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믿을 때는 먼저 세상의 사악한 흐름을 꿰뚫어 봐야 한다

어떤 젊은이들은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컴퓨터 게임을 즐기는 나쁜 습관을 좀처럼 떨쳐 버리지 못한다. 게임 속에 있는 것들은 대부분 무엇이냐? 폭력적인 것이 아주 많다. 게임은 마귀의 세계다. 대부분 사람은 게임을 오래 하면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다. 학교도 가기 싫고 일도 하기 싫고, 자기 앞길도 생각하지 않고, 인생에 관한 일은 더더욱 생각하지 않는다. 요즘 사회 젊은이들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느냐?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는 것 외에는 게임밖에 없다. 그들이 입으로 말하는 것이든,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든 모두 황당하고 비인간적인 일들뿐이고, 생각하는 것들은 이미 ‘더럽다’, ‘사악하다’라는 두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모두 정상적인 인성에 갖춰져야 할 것들이 아니고, 비인간적인 황당한 일들이다. 네가 정상적인 인성의 일과 화제를 말해도 그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관심도 없으며, 들으려 하지도 않고, 반감을 가지기도 한다. 그들은 정상적인 사람과 공통된 대화도 화제도 없다. 그들의 화제는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는 것뿐이고, 그들의 마음속은 세상의 흐름에 속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렇다면 그들의 앞날이 어떻겠느냐? 그들에게 미래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이들은 가망이 없습니다.) ‘가망이 없다’는 말이 아주 적절하다. ‘가망이 없다’는 것이 무엇이냐? 그들이 정상적인 인성이 갖춰야 하는 일을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이 사람들이 잘 배우지 않으면 힘써 일하라고 시켰을 때 하려고 하겠느냐? (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겠느냐? ‘일하는 게 뭐가 재밌어? 일하는 게 얼마나 힘든데 그렇게 해서 뭘 얻을 수가 있지?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 말고 아무것도 없어. 역시 게임이 재밌지. 이게 얼마나 편하고 즐거운데! 컴퓨터 앞에 앉아 사이버 세계에 살면 뭐든 다 있잖아.’ 그에게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시간 맞춰 자리를 지키며 근무하라고 하면 그의 기분이 어떻겠느냐? 그가 그 시간을 지키고 그런 제약을 받으려 하겠느냐? (원치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항상 게임을 하고 컴퓨터를 가지고 놀면 시간이 갈수록 의지가 사라지고 퇴폐적이 된다. 이방인들은 세상의 흐름을 좇고 유행을 좋아한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올바른 일을 하지 않고 바른길을 걷지 않는다. 부모도 관리를 못 하고 학교 선생님도 방법이 없다. 어떤 국가의 교육 제도도 모두 이 흐름에 대해 어찌할 수가 없다. 사탄 마귀가 하는 그런 짓들은 사람을 꾀어 타락시키는 것이다. 사이버 세계에 사는 사람은 정상적인 인성의 모든 생활에 흥미가 없고 일과 공부에도 전혀 생각이 없으며 오로지 게임을 할 생각만 한다. 마치 어떤 것에 홀린 듯하다. 과학 연구 팀에 따르면, 게임을 하는 사람이 일단 게임에 몰입하면 뇌에서 어떤 것이 분비되는데, 그런 것이 사람을 흥분시키고 심지어 어떤 환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이 게임을 하면 중독되어 계속 하고 싶게 된다. 심심하거나 혹은 올바른 일을 하려 할 때 사람은 대신 게임을 하고 싶어 하는데 게임은 점차 생활의 전부가 된다. 게임은 마치 마약과 같다. 일단 중독되면 끊기도 어려워지고 헤어 나오기 어려워진다. 그렇게 사람을 망치는 것이다. 젊은이이든 노인이든 이 나쁜 습관에 물들게 되면 고치기 어렵다. 어떤 아이가 잠을 자지 않고 밤새 게임만 하였는데 부모도 말리지 못하고 감시도 못 하니 결국엔 컴퓨터 앞에서 죽고 말았다. 어떻게 죽은 것이냐? 과학적으로 뇌 괴사라고 밝혀졌다. 게임 때문에 죽은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게임이 정상적인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겠느냐? 만약 그것이 정상 인성에 필요하고 바른길이라면 사람은 왜 그것을 끊지 못하느냐? 사람이 어떻게 이 정도까지 게임에 빠질 수 있는 것이냐? 이는 곧 게임을 하는 것이 좋은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온종일 인터넷에 빠져서 인터넷으로 이것저것 훑어보고, 불건전한 것들을 보고, 게임을 한다. 온종일 이러고 놀면 사람은 의욕을 잃을 수밖에 없다. 이런 행동은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고 해칠 뿐이며, 바른길이 아니다. 지금 청년도 청소년도 심지어 일부 중장년층도 게임을 하고 있다. 게임을 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대다수 사람이 이것이 좋은 현상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게임이라는 것은 젊은 세대를 해치고, 확실히 많은 사람에게 해악을 끼쳤다. 게임 같은 것들이 어떻게 생겨난 것이냐? 사탄에게서 나온 게 아니냐? 어떤 그릇된 자들은 “게임은 현대 과학의 발달을 보여 주는 하나의 상징이다. 이것은 과학적 성과다.”라고 말한다. 이런 해석이 어떠냐? 역겹다! 게임은 좋은 길이 아니고 바른길도 아니다! 게임은 그저 사회의 흐름을 좇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이방인들조차도 게임을 하다가 의욕을 잃는다고 말한다. 그런 것조차 끊지 못하고 자제하지 못한다면 너는 아주 위험한 사람이다. 지금 사람들은 나이가 적든 많든 게임, 마약 같은 것들을 흔하게 한다. 전 세계적으로 다 그렇다. 네가 몇 년 동안 하나님을 믿었든 간에 게임조차도 자제하지 못하면, 언젠가 하나님을 믿는 일이 재미없다고, 무료하고 지루하다고 느껴질 때 너는 이방인처럼 마약을 시작하고 흥분제에 손을 댈 수 있지 않겠느냐? 그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네가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너는 기초도 없고 진리도 얻지 못했으며, 네가 하나님을 배신할 위험성은 여전히 100퍼센트다. 어떤 일이 닥치면 넘어질 수도 있다. 이 사악한 세상에는 시험이 너무 많다. 사탄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을 온갖 방식으로 유혹한다. 네가 항상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실 수 없고, 마음속과 머릿속이 늘 텅 비어 있다면 너는 아주 위험하게 된다. 너희 마음속이 텅 비어 있는 시간이 많지 않으냐? 젊은이들은 텅 비어 있을 때가 많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아주 위험하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어야 한다. 언젠가 마음속으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전환점이 나타나고, 위험기를 벗어날 수 있고, 교회에서 굳게 설 수 있다.

