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진입[1]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74)

만유의 머리인 전능하신 하나님이 보좌 위에서 왕권을 잡고 우주와 만유를 주관하며 온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늘 그를 가까이하고 그의 앞에 와 마음을 평온히 하라. 한순간도 놓치지 말라. 매 순간 배울 공과가 있다. 주변 환경과 사람, 일, 사물은 모두 보좌가 허락한 것이므로 절대로 원망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질병에 걸린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그 속에는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다. 비록 육체가 조금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사탄의 생각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질병 속에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찬미 속에서 하나님을 누리며, 질병 앞에서 낙심하지 말고 계속 구하며 포기하지 말라. 그러면 하나님이 빛을 비추어 깨우쳐 줄 것이다. 욥의 믿음이 어떠했느냐? 전능하신 하나님은 전능한 의사이다! 병 안에서 살면 그저 병뿐이지만 영 안에서 살면 병이 없다. 너에게 한 모금의 숨이라도 붙어 있는 한, 하나님은 너를 죽게 하지 않을 것이다.

부활한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다. 실로 하나님 앞에서 믿음이 부족하니 하나님이 우리 안에 참된 믿음을 더해 주길 바란다. 하나님 말씀은 참으로 달콤하다! 하나님 말씀은 특효약이며, 마귀와 사탄을 치욕스럽게 한다! 하나님 말씀을 알면 의지할 곳이 생기며, 하나님 말씀은 사람의 마음을 살리는 데 즉효이다! 만사가 해결되고 모든 것이 평안해진다. 믿음은 외나무다리다. 죽음을 두려워하면 건너기 어렵고 목숨을 내걸면 편안히 건널 수 있다. 사람에게 겁나고 두려운 생각이 드는 것은 사탄의 우롱으로 인한 것이다. 사탄은 우리가 믿음의 다리를 건너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사탄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항상 자신의 생각을 보낸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의 빛 비춤과 깨우침을 구하고, 하나님께 의지해 우리 안에 있는 사탄의 독소를 정결케 하며, 영 안에서 늘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훈련을 하여 하나님이 권세를 잡고 온몸과 마음을 점유하게 해야 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그리스도의 최초의 말씀ㆍ제6편>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75)

일이 임할 때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해야겠느냐? 기도를 해야 한다. 기도가 우선이다. 기도는 너라는 사람이 경건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 구할 줄 알고 하나님이 네 마음에서 자리를 갖게 한다는 것을, 너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연로한 신자들이 날마다 시간 맞춰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데, 꿇어앉은 시간이 길어져 일어서기조차 힘들 정도이다. 그것을 종교 의식으로 봐야 할지,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는 차치하고, 이 나이 많은 형제자매들은 더없이 경건하며, 너희 젊은이들보다 훨씬 낫고 부지런하다. 일이 임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기도이다. 기도는 마음 없이 입으로만 중얼거린다고 그만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어쩌면 여덟 번, 열 번 기도를 해도 아무 수확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낙담하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일이 임했을 때 먼저 기도하며, 먼저 하나님이 알고 주권을 잡고 너를 돕고 주도하고 네게 방향을 지시하게 한다면, 이는 네가 하나님을 첫 번째 자리에 놓았으며, 네 마음에 하나님이 있다는 의미이다. 일이 임했을 때 먼저 반발하고 화나 성질을 내고 소극적이 된다면 이는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는 모습이다. 실생활에서 일이 임할 때마다 늘 기도해야 한다. 가장 먼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 이것이 핵심이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대하는 네 태도를 의미한다. 네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이는 “하나님께 기도해도 깨우쳐 주지 않으십니다!”라고 말하는데, 그렇게 말해선 안 된다. 먼저 기도할 때 네 마음가짐이 올바른지를 보아야 한다. 네가 진심으로 진리를 구하고 언제나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어떤 일에서 너를 깨우쳐 알게 할 수도 있고, 어쨌든 네가 알게 할 것이다. 하나님이 깨우쳐 주지 않으면 너 스스로는 깨달을 수 없다. 너에게는 깨닫는 능력이 없고 그런 머리도 없다. 이는 사람의 사유로는 다다를 수 없는 것이다. 네가 깨달았다면 그것은 네 사유로 생각해 낸 것이겠느냐? 영이 역사하는 뜻, 하나님의 뜻에 있어, 만약 성령이 너를 깨우쳐 주지 않는다면, 너는 누구에게 물어봐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 자신이 그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 주어야 그때 비로소 네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일이 임하면 가장 먼저 기도를 해야 한다. 기도는 마땅히 구하는 태도로 찾아야 하고, 너 자신의 생각, 관점, 태도를 밝혀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 만약 네가 형식만 좇는다면 성과를 내지 못한다. 그러니 성령이 너를 깨우쳐 주지 않는다고 원망할 수는 없다. 현재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계속 믿다 보면 하나님을 입에만 달고 다닐 뿐,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고, 영의 역사 또한 부정하게 된다. 기도 역시 부정하면서 그저 하나님 말씀을 읽고 그걸로 끝이다. 이것을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계속 믿다 보면 그 믿음에 하나님이 없게 된다. 특히 어떤 이는 늘 사무적인 일로 바삐 뛰어다니며 너무 바삐 보내는데도 소득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바른길을 걷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바른길을 걷는 것이 힘들지 않겠느냐? 수많은 도리를 알아도 바른길을 걷지는 못하고, 오히려 아주 빨리 그릇된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러므로 일이 임했을 때 많이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가장 최소한으로 갖춰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성령의 뜻을 구하는 법을 배우는 것, 이것이 핵심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이렇게 체험하고 실행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테니 헛되이 믿은 것과 같다.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모든 일을 진리의 관점으로 바라봐야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76)

사람이 얼마나 많은 진리를 깨달았든, 얼마나 많은 본분을 이행했고 본분을 이행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체험했든, 분량이 크든 작든, 어떤 환경에 처해 있든 떠날 수 없는 것은 바로 매사에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이는 가장 큰 지혜이다. 어째서 가장 큰 지혜라고 하겠느냐? 사람이 많은 진리를 깨달았다 한들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으면 되겠느냐? 하나님을 꽤 오랜 시간 믿고, 일부 진리를 깨달았으며, 몇 번의 시련을 겪어 실제 체험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의지할 줄 모르고, 어떻게 하나님을 앙망해야 할지, 어떻게 하나님께 기대야 할지 또한 모른다면, 그런 사람에게 지혜가 있겠느냐? 그런 사람은 가장 어리석은 자로, 젠체하는 부류에 속할 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 아니다. 어떤 이는 “저는 많은 진리를 깨달았고, 진리의 실제 역시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니 일을 처리할 때 원칙대로만 하면 됩니다. 저는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며, 어떻게 하나님께 다가가야 하는지 또한 알고 있습니다. 진리에 의지하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한다. ‘진리에 의지한다’는 말이 도리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사람은 많은 시기, 많은 상황에서 진리가 무엇인지, 진리의 원칙은 또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실제 체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이런 경험을 해 봤을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일이 임했는데 네가 그 측면의 진리를 어떻게 실행하고 적용해야 할지 모른다면, 그럴 때 어떻게 해야겠느냐? 아무리 실제 체험이 있다고 해도 모든 일에서 다 진리를 갖추고 있을 수는 없다. 하나님을 아무리 오래 믿었다고 한들, 체험한 일과 책망 훈계, 징계가 아무리 많다고 한들, 네가 진리의 근원이냐? 어떤 이는 “저는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의 명구들을 막힘없이 외우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의지하고 앙망할 필요가 없지요. 때가 됐을 때 하나님의 그 말씀들에 의지하면 됩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네가 외운 그 말씀들은 죽은 것이고, 사람이 처한 환경이나 내적 상태는 살아 있는 것이다. 글귀를 이해하고, 영적인 도리를 많이 말할 수 있다고 해서 진리를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으며,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다고는 더욱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여기에 아주 중요한 공과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즉, 사람은 매사에 하나님을 앙망해야 하며, 하나님을 앙망함으로써 하나님께 의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만이 실행할 길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떤 일에 있어 옳게 행동하고, 진리의 원칙에 부합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기에 그것은 인위적인 행위에 불과하며, 하나님을 흡족게 했다고는 할 수 없다. 사람이 깨닫는 진리는 너무 얕다. 그렇기 때문에 각기 다른 환경 속에서 늘 동일한 진리로 규례에 맞추고 글귀와 도리를 고수한다면, 많은 일을 이루고 대체적으로 진리의 원칙에 부합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서는 하나님의 인도와 성령 역사를 찾아볼 수 없다. 그렇게 되면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바로 많은 일을 할 때 자기가 깨달은 경험과 규례, 또는 인위적인 일부 상상에 의지하게 되므로 하나님을 앙망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확실히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후에 하나님의 역사와 인도를 통해 최고의 성과를 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매사에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지혜라고 말한다.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하나님을 믿을 때는 먼저 세상의 사악한 흐름을 꿰뚫어 봐야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77)

진리는 하나님 자신의 생명으로,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본질, 그의 내면에 있는 모든 것을 대표한다. 사람이 얼마간 체험을 했다고 해서 진리를 갖췄다고 한다면 너는 하나님의 성품을 대변할 수 있겠느냐? 네가 한 가지 진리의 한 측면, 또는 한 부분을 어느 정도 체험하고 빛을 얻었을지는 몰라도 다른 사람에게 영원히 공급해 주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얻은 그 빛은 진리가 아니라, 그저 사람이 이를 수 있는 어떤 정도이다. 즉, 그것은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 할 올바른 체험이자 올바른 인식, 진리에 대한 실제적인 체험으로 얻은 인식이다. 그 정도의 빛과 깨우침, 체험으로 얻은 인식은 영원히 진리를 대체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한 마디의 진리를 체험하고 그 체험한 인식들을 종합해 놓는다고 해도 그 한 마디의 진리를 대체하지는 못한다. 예전에 “내가 인간 세상에 대해 ‘사람 중에는 나를 사랑하는 이가 없다.’라는 격언을 만든 것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는 하나의 진리이자 인생의 정수, 가장 심오한 것으로,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다. 네가 체험하고 또 체험해서 3년간 체험하면 얕은 인식이 생길 것이고, 7~8년간 체험하면 또 어느 정도 인식을 갖게 되겠지만, 그런 인식은 영원히 그 한 마디의 진리를 대체할 수 없다. 누군가 2년 동안 체험하면 약간의 인식이 생길 것이고, 10년 동안 체험하면 좀 높은 인식이 생길 것이며, 일생 동안 체험하면 또 어느 정도 인식이 생기겠지만, 너희 둘을 합해 얼마나 많은 인식과 체험, 깨달음, 빛 비춤, 실례(實例)가 있든 그것은 그 한 마디의 진리를 대체하지 못한다. 이는 사람의 생명은 영원히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이다. 너의 인식이 아무리 진리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해도 그것은 영원히 진리를 대체하지 못한다. 사람에게 진리가 있다는 것은 얼마간 실제가 있고, 진리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이 있으며, 하나님이 한 말씀에 대해서도 실제 진입과 체험을 좀 하고,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로 나아가고 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면 사람이 평생 체험할 수 있다. 심지어 몇 번의 생 동안, 몇천 년 동안 체험해도 하나의 진리를 다 체험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 글귀를 좀 안다고 해서 진리를 갖췄다고 말한다면, 이는 터무니없는 소리 아니겠느냐? …

사람이 진리를 알고 진리를 생명으로 삼는다면, 그 생명은 어떤 것이겠느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 하나님의 말씀에 참된 인식이 있고 진정으로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사람의 내면에 그 새 생명이 존재하면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기반으로 살아가고, 진리의 범위 안에서 살아가게 되며, 사람의 생명에 온통 진리에 대한 인식과 체험이 존재하게 되고, 그것을 기초로 범위를 넘지 않게 된다. 진리 생명을 얻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생명을 의미한다. 사람이 진리를 생명으로 살아간다고 해서 사람의 내면에 진리의 생명이 생기는 것은 아니며, 네가 진리를 생명으로 삼았다고 해서 네가 곧 진리가 되고, 네 안의 생명이 진리의 생명이 되는 것도 아니다. 또한, 사람이 곧 진리 생명이라고는 더더욱 말할 수 없다. 결국 너의 생명은 여전히 사람의 생명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이런 말씀으로 살아가고, 진리에 대한 인식이 뿌리 깊은 수준에 이르렀으며, 이러한 인식이 네 안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 체험으로 확실히 인식하여 이러한 것들이 더없이 좋고 귀중하다고 느끼며, 그것을 받아들여 생존의 근간으로 삼고, 그러한 것들에 기대 살아가고, 누구도 바꿀 수 없는 것, 이것이 바로 너의 생명이다. 즉, 네 생명 안에 오직 이러한 것들만 존재하고, 오직 진리에 대한 인식, 체험, 깨달음만 존재하며, 무슨 일을 하든 이러한 것들로 살아가고, 이 범위와 선을 넘지 않는다면, 그것이 곧 너의 생명인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 바로 사람의 이러한 생명이다. 사람이 아무리 진리를 잘 알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사람의 본질로, 하나님의 본질과는 같은 선상에서 논할 수 없다. 사람은 영원히 진리를 다 체험할 수 없으므로 진리를 완전히 살아 낼 수 없으며, 사람이 닿을 수 있는 극히 제한된 진리만 조금 살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이 될 수 있겠느냐? …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느 정도 체험하여 진리에 대한 인식으로 살아가며, 하나님의 말씀이 네 생명이 되었다고 해도 진리가 네 생명이고, 네가 말하는 것이 진리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네가 또 틀린 것이다. 네가 진리의 한 부분을 어느 정도 체험했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를 대표할 수 있겠느냐? 절대로 그럴 수 없다. 그럼 너는 진리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느냐? 너는 진리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느냐? 발견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한 측면, 한 범위에서 진리를 체험한다. 각자의 제한된 범위 안에서 체험하므로 진리의 모든 면을 아우르지 못한다. 사람이 진리의 본뜻을 살아 낼 수 있겠느냐? 네가 체험한 그 정도의 진리가 차지하는 비율은 얼마나 되겠느냐? 백사장의 모래 한 알, 바닷물의 한 방울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네가 체험한 그 인식과 네가 얻은 그 느낌이 아무리 귀하다고 해도, 그것을 진리라고 할 수는 없다. 진리의 근원과 내용은 매우 넓은 범위를 포함하므로 그 어떤 것도 반박하지 못한다. 어떤 이는 “제 이러한 체험과 인식은 어떤 상황에서도 반박당하지 않을까요?”라고 묻는데, 그것은 당연하다. 네가 하나님 말씀을 통해 체험한 참된 인식은 진리에 부합하는데, 어떻게 반박당할 수 있겠느냐? 진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네 생명이 되고, 네게 길을 주며, 네가 살아남게 한다. 그러나 사람이 지닌 그 약간의 것, 그 얼마 안 되는 빛은 오직 한 범위 안에서만 자신, 또는 일부 사람들에게 적합할 뿐, 다른 범위에서는 적합하지 않다. 사람이 아무리 깊게 체험해도 한계가 있고, 어떻게 해도 진리가 적용되는 범위에는 이르지 못한다. 사람의 빛과 인식은 영원히 진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다.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너는 진리가 대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78)

