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조 두각을 드러내고 자신의 이익과 야심을 충족하기 위해 본분을 이행할 뿐, 하나님 집의 이익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심지어는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넘기며, 하나님 집의 이익을 대가로 개인의 명예를 얻는다(8) 제 1 부

2. 적그리스도의 이익

4) 앞날과 운명

먼저 지난번 예배 때 교제한 내용을 돌아보자. (지난번에 하나님께서는 앞날과 운명을 대하는 적그리스도의 두 번째 태도, ‘적그리스도는 어떻게 본분을 대하는가’에 관해 교제해 주셨습니다. 적그리스도가 본분을 대하는 태도에는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공급해 주시고 인류를 인도해 주시므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이자 인류 가운데 가장 정의롭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지만 적그리스도는 이것을 하나의 거래로 여기며, 본분 이행을 통해 앞날과 종착지를 얻어 내려고 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사역 기간에 수많은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여기거나 인류가 구원받기 위해 갖추고 추구하고 받아들이고 진입해야 할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앞날과 종착지, 명예, 지위를 추구하는 것을 진리로 여기고, 사람이 마땅히 지키고 얻어야 할 것으로 여깁니다. 셋째, 하나님은 사역으로 인류를 경영하고 구원하시지만, 적그리스도는 그것을 하나의 거래이자 게임으로 여깁니다. 그는 반드시 사람의 노력과 거래가 있어야만 천국의 복을 얻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에게 본분을 이행하라고 요구하는 하나님의 이 진리를 대하는 적그리스도의 태도로 볼 때, 그들의 성품은 사악합니다.) 또 보충할 내용이 있느냐? (적그리스도는 본분 이행을 복받기 위한 유일한 길로 여깁니다. 복받으려는 욕망이 무너지는 순간, 그는 바로 본분을 포기하며, 심지어는 하나님을 떠납니다. 이는 복받으려는 욕망이 무너졌을 때 적그리스도가 보이는 태도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진실로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는 방해하고 교란하며 악을 행해 교체되거나 출교된 후, 하나님 집에서 다시금 기회를 주어 본분을 이행하게 하면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는커녕 원망하고 판단하며 “내가 필요하면 나를 찾고, 내가 필요 없어지면 나를 차 버리잖아.”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적그리스도는 죽어도 회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컨대, 적그리스도가 본분을 대하거나 하나님 말씀을 대할 때 보이는 몇 가지 측면의 본질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그저 서로 다른 사물을 대할 때 똑같은 성품과 본질을 드러내는 것뿐이다. 적그리스도가 본분을 대할 때 드러내는 본질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기본적으로 다 교제하였다. 첫째,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믿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 둘째, 하나님 말씀 교제를 통해 진리를 듣고 이해했을지라도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셋째,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지 않는다. 넷째, 영원히 진실로 회개하지 않는다. 이는 그들이 보이는 모든 모습의 본질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너희는 이 네 가지를 종합해 냈느냐? (그러지 못했습니다.) 너희가 말하는 것은 대부분 지난번에 교제한 모습들이다. 하지만 이런 모습 뒤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밝히 알지 못했다. 적그리스도가 진리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드러내는 본질은 언제나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으며, 순종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과 본분을 이런 식으로 대한다. 그럼 책망 훈계를 대할 때는 또 어떤 태도를 보이겠느냐? 또 어떤 태도들이 그가 위에서 말한 그런 본질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주고, 그가 바로 하나님과 진리를 적대하는 적그리스도임을 실증하겠느냐? 이것이 바로 오늘 교제하려는 세 번째 태도, ‘적그리스도는 책망과 훈계를 어떻게 대하는가’이다. 이는 앞날과 운명을 대하는 적그리스도의 태도 중 세 번째 소주제이다. 보아라, 각종 진리를 교제할 때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교제하고 구체적으로 구하고 묵상해야 한다. 두루뭉술하게만 말한다면, 너는 각종 진리의 실제를 구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자, 지난번에 교제한 내용은 더 이상 돌아보지 않겠다. 이제 본격적으로 제3조에 관해 교제해 보자.

