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조 그는 사람들이 진리와 하나님이 아닌 오직 그에게 순종하도록 한다(2) 제 2 부
2) 개인 주변 환경에 대한 관리
두 번째 측면은 일상생활 속 개인 주변 환경에 대한 관리이다. 이는 어느 측면의 정상 인성과 관련 있겠느냐? (생활 환경 측면과 관련 있습니다.) 생활 환경은 무엇을 포함하겠느냐? 주로 개인의 생활 범위 내의 생활 환경과 자주 접하는 공공 환경, 이 두 가지를 포함한다. 이 두 가지 안에는 구체적으로 무엇이 포함돼 있겠느냐? 생활 방식, 위생 관리, 환경 관리가 포함돼 있다. 생활 방식을 더 세분하면 무엇을 포함하겠느냐? 일과 휴식, 음식, 일상 보건, 생활 상식 등을 포함한다. 우선 첫 번째인 일과 휴식에 대해 얘기해 보자. 일과 휴식은 보통 규칙이나 시간을 따르면 된다. 밤을 새워 일해야 하거나 초과 근무를 해야 하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보통 규칙이나 시간을 따르는 게 옳다. 밤을 새우는 것을 유독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밤에는 자지 않고 분주하게 일하다가 아침에 남들이 일을 시작할 때가 되면 그제야 잠을 자고, 밤에 남들이 잘 때 일어나서 일한다. 이런 사람이 있지 않으냐? 늘 남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고 유별나게 구는 이런 사람은 이성이 그다지 건전하지 못하다. 특수한 상황을 제외한 정상적인 상황에서 다들 대체로 보조를 맞춘다. 다음 생활 방식은 무엇이냐? (음식입니다.) 음식이라는 측면에서 정상 인성의 요구는 충족하기 쉽지 않겠느냐? (쉽습니다.) 충족하기 쉽다. 하지만 사람은 음식이라는 측면에서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관점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지 않으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있으니까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어요. 배탈 날 일은 없으니 먹고 싶은 걸 자유롭게 먹으면 돼요.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테니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이 있지 않으냐? 이는 다소 치우치지 않았느냐? 이렇게 이해하면 비정상이고, 정상적으로 사고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또 일부 사람은 정상적인 생활 상식과 육을 좇는 것을 동일시하면서 생활 속의 일부 상식에 주의하는 게 육을 좇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위가 좋지 않아서 맵거나 너무 자극적인 음식을 먹지 않는 걸 보고 “그건 식욕이고 육을 좇는 거예요. 당신은 그걸 배반해야 해요. 어디에 갔는데 그런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먹어야 해요. 안 먹어서야 되겠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이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특정 음식을 먹지 못하면서도 육을 저버리기 위해 기어코 먹고는 매우 힘들어한다. 내가 “먹기 싫으면 안 먹어도 된다. 안 먹는다고 누가 정죄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해도 그는 “안 돼요. 먹어야 해요!”라고 말한다. 그러니 그는 먹고 나서 괴로워해도 싸다. 그건 자업자득이다. 자신이 정한 규례이니 스스로 지켜야 한다. 그럼 먹지 않는 것을 잘못됐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됐다고 할 수 없다. 또 어떤 사람은 몸에 특수한 질환이 있어서 특정 음식을 먹으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데, 그런 경우에는 그런 음식을 먹지 말고 피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고추를 먹으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먹지 말아야 하는데, 기어코 무작정 먹고는 육을 저버렸다고 생각한다. 이는 치우치게 이해한 것 아니겠느냐? 이는 치우친 것이다. 먹으면 안 되는 것은 먹지 마라. 몸과 싸워서 뭐 하겠느냐? 무모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런 규례를 지킬 필요도, 그렇게 육을 저버릴 필요도 없다. 사람마다 몸 상태가 다르다. 위가 좋지 않은 사람도 있고 심장이 좀 약한 사람도 있으며 시력이 좀 나쁜 사람도 있다. 