진리를 실행하고 싶고 알고 싶다면 먼저 자신에게 임한 어려움과 자기 주변에서 발생한 일의 본질이 무엇인지, 어떤 문제인지, 어떤 측면의 진리와 관련되어 있는지 알아야 한다. 이것들을 찾은 후에 너의 실제 어려움에 맞춰 진리를 구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조금씩 체험하다 보면 네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을 것이고, 하나님이 하려는 것, 네게서 이루려는 성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주변에 어떤 일이 생겨도 하나님을 믿는 일이나 진리와는 무관하다고 여기며, ‘나한테는 처리할 방법이 있으니 진리도, 하나님 말씀도 필요 없어. 예배할 때나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 또는 내가 본분을 이행할 때나 진리에 맞춰 보면 돼.’라고 생각하고, 평소 자기 삶에서 발생하는 일, 자신의 가정, 직장, 결혼, 앞날 등 주변에서 발생하는 갖가지 일들이 모두 진리와 무관하다고 여긴다면, 그리하여 스스로 사람의 방법을 통해 해결하려 한다면, 너의 체험법이 이런 것이라면, 너는 영원히 진리를 얻지 못할 것이고, 하나님이 네게서 대체 무엇을 이루려는지, 어떤 성과를 내려는지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진리 추구는 기나긴 과정이다. 거기에는 간단한 면도 있고 복잡한 면도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먼저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에서 진리를 찾고 하나님 말씀을 체험하며 실행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하나님을 믿으면서 얻어야 할 진리나 추구해야 할 진리가 너무도 많다는 것을, 진리는 더없이 실제적이며 진리가 곧 생명이라는 것을 차츰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나 리더 역할을 하는 사람만 모든 일을 진리에 따라 실행해야 하고, 일반 신자는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이 선포한 말씀들이 그렇게 큰 의의가 없을 것이다. 현재 너희는 진리 추구에 길이 있느냐? 진리를 추구할 때 가장 먼저 무엇을 해결해야겠느냐? 가장 먼저 하나님 말씀을 많이 먹고 마시고, 설교 교제를 많이 듣고, 일이 임했을 때 많이 기도하고 구해야 한다. 너희가 갖춘 진리가 많아지고, 생명 진입을 하고, 분량이 생기면 실제적인 일을 하거나 사역을 감당할 수 있고 일부 시련과 시험들을 견디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너희 스스로도 확실히 얼마간 진리를 깨닫고 얻었다고 느낄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은 실로 사람에게 필요한 것임을, 사람이 반드시 얻어야 하는 것임을, 또한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진리임을 느낄 것이다.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진리 추구의 중요성과 진리를 추구하는 길>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79)

많은 이가 이런 말을 하곤 한다. “나는 무슨 진리든 전부 알고 있어. 다만 실행하지 못할 뿐이야.” 이 말은 근원적인 문제, 그리고 사람의 본성 안에 있는 문제를 보여 준다. 만약 사람의 본성이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라면 영원히 진리를 실행하지 못할 것이다.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을 때 분명 사치스러운 욕망을 지니고 있을 것이고, 무슨 일을 하든 자신만의 속셈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핍박을 받아 집이 있어도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지금 나는 집에 돌아가지 못하지만, 언젠가 하나님이 내게 더 좋은 집을 주실 거야. 하나님이 날 헛고생하게 두실 리 없어.’라거나 ‘내가 어디 있든 하나님은 내게 먹을 것을 주실 거야. 하나님이 나를 막다른 길로 내모실 리 없지. 만약 그러신다면 하나님이 잘못하신 거야.’라는 기대를 한다. 사람의 내면에 이러한 것들이 있지 않더냐? 또 어떤 사람들은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 헌신했으니 하나님은 날 정부(政府)의 손에 넘기지 않으실 거야.’, ‘내가 이렇게 버리고 진리를 추구했으니 하나님은 나를 축복하셔야 마땅해.’, ‘우리가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이토록 고대하고 있으니 곧 하나님의 날이 올 거야. 하나님은 사람이 원하는 대로 이뤄 주실 거야.’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내면에는 늘 하나님에 대한 사치스러운 요구가 존재한다. ‘우리가 이렇게 했으니 하나님은 어떻게 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경지에 이르렀으니 하나님은 마땅히 우리에게 상을 내려 주시고 축복을 내려 주실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또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이 가정을 떠나 홀가분하게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면 속으로 불편해하며, ‘저렇게 오래 집을 떠나 있었는데 어떻게 버틴 거야? 왜 난 늘 못 버티겠지? 나는 왜 가정이나 자식을 내려놓지 못하는 거냐고. 하나님은 왜 저 사람은 선대하시고 나는 선대해 주시지 않는 걸까? 성령은 왜 내게 은혜를 내려 주시지 않는 거지? 하나님은 왜 나와 함께해 주시지 않는 거야?’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어떤 내적 상태겠느냐? 사람이 너무 비이성적인 것이다. 스스로 진리를 실행하기는커녕 하나님을 원망하니 말이다. 주관적인 노력도 하지 않고, 스스로 이뤄야 할 것들도 모두 하지 않으며, 주관적으로 선택하고 걸어야 할 길 역시 전부 포기한 채 늘 하나님께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요구하고, 언제나 자신을 선대해 달라고, 은혜를 베풀고 인도해 달라고, 누리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는 ‘나는 집에서 나왔고, 이렇게 많은 것을 포기했으며, 본분을 이행하면서 고생도 이렇게 많이 했으니 하나님은 내가 집이 그립지 않게, 내려놓을 수 있는 의지를 갖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 해. 그리고 내게 힘을 주셔야 돼. 나는 왜 이렇게 연약할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강인한 거지? 하나님은 날 강인하게 만들어 주셔야 돼.’, ‘다른 사람들은 다 집에 갈 수 있는데 나는 왜 핍박받으면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거지? 하나님은 날 선대해 주지 않으셔.’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하는 이런 말에는 조금의 이성도 존재하지 않으며, 진리는 더더욱 없다. 사람의 원망이 어디에서 왔겠느냐? 그것은 바로 사람 내면에서 흘러나온 것들로, 사람의 본성을 완전히 대표한다. 사람의 내면에 있는 이러한 것들을 벗어 버리지 않는다면, 네 분량이 얼마나 크든, 네가 알고 있는 진리가 얼마나 되든 영원히 굳게 설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모독하고 배반하고 참도를 저버릴 수 있다. 이는 더없이 쉬운 일이다. 이제 확실히 깨달았느냐? 사람은 자신의 본성이 늘 무엇을 드러내는지 반드시 깨닫고 확실히 알아야 한다. 이 문제를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 어느 정도 진리를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때로 이것을 의식하면 문제를 발견하여 성찰하고 깊이 파헤치지만, 또 때로는 이것을 의식하지 못하면 이럴 때는 하나님이 밝혀 주기를 기다리거나 사실이 드러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데면데면한 사람은 때로 이것을 의식하고도 스스로와 타협하면서 ‘사람은 다 이런 거야. 이게 뭐 어때서? 하나님도 용서해 주실 거야. 기억하실 리 없어. 이건 다 정상이야.’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스스로 선택해야 할 것, 해야 할 것을 전혀 하지도 달성하지도 않고 흐리멍덩하며 타성에 심각하게 젖어 기대려고만 하면서 ‘하나님이 언젠가 우리를 철저히 변화시켜 주시면 이런 타성도 없어지고 똑바로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겠지. 하나님이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라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한다. 이제 너는 확실히 알아야 한다. 네가 어떤 길을 갈지는 너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그 선택은 모든 이에게 더없이 중요하다! 너는 자신을 이겨 내는 힘이 강하냐? 자신을 저버리는 힘이 크냐? 의식할 수 있겠느냐? 이는 진리 실행의 전제이자 핵심적인 부분이다. 어떤 일이 임할 때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에 부합하는지 알고 있는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무엇을 실행해야 할지를 확실히 해야 길이 생긴다. 자신의 내적 상태가 올바른지 그릇되었는지 의식할 수 있지만, 확실하지 않은 상태로 대충 넘어간다면 너는 영원히 발전하지도, 새로운 진전을 이루지도 못할 것이다. 생명 진입에 관한 일을 참답게 대하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망칠 뿐이며, 네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자신의 내적 상태를 알아야 정상 궤도에 오를 수 있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80)

진리를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은 일을 할 때 하나님의 감찰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의 감찰을 받으면, 네 마음은 올바른 것이다. 네가 늘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기 위해 일을 하고 하나님의 감찰을 받지 않는다면, 네 마음속에 하나님이 있겠느냐?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다. 일을 할 때 언제나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안 되며, 자신의 이익이나 지위, 체면, 명예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람의 이익을 생각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 집의 이익을 생각하고, 하나님 집의 이익을 제일 앞자리에 두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먼저 자신의 본분 이행에 불순물이 섞여 있지 않은지, 충성을 다했는지, 책임을 다했는지, 최선을 다했는지, 자신의 본분 그리고 하나님 집의 사역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치고 있는지 이런 것들을 생각해야 한다. 네가 늘 이런 것을 생각하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다. 네가 자질이 부족하고 체험이 얕거나 업무에 정통하지 못해 일에 실수와 잘못이 생기고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한다 할지라도 너는 이미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네가 네 자신의 사욕이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어디서나 하나님 집의 사역과 하나님 집의 이익을 생각하며, 또한 본분을 제대로 이행했다면, 하나님 앞에서 선행을 쌓은 것이다. 그렇게 선행을 행한 사람이 바로 진리의 실제가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되면 증거가 있게 된다. 늘 육으로 살아가고 자신의 사욕을 만족시키는 사람에게는 진리 실제가 없다. 그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징표이다. 너는 “저는 한 것도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욕되게 했다고 하십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네 생각과 일하는 속셈, 목적, 동기, 일을 행한 결과는 모두 사탄을 만족시키고, 사탄의 웃음거리가 되며, 사탄에게 약점을 잡히고, 크리스천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증거가 조금도 없다. 네가 매사에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진실한 증거가 없으니, 하나님이 네가 행한 것을 기억하겠느냐? 마지막에 하나님이 너의 모든 행위와 네가 이행한 본분에 어떤 결론을 내리겠느냐? 결론이나 설명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성경에서 예수는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라고 하였다. 예수는 왜 이런 말을 했겠느냐? 주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열심히 뛰어다닌 사람이 어째서 불법을 행하는 사람이 되었겠느냐? 불법을 행하는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느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느냐?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하나님을 위해 포기하고 헌신하고 자신의 본분을 이행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본분을 이행하면서 충성심과 증거가 없었으므로 불법을 행하는 자가 되었다. 그래서 예수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한 것이다.

사람의 행위가 선인지 악인지를 가늠하는 기준은 무엇이냐? 바로 네가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 드러내는 것, 행하는 것에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의 실제를 살아 낸 증거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네게 그러한 실제가 없고 그러한 살아 냄이 없다면, 너는 의심할 나위 없이 악을 행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사람을 어떻게 보겠느냐? 네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 겉으로 행동하는 것은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사탄을 수치스럽게 하거나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어디서나 하나님을 욕보이는 표가 되는 것이다. 너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도,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도, 하나님을 위해 네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도 아니라, 너 자신을 위하는 것이다. ‘자신을 위한다’라는 말에 숨은 뜻이 무엇이겠느냐? 사탄을 위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하나님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말씀할 것이다. 하나님이 보기에 네가 행한 것이 선행이 아니라 악행이다. 너는 상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께 기억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럼 전부 허사가 되지 않겠느냐?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이 진리를 깨달은 정도가 깊든 얕든 상관없이, 진리의 실제에 진입하기 위한 가장 간단한 실행 방법은 바로 어디서나 하나님 집의 이익을 생각하고, 자신의 사욕과 속셈, 동기, 체면, 지위를 내려놓는 것이다. 하나님 집의 이익을 첫자리에 놓는 것은 가장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이 이것조차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본분을 이행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것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다. 너는 마땅히 하나님 집의 이익과 하나님의 이익, 하나님의 사역을 먼저 생각하고, 그것들을 첫자리에 놓아야 하며, 그다음 네 지위가 안정적인지, 다른 사람들이 너를 어떻게 볼지를 생각해야 한다. 두 단계로 나누어 절충하면 좀 쉬운 것 같지 않으냐? 시간이 지나면 너는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이 밖에 너는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본분을 이행하고, 사욕과 속셈, 동기를 내려놓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하나님과 하나님 집의 이익을 첫자리에 놓고 그렇게 한동안 체험하다 보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좋고 정정당당하게 사는 것이라 생각하게 될 것이다. 비열한 소인배처럼 나약하고 천하고 야비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광명정대하게 사는 것이라고, 이것이 바로 사람이 마땅히 살아 내야 할 모습이자 마땅히 해야 할 것이라고 말이다. 이렇게 하면 네 마음속에 있던, 이익을 채우려던 욕망은 점차 천천히 작아질 것이다.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하나님께 진심을 바치면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81)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특히 행위를 중요시하기에 행위 면에서는 어느 정도 변화가 있다. 하나님을 믿은 후로 다른 이와 다투지 않는다거나 싸우지도 욕하지도 않는다거나 담배나 술을 끊는다거나 공공 물건이라면 못 하나, 널빤지 하나라도 탐내지 않는다거나 심지어 손해를 좀 보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고소하지 않는 등 행위 면에서는 확실히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을 믿은 후로 참도를 잘 받아들였다는 생각이 들고, 또 성령 역사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어 매우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심지어는 무엇이든 다 내려놓고 어떤 고난이든 전부 감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은 지 3년, 5년, 10년, 30년이 지났는데도 사람의 생명 성품이 변화되지 않아 결국엔 옛병이 도져 교만하고 잘난 체하는 모습이 예전보다 더욱 심해졌다. 그리하여 권력과 이익을 놓고 다투고, 교회의 재물에 눈독 들이며, 이익만 추구하고, 지위와 안락을 탐하여 하나님 집의 기생충이 되고 말았다. 특히 리더를 맡았던 많은 이가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을 말해 주느냐? 단순한 행위적 변화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 사람의 생명 성품이 변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흉악한 몰골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행위적 변화는 열정에서 비롯되는데, 거기에 성령의 역사까지 더해지면 사람이 열정을 갖고 한때 호의를 베푸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좋은 일을 한 번 하기는 쉽지만, 평생 하기는 쉽지 않다”는 이방인의 말처럼 사람은 좋은 일을 평생 하지는 못한다. 사람의 행위는 생명의 지배를 받으며, 그 생명에 따라 행위도 달라진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야말로 생명과 본성을 대표하며, 위장한 것들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하나님이 사역하여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사람의 좋은 행위를 꾸며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성품을 변화시켜 환골탈태시키고 새사람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하고 형벌하고 연단하고 사람에게 시련을 주는 것은 모두 사람의 성품을 변화시켜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충성하며 정상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역사의 근본 취지이다. 좋은 행위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다고 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와 합할 수 있다고는 더더욱 말할 수 없다. 행위상의 변화는 도리에 기반해 열정으로 이뤄진 것이지,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인식이나 진리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며, 더욱이 성령의 인도로 인한 것도 아니다. 때로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그의 생명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며, 더욱이 하나님을 아는 것과도 같지 않다. 행위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 주지는 않고, 나아가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임을 증명하지도 못한다. 행위상의 변화는 한때의 거짓된 모습이자 열정에서 비롯된 모습이지, 생명의 드러남이 아니다.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외적인 변화와 성품 변화의 차이>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82)