(3) 적그리스도는 책망과 훈계를 어떻게 대하는가

책망과 훈계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체험할 수 있는 일이다. 특히, 본분 이행 과정에서 겪는 책망 훈계가 많아짐에 따라 많은 사람이 책망 훈계의 의미에 대해 점점 더 인식하고, 책망 훈계가 가져다주는 이점이 무척 많다고 생각하며, 점점 더 올바르게 책망 훈계를 대한다. 물론, 누구든 본분을 이행하기만 하면,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책망 훈계를 겪을 기회가 있다. 정상적인 사람은 책망 훈계가 닥칠 때마다 올바르게 대한다.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마음으로 책망 훈계를 받아들이는 한편,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반성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책망 훈계를 대할 때 자주 보이는 태도이자 관점이다. 그럼 적그리스도도 책망 훈계를 이렇게 대하겠느냐? 절대 그렇지 않다. 적그리스도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책망 훈계를 대하는 태도가 분명히 다르다. 먼저, 적그리스도는 마음속으로 책망과 훈계를 받는 일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주된 이유는 책망과 훈계가 닥칠 때 망신을 당했다고, 명예와 지위, 존엄을 잃었다고, 사람들 앞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이 마음속에서 작용하기에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기가 무척 힘든 것이다. 그는 누가 자신을 책망하고 훈계하면 그것은 자신을 괴롭히는 거라고, 그 사람은 자신의 원수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책망과 훈계가 닥쳤을 때 적그리스도가 보이는, 있는 그대로의 심리 상태이다. 사실, 책망과 훈계는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는지, 진실한 순종이 있는지를 가장 잘 드러낸다. 책망과 훈계를 대할 때 이렇게 반발하는 것은 적그리스도가 진리를 싫어하고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충분히 보여 준다. 이것이야말로 문제의 핵심이다. 체면 문제는 핵심이 아니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바로 문제의 본질이다. 적그리스도는 책망과 훈계가 닥쳤을 때, 상대에게 부드러운 말투와 태도를 보일 것을 요구한다. 말투가 엄하고 태도가 날카롭다면 반발하고 반항하며 수치심에 분노한다. 그는 폭로한 것이 옳은지, 사실인지 개의치 않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진리를 받아들여야 하는지 반성하지도 않는다. 오직 자신의 허영과 체면에 상처를 입지 않았는지만 신경 쓸 뿐이다. 적그리스도는 책망과 훈계가 사람에 대한 도움이자 사랑이자 구원이며 이로움임을 결코 인식하지 못한다. 그는 이것조차 깨닫지 못한다. 이는 사리 분별이 되지 않고 말이 안 통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럼 적그리스도는 책망과 훈계가 닥쳤을 때 어떤 성품을 드러내겠느냐? 의심할 여지 없이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 그리고 교만하고 강퍅한 성품을 드러낸다. 여기에서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이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것임이 드러난다. 그래서 적그리스도는 책망 훈계를 가장 두려워하며, 책망 훈계가 닥치는 순간 그의 추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럼 적그리스도에게 책망 훈계가 닥칠 때, 그의 어떤 태도, 어떤 말, 어떤 일이 사람들로 하여금 적그리스도는 적그리스도이고 그는 패괴된 보통 사람과 다르며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의 본성 본질과 차이가 있다고 확실히 알게 하겠느냐? 내가 예를 들어 볼 테니 너희도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보충해도 좋다. 적그리스도는 책망 훈계가 닥쳤을 때 먼저 마음속으로 계산하고 궁리한다. ‘나를 책망하는 사람이 누구지?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거야? 그가 어떻게 그 일을 아는 거지? 왜 나를 책망하려는 걸까? 내가 마음에 안 드나? 내가 한 어떤 말에 기분이 상했나? 내가 뭔가 좋은 걸 주지 않아서 복수하고, 그걸 빌미로 나한테서 빼앗아 가려는 거 아냐?’ 