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조 그는 사람들이 진리와 하나님이 아닌 오직 그에게 순종하도록 한다(3) 제 1 부
참고 동서양의 전통문화를 해부하다
말해 보아라, 무엇이 진리이냐? 예전에 이 주제를 교제한 적이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럼 너희 자신의 언어로 한번 말해 보아라, 무엇이 진리이냐? (진리는 모든 사람과 일, 사물을 평가하는 원칙이자 준칙입니다.) 좋다. 누가 또 말해 보아라. 다른 주장은 없느냐? 도리에 관한 어떤 말이나 하나님의 어떤 말씀을 써서 대답하려 하지 말고 자신이 실제로 체험한 언어나 실제 인식으로 대답해 보아라. 얕아도 괜찮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진리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렇게 말할 줄만 알고 그 말이 실제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인식하지 못한다면 네게 그 말은 도리에 불과하다. 더 나아가 말해 보자. 무엇이 진리이냐?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이겠느냐? 하나님 말씀의 본질이란 또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생각으로 만들어 낸 준칙이 진리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정리한 경험과 배운 지식, 혹은 사회 문화나 사회적 배경하에 생겨난 전통문화가 진리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사람이 스스로 정리해 낸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원칙이 진리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진리겠느냐? 여기서 말하는 원칙이 구체적으로 무언가를 가리키게 하려면, 사람들이 듣자마자 그것을 진리라고 생각하게 하려면 그것을 어떻게 규범화해야겠느냐? 어떻게 말해야 간결하고 정확하다는 느낌을 주겠느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모두 진리입니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모두 진리이다. 그것은 옳은 말이다. 더 정확히는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느냐? (진리는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입니다.) 이것은 예전에 자주 하던 이야기다. 예전에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가 전부 진리라고 자주 이야기했다. 또 뭐가 있느냐? (진리는 사람이 행동하고 처신하는 준칙이자 길입니다.) 사람이 행동하고 처신하는 준칙이자 길이다. 이 역시 맞는 말이다. 그럼 이 몇 가지 측면을 하나로 정리해 무엇이 진리인지 간결한 말로 정의해 보아라. (하나님이 바로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진리라는 말은 너무 포괄적이고 막연하다. 듣고 나면 그 정의가 공허하지 않고, 제법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며 정확하다고 느끼고, 아주 적절하다고 느낄 수 있도록 좀 더 구체적이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해야 더 정확할지 너희가 다시 정리해 보아라. (진리는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준칙이라고 상부에서 교제한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이 간결하지 않으냐? (간결합니다.) 진리는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준칙이다. 왜 준칙이라고 정의하겠느냐? ‘준칙’이라는 단어는 글자상으로 보면 어떻게 이해해야겠느냐? (정확한 원칙입니다.) 정확한 원칙이자 법칙이며, 규칙이라고 할 수도 있다. 여기서 ‘준’은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기준을 가리킵니다.) 기준이 되는 정확한 법칙이자 원칙이 바로 준칙이다.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준칙’에서 앞의 그 몇 가지 정의가 정확하다면 그 준칙은 무엇과 관련 있겠느냐? 여기서 말하는 준칙은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앞에서 정의한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준칙이 바로 진리이다. 그럼 사람들이 이 말을 보고 나서 ‘우리의 전통문화도 진리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겠느냐? 그걸 진리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없다. “우리가 진행한 어떤 학술 연구의 결론은 진리입니다.”, “우리 민족의 어떤 문화와 체험, 좋은 도덕 기준도 진리입니다.”라고 말하고 정의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왜 그런 것들로 진리를 정의할 수 없겠느냐? 왜 그 몇 가지 모두 진리와 무관하다고 하겠느냐?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과 관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그것들도 처신과 관련 있을 수는 있지만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그것들이 말하는 처신은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그것들의 기준과 법칙은 무엇이겠느냐? 