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조 그는 사람들이 진리와 하나님이 아닌 오직 그에게 순종하도록 한다(1) 제 1 부
참고 설교를 정리할 때 나타나는 문제를 해부하다
듣자 하니 설교를 정리하는 사람이 지난 설교 몇 편에서 앞부분의 이야기는 삭제하고 뒷부분에서 본격적으로 설교한 내용만 남겼다던데,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느냐? 뒷부분 설교와 분리된 이야기가 어떤 것들이냐? (<다바오와 샤오바오의 이야기>, <다밍과 샤오밍의 이야기>, <밑천을 따지다 —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다>입니다.) 그 세 이야기가 설교 내용과 분리되었구나. 왜 분리되었겠느냐?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듣기로는 설교를 정리하는 사람이 앞부분에서 한 이야기가 뒷부분의 설교 내용에 맞지 않다고 생각해서 분리했다고 한다. 그게 이유가 되겠느냐? 이게 바로 설교를 정리하는 사람이 한 일이다. 그들은 아주 교만하고 독선적이게도 설교 내용 없이 이야기만 골라내서 따로 한 파트로 엮었다. 너희가 보기에 이렇게 하면 효과가 좋겠느냐? 그리고 앞에서 한 이야기가 꼭 뒷부분의 설교 내용과 어울리고 들어맞아야겠느냐? 반드시 그래야 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설교를 정리하는 사람은 왜 그렇게 오해했겠느냐? 그는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겠느냐? 무엇이 문제겠느냐?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하신 이야기는 주제에서 벗어났어요. 제가 확인해 보고 하달할 때 따로 내려보낼게요. 앞에서 한 이야기의 내용이 설교의 내용을 교란하지 않게 설교는 설교끼리 따로 연결해 놓을게요. 당신이 속으로 딱히 기준이 없으니 제가 대신 확인해 드려야죠.’ 이건 선의가 아니냐? 그의 이런 선의는 어디에서 비롯되었겠느냐? 사람의 관념에서 비롯되지 않았겠느냐? (그렇습니다.) 내가 설교할 때 그렇게까지 꼼꼼하게 생각해야겠느냐? 매번 꼭 뒷부분의 내용에 어울리는 이야기만 해야겠느냐?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그건 규례이자 관념이다. 그럼 설교를 정리하는 사람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느냐? (관념과 상상에 기대 일을 처리했습니다.) 또 어떤 잘못을 저질렀느냐? (제멋대로 굴었습니다.) 이런 행위의 성질은 다소 제멋대로 구는 것인데,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해도 일리는 있지만, 이 문제의 본질과는 차이가 있다. 그는 설교를 정리할 때 어떤 마음가짐과 관점으로 하나님이 얘기한 각각의 일을 바라보겠느냐? 이야기든, 설교한 내용이든 그는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어떤 관점에서 얘기한 일들을 바라보고 듣겠느냐? (지식과 교육 수준입니다.) 그렇다. 들려준 이야기와 설교 내용을 지식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 그는 설교를 하면 어떤 말을 하든 반드시 순서대로 내용을 말해야 하고, 한마디 한마디 다 논리적이고 모든 사람의 관념에 부합해야 하며, 모든 내용이 반드시 엄격한 목적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런 관념으로 평가한다. 이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모습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이다! 지식의 관점에서 논리적으로 추론하는 방식으로 내가 얘기하는 내용들을 대하는 것은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나는 진리를 교제하는 것이지 글을 쓰는 게 아니다. 너는 이 점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너희는 예배 현장에서 설교를 듣고 나서 나중에 그들이 정리한 설교 내용을 다시 들었을 때 예배 당시에 했던 중요한 말이나 일이 삭제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적이 있느냐? 