하나님 집에 젊은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20대 젊은 층도 적지 않다. 모두 꽃다운 나이로, 아직 인생의 목표를 확실히 정하지 못하고 포부도 없으며 인생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하겠느냐? 내가 한 마디로 알려 주겠다. 어리고 경망스러우며 천지 분간을 못한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우선 ‘어리고 경망스럽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 보아라. ‘어리고 경망스러운 것’이 무엇인지 너희가 해석할 수 있겠느냐? 그것이 어떤 성품이냐? 이것이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 (항상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최고이고, 자기가 상상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며, 누구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런 성품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바로 ‘미쳐 날뛰는 것’이다. 이것은 이 연령대 사람들의 대표적인 성품이다. 생활 환경과 배경이 어떠하든,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이 연령대 사람들은 모두 어리고 경망스럽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그들에게 편견을 가지거나 그들을 깔보는 것이 아니라 그 연령대의 사람들이 내면에 갖고 있는 성품이 유난히 교만하고 경박하고 오만해서이다. 그들은 세상을 많이 겪어 보지 못했고 인생사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세상의 어떤 일이나 인생의 일을 처음 접하면 ‘알았어. 분명히 이해했어. 난 뭐든지 다 알아! 어른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고, 사회에서 유행하는 것들도 따를 수 있어. 지금 휴대전화가 얼마나 빨리 발달하고 기능이 얼마나 복잡해? 하지만 나는 뭐든 다 할 수 있어. 나이 많은 노인네들처럼 아무것도 모르지는 않아.’라고 생각한다. 노인이 그에게 도와 달라고 하면 “사람이 늙으면 쓸모가 없어. 컴퓨터도 할 줄 모르는데 사는 게 무슨 의욕이 있겠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이 무엇이냐? 이것이 바로 어리고 경망스러운 행동이다. 젊은이들은 기억력이 좋고 새로운 것을 빨리 받아들인다. 조금 할 줄 안다고 해서 노인을 무시하는 것은 패괴 성품이다. 이런 성품이 정상적인 인성의 성품이겠느냐? 정상적인 인성의 행동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리고 경망스럽다고 하는 것이다. ‘교만하다’고 하지 않고 ‘경망스럽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그것이 젊은이들 특유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작은 일을 조금 알면 붕붕 떠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그것을 밑천으로 여긴다. 사람이 젊었을 때는 그러지만, 나이를 조금 더 먹어 아는 것도 많아지고 인생의 굴곡을 많이 겪으면 훨씬 성숙하고 진중해지며, 겸손하게 처신하는 것을 좋아하게 된다. 뭘 좀 알았다고 해서 떠벌리지 않고, 뭘 좀 모른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않는다. 젊은이들은 아주 건방지고, 뭘 조금 할 줄 알면 뽐내며 우쭐댄다. 가끔 흥이 오르면 남들보다 잘났다고 생각하고, 그에게는 지구조차도 좁아서 외계의 별까지 가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운 것 같다. 이것이 바로 경망스러운 것이다. 어리고 경망스러운 것의 주된 특징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사람이 살면서 뭐가 필요한지도 모르며, 인생에서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어떤 상황에서 사는 것이 위험한지도,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런 경우를 두고 흔히 “천지 분간을 못하고 세상 물정도 모른다.”라고 말한다. 이 연령대에, 사람에게 이런 경망스러운 성품이 있으면 이런 것들을 드러낸다. 어떤 젊은이들은 누구도 안중에 두지 않는다. 네가 하는 말이 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는 너를 상대하지 않는다. 젊은이들의 심리는 부모도 제대로 헤아리기가 힘들다. 한 마디라도 잘못 말하면 아이는 물건을 집어던져 깨부수고 씩씩거리며 나가 버려 대화하기가 어렵다. 어째서 요즘 부모들이 자식을 관리하고 교육하기가 어렵다고 느끼겠느냐? 요즘 부모들이 못 배우고 무식해서도 아니고, 젊은이들의 심리를 몰라서도 아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생각이 이상하고, 세상의 흐름을 좋아하며 세상의 흐름에 포로가 되어 사탄의 희생품이 되고 너무 빨리 타락하면서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 노릇을 하기가 아주 힘들다. 어떤 부모들은 자식 교육을 위해 일부러 아동 심리학을 공부하기도 한다. 요즘은 자폐증, 우울증 같은 이상한 병에 걸리는 아이들도 아주 많아서 관리하기가 어렵다. 이런 문제 앞에서 사람들이 방법이 없고 제대로 해석할 수도 없게 되자 학교와 사회의 지식인들이 ‘반항 심리’, ‘사춘기’ 등의 말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옛날에는 왜 그런 말이 없었던 것이냐? 요즘 과학이 발달해서 이상한 말들도 많이 생겨났다. 이 인류가 점점 심하게 타락하고 정상적인 인성에 관한 것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것은 이 사회의 사악한 흐름으로 초래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래서 너희 같은 젊은이들이 지금 여기에 차분하게 앉아서 진실하고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내 얘기를 듣고, 내가 너희와 이렇게 교제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어느 누가 훌륭해서 진리를 추구하는 이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며, 하나님이 너희를 세상에 내어 주지 않고, 사탄에게 넘겨주지 않아서이다. 요즘 사회의 젊은이들을 보아라. 누가 그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권해도 믿지 않는다. 