사탄에게서 비롯된 좋은 행동이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게 아니다. 사탄을 경배하고 지키는 것이고 사람의 상상과 관념, 사람이 생각하는 좋은 도덕이나 행위에서 정리해 낸 일련의 처신에 관한 가르침이나 문화이지, 진리와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중국인들은 전통문화 하나를 정리해 냈는데, 그 전통문화는 중국인에게만 적합하고 서양인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서양인들도 그들만의 민족 영웅과 민족 기개, 민족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럼 그들의 문화를 동양에 가져오면 동양인이 받아들이겠느냐?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니 사람이 보기에 그런 문화가 아무리 좋고 전통이 아무리 고상한들 진리와 관련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관련이 없다. 예를 들어, 동양의 전통문화에서는 부엉이를 길조로 여기지 않는다. 민간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부엉이 우는 것이 무서운 게 아니라 부엉이 웃는 게 무섭다. 부엉이 소리를 들으면 틀림없이 안 좋은 일이 생긴다.” 동양의 전통문화에서는 부엉이를 불길하고 재수 없는 동물로 여긴다. 그럼 그렇게 ‘재수 없는’ 동물을 동양인이 좋아하겠느냐? (좋아하지 않습니다.) 좋아하지 않는 근거는 무엇이겠느냐? 동양의 전통문화와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에 근거해 “부엉이 울음소리를 들으면 집안에 반드시 초상이 난다.”라고 말한다. 그건 정리해 낸 규칙일 수도 있고 사람의 상상이나 우연일 수도 있는데,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부엉이가 나쁘다고, 누구도 부엉이를 받들면 안 된다고, 부엉이를 길조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부엉이만 보면 반가워하지 않고 내쫓기 바쁘다. 이건 일종의 문화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런 문화 역시 일종의 민간전승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동양에서, 특히 중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이런 문화를 특별히 인정한다. 모두가 마음속으로 부엉이는 좋은 동물도, 길조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보는 순간 서둘러 피한다. 반면 서양에서는 부엉이를 길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부엉이 조각상이나 그림으로 장식을 하기도 하며 각종 자수 작품과 토템에도 부엉이 도안이 있는 등 부엉이를 길조로 여긴다. 길조로 여긴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느냐? 그 동물이 행운을 가져다주고 그 울음소리를 듣거나 그것을 보면 불운이 닥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는 서양의 한 민간 전통문화다. 우리는 동서양의 이 두 가지 문화 중 무엇이 맞고 틀린지는 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평가는 하지 않겠지만 이를 통해 하나님이 만든 같은 동물에 대해 동서양의 생각과 관념이 다르며 완전히 딴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양인은 부엉이가 좋은 동물이 아니라고, 부엉이가 웃든 울든 모두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반면 서양인은 부엉이가 울든 웃든 모두 길하고 부엉이를 보면 행운이 올 것이라고 생각해서 부엉이를 길조로 대한다. 부엉이를 재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길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 두 가지 생각이나 취급법 모두 전통문화에서 비롯된다. 지금 보면 어느 것이 진리에 부합하고 어느 것이 진리에 부합하지 않겠느냐? (둘 다 진리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모두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무엇을 근거로 한 말이냐? (두 관점 모두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 부엉이는 길조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의 근거는 무엇이겠느냐? 동양의 전통문화이다. 무엇이 길하고 무엇이 불길한지, 무엇이 사람에게 재앙을 불러오는지, 무엇이 재수 없고 무엇이 상서로운지 그는 전통문화를 근거로 평가한 것이고 상상 관념을 근거로 그런 생각을 정리해 내고 그런 문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서양인은 부엉이가 사람에게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는데, 물론 이는 부엉이가 재수 없다고 생각하는 취급법이나 생각보다는 좀 더 낫고 진보적이다. 부엉이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게 하니 최소한 부엉이를 보고 나서도 마음이 안정되고, 보고 나서 재수 없다고 생각할 때보다 좀 더 기분이 좋다. 그러나 이런 인식법이 네게 무엇을 얻게 하겠느냐? 부엉이가 정말 네게 행운을 가져다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만약 네가 중국에서 태어났다면 부엉이가 정말로 네 운수를 결정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여기서 무엇을 알 수 있느냐? 