그는 결코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거나 인식하지 않고,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나 표출한 패괴 성품을 인식하지도 않으며, 그저 책망 훈계를 받은 그 일에서 단서를 찾아내려고 한다. 그 안에 음모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이런 식으로 책망 훈계를 대한다. 여기에 진실한 받아들임이 있겠느냐? 진실한 인식과 반성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대다수 사람에게 책망 훈계가 닥치는 이유로는 패괴 성품을 표출한 것, 어리석어 잘못을 저지르고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먹은 것, 대충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하여 하나님 집 사역에 손실을 초래한 것 등이 있다. 가장 증오스러운 행동은 공공연하게 나쁜 짓을 저지르고 원칙을 어기며 하나님 집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것이다. 주로 이 몇 가지 상황 때문에 책망 훈계가 닥친다. 어떤 상황에서든 책망과 훈계가 닥치면, 사람이 무엇보다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이겠느냐?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 누가 너를 책망하는지, 왜 책망하는지 신경 쓰지 말고, 또한 그의 말이 듣기 거북한지 그렇지 않은지, 그의 어조나 어휘 선택이 어떤지도 신경 쓰지 말고 전부 받아들여서 자신이 어떤 부분에서 잘못했고, 어떤 패괴 성품을 드러냈는지, 그 일을 할 때 진리 원칙대로 했는지를 인식해야 한다. 이것이 먼저 가져야 할 태도이다. 하지만 적그리스도가 이런 태도를 갖췄겠느냐? 그렇지 않다. 그는 언제나 반발심과 반감을 표출한다. 이런 태도를 갖고 있는데 하나님 앞에 마음을 평온히 하며 겸허히 책망 훈계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불가능하다. 그럼 그는 어떻게 행동하겠느냐? 먼저 온 힘을 다해 해명하고 변명하며, 자신이 저지른 잘못과 표출한 패괴 성품에 대해 변호하고 해명하면서 사람들의 이해와 관용을 얻고자 한다. 그리하여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자신을 책망하고 훈계하는 말들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될 수 있도록 말이다. 그가 책망과 훈계를 받을 때 드러내는 태도는 무엇이겠느냐? ‘나는 죄짓지 않았어. 잘못한 게 없다고. 설령 잘못이 있다고 해도 거기엔 이유가 있어. 잘못해도 고의가 아니었단 말이야. 내가 책임을 질 필요도 없어.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는 이런 주장과 말을 고집하며 놓지 않는다. 진리를 구하지 않고, 자신이 저지른 잘못과 표출한 패괴 성품을 인정하지도 않으며, 자신이 악행을 저지른 속셈과 목적은 더더욱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아무리 눈에 띄어도, 초래된 손실이 아무리 커도 그는 본체만체하면서 전혀 괴로움이나 죄스러움을 느끼지 않고, 양심에 어떤 가책도 받지 않는다. 오히려 극력 변명하며 설전을 벌인다. 그는 ‘이건 말하는 방식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 일리가 있는 거라고. 말재간 있는 사람이 말하는 거지. 내 해명과 변명이 많은 사람 앞에서 통과된다면 내가 이긴 거야. 그럼 당신이 말한 진리는 진리가 아닌 게 되고, 당신이 말한 사실도 성립하지 않는 거지. 나를 정죄하려고? 꿈 깨시지!’라고 생각한다. 적그리스도는 책망 훈계가 닥쳤을 때, 마음속 깊이, 영혼 깊이 절대적으로 단호하게 반발하고 반감을 가지며, 받아들이지 않는다. ‘당신이 어떻게 말하든, 당신의 말이 아무리 옳아도 나는 받아들이지 않을 거고 인정하지도 않을 거야. 이건 내 잘못이 아니라고!’라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그의 패괴 성품이 어떻게 사실로 드러났든 그는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으며 한사코 반항하고 반발한다. 또 다른 사람이 어떻게 말하든 그는 받아들이거나 인정하지 않으며, 마음속으로 ‘누가 말로 이기나 보자. 누구의 입심이 센지 보자고.’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책망과 훈계를 대하는 적그리스도의 태도 중 하나이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여부는 책망 훈계가 닥쳤을 때 드러난다. 적그리스도는 글귀와 도리를 말할 때는 무척 분명하지만, 책망 훈계가 닥치면 계속 반발하고 이치를 따지고 반항하면서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 그는 평소에 읊어 대던 글귀와 도리를 하나도 실행하지 못한다. 