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조 그는 사람들이 진리와 하나님이 아닌 오직 그에게 순종하도록 한다(1) 제 2 부
참고
샤오강의 꿈
오늘도 먼저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겠다. 너희는 이야기를 듣는 데 관심이 있느냐? 이야기 속에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느냐? 이야기 속에서는 사건이 등장하고 사건 속에는 진리가 담겨 있다. 사실 이야기 속 등장인물의 일부 내적 상태와 표출, 속셈과 패괴 성품은 누구나 가지고 있고 모두와 관련 있다. 네가 이야기를 알아듣고 그 속에서 이런 것들을 알아낼 수 있다면 이는 네가 영적인 이해력이 있다는 증거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제게 영적인 이해력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럼 저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겠네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그건 별개의 일이다. 영적인 이해력은 있지만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는 알아듣는 데서 그칠 뿐 자신을 비춰 보거나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다. 영적인 이해력도 있고 듣고 나서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앞으로 어떻게 진입하고 변화할지 궁리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면 성과를 이룬 것이다. 그럼 오늘도 이어서 이야기를 들려주겠다. 이 주제는 다들 듣고 싶어 하는 가벼운 주제이다. 요 며칠 나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많은 사람이 듣고 나서 수확을 얻고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또한 특정 방면의 진리에 대해 더 깊은 인상을 받을 수 있을지, 실제와 대조하고 특정 방면의 진리에 진입하거나 특정 방면의 편차를 바로잡음으로써 이득을 볼 수 있을지 깊이 생각해 봤다. 지난번 들려준 이야기에 제목을 붙이는 걸 깜빡했으니 오늘은 제목을 하나 붙여 주자. 뭐라고 하는 게 좋겠느냐? (‘특별한 선물’이라고 하는 게 좋겠습니다.) ‘특별한’은 빼고 그냥 ‘선물’이라고 하자. ‘특별한’이라는 단어가 조금 특이해서 사람들의 관심이 ‘특별한’이라는 단어에 집중될 수도 있다. ‘선물’이라는 단어는 다소 불분명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럼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좋겠느냐? 오늘 이야기의 제목은 ‘샤오강(小崗)의 꿈’이다. ‘샤오’가 크기가 작다는 뜻이라는 건 다들 알 것이다. 그럼 ‘강’은 무슨 뜻이겠느냐? (자리라는 뜻입니다.) 그렇다. 제목을 들으면 너희도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있고 대략적으로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샤오강은 열정과 학구열이 넘치는 꽤 부지런하고 똑똑한 젊은이이다. 그는 학구열이 높아서 요즘 비교적 유행하는 컴퓨터 기술을 좀 익혔다. 그래서 하나님 집에서는 당연히 그를 영상팀에 배정해 본분을 이행하게 했다. 영상팀에 막 왔을 때 샤오강은 아주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자신이 젊고 어느 정도 기술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영상 사역을 하는 것이 자신의 강점이자 취미이며, 여기에서 본분을 이행하면 자신의 특기를 발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끊임없이 배우면서 이 방면의 업무도 더 잘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여기에서 접하는 사람도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는 이곳의 환경과 자신의 본분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는 매일 바쁘게 사역하고 열심히 공부했다. 이렇게 샤오강은 매일 일찍 일어나 사역을 시작했고, 밤이 깊어서야 휴식을 취할 때도 있었다. 샤오강은 그의 본분을 위해 대가도 많이 지불하고 고생도 꽤 했다. 물론 업무와 관련된 지식도 많이 배웠다. 그는 매일매일이 보람차다고 생각했다. 샤오강은 형제자매와도 자주 교제하고 예배했는데, 여기 온 뒤 고향에서 하나님을 믿을 때보다 성장하고 성숙해졌으며 사역을 하나 맡을 수 있게 됐다는 생각에 행복하고 흡족했다. 애초에 컴퓨터 기술을 배울 때부터 자신이 언젠가 컴퓨터 관련 일을 하게 되길 바랐는데 드디어 소원을 성취했으니 그는 이 기회를 몹시 소중히 여겼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도 샤오강의 사역과 자리는 그대로였다. 그는 자신의 자리와 책임, 본분을 굳게 지키며 전보다 더 성숙해진 듯했고 생명 진입 방면에서도 어느 정도 성장했다. 예배에서 자주 형제자매와 교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다 보니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관심도 더욱 깊어졌다. 