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조 두각을 드러내고 자신의 이익과 야심을 충족하기 위해 본분을 이행할 뿐, 하나님 집의 이익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심지어는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넘기며, 하나님 집의 이익을 대가로 개인의 명예를 얻는다(7) 제 2 부

적그리스도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무엇이냐? 먼저, 그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는 모두가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건의를 해도 받아들이지 않을뿐더러, 무엇보다도 책망과 훈계를 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적그리스도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다. 만약 그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적그리스도가 아닐 것이다. 그럼 적그리스도는 왜 본분을 이행하려 하겠느냐? 그가 본분을 이행하는 속셈은 과연 무엇이겠느냐? 그는 전적으로 ‘현세에 백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는다’는 말에 따라 본분을 이행한다. 이것은 하나의 거래가 아니겠느냐? 이는 전적으로 거래이다. 거래의 성질을 볼 때, 그것은 일종의 사악한 성품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그의 어떤 점이 사악하냐? 누가 말해 보아라.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선포하신 수많은 진리를 들어도 추구하는 법이 없으며, 지위를 단단히 붙잡고 놓지 않습니다. 본분을 이행할 때도 개인의 이익을 얻고 사람들 사이에서 권력을 잡는 데 목적을 둡니다.) 그 말도 맞다. 그런 의미가 있지만, 충분히 구체적이지는 않구나. 만약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이 잘못인 줄 분명히 알면서도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죽어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심각하다. 지금 많은 사람이 복을 받으려는 심산으로 본분을 이행하고, 본분 이행을 통해 상과 면류관을 얻으려고 하면서 본분 이행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 문제를 정확히 교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럼 먼저 사람의 본분이 도대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하나님은 인류를 경영하고 구원하기 위해 사역한다. 물론 하나님은 인류에게 요구하는 바가 있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그 요구들이 바로 사람의 본분이다. 이를 통해 사람의 본분은 하나님의 사역과 인류에 대한 요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그것은 가장 정당한 일이다. 이는 인류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정의로운 일이다. 피조물이라면 마땅히 자신의 본분을 이행해야 창조주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 피조물은 창조주의 권세하에 살면서 하나님의 모든 공급과 하나님에게서 온 모든 것을 받아들이므로 마땅히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고, 하나님이 예정해 놓은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봤을 때, 사람이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살면서 행하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정의롭고 아름다우며 고상한 일이다. 인류 가운데 어떤 일도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보다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은 없으며, 지음 받은 사람이 더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일은 없다. 땅에서 유일하게 진심으로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창조주께 순종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세상의 조류를 좇지 않고, 하나님의 인솔과 인도에 순종하며, 오로지 창조주의 말씀을 듣고, 창조주가 선포한 진리를 받아들이고, 창조주의 말씀대로 살아갈 뿐이다. 이는 가장 진실되고 힘 있는 증거요,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가장 훌륭한 증거다. 한 피조물이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 창조주를 만족게 할 수 있는 것은 인류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며, 인류 가운데서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져야 할 일이다.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어떤 일을 맡기든, 피조물은 마땅히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인류에게 행복한 일이자 영광스러운 일이다.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 이는 무엇보다 아름답고 기념할 만한 일로, 긍정적인 사물이다. 