땀을 많이 흘리는 사람도 있고 땀이라고는 절대 흘리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렇듯 상태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자신의 상태에 따라 몸을 돌봐야 한다. 이런 일들을 한 마디 말로 표현하자면, 생활 상식을 좀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상식은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어떤 음식을 먹으면 몸에 해롭고 어떤 음식을 먹으면 몸에 이로운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음식이 맛은 없지만 몸에 이롭다면 건강을 위해 먹어야 한다. 반면 맛은 있지만 먹은 뒤 병이 도지는 음식이라면 먹어서는 안 된다. 이런 게 바로 상식이다. 그 밖에 보건 상식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한다. 일 년 사계절 동안 시간과 기후, 계절별로 적절한 음식을 먹는 게 대원칙이다. 몸과 싸우지 않는 것이 정상 인성이 가져야 할 사고이자 이해이다. 장염에 걸려서 자극적인 음식을 먹으면 설사하는 사람은 그런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전 두렵지 않아요. 하나님이 지켜 주시니까요.”라고 말하는데, 결국 먹고 나서 끊임없이 설사를 하면서도 하나님이 그에게 시련과 연단을 준 것이라고 말한다. 터무니없는 사람이 아니냐?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라면 식탐이 너무 강한 것이다.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음식을 먹는 사람은 아주 골치 아프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입을 통제하지 못하고 “전 두렵지 않아요. 하나님이 지켜 주시니까요!”라고 말한다. 이렇게 이해하는 건 어떤 것이냐? 치우친 것이고,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서 함부로 규례에 맞추는 것이다. 원래 장염이 있었는데도 음식을 함부로 먹어서 결국 설사를 하고는 하나님이 시련과 연단을 준 것이라고 말하니 이는 함부로 규례에 맞추는 것 아니겠느냐? 이렇게 그릇된 인간이 이런 헛소리를 내뱉다니 이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 아니겠느냐? 성령이 이런 그릇된 인간에게 역사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면 함부로 규례에 맞춰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아무렇게나 시련을 주겠느냐? 절대 그럴 리 없다. 그럴 자격도 부족하고 분량도 부족한 네게 하나님이 시련을 줄 리 없다. 자신이 어떤 음식을 먹으면 병이 도지는지도 모르는 것은 바보이고 지능이 건전하지 않은 것이다. 지능과 이성이 건전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느냐?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이런 사람에게 시련을 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이는 비이성적인 것이고 함부로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시련을 줄 때는 원칙이 있다. 하나님은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하나님이 쓰려 하고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따르고 증거할 수 있는 사람에게 시련을 준다. 안일과 누림만 탐내고 진리는 조금도 추구하지 않는 사람, 특히 그릇되게 이해하는 사람은 모두 성령 역사가 없는데 하나님이 그들에게 시련을 줄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은 한약이나 몸에 좋은 식품을 접할 수 있으면 아무 때나 닥치는 대로 먹는다. 어떤 여자는 피부 관리를 위한 미백 및 주름 개선 제품을 보면 아무 때나 닥치는 대로 얼굴에 바르지만, 매일 두 시간 동안 화장하고 세 시간 동안 화장을 지우다가 결국 보기 흉하게 피부를 망친다. 그러고는 “나이 들어 생기를 잃는 자연법칙을 그 누가 당해 낼 수 있겠어요. 이 피부 늙은 것 좀 보세요!”라고 말한다. 사실 그녀가 그렇게 함부로 손대지 않았으면 그다지 늙어 보이지도 않았을 텐데, 얼굴에 닥치는 대로 바르다 보니 오히려 늙어 보이게 된 것이다. 이를 두고 뭐라고 하겠느냐? (자업자득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싸다! 정상 인성은 생활 측면의 상식을 어느 정도 파악해야 한다. 예를 들어, 발이 차면 허리가 쉽게 아프다는 것, 노안이 빨리 시작되면 어떻게 눈을 보호해야 하는지, 컴퓨터 앞에 자주 앉아 있으면 어떤 폐단이 생기는지 등 어떻게 건강을 지키고 관리하는지에 관한 보건 상식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으면 하나님의 말씀만 읽으면 되지 그런 보건 상식은 배워서 뭐 하죠? 