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조 복받을 희망이나 지위가 없으면 물러나려 한다 (제 4 부)

4. 적그리스도는 발탁되거나 사용되지 않으면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

또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에 속하는 부류가 있다. 이들은 진리를 추구하지 않아서 중요한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하나님 집에서 책망과 훈계를 거의 받지 않고, 교체를 겪어 본 적도 없으며, 당연히 본분이 조정되는 일도 거의 없다. 하지만 자신들이 하나님을 믿고 몇 년이 지난 후에도 발탁되거나 사용되지 않으면 그들은 항상 자신이 복받을 희망이 얼마나 되는지 저울질하기 시작한다. 특히 하나님 말씀에서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라고 한 부분을 보고 자신이 복받을 희망이 작다고 느껴져서 물러나려는 생각을 한다. 한결같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이들 중 어떤 이는 지식과 모종의 특기가 좀 있는데 발탁되거나 사용되지 않으니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불평을 한다. 물러나자니 복받을 기회를 잃을까 두렵고, 그대로 있자니 그렇다고 발탁되거나 사용되지 않는다. 이들은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진다. 너희는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런 사람들은 진리를 추구하지는 않지만 그중에는 배우는 걸 좋아하고 성취욕이 있는 사람이 있는데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업무 지식을 배우려 하고 하나님 집에서 발탁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두각을 나타내서 자신이 얻고 싶은 지위나 각종 이익을 얻기를 고대한다. 겉으로 볼 때 이런 사람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묵묵히, 조용히, 성실하게 지내지만 마음은 야심과 욕망으로 가득하다. 그들의 명언은 무엇이냐?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그들은 조용히 있으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경쟁하지도 다투지도 않는다. 하지만 속에는 ‘원대한 포부’가 있다. 따라서 교회에서 누군가 발탁되고 누군가 리더 일꾼이 되는 것을 볼 때마다 속으로 한껏 우울해하고 실의에 빠진다. 어느 누가 발탁되어 양성되고 중용되든 그들에게 그것은 일종의 타격이고, 심지어 누군가가 형제자매들에게 우러름과 칭찬, 추대를 받으면 그들은 속으로 질투하고 슬퍼한다. 심지어 몰래 눈물을 떨구며 수시로 자문하는 사람도 있다. ‘난 언제쯤 남들이 우러러볼까? 언제쯤 지명받고 상부에 알려질까? 언제쯤 내 특기와 장점, 은사, 재주가 리더 눈에 띄고 발탁되어 양성될 수 있을까?’ 그는 속으로 근심하고 소극적이 되지만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못마땅해서 소극적이 되면 안 된다고, 끝까지 계속해야 한다고, 불굴의 정신으로 절대 포기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격려한다. 그는 늘 스스로에게 충고한다. “나는 원대한 포부가 있는 사람이야. 보통 사람, 평범한 사람에 만족할 수 없고, 평생을 뭐 하나 이룬 것도 없이 살기는 싫어. 하나님을 믿는 일에도 뛰어나고 성과를 내야지. 평생을 이렇게 조용히, 밋밋하게 살면 얼마나 억울하고 답답해! 난 그런 사람은 될 수 없어. 더 많이 노력할 거야. 시간을 죄다 활용해서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고, 많이 외우고, 지식을 배우고, 업무를 연구해야지. 남들이 할 수 있는 건 나도 해내고, 남들이 교제할 수 있는 건 나도 해야지.” 한동안 노력을 기울였지만 교회 선거 때 그는 또 선출되지 못했다. 매번 교회에서 양성하고 발탁하고 중용할 사람을 찾을 때마다 여전히 그의 자리는 없다. 매번 발탁되리라는 희망을 가질 때마다 결국에는 실망하게 되고, 매번 느끼는 실망은 그를 낙심하게 만들고 소극성을 띠게 만들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복을 받는 것은 기약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물러나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내키지 않아서 또 한 번 고군분투하기로 했다. 이렇게 고군분투할수록 추천받고 발탁되어 사용되고 싶은 바람은 더 커지고, 속으로 이렇게 바랄수록 돌아오는 것은 결국 실망이었다. 허영심과 복받으려는 욕망은 이렇게 그를 괴롭혔다. 실망할 때마다 그는 마치 불에 구워지고 달궈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얻고 싶어도 얻을 수 없고, 물러나고 싶어도 물러날 수 없고, 손에 넣고 싶어도 잡을 수 없으니 그에게 남은 것은 실망과 낙담, 기약 없는 기다림뿐이었다. 물러나고 싶었지만, 그러다 큰 복을 잃게 될까 두렵고, 복에 집착할수록 복은 잡히지 않았다. 