사람이 행위가 좋다고 해서 반드시 진리를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열정으로는 그저 도리에 근거해 규례를 지킬 수 있을 뿐, 진리가 없는 사람은 본질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도리는 진리를 대체할 수 없다. 그러나 성품이 변화된 사람은 다르다. 성품이 변화된 사람은 진리를 알고 있으며, 모든 일을 분별할 수 있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어떻게 해야 진리의 원칙에 부합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흡족게 할 수 있는지 알고 있다. 또한, 자신이 드러내는 패괴 성품이 어떤 성질인지 알고 있으며, 사람의 생각과 관념이 드러날 때 그것을 분별하여 육을 버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성품이 변화된 사람의 모습이다. 성품 변화의 가장 주된 모습은 진리를 밝히 깨닫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진리 실행이 비교적 정확하며, 패괴된 성품을 드러내는 경우가 적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성품이 변화된 사람은 행위가 남달리 이성적이고 분별력이 있다. 진리를 깨달았기에 교만하고 독선적인 모습을 적게 드러내며, 드러내는 많은 패괴된 성품을 명확히 알고 분별할 수 있기에 교만해질 수 없다. 사람이 마땅히 어떤 위치에 서야 하는지,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이성적인 것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본분을 지키는 것인지, 어떤 말을 해야 하고 어떤 말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 어떤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러한 일들을 비교적 잘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비교적 이성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품이 변화된 사람만이 진실로 사람의 모습을 살아 낸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진리가 있기에 말을 할 때도, 어떤 일을 하거나 일을 바라볼 때도 진리에 근거해 할 수 있으며, 무슨 일을 하든 원칙이 있다. 또한, 어떤 사람과 일, 사물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주관을 지키며, 진리의 원칙을 견지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의 성품은 비교적 안정적이어서 쉽게 끓거나 식는 일이 없으며, 어떤 환경에서든 어떻게 해야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흡족게 할 수 있는지 알고 있다. 성품이 변화된 사람은 겉으로 어떻게 해야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일지 신경 쓰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는지를 마음속으로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그다지 열정적이지 않은 것 같고, 큰일을 많이 한 것 같지도 않지만 그가 하는 모든 일에는 의의와 가치, 그리고 실질적 성과가 있다. 성품이 변화된 사람은 틀림없이 많은 진리를 갖추고 있다. 그것은 그가 일을 바라보는 관점과 일을 처리하는 원칙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진리가 없으면 결코 성품이 변화되지 못한다. 성품 변화는 인성이 성숙하고 노련해진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주로 사람의 본성 안에 있는 사탄의 독소가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바뀐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사탄의 독소가 정결케 되고,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가 그 사람의 내면에 뿌리내려 생명과 생존 토대가 됨으로써 그를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한 것이다. 그래서 성품이 변화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성품 변화는 사람의 외적인 성품이 전보다 온순해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전에는 교만한 편이었는데 지금은 이성적으로 말한다든가, 예전에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래도 다른 사람의 말을 좀 듣는다든가 하는 외적인 변화로 성품이 변화되었다고 하지 않는다. 물론 성품 변화에는 당연히 이러한 변화도 포함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적 생명에 변화가 생기고,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가 그 사람의 내면에서 생명이 된 것이다. 내면에 있던 사탄의 독소가 없어지고, 일을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져 세상의 관점과 맞는 것이 하나도 없으며, 큰 붉은 용의 음모와 독소를 완벽하게 꿰뚫어 보고, 인생의 참뜻을 깨달아 가치관이 바뀐 것,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변화이며 성품 변화의 본질이다.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외적인 변화와 성품 변화의 차이>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83)

성품 변화는 행위상의 변화도 아니고, 꾸며낸 표면상의 변화도 아니며, 한때의 의욕으로 인한 변화도 아니다. 그것은 진정한 성품에 변화가 생김으로써 나타나는 행위상의 변화이다. 이러한 행위상의 변화는 사람의 표면적 행위 방식의 변화와는 다르다. 성품 변화는 진리에 인식과 체험이 생긴 것이며, 진리가 네 생명이 된 것이다. 예전에는 어떤 일을 할 때 진리를 알아도 실행하지 못했고, 진리를 도리처럼 여겨 대충 보고 넘길 뿐이었지만, 이제는 성품에 변화가 생겨 단순히 진리를 아는 것을 넘어 진리대로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예전에 네가 좋아하며 하고 싶었던 것, 너의 상상과 관념을 모두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내려놓지 못한 것을 지금은 내려놓을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성품 변화이고 성품 변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듣기엔 매우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 그 과정에서 사람은 수많은 교통을 겪어야 하며 스스로를 이겨내면서 자신의 육 안에 있는, 본성에 속하는 것들을 저버려야 한다. 또한 책망과 훈계, 형벌과 심판, 시련과 연단을 체험해야 한다. 사람은 이러한 것들을 체험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본성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바로 변화가 생기는 것도 아니며, 그 과정에서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네가 어떤 일에 인식이 있다고 해서 실행할 수 있겠느냐? 바로 실행하지는 못한다. 인식 단계에서 누군가 너를 훈계하고 책망하며, 또 환경이 너를 압박해야 진리의 원칙대로 행하게 되는 것이다. 간혹 어떤 이가 못마땅해하면서 “난 그렇게 하고 싶은데 왜 안 되는 거지? 왜 꼭 이렇게 해야만 하는 거야?”라고 할 때, 다른 이가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이렇게 해야만 해. 이렇게 하는 게 진리에 부합하는 거야.”라고 한다. 사람이 어느 정도에 이르러 시련을 겪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 어느 정도 진리를 깨달으면, 진리의 원칙대로 행하기가 달가워진다. 누구나 처음 진리를 실행할 때는 마지못해 억지로 실행한다. 본분 이행의 충성심을 들어 이야기해 보겠다. 네가 본분 이행, 하나님에 대한 충성에 얼마간 인식이 있고, 진리를 알고 있다고 치자. 하지만 언제쯤 완전한 충성심을 갖고 명실상부하게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겠느냐? 여기에는 어느 정도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너는 많은 고통을 겪을 수도 있다. 누군가 너를 책망하고 누군가 너를 질책하며, 모두의 눈이 네게 집중되어야 너는 비로소 자신에게 잘못이 있음을 깨닫고, 자신이 나쁘다는 것을, 본분을 이행할 때 충성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건성으로 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성령이 안에서 깨우쳐 네가 잘못된 일을 할 때 너를 질책하면, 그 과정에서 너는 스스로를 얼마간 인식하게 되고, 네 본분 이행에 불순물과 개인의 속셈, 사치스러운 욕망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것들의 본질을 인식한 후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고 진실로 회개하면, 정결하지 않은 것들이 정결케 될 수 있다. 늘 이렇게 진리를 구해 자신의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한다면 조금씩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오를 것이다. 사람의 패괴 성품이 정결케 됨에 따라 생명 성품에도 점점 변화가 생기게 된다.

솔직히 말해, 지금 너희의 본분 이행 중 진정한 본분 이행이 얼마나 되겠느냐? 성품 변화를 이룬 후 진리에 부합하는 본분 이행이 얼마나 되겠느냐? 이러한 것들을 성찰하다 보면 네가 과연 성품 변화를 얼마나 이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성품 변화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행위 면에서 변화가 생겼거나 진리에 대해 얼마간 인식이 있다고 해서, 모든 진리에 대해 어느 정도 체험을 이야기할 수 있다거나 징계를 겪고 얼마간 변화와 순종이 생겼다고 해서 생명 성품의 변화를 이뤘다고 할 수는 없다. 어째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겠느냐? 네게 얼마간 변화가 생기기는 했지만, 진정한 진리 실행에 이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한순간 알맞은 환경이나 좋은 조건 때문에, 또 어쩌면 그 당시의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이 밖에, 네가 정서적으로 안정적일 때나 성령이 역사할 때는 실행할 수 있겠지만, 시련을 겪는 중이라면, 욥처럼 시련으로 고통을 받거나 베드로처럼 하나님이 죽게 한다고 말씀한다면, “제가 당신을 알게 된다면 죽어도 괜찮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성품 변화는 하루아침에 되는 일도 아니고, 네가 진리를 깨달은 후에 다양한 환경에서 항상 실천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본성과 관계된다. 간혹 겉으로는 진리를 실행하는 것 같지만 사실 네 행위의 본질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가정과 일을 다 내려놓거나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이러한 외적인 행위를 갖추고는 자신은 진리를 실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네가 진리를 실행하고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일을 할 때, 개인의 속셈과 목적과 불순물이 들어 있는 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행위일 뿐이다. 엄밀히 말하면 너의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께 칭찬받지 못하고 기억되지 않으며 정죄될 수도 있다. 더 분석해 보면 네가 이렇게 하는 것은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는 네가 방해하거나 교란하지 않고 파괴를 부르지도 않아 어떠한 진리에도 어긋나지 않으며 논리와 이치에 맞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의 본질은 악을 행하고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이다. 따라서 네가 성품의 변화가 있는지 또는 진리를 실행하고 있는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일을 하는 너의 마음가짐으로 판단해야 한다. 사람의 상상과 뜻, 또는 너 자신의 입맛에 맞는지를 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네가 하나님의 뜻에 맞다고 하는지, 네가 한 일이 진리 실제가 있다고 하는지,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 달했다고 하는지를 보아야 하며, 하나님이 말씀한 요구에 근거하여 가늠해야 정확한 것이다. 성품 변화와 진리 실행은 사람이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것이 아니다. 이제 깨달았느냐? 여기에 대해 체험한 것이 있느냐? 너희가 문제의 본질에 관한 것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너희는 진입이 너무 얕다. 온종일 뛰어다니고 아침 일찍 일어나 어두워질 때까지 바쁘게 보내지만, 생명 성품에 어떤 변화도 없고, 무엇이 성품 변화인지도 알지 못한다면 진입이 너무 얕은 것 아니겠느냐? 하나님을 믿은 시간이 길든 짧든, 너희는 성품 변화의 본질적인 것, 깊은 것을 느끼지 못할 텐데, 이것을 성품이 변화했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칭찬하는지 칭찬하지 않는지 어디에서 알 수 있겠느냐? 적어도 일을 할 때마다 마음이 더없이 편안해야 한다.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거나 어떤 일을 할 때, 또는 평소에, 성령이 너를 인도하고 깨우쳐 주며 네게 역사한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하고, 네가 하는 모든 행동이 하나님 말씀과 맞아야 한다. 어느 정도 체험하고 나면 너는 네 예전 행동들이 꽤 적절했다고 느낄 것이다. 네가 한동안 체험하고 나서 예전에 행한 일 중 일부는 스스로 봐도 적절하지 않고 만족스럽지도 않아 확실히 진리가 없다고 느낀다면, 이는 네가 한 모든 일이 하나님을 대적했다는 의미이며, 너의 섬김에는 패역과 대적, 사람의 방식이 가득했다는 의미이다.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성품 변화에 대해 가져야 할 인식>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84)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려면 무엇보다도 사람이 하나님께 지나친 욕망을 품고 있지는 않은지, 다른 속셈을 갖고 있지는 않은지를 보아야 한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께 늘 요구한다면, 이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어떤 일이 임하든 네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지 못하고 진리를 구하지 않으며, 늘 자신의 이치를 따지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며 심지어 하나님을 의심한다면, 문제가 된다. 이런 사람은 가장 교만한 사람이자 하나님을 제일 심하게 거역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 늘 요구만 하는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다. 요구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거래를 한다는 의미이며, 자신의 뜻을 선택하고 자신의 뜻에 따라 행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바로 배반이고, 순종하지 않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께 요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성이 없는 행위이다. 그가 하나님임을 진실로 믿는다면, 너는 무리한 요구든 합리적인 요구든 감히 그에게 요구를 할 수 없고, 그에게 요구를 할 자격도 없다. 네게 진실한 믿음이 있고, 그가 하나님임을 믿는다면, 다른 선택의 여지 없이 경배하고 순종할 것이다. 오늘날 사람은 선택을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자기 뜻대로 행할 것도 요구한다. 그는 자신의 뜻을 선택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에게 자기 뜻대로 행하라고 하며,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도록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의 내면에 진정한 믿음도, 실질적인 믿음도 없으면 영원히 하나님께 칭찬받을 수 없다. 언젠가 하나님에 대한 네 요구가 적어지면 진실한 믿음과 순종의 성분은 많아질 것이며, 네 이성도 비교적 정상적이 될 것이다. 보통 이치를 따지고 이유가 많은 사람일수록 다루기가 어렵다. 요구만 많을 뿐 아니라 하나를 얻으면 둘을 갖고 싶어 하고, 이 방면에서 만족시켜 주면 또 다른 방면의 요구가 있어 모든 방면에서 다 만족시켜 줘야 한다. 만족시켜 주지 못하면 원망하고 자포자기하며, 그러고 나서는 죄스러운 느낌에 후회하고 통곡하고 죽고 싶어 한다. 그렇게 한들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일이 발생하기 전에 자신의 본성을 해부하여 본성 안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너라는 사람의 기호는 무엇인지, 네 요구로 이루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어떤 이는 자신에게 자질과 은사가 있다고 생각하여 늘 리더가 되고 싶어 하고, 남들보다 뛰어나고 싶어 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써 줄 것을 요구한다. 만약 그를 쓰지 않으면 “하나님, 당신은 왜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십니까? 저를 크게 써 주시면 반드시 당신을 위해 헌신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런 속셈이 올바른 것이겠느냐?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위한 헌신을 두 번째 자리에 놓았다. 그가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것은 지위이며, 중요시하는 것도 지위이다. 진실로 순종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너를 쓰든 쓰지 않든 한마음 한뜻으로 하나님을 따르고, 지위가 있든 없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래야만 이성을 갖추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요구는 너무나 많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85)