그런 생물이 불운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든,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든 그건 사람의 생각과 관념일 뿐 사실이 아니다. 이는 무엇을 증명하느냐? (전통문화는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렇다. 어떤 문화든 진리는 아니다. 부엉이를 어떻게 대해야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이는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준칙과 관련 있다. 여기서 말하는 준칙이란 무엇이겠느냐? 어떤 관점을 가지고 그런 생물을 바라봐야 하는지를 말한다. 그런 생물이 너의 곁에 나타났을 때, 그것이 울든 웃든 그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준칙과 관련 있다. 그럼 그 준칙은 무엇이겠느냐? (진리입니다.) 그 준칙이 바로 진리이다. 그것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네 근거는 무엇이냐? (하나님의 말씀이 근거입니다.) 그럼 그런 생물을 대하는 것에 관해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했느냐?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았다. “너는 반드시 부엉이를 올바르게 대해야 한다. 이 일에서는 치우쳐서도, 그것이 재수 없다고 말해서도, 그것이 네게 행운을 가져다줄 거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너는 부엉이를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대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다. 그럼 무엇을 근거로 부엉이를 대하는 네 관점이 준칙과 진리에 부합하게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근거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근거로 해야 한다. 그게 바로 진리이다. 만물은 하나님의 손안에서 각각의 기능과 사명, 존재 가치를 갖는다. 또 무엇이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모두 좋은 것입니다.) 그렇다.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은 모두 좋은 것이고 존재 가치가 있으며 존재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고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라면 그것은 절대 쓸데없을 리 없다. 여기서 ‘쓸데없지 않다’는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그것이 아무렇게나 사람에게 불운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작은 부엉이 한 마리가 아무렇게나 불운을 가져올 수 있겠느냐? 그럼 너무도 대단한 것 아니겠느냐? 인간과 부엉이 중에 무엇이 더 우월하겠느냐? 만물의 관리자는 인류이다. 인류가 부엉이의 운명을 좌우하고 마음대로 멸종시킬 수는 있어도 부엉이가 인간의 운명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 그런 생물을 대체 어떻게 대해야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대해야 한다. 만물은 모두 하나님이 창조했다. 여러 생물과 인류는 모두 하나님이 창조했다. 부엉이도 하나의 생물이므로 우리는 모든 피조물을 대하는 관점에 따라 그것을 대해야 한다. 우선, 그것의 생존 규칙을 제멋대로 파괴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부엉이의 습성과 특징은 낮에 잠자고 밤에 사냥하고 활동하는 것이다. 만약 다친 부엉이 한 마리를 좋은 마음에 거두어 키운다면 너는 그것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그것의 습성에 맞게 대해야 합니다.) 그렇다. 너는 그것의 생활 규칙을 지켜야 한다. 밤에 그것을 재우기 위해 자지 않는다고 수면제를 먹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옳지 않다. 만약 그것이 밤에 계속 시끄럽게 울어 네 휴식을 방해한다면 그것을 네 휴식을 방해하지 않는 곳에 두면 되지 그것의 생활 규칙을 깨뜨리거나 생존 방식을 위배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올바른 취급법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은 이런 관점으로 대해야 한다. 우선, 올바른 관점을 지녀야 한다. 이는 일을 처리할 때 가장 먼저 지녀야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행동하고 일을 처리할 때 이 올바른 관점을 활용해야 한다. 그러면 행동이 진리에 부합할 것이다. 이것을 바로 준칙이라고 한다. 준칙은 결국 정확한 법칙이나 규칙이다. 예를 들어, 고양이는 쥐를 보면 잡으려고 하는데, 쥐도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생각해서 고양이에게 쥐를 잡지 못하게 한다면 그건 잘못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런 처리 방법은 어떠냐? (규칙을 위배했습니다.) 자연의 규칙을 위배했다. 또 어떤 사람은 물속의 물고기를 보고 생각한다. ‘다들 물고기는 물을 떠날 수 없다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든 물고기가 물을 떠나 육지에서 살게 하겠어.’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물고기는 죽어 버린다. 이를 뭐라고 하겠느냐? (터무니없다고 합니다.) 터무니없다고 한다. 