사람의 수명은 하나님께서 정하시기 때문에 보건 지식을 아무리 많이 배워 봤자 소용없어요. 죽을 때가 되면 아무도 구해 주지 못하죠.” 겉으로 보면 맞는 말 같지만 사실은 다소 터무니없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이나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상투적인 글귀와 도리만 말할 줄 안다. 마치 꽤나 영적인 것처럼 굴지만 사실 조금도 순수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일이 닥치면 함부로 규례에 맞추고 듣기 좋은 말만 하면서 진리는 조금도 실행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는 사람들이 옥수수 미음을 자주 먹으면 건강을 지킬 수 있고 몸에 좋다고 말해도 귀 기울이지 않다가 누가 돼지고기 볶음을 먹는 게 건강에 좋다고 얘기하면 돼지고기 볶음을 볼 때마다 끊임없이 먹는다. 먹으면서 입으로는 “어쩔 수 없이 좀 먹어야겠네요. 이건 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라고요!”라고 말한다. 이는 거짓말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거짓말이다. 정상 인성 안에 갖춰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 사람이 알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 어떤 나이에 알아야 할 것을 아는 것이 정상 인성이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20대 때 음식을 아무렇게나 먹는다. 추운 날에 얼음을 먹는 걸 보고 나이 많은 사람이 겁에 질려서 먹지 말라고, 많이 먹으면 배탈 난다고 타이르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프긴 뭐가 아파요. 제 몸 튼튼한 거 안 보이세요?” 그 나이에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가 40대가 되었을 때 얼음을 먹으라고 주면 그가 먹을 수 있겠느냐? (먹지 않습니다.) 60대가 되면 먹는 것은 고사하고 다가가는 것조차 두려워할 것이다. 찬 기운이 너무 강해서 몸이 견디지 못할 것이다. 이런 것을 두고 경험이라고 하고, 삶의 경력이라고 한다. 60세가 넘도록 살고도 얼음을 많이 먹으면 위나 몸이 견디지 못해 병에 걸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이를 뭐라고 하겠느냐? 이는 정상 인성이 부족한 것 아니겠느냐? 이는 견문이 부족한 것이다. 60대인데도 허리에는 한기가 들면 안 되고 다리에 한기가 들면 허리가 아프다는 사실도 모른다면 그는 60여 년 동안 어떻게 살아온 것이겠느냐? 되는대로 산 것이다. 어떤 사람은 40대가 되면 보건 상식 같은 생활 상식을 많이 알게 된다. 또한 물질과 금전, 일, 혈육, 세상사, 인생 등을 대할 때도 어느 정도 올바른 관점과 순수한 이해를 가지게 되며 설사 하나님을 믿지 않더라도 젊은이보다 아는 게 많아진다. 이게 바로 분별력과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다. 그는 20년을 더 살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됐는데, 그중에는 진리에 가까운 것들도 있다. 이를 통해 그가 이해 능력을 가지고 있고 자질도 좋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그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진리 실제에 훨씬 더 빨리 진입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지난 20년 동안 많은 일을 겪으면서 어느 정도 긍정적인 것을 얻었고, 그런 경력이 하나님이 말씀하는 진리 실제의 측면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네 인성 안에 부족한 게 너무 많고, 생활을 대하거나 지난 20년 동안 발생한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할 때 올바른 관점이나 정상 인성의 사고, 더욱이 정상 인성의 지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너는 그 20년을 헛산 것이다. 내가 예전에 몇 곳을 방문했을 때 나이 든 자매 여럿이 밥도 할 줄 모르고 반찬도 못 만들어서 찌개로 끓여야 할 것을 볶고 볶아야 할 것을 찌개로 끓이는 것을 봤다. 계절마다 나는 채소가 다른데 식탁 위에는 늘 같은 채소 몇 가지만 올랐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겠느냐? 이는 지능이 몹시 떨어지는 것 아니겠느냐? 