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조 두각을 드러내고 자신의 이익과 야심을 충족하기 위해 본분을 이행할 뿐, 하나님 집의 이익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심지어는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넘기며, 하나님 집의 이익을 대가로 개인의 명예를 얻는다(1) 제 6 부

지금 너희의 마음속에서는 교회의 어떤 사역이 가장 중요하고, 하나님 경륜의 확장과 관계가 있느냐? (복음 전파입니다.) 복음 사역은 큰 사역이다. 하나님의 사역이 하나님에게는 사역이고, 사람에게는 본분이다. 복음 사역 외에도 영상 사역, 번역 사역, 찬양 및 각종 문서 사역이 있다. 지금 풀타임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많은 사람이 다 이 사역들과 관계된 일에 종사하고 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 사역들 중 어떤 것을 버릴 수 있겠느냐? 혹자는 “음악은 음을 다루는 일이니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곡조가 없어도 똑같이 전파되고 확장될 수 있으며,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할 수 있으니까요.”라고 말하는데, 이 말이 맞느냐? (맞지 않습니다.) 어째서 맞지 않겠느냐? 다양한 영상 작품에 음악이 없으면 되겠느냐? (안 됩니다.) 교회 내부에서 노래를 부를 때 필요한 것 외에도 모든 영화, 뮤직비디오, 합창, 뮤지컬, 하나님 말씀 낭송 영상 등에 다 음악이 필요하다. 음악이 겉으로 보기에는 음을 다루는 일 같지만, 사람들에게 그것을 들려주면 하나님 말씀 전파 성과가 더욱 좋아지며, 복음의 확장을 추진하는 역할을 할 수 있으므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너희가 여기에서 아무렇게나 말을 한다고 해도 배경 음악이 있으면 효과는 다를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래서 이 본분은 무척 중요하다. 또 혹자는 “그럼 영상 사역은 중요한가요?”라고 말하는데, 영상 사역이 중요하지 않겠느냐?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특수 효과 기술로 제작한 일부 대형 장면은 어떤 소재로도 대체가 불가능하고, 촬영해 낼 수도 없다. 이는 현대 예술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집에서 현대 예술을 논하다니, 이는 시대에 발맞추는 것 아닌가요?”라고 말하는데, 뭐가 시대에 발맞추는 것이냐? 이는 사탄을 이용해 봉사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형제자매를 이용해 힘쓰게 하는 것은 아니다. 즉, 몇몇 기술과 예술 측면의 업무를 익히고 이러한 업무 지식을 복음 확장과 하나님 말씀 전파 사역에 쓴다면, 네가 배운 것은 쓸모가 있을 것이다. 네가 그것을 배울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이고, 네가 그 본분을 이행할 수 있다면 복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너의 복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배우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네가 본분에 사용하는지가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저희가 하는 문서 사역은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저희에 대해 언급하지도 않습니다. 저희를 볼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얼마 안 되고요. 저희는 있으나 없으나 한 존재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일을 밝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너를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너를 볼 수 있다. 하나님이 너를 감찰하고 인도하고 축복하고 있는데 왜 느끼지 못하는 것이냐? 사람들이 너를 볼 수 있는지, 너희에 관해 언급했는지가 중요하냐? 너희에게 어떤 진리를 공급해 주지 않았더냐? 너희가 빠진 설교 교제가 어떤 것이 있더냐? 사실, 문서 사역은 기술 수준이 그리 높지 않고, 업무 측면에서도 그리 강화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한 가지 꼭 필요한 것이 있으니, 바로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아무것도 써낼 수 없다. 너는 글쓰기 지식을 갖추고, 말을 규범화하고 조직화할 수 있으며, 한 작품의 구조와 맥락을 써낼 수 있겠지만, 구조가 그 자체로 문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 내용을 채워 넣어야 한다. 내용으로 과연 무엇을 쓸지, 과연 어떻게 써야 하나님을 증거하는 성과를 낼 수 있을지 등은 너희가 진입해야 할 부분이다. 만약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이 단계 사역을 전파하는 기초에만 머무른다면, 너희의 분량은 결코 성장할 수 없을 것이다. 