부엉이에 관한 일을 다룸으로써 준칙이란 무엇이고 준칙의 근거는 무엇인지 대략적으로 깨닫지 않았느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 준칙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럼 너희는 앞으로 부엉이를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만약 어느 날 밤 부엉이가 네 창가에 앉아 울면 너는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최소한 우리는 부엉이에게 울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것에게 울 권리를 줘야 한다. 만약 너무 시끄러우면 내쫓아도 되지만 내일 불운이 닥치지는 않을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 쓸데없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운명과 생사는 하나님의 수중에 있고 하나님이 주재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사물에 편견이 생기기 쉽고 나아가 상상 관념이나 미신을 품을 수도 있기 때문에 결국 많은 일에서 올바른 관점을 갖지 못하고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하며 모든 일에서 사람이 갖춰야 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준칙도 갖추지 못한다. 무엇 때문이겠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진리를 깨닫지 못해 초래되는 것이다.
어떤 동양인은 서양인과 접촉할 때 서양인이 콧대도 높고 눈도 크고 머리카락 색깔도 다양한 등 특색 있게 생기고 유독 분위기가 있는 걸 보고는 은연중에 서양인을 부러워하고 우러러보는 감정이 생긴다. 또, 접촉하는 과정에서 서양 문화도 끊임없이 받아들인다. 왜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그는 마음속으로 부러워하고 자신이 그들과 같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그는 외모는 하나님이 정했으니 바꿀 수 없지만 만약 서양인의 생활 방식과 그들이 먹고 입고 쓰는 것, 그들의 말과 사고방식, 문화와 가까워지면 자신도 고귀해진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은 어떠냐? 모두가 가지고 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동양인은 서양인을 모방하는 걸 좋아한다. 그들이 가장 먼저 모방하는 것은 커피를 마시는 것이다. 그들은 동양인이 차를 마시는 게 너무 미천하다고 생각해서 서양인을 따라 커피를 마신다. 특히 일부 동양인은 많은 서양인이 매일 아침 커피 한 잔을 들고 바쁘게 출근하는 모습을 보고 시간이 지나면서 따라 하게 된다. 때로는 바쁘지 않아도 그렇게 하는데, 이게 바로 모방이다. 사실 동양인은 그런 습관이 없지만 그들은 서양인의 습관이 좋다고, 존귀하고 우아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습관은 없지만 배우고 모방하려 한다. 익히고 나서 그 습관대로 생활하면 서양인의 일원이 되고 서양인처럼 변하지 않겠느냐? 이게 바로 마음속으로 서양인을 숭배하는 것이다. 마음에 들어서 배워 보는 건 괜찮지만 그런 습관을 익혀서 남에게 보여 주며 허세를 부린다면 그건 모방이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무슨 일을 하든 준칙이 없고 머리 없는 파리처럼 목표 방향도 없이 서양인을 보고 따라 하고 세상에서 유행하는 걸 보고 따라 한다. 이방인이 그러한데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런다면 그건 어떤 인간이겠느냐? (불신파입니다.) 그렇다. 그들의 행동에 기준이나 원칙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원칙이 없다. 왜 없겠느냐?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의 흐름이나 사악함을 숭상하고 하나님을 우러러보지 않으며 마음속으로 진리를 사랑하지도 않고, 진리를 받아들이거나 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모두 불신파다. 이런 사람은 그런 본질을 가졌기 때문에 교회 안에 있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듣더라도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준칙을 영영 찾지 못한다. 이 말은 이런 사람은 영영 진리를 얻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커피 마시는 걸 모방하는 것은 사람의 기호와 걷는 길, 행동 원칙을 드러낸다. 차를 마시는 게 진리겠느냐, 아니면 커피를 마시는 게 진리겠느냐? (모두 진리와 무관합니다.) 맞는 말이다. 그럼 무엇이 진리겠느냐?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건 모두 진리예요. 하나님께서는 계절에 맞게 음식을 먹는 게 신체에 이롭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게 진리예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맞는 말이다. 진리는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준칙이다. 그럼 처신하는 준칙은 무엇을 포함하겠느냐? 처신과 관련된 여러 측면의 진리를 포함한다. 일을 처리하는 준칙은 무엇이겠느냐? 일을 처리하는 방식과 방법이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준칙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안다. 준칙의 범위란 이런 것들을 가리키고 모두 진리와 관련 있다. 