정상 인성의 자질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배추나 감자 같이 일상생활 속에서 접하는 여러 식재료조차 요리하지 못하는 것이다. 가장 간단한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이루지 못하는 걸 보면 지난 오륙십 년을 얼마나 대충 살아온 것이겠느냐? 설마 마음속에 아무런 요구도 없는 것이겠느냐? 무슨 일을 해도 경험을 도출해 내지 못하는 사람이 무슨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겠느냐? 사실 마음을 쓰고 한동안 연습하면 배울 수 있는데, 몇 년을 배웠는데도 할 줄 모른다면 지능과 자질이 너무도 떨어지는 것이다!
이어서 위생 관리라는 측면에 대해 말해 보겠다. 최근 나는 두 곳에 갔었는데 건물 주위가 아수라장이었다. 그곳은 원래 상당히 잘 계획돼 있었는데 어째서 결국 ‘돼지우리’로 변했겠느냐? 사람들이 관리할 줄 모르고 정상 인성의 위생 의식과 요구를 갖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게으를 뿐 아니라 그런 환경에서 생활하는 게 습관이 되어 아무 데나 쓰레기를 버리고 손이 가는 대로 물건을 방치한 것이다. 규율이나 제한도 없어서 한 곳을 정리해도 하루 이틀 동안만 유지되고 며칠 지나면 다시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워졌다. 이 대체 무슨 환경이란 말이냐? 이런 환경에서도 잘 먹고 잘 자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이겠느냐? 돼지나 마찬가지 아니겠느냐? 이런 사람들은 위생이나 환경, 구도, 관리에 대해 아무런 의식도 없고 아무것도 모른다. 아무리 더럽고 어수선해도 알아차리지 못할 뿐 아니라 마음속으로 괴로워하지도, 조급해하지도 않고 변함없이 생활하며 별로 신경 쓰거나 요구하는 것도 없다. 어떤 곳은 위생이나 환경을 괜찮게 관리하길래 그곳 사람들이 위생을 중시하고 환경을 관리할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 예고 없이 검사해 보니 일손을 불러 미리 정리한 것이었다. 갈 거라고 미리 알리면 분명 깨끗하게 정리해 놓을 것이다. 하지만 미리 알리지 않고 가면 환경이 다를 것이다. 분명 더럽고 어수선할 것이다. 어떤 여자아이의 방에는 옷과 신발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밖에서 쓰는 호미나 괭이 같은 작업 도구도 옷과 함께 쌓여 있었다. 어떤 사람은 너무 바빠서 정리할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정말 그 정도로 바쁘겠느냐? 한숨 돌릴 시간도 없느냐? 한숨 돌릴 시간도 없다면 그건 정말 바쁜 거지만 그 정도는 아니지 않으냐? 환경을 관리하는 게 어째서 그렇게 어려우냐? 깨끗하고 말끔한 환경을 유지하는 게 어째서 그렇게 힘드냐? 이는 인성과 관련이 있지 않으냐? 사람은 왜 그렇게 ‘돼지우리’ 안에서 생활하는 걸 좋아하는 것이냐? 어째서 그런 환경에 만족하는 것이냐? 어째서 그런 환경에 대해 아무런 느낌도 없는 것이냐? 어떻게 된 일이겠느냐? 무엇 때문에 환경을 잘 관리하지 못하는 것이겠느냐? 내가 가끔 어디를 가기 전에 간다고 미리 알리면 그들은 깨끗하게 정리해 놓지만, 자주 가면 정리도 하지 않고 “자주 오시니까 편하게 대할게요. 저희는 원래 이래요. 항상 정리하면 얼마나 힘들어요!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요? 일하느라 하루 종일 바빠서 머리 빗을 시간도 없는걸요.”라며 핑계를 댄다. 또 어떤 핑계를 대겠느냐? “이건 다 가건물이니까 너무 잘 정리할 필요 없어요. 이 정도면 돼요.” 그렇다. 모두 가건물이다. 하지만 설사 텐트에서 살더라도 관리는 잘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것이 정상 인성이다. 만약 이 정도 정상 인성도 없다면 짐승과 뭐가 다르겠느냐?
하나님 집에는 지리적 환경이 꽤 좋은 교회가 하나 있는데, 산도 있고 물도 있으며 길도 잘 정비돼 있다. 강가에는 나무가 심어져 있고 정자도 하나 있으며 옆에는 조경석도 놓여 있어서 상당히 아름답다. 어느 날 멀리 보이는 깨끗한 오솔길 위에 노란색 물건이 하나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앞으로 걸어가 보니 귤껍질이었다. 누가 쓰레기를 그렇게 함부로 버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또 원래는 깨끗했던 정자에도 누가 해바라기씨를 까먹었는지 바닥에 해바라기씨 껍질이 가득 버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규율을 이해하겠느냐? 정상 인성 안에서 사람은 위생이나 환경에 대해 요구 기준이 있느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제가 요구 기준이 없다니요? 저는 매일 밤 발을 씻어요. 어떤 사람은 발도 씻지 않아요. 