이런 현상이 존재하느냐? 예를 들어, 예배에서 꽤나 감동적이고 도움이 되는 말을 들었는데 나중에 설교 녹음을 들어 보니 그 부분이 삭제되고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있느냐? 자세히 듣지 않았다면 모를 수도 있으니 나중에 한번 자세히 들어 보아라. 나는 녹음을 한 번 들어 보았다. 처음에 내가 적그리스도의 여러 모습을 다루며 열다섯 가지 조항을 나열했는데 각 조항 중간에 했던 세세한 말이나 해석을 그들은 다 지워 버렸다. 그러고는 제1조, 제2조, 제3조 등으로 나열했다. 한 조항씩 얘기할 때는 속도가 유독 빨랐는데, 교사가 수업하는 속도보다도 훨씬 더 빨랐다. 해당 설교를 들어 본 적 없는 보통 사람이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듣는다면 생각할 겨를도 없을 것이다. 자세히 들으려면 잠시 멈춰서 한 문장을 다 듣고 서둘러 기록한 다음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고 이어서 다음 문장을 틀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속도가 너무 빨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이것이 바로 설교 녹음을 정리하는 사람이 저지른 심각한 잘못이다. 설교는 대화하고 말하는 것이다. 설교는 어떤 내용을 다루겠느냐? 여러 진리와 사람의 다양한 내적 상태를 다루는데, 모두 진리와 관련된 내용들이다. 그럼 사람은 진리와 관련 있는 이런 내용을 쉽게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겠느냐, 아니면 생각하고 묵상하며 마음과 머리를 거친 후에야 점차 반응하겠느냐? (생각하고 묵상하며 마음과 머리를 거쳐야 합니다.) 그럼 이런 상황을 고려했을 때 설교하는 사람은 어떤 속도를 유지해야겠느냐? 따발총처럼 말해도 되겠느냐? (안 됩니다.) 교사가 수업하듯 말해도 되겠느냐? (안 됩니다.) 연설하듯 말해도 되겠느냐? (안 됩니다.) 절대 그래선 안 된다. 중간에 질문하고 답하며 생각할 겨를이 있어야 하며, 사람에게 반응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 그 정도 속도가 적절하다. 그들은 이 원칙도 모르고 설교를 정리했는데, 이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당신이 얘기하시는 내용은 전에 들어 봤어요. 저는 한 번 들으면 대체로 다 기억할 수 있고 당신이 하시는 얘기가 뭔지도 알아요. 제 경험과 항상 설교 녹음을 정리하는 탁월한 기술을 통해 이렇게 정리하고 속도를 높였어요.’ 속도를 높인 건 문제될 게 없어 보이지만 설교문이 어떻게 바뀌었느냐? 글로 바뀌었다. 글로 바뀌니 현장에서 들을 때와 느낌이 다르다. 그럼 같은 효과를 이룰 수 있겠느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효과가 더 나아졌겠느냐, 아니면 떨어졌겠느냐? (떨어졌습니다.) 떨어졌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제멋대로 결정하고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어느 정도 교육을 받고 기술도 뛰어난 데다 은사도 있고 머리도 좋다고 생각해 결국 비이성적인 일만 저지른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내가 설교할 때 왜 가끔 너희에게 질문을 하겠느냐? “저희가 졸까 봐 그러시는 거겠죠.”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것이겠느냐? 왜 내가 가끔 외부의 일도 좀 언급하고 주제에서 벗어나 가볍고 유쾌한 일을 얘기하겠느냐? 바로 너희의 긴장을 풀어주고 너희에게 어느 정도 생각할 여지를 주기 위해서이다. 그 밖에도 너희가 글귀, 문자의 표면적인 뜻, 도리, 문장의 문법 같은 것들에 국한되지 않고 어떤 방면의 진리를 좀 더 넓게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가끔 외부의 일도 좀 다루고, 분위기를 위해 농담도 좀 하지만, 사실은 주로 효과를 위해서이다. 그러니 너희는 이런 점을 이해해야 한다.
