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패괴 폭로[1]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00)

사람은 수천 년의 패괴를 겪고 나서 모두 무감각하고 우둔해졌으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마가 되었다. 그리하여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한 역사(歷史)는 모두 ‘사기(史記)’에 기록되었고, 심지어 사람의 패역한 행위는 사람 스스로도 다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사탄에 의해 너무 심하게 패괴되었고, 이미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갈 곳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배반하고 있다. 사람은 하나님을 보고도 배반하고, 하나님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도 배반하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본 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배반한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의 이성이 원래의 기능을 잃었고, 사람의 양심도 원래의 기능을 잃었다고 말한다. 내 눈에 보인 사람은 모두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자 독사다. 사람이 내 앞에서 얼마나 가련한 척을 하든 나는 사람에게 연민의 정을 베풀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흑과 백의 차이를 전혀 모르고, 진리와 비진리의 차이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성이 이렇게 무감각함에도 여전히 복을 받고 싶어 하고, 이렇게 비열한 인성을 가지고도 여전히 왕이 되어 권력을 잡고 싶어 한다. 이런 이성을 가지고 누구에게 왕 노릇을 하겠느냐? 이러한 인성으로 어떻게 보좌에 오를 수 있겠느냐? 정말로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구나! 모두 제 주제도 모르는 소인배로구나! 복을 받고 싶어 하는 너희들에게 권하는데, 우선 거울을 찾아 자신의 추한 몰골을 비춰 보아라. 네가 왕이 될 재목이냐? 너는 복받을 만한 오관을 가졌느냐? 성품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진리를 조금도 실천하지 못하면서 아름다운 앞날을 생각하다니 참으로 망상이 아니고 무엇이냐! 이토록 더러운 땅에서 태어난 사람은 심하게 사회에 물들었고, 봉건 예교의 영향을 받았으며, ‘고등 학부’의 교육을 받았다. 뒤처진 사상, 부패한 도덕, 저열한 인생관, 비열한 처세 철학, 일말의 가치도 없는 삶, 저속한 풍속과 생활, 이러한 것들이 사람의 마음을 심하게 침해하고, 사람의 양심을 심하게 파괴하며, 사람의 양심에 타격을 주고 있다. 이로 인해 사람은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고 갈수록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사람의 성품은 나날이 더 악랄해져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거나 하나님께 기꺼이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기꺼이 하나님의 나타남을 찾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반면에 사람은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마음껏 쾌락을 찾아 즐기고, 진흙탕에서 마음껏 자신의 육체를 패괴시키고 있다.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설령 진리를 듣더라도 실천할 마음이 없고, 하나님이 이미 나타난 것을 보아도 찾으려는 마음이 없다. 이렇게 타락한 인류에게 구원의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겠느냐? 이렇게 부패한 인류가 어떻게 빛 속에서 살 수 있겠느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품이 변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적이 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01)

사람의 패괴된 성품의 근원은 사람이 이미 사탄에게 해를 입고 사탄에게 짓밟혀 사람의 사상, 도덕, 식견, 이성이 사탄에 의해 심하게 파괴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의 근본적인 것들이 이미 모두 사탄에 의해 패괴되어 하나님이 만든 원래의 모습과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성품이 변화되려면 우선 사람의 사상, 식견, 이성에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진리에 대한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 가장 심하게 패괴된 곳에서 태어난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란 무엇인지 더더욱 모른다. 사람은 심하게 패괴될수록 하나님의 존재를 더 알지 못하고, 이성과 식견이 더 부족하다.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는 근본적 원인은 사람이 사탄에 의해 패괴되었기 때문이다. 사탄에 의해 패괴되어 사람은 양심이 무감각하고 도덕이 부패하고 사상이 진부하고 정신 면모가 뒤처지게 된 것이다. 사람은 사탄에 의해 패괴되기 전에는 본래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바로 순종했으며, 이성과 양심이 건전하고, 인성이 정상적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사탄에 의해 패괴된 이후로 사람에게 원래 있었던 이성과 양심, 인성이 무감각해지고 전부 사탄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리하여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사랑을 모두 잃게 된 것이다. 사람의 이성이 정상에서 벗어나고, 사람의 성품도 짐승처럼 변해 하나님에 대한 패역이 점점 많아지고 심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아직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고 무턱대고 대적하고 거역하기만 한다. 사람이 드러내는 성품은 곧 사람의 이성, 식견, 양심의 발현이다. 사람은 이성과 식견이 건전하지 못하고, 양심이 극도로 무감각해졌기 때문에 사람의 성품 또한 하나님을 거역하는 성품이 된 것이다. 사람의 이성과 식견을 바꾸지 못하면 성품 변화는 물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다는 것도 말할 나위가 못 된다. 사람은 이성이 건전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고 하나님께 쓰임 받기에도 적합하지 않다. 정상적인 이성이란 하나님께 순종하고 충성스러우며,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고, 하나님에 대해 절대적이고 양심적이며, 하나님에 대해 일편단심이고, 고의로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는 것이다. 비정상적인 이성은 그렇지 않다. 사람은 사탄에 의해 패괴된 후 하나님에 대해 관념이 생기고,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이 사라졌으며, 하나님을 사모하지 않게 되었다. 양심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고의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판단할 뿐만 아니라, 뒤에서 하나님을 욕하고, 하나님인 줄 뻔히 알면서도 뒤에서 판단하며, 순종하려는 마음은 조금도 없이 계속 하나님께 달라고 하고 요구하기만 한다. 이처럼 이성이 비정상적인 사람은 자신의 비열한 행위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패역한 행위를 통회하지도 못한다. 자신을 알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래도 이성이 조금은 회복된 사람이다. 하나님을 거역하면서도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이성이 더 건전하지 못하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품이 변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적이 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02)

사람의 패괴 성품이 드러나는 근본 원인은 사람의 무감각한 양심, 악독한 본성과 건전하지 못한 이성에 있다. 사람의 양심과 이성이 정상으로 회복된다면 하나님께 쓰임 받기에 적합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사람의 양심이 줄곧 무감각한 상태에 있고, 사람의 이성이 한 번도 건전했던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점점 더 무감각해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심지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말세에 하나님이 입은 육신을 문전 박대 하며, 하나님의 육신을 정죄하고, 또 하나님의 육신이 비천하다고 여긴다. 사람에게 인간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하나님이 입은 육신을 이렇게 잔혹하게 대할 수 없고, 이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하나님이 입은 육신을 이렇게 악독하게 대할 수 없으며, 정말로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성육신 하나님께 이같이 ‘감사’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성육신한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좋은 기회를 준 하나님께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이 온 것을 욕하거나 하나님이 성육신한 사실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어쩌면 부정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귀찮아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나님이 온 것을 사람이 어떻게 대하든 하나님은 싫은 기색 없이 계속 자신의 사역을 한다. 사람이 그를 조금도 환영하지 않고, 그에게 계속 뭔가를 요구하더라도 말이다. 사람의 성품은 극도로 악독해졌고, 사람의 이성은 극도로 무감각해졌으며, 사람의 양심은 이미 악한 자에게 짓밟혀 원래 가지고 있던 양심은 진작에 사라져 버렸다. 사람은 성육신 하나님이 인류에게 베풀어 준 이처럼 많은 생명과 은혜에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풀어 준 진리로 인해 하나님을 혐오하고, 진리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해 하나님에게조차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 사람은 성육신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서 ‘기름을 짜내고’ 자신이 하나님께 드린 것보다 수십 배나 많은 이자를 달라고 요구한다. 사람은 이런 양심과 이성을 가졌으면서도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며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 것이 너무 많고 반면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푼 것이 너무 적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물 한 그릇을 주고는 우유 두 그릇 값의 금화를 달라고 손을 내밀고, 내가 그의 집에서 하룻밤 묵으면 이보다 몇 배 넘는 숙박비를 요구한다. 너희는 이런 인성과 양심을 갖고도 생명을 얻으려 하느냐? 정말 비열한 소인배들이구나! 사람의 이런 인성과 양심 때문에 성육신 하나님은 기거할 곳 없이 곳곳을 떠돌게 된 것이다. 정말로 양심과 인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성육신 하나님이 이렇게 많은 사역을 했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설사 그가 아무런 사역을 하지 않더라도 마땅히 그를 경배하고 일편단심으로 그를 섬겨야 한다. 이것은 이성이 건전한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사람의 본분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도 조건을 내건다. 그런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인지 사람인지는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조건만을 얘기하거나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고만 한다. 너희는 나에게 밥을 지어 주면 품값을 요구하고, 나를 위해 다리품을 팔면 수고비를 요구하며, 나를 위해 사역하면 사역비를 요구하고, 나에게 빨래를 해 주면 세탁비를 요구하며, 교회에 공급하는 일을 하면 몸보신 비용을 요구한다. 말하는 자는 강의료를 요구하고, 책을 배부하는 자는 책 배부 비용을 요구하며, 글을 쓰는 자는 원고료를 요구한다. 심지어 내게 책망받은 사람은 내게 보상금을 요구하고, 집으로 돌려보낸 사람은 명예 훼손 배상금을 요구하며,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혼수비와 청춘을 바친 대가를 요구한다. 또한 닭 잡은 사람, 요리를 만든 사람, 국을 끓인 사람 등 다 그에 따른 수고비를 요구한다. 이런 것들이 바로 너희의 고상하고도 위대한 인성이며, 너희의 그 따뜻한 양심에서 비롯된 일이다. 너희의 이성은 어디에 있느냐? 너희의 인성은 어디에 있느냐?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너희가 계속 이렇게 한다면, 나는 더 이상 너희들 가운데서 사역하지 않을 것이고,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에게 사역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희 같은 인면수심의 무리들 때문에 고통받지 않을 것이고, 구원할 여지가 조금도 없는 이런 짐승들을 위해 인내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등을 돌리는 날은 바로 너희가 죽는 날이고, 어둠이 너희에게 임하는 날이며, 광명이 너희를 버리는 날이다.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나는 너희처럼 짐승보다도 못한 무리에게 큰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하고 일하는 데는 나만의 기준이 있다. 너희의 인성과 양심이 이러하니 나는 더 많은 사역을 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너무 양심이 없고, 나의 마음을 너무 많이 상하게 했으며, 너희의 비열한 행위는 나를 너무 역겹게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성과 양심이 없는 사람은 영원히 구원받을 기회가 없다. 나는 이렇게 흉악하고 잔인한 사람들을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날이 올 때, 나는 나를 크게 진노하게 했던 이 패역한 자식들에게 영원히 불사름의 불을 쏟을 것이고, 예전에 나를 욕하고 저버린 이 짐승들에게 영원히 징벌을 내릴 것이며, 나와 함께 먹고 함께 지냈지만 나를 믿지 않고 모욕하고 배반한 그 패역한 자식들을 영원히 나의 분노의 불길로 태울 것이다. 나를 분노하게 한 모든 사람을 나의 징벌 속에 내던질 것이고, 나와 동등해지고 싶어 하며 나를 전혀 경배하지 않고 내게 순종한 적이 없는 짐승들에게 나의 모든 분노를 쏟을 것이며, 내 입에서 나온 말의 비밀과 나의 보살핌을 누리고 나에게서 물질적인 누림을 다투었던 짐승들을 나의 채찍으로 칠 것이다. 나는 내 지위를 빼앗으려는 자는 그 누구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나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다투는 자는 그 누구도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지금은 별 탈 없이 평안하고, 점점 더 큰 욕심을 내며 내게 요구하고 있지만, 분노의 날이 오면 더는 내게 요구하지 못할 것이다. 그때 나는 너희가 마음껏 ‘누리게’ 할 것이다. 나는 너희가 입으로 진흙을 씹게 할 것이고, 너희는 영원히 그 처지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조만간 이 빚을 너희에게 모두 ‘되갚을’ 것이다. 그날이 올 때까지 너희가 참을성 있게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란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품이 변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적이 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03)

사람이 하나님을 얻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감정이 있어서도, 사람이 얻는 것을 하나님이 원치 않아서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얻으려고 하지 않고 사람에게 하나님을 간절하게 찾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 중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이가 있더냐? 이성이 건전하고 양심이 예민한 사람 중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이가 있더냐?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섬긴 사람 중에 하나님의 진노의 불에 불사름 당한 이가 있더냐? 하나님께 기꺼이 순종한 사람 중에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 집 밖으로 쫓겨난 이가 있더냐? 하나님을 한없이 사랑하는 사람 중에 하나님의 징벌 속에서 살게 된 이가 있더냐?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린 사람 중에 빈털터리가 된 이가 있더냐? 사람은 하나님을 추구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자기 재물을 쓰려고 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위해 자기 일생의 정력을 쓰려고 하지 않으면서 도리어 하나님이 너무 지나치다고 말하고, 하나님께 사람의 생각에 맞지 않는 점이 너무 많다고 말한다. 너희 같은 이런 인성으로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설령 모든 힘을 다 쏟아부어도 하나님께 칭찬받을 수 없다. 너희는 자신이 인류 중의 불량품이라는 사실을 모른단 말이냐? 너희의 인성이 가장 비천하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냐? 너희의 ‘존칭’이 무엇인지 모른단 말이냐?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너희를 늑대의 아비나 어미, 늑대의 자식이나 손자, 늑대의 후예, 늑대의 민족이라고 한다. 너희는 자기 신분을 알고 항상 마음에 새겨야 하며, 스스로를 상등 인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인류 가운데 가장 악랄한 한 무리의 비인류이다. 너희는 이 모든 것을 모른단 말이냐? 내가 너희들 가운데서 사역하면서 얼마나 큰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지 너희는 알고 있느냐? 너희의 이성이 정상을 되찾지 못하고, 너희의 양심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한다면, 너희는 ‘늑대’라는 호칭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고, 저주와 징벌의 날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너희는 출생이 비천하고, 본래 아무런 가치도 없으며, 본래 한 무리 굶주린 늑대이고, 한 무더기 잡동사니나 쓰레기다. 내가 너희에게 사역하는 것은 너희처럼 이득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역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계속 이렇게 거역한다면 나는 나의 사역을 그만둘 것이며, 앞으로 다시는 너희에게 사역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나는 내가 좋아하는 다른 무리의 사람들에게 옮겨 가서 사역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영원히 너희를 떠나게 된다. 나는 나와 적이 되는 사람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는 나의 마음에 합하길 원하느냐, 아니면 나와 적이 되길 원하느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품이 변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적이 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04)

사람은 누구나 예수의 참모습을 보고 싶어 하고 예수와 함께하길 원한다. 예수를 만나거나 예수와 함께하길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형제자매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예수를 만나기 전, 다시 말해 성육신 하나님을 만나기 전, 너희는 예수의 모습이 어떨지, 말씀은 어떤 식으로 할지, 생활 방식이 어떨지 등 생각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정말로 만났을 때 너희의 생각은 곧바로 바뀔 것이다. 어째서 그럴까? 알고 싶으냐? 사람의 사유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의 본질은 더더욱 사람이 바꿀 수 없다. 너희는 그리스도를 신선이나 성인(聖人)으로 여기지만, 누구도 그리스도를 신적 본질을 지닌 일반인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밤낮으로 하나님을 만나기만을 고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적대시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이 사람의 잘못이 아니란 말이냐? 지금까지도 너희는 자신의 믿음과 충성심이 그리스도를 뵙기에 충분하다고 여기는데, 나는 너희에게 실제적인 것들을 더 많이 갖추라고 충고하고 싶다! 과거와 현재에 그리스도와 접한 많은 사람들이 모두 바리새인의 역할을 하여 실패했고, 이후에도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너희들이 실패한 까닭은 무엇이냐? 그것은 너희의 관념 속에 사람들이 앙모할 만큼 위대한 하나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사람의 바람과 다르다. 그리스도는 위대하기는커녕 아주 보잘것없으며, 사람인 데다 그것도 평범한 사람이다. 그는 하늘에 올라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땅에서도 행동이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사람은 그리스도를 평범한 사람처럼 대하고, 그와 거리낌 없이 지내며, 그에게 막말을 하면서, 동시에 여전히 ‘진정한 그리스도’가 오기를 기다린다. 너희는 이미 온 그리스도를 보통 사람으로 대하고 그의 말씀을 보통 사람의 말로 여기므로 그리스도에게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빛 속에서 자신의 추한 모습만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리스도와 만나기 전에 너는 자신의 성품이 완전히 변화되었고, 자신이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르는 자라 여기며 그리스도의 축복을 받기에 가장 합당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또한 많은 길을 열심히 뛰어다녔고 많은 사역을 행하여 많은 결실을 맺었으므로 자신이 나중에 꼭 면류관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너는 사람의 패괴 성품과 패역, 대적은 그리스도를 만날 때 드러날 뿐만 아니라, 그때 드러나는 패역과 대적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적나라하다는 사실을 아느냐? 그리스도가 인자이며 정상 인성을 지닌 인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불경스레 대하고, 하나님이 육신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사람의 패역이 남김없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의 임함으로 인류의 패역이 모두 파헤쳐졌고, 그리스도의 임함으로 인류의 본성이 다 부각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맹수를 굴 밖으로 유인하는’ 것이다. 너는 감히 자신이 하나님께 충실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너는 감히 자신이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너는 감히 자신이 패역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어떤 자는 자신이, 하나님이 환경을 마련할 때마다 아무 불평 없이 순종하고,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전혀 없다고 말할 것이다. 또 어떤 자는 자신이, 하나님이 맡긴 일을 건성으로 대한 적 없이 언제나 최선을 다해 완수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럼 너희에게 묻겠다.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생활할 때 그의 마음에 합할 수 있느냐? 그런 날은 또 얼마나 오래갈까? 하루? 이틀? 한 시간? 두 시간? 너희의 믿음은 가상하나 너희의 의지력은 결코 강하지 않다. 네가 정말로 그리스도와 함께 생활하게 될 때는 너의 독선과 자만이 언행에서 조금씩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 뒤를 이어 너의 사치스러운 욕망과 불복하고 불만스러워하는 마음 또한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다. 결국 교만함이 나날이 심해져 물과 불처럼 그리스도와 상극이 될 때면, 너의 본성이 전부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때 너의 관념은 감출 수 없게 되고, 너의 불평도 자연스럽게 ‘표출’되면서 너의 그 비열한 인성이 전부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너는 여전히 자신의 패역을 인정하지 않고, 그런 그리스도는 너무 냉혹하여 받아들이기 어렵기에 더 나은 그리스도가 있으면 완전히 순종할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너희는 자신의 패역에 이유가 있다고 여기며, 그리스도가 너희를 그렇게 거역할 수밖에 없는 지경으로 몰아넣었다고 생각한다. 너희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고 그에게 순종할 마음이 없었음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한사코 그리스도에게 너의 뜻에 따라 사역하길 강조하며, 한 가지 일이라도 너의 뜻에 따라 하지 않으면 그를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으로 여긴다. 너희 중 많은 사람이 이렇게 그와 힘겨루기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믿는 이는 대체 누구이냐? 너희는 어떻게 추구했느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그리스도의 마음에 합하지 못하는 사람은 분명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이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05)

너희는 늘 그리스도를 만나길 원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자신을 너무 높이 보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다. 누구나 그리스도를 만날 수는 있지만 나는 아무도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자격이 없다고 한다. 인간의 본성은 악과 교만, 패역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만날 때 그 본성이 너를 망치고, 네게 사형을 선고할 것이다. 네가 형제(자매)와 접할 때에는 너를 어떠하다고 설명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접하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너의 관념이 수시로 뿌리를 내리고, 너의 교만함이 수시로 싹이 트고, 너의 패역이 수시로 무화과를 맺을 것이다. 너의 그런 인성으로 어찌 그리스도를 접한단 말이냐? 너는 진정 그를 언제나 하나님으로 대할 수 있느냐? 너에게는 정말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실제가 있느냐? 너희는 마음속의 위대한 하나님을 여호와로 여겨 경배하고, 보이는 그리스도는 사람으로 대하니 이성이 너무도 없고, 인간성 또한 몹시 저열하다! 너희는 가끔 기쁠 때에만 그를 끌어와 하나님으로 여겨 경배할 뿐, 영원히 하나님으로 여기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악당이라고 한다. 타인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도 보답을 받는데, 그리스도는 너희 가운데서 이렇게까지 사역하면서도 사람들의 사랑과 순종, 보상도 받지 못한다. 이는 마음이 미어지고 눈물이 날 일이 아니겠느냐?