심지어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조차 안 하는 사람도 있다고요.” 너는 발은 깨끗이 씻는구나. 그런데 왜 네가 사역하는 환경은 돼지우리 같은 것이냐? 네가 그 정도 깨끗한 것이 대수겠느냐? 기껏해야 네가 몹시 이기적이라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 너는 만물을 관리하고 싶어 하는데, 정원 하나를 주어도 잘 관리하지 못하는 네가 어떻게 만물의 주인이 되겠느냐? 부끄러움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이런 사람은 환경뿐 아니라 개인의 위생도 관리하지 못하고 아무 데나 쓰레기를 버리기도 한다. 이런 습관은 어떻게 생겼겠느냐? 아무 데나 과일 껍질을 버려 놓고도 거름을 만들려고 남겨 두었다고 핑계를 댄다. 그럼 왜 거름더미나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고 길 위와 정자에 버렸느냐? 정자가 거름을 만드는 곳이냐? 이는 규율을 모르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인성과 이성, 품성이 모자란 천한 사람이다!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 어떻게 제지할 수 있겠느냐? 관리 감독하면 되겠느냐? 누가 감시할 수 있겠느냐? 어떻게 해야겠느냐? (벌금을 물어야 합니다.) 그렇다. 어쩔 수 없이 그 방법을 써야 한다. 적절한 제도를 만들어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 그런 사람은 불량기가 가득해서 몇 번이나 타일러도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 어떤 곳에서는 낡은 종이 상자와 부서진 나무판자, 종이 쪼가리를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늘어놓고는 나중에 쓰려고 남겨 놨다고 말한다. 기왕 쓸모 있는 물건이라면 어째서 유형별로 정리하여 가지런히 놓아두지 않는 것이냐? 그러면 더 보기 좋고 공간도 덜 차지하지 않겠느냐? 대부분의 사람이 관리를 할 줄 몰라서 생활하는 환경에 아무렇게나 물건을 쌓아 두고 늘어놓는 바람에 빈자리도 하나 없다. 쌓아 둘수록 어수선해지고 어수선해질수록 더러워져서 결국 누가 보기에도 불편한 쓰레기장이 된다. 이런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정상 인성을 갖추고 있겠느냐? 자신이 생활하는 환경조차 관리하지 못하는 사람이 자질을 갖추었겠느냐? 그런 사람이 짐승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생활하는 환경을 관리하지 못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모든 사람이 원래 위생 의식도 없고 환경을 관리할 줄도 모르며 마음속에 그런 일들을 품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사람의 생활 환경이 어때야 하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동물과 마찬가지로 어떤 환경에서 생활해야 하는지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관리자가 관리할 줄 모르는 것과 관련 있다. 관리자는 관리할 줄 모르고 관리받는 사람은 스스로 깨닫지도, 알아차리지도 못해서 결국 모두가 이런 식으로 ‘협력’하다 보니 ‘돼지우리’가 된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오랫동안 머문 곳에 가 보면 나는 이런 느낌을 받는다. ‘여기는 왜 늘 깨끗하지 않고 집 같은 느낌이 안 들지?’ 이런 걸 보고도 기분이 좋아질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너희는 그런 곳에 가면 기분이 좋겠느냐? (별 느낌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별 느낌을 받지 못하는 것이 너희의 진실한 느낌이다. 내가 몇 군데를 골라 계획을 세우고 일을 마치고 정리를 끝내자 다들 보면서 즐겼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아수라장이 되는 바람에 위생을 유지하기 위해 적절한 사람을 찾아 관리시켜야 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몹시 더럽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 보기 흉하다. 어떤 사람은 채소를 뽑아 오고 나서 어디에서 씻어야 좋을지 모르고 반드시 깨끗한 곳에서 씻으려고 해서 결국 깨끗한 곳을 또 더럽혔다. 그걸 보면 어떤 기분이 들겠느냐? 이는 짐승 무리가 아니겠느냐? 인성이 없다! 그런 사람들이 위생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환경을 관리할 줄도 모르는 걸 보면 조급해지고 화가 치민다! 