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조 두각을 드러내고 자신의 이익과 야심을 충족하기 위해 본분을 이행할 뿐, 하나님 집의 이익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심지어는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넘기며, 하나님 집의 이익을 대가로 개인의 명예를 얻는다(9) 제 1 부
2. 적그리스도의 이익
4) 앞날과 운명
(4) 적그리스도는 ‘봉사자’를 어떻게 대하는가
오늘은 이어서 적그리스도의 각종 모습 중 제9조인 ‘두각을 드러내고 자신의 이익과 야심을 충족하기 위해 본분을 이행할 뿐, 하나님 집의 이익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심지어는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넘기며, 하나님 집의 이익을 대가로 개인의 명예를 얻는다’는 것에 관해 교제하겠다. 이 항목에서 우리는 적그리스도의 이익을 해부하는 것을 주요 교제 주제로 삼았다. 오늘은 적그리스도의 이익 제4조 중 네 번째 주제인 ‘‘봉사자’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관해 교제하고 적그리스도가 ‘봉사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해부하겠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있어 ‘봉사자’라는 단어는 생소하지 않다. 많은 사람이 이 호칭을 마음속으로 거의 받아들였고, 주관적인 바람 면에서도 이미 이 호칭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을 봉사자라고 말하면, 대부분 달가워하지 않고 원치 않으며 억울해하고, 이런 호칭으로 불리거나 봉사자가 되는 것을 그리 바라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이런 태도를 볼 때, 비록 사람이 주관적으로는 ‘봉사자’가 뭔가 나쁜 호칭이 아님을 인정할지라도 객관적 사실을 보면 봉사자라는 호칭을 차별하고 적대시하며, 심지어는 달가워하지 않는 감정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이 봉사자라는 호칭을 어떻게 보든, 진심으로 받아들이며 봉사자가 되든, 아니면 그 안에는 숱한 불순물과 바람이 있든 오늘은 먼저 과연 봉사자란 무엇인지, 하나님 눈에 봉사자라는 호칭은 어떻게 정의되고 규정되는지, 하나님이 말씀하는 봉사자는 어떤 본질을 갖는지, 하나님은 ‘봉사자’라는 세 글자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사람의 시선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등을 교제함으로써 모두가 마음속으로 봉사자라는 호칭에 대해 정확한 인식과 개념을 갖게 하겠다.
① ‘봉사자’의 정의와 유래
‘봉사자’라는 세 글자의 문자적 의미는 어떤 일을 위해 노력하고 힘쓰는 사람이란 것이다. 이 호칭을 지위로 판단하자면, 잠시 이용되는 대상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만약 한 사람이 봉사자로 간주되어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업계에 종사한다면, 그가 그 업계나 일에 종사하는 것은 잠시일 뿐, 길지 않을 것이다. 그저 임시로 그에게 힘을 좀 쓰게 하고, 그 업계나 일에 봉사하게 하는 것으로, 거기에는 앞날도 미래도 없고, 어떤 혜택도 없다. 또 아무 책임도 질 필요 없이 그저 일한 대로 대가를 받는데, 배정된 일을 마치면 더는 필요가 없으니 보수를 받고 떠나면 된다. 어쨌든 이는 임시직으로, 필요할 때 부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봉사자’의 문자적 의미이다. ‘봉사자’라는 세 글자의 의미로 해석한다면, 봉사자는 다른 말로 ‘계약직’, ‘임시직’으로 불리며, 어떤 일이나 업계에서 임시로 봉사하고 힘을 쓰는 대상이다. 그는 그 일에 그를 필요로 하는 동안에만 관계가 있을 뿐, 그 기간이 지나면 그의 가치는 사라진다. 그가 필요하지 않고, 그의 사용 가치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의 가치는 그 기간에 이미 다 발휘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봉사자’에 대해 표면적으로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는 의미이다. 사람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의미, 그러니까 하나님이 말씀한 봉사자라는 호칭에 대해 사람이 파악할 수 있는 의미 가운데 진리에 부합하는 차원의 의미가 있느냐? 정상 인성과 이성에 부합하는 차원의 의미가 있느냐? 진정한 피조물로서 인식해야 하는 차원의 의미가 있느냐? 하나님이 이 호칭을 대하는 차원의 의미가 있느냐? (없습니다.) 없다는 것을 너희가 어떻게 아느냐? 너희는 곤혹스러워하며,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너희 중에는 대학생, 대학원생도 있고, 박사나 교수도 있지만 아무도 이 일에 관해 분명히 말하지 못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식과 진리의 차이이다. 문화적인 소양을 갖추고 있고, ‘봉사자’라는 세 글자를 인식하며, 이 세 글자가 한 단어, 한 부류, 한 집단이 될 때 그 부류의 본질과 모습, 그리고 그 부류가 전 인류 가운데서 차지하는 위치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진리의 관점, 한 피조물의 관점으로 이 세 글자를 바라보지 못한다면 너의 이해는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었겠느냐? 네가 이해한 이 세 글자의 본질은 과연 무엇이겠느냐? 