어쩌면 네가 하나님을 여러 해 믿으면서 어느 누구에게도 악담을 하거나 나쁜 짓을 한 적이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네가 그리스도를 접했을 때 정직한 말과 일을 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다면, 나는 너를 세상에서 가장 음험하고 악랄한 사람이라고 한다. 네가 친지와 친구, 아내(남편)와 자녀, 부모에게 매우 자상하고 충실하며, 여태껏 다른 이를 상대로 부당한 이득을 챙긴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네가 그리스도의 마음에 합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와 화목하게 지낼 수 없다면, 너의 모든 것으로 이웃을 구제하거나 부모와 가족을 세심하게 돌본다 하더라도 나는 네가 여전히 악인일 뿐만 아니라 그것도 간계가 많은 악인이라고 할 것이다. 네가 사람들의 마음에 합한다고 그리스도의 마음에 합하는 것이라고 여기지 말라. 좋은 일을 좀 했다고 그리스도의 마음에 합한다고 여기지 말라. 너는 선심을 쓰는 것으로 교묘하게 하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좋은 일을 좀 했다고 순종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너희는 모두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정상적인 인성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면서도 입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하는데, 너희들의 그런 믿음은 그에 상응하는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다. 너희는 그리스도를 만나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너희는 분량이 너무 작아서 그리스도를 만날 자격조차 없기 때문이다. 네가 패역을 완전히 벗어 버리고 그리스도와 화목하게 지낼 수 있을 때 하나님은 자연스럽게 너에게 나타날 것이다. 책망이나 심판을 거치지 않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너는 반드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 멸망의 대상이 될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본래 하나님께 적대적이다. 사람은 사탄에 의해 심하게 패괴된 존재이므로 만약 패괴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지낸다면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없다. 언행 하나하나에서 패괴가 드러나고, 하나님을 접할 때 곳곳에서 패역을 드러내어 부지중에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기만하고, 저버리는 존재가 될 것이다. 그때는 사람의 처지가 더욱 위험해지고, 그러다 보면 결국 징벌의 대상이 되고 말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접하는 것이 너무 위험하니 하나님과 거리를 두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이런 자가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느냐? 이런 자가 하나님께 충실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접하는 것이 물론 어렵지만 이는 모두 사람이 패괴되었기 때문이지 하나님이 사람을 접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너희들이 자신을 아는 진리에 공을 들이면 좋겠다. 하나님이 왜 너희를 알아주지 않을까? 왜 너희의 성품을 혐오할까? 왜 너희의 언사를 증오할까? 너희는 충성심이 좀 있으면 뽐내고 공헌을 좀 하면 보답을 바란다. 또 조금 순종하면 타인을 업신여기고 보잘것없는 사역을 좀 하면 하나님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 너희는 하나님을 대접하고는 돈과 물질을 요구하고 칭찬해 달라고 하며, 동전 두 닢을 내놓고는 아까워하고, 동전 열 닢을 내놓고는 축복해 달라고 하며 특별 대우를 받으려 한다. 너희의 이런 인성은 정말 입에 담기 민망하고 듣기조차 거북하다. 너희의 언행에 자랑스러울 것이 뭐가 있단 말이냐? 본분을 이행하는 자나 이행하지 않는 자, 인도하는 자나 따르는 자, 하나님을 대접하는 자나 하지 않는 자, 헌금하는 자나 하지 않는 자, 전도하는 자나 받는 자 등등의 모든 사람이 자기 자랑만 하는데 우습지 않으냐? 자신이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못하고,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을 자랑하는데, 너희들의 이성이 자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되지 않는단 말이냐? 이런 이성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접할 수 있단 말이냐? 너희는 이런 자신이 걱정스럽지 않으냐? 너희의 성품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너희의 믿음이 우습지 않으냐? 너희의 믿음이 터무니없지 않으냐? 너는 너의 미래를 어떻게 대할 것이냐? 네가 가야 할 길을 어떻게 선택할 것이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그리스도의 마음에 합하지 못하는 사람은 분명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이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06)

내가 많은 말을 하고 내 뜻과 내 성품까지 나타내었건만, 사람은 여전히 나를 알지도, 믿지도 못한다. 혹은 나에게 순종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성경만 따르며 사는 사람, 율법만 따르며 사는 사람, 십자가에만 기대어 사는 사람, 규례만 따르며 사는 사람, 오늘날 나의 사역을 따르며 사는 사람, 이들 가운데 그 누가 내 마음에 합하겠느냐? 너희는 복받거나 상받을 궁리만 하였지, 도대체 어떻게 해야 나와 적이 되지 않고 내 마음에 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너희가 너무나 실망스럽다. 너희에게 셀 수 없을 만큼 베풀어 주었지만, 내가 너희에게서 얻은 것은 너무나도 미미하기 때문이다. 너희의 기만과 교만, 너희의 탐욕과 사치스러운 욕망, 너희의 배반과 불복종, 이 가운데 어느 것이 내 눈에서 벗어날 수 있겠느냐? 너희는 나를 무성의하게 대하고 속이며 욕되게 한다. 또한 기만하고, 사기 치며, 나의 제물을 강탈한다. 이런 악행들이 어떻게 내 징벌을 피해 갈 수 있겠느냐? 이 악행들은 너희가 나를 적대시하며 내 마음에 합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너희는 저마다 내 마음에 합하는 부분이 아주 많다고 여긴다. 그렇다면 이 확실한 증거는 또 누구에게 해당하는 것이란 말이냐? 너희는 나에게 진심을 다하고, 변치 않는 마음으로 충성한다고 여긴다. 또한 너희는 자신들이 더없이 착하고, 동정심도 넘쳐난다고 여기며, 나에게 셀 수 없이 많이 바쳤고, 나를 위해 행한 것도 충분히 많다고 여긴다. 하지만 너희는 그런 생각들을 자신의 행위와 대조해 본 적이 있느냐? 내가 말해 주겠다. 너희는 교만으로 가득 찼고, 너무나 탐욕스러우며, 건성으로 하는 일이 많다. 게다가 나를 속이는 데 탁월하고, 비열한 속셈과 수단이 너무 많다. 너희는 충성심과 진심이 한없이 부족하고, 양심은 더욱 없으며, 마음씨 또한 너무나 악독하여 어떤 사람도 그냥 두지 않는다. 심지어 나에게도 예외는 없다. 너희는 자녀와 남편을 위해, 그리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나를 문전 박대 한다. 너희의 가정과 자녀, 지위와 앞날, 그리고 누리는 데에만 관심을 둘 뿐, 나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너희가 말을 할 때, 일을 할 때 나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날이 추울 때도, 더울 때도 너희는 자녀와 남편, 아내 그리고 부모를 생각하지, 나를 떠올리지는 않는다. 본분을 이행할 때도 네가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이익과 신변 안전, 그리고 너의 가족이다. 네가 행한 일 중에 나를 위한 것이 있었느냐? 언제 나를 생각한 적이 있었느냐? 나와 내 사역을 위해 모든 것을 불사한 적이 있었느냐? 내 마음에 합하는 증거는 어디에 있느냐? 실제로 나에게 충성하였느냐? 실제로 나에게 순종하였느냐? 복을 얻으려는 마음을 갖지는 않았느냐? 너희는 모두 나를 건성으로 대하며 기만하고 있다. 또한 진리를 우롱하고, 진리의 존재를 덮어 감추며, 진리의 본질을 배반하고 있다. 나를 이토록 적대시했으니, 너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너희는 막연한 하나님과 합하며, 막연한 신앙만을 추구하지, 그리스도의 마음에는 합하지 않는다. 이런 악행을 저지르고 있으니 악인과 똑같은 보응을 받지 않겠느냐? 그때가 되면, 너희는 그리스도와 합하지 않은 자는 그 누구도 분노의 날을 피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를 적대시하는 자가 어떤 보응을 받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그날이 오면, 하나님을 믿어 복을 받고, 또 천국에 가려는 너희의 꿈은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마음에 합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많은 것을 잃고 수없이 고통을 겪었지만, 내가 인류에게 베풀어 주는 모든 유업을 이어받을 것이다. 최종에 너희는 오직 나만이 공의로운 하나님이고, 오직 나만이 인류를 아름다운 종착지로 인도할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너는 마땅히 그리스도와 합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07)

하나님은 사람에게 많은 일을 맡겼고, 사람의 진입에 대해서도 수없이 많이 이야기했다. 그러나 사람의 자질이 너무 부족해 하나님의 많은 말씀은 거의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했다. 사람의 자질이 부족한 이유는 다양하다. 사람의 사상과 도덕이 부패하고 교양이 없는 것, 봉건적 미신이 사람 마음을 심각하게 점령한 것, 타락하고 문란한 생활 방식이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서 각종 폐단을 일으킨 것, 거의 98%의 사람이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고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은 더더욱 극소수일 정도로 교육 수준이 얕은 것, 이러한 것들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영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 채 봉건적인 미신으로부터 얻어진 하나님에 대한 막연하고 불명확한 이미지만을 가지고 있다. 수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민족의 기개’는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 악영향과 봉건사상을 남겨, 조금의 자유도 없이 옭아매며, 이로 인해 사람들은 패기도, 의지력도, 진취심도 없이 소극적으로 뒷걸음질 치며, 노예근성에 깊이 젖어 버렸다. 이러한 객관적 요소들은 사람의 사상적 풍모, 개인의 이상(理想)과 도덕, 성품을 씻을 수 없는 더럽고 추한 몰골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모두 공포의 암흑세계에 갇힌 것처럼 누구도 벗어날 생각을 못 하고, 이상적인 세상도 생각지 못한 채, 그저 현실에 안분지족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자녀를 낳아 기르고, 힘껏 땀 흘려 일하며, 안락하고 원만한 가정, 부부간 사랑, 자녀의 효도, 즐거운 노년과 편안한 여생 등을 꿈꾸면서 말이다. 사람은 수십 년, 수천 년, 수만 년 동안 심지어 지금도 이렇게 헛되이 시간을 보내고 있으며, 아무도 가장 아름다운 인생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그저 어두운 세상에서 서로 싸우고 죽이고, 명예와 이익을 다투며, 아귀다툼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들 중 하나님의 뜻을 구한 자가 있더냐? 하나님의 사역에 신경을 쓴 자가 있더냐? 흑암 권세에 점령당한 사람의 이 모든 것들은 이미 고질화되었기에, 하나님의 사역은 전개하기가 매우 어려우며, 사람은 하나님이 오늘날 맡긴 일에 대해 신경 쓸 생각조차 없다. 어찌 됐든, 나는 사람이 내가 한 말들을 개의치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말하는 것은 수천 년의 역사(歷史)이기 때문이다. ‘역사’란 곧 실제로 있었던 일이고, 게다가 이 모든 것은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추문’이니, 굳이 사실을 숨길 필요가 있겠느냐? 하지만 나는 또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내 말을 보면서 깨닫고 분발할 것임을 믿는다. 하나님은 사람이 편안하게 살면서 즐겁게 일하기를, 하지만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바란다. 전 인류가 안식에 들어가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더욱이 온 땅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해지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크나큰 소망이다. 애석하게도 사람은 모두 어리석어 깨닫지 못하고, 사탄에 의해 패괴되어 오늘날 사람 같지도 않은 몰골이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의 문화적 소양을 높이고 정신적 면모를 변화시키는 데는 무엇보다 사상, 도덕과 교육이 중요하고, 지식 습득 훈련은 그다음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3>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08)

사람은 생명 체험 과정에서 늘 ‘나는 하나님을 위해 가정도 직장도 내려놓았는데,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주셨지? 그동안 내가 받은 복이 있는지 한번 계산하고 따져 봐야겠다.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헌신하고 뛰어다니며 수많은 고난을 받았다. 하나님은 그동안 내가 한 것에 대해 어떤 약속을 해 주실까? 내 선행을 기억해 주실까? 내 결말은 어떤 것일까? 복은 받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사람은 늘 마음속으로 이렇게 계산하고, 저의와 야심을 품고, 하나님께 장삿속을 들이밀며 뭔가 얻어 내려고 한다. 다시 말해, 사람의 마음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시험하며, 하나님을 상대로 계산하고, 자신의 결말을 두고 하나님과 ‘이치를 따지며 논쟁한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달라며 하나님께 구두 증거를 구걸한다. 사람은 하나님을 추구하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장삿속을 들이밀며, 끊임없이 뭔가를 얻어 내려고만 한다. 심지어 갈수록 심해지고 탐욕스러워진다. 사람은 하나님과 거래를 하는 동시에, 또 끊임없이 하나님과 논쟁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시련이 임하거나 특정 환경에 처했을 때 항상 나약해지고 일을 태만히 하며,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늘어놓는다. 하나님을 믿는 순간부터 사람은 하나님을 화수분이나 만물 상자로 삼고, 자신을 하나님의 가장 큰 채권자로 간주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복과 약속을 얻어 내는 것이 생득적 권리이자 책무라고 생각하고, 반면 사람을 보호하고 보살피며 사람에게 뭔가를 제공하는 것은 하나님이 다해야 할 책임이라 여긴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모든 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표현에 대해 갖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이해이자, ‘하나님을 믿는다’는 개념에 대해 갖고 있는 가장 깊은 이해이다. 사람의 본성과 본질에서부터 사람의 주관적인 추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관련된 것은 하나도 없다. 또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목적은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과 연결 짓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단 한 번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하려고 생각하거나 그래야 한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람의 이러한 상태를 볼 때, 사람의 본질은 뻔한 것이다. 그 본질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마음씨가 악독하고 음험하고 간사하며, 공평과 공의와 긍정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고, 나아가 비열하고 탐욕스럽다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께 마음을 닫고,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바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태껏 사람의 진심을 보지 못했으며, 사람의 경배를 받지도 못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고 얼마나 많은 사역을 행하든,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것들을 공급하든, 사람은 봐도 못 본 척하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사람은 시종일관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고, 자신이 주관하고 자신이 결정하려고 한다. 그 뜻인즉,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가고 싶어 하지도,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고 싶어 하지도 않으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경배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사람들의 상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09)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다양한 사역에 대해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얼마 안 되는 지식과 이치로 성령의 역사를 가늠했기 때문이 아니냐? 그들은 체험이 얄팍하면서도 천성이 교만하고 방종하여 성령의 역사를 가볍게 여기고 성령의 징계를 등한시한다. 또 자신의 미약하기 짝이 없는 낡은 이치로 성령의 역사를 ‘입증’하고, 스스로 학식이 높다고 믿으며 온 세상을 주름잡을 수 있다고 허세를 부린다. 그런 자는 모두 성령께 혐오받아 버림받는 자이자 새 시대에 도태되는 자임을 어찌 알지 못한단 말이냐? 하나님 앞에서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모두 얄팍한 지식으로 경망을 떠는 소인배들 아니냐? 얼마 되지도 않는 성경 지식으로 세상의 ‘학술계’를 휘어잡으려 하고, 겨우 사람이나 가르칠 수 있는 보잘것없는 이치로 성령의 역사를 돌려세우려 하고 자기 생각대로 주무르려는 야심을 품으며, 좁은 안목으로 하나님의 6천 년 사역의 풍모를 한눈에 다 꿰뚫어 보려고 한다. 그런 자에게 무슨 이성이 있다고 하겠느냐! 사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사역을 쉽사리 평가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현재 사역에 대한 인식을 좀 말할 뿐 함부로 단정 짓지 않는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교만하고 분수를 모르며, 또한 하나님의 어떠함에 대해 실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론만 멋대로 떠벌릴 뿐이다. 이런 사람은 가장 무가치한 자이다. 성령의 역사를 아이들 장난으로 치부하는 사람은 모두 경박한 자들이다! 이들은 성령의 새 역사를 마주하고도 신중하게 대하기는커녕 함부로 지껄이고 멋대로 평가하며, 자기 성미대로 성령 역사의 정확성을 부인하고, 모욕적인 말과 모독도 서슴지 않는다. 이렇게 오만불손한 자들은 모두 성령 역사를 알지 못하고, 천성이 거만하며 방자한 사람이 아니냐? 그런 자는 언젠가 성령의 새로운 역사를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관용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런 자는 하나님을 위해 사역하는 사람을 안중에 두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하기까지 한다. 그러니 그런 악당은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사함 받지 못할, 영원히 지옥에 멸할 대상이다. 그 오만하고 방종한 자들은 또 모두 하나님을 믿는다는 간판을 내건 사람들이다. 그런 자들일수록 하나님의 행정 법령을 더 쉽게 거스른다. 천성적으로 방종하고 복종할 줄 모르는 교만한 자들은 모두 그런 길을 가지 않더냐? 모두가 이렇게 ‘언제나 새로운 하나님’을 끊임없이 대적하지 않더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3단계 사역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길이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10)

수천 년의 고대 문화와 역사적 지식으로 사람의 사상과 관념, 정신적 면모는 물샐틈없이 밀봉되었으니, 호추부두[1]와 같다. 사람은 십팔 층 지옥에서 살며, 하나님에 의해 지하 감옥에 던져진 것처럼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한다. 봉건사상에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억눌려 질식당하고, 반항할 여력이 없어 그저 묵묵히 참고 또 참는다…. 지금까지 아무도 정의와 공평을 위해 싸우거나 일어서지 않았다. 그저 봉건적 예교(禮敎)의 가혹한 학대와 속박에 시달리며 개돼지만도 못한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날이 지나고 해가 바뀌어도 사람은 하나님을 찾아 인간 세상의 즐거움을 누리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사람은 구타를 당해 늦가을의 낙엽처럼 시들었으며, 누렇게 뜨고 바싹 야위었다. 사람은 이미 오래전에 기억을 잃고, 인간 세상이라 불리는 지옥에서 속절없이 살아가고 있다. 사람이 고대하는 종말의 날이 ‘편히 누리는’ 날이기라도 한 양 종말의 날을 기다리고, 지옥과 함께 파멸을 맞고자 한다. 봉건적 예교가 사람의 삶을 ‘저승’으로 이끌어 사람은 더더욱 반항할 힘을 잃어버리고, 온갖 압박 속에서 한 걸음씩 저승으로 추락하여 하나님과 점점 더 멀어지게 되었다. 오늘날, 사람은 하나님과 생면부지의 사이가 되어 얼굴을 마주하면 계속 피하기에 급급하다. 모두가 하나님을 안 적도, 본 적도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상대하지 않고 한쪽에 고립시켰다. 기나긴 인생 여정이 펼쳐지는 내내 하나님은 줄곧 기다려 왔고, 억누를 수 없는 분노를 한 번도 사람에게 퍼붓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침묵하며 사람이 개과천선하기를 기다릴 따름이다. 하나님은 일찍이 인간 세상에 와서 사람과 함께 세상의 고난을 겪었고, 오랜 시간을 같이 지냈으나 사람은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묵묵히 인간 세상의 쓰라린 아픔을 감내하며, 자신이 가져온 사역을 행할 뿐이다. 그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 인류가 필요로 하는 것을 위해 인내하며 사람이 경험하지 못한 고통을 받고 있다. 또한 사람 앞에서 소리 없이 그들을 돌보며, 자신을 낮추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위해, 그리고 인류의 필요를 위해 사역하고 있다. 고대 문화의 지식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몰래 훔쳐 마왕과 그 자손에게 넘겼다. ‘사서오경(四書五經)’은 사람의 사상과 관념을 또 다른 패역의 시대로 끌어갔으며, 사람이 ‘서경(書經)’의 편자를 더욱 숭배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에 대한 관념은 한층 더 깊어졌다. 어느덧 마왕은 사람 마음속의 하나님을 무정하게 내쫓고, 득의양양하게 사람의 마음을 차지했다. 그때부터 사람은 추악한 영혼을 가지게 되었고, 마왕의 몰골을 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게 되었다. 마왕의 사악한 독은 하루하루 사람 안에서 퍼져 나갔고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사람은 더 이상 자유를 누릴 수 없었고, 마왕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그저 그렇게 마왕에게 사로잡혀 항복하고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어린 마음에는 오래전에 ‘무신론’이란 암세포가 심어졌다. “과학과 기술을 배워 4대 현대화를 실현하자. 세상에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릇된 이론을 교육시키고, 말끝마다 “우리의 근면한 노동으로 아름다운 삶의 터전을 꾸려 가자.”라고 외쳐 대며 누구나 어린 시절부터 이에 동참하여 조국에 보답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렇게 마왕은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자기 앞에 오게 만들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모든 공로(하나님이 손으로 온 인류를 받들고 있는 공로)를 자신에게 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움을 느낀 적이 없으며, 게다가 뻔뻔하게 하나님의 백성을 빼앗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고, 자신은 쥐처럼 책상 위로 ‘뛰어올라’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하나님’으로 간주하고 경배하게 한다. 이 악당들아! 입으로 “세상에는 하나님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바람은 자연법칙에 의한 변화이고, 비는 안개가 찬 공기를 만나 응결되어 작은 물방울로 맺힌 후 땅에 떨어지는 것이다. 지진은 지형의 변형이 초래한 지각의 흔들림이고, 가뭄은 태양 표면의 핵자가 깨지고 갈라지면서 공기의 습기가 사라진 현상이다. 이것이 자연 현상이지 어떻게 하나님의 행사일 수 있겠는가?”라고 외치며 끔찍한 소문을 퍼뜨리는구나. 그뿐만 아니라 “사람은 고대 유인원에서 진화한 것이고, 지금의 세계는 약 억만년 전의 원시 사회가 교체되며 형성된 것이다. 나라의 흥망성쇠는 국민의 두 손에 달려 있다.”라는 등의 입에 담기도 민망한 논리를 외치는 자도 있다. 그리고 돌아서서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화상을 벽에 걸거나 책상 위에 봉안하고 경배하게 한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외치면서 스스로를 신으로 간주하고, ‘사정없이’ 하나님을 지계(地界) 밖으로 밀어내며,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의 위치에 서서 마왕 노릇을 하려 드는구나. 실로 터무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치 하나님이 마왕의 원수이고, 하나님과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하게 만들며, 하나님을 내쫓고 자신은 법망 밖에서 노닐고자[2] 한다. 이 마왕들아! 어찌 그것의 존재를 용납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여 뒤죽박죽, 엉망진창[3]으로 만들어야 그만둘 태세다. 하나님께 끝까지 맞서려는 듯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달려들며, 고의로 하나님과 대립하고 점점 강한 압박을 가하는구나. 추악한 몰골은 이미 오래전에 낱낱이 드러났고[4], 진퇴유곡[5]의 처지에 이르렀건만 하나님에 대한 증오심은 여전하며, 하나님을 통째로 집어삼켜야 마음속의 원한이 풀릴 것처럼 군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그 원수를 용납할 수 있겠느냐! 그것을 말살시키고 근절해야 금생의 소원을 이룰 수 있을 텐데, 어찌 그것이 계속 미쳐 날뛰도록 내버려 둘 수 있겠느냐? 그것은 사람을 패괴시켜 하늘해(원문: 天日)를 모르게 만들었고, 아둔하고 무감각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정상인의 이성을 상실하게 했다. 그러니 어찌 우리의 온 몸과 마음을 바쳐 그것을 쳐부수고 불태워 후환을 없앰으로써 하나님의 사역이 하루빨리 공전의 성황을 이루도록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이 악한 무리는 인간 세상에 와서 소란을 일으키고 불안을 조성하며 사람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사람을 벼랑 아래로 떨어뜨려 온몸이 산산조각 나게 한 다음 사람의 시체를 집어삼키려는 속셈이다. 하나님의 계획을 망치고, 하나님과 겨루어 보겠다는 헛된 생각을 하며 모든 것을 걸었지만[6], 그것이 어디 말처럼 쉽겠느냐! 십자가는 결국 극악무도한 마왕을 위해 준비된 것이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속하지 않고, 이미 십자가를 마귀에게 던졌다. 하나님은 일찍이 승리하였으며, 더 이상 인류의 죄 때문에 슬퍼하지 않는다. 그는 온 인류를 구원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7> 중에서

