한 진실한 태도와 감정을 나타냈고, 또한 인류가 들어 보기 어려운, 명확한 언어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진심을 표현했다. 이 대화는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보여 준다. 어떤 태도겠느냐? 회개하기 전후의 니느웨 성 사람들에 대한 태도이다. 이는 하나님이 인류를 대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이 안에는 하나님의 마음도 있고 하나님의 성품도 있다.

인류에 대한 조물주의 진실한 마음

이 대화에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이겠느냐? 자세히 살펴보면, 여기에서 하나님이 ‘아끼다’라는 단어로 인류에 대한 그의 진실한 태도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아끼다’라는 단어를 글자 그대로 이해한다면 다양한 해석들이 나올 수 있다. 첫째, 거기에는 보살피고 불쌍히 여긴다는 의미가 있다. 둘째, 몹시 사랑한다는 의미가 있다. 셋째, 너무 아껴서 차마 상처를 줄 수 없다는 의미가 있다. 한마디로 이 단어는 몹시 사랑하고 어여삐 여기며 내치지 못한다는 뜻을 지닌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류를 긍휼히 여기고 인류에게 관용을 베푼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이 대화에서 그의 마음의 소리와 인류에 대한 태도를 남김없이 보여 주었다.

니느웨 성 사람들도 소돔 성 사람들처럼 패괴되고 사악하고 아주 폭력적이었지만, 회개했기에 하나님은 마음을 되돌려 그들을 멸하지 않았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지시를 대하는 태도는 소돔 성 사람들과 확연히 달랐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순종하고 회개하였고, 여러 면에서 진실하고 간절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에 하나님은 다시 한번 그들을 아끼는 마음이 우러났고, 그들에게 상응하는 보답을 해 주게 되었다. 그 누구도 하나님처럼 인류에게 보답을 해 주고 인류를 아낄 수 없고, 그 누구도 하나님처럼 긍휼과 관용, 그리고 인류에 대한 진심을 지닐 수 없다. 네가 생각하는 위인이나 초인 중에 높은 위치, 즉 위인의 입장이나 지고한 위치에 서서 인류나 피조물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자가 있느냐? 인류 중에 누가 인류의 생존 현황을 제 손금 보듯 환히 알 수 있겠느냐? 누가 인류의 생존에 부담과 책임감을 가질 수 있겠느냐? 누가 성을 멸한다고 말할 자격이 있겠느냐? 또 누가 성의 죄를 사할 자격이 있겠느냐? 누가 자신이 창조한 만물을 아낀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느냐? 오직 창조주밖에 없다! 창조주만이 이 인류를 불쌍히 여기고, 이 인류를 사랑하며, 이 인류를 내치지 못하는 참된 마음을 갖고 있다. 또 오직 창조주만이 이 인류를 긍휼히 여기며 모든 피조물을 아낀다. 그의 마음은 인류의 일거수일투족에 이끌린다. 그는 인류의 사악하고 패괴된 모습에 분노하고 근심하고 슬퍼하며, 인류가 회개하고 신복하는 모습에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마음을 되돌리고 축하한다. 그의 모든 마음과 생각은 인류를 위해 생기고 움직이며, 그의 소유와 어떠함은 인류를 위해 발현된다. 또한 그의 희로애락은 인류의 생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는 인류를 위해 바삐 움직이고, 인류를 위해 묵묵히 자신의 생명을 전부 희생하며, 인류를 위해 생명의 매분 매초를 기여한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아낄 줄 몰랐지만 자신이 손수 창조한 인류는 늘 아껴 왔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인류에게 주었다…. 그가 조건도 보상도 없이 긍휼과 관용을 베푸는 것은 오로지 인류가 그의 눈 아래에서, 그의 생명의 공급 아래에서 계속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 언젠가 인류가 다시 그의 앞에 돌아와 그가 바로 인류에게 생존을 위한 자양분을 공급하고 만물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그분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인류에 대한 창조주의 참된 고백