내가 그들에게 말해도 소용이 없다. 그들이 그저 어리고 경망스러운 이들이겠느냐? 그들은 다 어떤 사람들이겠느냐? 양심과 이성이 없다면 짐승이고 마귀다! 네가 그에게 사람의 말을 하면 그가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 이제는 대화가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그가 아예 듣지를 않는다. 너희가 오늘날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일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으며, 진리의 도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과 보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지금 본분 이행의 기회를 소중하게 여기고, 이 기간 동안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 기초를 탄탄히 다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너희가 안전해지고, 이 사악한 흐름에 쉽게 휩쓸리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일단 사악한 흐름에 붙들리면 그 사악한 흐름에 쉽게 휩쓸리게 된다. 네가 사악한 흐름에 다시 휩쓸린다면 하나님이 너를 원하겠느냐? 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네게 기회를 한 번 주었으니 다시 또 너를 원할 리 없다. 하나님이 널 원하지 않으면 너는 위험해지며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어리고 경망스럽다’는 말에 대해 다 얘기했으니 ‘천지 분간을 못한다’는 말에 대해 얘기하겠다. ‘천지 분간을 못한다’는 말은 비속한 말이다. 이 말의 문자적인 의미를 해석해 보아라. (좋고 나쁜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영원히 좋고, 자신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영원히 나쁘다고 여기며, 그에게 아무리 해석해 줘도 듣지 않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을 모르고 분별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바로 그런 뜻이다. 옳고 그름을 구별하지 못해 어떤 것이 긍정적인 사물이고, 어떤 것이 부정적인 사물인지 모르는 것이다. 그가 어리고 경망스럽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하든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남들이 하는 말은 다 틀렸고 내가 하는 말이 옳아. 누구든 내게 말하면 안 돼. 듣지 않을 거야. 난 똥고집이야. 내가 틀렸어도 끝까지 우기고 고집할 거야.’라고 생각한다. 천지 분간을 못하는 이런 성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그가 말하는 도리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고, 누구보다도 분명하고 명백하게 말하는 것 같은데, 어째서 정작 일 처리를 할 때는 항상 어리석은 짓을 일삼겠느냐?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걸 분명히 알면서도 듣지 않고 자기 성질대로 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제멋대로 군다고 하고 또 황당하다고 한다. 세상의 흐름을 좇는 사람은 아주 황당하다. 그들은 파쿠르, 번지 점프 등을 좋아하고, 각종 익스트림 스포츠로 자극 찾는 것을 즐긴다. 이것이 황당하지 않으냐? 너희도 파쿠르를 좋아하지 않느냐? (예전에는 좋아했습니다.) 어째서 좋아할 수가 있느냐? 파쿠르가 위험하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냐? 그것이 목숨을 가지고 장난치는 짓이라는 걸 모른단 말이냐? 사람은 거미도 아니고 도마뱀도 아니다. 벽에 기어올라 가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사람에게는 그런 기능이 없다. 그것은 정상적인 인성에 갖춰진 것이 아닌데 너희는 왜 그것을 좋아하는 것이냐? 그런 것들이 사람에게 시각적, 정서적 자극을 주기 때문에 사람들이 파쿠르를 동경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무엇의 지배를 받는 것이냐? ‘스파이더맨’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냐? 사람의 뼛속에 세상을 구하고 슈퍼맨이 되고 싶은 욕망이 들어 있지 않느냐? 많은 영화 속에 나오는 날아다니는 협객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지붕을 넘나들고 벽을 타고 오르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몹시 부러워한다. 젊은이들의 머릿속에 그런 것들이 심어졌다. 어째서 그런 것들에 중독되겠느냐? 그것은 사람이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것, 추구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사람은 모두 영웅이나 슈퍼맨, 남다른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어 하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사탄을 숭배한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정상인이 이런 황당한 것들을 좋아하겠느냐? 정상인에게 그런 초능력이 있겠느냐? 절대 없다. 그것은 모두 사람이 제멋대로 꾸며 내고 상상해 낸 것들이 아니냐? 만약 정말로 그런 이상한 일이 생긴다면 악령이 몸에 붙은 것이 아니겠느냐? 아담과 하와의 시대에 파쿠르가 있었느냐? 성경에 파쿠르에 대한 기록이 있느냐? (없습니다.) 파쿠르는 사악한 현대 사회의 산물이자 사탄이 사람을 미혹하고 패괴시키는 방식 중 하나이다. 사탄은 기이하고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젊은이들의 심리를 이용해 허구의 이야기를 꾸미고 펼쳐 놓고는 이런 방식으로 천지 분간 못하는 청소년을 미혹하고, 사람들이 사탄의 이런 기이하고 자극적이고 특이한 재주를 추구하게 한다. 이것이 사람들을 해치는 것이 아니냐? 이런 것들이 일단 사람의 생각 속으로 들어가면 독소가 된다. 네가 그 독소를 간파하지 못하면 그것을 완전히 떨쳐 버릴 수 없고, 계속 그것의 영향을 받고 교란당하고 통제당한다. 그러면 이런 독소를 제거하기가 쉽겠느냐? (쉽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겠느냐? 어떤 사람은 그런 것들을 내려놓기 아쉬워한다. 