반면, 너희가 하나님의 새 사역을 증거하고 사람의 관념을 깨부술 수 있다면, 이상(異象) 측면의 진리 외에도 생명 진입 측면의 진리를 교제하고, 사실과 이야기, 비교적 섬세하게 묘사된 상황 설명으로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 각종 내적 상태를 표현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사람의 패괴를 인식하게 하고 하나님의 요구,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며 가장 중요한 문제인 도대체 무엇이 진리인지, 사람이 가야 할 길은 무엇인지, 사람이 지금 걷고 있는 잘못된 길의 문제점은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은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떤 길을 걸으라고 요구하는지 등을 인식하게 한다면, 또 한 걸음 한 걸음 이러한 측면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너희의 본분 이행은 더없이 가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난관이자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사람의 생명 진입은 하루 이틀에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대부분의 일이 처음 말할 때부터 의식을 가질 때까지 1~2년이라는 시간이 걸리고, 모호하게 의식할 때부터 분명하게 의식할 때까지 2~3년, 3~5년의 시간이 걸리며, 분명하게 의식할 때부터 그 일의 성질을 의식하게 될 때까지 2~3년이 걸린다. 또 그 문제의 심각성을 아는 데까지는 2~3년이 더 걸린다. 무감각하고 자질이 떨어지는 사람은 여기까지 올 수 있지만, 자질이 좀 좋고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은 무엇이 진리인지 주동적으로 구하는 데 또 2~3년이 걸린다. 이렇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일생이 지나가는 것이다. 생명 진입은 이렇게 느리다!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고 기억하는 속도는 진리를 체험하고 인식하는 속도를 크게 뛰어넘는다. 이 말은 무슨 의미겠느냐? 체험과 인식은 영원히 느리다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해하고 기억하는 데는 머리만 쓰면 된다. 기억력과 이해력이 좋고 자질이 좀 있으며, 지식적인 기초가 갖춰져 있으면 아주 빨리 해낼 수 있다. 하지만 이해한 후에 바로 인식이 생기겠느냐? 그렇지 않다. 이해했다고 해도 그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아는 데 머무를 뿐, 일을 할 때는 여전히 잘되지 않는다. 왜 그렇겠느냐? 대부분의 경우, 네가 아는 도리는 일이 닥쳤을 때 쓸 수도, 연관 지을 수도 없다. 그 결과, 몇 번 실패하고, 적잖은 손해를 보며, 여러 번 길을 잘못 들기도 한다. 많은 심판과 형벌,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여야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갖가지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할 수 있다. 그렇게 몇 년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네 얼굴은 주름으로 덮일 것이다. 이것이 무척 느린 것 아니겠느냐? 사람의 생명 성장은 무척 느린 일이다. 사람이 깨닫는 진리는 사람의 본성 본질, 사람의 생존, 사람이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등과 연관되며, 이는 또 성품 변화나 생명 변화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네 생명이 다른 종류의 생명으로 변하는 것이 그리 쉬울 리 있겠느냐? 먼저 하나님의 사역이 필요하고, 이와 동시에 사람이 주동적으로 협력해야 하며, 게다가 외부 환경의 시련을 겪어야 하고, 개인적인 추구도 필요하다. 이 밖에도, 충분한 자질과 이해력이 있어야 한다. 그다음, 하나님이 추가적으로 너를 깨우치고 인도해 주며, 형벌과 심판, 책망과 훈계를 해야 한다. 또한, 형제자매들의 질책이 있어야 하고, 너 역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추구해야 한다. 그래야 사탄에게 속하는 것들을 제거할 수 있고, 진리에 속하는 긍정적인 사물들이 조금씩 들어갈 수 있다. 혹자는 “사람이 진리를 깨달으면 생명이 변합니다.”라고 말하는데, 이 말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어디가 옳지 않으냐?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서 진리를 갖춘 것은 아니며, 진리가 네 생명이 된 것도 아니다. 네가 진리를 듣고 이해하고, 알아들었다고 해서 그게 네 마음속에 얼마나 오래 남아 있겠느냐? 어쩌면 한 달 후, 네가 당시에는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던 그 말씀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 그리고 다시 그 말씀들을 들을 때 너는 처음 듣는 것 같다고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네가 이러한 생명의 분량을 갖추었다면 반복적으로 들을 필요는 없다. 반대로, 갖추지 못했다면 항상 들어야 한다. 듣지 않는다면 네가 이해한 것들이 점점 줄어들고 사라질 것이며, 서서히 불신자들과 같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과 진리는 늘 듣고 보아야지, 적게 보고 들으면 안 된다. 너희는 이 점에 대해 깊이 느낀 바가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가끔은 2~3일만 찬양을 부르지 않고 하나님에게 기도하지 않아도 마음이 공허해지고 하나님을 느낄 수가 없어 밖에 나가 산책하며 기분을 풀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기분을 풀수록 마음이 더 흩어지기만 하고, 교회에 가서 형제자매들과 진리를 교제하면 생소하게 느껴지며, 교회 사역에 대해 말해도 몇몇 말이 어색하게 느껴진다. 2~3일만 지나도 이렇게 변해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고, 너 자신조차 스스로를 알 수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는 어찌 된 일이겠느냐? 네가 설교를 많이 들었다고 해서 진리를 네 생명으로 삼았다고, 진리를 얻었다고 생각하지 마라. 아직 멀었다! 또한, 간증문을 하나 쓰고 그런 체험이 생겼다는 이유로 네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아직 그러기엔 이르다! 그것은 그저 네 기나긴 생명 체험 중 하나의 편린일 뿐이다. 