무엇 때문이겠느냐? 적그리스도의 본질이 진리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적그리스도의 성품은 흉악하고 극도로 교만하다. 진리 앞에서, 사실 앞에서 그는 언제나 강퍅한 태도, 반발하고 반감을 품는 태도를 보인다. 책망 훈계가 닥쳤을 때, 적그리스도는 스스로를 위해 극력 해명하고 변명하면서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것 외에도 가장 큰 신념 하나를 갖고 있다. 바로 ‘내가 믿는 존재는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니야. 하나님은 공의로우시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책망하든 내 운명을 결정할 수는 없어. 설령 내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사람이 나를 어쩔 수 있겠어?’라는 것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불복한다. ‘땅에 있는 사람의 말이 아무리 옳고 진리에 부합해도 그건 진리가 아니야. 오직 하늘의 하나님이 직접 음성을 발하신 것만이 진리라고. 땅에 있는 사람이 아무리 다른 사람을 심판하고 형벌하고 책망하고 훈계해도 공의롭지 않아. 오직 하늘의 하나님만이 공의롭다고!’ 이 말에 내포된 의미는 무엇이겠느냐? ‘땅의 하나님 말이 아무리 옳고 진리에 부합해도 그건 진리가 아니야. 하늘의 하나님만이 진리고 가장 위대하지. 땅의 하나님이 진리를 선포할 수는 있지만, 하늘의 하나님에게 비할 수는 없어.’라는 의미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내가 믿는 분은 하늘의 하나님이지 땅의 하나님이 아니야. 당신처럼 평범한 사람이 하는 말이 아무리 옳고 진리에 부합해도 당신은 하늘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늘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재하셔. 또 하늘의 하나님은 내 운명을 결정하시지만, 땅의 하나님은 내 운명을 결정할 수 없어. 땅의 하나님이 한 말이 아무리 진리에 부합해도 나는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나는 오직 하늘의 하나님만 받아들이고 하늘의 하나님께만 순종할 거니까. 하늘의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대하시든 나는 항상 순종할 거라고.’ 이런 말은 다 책망 훈계가 닥쳤을 때 적그리스도가 드러내는 말이자 그의 마음속 말이다. 적그리스도의 이런 마음속 말은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완전히 대표하며,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을 드러낸다. 적그리스도가 이런 말을 드러낼 때면 그의 민낯이 완전히 드러난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다 영락없는 적그리스도이자 진정한 마귀 사탄이라고 할 수 있다. 일부 적그리스도는 책망 훈계가 닥쳤을 때 굽히지 않고 비굴하거나 거만하게 굴지도 않는 태도를 보이는데, 그들은 진리와 책망 훈계를 받아들이는 것도, 진실로 자신을 인식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의 신념 속으로 물러나 그 신념으로 자신의 지위와 명예, 존재감을 지키는 것이다. 이는 불신파의 본질이 완전히 폭로된 것이다. 그는 “내가 믿는 분은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니야.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라고.”라는 말로 모든 사람에게 반박하고 그들을 물리치며, 이 말로 진리를 부인하고 땅의 하나님을 부인하는 한편, 이 말로 자신의 죄를 덮고 거기에서 벗어나며, 자신의 패괴 성품과 본성 본질을 숨긴다. 적그리스도는 자신의 신념과 이론으로 스스로의 악행을 덮는 한편, 스스로를 위로하고 비호한다. 어떻게 스스로를 위로하겠느냐?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괜찮아. 땅에 있는 사람이 말한 건 이뤄지지 않아. 그가 하는 말이 아무리 옳아도 나는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 한, 그가 하는 말은 사실이 아니고, 진리에 부합하지도 않는 거야. 그럼 어떤 잘못이나 나쁜 일을 저지르든, 어떤 과오를 범하든 책임질 필요는 없어. 여태까지처럼 그렇게 내 마음대로 행동하고 거들먹거리고 고집을 부려도 된다고.’ 그래서 적그리스도는 그렇게 아무 거리낌 없이, 몰염치하게 계속 자신의 길을 걸어가며, 복받으려는 욕망과 속셈을 끝까지 유지한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민낯이다.