누가 “왜 차 마시는 걸 싫어해요?”라고 물으면 “차 마시는 걸 싫어하는 게 진리에 부합하지 않나요?”라고 답하고, 누가 “서양에 왔으니 커피를 좀 마셔 보는 게 어때요? 커피를 안 마시다니 정말 품위가 없네요!”라고 말하면 “저를 정죄하려는 건가요? 커피를 안 마시는 게 죄를 짓는 건가요? 품위가 진리인가요? 품위가 그렇게 가치 있나요?”라고 답해라. 아무런 가치도 없지 않으냐?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가치 없는 것이다! 그럼 이런 예시를 드는 것은 사람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겠느냐? 그런 사람과 일, 사물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그런 사람과 일, 사물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 이를 수 있는 것인지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 일들에서 사람이 깨닫고 구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실행해야 하는 여러 사물을 대하는 준칙이다.
한 가지 전통문화나 민족 정서가 ‘준칙’이라는 단어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이 준칙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라는 말이 준칙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또 누구는 “여성은 정숙해야 해요.”, “여성은 반드시 삼종사덕을 지켜야 해요.”라고 하는데, 그게 준칙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남성은 아내를 한 명만 가질 수 있고 바람을 피우면 안 된다.”라는 말이 준칙이겠느냐? 진리에 미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건 옳은 행위이고 도덕이며 인성의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것이지만 진리에 미치지는 못한다. 정상 인성의 도덕과 행위 기준에 부합할 뿐이다. 그럼 준칙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준칙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진리를 가리킵니다.) 준칙은 진리를 가리킨다. 진리에 미치지 못하면 준칙이 아니다. 알겠느냐? 방금 여성과 남성에 대한 전통문화의 요구를 언급했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요구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남성에게 어떻게 요구하느냐? 성경에서는 뭐라고 말하느냐? (땀 흘려 일해 가족을 먹여 살리라고 합니다.) 그것이 남성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자 남성이 가장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은 여성에 대해 어떻게 규정하느냐? (남편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했으면 그게 바로 진리이고 인간이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전통문화나 도덕경에서 비롯된 것은 아무리 옳다 한들 진리는 아니다. 왜 진리가 아니라고 하겠느냐?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으면 절대 진리가 아니다. 하나님 말씀의 요구와 무관한 것은 절대 진리가 아니다. 동양인은 무엇을 기준으로 여성을 정의하느냐? 동양인은 좋은 여성은 일단 상냥하고 어질며 온화하고 우아하며 사랑스러워야 하고, 결혼 후에는 온 가족을 잘 돌보고 불평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박덩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는 동양인이 만든 여성의 이미지이자 여성에 대한 동양인의 요구 기준이다. 이제 여성에 대한 서양인의 요구 기준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그들의 사상 관점에서 그들은 무엇을 교육하고 제창하겠느냐? 여성은 독립적이고 자유로우며 평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몇 가지가 서양에서 기본적으로 제창하는 여성의 권리이다. 이 여성의 권리에는 여성에 대한 기본적인 정의와 요구, 여성의 생활 방식이나 외모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이 담겨 있다. 그 개념은 무엇이겠느냐? 여성은 순종적이거나 가련해서는 안 되고 구박덩이처럼 하루 종일 고분고분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러면 좋지 않다고, 여성은 강인하고 호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서양인의 마음속 여성에 대한 요구 기준이다. 그들은 여성이 꼭두각시처럼 매일 외부의 압박을 참고 견디며 남이 꾸짖거나 명령을 내리길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여성이 적극적이고 독립적으로 행동해야 하고 패기 있어야 한다고 제창한다. 물론 우리가 이해한 것이 그들의 생각과 완전히 맞아떨어지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동양과 서양의 여성은 대체로 이런 차이를 보인다. 그럼 이 두 관점 중 어느 것이 올바르겠느냐? (올바른 게 없습니다.) 사실 이는 옳고 그름과는 무관하다. 동양의 사회적 배경에서 한 집단 안에 있다면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반항하려 한들 가능하겠느냐? 한 가족 안에서 반항한다면 괴롭힘을 당해 죽을 수도 있다. 