이 패괴된 인류와 이 사회, 인류의 지식으로 이 세 글자를 이해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인류의 지식이 진리와 일치하느냐, 아니면 적대하느냐? (적대합니다.) 그럼 네가 이 세 글자를 그렇게 인식하고 이해할 때, 너는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 있겠느냐, 아니면 하나님과 합하는 편에 서 있겠느냐? 틀림없이 네 지식과 머리로 이 세 글자를 이해하고 파악할 때, 너는 부지중에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게 될 것이다. 네가 네 지식으로 이 세 글자를 이해할 때, 네가 이해한 것은 어느새 너로 하여금 이 세 글자에 거부감과 반감, 혐오, 심지어는 증오심까지 품게 한다. 거기에 순종이 있겠느냐? 참된 수용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좋은 단어라면 받아들이겠지만, 이 안 좋은 단어를 뭘 받아들이라는 겁니까? 거부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거죠. 예를 들어 면류관이나 상, 복을 받고 천국이나 천당에 들어가는 것,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징벌받지 않는 것, 장자가 되는 것 같은 긍정적인 단어라면 저는 받아들일 것입니다. 이건 당연한 것이고 인지상정이며, 사람이 추구해야 하는 바죠. 하지만 악인, 적그리스도, 징벌받는 것, 지옥에 떨어지는 것 같은 부정적인 단어를 받아들이기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봉사자’라는 단어가 중성적이라고는 하나, 제가 이해한 대로라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것을 멸시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 (옳지 않습니다.) 언제 옳지 않음을 알았느냐? 방금 알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너는 조금 전에야 그것이 옳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럼 그전까지 네가 표면적으로 봉사자라는 호칭을 받아들인 것 같고, 주관적으로 이미 받아들였다고 한 것은 진실이겠느냐, 거짓이겠느냐? (거짓입니다.) 그것은 분명 진실이 아니고, 너는 그것을 기꺼운 마음으로 원하지도 않았다. 거기에는 거짓과 위장, 어쩔 수 없는 마음, 일종의 부득이한 마음이 들어 있다.
위에서 우리는 봉사자라는 호칭에 대해 사람들이 보이는 진실한 반응과 모습에 관해 교제했다. 이는 봉사자라는 호칭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와 관점, 이해를 100% 대표하며, 사람들이 이 호칭을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차별하고 반감을 가지며 마음속 깊이 거부한다는 사실을 낱낱이 드러냈다. 사람은 모두 봉사자가 되는 것을 멸시하고, ‘봉사자’라는 세 글자를 멸시하며, 봉사자가 되기를 원치 않고 증오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호칭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이자 태도이다. 그럼 이제 봉사자가 하나님 눈에는 과연 어떻게 보이는지, ‘봉사자’라는 세 글자는 어떻게 나왔는지, 하나님 눈에 보이는 이 호칭의 본질은 무엇인지, 그 유래는 무엇인지 살펴보자. 인류의 언어로 이해했을 때, ‘봉사자’의 문자적인 의미는 ‘임시직’이란 것으로, 잠시 어떤 업계나 일에 봉사하는 사람, 임시로 필요한 사람이란 의미이다. 하나님의 경륜과 사역에서, 또 하나님 집에서 봉사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이 부분 사람들이 하나님 집과 하나님의 사역 장소에 올 때, 그들은 하나님이나 하나님을 믿는 일에 대해 전혀 모르고, 하나님의 사역이나 경륜에 대해서는 더더욱 아는 게 하나도 없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문외한, 이방인이다. 하나님 눈에 이방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하나님 집에 오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아무것도 못 한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은 패괴 성품으로 점철되어 있고, 하나님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또 그 본성 본질 때문에 하나님에게 분부받은 것을 그대로 행하고, 하나님이 사역하는 만큼 따라가며, 하나님이 말씀하는 만큼 아는 정도에 그친다. 또 그저 알기만 할 뿐, 결코 이해하지는 못한다. 사람은 모두 수동적으로 하나님이 요구한 각각의 사역에 협력한다. 이것은 주동적인 행동이 아니라 순전히 수동적인 행동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수동적’이란 하나님이 무엇을 하려는지, 하나님이 네게 무엇을 하라고 하는지, 하나님이 네게 그 사역을 시키는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지 모르며, 자기가 어떤 길을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너는 하나님 집에 오면 기계처럼 하나님이 조종하는 대로 움직일 뿐이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것은 너의 어떤 부분이겠느냐? 너희는 알고 있느냐? (사람은 하나님이 진리를 선포하여 심판하시는 대상이자, 말씀하시는 대상입니다.) 이는 그중의 한 항목으로, ‘하나님이 말씀하는 대상’이다. 또 무엇이 있겠느냐? 은사는 포함되느냐? (그렇습니다.) 정상 인성의 사유도 포함되느냐? (그렇습니다.) 네가 정상 인성의 사유를 지니고 있어야 하나님에게 쓰임 받는다. 만약 양심과 이성이 없다면, 봉사자가 될 자격도 없다. 