적그리스도는 책망 훈계가 닥쳤을 때 드러난다. 그때 그의 본성 본질은 가장 쉽게 폭로된다. 첫째, 그가 자신의 악행을 인정하겠느냐? 둘째, 그가 스스로를 반성하고 인식하겠느냐? 셋째, 책망 훈계가 닥치면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겠느냐? 이 세 가지에 근거하여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을 알 수 있다. 책망 훈계가 닥쳤을 때 순종하고, 스스로를 반성하며, 그 속에서 자신의 패괴 표출과 패괴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지 적그리스도가 아니다. 적그리스도는 이 세 가지를 갖추지 않았으며, 오히려 다른 짓을 벌인다. 그것은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하는 일로, 책망 훈계가 닥쳤을 때 적반하장을 보이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과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정하기는 고사하고 책망 훈계를 한 사람을 정죄한다. 어떻게 정죄하겠느냐? “책망 훈계가 반드시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책망 훈계는 다 사람이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대표하지 않죠. 오직 하나님만이 공의로우십니다. 남을 정죄하는 자들은 모두 정죄받아야 해요!”라고 말한다. 이는 적반하장이 아니겠느냐? 어떤 사람이라야 이렇게 적반하장격의 일을 하겠느냐? 생트집을 잡는 사람,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 마귀 사탄 부류만이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다.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은 절대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책망 훈계가 닥쳤을 때 적반하장을 보이는 사람은 분명히 악인이고 마귀이다. 적그리스도가 적반하장격으로 자주 하는 말에는 어떤 것이 있겠느냐? 바로 “제가 믿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롭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순종할 뿐 사람에게는 순종하지 않습니다! 책망 훈계가 반드시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저를 책망 훈계하신다면 받아들이겠지만, 사람이 책망 훈계한다면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라는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첫 번째 말은 바로 “하나님은 공의롭습니다!”라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들어 보면 그 어조에는 악독한 속내가 들어 있다. 두 번째 말은 “저는 하나님께 순종할 뿐 사람에게는 순종하지 않습니다!”라는 것이다. 너희는 이 두 가지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있습니다.) 그럼 너희가 이런 말을 한 적은 없느냐? (없습니다.) 평범한 사람은 감히 이런 말을 하지 못한다. 긍정적이라고 생각하는 일, 자기가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은 정말 공의로우시며, 그분의 책망 훈계와 징계는 옳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이 말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지킴으로써 스스로를 위해 해명하거나 변명하지 않는다. 그는 이 말, 이 사실을 진실로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고 인정한다. 하지만 적그리스도의 태도는 다르다. 그는 책망 훈계가 닥친 상황에서 이런 말투로, 이런 속셈을 품고 “제가 믿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롭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순종할 뿐 사람에게는 순종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어떤 의미겠느냐? 그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겠느냐?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책망 훈계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고, 하나님이 허락한 것임을 부정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전적으로 증명한다. 그럼 그는 왜 하나님이 공의롭다는 것을 인정하겠느냐? 분명 이 말과 표면적으로 옳게 보이는 말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자기에게 불리하게 군 사람, 자기를 책망 훈계하고 자기의 패괴 성품을 폭로한 사람을 정죄하려는 것이다. 이는 악인의 행위 아니겠느냐? 이런 자가 바로 악인이다. 악인은 중요한 시기에도 옳은 말을 이용해 하나님을 대적하고 진리에 대항하며, 자신의 이익과 이미지, 체면, 명예를 지킨다. 이는 염치가 없는 것 아니겠느냐? “악인은 그 얼굴을 굳게 하나”(잠 21:29)라는 말이 악인과 적그리스도에게서 입증되었다. 적그리스도는 바로 이런 사람이다.