피조물이 창조주를 대하는 유일한 태도는 바로 순종, 무조건적인 순종뿐이다. 현재 어떤 이들은 이 말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분량이 너무 작고 진리의 실제가 없기 때문이다. 너 역시 이런 내적 상태라면 하나님께 순종하기까지 아직 먼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 말씀의 공급과 양육을 받아들이는 동안 사실 늘 한 가지 일을 예비한다. 바로 마지막에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라는 피조물은 합당한 자격을 갖춘 것이다. 때로 하나님은 일부러 네 관념에 맞지 않는 일, 네 바람과 어긋나는 일, 심지어는 겉으로 보기에 원칙에 어긋나고, 사람의 인정, 인성, 감정에 어긋나는 일을 한다. 그리하여 너로 하여금 이해가 되지 않고, 사상적으로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으며 어떻게 분석해도 아닌 것 같고, 어떻게 분석해도 받아들이지 못하며, 그 일이 불합리하다고만 생각하게 한다.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너를 검증하는 것이다. 너는 하나님의 행사에 대해 어떤 이치도 따질 필요가 없다. 그저 그가 곧 진리라고 인정하면 된다. 또 그가 너의 창조주이고 너의 하나님이라고 확신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그 어떤 진리보다도 높고, 그 어떤 처세술보다도, 소위 말하는 도덕이며 윤리, 지식, 문화, 철학, 전통문화, 심지어 사람의 정, 의, 사랑, 그 모든 것보다도 높다. 네가 이것을 밝히 알지 못한다면 언젠가 어떤 일이 임했을 때, 심하지 않은 경우에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굽은 길을 가다가 결국엔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랑스러움과 하나님이 네게 역사하는 것의 의의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심할 경우, 이 일로 인해 넘어지게 될 수도 있다. … 사람이 하나님을 믿은 시간이 얼마나 오래됐든, 얼마나 열심히 뛰어다녔든, 얼마나 많은 사역을 하고 얼마나 많은 본분을 이행했든, 이 기간에는 사실 계속 한 가지 일을 예비하게 된다. 바로 마지막에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무엇을 무조건이라고 하겠느냐? 네 개인적인 이유를 대지 않고, 네 객관적인 원인을 들지도 않으며, 어떤 것도 따지지 않는 것이다. 너는 피조물이니 그럴 자격이 없다. 하나님께 따진다면 네가 선 자리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께 이치를 들이민다면 이 역시 네가 선 자리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께 시비를 따지고 연유를 물어 상황을 알려고 하면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순종하지 않고, 이해가 되어야 순종한다면 그것 또한 네가 선 자리가 잘못된 것이다. 네가 선 자리가 잘못되었다면 하나님에 대한 네 순종이 절대적이겠느냐? 네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했겠느냐? 창조주로 여겨 경배했겠느냐? 그렇지 않다. 그러면 하나님은 너를 인정하지 않는다. 어떤 일들이 너로 하여금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순종하게 하겠느냐? 어떻게 체험해야겠느냐? 우선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갖춰야 한다. 또한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각 방면의 진리를 모두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이르러야 한다. 때로는 사람의 자질이 미치지 못하고, 갖가지 진리를 이해할 힘도 정력도 없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해야 한다. 무릇 너에게 임한, 하나님이 배치한 각종 환경, 사람과 일, 사물에 대해 너는 늘 순종하는 태도를 지녀야 하며, 연유를 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네게 이런 태도조차 없다면, 더욱이 하나님을 경계하고 추측하거나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정말 공의로운지 봐야겠어.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내게 하시는 일에 정말 사랑이 있는지, 과연 사랑이 맞는지 지켜보겠어.’라는 마음을 갖는다면, 언제나 하나님의 행사가 네 관념에 부합하는지, 네 입맛에 맞는지, 심지어 네가 생각하는 진리에 맞는지 시험한다면 그것은 네가 선 자리가 잘못된 것이다. 그러면 너는 위험할 것이며, 하나님의 성품을 쉽게 거스를 것이다.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사람들이 진리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게 아니라 그에게만 순종하게 한다(2)>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86)

네가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는 것도, 드러나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다. 책망과 훈계를 받든 드러나든 이것을 명심해라. 사람이 드러나는 것은 정죄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좋은 일이며,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로, 네게 생명 체험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너는 자신의 패괴된 본모습을 알 수 있는 기회도 조건도 배경도 얻지 못한다. 네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것, 깊이 숨겨져 있어 인식하기도 찾아내기도 힘든 면면들을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진실로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은 개과천선하여 새사람이 되고 거듭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이다. 진실로 자신을 인식하면 진리가 생명이 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알 수 있게 되고, 진리를 갈망하며 실제에 진입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더없이 좋은 일이다! 네가 이 기회를 잡아 실패하고 쓰러졌을 때 진지하게 스스로를 반성하여 진실로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면, 소극적이고 연약한 상태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그 고비를 넘기면 크게 한 걸음 더 성장할 수 있고 진리의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

만약 네가 하나님의 주재를 믿는다면, 너는 매일 일어나는 일들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우연히 발생한 것은 없다는 것을, 누군가 일부러 너를 괴롭히거나 겨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안배한 것임을 믿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위해 이 모든 것을 안배했겠느냐? 그것은 너의 추한 모습을 들춰내기 위함도, 너를 드러내기 위함도 아니다. 최종 목적은 너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너를 온전케 하고 구원하는 데에 있다. 어떻게 너를 온전케 하고 구원하겠느냐? 먼저 너에게 패괴 성품이 있음을 알게 하고, 너의 본성과 본질, 부족함, 결점 등을 알게 한다. 네가 이러한 것들을 알고 마음속으로 깨달아야 비로소 진리를 추구하고 패괴 성품을 차츰 벗어 버릴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이 네게 준 기회이다. 너는 기회를 잡아야지, 하나님과 겨루어서는 안 된다. 특히 하나님이 네 주변에 안배한 사람과 일, 사물이 늘 네 뜻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여기며 벗어나려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오해해선 안 된다. 그런 식으로 대하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것이 아니므로 진리의 실제에 진입하기가 매우 어렵다. 어떤 일이 임해 밝히 알지 못하고 어려움을 느낄 때, 너는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마땅히 먼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많이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너도 모르는 사이에 내적 상태가 바뀌고,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기간에 진리의 실제가 내면에 만들어져 너는 성장할 것이며 생명의 상태에 변화가 생길 것이다. 변화가 생기고 이러한 진리의 실제를 갖추면, 너에게 분량이 생기며, 분량이 생기면 생명이 생긴다. 사람이 늘 사탄의 패괴 성품에 기대어 살아간다면, 아무리 열정이 많고 아무리 힘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분량도, 생명도 될 수 없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떤 방식으로 역사하든, 어떤 사람과, 일, 사물을 통해 힘쓰게 하든, 사람에게 어떤 어조로 말씀하든, 하나님의 최종 목적은 단 하나, 바로 너를 구원하려는 것이다. 너를 구원하기 전에 너를 변화시켜야 한다. 고통 없이 변화될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너는 고통을 겪어야 한다. 이 고통에는 많은 것이 포함된다. 어떤 때 주변 사람과 일, 사물을 일으켜 네가 너 스스로를 알게 할 것이다. 혹은 직접 책망하고 훈계하고 들춰낼 것이다. 수술대에 오른 것처럼 고통을 좀 겪어야만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매번의 책망과 훈계, 그리고 매번 일으키는 사람과 일, 사물이 모두 네 마음을 흔들고 너에게 촉진제가 되면, 옳은 것이다. 그러면 네가 분량이 생기고 진리의 실제에 진입한 것이다. 모든 책망과 훈계, 매번 일으키는 환경이 너에게 어떤 느낌도 감각도 주지 못한다면,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도 기도하지도 않고 진리를 찾지도 않는다면, 너는 너무 무감각한 사람이다! 사람이 지나치게 무감각하고 영 안에 지각이 없다면 하나님도 역사할 수 없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이 자는 너무도 무감각하고 심하게 패괴되었구나. 내가 이렇게 사역하고, 이토록 많은 공을 들이고, 그에게 이토록 많은 일을 했건만 그의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도, 그의 영을 일깨울 수도 없으니 심각하구나. 구원받기 쉽지 않은 자구나.”라고 말씀할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너에게 배치한 환경, 사람과 일, 사물, 혹은 책망과 훈계 속에서 공과를 배운다면, 하나님 앞에 오고 진리를 찾고 구하는 법을 배워 자기도 모르는 새에 깨우침과 빛 비춤을 입고 진리를 얻게 된다면, 그 환경 속에서 변화되고 성과를 거두며 성장하여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도 조금씩 이해하고, 원망하지 않게 된다면, 다시 말해 그러한 환경과 시련 속에서 굳게 서서 검증을 이겨 내게 된다면, 너는 통과한 것이다.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진리를 얻으려면 주변의 사람과 일, 사물로부터 공과를 배워야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87)

교회의 리더와 일꾼이 사역을 할 때는 반드시 다음의 두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 첫째, 사역지침에서 규정한 원칙을 정확히 따라 행하되, 원칙을 어기거나 마음대로 상상하거나 자기 뜻대로 행동해선 안 된다. 모든 일에 있어 하나님 집의 사역을 생각하고, 하나님 집의 이익을 중시해야 할 것이다. 둘째, 매사에 성령의 인도를 따르도록 신경 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엄격히 따라 실행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다. 성령의 인도를 어기고, 고집스럽게 자신의 뜻과 상상대로 행동한다면, 그것은 가장 심각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다. 늘 성령의 깨우침과 인도에서 어긋나면 막다른 길에 들어서게 되며, 성령 역사를 잃어버리면 사역을 할 수 없게 된다. 설령 사역을 할지라도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사역 전개에는 이렇게 두 가지의 원칙이 있다. 하나는 정확히 상부의 안배에 따라 사역하고, 상부에서 안배한 원칙에 근거하여 일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내면의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파악하면 사역할 때 쉽게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처럼 이런 쪽에서 아직 체험이 많지 않은 자들은 사역할 때 자신의 뜻과 불순물들이 많이 섞인다. 때로는 내면에서 성령이 깨우쳐 주거나 인도해 줘도 깨닫지 못하고, 때로는 깨달은 것 같아도 무시하고 지나가기가 쉽다. 네 안에는 늘 사람의 상상과 추측이 있으며, 스스로 어떻게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한다. 성령의 뜻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고 전적으로 자기 뜻을 따르며, 성령의 깨우침은 한쪽에 내버려 둔다. 이런 상태가 자주 나타난다. 성령의 내적 인도는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더없이 정상적인 일이다. 즉, 마음 깊은 곳에서 이렇게 하는 게 적절하고, 이렇게 하는 게 가장 좋은 거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의 의미는 매우 분명하다. 네가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이다. 때로는 스스로도 왜 그렇게 하려는 건지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이는 보통 성령의 깨우침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일은 많은 사람에게서 자주 발생한다. 자신의 뜻은 대부분 사유와 생각을 통해 나오며, 스스로에게 어떤 면에서 도움이 되고 어떤 이로움이 있는지 등 불순물이 섞여 있다. 사람이 작심하고 한 일에는 다 이런 것들이 들어 있다. 성령의 인도에는 절대 이런 불순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성령의 깨우침이나 인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특히 중요한 일에 있어서는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확실히 할 수 있다. 머리 쓰는 걸 좋아하고 자기 뜻을 잘 따르는 사람은 무시하고 넘어가기가 쉽다. 합당한 자격을 갖춘 리더와 일꾼은 모두 성령 역사에 주의를 기울이고, 성령에게 순종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 경외심을 지니며 전력을 다해 진리를 추구한다.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하나님을 제대로 증거하려면 반드시 사역 과정에서 자신의 불순물과 속셈을 살피고,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얼마나 되는지, 성령의 깨우침에서 비롯된 것은 얼마나 되는지, 하나님 말씀에 부합하는 것은 얼마나 되는지 살펴야 하며,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언행을 살펴야 한다. 늘 이렇게 실행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정상 궤도에 진입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섬기려면 반드시 수많은 진리를 갖춰야 한다. 사람은 진리를 이해해야 비로소 분별력이 생기고, 무엇이 자기 뜻에서 나온 것인지, 무엇이 사람의 속셈에서 비롯된 것인지, 무엇이 사람의 불순물이고 무엇이 진리대로 행하는 것인지 분별할 수 있다. 또 분별을 해야 비로소 어떻게 순종하는 것이 더 순수한지 알 수 있다. 진리 없이는 분별 역시 존재할 수 없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평생 믿어도 무엇이 패괴 성품을 드러내는 것인지, 무엇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인지 모른다.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의 머리에는 그런 부분이 없다. 자질이 너무 부족한 사람은 진리에 이르지 못하고,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 줘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유형의 사람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이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믿어도 하나님을 증거하지 못하고 그저 얼마간 힘만 쓸 뿐이다. 하나님이 맡긴 사역을 잘해내려면 반드시 두 가지 원칙을 지켜야 한다. 먼저 상부의 사역 안배를 엄격히 따라야 하고, 다음으로 성령의 인도에 주의를 기울이며 순종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원칙을 지켜야 사역에 성과가 생기고, 하나님의 뜻을 만족게 할 수 있다.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리더와 일꾼이 사역하는 주요 원칙>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88)

베드로가 추구한 것은 하나님 말씀의 연단과 하나님이 그에게 준 각종 시련 속에서 스스로를 깨닫고, 자신이 무엇을 드러내는지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가 진정으로 자신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사람이 너무도 패괴되어 무가치하며 하나님을 섬길 자격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자격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장 소중하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로 죽는다면 얼마나 안타깝겠는가!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야.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살아갈 자격도 없고 인생도 없어.’라고 느꼈다. 베드로는 이 정도까지 체험했을 때, 자신의 본성을 깨닫고 이해하게 되었다. 지금 사람들처럼 분명하게 말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그 경지에 도달했다. 그러므로 생명을 추구하여 하나님께 온전케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본성을 깨달아야 한다. 자신의 본성 안에 들어 있는 갖가지 것들을 인식해 말로 정확히 표현하고, 명확히, 그리고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자신을 아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요구하는 결실을 얻은 것이다. 이 정도까지 깨닫지 못했다면, 너 스스로 자신을 알고 생명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은 허풍이 아니겠느냐? 네가 너 자신을 알지 못하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 사람의 기준에 부합하는지, 사탄에 속한 부분이 얼마나 많은지 알지 못하며, 네가 누구에게 속하는지 너 스스로도 확실치 않을 것이다. 자기 자신조차 모르는 네가 하나님 앞에서 어찌 이성을 가질 수 있겠느냐? 베드로의 생명 추구는 시련 속에서 자신에 대한 인식과 성품 변화에 집중하며,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이었다. 마지막에 그는 ‘사람은 살면서 하나님을 알아 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장 핵심이다. 만약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나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게 된다면, 그 후에는 하나님이 죽으라고 하셔도 원망은커녕 더없는 기쁨과 위안을 느낄 것이며, 내 인생에 만족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베드로의 이 정도의 인식은 하나님을 믿자마자 얻은 것이 아니다. 수많은 시련을 겪고 어느 정도까지 체험해 자기 자신을 완전히 인식한 후에야 하나님을 아는 것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그가 간 길은 생명을 얻는 길, 온전케 되는 길이었다. 그의 구체적인 실행은 주로 이 측면에서 두드러진다.