또 무엇이 있겠느냐? (사람의 기술과 특기가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은사에 포함되며, 그중 한 항목, 그러니까 사람이 갖춘 각종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무엇이 있겠느냐? (하나님께 협력하려는 의지입니다.) 그것 또한 한 가지 항목으로, 말을 듣고 순종하려는 바람이다. 물론 그것은 사람이 긍정적인 사물과 광명을 사랑하려는 일종의 바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말을 듣고 순종하려는 바람은 곧 하나님에게 협력하려는 의지이다. 어떤 표현이 더 적절하겠느냐? (말을 듣고 순종하려는 바람이라고 하는 게 적절합니다.) 그렇다. 바람은 좀 더 거시적이고, 적용 범위가 넓은 편이다. 의지라고 하면 범위가 상대적으로 좁아진다. 게다가 바람은 의지보다 상대적으로 정도가 낮다. 즉, 너에게 바람이 있어야 조금씩 각종 의지가 생겨난다. 의지는 좀 더 구체적이고, 바람은 좀 더 광범위하다. 창조주가 패괴된 인류에게서 필요로 하는 것은 이 몇 가지 것들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하나님의 경영,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성품을 하나도 모르는 문외한이 하나님 집에 오면 기계와 같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것, 하나님의 사역에 협력할 수 있는 것들이 하나님이 요구한 기준인 진리와는 기본적으로 아무 관계가 없다.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방금 말한 이 몇 가지뿐이다. 첫째, 사람이 하나님이 말씀하는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사람이 갖춘 갖가지 은사이다. 셋째, 사람이 정상 인성의 사유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넷째, 사람이 지닌 각종 기능이다. 다섯째, 이 또한 가장 중요한 점으로,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거기에 순종하려는 바람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몇 가지는 다 매우 중요하다. 사람이 이 몇 가지를 갖추면 하나님의 사역과 경륜을 위해 힘을 쓰게 되며, 정식으로 정상 궤도에 오르게 된다. 즉, 정식으로 하나님 집의 봉사자가 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말씀과 진리, 하나님 뜻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에게 어떤 경외심도 갖기 전까지 맡는 역할은 오직 봉사자일 뿐, 다른 것은 없다. 즉, 네가 원해도 봉사자이고 원치 않아도 봉사자라는 것이다. 너는 이 호칭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혹자는 “저는 평생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부터 지금까지 수십 년을 믿었죠. 그런데도 여전히 봉사자란 말씀입니까?”라고 하는데, 이 질문이 어떠하냐? 이 질문은 누구를 대상으로 한 것이냐? 너는 마땅히 너 자신에게 묻고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나? 지금 내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힘을 쓰는 걸까, 아니면 진리를 실행하는 걸까? 내가 진리를 추구하고 깨닫는 길을 걷고 있을까? 진리 실제에 진입했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고 있나? 나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인가?’ 이 몇 가지 측면에서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만약 이 몇 가지 기준에 모두 도달했다면, 하나님의 시련이 임할 때 굳게 설 수 있으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날 수 있다면 당연히 너는 봉사자가 아니다. 반면, 이 몇 가지 기준을 하나도 갖추지 못했다면 너는 의심할 여지 없이 여전히 봉사자이다. 이는 벗어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30여 년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햇수는 계산할 필요도 없지요. 하나님이 이번에 육신을 입고 현현하시어 사역하고 말씀하실 때부터 하나님을 따랐지요. 저는 가장 먼저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한 사람이자 가장 먼저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말씀을 귀로 들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저는 줄곧 하나님을 믿고 따랐습니다. 그 사이에 몇 번이나 체포되고 박해받으며 숱한 위험에 직면했지만,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요. 하나님은 저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지금도 본분을 이행하고 있으며, 상태가 점점 좋아지고 있습니다. 믿음도 점점 커져 하나님께 어떤 의문도 갖지 않게 됐고요. 그런데도 여전히 봉사자란 말씀입니까?” 누구에게 묻는 것이냐? 질문 대상이 잘못된 것 아니냐? 너는 그런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오랜 세월 하나님을 믿었는데 네가 봉사자인지 아닌지조차 모를 수 있단 말이냐? 만약 모르겠다면, 왜 스스로에게 진리 실제가 있는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지, 악에서 떠나는 모습이 있는지 묻지 않는단 말이냐? 