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조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고 그리스도의 본질을 부정한다(2) 제 3 부

2)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면을 어떻게 대하는가

방금 적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의 본질을 부정하는 첫 번째 모습, 즉 적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의 출신을 어떻게 대하는지, 어떤 관점과 인식을 지니고 어떤 일들을 하는지 등에 대해 교제하고 해부해 보았다. 적그리스도의 각 방면의 모습을 해부함으로써 적그리스도 부류의 본질을 정확하게 인식해 보았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다른 방면, 즉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면에 대해 적그리스도는 또 어떤 관점을 가지고, 어떤 일들을 하고, 어떤 성품과 본질을 드러내느냐?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본질을 부정하는 적그리스도의 두 번째 모습, 즉 적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의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면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해 해부해 보도록 하자. 정상적이고 실제적이라고 하면 많은 이들이 이에 대한 생각과 인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사흘 동안 물도 안 마시고 밥도 안 먹었는데도 배도 안 고프고 목도 안 마르고, 거기다 원래보다 체력과 기운이 더 좋다면 이것을 정상적이고 실제적이라고 할 수 있느냐? 정상적인 사람은 8~10리만 걸으면 피곤한데, 그리스도는 80리를 걸어도 피곤하지도 않고, 발도 안 아프고, 몸도 제비처럼 가볍고, 기운도 더 난다면 이것을 정상적이고 실제적이라고 할 수 있느냐? 그리스도는 한기가 들어도 감기에 걸리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병이 나지 않고, 눈에 강한 빛이 들어왔을 때 그보다 몇십 배 더 강한 빛을 낼 수 있고, 컴퓨터를 아무리 오래 들여다봐도 눈이 피로하거나 근시가 되지도 않고, 태양을 아무리 오래 쳐다봐도 눈이 부시지 않고, 다른 사람은 밤길을 갈 때 손전등을 들고 가지만 그리스도는 그럴 필요 없이 밤이 될수록 눈이 더 밝아진다면 그런 게 정상적이고 실제적이라고 할 수 있느냐? 모두 아니다. 이런 건 사람들이 늘 접하는 상식들이다. 정상적이고 실제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장시간 물을 마시지 않으면 입이 마르고, 말을 많이 하면 지치고, 많이 걸으면 발이 아프고, 슬픈 일, 가슴 아픈 일을 들으면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난다는 뜻이다. 이것이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정상적이고 실제적이라는 것의 정확한 정의는 과연 무엇이냐? 육의 정상적인 필요와 본능에 부합하고, 이 범위를 넘지 않는 것이 정상적이고 실제적이라는 것의 정의이다. 정상 인성의 능력과 범위, 정상 인성의 이성에 부합하고, 또한 정상 인성의 희로애락에 부합하는 것, 이런 것은 모두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것의 범위에 해당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땅에서 입은 육신이다. 그에게는 정상인과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언행, 정상적인 생활 규율과 생활 패턴이 있다. 사흘 밤낮 눈을 붙이지 않으면 졸음이 몰려와 서 있어도 잠이 쏟아지고, 하루 밥을 안 먹으면 배가 고프고, 오랜 시간 걸으면 피곤해서 얼른 쉬고만 싶다. 예를 들어, 나는 너희와 예배드리며 서너 시간 교제하면 피곤함을 느끼고 쉬기도 해야 한다. 이것이 육의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면이다. 육의 특성에 완전히 부합하고, 정상 인성의 각종 모습, 각종 본능에 완전히 부합하며, 조금도 초자연적이지 않다. 따라서 이런 육신에는 인성의 많은 모습과 표출이 있다. 인성의 외적인 생활 방식, 생활 규율이 모든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이 나타내고 표출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고 비슷하다. 하나님이 만든 인류가 지닌 특성과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생활 본능은 성육신 하나님도 똑같이 지니고 있고, 조금도 초자연적이지 않다. 인간이 문을 뚫고 나갈 수 없고, 벽을 뛰어넘을 수 없듯 성육신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당신은 성육신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십니까? 당신에게는 하나님의 본질이 있지 않으십니까? 문이 잠겨서 갇히셨습니까? 당신은 당연히 문을 뚫고 나오셔야죠. 사람은 10리를 걸으면 지치지만 당신은 80리를 걸어도 지치지 않으셔야죠. 사람은 하루에 세 끼를 먹지만 당신은 30일이 되도록 드시지도 않고, 드시고 싶을 때 드시고, 드시기 싫으면 안 드시고, 안 드셔도 평소처럼 예배에서 설교하고, 사람보다 기운차게 사셔야 합니다. 사람은 오곡 잡곡을 먹고 병이 나지만 당신은 그러셔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니까 당연히 보통 사람과는 다른 면이 있으셔야죠. 그래야 그리스도라고 불릴 자격이 있고, 그래야 당신이 하나님의 본질을 갖췄다는 것이 증명될 수 있죠.” 이런 말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어디가 옳지 않으냐? 이런 건 모두 사람의 관념과 상상이지 진리가 아니다.

