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알아 가기[1]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

사람마다 하나님을 믿어 온 자신의 생애를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고 이해하고 인식하고 있었는지, 각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진정으로 알고 있었는지, 하나님이 너에게 한 사역과 너의 모든 행위에 대해 내린 정의를 정말 알고 있었는지 돌아봐야 한다. 너의 곁에서 너와 함께하고, 네가 나아갈 방향을 인도하며, 너의 운명을 주재하고, 네가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하는 하나님에 대해 너는 얼마나 이해하고 알고 있느냐? 너는 그가 날마다 너에게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아느냐? 일을 하는 그의 원칙과 근본 취지가 무엇인지 아느냐? 그가 어떻게 너를 인도하고 너에게 공급하며, 어떤 방식으로 너를 이끄는지 아느냐? 그가 너에게서 얻으려는 것이 무엇이고 이루려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가 어떤 태도로 너의 여러 가지 모습을 대하는지 아느냐? 네가 그에게 사랑받는 사람인지 아닌지 아느냐? 그의 희로애락의 이유와 그 뒤에 있는 마음과 생각, 그리고 그의 본질을 아느냐? 네가 믿는 그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하나님인지 아느냐? 이러한 문제들은 네가 이해한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던 것이 아니더냐? 너는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참된 체험과 경험으로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푼 적이 있느냐? 너는 하나님의 징계와 채찍질을 받고 진정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린 적이 있느냐? 너는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 속에서 사람의 패역과 사탄 본성을 깨닫고,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게 되었느냐? 너는 하나님 말씀의 인도와 깨우침으로 새로운 인생관을 갖기 시작했느냐? 너는 하나님이 너에게 준 시련 속에서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와 구원을 느꼈느냐?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풀어야 하는지 모른다면 너는 한 번도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를 한 적도, 하나님을 이해한 적도 없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너는 한 번도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징계와 채찍질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너는 틀림없이 순종과 헤아림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최소한 너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순종한 적도, 하나님의 마음을 진정으로 헤아린 적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을 겪은 적이 없다면, 너는 분명 하나님의 거룩함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고, 사람의 패역이 무엇인지는 더더욱 모를 것이다. 네가 지금껏 진실로 올바른 인생관을 가진 적이 없고, 올바른 인생 목표도 없으며, 여전히 향후 인생길에 대해 막막해하고 방황하며 심지어 주저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너는 분명 하나님의 깨우침과 인도를 받은 적이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너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하나님 말씀에서 진정으로 공급(원문: 供應與補給)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네가 아직 하나님이 주는 시련을 겪지 못했다면, 말할 필요도 없이 너는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고,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대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할 것이며, 사람을 경영하고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역이 도대체 무엇인지는 더더욱 모를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얼마나 오래 믿었느냐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 어떤 체험도 하지 못하고 깨달음도 얻지 못했다면, 그는 틀림없이 구원의 길에 들어서지 못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실제 내용이 없으며, 하나님에 대한 인식 역시 전무할 것이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리가 없음은 뻔한 일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이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2)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성품은 모두 인류에게 한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타난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할 때, 실천 과정에서 하나님이 말씀한 목적과 근원, 배경을 알게 되고,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성과를 알고 체득하게 된다. 사람에게 있어 이것들은 모두 진리와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며, 성품이 변화되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기 위해 반드시 체험하고 깨닫고 얻어야 하는 것들이다. 사람은 이런 것들을 체험하고 깨닫고 얻으면서 하나님에 대해 차츰 이해하게 되고, 동시에 또 서로 다른 정도의 인식을 갖게 된다. 이 이해와 인식은 상상해 내거나 지어낸 것이 아니라, 사람이 깨닫고 체험하고 느끼고 실증한 것이다. 사람에게 이런 깨달음과 체험, 느낌, 실증이 있어야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 내용이 생기게 된다. 이때의 인식이야말로 실제적이고 진실하며 정확한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체험, 느낌과 실증을 통해 하나님을 진실로 이해하고 알아 가는 이 과정이 바로 사람과 하나님의 진정한 사귐이다. 사람은 이러한 사귐 속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해하게 되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 본질에 대해 알고 이해하게 되며,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도 점차 알고 이해하게 된다. 또한,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실제적으로 확신하고 정확한 정의를 내리게 되며,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를 본질적으로 확정하고 알게 된다. 사람은 이러한 사귐 속에서 점차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 더는 터무니없는 상상을 하지 않고, 더는 자기 멋대로 추측하지 않으며, 더는 하나님을 오해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더는 하나님을 판단하거나 의심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항변은 갈수록 적어지고,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반발심과 패역 또한 점점 줄어든다. 반대로,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헤아림과 순종은 점점 많아지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점점 실제에 가까워지고 깊어진다. 사람은 이러한 사귐을 통해 진리의 공급과 생명의 세례를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인식을 얻게 된다. 또한 이러한 사귐 속에서 성품이 변화되고 구원을 받게 되며, 동시에 피조물로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배하게 된다. 이러한 사귐이 있으면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믿음은 더 이상 백지도, 구두 약속도 아니며, 맹목적인 추종과 숭배도 아니다. 이러한 사귐이 있어야만 사람은 생명이 나날이 자라고, 성품도 점차 변화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믿음이 막연한 신앙에서 점차 참된 순종과 헤아림, 나아가 참된 경외에 이르게 되며, 하나님을 따르는 것 또한 피동적이고 소극적인 것에서 점차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것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러한 사귐이 있어야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고 이해하며 인식하게 된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진정한 사귐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이론과 글귀에 머물러 있다. 다시 말해,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얼마나 오래 믿었든 상관없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원점에 머물러 있고, 전설과 봉건 미신의 색채를 띤 전통적인 참배의 기초에 머물러 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원점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으며, 하나님의 지위와 신분에 대한 확신을 제외하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여전히 막연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할진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진정한 경외심은 또 얼마나 되겠느냐?

네가 하나님의 존재를 얼마나 확신하든,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너의 인식과 경외를 대체하지 못한다. 네가 과거에 하나님이 주신 복과 은혜를 얼마나 누렸든,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너의 인식을 대체하지 못한다. 또한, 네가 얼마나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봉헌하고 헌신하든,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너의 인식을 대체하지 못한다. 어쩌면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숙독하고 막힘없이 술술 외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너의 인식을 대체하지는 못한다. 사람은 아무리 흔들림 없이 하나님을 따르더라도, 지금까지 하나님과 진정으로 사귄 적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체험한 적이 없다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텅 빈 공백이나 끝없는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설령 네가 한때 하나님과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 적이 있고, 하나님과 얼굴을 맞댄 적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너의 인식은 여전히 비어 있으며, 하나님에 대한 너의 경외 또한 공허한 구호나 이상(理想)에 불과하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이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

많은 사람들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읽고,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에서 중요한 부분을 마음에 새기며 귀한 보물로 여긴다. 또한, 곳곳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른 사람에게 공급하고 도움을 준다. 그들은 이런 행동이 바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도를 행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들은 또 이런 행동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생활에 적용하는 것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고, 하나님께 구원받고 온전케 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한 번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한 적이 없으며, 하나님이 폭로한 말씀에 자신을 비춰 본 적도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 다른 사람의 숭상과 신임을 편취하고, 개인적인 경영을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사취하고 도둑질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기회를 이용해 하나님이 자신에게 역사하게 하고 하나님께 인정받고자 망상한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를 찾지 못했으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른 사람에게 공급하고 도움을 주는’ 과정에서 자신을 돕고 공급하지 못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하나님을 알거나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경외심이 생기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점점 더 깊어졌고, 하나님에 대한 추측이 점점 더 심해졌으며, 하나님에 대한 상상은 갈수록 과장되어 갔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의 이론적 공급과 인도하에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식은 죽 먹기인 것처럼, 그들의 인생 목표와 사명을 찾은 것처럼, 새 삶을 얻은 것처럼, 구원을 받은 것처럼 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낭랑하게 외우는 과정에서 진리를 얻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을 알아 가는 길을 찾은 듯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과정에서 언제나 하나님과 대면하는 듯했고, ‘감동’받아 눈물을 흘리면서 늘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로 하나님의 고심을 끊임없이 깨닫고 있는 듯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경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을 알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도 알게 된 듯했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더욱 확신한 듯했고, 하나님의 존귀함을 더욱 깨달은 듯했으며, 하나님의 위대함과 비범함을 더욱 느낀 듯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표면적인 인식에 심취되어 있으면서, 마치 그들의 믿음이 증가하고, 고난받겠다는 다짐이 견고해지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깊어진 듯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로 체험하기 전에 갖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생각은 다 그들의 일방적인 상상과 추측에서 비롯되었음을 그들이 어찌 알겠느냐? 그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어떤 검증도 견뎌 내지 못하고, 그들이 말하는 영적인 것과 분량은 하나님이 준 시련과 검증을 전혀 감당해 내지 못한다. 그들의 의지는 모래 위에 지어진 공중누각에 불과하며,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도 자신들의 머릿속에서 상상해 낸 성과에 불과하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에 ‘많은 공을 들인’ 이 사람들은 무엇이 참된 믿음이고 참된 순종인지, 무엇이 참된 헤아림이고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인지 전혀 모른다. 그들은 이론, 상상, 지식, 은사, 전통과 미신, 심지어 사람의 도덕관까지 모두 가져다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밑천과 무기, 심지어 토대로 삼는다. 그러면서 또 그러한 밑천과 무기를 하나님을 알아 가는 비법으로 삼고, 하나님이 주는 검증과 시련, 형벌과 심판을 맞이하고 대처하는 비법으로 삼는다. 결국 그들이 얻는 것은 여전히 종교적 색채와 봉건 미신, 전설과 기괴함, 비밀스러움으로 가득 찬 하나님에 대한 정론이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인식과 정의는 하늘과 하느님(원문: 老天爺)만 믿는 사람들과 찍어 낸 듯 똑같다. 반면에, 하나님의 실제,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 등 진실한 하나님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은 그들의 인식과 어긋나고, 그 어떤 관계도 연관도 없으며, 심지어 완전히 상반된다. 그렇기에 그들은 하나님 말씀의 ‘공급과 자양’ 아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 진정한 원인은 바로 그들이 하나님과 알고 지낸 적이 없기 때문이며, 하나님을 진정으로 ‘접하고’ 사귄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불가능하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고 따르며 경배할 수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대하는 이러한 관점과 태도로 인해 그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영원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갈 수 없다.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와 방향은 그들이 영원히 하나님의 원수임을 뜻하고, 영원히 구원받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이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

오랜 세월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 말씀의 공급을 누린 사람과 우상을 숭배하고 공양하는 자가 하나님에 대해 본질적으로 같은 정의를 내렸다면, 이는 그 사람이 하나님 말씀의 실제를 얻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 원인을 따져 보면, 그는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전혀 진입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 속의 실제와 진리, 하나님의 뜻, 그리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그와 아무 관계도 없다. 다시 말해, 그런 사람이 하나님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 아무리 공을 들인다 한들 쓸모없다. 그가 추구하는 것이 글귀이므로 그가 얻는 것 또한 필연적으로 글귀이다. 하나님이 한 말씀은 겉으로 봤을 때 이해하기 쉽든 심오하든, 전부 사람의 생명 진입을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할 진리이며, 사람의 심령과 육체가 생존해 나가기 위한 생수의 근원이다. 그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일상적인 처세 법칙과 신조를 공급하며,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길과 목표, 방향을 공급한다. 또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로서 갖춰야 할 모든 진리를 공급하고,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하고 경배해야 하는지에 관한 모든 진리를 공급한다. 그는 사람이 살아 나가기 위한 보장이자 일용할 양식이며, 사람을 굳세어지고 우뚝 설 수 있게 하는 견고한 방패이다. 그에게는 창조된 인류를 정상 인성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진리의 실제가 가득하고, 인류를 패괴에서 벗어나게 하고 사탄의 올무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진리가 가득하며, 창조된 인류에 대한 창조주의 간곡한 가르침과 권면, 격려와 위로가 가득하다. 그는 사람이 모든 긍정적인 사물을 알도록 인도하고 깨우치는 길잡이 등불이자, 사람이 모든 정의와 아름답고 선한 것을 구현하고 가질 수 있게 하는 보장이며, 모든 사람과 일, 사물을 가늠하는 준칙이자, 사람을 구원과 광명의 길로 이끄는 등대이다. 사람은 하나님 말씀의 실제 체험 속에서만 비로소 진리와 생명을 공급받을 수 있고, 정상 인성이란 무엇인지, 의미 있는 인생이란 무엇인지, 진정한 피조물이란 무엇인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순종이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또한,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해야 하는지, 어떻게 진정한 사람의 모습을 갖춰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고, 참된 믿음과 경배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며, 천지 만물의 주재자가 누구인지, 만물을 주재하는 그분이 어떤 방식으로 만물을 주재하고 인도하며 공급하는지를 깨닫게 되고, 만물을 주재하는 그분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나타나며 사역하는지를 알고 이해하게 된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실한 경험과 체험에서 벗어나면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대한 참된 인식과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확실한 산송장이고 의심할 나위 없는 겉껍데기로, 창조주와 관련된 모든 인식은 그와 어떤 관계도 없다. 하나님이 보기에 그런 사람은 지금껏 하나님을 믿거나 따른 적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가 하나님을 믿는 자라는 것도, 하나님을 따르는 자라는 것도, 더 나아가 진정한 피조물이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이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

진정한 피조물이라면 마땅히 창조주가 누구인지, 사람이 왜 창조되었는지, 피조물의 직책을 어떻게 이행해야 하는지, 창조주를 어떻게 경배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고, 창조주의 뜻과 마음의 소리와 요구를 알고 이해하고 깨닫고 헤아려야 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라’는 창조주의 도를 행해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냐? 어떻게 악에서 떠날 것이냐?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를 의미하는 것도, 숨고 멀리하고 숭상하고 미신하는 것을 뜻하는 것도 아니라, 앙모하고 숭경하고 신뢰하고 이해하고 헤아리고 순종하고 헌신하고 사랑하는 것이며, 조건도 불평도 없이 경배하고 보답하고 복종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이 없으면 진정한 앙모도, 신뢰도, 이해도, 헤아림도, 순종도 없으며, 단지 두려움과 불안, 의심, 오해, 회피, 그리고 멀리함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이 없으면 진정한 헌신과 보답도 없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이 없으면 진정한 경배와 복종도 없으며, 맹목적으로 숭상하고 미신할 뿐이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이 없으면 하나님의 도를 행할 수도, 하나님을 경외할 수도, 악한 일을 멀리할 수도 없다. 반면, 사람이 종사하는 모든 활동과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거역과 대적, 비방과 논단으로 가득할 것이며, 또한 진리를 위배하고 하나님 말씀의 참뜻에 어긋난 악행으로 가득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진실로 신뢰하면, 진실로 따르고 의지할 수 있다. 하나님을 진실로 믿고 의지해야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고 이해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진실로 이해해야 하나님의 마음을 진실로 헤아릴 수 있다. 하나님의 마음을 진실로 헤아려야 하나님께 진정으로 순종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 진정으로 순종해야 진정으로 헌신할 수 있다. 하나님께 진정으로 헌신해야 조건도, 불평도 없이 보답할 수 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고 의지하고, 이해하고 헤아리고, 순종하고, 헌신하고 보답해야 진정으로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을 알 수 있고, 창조주의 신분을 알 수 있다. 진정으로 창조주를 알아야 진정으로 경배하고 복종할 수 있으며, 진실로 창조주께 경배하고 복종해야 진정 악행에서 벗어나고 악에서 떠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전 과정이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의 모든 내용이며,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 사이에는 매우 밀접하면서도 갈라놓을 수 없는 연관성이 있으며, 이 둘의 관계는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악에서 떠나려면 반드시 먼저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해야 하며,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려면 반드시 먼저 하나님을 진실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알고 싶으면 반드시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하고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해 하나님의 채찍질과 징계, 형벌과 심판을 겪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하려면 반드시 먼저 하나님의 말씀과 대면하고, 하나님과 마주해야 하며,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도록 사람, 일, 사물과 각종 환경을 마련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하나님과 마주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대면하려면 반드시 먼저 순수하고 정직한 마음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 고통을 감내하려는 의지, 악한 일을 멀리하려는 결심과 용기, 그리고 참된 피조물이 되고자 하는 소망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면 너는 하나님께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고, 네 마음은 점점 더 순결해질 것이다. 또한, 너의 인생과 삶의 가치는 하나님에 대한 너의 인식과 함께 점점 더 의미를 갖게 되고, 점점 더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언젠가 너는 창조주가 더 이상 수수께끼가 아님을 느끼게 될 것이다. 또한, 창조주가 너를 피해 숨거나 얼굴을 가린 적이 없고, 너에게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며, 더 이상 네가 밤낮으로 그려도 느낄 수 없었던 그분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분명히 너의 곁을 지키고 있고, 너에게 생명을 공급하고 있으며, 네 운명을 주관하고 있다. 그는 아득한 하늘 끝이나 구름 사이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너의 주변에서 너의 모든 것을 주재하고 있다. 그는 너의 모든 것이자 너의 유일한 분이다. 이러한 하나님은 너에게 사모의 마음이 들게 하고, 그리워하게 하며, 가까이하게 하고, 앙모하게 하며, 잃을까 두려워하게 하고, 더는 포기하려고도 거역하려고도 하지 않게 하며, 멀리 떠나거나 숨으려고도 하지 않게 한다. 너는 오직 그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에게 순종하며, 그가 네게 준 모든 것에 보답하고 그의 권세 아래에 돌아와 복종하기만을 원하게 된다. 너는 더 이상 너에 대한 그의 인도와 공급, 보살핌과 보호를 거절하지 않고, 너에 대한 그의 주재와 안배에 저항하지 않게 된다. 너는 오로지 그의 곁을 따르고 그와 함께하기를 바라며, 그를 너의 유일한 생명이자 유일한 주, 유일한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게 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이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6)

사람의 생각은 진리를 대신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고난과 괴로움을 참고 견디며 대가를 치르고 외적 행위가 아주 좋아 사람에게서 존경을 받고 감탄을 자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외적 행위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느냐?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한다고 확정할 수 있느냐? 왜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보면 흔히 그가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진리를 실행하는 길을 가고, 하나님의 도를 지키고 있다고 여기느냐? 왜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냐? 거기에는 한 가지 이유밖에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란 어떤 것인지,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것이란 어떤 것인지, 진정으로 진리의 실제가 있는 것이란 어떤 것인지 등의 문제에 대해 아직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종종 겉으로 보았을 때 영적이고 고상해 보이는 사람, 이미지가 괜찮은 사람에게 미혹된다. 사람들은 글귀 도리를 말하고, 말과 행동이 다른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그런 사람들의 일을 하는 본질과 원칙, 일을 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또 그런 사람들이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하는지,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는지는 살피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의 인성 본질을 전혀 분별하지 않는다. 그 대신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점점 익숙해지면서 조금씩 탄복하고 우러러보다가 나중에는 그 사람들을 자신의 우상으로 삼는다. 게다가 일부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자신이 숭상하는 우상,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가정과 직장을 내려놓고 대가를 치르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사람, 참으로 좋은 결말과 좋은 종착지가 있을 사람, 하나님이 칭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에게 존재하는 이런 ‘생각’은 어떤 원인으로 초래된 것이냐? 이 일의 본질은 무엇이냐? 이 일로 초래된 결과는 무엇이냐? 먼저 이 일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앞에서 언급한 사람의 관점과 실행법, 사람이 스스로 취한 실행 원칙, 그리고 사람들이 평소에 중시하는 것들은 본질적으로 모두 하나님의 요구와 무관하다. 사람이 중요시하는 것이 깊든 얕든, 글귀의 이치이든 실제이든, 결론적으로 말해서 사람은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했고,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했다. 그 원인을 따져 보면, 사람이 진리를 전혀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실행 원칙을 찾아 실행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도리어 지름길로 가면서 자기 자신이 생각하고 있고 알고 있는 좋은 행위와 방법을 종합해 그것을 자신의 목표로 삼아 추구하고, 진리로 삼아 실행하고 있다. 이렇게 했을 때 직접적으로 초래되는 결과는 바로 사람이 인위적인 좋은 행위로 진리 실행을 대체하게 되고, 동시에 하나님의 환심을 사고자 하는 욕망을 충족시키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사람에게는 진리에 대항하는 밑천, 하나님과 이치를 따지며 맞서는 밑천이 생기게 된다. 그와 동시에 사람은 서슴없이 하나님을 한쪽에 제쳐 놓고 자신의 마음속 우상을 하나님 자리에 놓는다. 사람에게 이런 미련한 행위와 우매한 사고방식, 혹은 단편적인 사고방식과 실행법이 생기게 된 근본 원인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을 오늘 알려 주겠다. 그 원인은 바로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면서 날마다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있어도 사실상 하나님의 뜻을 전혀 알지 못한 데에 있다. 이것이 문제의 근원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이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혐오하는지, 무엇을 얻으려고 하고 무엇을 버리려고 하는지,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을 싫어하는지, 어떤 기준으로 사람에게 요구하고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온전케 하는지를 안다면, 사람에게 자신만의 생각이 있을 수 있겠느냐? 또 멋대로 다른 사람을 숭상할 수 있겠느냐? 또 일반 사람을 자신의 우상으로 삼을 수 있겠느냐? 만약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사람의 견해는 다소 이성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패괴된 사람을 함부로 자신의 우상으로 삼지 않을 것이고, 진리를 실행하는 길에서 제멋대로 몇 가지 간단한 규례나 원칙을 지키는 것을 진리 실행으로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사역으로 맺게 될 결실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7)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 기준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갖고 있다