샤오강의 믿음이 조금씩 깊어졌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자 그에게는 새로운 꿈도 생겼다. ‘컴퓨터 관련 사역을 하면서 더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은 흘렀지만 샤오강은 계속 같은 본분을 이행하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그는 영화를 한 편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깊은 인상을 받게 되었다. 왜 그랬겠느냐? 그 영화에는 샤오강과 나이가 비슷한 젊은이가 등장했는데 샤오강은 그 젊은이가 영화에서 보여 준 모습과 연기, 언행이 부러웠고 살짝 질투도 났다. 다 보고 나서 그는 마음속으로 시도 때도 없이 상상했다. ‘내가 그 젊은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난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 이런저런 영상을 제작하고 업로드하지만 아무리 바쁘고 지치고 고생해도 결국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일 뿐이야. 이런 수고를 누가 알아주겠어? 언젠가 나도 영화 속 그 젊은 사람처럼 스크린에 나와 더 많은 사람에게 나를 보여 주고 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샤오강은 그 영화를, 특히 그 젊은이가 나오는 여러 장면을 반복해서 봤다. 그는 보면 볼수록 부러웠고 마음속으로 배우가 되길 갈망했다. 그렇게 샤오강에게 새로운 꿈이 생겼다. 새로운 꿈은 무엇이겠느냐? ‘나도 연기를 배워서 언젠가 제대로 된 배우로 스크린에 등장하겠어. 그 젊은 사람처럼 분위기 있게 변해서 더 많은 사람이 나를 부러워하고 동경하게 할 거야.’ 그 후 샤오강은 자신의 꿈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여유가 생기면 샤오강은 인터넷에 접속해 연기와 관련된 각종 자료를 찾아봤고, 다양한 영화나 드라마도 보면서 공부도 하고 자신도 배우가 될 기회가 있을 거라는 환상에 빠졌다. 또 그렇게 하루하루가 흐르는 동안 샤오강은 계속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서 전문적으로 연기를 배웠다. 끊임없이 노력한 끝에 드디어 그도 연기에 어느 정도 내공이 쌓여 모방도 할 줄 알게 됐고, 사람들 앞에서 말하고 연기할 때도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았다. 그가 거듭 요구한 끝에 드디어 기회가 생겼다. 어떤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젊은 배우가 필요했는데 감독은 카메라 테스트를 통해 샤오강의 외모와 분위기, 연기 기본기가 나름 합격점을 줄 만하고 그를 조금만 더 가르치면 주인공 역할을 맡기에 충분할 거라고 판단했다. 소식을 들은 샤오강은 크게 기뻐하며 이렇게 생각했다. ‘드디어 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는 곳으로 갈 수 있게 됐어. 내 새로운 꿈이 곧 이루어지겠구나!’ 그 후 샤오강은 영화 제작팀으로 조정되어 본분을 이행하게 됐다.
영화 제작팀으로 조정된 샤오강은 새로운 사역 환경에서 신선함과 활력을 느꼈다. 답답하고 단조롭고 제한적이었던 예전과 달리 샤오강은 매일매일 행복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생활하고 사역하면서 매일 접하는 많은 것들이 컴퓨터 사역을 할 때와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또 다른 사역 영역, 전과는 다른 세상에서 살았다. 그렇게 샤오강은 영상 사역에 투입되어 매일 바쁘게 연기하고 대사를 외우며 감독의 연기 지도와 형제자매의 줄거리 분석에 귀를 기울였다. 배역에 몰입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던 샤오강은 반복해서 대사를 외우고 자신의 배역을 사색했으며 어떻게 말하고 연기해야 하는지, 어떻게 걷고 서고 앉아야 하는지 모두 새로 배워야 했다. 이렇게 번잡한 사역이 한동안 지속되고 나서야 샤오강은 배우가 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깨달았다. 매일 같은 대사를 외워야 했고, 달달 외웠지만 실제로 연기할 때만 되면 늘 문제가 생겨 다시 찍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말 한마디나 동작 하나 때문에 감독에게 한소리 들을 때도 많았고, 연속으로 몇 번 연기를 제대로 못 하면 책망과 훈계를 받아 체면을 구기면서도 고통을 견뎌야 했다. 심지어 이상한 시선과 비웃음을 받기도 했다. 이런 일을 겪자 샤오강은 살짝 의기소침해졌다. ‘배우가 되어 스크린에 나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여기에 오지 않는 건데. 하지만 이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됐어. 기왕 왔는데 영화를 다 찍기도 전에 그만두는 건 말도 안 되잖아. 뭐라고 설명할 수도 없고. 이건 내 꿈이니까 반드시 이루어 내야지.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너무 먼 것 같은데 내가 계속 버틸 수 있을까?’ 샤오강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후 샤오강은 매일의 사역과 생활에 간신히 대처해 나갔다. 