그런 사람들에게 좋은 생활 환경을 마련해 주고 잘 꾸며 주어 봄에는 여러 꽃나무가 자라고 산과 물, 정자도 있으며 일하고 생활할 곳도 있고 각종 시설도 갖추어져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하지만 결국 어떻게 되었느냐? 그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감사히 여기지도 않는 채 이렇게 생각한다. ‘여기는 환경이 좀 낫네. 하지만 여전히 농촌과 별 차이가 없어. 땅에는 온통 잡초랑 진흙뿐이라고.’ 그는 이런 마음가짐으로 환경을 함부로 망가뜨리고 관리할 줄도 모른다. 인성에 부족한 것이 대체 얼마나 많은 것이냐! 인성 안에 갖추어야 할 것조차 갖추지 못하고 최소한의 생활 환경과 관련된 여러 측면도 스스로 잘 돌보지 못한다. 사람은 그렇게 좋은 환경을 누리면서도 어째서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것이겠느냐? 어째서 그 환경을 잘 관리할 줄 모르는 것이겠느냐? 왜 그렇겠느냐? 본분을 이행하느라 너무 바빠서 시간이 없는 것이겠느냐? 아니면 왜 그런 것이겠느냐? 본분으로 바쁘지 않은 사람이 있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너희들보다 생활 환경이 좋지 않지만 관리를 상당히 잘해서 남들은 보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고 마음속으로 탄복하고 우러러본다. 반면 너희의 생활 환경은 남들이 들어가 보지 않고 겉만 보고도 무시한다. 이는 너희 스스로가 초래한 결과가 아니겠느냐? 네 자신의 행동이 네가 생존하는 그 형편없는 환경을 만들었다. 남들이 네 생활 환경을 보는 것은 네 본질을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남들이 너를 무시한다고 비난해서야 되겠느냐? 사람의 고귀함과 비천함은 남들의 평가로 정해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가 살아 내는 것이다. 정상 인성의 것들을 갖추고 있다면 너는 진정한 사람의 모습으로 살 수 있고 네 고귀한 인품을 드러낼 수 있으며 사람들도 자연스레 너를 중요시하고 우러러볼 것이다. 반면, 네가 정상 인성의 측면들을 갖추고 있지 않고 위생 상식도 모르며 환경을 관리할 줄도 모르고 매일 ‘돼지우리’ 안에서 살면서도 스스로는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짐승의 품성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럼 너는 비천한 것이다. 그토록 비천한 사람, 그토록 비천한 인성은 정상 인성이 갖춰야 하는 여러 사상과 관점, 요구, 추구 같은 것들은 전혀 갖추지 않았는데 과연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너희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왜 불가능하겠느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저희는 지난 몇 년간 하나님을 믿어 오면서 그런 세속적인 일들은 깨끗이 버린 지 오래예요. 저희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삶의 질 같은 건 세속적이잖아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지 않으냐? 그럼 네가 호흡하는 공기도 세속적이지 않겠느냐? 네가 입는 옷과 쓰는 물품도 전부 세속적이지 않겠느냐? 너는 어째서 야외 아무 곳에서나 예배하지 않고 실내에서 예배하는 것이냐? 이런 사람은 터무니없지 않으냐?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사람은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 어렵다. 진리 실제에 진입하려면 정상 인성을 먼저 갖춰야 할 뿐 아니라 나쁜 생활 습관을 벗어던지고 품위와 교양, 품성을 갖춘 생활 방식과 생활 목표를 추구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적절하지 않겠느냐? 그럼 이런 문제는 바로잡기 쉽겠느냐? 생활 방식을 바꾸고 나쁜 생활 습관을 벗어던지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느냐? 어떤 방법을 써야 빠르게 진입할 수 있겠느냐? 처벌하는 것 외에 또 어떤 방법이 있겠느냐? (서로 감독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서로 감독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핵심은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이다. 내가 보기에 벌금을 물리는 방법은 상당히 훌륭하고 매우 유용하다. 