너희가 지금 걷는 길은 어떤 길이냐? 베드로와 같이 생명을 추구하고, 자신을 알기를 추구하며, 하나님 알기를 추구하는 데 이르지 못한다면 네가 걷는 길은 베드로의 길이 아니다. 현재 많은 사람이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위해 헌신해야 돼.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위해 어느 정도 대가를 치러야 돼.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돼.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고 내 본분을 잘 이행해야 돼.’라고 생각하며 이런 내적 상태로 살고 있다. 이는 복을 받으려는 속셈에 지배된 것으로, 순전히 하나님이 내리는 상을 받기 위해, 그리고 면류관을 얻기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의 마음에는 진리가 없으며, 글귀나 도리를 얼마간 이해한 것으로 곳곳에서 뽐낼 것이다. 이런 사람이 걷는 길이 바로 바울의 길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한결같이 사역만 한다. 마치 사역을 많이 할수록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며, 하나님 앞에서 면류관을 얻어 하나님 집에서 가장 큰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고생하고 전도하며 죽을 수 있는 사람, 목숨조차 돌보지 않는 사람, 또한 하나님이 맡긴 본분을 훌륭히 완수하는 사람이라면 바로 하나님이 가장 축복해 주는 사람, 바로 하나님께 가장 큰 복을 받는 사람이며, 확실히 면류관을 얻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상상이고 추구이며, 바울이 걸은 길이다. 바울은 바로 이런 사상 속에서 사역하고 하나님을 섬겼다. 이런 생각과 속셈은 사탄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 아니겠느냐? 그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이 세상에서는 지식을 추구해야 하며, 지식을 갖추고 나면 남들보다 뛰어나고 관직에 나아가고 지위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지위를 얻으면 재능과 포부를 크게 펼치며 자신의 가업과 사업을 어느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고 여긴다. 이방인들은 모두 이 길을 가지 않더냐? 이렇듯 사탄의 본성에 지배되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은 후에도 바울처럼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며 하나님 앞에서 충성심을 보여야 해. 그러면 나중에 가장 큰 면류관과 축복을 얻을 수 있을 거야.’라고만 생각한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세상을 추구하는 것과 틀에 박힌 듯 똑같다. 그것들은 전부 본성에 지배되는 것이다. 사람이 이런 사탄의 본성을 갖고 있으면, 세상에서 지식을 추구하고 지위를 추구하고 학문을 추구하고 남들보다 뛰어나기를 추구한다. 하나님 집에 있을 때는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충성해서 마지막에 면류관과 큰 복을 얻기를 추구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은 후에도 진리가 없고 성품에 변화가 생기지 않았다면 분명 이런 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베드로의 길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길이다. 지금 너희는 어떤 길을 걷고 있느냐? 네가 바울의 길을 걸을 생각이 없다고 해도 너의 본성은 이렇게 너를 지배하고, 너 또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마음속으로는 베드로의 길을 걷고 싶다고 해도, 베드로의 길을 도대체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고, 부지불식간에 바울의 길을 걷게 된다. 사실이 바로 그렇다.

그렇다면 이제 대체 어떻게 베드로의 길을 걸어야겠느냐? 베드로의 길과 바울의 길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아예 알지 못한다면, 네가 아무리 베드로의 길을 걷겠다고 말해도 전부 빈말에 불과하다. 먼저 마음속으로 베드로의 길이 어떤 것인지, 바울의 길은 어떤 것인지 확실히 구분해야 한다. 정말 베드로의 길이 생명의 길이고, 온전케 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해야만 베드로의 길을 걷기 위해 갖춰야 할 진리와 구체적인 실행 방법을 알고 확실히 할 수 있다. 베드로의 길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네가 걷는 길은 분명 바울의 길일 것이다. 네게는 걸을 수 있는 다른 길, 다른 선택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진리가 없고 또 의지가 없으면 베드로의 길을 걷기가 힘들다. 오늘날 하나님이 구원받는 길, 온전케 되는 길을 너희에게 보여 주는 것은 하나님의 선대이며 높여 주심이고, 너희를 베드로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깨우침과 인도가 없으면 누구도 베드로의 길을 걷지 못한다. 그럼 모두 바울의 길을 걸을 뿐이며, 바울의 전철을 밟아 침륜될 수밖에 없다. 바울은 자신의 길을 걸으면서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올바르다는 생각뿐이었다. 그에게는 진리가 없었고, 성품 변화는 더욱 없었다. 그는 스스로를 지나치게 믿었으며, 이렇게 길을 걷는 것에 조금의 문제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감과 확신을 갖고 걸어갔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도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이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며 끝까지 걸어갔다. 결국 징벌을 받을 때는 모든 것이 늦었다. 바울의 길에는 자신에 대한 인식이 없었고, 성품 변화에 대한 추구는 더더욱 없었다. 그는 한 번도 자신의 본성을 해부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전혀 몰랐다. 그가 아는 것이라고는 자신이 예수를 핍박한 괴수라는 것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본성을 털끝만치도 알지 못했으며, 사역을 마친 후에는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상을 받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바울의 사역은 하나님을 위해 한 단계 힘을 쓴 것이었다. 바울 개인적으로 보면, 성령의 계시를 얼마간 얻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진리와 생명이 없었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징벌을 받았다. 어째서 베드로의 길을 온전케 되는 길이라고 하겠느냐? 그의 실행법은 생명을 더없이 중시했으며, 하나님 알기를 추구하고 스스로를 알아 가는 것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면서 스스로에게 인식이 생겼고, 사람의 패괴된 상태에 대해서도 인식이 생겼다.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았고, 사람이 무엇을 추구하는 게 가장 가치 있는 일인지 알았다. 그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줄 알았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보답할 수 있는지도 알았다. 그는 진리를 조금 얻었으며, 하나님이 요구한 실제를 갖추었다. 시련 속에서 한 말을 보면, 그는 확실히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가장 많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토록 많은 진리를 깨달아 그의 길이 점점 더 밝아지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되었다. 만약 그에게 이러한 진리가 없었다면 그가 걸은 길 또한 그렇게 정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어떻게 베드로의 길을 갈 것인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89)

베드로는 내 앞에서 오랜 세월 충성을 다하면서도 입에 불평을 담은 적이 없었고, 원망의 마음을 품은 적도 없었다. 욥도 그에게 미치지 못했고, 역대의 성도들 또한 베드로보다 훨씬 뒤떨어졌다. 베드로는 나를 알기를 추구했을 뿐만 아니라 사탄이 간계를 부릴 때에도 나를 알려고 했다. 그리하여 그의 오랜 섬김이 다 나의 뜻에 부합하였고, 그로 인해 사탄에게 이용당한 적이 없었다. 그는 욥의 믿음을 본받았으나 욥의 단점도 파악하였다. 욥은 믿음이 컸지만, 영계의 일에서는 인식이 부족하여 실제에 부합하지 않는 말을 많이 했다. 이는 그의 인식이 얕아 완벽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언제나 영적인 느낌을 찾는 것과 영계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나의 마음을 어느 정도 살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사탄의 간계도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역대로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되었다.

베드로의 체험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듯이, 사람이 나를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영적으로 세심하게 살피는 것을 중요시해야 한다. 너에게 나를 위해 겉으로 얼마를 ‘헌신’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모두 부차적인 일이다. 네가 나를 알지 못한다면, 네가 말하는 믿음과 사랑, 충성심은 전부 환상이고 물거품이다. 너는 분명 내 앞에서 큰소리치지만,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또다시 사탄의 올무에 빠지고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해 침륜의 자식이 될 것이고 멸망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말에 냉담하다면 의심할 것도 없이 너는 나를 대적하는 자이다. 이것이 사실이다. 네가 영계의 문을 통해 그 안에서 나의 형벌을 받는 각양각색의 영들을 보는 것도 좋겠다. 어느 누가 나의 말에 냉담하지 않고, 소극적이지 않았으며, 또 나의 말을 거부하지 않았더냐? 어느 누가 나의 말을 조소하고 비아냥거리지 않았더냐? 어느 누가 나의 말에서 꼬투리를 잡지 않았더냐? 어느 누가 나의 말을 자신의 ‘호신용 무기’로 삼아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았더냐? 그들은 나의 말에서 나를 알고자 한 것이 아니라, 단지 나의 말을 ‘이용’해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을 뿐이다. 이것이 나에게 직접적으로 대적한 것이 아니더냐? 내 말은 누구냐? 내 영은 누구냐? 나는 너희에게 이런 질문을 몇 번이나 했다. 그런데 너희는 더 높은 차원에서 분명하게 깨달은 적이 있더냐? 진실한 체험이 있었느냐? 다시 한번 일깨워 주겠다. 나의 말을 깨닫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며, 실행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내 형벌의 대상이 될 것이며, 사탄의 희생물이 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이 전 우주를 향해 한 말씀ㆍ제8편>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90)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에 맞을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은 극히 적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사람은 ‘하나님’이라는 글자를 알고 ‘하나님의 사역’과 같은 말도 알지만,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사역은 더 모르기 때문이다. 이러니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모두 흐리멍덩하게 믿는 것도 당연하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일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을 믿는 일이 사람에게 너무 생소하고 낯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하나님의 요구에서 한참 멀어지게 됐다. 다시 말해,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사역을 모르면, 하나님께 합당하게 쓰임 받을 수 없고 더욱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도 없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것의 가장 간단한 개념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라 단순한 신앙으로, 짙은 종교적 색채를 띤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의 함의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물의 주재자로 믿는 것을 기초로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을 체험하여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는 동시에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야말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은 종종 하나님을 믿는 일을 아주 쉽고 가볍게 본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의미를 잃었으며, 마지막까지 믿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다. 그들이 가는 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도 글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과 텅 빈 도리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에게 하나님을 믿는 실체가 없고 자신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면서도 평안과 풍성한 은혜를 얻을 수 있게 지켜 달라고 하느님(원문: 上帝)에게 기도하고 있다. 우리 모두 마음을 차분히 하고 생각해 보자. 하나님을 믿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겠느냐?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의 함의가 고작 더 많은 은혜를 얻는 것에만 국한되겠느냐?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겠느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서문>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91)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으면서 대체 무엇을 얻었느냐? 너는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알게 되었느냐? 너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얼마나 변화하였느냐? 너희가 모두 알고 있듯이,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단순히 영혼의 구원과 육적인 평안을 위해서라든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라든지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니다. 지금 네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육적인 평안이나 잠시적인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설사 하나님을 사랑하는 너의 마음이 최고조에 달해 더 이상 무언가를 구하지 않을 지경에 이른다 하더라도 네가 추구하는 그 ‘사랑’은 불순한 사랑이지,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이용해 자신의 무료한 삶을 충실하게 하고, 마음속의 공허함을 채우려 하는 자는 안락을 탐하는 사람이지,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런 사랑은 마지못해 하는 사랑이고, 정신적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너의 사랑은 어떠한 사랑에 속하느냐? 너는 왜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지금 너는 하나님을 얼마나 진실하게 사랑하느냐? 너희 가운데 대다수의 사랑은 모두 앞에서 언급한 사랑이다. 이런 사랑은 기껏해야 현상 유지나 가능할 뿐, 영원불변할 수 없고, 사람의 내면에 깊이 뿌리내릴 수도 없다. 이런 사랑은 피고 시든 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꽃과 같다. 다시 말하면 네가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한 번 사랑한 후, 누군가 너를 앞길로 인도하지 않는다면 너는 이내 쓰러지고 말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시대에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이후에 너의 생명 성품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너는 여전히 흑암 권세의 그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사탄의 결박과 농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 온전히 얻어지지 못하고, 결국 영과 혼과 몸이 여전히 사탄에게 속하게 된다. 이는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하나님께 온전히 얻어지지 못한 자는 모두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즉, 사탄에게 돌아가 유황불 못에 던져져 하나님의 다음 단계의 징벌을 받게 된다. 하나님께 얻어진 자는 사탄을 저버리고 사탄의 권세에서 빠져나온 자로, 정식으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나라 백성의 유래이다. 너는 이러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느냐? 너는 하나님께 얻어지기를 원하느냐? 너는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돌아오길 원하느냐? 지금 너는 사탄에게 속해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나라의 백성이냐? 이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테니 자세히 설명하지 않겠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람은 어떤 관점으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92)

지난날 많은 사람들은 사람의 야심과 관념을 갖고 추구했으며, 자신의 소망을 위해 추구했었다. 이런 문제들은 일단 차치해 두자. 가장 중요한 것은 실행의 길을 찾는 것이다. 너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또한 사탄 권세의 결박에서 조금씩 벗어나, 하나님께 얻어지고 이 땅에서 하나님이 요구하는 대로 살 수 있도록 하는 실행의 길 말이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사탄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그저 흐리멍덩하게 믿으며 대세를 따른다. 그래서 줄곧 정상적인 크리스천의 생활을 하지 못하고,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며,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 또한 세우지 못하고 있다. 이로부터 사람에게 어려움과 결점, 하나님의 뜻을 막는 것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사람이 아직도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하지 못했으며, 진정한 삶의 체험 속에 들어가지 못했음을 여실히 보여 준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정상 궤도에 진입한다는 것은 바로 너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평온함을 유지하고, 하나님과 정상적으로 교제하며, 사람의 부족한 점을 하나둘씩 깨닫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 또한 점점 깊어지게 됨을 뜻한다. 이를 통해 너의 영은 날마다 새로운 것을 보고, 새로운 깨우침을 얻으며, 점점 더 간절히 사모하고, 진리에 진입하기를 추구하며, 날마다 새로운 빛 비춤과 새로운 인식을 얻게 된다. 또 이런 방식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조금씩 벗어나 생명이 점차 자라게 된다. 이런 사람이 바로 정상 궤도에 진입한 사람이다. 너의 실제 체험을 살펴보고,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추구하는 길에 대해 생각해 보거라, 앞에서 말한 것들과 대조해 볼 때, 너는 정상 궤도에 진입한 사람이 맞느냐? 너는 어떤 일에서 사탄의 결박과 권세에서 벗어났느냐? 네가 아직 정상 궤도에 진입하지 못했다면 너와 사탄의 관계는 아직 단절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진실하고 유일하며 순결한 사랑이라 할 수 있겠느냐? 너는 하나님에 대한 너의 사랑이 좌우로 치우침 없이 매우 깊다고 말하면서도 사탄의 결박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이는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을 사랑함에 불순물이 없고 온전히 하나님께 얻어져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해야 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람은 어떤 관점으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93)

모든 사람에게 존재하는 보편적 문제는 진리를 깨닫기는 하지만 실행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사람이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분별력이 너무 부족한 까닭에 실생활 속의 수많은 어려운 문제들을 꿰뚫어 보지 못해 어떻게 실행해야 좋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은 체험이 너무 얕고, 자질이 부족하며, 진리를 깨닫는 정도 또한 한계가 있어 실생활 속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할 줄 모르니,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실생활 속으로 들어오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생활은 생활일 뿐, 생활 속에서는 하나님과 아무 관계도 없는 것 같다. 사람은 다들 이렇게 여긴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을 믿으면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 얻어질 수 없고, 하나님에 의해 온전케 될 수 없다. 사실, 하나님이 분명하게 말씀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이해 능력이 너무 부족한 것이다. 하나님의 원래 뜻에 따라 행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모두 개인의 뜻에 따라, 자신이 이전부터 갖고 있던 종교 관념에 따라, 자신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다음 변화가 생겨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실행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며, 대부분은 잘못된 관점을 고집하며 깨닫지 못한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저 종교의 오래된 규칙에 따라 믿고, 생활과 처세 부분에서는 완전히 자신의 처세 철학에 따라 행한다. 열 사람 중 아홉은 이렇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게 된 이후 별도의 계획을 세워 새사람이 되려는 자는 아주 드물고,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여겨 대하지도, 실행하지도 않는다.

