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조 두각을 드러내고 자신의 이익과 야심을 충족하기 위해 본분을 이행할 뿐, 하나님 집의 이익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심지어는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넘기며, 하나님 집의 이익을 대가로 개인의 명예를 얻는다(3) 제 3 부
적그리스도는 늘 자기가 하나님 집에서 인기인이고 하나님이 중용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고 신뢰하는 사람이라는 말로 남들을 미혹하고 농락하고 통제함으로써 영원히 지위를 누리고 발언권을 얻으려는 목적을 이룬다. 적그리스도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그는 지위를 잃고 명성이 떨어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형제자매들로부터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자질이 떨어지며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는 말,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고 할 줄도 모른다는 말을 들을까 봐 겁낸다. 그들은 이런 말을 듣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이런 말과 정의를 들을 때, 적그리스도는 당황하고 분노하며, 심지어는 행패를 부린다. “저는 자질이 떨어지니 쓰고 싶은 사람을 쓰시죠. 어쨌든 저는 못 할 테니까요!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 아니십니까? 저는 이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위해 가정과 직업을 버리고, 당신들을 위해 많은 것을 대가로 치렀습니다. 그런데 형제자매들은 왜 공정한 말 한마디 못 해 주는 겁니까?” 그는 명예니, 지위니 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포장하고 위장하기도 때려치운 채 추악한 몰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또 분노를 발산한 후에는 눈물을 훔치며 생각한다. ‘큰일이야. 추태를 부렸잖아. 재기해야 해!’ 그는 계속 위장하며, 좋은 구호와 도리를 배우는 한편, 계속 듣고 읽고 말하고 남들을 미혹한다. 명예와 지위를 만회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언젠가 선거 때 형제자매들이 다시 그를 떠올리기를, 그의 좋은 점과 그가 치른 대가, 그가 한 말을 떠올리기를 바란다. 이는 염치가 없는 것 아니겠느냐? 옛 습성을 못 고친 것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는 왜 변하지 못하겠느냐? 이는 본성 본질에 의해 결정되며 그는 변하지 못한다. 그는 이런 인간이다. 자신의 야심과 욕망이 완전히 물거품이 될 때 그는 행패를 부리는데, 그러고 나면 한결 점잖아진다. 얼마 전, 한 사람의 근황에 대해 알아봤더니 몇몇 형제자매는 그가 요즘 들어 많이 온순해졌다고 했다. ‘온순해졌다’는 말은 무슨 뜻이겠느냐? 최근 들어 많이 점잖아지고, 예전보다 태도가 좋아졌다는 것이다. 소란을 피우지 않고, 남을 공격하지도 않으며, 지위를 두고 경쟁하지도 않고, 남들에게 부드럽고 겸손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또 옳은 말로 남들을 도와주고, 삶 속에서 사람들에게 특별히 관심을 갖고 보살펴 주는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가 정말 변했겠느냐? 변하지 않았다. 그럼 이 행동들은 무엇이겠느냐? (겉면의 좋은 행위입니다.)
어떤 적그리스도는 드러나서 모든 악행이 폭로된 후 형제자매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저는 그동안 하나님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받고 내적 상태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지난날 제가 저지른 일들을 깊이 뉘우치고 있죠. 형제자매들에게 피해를 준 일을 잊을 수도, 내려놓을 수도 없어 마음이 무척 괴롭습니다.” 그러면서 울기 시작하는데, 자발적으로 형제자매들에게 자신을 책망하고 훈계해 달라고도 한다. “제가 연약해질까 봐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에게 그릇된 부분이 있으면 책망해 주십시오. 받아들이겠습니다. 여러분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는 형제자매의 책망과 훈계를 고집스럽게 거부하며, 거기에 반감을 품고 반항하고, 자신을 위해 변호하고 해명하고 마음속으로 원망을 품던 데서 자발적으로 책망과 훈계를 구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태도의 변화가 너무 빠르지 않으냐? 이것이 회개했음을 의미하겠느냐? 그의 태도를 보면 돌이킨 것 같으니 너는 그를 책망해야 한다. 그러면 그가 예전에 저지른 잘못을 깨닫고, 스스로를 인식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때, 너는 진심 어린 마음으로 그를 도와주며 이렇게 말해야 한다. “요즘 당신의 태도가 무척 좋은 것 같으니 솔직히 이야기하겠습니다. 