창조주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그들에게 어떤 약속을 주는지는 창조주의 일로, 피조된 인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분명하고 간단하게 말하면, 이 일은 하나님이 결정하는 것으로, 사람은 간섭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네게 뭔가를 주면 너는 뭔가를 얻는 것이고,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네가 할 말은 없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창조주에게 협력하여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고 능력을 다하는 것은 본래 거래가 아니고 교환도 아니다. 사람은 태도나 행위, 행동 방식을 나타내는 것으로 하나님에게서 오는 어떤 약속이나 축복도 맞바꾸려 해서는 안 된다. 창조주가 너희에게 이런 일을 맡겼으니 피조물로서 마땅히 그 본분과 부탁을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에 거래가 있느냐? (없습니다.) 창조주 입장에서 보면 사람이 당연히 이행해야 하는 본분을 너희 각자에게 맡기기를 원하는 것이고, 피조된 인류 입장에서 보면 기꺼운 마음으로 그 본분을 받아들여 이생에 다해야 할 의무와 살아 내야 할 가치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거래는 없다. 이것은 등가 교환이 아니며, 어떤 상이나 사람이 상상하는 다른 설명과는 더더욱 무관하다. 그것은 절대 교환이 아니며, 본분 이행을 위해 바친 대가나 노동력으로 무언가를 얻어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고 사람도 그렇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창조주는 인류에게 부탁을 맡기고, 피조물은 창조주로부터 하나님이 준 부탁을 받아들인 후 자기 본분을 이행한다. 이 일, 이 과정에는 거래가 없으며, 이는 그저 단순하고 아주 정당한 일이다. 부모가 자녀를 낳은 후 무조건 불평 없이 키울 뿐, 자녀가 앞으로 부모에게 효도하느냐 안 하느냐에 관해서는 자녀를 낳은 그날부터 그런 요구를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어떤 부모도 자식을 낳은 후 “저는 이 아이가 커서 저를 보살피고 효도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를 키우는 거예요. 만약 이 아이가 나중에 효도하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목을 졸라 죽여 버릴 겁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런 부모는 없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하나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자녀가 효도할 수 있든 없든 부모는 그렇게 계속 자녀를 키운다. 아무리 고생스럽고 힘들어도 자녀를 성인으로 키우며 자녀가 잘되기만 바란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책임과 의무에는 조건도, 거래도 없다. 이 점은 경험 있는 사람은 모두 이해할 것이다. 많은 부모가 자녀의 효도 여부에 대해 어떤 요구 기준이 없다. 자녀가 효도하면 기뻐하며 말년을 조금 즐겁게 보내고, 자녀가 효도하지 않아도 그냥 흐름에 맡긴다. 비교적 생각이 트인 부모라면 다수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어쨌든 부모가 자녀를 키우는 것이든, 자녀가 부모를 부양하는 것이든 다 책임과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고, 사람의 소임 안에 있는 일이다. 물론, 피조물이 본분을 이행하는 것과 비교하면, 이런 것은 작은 일이지만 인간 세상에서는 비교적 아름답고 정의로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피조물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더더욱 말할 나위도 없다. 피조물로서 창조주 앞에 왔으면 마땅히 자신의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이는 지극히 올바른 일이며, 사람이 이행해야 할 책임이다. 창조주는 피조물이 본분을 이행하는 이런 전제하에 인류 가운데서 더 큰 사역을 하고, 사람에게 한층 더 깊은 사역을 했다. 그것은 어떤 사역이겠느냐? 바로 인류에게 진리를 공급하여 인류가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진리를 얻게 하는 것이다. 또 이를 통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정결케 되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고 인생의 바른길을 걷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 더는 사탄의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완전히 구원받게 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본분을 이행하게 하여 최종적으로 이루려는 성과이다. 그러므로 본분 이행 과정에서 하나님은 너에게 한 가지 일만 꿰뚫어 보거나 일부 진리만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고,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여 얻게 되는 은혜와 축복을 누리게 하는 데만 그치는 것도 아니다. 네가 정결케 되고 구원받아 마지막에는 창조주의 얼굴빛 속에서 살게 하는 것이다. 이 ‘얼굴빛’에는 많은 파생 의미와 파생 내용이 있는데, 오늘은 자세히 말하지 않겠다. 