결국 복에 대한 기대와 실망의 괴로움에 빠져 계속해서 발버둥치느라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가 이 일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기도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생각했다. ‘기도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형제자매들도 나를 칭찬하지 않고, 리더도 나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데 하나님이라고 파격적으로 나를 중용하실 수 있겠어?’ 그는 다른 사람에게 희망을 걸어도 실망할 것이고, 마찬가지로 복받을 희망을 하나님에게 걸어도 역시 확실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하나님 말씀 중에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다 구원받을 수 없다.”라고 한 말씀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실의에 빠졌다. 교회에서 아무도 그를 거들떠보지 않고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자신의 관상을 보아도 복받을 희망이 보이지 않자 그는 생각했다. ‘물러날까, 남을까? 복받을 희망이 정말 조금도 없는 걸까?’ 이렇게 거듭 망설이고 고민하는 동안 일 년이 지나고 또 일 년이 지나도 그는 여전히 발탁되거나 중용되지 않았다. 그는 지위를 다투고 싶었지만, 또 그건 그다지 이성적이지도 정당하지도 않고, 부끄러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투지 않으면 언제 발탁되고 중용될까 싶었다. 같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 같이 예배드리고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니 많은 이들이 발탁되고 중용되었다. 하지만 자기는 아무리 노력해도 중용되지 않으니 속으로 곤혹스럽기도 하고, 정말 길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내적 상태, 자신의 사상 관점, 자신의 오류와 결점을 절대 누구와도 교제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 완전히 마음을 닫은 것이다. 겉으로 보면 그는 말할 때도 사리 분별을 잘하고 일할 때도 조금은 이성이 있는 듯하지만 마음속에는 야심과 욕망이 무척 강렬했다. 그는 자신의 야심과 욕망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고생하고 대가를 치렀고, 자신의 복받을 희망을 위해 모든 걸 바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기가 바라는 성과가 보이지 않자 하나님과 하나님 집, 심지어 교회에 있는 모든 이들에 대해 마음 한가득 적개심과 분노를 품었다. 누구 하나 자신의 노력과 특기, 자신의 좋은 점을 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고, 하나님이 기회를 주지 않고 자기를 발탁하지 않고 중용하지 않는 것이 한스러웠다. 마음속에 그토록 커다란 질투와 증오가 생겼는데 그가 형제자매를 사랑할 수 있느냐?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느냐? 자신의 야심과 욕망을 내려놓은 다음 진리를 받아들이고 착실하게 본분을 이행하면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될 수 있느냐? 그가 이렇게 다짐할 수 있느냐? (없습니다.) 그는 그럴 의지도 없을 뿐 아니라 회개하는 마음도 없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스스로를 감추며 지내다 보니 하나님 집과 형제자매,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증오가 갈수록 커졌다. 어느 정도로 커졌겠느냐? 그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본분을 열심히 이행하지 못하기를 바라고, 하나님 집 사역이 마비되고 하나님의 경륜이 무산되기를 바라고, 심지어 형제자매들이 모두 큰 붉은 용에게 잡혀가기를 바랐다. 그는 형제자매들도 증오하고 하나님도 증오하면서 하나님이 공의롭지 않다고 원망하고 이 세상에 구세주 따위는 없다고 욕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마귀의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이런 부류는 평소에 꽤 깊이 스스로를 감추면서 겉으로는 겸손하고 부드럽고 사랑하는 마음도 있는 것처럼 잘 위장하지만, 사실 웃는 얼굴 뒤에 칼을 감춘 사람이다. 속으로는 살의를 깊이 숨기고 드러내지 않기에 누구도 간파하지 못한다. 누구도 그의 내막을 모르고 그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 그와 얼마간 지낸 사람은 이 사람이 질투심이 강하고 남과 겨루는 것을 좋아하고, 남 앞에 얼굴 내미는 것을 좋아하고, 승부욕이 특히 강해서 무엇이든 1등을 차지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겉으로 볼 때는 그렇지만 정말 그게 사실이냐? 사실상 이런 사람들은 복받으려는 욕망이 더 크다. 그는 자신이 묵묵히 노력하고 헌신하고 대가를 치르는 동안 사람들이 자신의 좋은 점, 자신의 사역 능력을 보고, 그래서 하나님 집에서 중용될 수 있기를 바란다. 중용되면 그 결과는 무엇이냐? 사람들에게 우러름을 받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실현하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뛰어난 사람이 되고,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앙망하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수년간의 수고에 부응하고 수년간의 대가와 노력에 부응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런 부류의 내면에 자리한 야심과 욕망이다.