성육신 하나님은 정상적이고 실제적이다. 그가 정상 인성으로 하는 모든 활동, 그의 생활과 언행은 모두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이다. 처음에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 때부터 사람에게 이런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본능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성육신 하나님도 절대 이 규율을 어기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면이 긍정적인 사물이 될 수 있는 연유이자 근거이다. 하나님은 인류를 만들 때 인류의 여러 모습과 인류의 본능을 모두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만들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런 본능을 만들어 주어서 사람의 생활에 이런 규율이 생겼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가 입은 육신이 이런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규율을 어기게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사람을 만든 분이 하나님이고, 말씀으로 된 육신의 본질 역시 하나님이며, 그들의 근원은 같기 때문에 그들이 일하는 원칙과 근본 취지 역시 같다. 이런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모습 때문에 자연히 사람들 눈에 그리스도는 그저 더없이 평범한 사람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가 많은 일에서 사람들의 상상과는 달리 예지력과 예견 능력이 없고, 유에서 무가 되고 무에서 유가 되게 할 수 없고, 더욱이 정상적인 사람을 능가하거나 육의 능력과 본능, 사람의 정상적인 사유를 능가해서 사람들이 해낼 수 없는 일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과 정반대로 이 평범한 사람이 사역을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그에게서 표출되고 나타난 것은 사람이 육안으로 볼 때 전혀 하나님이라는 느낌이 없다. 그의 말씀과 사역을 제외하고는 그의 모든 정상 인성의 활동에서 하나님이라는 느낌,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의 표출을 찾아볼 수 없으며, 아무리 봐도 그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다. 왜 그런 것이냐? 그 이유는 단 하나, 사람이 잘못 본 게 아니라, 성육신 하나님이 확실히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사람이고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육신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표면적으로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육신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큰 붉은 용에게 박해받고 추적당한다. 머리 둘 곳 없고 편히 거할 곳 없기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예외가 아니다. 이 모든 박해를 겪을 때 그 역시 사방으로 숨어 다닌다. 그는 은신술도 부릴 줄 모르고, 토둔법도 쓸 줄 모르고, 이 모든 것을 피할 비범한 능력도 없다. 유일한 방법은 미리 정보를 듣고 서둘러 도망치는 것이다. 환경이 닥치면 사람은 속으로 긴장하고 무서워한다. 그럼 그리스도는 무서워하지 않겠느냐? 긴장하지 않겠느냐? (긴장하실 것입니다.) 옳은 말이다. 너희는 어떻게 아느냐? (정상인들은 모두 그렇습니다.) 맞다. 잘 대답했다. 너희는 이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면을 정말 이해하고 있구나. 그것이 제대로 된 이해다. 그리스도도 긴장하고 무서워한다. 하지만 그가 겁을 내겠느냐? 집권당을 두려워하겠느냐? 그들과 타협하겠느냐? 그렇지 않다. 그는 그저 긴장이 되고 무서워서 얼른 이 마귀 소굴에서 도망치고 싶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모습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모습은 이것 말고도 많이 있다. 예를 들어, 간혹 어떤 일을 잊어버리기 쉽다든가, 오랫동안 못 만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든가 하는 등등이다.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것, 그건 단지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람의 특성이자 본능이고, 기호이자 상징일 뿐이다. 그리스도는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인성이 있고, 생존 본능이 있고, 또 육신의 여러 가지 특성이 있기에 정상적으로 말하고 사역할 수 있고, 정상적으로 사람들과 왕래할 수 있고, 정상적이고 실제적으로 사람을 이끌 수 있고, 아울러 정상적이고 실제적으로 사람이 본분 이행에 관한 일을 하도록 지도하고 도와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면 때문에 모든 피조된 인간은 하나님이 하는 사역이 실제적임을 더욱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은 거기서 이익을 얻으며 거기서 얻는 이익은 더욱 실질적이고 실용적이다. 