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조 자신을 높이고 증거한다 (제 4 부)

어떤 사람들은 적그리스도의 성품이 있어 자주 패괴 성품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하며, 또한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할 수 있다. 한동안 지나면 그에게서 변화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런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는 대상이다. 어떤 사람은 겉으로는 버리고 헌신하며 고생하고 대가도 지불하지만 그의 본성 본질이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데, 네가 그에게 진리를 교제하면 그는 싫어하고 반항한다. 그는 예배할 때 설교를 들으면 졸려 하고 잠을 자며 재미없다고 생각하고, 설사 알아들었다 해도 실행하지 않는다. 또 어떤 사람은 설교를 들을 때 겉으로는 꽤 진지해 보이지만 마음속으로는 진리를 사모하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을 대할 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인 지식과 이론으로 여겨 평가하는 태도를 보인다. 따라서 그가 하나님을 몇 년 믿든,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읽고 설교를 얼마나 듣든 결국 지위를 추구하고 권력을 숭상하는 내면의 관점과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의 태도는 전혀 바뀌지 않는다. 이런 자가 바로 전형적인 적그리스도이다. 만약 네가 그를 폭로하며 “당신의 행동 방식은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는 겁니다. 당신이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은 사람을 현혹하는 것이자 하나님과 지위를 다투는 것이며 사탄과 적그리스도의 행동 방식입니다.”라고 말하면 그가 이런 정죄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받아들일 리가 없다. 그는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내가 이렇게 하는 건 정당해. 나는 이렇게 할 거야. 당신이 어떻게 정죄하든, 당신이 뭐라고 하고 얼마나 바른 소리를 하든 나는 이런 행동 방식과 바람, 추구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 이러면 그를 적그리스도라고 규정할 수 있다. 네가 뭐라고 하든 그의 관점과 속셈, 의도, 야심, 욕망을 바로잡을 수는 없다.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로, 아무도 그를 바꿀 수 없다. 진리를 어떻게 교제하고 어떤 언어와 말을 사용하든 어떤 시간과 공간, 배경에서도 그를 바꿀 수는 없다. 환경이 어떻게 변하고 주위 사람과 일, 사물이 어떻게 변하든, 시대가 어떻게 변하든, 하나님이 얼마나 큰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고 그에게 얼마나 많은 은혜를 베풀든, 심지어 그에게 어떤 징벌을 내리든 일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과 의도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권력을 쟁탈하려는 그의 야심과 욕망, 그가 처신하는 방식, 진리와 하나님을 증오하는 그의 태도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남이 그에게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여 사람을 현혹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면 그는 남이 문제를 찾아내지 못하고 분별하지 못하도록 말하는 방식을 바꾼다. 그는 더욱 교활한 방식으로 계속해서 자신의 경영을 하여 스스로 권력을 잡고 하나님 선민을 통제하려는 목적을 이룬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모습이며 적그리스도의 본질에 의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설령 하나님이 그를 징벌하겠다고 말씀하고, 그의 결말이 다가왔다고, 그는 저주받을 만하다고 말씀한다 해도 그의 본질을 바꿀 수 있겠느냐? 진리를 대하는 그의 태도를 바꿀 수 있겠느냐? 지위와 명리에 대한 그의 사랑을 바꿀 수 있겠느냐? 바꾸지 못한다. 사탄에 의해 패괴된 사람을 정상 인성을 지니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이 하는 사역으로, 이룰 수 있다. 그러나 마귀와 인두겁을 쓰고 있어도 본질이 사탄인 사람, 하나님을 적대하는 사람을 정상적인 사람으로 변화시킬 수 있겠느냐? 그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그런 사역을 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구원하는 인류에는 그런 사람이 포함되지 않는다. 그럼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어떻게 규정하겠느냐? 그는 사탄에 속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이 택하고 구원하는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원치 않는다.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오래 믿었든,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든, 혹은 무슨 일을 했든, 그의 의도는 변할 리 없다. 그는 자신의 야심과 욕망을 버릴 리도 없고, 사람과 지위를 놓고 하나님과 다투려는 그런 속셈과 욕망을 버릴 리는 더더욱 없다. 이런 자는 틀림없는 적그리스도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적그리스도가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잠깐 어리석어 그러는 것 아닐까요? 그가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나님이 이적과 기사를 좀 나타내거나 징벌을 좀 내린다면 그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진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더 이상 하나님과 지위를 다투지 않지 않을까요? 그는 하나님께서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시는 것과 하나님의 영체를 보지 못해 믿음이 없어서 연약해지고 사탄에게 속은 것 아닐까요?” 그렇지 않다. 적그리스도의 야심과 욕망, 본질은 일시적으로 속고 우매하며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과는 구별되고 완전히 다르다. 적그리스도는 천성적으로 사탄 본성을 가지고 있고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사람이다. 