이런 부류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지만 언제나 하나님 집에서 발탁되거나 사용되기를 바란다. 그들은 속으로 하나님 집에서 사역 능력이 있을수록, 중용되거나 발탁될수록, 사람들이 우러러볼수록 복을 받고 면류관과 상을 받을 확률이 커지고, 만약 사역 능력이 없고 무슨 특기가 없으면 복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은사, 특기, 능력, 기량, 그 사람의 교육 수준, 사역 능력에서부터 이기려는 의지, 끈질긴 태도에 이르기까지,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성 안에 포함되는 소위 장점과 강점이 바로 한 사람이 복을 받고 상을 받을 수 있는 밑천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어떤 기준이냐? 이것이 진리에 부합하는 기준이냐? (아닙니다.) 그건 진리에 부합하는 기준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탄의 논리가 아니냐? 사악한 시대, 사악한 세상 조류의 논리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이 사물을 판단하는 논리와 방식, 기준, 그리고 그들이 이런 일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을 보면 마치 하나님 말씀을 들어본 적도, 읽어본 적도 없어서 하나님 말씀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것 같다. 하지만 사실 그들은 매일 듣고 있고, 매일 보고 있고, 또 매일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의 관점은 어째서 바뀌지 않는 것이냐? 한 가지는 분명하다. 아무리 듣고 본다고 한들 그는 속으로 하나님 말씀이 진리이고 하나님 말씀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임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가 속으로 이 사실을 인식하고 받아들일 리 없다. 따라서 자신의 관점이 아무리 터무니없고 편집적이더라도 그는 영원히 고수할 것이고, 하나님 말씀이 아무리 바르다 해도 그는 배척하고 정죄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흉악한 본성이다. 중용되지 않고 자신의 욕망과 야심을 이룰 수 없을 때, 그는 여우의 꼬리를 드러내고 자신의 흉악한 본성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려 한다. 사실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부정한 것이다. 진리를 부정하고 하나님 말씀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임을 부정하는 그의 본성 본질 때문에, 그는 이렇게 하나님을 적대시할 수 있다. 또한 그런 본성 본질 때문에 그는 자신의 계산과 계획, 노력을 통해서도 여전히 중용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부정하고, 배반하고, 저버리려 하고, 하나님 집을 떠나려 한다. 이런 사람들은 비록 겉으로는 권력과 이익을 두고 남과 다투지 않고, 독자적인 수단을 취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독립 왕국을 세워 지위를 경영하지 않지만, 그 본성 본질을 보면 역시 영락없는 적그리스도이다. 그에게 자신은 어떻게 추구하든 옳지만, 하나님 말씀은 어떻게 얘기하든 거론할 가치도 없고, 들을 가치도 없고, 사용할 가치는 더더욱 없다. 이건 대체 어떤 인간이냐? 하나님 말씀은 그에게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그를 감동시킬 수도 없고 그의 마음에도, 그의 눈에도 들 수 없다. 그렇다면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냐? 사람의 은사와 재주, 능력, 사람의 지식, 사람의 수단, 그리고 사람의 야심, 원대한 계획과 위업이다. 그는 이런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런 건 무엇이냐? 하나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냐? 아니다. 그런 건 패괴된 인류가 추앙하고 우러러보는 것이자 사탄이 우러러보고 숭배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도, 하나님의 말씀, 구원받는 인류에게 하나님이 하는 요구와 정확히 배치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부류는 결코 그런 것들을 사탄에 속하는 것, 사악한 것, 진리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며 악착같이 단단히 움켜쥔다. 