[1] 호추부두(戶樞不蠹): 문의 회전축은 좀먹지 않는다는 뜻으로, 늘 움직이는 것은 쉽게 부식되지 않으며, 오랫동안 망가지지 않음을 비유함. 여기서는 완고하고 고루한 사람의 지식, 문화, 정신적 면모를 풍자함.

[2] 법망 밖에서 노닐고자[逍遙法外]: 여기서는 마귀가 미쳐 날뛰고, 횡포를 부리는 것을 의미함.

[3] 엉망진창[狼藉遍地]: 여기서는 마귀의 행동이 난폭하여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음을 가리킴.

[4] 낱낱이 드러났고[暴露無遺]: 여기서는 마왕의 몰골이 하나님에 의해 폭로된 것을 의미함.

[5] 진퇴유곡[焦頭爛額]: 마왕의 추악한 몰골을 비유함.

[6] 모든 것을 걸었지만[孤注一擲]: 마귀의 음흉하고 악랄한 술수를 비유함. 여기서는 풍자적으로 쓰였음.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11)

사탄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하나님에게 맞서고 있다. ‘오랜 문화유산’이니 소중한 ‘고대 문화의 지식’이니 ‘도가 학설, 유가 학설’이니 ‘공자의 경전, 봉건적 예교’니 하는 것들은 사람을 지옥으로 끌고 간다. 현대의 선진적인 과학기술과 발달한 공업, 농업, 상업은 그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다. 오로지 고대 ‘유인원’이 가져다준 봉건적 예교만을 강조하면서 고의로 하나님의 사역을 교란하고, 대적하고, 무너뜨리며 오늘날까지 사람을 해쳐 왔다. 게다가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키려[1] 한다. 사람은 봉건적 예교의 가르침을 받고 고대 문화의 지식을 물려받아 크고 작은 마귀로 물들어 버린 지 오래다.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접하는 사람도, 하나님의 오심을 즐겁게 맞이하는 사람도 얼마 되지 않는다. 사람은 모두 얼굴에 살기가 가득하고, 여기저기 독살스러운 기운이 잔뜩 올라와 있으며, 하나님을 육지에서 몰아내려 한다. 손에 칼을 쥔 채 진을 치고 하나님을 ‘말살’하려 한다. 언제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마귀의 땅에는 우상이 널려 있다. 온 땅의 상공에 종이를 태우고 향을 피우는 역겨운 냄새가 진동을 하여 숨 쉬기가 힘들 정도이다. 그것은 마치 독사가 뒹굴며 일으키는 썩은 흙냄새 같아서 구토를 유발한다. 또한, 머나먼 지옥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듯한 악귀의 ‘독경’ 소리는 사람을 몸서리치게 한다. 알록달록한 우상이 빼곡히 진열된 땅은 주지육림의 세상으로 전락했다. 마왕은 음모를 실현한 듯 섬뜩한 웃음을 멈추지 않는데, 사람은 오히려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마귀에 의해 패괴되어 정신이 혼미하고 실의에 빠져 있다는 것 역시 깨닫지 못한다. 마귀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허물어뜨리려 하고, 하나님을 다시 한번 욕보이고 암살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허물고 방해하려고 한다. 그러니 하나님이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을 마귀가 어찌 용납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땅에서 인간 세상의 일에 ‘개입하는’ 것을 어찌 용납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자신의 추악한 몰골을 폭로하는 것을 마귀가 어찌 용납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자신의 일을 망치는 것을 마귀가 어찌 용납할 수 있겠느냐? 악에 받친 마귀가 하나님이 땅에서 그것의 정치 기강을 바로잡는 것을 어찌 용납할 수 있겠느냐? 어찌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겠느냐? 추악한 몰골이 남김없이 드러나니 울 수도 웃을 수도 없고, 언급할 수조차 없다. 이것이 마귀의 본질 아니겠느냐? 그런데도 추한 영혼은 이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이 공모자[2]들아! 그것들은 속세에 내려와 쾌락을 추구하고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염량세태를 초래하고, 사람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했다. 사람을 농락하여 성결했던 본래의 모습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흉악하고 사악하게 만들었다. 그것도 모자라 세상에 군림하고 세상을 호령하려 하는구나. 하나님의 사역을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을 정도로 가로막고, 사람을 철옹성처럼 둘러싸 가둔다. 이렇게 많은 죄업을 쌓고, 화를 야기하고도 벌받을 생각을 하지 않는단 말이냐? 잡귀와 요괴가 세상에서 잠시 횡행하며,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심혈을 물샐틈없이 차단했으니, 정말이지 극악무도하다. 이러할진대 어찌 하나님이 조급해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어찌 하나님이 크게 노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사역을 심히 가로막고 대적하니, 패역이 너무도 심하구나! 크고 작은 잡귀조차 호가호위하며, 덩달아 풍파를 일으키고, 진리인 줄 알면서도 고의로 대적한다. 패역한 자식들아! 그것의 염라대왕이 현재 ‘왕’이라고 새겨진 보좌에 오르기라도 한 듯 여유만만해하며[3]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구나. 진리를 찾고 정의를 따르는 자가 몇이나 되느냐? 개돼지 같은 짐승들이 역겨운 파리 떼를 이끌고 거름 더미 속에서 의기양양해하며 못된 수작을 부리고[4], 자신의 ‘염라대왕’이 가장 대단한 ‘왕’이라고 생각하며 우쭐한다. 자신이 역겨운 파리 한 마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어찌 모르는 것이냐? 개돼지 같은 아비 어미에게 기대 하나님의 존재를 모독하는구나. 보잘것없는 파리가 자신의 아비 어미는 이빨고래[5]만큼 크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보잘것없이 작고, 아비 어미는 자신보다 수억 배나 큰, 더러운 개돼지임을 어찌 모른단 말이냐? 자신의 비천함을 알지 못한 채 개돼지의 ‘썩은 냄새’를 믿고 곳곳에서 횡포를 일삼으며, 후대를 번성하겠다는 헛된 생각에 빠져 부끄러움도 모르는구나! 초록색 날개를 달고(하나님을 믿는다는 명분을 내세우는 것을 가리킴) 잘난 체하며, 여기저기서 자신의 아름다움과 뛰어남을 뽐낸다. 또 자신의 더러움을 슬그머니 사람에게 내던지고, 오색찬란한 날개로 자신의 더러움을 감추었다는 듯 득의양양해하며 참하나님의 존재를 핍박한다(종교계의 실상을 가리킴). 파리가 날개는 아름답고 매혹적일지 몰라도 배 속은 불결함으로 가득 차 있고, 온몸은 독을 가진 균으로 들끓는, 작디작은 파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람이 어찌 알겠느냐? 파리는 개돼지 아비 어미에 기대어 횡포를 부리고, 미쳐 날뛴다(여기에서 횡포란 하나님을 핍박하는 종교계의 관계자들이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믿고 참하나님을 배반하고 진리를 배반하는 것을 일컫는다). 마치 유대 바리새인의 영혼이 하나님을 따라 큰 붉은 용의 나라, 자신의 소굴로 되돌아와 또다시 핍박을 시작하고, 수천 년 동안 해 온 일을 이어 나가는 듯하구나. 이 인간쓰레기들은 결국 땅에서 멸망할 것이다! 수천 년이 지난 후의 더러운 귀신은 더욱더 ‘교활하고 간사해진’ 듯하다. 속으로 늘 하나님의 사역을 망가뜨리겠다는 생각을 품고, 온갖 술수를 쓰며, 수천 년 전의 비극을 자신의 고국에서 ‘재연’하려 한다. 하나님은 핍박을 받다 못해 큰 소리로 부르짖을 뻔했고, 당장이라도 셋째 하늘로 되돌아가 그것을 멸해 버리고 싶을 정도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그의 뜻을 깨닫고, 그의 기쁨과 슬픔을 알며, 그가 혐오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는 사람의 진입에 더 큰 도움이 된다. 사람의 진입이 빠를수록 하나님의 마음은 더 큰 만족을 얻으며, 마왕을 꿰뚫어 볼수록 하나님과의 거리가 좁혀져 하나님의 염원을 이룰 수 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7> 중에서

[1] 집어삼키려[呑噬]: 사람의 모든 것을 빼앗은 마왕의 잔혹한 행위를 가리킴.

[2] 공모자[幫凶]: 흉악한 일이나 나쁜 짓을 돕는 사람으로, 악당 패거리와 같은 부류임.

[3] 여유만만해하며[悠閑自得]: 여기에서는 표정이나 태도가 오만하고 무례하여 혐오감을 유발하는 것을 의미함.

[4] 못된 수작을 부리고[興妖作怪]: 여기서는 마귀에 속한 자들이 곳곳에서 횡포를 부리고,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대적하는 것을 가리킴.

[5] 이빨고래[齒鯨]: 여기서는 작디작은 파리가 ‘개돼지’를 ‘고래’로 생각한 것을 풍자함.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12)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불결의 땅은 차마 눈 뜨고 못 볼 정도로 더럽고 도처에 참상이 난무해 있다. 곳곳에서 유령이 횡포와 협잡을 일삼고, 사시이비[1]한 언행과 악랄한 수법으로 이 마귀의 성을 무참히 짓밟아 시체가 즐비하고 썩은 내가 온 땅의 상공을 뒤덮게 했다. 게다가 경계가 삼엄[2]하니 누가 바깥세상을 볼 수 있겠느냐? 마귀는 사람의 온몸을 꽁꽁 묶고 두 눈을 가렸으며, 입을 단단히 막아 버렸다. 수천 년 동안 횡행한 이 마왕이 오늘날에도 마귀의 성을 이토록 빈틈없이 감시하고 있으니, 마치 난공불락의 ‘마귀 궁전’ 같다. 그리고 이 집 지키는 개들은 하나님이 그것의 빈틈을 노려 그들을 일망타진하면 ‘안락’의 땅을 잃을까 두려워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다. 이런 마귀의 성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었겠느냐? 하나님의 친절함과 사랑스러움을 어디에서 누려 봤겠느냐? 인간 세상의 일을 어찌 알겠느냐? 하나님의 절박한 마음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 하나님이 지극히 은밀하게 성육신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어두운 사회의 마귀는 잔인무도하다. 사람을 죽여도 눈 한 번 깜빡하지 않는 마왕이 어찌 사랑스럽고 선량하며 거룩한 하나님의 존재를 용납하겠느냐? 어찌 하나님의 강림을 손뼉 치며 반기겠느냐? 그 개만도 못한 노예들! 은혜를 원수로 갚으며 오래전부터 하나님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하나님을 학대하고 극히 잔인하게 굴며 하나님을 전혀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러면서 흉포하게 약탈을 일삼고, 악행을 저질렀으며, 양심을 내다 버리고, 무고한 인류를 유혹해 혼미한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게 했다. 고대의 계승자니, 경애하는 지도자니 하는 것들은 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들이다! 세상을 농락해 어둠으로 밀어 넣었다! 무슨 종교와 신앙의 자유니, 국민의 합법적인 권익이니 하는 것들은 전부 죄악을 덮으려는 수법이다! 하나님의 사역을 누가 지지하더냐?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피를 흘린 자 그 누구더냐? 조상 대대로 노예로 부림 받던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하나님을 노예로 부린다. 그러니 어찌 분개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천고의 원한이 마음에 맺히고, 만고의 죄악이 가슴에 응어리져 있다. 그러니 어찌 증오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위해 원한을 갚고, 하나님의 원수를 철저히 없애 버릴 것이다. 그들에게 계속 미쳐 날뛰고 제멋대로 발광해 보라고 해라! 이제 때가 왔다. 사람은 그 마귀의 추악한 몰골을 벗겨 버리기 위해 일찍이 온몸의 힘을 모아 준비하였고 모든 심혈을 기울였으며 대가를 치렀다. 속임을 당하고 고통과 고난을 받는 사람들이 그 아픔 속에서 떨쳐 일어나 이 악마를 저버리도록 말이다! 어찌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물샐틈없이 가로막는 것이냐? 어찌하여 갖가지 수법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속이는 것이냐? 진정한 자유와 합법적인 권익이 어디에 있느냐? 공평이 어디에 있느냐? 위로가 어디에 있느냐? 따스함이 어디에 있느냐? 어찌하여 간계로 하나님의 백성을 속이는 것이냐? 어찌하여 하나님의 강림을 강제로 막는 것이냐? 어찌하여 하나님이 자신이 창조한 땅에서 마음대로 노닐지 못하게 하는 것이냐? 어찌하여 하나님을 머리 둘 곳도 없게 쫓아가 죽이려는 것이냐? 인간 세상의 따스함은 어디에 있느냐? 인간 세상의 환영은 또 어디에 있느냐? 어찌하여 하나님이 간절히 기다리게 하는 것이냐? 어찌하여 하나님이 애타게 부르짖게 하는 것이냐? 어찌하여 하나님이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걱정하게 몰아붙이는 것이냐? 어두운 사회와 궁지에 몰린 집 지키는 개들은 어찌하여 하나님이 자신이 창조한 세상을 마음대로 드나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냐? 고난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찌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냐? 하나님은 너희를 위해 크나큰 고통을 감내하고 가슴 아프지만,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자 골육을 너희에게 주었는데, 어찌하여 너희는 본 체도 하지 않는 것이냐? 너희는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나님의 강림을 저버렸고, 하나님의 우정을 거절했다. 어찌하여 그리도 양심이 없는 것이냐? 이런 어두운 사회에서 너희는 억울함을 계속 참겠단 말이냐? 어찌하여 가슴에 천고의 원한을 품지 않고 마왕의 ‘배설물’을 채우는 것이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8> 중에서

[1] 사시이비[捕風捉影]: 말을 하거나 일을 할 때 허무맹랑한 것을 근거로 삼음을 비유함. 본문에서는 마귀가 사람을 해치는 수단을 가리킴.

[2] 경계가 삼엄[戒備森嚴]: 여기에서는 마귀가 사람을 해칠 때 매우 악랄한 수단을 사용하여 사람을 꼼짝도 못 하게 통제하는 것을 가리킴.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13)

사람이 진정으로 인생의 바른길과 하나님이 사람을 경영하는 근본 취지를 꿰뚫어 본다면, 자신의 앞날과 운명을 마음에 담아 두며 보배처럼 여기지 않을 것이고, 더 이상 개돼지보다 못한 자신의 아비 어미를 보살피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운명과 앞날은 소위 현대판 베드로의 ‘아비 어미’가 아니겠느냐? 사람은 그들과 골육처럼 가깝다. 육의 종착지, 육의 장래라는 것이 과연 살아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겠느냐, 아니면 죽은 후에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겠느냐? 육의 내일이 환난과 같은 커다란 풀무 불 속에 있겠느냐, 아니면 불사름 속에 있겠느냐? 사람의 육체가 화를 당할지 고통을 받을지에 관한 이런 문제들(여기서 고통받는다는 것은 복을 얻는다는 뜻이고, 고통은 장래의 시련이 사람의 종착지에 이롭다는 의미다. 화는 굳게 설 수 없거나 미혹되거나 재난 속에서 ‘불행히 어려움을 만나’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고 영혼이 적합한 종착지가 없음을 의미한다.)이 바로 지금 이 흐름 속에 있는, 사고할 수 있고 이성을 지닌 모든 사람의 최대 관심사 아니겠느냐? 사람이 건전한 이성을 가지기는 했지만 늘 이성에 걸맞은 생각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모두 멍하며, 맹목적으로 따르기 때문이다. 사람은 진입해야 하는 것에 대해 손바닥 보듯 훤히 알아야 하고, 환난 속(풀무 불의 연단 속을 의미한다)에서 진입해야 하는 것과 불의 시련 속에서 사람이 갖추어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더욱 분명하게 갈피를 잡아야 한다. 개돼지와 같고 개미나 빈대보다도 못한 아비 어미(육을 가리킨다)를 계속 섬기지 마라. 어째서 굳이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온갖 궁리를 다하며 애써 머리를 짜내는 것이냐? 육은 본래 너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너를 통제하고 사탄을 장악하는 하나님 손안에 있는 것이다(원래는 사탄에게 속하지만 사탄 역시 하나님의 손안에 있기에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이 완전히 사탄의 권세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너는 육체의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그 육체는 너에게 속한 것이더냐? 육체가 너에게 지배당하고 있더냐? 굳이 육을 위해 모든 마음을 쏟아부을 필요가 있겠느냐? 이미 오래전에 정죄받고, 저주받고, 더러운 귀신에게 더럽혀지고, 냄새가 나도록 썩어 버린 너의 육을 위해 애타게 하나님께 간청할 필요가 있겠느냐? 사탄의 패거리를 늘 가슴에 두고 있을 필요가 있겠느냐? 육 때문에 너의 진정한 앞날과 아름다운 소망, 인생의 진정한 종착지를 망치게 될까 봐 걱정되지 않느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람을 경영하는 근본 취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14)