적그리스도가 하는 또 다른 말로는 “제가 믿는 존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라는 것이 있다. 표면적으로 듣기에 이 말에 문제가 있어 보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당연히 옳다.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된다. 이 말이 얼마나 점잖고 올바르냐. 어떤 문제도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말은 적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면서 의미가 변질되었다. 의미가 변질되었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느냐? 적그리스도는 옳은 말을 이용해 곤경에서 벗어나고 변명한다. 그가 이 말을 한 이면에는 어떤 속셈이 있겠느냐? 그가 이 말을 한 이유는 무엇이냐? 이는 그의 어떤 측면의 본질을 증명하느냐?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증오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그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그가 공개적으로 “저는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한 말이 옳아도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하겠느냐? 만약 그가 그렇게 말한다면 모두가 그를 분별하고 저버릴 것이며, 그는 발붙일 곳이 없어질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말하지 못한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런 일을 매우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 적그리스도의 간사한 점, 사악한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만약 내가 공개적으로 당신에게 반발하고 큰소리치고 대항한다면, 당신은 내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겠지. 그러니 내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당신이 간파하지 못하게 할 거야. 다른 방식으로 이 일을 해결하고 나 자신을 지킬 거라고.’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제가 믿는 존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라는 말을 한 것이다. 그가 믿는 존재가 하나님이든 사람이든, 여기에서 우리가 해부해야 할 것은 적그리스도가 진리를 받아들이는가 하는 점이다. 그의 이 말은 개념을 혼동시키는 것 아니겠느냐? 이럴 때 그는 개념을 혼동시키고 사람들의 눈을 속인다. 그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간파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는 “저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진리를 인정합니다. 또 저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진리임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진리인 이상, 사람이 되실 수는 없지요. 만약 사람이 된다면 진리가 없을 것이고, 그 존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적그리스도는 이미 드러난 것 아니겠느냐? 그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평범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하늘의 하나님,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하나님, 사람이 마음대로 상상하고 이용할 수 있는 하나님만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이 점은 바울과 비슷한 데가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바울은 땅의 그리스도를 대할 때 어떤 태도를 보였느냐? 인정했느냐? 받아들였느냐?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 역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 형제자매이고, 서열을 따지면 그와 동등하지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땅에는 하나님이 없어요. 그러니 오해하지 마십시오. 땅에 있는 분은 그리스도이고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과 같지 않습니다. 그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대표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 또한 그를 진리로 여겨서는 안 되고요. 그를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제가 믿는 존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라는 적그리스도의 말에서 무엇을 해부할 수 있느냐? 그는 바울과 마찬가지로 하늘의 막연한 하나님만 인정하고,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그는 하나님이 이미 육신을 입고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 점은 적그리스도와 바울이 똑같다. 그의 뜻인즉슨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려면 하나님을 믿어야지, 사람을 믿어서는 안 돼. 사람을 믿는 것은 소용이 없어. 사람을 믿으면 복을 받을 수 없거든. 하나님을 믿으려면 하늘의 하나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어야 해. 하늘의 하나님은 얼마나 위대하고 전능해. 반면, 땅의 하나님이 뭘 할 수 있지? 진리나 좀 선포하고 옳은 말이나 좀 할 수 있지.’라는 것이다. 이 말을 통해 그의 본질을 해부하고 살펴보면 그는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고 대적하며, 하나님이 성육신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자로, 영락없는 적그리스도이다.