모든 사람의 관심이 자신의 결말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너희는 하나님이 사람의 결말을 어떻게 정하는지 알고 있느냐? 하나님은 한 사람의 결말을 어떤 방식으로 정할까? 어떤 기준으로 한 사람의 결말을 정할까? 사람의 결말이 아직 정해지기 전, 하나님은 어떤 사역들을 하여 사람의 결말을 드러낼까? 이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느냐? 내가 방금 말했다시피, 일부 사람들은 사람의 결말이 무엇인지, 사람의 결말이 어떻게 나뉘는지, 사람마다 각각 어떤 결말이 있는지, 하나님 말씀에서는 사람의 결말을 어떻게 정했는지, 하나님이 어떤 기준과 방식으로 한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지 알고 싶어서 하나님 말씀 가운데 오랫동안 연구를 해 왔다. 하지만 결국 아무 결과도 찾지 못했다. 사실 하나님 말씀에는 아주 조금만 언급되어 있을 뿐 내용이 많지 않다.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은 사람의 결말이 드러나기 전까진 그 누구에게도 최후의 결과를 알려 주기를 원치 않고, 사람의 종착지가 어떤지 미리 알려 주는 것도 원치 않는다. 사람에게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서 너희에게 알려 주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 어떤 방식을 통해 사람의 결말을 정하고 어떤 사역 원칙으로 사람의 결말을 정하고 드러내는지, 어떤 기준으로 한 사람이 살아남을지를 정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너희도 가장 관심 갖고 있는 내용이 아니냐? 그럼 사람의 관념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람의 결말을 어떻게 정하느냐? 조금 전에 너희가 일부를 얘기했다. 즉, 어떤 사람들은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고 헌신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님을 흡족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배에 따르는 것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너희가 이런 진리들을 실천하고, 스스로 원칙이라 생각하는 것에 따라 실천할 때,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느냐? 너희는 너희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는 것인지,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것인지,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는 것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나는 많은 사람이 그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저 하나님 말씀의 일부, 설교의 일부, 그리고 자신이 숭상하는 일부 영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준을 따라서 적용하며 스스로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강요할 뿐이다. 마지막 결과가 어떠하든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여기며 계속 이를 고수하고 그대로 행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난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렇게 실천해 왔어. 그동안 많은 진리를 깨달았고, 지난날 몰랐던 것들도 많이 알게 됐지. 특히 사상과 관점, 인생의 가치관이 많이 바뀌고, 이 세상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됐어. 그래서 하나님을 아주 흡족게 해 드렸고 얻은 것도 적지 않은 것 같아.’ 그러면서 그것을 수확이라고, 하나님의 사역이 사람에게서 맺는 최종 결실이라고 생각한다. 너희 모든 사람이 실천하고 있는 것들을 포함한 이런 기준들을 종합해 보면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해 드리는 것이냐? 어떤 사람들은 확신에 차 대답한다. “물론이죠! 우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실천하고, 상부의 설교에 따라 실천하며, 계속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을 따르면서 지금껏 하나님을 떠난 적이 없거든요.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을 흡족게 해 드리고 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이해했든,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깨달았든 결론적으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길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행한 것이 올바르다면, 결과도 틀림없이 옳을 것입니다.” 이런 관점은 어떠하냐? 올바르냐? 아마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는 이런 일들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면서 계속 하나님 말씀의 요구대로 행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할 수 있는지,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 다다랐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선 그런 걸 저한테 알려 주신 적도, 명확하게 지시하신 적도 없으시거든요. 저는 그저 쉬지 않고 행하면 하나님께서 흡족해하실 것이고, 더 이상 다른 요구는 없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은 올바르냐? 내가 봤을 때, 너희의 그런 실천과 생각, 관점에는 상상이 섞여 있고 다소 맹목적이다. 내가 이 말을 하면 낙담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맹목적이라고요? 그럼 우리가 구원을 받거나 살아남을 가망이 불투명하고 희박하다는 말인가요? 저희에게 찬물을 끼얹는 말씀 아닌가요?” 너희가 어떻게 생각하든 내가 말하려는 것과 내가 하려는 것으로 너희에게 찬물을 끼얹는 느낌을 주려는 것은 아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더욱 잘 깨닫고, 하나님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혐오하고 무엇을 증오하는지, 어떤 사람을 얻으려고 하는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싫어해 버리는 대상인지 더 확실히 알게 하는 것이다. 너희 모두의 모든 행위와 생각이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분명하고 뚜렷하게 알게 하려는 것이다. 이런 주제들에 관한 교제가 참으로 필요하지 않으냐? 나는 너희가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고 그렇게 많은 도를 들었지만 이런 부분이 가장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모든 진리를 다 기록해 두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부분은 머릿속에 기억하고 마음에 새겨 두며 준비를 해 둔다. 실천할 때가 되면 그 진리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흡족게 해 드릴 수 있도록, 수시로 필요한 것을 채울 수 있도록, 혹은 눈앞에 연이어 놓인 난관들을 극복하는 데에 도움을 받도록, 아니면 그 진리들이 너희의 삶에 함께하도록 말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너희가 어떻게 행하든 마냥 행하기만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하겠느냐? 네가 행할 때 그 행함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인지, 너의 행함과 생각과 이루려는 결실과 목표가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는 것인지,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는 것인지,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인지 아주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이것들이야말로 매우 중요하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사역으로 맺게 될 결실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8)

하나님의 도를 행하라. 즉,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라

너희가 반드시 기록해 두어야 할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날마다 이 말을 몇 번이나 되새겨 보는지 모른다. 왜 이렇게 말할까? 그것은 사람을 대할 때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하나님을 믿어 온 누군가의 체험이나 간증을 들을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 말을 가지고 그가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이 맞는지,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이 맞는지 가늠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떤 말일까? 너희 모두 잔뜩 기대하고 있지만 이 말을 꺼내는 순간 아마 크게 실망할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은 이미 오랜 시간 입에 달고 살 듯했던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껏 이 말을 입이 아닌 마음속에 담아 두고 있었다. 이 말은 무엇일까? 바로 ‘하나님의 도를 행하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라.’이다. 아주 간단한 말 아니냐? 간단하지만, 이 말을 진정 깊이 이해하는 사람은 아주 무게 있고, 실천할 가치가 있는, 진리 실제가 있는 생명의 언어이자 하나님을 흡족게 해 드리길 원하는 사람이 평생 추구해야 할 목표이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이 일생 동안 행해야 할 도라고 여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이 너희에게는 진리가 아니냐? 이런 의미가 있지 않으냐? 아마 어떤 사람들은 이 말에 대해 생각하고 되새겨 보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되려 의심을 품을 것이다. ‘이 말이 중요할까? 정말 중요할까? 이렇게까지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또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은 ‘이 한마디로 하나님의 도를 요약하는 건 너무 간단한 것 아닐까? 하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을 한마디로 귀결시키는 건 하나님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냐? 너희 중 대다수는 아마 이 말의 깊은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이 말을 적어 두긴 하겠지만 마음속에 새겨 둘 생각은 없다. 그저 노트에 적어 두고, 한가할 때 펼쳐 되새겨 볼 뿐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은 기억할 가치가 전혀 없다고 여기고, 적용할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내가 왜 이 말을 하겠느냐? 너희의 관점과 생각이 어떠하든, 이 말은 하나님이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 것과 큰 관련이 있기에 나는 반드시 말해 줘야 한다. 너희가 지금 이 말에 대해 어떻게 깨닫고 대하든, 나는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사람이 이 말을 실천하고 체험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다’라는 기준에 이른다면, 틀림없이 살아남을 것이고, 좋은 결말을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의 기준에 이르지 못한다면, 너의 결말은 미지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이 말을 너희에게 하는 목적은 하나님이 어떤 기준으로 너희를 가늠하는지 실상을 우선 알려 주려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사역으로 맺게 될 결실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9)

하나님은 여러 가지 시련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지 검증한다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하던 각 시대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말씀을 베풀어 주고 진리를 알려 주었다. 이 진리들은 사람이 지키고 행해야 할 도이고,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게 하는 도이다. 또한 사람이 삶 속에서, 인생 역정 속에서 실천하고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씀을 선포하는 목적이다. 이 말씀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포된 것으로 사람은 마땅히 이를 지켜야 하고, 지키면 생명을 얻게 된다. 만약 하나님의 이 말씀을 지키지 않고 실천하지 않고 삶 속에서 살아 내지 못한다면 그는 진리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을 흡족게 하지 못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흡족게 하지 못하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다. 이런 사람은 결말이 없어진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역 가운데 어떻게 사람의 결말을 정할까?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사람의 결말을 정할까? 너희는 내가 말해 주지 않으면 잘 모를 테지만, 많은 사람이 이미 관련된 체험을 했기 때문에 내가 그 과정을 말하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역을 시작해서 지금껏 모든 사람에게, 즉 자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크고 작은 시련을 주었다. 어떤 사람은 가족에게 버림받는 시련을 겪었고, 어떤 사람은 열악한 환경에 처하는 시련을 겪었으며, 어떤 사람은 잡혀가거나 고문을 받는 시련을 겪었다. 또 어떤 사람은 선택을 해야 하는 시련을 겪었고, 어떤 사람은 지위와 재물의 시련에 맞닥뜨렸다. 결론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다양한 시련이 닥쳤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런 일을 하는 것일까? 왜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할까? 그는 어떤 결과를 보려고 하는 것일까?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알려 주고자 하는 핵심이다. 하나님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인지를 보려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네게 시련을 주어 어떤 환경에 처하게 할 때는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인지 검증하려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제물을 관리하는 본분이 주어졌다고 하자. 그 본분으로 인해 그는 하나님의 제물을 접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 일은 하나님이 마련한 것이 아니냐?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너에게 닥치는 일은 다 하나님이 마련한 것이다. 너에게 이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은 네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실천하는지, 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은밀히 관찰하며 지켜볼 것이다. 하나님은 그 결과에 가장 관심을 기울인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결과를 통해 네가 그 시련 가운데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렀는지 가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이 닥쳤을 때 사람은 흔히 왜 이런 일이 닥쳤는지, 하나님의 요구 기준은 무엇인지,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보려는 것이 무엇이고 얻으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대신 이런 생각만 한다. ‘나한테 이런 일이 주어졌으니 소홀히 하지 말고 신중을 기해야지! 이건 하나님의 제물이니까 손을 대선 안 돼.’ 이렇게 단순히 생각하고선 책임을 다했다고 여긴다. 이 시련의 결과에 대해 하나님은 만족했을까, 아니면 만족하지 못했을까? 너희가 말해 보아라.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다면 제물을 접하는 일이 주어졌을 때 이는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기 쉬운 일이라고 생각해 틀림없이 신중을 기할 것입니다.) 근접했지만 아주 적절하지는 않다. 하나님의 도를 행한다는 것은 외적인 규례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너에게 일이 닥쳤을 때 먼저 그것을 하나님이 마련한 환경, 하나님이 너에게 맡긴 책임이나 사명으로 여기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일이 닥쳤을 때 너는 그것을 하나님이 너에게 준 시련으로 여겨야 한다. 일이 닥쳤을 때 네 마음속엔 기준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에게서 온 일이니 어떻게 해야 책임을 다하고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노하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지 않을지 생각해야 한다. 방금 우리는 제물 보관에 대해 말했다. 제물과 관련 있고 또 너의 본분 및 책임과도 관련 있는 일이다. 그 책임은 마땅히 해내야 한다. 그러나 이 일이 주어지면서 시험도 따르지 않을까? 당연히 시험이 있다! 시험은 어디에서 오느냐? 사탄에게서 비롯되기도 하고 사람의 사악하고 패괴된 성품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시험이 있다는 것은 이 일이 사람이 굳게 서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는 말이다. 굳게 서는 것 역시 너의 책임과 본분이다. 혹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런 작은 일을 굳이 큰 문제로 여길 필요가 있을까요?”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도를 행하려면 우리 곁이나 주변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을 그냥 넘겨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일이라 하더라도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일단 우리의 입장에서 중요한 일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무시하지 말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검증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런 태도는 어떠하냐? 너에게 이런 태도가 있다면 한 가지 사실을 증명해 준다. 너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 너에게 하나님을 흡족게 해 드리고 싶다는 이런 소망이 있다면, 네가 실천해 내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다’라는 이 기준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어떤 이들은 사람들이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는 일이나 평소 사람들이 아예 언급하지 않는 일은 작은 일로 여기고 진리의 실천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일이 닥치면 가볍게 생각해 그냥 흘려보낸다. 사실 이런 일이 닥쳤을 때가 바로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야 하는지를 배워야 할 때이다. 또한 너는 이런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더더욱 잘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너의 곁에서 너의 언행을 관찰하고 행동과 생각의 변화를 관찰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역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저는 왜 느끼지 못하는 걸까요?” 네가 느끼지 못하는 것은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라는 도를 가장 중요한 도로 삼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는 하나님이 사람의 서로 다른 생각과 행동에 기반해 사람에게 행하는 미묘한 사역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너는 정말 부주의한 사람이구나! 무엇이 큰일이고 무엇이 작은 일이겠느냐? 하나님의 도를 행하는 것과 관련된 일에는 크고 작음의 구분이 없다. 이 말을 너희는 받아들일 수 있느냐? (네.) 사람이 보기에 매일 닥치는 일 중에 어떤 일은 아주 크고 어떤 일은 아주 작다. 흔히 사람들은 큰일을 아주 중요한 일로 간주하고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막상 큰일이 주어져도 사람의 분량이 작고 자질이 부족한 탓에 하나님의 뜻에 이르지 못하고, 아무런 깨달음도 얻지 못하며, 가치 있는 실제적 인식도 얻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런가 하면 작은 일은 무시하면서 조금씩 흘려보낸다. 그렇게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검증받고 시련받을 무수히 많은 기회를 놓치게 된다. 네가 계속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너를 위해 마련한 사람과 일, 사물과 환경을 소홀히 대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하나님이 너를 온전케 하고 인도하려는 것을 네가 날마다, 더 나아가 매 순간 저버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너에게 어떤 환경을 마련해 너를 은밀히 관찰하고 네 마음과 모든 생각을 감찰한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하려고 하는지를 본다. 만일 네가 경솔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도,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한 번도 참답게 대한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너는 하나님이 너를 위해 마련한 환경에서 무엇을 이루려고 하고, 무엇을 요구하는지 세심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또한 너에게 주어진 사람과 일이 진리나 하나님의 뜻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너에게 이렇게 여러 차례 환경과 시련을 주었음에도 너에게서 아무런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겠느냐? 너에게 수차례의 시련이 주어졌음에도 네 마음이 하나님을 크게 높이지 않고 하나님이 마련한 환경을 중요하게 여기지도, 하나님이 준 시련이나 검증으로도 여기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내려 준 기회를 지속적으로 밀어내고 흘려보낸다면 그것은 엄청난 패역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 일로 슬퍼하겠느냐? (슬퍼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슬퍼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너희는 또 크게 놀랄 것이다.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늘 슬퍼하신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하나님께서 슬퍼하지 않으신다고? 그럼 하나님은 언제 슬퍼하시는 거지?’ 어쨌든 하나님은 이 일에서는 슬퍼하지 않는다. 그러면 앞서 언급했던 사람의 행위에 대해 하나님은 어떤 태도를 보일까? 사람이 하나님이 주는 시련과 하나님의 검증을 밀어내고 도피하려 할 때 하나님은 오직 한 가지 태도만을 취한다. 어떤 태도일까?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이런 사람을 증오하고 버린다. ‘증오와 버림’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돼 있다. 내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석할까? ‘증오’에는 극도로 혐오하고 미워한다는 의미가 있다. ‘버림’은 어떤 의미일까? 내게 있어서는 ‘포기한다’는 뜻이다. ‘포기’가 어떤 뜻인지 너희는 다 알고 있겠지? 결론적으로 ‘증오와 버림’이란 하나님이 위에서 말한 일들을 행하는 사람에게 취하는 마지막 반응이자 태도로, 사람에게 크게 혐오감과 반감을 가져 포기하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도를 전혀 행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며 악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에 대해 하나님이 내린 최종 결단이다. 이제 너희는 내가 한 말의 중요성을 깨달았느냐?

이제 너희는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지 알겠느냐? (날마다 다른 환경을 마련해 주시는 방식으로 정하십니다.) ‘다른 환경을 마련한다’는 것은 사람의 입장에서 느끼고 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 일을 하는 출발점은 무엇일까? 그 출발점은 하나님이 각기 다른 시간과 지점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모든 사람들을 시련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시련하는 것일까? 사람에게 닥치는 모든 일에서, 네가 듣고 보고 직접 겪는 모든 일에서 네가 과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인지를 보려고 시련하는 것이다. 이런 시련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을 몇 년간 믿어 왔는데 왜 제게는 시련이 닥치지 않은 걸까요?” 시련이 닥치지 않았다고 느끼는 것은 네가 하나님이 마련한 환경을 중요한 일로 여기지 않았고 하나님의 도를 행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준 시련에 대해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저에게도 시련이 몇 번 닥쳤지만 정확한 실천의 길을 몰랐었습니다. 실천했다 하더라도 제가 과연 그 시련 가운데 굳게 섰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와 비슷한 상태인 사람이 적지 않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람을 가늠하는 기준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내가 앞서 언급했던 그 말이다. 즉, 네가 행하고 생각하고 드러낸 것들이 과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인지를 확정한다. 이것이 쉬운 일이냐? 말로야 쉽겠지만 실천하기도 쉬울까? (쉽지 않습니다.) 왜 쉽지 않으냐?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온전케 하시는지 모르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지는 일에서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할 줄 모릅니다. 사람은 여러 가지 시련과 연단, 형벌과 심판을 겪어야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실제가 있게 됩니다.) 너희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지금 너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은 쉽게 해낼 수 있으리라 느낄 것이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지금 너희는 많은 도를 듣고 진리 실제로 많은 양육을 받아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는지 이론과 의식상으론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너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기’를 실천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너희는 쉽게 해낼 수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왜 실제로 해내지 못할까? 바로 사람의 본성과 본질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악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정한 원인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사역으로 맺게 될 결실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0)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악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대립하는 것이다

지금 하나님과 마주하고 있고 하나님 말씀과 마주하고 있는 너희는 하나님에 대해 욥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다. 내가 왜 이 일을 언급하겠느냐?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여기에서 한 가지 사실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사실을 설명하기 전에 너희에게 하나 묻겠다. 욥은 하나님을 아주 조금밖에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무엇 때문일까? (깊이 패괴되었기 때문입니다.) ‘깊이 패괴되었다’는 것은 문제의 표면적인 현상일 뿐 나는 절대 그렇게 보지 않는다. 너희들은 평소 ‘깊이 패괴되었다’, ‘하나님을 거역한다’, ‘하나님에 대해 충성심이 없다’, ‘순종하지 않는다’,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다’와 같은 도리와 글귀를 곧잘 말한다. 이런 실속 없는 말들을 입에 달고 살면서 그것으로 모든 문제의 본질을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실천법이다. 다른 성질의 문제들을 똑같은 답으로 해석하는 것은 진리를 모독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나는 그런 답을 듣길 원치 않는다. 잘 생각해 보아라! 이 일에 대해 너희 누구도 생각해 본 적이 없겠지만 나는 여기서 날마다 보고 느낀다. 그래서 너희는 행하고 있고 나는 보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너희가 행하고 있을 때 너희는 이 일의 본질을 느끼지 못하지만, 나는 거기에서 이 일의 본질을 볼 수 있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면 이 본질은 무엇일까? 왜 지금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고 악에서 떠나지 못할까? 너희의 답은 이 문제의 본질을 전혀 해석할 수 없고 해결할 수도 없다. 그것은 여기에 너희가 모르는 근본 원인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이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너희가 무척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럼 이 문제의 근본 원인을 알려 주겠다.