하나님은 이렇게 오랜 세월 사역하고 이렇게 많은 말씀을 했다. 그런데 너는 얼마나 깨닫고 진입했느냐? 얼마나 얻었느냐? 하나님의 책망과 훈계, 시련과 연단은 얼마나 받아들였느냐? 이러한 것들을 받아들일 때, 굳게 서서 증거했느냐? 너는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느냐? 네게 욥과 같은 시련이 임하면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네 믿음은 얼마나 되느냐? 네 그 믿음은 단순한 믿음이냐, 아니면 진실한 믿음이냐? 스스로에게 이런 것들을 물어보아라. 만약 이 질문에 하나도 답하지 못하겠다면 너는 어리석은 자다. 그런 너는 부화뇌동하는 자이니 봉사자라는 호칭조차 어울리지 않는다. 봉사자라는 호칭을 그런 태도로 대하며 마음속이 흐리멍덩한 사람은 너무도 가련하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조차 모르니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대하든 분명하고 명확하다.
우리는 방금 ‘봉사자’라는 세 글자에 대한 하나님의 본뜻이 과연 무엇인지 교제하였다. 사람이 하나님 집에 들어와 처음에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여러 바람이나 협력하려는 의지만 지니고 있을 때, 그 기간에 맡을 수 있는 역할은 봉사자뿐이다. 물론 ‘봉사’라는 말이 그리 듣기 좋지는 않다. 바꿔 말하자면,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영 사역을 위해 봉사하고 힘쓰는 것이고, 힘을 보태는 것이다. 사람은 무엇이 진리인지 모르고, 하나님의 뜻도 알지 못하며, 인류를 구원하고 경영하는 하나님의 갖가지 구체적인 사역, 진리와 관계된 각 사역에 전혀 힘을 바치지 못하고, 어떤 협력도 하지 못한다. 그저 기술을 좀 알고 은사가 좀 있어 일부 사무 사역에서 힘을 좀 쓰고 말을 좀 하고, 외부에서 보조하는 일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만약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면서 하는 사역의 본질이 이렇다면, 그저 봉사하는 역할을 할 뿐이라면 봉사자라는 호칭에서 벗어나기가 무척 힘들 것이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그것은 이 호칭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와 관계가 있지 않겠느냐? 전적으로 관계가 있다. 사람이 힘을 쓸 때 타고난 능력과 은사, 머리로 일을 처리하는 것은 무척 쉬운 일이다. 하지만 진리로 살아가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하는 것은 무척 힘이 든다. 이는 시간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인도와 깨우침, 징계가 필요하며, 나아가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 목표를 달성하는 동안 많은 사람이 할 수 있고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방금 말한 그 몇 가지뿐이다. 즉, 하나님이 말씀하는 대상이 되는 것, 자신이 지닌 특정한 은사가 하나님 집에서 어느 정도 쓸모가 있는 것, 정상 인성의 사유를 지녀 어떤 사역을 맡으면 이해하고 행하는 것, 특정 기술을 지녀 하나님 집의 어떤 사역에서 특기를 발휘하는 것 등이다. 이 밖에도 가장 중요한 것이 있으니, 말을 듣고 순종하려는 바람이다. 하나님 집에서 봉사할 때,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힘을 보탤 때 말을 듣고 순종하려는 바람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소극적으로 변하거나 나태해지지 않으며, 온 힘을 다해 악행은 줄이고 선행은 늘리도록 자제할 수 있다. 이것이 많은 사람의 내적 상태이자 상황 아니겠느냐? 물론 너희 중 극소수는 이미 이런 상태, 이런 범위에서 빠져나왔을 것이다. 그 극소수의 사람들은 무엇을 갖추었겠느냐? 그들은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제가 있으며, 일이 닥쳤을 때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구할 수 있고,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다. 말을 듣고 순종하려는 그들의 바람은 의지 수준에 그치지 않으며, 주동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행동한다. 또 일이 닥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고, 언행을 함부로 하지 않으며,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행동한다. 특히 책망과 훈계가 임해 자기 뜻에 맞지 않을 때 하나님을 판단하거나 하나님에게 이치를 따지지 않고 마음속으로 거부감을 갖지도 않으며,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 본질을 마음속 깊이 진실로 받아들인다. 이런 사람들은 봉사자와 차이가 있지 않겠느냐? 어떤 차이가 있겠느냐? 첫째, 진리를 깨달았다. 둘째, 일부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 셋째, 하나님을 어느 정도 인식한다. 넷째, 말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더 이상 바람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주관적인 태도가 되어 진실로 순종한다. 