그것을 지고지상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으로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일을 대신한다. 이것은 대역무도한 짓이 아니냐? 이렇게 대역무도하고 어처구니없이 행동하다가 궁극적으로 맞이하는 유일한 결말은 무엇이냐? 그건 바로 구제가 불가능해지는 것으로, 누구도 그를 변화시킬 수 없게 된다. 틀림없이 이런 결말을 맞이할 것이다. 너희가 볼 때 이것은 가만히 때를 기다리는 그런 부류가 아니냐? 그들이 신봉하는 원칙은, 금은 언젠가는 빛을 발하기 때문에 조용히 엎드려서 시기를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하고, 그러는 동안 본인은 예비하면서 자신의 미래, 자신의 꿈과 희망을 위해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신봉하는 원칙과 생존의 원칙,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와 그들의 내면에서 본질적으로 앙모하는 것들을 볼 때, 이 자들은 영락없는 적그리스도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적그리스도는 독립 왕국을 세우고 지위를 다투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들이 권력을 잡은 후 독립 왕국을 세울 수 없겠느냐? 사람을 혼내고 괴롭힐 수 없겠느냐? (그럴 수 있습니다.) 이들이 권력을 잡으면 진리 원칙대로 행동하겠느냐?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겠느냐?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데려올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이들이 만약 중용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는 은사가 있는 사람, 말을 잘하는 사람, 지식이 있는 사람을 발탁할 것이다. 그 사람들이 사역을 할 수 있고 없고에 관계없이 자기와 같은 사람을 발탁할 것이다. 그리고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 정직한 사람들, 이들 옳은 사람들은 모두 억압받을 것이다. 이런 광경을 목격하는 순간, 이 부류 사람들의 적그리스도 본질이 드러나지 않겠느냐? 그것이 아주 분명해지지 않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내가 처음에 했던, “중용되지 않고 복받을 희망이 없으면 물러나려고 하는 그런 부류 역시 적그리스도이다.”라는 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보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적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리더 직무에서 교체된 다음, 상부에서 앞으로는 더는 그를 양성하거나 쓰지 않겠다는 말에 무척 괴로워하며 통곡하기 시작한다. 마치 도태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어떤 문제이냐? 다시 너를 양성하거나 사용하지 않는 것이 네가 도태되었다는 뜻이냐? 네가 구원받을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냐? 명예와 이익, 지위가 정녕 너에게는 그렇게 중요하다는 말이냐?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명예와 이익, 지위를 잃었을 때 스스로를 반성하고 진정으로 뉘우쳐야 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선택하고 새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렇게 슬퍼하고 통곡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네가 속으로 자신이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고 진리도 추구하지 않아서 하나님 집에서 교체된 것임을 알고 있다면, 하나님 집에서 앞으로 다시는 너를 발탁하거나 사용하지 않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부끄러워해야 하고, 하나님에게 죄스럽고 미안하게 생각해야 하고, 자신이 하나님에게 쓰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이것이 그나마 조금은 이성적인 것이다. 하지만 너는 하나님 집에서 더 이상 너를 양성하거나 쓰지 않겠다는 말에 소극적이 되고 괴로워한다. 이것은 네가 추구하는 것이 명예와 이익, 지위라는 뜻이고, 너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너는 복받으려는 마음이 그토록 강하고, 지위를 그토록 소중히 여기면서 실제적인 사역은 하지 않으니 교체되어 마땅하다. 너는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식하고 반성해야 하고, 자신이 잘못된 길을 걷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네가 이렇게 지위와 명예, 이익을 추구하는 건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에게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게 될 것이고, 만약 온갖 악행을 저지른다면 하나님이 내리는 징벌도 받을 것이다. 