책망 훈계가 닥칠 때, 좌절할 때, 누군가에게 폭로당할 때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은 공의롭습니다.”라는 말로 스스로를 지키고, 그에 대한 다른 사람의 폭로와 책망 훈계를 부정한다. 어찌 됐든 책망 훈계가 닥쳤을 때, 그의 주된 태도는 반항하고 반발하며 거부하고 극력 변명하고 변호하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시간이 모든 것을 드러낼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롭습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 밝혀 주실 거예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패괴된 인류인 그는 본분 이행 과정에서 하나님 집 사역에 얼마나 큰 손실을 끼치든 아랑곳하지 않고, 개의치도 않는다. 만약 이 사실이 폭로된다면 그는 자기가 그 손실을 초래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며, 그 책임을 지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에게 밝혀 달라고 할 것이다. 마치 하나님이 그를 위해 봉사하는 양, 그가 잘못을 저지르면 하나님이 그를 지켜 줘야 하는 양,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인 양 말이다. 그는 진리와 책망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 그를 위해 변명하고 해명해 달라고 한다. 이는 부끄러운 일 아니겠느냐? 이는 너무도 부끄러운 일이다! 적그리스도 부류는 모두 극도로 몰염치하고 사악한 자들이다. 이것이 한 가지 측면이다. 책망 훈계가 닥쳤을 때 적그리스도가 수시로 하는 말 두 가지는 무엇이냐? (“제가 믿는 존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롭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이는 그들이 자주 쓰는 두 가지 말이다. 다른 생억지는 하나도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감히 말하지도 못하지만, 이 두 가지 옳은 말로 사람을 미혹하고, 스스로를 위해 궤변을 늘어놓으며, 잘못된 일을 옳은 일로, 사악한 일을 정의로운 일로, 그가 저지른 잘못과 그가 초래한 손실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고자 시도한다. 그는 이 두 가지 말로 이 모든 것을 일소하고 무효로 하며, 없던 일 취급한 후 자기 마음대로 믿는다. 적그리스도의 이런 모습에 회개가 있느냐? (없습니다.) 그는 회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적그리스도의 또 다른 일면, 진리를 싫어하고 교만하고 사악하고 흉악한 모습을 드러낸다. 교만함은 누가 그를 책망 훈계할 때 ‘당신은 사람이니, 나는 두렵지 않아!’라며 상대를 멸시하는 데서 드러난다. 이는 교만함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악함은 어떤 부분에서 드러나느냐? (적반하장에서 드러납니다.) 적반하장이 한 측면이다. 다른 한 측면은 옳은 말로 스스로를 위해 해명하고 변명하며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여기에는 또 어떤 성품이 있겠느냐? 적반하장 역시 흉악한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만약 누가 그의 본질을 폭로한다면 그는 자신이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를 반성하거나 인식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적반하장을 보이면서 옳은 말, 듣기 좋은 말로 다른 사람을 정죄할 것이다. 그가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방식과 말은 음험하고 사악하다. 그는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입을 막을 때 어떤 말을 해야 상대가 더는 말하지 못하고 그를 어찌하지도 못하게 될지를 알고 있다. 이것이 사악함이다. 그의 이런 방식과 행동은 부정할 여지 없이 흉악한 성품이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에게 책망 훈계가 닥친 일에서 해부해 낸, 적그리스도의 몇 가지 성품이다. 적그리스도의 이 몇 가지 성품과 표출은 우리가 앞에서 말한 네 가지와 대입이 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네 가지였는지 말해 보겠느냐? (첫째,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믿지도, 인정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 말씀 교제를 통해 진리를 듣고 이해했을지라도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넷째, 영원히 진실로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고, 순종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것이다. 이 ‘네 가지 부정’은 적그리스도의 본질을 대표한다. 적그리스도는 절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도 않는다. 이것이 바로 죽어도 회개하지 않는 것이고, 적그리스도 본성 안에서 표출된 것들이다. 이는 적그리스도가 책망 훈계를 대하는 첫 번째 태도이다. 적그리스도의 성품 본질은 동일하지만,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 명언이나 명문장들이 꼭 같지는 않다. 어떨 때는 이런 말을 하고, 어떨 때는 저런 말을 한다. 하지만 그들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든, 그 특징과 본질은 모두 같다. 그 말들의 본질은 바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모두 어떤 말이겠느냐? 진리에 부합하는 말이겠느냐? 사람의 말, 윤리에 부합하는 말이겠느냐? 아니면 양심과 이성에 부합하는 말이겠느냐? (마귀적인 말입니다.) 그렇다. 그것을 빈말,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한다면, 그 정의는 그다지 정확하지 않다. 마귀적인 말이라고 하면 그것은 문제를 설명해 준다.

성경은 개역한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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