서양에 있다면 서양 여성처럼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가든, 어떤 사회적 배경에서, 어떤 집단 안에서 살든 어떤 관점이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모두 진리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어떤 관점도 진리에 부합하지 않고 진리에 위배된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동양인은 여성에게 늘 고분고분하고 삼종사덕을 지키며 정숙하고 상냥하라고 하는데, 그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쉽게 통제하려는 것이다. 이는 동양의 전통문화에서 생겨난 일종의 암적인 사상이다. 그건 사실 사람을 해치고 결국 여성이 방향도, 주견도 없이,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는 게 옳고 어떻게 하는 게 그른지도 모른 채 살아가게 한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가족에 바치고도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한다. 이는 사람을 해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자신이 가져야 하고 누려야 할 권리를 박탈당하고도 반항하지 않는다. 그녀는 왜 반항하지 않겠느냐?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반항은 옳지 않아요. 반항하면 현모양처가 아니에요. 누구누구와 비교해 보면, 그 사람은 저보다 훨씬 잘하고 훨씬 더 고생하는데도 불평하지 않아요.” 그녀는 왜 이렇게 생각하겠느냐? (전통문화 사상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전통문화가 그녀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려 그녀를 해치는 것이다. 그럼 그녀는 왜 이런 해를 받아들이겠느냐? 그녀는 그런 해가 자신을 아주 고통스럽고 무력하게 하며 마음에 크게 상처를 준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왜 받아들이겠느냐? 객관적인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사회적 환경이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벗어나지 못하고 그렇게 외부의 압박을 참고 견디는 것이다. 주관적으로 말하면 그녀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녀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고 여성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존엄 있고 옳은지도 깨닫지 못했다. 아무도 그녀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녀에게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모든 준칙은 무엇이겠느냐? 전통문화다. 그녀는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이 옳고, 그것을 위배하면 양심에 가책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게 바로 그녀의 ‘준칙’이다. 사실상 그 준칙이 옳겠느냐? 그 준칙에 인용 부호를 붙여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 준칙은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런 사상 관점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행위가 얼마나 수긍이 가고 호감을 주든 실제로 그것이 준칙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그건 진리와 인성에 위배된다. 오랜 세월, 동양의 여성은 온 가족을 뒷바라지하고 집안의 모든 자질구레한 일을 전부 혼자 처리해야 했다. 그게 공평하냐? (불공평합니다.) 그럼 그녀는 왜 견딜 수 있는 것이냐? 그런 사상 관점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인내할 수 있고, 최소한 마음속 깊이 80%는 그렇게 하는 게 옳다고, 자신이 맹목적으로 참으면 전통문화의 기준에 미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 기준과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 만약 그녀가 마음속 깊이 그렇게 하는 게 옳지 않고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그렇게 하면 인성에 부합하지 않고 인성과 진리에 위배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녀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녀는 그런 사람들과 분리되고 그들의 노예가 되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그렇게 할 엄두를 못 낸다. 그녀는 그 집단을 떠나도 살 수는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 집단을 떠난 뒤 짊어져야 할 오명이 얼마나 클지, 그렇게 하는 결과는 어떨지 가늠한 뒤 만약 그렇게 하면 동료들은 자신이 현모양처가 아니라고 비평할 것이고 사회도 그녀를 비난할 것이며 여론이 형성돼 아주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생각에 결국 이렇게 궁리한다. ‘그냥 참자. 안 그러면 비난에 숨 막혀 죽을지도 몰라.’ 동양의 여성은 대대로 이렇게 살아왔다. 그 모든 좋은 행위의 이면에 사람은 무엇을 견디고 있겠느냐? 사람은 존엄도, 인권도 박탈당했다. 