생활은 갈수록 견디기 힘들어졌지만 그는 그렇게 견디며 억지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앞으로 샤오강의 삶 여기저기에 문제가 생길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맡은 사역에 마지못해 대처하기 시작했고, 감독이 어떻게 하라고 하면 그냥 듣고 넘겼다. 나중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는 전력을 다했지만 할 수 없는 일은 진지하게 대하지 않았다. 이때 샤오강은 어떤 상태였겠느냐? 마지못해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감독과 형제자매의 진지한 지도와 도움을 마음속으로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게 내 최선이야. 더 나아질 가능성은 없어. 당신들은 지금 내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거라고. 어쨌든 영화는 찍을 수 있으면 찍고 못 찍으면 마는 거지 뭐. 나야 다시 영상팀으로 돌아가서 본분을 이행하면 되니까.’ 영상팀의 사역을 떠올려 보니 그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매일 컴퓨터 앞에만 앉으면 얼마나 안락하고 행복했던가! 자신의 전부, 자신의 세상이 모두 손가락만 까딱하면 되는 키보드 위에 있다. 특수 효과만 한번 적용하면 원하는 걸 다 만들 수 있는 가상 세계는 샤오강에게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그 순간 샤오강은 그의 과거, 영상팀에서 본분을 이행하던 그 시절이 더욱 그리워졌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샤오강은 잠에 들지 못했다. 왜 잠에 들지 못했겠느냐?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배우가 될 만한 재목일까? 그럴 재목이 아니라면 얼른 영상팀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어. 역시 영상팀의 본분이 수월했어. 컴퓨터 앞에 한 번 앉으면 한나절이 금방 지나가고, 식사도 직접 준비할 필요 없었잖아. 본분 이행도 그렇게 힘들지 않았고. 키보드만 치면 못하는 게 없었지. 생각할 수 있는 건 뭐든 할 수 있었어. 근데 배우가 된 지금은 매일 대사를 외워야 해. 외우고 또 외워도 촬영할 때는 통과가 안 돼서 감독한테 혼나고 형제자매에게 비난받기 일쑤지. 본분 이행이 너무 힘들어. 역시 영상팀의 사역이 좋아!’ 그는 생각하면 할수록 그리움에 사무쳐 한밤중에 잠을 설치며 잠들지 못하다가 새벽녘이 돼서야 너무 졸려서 겨우 잠든다. 샤오강은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자마자 이렇게 생각한다. ‘가, 말아? 영상팀으로 돌아가, 말아? 여기에 남아 있으면 영화를 다 찍고 나서도 합격인지 아닌지 알 수 없고, 그 기간 동안 많이 고생할지도 몰라. 난 배우가 될 재목도 아니잖아! 그때 배우가 되려고 했던 건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결정이었어. 왜 그렇게 어리석었을까! 봐봐. 한 걸음 잘못 내디뎠다가 상황이 이 지경이 됐잖아. 이 고통을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고. 이대로라면 좋은 배우가 되는 건 쉽지 않을 테니 일찌감치 그만두자. 괜히 그들의 일을 지체시키지 말고 얼른 감독한테 돌아가겠다고 말해야겠어.’ 그렇게 샤오강은 용기를 내 감독에게 이 일을 말한다. “보세요. 배우가 될 재목도 아닌 저를 굳이 뽑으신 거잖아요. 그냥 저를 영상팀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그러자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그건 안 돼요. 영화를 절반이나 찍었는데 이제 와서 배우를 바꾸면 차질이 생기지 않겠어요?” 그래도 샤오강은 꿋꿋이 말한다. “그럼 어떡해요? 누구로 바꾸시든 그건 감독님의 사정이지 이제 저랑은 상관없어요. 어쨌든 저를 꼭 보내 주셔야 해요. 안 보내 주시면 아무렇게나 연기할 거예요!” 감독은 가겠다고 고집부리는 샤오강을 보고 영화를 찍기는 글렀다고 생각해 결국 그를 돌려보낸다.
샤오강은 결국 영화 제작팀에서 다시 영상팀으로 돌아온다. 과거에 익숙했던 사역 장소로 돌아와 의자와 컴퓨터를 만져 보니 친숙했고 역시 여기가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자에 앉아 보니 푹신푹신했고 컴퓨터도 준비되어 있었다. ‘역시 영상 만드는 게 나아. 이 본분은 피곤하지 않거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역하는 것도 그 나름의 장점이 있지. 실수해도 아무도 모르고 지적하는 사람도 없어서 재빨리 수정하면 그만이니까.’ 샤오강은 드디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것의 장점을 발견한다. 이때 그는 어떤 기분이었겠느냐? 그보다 더 마음이 편하고 기쁠 수가 없었다. ‘이게 옳은 선택이야. 하나님이 내게 이 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시다니 이렇게 영광스러울 수가!’ 그는 자신이 옳은 선택을 했다며 기뻐한다. 그 후 샤오강은 영상팀에서 매일 순서대로 정해진 일을 한다. 그러는 동안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샤오강도 그렇게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보낸다.