물론, 하나님은 분명 이런 사람에게 약속을 주고 축복을 주며 그들에 대해 다른 말씀을 할 텐데, 이는 아주 먼 일이다. 현재를 보면 하나님 앞에 와서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얻는 것은 무엇이냐? 진리이자 생명이며, 그것은 모두 인류 가운데서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인류 가운데 아무 피조물이나 쉽게 창조주의 손에서 그런 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일이, 이렇게 위대한 일이 적그리스도 부류에 의해 왜곡되어 거래로 변했고, 그들이 하나님 손에서 면류관을 받아 내고 상을 받아 내는 거래로 변했다. 이런 거래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정의로운 일을 가장 추하고 가장 사악한 것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적그리스도가 한 짓이 아니냐? 이런 점을 보면 적그리스도는 사악하지 않으냐? 적그리스도는 너무 사악하다! 이것이 바로 그의 사악함 중 한 측면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말세에 육신을 입고 사역하며 수많은 진리를 선포해 인류에게 하나님 경륜의 모든 비밀을 밝혔고, 인류가 구원받기 위해 반드시 알고 진입해야 할 모든 진리도 공급했다. 이러한 진리, 이러한 하나님 말씀은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보배와 같다. 진리는 패괴된 인류가 필요로 하는 것이자 인류의 가장 귀한 보물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요구, 뜻은 인류가 알고 파악해야 하는 것, 구원받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며, 또한 반드시 얻어야 할 진리이다. 그러나 적그리스도는 이러한 말씀을 이론이나 구호, 심지어는 마이동풍으로 여기며, 더 심하게는 멸시하고 부정한다. 그들은 인류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을 사기꾼의 거짓말로 여긴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이 세상에 구세주는 존재하지 않으며, 진리나 긍정적인 사물은 더더욱 존재하지 않는다고, 아름다운 것이나 이익은 뭐든 다 사람의 손으로 쟁취하고 사람의 노력으로 빼앗는 거라고 생각한다. 또 그들은 야심과 꿈이 없는 사람은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는 마음속으로 극도로 싫어하고 증오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는 이론이나 구호로만 치부하면서 권력, 이익, 야심, 욕망 등은 정의로운 사업으로 여겨 경영하고 추구한다. 또 은사를 통해 힘쓰는 것을 빌미로 하나님과 거래하며 천국에 들어가고 면류관을 얻어 더 큰 복을 누리고자 한다. 이것이 사악함 아니겠느냐?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느냐?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위해 가장 많이 헌신하고 고난을 겪은 자, 가장 큰 대가를 치른 자가 윗자리에 앉게 되고, 열심히 뛰어다닐 수 있는 자, 말재간이 좋은 자, 강도와 같은 정신으로 폭력을 통해 쟁취할 수 있는 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고 면류관을 얻게 된다고 보세요. 마치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딤후 4:7~8)라는 바울의 말처럼 말이에요.”라고 말한다. 그들은 바울의 이 말을 신봉하며, 그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요구와 가르침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아. 가장 중요한 건 싸워야 할 싸움을 마치고, 달려야 할 길을 다 달리면 마지막에 면류관을 얻는 거야. 이건 진실이라고. 하나님의 뜻도 이런 것 아니겠어? 하나님은 수없이 많은 말씀을 하시고 수없이 많은 설교도 하셨지만, 결국 그 뜻은 면류관을 얻고 상을 받고 싶다면 자신의 힘으로 쟁취하고 싸우고 강탈하고 빼앗아야 한다고 인류에게 알려 주시는 거야!’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논리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는 마음속 깊이 하나님의 사역을 늘 이렇게 생각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경륜을 이렇게 해석한다. 적그리스도의 성품이 사악하지 않으냐? 그는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진리를 왜곡하며 모든 긍정적인 사물을 왜곡한다. 그는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륜을 하나의 적나라한 거래로 여기며, 창조주가 인류에게 이행하라고 요구한 본분 역시 하나의 적나라한 박탈, 침략, 기만, 거래로 생각한다.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성품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는 복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거래의 수법으로 이루어야 한다고, 그것이야말로 공평하고 합리적이며 가장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사악한 논리 아니겠느냐? 사탄의 논리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는 마음 깊은 곳에 늘 이러한 관점과 태도를 지니고 있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성품이 너무도 사악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설명한다!