그는 그런 것들이 아주 좋다고, 독이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으니 그는 내려놓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사탄의 시험에 빠지지 않으려면 네 분량이 작고 어릴 때 네 영혼을 갉아먹을 수 있고 너를 중독시킬 수 있는 그런 것들을 최대한 멀리해야 한다. 지금 너는 분별력이 없고 아직 아주 경망스럽고 어리숙하며, 네 마음속에 긍정적인 것이 너무 적고 진리 실제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을 때 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네게는 생명도 분량도 없다. 너는 그저 작은 바람을 갖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을 믿고 싶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좋은 일이고 바른길로 나아가는 것이며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야. 난 파쿠르를 좋아하지만 딱히 나쁜 짓을 하지도 않았잖아. 나는 역시 좋은 사람이야.’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네가 나쁜 일을 하지 않았으면 네게 패괴 성품이 없는 것이냐? 네가 사악한 흐름 속에서 산다면 그것은 네 마음이 사악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는 충분한 증거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환경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냐, 작으냐? 지금 너는 교회에서 본분을 이행하고 있고, 매일 형제자매와 함께 지내고, 주변 모두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 이런 환경에서 착실하게 하나님을 믿고 있다. 네가 만약 이방인 사이에 놓여서 그들과 함께 생활한다면 네 마음속에 여전히 하나님이 있을 수 있겠느냐? 만약 네가 그들과 접촉하거나 그들과 함께 산다면, 너는 그들처럼 흐름을 따르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은 “괜찮아요. 하나님이 저를 돌보시고 지켜 주시니 저는 그 길로 나아가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할 것이다. 네가 감히 그렇게 장담할 수 있느냐? 네 마음속으로 그런 것들을 좋아하고 따른다면, 너는 제멋대로 흐름을 따를 수도 있다. 설사 속으로는 옳지 않다는 걸 안다 해도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이 일은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속으로 멋대로 말하고는 시간이 지나면 네 마음속에 꾸짖음도 느낌도 없어질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대체 어디 계시지? 나는 왜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항상 하나님을 의심하면 원래 있던 믿음도 조금씩 사라지게 된다. 그러다가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완전히 부인하게 되면 너는 하나님을 따르기가 싫어지고, 본분을 이행하기는 더더욱 싫어질 것이며, 애초에 왜 본분 이행을 선택했는지 후회하게 될 것이다. 왜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겠느냐? 사실, 너는 그때서야 변한 것이 아니다. 본래 너에게는 진리 실제가 없다. 겉으로 보면 너는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 것 같지만 네 안에 있는 세상에 속하고 사탄에 속한 그런 생각과 관점, 처세 방식, 패괴 성품이 아직 제거되지 않았다. 너는 내면에 아직도 사탄에 속하는 그런 것들을 담아 두고 있고, 여전히 그것들에 기대어 살고 있다. 따라서 너는 분량이 아주 작고, 여전히 위험한 단계에 있고, 확실치 않고, 안전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너에게 사탄 성품이 있는 한 너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배신할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너는 사탄에 속하는 것들과 사악한 것들이 어떤 것인지, 이것의 위험성은 무엇이며, 사탄이 왜 이렇게 하는지, 사람이 이것을 받아들였을 때 어떤 독에 중독될 수 있는지,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야 한다. 또한,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떠한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는지, 어떤 것이 정상 인성인지, 무엇이 긍정적인 것이고 무엇이 부정적인 것인지 알아야 한다. 너는 분별할 줄 알아야 하고 똑똑히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길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적극적인 측면에서 능동적으로 본분을 이행하고 네 진심과 충성심을 바쳐야 하며, 교활한 수단으로 자기 이익을 챙겨서는 안 된다. 또 이방인의 견해와 사탄 철학으로 네 본분을 대하거나 하나님이 네게 맡긴 부탁을 대해서도 안 되고, 마땅히 하나님 말씀을 많이 먹고 마시고 각 측면의 진리를 구하여 이해하며, 본분 이행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한 후에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각 측면의 진리를 실행하고 진입함으로써 차츰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을 인식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너도 모르는 사이에 너의 내적 상태가 바뀌게 된다. 긍정적인 것은 늘고 부정적인 것은 줄어들며, 적극적인 것은 늘고 소극적인 것은 줄어들며, 분별력도 전보다 더 좋아진다. 분량이 이 정도로 커지면 너는 세상의 모든 사람과 일, 사물에 대해 분별력이 생길 것이고,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게 될 것이다. 예컨대 이방의 영화를 본다면, 너는 사람들이 그것을 본 후 어떤 독에 중독되는지, 사탄이 이런 방식과 이런 흐름을 이용하여 사람에게 어떤 것을 주입하고 심어 주려고 하는지, 사람을 어떤 것으로 잠식하려고 하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다. 너는 점차 꿰뚫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네가 그것을 본 후에 중독되지 않고 분별할 수 있게 되면, 그때 비로소 네게 진정으로 분량이 있게 된다.