너희도 알다시피 종교계의 목사가 설교할 때 그는 연단에 서서 사람의 현실 생활, 마음 상태, 문제점과는 전혀 관련 없는 틀에 박힌 주제들만 다룬다. 전부 죽은 글귀와 도리뿐이다. 듣기 좋은 말만 하고 공허한 구호만 외치다 보니 듣는 사람은 재미도 없고, 수확도 없다. 결국 위에서 목사가 떠들어도 아래에서는 모두 외면하는, 상호 작용이 전혀 안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는 무의미한 설교가 아니겠느냐? 목사는 밥벌이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그렇게 설교하는데, 신도의 필요는 고려하지 않는다. 반면 지금 우리가 하는 설교는, 종교 의식을 치르거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몇 가지 방면에서 효과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 성과를 이루려면 여러 방면을 두루 고려해야 한다. 다양한 사람들의 필요와 관념, 상상, 내적 상태, 관점을 다 고려해야 할 뿐 아니라 계층별 언어 수용 정도 또한 고려해야 한다. 교육을 좀 받고 비교적 글말을 좋아하는 사람은 글말로 쓰인, 비교적 어법에 부합하고 논리적인 말을 듣고 싶어 한다. 그는 그런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 반면 평범한 사람이나 사회 하류층은 이런 글말을 접하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해야겠느냐? 사투리를 좀 써야 한다. 예전에 나는 사투리를 많이 쓰지 않았는데 몇 년 사이 조금 배웠다. 가끔 헐후어(歇后語)를 사용하거나 농담을 할 때도 있다. 그러면 어느 계층의 사람이 들어도 내가 다룬 내용이 이해하기 쉽고 그들과 더 가깝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투리만 쓰면 설교 내용의 깊이가 부족한 것처럼 들리기 때문에 반드시 글말과 섞어서 일상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 그래야 최소한의 기준을 충족할 수 있다. 사투리만 썼다 하면 ‘그러니까’, ‘이게’, ‘그게’ 같은 말이 너무 많이 섞여 진리를 표현하는 수준에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글말만 써서 반듯하고 공식적으로 말하고 어법과 논리적 추론에 맞게 차근차근 이야기하면서 조금도 실수하지 않는다면, 글을 읽고 본문을 낭독하듯 초고를 써 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자도 다르지 않게 문장 부호조차 그대로 읽는다면, 너희가 보기에 그래도 되겠느냐? 그건 너무 번거롭고, 나는 그럴 에너지가 없다. 이것이 한 가지 이유다. 그 밖에도, 교육을 받았든 안 받았든 모든 사람의 인성에는 여러 가지 모습이 있는데 이런 인성의 모습은 현실 생활과도 관련 있다. 현실 생활은 또 일상 언어나 너의 생활 환경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생활 환경에서는 이런 종류의 일상생활 언어를 사용하고 나아가 일부 사투리도 섞어 쓴다. 여기에 문학적 수준의 일부 간단한 어휘도 첨가된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면 고려해야 할 부분은 기본적으로 다 포괄하고 포함하는 것이다. 노인이든 젊은이든, 교육을 못 받은 사람이든 어느 정도 지식을 갖춘 사람이든, 기본적으로 다 접근할 수 있고 알아들을 수 있으며 무미건조하거나 닿을 수 없다고 느끼지도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제하고 설교할 때 고려해야 할, 각 방면에서의 사람의 필요이다. 설교에서 성과를 이루려면 말하는 속도, 어휘, 표현 방식 등 방면을 다 고려해야 한다. 그 외에 어떤 일에 대한 주장을 표현하거나 어느 한 방면의 진리를 교제할 때 어디까지 말해야 철저하게 말한 것이고 어디까지 말해야 철저하게 말하지 않은 것인지, 어떤 방면들을 보충해야 하는지 모두 고려해야 한다. 이런 것들조차 생각하지 못한다면 생각하는 능력이 심히 부족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 평면을 생각하면 너는 입체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남보다 더 전체적으로, 더 정확하게 바라보아야 하고, 여러 방면의 문제를 모두 똑똑히 알아야 하며, 관련된 진리 원칙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이러면 모든 사람이 생각하거나 표현해 내고 드러내는 모든 방면의 패괴 성품, 그리고 관련 있는 내적 상태는 기본적으로 다 포괄하고 알아들을 수 있게 된다. 설교를 정리하는 사람도 이런 자질과 생각을 갖추어야 하지 않겠느냐? 이런 것들을 갖추지 않는다면 설교의 대체적인 의미, 중심 생각, 각 단락의 대략적인 의미를 늘 자신이 배웠던 지식에만 기대 정리할 것이다. 이는 마치 중국인이 중국어 교과서를 학습하는 것과 같다. 교사는 우선 학생에게 본문 전체를 예습하고 숙독하게 한 다음 첫 공식 수업에서 첫 번째 단락의 대체적인 내용과 새 단어, 그 안에 등장하는 어법을 가르친다. 너는 모든 단락을 다 배운 뒤 외워야 하고 마지막에는 새로 나온 단어로 문장도 만들어 본 다음 다시 본문의 중심 생각, 작가가 글을 쓴 목적을 학습하여 글이 전하려는 뜻을 이해하게 된다. 이런 것들은 모든 사람이 배워서 알지만 설교를 정리하는 데 활용하기에는 너무도 보잘것없다. 내가 알려 주겠다. 글을 쓸 때는 이런 것들을 활용할 수 있다. 이는 글을 쓰는 기본 상식이다. 그러나 설교를 정리하는 데 이런 생각과 이념, 방식을 적용한다면 이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지 않겠느냐?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내가 왜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지 알지 못하고 이 이야기 속에서 깨달아야 할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건 실수이다. 그 밖에, 너는 이야기와 설교 내용, 이 두 가지 안에 담긴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깨닫지 못한다면 너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이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자에게 무슨 설교를 정리할 자격이 있겠느냐?