벌금을 물리는 것과 관련되면 사람의 이익과 직결되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에 손해가 갈까 봐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따른다. 벌금을 물리면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 그럼 그런 사람들에게 진리를 교제하면 왜 성과를 이룰 수 없겠느냐? 그런 사람들은 정상 인성도, 진리를 받아들일 조건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진리를 교제하는 방법이 그들에게 효과가 없는 것이다. 어떤 사역 환경에서든 첫 번째로 분류하는 법을 배우고, 두 번째로 말끔한 상태를 유지하는 법을 배우고, 세 번째로 위생적이고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는 법을 배운 다음, 이에 더해 쓰레기를 치우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정상 인성은 이런 것들을 갖춰야 한다.
어떤 여자는 매일 머리를 빗고 나서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치우지 않고 집을 나선다. 이런 습관을 고칠 수 있겠느냐? 머리를 빗고 나면 서둘러 깨끗하게 정리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정리하게 하지 말고 스스로 자신의 환경을 잘 관리해야 한다. 환경을 잘 관리하고 싶다면 자신부터 시작해야 한다. 먼저 자신 주변을 깨끗이 정리해야 하고 자신이 생활하고 있는 공공 환경에 대해서도 공중도덕심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어, 여럿이 생활하고 휴식하는 곳은 모두가 책임을 지고 잘 관리해야 한다. 바닥에 귤껍질 몇 조각이 떨어져 있는 걸 보면 주워서 쓰레기통에 버리면 된다. 일부 사역 장소에서는 일을 마치고 나면 나무 조각, 톱밥, 철근, 못이 바닥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바람에 걸어가다가 실수로 못을 밟기 쉬워서 몹시 위험하다. 왜 일을 마치고 나서 정리를 하지 않는 것이냐? 이 무슨 나쁜 습관이란 말이냐? 그래서야 되겠느냐? 사역 현장이 그렇게 더럽고 어수선한 걸 보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이건 짐승이나 하는 짓이 아니겠느냐? 인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일을 다하고 나서 깨끗이 정리해서 남들이 보기에 사람이 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게 해야 한다. 짐승은 일을 다 하고 나서도 마치 청소는 그의 일이 아니고 그와 무관하기라도 한 듯 청소를 하지 않는다. 이 무슨 논리란 말이냐? 난 일을 다 하고 나서 청소하지 않는 나쁜 습관을 가진 사람을 많이 봤다. 난 그들에게 매일 일을 마치고 나면 사람을 안배해 쓰레기를 전부 치우도록 해야 한다고, 매일 청소해야 현장이 깨끗해지기 때문에 그런 습관을 길러야 한다고 알려 주었다. 생활 습관을 기르려면 먼저 특정한 환경을 유지해야 한다. 그런 환경에 적응한 다음에는 언젠가 그 환경이 변하면 깨끗하지 않은 곳을 보고 스스로도 불편해할 것이다. 마치 해외에서 3년, 5년 생활한 사람이 해외는 모든 게 다 좋다고 생각해서 언젠가 고향에 돌아오면 자신이 갑자기 고귀해진 것처럼 느끼고, 남들이 위생을 중시하지 않거나 누군가의 집이 깨끗하지 않으면 무시하며 며칠 씻지 않는 것도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생활 환경 때문이 아니겠느냐? 바로 그런 것이다. 그래서 우선 자신의 위생이나 환경을 잘 관리해야만 본분을 이행할 때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 역시 정상 인성이 갖춰야 하는 측면이다. 나는 몇몇 곳에 방문했을 때 일부 여자아이들이 사는 방이 말끔하지 않고 아수라장인 것을 발견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말끔하게 하라는 건 꼭 군대 같지 않나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 매일 침대와 방 안을 깨끗이 정리하고 청결을 유지하는 습관을 기른다면, 매일 이런 일들을 하는 게 습관이자 정상 상태, 밥 먹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행동이 된다면 이런 생활 습관을 기르게 된 것이다. 그러면 환경에 대한 네 요구가 한 단계 높아질 것이다. 그 단계가 높아지면 너라는 사람 자체의 기질과 정신 면모, 격조와 인성, 존엄성도 향상될 것이다. 그러나 네가 ‘돼지우리’ 안에서 생활한다면, 짐승 우리처럼 사람이 머물 만하지 않은 곳에서 산다면 너는 사람의 모습이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똑같이 집에 들어가더라도 어떤 사람은 집 안과 바닥이 모두 깨끗한 걸 보고 문밖에서 계속 신발을 문지르는데, 그러고도 여전히 깨끗하지 않은 것 같아서 아예 신발을 벗고 집에 들어간다. 