어느 날 영상을 만들던 샤오강은 갑자기 어느 댄스 프로그램에 나오는 젊은이의 출중하고 유머러스하며 분위기 있는 모습을 보고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이도 비슷한 것 같은데 왜 나는 저 사람처럼 춤을 잘 추지 못할까?’ 그래서 샤오강은 또 마음이 흔들린다. 어떤 생각이 들었겠느냐? (춤을 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샤오강은 춤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반복해서 그 영상과 그 젊은이의 공연을 보고 어디에 가면 춤을 배울 수 있고 어떻게 배우는지, 가장 기본적인 춤은 무엇인지 수소문한다. 또, 일하면서 컴퓨터로 춤과 관련된 교재와 영상, 학습 자료를 자주 찾아본다. 물론 샤오강은 찾아보는 과정에서 그저 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연습하며 배우기도 했다. 춤을 배우기 위해 샤오강은 매일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며 자신이 할 줄 아는 체조 무용을 기반으로 정식으로 민족춤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렇게 그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고 상체를 뒤로 굽히기를 했다. 배우는 과정에서 샤오강은 육적인 고통을 많이 견디고 시간도 많이 들였고, 결국 그의 춤 실력은 조금 나아진다. 샤오강은 드디어 자신에게도 무대에 올라 춤출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는 몸도 좀 유연해졌고 춤 동작도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된 데다 모방하고 학습하며 나름 음악에 맞춰 리듬도 탈 수 있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샤오강은 교회에 본분 조정을 신청할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또다시 거듭된 요구 끝에 샤오강은 드디어 바라던 대로 무용팀의 무용수가 된다. 그 후 샤오강은 다른 무용수들과 마찬가지로 매일매일 일찍 일어나 아침 훈련과 무대 연습을 했다. 정상적으로 그들과 함께 예배하고 교제하며 공연을 분석하고 구상하기도 했다. 매일같이 이런 사역을 하는데, 하루가 끝나면 허리가 쑤시고 다리가 아플 정도로 피곤했지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이러했다. 처음에는 샤오강도 춤에 호기심이 가득했지만 무용수의 삶이나 이런저런 방면을 익히 알게 된 후 샤오강은 무용도 결국 별거 없고 한 가지 동작을 반복하는 것이며 때로는 발목이나 허리를 삐는 등 다칠 위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춤을 계속 추던 그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에휴, 춤추는 일도 쉽지 않네. 매일 땀범벅이 될 정도로 힘들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어. 영상 사역보다 더 어렵다고! 안 돼, 그래도 포기할 순 없어!’ 그는 이번에는 쉽게 물러서지 않고 드디어 무용 공연의 리허설까지 견뎠고, 공연은 심사를 위해 제출됐다. 심사에 들어가는 날 샤오강은 기분이 어땠겠느냐? 그는 감격에 겨웠고 자신의 노동이 얻을 성과에 기대를 가득 품은 채 점심도 걸렀다. 공을 아주 많이 들이지 않았느냐? 드디어 기다리던 결과가 나왔는데 첫 번째 심사에서 통과하지 못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기분이 곤두박질친 샤오강은 의자에 턱 걸터앉아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그렇게 오랜 시간을 들여 춤을 췄는데 당신이 한마디로 그걸 다 부정해 버리신 건가요? 당신이 춤을 아세요? 저희는 원칙대로 춤을 추고 대가도 많이 치렀는데 당신이 그렇게 쉽게 부정해 버리시면 다예요?’ 샤오강은 또 이런 생각을 한다. ‘결정권은 그들의 손에 있으니 그들이 통과시키지 않으면 다시 수정해야지 뭐. 누구한테 하소연을 하겠어? 어쩔 수 없어. 다시 하자.’ 무용 공연이 첫 번째 심사를 통과하지 못한 날, 점심도 거른 샤오강은 마지못해 저녁은 몇 숟갈 들었다. 너희 생각에 그가 밤에 잠에 들 수 있었겠느냐? (그럴 수 없었을 겁니다.) 그는 마음속이 복잡해 또 잠에 들지 못했다. ‘왜 나는 어디를 가나 되는 일이 없지? 하나님도 나를 축복하지 않으시고. 춤을 두 달이나 췄는데 첫 번째 심사를 통과 못 했어. 두 번째 심사는 언제 통과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야 통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난 언제쯤 무대에 올라 정식으로 공연할 수 있을까? 보아하니 남 앞에 얼굴 내밀기는 글렀네!’ 그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이리저리 궁리한 끝에 ‘역시 영상 사역이 좋아. 의자에 앉아서 키보드만 한 번 두드리면 꽃이고 풀이고 나무고 다 튀어나오잖아. 새도 지저귀게 하고 말도 달리게 하고, 원하는 건 다 만들 수 있어. 하지만 무용은 심사도 통과해야 하고 매일 땀범벅이 될 만큼 힘들어. 밥도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잘 만큼 힘들 때도 있어. 근데 첫 번째 심사도 통과 못 하다니 이 본분도 참 이행하기 쉽지 않네. 다시 영상팀으로 돌아가서 사역하는 게 좋지 않을까?’라고 느꼈다. 그는 생각다 못해 ‘나도 참 못났다. 왜 또 흔들리는 거지? 이런 생각은 그만하고 잠이나 자자!’