너희는 내가 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으냐? 설교를 정리하는 사람은 그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관점을 그 안에 추가하는 것이다. 그는 내가 이야기를 하려면 뒷부분 내용에 맞아야 한다고 생각할 뿐, 내가 왜 이야기를 들려주는지는 알지 못한다. 너희도 모르지 않느냐? 모를 테니 내가 이유를 말해 주겠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적그리스도의 여러 모습을 거의 열 번 정도 다루었지만 전체 내용의 절반밖에 이야기하지 못했다.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다 이야기한다면 이 주제는 꽤 지루해질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매번 시작할 때마다 곧바로 우선 모두에게 지난번에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돌이켜보라고 하고, 그런 다음 바로 설교를 시작하면 너희는 서둘러 받아 적을 것이고 적다 보면 눈꺼풀이 감길 것이다. 설교를 마치고 너희에게 정리해 보라고 하면 다들 눈을 비비며 그날 교제한 대체적인 내용을 죽 한 번 훑어보며 읽을 것이다. 다들 내용을 대략적으로 기억한 듯하면 마지막으로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마치도록 하자. 다음번에 이어서 얘기하겠다.”라고 하면 다들 조금 우려할 것이다. ‘예배 때마다 이런 일들만 다루시네. 항상 똑같은 스타일에다 내용이 너무 장황하고 지루해.’ 그 밖에, 진리는 반드시 여러 방면으로 교제해야 하고 사람은 진리의 각 방면에서 동시에 자라야 한다. 사람의 생명 진입과 마찬가지다. 사람은 자신에 대한 인식, 성품 변화, 하나님에 대한 인식, 자신의 각종 내적 상태에 대한 인식, 자신의 인성과 식견 등 여러 부분에서 자라야 한다. 이런 게 모두 동시에 자라야 한다. 이 시기에 늘 적그리스도의 여러 모습을 분별하는 것만 다루면 사람은 다른 측면의 진리는 내버려둔 채 머릿속으로 하루 종일 이런 생각만 할 것이다. ‘누가 적그리스도일까? 혹시 나는 아닐까? 내 주변에 몇 명이나 있을까?’ 이러면 다른 방면의 진리에 진입하는 데 영향을 끼친다. 그래서 나는 어떤 방식을 써야 설교 내용에 진리를 하나 더 추가해서 사람이 진리를 하나 더 깨닫게 할 수 있을지 궁리했는데,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라는 주제를 다루는 기간에 다른 방면의 내용들도 추가로 깨닫게 하기로 했다. 이러면 효과가 더 좋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밥을 먹을 때 사과도 하나 곁들여 먹으면 영양분을 한 가지 더 섭취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너희 생각에 내가 이야기를 들려줄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당연하다. 필요 없다면 이야기를 뭐 하러 하겠느냐?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가볍고 유쾌한 주제를 다루면 사람이 다른 방면의 진리에서도 어느 정도 소득과 수확을 얻을 수 있으니 이는 좋은 일이다. 가벼운 주제를 다 다루고 나서 다시 본론을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안배하는 게 적절하다. 이는 식사 전에 무엇을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냐? (애피타이저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바로 애피타이저이다. 보통 애피타이저는 맛도 좋고 식욕도 돋우지 않느냐? 따라서 어떤 방면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너는 이 이야기 속에서 그 방면의 진리를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인식이나 이해를 심화할 수도 있으니 아주 바람직하다. 물론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이야기를 들어도 표면적인 이야기만 듣고 그 속에 담긴 깨달아야 할 진리는 보지 못한다. 그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 예를 들어, <다바오와 샤오바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어떤 사람은 다바오는 나쁘고 샤오바오는 멍청하다는 것과 그들의 이름만 기억할 뿐 이야기 속의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패괴 성품을 드러냈는지, 어떤 성품을 드러냈는지, 그 성품은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이며 진리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너는 어떤 상황에서 그런 성품을 드러내느냐? 너도 그런 말을 하지 않느냐? 만약 “저는 그러지 않아요.”라고 말한다면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는 뜻이니 아주 골치 아픈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일이 발생한다면 저도 그런 말을 하겠죠. 그건 특정한 내적 상태에서 드러내는 특정한 성품이니까요.” 이 사실을 인식했다면 이야기를 들은 보람이 있는 것이다. 이야기를 다 듣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다바오는 대체 뭐 하는 사람이죠? 어린아이조차 괴롭히고 속이다니, 정말 이상하네요! 저는 어린아이를 그렇게 속이지 않아요.” 