너희가 지금 깨달은 것은 온전케 되지 않은 역대의 그 누구보다 높다. 시련에 대한 인식이든 또는 믿음에 대한 인식이든 하나님을 믿는 그 누구보다 높다. 너희가 깨달은 것은 모두 환경의 시련을 겪기 전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희의 실제 분량과는 전혀 부합되지 않으며 모든 깨달음이 실천에 앞선다. 너희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복을 바라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기만을 원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너희가 삶에서 보여 주는 행동은 그것과는 거리가 너무 멀고 불순물도 너무 많다. 많은 이가 평안과 이익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 이익이 없으면 믿지 않고 은혜를 받지 못하면 입을 비쭉거리니, 너의 말이 어찌 너의 실제 분량을 대표하겠느냐? 아이의 질병, 가족의 입원, 농작물의 수확 감소, 가족의 핍박 등 평소에 벌어지는 피할 수 없는 가정의 변고, 즉 일상생활 속에서 흔히 일어나는 이러한 일들을 너는 감당하지 못한다. 이런 일이 생기면 너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대부분 하나님을 원망하곤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모두 너를 속였다고, 하나님의 역사가 너를 조롱했다고 원망한다. 너희 모두가 이런 마음을 갖고 있지 않느냐? 이런 일들이 너희 가운데서 드물게 발생한다고 생각하느냐? 너희는 온종일 이런 일들에 빠져 살면서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제대로 믿을 수 있을지, 또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수 있을지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너희의 실제 분량은 너무나 작아서 그야말로 병아리만큼도 되지 않는다. 사업이 손해를 봐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어떤 상황이 닥쳤을 때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 같아도 원망하고, 심지어 집에 있는 병아리가 죽거나 외양간의 소가 병들어도 원망하고, 아들이 장가를 가는데 집에 돈이 없어도 원망한다. 접대하며 본분을 이행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도 원망한다. 너의 뱃속은 원망으로 가득 차 있어 때로는 그것 때문에 예배를 드리지도,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지도 않으며, 기약 없이 부정적인 상태로 지낸다. 지금 임한 이런 일들은 너의 미래나 운명과 아무 관련이 없으며,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일어났을 일들이다. 그러나 너는 이 일들의 책임을 모두 하나님께 돌리고는 하나님이 너를 도태시켰다고 우긴다. 너의 믿음은 도대체 어떤 것이냐? 정말로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느냐? 오늘날 나를 따르는 너희에게 욥과 같은 시련을 준다면 단 한 명도 굳게 서지 못하고 다 넘어질 것이다. 너희와 욥의 차이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이다. 오늘날 내가 너희의 재산 중 반을 빼앗는다면 너희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할 것이다. 내가 너희의 자녀를 거둬 간다면 길거리에 주저앉아 큰 소리로 욕할 것이고, 얼마 안 되는 네 생계의 길을 막아 버리면 하나님과 결판을 내려고 할 것이다. 애초에 왜 그렇게 많은 말로 엄포를 놓았느냐며 너희는 무슨 일이든 저지를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 너희는 참된 깨달음이 없고, 참된 분량 또한 전혀 없다. 그러므로 너희가 받는 시련이 큰 것이다. 아는 것은 지나치게 많은데 진정한 깨달음은 너희가 알고 있는 것의 천 분의 일도 안 되기 때문이다. 너희는 깨닫고 이해하는 것에만 국한되지 말고, 자신이 얼마나 참되게 실행할 수 있는지, 자신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은 것이 얼마나 되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실행으로 자신의 의지를 실현했는지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너는 자신의 분량과 실행을 참답게 대해야지, 하나님을 믿는 일에서 어물쩍 넘어가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네가 진리와 생명을 얻을 수 있을지 여부는 결국 너 자신의 추구에 달려 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실행 3>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15)

또 어떤 사람들은 외관을 번지르르하게 꾸민다. 자매들은 ‘한 송이 꽃’처럼 치장하고, 형제들은 귀공자나 부잣집 도련님처럼 멋을 내며 먹고 입는 등의 겉면의 것에 치중한다. 그러나 내적 세계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을 정도로 궁핍하기 그지없다. 이러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또 어떤 사람들은 밥 빌어먹는 거지들처럼 입고 다니는데, 그런 자들을 보면 딱 동아시아의 노예 상(相)이다! 너희는 정녕 너희에 대한 내 요구를 모르는 것이냐? 너희가 대체 무엇을 얻었는지 서로 교제하고 나누어 보아라! 그렇게 오랜 세월 하나님을 믿고도 너희가 얻은 수확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 낯부끄럽지도 않으냐? 수치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 참도에서 몇 년이나 추구했음에도 너희의 분량은 여전히 이토록 보잘것없다! 너희 가운데 있는 잘난 아씨들을 보아라. 하나같이 꽃처럼 치장하고는 서로 비교하고 있다. 대체 무엇을 비교한단 말이냐? 누가 더 잘 누리고 있는지, 누가 더 많이 얻어 냈는지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냐? 너희는 내가 ‘모델’이라도 모집하러 온 줄 아느냐? 수치심도 없구나! 너희의 생명은 어디에 있느냐? 너희가 추구하는 것은 모두 너희의 그 지나친 욕심이 아니더냐? 너희는 너희 스스로가 더없이 아름답다고 여긴다. 그러나 제아무리 아름답게 치장할지라도 너는 분토 속에서 굴러다니는 구더기가 아니냐? 오늘날 너희가 하늘의 복을 누리게 된 것은 내가 너희를 전례 없이 높여 주었기 때문이지, 너희의 그 ‘잘난 얼굴’ 때문이 아니다. 네 출신을 아직도 모르느냐? 생명에 대해 말하면 너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한 마디도 못하면서 앉아서 치장이나 하고, 얼굴에 분칠할 생각이 드느냐? 또 너희 가운데 있는 한량들을 보아라. 온종일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돼먹지 못하게 행동하면서도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전혀 단정치 않다. 거기에 사람의 모양이 있느냐? 남녀를 막론하고, 너희 각자가 늘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 너희가 누구 덕에 밥을 먹고 있는지 모르느냐? 네가 입고 있는 옷과 네 손에 들린 수확물, 그리고 너의 그 배를 만져 보아라. 이렇게 오랜 세월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 심혈의 대가로 얻은 결실은 무엇이냐? 그런데도 여기저기 놀러나 다니고 냄새 나는 몸뚱이를 꾸밀 생각이 드느냐? 거기에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이냐! 정상인이 되라고 했거늘, 지금의 너는 정상은 고사하고 오히려 비정상적이다. 그런 주제에 무슨 낯짝으로 내 앞에 서는 것이냐? 자신의 자태를 뽐내고 육체를 드러내며, 늘 육체의 정욕 속에서 살고 있는 그런 인성을 보면 네가 바로 더러운 귀신과 악령의 후예가 아니냐? 나는 이런 더러운 귀신을 오래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네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가 모를 거라고 착각하지 말라. 네가 정욕과 육체를 방종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네가 마음으로 무엇을 생각하는지, 네 눈이 무엇을 탐내고 있는지, 내가 모를 것 같으냐? 너희 아씨들이 꽃처럼 단장하는 이유는 자신의 육체를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냐? 남자들이 너희에게 무슨 유익이 되느냐? 그들이 진정 너희를 이 고해에서 벗어나도록 구원해 줄 수 있겠느냐? 또한, 너희 한량들이 번지르르하게 멋을 내는 것은 전부 자신의 ‘멋들어진 용모’를 뽐내기 위해서가 아니냐? 그것은 또 누구를 위함이냐? 여인들이 너희에게 무슨 유익이 되느냐? 너희를 죄짓게 하는 근원이 아니더냐? 나는 너희 모든 남녀 족속들에게 적지 않은 말을 했지만, 너희가 듣고 따른 것은 극히 적다. 너희는 귀가 먹었고, 눈이 흐려졌으며, 마음은 강퍅하고, 나아가 온몸은 정욕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 속에서 빠져나오질 못하는구나. 오물 속에서 굴러다니는 너희 구더기들에게 누가 다가가고 싶겠느냐? 명심해라. 너희는 내가 분토 속에서 들어 올린 존재로, 원래 정상 인성이 없었다. 내가 너희에게 요구한 것은 정욕을 과시하라는 것도, 마귀에게 오랜 세월 조련된 그 냄새 나는 육체를 방종하라는 것도 아니라 너희가 원래 갖추지 못한 ‘정상 인성’을 갖추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치장하는데, 더 깊이 빠질까 두렵지 않으냐? 너희는 본디 죄에 속한 자들이다. 그것을 모른단 말이냐? 너희의 온몸은 정욕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도 모른단 말이냐? 나아가 그 정욕이 너희의 옷을 적시며 스며 나와 추악하기 이를 데 없는 귀신의 몰골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너희 스스로가 누구보다 잘 알 것이 아니냐? 너희의 마음, 너희의 눈, 너희의 입술은 모두 더러운 귀신에게 더럽혀지지 않았느냐? 전부 불결한 것이 아니냐? 너는 일만 저지르지 않으면 자신이 누구보다 성결한 존재라고 생각하느냐? 겉으로 화려한 옷을 차려입으면 너희의 그 더러운 영혼을 가릴 수 있다고 여기느냐? 어림없다! 거짓을 꾸며 낼 생각도, 자신의 용모를 뽐낼 생각도 하지 말고 현실을 직시해라. 너희는 서로 정욕을 드러내지만, 그 대가로 얻는 것은 영원한 고통과 무정한 채찍질이다! 그런데 서로 추파를 던지며 연애질을 할 필요가 있겠느냐? 그것이 너희의 올곧음이냐? 그것이 너희의 강직이며 절개더냐? 나는 너희들 중 술객 따위들과 자신의 육체를 사랑하는 젊은 남녀들을 혐오한다. 그러니 가능한 한 인내심을 발휘하는 게 좋을 것이다. 지금 너희에게 정상 인성을 갖추라고 요구하는 것이지, 자신의 정욕을 드러내라고 허락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너희는 틈만 나면 언제든 기회를 이용하려 하는데, 그것은 너희에게 육적인 것이 너무 많고, 정욕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실행 7>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16)

현재 너희가 가지고 있는 것에 따라 너희가 추구하는 것에 성과가 있는지를 가늠하고, 그것으로 너희의 결말을 정할 것이다. 즉, 너희가 치른 대가와 너희가 행한 것들을 통해 너희의 결말을 드러낸다는 말이다. 나는 너희가 추구하는 것과 너희의 믿음, 너희가 행한 것으로 너희의 결말을 드러낼 수 있다. 너희들 중 수많은 사람이 이미 구제 불능 상태이다. 이제 사람의 결말을 드러낼 때가 되었으므로 나는 어리석게 일을 하지 않을 것이며, 전혀 구제할 방법이 없는 사람을 다음 시대로 인도하지도 않을 것이다. 사역도 결국엔 끝이 있는 법이다. 나는 전혀 구제할 방법이 없는, 썩어 빠져 영이 없는 시체에게 역사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사람을 구원하는 마지막 때이니 그렇게 불필요한 사역은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원망이나 불평을 해서는 안 된다. 세상의 마지막 날이 다가오고 있으며, 이는 필연적인 흐름이다. 일이 이미 오늘날에 이르렀으니, 사람이 막을 수도 없고, 바꾸고 싶다고 바꿔 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제, 너는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 대가를 치르지 않았고, 충성을 다하지도 않았다. 오늘은 이미 때가 도래했으니 너를 구제할 방법이 없다. 내일이 되면 너는 내쳐질 것이고, 그러면 구원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설령 내 마음이 약해져 온 힘을 다해 너를 구원한다고 할지라도 너 스스로가 자신을 위해 노력하지도, 생각하지도 않는데 내가 뭘 어쩔 수 있단 말이냐? 늘 자신의 육체를 위해 계산하고 편안함을 즐기는 자, 반신반의하는 자, 더러운 주술과 사술(邪術)을 부리는 자, 행음하고 추하기 그지없는 자, 여호와의 제물을 훔쳐 먹고 여호와의 재물을 도둑질하는 자, 뇌물을 좋아하는 자, 천국에 가기를 꿈꾸는 자, 거만하고 건방지며 자신의 명리를 위해 싸우는 자, 망령된 말을 퍼뜨리는 자, 하나님 자신을 모독하는 자, 늘 하나님 자신을 논단하고 비방하는 자, 패거리를 짓고 독립을 꾀하는 자,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높이는 자, 음란한 짓거리에 빠진 경박한 젊은 남녀와 중·노년 남녀, 사람들 가운데서 개인의 명리와 지위를 탐하는 남자와 여자들, 죄악에 빠져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모든 자들이 다 구제 불능 아니겠느냐? 음란과 죄악, 주술, 사술, 모독의 말, 망령된 말이 너희들 가운데서 성행하고, 진리와 생명의 말씀은 너희들 가운데서 짓밟혔으며, 거룩한 말씀은 너희들 가운데서 더럽혀졌다. 더러움과 패역으로 가득한 이방의 족속들아! 너희의 결말이 어떨 것 같으냐? 육체를 탐닉하고, 육적인 사술을 부리며, 음란한 죄 가운데 빠진 자들이 무슨 낯짝으로 살아간단 말이냐? 너희들이 이미 구제 불능의 구더기임을 모른단 말이냐? 너희가 무슨 자격으로 이런저런 요구를 한단 말이냐?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오직 육체만 탐닉하는 자들은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구원하겠느냐? 생명의 도를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높이거나 증거하지 않으며, 자신의 지위를 도모하고 스스로를 높이는 자들은 지금도 여전히 그대로가 아니더냐? 그들을 구원할 가치가 있겠느냐?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얼마나 관록이 있는지, 얼마나 오래 사역했는지에 달린 것이 아니며, 경험이 얼마나 풍부한지에 달린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너의 추구에 결실이 있는지에 달렸다. 구원받는 사람은 꽃이 흐드러지고 이파리가 무성하더라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가 아니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나무’임을 너는 알아야 한다. 네가 오랜 세월 거리를 떠돌아다녔다 한들 그게 어쨌단 말이냐? 너의 증거는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을 경외하는 네 마음은 너 자신을 사랑하고 정욕을 탐하는 마음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인간 말종이 아니겠느냐? 그런 자가 어떻게 구원받는 표본이나 모델이 될 수 있겠느냐? 너의 본성은 바뀌기 힘들고, 너의 패역은 너무나 많아 구제할 방도가 없다! 이런 사람이 바로 도태될 대상이 아니냐? 나의 사역이 끝날 때가 바로 너의 마지막 날이 임할 때가 아니겠느냐? 나는 너희 가운데서 수많은 사역과 말을 했다. 너희는 그중 얼마나 귀담아들었느냐? 얼마나 순종했느냐? 내 사역이 끝날 때가 바로 나에 대한 너의 대적과 대립이 끝나는 시점이다. 내가 사역하는 동안 너희는 늘 내게 반기를 들었고, 한 번도 내 말대로 하지 않았다. 나는 내 사역을 하고 너는 자신의 ‘사역’을 하며, 자신만의 작은 왕국을 세웠다. 짐승 같은 너희들은 극력 내게 맞서 왔다! 언제나 너만을 사랑하는 사람을 품으로 끌어들이려 하는데, 너희의 경외심은 어디로 간 것이냐? 속임수뿐이구나! 기만과 모독뿐, 순종과 경외는 찾아볼 수도 없다! 그런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느냐? 음란한 것을 좋아하는 호색한들은 늘 요염한 음녀들을 품으로 끌어와 ‘누리려’ 한다. 나는 그런 음란한 귀신들을 절대로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희처럼 더러운 귀신들을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한다. 너희의 ‘색정’과 너희의 ‘요염’이 너희를 지옥에 떨어뜨릴 텐데, 또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더러운 귀신, 악령 같은 너희는 한없이 가증스럽다! 보기만 해도 역겹구나! 그런 천한 것들이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죄 가운데 빠져 있으면서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오늘날 이러한 진리와 길, 생명은 너희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고, 오히려 그 죄악과 재물, 지위, 명리, 육체의 쾌락, 남자의 용모, 여자의 요염함이 너희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너희가 무슨 자격으로 내 나라에 들어오겠단 말이냐? 너희의 형상은 하나님보다 크고, 너희의 지위는 하나님보다 높다. 사람들 가운데서의 위세와 명망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너희는 사람들이 숭배하는 우상이 되었다. 그러니 너희가 천사장이 된 것이 아니겠느냐? 사람의 결말을 드러낼 때가 되면, 즉 구원 사역이 막바지에 이르면, 반드시 너희 중 수많은 사람이 도태될 것이다. 그들은 구원받을 수 없는 시체들이기 때문이다. 구원 사역 기간에는 모든 사람에게 자비와 온화한 얼굴을 보여 주겠지만, 사역이 끝나고 각 부류 사람들의 결말이 모두 드러나면 더 이상 그런 모습은 없을 것이다. 사람의 결말이 전부 드러나고, 모두가 각기 부류대로 나뉠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의 시대가 지나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므로 그때는 더 이상 구원 사역을 하는 게 의미가 없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실행 7>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17)

사람은 계속 흑암 권세의 그늘에 살고 있다. 사탄의 권세에 얽매여 자유를 얻지 못하고 있으며, 사탄에게 가공된 성품은 점점 더 패괴되고 있다. 사람은 늘 사탄의 패괴 성품 안에서 살아가며,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독선적이고, 우쭐거리고, 교만하고, 자만하는 등 사탄에게 속하는 모든 성품을 반드시 벗어 버려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의 사랑은 전부 불순물이 섞인 사랑이자 사탄의 사랑이기에 절대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다. 성령에게 직접 온전케 되고 책망받고 깨지고 훈계와 징계, 채찍질, 연단을 받지 않고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일 네 어떤 성품이 하나님을 대변할 수 있으니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면, 너는 교만한 말을 하는 사람이요, 그릇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바로 천사장이다! 사람의 천성은 하나님을 직접 대변할 수 없다. 반드시 하나님께 온전케 되어 천성을 벗어 버린 후,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만족게 하며 나아가 성령의 역사를 거쳐야 사람이 살아 내는 것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 육으로 사는 자 중에 하나님을 직접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성령께 쓰임 받는 사람은 예외가 될 수 있겠지만, 그런 사람일지라도 그의 성품과 살아 내는 모습이 완전히 하나님을 대변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가 살아 내는 것이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고만 할 수 있을 뿐, 그 사람의 성품 또한 하나님을 대변할 수는 없다.

사람의 성품은 의심의 여지 없이 모두 하나님이 정한 것이므로 긍정적인 사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성품은 또 사탄의 가공을 거쳤다. 그래서 사람의 모든 성품이 다 사탄의 성품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말한 대로 행하는 하나님의 성품처럼 자신에게도 그런 모습, 그런 성격이 있다며, 자신의 그런 성품이 하나님을 대변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어떤 사람이냐? 사탄의 패괴 성품이 하나님을 대변할 수 있겠느냐? 자신의 성품이 하나님을 대변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이며, 성령을 모욕하는 자이다! 성령이 역사하는 방식으로 보면, 하나님이 땅에서 하는 사역은 그저 정복 사역일 뿐이다. 그렇기에 사람이 지닌 사탄의 수많은 패괴 성품이 아직 정결케 되지 않은 것이다. 또한 그렇기에 사람은 여전히 사탄의 형상, 즉 자신들이 좋다고 여기고 육적인 행위를 대표하는 것들을 살아 내는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사탄을 대변하는 것일 뿐, 결코 하나님을 대변할 수 없다. 설령 누군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땅에서도 하늘에 있는 것과 같은 삶을 누리고, “하나님, 저는 아무리 당신을 사랑해도 부족하기만 합니다.”라는 말도 할 수 있으며, 또한 그 정도가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그가 하나님을 살아 내고 하나님을 대변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람과 하나님은 본질이 다르기에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을 살아 낼 수 없고 하나님이 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성령의 지배 속에서 살아 내는 것 또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 따른 것일 뿐이다.