그 편린도 한때의 기분이나 느낌, 바람, 포부에 그쳤을 수도 있다. 어느 날 네가 연약해질 때, 지난날의 간증과 서약, 인식을 돌이켜보면 낯선 느낌이 들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게 저라고요? 저한테 이렇게 큰 분량이 있었단 말이에요? 왜 모르겠죠? 이건 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때, 너는 네 생명이 아직 변하지 않았음을 느낄 것이다. 생명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무슨 의미겠느냐? 아직 성품이 변화하지 않은 것이다. 과거에 간증을 할 당시에는 너 자신에게 큰 분량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처럼 소극적인 모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떤 느낌이 들겠느냐? 성품 변화가 너무도 어렵다고 느끼지 않겠느냐? 진리가 사람 내면에 만들어지는 것은 하루아침에 가능한 일이 아니다. 사람이 정말 진리를 얻어 생명으로 삼으면 복을 얻게 되고,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지금처럼 그렇게 수시로 패괴 성품을 표출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충성심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며, 철저히 변화하게 된다.

인류가 너무 깊이 패괴되어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진리는 너무도 귀하기에 하나님이 진리를 사람 내면에 만드는 것은 더욱 어렵다. 진리의 가치와 의미, 그리고 진리의 다양한 측면은 사람에게 너무도 가치 있고 의미 있다. 하지만 인류는 사탄에게 너무 깊이 패괴되었고, 내면에 사탄에게 속하는 것들이 너무 많기에, 진리를 사람 내면에 만들어 생명이 되게 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진리가 사람 내면에 만들어지지 못하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진리는 사람 내면에 만들어질 수 있다. 다만, 사람이 올바른 태도와 관점을 지녀야 하고, 올바른 길을 걸어야 한다. 어렵다고 해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지난 두 단계 사역을 보면, 하나님은 온전케 하는 사역을 하지 않았고, 이런 진리를 선포하지 않았으며, 이런 말씀을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온전케 된 사람이 있었고, 하나님을 인식한 사람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진리는 사람 내면에 만들 수 있다. 아예 안 되는 게 아니라 가능하다. 다만 이는 사람의 진리 추구 여부에 달려 있다. 그럼 어떻게 추구해야겠느냐? 가장 간단한 방법은 매일 하나님 말씀을 읽고 대표적인 하나님 말씀을 외우며, 하나님 말씀 한 대목을 묵상하는 한편,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 말씀들을 반복해서 읽고 교제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 말씀 가운데서 너에게 가르쳐 주려는 관점과 가르침, 각종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는 태도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어 이해하고 마음속에 담으면, 갖가지 일이 닥쳤을 때 너도 모르게 올바른 사상 관점, 실행 원칙을 살아 낼 수 있을 것이다. 너희는 지금 아직 이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욥이 무엇을 했는지 보았느냐? 그의 자식들이 잔치를 열 때 욥은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며, 자식들을 위해 제사를 지냈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지지 않았다. 즉, 너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일은 피해라. 너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말은 하지 마라. 너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 네게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의혹을 싹트게 하는 것은 보지 말고 피해라. 너를 소극적으로 만들고, 타락하게 만들고, 방종하게 만드는 사람, 네게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거부감, 거리감이 생기게 하는 사람은 접하지 말고, 그런 사람으로부터 멀리해라. 접했을 때 네게 유익과 도움, 공급을 주는 사람이라면 가까이해라. 네가 진리에 반감, 염증을 갖거나 진리를 좋아하지 않게 만드는 일은 하지 마라. 이런 것들을 너는 마음속으로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저 그렇게 살 때까지 살면 되지. 모든 건 다 순리대로 따르고 하나님의 지배에 맡기자.’라고 생각하며 맹목적으로 그럭저럭 살지 마라. 하나님은 네게 환경을 안배해 놓고, 네게 자유 의지를 주어 네가 선택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네가 협력하지 않고, 늘 세속적인 것을 좋아하고, 육체를 방종하고, 본분에 충실하지 않은, 무책임한 사람과 적극적으로 접하며 그런 사람과 어울린다면, 최종 결과와 그 말로는 무엇이겠느냐? 그런 사람은 한가할 때면 먹고 마시고 놀며 즐기는 일에 관해 이야기하고, 구설수를 부르는 말을 한다. 이런 시험이 닥쳤을 때 멀리하지 않고 그런 일에 골몰하면서 이런 사람들과 어울려 다닌다면 위험하다. 그러면 언제라도 시험을 마주할 수 있다! 슬기로운 사람은 이런 시험을 보면 멀리한다. 그는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고 있다. ‘나는 그럴 분량이 없어 듣지 않을 거야. 상대하고 싶지도 않아. 저런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진리를 좋아하지 않아. 