그가 바로 하나님과 공존할 수 없고 끝까지 하나님에게 대항하고 다투는 사탄이자 인두겁을 쓴 살아 있는 사탄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본성 본질에 따라 적그리스도로 규정되는데, 그럼 그는 하나님 집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어떤 일을 하겠느냐?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며 무너뜨리고 파괴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하나님 집에서 그런 일을 저지른다. 그는 원래 그런 인간이고 사탄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 늑대가 전적으로 양을 잡아먹으려 양 떼에 침입하듯 그는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은 왜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집에 등장하는 것을 허락하겠느냐? 하나님 선민의 분별력을 키우기 위해서이다. 사탄 마귀가 어떻게 생겼고 어떤 일을 저지르며 그 본질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무엇을 표출하는지, 사람들 가운데서 어떻게 사람을 현혹하고 어떻게 하나님과 맞서는지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사탄 마귀가 언급되면 사람은 추상적이고 공허하며 구체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탄이 어디 있나요?” “반 공중에 있어요.” “그럼 사탄은 얼마나 큰가요? 구체적으로 어떤 뛰어난 재주를 부리나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과 맞서나요? 그 본성 본질은 무엇인가요?” 이렇듯 사람은 추상적이고 막연하며 공허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은 적그리스도의 모습과 표출을 통해 그런 것들을 사탄의 행동, 본성 본질과 대조할 수 있다. 그러면 구체화되기 때문에 추상적이지도, 공허하지도 않게 된다. 구체화되면 사람도 그의 말을 들을 수 있고 그의 행위를 볼 수 있으며 공을 들여 그의 본성 본질을 분별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사람은 하나님이 말씀한 사탄 마귀의 본질이 더욱 구체적이고 진실해 실제로 대조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겠느냐? 어떤 사람은 분량이 작고 진리를 깨닫지 못하여 순간적인 우매함으로 인해 적그리스도에게 속아 넘어가고 현혹되어 일 년쯤 떠나게 된다. 그러다 다시 하나님 집에 돌아오고 나서야 사탄을 따르는 것이 아주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사람은 처음에 적그리스도를 따라갔을 때는 당당하게 “상부에서는 적그리스도를 따르지 말라고 하지만 우리는 따르고 말 거예요. 언젠가는 우리가 옳다는 사실이 증명될 거예요!”라고 말하지만 결국 그는 한동안 성령 역사가 사라졌다고 느끼게 되고 마음속으로도 확증을 얻지 못한다. 마치 하나님이 사라진 것 같고 하나님을 믿는 것의 의미와 방향도 사라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다가 서서히 적그리스도를 더욱 잘 분별하게 된다. 과거에는 적그리스도가 진리를 깨달았으니 그를 따라 믿으면 틀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적그리스도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마치 진리를 깨달은 듯 말하지만 절대로 진리를 실행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사실이다. 적그리스도를 그토록 오랫동안 따랐지만 진리를 조금도 얻지 못했으니, 그는 적그리스도를 계속 따르는 것이 아주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고 후회하며 적그리스도를 버리고 하나님 집으로 돌아오려 한다. 하나님 집에서 그를 받아들인 뒤 그에게 그 체험을 이야기해 보라고 하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 적그리스도는 사람을 현혹하는 데 아주 뛰어나요. 그때는 아무리 봐도 옳은 사람 같았는데 그를 일 년 넘게 따랐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고 아무런 진리도 깨닫지 못했어요. 진리 실제도 전혀 갖추지 못하고 귀중한 시간만 허비했으니 손해가 막심하죠!” 이 실패한 체험이 그에게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다. 하나님 집에 돌아온 이후 그는 설교를 들을수록 진리를 더 많이 깨닫게 되고 마음속도 더욱 환해진다. 자신이 적그리스도를 따라 걷던 그 길을 다시 떠올리고 자신이 입은 손해를 확인하고는 적그리스도는 사탄이 분명하며 진리도 전혀 갖추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진리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 후 그는 더 이상 사람을 따를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된다. 다시 리더를 뽑을 때 그는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투표하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자칫하다간 내가 행사한 이 한 표 때문에 적그리스도가 뽑힐지도 몰라. 내가 투표를 안 한다면 적그리스도는 안 뽑힐 수도 있지. 사람을 평가할 때는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원칙대로 평가해야 해.’ 일 처리에 원칙과 기준이 생기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바람직한 일이다. 어떤 사람은 적그리스도에게 현혹되어 이렇게 말한다.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닥쳤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버려두시고 돌보지 않으시는 게 아닐까요?”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네게 적그리스도를 따르지 못하게 한다면 너는 동의하겠느냐? 너는 동의하지 않고 기어코 따르려 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네가 따르도록 허락한 다음, 사실을 이용해 너에게 교훈할 수밖에 없다. 너는 한동안 적그리스도를 따르다가 갑자기 각성하여 자신의 생명이 손해를 입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후회하며 적그리스도를 버리고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려 할 것이다. 다행히 하나님께 관용과 긍휼이 있어 너를 원하기에 망정이지, 만약 하나님이 너를 원하지 않았더라면 너는 완전히 끝장났을 것이고 더 이상 구원받을 기회가 없을 것이다. 적그리스도를 따라가면 좋은 결말을 얻지 못한다.