사탄의 모든 행위는 사람에게서 나타난다. 지금 사람의 모든 행위는 다 사탄의 발현이므로 하나님을 대변할 수 없다. 사람이 바로 사탄의 화신이므로 사람의 성품은 하나님의 성품을 대표할 수 없다. 성격이 좋은 사람이 있어 하나님이 그의 성격을 통해 일을 한다면, 그 사람은 성령의 지배를 받아 일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성품이 하나님을 대변할 수는 없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행한 것은 상황에 맞게 사용하고, 도구로 쓴 것뿐이다. 역대 선지자든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이든 하나님을 직접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모두 환경의 압박으로 인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일 뿐, 자발적으로 노력하며 협력하지 않는다. 긍정적인 사물이란 무엇이냐? 하나님에게서 직접 온 것은 다 긍정적인 사물이다. 하지만 사람의 성품은 모두 사탄의 가공을 거쳤으므로 하나님을 대변할 수 없다. 오직 성육신 하나님의 사랑과 고난받는 의지, 공의, 순종 그리고 낮춤과 감춤만이 하나님을 직접 대변한다. 이것은 그가 죄짓는 본성을 지니지 않고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사탄의 가공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는 단지 죄 있는 몸의 형상만 지녔을 뿐, 결코 죄를 대변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의 모든 행사, 일언일행, 나아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역을 이루기 전까지(십자가에 못 박히는 때 포함) 모든 것이 직접 하나님을 대변한다. 예수의 예로 증명된 것이 있다. 바로 죄짓는 본성을 지닌 존재는 모두 하나님을 대변할 수 없으며, 사람의 ‘죄’의 일면은 사탄을 대변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죄는 하나님을 대변할 수 없으며 하나님에게는 결코 죄가 없다. 사람에게 행해지는 성령의 역사 부분도 성령의 지배라고 할 수 있을 뿐, 하나님을 대표해 사역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을 놓고 말했을 때, 사람의 죄와 성품은 하나님을 대변하지 않는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성령이 사람에게 행한 역사를 보면, 성령이 사람에게 역사했기에 사람이 진리를 살아 낼 수 있었다. 성령의 책망과 징계를 받은 뒤에 진리를 살아 낼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말하자면 성령이 역사한 요소만 있고 사람이 협력한 요소는 없다는 것이다. 이 점을 분명히 깨달았느냐? 그렇다면 성령이 역사할 때, 너는 어떻게 전력으로 협력하며 너의 본분을 이행해야 하겠느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패괴된 사람은 하나님을 대표할 수 없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18)

네가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것에서 너의 사람됨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은 실제로부터 출발하고 현실을 마주해야지 허무맹랑한 것들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사람으로서의 가치는 말할 것도 없고 인생의 의미까지 없어진다. 너의 추구와 인생은 그저 허망함과 기만 속에서 덧없이 흘러갈 뿐이고, 네가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들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너는 진리와 무관한 그릇된 이치밖에 얻지 못한다. 그런 것들은 너를 공허한 상태에 빠지게 할 뿐, 네가 생존하는 의미나 가치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 이렇게 되면 너의 일생은 그 어떤 가치도 의미도 없게 될 것이다.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너는 한평생을 헛되이 보내게 될 텐데, 그런 삶을 어떻게 ‘인생’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런 사람은 말 그대로 짐승이 아니냐? 이와 마찬가지로,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 길을 가려고 하지만, 보이는 하나님은 추구하지 않고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만 숭배한다면, 이것은 더욱 헛된 추구가 아니냐? 네가 추구하는 바는 결국 잿더미로 변할 텐데, 그런 추구가 너에게 또 무슨 이로움이 있겠느냐? 사람의 가장 큰 어려움은 바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들만 사랑한다는 점이다. 그런 것은 신묘하기 그지없고, 상상하기도 어려우며, 평범한 사람이 결코 닿을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 비현실적인 것일수록 사람은 더 분석하며, 만사를 제쳐 두고 추구하면서 그것을 얻으려는 망상까지 한다. 또한, 그런 비현실적인 것일수록 사람은 더 자세히 생각하고 분석하며, 심지어 치밀하게 구상하기까지 한다. 이와 반대로, 현실적인 것일수록 사람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여기면서 그것을 전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심지어 멸시하는 태도를 보이기까지 한다. 오늘날 행하는 나의 현실적인 사역에 대한 너희의 태도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니냐? 이렇게 현실적인 것일수록 너희는 더 경시하고, 그것을 알아볼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으며, 아예 거들떠보려 하지도 않는다. 너희는 기준이 낮은 이런 현실적 요구를 전혀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 심지어 가장 실제적인 하나님에 대해서도 관념에 사로잡혀 그의 실제와 정상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렇다면 너희의 믿음은 모두 막연한 것이 아니냐? 너희는 이전의 막연한 하나님은 그토록 굳게 믿었으면서도 오늘날의 실제 하나님에게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것은 어제의 하나님과 오늘의 하나님이 다른 시대의 하나님이기 때문이 아니냐? 어제의 하나님은 위대한 하늘의 하나님이고, 오늘의 하나님은 보잘것없어 보이는 땅의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냐? 사람이 숭배하는 하나님은 관념 속에서 탄생한 하나님이고, 오늘의 하나님은 땅에서 탄생한 실제적인 육신이기 때문이 아니냐? 결국, 오늘날의 하나님이 너무 현실적이어서 사람이 추구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 오늘날의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공교롭게도 사람이 가장 하기 싫어하고 또 난감해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난처하게 하고, 또 일부러 자신들의 허물만을 들춰내는 것이 아니냐고 한다. 그래서 현실을 추구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 성육신 하나님의 원수, 즉 적그리스도가 되었다. 이는 명백한 사실이 아니냐? 이전에 하나님이 성육신하지 않았을 때, 너는 단지 종교인이거나 경건한 신자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육신한 후, 경건했던 많은 신자들이 자신도 모르는 새에 적그리스도가 되었다. 어찌 된 일인지 그 원인을 아느냐? 너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현실을 중요시하지 않았고, 진리도 추구하지 않았으며, 공허한 것에만 매달렸다. 이것이 바로 네가 성육신 하나님의 원수가 된 가장 뚜렷한 원인이 아니냐? 성육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라 일컫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성육신을 믿지 않는 자는 바로 적그리스도가 아니냐? 네가 믿고 사랑하는 분이 정말 육신에 거하는 이 하나님이 맞느냐? 현실을 가장 중요시하고 ‘유달리’ 정상적이며 생생하게 살아 계신 이 하나님이 맞느냐? 네가 추구하는 목표는 도대체 무엇이냐? 하늘이냐, 아니면 땅이냐? 관념이냐, 아니면 진리냐? 하나님이냐, 아니면 신선이냐? 사실, 진리는 가장 실제적인 것이고 인류의 최고 인생 격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자 하나님 자신이 직접 행한 사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생 격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격언은 종합해 낸 것도 아니고 위인의 명언도 아니라 천지 만물의 주재자가 인류에게 발한 음성이다. 또한 사람이 이것저것 종합해서 생긴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유한 생명이다. 그러므로 ‘최고의 인생 격언’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진리 실행을 추구하는 것은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 ‘요구’의 본질은 가장 현실적인 진리이지, 그 누구도 이를 수 없는 공허한 이치가 아니다. 네가 추구하는 것에 이치만 넘쳐 나고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면, 너는 진리를 거역하는 사람이 아니냐? 이런 자는 진리를 반대하며 공격하는 사람이 아니냐? 이런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일 수 있겠느냐? 실제가 없는 이 사람들은 모두 진리를 배반한 자이자 패역한 천성을 가진 자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흡족게 할 수 있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19)

너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상을 받고 하나님의 눈에 들기를 원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소원이다. 사람은 항상 높은 것을 추구하는 존재이므로 그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뒤처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 중 많은 이들이 시종일관 하늘의 하나님에게 잘 보이려 한다. 하지만 사실 하나님에 대한 너희의 충성심과 진심은 너희 자신에 대한 충성심과 진심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나는 하나님에 대한 너희의 충성심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며, 너희 마음에 있는 그 하나님의 존재를 더더욱 부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너희가 경배하는 하나님, 너희가 앙모하는 막연한 하나님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내가 이렇게 단언하는 이유는, 너희가 진정한 하나님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졌기 때문이다. 너희가 이런 충성심을 지닌 이유는 너희 마음속에 또 다른 우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가 보기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나, 하나님은 말로만 인정할 뿐이다. 너희가 하나님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졌다는 말은 진정한 하나님과의 거리는 한없이 멀고, 막연한 하나님과는 눈앞에 있는 듯 가깝다는 의미이다. ‘크지 않다’라 함은 오늘날 너희가 믿는 이 하나님이 별 대단한 ‘능력’도 없는 사람, 그리 위대하지 않은 사람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작지 않다’라 함은 이 사람이 비바람을 불러오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의 영을 불러 경천동지할 사역을 해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너희가 땅 위의 그리스도에게 충실히 복종하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 너희는 그를 믿지도, 사랑하지도 않는다. 바꿔 말해, 너희가 진정으로 믿는 존재는 너희 마음속에 있는 그 막연한 하나님이요, 너희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존재는 너희가 밤낮으로 그리면서도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 하나님이다. 이 그리스도에 대한 너희의 믿음은 미미하기 짝이 없고, 그에 대한 너희의 사랑은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믿음이란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을 의미하며, 사랑이란 마음속으로 연모하고 앙망하면서 영원히 헤어지지 않음을 뜻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그리스도에 대한 너희의 믿음과 사랑은 이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믿음에 대해 말하면 너희는 어떻게 그를 믿고 있느냐? 사랑에 대해 말하면 너희는 또 어떻게 그를 사랑하고 있느냐? 너희는 그의 성품을 전혀 알지 못하고 그의 본질은 더더욱 모르는데, 그러면 어떻게 그를 믿은 것이냐? 너희가 그를 믿는 실제는 어디에 있느냐? 너희는 어떻게 그를 사랑한 것이냐? 너희가 그를 사랑하는 실제는 어디에 있느냐?

많은 사람들이 망설임 없이 오늘날까지 나를 따라왔다. 그 몇 년의 시간 동안 너희도 적지 않은 ‘피로’의 고난을 받았을 것이다. 나는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의 천성과 취향에 대해 더없이 정확하게 알고 있다. 너희와 일일이 상대하는 것은 몹시도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안타까운 점은, 나는 너희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너희는 정작 나에 대해 조금도 아는 게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가 순간의 어리석음으로 어떤 이의 꾐에 빠졌다는 말을 듣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확실히, 너희는 나의 성품을 모르고, 나의 마음은 더더욱 읽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나에 대한 너희의 오해는 설상가상으로 커지고 있고, 너희의 믿음은 여전히 어리석기만 하다. 너희는 나를 믿는다기보다는 나에게 잘 보이려 하고 아첨을 한다는 게 낫겠다. 너희의 목적은 아주 단순하다. 누구든 자신에게 상을 주는 사람을 따르고, 큰 재앙에서 벗어나도록 해 주는 사람을 믿을 뿐, 그가 하나님이건 아니건, 어떤 하나님이건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 이런 사람이 매우 많으며, 이런 상태 또한 아주 심하다. 어느 날, 너희 중 그리스도의 본질을 분명히 알고 그를 믿는 자가 몇이나 될지 테스트해 본다면, 아마 내 기대에 부합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다들 다음과 같은 질문을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 너희가 믿는 하나님이 나와는 거리가 매우 먼데, 그러면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 본질은 무엇이냐? 너희가 하나님이라 이르는 그 하나님을 믿으면 믿을수록 너희는 나와 점점 더 멀어지는데, 이 문제의 본질은 또 무엇이냐? 너희는 이런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너희의 그런 믿음의 결과는 어떨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땅의 하나님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20)

나는 타인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을 마음에 들어 하고, 기꺼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을 매우 좋아한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특별히 보살피는데, 내 눈에는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정직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네가 매우 간사한 사람이라면 너는 모든 일과 모든 사람을 경계하고 추측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에 대한 너의 믿음 역시 의심의 토대 위에 세워졌을 것이다. 이러한 믿음을 나는 영원히 인정할 수 없다. 참된 믿음이 없다면 참된 사랑은 더욱 논할 것도 못 된다. 네가 하나님에 대해서도 의심하고 제멋대로 추측하기까지 한다면, 너는 틀림없이 누구보다 간사한 사람일 것이다. 너는 ‘하나님도 사람처럼 죄 사함을 못 받지는 않을까, 사람처럼 속이 좁지는 않을까, 사람처럼 불공평하고 불합리하지 않을까, 사람처럼 정의감이 없지 않을까, 사람처럼 수단이 악랄하고, 음험하고 간교하지 않을까, 사람처럼 사악함과 흑암을 좋아하지는 않을까….’라고 의심을 한다.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기 때문이 아니냐? 그러한 믿음은 그야말로 죄업을 쌓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이는 내가 비위를 잘 맞추고 아첨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그들처럼 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집에서 환대를 받지도, 발을 붙이지도 못할 것이라고 여긴다. 이것이 바로 오랜 기간 동안 너희가 얻은 인식이더냐? 이것이 바로 너희가 얻은 수확이더냐? 너희가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이런 오해에 그치지 않는다. 더 많은 경우는 하나님의 영을 모독하고 하늘을 능멸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너희의 그런 믿음이 너희가 내게서 더욱 멀어지게 만들고, 너희가 나를 더욱 적대하게 만들 뿐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러 해 동안의 사역을 통해 너희도 수많은 진리를 보고 접했다. 그러나 내 귀에 들리는 것들이 전부 무엇인지 너희는 알고 있느냐? 너희 중 기꺼이 진리를 받아들이려는 자가 몇이나 되느냐? 너희는 하나같이 자신이 진리를 위해 기꺼이 대가를 치를 의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진리를 위해 고난받은 자가 몇이나 되느냐? 너희의 마음에 있는 것이라고는 불의뿐이다. 그래서 너희는 누구나 다 똑같이 간사하고 교활하다고 생각하며, 심지어는 하나님이 입은 육신까지도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선한 마음과 인자한 사랑이 없다고 여긴다. 나아가 고상한 품성이나 인자하고 자비로운 본성은 오직 하늘의 하나님에게만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런 성인(聖人)은 존재하지 않고, 이 세상은 어둠과 사악이 권력을 잡고 있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아름다운 소망의 정신적 존재이자 사람이 만들어 낸 전설 속 인물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너희 마음속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매우 정직하고 공의로우며, 또한 너무도 위대하여 경배하고 앙망할 가치가 있는 분이지만, 땅에 있는 이 하나님은 그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대역이자 도구일 뿐이다. 너희는 이 하나님이 하늘의 하나님과 절대 동등한 분이 될 수 없으며, 같은 선상에서 논하는 것은 더더욱 안 될 일이라고 여긴다. 하나님의 위대함과 존귀함을 얘기할 때면 그것은 전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이고, 사람의 본성과 패괴에 대해 논할 때면 땅에 있는 이 하나님도 거기에 해당한다고 여긴다. 하늘의 하나님은 영원히 위대한 반면, 땅의 하나님은 영원히 하찮고 연약하며 무능한 존재라는 것이다. 하늘의 하나님은 사사로운 감정 없이 언제나 공의로운 반면, 땅의 하나님은 전혀 공평하거나 합리적이지 않고 사사로운 마음뿐이라는 것이다. 하늘의 하나님은 전혀 교활하지 않고 영원히 신실한 반면, 땅의 하나님은 정직하지 못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하늘의 하나님은 사람을 지극히 아끼는 데 반해 땅의 하나님은 사람에 대한 보살핌이 부족하고, 심지어는 상관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그릇된 인식은 너희 마음에 이미 오랫동안 자리해 왔으며, 너희는 앞으로도 이 잘못된 인식을 유지할지도 모른다. 너희는 불의한 자의 입장에서 그리스도가 하는 모든 일을 바라본다. 또한 악인의 위치에서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 그의 신분과 본질을 평가한다. 너희는 크나큰 잘못을 저질렀고, 이전 사람들이 하지 않은 일을 하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너희가 지금껏 면류관을 쓴 하늘의 위대한 하나님만을 섬기고, 보잘것없어 눈에 띄지 않는 이 하나님은 ‘시중’조차 든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너희의 죄행이 아니겠느냐?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른 전형적인 사례가 아니겠느냐? 너희는 하늘의 하나님을 매우 숭배하고, 위대한 형상을 아주 숭상하며, 비범한 말재주를 가진 사람을 무척 존경한다. 너희 두 손에 재물을 가득 채워 주는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고, 무엇이든 너희 뜻에 딱 맞는 하나님을 그리워한다. 네가 유일하게 숭배하지 않는 대상은 바로 이 위대하지 않은 하나님이며, 유일하게 싫어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사람들도 높이 보지 않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며, 유일하게 원치 않는 것은 이렇게 지금껏 너에게 한 푼도 주지 않은 하나님을 위해 힘쓰는 것이다. 또한, 네가 그리워할 수 없는 대상은 바로 이 사랑스럽지 않은 하나님이다. 이런 하나님은 너의 시야를 넓혀 주지도, 너에게 보물을 얻은 것 같은 기쁨을 주지도 못하며, 네가 원하는 것을 이뤄 주지도 못한다. 그런데 너는 왜 그를 따르느냐? 너는 이런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너의 행위는 이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일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하늘의 하나님께도 죄를 짓는 것이다. 내 생각엔 이것이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 목적은 아닐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땅의 하나님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21)

너희는 몹시 하나님의 기쁨을 사고 싶어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 이것은 어찌 된 일이냐? 너희는 그의 말씀만 받아들일 뿐, 그의 책망과 훈계는 받아들이지 않으며, 더욱이 그의 모든 안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를 완전히 믿지도 못한다. 이것은 또 어찌 된 일이냐? 결국 너희의 믿음은 영원히 병아리가 나올 수 없는, 속이 텅 빈 달걀과 같다. 너희의 믿음이 너희에게 가져다준 것은 진리와 생명이 아니라 뜬구름과도 같은 기대와 희망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 목적은 바로 그 기대와 희망을 위한 것이지 진리와 생명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 과정이 그저 부끄러움도 모른 채 비굴하게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만 하는 것으로, 아예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한 믿음에서 어떻게 병아리가 나오겠느냐? 다시 말해, 그러한 믿음이 어떻게 결실을 맺겠느냐?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 목적은 하나님을 이용해 너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다. 그것은 더더욱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는 일이 아니겠느냐? 너희는 하늘의 하나님의 존재는 믿으면서 땅의 하나님의 존재는 부정한다. 하지만 나는 너희의 그런 관점을 인정할 수 없다. 나는 착실하게 땅의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만을 인정하며, 땅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자는 인정한 적이 없다. 그런 자들은 아무리 하늘의 하나님께 충성한다 해도 결국에는 악한 자를 징벌하는 내 손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바로 악한 자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자, 한 번도 그리스도에게 기꺼이 순종한 적이 없는 악한 자들이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부정하는 사람들 또한 당연히 그 안에 포함된다. 너는 하늘의 하나님께 충성하기만 하면 그리스도에게는 제멋대로 해도 되는 줄 아느냐? 틀렸다! 네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것은 하늘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네가 아무리 하늘의 하나님께 충성해도 그것은 전부 공허한 외침이며 거짓일 뿐이다. 땅의 하나님은 사람이 진리를 얻고 더 깊은 인식을 얻는 데에 유리할 뿐만 아니라, 사람을 정죄하고 그 뒤에 사실을 파악하여 악한 자를 징벌하는 데에도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해관계를 너는 알아들었느냐? 체험했느냐? 나는 너희가 하루빨리 다음과 같은 진리를 깨닫기만을 바란다. 즉, 하나님을 알려면 하늘의 하나님도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땅의 하나님을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경중을 분간하지 못해 주객이 전도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야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쌓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가까워져 하나님의 마음과 더 가까워질 수 있다. 오랜 세월 하나님을 믿고 나와 함께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소원하다면, 나는 네가 분명 하나님의 성품을 자주 거슬렀을 것이며, 너의 결말은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오랜 세월 나와 함께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인성과 진리를 가진 사람으로 변화되기는커녕 나쁜 습관이 몸에 배고, 교만이 배가될 뿐만 아니라 나에 대한 오해가 가중되어 심지어 나를 너의 소꿉친구로 여긴다면, 너는 이미 겉만 병든 것이 아니라 골수까지 병들었으니 그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어라! 더 이상 내게 찾아와 너의 하나님이 되어 달라고 간구할 필요도 없다. 너는 이미 용서받지 못할 죽을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용서한다고 하더라도 하늘의 하나님이 네 목숨을 거두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른 일은 보통 문제가 아닌, 상당히 심각한 성질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때가 되어 왜 진작 알려 주지 않았느냐고 원망하지 말라. 여전히 말했던 대로다. 네가 그리스도, 땅의 이 하나님을 보통 사람처럼 취급하고 함께 지낸다면, 다시 말해 이 하나님이 그저 사람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때 너는 황천길로 갈 것이다. 이것이 내가 너희 모두에게 하는 유일한 충고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땅의 하나님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22)