라는 결론을 내리며 몽롱한 상태로 잠든다. 이튿날 눈을 뜬 그는 그 일은 거의 다 잊고 계속 춤을 추고 리허설을 한다. 두 번째 심사 날이 오자 샤오강은 또 긴장하며 이렇게 묻는다. “통과할 수 있을까요?” 그러자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걸 누가 알겠어요? 통과하지 못하면 우리의 춤이 아직도 부족하다는 뜻이니 다시 수정해야죠. 언제 통과되면 그때 정식으로 공연하고 영상을 찍게 되죠. 모든 걸 순리에 맡기고 이 일을 바르게 대해야죠.” 그러자 샤오강은 이렇게 말한다. “그럴 수 없어요. 당신들은 바르게 대할 수 있겠지만 저는 기다릴 시간이 없다고요.” 드디어 두 번째 심사 결과가 나왔는데 이번에도 통과하지 못했다. 샤오강은 이렇게 말한다. “쳇, 그럴 줄 알았어요. 춤을 춰서 두각을 나타내는 게 어디 쉽겠냐고요! 우리는 젊고 외모도 출중하고 춤도 잘 추잖아요. 이게 특기 아니겠어요? 심사위원들은 춤을 못 추니까 우리를 질투해서 통과시켜 주시지 않는 거예요. 보아하니 앞으로도 통과 못 할 것 같네요. 춤추는 건 너무 어려워요. 저는 돌아갈래요.” 샤오강은 그날따라 유독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잤다. 왜냐하면 그는 다음날 보따리를 싸서 떠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샤오강은 이번에도 결국 원하는 대로 영상팀으로 돌아가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예전의 그 익숙했던 느낌을 회상하며 샤오강은 이렇게 생각했다. ‘난 천성적으로 보이지 않는 데서 일할 재목인가 봐. 이름 없는 영웅밖에 될 수 없는 거지. 이번 생에는 무대나 유명해지는 것과는 연이 없는 것 같아. 착실하게 키보드나 두드리자. 이게 내 본분이니 이 사역이나 하는 거야.’ 그는 고생 끝에 마음이 안정됐다. 그의 두 번째 꿈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물거품이 됐다. 너희가 보기에 ‘부지런하고 학구열이 넘치는’ 데다가 ‘열정적이고 의지가 강한’ 샤오강에게 컴퓨터 앞에 앉아 따분하게 사역하는 일이 쉽게 내키는 일이겠느냐? 아마도 그렇게 내키는 일은 아닐 것이다.
최근 샤오강은 또 노래 부르는 데 빠졌다. 어떻게 이렇게 쉽게 변하는 것이냐? 다른 것도 아니고 왜 또 무대를 못 떠나는 것이냐? 이 사람의 마음속에는 뭔가가 숨겨져 있다. 이번에 그는 본분을 바꿔 달라고 성급히 요구하지 않고, 매일 자료를 찾고 목소리 쓰는 법과 노래 부르는 법을 연습했다. 목이 쉴 정도로 자주 연습해서 목소리가 아예 안 나올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샤오강은 낙담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전략을 바꿨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번에는 실제 상황도 알아보지 않고 본분을 바꾸지는 않을 거야. 꼭 조심해야 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남들이 비웃을 테니까. 계속 본분을 바꾸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어? 다들 나를 깔보겠지. 이번에는 내가 봐도 가수를 해도 되겠다는 생각, 교회에 있는 가수들과 실력이 엇비슷하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계속 연습한 다음 찬양팀에 지원할 거야.” 그는 매일같이 공들여 연습한다. 여유가 있을 때도, 사역을 할 때도 귀찮아하지 않고 연습한다. 어느 날 샤오강이 사역을 하고 있는데 팀장이 갑자기 샤오강에게 이렇게 말한다. “샤오강, 이걸 일이라고 한 건가요? 계속 이렇게 건성으로 대충 하면 이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게 할 거예요.” 그러자 샤오강은 “제가 언제요.”라고 답한다. 곧이어 사람들이 달려들어 이렇게 말한다. “샤오강, 무슨 일이에요? 아니, 이렇게 큰 잘못을 저지르다니! 상부에서 그렇게 많이 바로잡아 주셨는데 어떻게 또 이런 잘못을 저지를 수 있죠? 매일 노래 연습하느라 영상 만드는 데 집중을 못하니까 실수만 저지르고 큰일을 그르치잖아요. 또 이렇게 실수하면 교회에서 당신을 출교시켜 버릴 거예요. 더 이상 당신을 원하지 않고 우리도 당신을 버릴 거라고요!” 샤오강은 변명을 이어갔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앞으로 조심할 테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출교시키지 말아 주세요. 부탁이에요. 출교만은 안 돼요! 하나님, 살려 주세요!” 그가 소리치는 와중에 커다란 손이 뒤에서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샤오강, 정신 차려요! 샤오강, 정신 차리라고요!” 어떻게 된 일이겠느냐? (꿈을 꾼 것입니다.) 꿈을 꾼 것이다. 샤오강이 눈을 감은 채 비몽사몽간에 허공에서 손을 허우적거리자 다들 무슨 일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샤오강은 키보드 위에 엎드려 잠든 것이었다. 한 형제가 또 그를 툭툭 치고 몇 번 흔들자 샤오강은 드디어 깨어났다. 깨어난 그는 “아이고, 깜짝이야. 하마터면 출교당할 뻔했네.”라고 말했다. “무슨 일 때문에요?”라는 질문에 샤오강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실제로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니라 꿈일 뿐이었다. 꿈 때문에 놀라 깬 것이었다.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이게 바로 ‘샤오강의 꿈’이다.