여호와 하나님이 요나와 나눈 이 대화는 인류에 대한 창조주의 참된 고백임이 틀림없다. 이는 창조주가 자신이 주재하는 만물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여호와 하나님이 한 말씀과 같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이는 하나님이 니느웨 성에 대해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성안에 살아 있는 것(사람과 가축까지)이 얼마나 있는지, 아이나 미성년자, 즉 좌우를 분변 못 하는 사람이 몇 명인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인류에 대해 손금 보듯 훤히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구체적인 증거이다. 다음으로 인류에 대한 창조주의 태도, 즉 창조주의 마음속에 차지하고 있는 인류의 무게를 사람에게 알려 준다. 여호와 하나님이 한 말씀과 같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요나를 책망하는 말씀이지만 모두 사실이다.

요나가 명을 받들고 니느웨 성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긴 했지만,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고 또 성안 사람들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염려와 기대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님은 요나를 질책함으로써 그에게 알려 주려는 것이 있었다. 즉, 인류는 하나님이 손수 만든 것이며,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심혈을 기울였고, 모든 사람에게 기대를 걸고 있으며, 또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 공급을 누리고 있고, 하나님이 자신이 기울인 심혈로 그 모든 사람을 바꾸어 왔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요나에게 그가 박 넝쿨을 아끼는 것처럼 하나님도 손수 만든 인류를 마지막 순간까지 절대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더군다나 그 성안에는 수많은 아이와 무고한 가축이 있었으니 말이다. 하나님은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철없는 나이대인 창조된 인류의 생명을 그렇게 쉽게 끝내거나, 그들의 결말을 그렇게 쉽게 정할 리가 없다. 하나님은 그들이 성장하여 다시는 조상들이 갔던 길을 답습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경고를 받지 않으며, 니느웨 성의 과거를 증언할 수 있기를 바랐다. 또한 하나님은 회개한 후의 니느웨와 니느웨의 미래를 보고, 다시 하나님의 긍휼 아래에서 사는 니느웨를 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니느웨 성에서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창조된 인류가 곧 니느웨의 미래라고 생각했고, 그들이 언급하기 싫은 니느웨 성의 과거를 짊어지고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 아래에 있는 니느웨 성의 과거와 미래를 증언하는 중차대한 일을 책임질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그 참된 고백에서 인류를 긍휼히 여기는 창조주의 마음을 완전히 볼 수 있다. 이는 인류에게 ‘창조주의 긍휼’이 알맹이 없는 단어나 헛된 약속이 아니라 여기에는 구체적인 원칙과 방식, 목표가 있다는 것과 그는 거짓이나 가식이 없고 진실하고 참되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그는 모든 시기와 시대에 끊임없이 인류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었다. 하지만 요나와의 대화는 창조주가 왜 인류를 긍휼히 여기는지, 어떻게 긍휼히 여기는지, 인류에게 얼마나 많은 관용과 진심을 베풀었는지에 대해 지금까지 창조주가 언어로 표현한 유일한 내용인 것이다. 이 짧은 대화는 여호와 하나님이 인류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표현한 것이고, 인류를 향한 자신의 태도를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또한 이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긍휼을 많이 베풀었다는 구체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인류의 선조에게 긍휼을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예전과 같이 오늘날의 후손에게도 한 세대 또 한 세대 긍휼을 베풀고 있다. 비록 하나님의 진노가 종종 인류의 어떤 구석, 어떤 시대에 임했더라도 하나님은 긍휼을 멈춘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의 긍휼로 창조된 인류를 한 세대 또 한 세대 이끌고 인도하며 그들에게 자양분을 공급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인류에 대한 그의 참된 마음이 영원히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여호와 하나님이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라고 한 말씀처럼 그는 계속해서 자신이 손수 만든 만물을 아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의 공의로운 성품에 있는 긍휼이다. 이것 또한 틀림없는 창조주의 유일무이함이다!

―<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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