제 말이 틀려서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개의치 마십시오. 하지만 제 말이 맞다고 생각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 주십시오. 제 의도는 당신을 도와주고 싶은 거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식으로 당신을 공격하려는 게 아닙니다. 솔직하게 마음을 열고 교제하자고요. 당신은 예전에 리더 자리에 있을 때 정말 거만했고, 잘못을 저질러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인정한다고 해도 속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았죠. 시간이 흐른 뒤 비슷한 일이 생기면 똑같이 행동했습니다. 지난번 일을 예로 들어 볼게요. 당신이 맡은 바 책임을 다하지 않았기에 결과적으로 일이 터졌고, 하나님 집의 재산에 매우 큰 손실을 주었습니다. 또한 많은 형제자매가 끌려가 감옥살이를 하면서 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죠. 그러니 당신이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그 사건의 직접적인 책임자였으니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죄를 인정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사실, 당신이 잘못을 인정해도 하나님은 기껏해야 당신이 과오를 저질렀다고 보실 테니, 앞으로의 진리 추구에는 영향이 없을 것입니다. 형제자매들도 올바르게 대하면서 당신을 하나님 집 사람으로 여길 거고요. 당신을 배척하거나 공격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사람의 모든 것이 하나님 손안에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시종일관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혐오를 사서 버림받게 되죠. 그러면 멸망의 대상이 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순종하며 진실로 회개한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지난 과오를 기억하지 않으실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당신은 여전히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일 테고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 사함과 용서를 구하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은 해야 합니다. 이는 피조물이 다해야 할 책임이자 본분이며,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에요.” 이는 진실한 말 아니겠느냐? 여기에 사람을 조롱하고 속이는 말이 한마디라도 있느냐? 사람을 비꼬고 비웃는 어조가 있느냐? (없습니다.) 이는 담담하게 마음속 말을 한 것으로, 다른 이를 도와 이로움을 주는 것을 원칙으로 이루어진 이야기이다. 이 말은 틀리지 않았으며, 여기에는 실행의 길과 구할 진리가 있다. 하지만 적그리스도가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이 말을 진리로 여겨 이해하고 실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는 어떻게 말하겠느냐? “아직도 제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겁니까? 하나님도 사람의 과오를 기억하지 않으시는데, 당신들은 항상 뭘 그렇게 추궁하는 겁니까? 이러면서 저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겠다느니, 도와주겠다느니 운운하는데, 이게 도와주는 겁니까? 이건 그냥 옛일을 물고 늘어지는 거고, 책임을 추궁하는 거죠. 결국 저한테 책임을 지라는 것 아닌가요? 그게 저 혼자만의 책임입니까? 모든 건 하나님의 손안에 있으니 책임져야 할 분은 하나님이시겠지요. 그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은 왜 힌트를 주지 않으셨답니까? 그 모든 건 하나님이 배치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저를 탓할 수 있습니까?” 이는 마음속 말이 튀어나온 것 아니겠느냐? 그의 문제는 무엇이냐? 겉으로 볼 때 그는 뉘우치고 겸손해진 것 같으며, 예전보다 한결 점잖아진 것 같다. 지위와 명예를 추구하지 않고, 사람들과 차분히 앉아서 마음을 터놓고 얘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런데 왜 이런 말을 하겠느냐? 여기에서 어떤 문제를 알 수 있느냐? (그가 보여 준 모습은 그저 재기를 위한 허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있느냐? (그는 결코 진정으로 스스로를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진심으로 회개한 모습도 아니고요. 