적그리스도를 분명히 파악하고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적그리스도의 여러 모습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의 본성 본질이 적그리스도와 많은 부분에서 같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둘 다 사탄에 의해 패괴된 인간이기 때문이다. 다만 적그리스도는 사탄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어 사탄과 한패가 되고 사탄을 위해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너 역시 패괴된 인간이지만,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고 아직 구원받을 희망이 있다. 그러나 너는 본질이 적그리스도와 똑같은 부분이 많고, 행동 방식, 의도도 같다. 다만 너는 진리를 듣고 설교를 들으면 돌아설 수 있으며 돌아설 수 있기 때문에 구원받을 희망이 있다. 바로 이 점이 다르다. 따라서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는 동시에 너도 자신을 비춰 보고 자신이 적그리스도와 어떤 점이 같은지, 적그리스도의 모습, 성품, 본질과 어떤 부분이 같은지 인식해야 한다. 이러면 자신을 더 잘 인식할 수 있지 않겠느냐? 만약 네가 늘 반항하며 자신은 적그리스도가 아니며 마음속으로 적그리스도를 가장 증오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비춰 보려고 하지 않고 자신이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 반성하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어떤 결과를 맞이하겠느냐? 사탄 성품이 있으면 너는 적그리스도가 되기 쉽다. 왜냐하면 적그리스도 중 자신이 일부러 추구하여 적그리스도가 된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모두 진리를 추구하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종교계에서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적그리스도가 아니겠느냐? 자신의 본성 본질을 반성하거나 인식하지는 않고 관념과 상상에 기대어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런 사람은 모두 적그리스도이다. 적그리스도의 길에 올라 일단 지위가 생기고 거기에다 은사와 지식까지 있다면 다들 너에게 탄복할 것이고, 사역 시간이 길어지면 너는 사람 마음속에서 자리를 잡게 된다. 갈수록 사역도 커지면서 갈수록 이끄는 사람도 많아지며 자본도 생기면 영락없는 바울이 된다. 이게 네 마음대로 되겠느냐? 이 길로 갈 계획도 없던 네가 어째서 자신도 모르게 적그리스도의 길을 가겠느냐? 중요한 원인은 바로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너는 분명 지위와 명망을 추구하게 되고 자신의 경영을 하게 되면서 결국 자기도 모르게 적그리스도의 길에 오르게 되기 때문이다. 적그리스도의 길에 오른 사람이 제때에 돌아서지 않는다면 지위가 생기는 순간 바로 적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 이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이 일을 간파하지 못하면 위험하다. 사람은 모두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고 명예와 지위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명예와 지위 때문에 넘어지기 쉽다.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이 없다면 모든 사람이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고 명예와 지위 때문에 넘어질 것이다. 이는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너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그저 가끔씩 이런 표출이 있을 뿐이에요. 일시적인 모습일 뿐이라고요. 비록 적그리스도와 본질은 같지만 저는 적그리스도와는 달라요. 왜냐하면 저는 야심이 그렇게 크지 않은 데다 본분을 이행하는 기간에도 계속해서 반성하고 뉘우치며 진리를 구하면서 진리 원칙에 따라 행하거든요. 행위로 보면 저는 아직 적그리스도가 아니죠. 게다가 적그리스도가 되고 싶지도 않고요. 그러니까 저는 적그리스도가 될 리 없어요.” 너는 아직까지는 적그리스도가 아니지만 앞으로도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지 않고 적그리스도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장담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장담할 수 있겠느냐? 유일한 길은 바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추구해야겠느냐? 길이 있느냐? 우선 너는 너와 적그리스도의 성품 본질이 같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비록 지금은 적그리스도가 아니지만 네게 가장 치명적이고 위험한 점은 무엇이겠느냐? 너와 적그리스도가 같은 본성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네게 좋은 일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일일 리 없다. 이것은 네게 치명적이다. 따라서 적그리스도의 다양한 모습을 폭로하는 설교를 들을 때 너는 그런 일이 자신과 무관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런 태도는 옳지 않다. 그럼 어떤 태도로 이런 사실과 모습을 받아들여야겠느냐? 자신을 비춰 보고 자신에게도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다음 자신의 모습, 표출 중 어떤 것이 적그리스도의 모습, 표출과 완전히 같은지 성찰해야 한다. 너는 우선 자신을 위장하지도 포장하지도 말고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네가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고 있으니 너를 적그리스도라고 해도 사실에 부합한다. 다만 하나님 집에서 너를 규정하지 않고 네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을 뿐이다. 알겠느냐? 우선 받아들이고 인정한 다음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이 징계하고 구속하게 해야 하며, 하나님의 얼굴빛과 보호를 떠나서는 안 된다. 