하나님은 사역을 시작하면서부터 사람을 무엇으로 여겼을까? 하나님은 사람을 구하여 그의 가족으로 여겼고 그의 사역 대상으로 여겼으며 정복하고 구원하고 온전케 할 대상으로 여겼다. 이것은 하나님이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 사람에 대해 가졌던 태도다. 그러나 당시 사람은 어떤 태도로 하나님을 대했을까? 사람은 하나님을 생소하게 느끼며 낯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에 대해 갈피를 못 잡는 태도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사람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몰랐고, 결국 자신의 생각대로 대하고 행했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관점이 있었을까? 처음에는 하나님에 대해 아무런 관점도 없었다. 사람의 관점이란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상상을 말한다.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는 것이면 받아들이고 부합하지 않는 것이면 겉으로는 순종하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극력 저항하고 반대했다. 이것이 처음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였다. 하나님은 사람을 가족으로 여겼지만 사람은 하나님을 낯선 사람으로 대했다. 그러나 일정 기간 하나님이 사역한 후, 사람은 하나님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게 되었고, 하나님이 참하나님임을 알게 되었으며, 하나님에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이때 사람은 하나님을 무엇으로 여겼느냐? 생명줄로 여겼다. 그러면서 하나님에게서 은혜와 축복을 받고 약속을 받기를 원했다. 이때 하나님은 사람을 무엇으로 여겼을까? 하나님은 사람을 정복할 대상으로 여겼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사람을 심판하고 검증하고 시련을 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사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용하는 대상이었다. 사람은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가 사람을 정복하고 구원할 수 있음을 보았고, 하나님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것과 원하는 종착지를 얻을 기회가 있음을 보았다. 그랬기 때문에 사람은 조금이나마 진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따르려고 했던 것이다. 나중에는 하나님에 대한 표면적인 도리상의 인식도 조금 생기게 되었다. 하나님에 대해 점차 ‘익숙’해지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전한 도, 선포한 진리, 행한 사역에 대해서도 서서히 ‘익숙’해졌다. 그런 이유로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이 낯설지 않다고 착각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길을 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람은 진리의 도를 많이 들었고 하나님의 사역도 무수히 많이 체험했다. 하지만 수많은 요인, 그리고 상황의 방해와 저지로 인해 다수의 사람들은 진리를 실천하지 못했고 하나님을 흡족게 하지 못했다. 사람은 점점 태만해지고 믿음을 잃어 갔으며 점차 자신의 결말이 불확실하다고 느끼게 되었고, 사치스러운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하며 발전하려고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저 마지못해 따르면서 한 걸음씩 앞으로 가고 있을 뿐이다. 지금 사람들의 이런 모습에 대해 하나님은 어떤 태도를 취할까? 하나님은 단지 진리와 그의 도를 사람에게 부어 준 뒤 여러 환경을 마련하고 각종 방식으로 사람을 시련하려고 한다. 그 목적은 말씀과 진리와 그가 행하는 사역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게 되는’ 결과를 이루는 것이다. 내 눈에 비친 많은 사람은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도리와 글귀와 규례로만 삼아 지킬 뿐, 일을 처리하고 말하거나 또는 시련이 닥쳤을 때 하나님의 도를 자신이 지켜야 할 도로 여기지 않는다. 특히 크나큰 시련이 닥쳤을 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방향으로 실천하는 사람을 나는 전혀 보지 못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에 대해 극도의 반감과 혐오감을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수차례, 심지어 수백 차례 시련을 준 후에도 사람은 여전히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겠다!’라는 결심을 드러내는 그 어떤 명확한 태도도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이런 결심과 태도를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전처럼 사람에게 긍휼과 관용, 포용과 인내를 베푸는 대신 극도의 실망감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 ‘실망’은 누가 초래한 것이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는 누구에게 달려 있느냐? 하나님을 따르는 각자에게 달려 있다. 이토록 오랫동안 행한 사역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적지 않은 요구를 했고 사람에게 많은 환경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실천했고 하나님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졌든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목표에 따라 명확하게 실천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한 마디로 종합한 말로 방금 우리가 언급했던, 사람이 왜 하나님의 도를 행하지 못하는지에 대해, 즉 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지 못하는지에 대해 해석해 보겠다. 이 말은 무엇일까?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할 대상이자 사역할 대상으로 여겼지만 사람은 하나님을 원수이자 대립적인 상대로 여겼다는 말이다. 지금 이 사실에 대해 분명히 깨달았느냐? 사람의 태도가 무엇이고 하나님의 태도가 무엇인지,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어떠한지는 분명하다. 너희는 스스로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길을 찾는 것, 하나님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 것,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과 같은 내용들을 종합해 냈다. 하지만 너희가 도를 얼마나 많이 들었든지 상관없이, 너희가 스스로 종합한 내용들은 내 입장에서 봤을 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라’는 하나님의 도를 의식 있게 행한 것이 아니다. 그 내용들은 그저 너희가 어떤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한 경로일 뿐이다. 너희는 그런 목적들을 위해 억지로 규례들을 지키는데, 바로 그런 규례들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와 더욱 멀어지고 또다시 하나님과 대립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얘기하는 주제가 다소 무겁기는 하지만 어쨌든 나는 너희가 앞으로의 체험과 시간 속에서 방금 내가 말한 것을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하나님을 공기처럼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하나님을 공기처럼 생각해 필요할 땐 존재한다 느끼고 불필요할 땐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끼지 말기를 바란다. 네가 잠재의식 속에서 그렇게 인식할 때는 이미 하나님을 노하게 한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저는 하나님을 공기처럼 생각하지 않습니다.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흡족게 해 드리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든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범위와 원칙 기준에 맞게 실천했지 제 뜻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 실천 방식은 맞다! 하지만 일이 닥쳤을 때 너는 어떻게 생각했느냐? 일이 닥치면 어떻게 실천했느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할 때는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여기지만, 막상 일이 닥치면 하나님은 공기처럼 생각하고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을 불쑥 드러내며 자신의 뜻대로 행하려 한다. 그럴 때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필요로 할 때는 하나님이 존재해야 하고,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고 여긴다. 자신의 뜻대로 실행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해 하고 싶은 대로 하며 하나님의 도를 찾을 필요가 전혀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사람이 지금 이런 상황과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은 위험한 경계에 있는 것이 아니냐?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제가 위험한 경계에 있든 어쨌든 저는 이렇게 오랫동안 믿어 왔으니 하나님은 저를 버리실 수 없을 거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차마 버리지 못하실 테니까요.”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모태에서부터 지금까지 사오십 년간 주님을 믿었어요. 시간으로 따지면 저는 가장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고, 가장 살아남을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오십 년간 저는 가정과 직장,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돈, 지위, 향락과 가족의 단란함 같은 것도 포기했습니다. 오랜 시간 맛있는 음식도 먹지 않고, 재미있는 것도 즐긴 적이 없으며 좋은 곳에도 가 본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일반 사람이라면 견딜 수 없는 고통까지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저를 구원하지 않으신다면 너무 억울합니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저는 믿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으냐? (많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너희에게 실정을 알려 주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다 돌을 들어 제 발등을 찍는 존재들이다. 자신의 상상으로 자기 눈을 가렸기 때문이다. 그 상상과 규정이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을 대체했고, 하나님의 진실한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실한 존재를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께 온전케 될 기회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무관한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사역으로 맺게 될 결실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1)

하나님이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 방법과 기준

그 어떤 생각과 결정이 있기 전에 너는 우선 너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어떠하며,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런 다음 자신의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 정해야 한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사람의 결말을 시간을 기준으로 정한 적도, 받은 고통의 양에 따라 정한 적도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기준으로 사람의 결말을 정할까? 시간을 기준으로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 방법은 사람의 관념에 가장 부합한다. 또한 헌금을 많이 내고 헌신도 많이 하고 대가도 많이 치르고 고난도 많이 받는 등 너희가 종종 보게 되는 사람들은 다 너희의 관념으로 볼 땐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있는 대상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보여 주고 살아 내는 것은 바로 사람의 관념 속에 있는, 하나님이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 기준인 것이다. 너희가 어떻게 생각하든 너희의 관념 속에 있는 기준들을 일일이 나열하지는 않겠다. 결론적으로 말해, 하나님이 생각하는 기준이 아니라면 모두 사람이 상상해 낸 것이고, 사람의 관념이다. 네가 계속 너의 관념과 상상을 고집한다면 어떤 결과를 맞이하겠느냐? 그 결과는 아주 분명하다. 하나님은 너를 혐오하여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 원인은 네가 하나님의 마음과 뜻, 그리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알려고 하지 않고, 늘 하나님 앞에서 경험 많은 티를 내고, 하나님과 힘겨루기를 하며 논쟁하려고만 들기 때문이다. 너의 그런 행위는 자신을 높이는 것이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며,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원하지 않고 구원하지도 않을 것이다. 네가 이런 관점을 버리고 지난날의 잘못된 관점을 바로잡아 하나님의 요구에 따른다면 아주 좋겠다. 지금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행하고, 어디서든 하나님을 높이며, 자신의 상상, 관점으로 자신을 규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규정하지 않으면 참으로 좋겠다. 매사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알고 이해하면서 하나님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흡족게 한다면 그야말로 너무나 좋겠다! 이는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에 곧 들어서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이런저런 사상과 관점을 기준으로 사람의 결말을 정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과연 어떤 기준으로 사람의 결말을 정할까?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 사람의 결말을 정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기준이 있다. 첫째는 사람이 시련을 받는 횟수이고, 둘째는 시련을 통한 결과이다. 이 두 가지 기준에 따라 사람의 결말을 정한다. 이제 이 두 가지 기준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해 보자.

첫째, 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준 시련이 닥칠 때[주: 이 시련 역시 네 입장에서는 아주 사소하고 언급할 가치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하나님은 그것이 하나님의 손길이 임한 것이고, 하나님이 마련한 환경임을 분명히 알게 해 줄 것이다. 너의 분량이 작다면 하나님은 네 분량에 맞고, 네가 깨닫고 감당할 수 있는 시련들을 마련하여 너를 검증한다. 너의 무엇을 검증하겠느냐? 하나님을 향한 너의 태도를 검증한다. 이 태도가 중요한 것일까? 당연히 중요하다! 그것도 특별히 중요하다! 이 태도가 바로 하나님이 원하는 결과이기 때문에 사람의 태도는 하나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그토록 공을 들여 사람에게 이런 사역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너의 태도를 보려고 하고, 네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고 있는지 보려고 한다. 그러므로 당시 네가 깨달은 진리가 많든 적든 하나님이 주는 시련은 너에게 임할 것이다. 그리고 네가 깨닫는 진리가 많아짐에 따라 하나님은 계속해서 너에게 알맞은 시련을 마련할 것이다. 너에게 또다시 시련이 임할 때, 하나님은 그때의 네 관점과 생각과 하나님에 대한 태도에 발전이 있는지를 보고자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왜 자꾸 사람의 태도를 보려고 하시죠? 사람이 이렇게 진리를 실천하는 것을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사람의 태도까지 봐서 뭐 합니까?” 이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말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행한다는 건 그 속에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항상 사람의 곁에서 사람의 말과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마음과 생각까지 하나하나 다 살펴본다. 하나님은 사람의 선행, 사람의 잘못과 과오, 더 나아가 사람의 패역과 배반 등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일일이 기록하여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 증거로 삼는다. 하나님의 사역이 점차 깊어질수록 네가 들은 진리도 점점 많아지고, 네가 받아들인 긍정적인 사물과 긍정적인 정보와 진리의 실제도 점점 많아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도 높아질 것이며, 하나님은 너에게 더 큰 시련을 마련할 것이다. 이는 그 기간 하나님에 대한 너의 태도에 발전이 있었는지 검증하기 위함이다. 물론 그때 하나님은 너의 관점과 네가 깨달은 진리 실제가 서로 부합되기를 요구한다.

너의 분량이 점차 커짐에 따라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도 점차 높아질 것이다. 네가 어릴 때 하나님은 매우 낮은 기준을 설정해 주지만, 너의 분량이 좀 커졌을 때는 그에 상응해 조금 더 높은 기준을 설정해 줄 것이다. 그러나 네가 모든 진리를 깨닫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할까? 하나님은 너에게 더 큰 시련이 임하게 할 것이다. 더 큰 시련 가운데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것과 보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더 깊어진 네 인식과 진실한 경외심이다. 그때 하나님이 네게 요구하는 바는 네 분량이 작을 때의 요구보다 더 높고 ‘가혹’할 것이다[주: 사람의 입장에서는 가혹하겠지만 사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아주 정당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시련을 주는 기간, 하나님이 이루려는 건 어떤 걸까? 하나님은 사람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끊임없이 요구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마음을 어떻게 드려요? 저는 본분도 이행하고, 가정과 직장도 내려놓았고, 헌신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게 이미 마음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표현 아닌가요? 거기다 더 어떻게 마음을 드리라는 겁니까? 설마 이런 방식들은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행위가 아니란 말인가요? 하나님은 대체 구체적으로 뭘 요구하시는 건가요?” 그 요구는 매우 간단하다. 사실, 각 단계의 시련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정도는 다르나 이미 마음을 하나님께 드렸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 한 번도 마음을 하나님께 드린 적이 없다. 하나님이 너에게 시련을 줄 때, 하나님은 너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는지, 아니면 육체나 사탄에게로 향하고 있는지를 본다. 하나님이 너에게 시련을 줄 때, 네가 하나님과 대립하는 편에 서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입장에 서 있는지를 본다. 네 마음이 하나님 편에 있는지 없는지를 보는 것이다. 네가 어릴 때 네 믿음은 시련 가운데 한없이 나약하다. 깨달은 진리가 많지 않아서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할 수 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하지만 네가 진심을 다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도하게 하고,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모두 하나님께 바치고자 한다면, 이미 마음을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네가 들은 도와 깨달은 진리가 점점 많아지면, 너의 분량도 점차 성장하게 된다. 그때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은 네가 어릴 때 요구했던 기준이 아니라 그보다 더 높은 기준일 것이다. 사람이 마음을 점차 하나님께 드리게 되면, 마음이 점차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된다. 사람이 진실로 하나님과 가까이할 수 있게 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점점 더 생기게 된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마음이다.

하나님이 누군가의 마음을 얻으려고 할 때면 그 사람에게 여러 차례 시련을 준다. 시련들을 주는 기간, 하나님이 그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그의 어떤 태도도 보지 못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실천과 태도를 보지 못하고, 악에서 떠나려고 하는 태도와 결심도 보지 못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은 여러 차례 시련을 준 뒤 그 사람에 대한 인내심을 접고, 더 이상 관용도 베풀지 않으며 시련도 주지 않을 것이다. 또 더 이상 그 사람에게 사역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의 결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의 결말은 결말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는 어떤 악행을 저지른 게 아닐 수도 있고, 방해와 교란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감추고, 하나님에 대해 명확한 태도와 관점을 보이지 않았다. 하나님 입장에선 그가 마음을 하나님께 드렸는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기를 추구하고 있는지 명확히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더 이상 인내해 주지도, 그 어떤 대가도 지불해 주지도, 긍휼을 베풀어 주지도 않고, 더 이상 그에게 어떤 사역도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생애가 이미 끝난 것이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준 여러 번의 시련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일부 사람들에게서는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이 있었던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 사람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겉으로는 열정적으로 뛰어다녔고 책도 많이 보고 일도 많이 했다. 필기 노트도 열권이 넘고, 글귀와 이치도 많이 이해했다. 하지만 발전하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하나님에 대한 관점이나 명확한 태도도 전혀 볼 수 없었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은 늘 베일에 싸여 있고 봉쇄되어 있었다. 하나님을 향해 봉쇄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서 진실한 마음을 보지 못했고,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경외심도 보지 못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도를 어떻게 행했는지는 더더욱 보지 못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지금까지도 얻지 못했는데 이후라고 얻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얻지 못할 대상에게 하나님이 강요를 하겠느냐? 강요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그런 부류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어떠하겠느냐? (혐오하여 포기하시고 상대하지 않으십니다.) 상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상대하지 않고 혐오하여 포기한다. 너희는 그 말을 아주 빠르고 정확하게 기억했구나. 아주 잘 알아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처음 하나님을 따를 때 어리고 무지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할지도 몰라 인위적이고 잘못된 방식으로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 시련이 닥쳐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깨우침과 인도에 대해 아주 무감각하다.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무엇인지, 시련 속에서 굳게 서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어느 정도의 기한을 주어 그 기한 내에 하나님이 주는 시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고, 그런 다음 자신의 관점을 밝힐 수 있도록 한다. 하나님은 그 단계에 있는 사람을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 자신의 관점들로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려 흔쾌히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고, 일부 기본적인 진리들은 실천하면서도 큰 시련이 닥치면 이내 도망가고 포기하려는 사람에 대해 하나님은 어떤 태도를 취할까?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도 여전히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다. 그 결과는 사람의 태도와 행동에 달렸다. 사람이 적극적으로 발전해 나가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겠느냐? 포기한다. 하나님이 너를 포기하기 전에 네가 이미 스스로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너는 하나님이 너를 포기했다고 탓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냐? 이렇게 하는 것이 공평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사역으로 맺게 될 결실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2)

사람은 하나님을 따르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중요시하는 경우가 드물고, 하나님의 마음과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경우도 너무도 적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과 관련되거나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된 질문을 던지면 갈피를 못 잡고 당황해 추측하거나 아무 대답이나 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태도이냐? 이는 하나의 사실을 증명한다. 즉,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있는 듯 없는 듯한 공기 같은 존재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 이렇게 말할까? 그것은 너희가 일이 닥칠 때마다 늘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이다. 왜 모를까? 지금 모르는 것이 아니라 시종일관 이 일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태도를 꿰뚫어 보지 못하고 알지도 못할 때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구해 본 적이 있느냐? 교제해 본 적이 있느냐? 없다! 이것은 하나의 사실을 실증한다. 즉, 네가 믿는 하나님과 진정한 하나님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너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자신의 뜻만 되새기고 리더의 뜻만 되새기며, 하나님 말씀 겉면의 도리적인 뜻만 되새길 뿐,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거나 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으냐? 이런 상황의 본질은 아주 심각하다! 오랜 세월 나는 하나님을 믿는 많은 사람을 보아 왔다. 그들은 하나님을 무엇으로 믿어 왔느냐?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을 공기처럼 대하며 믿어 왔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묻는 질문에 대해 답이 없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느끼지도 의식하지도 못했고, 분명한 깨달음과 인식은 더 말할 나위도 없으며, 잠재의식상에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람처럼 대하며 믿어 왔다. 즉,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은 하나님도 하지 못한다고 여기고,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도 생각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또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을 목석으로 대하며 믿어 왔다. 그들은 하나님에겐 희로애락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석상 같아서 어떤 일에도 태도나 관점이나 생각이 없고, 사람의 뜻에 지배당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위대한 존재로 여겼다가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겼다가 하며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과 사랑이 필요할 때는 하나님이 마땅히 긍휼을 베풀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머리로 ‘하나님’을 상상해 낸다. 그렇게 상상해 낸 ‘하나님’이 자신들의 필요를 공급할 수 있게 하고, 자신들의 모든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게 한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하든 이런 상상으로 하나님을 대하고 하나님을 믿는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렀으면서도 하나님이 구원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한량없고 하나님의 성품은 공의로우니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을 거슬러도 하나님은 기억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의 잘못, 과오, 패역은 일시적으로 드러난 성품이니 하나님은 사람에게 기회를 주고 관용을 베풀고 인내할 것이고, 예전처럼 사랑할 것이므로 여전히 구원받을 가망이 많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믿든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입장에선 사람에 대해 부정하는 태도를 취한다. 너는 하나님을 믿는 동안 하나님 말씀 책을 보배처럼 여기면서 날마다 보고 읽었겠지만, 막상 진정한 하나님은 한쪽에 방치해 두고 그를 공기처럼, 사람처럼 여겼고,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아예 목석처럼 대했기 때문이다. 내가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내 눈으로 본 바에 의하면 일이 닥치든, 어떤 환경을 만나든, 너희의 잠재의식 속에 존재하는 것과 내면에서 나오는 것 모두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것과 무관했기 때문이다. 너는 그저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고, 자신의 관점이 무엇인지만 안다. 자신의 생각과 관점을 억지로 하나님께 씌워 하나님의 관점이라고 할 뿐만 아니라 그 관점을 준칙으로 여겨 고수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너는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게 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사역으로 맺게 될 결실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3)