다섯째, 무엇보다 중요하고 귀한 것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이러한 것들을 갖춘 사람은 이미 봉사자라는 호칭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측면의 진입, 진리에 대한 태도, 하나님에 대한 인식 정도를 볼 때,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 집에서 단순히 한 가지 일을 하는 것도, 임시로 불려 와 얼마간 일을 하는 임시직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한때의 보수를 위해 온 것도, 임시로 불려 와 잠깐 쓰임 받는 것도, 쓰임 받는 동안 장기적으로 그 업무에 종사할 수 있을지 평가받는 것도 아니며, 진리를 실행하고 자신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들은 이미 봉사자라는 이름, 호칭에서 벗어난 것이다. 너희는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있느냐? 교회에는 이런 사람이 있다. 그게 누구인지,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겠지만, 거기에 관해서는 일단 다루지 않겠다. 진리를 깨닫게 되면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너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지금 너희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너희 앞에 놓인 길은 무엇인지, 마땅히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등이다. 너희는 이런 것들을 알아야 한다.
이제 보면 봉사자라는 호칭을 하나님이 사람에게 강제로 붙여 준 것이냐? 하나님이 이 호칭으로 사람을 깎아내리고, 분류하고 사람의 등급을 나눈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이 호칭을 어떻게 정의했느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호칭은 아무렇게나 지어 준 별명이 아니고, 겉모습에 근거하여 정의한 것도 아니다. 그 호칭은 하나의 호칭만이 아니다. 사람이 짓는 이름은 하나의 별칭이나 호칭일 뿐, 실제적인 의미가 없다. 예를 들어, 어떤 부모는 자기 딸이 똑똑하고 예쁘기를 바라며 ‘려(麗)’ 자를 넣어 이름을 짓는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희망일 뿐, 그녀의 본질과는 상관이 없다. 어쩌면 그녀는 무척 멍청할 수도 있고, 예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 ‘려’ 자를 넣어 부르는 게 소용이 있겠느냐? 또 어떤 남성의 경우 ‘성룡(成龍)’이니 ‘성호(成虎)’니 하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런 이름으로 불린다고 해서 정말 대단하겠느냐? 그는 겁쟁이나 못난이일 수도 있다. 이는 부모가 자식에게 품는 일종의 희망에 불과하다. 자식에게 지어 준 그런 이름은 그 사람의 본질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래서 사람이 지은 이름이나 호칭에는 사람의 상상과 좋은 바람이 담겨 있다. 그것은 그저 하나의 호칭이나 별칭일 뿐, 그 사람의 본질에 근거하여 지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한 가지 호칭이나 명칭을 정의할 때 절대 사람의 겉모습에 근거하지 않으며, 당연히 하나님의 바람에 근거하지도 않는다. 사람이 봉사자가 되는 것을 하나님이 바라겠느냐? (바라지 않으십니다.) 너희는 하나님 말씀 가운데 “나는 만인이 봉사자가 되기를 바란다. 아무도 구원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구절을 본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바람은 무엇이냐? 지난날, 사람들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지 아무도 침륜되는 것을 바라시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이는 하나의 바람이다. 하지만 봉사자라는 호칭은 뜬금없이 생겨난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이 나무나 풀의 이름을 짓는 것과 같다. 나무는 거대한 존재로, 나무를 언급하면 모두가 그것이 크고 높다는 것을 안다. 또 풀을 언급하면 모두가 그것이 작고 낮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럼 봉사자라는 호칭은 어떠하냐? 이 호칭은 사람의 본질과 모습에 근거한 것이자, 하나님의 사역 단계에 근거하여 생겨난 것이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에 따라 점차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며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다면, 이 호칭은 자연히 바뀔 것이다. 그렇기에 설사 네가 봉사자 중 한 명이라 하더라도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거나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하는 데 영향을 주지 않으며,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는 더더욱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봉사자라는 호칭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느냐? (있습니다.) 어떤 부류겠느냐?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진리를 깨닫고도 실행하지 않으며, 더욱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 심지어 마음속으로 늘 진리에 반감을 가지고 진리를 싫어하는 부류이다. 