그러면 너는 한편으로는 행동할 때 양심과 이성으로 자신을 구속할 수 있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에게 빛 비춤을 주고 너를 이끌며 동시에 너를 구속도 할 것이다. 그 밖에 성령도 역사하여 너를 인도하며 주위의 사람과 일, 사물을 안배해 너를 일깨워 주고 징계할 것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너를 일깨워 주겠느냐? 하나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일한다. 때로 하나님은 구속을 받아야지 제멋대로 굴면 안 되며, 일단 잘못하면 하나님을 욕되게 할 수 있고 망신을 당한다는 것을 네가 마음속으로 명확히 느끼고 분명히 의식하게 한다. 그래서 너는 삼가게 된다. 이는 너를 보호하는 것 아니겠느냐? 이것이 일종 방식이다. 때로 하나님은 네 안에서 너를 꾸짖고 네게 명확한 말씀을 주어 그렇게 하면 부끄러운 것이며 하나님께 혐오받고 저주받을 만한 일이라고 네게 알려 주기도 한다. 즉, 네가 자신을 비춰 볼 수 있게 명확한 말씀으로 너를 꾸짖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꾸짖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네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려는 것이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면 너는 영향과 결과, 자신의 염치를 고려할 것이고 행동과 행동 방식에서도 어느 정도 조심할 것이다. 이런 체험이 많아지면 너는 이런 패괴 성품이 사람 안에 뿌리내려져 있더라도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패괴 성품의 본모습을 똑똑히 인식한다면 의식적으로 육을 저버릴 수 있으며, 사람이 진리를 실행해 내는 순간 사탄의 성품이 정결케 되고 변화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람의 사탄 성품은 무너뜨릴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하거나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해 낼 때 사탄 성품은 자연스럽게 무너지고 대체된다. 진리 실행의 달콤함을 맛보면 너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과거의 난 너무 부끄러움을 몰랐어. 남의 숭배를 받기 위해 아무리 말을 노골적으로 하고 아무리 자신을 높여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고, 그 후에는 아무런 느낌조차 들지 않았지.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는 게 옳지 않고 창피하다고 생각해. 마치 많은 눈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 이는 하나님이 일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네게 느낌을 주어 네가 자신을 꾸짖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그러면 너는 악을 행하거나 홀로 자기 길을 걷지 않게 될 것이고,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행동 방식도 알게 모르게 조금씩 줄어들 것이다. 너는 갈수록 삼갈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마음이 놓이며 양심에 찔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빛 속에서 사는 것이며, 더 이상 마음을 졸이지 않아도 되고, 거짓말이나 듣기 좋은 말로 자신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 예전에는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매일같이 거짓말을 하고 둘러대야 했다. 거짓말을 하나 할 때마다 이리저리 둘러대야 했고 들통날까 봐 두려워했다. 결국 거짓말이 점점 늘어나 나중에는 갖은 애를 쓰고 머리를 쥐어짜며 거짓말을 둘러대야 했다. 사람답게 살지 못했는데, 너무 피곤하게 산 것이다! 너는 이제 정직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마음을 활짝 열고 바른말을 할 수 있다. 매일같이 거짓말을 하고 둘러댈 필요도 없고 더 이상 거짓말에 휘둘리지도 않는다. 고생도 훨씬 덜하고 갈수록 홀가분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며 마음속으로 평안과 기쁨을 누린다. 이러면 달콤함을 맛본 것이다. 달콤함을 맛보는 동시에 네 마음속 세상도 더 이상 간사하고 사악하거나 가식적이지 않고, 하나님 앞에 오고자 한다. 일이 있으면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진리를 구하고 사람들과 상의하지 더 이상 자신의 생각대로 결정하거나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너는 갈수록 과거의 행동 방식이 비열하다고 생각해 그렇게 하려 하지 않고 진리와 이성,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대로 행동한다. 너의 행동 방식은 이렇게 바뀐다.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너는 적그리스도의 길에서 멀어진 것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의 길에서 멀어지면 구원받는 길에 오른 것 아니겠느냐? 구원받는 길에 오르면 너는 자주 하나님 앞에 오고 너의 태도, 마음가짐, 관점, 살아가는 목표, 인생의 방향 모두 하나님과 적대되지 않으며 너는 긍정적인 사물과 공평함, 공정함, 진리를 사랑하기 시작한다. 이때는 너의 마음과 생각이 이미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네가 구원받는 길에 올랐을 때 그래도 네가 적그리스도가 될 리 있겠느냐?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할 리 있겠느냐? 그럴 리 없다. 그러면 위험에서 멀어진 것이다. 사람은 이런 내적 상태에 진입해야만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하게 되고, 이렇게 진리를 구하고 받아들여야만 사탄 본성과 적그리스도 본성의 괴롭힘, 통제, 교란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제 너는 진리를 추구하는 올바른 인생길에 올랐느냐? 그렇지 않다면 어서 그러기 위해 노력해라.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 오르지 못한다면 여전히 위험 속에 살게 된다.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사람은 언제든 도태될 위험이 있다.