하나님의 태도를 알고 하나님에 대한 각종 오해를 버려라

너희가 지금 믿고 있는 이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그는 악인의 악행을 보면 증오할까? (네.) 그는 우매한 사람의 잘못을 보면 어떤 태도를 취할까? (슬퍼하십니다.) 그는 사람이 제물을 훔쳐 먹는 것을 보면 어떤 태도를 취할까? (증오하십니다.) 다들 잘 알고 있다. 그렇지? 사람이 하나님을 흐리멍덩히 믿으면서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어떤 태도를 취할까? 너희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렇지? ‘흐리멍덩한’ 태도는 죄를 짓거나 하나님을 거스른 것이 아니니 사람은 그렇게 큰 잘못이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태도를 취할까? (상대하려고 하시지 않습니다.) ‘상대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속에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바로 이런 자를 경시하고 멸시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 대해 차갑게 무시하는 태도를 취한다. 한쪽에 내버려 두는 것이다. 즉, 깨우침과 빛 비춤, 채찍질과 징계 등 그 어떤 사역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 부류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에서 열외로 취급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을 거슬러 노하게 하고 자신의 행정 법령을 거스른 사람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할까? 극도로 혐오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을 거슬러 노하게 하고도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에 대해 극도로 노한다! ‘노’는 일종의 정서이고 심정일 뿐 명확한 태도를 뜻하지는 않지만 이런 정서와 심정은 그 사람에게 어떠한 결말을 가져다줄 것이다. 하나님이 극도로 혐오하는 결말이다! 그렇다면 ‘극도로 혐오’하여 초래되는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은 그 사람을 일단 상대하지 않고 한쪽에 내버려 두었다가 ‘추수 후’ 일괄적으로 처리한다. 그 뜻은 무엇이겠느냐? 그런 사람에게 결말이 있겠느냐? 하나님은 이 부류 사람들에게 결말을 줄 생각이 없다! 그러니 하나님이 지금 이런 자들을 상대하지 않는 것은 매우 정상 아니냐? (맞습니다.) 이런 사람은 지금 무엇을 준비해야 하겠느냐? 자신이 저지른 악행과 자신의 행위로 초래된 나쁜 결과를 감당할 준비를 해야 한다! 이것이 이런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답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이 부류의 사람들에게 명확히 알려 주겠다. 어떤 환상도 가지지 말고, 더 이상 그 어떤 요행심도 품지 마라. 하나님은 사람에게 관용을 끝없이 베풀지 않을 것이고, 사람의 과오와 패역을 한없이 참아 주지도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도 그 부류의 사람들을 몇몇 만나 봤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큰 감동을 받아 눈물 흘리며 통곡하더군요. 평소에도 무척 즐거워하는 걸 봐선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하나님의 인도가 있는 것 같았어요.” 이런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된다! 눈물 흘리며 통곡한다고 해서 꼭 하나님께 감동받거나 하나님이 함께한다고 볼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인도가 있다고는 더더욱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을 거슬러 노하게 했는데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인도하겠느냐?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도태시키고 포기하려고 작정했을 때는 이미 그 사람의 결말은 없어진 것이다. 그가 기도하며 스스로 얼마나 만족스러워하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얼마나 크든 그런 것은 이미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은 그런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고, 이미 그를 혐오하여 포기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앞으로 그런 사람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그가 하나님을 거슬러 노하게 한 그 순간 그의 결말은 이미 정해졌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만약 하나님이 그 사람을 구원하지 않기로 작정했다면, 하나님은 그를 남겨 두었다가 벌을 받게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태도이다.

하나님의 본질에는 사랑이라는 요소가 있어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푼다. 하지만 사람은 그의 본질에 존엄이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잊어버린다. 그에게 사랑이 있다고 해서 사람이 그를 제멋대로 거슬러도 아무 느낌과 반응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에게 긍휼이 있다고 해서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 원칙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은 살아 있고 진실로 존재하는 분이지, 사람이 상상해 낸 목석이나 어떤 물체가 아니다. 그가 존재하는 이상 우리는 마땅히 매 순간 그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태도를 중시하며, 그의 느낌을 알아야 한다. 사람의 상상으로 하나님을 규정해서는 안 되고, 자기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바라는 바를 하나님께 강요하여 사람의 방식과 상상대로 사람을 대해 달라고 해서도 안 된다. 네가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을 거슬러 노하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노를 시험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존엄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가 이 심각성을 알았다면 너희 모두 조심스럽게 행하고, 말하며, 하나님을 대할 때 부디 신중하고 또 신중하며 조심하고 또 조심하기를 권고한다! 하나님의 태도가 어떤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함부로 말하지도, 일을 하지도 말며, 함부로 딱지를 붙이지 말고, 함부로 결론짓는 일은 더욱 하지 말아야 한다. 기다리면서 구해야 한다. 이 역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행실이다. 네가 우선 이렇게 행할 수 있고 이런 태도를 갖출 수 있다면, 하나님은 네가 무지몽매하고 사리를 모른다고 탓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하는 너의 태도로 인하여 너를 기억하고 인도해 깨우쳐 주거나 혹은 어리고 무지한 너에게 관용을 베풀어 줄 것이다. 그와 반대라면, 함부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하나님의 뜻을 추측하며 정의를 내리는 너의 오만불손한 태도 때문에 하나님은 너를 정죄하고 징계할 것이다. 나아가 너에게 벌을 주거나 결론을 내릴 것이다. 이 결론은 아마 너의 결말과 관련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강조한다. 너희 모두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모든 것을 대함에 있어 신중을 기해야 한다. 함부로 말해서도 안 되고 함부로 일해서도 안 된다. 말을 하기 전에 먼저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지 않을까?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일까?’라고 생각해 봐야 한다. 단순한 일일지라도 마음속으로 많이 되새겨 보고 많이 생각해 봐야 한다. 네가 정말 언제 어디서나 매사에 이런 원칙에 따라 실천하고, 특히 네가 모르는 일에서도 이런 태도를 취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언제나 너를 인도하며 실천의 길을 열어 줄 것이다. 사람이 어떤 행실을 보이든 하나님 쪽에서는 모든 걸 분명하고 명확하게 보고 있을 것이며, 너의 행실에 따라 정확하고 합당한 평가를 내려 줄 것이다. 네가 마지막 시련을 겪을 때, 하나님은 너의 모든 행위를 종합하여 너의 결말을 정할 것이고 그 결과에 대해 사람들은 모두 진심으로 탄복할 것이다. 이 자리에서 내가 너희에게 알려 주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너희가 행한 모든 것과 마음속으로 생각한 모든 것이 너희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사역으로 맺게 될 결실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4)

사람의 결말은 누가 정하는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대하는 너희의 태도이다. 이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 이 태도는 너희가 최종적으로 멸망에 이를지, 아니면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 예비한 아름다운 종착지에 들어갈 것인지를 결정한다. 하나님나라시대(역주: 왕국시대)에 하나님은 이미 20년 넘게 사역하였다. 20년이 넘는 이 기간 동안 너희는 자신의 행실에 대해 다소 모호하겠지만,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모든 사람의 행실을 확실하고 진실하게 기록해 놓았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고 자신이 전하는 도를 듣기 시작해서부터 점점 더 많은 진리를 깨닫고 본분을 이행하기까지, 사람이 이 기간에 보였던 각종 행실을 다 기록해 두었다. 본분을 이행하는 동안 여러 가지 환경이나 시련이 닥치면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여러 행실이 어떠하였는지, 마음속으로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였는지 등을 하나님은 기록부에 다 기록해 두었다. 이런 일들이 너희에게는 아마 무척 흐릿하겠지만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전혀 흐릿하지 않고 매우 분명하다. 모든 사람의 결말, 모든 사람의 운명 및 앞날과 관련 있으며, 하나님의 모든 심혈이 들어가 있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 쪽에서는 조금도 등한시하지 않고 한 치의 소홀함도 용납하지 않는다. 사람을 위해 이런 기록부를 작성하는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을 따른 노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기록해 두고 있다. 이 기간 하나님을 대하는 너의 태도가 어떠했는지가 바로 너의 운명을 결정한다. 이는 무척 진실하지 않으냐? 지금까지 너희는 하나님이 매우 공의롭다고 생각하지 않았느냐? 하나님이 이렇게 하는 것은 아주 적절하지 않으냐? 너희는 하나님에 대해 또 다른 상상을 하고 있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너희의 결말을 하나님이 정하는 건지, 아니면 사람이 스스로 정하는 건지 말해 보아라!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누가 정한다고? (하나님이요.) 여전히 모르는구나! 홍콩의 형제자매들이 먼저 말해 보아라. 누가 정하느냐? (사람이 스스로 정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정한다고? 그 말은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다는 뜻이냐? 한국의 형제자매들이 말해 보아라.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든 행위와 가는 길에 근거해 사람의 결말을 정하십니다.) 객관적인 대답이었다. 너희에게 알려 줘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하나님은 구원 사역을 하는 기간 사람에게 기준을 하나 정해 주었다. 그 기준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하나님의 도를 행하는 것이다. 이 기준으로 사람의 결말을 가늠한다. 네가 하나님의 이 기준에 따라 행한다면 좋은 결말을 얻을 것이다. 반대로 이 기준에 따라 행하지 않는다면 좋은 결말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결말을 누가 정하는지 말해 보아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정하는 것이다. 이 말이 맞느냐? (맞습니다.) 왜 이렇게 말할까?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구원 사역을 하며 아름다운 종착지를 예비해 준다. 사람은 하나님이 사역하는 대상으로, 위에서 말한 결말과 종착지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예비해 주는 것들이다. 사역 대상이 없다면 하나님은 이런 사역을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사역을 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구원받을 기회가 없어진다. 사람은 구원받는 대상이다. 구원받는 대상이란 게 수동적이긴 하지만 이 대상의 태도가 하나님의 인류를 구원하는 사역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결정된다. 하나님의 인도가 없으면 너는 기준도 모르고 목표도 없다. 기준과 목표가 있더라도 네가 협력하지 않고 실천으로 옮기지 않고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면, 너는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결말은 하나님과도, 사람과도 떨어질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제 대체 누가 결말을 정하는 건지 알았겠지?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사역으로 맺게 될 결실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5)

사람은 경험으로 하나님을 규정하기 좋아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관련한 주제를 교제할 때, 너희는 어떤 사실 하나를 발견하지 못했느냐? 지금 하나님의 태도가 바뀐 것을 발견하지 못했느냐?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고정불변한 것이냐? 하나님이 계속 그렇게 인내하고, 계속 사랑과 긍휼을 사람에게 무제한으로 베풀어 주겠느냐? 이는 하나님의 본질과 관련이 있다. …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의 상징으로 규정해 버린다. ‘하나님께는 사랑이 있고 또한 하나님의 사랑은 한량없기 때문에 사람이 무엇을 하든, 어떻게 행동하고 하나님을 대하든, 어떻게 거역하든 다 괜찮아.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사람을 포용해 주시고 긍휼히 여겨 주실 거야. 어리고 무지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사람의 패역도 긍휼히 여기실 거야.’ 정말 그러할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인내를 한 차례 혹은 몇 차례 느끼고 난 후 그 경험을 하나님을 알게 된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한 번으로 인해 하나님은 영원히 자신을 인내해 주고 긍휼히 여겨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인내가 자신을 대하는 하나님 태도의 기준이라고 평생토록 여긴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한 번 관용을 베푼 것을 가지고 영원히 관용을 베풀어 줄 거라고 규정지어 버린다. 게다가 그 관용이란 기한도 조건도 없고, 나아가 아무 원칙도 없는 관용이다. 이런 인식법이 맞느냐?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너희는 어리벙벙해지는데, 너희의 그런 모습을 보면 정말 안타깝기 그지없다. 너희는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진리와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얘기를 적지 않게 들었다. 하지만 너희 머릿속에는 이런 내용들과 이런 측면의 진리들이 그저 이론과 글자로만 기억되어 있을 뿐, 지금까지 아무도 실생활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어떤지 느끼거나 보지 못했다. 그래서 너희 모두 흐리멍덩하고 맹목적으로 믿고 있고, 하나님에 대해 오만불손하고 무시하는 태도까지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너희의 이런 태도로 어떤 상황이 초래되었느냐? 너희는 늘 하나님을 규정하게 되었다. 조금만 알아도 아주 만족스러워하며 하나님의 전부를 얻었다고 생각하곤 하나님을 그곳에 규정지어 놓고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그러다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하면 그를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어느 날 하나님이 “나는 더 이상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더 이상 긍휼을 베풀어 주지 않는다. 나는 사람에게 더 이상 그 어떤 관용과 인내도 베풀지 않는다. 나는 사람에게 극도의 혐오감과 반감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면 사람은 속으로 이 말에 반발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심지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더 이상 저의 하나님이 아니고, 더 이상 제가 따르려고 했던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런 말씀을 하신다면 당신은 저의 하나님이 될 자격이 없고 저는 당신을 계속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저에게 긍휼과 사랑과 관용을 베풀어 주시지 않는다면 당신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저에게 한없이 관용을 베풀어 주시고 인내해 주시면서 사랑과 인내와 관용이 있는 분이심을 보여 주셔야 저는 당신을 따를 것이고, 끝까지 따라갈 자신이 있습니다. 당신의 인내와 긍휼이 있어야 저의 패역과 과오가 한없이 용서받고 죄 사함 받을 수 있으며, 그래야 제가 언제 어디서 죄를 지어도 언제든 죄를 자백하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제가 언제 어디서 당신을 거슬러 노하게 해도 당신은 저에 대해 그 어떤 견해를 가지거나 규정을 내려선 안 됩니다.” 물론 사람마다 마음속으로 이런 문제에 대해 이렇게 주관적이고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자신의 죄를 사해 주는 도구나 아름다운 종착지를 가져다주는 이용 대상으로 생각할 때, 너는 이미 무의식적으로 생생히 살아 있는 하나님을 네 대립 면에 놓고 원수로 삼은 것이다. 이것이 내 눈에 비친 모습이다. 네가 아무리 말끝마다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저는 진리를 추구합니다”, “저는 성품이 변화되고 싶습니다”, “저는 흑암 권세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흡족게 해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충성하며 본분을 잘 이행하고 싶습니다” 등등 듣기 좋은 말을 하고, 번지르르 그럴듯한 이론을 많이 갖추었다 할지라도, 실제론 지금껏 많은 사람이 자신이 익힌 규례나 도리, 학설로 하나님을 규정하는 것을 배웠고, 그렇게 자연스레 하나님을 자신과 대립하는 편에 놓아두게 되었다. 글귀와 도리는 익혔지만 진정으로 진리의 실제에는 진입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알며, 이해하는 수준에 이르기가 매우 어렵다. 이는 참 슬픈 일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사역으로 맺게 될 결실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6)

하나님이 사역하는 기간 도망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

하나님의 도에 대해 확신했으면서도 여러 이유로 인해 아무 말 없이 떠나 버리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다. 그들은 작별 인사도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마음대로 떠나 버린다. 그런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떠났는지에 대해서는 일단 접어 두고, 먼저 그런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살펴보자. 하나님의 태도는 아주 분명하다! 하나님은 그 사람이 떠난 그 순간부터 그의 하나님을 믿는 생애는 이미 끝난 것으로 간주한다. 그 사람이 스스로 마침표를 찍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마침표를 찍어 준 것이다. 그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건 이미 하나님을 원치 않아 저버렸다는 것을 의미하고, 더 이상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하나님을 원하지 않는데 하나님이라고 그를 원하겠느냐? 또한 이런 태도와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떠나려고 작정했을 때 그는 이미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러 노하게 만든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은 길길이 날뛰면서 하나님께 손가락질하며 욕하지 않았고, 과격하거나 악랄한 행위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밖에서 놀 만큼 놀고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느껴지면 그때 다시 돌아올 거야.’,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면 다시 돌아올 거야.’ 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제가 밖에서 상처 입거나, 바깥세상의 어둡고 사악한 면을 보고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 싶지 않게 되면, 다시 돌아와 하나님을 찾을 것입니다.” 그들은 언제 다시 돌아올 거라고 속으로 계산해 놓았고, 자신을 위한 퇴로를 남겨 두었지만 그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다. 자신들이 어떤 생각과 계획을 가지고 있든 그것은 혼자만의 바람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자신들이 떠나려고 할 때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한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을 떠나려고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하나님은 그 사람을 철저히 포기했고, 속으로 이미 그의 결말을 정해 두었다. 어떤 결말일까? 그 사람을 쥐들과 같이 분류해 두었다가 그 쥐들과 함께 멸망당하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상황을 종종 보게 된다. 누군가 하나님을 저버렸는데 징벌을 받지 않는 상황 말이다. 하나님은 원칙 있게 일을 한다. 어떤 일들은 사람이 볼 수 있지만, 어떤 일들은 하나님이 마음속으로만 정해 뒀기에 사람은 그 결과를 보지 못한다. 사람의 눈에 보인다고 해서 진실한 일면이라고 할 수는 없다. 네가 보지 못한 일면이야말로 하나님 마음속에 있는 진실한 생각과 결정이다.

하나님이 사역하는 기간 도망친 사람은 참도를 배반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런 사람에게 이렇게 심한 징벌을 내릴까? 하나님은 왜 이런 사람에게 이렇게 크게 노할까? 먼저 하나님의 성품은 위엄과 진노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는 아무에게나 죽임을 당하는 온순한 양이 아니고, 사람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꼭두각시는 더더욱 아니며, 사람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공기도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네가 참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하나님의 본질을 거슬러 노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거슬러 노하게 한다’는 것은 아마 한 마디 말 때문일 수도 있고, 어떤 생각 때문일 수도 있으며, 어떤 악랄한 행위 때문일 수도 있다. 또는 어떤 아주 온화한 행위, 사람의 관점에서나 사람의 도덕 윤리적 관점에서 봤을 땐 넘어갈 수 있는 행위 때문일 수도 있다. 어떤 학설이나 이론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네가 일단 하나님을 거슬러 노하게 하면 너의 기회는 사라져 버리고, 그에 따라 너의 마지막 날도 다가오게 된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네가 만약 하나님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고, 걸핏하면 하나님을 거스르게 될 것이다. 만약 네가 하나님을 어떻게 경외해야 하는지를 모른다면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 수 없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라’는 하나님의 도를 어떻게 행해야 할지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일단 네 마음속에 하나님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생기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인지 알게 된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라는 도는 네가 많은 진리를 깨닫고 시련을 겪고 징계를 경험해야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네 마음속 태도와 네가 드러내는 본질이다. 사람의 본질과 사람의 주관적인 태도가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하다. 하나님을 저버리고 떠난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시하는 태도와 진리를 혐오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러 노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기에 그들은 영원토록 용서받지 못할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하나님이 이미 왔다는 소식도 들었으며, 심지어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도 체험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미혹된 상황이나 흐릿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니고, 강요당해 떠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의식과 정신이 맑은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떠나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들은 방향을 잃거나 버려지게 되어 떠난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기에 그들은 양 떼에서 잃어버린 어린양이 아니고, 방향을 잃은 탕자는 더더욱 아니다. 그들은 제멋대로 거리낌 없이 떠난 사람들인데, 그들의 이런 상태와 상황이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러 노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러 노하게 한’ 것이 그들에게 수습할 수 없는 결말을 가져다준 것이다. 이런 결말이 무섭지 않으냐?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면 하나님을 거스를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절대 사소한 일이 아니다! 만약 누군가 하나님은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을 거라고 여기고, 자신은 하나님의 잃어버린 어린양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직도 그가 마음을 돌려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징벌받을 날이 멀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거기다 그는 하나님의 성품을 다시 한번 거슬러 노하게 만들었다. 이는 더욱 무서운 일이다! 하나님에 대한 그 사람의 오만불손한 태도가 이미 하나님의 행정 법령을 거슬렀는데, 하나님이 그를 받아들이겠느냐? 사람이 참도를 확신한 후 의식이 또렷하고 정신이 맑은 상태에서도 하나님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멀리해 떠난다면, 하나님은 그가 구원받는 길을 막아 버린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대문은 그 순간부터 그 사람에게는 닫힌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런 일을 처리하는 원칙이다. 그 사람이 다시 문을 두드릴 때 하나님은 더 이상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것이며, 그는 영원히 문밖에 버려질 것이다. 너희 중 일부는 아마 성경 속 모세 이야기를 읽어 보았을 것이다. 하나님이 모세를 세운 뒤 250명의 족장들은 모세의 여러 행실과 각종 이유 때문에 불복하는 마음을 드러냈다. 그들은 누구에게 불복한 것이냐? 그들은 모세에게 불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배에 불복한 것이고, 하나님의 행사에 불복한 것이다. 그들은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이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은 사람이 보기에 매우 심각하냐? 심각하지 않다! 최소한 글자 자체로 표현된 뜻은 심각하지 않고, 법적으로도 별일이 아니다. 표면적으로 봤을 때 반항하는 말이나 단어가 없고, 모독의 뜻도 없다. 그저 평범한 말에 불과하다. 그런데 왜 이 한마디가 하나님의 큰 노를 불러일으켰을까? 그들의 이 말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겨냥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한 몇 마디 말에 나타난 성품과 태도는 바로 하나님의 성품, 거슬러서는 안 되는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렀다. 그들의 최종 결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다. 일찍이 하나님을 떠난 적이 있는 사람의 관점과 태도는 무엇이고, 왜 그의 관점과 태도는 하나님의 이런 처분을 초래한 걸까? 그 이유는 하나님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배반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받을 기회를 완전히 박탈당한 것이다. 성경에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라고 한 것과 같다. 이제는 이 일에 대해 잘 알았겠지?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사역으로 맺게 될 결실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7)