그의 행동은 그저 외식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다른 사람이 그의 문제를 교제할 때, 그는 여전히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여기에서 그의 본성 본질이 진리를 적대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것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적그리스도는 지위를 잃었을 때, ‘푸른 산이 있는 한 땔나무 걱정은 없다’는 삶의 태도를 보이며 시시각각 재기할 준비를 한다. 둘째, 적그리스도는 자신이 걸어온 잘못된 길과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결코 반성하지 않으며,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도,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더욱이 악행을 저지른 사실 속에서 자기 본질을 인식하지도 못하고, 어떻게 해야 진리대로 실행할 수 있을지 종합해 내지도 못한다. 교체되어 지위를 잃었을 때, 그는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걸까? 도대체 어떻게 회개해야 하지?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에 맞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뉘우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책망과 훈계를 당하고 교체될지라도 그는 그 일로 뉘우치고 진리를 추구하거나 실행의 길을 찾거나 추구하는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 하나님 집에 얼마나 큰 손실을 초래했든, 얼마나 큰 실패를 겪었든 그는 죽어도 죄를 인정하지 않으며, 이번 실패를 통해 앞으로의 시간 속에서 진리를 추구하고 구하는 일도 없다. 그저 어떻게 해야 이 모든 것을 만회할 수 있을지, 자기 지위를 되찾을 수 있을지 머릿속으로 주판알을 굴릴 뿐이다. 바로 이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지위를 잃은 후의 생활 상태로, 시시각각 재기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마음속으로 예전에 자신이 걸었던 잘못된 길을 인정하지도 인식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두 번째에서 예전에 자신이 걸었던 잘못된 길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한 부분이고, 이 밖에도 그는 절대 진실로 회개하지 않고,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않으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전에 하나님 집에 가져다준 손실을 만회하려고 하는 일은 더더욱 없는 것도 한 부분이다. 그는 결코 어떻게 해야 추구하지 않는 사람에서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하는 사람으로 바뀔 수 있을지 생각하지 않는다. 이 두 가지로 볼 때, 적그리스도는 진리를 싫어하고, 본성이 사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마치 카멜레온처럼 위장에 몹시 능하며, 환경 적응력이 뛰어나다. 그의 본질은 바로 변화에 능한 것이다. 또한, 지위와 야심, 욕망에 대한 내면 깊은 곳의 추구 상태는 시종일관 느슨해지지도, 변하지도 않는다. 누구도 그를 변화시킬 수 없다. 적그리스도의 이런 모습을 볼 때, 이 부류의 본성 본질은 무엇이겠느냐? 그가 형제자매겠느냐? 진정한 사람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너희가 이들을 형제자매로 여긴다면, 너무 어리석은 것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의 이런 모습은 본질의 표출이다. 지위를 잃은 그는 이런 생활 상태를 보이며, 그가 계산하는 것, 드러내는 것, 외적으로 행동하는 것, 그리고 자기가 저지른 과오와 진리에 대한 마음속 깊은 곳 태도는 이런 것이다. 그의 관점은 변하지 않는다. 네가 어떻게 진리를 교제하든, 옳고 긍정적인 실행의 길을 어떻게 말해 주든 그는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기는커녕 대항하며, 심지어는 ‘지금 나는 지위를 잃어서 말을 해도 소용이 없어. 옹호해 주는 사람이 없고, 당신들까지 나를 우습게 보고 가르치려고 드는군. 당신한테 나를 가르칠 자격이 있나? 당신이 그럴 주제나 돼? 내가 리더 자리에 있을 때 당신은 걸음마도 못 뗐다고! 당신이 지금 할 줄 아는 그 말들도 다 나한테서 배운 거 아니야? 그런데 그걸로 나를 가르치려고 들다니, 하늘 높은 줄 모르네!’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책망하고 훈계하는 사람, 자신과 대화하고 이야기하는 사람, 자신에게 솔직하게 마음을 터놓는 사람에게 자격과 경력을 논하니, 이는 어떤 인간이겠느냐? 적그리스도 부류나 이런 말을 하지, 정상인 혹은 염치와 이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누가 너희에게 설교해 주고, 차분하게 속을 터놓고 이야기하며, 너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의견을 내면 너희는 받아들일 수 있느냐? 아니면 적그리스도와 같은 마음가짐을 갖느냐? 예를 들어, 너는 하나님을 10년 동안 믿었는데도 리더가 되지 못했는데, 다른 누구는 하나님을 믿은 지 2년 만에 너보다 높은 지위에 올랐다고 해 보자. 너는 마음이 괴로울 것이다. 