본분 이행 기간에 대다수 사람은 자신의 적그리스도 성품과 싸우는데, 명예와 지위, 돈과 이익을 위해 고단하게 싸우느라 몸도 마음도 지친다. 그럼 언제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진리를 추구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서서히 적그리스도 본성 본질의 통제와 결박에서 벗어나고 사탄 성품을 차차 약화시키고 사라지게 할 수 있다. 그러면 너에게는 사탄의 권력에서 걸어 나올 희망이 생긴다. 너희는 이런 일로 인해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자신은 어째서 늘 변하지 못하고 진리를 사랑하지 못하며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하는지 생각하고, 자신을 원망한 나머지 스스로 뺨을 때리고 눈물을 흘리며 통곡한 적이 있느냐? 그런 적이 많으냐? 많지 않다면 그 사람은 매우 무감각한 것 아니겠느냐? 그는 항상 자신에게 패괴가 있음을 느끼지 못하는 데다가 스스로 제대로 사역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자신이 자질과 재능을 갖추었고 진리도 꽤 많이 깨달았으며 많은 일을 원칙대로 처리한다고 생각하여 안심한다. 이것이 바로 무감각하고 스스로 잘났다고 착각하는 것으로, 이는 아주 위험하다! 너희는 지금 자신이 분량이 너무도 작고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려면 아직 멀었으며 여전히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다고 진정으로 느낄 수 있느냐?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느끼지 못하고, 성령 역사가 없는 사람도 이렇게 느끼지 못한다. 대다수 사람은 어리둥절하고 흐리멍덩한데, 정해진 틀에 맞춰 본분을 이행하고 악을 행하지만 않으면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게 아니라고, 온갖 못된 짓을 일삼지만 않으면 적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경우 무감각한 상태에 있다. 자주 우쭐거리며, 스스로 나쁘지 않고 곧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적그리스도의 길은 자신과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매일 하는 기도로 너희가 이런 내적 상태에 놓여 있지는 않는지 평가할 수 있다. 너희가 매일 하나님 앞에 와서 하는 기도의 내용은 무엇이냐? 네가 매일 “하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나님, 당신께 순종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저는 당신께서 제게 맡기신 부탁을 완수하고 싶습니다! 저는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할 수 있고, 당신을 흡족게 하고 당신께 온전케 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제게 적그리스도의 어떤 모습이 있든, 제가 얼마나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든 당신은 여전히 저를 사랑하시고 저를 구원하려 하십니다.”라고 기도한다면 이는 어떤 모습이겠느냐? 이는 무감각한 것이다. 각오만 밝히고 자신의 본성 본질은 조금도 인식하지 못한다. 이는 열성적인 단계에 있는 것인데, 진리 실제를 갖추려면 아직 갈 길이 한참 멀었다. 너희는 얼마 만에 한 번 진실로 기도하여 하나님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자신의 속사정을 알려 마음속으로 평안과 기쁨을 누리면서 자신이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산다고 느끼느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주기가 어떻게 되느냐? 한두 달에 한 번이냐, 아니면 반년이나 일 년에 한 번이냐? 만약 늘 진실하게 기도하지 않고 종교계에서 하는 것처럼 기도한다면, 늘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각오만 밝히며 상투적인 말만 늘어놓는다면 너희는 갈 길이 너무 멀고 진리 실제가 조금도 없는 것이다. 보통 하나님을 믿은 지 3~5년 정도 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와서 그런 어린애 같은 무지한 말은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따르기로 확실히 정했고 믿음도 있으며 하나님의 사역과 뜻, 경륜, 그리고 하나님 사역의 근본 취지 같은 이상 측면의 진리를 환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 앞에 와서 주로 어떻게 기도하겠느냐? 하나는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른말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 오늘 제게 이러이러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러이러한 일을 해서 당신께 죄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고 이러이러한 일에서 아직도 부족합니다. 저를 지켜 주시고 이끌어 주시고 깨우쳐 주시고 제게 빛 비춤을 주세요.” 그는 비교적 진실하고 진리 실제와 관련 있는 말을 하기 시작한다.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열성이 넘치는 사람이 자주 하는 각오를 밝히는 말이나 구호는 사라진다. 왜 사라지겠느냐? 그는 그런 말을 해 봤자 소용없고, 자신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진리에 대한 필요와 생명 진입에 대한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네가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나 되었든, 하나님에게 기도할 때 형식만 차리든 아니면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오든, 열흘 중 며칠이나 빈말 또는 입에 발린 말을 하느냐? 하루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러면 나머지 구 일 동안에는 무슨 기도를 하느냐? 자신의 본분이나 생명 진입과 관련 있다면 그나마 괜찮다. 