그리스도의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면은 정상 인성의 상징이자 성육신이 모든 정상적인 사역과 활동, 인성 생활을 할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나아가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면에 대해 이렇게 이해하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가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그리스도가 정상적이고 실제적이며 너무나 사람 같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고, 사람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화신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고, 그리스도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느낌이나 하나님의 본질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정상적이고 실제적이기 때문이다. 적그리스도는 말한다. “이런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이런 하나님이 그리스도라고 불릴 자격이 있습니까? 이런 하나님은 너무나 하나님답지 않아요! 사람의 관념에 있는 하나님이 갖춰야 할 요소를 그분은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첫째, 비범하고 초월적이고 기이해야 하고, 둘째, 초능력이 있고 큰 능력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하고, 셋째, 반드시 겉모습이 하나님다워야 하고 하나님의 신분, 하나님의 존엄성, 하나님의 본질을 갖춰야 하는 등, 이런 요소 말입니다. 만약 이런 것을 하나도 볼 수 없으면 어떻게 하나님일 수 있습니까? 그저 말씀을 좀 하고 사역을 좀 했다고 하나님이라는 뜻인가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되기가 너무 쉽겠네요? 육신이 평범하고 정상적인데 어떻게 하나님일 수 있겠습니까?” 적그리스도는 아무리 해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중국 대륙에서 큰 붉은 용이 박해할 때 나는 형제자매 몇 명과 함께 늘 여기저기 숨어 다니느라 인신의 자유가 없었고, 이따금 소식이 들려오면 도망치기 바빴다. 그런 상황에서 곁에 있는 그 사람들은 아무도 연약해지지 않았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연약해지지 않았느냐? 그들이 바보라서 그런 것이냐? 그들이 단순해서 그런 것이냐? 아니다. 그들은 성육신의 본질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면에 대해 그들은 어떠한 관념도 갖지 않고 어떤 식으로도 정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배려하고 이해하며 올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가 받는 고통을 그들도 함께 받았고, 그리스도가 어떻게 박해받고 추격당해도 그들은 변함없이 따르면서 불평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런 일 때문에 연약해지는 일은 없었다. 오직 몇 군데 지역에 갔을 때만, 어떤 사람들은 내가 환경을 피하기 위해 황급히 도망쳐 나왔고, 자기들 지역이 아니면 지낼 곳이 없고 정착할 곳을 못 찾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속으로 생각했다. ‘쳇, 그러고도 당신이 그리스도이고 성육신 하나님인가? 당신의 딱한 모습을 좀 보라고. 당신한테 그리스도가 될 자격이 어딨어? 어디가 하나님답냐고? 그러고도 다른 사람을 구원하겠다니, 본인부터 빨리 구원하시지! 당신을 따르면 그래도 복을 받을 수 있나? 어림없는 소리! 당신이 하는 그 말씀이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면 왜 당신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 거지? 지금 머리 둘 곳도 하나 없어서 우리 인간들, 세력 있는 사람들을 찾아야 하잖아. 당신이 하나님이면 이렇게 딱한 처지에 놓이면 안 되고, 당신이 성육신 하나님이면 돌아갈 집이 없으면 안 되지!’ 그러니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 만약 언젠가 그가 하나님나라 복음이 해외에 확장되어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큰 붉은 용도 무너지고,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모두 기를 펼 수 있고, 더 이상 박해받지 않고, 그때 그 사람들이 왕권을 잡고 아무도 괴롭히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는 분명 평소와는 180도 달라져서 성육신 하나님이 왕권을 잡는 것에 대해 관념을 갖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 이렇게 순식간에 바뀌는 것이냐? 