사람의 운명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태도에 따라 결정된다

하나님은 살아 있는 하나님이다. 어떤 일에 부딪히면 사람들은 각기 다른 행실을 보인다. 하나님은 사람의 각기 다른 행실에 따라 다른 태도를 취하는데, 이는 그가 목석도 아니고 공기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태도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의 태도를 알아 가면서 조금씩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조금씩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다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이 아주 어려운 일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이해하게 되면 하나님을 쉽게 규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더 이상 하나님을 규정하지 않게 되면 하나님을 쉽게 거스르지 않을 것이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이 너를 인도하여 하나님을 알게 해 줄 것이다. 이로써 너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또한 더 이상 자신이 알고 있는 글귀의 이치나 이론을 하나님께 씌우지 않고,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이 될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하는 사역을 보지 못하고 짐작하지도 못하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모든 사람의 행위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를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볼 수도 있다. 이는 사람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부분이다. 만약 네가 속으로 늘 이런 생각을 품고 있다고 해 보자. ‘내가 여기에서 이렇게 하는 걸 하나님이 아실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걸 하나님이 아실까? 아실 수도 있고 모르실 수도 있을 거야.’ 네가 한편으론 이런 관점을 가진 채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또 한편으론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한다면 언젠가는 하나님을 거슬러 노하게 할 것이다. 너는 이미 위험한 경계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보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으면서도 진리 실제를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은 더더욱 모르며, 생명과 분량이 전혀 자라지 않는 사람, 얕디얕은 수준의 도리밖에 지키지 않는 사람 말이다. 그렇게 된 원인을 살펴보면 그들은 지금껏 하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생명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고, 하나님의 존재를 직시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보면 기뻐하겠느냐? 마음에 위로가 되겠느냐?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방식이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추구하고 하나님을 대하는지, 사람의 태도가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을 공기처럼 여겨 뒷전에 미뤄 두지 말고, 네가 믿는 하나님은 살아 있고 확실히 존재하는 하나님임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는 셋째 하늘에서 할 일 없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시시각각 사람들의 마음과 모든 언행을 감찰하고 있으며, 너의 행실과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를 감찰하고 있다. 너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기 원하든 원치 않든 너의 모든 행위와 마음과 생각은 다 하나님 앞에 놓여 있고, 하나님의 감찰을 받고 있다. 너의 일거수일투족으로 인해, 너의 태도로 인해 하나님은 끊임없이 너에 대한 견해를 바꾸고 있고, 너에 대한 태도를 바꾸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일부 사람들에게 충고하고자 한다. 자신을 하나님 손안의 귀염둥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하나님이 너를 매우 총애하고 하나님에겐 네가 없으면 안 된다고 착각하지 말고, 너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고정불변이라고 착각하지도 말아라. 꿈꾸지 마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공의롭게 대한다. 그는 아주 신중하고 엄숙하게 정복 사역과 구원 사역을 행한다. 이것이 그의 경영이다. 그는 모든 사람을 엄격하고 진지한 태도로 대한다. 사람을 애완동물처럼 어르고 달래지 않는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총애나 지나친 애정이 아니다. 사람에 대한 긍휼과 관용은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는 방임이 아니다. 반대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아끼고, 가엾게 여기며,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긍휼과 관용에는 그의 기대가 깃들어 있으며, 그의 긍휼과 관용은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밑천이다. 하나님은 살아 있는 분이고, 실제로 존재하는 분이다. 사람에 대한 그의 태도에는 원칙이 있다. 그 원칙은 바뀔 수 있는 것이지 절대로 규례가 아니다. 인류에 대한 그의 마음은 시간과 환경에 따라, 사람들의 태도에 따라 점차 바뀌고 달라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질은 변함이 없지만 하나님의 성품은 시간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아마 너는 이 일을 그리 심각하지 않게 여기면서 너의 고정 관념으로 하나님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상상할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일은 너의 관념과 정반대이다. 네가 자신의 관념으로 하나님을 가늠하는 순간, 너는 이미 하나님을 거슬러 노하게 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절대로 네 상상대로 행하지 않을 것이고, 절대로 너의 말처럼 일을 대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너에게 네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신중하게 대하라고 일깨워 주고자 한다. 또한 범사에 ‘하나님의 도를 행하는 것, 곧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원칙에 따라 실천하는 법을 배우라고 일깨워 주고자 한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태도에 관한 일을 대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올발라야 하고, 분별이 있는 사람들과 교제하며 성실히 구해야 한다. 네가 믿는 하나님을 장난감처럼 여겨 함부로 판단하거나 결론을 내리거나 오만불손한 태도로 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고 너의 결말을 정하는 과정에서 너에게 긍휼과 관용을 베풀든, 심판과 형벌을 주든 결론적으로 너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너의 태도와 인식에 달려 있다. 네가 하나님의 어떤 면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해서 그걸 가지고 영원히 하나님을 규정해서는 안 된다. 죽은 하나님을 믿지 말고 살아 있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기억했겠지? 내가 한 말들은 사실이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지금 너희의 내적 상태와 분량을 감안해 나는 더 높은 요구로 너희의 적극성을 꺾고 싶지 않다. 그런 식으로 너희 마음을 처량하게 만들거나 하나님에 대해 큰 실망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 반대로 나는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존중하는 태도로 앞을 향해 나아가기 바란다. 하나님을 믿는 일을 흐리멍덩하게 대하지 말고, 가장 큰 일로 여겨 마음속에 담아 두고, 실제와 연결 짓고 실생활과 연결 짓기를 바란다. 입에만 달고 있지 말아라. 왜냐하면 이 일은 목숨과 결부된 일이고, 너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일을 우스갯소리나 아이들 장난으로 여기지 마라! 오늘 너희와 나눈 말을 통해 너희가 뭐라도 깨닫고 얻은 것이 있는지 모르겠구나. 내가 한 말에 대해 또 궁금한 것이 있느냐?

이런 주제는 다소 새롭기도 하고, 너희의 관점이나 너희가 평소 추구하고 중시하던 것과는 좀 거리가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교제하고 나면 내가 한 말들에 대해 너희에게 공통의 인식이 생길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주제들은 아주 새롭고 너희가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다. 이런 말들이 너희에게 부담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오늘 이런 말을 하는 목적은 너희에게 겁을 주거나 이런 방식으로 너희를 책망하려는 게 아니라 진실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어쨌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거리가 있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태도도 알지 못한다. 그뿐 아니라 사람은 하나님의 태도에 대해 그렇게 열성적으로 관심을 갖지도 않는다. 무턱대고 믿다 보니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흐리멍덩하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내용에 대해 분명하게 이야기해 너희가 알게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즉, 너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그가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각 부류의 사람에 대한 그의 태도는 어떤지, 너희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그의 요구와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지, 그가 요구한 기준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에 대해 말이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너희들 각자의 마음속에 판단의 기준이 생겨 자신이 이 길에서 무엇을 얻었는지, 아직 얻지 못한 것은 얼마나 되는지, 아직 발을 들여놓지 않은 영역은 무엇인지 알게 하려는 것이다. 평소 너희가 교제할 땐 일부 사람들이 늘 말해 오던 주제만 다루다 보니 교제의 범위가 매우 좁고 내용도 너무 얕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범위 기준과 거리가 멀고 차이도 난다. 계속 이대로 나간다면 하나님의 도에서 점점 멀어질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기존 말씀을 그저 숭상할 대상으로 삼고, 의식과 규례로만 삼게 될 뿐이다. 그게 다이다! 사실 너희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자리가 전혀 없고, 또 하나님은 지금까지 너희 마음을 얻은 적도 없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아 가는 일이 매우 어렵다고 여긴다. 그것도 솔직한 말이다. 확실히 좀 어렵다! 본분을 이행할 때 사람에게 외적인 일을 하라고 하거나 열심히 일하라고 하면 하나님을 믿는 일이 아주 쉽다고 여길 것이다. 이는 다 인류의 능력 범위 안에 있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나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와 관련된 영역은 사람에게 있어 분명 어려움이 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실제에 진입하는 일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어려움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네가 첫걸음을 떼고 진입하기 시작하면 어려움은 점차 줄어들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사역으로 맺게 될 결실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8)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시작이다

방금 누가 “저희는 하나님에 대해 욥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데 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까요?”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대해선 전에도 살짝 언급한 적이 있다. 그렇지? 사실 우리는 이 문제의 본질에 대해서도 얘기했었다. 당시 욥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했고, 하나님을 천지 만물의 주재자로 여겼다. 그는 하나님을 원수로 여기지 않았고 창조주로 여겨 경배했다. 그런데 지금의 사람은 왜 하나님을 이렇게도 대적할까? 왜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할까? 첫 번째 원인은, 지금의 사람은 사탄에 의해 심히 패괴되었고, 사탄의 본성이 깊이 뿌리박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과 맞서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본성으로 결정된 것이다. 두 번째 원인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는 있지만 하나님을 전혀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고, 사람의 대립 상대로 여기고 사람의 원수로 여기면서 하나님과 맞서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원인은 이처럼 간단하다. 이것도 조금 전 교제할 때 언급하지 않았느냐?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이 원인이 맞지 않으냐? 설령 네가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좀 있을지라도 너의 인식은 어떤 것이냐? 모두들 이야기하고 있는 것 아니냐? 하나님이 알려 준 것 아니냐? 너는 고작 이런 것과 관련된 이론과 도리만 알 뿐이다. 하나님의 진실한 일면에 대해 깨달은 것이 있느냐? 주관적인 인식을 갖고 있느냐? 실제적인 인식과 체험이 있느냐? 하나님이 알려 주지 않는다면 알 수 있겠느냐? 이론을 알았다고 해서 진실한 인식을 갖추고 있음을 뜻하는 건 아니다. 결론적으로 네가 어떻게 알게 되었든, 얼마나 알고 있든 하나님을 진실하게 알기 전까진 하나님은 너의 원수인 것이다. 또한 네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기 전까진 하나님은 여전히 너와 대립되는 지점에 서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네가 사탄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네가 그리스도와 함께할 때 너는 아마 하루 세끼 시중들며, 차를 대접하고 물을 떠다 드리며, 그의 생활을 돌볼 것이다.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대하는 것 같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일이 생기면 사람의 관점은 늘 하나님과 어긋나고, 사람은 늘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람이 겉으로는 그와 화목하게 지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그와 마음이 잘 맞음을 뜻하진 않는다. 일단 일이 생기면 사람은 거역하는 본색을 드러낸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과 대치된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렇게 대치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과 대립하는 것도, 하나님이 사람을 적대시하는 것도, 하나님이 사람을 자신과 대립되는 지점에 놓고 대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의 주관적인 의지와 잠재의식 속에 하나님과 대립되는 이런 본질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온 모든 것을 연구 대상으로 삼기에 하나님에게서 온 것을 대하거나 하나님과 관련된 것을 대할 때 가장 먼저 보이는 반응은 추측과 의심이다. 그런 다음 사람은 재빨리 저항하는 태도를 취하여 하나님과 대립할 것이다. 이어서 부정적인 감정을 품고 하나님을 ‘논박’하거나 하나님과 겨루려 들 것이다. 심지어 이런 하나님을 따를 가치가 있는지 의심하기까지 할 것이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이성적으로는 알더라도 어쩔 수 없이 이런 선택을 하게 될 것이고, 더 나아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이 선택을 끝까지 고수할 것이다. 가령 하나님에 관한 어떤 유언비어나 비방을 들었을 때 사람의 첫 번째 반응은 무엇일까? ‘그 유언비어가 사실인지, 거짓인지, 존재하는지, 아닌지 모르니 조용히 지켜봐야지.’라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런 다음 ‘이 일이 정말 있었는지 없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네. 이 유언비어는 진짜일까?’라고 생각해 본다. 물론 겉으로는 아무런 태도도 취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이미 의심하기 시작했고, 하나님을 부인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태도와 관점은 어떤 본질을 지니고 있느냐? 배반이 아니냐? 이 일이 닥치기 전까진 그 사람의 관점이 보이지 않으니 그는 하나님과 대립하지 않고 하나님을 원수로 여기지 않는 사람인 것 같다. 하지만 막상 일이 닥치면 그 사람은 즉시 사탄의 편에 서서 하나님과 대립한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해 주느냐? 사람은 하나님에게 대립적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하나님이 사람을 원수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본질 자체가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따른 시간이 얼마나 오래되었든, 지불한 대가가 얼마나 되었든, 하나님을 어떻게 찬양하든,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어떻게 억제하든, 심지어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스스로에게 요구할지라도 사람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못한다. 이것은 사람의 본질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냐? 네가 그를 하나님으로 대하고 정말 하나님으로 여긴다면 그에 대한 의심이 생길 수 있겠느냐? 마음속에 그에 대한 의문이 있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겠지? 이 세상 풍조가 이렇게 사악하고, 이 인류가 이렇게 사악한데 너는 왜 그들에 대해서는 관념을 가지지 않는 것이냐? 너 스스로가 그렇게 나쁜데 왜 관념을 가지지 않느냐? 몇 마디 유언비어나 비방으로 하나님에 대해 그렇게 큰 관념과 그렇게 많은 생각을 갖는데, 너의 분량이 얼마나 작은지 알 수 있다. 모기나 역겨운 파리 몇 마리가 ‘앵앵거렸을’ 뿐인데 미혹되었단 말이냐?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느냐? 사실 그런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아주 분명하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차갑게 무시해 버린다. 아예 상대하지 않는다. 이 무지한 자들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는 그를 필사적으로 적대하려고 하고, 그의 마음에 합하는 길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을 얻을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해서 또 일부에게 상처를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너희는 내가 계속 이렇게 너희에게 상처 주는 것을 원하느냐?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쨌든 내 말은 사실이다! 내가 계속 이렇게 너희에게 상처를 주고 늘 너희의 흉터를 들춰내면 너희 마음속에 있는 위대한 하나님의 이미지에 영향을 주지 않겠느냐? (아닙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애초에 너희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다. 너희가 마음속으로 애써 지키고 보호하는 위대한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상상해 낸 것으로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이 수수께끼에 대한 답을 밝히는 편이 좋겠다. 그러면 ‘진상이 환히 드러나지’ 않겠느냐? 참하나님은 사람이 상상해 낼 수 있는 분이 아니니 너희 모두 현실을 직시하기 바란다. 그래야 너희가 하나님을 알아 가는 데에 유익하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사역으로 맺게 될 결실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9)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

어떤 사람들의 믿음은 하나님께 전혀 인정받지 못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그 사람들을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로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따른 시간이 얼마나 되었든 그들의 생각과 관점은 바뀐 적이 없다. 그들은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방인의 처세 원칙과 방식을 지키고 있고, 이방인과 같은 생존 법칙과 신념을 지키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을 믿은 적이 없으며,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려고 한 적도 없고,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취미로만 믿을 뿐이고, 하나님을 정신적 의지처로만 여길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은 알 가치가 없다고 여긴다. 다시 말해, 진정한 하나님의 모든 것은 그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고, 그들은 관심을 가지려고도,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늘 ‘하나님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다.’라고 말하는 강렬한 목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런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고, 자신을 우롱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입으로만 인정하면서 그 어떤 입장도 밝히지 않고 그 어떤 실제적인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 진짜 현명한 것이라고 여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볼까? 하나님은 그들을 이방인으로 여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방인이 하나님 말씀을 읽을 수 있나요? 본분을 이행할 수 있나요? 하나님을 위해 산다는 말을 할 수 있나요?” 사람들이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다 외적 행실이지 사람의 본질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외적인 행실을 보지 않고 사람의 내적 본질만 본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들에 대해 이런 태도를 취하고, 이런 정의를 내리게 된 것이다. 이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시죠? 하나님은 왜 저렇게 하시죠? 난 이 일을 납득할 수 없고 저 일도 납득할 수 없어요. 이 일은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아요. 어떻게 된 건지 설명을 해 주셔야 합니다….” 이런 말에 나는 이같이 답할 것이다. “너에게 설명해 줄 필요가 있느냐? 이 일이 너와 상관이 있느냐? 너는 누구냐? 너는 어디서 왔느냐? 네가 하나님에 대해 흠잡을 자격이 있느냐? 네가 그를 믿기라도 하느냐? 그가 너의 믿음을 인정하느냐? 너의 믿음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데, 그의 행사가 너와 또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하나님 마음속에서 너의 위치가 어떤지도 모르는데, 네게 하나님과 대화할 자격이 있겠느냐?”

훈계의 말씀

너희는 이 말을 듣고 무척 괴롭지 않으냐? 듣기 싫거나 받아들이기 싫을지라도 이는 다 사실이다. 이 단계의 사역은 하나님이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태도에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을 알아 가지 않는다면, 최종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은 너 자신이다. 너희는 내 말이 듣기 거북하다고 탓하지 말고, 내 말이 너희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다고 탓하지도 마라. 내가 말하는 것은 다 사실이지 너희에게 타격을 주려는 것이 아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어떻게 하라고 요구하든 모두 너희가 올바른 길을 가기 바라고, 너희가 올바른 길에서 빗나가지 말고 하나님의 도를 행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고 그의 도를 지키지 않는다면, 너는 하나님을 거역하며 올바른 길에서 엇나가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래서 나는 어떤 일들에 대해서는 너희에게 명확히 설명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너희가 흐리멍덩하지 않고 아주 분명하고 정확하게 믿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태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을 온전케 하는지,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지를 너희가 분명히 알 수 있도록 말이다. 언젠가 네가 따라가지 못하게 되더라도 나는 이미 내게 책임이 없다고 할 것이다. 나는 이미 많은 말을 분명히 해 주었기 때문이다. 네가 자신의 결말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전적으로 너에게 달렸다. 하나님은 각기 다른 태도로 사람들의 결말을 대하고 있다. 그에게는 자신만의 가늠 방식이 있고, 자신만의 요구 기준이 있다. 그 가늠 기준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 이유로 어떤 이들의 걱정은 불필요한 것이다. 이제 안심이 되겠지?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사역으로 맺게 될 결실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20)