그것은 너희가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 자신의 본분에 어느 정도 책임감을 가지고 있고 그다지 무감각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다지 무감각하지 않다는 게 무슨 뜻이겠느냐? 사람의 패괴 성품과 관련된 일, 여러 내적 상태와 관련된 일을 언급하면 듣고 나서 무언가를 느끼고 의식하며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는데, 어떻게 말하든 거의 바로바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면 어느 정도 분량이 있는 것이다. 무감각한 사람은 어떤 모습을 보이겠느냐? 매일 그저 그렇게 현실에 안주하고 조금도 발전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기도할 때도 전부 상투적인 말뿐이다. 그는 생명 진입이라는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영적인 이해력도 없으며 아무 느낌도 없다. 설교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반응이 없고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도 모두 같은 말에 같은 뜻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가 하나님에게 더 할 말이 있겠느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와서 무엇을 기도하고 어떤 말을 할지는 사람이 마음속으로 하나님에게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하나님에게 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지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요구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자신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하나님의 요구를 어떻게 충족시켜야 하는지, 최소한 마음속에 이런 것들이 있어야 한다. 만약 네 마음속에는 아무것도 없고 그저 듣기 좋은 말이나 늘어놓고 구호와 도리나 좀 외치며 형식만 갖춘다면 그건 기도가 아니다. 아무리 여러 해 동안 굳게 맹세하더라도 실속 있는 일은 조금도 하지 않고 결국 쉽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부인하며, 쉽게 믿음을 포기하고 물러날 수 있다면 이는 바로 분량이 없는 것이다. 지금 너희가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할 때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과의 관계를 하나님의 요구, 자신의 성품 변화와 관련된 범위 안에서 유지할 수 있다면 너희는 이미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것이고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지는 않을 것이다. 즉, 너희는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너희는 이제 적그리스도가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여러 모습, 이런 행위의 성질에 대한 정의를 명확히 이해하지 않았느냐? 적그리스도의 모습과 보통 사람이 가진 패괴 성품의 모습은 다르지 않으냐? 정말로 일이 닥쳤을 때 너희는 비춰 볼 수 있겠느냐? 적그리스도의 모습을 평범한 패괴된 사람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평범한 패괴된 사람의 모습을 적그리스도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겠느냐? 이는 어떻게 분별해야겠느냐? 한 사람의 일관된 모습과 표출을 통해 그의 성품을 판단하고, 성품에서 그의 본질을 판단하는 것, 이렇게 규정하는 것이 정확하다. 적그리스도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하나님은 높이지 않고 자신만 높이고 증거한다. 이런 측면의 모습이 특히 뚜렷하고 두드러진데, 사탄 본성에 철저히 지배된 것이다. 비록 보통 사람도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긴 하지만 네가 진리를 교제해 주면 그는 받아들인다. 그는 하나님이 진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진리를 받아들인다. 다만 그리 빠르고 쉽게 변하지 않을 뿐이다. 이것이 적그리스도와 보통 사람의 차이이다. 이렇게 말하면 쉽게 분별할 수 있지 않겠느냐? 적그리스도가 가진 특징이 하나 있는데, 진리를 사랑하지 않거나 진리를 부정할 때 그가 바로 부정하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부정하길래 너는 그가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느냐? 그는 궤변을 늘어놓는 방식으로 네게 반박하는데, 네가 교제하는 것이 진리가 아니고 그가 교제하는 것이 진리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그가 자신을 증거해 누군가 그를 폭로한다면, 폭로한 후 그의 어떤 모습을 보고 그는 진리를 사랑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겠느냐? 궤변을 늘어놓으며 설명하는 것이 하나이고, 사실의 진상을 숨기는 것도 있는데, 그 진상이 바로 그의 의도이다. 그의 의도는 남이 자신을 우러러보게 하기 위해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는 네가 그의 그런 의도를 알지 못하도록 감언이설로 궤변을 늘어놓고 너를 속이며 헷갈리게 하면서 결국 네가 그는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게 한다. 그러면 그는 목적을 이룬다. 그는 감언이설과 궤변을 늘어놓고 사람을 속이며 그가 자신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너의 폭로와 지적도 받아들이지 않고 그 사실에 대한 규정은 더더욱 받아들이지 않는다.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는 데다가 이유를 찾아내 이렇게 말하기까지 한다. “저는 자신을 증거한 게 아니에요. 제가 그렇게 말한 데는 다 이유와 배경이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 적절치 못한 말을 몇 마디 하는 건 정상이고 별문제도 되지 않잖아요. 그 정도 가지고 자신을 증거한다고 할 수 있겠어요? 게다가 저는 사역을 이렇게나 많이 했는데, 공로는 없어도 나름 고생했으니 저를 우러러보고 숭배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죠.” 