이런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을 뿐,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전능을 믿지 않고 하나님 말씀이 모두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이 과연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이냐? 그들이 믿는 것은 무엇이냐? (권세입니다.) 그리스도는 권세가 있느냐? 패괴된 인류 사이에서 그리스도는 권세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하나님은 권병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본질은 하나님이신데 그러면 그분에게는 왜 하나님의 권병이 없으십니까? 권세가 권병보다 훨씬 작은데, 그분은 어째서 권세도 없으십니까?” 성육신 하나님 사역의 근본 취지가 무엇이냐? 성육신 하나님의 직책은 무엇이냐? 권세를 과시하러 온 것이냐? (아닙니다.) 그러니 그는 정상적인 사람과 마찬가지로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욕설을 듣고, 비방당하고, 적대시된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에게는 예외 없이 반드시 겪어야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면에 대해 관념이 없는 것은 물론, 오히려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더 많이 보고, 진정한 하나님의 본질, 창조주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지를 더 잘 인식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인식은 깊어지고, 더욱 실제적이고, 참되고, 정확해진다. 그런데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모든 면 때문에 그런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영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의 생각에 그리스도는 비범한 능력도 없고 세속을 초월한 사람도 아니고, 인류와 함께 똑같은 생활 환경을 체험한다. 적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로부터 하나님의 성품을 인식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정죄하고, 경계하고, 나아가 참소하기까지 한다. 예를 들어, 나는 사람이 저지른 몇몇 진리에 위배되는 일에 대해 나 스스로도 알아보지 않고 나에게 얘기해 주는 사람도 없으면 알지 못한다. 이는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범주에 속하는 모습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올바른 이해와 정상 인성이 있는 사람은 이 일을 나에게 하나하나 확실하게 얘기하고, 그런 다음 내 처분에 맡긴다. 그러나 적그리스도는 정반대다. 그는 관찰하는 시선, 떠보는 방식으로 시험하면서 생각한다. ‘이 일은 당신이 모르니 잘됐군. 당신이 알아도 나는 대응할 방안이 있고, 당신이 몰라도 나는 또 다른 방안으로 당신에게 대응할 거야. 일을 축소하고 무마해서 당신이 전혀 모르게 하면 이 일은 지나가겠지. 이왕 모르는 거니 앞으로도 몰라도 되고, 알 필요도 없지. 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해야지. 언젠가 당신이 알게 되는 날에는 이미 다 끝났을 텐데 당신이 나를 어쩌겠어?’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대하는 인간은 대체 어떤 부류냐? 좋은 사람이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냐? 인성과 인격이 있는 사람이냐? (아닙니다.) 몇몇 리더들이 밑에서 마음대로 사람을 발탁하고, 제물을 낭비하고, 물건을 함부로 사들이는 일을 저질렀는데, 얼마를 쓰든, 얼마나 큰 일이 생기든 그들은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내가 몇 번을 가도 자문을 구하거나 묻는 법이 없었고, 자기들이 결정했다. 내게는 점검도 하도록 하지 않아 결국 내가 캐물어야 했다. 그랬더니 그들은 나를 외부인 취급했다. ‘당신이 왔으니 당신이 눈앞에서 본 일들은 좀 얘기하고 보고하겠지만, 우리가 뒤에서 한 일은 절대 알려고 하지 마세요. 끼어들거나 관여하지도 마십시오.’ 내가 몇 번을 갔는데도 그들은 계속 내가 관여하지 못하게 했고, 행여나 내가 관여할까 봐 감언이설을 늘어놓으며 일부러 숨기고 거짓말을 했다. 그들은 서로 의기투합하고 합의해서 서로 곁눈질을 하며 말을 맞췄고, 누구 하나 서로의 문제를 보고하지 않고 서로 감싸기 바빴다. 내가 안 다음 책임을 추궁하려 할 때도 그들은 여전히 자기들끼리 감싸기만 했다. 누구의 책임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없고 그저 얼버무리며 나에게 말장난이나 했다. 그들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느냐? 그들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그리스도라는 이 평범한 사람은 정상적이고 간단한 사유, 평범하고 정상적인 인성을 갖춘 것 말고는 내세울 만한 것도 없고 무슨 비범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야. 