실제로 하나님의 성품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되어 있지 감추어져 있지 않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에 대해 알지 못하도록 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의도적으로 어느 누군가를 피한 적도 없고, 스스로를 숨긴 적도 없다. 도리어 하나님의 성품은 언제나 공개되어 있고, 숨김없이 모든 사람들을 마주하고 있다. 하나님의 경영 가운데, 하나님은 그의 사역을 하면서 모든 사람을 마주한다. 또한 그의 사역은 모든 사람에게 행해진다. 그는 이런 사역들을 하는 동시에, 지속적으로 그의 성품을 나타내고 있고, 자신의 본질과 소유와 어떠함으로 사람들을 끊임없이 인도하며 공급하고 있다. 좋은 환경이든 열악한 환경이든, 각 시대와 각 단계에서 하나님의 성품은 모든 사람에게 공개되어 있고, 그의 소유와 어떠함 역시 모든 사람에게 공개되어 있다. 그의 생명이 쉼 없이 사람에게 공급되고 사람을 붙들어 주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성품은 감추어져 있다. 왜 이렇게 말할까?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역 가운데 살고 있고 하나님을 따르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이해해 본 적이 없고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일단 이런 자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깨달았다고 한다면 바로 그의 결말이 임박했다는 뜻이고, 하나님의 성품에 의해 심판받고 정죄받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런 부류 사람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깊이 깨닫거나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이들은 의식적인 협력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만 몰두하고, 자신이 믿고 싶은 하나님, 자기 마음속으로 상상한 하나님과 관념 속의 하나님, 일상생활에서 자신과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는’ 하나님만 믿는다. 이들은 참된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이해하려 들지도 않는다. 또한 그에게 등을 돌리고 가까이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선포한 말씀을 가지고 스스로를 보기 좋게 꾸미고 포장한다. 이러면서 자신의 믿음이 이미 높은 수준에 이르렀고, 자신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참된 하나님 자신은 이들과 무관하며, 이들을 인도하는 것은 그들 마음속에 존재하는 관념과 상상, 그리고 이들이 하나님에 대해 내린 규정들이다. 일단 이들이 참된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참된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을 알게 된다는 것은 이들의 행위와 믿음과 추구하는 것이 정죄받는다는 걸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아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성품을 더 잘 깨닫기 위해 적극적으로 구하며 기도하는 것을 원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차라리 하나님이 허구적이고 공허하며 막연한 존재이기를 바란다. 차라리 하나님이 그들이 상상한 바와 똑같아서 그들이 마음대로 부릴 수 있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끝없이 채워 줄 수 있는 존재이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싶을 때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도록 하고, 축복이 필요할 때 하나님이 축복을 내리도록 하며, 역경이 닥치면 하나님이 자신에게 담대함을 주고, 버팀목이 되어 주도록 말이다. 이들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은혜와 축복의 범위에만 머물러 있다.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에 대한 이해 역시 상상과 글귀상의 말에만 국한되어 있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또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싶어 하고, 하나님 자신을 분명히 보고 싶어 하며, 하나님의 성품, 소유와 어떠함을 확실히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이 사람들은 진리의 실제를 추구하고,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있기를 바라며, 하나님께 정복되고 구원받고 온전케 되기를 바란다. 이 사람들은 심혈을 기울여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하나님이 마련해 준 환경과 하나님이 배정한 사람과 일, 사물들을 체험하며, 진심으로 기도하고 구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알고 싶어 하고, 하나님의 참된 성품과 본질을 가장 이해하고 싶어 한다. 그리하여 더 이상 하나님을 거스르지 않고 체험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스러움과 참된 일면을 볼 수 있도록 말이다. 또한 그들 마음속에 하나님이 확실히 거하고,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리가 생겨 그들이 더 이상 상상과 관념 속에서, 막연한 상태에서 살지 않게 될 수 있도록 말이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을 간절히 알고 싶어 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은 사람의 체험 과정에서 언제든 필요하고, 사람에게 평생토록 생명을 공급해 주기 때문이다. 이들이 일단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되면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역에 더 잘 협력할 수 있게 된다.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더 잘 헤아릴 수 있고, 자신의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두 부류의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보이는 태도다. 한 부류는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할 생각이 없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고 싶고 하나님 자신을 알고 싶고,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을 보고 싶고 하나님의 마음을 진심으로 느끼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차라리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며, 마음속으로 하나님과 패권을 다투고, 늘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며, 심지어 부인까지 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품과 참된 하나님 자신이 자신들의 마음을 차지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자신의 상상과 야심을 충족시키길 원할 뿐이다. 그래서 이 부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집과 생업까지 버릴지라도 악행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저지른다. 심지어 제물을 훔쳐 먹는 자들, 제물을 함부로 쓰는 자들도 있다. 또 어떤 자들은 뒤에서 하나님을 저주하고, 어떤 자들은 지위를 이용해 끊임없이 자신을 증거하고 높이며 사람이나 지위를 두고 하나님과 쟁탈전을 벌이기도 한다. 이들은 여러 가지 방식과 수단으로 사람들이 자신을 우러러보게 하고, 사람의 마음을 구슬려 사람을 통제할 생각만 한다. 심지어 어떤 자들은 고의로 사람들이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오해하도록 만들어 자신을 하나님으로 대하게 한다. 이런 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저는 패괴된 사람입니다. 저 역시 패괴되어 교만하니 저를 우러러보지 마세요. 제가 일을 잘했다 해도 그것은 다 하나님이 저를 높여 주셨기 때문이고, 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왜 그는 이런 말을 하지 않는 것일까? 사람들 마음속 자신의 지위를 잃을까 무척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높이지도 증거하지도 않는다. 그가 하나님을 높이지 않고 증거하지 않는 이유는 지금껏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이라는 주제에 나오는 단어들은 간단해 보이지만 각자가 받는 의미는 서로 다른 것이다. 걸핏하면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며 적대시하는 사람들에게는 정죄일 것이고, 진리와 실제를 추구하고 자주 하나님 앞으로 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은 말이다. 그러기에 너희 중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머리가 멍해지면서 반발심이 잔뜩 생겨난다. 괴로운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주제라고 느낀다. 그 이유는 이는 그들에게 무척 유익한 주제로, 그의 생명 체험 과정에서 필수적인 부분이자, 핵심 중의 핵심이며, 하나님을 믿는 근간이고, 사람이 떠날 수 없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주제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하며, 낯설기도 하고 익숙하기도 하다. 하지만 어쨌든 이 주제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 새겨듣고, 알아야 하고, 깨달아야 한다. 네가 이 주제를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취급하며, 어떻게 깨닫든지 간에 결코 이 주제의 중요성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1>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21)

하나님은 인류를 창조하면서부터 사역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간단한 사역이었다. 간단한 사역이었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본질이 있고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났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사역이 심화되었으며, 하나님이 자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구체적 사역을 다량으로 행하고 수많은 말씀을 선포하긴 했지만, 하나님의 본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에게 감춰져 있다. 그는 두 차례 성육신했지만 성경의 기록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참모습을 본 사람이 있느냐? 너희가 알기로 하나님의 참모습을 본 사람이 있느냐? 없다. 하나님의 참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즉, 하나님의 진실한 면모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는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참모습이나 하나님의 영은 모든 사람에게 감춰져 있다. 하나님이 창조한 아담과 하와, 하나님이 열납한 의인 욥을 포함해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참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처럼 의도적으로 자신의 참모습을 감춘 이유는 무엇일까? 혹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놀랄 것을 염려하신 겁니다!” 또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참모습을 감추시는 이유는 사람은 너무 작고 보잘것없는 데에 반해 하나님은 너무나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분을 볼 수 없는데, 보면 바로 죽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자들은 이렇게도 말한다. “하나님은 사역을 경영하시느라 매일 바쁘게 보내십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자신의 모습을 나타낼 여력이 없으실 겁니다.” 너희가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이 결론은 무엇일까? 바로 하나님은 인류에게 그의 참모습을 보여 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결론이다. 여기에서 ‘사람에게 감춘다’는 것은 하나님이 특별히 취한 일이다. 즉, 하나님은 일부러 사람이 그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너희는 다 알아들었겠지? 이렇듯 하나님은 지금껏 사람에게 그의 본체를 나타낸 적이 없는데, 너희는 하나님의 본체가 존재한다고 여기느냐? (네.) 이는 분명하다! 하나님 본체는 의심의 여지 없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본체가 얼마나 거대하고, 또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이것이 인류가 탐구해야 할 문제일까? 아니다! 이에 대한 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체와 관련된 주제는 우리가 탐구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탐구해야 할까?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본격적인 주제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 조금 전 주제로 돌아가 보자. 하나님은 왜 지금껏 인류에게 그의 본체를 나타내지 않았을까? 하나님은 왜 의도적으로 인류에게 그의 본체를 감췄을까? 이유는 단 하나다. 창조된 인류가 수천 년 동안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해 왔지만, 하나님의 사역과 성품과 본질에 대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런 인류는 하나님을 적대하는 인류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적대적인 인류에게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지금껏 인류에게 그의 본체를 나타내지 않고 의도적으로 감춘 유일한 이유이다. 이제 너희는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의 중요성을 분명히 알았겠지?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1>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22)

하나님은 경영을 시작하면서부터 줄곧 최선을 다해 그의 사역을 하고 있다. 그는 비록 자신의 본체는 감추어 왔지만, 계속 인류와 함께하면서 인류에게 사역하고 그의 성품을 나타내고 있다. 그의 본질로 온 인류를 인도하고 있고, 그의 큰 능력과 지혜와 권병으로 모든 사람에게 사역하고 있다. 그렇게 율법시대가 있었고, 은혜시대가 있었으며, 지금의 하나님나라시대(역주: 왕국시대)가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본체는 사람에게 감추어져 있지만, 하나님의 성품, 소유와 어떠함, 그리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은 조금도 남김없이 사람에게 나타내 사람이 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인류는 하나님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인류가 접한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은 완전한 하나님 자신의 발현이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냐?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어떤 위치에 서서 사역하더라도, 그는 그의 참된 신분으로 사람을 대하고, 자신이 해야 할 사역과 말씀을 한다. 셋째 하늘의 높이에서든, 육신의 위치에서든, 심지어 보통 사람의 위치에서든, 어떤 위치에서 말씀하든 하나님은 마음과 뜻을 다하고, 어떠한 거짓도, 숨김도 없다. 그는 사역하는 동안 말씀을 선포하고, 자신의 성품, 소유와 어떠함을 나타낸다. 조금도 남김없이 말이다! 그는 자신의 생명과 소유와 어떠함으로 인류를 인도한다. 이렇듯 인류는 ‘보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에서 율법시대, 즉 인류의 요람시대를 지나왔다.

율법시대 이후에 하나님은 처음으로 성육신했으며, 그때 성육신 하나님은 장장 33년 반이란 시간을 보냈다. 이 33년 반이라는 시간은 사람에게 긴 편일까? (길지 않습니다.) 사람의 수명은 일반적으로 30년을 넘는다. 그래서 33년 반은 사람에게 아주 긴 시간은 아니다. 하지만 성육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 33년 반은 무척 긴 시간이다. 그는 사람, 즉 평범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사역과 사명을 맡았다. 이는 그가 보통 사람이 맡을 수 없는 일을 맡아야 함과 동시에 보통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해야 함을 의미한다. 은혜시대에 사역을 시작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예수는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 물론 지금의 사람들은 이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지 않으냐? 성경에 세부적인 사실이 얼마나 기록되었든 간에, 어쨌든 그 당시 하나님의 사역에는 위험과 고난이 가득했다. 패괴된 사람에게 33년 반의 시간은 결코 길지 않고 고통을 좀 받는 건 아무 일도 아니다. 그러나 거룩하고 아무 오점도 없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죄를 견뎌 내야 했고, 죄인과 함께 먹고 지내며 생활해야 했다. 이는 어마어마한 고통이었다. 그는 창조주이고 만물의 주재자이자 모든 것의 주재자다. 하지만 그는 세상에 와서 패괴된 인류의 유린과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그의 사역을 완수하고 인류를 고통의 세계에서 구원하기 위해, 그는 사람에게 정죄당하고 모든 사람의 죄를 담당했다. 그가 받은 그 모든 고난은 보통 사람이 상상할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것이다. 그가 받은 고난은 무엇을 의미할까?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헌신을 의미한다. 인류를 구원하고 사람의 죄를 속량하고 이 단계의 사역을 완수하기 위해 받은 모든 굴욕과 대가를 의미한다. 또한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인류를 속량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피의 대가이고 생명의 대가이며, 그 어떠한 피조물도 갖추지 못한 것이다. 그에게 하나님의 본질과 소유와 어떠함이 있기에 그는 그 고통을 감당하고 이런 일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어떠한 피조물도 대신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은혜시대에 하나님이 행한 사역과 하나님이 나타낸 성품이다. 여기에 하나님이 나타낸 소유와 어떠함이 있지 않으냐? 인류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지 않으냐?

그 시대 사람은 하나님의 본체를 본 적은 없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속죄 제물을 얻었고,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인해 구속되었다. 은혜시대에 하나님이 행한 사역에 대해 사람은 낯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기에 하나님이 나타낸 성품과 뜻에 대해 낯설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사람은 여러 경로를 통해 하나님이 각 시기에 행한 사역의 내용 혹은 그 사역들을 행하면서 생겨난 하나님과 관련된 이야기에 대해 알 뿐이다. 이 내용과 이야기들은 기껏해야 하나님과 관련한 정보나 전설에 불과할 뿐 하나님의 성품이나 본질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과 관련된 이야기를 아무리 많이 알고 있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에 대해 깊은 이해와 인식이 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은혜시대의 사람은 성육신 하나님과 무척 친밀하게 접촉한 적이 있다. 하지만 율법시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에 대한 인식은 거의 전무했다.

하나님나라시대에 하나님은 또다시 성육신했다. 이 방식은 첫 번째 성육신과 같다. 이 사역 기간에도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남김없이 선포하고, 해야 할 사역을 하고 있으며, 자신의 소유와 어떠함을 나타내고 있다. 동시에 사람의 패역과 무지를 끊임없이 인내하고 관용하고 있다. 이 사역 기간에도 하나님은 끊임없이 자신의 성품을 나타내고, 자신의 뜻을 표현하고 있지 않느냐? 그러기에 처음 인류가 생기고 지금까지 하나님의 성품, 소유와 어떠함, 뜻이 모든 사람에게 공개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의도적으로 그의 본질과 성품과 뜻을 감춘 적이 없다. 그저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있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 사람이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일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이해는 형편없을 정도로 적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그의 본체를 감춤과 동시에 매 순간 사람과 함께하면서 사람에게 그의 뜻과 성품과 본질을 공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본체는 사람에게 공개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다만 사람이 눈이 멀고 패역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타남을 전혀 보지 못할 뿐이다. 만일 지금의 이런 상황대로라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을 아는 일이 과연 쉬울까? 대답하기 무척 어려운 문제다. 그렇지 않으냐? 쉽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고자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지 못하고 흐릿하기 때문이다. 어렵다는 대답도 옳지 않다! 이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면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참된 사귐을 가졌던 경험이 있다. 어쨌든 하나님과 어느 정도 마음의 감응이 있고, 하나님과 마음의 부딪힘이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다소나마 감성적인 인식이 있고, 하나님을 알아 가는 일에서도 조금이나마 성과를 얻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따르면서 사람이 얻은 것은 무척 많다. 하지만 사람의 자질이 부족하고, 우매하며, 패역하고, 마음에 온갖 속셈을 품고 있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사람이 잃은 것도 너무 많다. 사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것이 적으냐? 하나님은 그의 본체를 감추기는 했지만 그의 소유와 어떠함과 생명을 전부 사람에게 공급해 주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인식이 지금의 이런 상태여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이라는 주제에 대해 한 걸음 더 나아간 교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목적은 수천 년 동안 하나님이 사람에게 기울인 심혈을 헛되지 않게 하고, 사람이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라는 영역에서 새로운 단계로 도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 있어야 할 하나님의 진정한 자리를 회복할 수도 있다. 즉, 하나님이 ‘공정한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1>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23)

아담에 대한 하나님의 당부

창 2:15~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아담에 대한 하나님의 당부’와 관련된 말씀에서 너희는 무엇을 깨달았느냐? 이 말씀에서 너희는 어떤 느낌을 받았느냐? 왜 ‘아담에 대한 하나님의 당부’와 관련 있는 이 말씀을 골랐을까? 너희 각자의 마음속에 하나님과 아담의 그림이 떠오르느냐? 상상해 보아라. 너희가 그 입장이라면 너희 마음속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까? 이 장면은 너희에게 어떤 느낌을 주느냐? 이건 감동적이고 따뜻한 장면이다. 이 장면 속에는 하나님과 사람만 있는데, 양자의 친밀한 관계는 사람의 부러움을 자아낸다. 하나님의 차고도 넘치는 사랑이 아무 대가 없이 주어져 사람을 에워싸고 있다. 사람은 순진무구하고 근심 걱정 없이 하나님의 눈앞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염려하고, 사람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살고 있다. 사람의 모든 언행은 하나님과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는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한 이후 사람에게 한 첫 번째 당부라고 할 수 있다. 이 당부에는 어떤 것이 담겨 있을까?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고, 인류에 대한 그의 걱정이 담겨 있다. 이는 하나님의 첫 번째 당부이자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첫 번째 걱정인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인류를 창조한 그 순간부터 인류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 책임은 무엇일까? 사람을 보호하고 보살피는 것이다. 그는 사람이 그의 말씀을 믿고 따르기를 바랐는데, 이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첫 번째 바람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그런 바람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 단순한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고, 하나님의 마음이 이미 사람을 염려하기 시작했음을 드러내고 있다. 만물 중 오직 아담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생기를 가진 생령이며,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고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런 당부를 한 것이다. 이 당부에는 사람이 해도 되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담겨 있었고, 하나님은 이 부분을 아주 분명하게 말씀했다.

이 단순한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어떤 마음을 볼 수 있느냐? 하나님의 마음에 사랑이 있지 않으냐? 염려가 있지 않으냐? 이 말씀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염려를 느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이 절실히 와닿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내 말을 듣고도 너희는 이 말씀이 단순하게 느껴지느냐? 단순하게 느껴지지 않겠지? 그럼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었느냐? 만일 하나님이 직접 너에게 이 몇 마디 말씀을 했다면 너는 어떤 느낌을 받았겠느냐? 만일 네가 인성이 없는 사람으로 마음이 얼음장처럼 차갑다면 아무 느낌도 받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의 마음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반면 네가 양심과 인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느낌을 받을 것이다. 너는 따스함을 느낄 것이고 하나님의 염려를 느낄 것이며,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것이고, 행복을 느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이런 느낌을 받을 때 너는 하나님을 어떻게 대할까? 하나님을 그리워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을 경애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겠느냐? 네 마음은 하나님을 가까이하지 않겠느냐?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이해하는 것은 더더욱 중요하다! 사실, 하나님은 이 단계 사역에서도 이와 유사한 말씀을 많이 하지 않았느냐? 하지만 지금의 사람 중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너희는 내가 방금 언급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느냐? 너희는 이렇게 구체적이고 진실하며 현실적인 하나님의 뜻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너희가 하나님에 대해 진실로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사실이 아니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1>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24)

하나님이 하와를 만들다

창 2:18~20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창 2:22~23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하나님이 하와를 만들다’와 관련된 구절에는 한 가지 핵심적인 말씀이 있다.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각 생물에게 이름을 지은 사람이 누구냐? 하나님이 아닌 아담이다. 이 말은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준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 때 사람에게 지혜를 주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사람의 지혜는 하나님에게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이는 의심할 여지 없이 확실하다. 왜 그럴까? 하나님이 아담을 만든 뒤 아담이 학교에 다닌 적이 있었느냐? 글자를 알았느냐? 하나님이 각종 생물을 창조한 뒤에 아담은 각종 생물을 보고 그것들이 무엇인지 알았느냐? 하나님이 아담에게 각종 생물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려 주었느냐? 물론 각종 생물의 이름을 짓는 법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아담은 어떻게 각종 생물들에게 어떤 이름을 어떤 식으로 지어 주어야 할지를 알았을까? 이는 하나님이 아담을 만들 때 아담에게 어떤 것을 더해 주었냐 하는 질문과 관련이 있는데, 위의 사실은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 때 하나님의 지혜를 더해 주었음을 증명해 준다. 이것이 핵심이다. 너희는 새겨들어야 한다! 또 한 가지 핵심이 있는데 이 역시 너희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아담이 생물들에게 이름을 지으면 하나님 편에서는 그 생물들의 이름을 확정했다. 왜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 여기에도 내가 꼭 설명해야 하는 하나님의 성품이 들어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들었고,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었으며, 그의 지혜와 능력, 소유와 어떠함도 주었다. 하나님에게서 이런 것들을 받은 사람은 독립적으로 일을 하고 사고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이 생각하고 행한 것들이 하나님 보기에 좋으면 하나님은 열납하고 간섭하지 않는다. 사람이 일을 올바르게 하면 하나님은 그 일을 기준으로 삼는다. 이렇게 볼 때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이 각 생물의 이름을 고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아담이 부른 대로 하나님은 ‘인정’해 주어 그 생물의 이름을 그대로 확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는 다른 의견이 있었을까? 없었다. 이것은 분명하다! 여기에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은 사람에게 지혜를 주었고, 사람은 하나님이 준 지혜를 가지고 일을 했다. 하나님이 보기에 사람이 긍정적인 일을 행했다면, 그 일은 하나님 편에서 긍정되고 인정받고 열납된다. 하나님은 아무런 평가나 비판도 하지 않는다. 이는 어떠한 인류도, 어떠한 악령이나 사탄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여기에서 너희는 하나님이 나타낸 성품을 보았느냐? 사람이라면, 패괴된 사람 혹은 사탄이라면, 다른 사람이 자신 앞에서 자신을 대표해 일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을까? 절대 허용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나 세력과 그 지위를 놓고 다투지 않겠느냐? 반드시 다툴 것이다! 이때 패괴된 사람 혹은 사탄이 아담과 함께 있었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아담이 한 일을 부인했을 것이다. 자신에게 독립적인 사고 능력이 있고 독창적인 견해가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아담이 한 모든 일을 부정했을 것이다. “네가 ‘이것’이라고 부르겠다면 난 절대 그렇게 부르지 않고 ‘저것’이라고 부를 거야. 네가 ‘장 씨’라고 부르면, 난 ‘이 씨’라고 부를 거야. 반드시 내 우수함을 보여 줄 거야.”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것은 무슨 본성이냐? 교만이 아니냐? 반면 하나님은 어떠하냐? 이런 성품이 있느냐? 하나님은 아담이 한 일에 대해 이상한 행동, 반대하는 행동을 보였느냐? 분명히 말하건대 없었다! 하나님이 나타낸 성품에는 고집이나 교만이나 독선이 없다. 이 점을 위의 대목에서 분명히 볼 수 있다. 아주 사소한 일이긴 하지만 네가 하나님의 본질을 모르고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고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성품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나타내고 드러냈는지 볼 수 없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다면 내가 방금 해석한 내용들에 대해 너희는 인정하느냐? 아담이 한 일에 대해 하나님은 대놓고 “잘했다. 옳다. 찬성이다!”라는 말씀을 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인정했다. 그는 아담이 한 일을 높이 평가하고 칭찬했다. 이는 창세 이후 인류가 하나님의 당부에 따라 하나님을 위해 행한 첫 번째 일로, 하나님을 대신해 행한 일이자 하나님을 대표해 행한 일이다. 하나님이 보기에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지혜에서 비롯된 일로, 좋고 긍정적인 것이었다. 그때 아담이 한 일은 인류가 처음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선명히 나타내 보인 일이었고, 하나님이 보기에 좋은 것이었다. 여기에서 나는 너희에게 알려 주고 싶은 것이 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일부 소유와 어떠함과 지혜를 더해 준 것은 사람이 그를 선명히 나타내는 생명체가 되게 하려 함이었다. 또한 그러한 생명체가 하나님을 대표해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오랫동안 바라 왔던 일이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1>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25)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다