그는 진리를 싫어하면서 왜 계속 하나님 집에 머물러 있겠느냐? 이득을 좀 얻기 위해서이다. 그는 요행 심리를 품은 채 하나님 집에서 힘을 좀 쓰고 좋은 모습을 좀 보이며 자신이 치른 대가와 육적인 수고와 헌신으로, 또 청춘을 바치고 시간을 들이는 것으로 자신이 원하는 어떤 이득과 맞바꾸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결국 자기가 걸어가는 길 때문에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도 하나님에게 순종하지도 못하며, 더욱이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못하는데, 그들은 영원히 봉사자로 규정된다. 이 부류 중 일부는 하나님 집에서 마지막까지 봉사할 수 있지만, 일부는 그러지 못한다. 마지막까지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은 그러지 못하는 사람과 인성 면에서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지만 마지막까지 봉사할 수 있는 사람, 그러니까 하나님의 경륜 사역이 지속되는 이 단계에 하나님 집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얼마간 힘을 바칠 수 있는 사람들의 인성은 상대적으로 어느 정도 선량하고 어질다. 그들은 봉사하는 기간에 악을 행하거나 교란하지 않고, 교회에서 제명되지도 않는다. 이런 사람은 마지막까지 봉사할 수 있으며, 이런 자가 바로 영원한 봉사자이다. 반면, 또 다른 사람들은 인성이 악하고 인품과 인격이 비천하여 봉사하는 과정에서 수시로 하나님 집의 여러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하며, 하나님 집의 많은 사역에 손해를 끼친다. 거듭되는 책망과 훈계가 닥치거나 격리되어도 회개할 줄 모르고 여전히 옛 병이 도진다. 진리를 전혀 깨닫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으며 제멋대로 행동한다. 이런 사람은 도태된다. 도태되는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이런 사람은 봉사조차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집에서 힘을 좀 쓰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힘을 쓰는 동시에 악을 행하며, 하나님 집과 형제자매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니, 그를 쓰면 득보다 실이 많다. 재차 반성할 기회를 주어도 결국에는 본성을 고치지 못하고, 누가 말해도 듣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집에서 봉사할 자격조차 없고, 그럴 능력도 없으니 제명되는 것이다.
이제 봉사자라는 호칭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 않았느냐? ‘봉사자’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붙여 준 차별적인 호칭이겠느냐? 하나님이 일부러 이 호칭으로 사람을 깎아내리려는 것이겠느냐? 하나님이 이 호칭으로 사람을 드러내고 사람에게 시련을 주려는 것이겠느냐? 하나님이 이 호칭으로 사람이란 대체 어떤 존재인지 알게 하려는 것이겠느냐? 하나님에게 이런 뜻이 있겠느냐? 사실 하나님에게는 이런 뜻이 없다. 하나님에게는 사람을 드러내려는 뜻도, 깎아내리거나 조롱하려는 뜻도, 봉사자라는 호칭으로 사람에게 시련을 주려는 뜻도 없다. 하나님이 가진 유일한 한 가지 뜻은 바로 ‘봉사자’는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과 본질, 그리고 하나님이 사역하는 이 단계에서 사람이 맡는 역할, 아울러 사람이 할 수 있고 협력할 수 있는 바에 근거하여 규정하고 만든 호칭이라는 것이다. 이 뜻으로 볼 때, 하나님 집의 모든 일원은 다 하나님의 경륜을 위해 봉사하는 존재이고, 한때 봉사자라는 역할을 맡은 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충분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제 모두가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 호칭으로 사람의 열정에 타격을 주려는 것도, 사람의 믿음을 검증하려는 것도 아니며, 사람을 깎아내리면서 고분고분하고 말 잘 듣게 만들거나 사람에게 자신이 어떤 신분과 지위인지 알게 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더욱이 봉사자라는 호칭으로 피조물의 본분 이행이라는 사람의 권리를 박탈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 호칭은 전적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드러낸 갖가지 패괴 성품과 실제 내적 상태에 근거하여 정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 호칭은 하나님의 경영 사역이 끝난 후 사람이 어떤 신분, 어떤 명의, 어떤 지위를 갖게 될지, 어떤 종착지를 맞이할지 등과 전혀 관계가 없다. 이 호칭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경륜과 경영 사역의 필요에서 생겨난 것이며, 패괴된 인류가 하나님의 경영 사역에서 보이는 하나의 진실한 상태이다. 사람이 봉사자로서 하나님 집을 위해 봉사하고, 하나의 기계처럼 쓰임 받는 이 상태가 마지막까지 지속될지, 아니면 하나님을 따르는 동안 개선될지는 사람의 추구에 달려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여 성품 변화를 이루고,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다면, 이 봉사자라는 호칭에서 철저히 벗어난다. 봉사자라는 호칭에서 벗어나면 사람은 무엇이 되겠느냐? 