예수를 믿을 때의 일을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금방 믿었든 오래 믿었든 사람들은 모두 있는 재능을 발휘하고 있는 기량을 펼치며, 기존의 생활 속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만 더했을 뿐, 성품 변화는 전혀 없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전혀 커지지 않았다. 사람이 추구하는 바 역시 차갑지도 뜨겁지도 아니하여 믿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위해 온전히 바치지도 않는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 진정한 순종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을 믿는 게 진정인지 거짓인지 모르겠고, 믿는 둥 마는 둥 참답게 대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어영부영하다가 결국 어리벙벙하게 죽게 된다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 오늘 실제 하나님을 믿고자 한다면 반드시 정상 궤도에 진입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저 복만 얻고자 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나님을 알고자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깨우침과 개인의 추구를 통해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하나님을 참되게 알며, 진심에서 우러나는,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이 생겨날 수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네 사랑이 가장 참되어 아무도 그 사랑을 파괴하거나 방해할 수 없을 때, 하나님에 대한 너의 믿음은 정상 궤도에 진입했고, 네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임이 입증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네 마음이 이미 하나님께 사로잡혀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너를 점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의 체험을 통해, 너의 대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 너에게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우러날 때면, 너는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 말씀의 빛 속에서 살게 된다. 어둠의 권세를 벗어나야 하나님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너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러한 목표를 추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너희들 개개인의 책무이다. 너희는 현재 모습에 만족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딴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도 안 된다. 마땅히 어디서든 하나님을 생각하고, 언제나 하나님을 마음에 두며,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위하고, 말하고 일할 때 하나님 집의 이익을 우선으로 해야만 하나님의 뜻에 맞을 수 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을 믿는다면 진리를 위해 살아야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94)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때, 가장 큰 병폐는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면서 실생활 속에 하나님이 전혀 없는 것이다. 사람은 분명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면서 사람의 실생활 속에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입으로는 하나님께 적잖게 기도하지만 마음속에 하나님의 지위는 매우 하찮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사람에게 시련을 준다. 이는 사람이 정결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쩔 수 없이 사람에게 시련을 주는 것인데, 사람들이 시련 속에서 부끄러움을 자각하고, 스스로를 인식하게 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은 모두 천사장의 후예가 되어 날이 갈수록 패괴될 것이다. 사람마다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끊임없는 정결 과정을 거쳐 개인의 많은 속셈과 목적을 제거하게 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어느 한 사람도 전혀 쓸 수 없으며, 하나님이 해야 할 사역을 사람에게 전혀 할 수 없다. 하나님은 먼저 사람을 정결하게 하고, 그 과정에서 사람이 스스로를 알게 하고, 그 과정에서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런 다음에야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의 내면에 만들어지고, 사람의 마음이 완전히 하나님께로 향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일이 사람들이 말하듯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기에 네가 그저 인식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지 않으며, 자신의 인식에만 머물러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 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너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음을 뜻하고, 네 마음이 하나님께 속하지 않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최종 목적이고 사람이 추구해야 할 목표이다. 너는 살아 내는 면에서 노력을 기울여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에 옮길 수 있어야 한다. 네가 그저 도리만 안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야말로 공허한 일일 뿐이다. 네가 여기서 더 나아가 실행하고 살아 내야만 완전한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많은 인식을 말할 수 있지만 죽을 때는 오히려 눈물을 글썽거리며 자신이 한평생 헛되이 살았다고, 부질없이 살았다고 한탄한다. 그저 도리만 알았을 뿐, 진리를 실행함으로 하나님을 증거할 줄 몰랐고, 외적으로 동분서주하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보내다가 죽음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진실로 증거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은 너무 늦은 것이 아니냐? 왜 오늘의 기회에 자신이 좋아하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느냐? 왜 꼭 내일까지 기다려야 하느냐? 생전에 진리를 위해 고통받으려 하지 않고 진리를 얻으려 노력하지 않았던 것은 설마 죽을 때 평생의 여한이라도 남기기 위해서란 말이냐? 그렇다면 왜 하나님을 믿는 것이냐? 사실 사람은 조금만 노력하면 수많은 일에서 진리를 실행할 수 있고, 하나님을 흡족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은 줄곧 엉뚱한 데 마음이 쏠려 하나님을 위해 일하지는 않고, 언제나 육체를 위해 분주히 뛰어다녀 결국에는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한다. 그리하여 고뇌와 어려움에서 계속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사탄의 괴롭힘이 아니겠느냐? 육체의 패괴가 아니겠느냐? 너는 그저 입만 놀리면서 불성실하게 하나님을 대하지 말고 뭔가 실제적으로 실행해야 한다. 자기 스스로를 농락하지 마라.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 자신의 육체를 위해 살아가고, 명예와 이익을 다툰들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느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을 믿는다면 진리를 위해 살아야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95)

지금 나는 너희에게 백성이 되기를 추구하라고 한다. 모든 것이 정상 궤도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너희에게 백성이 되라고 하는 이유는 하나님나라시대(역주: 왕국시대)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이제 정식으로 하나님나라의 훈련에 들어갈 것이니 앞으로는 더 이상 예전처럼 해이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서는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 이르지 못한다. 너에게서 긴박감을 찾아볼 수 없다면 너는 진취적이지 못하고 생각 없이 추구하는 사람임을 뜻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없다. 하나님나라의 훈련에 들어가면 백성의 생활을 하게 된다. 너는 이 훈련을 받을 마음이 있느냐? 긴박감 있는 분위기에서 살기를 원하느냐? 하나님의 징계 아래에서 살 마음이 있느냐? 하나님의 형벌 아래에서 살 마음이 있느냐?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시련이 임할 때, 너는 어떻게 실행하겠느냐? 직면하게 될 갖가지 사실 앞에서 너는 또 어떻게 하겠느냐? 여태까지 생명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이제는 생명의 실제에 진입하는 것과 생명 성품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해야 하는 것이다. 백성이라면 모두 생명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나라의 훈련을 받아야 하며, 생명 성품의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나라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다.

하나님나라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이 주는 사명을 받아들일 것, 즉 하나님이 말세에 사역하면서 한 모든 말씀을 받아들일 것.

2. 하나님나라의 훈련에 들어갈 것.

3.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 너의 마음이 완전히 하나님께로 향하면 정상적인 영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곧 자유로운 경지에서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살핌과 보호를 받으며 사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를 받으며 살아야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다.

4. 하나님께 얻어질 것.

5.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존재가 될 것.

이 다섯 가지 사항은 내가 너희에게 주는 사명이다. 나의 말은 모두 백성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이 사명을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자에게는 나도 강요하지 않겠다. 그러나 네가 진정 이 다섯 가지 사명을 받아들인다면 너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다. 이제부터 너희는 하나님이 주는 사명을 받고,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추구하며, 하나님나라 백성의 기준에 도달해야 한다. 이것이 진입의 첫걸음이다. 완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려면 이 다섯 가지 사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다섯 가지를 다 행한다면 너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이며, 반드시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을 것이다. 지금 하나님나라의 훈련에 들어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나님나라의 훈련에 들어가는 것은 영 생활에 관련된다. 예전에는 영 생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오늘 하나님나라의 훈련에 들어가면 정식으로 영 생활에 들어가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최신 사역을 알고 하나님의 발걸음을 따라가야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96)

그렇다면 어떤 생활이 영 생활이겠느냐? 마음을 완전히 하나님께로 향하고,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워하며,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사는 것이다. 또한, 마음이 다른 것에 점령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현재 뜻을 찾아내고, 성령이 비추는 현재의 빛에 따라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이러한 생활이 바로 영 생활이다. 네가 만약 현재의 빛을 따라가지 못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심지어 단절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는 정상적인 영 생활을 할 수 없게 된다.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는 하나님의 현재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을 기초로 세워진다. 너는 정상적인 영 생활을 하고 있느냐?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고 있느냐? 너는 성령 역사를 따라가는 사람이냐? 성령의 현재의 빛을 따라가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낼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진입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성령의 흐름을 따라가는 사람이다. 그러나 네가 성령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다면 너는 분명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진취성이 없는 사람에게는 성령이 역사할 기회가 없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기운이 나지 않고 늘 소극적인 상태에 있다. 지금 너는 성령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느냐? 성령의 흐름 안에 있느냐? 소극적인 상태에서 나왔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 하나님의 사역을 기반으로 한 사람, 성령의 현재 빛을 따라가는 사람은 모두 성령의 흐름 안에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사람,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든 다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에 들어가기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이러면 너는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다.

성령의 흐름에 진입하려면 반드시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가 있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먼저 소극적인 상태를 벗어 버려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늘 대세를 따르고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이런 사람은 진취성이 없고 추구하는 기준도 매우 낮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얻어지기를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다. 또 어떤 이는 단지 양심적으로 하나님 사랑에 보답하려고 하는데, 이렇게 해서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할 수 없다. 추구하는 기준이 높을수록 하나님의 뜻에 더 잘 부합한다. 정상인으로서, 그리고 하나님 사랑하기를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 백성이 되는 것이 참된 미래이고, 무엇보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생이다. 너희보다 복된 자는 아무도 없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겠느냐? 불신자들은 언제나 육과 사탄을 위해 살지만, 오늘날 너희는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위해 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의 인생은 가장 의미 있는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택함 받은 이 사람들만이 가장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다. 너희 외에는 세상에 있는 누구도 이렇게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지 못한다. 하나님의 택함과 높여 줌으로 말미암아, 더구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는 참된 인생을 찾게 되었고, 가장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이는 너희가 잘 추구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대 덕분이다. 하나님이 너희의 영적 눈을 열어 주고, 하나님의 영이 너희의 마음을 감동시켰기 때문에 너희들이 하나님 앞에 오게 되는 행운을 얻은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너희를 깨우쳐 주지 않았다면 너희는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보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누릴 때 영이 감동을 받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고, 내면에 힘이 넘치며 내려놓지 못할 것이 없다고 느끼게 된다. 이런 느낌이 들었다면 하나님의 영에 감동받은 것이고, 너의 마음이 완전히 하나님께로 향한 것이다. 그럴 때 너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할 것이다. “하나님, 당신은 정녕 저희를 예정하고 택해 주셨군요. 저는 당신의 영광에 자부심을 느끼고, 당신의 백성이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당신의 뜻대로 행하기 위해 저 자신을 바치고 헌신하며, 저의 일생과 평생의 정력을 모두 당신께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참된 순종의 마음이 생길 것이다. 너는 이런 체험이 있었느냐? 사람이 늘 하나님의 영에 감동받는다면 기꺼이 헌신하겠다는 기도를 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 저는 당신이 영광을 받으시는 그날을 보게 되길 원합니다. 또한, 저는 당신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당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입니다. 저는 결코 사탄이나 육적인 것을 위해 살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 당신을 위해 살 수 있는 것은 당신이 높여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반드시 하나님을 얻어야겠다고,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을 얻지 못하면 죽어도 여한이 남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또 이런 기도를 하고 나면 내면에 힘이 넘쳐흐를 것이다. 그것이 어디에서 온 힘인지는 너도 모르겠지만, 마음에 무궁무진한 힘이 생겨 하나님이 너무도 사랑스럽고, 하나님은 사랑받기에 너무도 합당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때, 너는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것이다. 이런 체험이 있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 감동받은 사람이다. 늘 하나님께 감동받는 사람의 생명에는 변화가 생긴다. 그런 사람은 완전히 하나님을 얻겠다는 각오를 다질 수 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또한 굳건한 편이다. 그런 사람은 또 마음을 완전히 하나님께로 향해 가정이나 세상, 짐, 미래 따위를 멀리 던져 버리고 평생의 정력을 모두 하나님께 바치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받은 사람은 모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고, 하나님께 온전케 될 희망이 있는 사람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최신 사역을 알고 하나님의 발걸음을 따라가야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97)