어떤 젊은이들은 슈퍼히어로 영화나 판타지 영화를 보고 자신도 영화 속 주인공처럼 초능력을 갖고 싶다는 소망을 품는다. 이것이 해를 입은 것 아니겠느냐? 그런 영화를 보지 않으면 그런 것에 해를 입겠느냐? 그럴 수 없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무슨 뜻이겠느냐? 너는 이 사악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네 분량이 작고 어려 분별력이 없을 때 그 사악한 흐름 속의 것들을 먼저 받아들여 긍정적이고 정상적이고 정당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사람을 해치는 한 가지 방식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사탄이 사악하냐, 사악하지 않으냐?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방법은 참으로 여러 가지가 있다! 이런 영화를 본 사람은 모두 이런 소망을 품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아이가 판타지 영화를 보고 난 뒤, 시간이 날 때마다 마당에서 빗자루를 탔다. 처음에는 아무리 해도 날 수가 없었는데 어느 날 정말로 날아올랐다. 아이 스스로 날아오른 것이 아니라 외계의 힘이 아이를 날게 한 것이다. 날아오르자 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영화 속 그 사람처럼 괴상한 소리로 외쳤는데, 이것은 어떤 영이 그 아이에게 들어간 것이다. 빗자루를 타는 것이 인류의 정상적인 생활의 일부이냐? 말이나 나귀를 타면 되는데 왜 굳이 빗자루를 타야 하며 또 날기까지 해야 하느냐? 이게 가능한 일이냐? 딱 봐도 정상인이 하는 행동은 아니다. 빗자루는 날아오를 수도 없다. 악령의 도움이 있어야만 날아오를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탄 악령이 한 짓이다. 사탄 악령은 사람이 상상할 수도 없는 괴상하고 황당한 짓, 정상인이 하지 않는 그런 짓들만 한다. 너희는 사탄이 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분별할 수 있느냐? 너희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겠느냐? 그런 것들을 버려야 하지 않겠느냐? 시간이 나면 자신을 반성하고, 자기 생각 속에 또 어떤 괴상한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어째서 너희 생각 속에 괴상한 것들이 많은 것이냐? 너희 세대의 사람들이 해를 너무 많이 입었기 때문이다. 다들 지붕을 넘어다니고 벽을 타고 오르고 싶어 하고, 스파이더맨이나 배트맨이 되고 싶어 하고, 또 고등 동물이 되고 싶어 한다. 이것은 정상적인 인성이 가져야 할 것도 아니고, 갖춰야 할 것도 아니다. 정상적인 인성에 필요한 것이 아닌데도 네가 집요하게 추구하고, 굳이 시도하고 체험해 보려고 노력한다면 악령 역사를 자초하게 될 수도 있다. 악령이 들리면 곤란해지고, 사탄에게 사로잡히게 되며, 너는 위험해진다.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해결하겠느냐? 사람이 항상 시험에 빠지지 않고 사탄에게 미혹되지 않게 해 달라고 하나님에게 간절히 바라야 한다. 이 사악한 시대에, 마귀와 더러운 귀신 떼가 판치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은총과 보호가 항상 함께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하나님이 널 보살피고 지켜 주어 네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하고, 마음과 정직함으로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 길이 옳지 않으냐? (옳습니다.) 너희가 이 길로 가길 원하느냐? 너희는 항상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 속에서 살고 하나님의 징계 아래에서 살기를 원하느냐, 아니면 자신의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기를 바라느냐? 만약 하나님이 너희를 징계하여 가끔 너희 육체를 조금 고통스럽게 한다면 너희가 그러길 원하느냐? (원합니다.) 너희가 지금은 원한다고 말하지만, 사실로 닥치면 원망할 수도 있다. 고통받기를 원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너는 진리를 향해 노력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진리를 깨달아야만 굳게 설 수 있다. 젊은이들이 아직 성품이 정립되지 않고 올바른 일을 하지 않으며, 올바른 일을 마음에 두지 않고 하나님 말씀도 읽지 않으려 하고 진리를 향해 노력하려고 하지 않아서 걱정이다. 이것은 위험한 일이다. 결국 죽을지 살지 확실하게 말하기 어렵다. 지금 일부 젊은이들이 몇 년 동안 설교를 듣고 진리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고, 설교를 들을 때 받아 적으려 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느낌을 가지며 진리를 깨달을 수도 있다. 이것은 이미 기초가 생긴 것이다. 진리가 사람의 마음속에 뿌리내리기만 하면 훨씬 안전해진다. 그런 뒤에 계속 진리를 향해 노력한다면 반드시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여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너희는 가장 큰 지혜가 무엇인지 아느냐? 너희의 지금 분량으로 너희는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무엇을 가장 중시해야 하는지, 어떻게 추구하고 실행해야 가장 큰 지혜인지 알고 있느냐? 어떤 이들은 겉보기에는 아무 능력도 없고 과묵하여 매일 몇 마디 말도 하지 못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그 누구에게도 없는 가장 큰 지혜가 하나 있다. 그 지혜는 일반인들은 알아채지 못하고, 설령 알아챈다고 해도 그것이 지혜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불필요하고 가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너희는 그가 가진 가장 큰 지혜가 무엇인지 생각해 낼 수 있느냐? (항상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고 하나님께 자주 기도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근접하게 대답했구나. 하나님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목적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목적은 무엇이냐? 하나님에게 의지하기 위함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에게 의지하기 위한 것이다. 매사에 하나님에게 의지하면 하나님이 너를 깨우쳐 주고 인도해 주고 이끌어 준다. 너는 장님처럼 어둠 속에서 더듬을 필요 없이 그냥 하나님 말씀대로 하면 훨씬 수월하지 않겠느냐? 쓸데없이 헛수고할 필요 없이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면 간단하고 빠르다. 네가 고생스레 품을 들이며 시행착오를 겪을 필요도 없고, 하나님이 분명하게 말해 줄 것이니 너는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이것이 지혜 아니겠느냐? 이렇게 말하면 알아들었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매사에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하는 것은 가장 큰 지혜이다. 이는 평범한 사람이 인식하지 못하는 점이다. 사람은 모두 예배에 자주 참석하고 설교도 많이 듣고 형제자매들과 많이 교제하고 또 많이 버리고 고생하며 많은 대가를 치르면 하나님께 칭찬받고 구원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실행하는 것이 가장 큰 지혜라고 말이다. 하지만 사람은 가장 중요한 문제, 즉 하나님을 앙망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을 간과한 채 사람의 잔꾀를 지혜로 여기고, 그런 행동이 마지막에 어떤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지 간과한다. 이는 잘못된 것이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 진리를 깨달았든, 얼마나 많은 본분을 이행했고 본분을 이행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체험했든, 분량이 크든 작든, 어떤 환경에 처해 있든 떠날 수 없는 것은 바로 매사에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이는 가장 큰 지혜이다. 