방금 교제한 몇 가지 내용에서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성품을 간파할 수 있겠느냐? (네.) 첫 번째는 적그리스도가 본분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렇지 않으냐? 적그리스도는 본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적그리스도는 본분 이행을 거래로 여겨 종착지와 이익을 얻어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아무리 많은 사역을 하시고, 아무리 많은 말씀을 하시며, 아무리 많은 진리를 선포하셔도 그는 개의치 않고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심산으로 본분을 이행합니다.) 적그리스도는 본분 이행을 거래로 여긴다. 그는 거래하고 복을 받기 위해 본분을 이행하며, 하나님을 믿는 것은 복을 받기 위한 것이라고, 본분을 이행하고 복을 받는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본분 이행이라는 긍정적인 것을 왜곡하고, 피조물의 본분 이행의 가치와 의미를 훼손하며, 피조물의 본분 이행의 정당성을 비방한다. 또 그는 피조물이라면 마땅히 이행해야 하는 본분을 거래로 변질시킨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첫 번째 사악함이다. 두 번째, 적그리스도는 긍정적인 사물이 있다는 것, 진리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며,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믿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사악함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디가 사악하냐? 하나님 말씀이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인데 적그리스도는 보지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구호나 이론으로 여기며, 하나님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을 왜곡한다. 여기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문제는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은 이 말씀들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며, 인류는 반드시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여야 정결케 되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이자 진리이다. 하지만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이런 약속을 적그리스도는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는 “구원받는다고요? 정결케 된다고요? 그게 무슨 소용이죠? 아무 쓸모도 없습니다! 정결케 되면 정말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나요? 제가 보기엔 꼭 그러리란 법은 없는 것 같은데요!”라고 말한다. 그는 이런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관심도 두지 않는다. 이 말에 내포된 의미는 무엇이겠느냐? 그는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믿지 않고, 그저 하나의 가르침, 도리로 여긴다. 하나님 말씀이 사람을 정결케 하고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믿지 않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지난날 하나님이 욥을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순전한 자’라고 정의한 말씀은 진리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왜 이런 말을 했겠느냐? 어떤 근거가 있느냐?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를 살피고 사람의 마음을 감찰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본질을 보고 이를 근거로 욥을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순전한 자’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은 욥을 하루 이틀 살핀 것이 아니다. 욥 역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모습을 하루 이틀 보인 것도 아니고, 더욱이 그런 모습을 한두 가지 일에서만 보인 것도 아니다. 그럼 사탄은 이 사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겠느냐? (의심하고 의구심을 품습니다.) 사탄은 의심할 뿐만 아니라 부정한다. 사탄의 그 말을 까놓고 말하면 “당신은 욥에게 더없이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소와 양, 수많은 재산을 주셨지요. 그가 당신을 경배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당신은 욥을 순전한 자라고 하시지만, 그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말은 진리가 아니고 진실하지 않으며 정확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그 말을 부정합니다.”라는 것이다. 사탄은 이런 뜻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순전한 자이다.”라고 했을 때, 사탄이 뭐라고 했느냐?