그런 것도 없으니 우리가 당신 뒤에서 수작을 좀 부릴 수도 있고, 우리끼리 마음 놓고 대범하게 자기 경영을 할 수도 있지. 교회 돈이 우리 손에 있으니 사고 싶으면 그냥 사고, 사인할 때도 물어볼 필요 없이 그냥 사인하면 돼. 심사도 필요 없고 돈도 마음대로 쓰는 거지 뭐.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잖아? 당신이 이런 일을 관리할 수 있나?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라고. 당신이 있을 때만 제외하고 나머지 시간은 전부 우리 세상이지!’ 그들은 그리스도의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면을 어떻게 대하고 있느냐? 그를 호락호락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냐? 그들은 생각한다. ‘당신이 정상 인성을 지녔다면 우리는 당신을 괴롭힐 수 있지. 초자연적인 인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당신이 두렵지 않아.’ 이런 건 어떤 인간이냐? 인성을 논하자면 그들은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느냐? 품성이 좋고 인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느냐? 인격이 고상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느냐? 저들은 다 어떤 것들이냐? 오합지중이 아니냐? 이런 자들은 하나님 집에서 사역하면서 누구를 대표하느냐? 사람도 대표하지 못하는 그들은 사탄을 대표한다. 그들은 사탄을 대신해서 일하는 사탄의 종이자 사탄의 공범으로, 하나님 집 사역을 무너뜨리고 교란하러 온 자들이다. 그들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 사탄의 공범이 하나님 선민을 잡아가고, 박해하고, 해치는 큰 붉은 용과 다를 게 뭐가 있느냐? 큰 붉은 용은 성육신 하나님이 그저 평범한 사람이고 무서울 게 없다고 보기에 마음대로 잡아가려 하고, 잡으면 죽이려고 한다. 그렇다면 사탄의 공범인 이들 적그리스도들이 그리스도를 대할 때도 이런 식이 아니겠느냐? 본질이 같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너는 그리스도를 무엇이라 생각하고 믿느냐? 하나님으로 여겨 믿느냐, 아니면 사람으로 여겨 믿느냐?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여긴다면 네가 그를 이렇게 대할 리가 있겠느냐? (그렇게 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상황밖에 없는데, 바로 네가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를 마음대로 판단하고, 마음대로 속이고, 마음대로 가지고 놀고, 마음대로 멸시하고, 마음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간이 크다는 뜻이다. 이런 간덩이 부은 자를 분류하자면, 피조물, 하나님 선민, 하나님을 따르는 자, 하나님에 의해 온전케 되는 자, 하나님께 구원받는 자와 같은 이런 유형이나 그룹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작자들은 어디에 포함시켜야 하겠느냐? 사탄의 진영에 포함시켜야 하며, 이런 무리는 적그리스도들로 규정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평범한 사람으로 생각하며 자신의 세력 범위 안에서 마구잡이로 행동하고, 횡포를 부리고, 권세를 등에 업고 사람들을 속인다. ‘어떤 일이라도 당신에게 구하지 않고 알리지 않으면 당신은 간섭할 권한도 없고, 끝까지 알 수 없겠지.’ 그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너희가 볼 때 그리스도에게 그를 처리할 권한이 없겠느냐? (있습니다.)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적절하겠느냐? (출교해야 합니다.) 적그리스도와 사탄은 인정사정 봐 주지 말고 이렇게 대처해야 한다. 이런 부류가 하나님을 믿을 때는 하나님이 어떻게 행사하든,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떻게 진리를 공급하든, 하나님이 어떤 사역을 하든 거들떠보지 않는다. 권력이 없다면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권력을 얻을 것이고, 권력을 잡으면 그리스도와 대등한 자리에 서서 세상을 나눠 가지려 할 것이고, 그리스도와 고하를 겨루고 지위를 다투려 할 것이다. 자신의 세력 범위 내에서 그는 그리스도에게 도전하려 할 것이다. “내 말 한마디가 잘 먹히는지, 그리스도인 당신 말 한마디가 잘 먹히는지 보겠습니다! 이 교회는 내 세력 범위 안에 있으니, 교회 돈도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쓰고, 물건도 내 맘대로 살 거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겁니다. 내가 누군가를 나쁘다고 하면 그 사람은 나쁜 겁니다. 난 내가 쓰고 싶은 사람을 쓸 거고, 내가 쓰는 사람은 아무도 못 건드립니다. 건드리면 내가 가만 안 둘 겁니다. 하나님이라 해도 안 됩니다!” 이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 아니냐?