너희도 이런 문제가 있지 않으냐? 지금 너희에게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고 한다면 너희는 괴롭겠느냐? (괴롭습니다.) 어떤 사람은 상부 리더가 자기를 두고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고 하자, 자신이 진리를 깨달을 수 없고 하나님이 자신을 원하지 않는 게 분명하고, 복받을 희망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는 비록 괴로웠지만 그래도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할 수 있었다. 이런 사람은 그래도 조금은 이성적이다. 어떤 사람은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는 말에 소극적이 되어 본분도 이행하지 않으려 했다. ‘나보고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고 하는데 그럼 복받을 희망도 사라진 것 아닌가? 앞으로 내가 복받을 일은 없겠구나. 그럼 더 믿을 필요가 있을까? 나한테 봉사하라고 해도 안 될 걸. 누가 당신한테 공짜로 힘을 써 준대? 내가 그렇게 멍청한 줄 아나!’ 이런 자가 양심과 이성이 있느냐?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렇게 많이 받고도 갚을 줄 모르고, 약간 봉사하는 것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이런 자는 끝이다. 끝까지 봉사하지도 못하고, 하나님에게 참된 믿음도 없다. 바로 불신파이다. 네가 하나님에게 진심이 있고 참된 믿음이 있다면, 너에 대한 어떤 평가도 네가 더욱 참되고 정확하게 자신을 인식하도록 해 줄 뿐이니 너는 그것을 바르게 대해야 한다. 그것 때문에 네가 하나님을 따르고 본분을 이행하는 일이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설령 복을 받을 수 없더라도 하나님을 위해 끝까지 봉사하려고 해야 한다. 원망 없이 기꺼이 그렇게 하면서 모든 것을 하나님 지배에 맡길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사람이 바로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이다. 사람이 복을 받고 화를 입는 일은 모두 하나님 손에 달렸고, 하나님이 주재하고 안배하는 것으로, 사람이 구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도, 사람이 노력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건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따를 수 있느냐,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나님 요구에 따라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하나님은 각자가 행한 바에 따라 사람에게 돌려줄 것이다. 만약 사람에게 그만한 진심이 있고, 자신이 다해야 할 본분에 최대한 힘을 바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인정과 축복을 받을 수 있다. 반대로 사람이 본분 이행에 합격하지 못하고 심지어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도 하나님 손에서 복을 받으려고 한다면, 그렇게 하는 건 너무나 비이성적이지 않으냐? 만약 네가 스스로가 충분히 잘하지 못한 것 같고 힘은 많이 썼지만 원칙대로 일하지 못한 것 같아서 하나님께 죄송스러운데 하나님이 너를 축복하고 은총을 베풀어 준다면 그것은 특별한 은혜가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너를 축복하고자 한다면 그건 어느 누구도 앗아 갈 수 없다. 너는 네가 잘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판단해서 너란 사람은 진심이 있고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너에게 은총을 베풀고 축복하고자 한다. 하나님이 한 이 모든 일은 틀릴 리 없고, 너는 하나님의 공의를 찬미해야 한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든 모두 옳으니, 설령 네가 하나님이 한 일에 관념이 있어도, 하나님이 한 일이 사람의 뜻에 부합하지 않고 네 뜻에 맞지 않아도 너는 하나님을 찬미해야 한다. 어째서 이렇게 해야 하느냐? 너희는 그 이유를 모른다. 그렇지 않으냐? 그건 사실 쉽게 설명할 수 있는데, 그는 하나님이고 너는 사람이기 때문이고, 그는 창조주이고 너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너는 하나님에게 어떻게 해 달라고, 너를 어떻게 대해 달라고 요구할 자격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에게 요구할 자격이 있다. 복과 은총, 상, 면류관 등,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내려 주고 누구에게 내려 줄지는 하나님이 결정한다. 왜 그런 것이냐? 그건 모두 하나님에게 속해 있는 것이지, 인류와 하나님이 똑같이 나눠 가지는 공동 재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속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것을 약속한 사람에게 내려 준다. 