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사탄은 “틀렸습니다. 그는 순전한 자가 아니에요! 그는 당신에게서 이득과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당신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그 축복과 이득을 모두 거두어 가신다면 그는 당신을 경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순전한 자가 아닙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사탄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물음표나 가위표를 붙인다고 하는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 말씀을 부정하고, 모든 사물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定義)와 가르침을 부정한다. 이는 사탄이 진리를 부정한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실상은 이런 것이다. 그럼 적그리스도는 인류를 폭로하고 형벌하고 심판하며 인류에게 여러 가지를 구체적으로 요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겠느냐? 인정하고 ‘아멘’을 외치겠느냐? 준행하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여러 말씀에 대해 적그리스도는 마음속으로 대놓고 ‘틀렸어! 그렇게 된 거라고? 왜 당신이 그렇다면 그렇다라는 거지? 내가 보기엔 꼭 그렇지만은 않은데. 내 생각은 달라. 당신이 하는 말은 왜 이렇게 귀에 거슬리지?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아! 만약 나한테 말하라고 했다면 나는 이렇게 말했을 거야.’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에 대한 적그리스도의 태도를 볼 때, 그들이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여겨 지키겠느냐?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두 번째 사악한 점이다. 세 번째,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여 인류가 사탄의 패괴 성품과 흑암 권세에서 벗어나 구원받게 하려는 하나님 경륜의 취지를 적그리스도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왜 그들의 성품을 사악하다고 하겠느냐? 그들은 이것을 하나의 거래로 여기는 것도 모자라 그냥 하나의 게임으로 생각하기까지 한다. 누구와 누구의 게임이겠느냐? 전설 속 하나님과 인간 세상의 고뇌에서 벗어나 천국에 들어가려는 무지몽매한 사람들 사이의 게임이자 거래이다. 한쪽은 때리려고 하고 한쪽은 맞으려고 하며, 한쪽은 주려고 하고 한쪽은 받으려고 하는 게임 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경륜을 이렇게 바라본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성품이 표출된 것이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는 마음에 가득 찬 야심과 종착지를 얻고 복을 받으려는 욕망 때문에 인류 중 가장 아름다운 사업과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영 사역을 하나의 게임이나 거래로 왜곡한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성품이다. 이 밖에, 적그리스도에게는 가소롭고 웃기게 들리는 특징이 하나 더 있다. 무엇이 웃기겠느냐?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진리이며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도 믿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들은 기꺼이 그것을 위해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며 거래에 박차를 가해 성사시키고자 한다. 웃기지 않느냐? 물론, 이는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점이 아니라 어리석은 점이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고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인정하지 않으며, 심지어 하나님의 경륜을 왜곡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 말씀과 경륜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이 모든 사실의 존재를 믿지 않고, 더욱이 이 모든 사실의 진실성도 믿지 않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속에서 이득을 얻고 덕을 보려고 하고, 기회를 틈타 세상에서 얻지 못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무척 똑똑하다고 생각하니, 웃기지 않느냐? 이것이 바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꼴이니, 어리석기 그지없다.