하나님을 따라가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현재 말씀에 근거하는 것이다. 생명 진입을 추구하는 것이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기를 추구하는 것이든, 모두 하나님의 현재 말씀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 네가 교제하는 내용도, 진입하려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현재 말씀을 중심으로 하지 않는다면, 너는 하나님의 말씀 밖에 있는 사람이므로 절대로 성령이 역사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발걸음을 따라오는 사람을 원한다. 과거에 네가 깨달은 것들이 아무리 순수하고 좋았을지라도 하나님은 원치 않는다. 그러한 것들을 내려놓지 못한다면 앞으로 너의 진입에 큰 방해가 될 것이다. 성령의 현재 빛을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복 있는 사람이다. 만세와 만대의 사람들도 하나님의 발자취를 따랐지만, 오늘날까지 따라오지는 못했다. 그러니 이는 말세 사람들의 복이다. 성령의 현재 역사에 발맞추고, 하나님의 자취를 좇아 하나님이 어디로 인도하든 따라오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할 것이다. 성령의 현재 역사를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의 사역 안에 진입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사역을 하고 아무리 큰 고난을 받으며 아무리 많은 길을 달렸다 할지라도 소용이 없다. 하나님은 그들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현재 말씀을 따라가는 사람은 모두 성령의 흐름 안에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현재 말씀에서 벗어난 사람은 모두 성령의 흐름 밖에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다. 성령의 현재 말씀에서 벗어난 섬김은 전부 육적인 것과 관념에 속하는 섬김이다. 그러한 섬김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다. 사람이 종교 관념 속에서 살아가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을 할 수 없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섬긴다 해도 상상에 따라, 관념에 따라 섬길 뿐, 전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섬길 수 없다. 성령의 역사를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그의 뜻에 맞는 섬김이지, 관념적이거나 육적인 섬김이 아니다. 성령 역사의 발걸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은 관념 속에서 사는 것이다. 그런 사람의 섬김은 방해이자 교란이고, 그러한 섬김은 하나님과 반대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발자취를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길 수 없으며, 그런 사람은 틀림없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성령의 역사를 따라오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현재 뜻을 깨닫고 하나님이 현재 요구하는 대로 행하고, 또한 오늘의 하나님께 순종하고 따르며, 하나님의 최신 말씀에 따라 진입하는 사람을 뜻한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성령의 역사를 따라오는 사람이자, 성령의 흐름 안에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인정받고 하나님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최신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사람의 관념과 패역, 사람의 본성과 본질도 알 수 있다. 또 섬기는 과정에서 성품이 점차적으로 변화된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며, 진정으로 참도를 찾은 사람이다. 성령의 역사에 의해 도태된 사람은 하나님의 최신 사역을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최신 사역에 등 돌린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새로운 사역을 하였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형상이 그들의 관념 속 하나님의 형상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판단하여 하나님께 미움받고 버려졌다. 하나님의 최신 사역을 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 사역에 순종하는 마음, 하나님의 사역을 찾는 마음을 가져야 하나님을 볼 기회와 성령의 최신 인도를 받을 기회를 얻게 된다. 고의로 하나님의 역사를 저지하는 자들은 모두 성령의 깨우침과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최신 사역을 얻을 수 있는지는 하나님의 선대에 달렸지만, 한편으로는 사람의 추구와 마음가짐에도 달렸다고 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최신 사역을 알고 하나님의 발걸음을 따라가야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98)

성령의 현재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복 있는 사람들이다. 과거에 그 사람이 어떠했는지, 예전에 성령이 그 사람에게 어떤 역사를 했는지에 상관없이 최신 사역을 얻은 사람은 모두 가장 큰 복을 받은 사람이다. 반면, 오늘날 최신 사역을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 도태될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은 새로운 빛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며, 최신 사역을 받아들이고 알 수 있는 사람이다. 어째서 정결한 처녀가 되라고 말하겠느냐? 그런 사람만이 성령의 역사를 찾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며, 낡은 관념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오늘날 역사에 순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최신 사역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만세 전에 예정한, 가장 복된 사람들이다. 너희는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하나님의 현현을 보았으므로 천상천하, 만세와 만대에 너희보다 복된 자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모두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예정과 택함, 그리고 하나님의 선대로 인한 것이다. 하나님이 음성을 발하지 않았더라면 너희가 오늘과 같은 상황을 맞이했겠느냐? 그러므로 모든 영광과 찬송을 하나님께 돌려야 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전부 하나님의 높여 줌으로 인해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네가 이러한 것들을 생각한다면 어찌 소극적이 될 수 있겠느냐? 어찌 힘이 안 생길 수 있겠느냐?

오늘날, 네가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 채찍질, 연단은 물론, 하나님이 준 사명까지 받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만세 전에 예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벌을 받을 때도 너무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너희에게 하는 사역과 베풀어 준 복, 그리고 너희에게 더해 준 모든 것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다. 종교인들은 너희와 비교가 안 된다. 비록 너희가 알고 있는 성경 지식이나 종교적 도리는 얼마 되지 않지만, 하나님이 너희에게 행한 사역으로 인해 너희는 역대 그 누구보다도 많은 것을 얻었다. 그래서 너희가 가장 큰 복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을 위해 더더욱 자신을 바쳐야 하며, 더더욱 하나님께 충성을 다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높여 줌으로 인해 더 힘을 내야 하고, 분량을 예비하여 하나님이 준 사명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이 정해 준 자리에 굳게 서서 백성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하나님나라의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얻어져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증거가 되어야 한다. 너는 이러한 각오가 되어 있느냐? 네게 이런 각오가 있다면 최종적으로 반드시 하나님께 얻어져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증거가 될 것이다. 가장 중요한 사명은 바로 하나님께 얻어져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증거가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최신 사역을 알고 하나님의 발걸음을 따라가야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99)

성령의 현재 말씀이 곧 성령 역사의 움직임이며, 성령이 일정 기간 사람들에게 늘 깨우쳐 주는 것이 곧 성령 역사의 동향이다. 현재 성령 역사의 동향은 무엇이냐? 바로 백성들을 이끌어 하나님의 현재 역사 속으로 들어가고, 정상적인 영 생활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정상적인 영 생활에 들어가려면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쳐야 한다.

1. 먼저 마음을 전부 하나님 말씀에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의 지난 말씀을 추구하거나 연구하거나 나아가 대조하지 말고,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의 현재 말씀에 기울여라. 만약 예전의 하나님 말씀이나 영적 서적, 혹은 다른 설교집을 보고 싶어 하고 성령의 현재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혐오한다. 성령의 현재 빛을 받고 싶다면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의 현재 말씀에 기울여라. 이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2. 하나님의 현재 말씀을 바탕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진입하여 하나님과 교제해라. 또 네가 어떤 기준에 이를 것인지 하나님 앞에서 의지를 다져라.

3. 성령의 현재 역사를 바탕으로 진리에 깊이 진입하기를 추구해라. 과거의 낡은 논리와 도리를 고수하지 말라.

4. 성령의 감동을 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진입해라.

5. 성령이 현재 가고 있는 길에 진입하기 위해 노력해라.

성령의 감동을 어떻게 구해야겠느냐? 그 핵심은 하나님의 현재 말씀 속에서 사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요구를 바탕으로 기도하면 성령이 반드시 너를 감동시킬 것이다. 하나님의 현재 말씀을 바탕으로 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소용없다. 너는 마땅히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저는 당신을 대적하였으니 실로 죄스럽습니다. 제가 너무나 패역하여 늘 당신을 만족게 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구원해 주시기 원합니다. 저는 당신을 위해 마지막까지 힘쓰고, 당신을 위해 죽기 원합니다. 저를 심판하고 형벌하셔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을 대적했으니 죽어 마땅합니다. 모든 사람이 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공의로우신 성품을 보게 하십시오.” 네가 이렇게 마음에서 우러나온 기도를 하면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듣고 너를 인도해 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현재 말씀을 바탕으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성령은 너를 감동시키지 않을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이루려는 것에 따라 “하나님, 당신께서 주신 사명을 받아들이고, 맡겨 주신 것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당신의 영광을 위해 일생을 바치기 원하오니 제가 백성의 기준에 부합할 수 있도록 해 주시고, 제 마음을 감동시켜 주십시오. 당신께서 항상 깨우쳐 주사 제가 모든 행동으로 사탄에게 수치를 주게 하시고, 제가 당신께 얻어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면, 그러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기도한다면 성령이 반드시 역사할 것이다. 기도할 때 얼마나 많은 말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하나님의 뜻을 찾아냈는가 하는 것이다. 너희는 모두 다음과 같은 체험을 해 봤을 것이다. 간혹 예배에서 기도를 하다 보면 성령 역사의 움직임이 절정에 이르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모든 사람의 힘을 불러일으키는데,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서 통회하는 사람도 있고, 의지를 다지며 맹세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성령 역사로 얻은 성과이다.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기울이는 것이다. 과거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 네가 계속 과거의 것을 고수한다면 성령은 네게 역사하지 않을 것이다. 이 중요성을 알겠느냐?

너희는 성령이 현재 가는 길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앞에서 말한 몇 가지는 성령이 현재와 미래에 이루려는 것들이다. 즉, 성령이 가는 길로서, 사람이 마땅히 진입해야 하는 것이다. 생명 진입이 있으려면 최소한 하나님 말씀에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며, 진리에 깊이 들어가고, 하나님이 요구한 목표를 향해 추구해야 한다. 너에게 이러한 힘이 생겼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너를 감동시켰고 또한 네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생명 진입의 첫걸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온전히 기울이는 것이고, 그다음은 성령의 감동을 받는 것이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이룰 수 있는 성과는 무엇이겠느냐? 성령의 감동을 받는다면 더 깊은 진리를 사모하고 찾으며 구할 것이고, 적극적으로 하나님과 협력할 것이다. 현재 하나님과 협력하는 것은 목표를 갖고 추구하고 기도하며, 목표를 두고 말씀을 교제하고, 하나님의 요구에 맞춰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과 협력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 바라기만 하고 자신은 전혀 움직이지 않으며, 기도하지도 구하지도 않는다면, 그것을 협력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사람에게 협력하는 요소가 없고, 진입할 목표를 세워 훈련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협력이라고 할 수 없다. 어떤 이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셨으니 하나님께서 다 하실 거예요. 하나님이 안 하시면 사람이 혼자 어쩌겠어요?”라고 한다. 하나님의 사역은 조금도 초자연적이지 않으며 정상적이다. 네가 자발적으로 찾고 구해야 성령이 역사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는 반드시 하나님께 역사할 기회를 드려야 한다. 네가 추구하지도 진입하지도 않고,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마저 없다면 하나님은 역사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하나님의 감동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기도하며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명심해라. 늘 하나님의 감동이 있으면, 너는 육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 즉, 남편, 아내, 자녀, 돈이나 재물 등에 매이지 않고, 오직 진리를 추구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려고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는 자유로운 경지에서 사는 사람이 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최신 사역을 알고 하나님의 발걸음을 따라가야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00)

하나님은 사람을 온전케 하기로 뜻을 정했다. 그가 어떤 위치에서 말씀하든 그것은 이 사람들을 온전케 하기 위한 것이다. 영의 위치에서 말하면 사람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실행의 길을 찾지 못한다. 사람이 깨닫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각 단계 사역에는 그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고, 사역마다 성과도 서로 다르다. 또한 하나님은 서로 다른 위치에서 말씀해야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있다. 영의 위치에서만 음성을 발한다면 이 단계의 사역은 완성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하는 말씀의 어조를 보면 틀림없이 이 사람들을 온전케 할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 온전케 되려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해야 하겠느냐? 하나님의 사역을 알아야 한다. 현재 하나님의 사역은 새로운 방식에 들어섰다. 시대가 바뀌면서 사역 방식과 말씀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다시 말해, 사역 방식뿐만 아니라 시대도 바뀌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나라시대이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시대이며, 천년하나님나라시대를 미리 체험하는 것이다. 천년하나님나라시대는 말씀 시대로, 다양한 말씀 방식으로 사람을 온전케 하고, 각각 다른 위치에서 말씀하여 사람들에게 공급한다. 일단 천년하나님나라시대에 들어서면 말씀으로 사람을 온전케 하기 시작할 것인데, 생명의 실제에 진입하게 하고 정상 궤도로 이끌어 준다. 사람은 이렇게 다양한 사역 절차를 체험하면서 하나님의 사역은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바뀌고 심화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랜 시간을 거치며 사역은 계속해서 바뀌고 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근본 취지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사역이 아무리 변해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역 방식이 어떻게 바뀌어도 진리와 생명을 떠나지는 않는다. 사역 방식의 변화는 사역의 형식과 말씀할 때의 위치가 바뀌는 것일 뿐, 결코 사역의 주된 목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말씀의 어조와 사역 방식의 변화는 모두 상응하는 성과를 내기 위한 것일 뿐, 말씀의 어조가 달라진다고 해서 사역의 근본 취지나 원칙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생명 추구를 근간으로 해야 한다.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생명을 추구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알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네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 왕이 되려고 한다면 그것이 현실적이겠느냐? 오직 생명을 추구하여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만이 현실적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실행하는 이 모든 것은 다 현실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하면, 실제로 체험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된다. 이것이 참된 추구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나라시대는 말씀 시대이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01)

지금은 하나님나라시대로, 네가 이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는지를 알려면 네가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들어갔는지, 하나님 말씀이 너의 생명 실제가 되었는지를 보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결국에는 모두를 말씀의 세계에서 살게 하고, 각자에게 깨우침과 빛 비춤을 준다. 만약 네가 이 기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읽고 말씀에 흥미를 느끼지도 못한다면, 그것은 네 내적 상태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이다. 네가 말씀 시대에 들어가지 못하면 성령의 역사가 없을 것이고, 들어가면 성령의 역사를 얻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 시대의 출발점에서 어떻게 해야 성령의 역사를 얻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이 시대에 너희 가운데서 다음과 같은 일을 이루고자 한다. 너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 내고, 진리를 실행하며,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또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토대로 삼고 실제가 되게 하여 하나님께 경외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또한 사람이 말씀을 실행하여 하나님과 함께 왕권을 잡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는 사역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보지 않으면 되겠느냐? 현재 많은 이들이 하루 이틀만 하나님 말씀을 보지 않아도 매우 답답해하며, 매일 말씀을 봐야 하고, 시간이 없으면 듣기라도 해야 한다고 한다. 성령은 사람에게 이런 느낌을 주고, 이렇게 사람을 감동시키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말씀으로 사람을 제어하고,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네가 하루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지 않는다면, 어둠과 목마름을 느끼게 되어 답답해할 것이다. 이는 네게 성령의 감동이 있으며, 성령이 너를 버리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너는 이 흐름 속에 있는 사람이다. 반대로 하루 이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지 않아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목마름을 느끼지 못하며 아무런 감동도 없다면, 이는 성령이 너를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네가 내적 상태에 문제가 있고 말씀 시대에 들어가지도 못한 것이니, 뒤처진 사람이라고 봐야 한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사람을 제어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면 좋다고 느껴지고, 먹고 마시지 않으면 행할 길을 잃게 된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양식과 동력이 된 것이다. 예전에 성경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라고 한 바 있다. 오늘날 하나님은 이 사역을 이룰 것이다. 그는 너희에게서 이 사실을 이루고자 한다. 과거에는 며칠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보지 않아도 밥도 잘 먹고 일도 잘 했었는데, 왜 지금은 그러지 못하는 것이겠느냐? 이는 이 시대에 하나님이 주로 말씀으로 모든 것을 제어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심판을 받고 온전케 되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사람에게 생명과 광명, 그리고 실행할 길을 줄 수 있다. 특히 하나님나라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네가 하나님 말씀의 실제를 떠나지 않고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너를 온전케 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나라시대는 말씀 시대이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02)