창 3:20~21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이 장면 속에서 하나님은 어떤 신분으로 아담, 하와와 함께 있었느냐?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은 어떤 신분으로 나타났느냐? 하나님의 신분으로 나타났느냐? 홍콩의 형제자매들이 대답해 보아라. (부모의 신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한국의 형제자매들은 하나님이 어떤 신분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하느냐? (가장의 신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대만의 형제자매들이 말해 보아라. (아담과 하와의 가족의 신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의 가족의 신분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하고, 어떤 이는 하나님이 가장의 신분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부모의 신분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모두 아주 적절한 대답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하나님은 그 두 사람을 창조하여 그들을 동반자로 삼았고, 그들의 유일한 가족이 되어 그들의 생활을 돌보고 의식주를 돌보았다. 여기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부모 신분으로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이 행한 그 일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위대함을 보지 못했고, 하나님의 지고지상함도 보지 못했으며, 하나님의 신묘막측함도 보지 못했고, 하나님의 진노와 위엄은 더더욱 보지 못했다. 오로지 하나님의 낮춤과 자비, 그리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근심과 책임과 보호만 보았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대하는 태도와 방식은 흡사 자식을 두고 걱정하는 부모와 같았다. 또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돌보고 관심을 기울이는 것처럼 볼 수도 만질 수도 있는 진실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대한 지위를 가진 자라 자처하지 않고 가죽으로 직접 인류에게 옷을 지어 입혔다. 이 가죽옷으로 치부를 감추든 추위를 막든 어쨌든 하나님은 손수 그 일을 했다. 하나님은 사람이 상상하는 것처럼 생각이나 이적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옷을 지어 사람의 몸을 가린 것이 아니라, 사람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이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을 실제로 한 것이다. 이 일은 단순해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언급할 가치도 없다. 하지만 이런 일을 통해 하나님을 따르면서 하나님에 대한 막연한 상상으로 가득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실함과 사랑스러움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신실함과 낮춤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을 대단하다고 여기며 안하무인이었던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의 진실함과 낮춤 앞에 부끄러움을 느껴 한없이 높이 쳐들었던 머리를 떨구었다. 여기서 사람은 하나님의 진실함과 낮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더한층 느끼게 되었다. 마음속 ‘위대한’ 하나님, ‘사랑스러운’ 하나님, ‘무소불능한’ 하나님은 반대로 아주 미미하고 추하고 연약하게 느껴졌다. 이 말씀을 보고 나서, 이 일을 듣고 나서, 너는 하나님이 행한 이런 일들 때문에 하나님을 얕보겠느냐? 어떤 이들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정반대다. 그는 하나님이 진실하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진실함과 사랑스러움에 감동받는다. 하나님의 진실한 면을 볼수록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진실로 존재함을 더욱 느끼게 되고, 사람 마음속에 자리 잡은 하나님의 비중과 늘 사람 곁에 있는 하나님을 느끼게 된다.

여기까지 말했으면 현재와 연결시켜 봐야 한다. 하나님은 처음에 자신이 창조한 사람을 위해 이처럼 소소한 일을 했고, 사람이 지금껏 감히 상상하지도, 예상치도 못한 일까지 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런 일들을 지금의 사람에게 할 수 없을까? 어떤 사람은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의 본질은 꾸며 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스러움도 꾸며 낸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본질은 진실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른 누군가가 더해 준 것도 아니고, 시간이나 장소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화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행한 일에서, 사람이 하찮거나 아주 사소하게 여기는 일, 심지어 하나님이 절대 할 리 없다고 여기는 아주 미미한 일들에서 진정 하나님의 진실함과 사랑스러움이 비로소 나타난다. 하나님은 위선적이지 않다. 그의 성품과 본질 속에는 과장, 가식, 거만, 교만이 없다. 그는 지금껏 큰소리친 적이 없다. 그는 신실하고 진실한 태도로 자신이 창조한 사람을 사랑하고 걱정하고 돌보고 인도하고 있다. 사람이 얼마나 이해할 수 있든, 얼마나 느낄 수 있든, 얼마나 볼 수 있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이런 일들을 확실하게 행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러한 본질을 사람이 알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영향을 줄까?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 영향을 줄까? 나는 네가 하나님의 진실한 면을 이해하게 될 때, 하나님을 더 가까이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돌봄을 더 실감하길 바란다. 그와 동시에 너의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고,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해 어떠한 추측도, 의심도 하지 말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인류를 위해 묵묵히 모든 일을 행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진실함과 신실함과 사랑으로 모든 일을 묵묵히 행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대해 어떠한 주저함이나 후회도 없었고, 사람에게서 무언가를 보답받거나 얻으려 한 적도 없었다. 그가 이 모든 것을 행하는 유일한 목적은 사람의 진실한 믿음과 사랑을 얻기 위함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1>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26)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하려고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하다

창 6:9~14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창 6:18~22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 수 한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 하라 너는 먹을 모든 식물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식물이 되리라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이 성경 내용을 통해 노아라는 사람에 대해 대략적으로 알 수 있었지 않느냐? 노아는 어떤 사람이었느냐? 본문에 이렇게 나와 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지금 사람들의 이해에 의하면 그 당시 ‘의인’은 어떤 사람일까? ‘의인’은 완전한 자여야 한다. 완전한 자란 사람의 눈에 완전한 자인지, 하나님의 눈에 완전한 자인지, 너희는 아느냐? ‘완전한 자’란 의심할 바 없이 하나님의 눈에 완전한 자이지 사람의 눈에 완전한 자가 아니다. 이건 분명하다! 사람은 눈이 멀어 보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온 땅을 감찰하고 모든 사람을 감찰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노아가 완전한 자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할 계획은 노아를 부른 그 순간부터 시작된 것이다.

……

노아가 부름을 받은 일은 단순한 사실이지만, 이 기록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뜻과 본질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이것이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뜻과 본질을 이해하려면 먼저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부르는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부르는지 알게 되면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뜻과 본질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무척 중요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부른 사람은 하나님이 보기에 어떤 사람일까? 분명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그의 명령대로 행할 수 있는 사람이다. 동시에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이 다해야 할 책임과 본분으로 여겨 완수하는 사람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어야 할까? 아니다. 당시 노아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많이 듣지 못했고, 하나님의 사역도 경험하지 못했다. 그래서 노아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너무 적었다. 성경에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과연 노아가 하나님의 본체를 본 적이 있을까? 분명히 말하지만 본 적이 전혀 없었다! 당시 사람에게 임한 것은 하나님의 사자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신해 말을 하고 일을 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전달했을 뿐이었다. 하나님의 본체가 직접 사람에게 나타난 적은 없었다. 이 성경 내용에서 기본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노아라는 사람이 해야 할 일과 노아에게 내린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하나님이 나타내고 있는 본질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행하는 모든 일은 세밀하게 계획된 것이다. 어느 사건 혹은 현상이 발생했을 때 그에게는 이를 판단하는 기준이 있다. 그는 이 기준에 따라 계획하고 처리할지 혹은 어떤 식으로 이 일과 현상을 대할지를 결정한다. 그는 모든 일에 무관심하거나 아무 느낌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였다.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하나님은 이 말씀에서 하나님이 멸하려고 한 대상이 사람뿐이라고 했느냐?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혈육 있는 생물을 멸하겠다고 하였다. 왜 멸하려고 했을까? 여기에서 또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난다. 즉, 하나님이 인류의 패괴, 모든 혈육 있는 자의 더러움과 강포, 패역을 대할 때 그의 인내에는 한도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한도는 어디까지일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였다.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여기에서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는 무슨 의미일까?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 하나님께 번제를 드린 적이 있는 사람, 말로 하나님을 인정할 뿐 아니라 찬미하기까지 하는 사람을 포함해 모든 살아 있는 존재, 이들의 행위가 심히 패괴하여 하나님 앞에 상달되면 하나님은 그들을 멸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한계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인류와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패괴함을 어느 정도까지 인내한다는 것이냐?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든 이방인이든 그들이 바른길을 가지 않는 지경에 이르면, 하나님은 인내하지 않는다. 인류가 그저 도덕이 부패하고 사악으로 가득 찬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 없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주재하고 사람에게 광명과 바른길을 가져다줄 수 있음을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는 지경에 이르면, 하나님은 인내하지 않는다. 인류가 하나님의 존재를 증오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면, 하나님은 인내하지 않는다. 인류의 패괴가 일단 이런 정도에까지 이르면 하나님은 더 이상 인내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인내 대신 무엇이 임하겠느냐? 바로 하나님의 노와 징벌이 임하게 된다. 이는 하나님 성품의 일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이 보기에 의인이 있을까? 하나님이 보기에 완전한 자가 있을까? 하나님의 눈에 이 시대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한 시대가 아니냐? 이 시대에 하나님이 온전케 하려는 사람과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인류 이외에 혈육 있는 자는 모두 하나님 인내의 한계에 도전하고 있지 않느냐? 이 세상에서 매일 너희 주변에서 발생하는, 너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직접 경험하는 모든 일들엔 강포가 가득하지 않느냐? 하나님이 보기에 이와 같은 세상과 시대는 끝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지금의 시대적 배경과 노아가 살았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은 완전히 다르지만, 인류의 패괴를 보는 하나님의 심정이나 분노는 그때와 같다. 하나님이 인내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사역 때문이다. 하지만 각종 상황과 조건을 보면 이 세상은 하나님이 보기에 일찍 멸했어야 했다. 홍수로 세상을 멸했던 그 시대의 상황과 비교하면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다. 하지만 다른 점은 무엇일까? 이 역시 하나님이 가장 마음 아파하는 부분으로, 너희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홍수로 세상을 멸할 때 하나님은 노아를 불러 방주를 짓게 할 수 있었다. 이로써 홍수로 세상을 멸하기에 앞서 필요한 일을 예비한 것이다. 하나님은 노아라는 사람을 불러 하나님을 위해 일련의 일을 하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에는 하나님이 부를 만한 사람이 없다. 왜 그럴까?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해 내가 명확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 말하면 모두들 면목도 없고 괴로울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런 말을 한다. “우리는 의인도 아니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완전한 자도 아니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명하신다면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큰 재난이 닥칠 거라고 하셨을 때 우리는 양식과 재난에 필요한 물품을 미리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두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행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역에 아주 잘 협력한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 우리가 취한 행동은 노아와 비견할 만하지 않나요? 설마 우리의 이런 행동이 진실한 순종이 아니란 말입니까?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한 게 아니란 말입니까?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말씀대로 행한 것 아닌가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왜 상심하시는 건가요? 왜 부를 만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고 하시는 건가요?” 이런 사람들과 노아의 행위는 차이가 있지 않으냐? 어떤 차이가 있느냐? (오늘날 우리가 재난용 식품을 준비한 건 우리 스스로의 생각에서 비롯된 행동입니다.) (우리가 취하는 모든 행동은 의롭지 않습니다. 하지만 노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인이었습니다.) 정답에 가까운 대답이었다. 노아가 한 일과 지금 사람들이 한 일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노아가 하나님의 명대로 일을 했을 때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몰랐고, 하나님이 무엇을 이루려는지도 몰랐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명하여 그가 해야 할 일을 지시했을 뿐 많은 설명은 하지 않았다. 노아는 명대로 행했지 사사로이 하나님의 뜻을 추측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 대항하지 않았고 두 마음을 품지도 않았다. 그는 순진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그가 일을 하는 데 있어 가졌던 신념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준 사명을 대함에 있어 그토록 명쾌하고 단순했다. 노아의 본질, 즉 그 행위의 본질은 순종이다. 의심하지 않고 대항하지 않으며 개인적 이익이나 이해득실을 고려하지도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한다고 말씀하자 그게 언제냐고 묻지 않았고, 상세한 내용도 묻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왜 세상을 멸하는지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명대로 행했을 뿐이다. 하나님이 무엇으로, 어떻게 지으라고 명한 대로 그는 일일이 행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하나님을 흡족게 해 드려야겠다는 태도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했다. 노아는 자신이 재난을 피하기 위해 그랬던 것이냐? 아니다. 그는 하나님께 얼마 후 세상을 멸할 것인지 물어보았느냐? 그러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이 방주를 짓는 데에 시간이 얼마나 소요될지 하나님께 물어보았느냐? 아니면 노아 스스로 알고 있었느냐? 노아도 몰랐다. 그는 단순하게 순종하고 명령대로 행했다. 하지만 지금의 사람들은 다르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약간의 조짐이라도 보이면 불안해하면서 성급한 행동을 취한다. 다른 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모든 대가를 치러 가며 살아남기 위해 먹고 마시고 쓸 것들을 준비한다. 심지어 재난이 닥쳤을 때 자신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로드맵까지도 잘 예비해 둔다. 정말 재미있는 점은 사람의 두뇌는 중요한 시기가 되면 엄청난 ‘효용 가치’를 발휘한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아무런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도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뒷일을 잘 예비해 놓는다. 그 행동은 ‘완벽’이라는 단어로 묘사될 수 있겠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는 사람도 없고 이해하려는 사람도 없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사람과 노아의 가장 큰 차이점이 아닐까?

노아 이야기의 기록 가운데 너희는 하나님의 일부 성품을 보았겠지? 인류의 패괴와 더러움과 포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에는 한계가 있다. 그 한계점에 달하면 그는 더 이상 인내하지 않고 새로운 경영과 계획을 시작하고 자신이 하려는 일을 하여 그의 행사와 다른 측면의 성품을 나타낸다. 그의 ‘행함’은 그의 거스를 수 없음을 나타내기 위함도 아니고, 그에게 권병과 진노가 가득함을 나타내기 위함도 아니며, 그가 인류를 멸할 수 있음을 나타내기 위함도 아니다. 그것은 그의 성품과 그의 거룩한 본질이 더 이상 패괴된 인류가 그의 앞에서 사는 것을, 그의 권세 아래에서 사는 것을 용납하거나 인내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온 인류가 그와 적대적이고 온 땅에 그가 구원할 만한 대상이 하나도 없을 때, 그는 이런 인류를 더 이상 인내하지 않고 주저 없이 멸할 계획을 시행할 것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성품으로 결정된 것이다. 이는 필연적인 결과이자 하나님의 권세하에 살고 있는 모든 피조물이 응당 감내해야 하는 결과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은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그의 계획을 완성하고, 그가 구원하고자 하는 인류를 구원하려고 하지 않겠느냐?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그를 아예 따르지 않거나 본래 그와 적대적이던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대하고 그에게 대항하는지, 혹은 인류가 어떻게 그를 비방하는지는 안중에도 없다. 그는 오로지 그를 따르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그의 경륜 속에서 그가 구원할 대상이 그에 의해 온전케 되었는지, 그가 흡족해하는 수준에 이르렀는지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런가 하면 그를 따르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가끔 소소한 ‘징계’를 내려 그의 진노를 나타낸다. 예를 들면, 해일, 지진, 화산 폭발 등과 같은 징계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그를 잘 따르고 곧 구원받을 사람을 힘써 보살핀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이다. 한편으로, 하나님은 그가 온전케 하려는 인류에 대해 엄청난 인내와 관용을 베풀고, 최대한도로 기다린다. 또 한편으로, 하나님은 그를 따르지 않고 그와 적대적인 사탄의 부류를 극도로 증오하고 혐오한다. 그는 사탄의 부류가 그를 따르는지, 그를 경배할 수 있는지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사탄의 부류에 대해 인내하는 동시에 증오한다. 또한 사탄 부류의 결말을 정하는 동시에 그의 경륜의 시기가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1>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27)

홍수 후 하나님이 노아에게 내린 축복

창 9:1~6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찌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여 방주를 지은 뒤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하는 날들을 보냈고, 그의 여덟 식구는 살아남았다. 노아의 여덟 식구 이외의 인류는 모두 멸망되었고, 땅의 생물들도 모두 멸망되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축복을 내렸다. 하나님은 노아와 노아의 아들에게 어떤 말씀들을 하였다. 이 말씀들은 하나님이 노아에게 베풀어 주려는 것이자 노아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이는 하나님이 그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의 명령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주는 축복이고 약속이었다. 또한 하나님이 사람에게 상을 주는 방식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보기에 노아가 완전한 자이든 의인이든 상관없었고,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알든 상관없었다. 결국, 노아와 그의 세 아들은 하나님 말씀을 따랐고, 하나님의 사역에 협력했으며,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리하여 홍수로 세상이 멸망된 뒤에도 하나님을 위해 인류와 각종 생물이 보존될 수 있게 하였고, 하나님의 다음 단계 경륜을 위해 혁혁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 바로 노아의 이 모든 행위 때문에 하나님이 축복을 내린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사람에게 있어 노아의 행위는 언급할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노아도 한 일은 없잖아. 하나님이 노아를 남기겠다고 결정하셨으니 그는 당연히 남을 수 있었겠지.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그의 공로 때문이 아니야. 하나님이 이렇게 이루려고 하셨던 거지. 사람은 피동적이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보기에 위대한 사람이든 보잘것없는 사람이든 상관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의 명령과 받은 사명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협력하여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순조롭게 완수될 수 있도록 한다면, 하나님 입장에서 이런 행위는 하나님이 기억할 만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만하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의 이런 행위를 아끼며,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이런 정과 마음을 귀하게 여긴다. 이것이 하나님의 태도다. 그러니 하나님이 왜 노아를 축복했겠느냐? 하나님은 사람의 이런 행위와 순종을 아끼고 귀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노아를 축복한 것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을 흡족게 해 드리면 하나님은 당연히 사람을 축복해 주셔야 합니다. 이건 당연한 일 아닌가요?” 이렇게 말해도 될까? 어떤 사람은 “안 됩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면 왜 안 되는 것이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 이 말도 완전히 맞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이 준 사명을 받아들였을 때, 사람의 행위의 좋고 나쁨, 순종했는지,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해 드렸는지, 그리고 그가 행한 것이 합격인지 판단하는 데 있어 하나님은 한 가지 기준이 있다.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사람의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이 어떻게 행하든 행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당연히 축복해 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오해이다. 하나님은 일의 결과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일의 발전 과정 속에서 사람의 마음과 태도가 어떠했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핀다. 사람의 마음에 순종함이 있는지, 헤아림이 있는지, 하나님을 흡족게 하려는 염원이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당시의 노아는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너희가 지금 알고 있는 이치보다 많이 알고 있었을까? 하나님에 관한 개념이나 앎, 이런 진리에 대해 너희보다 더 많은 양육과 목양을 받았을까? 그렇지 않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다. 현대인의 의식과 사상 속, 심지어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하나님에 관한 개념과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는 명확하지 않고 애매모호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태도를 보인다. 반면 노아의 마음과 의식 속에는 하나님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생각이 있었고, 노아는 이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노아의 순종에는 불순물이 없어 검증을 견뎌 낼 수 있었다. 그의 마음은 순결했고 하나님께 활짝 열려 있었다. 그는 하나님이 준 사명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수많은 이치상의 인식으로 하나님 말씀에 따르라고 자신을 설득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많은 사실들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필요도 없었다. 이것이 바로 노아와 현대인들의 본질적인 차이다. 또한 하나님 보기에 완전한 사람에 대한 진정한 해석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노아와 같은 사람을 원하고 인정한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축복하는 대상이다. 여기에서 너희는 어떤 깨달음을 얻었느냐? 사람은 사람의 겉모습을 보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내면과 본질을 본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사람이 그를 조금이라도 등한시하고 의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그 어떤 추측이나 시험도 용납하지 않는다. 현대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주하고 있고,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한다고까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 내면 깊은 곳에 존재하는 것과 패괴된 본질,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태도가 사람이 하나님을 참되게 믿지 못하도록, 그리고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그러기에 사람은 하나님이 노아에게 준 것과 같은 축복을 받기 매우 어려운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1>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28)

하나님이 무지개를 사람과 맺은 언약의 증거로 삼다

창 9:11~13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이어서 ‘하나님이 무지개를 사람과 맺은 언약의 증거로 삼다’ 에 관한 성경 내용을 살펴보자.