이런 사상 관점이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부합하지 않습니다.) 부합하지 않는다. 존엄도, 인권도 박탈당했고 인격도 사라졌으며 독립된 생활 공간이나 사상 공간도, 말할 권리도, 자기 뜻을 표현할 권리도 없이 하는 일은 전부 가족을 위해서다. 그녀가 그렇게 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여성에 대한 전통문화의 요구 기준을 충족시켜 남들에게 칭찬받고 좋은 며느리,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이는 해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생각이 정당하냐, 아니면 왜곡되었느냐? (왜곡됐습니다.)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부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주어 사람이 그 자유 의지 안에서 어떤 생각을 가지게 했느냐? 인성에 부합하는 것 아니겠느냐? 최소한 인성에 부합한다. 그 밖에 생활하는 과정에서 모든 사람과 일, 사물에 대해 정확한 생각과 인지를 가지게 했고 옳은 길을 선택해 생활하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준, 사람이 마땅히 누려야 할 인생이다. 그러나 사람은 평생 소위 전통문화나 도덕경에 속박되고 얽매이고 왜곡되어 결국 무엇이 되었느냐? 전통문화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이는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해 일어난 일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너희는 앞으로 이런 길을 걷기를 선택할 수 있겠느냐? (선택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겠느냐? “저는 그들과 싸울 거예요.”, “당신들 뒷바라지는 그만둘 거예요. 제게도 인권과 독립된 인격이 있어요.”라고 말해도 되겠느냐? (안 됩니다.) 그래서도 안 된다. 하나의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겠느냐? (원칙대로 해야 합니다.) 원칙대로 하는 것은 당연히 옳다. 원칙대로 모든 사람을 대해야 한다. 그가 만약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를 형제자매로 대하고, 믿지 않는다면 이방인으로 대해야 한다. 스스로를 서럽게 만들거나 자신의 인격을 왜곡할 필요도, 자신의 존엄과 권리를 포기하고 그들을 위해 일생을 바칠 필요도 없다. 그들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 이 세상에 네가 일생을 바칠 만한 존재는 단 하나뿐이다. 누구겠느냐? (하나님입니다.) 왜 그렇겠느냐?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리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인류가 생존하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준칙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만 있으면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정확하게 할 수 있다. 이는 마지막에 사람이 구원받고 나서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에게서 이루려는 성과이다.
‘무엇이 진리인가’라는 주제는 몹시 방대하다. 우리는 예시 몇 가지만 들었을 뿐이다. 하나는 부엉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였다. 또 무엇이 있었느냐? (동양인이 서양인처럼 커피 마시는 것을 모방하는 것입니다.) (여성에 대한 동서양 사람들의 요구 기준입니다.) 그런 것들이 가장 두드러진 예시이다. 그럼 여러 사물에 대한 동양인과 서양인의 생각 중 어느 것이 준칙이냐? (모두 준칙이 아닙니다.) 모두 진리와 관련 없는, 사람의 생각과 관점이다. 정확히 말하면 모두 준칙이 아닌 그릇된 관점과 황당한 이론, 사탄이 사람을 해치는 수단이나 주장, 철학이다. 이런 일을 이렇게 교제하니 조금은 깨닫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너희는 언젠가 서양인을 따라 커피를 마시고 햄버거를 먹으며 서양인을 모방할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그게 원칙에 부합하겠느냐? 설사 매일같이 양식을 먹더라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소용없고 넌 여전히 처신하는 준칙이 없는 것이다. 핵심은 진리를 구해 원칙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가이다. 그래야 비로소 사람에게 이롭다. 이렇게 교제하니 너희는 마음속으로 진리나 준칙에 대해 조금 깨닫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의 전통문화나 도덕 준칙 안에 진리가 있느냐? (없습니다.) 도덕경 안에 진리가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라고 확신할 수 있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확신하고 나면 생각해야 한다.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일까? 하나님 말씀에서 요구하는 원칙은 무엇일까? 사람에게 알려 주는 준칙은 무엇일까? 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고 이런 일을 하는 정확한 원칙일까?’ 이런 것들을 구해야 한다. 이 주제는 여기까지 얘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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