생명이 자라는 것은 하루 이틀에 이뤄지는 일이 아니므로 생명 추구에 있어 성급히 굴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사역은 정상적이고 실제적이며, 모든 사역에는 다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 있다. 예수가 성육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역을 완성하는 데에도 33년 반이나 걸렸는데, 사람을 정결케 하고 사람의 생명을 변화시키는 사역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 이는 무엇보다 어려운 사역이다! 하나님을 나타내는 정상적인 사람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큰 붉은 용의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자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장기간의 말씀과 사역이 필요하다. 그러니 서둘러 결실을 맺으려 하지 말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며, 하나님의 말씀에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본 후, 실제로 실행하여 인식과 식견, 분별력, 지혜를 키운다면 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변화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고, 보고 인식하며, 체험하고 실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면 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장할 것이다. 어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지만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조급할 게 뭐 있느냐? 분량이 어느 정도 자라면 실행할 수 있다. 네댓 살 된 아이가 부모를 부양하거나 효도하지 못한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느냐? 너는 자신의 분량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여 실행할 수 있는 만큼 실행하되, 하나님의 경영을 방해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데만 신경 쓰고, 앞으로도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일단 하나님이 너를 온전케 할 수 있을지 등은 상관하지도, 생각하지도 마라.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다 보면 틀림없이 온전케 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데도 원칙이 있으니 무턱대고 먹고 마셔서는 안 된다.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면서 네가 인식해야 할 것, 즉 이상(異象)에 관한 말씀을 찾아야 하며, 또 한편으로는 실제로 실행해야 할 것, 즉 어떻게 진입할 것인가에 관한 것을 찾아내야 한다. 하나는 인식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입에 관한 것이다. 이 두 가지, 즉 네가 어떤 것들을 인식하고 어떤 것들을 실행해야 하는지 알게 되면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실 줄 아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나라시대는 말씀 시대이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03)

앞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것이 네가 말하는 원칙이 될 것이다. 평소 너희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교제해라. 하나님의 말씀을 화제로 삼아 자신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실행했는지,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는지 교제해라. 하나님의 말씀을 교제하기만 하면 성령이 빛 비춤을 줄 것이다. 하나님 말씀의 세상을 만들려면 사람도 협력해야 한다. 네가 진입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역사할 수 없다. 네가 입 다물고 말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네게 빛 비춤을 줄 수 없다. 시간이 나면 잡담이나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어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네 삶을 채워야 경건한 신자라고 할 수 있다. 교제의 깊이가 얕아도 상관없다. 어떻게 처음부터 깊을 수 있겠느냐! 얕은 곳을 거쳐야 깊은 곳에 갈 수 있는 법이다. 훈련을 통해 너에게 있는 성령의 빛 비춤을 찾아내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먹고 마셔야 성과를 낼 수 있는지 등을 한동안 모색하고 나면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협력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비로소 성령의 역사를 얻을 수 있다.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는 원칙에는 인식에 관한 것과 진입에 관한 것이 있다. 그렇다면 어떤 말씀이 인식에 관한 것일까? 이상에 관한 내용(하나님의 사역이 지금 어느 시대에 들어섰는지, 혹은 하나님이 지금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지, 성육신이란 무엇인지 등등은 다 이상에 해당됨)이다. 어떤 것이 진입해야 할 길일까? 사람이 실행해야 하고 진입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는 데는 이 두 가지가 있으니, 이렇게 먹고 마시면 된다. 단, 이상에 관한 것들은 확실히 이해하고 난 후에는 자주 보지 않아도 된다. 중요한 것은 진입에 관한 말씀을 많이 먹고 마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떻게 해야 마음을 하나님께 향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할 수 있는지, 육을 버릴 수 있는지 등등의 내용은 다 실행이 필요한 것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실 줄 모르는 사람은 진실한 교제를 할 수 없다. 하지만 먹고 마실 줄 알고 핵심을 짚을 수 있으면 자유로운 교제가 가능하다. 즉, 어떤 문제를 내놓든 교제할 수 있고 실제적인 것을 짚어 낼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 말씀을 교제할 때 실제적인 것이 없다면, 다시 말해 핵심을 잡지 못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실 줄 모른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 싫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정상적인 상태라고 볼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싫증을 내지 않고, 늘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언제나 하나님 말씀이 좋다고 느껴야 정상적인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실제적으로 진입한 사람의 먹고 마심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나 실제적이고 사람이 진입해야 할 것이라고 느낀다면, 또 사람에게 더없이 도움이 되고 생명을 공급하는 것이라고 느낀다면, 그 느낌은 성령이 준 것, 즉 성령의 감동이다. 그것은 너에게 성령의 역사가 있고, 하나님이 너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어떤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싫증을 느껴 하나님의 말씀은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이라고 여기는데, 그것은 비정상적인 상태다. 그런 사람은 실제에 진입하기를 사모하는 마음이 없으며, 온전케 되기를 바라지도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네가 언젠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너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의미한다. 예전에는 하나님이 사람을 외면했는지를 판단할 때 그 사람 마음에 평안과 즐거움이 있는지를 기준으로 했다. 하지만 지금은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지, 하나님의 말씀이 너의 실제가 되었는지, 하나님을 위해 충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할 수 있는지를 중요하게 본다. 다시 말해, 하나님 말씀의 실제로 사람을 가늠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므로 네가 즐겨 본다면 깨우침을 얻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깨우침을 얻을 수 없다. 하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하나님을 찾는 사람에게 깨우침을 준다. 간혹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는데도 깨우침을 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럼 그가 하나님 말씀을 어떤 식으로 보았겠느냐?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대충 보고 실제적인 것을 중시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깨우침을 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을 하나님이 온전케 할 리 있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에게는 진리도 실제도 없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실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쁘든 한가하든, 상황이 좋든 안 좋든, 시련이 있든 없든,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셔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에게 생존의 토대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루 세끼 끼니 챙기듯 먹어야지, 말씀을 떠나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 온전케 되고 얻어지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일이겠느냐? 네가 지금 이해하든 못 하든, 하나님의 사역을 분명하게 알든 그렇지 못하든, 어쨌든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먹고 마셔야 한다. 이것이 적극적인 진입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본 뒤에 진입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실행하고, 진입할 수 없는 것은 일단 내버려 두어라. 처음에는 깨닫지 못하는 말씀이 많겠지만, 2~3개월, 혹은 1년 정도 지나면 깨닫게 될 것이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케 하는 일은 하루 이틀 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 많은 경우 보자마자 바로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 당시에는 아무리 봐도 글자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겠지만, 한동안 체험하고 나면 그제야 그 뜻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수많은 말씀을 하였으니, 네가 가능한 한 먹고 마시면 시나브로 이해하게 될 것이요, 자기도 모르는 새에 성령의 깨우침을 얻게 될 것이다. 성령의 깨우침은 흔히 사람이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뤄진다. 네가 갈급해하고 찾을 때, 성령이 너를 깨우쳐 주고 인도해 줄 것이다. 성령의 사역 원칙은 네가 먹고 마시는 하나님 말씀을 중심으로 한다. 하나님 말씀을 중요시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늘 다른 태도를 가지며,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이라고 아무렇게나 생각하는 사람은 실제가 없는 사람이다. 그런 자에게는 성령의 역사도, 깨우침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 자는 밥이나 빌어먹고 사는 사람이요, 머릿수만 채우는 남곽 선생(南郭先生) 같은 사람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나라시대는 말씀 시대이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04)

하나님이 말씀하면 너는 그 즉시 받아서 먹고 마셔야 한다. 얼마를 깨닫든 네가 가져야 할 관점은 먹고 마시고 인식하고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네가 해야 할 일이다. 너의 분량이 얼마나 자랄 수 있을지는 상관치 말고 오로지 먹고 마시기만 해라. 이것은 사람이 협력해야 하는 일이다. 너의 영 생활은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말씀을 실행하는 실제에 진입하는 데 역점을 둬야지, 다른 것을 중요시해서는 안 된다. 교회를 이끄는 사람은 형제자매들을 이끌어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실 줄 알게 해야 한다. 이는 교회를 이끄는 사람의 책임이다. 나이가 많든 적든 모두가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해야 한다. 이 실제에 들어선다면 하나님나라시대에 들어선 것이다. 현재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느끼고, 하나님 말씀은 늘 새롭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정상 궤도에 진입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사역하고 말씀으로 공급한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고 사모한다면, 하나님 말씀의 세계로 들어선 것이다.

하나님이 많은 말씀을 했는데, 너는 얼마나 알고 있느냐? 진입한 것은 또 얼마나 되느냐? 교회를 이끄는 사람이 형제자매들을 하나님 말씀의 실제로 이끌지 못했다면, 이는 직책을 다하지 못한 것이고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말씀에 대한 이해가 깊든 얕든, 얼마나 깨달음을 얻었든, 너는 먹고 마실 줄 알아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시해야 하며, 먹고 마심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많은 말씀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먹고 마시거나 추구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지도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고 체험하며 그의 말씀을 살아 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떠벌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지도 못하고 실제적인 것을 내놓지도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떡으로 배를 불리는 것’에 불과하다. 사소한 간증과 쓸모없는 것, 외적인 것들만 말하고 실제적인 것이 조금도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을 믿는 올바른 길을 전혀 찾지 못한 것이다. 어째서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먹고 마셔야 하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지는 않고 하늘나라에 가려고만 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은 무엇을 통해 사람을 온전케 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지 않아도 온전케 될 수 있겠느냐? 하나님 말씀이 실제가 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나라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이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최소한 갖춰야 할 것은 겉으로 보기에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갖추는 것이다. 어찌 됐든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못한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는 것도 전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룰 수 있다. 앞으로는 각 나라 각 교파, 각 종교 각 분야가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복될 것이다. 하나님은 직접 말씀할 것이며, 모든 사람은 손에 하나님 말씀을 받들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사람을 온전케 할 것이므로 안팎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될 것이다. 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실행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며, 마음속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있으니, 이것이 곧 안팎이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젖어 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온전케 된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고,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 말씀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이다.

말씀의 시대로 들어가는 것이 곧 천년하나님나라시대로 들어가는 것이다. 지금 바로 이 사역을 이루고 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훈련을 하여라.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고 체험해야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 낼 수 있다. 네가 실제 체험을 내놓아야 다른 사람도 납득할 것이다. 네게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 낸 실제가 없다면 누구를 납득시킬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 말씀 실제를 살아 내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실제가 없다면 그것은 성령이 너에게 역사하지 않았고, 네가 온전케 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의 중요성이다. 너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은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한다. 앞으로 하나님은 각 종교와 각 교파에 더 많은 말씀을 할 것이다. 먼저 너희들 가운데서 말씀하여 너희들을 온전케 하고, 그다음에는 이방을 향해 음성을 발함으로써 그들을 정복할 것인데, 말씀으로 사람들을 탄복게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폭로를 통해 사람은 패괴 성품이 어느 정도 줄어들었고, 사람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패역한 성품도 어느 정도 줄어들었다. 권병을 띤 말씀으로 사람에게 사역하여 하나님의 빛 속에 사람을 정복한다. 하나님이 현시대에 하려고 하는 것과 사역의 전환점을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으니, 네가 말씀을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한편 형제자매들과 교제하고 본인 또한 실제로 체험한다면, 하나님 말씀을 종합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야 진정으로 실제가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나라시대는 말씀 시대이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05)

“이적과 기사 보는 것을 중시하는 자들은 다 버림받을 것이고, 모두 온전케 될 대상이 아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렇게 많은 말을 했는데도 사람은 이 사역에 대해 조금도 알지 못하고, 이 경지에 이르렀는데도 여전히 이적과 기사를 바란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이적과 기사를 보기 위함이냐, 아니면 생명을 얻기 위함이냐? 예수도 그 당시 수많은 말씀을 했는데, 그중에는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있다. 그렇다고 너는 예수가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느냐? 하나님이 그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증거했는데도 네가 부인할 수 있느냐? 오늘날 하나님은 말씀만 하므로, 네가 완전히 알지 못하면 제대로 설 수 없다. 너는 그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냐, 아니면 그의 말씀의 실현 여부에 따라 믿는 것이냐? 너는 이적과 기사를 믿는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냐? 오늘날 하나님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지 않는데,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이냐, 아니냐? 그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이냐, 아니냐? 하나님의 본질은 말씀의 실현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냐? 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뒤에야 그를 믿으려 하느냐? 이는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냐? 이런 관념을 가진 사람은 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이다. 관념으로 하나님을 가늠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을 믿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믿지 않으며, 늘 이적과 기사를 보고자 하는데, 이들이 바로 현대판 바리새인이 아니겠느냐? 네가 굳게 설 수 있는지는 실제 하나님을 알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이것은 무척 중요한 문제다! 너에게 하나님 말씀의 실제가 많아질수록 하나님의 실제에 대해 더 알게 되고, 시련 속에서 더 굳게 설 수 있게 된다. 반대로 이적과 기사에 눈을 돌릴수록 제대로 설 수 없고, 시련 속에서 쓰러지게 된다. 이적과 기사는 토대가 아니다. 하나님의 실제야말로 생명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역이 이룰 성과도 알지 못한 채, 온종일 흐리멍덩하게 보내며,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알고자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기만을 원하며, 그 후에야 제대로 믿으려 한다. 또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면 생명을 추구할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생명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을 이적과 기사를 바라는 것으로 여기고, 천국에 가고 셋째 하늘에 올라가는 것으로 여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실제에 진입하기를 추구하고 생명을 추구하고, 하나님께 얻어지기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 추구가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 하나님을 알고자 하지 않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자 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이제 이해가 되느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이적과 기사를 보는 것이냐? 천국에 가는 것이냐? 하나님을 믿는 것은 절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마땅히 종교적 믿음법을 없애야 한다. 병을 고치고 귀신 쫓는 것을 추구하며, 이적과 기사를 중요시하고, 하나님의 더 많은 은혜와 평안과 기쁨을 누리려 하며, 육적인 안락함과 앞날을 추구하는 이런 것이 종교적 믿음법이다. 이런 믿음법은 막연한 신앙이다. 오늘날,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너의 생명 실제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를 알고 진실로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좀 더 분명히 말하자면,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피조물이 해야 할 본분을 이행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목적이다.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스러움과 존경스러움을 알고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행하는 사역이 구원이요, 온전케 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데에 최소한으로 갖춰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로 육적인 삶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으로 바뀌고, 패괴된 삶에서 하나님 말씀의 생명 안에서 사는 삶으로 바뀌는 것이다. 또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돌봄과 보호 아래에서 살면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육체를 따르지 않으며, 하나님이 너의 온 마음을 얻고 너를 온전케 함으로써 사탄의 패괴 성품을 벗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주로 하나님의 큰 능력과 영광이 너에게 나타나게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며,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사탄 앞에서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을 믿으면 이적과 기사를 보려고 하거나 육적인 것을 위하지 말아야 한다. 마땅히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베드로처럼 죽기까지 순종하기를 추구해야 한다. 주로 이것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것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면 하나님에 대해 더 알게 되는데, 그런 뒤에야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해 알아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가져야 할 목적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늘 이적과 기사를 보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관점이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생명의 실제로 만드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실행하고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목적에 이른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온전케 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나아가 매사에 순종하기를 추구해야 한다. 네가 불평 없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베드로의 분량에 이르러 하나님이 말씀한 것과 같은 베드로의 풍격을 갖게 되면, 이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이는 네가 하나님께 얻어졌음을 의미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말씀이 모든 것을 이룬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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