사람에게는 그저 있는 듯 없는 듯한 ‘믿음’밖에 없다. 사람은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고, 왜 믿어야 하는지는 더더욱 모른다. 사람은 아는 것이 너무 없고 부족함도 너무 많다. 그저 무지몽매하게 나를 믿을 뿐이다. 믿음이 무엇인지, 왜 나를 믿어야 하는지 모르는데도 ‘집요하게’ 나를 믿고 있다. 내가 사람에게 바라는 것은 이처럼 어리석게 내게 간구하거나 아무렇게나 나를 믿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역을 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이 나를 보고 나를 알게 하려는 것이지, 결코 내 사역으로 나를 달리 보게 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수많은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고 수많은 권능도 행했던 적이 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내게 매우 ‘탄복’했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나의 뛰어난 능력을 몹시 흠모하기도 했다. 당시 유대 백성은 내가 의술이 뛰어나고 범상치 않다고 여겼을 뿐만 아니라, 나의 그 많은 사역으로 말미암아 나를 앙모하고 나의 그 모든 능력을 참으로 부러워하였다. 그리하여 내가 행한 권능을 본 자들은 나를 가까이 따르기 시작했으며, 수천 명이 나를 둘러싸고 내가 병자를 고쳐 주는 것을 보기도 했다. 내가 그토록 많은 이적과 기사를 나타냈음에도 사람은 나를 훌륭한 의사로만 생각했고, 내가 많은 말로 당시 사람들을 가르쳐 주었음에도 나를 제자보다 뛰어난 스승으로만 생각했다. 오늘날 사람은 내가 행한 사역의 역사적 기록을 보았음에도, 그 성경 구절에서 나를 병 고쳐 주는 ‘대단한 의사’, 무지한 자들의 ‘스승’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또 나를 ‘인자한 예수 그리스도’라고 규정하고 있다. 성경을 해석하는 자들은 나의 ‘의술’을 뛰어넘고 심지어는 이미 스승을 능가하는 제자가 되었지만, 의아하게도 그렇게 명망 높고 명성이 자자한 자들이 나를 보잘것없는 의사로 과소평가하고 있다. 내 행사가 해변의 모래알보다 많고, 내 지혜가 높디높아 모든 ‘솔로몬의 자손’을 능가하지만 사람은 나를 그저 하찮은 의사라고 믿고, 또 사람을 가르치는 무명의 스승이라고 믿는다. 많은 사람이 그저 질병을 치료받기 위해 나를 믿고, 많은 사람이 그저 나의 능력을 빌어 자기 몸에 있는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나를 믿는다. 또 많은 사람이 그저 평안과 기쁨을 얻기 위해 나를 믿고, 많은 사람이 그저 내게서 더 많은 물질적 부를 얻어 내기 위해 나를 믿는다. 많은 사람이 오직 이생을 무사히 보내고 내세에 무탈하기를 바라면서 나를 믿고, 많은 사람이 지옥의 고통을 피하고 천국의 복을 얻기 위해 나를 믿는다. 또 많은 사람이 내세에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일시적인 편안함을 위해 나를 믿는다. 내가 사람에게 분노해 원래 사람에게 있던 기쁨과 평안을 거두어 가자 사람은 모두 의심하였다. 내가 천국의 복을 거두고 지옥의 고통을 주자 사람은 분노하였다. 사람이 내게 병을 고쳐 달라고 할 때 내가 모른 척하고 혐오하자, 사람은 내게서 멀리 떠나 더러운 무당을 찾아갔다. 사람이 내게서 얻어 낸 것을 내가 다 거두어 가자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나를 믿는 것은 나의 은혜가 매우 많기 때문이며, 나를 믿으면 이로운 점이 아주 많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유대 족속은 나의 은혜 때문에 나를 믿었고 곳곳에서 나를 따랐다. 그 무지하고 식견이 좁은 자들은 그저 내가 나타내는 이적과 기사를 보기 위해 나를 따랐다. 그들은 나를 유대 족속 중 가장 큰 이적을 행할 수 있는 지도자로 여겼다. 그래서 내가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었을 때, 의견이 분분했다. 그들은 나를 엘리야 또는 모세라고 하고 가장 오래된 선지자라고도 했으며, 또 최고의 의사라고도 했다. 나 스스로 내가 생명이요 길이요 진리라고 했을 뿐, 나 외에는 누구도 나의 어떠함과 신분을 알지 못했다. 나 스스로 하늘은 본디 내 아버지가 거하는 곳이라고 말했을 뿐, 나 외에는 누구도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 자신임을 알지 못했다. 또 나 스스로 내가 전 인류를 구속하고 속량하리라고 말했을 뿐, 나 외에는 누구도 내가 인류의 구속주임을 알지 못했다. 사람은 그저 나를 인자한 사람,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다. 내 모든 것을 전부 말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나 자신일 뿐, 사람은 모두 나를 알지 못했고,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지 않았다. 사람은 그저 이렇게 나를 믿고 있고, 또 이렇게 나를 기만하고 있다. 사람이 나를 이렇게 생각하는데 어떻게 나를 증거할 수 있겠느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믿음’에 대해 너는 어떻게 알고 있느냐>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23)

사람이 하나님을 믿은 지는 오래됐으나 대부분 ‘하나님’이란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흐리멍덩하게 따를 뿐, 대체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 또는 하나님이란 어떤 존재인지 전혀 모른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기만 할 뿐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고 하나님을 알지도 못한다면 그것은 큰 웃음거리 아니겠느냐?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람은 천상의 비밀을 보고, 이제껏 이해하지 못했던 높은 수준의 ‘지식’을 수없이 들었지만, 가장 얕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수많은 진리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어 온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왜 모르겠어요? 사람 얕잡아 보는 거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사실 사람은 지금 나를 따르고 있으면서도 오늘날의 모든 사역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지 못한다. 가장 쉽고 가장 간단한 문제도 그냥 흘려보내는데, 하물며 가장 복잡한 ‘하나님’ 같은 문제는 더 말할 것이 있겠느냐? 너는 마땅히 이 점을 알아야 한다. 네가 관심을 두지 않는 문제, 발견하지 못하는 문제야말로 네가 가장 잘 알아야 할 문제이다. 너는 큰 흐름을 따르는 것만 알 뿐 네가 갖추어야 할 것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너는 정말 하나님을 왜 믿어야 하는지 아느냐? 정말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 아느냐? 정말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아느냐?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것들을 모른다면 하나님을 믿는 자의 존엄성을 잃은 것 아니겠느냐? 오늘날 내가 하는 사역은 사람에게 인간의 본질과 나의 모든 행사를 알게 하고, ‘하나님’의 본래 모습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는 경륜의 마무리이자 내 사역의 마지막 단계이다. 그래서 나는 너희에게 인생의 모든 비밀을 미리 알려 주어 내게서 받아들이게 하려 한다. 이는 말세 시대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감당할 수 없을지라도 나는 너희가 받아들인 적 없는 모든 생명 진리를 반드시 너희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 너희는 너무도 부족하고, 갖춘 것이 몹시 적기 때문이다. 어둠이 닥쳤을 때 너희가 또다시 길을 잘못 들어 악한 자의 간계에 빠지지 않도록, 나는 해야 할 사역을 다 하고, 너희에게 맡긴 사명을 모두 전하여 사역을 끝내려 한다. 너희는 깨닫지 못한 도가 너무 많고 알지 못하는 일도 한없이 많다. 너희는 너무 무지하다. 나는 너희의 분량과 부족함을 잘 알고 있기에 너희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말씀이 많다 해도 너희가 지금까지 받아들인 적 없는 모든 진리를 알려 주고자 한다. 지금 너희의 분량으로 나를 위해 굳게 설 수 있을지 늘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너희를 얕보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모두 나의 정식 교육을 거치지 않은 우마 부류이며, 너희에게서 과연 어느 정도의 영광이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내가 많은 정력을 쏟아 너희에게 사역하였음에도 적극적인 요소는 거의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소극적인 요소도 손꼽을 정도로, 겨우 사탄에게 치욕을 주는 간증만 할 뿐이다. 나머지는 거의 다 사탄의 독소이니 내 눈에 너희는 구제 불능처럼 보인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러 나는 너희의 갖가지 표정과 태도를 보고 나서야 너희의 진짜 분량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늘 너희를 염려한다. 사람이 혼자 살아간다면 정말 오늘보다 낫거나 오늘과 비슷할 수 있겠느냐? 너희는 자신의 작은 분량이 걱정되지 않느냐? 너희는 정말 이스라엘 선민처럼 언제나 나에게 일편단심일 수 있느냐? 너희가 드러내는 것은 부모에게서 벗어나려는 어린애의 장난기가 아니라 주인의 채찍을 벗어나기 위해 분출하는 우마의 야성이다. 너희는 너희의 본성이 너희, 모든 사람의 약점이자 공통적인 병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내가 너희에게 하고 싶은 유일한 당부는 절대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고 굳게 서서 나를 증거하라는 것이다. 증거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것이 내 사역의 중심이다. 너희는 내 말을 받아들여야 한다. 마리아가 꿈에서 여호와의 계시를 받아들인 것처럼 믿고 순종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정결’이다. 너희는 나의 말을 가장 많이 들었으므로 나의 축복을 가장 많이 받은 자들이다. 나는 너희에게 모든 귀중한 재산을 주었고, 모든 것을 베풀었다. 너희의 지위와 이스라엘 백성의 지위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지만 너희는 그들에 비해 훨씬 많은 것을 얻었다. 그들은 나의 출현을 고대했으나 너희는 나와 함께 좋은 나날을 보내며 나의 풍성함을 누렸다. 그들과 비교했을 때 너희는 무슨 자격으로 나와 다투고 재산을 쟁탈하려 하느냐? 너희가 얻은 것이 아직도 적단 말이냐? 나는 너희에게 아주 많은 것을 주었지만 너희가 돌려준 것은 가슴 시린 슬픔과 걱정, 그리고 억누르기 힘든 울분이다. 나는 너희가 너무나 밉지만, 한편으로는 또 안쓰럽다. 그래서 모든 분노를 참으며 너희에게 거듭 저항할 수밖에 없다. 나는 수천 년 동안 사역하면서 한 번도 인류에게 항의한 적이 없다. 인류가 오늘날까지 발전해 오면서 나는 너희의 ‘기만책’만이 가장 유명하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명성 높은 옛 ‘선조’가 너희에게 남겨 준 귀중한 유산 같다. 나는 이런 비인간적인 개돼지 부류를 실로 증오한다. 너희는 너무 양심이 없다! 너희의 인격은 너무도 저열하다! 너희의 마음은 너무나 강퍅하다! 나의 이런 말과 사역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에 가져갔다면 벌써 영광을 얻었겠지만 너희 가운데서는 불가능하다. 너희에게는 무자비한 매장과 차가운 눈빛, 책임 전가만 있을 뿐이다. 너희의 감각은 지나치게 마비됐고 너무도 무가치하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에 대해 너는 어떻게 알고 있느냐>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24)

이제 너희는 하나님을 믿는 것의 진정한 함의를 깨달아야 한다. 이전에 내가 너희에게 말한, 하나님을 믿는 것의 함의는 모두 너희의 긍정적인 진입과 관계가 있다. 하지만 오늘은 그때와 달리, 너희의 믿음에 대한 본질을 분석하려 한다. 물론 이것은 부정적인 면에서부터 너희를 인도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자신의 진면목을 영원히 알지 못한 채, 스스로가 경건하고 충성스럽다며 끝없이 과시할 것이다. 내가 너희 마음속 깊은 곳의 추한 모습을 들추어내지 않는다면, 너희는 저마다 면류관을 제 머리에 씌우고 모든 영광을 자신에게 돌릴 것이라는 의미다. 너희는 오만 방자한 본성 때문에 양심을 팔아먹었으며, 그리스도를 거역하고 대적하였다. 또한 너희의 그 추악한 몰골이 드러나면서 너희의 속셈과 생각, 사치스러운 욕망과 탐욕스러운 두 눈도 빛 속에 드러났다. 그런데도 너희는 말끝마다 그리스도의 사역에 한평생 몸 바치겠다고 외치고, 그가 일찍이 말씀했던 진리를 입에 달고 살면서 끊임없이 되뇐다. 이것이 곧 너희의 ‘믿음’, 바로 너희의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믿음’이다. 예로부터 사람에 대한 내 요구는 매우 엄격했다. 네 충성심에 다른 속셈이나 조건이 있다면, 나는 너의 그 소위 충성심을 차라리 받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사람이 저의를 지닌 채 나를 기만하고, 조건을 내밀며 뭔가 얻어 내려는 것을 혐오하기 때문이다. 내가 사람에게 바라는 것은 그저 나에게 변함없이 충실하고, 무슨 일을 하든 오직 ‘믿음’을 위해, 그리고 ‘믿음’을 검증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나는 너희가 감언이설로 나의 환심을 사려는 것을 미워한다. 나는 언제나 너희를 진심으로 대했으므로 너희 또한 나를 참된 믿음으로 대할 수 있기를 바란다. ‘믿음’이란 말을 들으면, 많은 사람이 ‘‘믿음’이 있으니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왜 구태여 이러한 고난을 받겠느냐’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묻겠다. 너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면서 왜 늘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느냐?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또한 조금도 없느냐?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육신임을 인정하면서 왜 그를 멸시하느냐? 왜 그에게 함부로 이래라저래라 하느냐? 왜 그를 공개적으로 판단하느냐? 왜 늘 그의 행적을 캐느냐? 왜 그의 안배에 순종하지 않느냐? 왜 일을 할 때 그의 말씀을 준칙으로 삼지 않느냐? 왜 그의 제물을 강탈하고 훔치느냐? 왜 그리스도의 자리에 서서 말하느냐? 왜 그의 사역과 말씀에 대해 옳고 그름을 평가하느냐? 왜 그를 뒤에서 모독하느냐? 이런 것들이 너희의 ‘믿음’이냐?

너희의 언행에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성분이 드러나고, 너희가 일을 행하는 동기와 목표에는 ‘불신’의 성분이 가득하다. 심지어 너희의 눈빛에도 그리스도에 대한 불신이 섞여 있다. 너희는 일분일초도 불신을 버린 적이 없었기에 언제든지 그리스도를 배반할 위험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성육신 하나님에 대한 불신의 피가 온몸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 길에 새긴 발자국이 참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너희는 착실하게 그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다. 너희는 언제나 그리스도가 한 말씀을 반신반의할 뿐 곧장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이는 너희가 그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또 그리스도에 대해 늘 관념에 사로잡히는 것도 그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는 항상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를 취하며, 그의 말씀도 늘 귓등으로 흘려보낸다. 또한 편견으로 인해 그가 행하는 일들을 정확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무리 설명을 해 줘도 관념을 내려놓기 어려워한다…. 이런 것들이 모두 너희 마음속에 섞여 있는 불신의 요소이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역을 따르면서 아직 뒤처진 적이 없긴 하지만, 너희의 마음속에는 패역의 성분이 너무 많이 들어 있다. 그 패역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데에 끼어 있는 불순물이다. 어쩌면 너희는 이 말에 동의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말을 보고 자신의 속셈을 깨닫지 못한다면, 너희는 멸망할 존재가 분명하다. 하나님이 온전케 하는 사람은 그를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지, 그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사람도, 그를 하나님으로 믿지 않으면서 억지로 따르는 사람도 아니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너는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25)

세력이나 재물은 좋아하지만 심판은 물론, 진리는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을 세력파라고 한다. 그들은 세상에서 세력이 있는 교파만을 골라 찾아다니고, 신학교를 나온 목사와 강사만을 찾는다. 그들은 설령 진리의 도를 받아들였다 할지라도 반신반의하여 몸과 마음을 다 바치지 못한다.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정작 주시하는 사람은 대단한 목사와 강사일 뿐, 그리스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들에게는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려는 마음밖에 없다. 그들은 이렇게 작디작은 한 사람이 많은 사람을 정복할 수 있고, 이렇게 볼품없는 한 사람이 사람들을 온전케 할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믿지 않는다. 또한 먼지와 거름으로 뒤범벅된 이 변변찮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라고는 전혀 믿지 않는다. 그들은 이 사람들이 정말 하나님이 구원하는 대상이라면 천지가 뒤집힐 일, 그야말로 배꼽 잡고 웃을 일이라고 여긴다. 또 그들은 하나님이 이들을 택해 온전케 한다면, 저 대단한 인물들은 모두 하나님 자신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관점에는 불신의 요소가 섞여 있다. 어찌 불신뿐이겠는가? 그들은 진정 이치로는 깨우칠 수 없는 짐승들이다. 그들은 지위와 명망, 세력, 그리고 거대한 단체와 파벌만 중시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이끄는 사람들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진리와 생명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배반자들이다.

너는 높디높은 지위를 가진 저 거짓 목자들을 숭상하지, 그리스도의 낮춤을 앙모하지는 않는다. 또한 세상과 야합하는 저 음탕한 자들을 좋아하지, 그리스도의 사랑스러움과 지혜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너는 제물을 약탈하고 주색에 빠져 사는 저 시체들에 감탄할 뿐, 머리 둘 곳 없는 그리스도의 고통은 비웃기만 한다. 또한 제멋대로 행하는 저 적그리스도의 품에 안기길 원하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너에게 공급하는 것이 육체와 글귀, 그리고 통제뿐일지라도 말이다. 지금도 너의 마음은 여전히 그들에게 향해 있고, 그들의 명예와 지위, 세력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사역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거부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런 이유로 너에게는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믿음’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네가 지금까지 따를 수 있었던 것은 부득이한 사정 때문이었다. 너의 마음속에는 높고 큰 형상이 우뚝 솟아 있다. 너는 그들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를 잊지 못하고, 권세를 지닌 그들의 말과 두 손도 잊지 못한다. 너희 마음속의 그들은 영원히 지고지상한 영웅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다. 네 마음속의 그는 영원히 초라하고 경외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 그는 지극히 평범하고, 권세도 거의 없으며, 너무도 위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컨대, 진리를 중시하지 않는 자들을 불신파, 진리의 배반자라 한다. 이런 자들은 영원히 그리스도에게 칭찬받지 못할 것이다. 지금 너는 자신에게서 얼마나 많은 불신의 요소를 찾아냈느냐? 그리스도를 배반할 수 있는 요소를 얼마나 많이 찾아냈느냐? 네가 진리의 도를 선택한 이상, 모든 심혈을 쏟아붓고, 망설이지도 흔들리지도 말 것을 권고한다. 너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진실로 하나님을 믿고 경배하며 일편단심으로 충성하는 모든 사람에게 속하지, 세상과 그 어떤 한 사람에게 속하지는 않는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너는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26)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목적은 하나님에게서 적합한 종착지와 무궁한 은혜를 받기 위한 것이고 하나님을 사람의 종으로 삼으려는 것이며, 언제든 하나님과 아무런 충돌이 없이 평화롭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께 사람의 모든 요구를 들어 달라고 요구한다. “너희가 구하는 것은 내가 다 들어줄 것이다”라는 성경의 말처럼 사람이 무엇을 요구하든 무조건 다 베풀어 줄 것을 요구한다. 또 하나님은 항상 인자한 구주 예수이므로 언제 어디서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사람을 심판하지도 훈계하지도 말 것을 요구한다. 사람이 믿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 뻔뻔스럽게 하나님께 달라고 해도 하나님은 무조건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거역하든 순종하든 상관없이 말이다. 또한 사람이 끊임없이 하나님께 ‘빚을 독촉해도’ 하나님은 아무런 반항 없이 사람에게 ‘빚을 갚아야’ 할 뿐만 아니라 곱절로 갚아야 하고,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얻는 것이 있든 없든 그저 사람이 지배하는 대로 따라야 할 뿐 사람을 마음대로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오랫동안 감추어 온 하나님의 지혜와 공의로운 성품을 마음대로 ‘사사로이’ 사람에게 나타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께 죄를 인정하기만 하면 되고, 하나님은 싫어하지 말고 언제까지나 사람의 죄를 사해 주기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사람은 하나님에게 시키기만 하고 하나님은 오로지 순종하기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하나님이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사람의 종이 되려 함이라”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이유를 대면서 말이다. 너희가 지금까지 계속 이런 식으로 믿고 있지 않느냐? 하나님에게서 무언가를 얻지 못하면 도망치려 하고,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하면 노발대발 화를 내고 심지어 욕설까지 퍼붓는다. 너희는 전혀 하나님이 자신의 지혜와 기묘함을 나타내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일시적인 안락만 탐할 뿐이다. 하나님을 믿는 너희의 태도는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낡은 관점에 머물러 있다. 너희에게 조금이라도 위엄을 드러내면 싫어한다. 이제 너희는 자신의 분량이 대체 얼마나 되는지를 보았느냐? 너희는 자신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말라. 사실 너희의 낡은 관점이 아직 바뀌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을 때는 모든 것이 순조로운 것 같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절정에 달하지만, 작은 일만 생겨도 음부까지 추락해 버린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이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지위의 복을 내려놓고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27)