방금 우리는 세 가지 모습을 통해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성품을 해부하였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보충하였다. 바로 적그리스도는 심각하게 어리석어 보는 이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종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세 가지는 무엇이었느냐? (첫째, 적그리스도는 본분 이행을 거래로 여깁니다. 둘째,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이 긍정적인 사물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으며, 하나님 말씀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말씀을 이론이나 구호로 여깁니다. 셋째, 적그리스도는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영 사역을 하나의 적나라한 거래나 게임으로 여깁니다.) 또 한 가지는 무엇이냐? (적그리스도는 우습고 심각하게 어리석습니다.) 무척 구체적이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런 성품을 지닌 부류는 이성과 정신이 좀 비정상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디가 비정상이냐? (적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거래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앞날과 운명을 얻어 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경륜을 믿지 않으며,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사실도 믿지 않습니다. 그의 사상은 모순적입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가 부정하는 것이니 근본적으로 말이 되지 않지요. 그래서 그는 이성이 비정상적이며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정상 인성에 결핍된 부분이다. 그는 자신의 그런 생각과 계산이 제 뺨을 때리는 것임을 모른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그는 결코 진리를 받아들이는 법이 없고, 진리를 실행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늘 그릇된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럼 그는 자신이 걷는 길이 그릇된 길임을 알겠느냐? 분명 모를 것이다. 만약 안다면 그렇게 손해 보는 일을 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잇속을 챙기는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얼마나 똑똑한지 보라고. 당신들은 모두 간파하지 못했으니 바보야. 왜 그렇게 우직한 거야? 하나님이 어디에 있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잖아. 하나님의 약속이 꼭 이뤄진다는 법은 없다고! 내가 얼마나 영민한지 보란 말이야. 나는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열 걸음을 내다보는데, 당신들은 한 걸음도 계산하지 않잖아.’ 그는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2~3년간 본분을 이행한 후 생각한다. ‘나는 지난 몇 년간 본분을 이행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어. 뭔가 이적을 보거나 특이한 현상을 목격하지도 못했고. 예전처럼 지금도 하루에 세끼 밥을 먹고, 한 끼라도 굶으면 배가 고프지. 밤에 한두 시간 덜 자면 다음 날 졸리고.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된 것도 아니야! 모두들 하나님은 무소불능의 존재라고, 본분을 이행하면 큰 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몇 년이나 본분을 이행했지만 뭔가 달라진 게 없어. 여전히 똑같잖아? 수시로 연약해지고 소극적 상태에 빠지고 원망하지. 또 모두들 진리와 하나님 말씀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어. 마음속으로 늘 부모님과 아이들을 생각하고, 심지어는 예전에 속세에서 살던 날들이 그립기까지 해. 그럼 하나님은 사람에게 대체 무슨 사역을 하신 걸까? 나는 뭘 얻은 거지? 모두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얻으면 얻어진다고 하는데 얻어졌다면 남들과 달라져야 하는 거 아냐? 지금 나는 점점 나이를 먹고 있고, 몸도 예전 같지가 않아. 얼굴의 주름도 많아졌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점점 젊어진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왜 젊어지기는커녕 늙고 있는 거지? 하나님 말씀도 정확하지가 않으니 나 자신을 위해 따져 봐야겠어. 내가 보기에 하나님을 믿는 건 이런 거야. 매일 하나님 말씀을 읽고 예배하고 찬송하고 본분을 이행하면서 바쁘게 지내지만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아. 옛날과 뭔가 달라진 것 같지도 않고.’ 이렇게 생각하면 문제가 심각해지지 않겠느냐? 그는 골똘히 생각한다. ‘지금 나는 본분을 이행하는 게 너무 고생스러워.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은 아주 멀리 있는 것 같고. 게다가 하나님을 믿는 몇몇 사람들도 재난 속에서 죽잖아. 하나님은 정말 사람을 지켜 주시는 걸까? 만약 그런 게 아니라면 가장 위험한 순간에 하나님이 이적과 기사를 드러내 목숨을 구해 주셨다는 간증 글은 사실일까, 아니면 거짓일까?’ 골똘히 생각하던 그는 본분 이행에 힘과 열정을 잃고 적극적인 모습이 사라진다. 늘 뒤로 물러서면서 대충 건성으로 임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어떻게 계산하겠느냐? ‘만약 복을 얻지 못하고 늘 이래야 한다면 다른 계획을 세워야 해. 이 본분을 이행할지 말지, 앞으로 어떻게 이행할지 다시 계획하자고. 계속 이렇게 바보처럼 굴 수는 없지. 세상에서의 즐거움도 누리지 못했는데 이러다가 나중에 앞날과 운명, 면류관을 얻지 못한다면 전부 다 헛수고가 되는 것 아니겠어? 