또 너는 하나님을 20년간 믿어서 겨우 지역 리더가 되었는데, 다른 누구는 하나님을 믿은 지 5년 만에 교구 리더가 되어 너를 ‘지도’한다면 속으로 불복할 것이다. 만약 그가 너를 책망한다면 마음이 불편할 것이며, 설령 그 책망이 옳다고 할지라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 것이다. 너희에게는 이런 태도나 모습이 없느냐?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성품이다. 너는 적그리스도 성품이 오직 적그리스도에게만 있다고 생각하느냐? 적그리스도 성품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 무척 위험하다. 그런 사람은 적그리스도의 길을 걸을 수 있고, 그 성품은 사람을 멸망에 이르게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본질을 교제하고 해부할 때는 적그리스도 성품을 지닌 부류도 그 대상으로 포함한다. 대상으로 포함되는 사람들이 소수겠느냐, 다수겠느냐, 아니면 전부겠느냐? (전부입니다.) 그렇다. 적그리스도 성품은 사탄의 성품이며, 패괴된 인간은 누구나 사탄 성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적그리스도가 책망과 훈계를 어떻게 대하는가’라는 항목에 관해 우리는 몇 가지 내용을 교제하였다.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면 몇몇 실제 사례를 들 수 있겠지만, 이 내용은 너희가 예배 때 교제하도록 남겨 두겠다. 늘 다른 사람이 어떤지에 관해서만 교제해서는 안 된다. 물론, 다른 사람의 모습을 교제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너희 스스로의 모습을 교제해야 한다. 만약 자기 자신에게서 적그리스도 성품과 관련된 모습이나 표출을 찾을 수 있다면, 이는 너희가 스스로를 인식하는 데 도움과 이로움이 될 것이며, 적그리스도 성품을 벗어 버리는 데도 일조할 것이다.
적그리스도 성품의 각종 모습이라는 주제에 관해서는 일전에 교제한 바 있다. 지금 너희는 그것에 대조해 볼 수 있느냐? 얼마간 인식할 수 있느냐? 실제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느냐? 어떤 측면의 패괴 성품을 변화시키는 것이든 전부 진리를 깨닫고 대조한 후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것을 기초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패괴 성품의 각종 모습을 분별하고 해부하는 것은 자기 인식을 통해 성품 변화를 이루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이다. 이 점을 깨달았느냐? 지금 당장은 깨닫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늘 이렇게 사소한 주제와 사소한 일만 교제하시고, 심오한 진리를 이야기하거나 심오한 비밀을 밝혀 주지는 않으시네. 정말 재미없고 지루하다! 이런 일을 교제하는 게 앞으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고 큰 복을 받고 온전케 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지?’라고 생각한다. 그는 줄곧 알지 못하며, 듣다 보면 종국에는 졸아 버린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알아듣지 못한다. 그는 각각의 진리와 관련된 사람의 각종 내적 상태나 각 항목 진리 사이의 관계를 알지 못한다.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기에 세부적으로 교제할수록 멍해지고, 새겨듣지 못해 늘 졸음이 오는 것이다. 예배가 시작되면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며, 아무리 재미없고 반복적인 규례와 의식을 지켜도 졸지 않지만, 진리나 각종 내적 상태를 교제하기만 하면 졸아 버린다. 늘 조는 사람은 왜 그런 것이겠느냐? 이는 드러난 것 아니겠느냐?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모습 아니겠느냐?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하고 어느 정도 자질을 갖춘 사람이라면 생명 진입 측면의 이 각종 진리와 관련된 세부 내용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 잘 알게 된다. 반면,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들은 들으면 들을수록 멍해지고 재미없다고 생각하며, 아무리 들어도 똑같다고 여기면서 어떤 길도 얻지 못한다. 그는 생명 진입의 일이 복잡하지 않으며, 그렇게 많이 교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자가 바로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이다. 사람의 성품 변화는 수많은 진리와 관련되어 있다. 성품 변화를 추구하는 길에서 각 항목의 진리에 공을 들여 깨닫고 이해하고 인식하며 실행의 길을 찾지 않는다면 절대 어떤 진리에도 진입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길은 무엇이냐? 각 진리를 깨닫고 거기에 진입하는 것, 이것이 유일한 길이다. 