이토록 부끄러운 행위와 역겨운 행동을 두고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이겠느냐? 그는 이런 악행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스스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바로 악인의 본질이다. 적그리스도는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며 응당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능력이 있는데 다른 사람은 자격이 있겠어? 사람들이 나를 옹호하는 건 다 내가 노력했기 때문이야. 내가 교회 사역에 얼마나 공을 많이 들이고 하나님 집을 위해 얼마나 큰 공을 세우고 얼마나 큰 위험을 부담했는데! 이런 내게 어느 정도의 상과 이익을 주지 않는다면 불공평한 거 아니야?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다며? 사람의 행동에 따라 보응을 내리신다며? 그럼 지금 이렇게 큰 공을 세우고 큰 위험을 부담하는 나를 사람들이 옹호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나?’ 그는 본분을 이행하면 반드시 보수가 따라야 하며, 사람들에게 옹호받고 그가 누려야 할 추대, 명예, 혜택을 누리는 것이 최소한의 보수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여기에서는 무엇이 진리이겠느냐? 예를 들어, 너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얼마나 고생하든 사람은 피조물이고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으니 고생을 견뎌야 해요. 그 고생 중 하나가 바로 본분 이행이죠. 우리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나고 우리에게 어떤 은사가 있든 보수를 언급해서도, 하나님과 거래를 해서도 안 돼요.” 이것이 진리 아니겠느냐? 이는 피조물이 깨달아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진리이다. 그러나 그의 처세 철학과 사상 관점 안에 이런 내용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이 방면의 진리를 들었을 때 그가 받아들이겠느냐? 그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 그는 하나님 집에서도 세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일한 만큼 보수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가 없이는 본분을 이행할 수 없고, 위험을 부담했으면 그에 상응하는 혜택과 은혜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분 이행은 모든 사람의 책임이자 의무로, 거기에는 보수라는 개념이 없다. 적그리스도가 이 진리를 받아들이겠느냐? 그는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 그는 멸시하고 반항하며 이렇게 말한다. “이런 말을 받아들이다니 당신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요. 그게 진리겠어요? 그건 진리가 아니라 사람을 속이는 거예요. 모두가 공평하고 평등한 게 바로 진리라고요!” 이게 무슨 말이냐? 이는 사탄의 논리이자 그릇된 주장이요, 황당한 이론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황이라면 사람은 그에게 현혹될 수 있지 않겠느냐? 현혹되기 아주 쉽다! 연약하고 본분 이행에 관련된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데다가 자질과 이해 능력이 떨어지고 믿음이 그리 크지 않은 사람들이 듣기에 이 말은 구미에 딱 맞는다. ‘그러게 말이야. 난 왜 그렇게 어리석었을까? 오늘 드디어 똑똑한 사람을 만났네. 저 사람 말이 맞아!’ 이런 사람들은 누가 일리 있고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는 말을 하면 그대로 따르고 받아들인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원칙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감정, 사고와 논리, 풍습이나 전통문화에 부합하든 부합하지 않든 하나님의 말씀은 한 치의 빈틈도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구구절절 전부 진리이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분석할 필요 없다. 인류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하든 그르다고 생각하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있든 없든,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진리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시간의 검증이 필요 없고 인간의 체험으로 확증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진리이다. 그럼 적그리스도는 이렇게 생각하겠느냐? 그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도 합리적이셔야지! 하나님의 공의는 뭐겠어? 고생을 많이 하고 능력이 뛰어나면 큰 상을 받고, 고생도 적게 하는데 능력도 하찮고 기여도 크지 않으면 작은 상을 받는 거 아니겠어?’ 하나님이 이렇게 말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뭐라고 말했느냐? 하나님은 본분 이행이 모든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본무이고 본분 이행에는 나름의 원칙이 있으며 모두가 마땅히 진리 원칙대로 자신의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고, 그것이 피조물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보수를 언급했느냐? 상을 언급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보수나 상은 언급한 적 없다. 이는 의무이다. 의무란 무엇이냐? 의무란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로, 일한 만큼 보수를 받는 것이 적용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본분을 많이 이행하면 나중에 큰 상을 받고, 본분을 적게 이행하거나 형편없이 이행한 사람은 작은 상을 받는다고 규정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한 적 없다. 