이 이야기는 어떤 문제를 다루었느냐? 꿈과 현실은 자주 충돌한다. 많은 경우 사람은 자신의 꿈은 아주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만, 꿈과 현실은 완전히 별개의 일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꿈은 그저 너의 일방적인 소망이자 한순간의 흥미일 뿐이다. 사람의 기호와 야심, 욕망이 사람이 추구하는 목표가 되다 보니 사람의 꿈은 현실에 전혀 부합하지 않을 때가 많다. 꿈이 너무 많으면 보통 어떤 잘못을 저지르겠느냐? 자신의 눈앞에 놓인 해야 할 사역이나 현실을 소홀히 하고, 지금 자신이 이행해야 할 본분, 제대로 해야 할 사역, 다해야 할 의무와 책임은 밀쳐놓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그저 자신의 꿈을 좇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분주하게 노력하며 무의미한 일을 많이 저지른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본분을 잘 이행하지 못할 뿐 아니라 교회 사역을 그르치고 교란한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추구하지도 않는 사람이 아주 많은데, 그들은 본분 이행을 무엇으로 여기겠느냐? 일종의 일이나 취미, 흥미에 몰입하는 것으로 여길 뿐, 하나님이 맡긴 임무나 사명, 자신이 다해야 할 책임으로는 여기지 않으며, 더욱이 본분 이행 과정에서 진리나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본분을 잘 이행해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본분 이행 과정에서 어떤 사람은 조금만 고생해도 싫어하고 도피하려 하고, 어려움에 조금 부닥치거나 좌절을 조금 겪으면 중도에 포기하고 또 도피하려 한다. 그는 진리를 구하지 않고, 무슨 일만 생기면 등딱지 안으로 숨었다가 별일 없으면 다시 나오는 거북이처럼 그저 도피할 생각만 한다. 이런 사람이 적지 않다. 특히 사역을 하나 책임지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충성을 다할 수 있을지, 어떻게 그 본분을 잘 이행하고 그 사역을 잘 할 수 있을지 고민하지 않고, 어떻게 해야 책임을 전가할 수 있을지, 책망받거나 책임지지 않을지, 문제가 생기거나 실수했을 때 빠져나올 수 있을지만 궁리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우선적으로 자신의 퇴로와 자신의 기호나 흥미를 충족시키는 것만 고려하지 어떻게 자신의 본분을 잘 이행하고 충성을 다할지는 고려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그는 진리에 공을 들이지 않고 본분을 이행할 때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그는 오늘은 이걸, 내일은 또 저걸 하려 하고 누구의 본분이든 다 자신의 본분보다는 좋고 수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진리에 공을 들이지 않고 자신의 이런 생각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도 고민하지 않으며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지도 않는다. 마음속으로 늘 자신의 꿈이 언제 이루어질지, 누가 남의 주목을 받는지, 누가 상부의 눈에 드는지, 누가 사역할 때 책망도 받지 않고 진급하는지만 신경 쓴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런 것들만 가득하다. 너희가 보기에 늘 이런 일들만 생각하는 사람이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있겠느냐? 영영 그럴 수 없다. 그럼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은 어떤 부류에 속하겠느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겠느냐? 우선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런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 집에서도 사회에서 살 때처럼 복을 누리고 유명해지고 체면을 세우는 것만 추구한다. 이런 사람은 본질을 놓고 보면 어떤 부류에 속하겠느냐? 바로 불신파이다. 불신파는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할 때도 사회에서 일할 때와 마찬가지로 누가 발탁되는지, 누가 팀장이 되는지, 누가 교회 리더가 되는지, 누가 사역할 때 남들 눈에 들고 우러름을 받으며 지명되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는 이런 것들만 중시한다. 회사에서 누가 승진하는지, 누가 월급이 오르는지, 누가 상사의 눈에 드는지, 누가 상사와 친하게 지내는지 신경 쓰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 집에서도 이런 것들을 추구하고 하루 종일 이런 것들만 신경 쓴다면 이는 이방인과 다름없는 것 아니겠느냐? 본질적으로 이방인이며 전형적인 불신파이다.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그는 힘만 쓰고 대충 이행하며 아무리 설교를 들어도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실행하지도 않는다.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어도 조금의 변화도 없고 본분을 몇 년 이행하든 자신의 충성을 다하지도 못한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도, 충성심도 없는 불신파이다.