주인은 꽤나 깨끗하고 그를 존중하는 네 모습을 보고 너를 존중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신발에 진흙을 잔뜩 묻힌 채 집에 들어가고 바닥에 진흙이 묻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아무런 느낌도 받지 않는다. 그러면 주인은 천성적으로 규율을 모르는 네 모습을 보고 너를 좋지 않게 생각하고 무시하며 앞으로는 너를 집 안으로 들이지 않고 문밖에서 기다리게 할 것이다. 이는 ‘당신은 이 집에 들어올 자격 없어. 당신이 들어오면 이 집을 망치는 거야. 당신이 집에 들어오면 내가 청소를 얼마나 오래 해야겠어?’라는 뜻이다. 그는 너를 존중하지 않는다. 네게 사람다운 모습이 없는 걸 보고 그는 너를 더 이상 존중하지 않게 된다. 살다가 그 지경에 이르면 그게 과연 사람이겠느냐? 그런 사람은 반려동물만도 못하다. 따라서 사람은 사람다운 모습으로 살아야 사람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고, 정상 인성을 갖춰야만 사람다운 모습으로 살 수 있다. 어디에서 생활하든,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사람은 규율을 잘 지켜야 하고 환경과 위생을 관리할 줄 알아야 하며 책임감과 좋은 생활 습관을 가져야 한다. 무슨 일을 해도 잘할 수 있게 되고 기준에 이르게 될 때까지 마음을 쓰고 열심히 해야 한다. 그러면 네가 본분을 이행하거나 처신할 때 남들은 네가 단정하고 올바른 좋은 사람인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탄복하며 자연스레 너를 존중할 것이다. 또한 너를 우러러보고 중요시하며 희롱하지도, 괴롭히지도 않을 것이고, 너와 말할 때도 진지한 태도를 취하며 네 말을 비웃거나 멸시하지도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내 외모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한 가지 느끼는 점이 있다. 나와 접촉하는 보통 사람 중 내게 농담을 하거나 가벼운 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점이다.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르지만 아마 사람들은 이런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하든 너무 진지해. 말과 행동이 모두 진지한 올바른 사람이야. 당신과 어울릴 때는 농담을 못 하겠어. 당신은 딱 봐도 농담할 만한 사람이 아니니까.’ 네가 어떤 곳에 가서 사람들과 대화하고 사귈 때 사람들은 네 인성과 품성 안에 무언가가 있다고 느낄 것이다. 사람들은 그게 무엇인지 명확히 말하지 못하지만 너는 스스로 알 것이다. 너는 마음속으로 매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일을 바라보고 어떻게 사람과 접촉하는지에 대해 항상 원칙과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과 접촉하고 어울리면 사람들은 네가 너무 엄숙하다고, 무슨 일을 처리하든 너무 진지하고 엄숙한 데다가 너무 원칙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결국 사람들에게 어떤 느낌을 주겠느냐? 천천히 생각해 보거라! 처신할 때 정상 인성 안에 갖춰야 할 이런 측면들을 갖췄다면, 사람들이 뒤에서 너를 어떻게 평가하든 간에 그들이 마음속으로 네가 올바르고 엄숙하며 어떤 일에 대해서도 진지하고 책임지는 태도를 가지는 사람이고 네 품성이 고귀하다고 생각한다면, 너와 접촉하고 사귀는 동안 그는 너를 칭찬하고 우러러볼 것이다. 그러면 너는 가치 있는 사람이 된다. 만약 한동안 접촉해 보고 네가 무슨 일을 해도 잘 못하고 게으르고 게걸스러우며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고 능력은 없는데 눈만 높은 데다가 너무 탐욕스럽고 이기적이라는 것, 위생도 중시하지 않고 환경을 관리할 줄도 모르며 무슨 일을 하든 요령을 찾아내지 못하는 데다가 자질도 몹시 떨어진다는 것, 신용도 없고 무슨 일을 맡기든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너는 사람 마음속에서 분량이 조금도 없게 되고 폐기 처분될 것이다. 사람 마음속에서 분량이 조금도 없는 것은 별거 아니다. 중요한 것은 네가 하나님 마음속에서도 그렇게 비천하고 가치 없으며 짐승처럼 마음과 영이 없는 사람으로 여겨진다면 너는 곤란해진다는 것이다. 너는 구원받으려면 멀었다! 인품이 합격하지 못하고 말과 행동에 규율이 조금도 없는 짐승 같은 사람에게 구원받을 희망이 있겠느냐? 내가 보기에 그런 사람은 매우 위험하고 조만간 도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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