하나님을 진실로 따르는 자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 나라의 백성, 즉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된다. 만약 하나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네가 힘을 쓰고 고생을 하고 대가를 치르는 데만 만족할 뿐, 진리를 추구하거나 실행하지 않고, 패괴 성품이 전혀 변화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 집의 원칙대로 행하지 않아 결국 하나님에게 순종하거나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한다면, 봉사자라는 이 호칭, 이 ‘월계관’은 네 머리에 쓰기에 크지도 작지도 않게 딱 맞을 것이며, 너는 영원히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사역이 끝날 때도 여전히 그런 내적 상태를 가지고 있고 성품이 변화하지 않았다면, 너는 ‘하나님나라 백성’이라는 호칭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영원히 봉사자이다.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겠느냐? 너희는 하나님의 사역이 일단 끝나면, 그러니까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사람들을 모두 구원하고, 행하려는 사역이 완전히 성과를 이루고 목적을 달성한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말씀하거나 사람을 인도하지 않고, 인류에게 어떤 구원 사역도 하지 않을 것이며, 그때 하나님의 사역은 끝나고, 모든 사람이 걸어온, 하나님을 믿는 길도 끝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계 22:11) 이 말은 무슨 의미겠느냐? 하나님이 일단 그의 사역이 지금 이 순간 끝났다고 얘기한다면, 그것은 사람을 구원하고 형벌하고 심판하는 하나님의 사역이 더는 진행되지 않으며, 하나님은 더 이상 사람을 깨우치고 인도하지 않을 것이고, 권면의 말씀, 책망하고 훈계하는 말씀도 간곡하게 거듭 얘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더 이상 이런 사역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는 만물의 결말이 드러나고 인류의 결말도 정해지며, 누구도 그것을 바꿀 수 없고 사람이 구원받을 기회도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런 뜻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이 끝날 때 봉사자라는 호칭, 이 이름, 이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기에 그는 더 이상 문외한이나 이방인이 아니라 하나님 집의 사람, 하나님나라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하나님 집의 사람, 하나님나라의 사람’이라는 호칭은 어디에서 비롯되었겠느냐? 사람이 이 호칭을 어떻게 얻게 되는 것이냐? 진리를 추구하고 깨달으며,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면서 본분을 잘 이행하여 어느 정도 성품 변화를 이루고,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면 너는 하나님 집의 사람이 된다. 그럼 너는 욥이나 베드로처럼 더 이상 사탄에게 해를 입거나 패괴되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집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더 이상 패괴 성품과 싸울 필요도 없게 된다. 너는 하나님 눈에 진정한 피조물이자 진정한 사람이 된다. 이는 기쁘고 축하할 일 아니겠느냐? 이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사탄에게 패괴된 사람의 힘들었던 날들이 완전히 끝나고, 기쁘고 평안한 날, 행복한 날이 와서 창조주의 얼굴빛 속에서 살아가며 하나님과 함께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기쁘고 축하할 일이다. 하지만 또 다른 부류는 마지막까지 봉사자라는 호칭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의 사역이 끝나는 순간에도 그는 머리 위의 봉사자라는 그 호칭, 그 ‘월계관’을 벗지 못한다면 이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는 여전히 문외한이고 하나님이 보기에 여전히 이방인이라는 의미이다. 그 이유는 그가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도 실행하지도 않고, 성품 변화를 이루지 못했으며,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집에서 도태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나라에는 그의 분깃이 없다. 그럼 그는 어디에 있겠느냐? 하나님의 나라 밖에 있으며, 백성 이외의 무리에 속한다. 이런 사람은 여전히 봉사자라고 불린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 집 사람이 되지 못했으며, 결코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님을, 하나님은 그들을 인정하지 않으며,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받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아름다운 복을 누리고 평안과 기쁨을 얻을 기회도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그런 기회는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럼 그들에게 그 순간은 축하할 만하겠느냐, 아니면 슬퍼할 만하겠느냐? 