어떤 사람은 본분을 이행할 때 책임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교회에서 그에게 사역을 하나 맡기면 그는 우선 그 사역을 할 때 책임을 져야 하는지 따져 보고 책임을 져야 한다면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가 본분을 이행하는 조건은 첫째, 한가해야 하고, 둘째, 바쁘거나 피곤하지 않아야 하며, 셋째, 무엇을 하든 책임지지 않아야 한다. 그는 이런 본분만 받아들인다. 이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약삭빠르고 간사한 사람이 아니겠느냐? 책임은 조금도 지려 하지 않고 떨어지는 나뭇잎에도 머리가 깨질까 두려워하는 이런 사람이 무슨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 집에서 무슨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 집의 사역은 모두 사탄과 싸우는 일, 하나님나라의 복음 확장과 관련 있는데 책임이 따르지 않는 본분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보기에 리더를 맡으면 책임이 없겠느냐? 그의 책임이 더 크지 않겠느냐? 그는 더 많은 책임을 짊어져야 하지 않겠느냐? 사실 복음을 전파하고 증거하거나 영상을 만드는 등 어떤 사역을 하든 진리 원칙과 관련된 일이라면 다 책임이 있다. 본분 이행에 원칙이 없다면 하나님 집 사역에 영향을 끼칠 것이고 책임지는 걸 두려워한다면 아무 본분도 이행하지 못한다. 본분을 이행할 때 책임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과연 간이 작은 것일까, 아니면 성품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이 일에 대해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사실, 이것은 간이 작은 문제가 아니다. 자기를 위해 돈을 벌거나 자신에게 유리한 일을 할 때, 그는 어찌 그렇게 간이 크단 말이냐? 그 어떤 위험도 감수할 수 있다. 하지만 교회나 하나님 집을 위해 일할 때는 눈곱만큼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 한다. 이런 사람은 이기적이고 비열하다. 가장 간교한 사람이다. 본분을 이행할 때 책임지지 않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 대해 진심이 전혀 없고, 충성심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책임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과감하게 중임을 맡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그는 하나님 집 사역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앞에 나서서 용감히 나아가는 사람이다.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핵심적인 사역을 보면 용감하게 막중한 책임을 짊어질 줄 알고, 고생과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이고, 그리스도의 정예병이다. 본분을 이행할 때 책임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냐? 아니다. 그것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는 정의감도 책임감도 없는, 이기적이고 비열한 자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가 아니고, 진리를 전혀 안 받아들이는 자다. 이것만 보더라도 그는 구원받을 수 없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얻으려면 수많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또 진리를 실행할 때는 숱한 장애물에 가로막힐 수 있으므로 반드시 어느 정도 버리고, 육적인 이익을 포기하며, 얼마간 고통을 견뎌야 한다. 그래야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책임지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절대 실행할 수 없다. 그러니 진리를 얻는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두렵고, 자신이 손해 보는 것이 두렵고, 모욕을 당하고 비방과 판단을 받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감히 진리를 실행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진리를 얻을 수 없다. 아무리 오랜 시간 하나님을 믿어도 하나님께 구원받지 못한다.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교회 사역에 부담이 있는 사람, 책임감이 있는 사람, 진리 원칙을 견지할 수 있는 사람, 고생하며 대가를 치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 몇 가지를 갖추지 않은 자는 본분 이행에 적합하지 않다. 그런 자는 본분 이행의 조건을 갖추지 않은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면서 책임지기를 두려워한다. 책임지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나타내는 모습은 주로 다음의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언제나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본분을 선택한다. 교회 리더가 본분을 이행하도록 안배하면, 그는 먼저 그 본분을 이행할 때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물어본다. 만약 책임을 져야 한다면 받아들이지 않고, 책임을 지지 않고 책임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면 마지못해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또 힘든 일은 아닌지,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일은 아닌지 본다. 마지못해 받아들인다고 해도 제대로 본분을 이행하려 하지 않고 대충 건성으로 넘기려 든다. 한가하고 고생하지 않으며 육적으로 힘들지 않은 것을 원칙으로 삼는 것이다. 둘째, 어려움에 부닥치거나 문제에 직면했을 때 먼저 리더에게 보고해서 처리하고 해결하게 하며 자신은 편안하게 있으려고 한다. 리더가 어떻게 문제를 해결했는지 관심도 없고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저 자기가 책임만 지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 이런 식의 본분 이행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겠느냐? 이는 책임 전가이자 직무 태만이며, 농간을 부리는 것이고, 입만 살아 있고 실제적인 일은 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속으로 ‘내가 그 일을 했다가 마지막에 실수라도 하면 어떡해? 책임을 추궁하면 내가 처리되지 않겠어? 내가 첫 번째 책임자 아니겠냐고.’라고 한다. 바로 이 점을 걱정하는 것이다. 그럼 너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감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이냐?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 사람의 마음가짐이 올바르다면, 경험이 없고 그와 비슷한 일을 처리해 본 적도 없지만 최선을 다했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알 것이다. 