어째서 가장 큰 지혜라고 하겠느냐? 사람이 일부 진리를 깨달았다 한들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으면 되겠느냐? 어떤 이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고 몇 번의 시련을 겪으면서 어느 정도 실제 체험이 있어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달았고 진리에 대한 실제적인 인식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 의지할 줄 모르고, 어떻게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해야 할지 모른다. 그런 사람에게 지혜가 있겠느냐? 그런 사람은 가장 어리석은 자로, 젠체하는 부류에 속할 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많은 진리를 깨달았고, 진리 실제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니 일을 처리할 때 원칙대로만 하면 됩니다. 저는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며, 어떻게 하나님께 다가가야 하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일이 닥쳤을 때 진리를 실행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도 없고 하나님을 앙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진리를 실행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하지만 사람은 많은 경우, 많은 상황에서 관련된 진리가 무엇인지, 진리 원칙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실제 체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이런 경험을 해 봤을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일이 닥쳤는데 네가 그 일에 관련된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고, 그 측면의 진리를 어떻게 실행하고 적용해야 할지 모른다면, 그럴 때 어떻게 해야겠느냐? 아무리 실제 체험이 있다고 해도 모든 일에서 다 진리 원칙을 안다고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을 아무리 오래 믿었다고 한들, 체험한 일과 겪은 책망 훈계, 징계가 아무리 많다고 한들, 설령 네가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도 네가 진리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느냐? 네가 진리의 근원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느냐? 어떤 이들은 “저는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의 명구들을 막힘없이 외우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의지하거나 앙망할 필요가 없지요. 때가 됐을 때 하나님의 그런 말씀에 의지하면 됩니다.”라고 말한다. 네가 외운 그 말씀들은 죽은 글귀이고, 사람이 처한 환경이나 내적 상태는 살아 있는 것이다. 글귀와 도리를 말할 수 있어도 일이 닥쳤을 때 전혀 적용할 줄 모른다면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했음을 증명한다. 글귀와 도리를 아무리 잘 말할지라도 진리를 깨달았다고 할 수는 없으며, 진리를 실행할 줄 안다고는 더욱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여기에 아주 중요한 공과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무슨 공과겠느냐? 매사에 하나님을 앙망해야 하며, 하나님을 앙망함으로써 하나님께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만이 실행 길을 얻을 수 있고, 성령 역사를 얻을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일을 옳게 행하고, 진리를 어기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기에 그것은 사람의 좋은 행위에 불과한 것으로, 하나님은 흡족해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이해한 진리는 얕기 때문에 각기 다른 환경 속에서 늘 동일한 진리로 규례에 맞추고 글귀와 도리를 고수하게 된다. 어쩌면 많은 일을 처리했고, 그것이 대체적으로 진리 원칙에 부합할 수도 있다. 하지만 거기에서는 하나님의 인도와 성령 역사를 찾아볼 수 없다. 그렇게 되면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바로 많은 일을 할 때 사람이 알고 있는 경험과 규례, 그리고 사람의 일부 상상에 의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앙망하며 의지하여 일을 하기 어렵다. 설령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 해도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진리 원칙에 근거해 일하는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매사에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하는 것이 가장 큰 지혜라고 말한다.

매사에 하나님을 앙망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을 어떻게 실행해야 하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이도 어리고 분량도 작은 데다가 하나님을 믿은 기간도 얼마 안 돼. 그래서 일이 닥쳐도 어떻게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해야 하는지 몰라.” 이는 문제가 아니겠느냐? 하나님을 믿을 때는 많은 난관에 부딪히며, 수많은 환난과 시련, 고통을 겪어야 한다. 이런 일에서 모두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해야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다. 하나님을 앙망하거나 의지하지 못한다면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없고, 하나님을 따를 수도 없다.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한다는 것은 공허한 도리가 아니며, 하나님을 믿을 때 쓰는 입버릇도 아니다. 그것은 핵심적인 진리, 하나님을 믿고 따를 때 반드시 갖춰야 할 진리이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하는 것은 큰일이 닥쳤을 때만 적용돼. 예를 들어 환난과 시련이 닥치거나 체포되거나 박해받을 때, 혹은 본분을 이행하다가 난관에 부딪히거나 책망과 훈계를 받을 때는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해야 해. 하지만 사생활의 사소하기 그지없는 작은 일에서까지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할 필요는 없어. 하나님이 그런 것까지 신경 쓰시지는 않으니까.”라고 하는데, 이 말이 맞겠느냐? 절대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오류가 있다. 큰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하나님을 앙망해야 한다. 하지만 생활 속 자질구레하고 사소한 일에 원칙이 없으면 되겠느냐? 옷 입고 밥 먹는 것 같은 일에 원칙이 없으면 되겠느냐? 절대 안 된다. 사람이나 사물을 대할 때 원칙이 없으면 되겠느냐? 역시 안 된다. 일상생활의 일, 사소하기 그지없는 작은 일에서도 최소한 원칙이 있어야만 사람다운 모습으로 살 수 있다. 원칙과 관련된 문제는 진리와 관련된 문제인데 사람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겠느냐? 분명 해결할 수 없다. 그러니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의 깨우침을 얻고 진리를 깨달아야만 이 사소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말해 보아라. 하나님을 앙망하지도 의지하지도 않는다면 원칙과 관련된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겠느냐? 