너희의 추구에는 개인의 관념, 기대와 미래에 대한 것이 너무나 많다. 현재 이렇게 사역하는 이유는 바로 지위에 대한 너희의 마음과 사치스러운 욕망을 다스리기 위함이다. 그러한 기대와 지위, 관념은 모두 전형적인 사탄 성품을 대변한다. 사람의 마음에 그런 것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사탄의 독소가 사람의 사상을 좀먹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시종일관 사탄의 그 유혹을 벗어던지지 못하여 죄 속에서 살면서도 죄로 여기지 않는다. 또한, 사람은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복을 주셔야 하고 우리의 모든 것을 알맞게 마련해 주셔야 해.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야 하는 거야. 어떤 사람보다도 지위가 높고 앞날이 밝아야 해. 하나님을 믿고 있으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한한 축복을 주셔야 해.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잖아.’라고 생각한다. 오랜 세월 동안, 사람의 생존의 토대가 된 사상은 사람의 마음과 영혼을 좀먹어 사람을 간사하고 나약하며 비열하게 만들어 버렸다. 사람은 끈기도, 의지도 없을 뿐만 아니라 탐욕스럽고 거만하게 변했다. 자신을 초월하려는 의지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이 흑암 권세의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용기는 더더욱 없다. 사람의 사상과 삶은 썩어 문드러졌고, 이로 인해 하나님을 믿는 관점 또한 추하기 그지없다. 심지어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관점에 대해 말하자면 그야말로 듣기조차 민망할 정도다. 사람은 모두 나약하고 무능하며 비열하고 연약하다. 흑암 권세에 대해 어떤 증오심도 느끼지 못하고, 광명과 진리를 사랑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온 힘을 다해 그것을 쫓아낸다. 현재 너희의 사상과 관점도 그렇지 않으냐? 하나님을 믿는 이상 복을 받아야 하고, 안정적인 지위를 보장받아야 하며, 믿지 않는 사람보다 높은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관점이 너희 내면에 자리 잡은 건 1~2년의 일이 아니라, 이미 꽤 오래되었다. 너희는 장삿속이 아주 발달했다. 오늘날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지위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한 채 계속 바득바득 ‘추궁’하고 있다. 게다가 매일같이 관찰하며, 언젠가 지위도, 명예도 모두 잃게 되지 않을까 심히 두려워하고 있다. 사람은 안락을 탐하는 마음을 한 번도 내려놓은 적이 없다. 내가 지금처럼 이렇게 심판하면 너희가 궁극적으로 얼마나 깨닫게 되겠느냐? 너희는 자신의 지위가 높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높여 주심을 누렸다고 말할 것이며, 지위가 없는 것은 너희의 출생이 미천하기 때문이고, 지위가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높여 주심과 베풀어 주심 때문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너희가 직접 하나님께 훈련받고, 하나님께 형벌과 심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더더욱 하나님이 높여 주신 덕분이다. 또한 직접 하나님께 정결함과 불사름을 받을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크나큰 사랑 덕분이다. 역대 이래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정결케 함과 불사름을 받지 못했고,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전케 되지 못했다. 지금 하나님이 너희와 얼굴을 마주하고 말씀하며, 너희를 정결케 하고 너희 속에 있는 패역을 드러내고 있으니, 참으로 하나님이 너희를 높여 준 것이다.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다윗의 자손이든 모압의 후손이든 사람은 모두 피조물이니 자랑할 것이 없다. 피조물이라면 마땅히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나는 너희에게 다른 요구가 없다. 너희는 다음과 같이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제게 지위가 있든 없든 저는 이제 자신을 알게 됐습니다. 제 지위가 높다면 그것은 당신의 높여 주심이고, 제 지위가 낮다면 그것 또한 당신의 결정입니다. 모든 것이 당신의 손에 달렸으니 저는 어떤 선택도, 원망도 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저를 이 나라, 이 민족 가운데서 살게 하셨으니 저는 당신의 권세에 오롯이 순종할 따름입니다. 이 모든 것은 당신의 결정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떤 지위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피조물일 뿐이니까요. 당신께서 저를 무저갱에, 유황불 못에 넣으신다고 해도 저는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당신께서 저를 쓰셔도 저는 피조물이고, 당신이 저를 온전케 하셔도 저는 피조물입니다. 당신께서 저를 온전케 하지 않으셔도 저는 변함없이 당신을 사랑할 것입니다. 저는 그저 일개 피조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창조주께서 만드신 보잘것없는 피조물이자, 당신께서 지으신 인류 중의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당신이 저를 만드셨고, 오늘날 또 저를 당신의 손안에서 지배하시니 저는 당신의 도구, 당신의 부각물이 되길 원합니다. 이 모든 것은 당신께서 정하신 것이므로 누구도 바꿔 놓을 수 없습니다. 만사 만물이 다 당신의 손안에 있습니다.” 이러면 너는 지위 따위를 중시하지 않고 해방을 받게 된다. 그래야 너는 담대하게 추구해 나가고, 너의 마음이 그 어떤 일에도 구애받지 않게 된다. 사람은 거기에서 풀려나면 어떤 염려도 하지 않게 된다. 현재 너희 대다수가 염려하는 것은 어떤 것이냐? 늘 지위에 묶여 있고, 자신의 앞길에만 관심을 갖고 있다. 늘 말씀 책을 뒤적이면서 인류의 종착지에 관련된 말씀을 보고 싶어 하고, 자신의 앞길과 종착지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또한 ‘내 앞길은 있는 걸까? 하나님께서 앞길을 없애 버리신 게 아닐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부각물이라는 말씀만 하셨어. 그렇다면 앞길은 대체 무엇일까?’라고 늘 속으로 궁리한다. 너희는 앞길과 운명을 내려놓기를 너무 힘들어한다. 현재 너희는 하나님을 따르고 있고, 이 단계 사역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여전히 지위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지는 못했다. 지위가 높아지면 열심히 추구하고, 지위가 낮아지면 추구하지 않으니, 지위의 복에 대한 생각이 마음에 가득하다고 하겠다. 어째서 많은 사람이 늘 소극적이 되어 일어서지 못하는 것이겠느냐? 앞날이 ‘암담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너희는 거기에서 황급히 자신의 지위와 신분이 어떠한지를 확인한다. 지위와 신분, 이 두 가지를 너희는 가장 앞자리에 놓고, 이상(異象)은 그다음이며, 자신의 진입은 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가 비로소 현재 하나님의 뜻이다. 너희는 먼저 부각물이라는 호칭이 바뀌지 않았는지를 확인하고, 뒤적거리다가 부각물의 꼬리표가 떨어졌으면 기뻐하면서 끊임없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큰 능력을 찬양하지만, 여전히 부각물이라는 것을 확인하면 괴로워하며 그 순간 힘이 다 빠져 버린다. 네가 이렇게 추구할수록 얻는 것이 없다. 지위에 대한 욕심이 강한 사람일수록 더 큰 책망을 받고, 더 큰 연단을 겪게 된다. 그런 사람은 너무나도 무가치하다! 많은 책망과 심판을 받아야만 철저하게 내려놓을 수 있다. 너희가 이런 식으로 추구한다면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생명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변화할 수 없고, 진리를 간절히 사모하지 않는 사람은 진리를 얻을 수 없다. 너는 자신의 변화와 진입을 추구하기보다는, 언제나 사치스러운 욕망이나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가까이하지도 못하게 만드는 것들을 중시하고 있다. 그런 것들이 너를 변화시킬 수 있겠느냐? 너를 하나님나라로 인도할 수 있겠느냐? 네가 추구하는 목표가 진리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이 기회에 세상으로 돌아가 한바탕 크게 하고 싶은 일을 벌이는 것이 낫겠다. 이렇게 헛되이 시간만 보내 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 굳이 너 스스로를 괴롭힐 필요가 있겠느냐? 아름다운 세상에서 무엇인들 누릴 수 없겠느냐? 재물과 미인, 지위, 허영, 가정, 자녀 등등 이 모든 세상의 산물이 전부 네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것들이 아니더냐? 무엇 하러 여기에서 편히 쉴 곳을 찾아 헤매느냐? 인자도 머리 둘 곳이 없거늘, 네게 어찌 안락한 곳이 있겠느냐? 아무렴 그가 네게 안락하고 좋은 쉼터를 마련해 주겠느냐? 그것이 가능하겠느냐? 오늘날 네가 내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심판과 진리의 가르침뿐이다. 너는 내게서 안락을 얻을 수 없고, 오매불망 바라는 안락한 거처도 얻을 수 없다. 나는 네게 세상의 부귀영화를 주지 않는다. 네가 진심으로 추구한다면 나는 네게 모든 생명의 도를 줄 것이고,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누리게 해 줄 것이다. 그러나 네가 진심으로 추구하지 않는다면 나는 네게서 모든 것을 거두어 갈 것이다. 나는 내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안락을 탐하는 개돼지 같은 자들에게 줄 생각이 없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너는 왜 부각물이 되기 싫어하느냐?>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28)

자신의 행동이 의를 행하는 것인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하나님의 감찰을 거쳤는지를 점검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일 처리 원칙이다. 너희는 하나님을 흡족게 할 수 있기에 의롭다 칭함 받고, 또 하나님의 보호와 보살핌을 받아들이기에 의롭다 칭함 받는다. 하나님이 보기에, 그의 보살핌과 보호, 그리고 온전케 함을 받아들여 그에게 얻어진 사람은 모두 의인이고, 그가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현실적인 말씀을 받아들일수록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그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살아 낼 수 있으며, 그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너희에게 준 사명으로, 너희 모두가 마땅히 해내야 하는 바이다. 관념으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규정하면서 그를 영원히 변치 않는 조각상인 양 완전히 성경 안에 국한하고 유한한 사역 가운데 고정해 놓는다면, 이는 너희가 하나님을 정죄했다는 의미이다.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마음속에 고정화된 우상으로 여겼다. 하나님은 오직 메시야라고 불려야만 하고, 또 그렇게 불려야만 하나님인 것처럼 말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조각상(생명이 없는 존재)처럼 여기면서 섬기고 경배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당시의 예수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그리하여 죄 없는 예수가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죄가 없지만, 사람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을뿐더러 기어코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하여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다. 사람은 하나님을 만고불변의 존재로 생각하며 성경 한 권에 기대어 하나님을 규정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경영을 꿰뚫어 보고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파악한 것처럼 말이다. 인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터무니없고 교만하며, 모두가 과장해서 떠벌리기를 좋아한다. 네가 하나님을 얼마나 잘 안다고 생각하든, 내가 보기에 너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가장 심하게 대적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을 정죄하는 사람이다. 이는 네가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하여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길을 전혀 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사람이 하는 일을 왜 늘 못마땅해할까?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또한 고정 관념이 너무 많아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실제 사실에 완전히 어긋나고 천편일률적이고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는 것이다. 잔혹한 인류야! 언제까지 그렇게 서로 암투를 벌이고 명리를 다투며 싸울 것이냐? 하나님은 많고 많은 말씀을 했지만 누구 하나 깨닫지 못한 채 모두 가정과 자녀, 직업, 앞날, 지위, 허영, 재산, 먹고 입는 것, 육체를 생각하느라 급급했다. 누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생각했느냐?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을지라도 그들 가운데 하나님을 아는 자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남을 억압하거나 배척하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 그래서 하나님이 강제로 사형 선고를 받은 적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또 얼마나 많은 잔인한 재판관들이 하나님을 정죄하여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았는지 모른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생각하여 의인이라 칭함 받을 자가 몇이나 되겠느냐?

하나님 앞에서 성결한 자나 의인으로 온전케 되는 것이 그렇게 쉽겠느냐? “세상에는 의인이 없고, 의인은 세상에 있지 아니하다.”라는 말은 사실이다. 하나님 앞에 와서 너희의 옷차림새, 너희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 그리고 마음과 생각 하나하나를 낱낱이 살펴보아라. 너희가 매일 꾸는 꿈조차도 자신을 위한 것이다. 이것이 사실 아니더냐? ‘의로움’이란 타인에게 재물을 베풀거나 남을 자기처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과 말다툼하지 않고 남의 것을 빼앗거나 훔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예수가 행한 모든 것처럼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이 맡긴 일을 자신의 임무로 삼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는 것을 천직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말한 의로움이다. 롯이 의롭다 칭함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득실을 따지지 않고 하나님이 보낸 두 천사를 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또한 그가 당시에 행한 일을 두고 의롭다 칭한 것뿐이지, 그를 의인이라고 칭할 수는 없다. 롯은 하나님을 보았기에 자신의 두 딸을 두 천사와 바꾸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전에 행한 일이 다 의로움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는 의인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회복의 흐름 속에 있는 사람이라도 의인이라고 칭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네가 아무리 잘 행하고, 겉보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아무리 영화롭게 할지라도, 남을 때리거나 욕하지 않고 남의 것을 빼앗지 않는다 할지라도 의롭다고 칭함 받을 수 없다. 이런 일은 보통 사람도 충분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가장 중요한 사실은 네가 하나님을 전혀 모른다는 점이다. 오늘날에야 네가 정상 인성을 어느 정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을 뿐, 하나님이 말한 의로움은 조금도 갖추지 못했다. 그러므로 너의 행위는 네가 하나님을 안다고 증명하지 못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악인은 반드시 징벌받을 것이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29)

이전에 하나님이 하늘에 있었을 때, 사람은 어떤 일에서나 하나님을 속였다. 그리고 오늘날,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 온 지 오래되었건만 그것을 아는 사람은 없고, 여전히 일을 할 때 하나님을 무성의하게 대하며 속이고 있다. 이는 사람의 생각이 너무 뒤처진 것 아니겠느냐? 마치 유다처럼 말이다. 유다는 예수가 오기 전에 늘 거짓말을 하고 형제자매를 속였으며, 예수가 온 후에도 그 버릇을 못 고쳤다. 또 예수를 전혀 알지 못해 마지막에는 예수를 팔았다. 하나님을 모르기에 그런 짓을 저지른 것 아니겠느냐?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너희도 유다처럼 될 것이고, 그로 인해 2천 년 전 은혜시대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비극이 재현될 것이다. 믿지 못하겠느냐? 이것은 사실이다! 지금 대다수 사람이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다. 이 말을 하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있지만, 그런 자들은 모두 유다의 역할을 맡은 인물들이다. 이는 터무니없는 말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한 것이므로 네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겉으로는 겸손한 척하나 사실 마음속에 담고 있는 것은 썩은 물이 가득 고인 시궁창이다. 지금 교회에는 이런 사람이 부지기수인데, 너희는 내가 조금도 모를 거라고 여긴다. 오늘날 나의 영이 나를 위해 주관하고 증거하건만, 내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여기느냐? 너희 마음속 엉큼한 수작과 꿍꿍이를 내가 전혀 모를 거라고 여기느냐? 하나님이 그렇게 만만해 보이느냐? 마음 내키는 대로 대해도 된다는 말이냐? 이전에는 너희가 속박받을까 봐 줄곧 너희에게 자유를 주었다. 하지만 사람은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한 채 끝없이 욕심을 부렸다. 너희가 서로 알아보아라. 나는 그 누구도 책망한 적이 거의 없고 그 누구도 쉽게 훈계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사람의 속셈과 관념을 분명히 알고 있다. 너는 하나님이 증거한 하나님 자신을 바보 멍청이라고 여기느냐? 그렇다면 나는 너를 완전히 눈먼 자라 하겠다! 나는 너를 폭로하지 않고 네가 어느 정도까지 패괴되는지 지켜보겠다. 너의 잔꾀가 너를 구할지, 아니면 하나님에 대한 너의 사랑이 너를 구할지 지켜보겠다. 나는 지금 너를 정죄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때가 될 때 하나님이 너에게 어떻게 보응하는지 보아라. 지금은 너와 잡담할 여유도 없고 너 하나로 인해 더 큰 사역을 그르치고 싶지도 않다. 너 같은 구더기는 하나님이 시간을 내서 상대할 가치도 없다. 네가 어느 정도까지 방자하게 굴지 지켜보겠다. 이런 사람은 털끝만큼도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전혀 없으면서 하나님께 의인으로 칭함 받기를 바란다. 이것은 웃기는 일 아니겠느냐? 그럼에도 너희 중 몇몇 일부는 정직하기에 나는 한결같이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것에만 신경 쓸 뿐이다. 나는 지금 해야 할 일만 하고, 이후에는 각자가 행한 것에 따라 보응할 것이다. 내가 해야 할 말은 다 했다. 내가 행하는 것이 바로 이런 사역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해야 할 것만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너희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진실한지, 자신이 하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이 아닌지 성찰해 보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하겠다.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악인은 반드시 징벌받을 것이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30)

오늘날의 길을 가면서 어떻게 추구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겠느냐? 너는 스스로를 어떤 사람으로 간주하고 추구해야 하겠느냐? 너는 오늘날 네게 임한 모든 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것이 시련이든, 고난이든, 무정한 형벌이든, 저주이든, 너는 그 모든 것이 임할 때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 내가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오늘 너에게 임한 것은 한 번씩 되풀이되는 짧은 시련이므로 정신적으로 큰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네가 이를 내팽개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소중한 자산으로 삼지 않는 것이다. 너는 조심성이 없기 짝이 없구나! 이 소중한 자산을 눈앞을 스쳐 가는 구름이라고 생각하다니. 되풀이되는 호된 매질에 크게 아파하지 않고, 이를 일시적인 고통으로 치부하며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관심 없이 냉담하게 바라보며 어쩌다 직면한 한 차례의 난관으로 간주할 뿐이다. 너는 거만하기 짝이 없구나! 거듭하여 밀어닥치는 거센 비바람을 하찮게만 여긴다. 심지어 싸늘하게 웃으며,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짓기도 한다. 이는 네가 계속 이런 ‘불행’을 겪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사람을 불공평하게 대하기라도 한다는 말이냐? 내가 오로지 너의 허물만 들춘다는 말이냐? 너의 생각이 내가 말한 것만큼 심각하지 않다고 해도 너의 그 ‘태연한’ 표정과 태도는 너의 내면을 여실히 드러냈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너의 마음 깊이 숨겨져 있는 것은 불만에 가득 찬(원문: 不近人意) 욕설과 사람의 눈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 끝없는 슬픔일 뿐이다. 너는 시련을 겪는 것이 몹시 불공평하다고 느끼기에 욕설을 퍼붓는다. 시련으로 인해 세상의 쓸쓸함을 느끼고, 이로 인해 낙담한다. 연거푸 이어지는 매질과 징계를 최고의 보살핌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하늘이 생트집을 잡거나 합당한 보응을 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너는 무지하기 짝이 없구나! 너는 무정하게 절호의 시기를 어두운 곳에 봉하고, 되풀이되는 아름다운 시련과 징계를 원수의 공격으로 간주한다. 너는 상황에 적응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상황에 적응할 생각도 없다. 네가 잔혹하다고 여기는 이 거듭되는 형벌을 통해 무언가를 얻으려 하거나, 구하거나 찾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갈 데까지 가 보자는 식으로 운명에 맡길 뿐이다. 네가 잔혹하다고 여기는 채찍질은 너의 마음을 변화시키거나 점유하지 못하고 네 마음에 생채기를 냈다. 너는 ‘잔혹한 형벌’을 금생의 원수라고 생각할 뿐 거기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너는 독선적이기 짝이 없구나! 너는 자신이 비열하기 때문에 이런 시련을 겪는다고 생각하는 법이 거의 없다. 도리어 자신이 더없이 불행하다고 여기고, 내가 항상 괜한 트집을 잡는다고 말한다. 이 지경에 이르렀건만 너는 도대체 내가 한 말과 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이냐? 네가 하늘보다는 약간 낮고 땅보다는 훨씬 높은 타고난 천재라고 생각하지 말라. 너는 결코 다른 사람보다 똑똑하지 않다. 지구상의 어떤 이성적인 사람보다 어리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너는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여 열등감을 느낀 적이 없고,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군다. 사실 너는 전혀 이성적인 사람이 아니다. 너는 아예 내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모를 뿐만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더더욱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가, 인생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도 하늘의 축복만을 바라보며 경작하는 농부만도 못하다고 하는 것이다. 너는 네 인생을 몹시 하찮게 여기고, 자신의 평판도 알지 못하며, 주제 파악을 못 한다. 너는 정말 ‘대단’하구나!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불학무식한 자는 짐승이 아닌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31)