슬퍼할 만하다. 그들이 하나님 집 밖에서, 하나님의 나라 밖에서 봉사자라는 이름을 갖고 어떤 대우를 받을지는 나중 일이다. 어쨌든 봉사자는 하나님나라의 백성들과 확연히 다른 대우를 받으며, 그 지위나 대우 등 여러 측면에서 다 차이가 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을 하는 동안 진리를 얻지 못하고 성품 변화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가엾지 않으냐? 너무도 가엾다! 이는 봉사자라는 호칭과 관련된 말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봉사자라는 말을 언급하면 거부감이 듭니다. 봉사자가 되라고 하면 싫고 기분이 나쁘고요. 만약 제게 백성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보잘것없는 존재일지라도 상관없습니다. 저를 가리켜 봉사자라고만 하지 않으면 되죠. 저는 평생 다른 것을 추구하는 바가 없고, 다른 꿈도 없습니다. 그저 봉사자라는 호칭에서 벗어나길 바랄 뿐입니다. 저는 높은 요구를 하지 않는다고요.” 이런 사람은 어떠하냐? 이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어떤 태도냐?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봉사자라는 호칭을 대할 때, 너는 그것을 벗어 버리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 호칭은 사람의 생명 성장 정도에 근거해 정해지는 것이지, 네 바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의 바람이 아니라, 사람이 걷는 길과 성품 변화 여부에 달려 있다. 만약 네 목표가 그저 봉사자라는 호칭을 벗어 버리는 데 있다면, 내가 사실대로 말해 주겠다. 너는 평생 그 호칭을 벗어 버리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네가 진리 추구에 집중하여 성품 변화를 이룬다면 그 호칭은 조금씩 바뀔 것이다. 이 두 가지 측면에서 본다면, 봉사자라는 호칭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강제로 붙여 준 것이겠느냐? 절대 그렇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강제로 붙여 준 호칭도, 별칭도 아니며, 사람의 생명 성장 정도에 따른 것이다. 네 생명 성장과 성품 변화가 어디까지 이뤄졌는지에 따라 네가 지닌 봉사자의 성분도 줄어들 것이다. 언젠가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면, 봉사자가 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사람이 추구하는 바와 진리를 대하는 태도, 걸어가는 길에 근거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저는 봉사자라는 호칭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저는 봉사자가 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저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를 추구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죠?”라고 말하는데, 방법이 있겠느냐? 하나님은 각 부류 사람의 결말을 정할 때 하나님 말씀과 진리에 근거하며, 절충안은 없다. 네가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걷는다면 기쁜 일이지만, 진리를 싫어하고 진리 추구의 길을 걷는 것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슬픈 일이다. 이 두 가지 길 외에 선택할 수 있는 중간 길은 없다. 하나님이 한 말씀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만물이 다 사라져도 하나님 말씀은 한마디도 사라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만물을 평가하고 규정하는 준칙이자 진리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이 세상과 이 인류, 만물이 모두 변하고 사라질 때도 하나님의 말씀은 단 한마디, 단 한 글자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전부 이루어질 것이다. 인류와 만물의 결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규정되고 드러난다. 어떤 사람도 이것을 바꿔 놓을 수는 없으며 이 일을 두고 의논할 여지는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의 결말을 주재하고 규정하는 일을 두고 사람이 요행 심리를 품는다면 그는 심각한 바보이다. 이 일에서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두 번째 길이 없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두 번째 길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자 하나님의 공의로, 사람은 개입하고 싶어도 개입할 수 없다. 너는 이방 세계에서는 사람이 돈을 좀 쓰고 인맥을 좀 동원하면 일을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에게는 그것이 적용되지 않는다. 기억해 두어라. 하나님에게 네 그 수법은 통하지 않는다!
성경은 ‘개역한글’을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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