쉽사리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사람이 밝히 알지 못하는 일, 진리를 구해야 하는 일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해야 한다. 그것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진리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면 항상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해야 한다. 이는 필수이다. 설령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하더라도 제한적이고 얕아 하나님을 앙망하거나 의지하지 않는다면 깊이 진입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네가 오늘 몸이 안 좋아 본분 이행에 지장을 주었다고 해 보자. 너는 이 일로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오늘 저는 몸이 좋지 않아 밥을 먹을 수가 없었고, 본분 이행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돌아보겠습니다. 대체 무엇 때문에 병에 걸린 걸까요? 본분 이행에 충성을 다하지 않아 하나님의 징계가 임한 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저를 깨우치고 인도해 주십시오.” 이렇게 부르짖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앙망할 때는 형식만 취하고 규례를 지켜서는 안 된다. 문제가 닥쳤는데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는다면 일을 그르치게 된다.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하나님을 앙망한 후에 네가 마땅히 살아야 하는 바대로 살고, 마땅히 이행해야 하는 본분을 지체해서도 안 된다. 병으로 고통스럽다면 병원에 가야 한다. 이는 합리적인 행동이다. 이와 동시에 기도하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렇게 실행해야 흠잡을 데 없이 적절하다. 어떤 일에서 어떻게 해야 적절한지를 알았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이는 사람이 협력해야 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온전히 성과를 내고 목적을 이룰 수 있을지 여부는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하는 데 달려 있다. 사람이 밝히 알지 못하는 일, 혼자 처리할 수 없는 일이라면 더더욱 하나님을 앙망하고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이는 정상 인성에 갖춰져야 할 부분이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데는 배워야 할 많은 공과가 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과정에서 성령이 깨우쳐 주어 길이 생길 수도 있고,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해 어떻게 협력해야 할지 알게 될 수도 있으며, 하나님이 환경을 마련하여 네가 공과를 배우게 할 수도 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 있다. 너는 하나님을 앙망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인도하고 이끌어 준 덕에 수많은 공과를 배우고, 하나님에 관해 더 많은 인식을 얻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앙망하여 얻은 성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 시시각각 배워야 할 공과이다. 이는 평생 체험해도 끝나지 않는다. 너무 얕게 체험하여 하나님의 행사를 보지 못한 채 ‘사소한 일은 대부분 스스로 처리할 수 있으니까 하나님을 앙망할 필요는 없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작은 일이 큰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작은 일에도 하나님의 뜻이 숨어 있다. 많은 사람이 작은 일을 간과했다가 결국 작은 일에서 큰 좌절을 겪는다.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하나님을 앙망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고 이끄는지 본다. 이렇게 체험한다면 매사에 하나님을 앙망할 수 있으며, 체험하면 할수록 매사에 하나님을 앙망한다는 말이 더없이 실제적이라고 느껴질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앙망해도 하나님이 네게 어떤 느낌이나 명확한 뜻을 주지 않을 수 있고, 더욱이 분명한 가르침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네가 그 일과 정확히 관련 있는 한 가지 뜻을 깨닫게 한다. 이는 바로 하나님이 다양한 방식으로 너를 인도하고 네게 길을 주는 것이다. 네가 깨닫고 이해할 수 있다면 도움을 얻을 것이다. 혹은 이번에는 뭔가 깨닫지 못했더라도 계속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앙망해야 한다. 이는 틀림이 없으며, 언젠가는 깨우침을 얻게 될 것이다. 그렇게 실행하는 것은 규례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영이 필요로 하는 일이며,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실행이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앙망할 때마다 깨우침과 인도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은 반드시 이렇게 실행해야 한다. 진리를 깨달으려면 이렇게 실행해야 한다. 이는 생명 영 안에 마땅히 갖춰져야 할 정상적인 내적 상태이다. 이렇게 해야만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고,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은 사람 마음과 하나님의 정상적인 교제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깨우침과 인도를 얻을 수 있든 없든 매사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앙망해야 한다. 이 또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필연적인 경로이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을 앙망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이는 정상 인성에 갖춰져야 할 마음 상태이다. 때로,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은 명확한 말로 하나님께 어떤 것을 해 달라고, 인도해 달라고 구하거나 지켜 달라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이 닥쳤을 때 진심으로 부르짖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겠느냐? 사람의 마음이 동요되어 ‘하나님, 저는 이 일을 할 줄 모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연약하고 소극적입니다….’라고 생각할 때, 사람에게 이런 생각이 일어날 때 하나님은 바로 알지 않겠느냐? 이러한 생각이 들 때 사람의 마음은 진정성이 있지 않겠느냐? 사람이 이렇게 진정성을 가지고 부르짖는다면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겠느냐? 때로 사람이 입을 열어 말하지 않더라도 진심이 움직였다면 하나님은 응답한다. 어려움이 닥쳐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아무 데도 기댈 곳 없을 때, 매우 무기력하다고 느낄 때 사람은 유일한 희망을 하나님께 건다. 그럴 때 사람의 기도는 어떠하겠느냐? 사람의 마음가짐은 어떠하겠느냐? 진심이 아니겠느냐? 거기에 불순물이 있겠느냐? 네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며 도와주기를 바랄 때 비로소 네 마음에 진정성이 생긴다. 말은 몇 마디 하지 않았을지라도 네 마음은 이미 움직인 것이다. 네가 참된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은 들어준다. 네 기도를 들었을 때 하나님은 네 어려움을 보고 너를 깨우치고 인도하며 도와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언제 가장 간절하겠느냐?