하나님이 너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더라도 너는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한다. 만약 네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너는 피조물이 아니란 말이냐? 네가 하나님의 주재에서 벗어날 수 있단 말이냐? 하나님이 여전히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사실은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 하나님의 신분, 지위, 본질과 사람의 신분, 지위, 본질, 이 둘 사이에는 영원히 등호가 성립될 수 없고, 영원히 어떤 변화도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영원히 하나님이고, 사람은 영원히 사람이다. 사람이 이 일을 알 수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이성적인 방법이다. 그것 말고 선택할 수 있는 제2의 길은 없다. 네가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패역이고, 네가 따지고 반항한다면 그것은 대역무도이다. 너는 멸해져야 한다. 네가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할 수 있는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 사람은 그런 태도가 있어야 하고, 그것이 바로 피조물이 갖춰야 할 태도이다. 예를 들어, 네가 개나 고양이를 기를 때 그것들이 너에게 온갖 맛있는 것, 재미있는 것을 사 달라고 요구할 자격이 있느냐? 이렇게 비이성적으로 주인에게 요구하는 개나 고양이가 있느냐?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집 개가 자기보다 더 잘 지내는 걸 보고 자기 주인을 따르지 않는 개가 있느냐? (없습니다.) 개는 천성적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주인님은 나를 먹여 주고 재워 주는데 나도 집을 지켜 줘야지. 설령 주인님이 먹이를 안 주거나 좀 부실한 걸 주더라도 집을 지켜야지.’ 그는 결코 분수에 안 맞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주인이 잘해 주든 말든 주인이 들어오기만 하면 반가워서 꼬리를 계속 흔들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개는 주인이 자기를 좋아하든 말든, 맛있는 먹이를 사 주든 말든 언제나 주인에게 한결같고, 항상 집을 지킨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람이 개보다도 못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에게 늘 요구하고, 늘 하나님을 거역한다. 무엇이 문제인 것이냐? 사람은 패괴 성품이 있어 피조물의 본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사람의 본능을 잃고 사탄으로 변했다. 사탄으로 변한 사람의 본능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진리를 버리고, 악을 행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사람의 본능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사람이 양심과 이성을 갖추고,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사람이 다해야 할 본분을 이행하게 만들어야 한다. 개가 집을 지키고 고양이가 쥐를 잡는 것과 같다. 주인이 자기에게 어떻게 하든 개와 고양이는 젖 먹던 힘을 다하고 마음과 뜻을 다해 제자리를 지키고 자신의 본능을 발휘한다. 그래서 주인이 개나 고양이를 좋아한다. 사람이 만약 이렇게 해낼 수 있다면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을 얘기할 필요가 없고, 이 모든 진리도 얘기할 필요가 없다. 사람은 너무 깊이 패괴되어 이성과 양심이 없고, 인격도 부족하고, 패괴 성품이 시시각각 장난을 치며 표출된다. 그리고 그것이 네 사상과 선택에 영향을 주어 네가 하나님을 거역하며 순종하지 못하게 만들고, 네가 늘 주관적인 바람과 생각, 기호를 갖게 만들고, 진리가 네 안에서 주인이 되지 못하고 네 생명이 되지 못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너를 구원하는 성과를 이루기 위해 말씀으로 너를 심판하고, 시련을 주고, 연단해야 한다. 하지만 적그리스도 부류는 사람들 사이에서 부정적인 역할만 한다. 전형적인 마귀 사탄이다. 그들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에게 패괴 성품이 있다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가차 없이 빼앗으려 하고 하나님 손에서 복과 면류관, 상을 받으려 한다. 어느 정도로 다툴 수 있겠느냐? 염치없고 어처구니없는 지경이다. 만약 자신이 온갖 악행을 저질러서 드러나고 도태되면 그는 가슴에 한을 품고 하나님에게 악담을 퍼붓고, 리더 일꾼에게 악담을 퍼붓고, 교회 그리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증오한다. 이로써 악인과 적그리스도의 추악한 낯짝이 완전히 드러난다.