이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 아니겠느냐? 그는 말만 그럴싸하게 할 뿐, 여기서 교제하려는 진리는 깨닫지 못하고 자신을 비춰 보지도 못한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 그것도 아주 심각하게 없는 것이다. 설교를 정리하는 사람에게 발생한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어떤 사람은 진리와 관련된 일에는 무조건 불신파의 관점을 드러내고, 진리만 언급하면 어떤 사람들은 영적인 이해력이 없고, 어떤 사람들은 치우친 모습을 보이고, 어떤 사람들은 강퍅함을 드러내고, 어떤 사람들은 사악함을 드러내고, 어떤 사람들은 귀찮아한다. 그럼 설교를 정리하는 사람은 어떤 성품이겠느냐? 최소한 오만방자하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자신이 깨닫지 못해도 구하지 않았다. 그는 묻지도 않고 직접 이야기와 뒷부분의 내용을 분리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제게 이 설교를 정리하라고 맡기셨으니까 제게 이런 결정을 내릴 권한이 있겠지요. 깔끔하게 이야기는 전부 없애 버리겠습니다. 제게 설교를 정리하라고 맡기셨으니 이렇게 처리하겠습니다. 그게 싫으시다면 저를 쓰지 마세요.’ 오만방자하지 않으냐? 그는 진리를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며 자신의 본분이 무엇인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건 하나도 모른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비이성적인 일, 비인간적이고 비인격적인 일, 진리 원칙에 위배되는 일만 하며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순종하지 않는다. 내가 설교 녹음을 정리하라고 맡겼는데 그가 개인적으로 어떤 의견이 있고 어떻게 처리하고 싶은지 내게 의논하지도 않았다. 이는 꽤 심각한 문제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로 심각한 것이겠느냐? (하나님 말씀을 왜곡하는 성질입니다.) 그런 성질이 묻어 있다.
나는 이야기를 하나 할 때 어느 한 가지 진리를 구체적으로 얘기한 다음 뒷부분에서 다른 방면의 설교를 하는데, 이 두 가지가 서로 어울리는지 내가 고려하겠느냐? 물론 나도 우선적으로 그 점을 고려하긴 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나는 이 두 가지가 반드시 서로 어울리게 하지는 않는 것이냐? 내가 알아차리지 못해서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럼 설교를 정리하는 사람에게는 왜 이 일이 문제가 되었겠느냐? 나는 내가 한 이야기가 뒷부분의 내용과 상관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그가 이 일을 알아차릴 수 있겠느냐? 그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이 일을 자세히 고민해 보지도 않았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당신은 성령의 지배를 받으시죠. 들었을 때 진리이면 그만이겠죠. 하지만 그날 들려준 이야기와 나중에 말한 구체적인 내용, 이 두 가지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는지, 왜 그렇게 얘기하시는지, 얘기를 다 하시고 나면 어떤 도움이 되는지,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시잖아요. 그러면 안 되죠!’ 우선, 너희가 보기에 내가 무엇을 말할지, 어떻게 말할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말할지 나는 분명히 알고 있는 상태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나는 분명히 알고 있는 상태이지 절대 흐리멍덩한 상태가 아니다. 마음속에 생각이 분명하다. 사람이 영적인 이해력이 없고 진리를 구할 줄 모르며 아무렇게나 분석하고 분류하면서도 잘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전형적인 바리새인이 아니겠느냐? 대단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공허한 이론만 듣기 좋아하고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설교는 듣기 싫어해서 결국 가장 얕은 진리조차 깨닫지 못한다. 이는 영적인 이해력이 심각하게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은 교만하고 독선적이고 간이 아주 큰데 무슨 일이든 감히 판단하고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패괴된 인류는 이런 인간들인데, 이것이 바로 성품이다. 겁 없이 함부로 날뛰는 게 좋은 일이겠느냐, 아니면 나쁜 일이겠느냐? (나쁜 일입니다.) 간이 크든 작든 사실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가 아닌가이다. 앞으로 너희는 설교 녹음을 들을 때 그들이 정리한 설교 내용 중 핵심적인 것이 삭제되지는 않았는지 주의 깊게 분별해 보고 살펴보아라.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자들이 가끔 저지르는 일이 은연중에 교란과 파괴를 불러올 수 있다. 그는 고의가 아니라고 하지만 고의가 아니라고 해서 그 성품이 패괴 성품이 아니겠느냐? 여전히 패괴 성품이다. 이 일은 여기까지 얘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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