너희는 내가 몇 번이고 되풀이한 훈계의 말을 까맣게 잊어버린 지 오래다. 심지어 한가로울 때에 즐기는 심심풀이용 오락 거리로 삼기도 한다. 너희는 언제나 훈계의 말을 자신의 ‘부적’으로 여긴다. 사탄이 참소할 때는 기도하고, 소극적일 때는 늘어지게 잠을 잔다. 기쁠 때는 여기저기를 싸돌아다니기 바쁘고, 내가 책망할 때는 굽실거린다. 그랬다가 나를 떠나자마자 험상궂은 모습으로 깔깔 웃어 댄다. 사람들 중에서 자신을 가장 높게 평가하면서도 자신이 교만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항상 거들먹거리고, 스스로 득의양양하여 날뛴다. 이렇게 불학무식한 ‘도련님’, ‘아가씨’, ‘나리’, ‘마님’들이 나의 말을 어찌 보물처럼 귀히 여길 리 있겠느냐? 내가 다시 너에게 묻겠다. 내가 오랫동안 말을 하고 사역을 했건만 너는 대체 무엇을 배운 것이냐? 너의 속임수가 더욱 그럴듯해진 것이냐? 너의 육이 더욱 노련해진 것이냐? 네가 나를 더욱 업신여기게 되지 않았느냐? 솔직히 말하면, 내가 이렇게 많은 사역을 해서 오늘날 너의 작았던 배짱만 커진 것 같구나. 네가 나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은 점점 줄어만 가고 있다. 내가 인자하기 그지없고, 폭력을 동원하여 너의 육을 제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너는 내가 불손한 말만 일삼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얼굴에 미소를 띤 채 너를 대할 때가 더 많고, 너의 면전에서 대놓고 질책한 적이 거의 없으며, 너의 연약함을 항상 너그러이 헤아려 주었다. 그래서 오늘날 네가 선한 농부를 대하는 뱀처럼 나를 대하게 된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의 의중을 살피는 인류의 현란하고 능란한 기교에 실로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내가 너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하겠다. 오늘날 네가 경외심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떨리지도 않고, 조급하지도 않다. 하지만 나는 너같이 불학무식한 ‘천재’도 결국 자아도취에 빠지는 잔머리 때문에 망하게 될 것임을 알리고 싶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고통을 받는 것도, 형벌을 받는 것도 너 자신일 것이다. 나는 너와 같은 부류가 아니기 때문에 너와 함께하며 지옥에서까지 고통받을 만큼 어리석지 않다. 너는 내게 저주받고 나의 가르침으로 구원받은 피조물이라는 것과 내가 미련을 가질 만한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잊지 말라. 나는 어느 때든 사람과 일, 사물에 구애받으며 일하지 않는다. 내가 인류에 대해 가지고 있는 태도와 생각은 변함이 없다. 나는 너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 너는 본래 내 경영의 부속물일 뿐 다른 어떤 존재보다 나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너는 항상 네가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겠다! 나와 함께 지내고 있다 해도 너는 네 신분을 알아야 한다.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지 말라. 내가 너를 책망하거나 훈계하지 않고 웃는 얼굴로 대한다고 해도 이것이 너와 내가 같은 부류라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너는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는 존재이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너는 항상 나의 말에 따라 변화해야 하며, 이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같은 절호의 시기에 소중한 기회가 찾아온 만큼 무언가를 배우는 것이 좋겠다. 나를 속이지 말라. 나는 나를 기만하는 너의 아첨 따위는 필요 없다. 네가 나를 찾는 이유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 스스로를 위해서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불학무식한 자는 짐승이 아닌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32)

지금 너희가 보내는 매일매일은 아주 중요한데, 너희의 종착지와 운명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날들이다. 그러므로 삶을 헛되이 보내지 않도록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과 살아가는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면서 모든 시간을 확보해 최대의 수확을 거두도록 해야 한다. 아마 너희는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영문을 모를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너희에게 기대한 것이 지금의 이런 모습이 아니기에 나로서는 너희 개개인의 행동거지가 전혀 만족스럽지 않다. 그래서 너희 모두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을 뿐 아니라, 지난날 구원을 갈구하던 목소리와 진리를 추구하고 광명을 바라던 마음의 소리도 이제는 끝에 가까워졌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너희가 내게 최종적으로 보답하는 모습, 또한 내가 전혀 기대한 적이 없었던 모습이다. 너희에게 너무도 실망했기에 사실과 다르게 얘기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너희는 이대로 순순히 수긍하고 싶지도, 진실을 직면하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너희에게 진지하게 물어야겠다. 지난 몇 해 동안 너희 마음은 무엇으로 가득 차 있었느냐? 너희의 마음은 대체 누구에게 충성했느냐? 내 질문이 너무 느닷없다고, 왜 이런 질문을 던지느냐고 하지 마라. 너희는 내가 너희를 너무나 잘 알고 있고, 너희에 대해 너무나 큰 관심을 갖고 있으며, 너희의 일거수일투족에 너무나 많은 신경을 쓰기에 너희에게 끊임없이 질타를 가하고, 갖은 고난도 감내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내게 돌아온 것이라곤 너희들의 외면과 참을 수 없어 하며 마지못해하는 모습이었다. 너희가 나를 이렇게 무성의하게 대하는 걸 내가 전혀 모를 거란 말이냐? 만일 그렇게 여겼다면 이는 나를 진심으로 선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실증한다. 그러니 나는 너희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거나 다름이 없다고 말한다. 너희 모두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똑똑하다. 그렇다면 너희는 내게 무엇을 내놓을 수 있겠느냐?

나는 너희의 마음이 도대체 누구에게 충성하고 있는지 하는 문제에 가장 관심을 갖고 있다. 너희 모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자신이 도대체 누구에게 충성하며 누구를 위해 살아가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길 바란다. 어쩌면 지금까지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이 문제의 답을 찾도록 도와주겠다!

기억을 가진 자라면, 사람은 모두 자신을 위해 살며 자신에게 충성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너희의 답이 100%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 저마다 각자의 삶 속에서 살아가며 각자의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것들에 충성하지 전적으로 자신에게만 충성하지는 않는다. 각자가 주위 사람과 일, 사물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너희는 진정으로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스스로에게 충성하는 것을 찬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어떤 것에도 충성할 수 있는 너희의 충성심을 폭로하기 위해서다. 왜냐하면 이렇게 오랜 세월 나는 너희 가운데 내게 ‘충성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를 따른 지 그렇게 오래되었으면서도 너희는 나에게 ‘충성한’ 적이 없었다. 너희가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것들을 싸고돌며, 한순간도 버리는 법 없이 언제 어디서나 마음속에 꽁꽁 담아두고 있기까지 했다. 나를 따르면서 심지어 내 말을 듣고 있을 때조차도 너희는 자신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모든 것들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너희들이 내가 너희에게 요구하는 충성심을 가지고 너희의 ‘애완동물’에 충성하고 너희의 ‘애완동물’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너희가 나를 위해 다소 바쳤다고는 하나, 그것이 너희의 전부를 뜻하지도 않고, 너희가 진실로 나에게 충성함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너희는 열렬히 좋아하는 일에 몸담고 있다. 어떤 자는 자녀에게, 어떤 자는 남편이나 아내에게, 어떤 자는 금전이나 업무에, 어떤 자는 직속상관이나 지위에, 어떤 자는 여자에게 충성한다. 너희는 자신이 충성하는 것들 때문에 피곤해하거나 번뇌한 적이 없다. 자신이 충성하는 것들을 더 많이, 더 쉽게 가질 수 있기를 더욱더 갈구하였고 또 이를 포기한 적도 없다. 여태까지 너희는 나와 내가 한 말을 너희가 열중하는 모든 것의 끝자리에 놓아두었는데 그것도 마지못해 마지막 자리에 놓아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자는 그 끝자리마저도 자신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충성하고 싶어질 것들을 위해 남겨 두었다. 그들 마음속에는 나에 대한 것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너희는 어쩌면 내 요구가 너무 지나치고 너희를 억울하게 한다고 여길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즐거워할 때 너희는 나에게 단 한 번도 충성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렸었느냐? 그때 너희는 이로 인해 괴로워했느냐? 기쁨 가득한 마음으로 수고의 대가를 받을 때 진리를 충분히 갖추지 못한 것에 대해 낙심했었느냐? 너희는 나에게 인정받지 못한 것에 대해 통곡하며 눈물을 흘린 적이 있느냐? 자녀를 위해서는 온갖 지혜를 짜내며 애쓰면서도 여전히 만족할 줄 모르며 여전히 자녀에게 정성과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고 여기는데, 내게는 어떠하였느냐? 너희는 지금껏 늘 나를 건성으로 대했다. 단지 기억만 할 뿐 마음속 깊이 오래도록 간직하지 않았다. 너희는 지금까지 내가 너희에게 기울인 심혈을 느낀 적도 이해한 적도 없이 단지 조금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느꼈다. 그런 ‘충성’은 내가 오래도록 기대해 온 것이 아니고 오래전부터 증오해 온 것이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말하든지 간에 너희는 여전히 아주 조금만 인정할 뿐 완전히 받아들이려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너희가 ‘자신만만하여’ 언제나 내 말을 가려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면 내게는 그 자신감을 상대할 방법이 있다. 또한, 나는 내 말이 사실을 전혀 왜곡하지 않은 진실한 것이라고 인정하게 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너는 도대체 누구에게 충성하는 사람이냐?>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33)

지금 너희 각자 앞에 돈을 얼마 놓아두고서 너희가 어떤 선택을 해도 정죄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너희 가운데 많은 자가 진리를 버리고 돈을 선택할 것이다. 그보다 좀 나은 자는 돈을 버리고 마지못해 진리를 선택할 것이고, 그 두 부류 중간에 있는 자는 한 손으로는 돈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진리를 붙들 것이다. 그렇다면 너희의 참모습이 어떠할지 말할 필요도 없지 않겠느냐? 자신이 충성스럽게 대하는 모든 것과 진리 사이에서 너희는 모두 이런 선택을 할 것이고, 너희 태도 또한 이럴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너희 가운데 많은 자가 옳고 그름 사이에서 망설이지 않았느냐? 가정과 하나님, 자녀와 하나님, 화목과 파탄, 부와 빈곤, 지위와 평범함, 지지받는 것과 버림받는 것과 같은 모든 정(正)과 반(反), 흑과 백의 싸움에서 너희가 무엇을 선택하였는지 너희 스스로 모를 리 없지 않으냐? 가정의 화목과 파탄 사이에서 전자를 선택하는 데에 조금의 망설임이 없었고, 금전과 본분 사이에서 또 전자를 선택했는데, 이를 뉘우치고 바른길로 돌아서려는 의지조차 없었다. 사치와 빈곤 사이에서도 전자를, 자녀, 아내, 남편과 나 사이에서도 전자를, 관념과 진리 사이에서도 전자를 선택하였다. 나는 너희의 온갖 악행에 너무나 놀랐고, 너희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잃었다. 너희의 마음이 그렇게도 누그러지지 않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오랜 세월 심혈을 기울여 얻은 결과가 나를 포기하고 속수무책으로 구는 너희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나의 모든 날들을 이미 너희 앞에 펼쳐 보였기 때문에 너희에 대한 기대는 오히려 날로 커지고 있다. 하지만 너희는 지금도 어둡고 사악한 것을 추구하며 놓으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너희의 최후가 어떻게 될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다시 한번 선택의 기회를 준다면 너희는 어떤 태도를 보이겠느냐? 그래도 전자를 택하겠느냐? 나에게 여전히 실망스럽고 고통스러운 슬픔을 안겨 주겠느냐? 너희의 따뜻한 마음은 여전히 그렇게도 작을까? 어떻게 해야 나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을지 여전히 모르겠느냐? 지금 이 순간, 너희는 무엇을 선택하고 있느냐? 내 말에 순종하는 것이냐, 아니면 성가셔하는 것이냐? 내 날은 이미 너희 앞에 펼쳐졌고, 너희 앞에 놓인 것은 새로운 삶과 새로운 출발점이다. 하지만 이번 출발점은 이전 새 사역의 시작이 아니라 옛 사역의 마무리이자 마지막 장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겠다. 나는 너희 모두 이 시작점이 예사롭지 않음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머지않은 어느 날, 너희는 이 시작점의 진정한 함의를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함께 이 시작점을 지나 마지막을 맞이하도록 하자! 하지만 정의와 불의에 맞닥뜨리면 너희는 언제나 불의를 선택하기에 나는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다 너희의 과거이다. 나 또한 너희의 과거를 모조리 잊어버리고 싶지만 그리 쉽지가 않다. 하지만 나에게 좋은 방법이 하나 있다. 바로 미래로 과거를 대체함으로써 너희 과거의 어두운 모습을 사라지게 하여 오늘날 참모습을 되찾아 오는 것이다. 그러자면 어쩔 수 없이 너희가 다시 한번 선택을 해야 한다. 너희가 도대체 누구에게 충성하는 사람인지 봐야 하지 않겠느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너는 도대체 누구에게 충성하는 사람이냐?>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34)

너희는 종착지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매우 진지하게 대하고, 개개인 모두가 종착지에 관한 일에 특별히 민감하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해서라도 좋은 종착지를 얻고 싶어 한다. 나는 너희의 간절한 마음을 알고 있으니 일일이 말할 필요는 없다. 너희는 그저 자신의 육체가 재난에 빠지지 않고, 더욱이 자신이 이후에 영원한 징벌에 떨어지지 않으며, 좀 더 자유롭게, 좀 더 안락하게 살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종착지를 언급하면 특히 관심을 기울이며, 자칫 부주의로 하나님께 죄를 지어 그에 따르는 보응을 받게 될까 봐 매우 두려워한다. 게다가 너희는 자신의 종착지를 위해서라면 굽실거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능구렁이 같던 자들도 종착지를 위해 갑자기 매우 성실해지고 온순해지는데, 그 성실한 모습은 실로 소름이 끼칠 정도다. 어찌 됐든, 너희의 마음은 다 ‘정직’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원망이든, 기만이든, 충성심이든 너희 마음속 비밀을 하나도 숨김없이 내게 털어놓았으니 말이다. 결론적으로, 너희는 가장 깊은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본질적인 것들을 내게 솔직하게 ‘고백’했고, 당연히 나 역시 그러한 것들을 피하지 않았다. 내게는 그 모든 것이 너무도 익숙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최후의 종착지를 위해서라면 불바다라도 뛰어들려고 하지만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 머리카락 한 올 바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내가 너희를 너무 교조주의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내가 하는 모든 것을 너무 충성심 없이 대하는 것이다. 너희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간단히 설명을 하겠다. 너희가 원하는 것은 진리와 생명, 사람됨의 원칙이 아니고, 내가 심혈을 기울인 사역은 더더욱 아니며, 너희의 육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재물, 지위, 가정, 혼인 등등)이다. 너희는 내가 하는 말과 사역에 대해서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두 글자로 너희의 믿음을 개괄하겠다. 그것은 바로 ‘건성’이다. 너희는 자신이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일이라면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달성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일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아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충성하고 상대적으로 진지하게 대한다는 것을 나는 발견했다. 그래서 나는 지극한 마음이 없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을 믿는 데 실패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너희 가운데 실패한 사람이 많지 않으냐?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데 성공한 것은 그 자신의 행한 바 때문이고, 반대로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한 것 역시 사람의 행위로 초래된 것이지, 결코 다른 요인의 영향 때문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나는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 일보다 더 어렵고 힘든 그 어떤 일도 온갖 방법을 강구하여 해낼 것이고, 매우 진지하게 대할 것이며, 심지어 그 어떤 오차도 원치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이 바로 너희 개개인이 자신의 생활을 위해 부단히 기울이는 노력이다. 심지어 너희는 자신의 혈육 중 누구도 속이지 않으면서 나의 육신을 속이는 짓도 해낼 수 있다. 이것이 너희의 일관된 행위이자 처세 원칙이다. 너희는 자신의 종착지를 위해서, 아름답고 이상적인 종착지를 위해서 여전히 거짓된 모습으로 나를 속이고 있지 않느냐? 나는 너희의 충성심이 일시적인 것이고, 성실함도 일시적인 것임을 알고 있다. 너희의 의지와 대가도 잠깐 반짝이다 사라지는 것 아니더냐? 너희는 오로지 마지막 한 번의 노력으로 있는 힘을 다해 아름다운 종착지를 쟁취할 생각만 한다. 너희의 목적은 교환하는 것일 뿐, 진리에 부응하는 것도, 더욱이 나의 대가에 보답하는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머리를 써서 얻으려고만 할 뿐 노력으로 밀어붙일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너희의 본심 아니더냐? 스스로를 위장하지 마라. 더욱이 자신의 종착지를 위해 식음을 잊고 밤잠을 설칠 정도로 머리를 쥐어짜지도 마라. 결국 너희의 결말은 정해진 것 아니겠느냐? 너희는 솔직하고 당당하게 각자의 본분을 잘 이행하되, 어떠한 대가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너희가 말했듯이, 그날이 되면 하나님은 그를 위해 고생하고 대가를 치른 그 누구도 홀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신념은 간직할 만하며 또한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해야 내가 너희에 대해 안심할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너희에 대해 영원히 안심할 수 없고, 너희를 영원히 싫어할 것이다. 너희가 양심에 따라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나의 사역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나의 복음 사역을 위해 평생의 정력을 바친다면, 내 마음이 항상 너희로 인해 기쁘지 않겠느냐? 그렇게 되면 내가 너희에 대해 완전히 안심할 수 있지 않겠느냐? 너희가 할 수 있는 것이 그저 내가 바라는 것들 가운데 초라한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점이 애석할 따름이다. 그러니 너희가 무슨 낯으로 나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할 수 있겠느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종착지에 관하여>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335)

종착지와 운명은 둘 다 너희에게 매우 중요하며, 또한 너희와 매우 중대한 관계가 있다. 너희는 경솔하게 일을 하면 종착지가 없어지고 자신의 운명을 망치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이 종착지를 위해 바친 노력이 헛수고가 되었다면 그런 노력은 허상과 기만일 뿐 진심이 아니며, 만약 그렇다면 종착지를 위해 노력을 바친 자는 결국 마지막 실패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너희는 생각해 보았느냐? 하나님을 믿는 데 실패하는 이유는 모두 기만 때문이다. 말했듯이, 나는 사람이 나에게 아첨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나에게 아부하거나 열성적으로 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또한 나는 정직한 사람이 나의 진리와 기대를 마주하는 것을 좋아하고, 사람이 나의 마음을 극진히 보살피고 나아가 나를 위해 전부를 바치는 것을 더 좋아하며, 그렇게 해야 나의 마음이 위로받을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지금 너희에게는 내가 싫어하는 것들이 얼마나 있느냐? 내가 기뻐하는 것들은 또 얼마나 있느냐? 설마 너희가 종착지를 위해 행한 온갖 추태를 발견한 사람이 아무도 없단 말이냐?

나는 적극적으로 발전하려고 하는 그 누구의 마음도 상하게 하고 싶지 않고, 본분을 이행하며 충성을 다하려는 의욕은 더더욱 꺾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나는 너희 개개인의 부족한 부분과 내면 깊은 곳의 더러운 영혼을 일깨워 주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그저 너희가 진심을 바쳐 나의 말과 마주하길 바라는 데 있다. 나는 사람이 나를 기만하는 것을 제일 혐오하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가 나의 마지막 단계 사역에서 가장 뛰어난 모습을 보이고, 또한 모두 일편단심으로 몸과 마음을 다 바치길 바랄 뿐이다. 물론 나는 또 너희 모두가 좋은 종착지를 갖게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나에게도 바라는 바가 있다. 그것은 바로 너희가 최선의 선택을 하여 너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충성심이자 마지막 충성심을 나에게 바치는 것이다. 유일한 충성심도 없는 자라면 틀림없이 사탄이 아끼는 자일 테니, 나도 더 이상 남겨 두지 않고 집으로 돌려보내 그의 부모가 돌보도록 하겠다. 내가 하는 사역은 모두 너희에게 큰 도움이 된다. 내가 너희에게서 얻고 싶은 것은 정직하게 발전하려는 마음이지만 지금까지 나는 아무런 수확도 없이 여전히 빈손이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아라. 어느 날 내가 여전히 이렇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다면 너희를 대하는 태도가 어떻겠느냐? 계속 이렇게 부드러울 수 있겠느냐? 내 마음이 계속 이렇게 평온할 수 있겠느냐? 너희는 무진 애를 써서 농사를 지었으나 낟알 한 알 거두지 못한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느냐?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의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큰지 알고 있느냐? 희망을 가득 품었지만 불쾌한 기분으로 헤어지게 된 자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느냐? 격노한 자가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느냐? 적대시되고 기만당한 자의 불타는 복수심을 아느냐? 너희가 사람의 이러한 마음을 이해한다면 하나님이 어떤 태도로 사람에게 보응할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너희 모두가 자신의 종착지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길 바란다. 다만 속임수 없이 노력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여전히 너희에게 실망할 것이다. 이러한 실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겠느냐? 그렇게 되면 너희는 스스로를 우롱한 것 아니겠느냐? 종착지를 생각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종착지를 망치는 자는 가장 구제 불능이다. 그런 자가 곤경에 처해 허둥댄들 그 누가 가엾이 여기겠느냐? 어쨌든 나는 너희를 축복하여 모두에게 적합하고 아름다운 종착지가 있기를 바라며, 더욱이 너희 모두가 재난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종착지에 관하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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