지금처럼 이렇게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예전이 더 나아. 일하면서 세상을 추구하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명목만 내세우는 거지. 만약 하나님이 언제쯤 사역이 끝날지, 언제쯤 사람에게 상을 주실지, 언제쯤 본분 이행이 끝날지, 언제쯤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현현하실지 계속 말씀하지 않으신다면, 항상 정확하게 설명해 주지 않으신다면, 내가 여기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속세에 돌아가 돈을 벌고 인간 세상의 복을 누리는 게 낫지. 그럼 적어도 이번 삶은 헛산 게 아니잖아. 내세에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어? 그건 다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먼저 이번 생을 잘 보낸 다음에 생각하자.’라고 계산한다. 그의 마음속에 변화가 생기지 않았느냐? 이렇게 계산하고 그릇된 길을 택하는데, 그가 수중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혹자는 “적그리스도는 지위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그에게 지위를 주면 하나님 집에 남지 않을까요?”라고 말하는데, 이럴 때 적그리스도가 지위를 필요로 하겠느냐? 이때 지위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분명한 한마디를 해 주는 것이다. 복을 얻을 수 없다면 그는 떠날 것이다. 먼저, 만약 그가 본분 이행 과정에서 계속 중용되지 못한다면 그는 앞날이 막연하고 암담하며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만약 본분 이행 과정에서 계속 그의 뜻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대업이 이루어지는 날 하나님이 영광을 얻어 강림하는 것을 직접 목도하거나 하나님이 그에게 몇 년 몇 월 며칠 몇 시 몇 분에 공개적으로 사람들에게 현현할 것인지, 하나님의 사역이 언제 끝나고 대재난은 언제 내릴지 분명하게 알려 주지 않는다면, 이런 것들을 명확한 말로 그에게 알려 주지 않는다면, 그의 마음 깊은 곳은 안정되지 않을 것이며, 그는 착실히 본분을 이행하거나 이런 현재 상황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결과이며, 하나님이 정확한 말 한마디로 그가 원하는 것을 과연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 분명히 알려 주는 것이다. 만약 계속 기다려도 그 말을 듣지 못한다면 그는 마음속으로 다른 계산을 할 것이다. 어떤 계산이겠느냐? 누가 그에게 그가 원하는 것과 복을 줄 수 있을지 계산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내세에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이번 생에서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할 것이다. 이 세상, 이 인류가 그에게 이번 생의 복을 주고 육적인 안락함과 즐거움, 명예와 지위를 줄 수 있다면 그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 호시절을 보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계산이다. 하나님 집에서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본분을 내려놓을 수 있고, 언제 어디서나 수중의 사역을 내팽개치고 속세의 기쁨과 앞날을 추구하러 갈 수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세상의 이익과 미래를 얻기 위해 형제자매와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먹고 하나님을 배반하기까지 한다. 그렇기에 적그리스도가 본분 이행 과정에서 아무리 뛰어난 모습을 보이고 아무리 승부욕이 강해도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본분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배신하며 하나님 집을 떠날 수 있고, 또 언제 어디서나 유다가 되어 하나님 집을 팔아먹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적그리스도가 본분을 이행한다면 반드시 본분 이행을 빌미로 단기간 안에 복받으려는 욕망을 충족하려고 할 것이며, 적어도 먼저 지위의 복을 얻어 사람들의 숭배를 받고, 그 후 천국에 들어가 상을 받으려 할 것이다. 그들의 본분 이행 기한은 3년일 수도 있고, 5년일 수도 있으며, 나아가 10년, 20년일 수도 있다. 이는 그가 하나님에게 준 기한이자, 스스로 정한 본분 이행의 최장 기한이다. 이 기한이 지나면 그들의 인내심은 한계에 이른다. 그가 복받으려는 욕망과 아름다운 종착지, 면류관, 상을 위해 몸을 굽히고, 하나님 집에서 고생하며 대가를 치를지라도, 마음속 깊은 곳 앞날과 운명, 개인에 대한 야심과 욕망은 결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잊히거나 내려놓아지거나 나아가 변하거나 옅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적그리스도의 본질을 통해 그들은 부정할 여지 없는 불신파이며, 긍정적인 사물은 싫어하고 부정적인 사물만을 좋아하는 부정할 여지 없는 투기꾼임을, 하나님 집에서 속여서 넘어가려는 인간 말종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수치스럽다.

성경은 ‘개역한글’을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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