사람이 만약 성육신 하나님의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인성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더 잘 인식한다면, 하나님의 실제와 본질을 더 확실하고 정확하게 인식한다면, 이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인성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면이 있다는 이유로 그를 하나님으로 보지 않고, 그 앞에서 더욱 방자하게 굴고, 겁 없이 날뛰고, 거침없이 행동하고, 그리스도를 능가하고 하나님 선민을 통제하려는 생각을 품는다. 그리스도를 멸시하고 그리스도와 고하를 다툴 수 있는 밑천이 생기고,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는 증거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런 증거가 생긴 뒤에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고, 마음대로 그를 비난해도 되고, 마음대로 그와 담소를 나누고 대등한 자리에 서고 일상적인 이야기나 속마음을 나눠도 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저는 당신에게 제 속마음을 털어놓고 제 연약함과 패괴 성품을 털어놓았으니 당신도 당신 내적 상태를 좀 얘기해 보세요. 당신에게 제가 하나님을 믿기 전후의 모든 체험을 얘기하고 제가 어떻게 하나님 사역을 받아들였는지 얘기했으니 당신도 당신 체험을 좀 얘기해 보세요.” 사람이 이러는 건 어쩌자는 것이냐? 너는 성육신 하나님이 너무나 평범하고 정상적인 것을 보고 그를 너의 가족이나 친한 벗, 친구, 이웃으로 바꿔 놓고 싶은 것 아니냐? 그리스도가 아무리 정상적이고 실제적이라 해도 그의 본질은 영원히 달라지지 않는다. 그가 나이가 얼마이든, 어디에서 태어났든, 너보다 경력과 이력이 많든 적든, 네가 볼 때 그가 겉으로 대단해 보이든 하찮아 보이든 그는 언제까지나 너와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왜 다르겠느냐? 그는 겉모습이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육신 안에 사는 하나님이다. 그의 본질은 너의 본질과 영원히 다르며, 그는 본질이 언제까지나 모든 인류를 능가하는 지고지상한 하나님이다. 이 점을 너는 잊어서는 안 된다. 겉으로 볼 때 그는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이고, 그리스도라고 불리고, 그의 신분은 그리스도이다. 하지만 만약 네가 그를 한 사람으로 여겨 믿고, 네가 그를 평범한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패괴된 인류의 일원으로 생각한다면 너는 위험해질 것이다. 어느 때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의 신분과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그의 본질은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고, 그의 신분은 영원히 하나님의 신분이다. 그가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육신의 껍데기 속에서 사는 것은, 그가 패괴된 인류의 일원이라는 뜻이 아니고, 인류가 그를 조종하고 지배할 수 있다는 뜻도 아니고, 인류가 그와 대등한 위치에 서서 그와 권력을 다투어도 된다는 뜻도 아니다. 사람이 그를 사람으로 본다면, 사람이 사람의 방식과 관점으로 그를 가늠하고, 그를 너의 친구나 동년배, 동료, 상사로 바꿔 놓으려 한다면 너의 처지는 위험해진다. 왜 위험해지겠느냐? 네가 그리스도를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너에게서 패괴 성품이 발현될 것이다. 네가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네 악행이 곧 드러나기 시작할 텐데 이는 위험한 부분이 아니겠느냐? 사람이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생각하고, 그가 정상적이고 실제적이어서 속이기 쉽고, 그가 인간과 같다고 생각한다면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진다. 그 순간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는 바뀐다. 이 관계는 무엇으로 바뀌겠느냐? 더 이상은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 따르는 자와 그리스도의 관계, 구원받는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아니라 사탄과 만물의 주재자의 관계가 되고 만다. 인간이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서 하나님의 원수가 돼 버린 것이다. 네가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생각할 때 너는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신분을 바꾸고, 하나님 눈에 비친 자기 가치를 바꾸고, 자신의 앞날과 운명을 철저하게 망친다. 너 자신의 방종과 패역, 사악함, 교만함 때문에 그것을 망치는 것이다. 