적그리스도의 여러 가지 모습 중 제12조에 해당하는 모습은 ‘복받을 희망이나 지위가 없으면 물러나려 한다’는 것이다. 어떤 게 물러나는 것인지 간단히 얘기해 보자. 물러나는 것을 문자적인 의미에서 이해하자면, 사람이 한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을 두고 물러난다고 한다. 하나님 집에는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이 예배드리고 설교 듣는 걸 싫어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게 달갑지 않아서 자발적으로 교회와 형제자매를 떠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를 두고 물러난다고 한다. 이것은 문자적 의미의 물러남이다. 하지만 하나님 편에서 진정으로 한 사람이 물러났다고 정의하는 것은, 사실 그 사람이 하나님 집을 떠나서 보이지 않고 교회에서 제명된 경우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사실상 한 사람이 믿음이 크고 작고를 떠나, 또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말고를 떠나 그가 만약 하나님 말씀을 결코 읽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 입장에서는 이미 물러난 것이고 이미 하나님 집의 일원이 아닌 셈이다. 하나님 말씀을 읽지 않는 부류는 그중 하나에 해당한다. 또 다른 부류는 교회 생활에 전혀 참여하지 않고, 형제자매들이 같이 찬양하고, 하나님 말씀을 읽고, 개인의 체험적 인식을 교제하는 등 교회 생활과 관련 있는 이런 활동을 하나도 참여하지 않는다. 이 부류도 하나님이 볼 때는 이미 물러난 것이다. 또 한 부류는 본분 이행을 거절하는 부류이다. 하나님 집에서 그에게 어떤 요구를 하든, 어떤 사역을 시키고 어떤 본분을 시키든,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심지어 말을 전하도록 시킬 때도 있는데, 이런 간단한 일도 그는 하려 하지 않는다. 이방인을 찾아 도와달라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을, 자칭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 그가 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받아들이기 거부하고 본분 이행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는 형제자매가 아무리 권면해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교회에서 어떤 본분을 이행하도록 안배해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온갖 이유를 들어 거절한다. 이것이 바로 본분 이행을 거절하는 부류이다. 이 부류 역시 하나님이 볼 때는 이미 물러났다. 이렇게 물러난 것은 하나님 집에서 그를 제거하거나 제명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 본인에게 이미 참된 믿음이 없는 것이고 그가 스스로를 하나님 믿는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중 한 가지에만 해당되어도 이미 물러난 사람이다. 이렇게 정의하는 것이 정확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지 않으면 네가 무슨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냐? 네가 교회 생활을 하지 않고, 형제자매들과 왕래하지 않고 상호작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냐? 더더욱 아니다. 또한 네가 본분 이행을 거절하고 피조물이 다해야 할 소임도 다하지 않으면 그건 더욱 심각하다. 이 세 부류의 사람은 하나님이 볼 때 이미 물러난 사람이다. 하나님 집에서 그들을 출교하거나 제명한 게 아니라 그들 스스로 먼저 물러난 것이고, 먼저 권리를 포기한 것이다. 그들의 모습은 그들이 진리를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라, 그야말로 떡으로 배만 불리려 하고 복받기만을 바라는 사람임을 완전히 드러낸다.

2020년 10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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