그럼 하나님은 뭐라고 했겠느냐? 하나님은 본분 이행이란 모든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본무이자 피조물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이는 진리이다. 적그리스도가 이렇게 이해했겠느냐? 그는 하나님의 이런 말씀들을 어떻게 대하겠느냐? 그는 다른 방식으로 대한다. 자신의 이익의 관점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한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그의 방식대로, 그가 이해하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다른 말로 바꾸는 것이다. 이런 말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겠느냐? 그 자신에게 이롭고 사람을 현혹하며 나아가 사람을 선동하고 유인할 수도 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가 말하는 방식대로 바꾸어 마치 그가 선포한 진리인 척한다. 하나님이 한마디를 하면 그는 그 말씀하는 방식과 원칙을 그의 방식대로 좀 바꿀 것이다. 그의 방식대로 바뀐 것이 여전히 진리이겠느냐? 그건 진리가 아니라 궤변이고 사설이다. 너희는 이 일을 분별할 수 있겠느냐? (조금 분별할 수 있습니다.) 설교를 이토록 많이 들었으니 어느 정도 분별할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럼 적그리스도가 진리에 반대하고 진리를 부인하는 본질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잘못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잘못 해석하는 속셈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남들에게 진리가 아니라 그의 궤변과 사설을 받아들이게 하려는 것이다. 그는 사람의 사고와 논리, 이익과 관점, 관념에 따라 진리를 왜곡한다. 왜곡하고 나면 한편으로는 그 자신에게 유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지몽매하고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선동하고 현혹할 수도 있다. 그의 이런 말들은 얼핏 듣기에는 옳은 것 같지만 자세히 분석해 보면 그 안에 사탄의 야심과 계략이 담겨 있다. 그의 야심과 계략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겠느냐? 바로 자신이 이익을 얻고, 자신의 행동 방식과 행위가 자리를 잡아 남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으려는 것인데, 그들의 나쁘고 악한 행위를 정당하고 진리에 부합하는 행위와 행동 방식으로 바뀌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다들 그를 버리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도 그를 정죄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가 사람들을 현혹해 사람들이 그를 버리지 않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과연 하나님이 그를 정죄하지 않게 할 수 있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의 본질을 바꿀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가장 어리석은 부분이다. 그는 자신의 뛰어난 말재주와 ‘똑똑한 머리’로 궤변과 사설을 생각해 내 진리를 왜곡하고, 그의 말이 자리 잡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뒤집고 진리의 존재를 부인하려 한다.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느냐? 그가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적그리스도가 일부 사람들을 현혹했다면 어쩌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만약 정말로 현혹되어 되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드러나고 도태된 것으로, 그래도 싸다. 이런 것을 두고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한다. 그는 죽어야 할 운명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구원할 생각이 없다. 그는 교회에 섞여 들어와 힘을 좀 쓰고 은혜를 좀 누리다가 하나님이 더 이상 그를 원하지 않으면 사탄에게 넘겨진다. 그는 마침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을 하나 듣고는 박수치며 찬동한 다음 사탄을 따라갔다. 이를 무엇이라 하겠느냐? 사탄을 이용해 봉사하게 한다고 한다. 계시록에 이런 말이 있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계 22:11) 이것이 바로 각기 부류대로 나뉜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이 잠시 부주의해서 적그리스도를 따라갔겠느냐? 하나님이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겠느냐? 이런 걸 두고 죽어야 할 운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한동안 어울려 보면 너는 그들이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너무나 비천하다! 그들의 인품과 진리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면 그들은 본성이 사악하고 진리를 싫어하므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크나큰 은혜를 입을 자격이 없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런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 그들은 얻지 못한다. 따라서 ‘죽어야 할 운명’이라는 세 어절로 요약하면 가장 정확하다.

성경은 개역한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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