네가 피조물이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이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어야만, 이런 바탕이 있어야만 하나님은 너를 인정하고 이끌 것이고, 너에게 생명을 베풀어 주고 구원받을 기회를 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너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는 변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이것은 아이들 장난이 돼 버리지 않느냐? 통상적으로 사람은 그것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도 본인이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했는데, 내가 그분을 사람으로 대하는 게 뭐가 나빠?’ 사실 별로 나쁠 건 없지만 그 결과는 매우 심각하다.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여기는 건 너에게는 좋은 점이 많다. 한 측면으로는 네 지위가 올라가고, 또 한 측면으로는 너와 하나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진다. 또 한 측면으로는 네가 하나님 앞에 나왔을 때 그렇게 어색하지 않고, 무척 편하고 자유로울 것이다. 너는 자신의 인권과 자유를 갖게 되고, 살아가는 가치를 갖게 되고, 자신의 존재감을 느낄 것인데, 이것은 좋은 일이냐? 네가 만약 진정한 사람을 이런 식으로 대한다면 별로 잘못되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너는 존엄성과 인격이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사내는 쉽게 무릎을 꿇지 않는다고, 누구에게도 쉽게 무릎 꿇거나 굴복하거나 고개 숙이면 안 된다. 인류의 생존 법칙, 게임의 룰이 그렇지 않으냐?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법칙과 룰을 그리스도와 함께 지내는 일에 적용하는데 그건 곤란하다. 그랬다가는 너무나 쉽게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게 된다. 인류 전체를 통틀어 모든 구성원들은 어느 인종을 막론하고 본성 본질이 모두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만큼은 인간과 같지 않다. 그리스도는 비록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외양을 갖추고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인성의 생활 규율과 방식을 갖췄지만 그의 본질은 그 어떤 패괴된 인간과도 같지 않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대해 달라고 요구할 자격이 있다. 그리스도 외에는 어느 누구도 이런 방식, 이런 기준으로 인류에게 요구할 자격이 없다. 왜 그런 것이냐? 그리스도의 본질은 하나님 자신이고, 그리스도, 이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은 하나님이 입은 정상적인 육신이고, 인류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부분 때문에 네가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고,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대하는 것은 더욱 옳지 않고,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생각해서 속이고, 우롱하고, 그와 다투는 것은 더욱 옳지 않다. 이렇게 심각한 문제, 이렇게 명백한 잘못을 적그리스도들, 진리를 싫어하는 이 사악한 무리는 결코 의식하지 못한다. 어째서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냐? 그들의 본성 본질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계에서 하나님과 전쟁을 치르고 하나님과 지위를 다투면서 하나님을 결코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결코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는다. 하나님 집에 온 그들은 또 낡은 방법을 고집하며 똑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대한다. 그들의 조상이 이렇게 하나님을 대했으니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대하는 것도 이상할 게 없다.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하고, 그들의 본성 본질이 그렇게 확정되었으니, 이런 부류가 그래도 하나님에게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 집에서 제명하고 출교할 대상이 아니냐? 모든 하나님 선민이 버리는 대상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너희는 하나님 집에서 이런 자들을 정죄하고 제명하고 도태시키는 일에 대해 아직도 관념이 있느냐? (없습니다.) 이런 자들이 가련하냐? (가련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가련하지 않으냐? 그들은 괘씸하고 가증스럽기에 가련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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