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을 앙망하는 마음이 가장 간절한 것이다. 하나님을 앙망할 때 무엇보다 갖춰야 할 것은 간절한 마음, 진실로 하나님을 원하는 내적 상태이다. 최소한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지 무성의하게 대하거나 마음은 움직이지 않고 입만 놀려서는 안 된다. 만약 네가 입으로만 대충 하나님께 이야기할 뿐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것은 ‘나는 일찌감치 계획해 뒀어. 하나님께는 통보만 하는 거야. 하나님이 동의하시든 안 하시든 나는 그대로 행동할 거야. 지금은 그냥 형식만 따르는 거라고.’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문제가 있다. 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을 기만하고 우롱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을 경시하는 태도이다. 그럼 하나님은 너를 어떻게 대하겠느냐? 틀림없이 너를 외면하고 한쪽에 내버려둔 채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며, 너는 더없이 부끄러워질 것이다.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진리에 공을 들이지 않는다면 너는 내쳐질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런 내적 상태이다. 대부분 시간을 아무 생각도 인식도 없는 상태에서 산다. 특별한 일이나 큰 어려움이 없으면 하나님에게 기도하거나 의지할 줄 모르고, 일반적인 일이 닥쳐도 진리를 구할 줄 모르고 지식과 도리, 자기 뜻에 따라 살며,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옳은 줄 알면서도 여전히 자신에게 의지하고 주변의 유리한 조건, 환경, 사람, 일, 사물에 의지할 때가 많다. 이것이 사람이 가장 잘하는 일이다. 사람이 가장 못하는 일은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을 앙망하는 일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을 너무 귀찮아 하고, 아무리 기도해도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지 못하며, 곧장 답을 얻을 수도 없기 때문에 편하게 하려고 사람을 찾아가 해결한다. 따라서 사람은 이 부분에서의 공과가 가장 부족하고 진입도 가장 얕다. 하나님을 앙망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너는 하나님이 너에게 한 사역, 인도, 깨우침을 보지 못할 것이다. 이런 것을 보지 못하면 너의 마음속 깊은 곳엔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하나님이 사람의 모든 생활을 인도하는지에 대해 마침표도 느낌표도 아닌 물음표가 남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모든 생활을 인도하실까?’,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하실까?’라고 생각하면 문제가 된다. 너는 어찌하여 여기에 물음표를 붙이느냐?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의지와 앙망이 없다면 너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생길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너는 하나님이 행한 모든 것에 대해 영원히 물음표가 남게 될 것이며 종지부를 찍을 수 없을 것이다. 너희는 시간이 날 때마다 자신에게 이렇게 물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주재하신다고 믿는데 이 말 뒤에 붙은 것이 물음표일까, 마침표일까, 아니면 느낌표일까?’ 속으로 생각해 보아도 자신이 대체 어떤 내적 상태인지 선뜻 확실하게 말할 수가 없다. 그러다가 몇 가지 일을 체험하고 나면 분명히 알고 “하나님이 분명히 만물의 주재자셔!!!”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게 된다. 문장 끝에 느낌표를 세 개나 붙이면서 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재에 대해 어떤 의심도 없이 정말로 인식이 생긴 것이다. 너희는 어떤 내적 상태이냐? 너희의 지금 분량과 내적 상태를 보면 물음표가 다수를 차지하는 데다가 또 물음표가 여러 개나 있다. 이것은 너희가 진리를 조금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아직도 의구심이 남아 있다는 의미이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의구심이 많아지면 이미 위험의 경계선에 이른 것이며, 언제든 넘어져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다. 어째서 사람의 분량이 작다고 하겠느냐? 무엇을 보고 사람이 가진 분량의 크기를 확정할 수 있느냐? 바로 네가 하나님에게 진실한 믿음을 얼마나 가졌는지, 진실한 인식을 얼마나 가졌는지에 달려 있다. 너희는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 검증해 보았느냐? 많은 젊은이들이 부모와 함께 하나님을 믿고, 부모에게서 하나님을 믿는 도리를 이해하며, 하나님을 믿는 것이 좋은 일이고 긍정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깨달아야 하는 진리는 아직 참으로 깨닫지 못했고, 체험하지도 검증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물음표가 너무 많고 관념도 너무 많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말은 긍정문도 감탄문도 아닌 의문문이다. 이것은 부족함이 너무 많고, 아직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한 것이며, 굳게 설 수 있는지조차 확실하게 말하기 어렵다. 20~30대 연령층에 있는 너희에게 이런 물음표가 많은 것은 정상이다. 하지만 너희가 한동안 본분을 이행한다면 이 물음표들을 얼마나 없앨 수 있겠느냐? 이 물음표들을 느낌표로 바꿀 수 있겠느냐? 이것은 너희의 체험에 달려 있다. 이것이 중요하지 않으냐? (중요합니다.) 이것은 너무도 중요하다! 조금 전에 내가 사람의 가장 큰 지혜가 무엇이라고 했느냐? (매사에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무 단순하고 저속한 말이에요. 요즘은 아무도 그런 상투적인 말을 하지 않아요.” 하나님을 앙망한다는 것이 너무 평범한 실행 방법처럼 들리지만,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이 평생에 걸쳐 배우고 진입해야 하는 공과다. 욥은 일흔 살이 넘어서도 하나님을 앙망하지 않았느냐? (앙망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나님을 앙망했느냐? 그가 하나님을 앙망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구체적인 모습이 무엇이냐? 그가 재산과 자식을 빼앗겼을 때 어떻게 하나님을 앙망했느냐? 그는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겉으로도 행동을 했다. 성경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느냐?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욥 1:20)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몸을 굽혀 절하는 것은 하나님을 앙망하는 행동이다! 매우 경건한 것이다. 너희는 그럴 수 있느냐? (아직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그런 경지에 다다르길 원하느냐? (원합니다.) 욥과 같은 경지에 다다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다면 완전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완벽하다! 하지만 본분을 이행하는 기간 동안 너희는 고통받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하고, 진리를 향해 계속 노력해야 한다. 진리를 깨닫고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되면, 하나님의 요구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너희는 이것만 기억하면 된다.

2015년 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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