각 항목의 진리는 한 가지 논조도 아니고, 하나의 지식이나 철학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삶이나 생존 상태, 매일의 내적 상태와 생각, 그리고 사람이 패괴된 본질에 지배되어 생겨난 갖가지 생각, 뜻, 속셈, 태도와 관련이 있다. 그렇기에 지금 이런 주제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 이 주제들을 분명히 하고 대조할 수 있으며 실행의 원칙을 찾고 자신의 갖가지 성품에서 생겨나는 다양한 내적 상태와 관점을 깨달으면 그것들과 관계된 진리를 진정으로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을 깨달아야 정확히 진리 원칙대로 실행할 수 있다. 만약 피상적인 글귀만을 이해한다면, 하나님이 적그리스도의 이기적이고 비열한 모습을 폭로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이기적이고 비열하지만, 나라는 사람은 공평무사하지. 나는 크나큰 사랑과 포용심을 지니고 있어. 나는 학자 가문에서 태어나 고등 교육을 받았고, 명인이며 명작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나는 이기적이지 않아.’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겠느냐?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이겠느냐? 분명히 너는 이 진리를 깨닫지 못했고, 이 진리 안에 내포된 갖가지 내적 상태 또한 알지 못했다는 것이 아주 분명하다. 네가 한 가지 진리에서 하나님이 말씀하고 폭로한 갖가지 내적 상태를 알았을 때, 자신과 대조해 볼 수 있고, 정확한 실행의 길을 찾을 수 있다면 진리 실행의 길에 오르고 진리 실제에 진입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도리만을 깨달은 것일 뿐 진리를 깨달은 것이 아니다. 방금 말한, 적그리스도가 어떻게 책망과 훈계를 대하는지 하는 항목처럼 말이다. 우리가 교제한 갖가지 내적 상태와 모습, 표출은 전부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 그리고 성품과 관계가 있었다. 너희는 이에 대해 얼마나 인식했느냐? 얼마나 대조해 볼 수 있느냐? 네가 이해한 그 속의 말과 세부 내용, 내적 상태들이 다른 사람들과 상관있다고 여겼느냐, 아니면 너 자신과 관계있다고 여겼느냐? 너는 이러한 내적 상태와 어떤 관련이 있느냐? 정말 대조해 볼 수 있느냐, 아니면 마지 못해 인정하고 동조하는 것이냐? 이는 너의 이해와 진리에 대한 네 태도에 달려 있다. 대조해 볼 수 있다는 것은 진리 실행을 위한 하나의 선결 조건일 뿐, 이미 진리를 실행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대조해 볼 수조차 없다면, 너는 진리 실행과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설교를 들으면서 무엇을 들은 것이겠느냐? 대충 흉내만 낸 것이다. 너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 같지만 사실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하지도 못하니, 너는 문외한, 봉사만 하는 존재, 부각물이다. 어떻게 대조할지, 이 말과 관련된 각종 내적 상태를 어떻게 해부할지 등은 너희 스스로의 인식에 달려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너희에게 이 말씀들을 알려 주고 공급해 주는 것뿐이다. 나머지는 너희 스스로 노력해야 하며, 받아들일 수 있을지 여부는 너희의 태도에 달려 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이 강퍅하여 늘 위장하고 자기 지위와 명예를 지키는데, 자신에게 분명히 문제가 있음에도 알아채지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을 폭로하고 해부한다. 그 결과, 남들은 거기에서 유익을 얻어도 그는 유익을 얻지 못하니, 이는 어리석은 사람 아니겠느냐? 이는 어리석은 행위이다. 너는 다른 사람을 분별하기 위해서, 혹은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설교를 듣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듣고 자신이 얻기 위해 듣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 말씀, 진리, 설교를 듣고 그 가운데서 진리를 깨달아 생명을 얻음으로써 성품 변화를 이루는 것이 다른 이와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이 말씀들은 너와 관계가 있다. 네가 이런 태도를 지니고 있다면 이 말씀들은 너를 변화시키고, 네 실제가 되며, 네가 성품 변화를 이루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제1조에서 우리는 책망과 훈계를 대하는 적그리스도의 갖가지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이 주제에 관해 교제하면서 한 측면에서는 이 일에서 적그리스도가 보이는 태도와 본성 본질의 표출에 관해 인식하게 하였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너희에게 긍정적인 인도를 해 주고, 경각심을 갖게 하였다. 남은 문제는 너희 스스로 교제하여 해결하여라. 이는 너희 자신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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