너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감찰하고 사람의 마음을 감찰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이것조차 믿지 못한다면 이는 불신파 아니겠느냐? 그런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그런 사람은 본분을 이행하든 안 하든 상관이 없다. 그렇지 않으냐? 책임지는 것이 두려워 책임을 미룬다. 무슨 일이 닥치든 우선 직접 문제를 처리할 방법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리더에게 전화를 걸어 통보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리더에게 통보하는 한편 직접 문제를 처리하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리더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며, 전화를 한 후에는 수동적으로 지시를 기다린다. 리더가 지시하는 것만큼만 움직이고, 리더가 말하는 만큼만 행동하는 것이다. 리더가 말하거나 지시하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고 미루다가 꼭 누가 재촉하고 감독해야 일을 한다. 말해 보아라. 이런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 것이겠느냐? 힘을 쓴다고 해도 충성심이 없다! 본분을 이행하면서 책임지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한 가지 모습이 더 있다. 어떤 사람은 본분을 이행하면서 표면적인 일, 단순한 일, 책임지지 않는 일만 한다는 것이다. 어려움이 있고 책임져야 하는 일은 모두 다른 사람에게 미룬다. 또 문제라도 생기면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책임을 남에게 미룬다. 교회 리더가 책임을 지지 않는 그를 보고는 인내심 있게 도와주고 책망하고 훈계하며 책임감을 가지라고 해도 그는 여전히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이 본분은 제대로 이행하기가 쉽지 않아. 문제라도 생기면 책임을 져야겠지. 여차하면 제명되거나 도태될 수도 있어. 그럼 끝이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어떤 태도겠느냐?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이 일말의 책임감도 없다면 어떻게 그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본분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며, 책임지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본분을 이행하면 일을 그르칠 뿐이다. 이런 사람은 믿을 수 없고 일을 맡길 수도 없다. 그는 순전히 공밥 먹기 위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이런 ‘거지’는 내쳐야 하지 않겠느냐? 반드시 내쳐야 한다. 하나님 집에서는 이런 사람을 원치 않는다. 이것이 바로 본분을 이행할 때 책임지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보이는 세 가지 모습이다. 본분을 이행할 때 책임지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모두 충성스럽게 힘쓰는 자에도 미치지 못하고 본분을 이행할 자격도 없다. 어떤 사람은 바로 본분을 이행하는 이런 태도 때문에 도태된 것이다. 그들은 아마 지금까지도 이유를 몰라 이렇게 불평할 것이다. “이렇게 열정적인 마음으로 본분을 이행하러 간 저를 왜 그렇게 냉정하게 내보내시죠?” 그들은 아직까지도 깨닫지 못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왜 도태됐는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평생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자기변명만 하며 끊임없이 궤변을 늘어놓고 이렇게 생각한다. ‘사람이 자신을 보호하는 건 본능이고 당연한 거야. 자신을 조금도 보호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자기를 조금도 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누구나 스스로 빠져나갈 구멍은 만들어 놓지 않나?’ 일이 닥치면 늘 스스로를 지키고, 여지를 남기거나 자신을 위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두는데, 이것이 진리 실행이겠느냐? 이는 진리 실행이 아니라 농간을 부리는 것이다. 지금 너는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고 있다. 본분 이행의 첫 번째 원칙은 무엇이냐? 바로 마음을 다하고 온 힘을 다해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리 원칙, 네가 실행해야 할 원칙이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고 여지를 남기는 것은 이방인들의 실행 원칙이요, 최고의 철학이다. 어떤 일이든 먼저 스스로를 생각하고 자신의 이익을 1순위에 두는 것,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집의 이익이니, 남들의 이익이니 하는 것은 전부 자신과는 무관하게 보는 것, 자신의 이익을 가장 먼저 고려하고, 그다음으로 퇴로를 생각하는 것, 이런 자는 이방인 아니겠느냐? 이런 자가 바로 이방인이다. 이런 부류는 본분을 이행할 자격이 없다. 또 다른 전형적인 예는 이야기 속의 샤오강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무슨 일을 하든 본분을 지키지 않고 수고를 덜려 하며, 고생이나 좌절은 조금도 겪지 않으려 한다. 육적으로 편안해야 하고, 제때 밥 먹고 잠을 잘 수 있어야 하고, 바람을 맞거나 햇볕에 노출되지 말아야 한다. 그 밖에, 사역할 때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자신이 하기 좋아하고 잘하며 마음속으로 하고 싶은 일이어야 한다. 기꺼이 원해서 하는 일이 아니면 눈곱만큼도 순종하지 않고, 변덕스럽게 굴고 딴마음을 품으며 무엇을 하든 정성을 다하지 않고 여지를 둔다. 고생하면 바로 뒷걸음질치려 할 뿐 아니라 책망받는 것, 조금이라도 높은 요구를 받는 것, 조금이라도 고생하는 것은 다 받아들이지 못한다. 무슨 일을 하든 흥미와 자신의 계획대로 하며 조금도 순종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진리를 구하고 자신을 반성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이런 행동 방식과 패괴 성품은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할 때는 최소한 어느 정도 진심은 있어야 한다. 너희가 보기에 이런 사람들에게 진심이 있겠느냐? 실제로 행동해야 할 때 그들은 뒷걸음질치고 진심이 조금도 없다. 이러면 아주 골치 아프고 다루기 어렵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이 꽤 위대하다고 생각해서 교체되거나 책망받으면 상당히 억울해한다. 사람이 진리를 구하지 않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도 않으면 이렇게나 골치 아프다. 이 주제는 여기까지 다루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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