많은 사람이 무지개가 무엇인지 알고 무지개와 관련된 이야기도 들어 보았다. 성경에 나온 무지개와 관련한 이야기를 어떤 이들은 믿고, 어떤 이들은 전설로 간주하며, 또 어떤 이들은 아예 믿지 않는다. 어쨌든 무지개와 관련해 전후로 발생한 일들은 모두 하나님이 행했던 일이자 하나님이 인류를 경영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다. 이 일들은 있는 그대로 성경 속에 기록되어 있다. 물론 기록 속에 당시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 하나님이 이런 말씀들을 한 의도가 무엇인지도 알려 주지 않는다. 하나님이 이런 말씀들을 하였을 때 하나님의 기분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 느낄 수 있는 사람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 일을 행하기 전후의 생각이 말씀의 행간에 드러나 있다. 말씀의 한 글자 한 글자를 통해 당시 하나님의 생각이 모두 생생하게 표현된 듯하다.

하나님의 생각은 인류가 가장 관심을 갖고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이해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또한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이해는 사람의 생명 진입에 있어서 절대 없어선 안 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일들이 발생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생각은 어떠했을까?

원래 하나님이 창조한 인류는, 하나님이 보기에 매우 좋고, 하나님과 아주 가까운 한 인류였지만, 하나님을 거역한 후 홍수로 멸망했다. 이런 한 인류가 순식간에 소멸되었을 때 하나님은 마음 아프지 않았을까? 당연히 마음이 아팠다! 그가 마음 아파하는 모습이 어디서 나타났느냐? 성경에는 어떻게 기술되어 있느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이 간단한 말씀 속에 하나님의 생각이 드러나 있다. 그는 그때 세상을 멸한 것이 무척 마음 아팠던 것이다. 사람의 말을 빌리자면 참으로 괴로워했다는 것이다. 우리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홍수로 세상을 멸한 뒤 원래 생기로 충만했던 땅이 어떻게 변해 버렸을까? 인류로 가득했던 땅이 어떻게 변해 버렸을까? 사람의 그림자도 없고 생물도 없이 도처에 물만 있는데, 물 위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그런 광경이 과연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본의였을까? 분명 아니다! 하나님의 본의는 곳곳에 활기가 넘치고, 그가 창조한 인류가 그를 경배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노아 한 사람만이 그를 경배하고 그의 부름을 받아 그가 준 사명을 완수하는 것, 이건 적어도 하나님의 본의가 아니었다. 인류가 사라지자 하나님이 보게 된 것은 그가 애초에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닌, 정반대의 광경이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마음이 괴롭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래서 그는 자신의 성품을 나타냄과 동시에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면서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어떤 결정이었을까? 구름 속의 무지개[주: 우리 눈에 보이는 무지개]로 사람과 언약을 세우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다시는 홍수로 인류를 멸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와 동시에 사람에게 하나님은 일찍이 홍수로 세상을 멸했었던 적이 있다고 알려 주며, 왜 하나님이 이런 일을 행했는지 영원히 기억하게 했다.

그렇게 세상을 멸하는 것을 하나님이 원했을까? 분명 하나님이 원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세상을 멸한 뒤 땅의 참상을 조금은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하나님의 눈에 비친 장면이 어땠을지, 우리는 전혀 상상할 수 없다. 지금이나 당시의 그 누구도 하나님이 그 광경을 목격했을 때, 즉 홍수로 멸망한 뒤의 세상을 봤을 때 하나님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상상할 수도, 느낄 수도 없다. 인류의 패역으로 인해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행했지만 그때 홍수로 세상을 멸한 것 때문에 하나님은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이 사실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고 느낄 수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과 세운 언약, 즉 맹세로 하나님이 그런 일을 행한 적이 있음을 사람에게 기억하라고 알려 준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앞으로 영원히 다시는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는 것을 사람에게 알려 준 것이다. 그 ‘언약’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이 인류를 멸했을 때 마음이 아팠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언어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인류를 멸하고 인류가 사라진 상황을 봤을 때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인류가 사람의 감정을 묘사하는 데 사용하는 언어들이기는 하지만 사람의 언어가 너무 부족하다 보니 이런 언어로 하나님의 심정과 느낌을 묘사하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그리 잘못되지도, 지나치지도 않은 것 같다. 최소한 당시 하나님의 심정이 어땠을지 너희가 아주 생생하고 적절하게 이해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제 너희가 다시 무지개를 보면 무엇을 생각하게 될까? 최소한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함으로 인해 느꼈던 아픔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과 인류를 증오했지만 자신이 친히 창조한 인류를 멸할 때 마음이 아팠음을, 차마 버릴 수 없지만 어쩔 수 없었음을, 견디기 힘들었음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유일하게 그에게 위안이 되었던 것은 노아의 여덟 식구였다. 노아의 협력으로 그가 만유를 창조할 때 기울인 심혈이 그나마 헛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는 하나님이 상심한 와중에 유일하게 그의 상처를 메워 준 일이었다. 그런 뒤로 하나님은 인류에 대한 모든 기대를 노아 가족에게 걸었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저주가 아닌 하나님의 축복 아래에서 살 수 있기를 바랐다. 또한 그들이 다시는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하는 광경을 보지 않기를 바랐고, 그들이 멸망되지 않기를 바랐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 성품의 어떤 부분을 알아야 할까? 하나님이 인류를 증오한 것은 인류가 하나님을 적대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보살핌과 근심과 긍휼은 시종 변하지 않았다. 그는 인류를 멸했지만 그의 이 마음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인류가 심히 패괴되어 하나님을 극도로 거역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과 본질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원칙대로 인류를 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본질로 인해 여전히 인류를 불쌍히 여긴다. 심지어 인류가 계속 생존해 가게 하려고 각종 방식으로 인류를 되돌리려 한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과 대립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거역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무리 부르고 깨우쳐 주고 공급하고 도움을 주고 관용을 베풀어도,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고 감사히 여기지 않으며 등을 돌려 버린다. 하나님은 상심했을 때에도 여전히 사람에게 최대한도의 관용을 베풀면서 사람이 돌이키기를 기다린다. 그러다가 한계에 다다르면 그는 아무런 주저함 없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인류를 멸하겠다고 계획하면서부터 하나님이 인류를 멸하는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까지는 어느 정도 기한이 있고 과정이 있었다. 이 과정은 인류가 돌이키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자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최후의 기회였다. 그러니 인류를 멸하기 전 이 기간 동안 하나님은 무엇을 했을까? 하나님은 대대적으로 깨우쳐 주고 권면하는 사역을 했다. 하나님은 아무리 상심하고 괴로워도 인류를 끊임없이 염려하고 보살피고 크게 긍휼을 베풀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느냐? 우리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진실함을 분명히 보았다.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닌, 실질적이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거짓이나 가식, 기만, 불순물이 없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지금껏 그 어떤 거짓된 수단이나 허상으로 인류에게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보인 적이 없다. 또한 하나님은 지금껏 거짓 증거로 사람에게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보여 자신의 사랑스러움과 거룩함을 과시한 적도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런 측면들의 성품은 사람이 사랑할 만하지 않느냐? 사람이 경배할 만하지 않느냐? 사람이 귀하게 여길 만하지 않느냐? 여기까지 말을 했는데 너희에게 물어보겠다. 이런 말을 듣고 난 후에도 너희는 하나님의 위대함이 속 빈 글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느냐?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이 빈말에 불과하느냐?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지고지상함, 위대함, 거룩함, 관용, 사랑 등 하나님의 모든 성품과 본질의 면면은 매번 하나님의 사역 가운데 구체화되었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구현되었다. 또한 모든 사람에게서 구체화되었고, 모든 사람들에게서 구현되었다. 네가 일찍이 그 느낌을 받았든 받지 못했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세심히 보살피고 있다. 하나님은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그의 지혜와 다양한 방식으로 모든 사람의 마음을 따스하게 하고 모든 사람의 영을 일깨운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1>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29)

하나님은 인류를 창조한 후, 인류가 패괴된 이후든 인류가 그를 따랐던 때든 상관없이 인류를 자신의 절친한 대상으로 여겼다. 그러니까 인류가 말하는 가장 가까운 존재라고 여겼지, 장난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님 스스로는 창조주이고 인류는 피조물이라고 한 이 말씀은 계급이 나뉘어 있다는 것처럼 들리지만, 하나님이 실제로 인류를 위해 한 모든 행사는 이런 관계를 한참이나 넘어서 있다. 인류를 사랑하고, 보살피고, 염려하고, 그리고 끊임없이 인류에게 공급하는 일까지, 그의 마음은 이런 것들을 가욋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고, 공로가 큰 일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 그는 인류를 구원하고 인류에게 공급하며 베푼 모든 것이 인류에게 엄청난 공헌을 한 일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 그는 그저 자신의 방식과 자신의 본질과 소유와 어떠함으로 조용하고 묵묵히 인류에게 공급하고 있을 뿐이다. 사람이 그에게서 얼마나 많은 공급과 도움을 받았든지 그는 사람에게 공을 요구할 생각이나 행동이 전혀 없다. 이는 하나님의 본질로 인한 것이자 진실로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난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에서나 다른 서적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부분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그래서 사람의 감사와 찬미를 받아 내려고 인류를 향해 하나님 자신이 왜 이렇게 행했고, 왜 이렇게 인류를 보살피는지 설명하거나 표현한 부분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그는 상심하거나 극심한 아픔을 느낄 때에도 인류에 대한 책임과 염려를 잊지 않고 그런 ‘상심’과 ‘아픔’을 홀로 묵묵히 감내한다. 오히려 그는 예전과 다름없이 이렇게 인류에게 공급한다. 비록 인류가 자주 하나님을 찬미하고 증거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이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그러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잘 대해 준 것을 가지고 사람의 은혜에 대한 감사나 보답을 받으려고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 하나님을 진실로 따르는 사람과 그의 말씀을 듣고 그에게 충성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자주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 하나님 쪽에서 이 축복은 조금의 아낌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께 받는 축복은 흔히 사람의 상상을 넘어서고, 사람이 한 행위와 사람이 들인 대가로 얻을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때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 있느냐? 하나님의 심정이 어떨지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있느냐? 하나님이 받은 아픔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느냐? 정확히 말하자면, 없다! 노아를 포함해 인류가 당시 하나님의 슬픔과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느냐? 하나님이 왜 그런 언약을 세웠는지 느낄 수 있느냐? 느낄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의 슬픔과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슬픔과 아픔’을 미처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거리가 있거나 지위상의 차이가 있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어떤 감정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독립적이어서 사람의 관심과 이해와 헤아림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아픔도 희로애락도 없고, 괴로워하지도 근심하지도 않으며, 심지어 눈물도 흘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어떤 감정적인 표현도 필요치 않고, 그 어떤 감정적인 위로도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가 어떤 상황에서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면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고, 사람의 ‘도움’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그와 반대로 ‘연약하고 어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위안과 공급과 격려가 필요하며, 나아가 언제 어디서든 감정적인 위로가 필요하다고 여긴다.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 이런 마음이 숨겨져 있다. 즉, 사람은 ‘약자’이니 하나님의 지극한 보호가 필요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돌봄’을 받아야 하며, 하나님에게서 자신이 받아야 할 모든 것을 받아야 한다는 마음이다. 반대로 하나님은 ‘강자’이고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니 사람의 수호자이자 축복자가 되어야 하고, 그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신통력이 굉장해서’ 사람에게서 더 이상 무엇을 얻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나타낸 모든 것에 대해 무관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슬픔과 고통과 하나님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 하나님은 사람의 모든 행실을 훤히 알고 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든 모든 사람의 필요를 공급하고, 마음의 변화를 관찰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해 주고, 인도해 빛을 비춰 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행한 이 모든 것과 들인 모든 대가에 대해, 성경이나 오늘날 하나님의 모든 말씀 가운데 하나님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분명히 요구하는 말씀을 찾을 수 있을까? 없다! 반대로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의 마음에 관심을 갖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사람을 끊임없이 인도하고 공급하며 도움을 준다. 그렇게 해서 사람이 하나님의 도를 행하게 하여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예비한 아름다운 종착지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고 따르는 사람에게 그의 소유와 어떠함, 은혜와 긍휼과 모든 상을 아낌없이 베풀어 준다. 하지만 지금껏 그가 받은 슬픔과 아픔, 그리고 그의 마음을 사람에게 드러내 보인 적은 없다. 또한 아무도 그를 이해해 주지 않고, 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나님 쪽에서 원망한 적도 없다. 그는 묵묵히 이 모든 것들을 감내하며, 사람이 깨달을 그날을 기다릴 뿐이다.

여기에서 나는 왜 이런 말들을 할까? 이 말들에서 너희는 또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에는 사람이 가장 쉽게 간과하는 부분이 하나 있다. 이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위인이나 좋은 사람을 포함해 모든 사람이나, 사람들의 상상 속에 있는 ‘하나님’도 갖추지 못한 것으로 오직 하나님만이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심 없음이다. 사심 없음이라 하면 너는 자신도 매우 사심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네 자녀에 대해 한 번도 대가를 바라거나 셈을 따진 적도 없었고, 부모를 대할 때도 사심 없는 마음으로 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너는 최소한 ‘사심 없음’이라는 말에 대해 어떤 개념은 갖고 있을 것이다. ‘사심 없음’은 긍정적이고, 사심 없는 사람이 되는 건 무척 훌륭하다고 여긴다. 만일 너 자신이 사심 없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스스로를 아주 위대하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만물 속에서나 사람, 일, 사물 속에서나 하나님의 사역 속에서 하나님의 사심 없음을 본 사람은 없다. 무엇 때문일까? 사람이 너무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 사람은 물질세계에서 살고 있어서 하나님을 따른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어떻게 너에게 공급하고 사랑을 주고 염려하는지 영원히 보지 못하고 느끼지도 못한다. 네가 보는 것은 무엇일까? 네가 보는 것은 너와 혈연관계에 있는,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너를 몹시 아끼는 그 사람이다. 네가 본 것은 너에게 육적으로 유리한 것들이고, 네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네가 좋아하는 사람과 물질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사심 없음이다. 바로 이렇게 ‘사심 없는’ 사람이 오히려 그에게 생명을 준 하나님에게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 하나님과 비교해 볼 때, 사람의 ‘사심 없음’은 오히려 이기적이고 비열하다. 사람이 생각하는 ‘사심 없음’은 실제적이지 않은 공허한 것이고 불순물이 들어 있다. 하나님과 부합하지 않고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다. 사람의 ‘사심 없음’은 사람 자신을 위한 것이다. 반면 하나님의 ‘사심 없음’은 하나님의 본질이 진실로 나타난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사심 없음으로 인해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끊임없는 공급을 받게 되는 것이다. 너희는 오늘 내가 말하는 이 주제에 대해 깊이 느끼지 못하고 그저 머리를 끄덕여 인정하는 수준에 그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네가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되면 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발견하게 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네가 느낄 수 있는 사람과 일과 사물 속에서 오로지 하나님의 사심 없음만이 진정한 것이고 실제적인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오직 너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만이 무조건적이고 흠결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의 소위 사심 없음도 진실이 아닌 거짓되고 표면적인 것이다. 그것은 목적과 속셈이 있고 거래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검증을 이겨 낼 수 없는 것이다. 추하고 비열하다고까지 할 수 있다. 너희는 이 말을 인정하느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1>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0)

창 9:11~13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노아 이야기의 결말인 이 부분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평소와 다른 이례적인’ 방식으로 당시 자신의 심정을 표현했음을 보았다. 이 방식은 무척 특별했다. 하나님이 사람과 언약을 세우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한 것을 일단락 짓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겉으로 봤을 때 ‘언약을 세운’ 일은 아주 평범한 일이다. 그것은 단지 문자의 형식으로 양측을 구속하는 일로, 일을 행할 때 규정을 어기지 않도록 양측의 이익을 보호하는 목적을 이루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형식상 아주 일반적인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런 일을 행한 출발점과 의미에 입각해서 보면, 이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생각이 진실하게 나타난 것이다. 만일 네가 이 말을 내버려 두고 상관하지 않는다면, 내가 일의 진상을 알려 주지 않는다면, 인류는 정말로 영원히 하나님의 생각을 알지 못할 것이다. 너의 상상 속 언약을 세우던 하나님은 웃고 있었을 수도 있고, 엄숙한 표정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의 상상 속 하나님이 가장 일반적인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든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아픔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더욱이 하나님의 고독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이 신뢰하거나 신뢰할 만하여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아픔을 토로할 대상이 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이런 행동을 취한 것이다. 표면적으로 봤을 때 하나님은 간단한 일을 행하여 지난 인류와 작별했고, 과거의 일을 해결했으며, 홍수로 세상을 멸하는 일에 완벽한 마침표를 찍었다. 하지만 그는 그때의 슬픔과 아픔을 마음 깊은 곳에 꼭꼭 숨겨 두었다. 하나님은 그가 토로할 만한 상대가 되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사람과 언약을 세워 사람에게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무지개가 나타날 때 과거에 이런 일이 발생한 적이 있음을 상기하게 했고,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하나님은 이토록 마음이 아픈 상황에서도 사람을 잊지 않고 여전히 이렇게 사람을 염려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고 사심 없음이 아닐까? 반면 사람은 고통스러울 때 무엇을 생각할까? 이때가 바로 사람에게 하나님이 가장 필요한 순간이 아닐까? 이럴 때 사람은 늘 하나님을 끌어당겨 와 위안을 받으려고 한다. 언제든 하나님은 사람에게 실망을 주어서는 안 되고, 사람을 곤경에서 벗어나 빛 속에서 살게 해야 한다고 말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사람에게 공급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은 안정제나 위로제에 불과하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이 마음 아프고 상처를 받았을 때, 어떤 피조물이나 사람이 그와 함께하고 그를 위로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 입장에선 분명 지나친 바람이다. 사람이 지금까지 하나님의 감정을 헤아린 적이 없기 때문에 그는 누군가 자신을 위로해 줘야 한다고 요구한 적이 없고, 위로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 적도 없다. 그는 그저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의 심정을 표현할 뿐이다. 하나님이 약간의 고통을 받는 것은 사람이 보기에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네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려고 할 때, 하나님이 모든 일에 기울인 심혈을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게 될 때, 너는 비로소 하나님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고 하나님의 사심 없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무지개로 사람과 언약을 세웠지만 왜 그렇게 했고 왜 언약을 맺었는지 누구에게도 알려 준 적이 없다. 즉, 그의 진정한 생각을 누구에게도 알려 준 적이 없다. 그가 직접 창조한 인류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누구도 이해할 수 없고 또한 그가 인류를 멸할 때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자신의 느낌을 사람에게 알려 주더라도 사람은 그 ‘신임’을 감당할 수 없다. 그는 마음이 아픈 와중에도 여전히 그의 다음 단계 사역을 계속하고 있다. 하나님은 늘 가장 좋은 부분과 가장 아름다운 것을 사람에게 베풀어 준다. 그러면서 자신은 묵묵히 모든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고통을 공개적으로 알리지 않고 묵묵히 인내하고 기다린다. 하나님이 인내하는 것은 그가 냉혹해서도 아니고, 무감각해서도 아니며,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나약함의 표현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본질이 본래 사심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본질과 성품이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이자 진정한 창조주인 하나님의 신분이 진실로 체현된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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