저들을 피해 조용한 곳을 찾아서 혼자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차분한 마음으로 묵상하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겠어.’ 이런 모든 원칙, 근본 취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지 마라. 둘째, 마음으로 하나님을 멀리하지 마라. 이렇게 무엇이 진리인지 이해한 것을 바탕으로 언제나 하나님 앞에 살면, 하나님은 한편으로는 네가 시험에 들지 않게 보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네게 특별히 은총을 베풀어 네가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인지 알게 하고, 여러 가지 진리에서 빛 비춤과 깨우침이 있게 할 것이다. 하나님은 네 본분에 있어서 네가 최대한 실수하지 않게 인도하여 늘 옳게 하고 원칙을 알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러면 네가 보호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 물론, 보호받는 것이 최대 목표, 최종 목표는 아니다. 그렇다면 최종 목표는 무엇이냐? 바로 네가 다양한 사람과 일, 사물에서 공과를 배우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역을 인식하여 하나님이 요구한 원칙에 따라 실행하는 것이다. 그러면 너의 생명과 분량은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성장할 것이다. 만약 네가 늘 업무 때문에 정신이 없어 본분 이행 과정에서 진리를 실행하고 생명 진입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집중하지 않는다면, 네 생명은 성장하지 못할 것이다. 생명 진입은 본분 이행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본분 이행과 하나님 말씀에서 벗어나면 생명도 성장하지 못한다. 혹자는 남들이 잡담하는 것을 보면 끼어들고 알아보려고 하며, 늘 수다쟁이 역할을 맡고 시비를 논하기를 좋아하는데,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느냐? 마음을 평온히 할 수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마음을 평온히 하고 무엇을 하느냐? 나무 인형이 되어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느냐?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고 하나님의 보호와 깨우침을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 또, 어떤 방면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경우 그 방면의 진리를 분명히 깨달을 수 있도록 깨우침과 빛 비춤을 구하고, 어떤 방면의 사역에서 난제를 만난 경우 하나님의 인도를 받거나 해결되기를 구한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할 때 배워야 할 공과와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다. 한가할 때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 저 여기 있어요. 당신은 제 마음속에 계시고, 저와 함께하세요. 저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해 주세요!” 같은 도착 보고나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무성의하게 대한다면 이런 자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진리를 베풀어 주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진리를 베풀어 주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무엇을 갖춰야 하느냐?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마음과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네 마음이 간절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네가 진정으로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네가 늘 하나님을 무성의하게 대하고, 진심이 전혀 없고, 무슨 일이든 스스로 결정하려 하고, 하나님 앞으로 가서 도착 보고를 하고 인사를 마치고는 자기 혼자 결정하고 일을 처리하려 한다면 하나님의 사역을 네게 맡겼음에도 종국에 너는 하나님과 무관하고 진리와 무관해진다. 이를 무엇이라 하느냐?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 경영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면 하나님이 너를 깨우칠 수 있겠느냐? 불가능하다. 너희는 진리를 추구하고 깨닫는 길을 알아냈느냐? 늘 하나님 앞에 와서 마음을 평온히 한 뒤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평온해지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평온해진다는 것은 머리를 텅 비우는 것이 아니라 구하고 생각하고 부담을 가지는 것이다. 진실한 마음으로, 갈망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와서 진리와 하나님의 뜻을 갈망하고, 자신의 본분과 사역에 책임감을 가지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와서 평온히 할 때 네가 마땅히 갖춰야 하는 것이다.

방금 전에 교회의 모든 사역은 하나님나라의 복음 확장 사역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교제했다. 특히 복음 전파 사역, 업무와 관련된 각 사역은 복음 확장 사역과 떼어 놓을 수 없는 중요한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복음 확장 사역에 관련된 것은 하나님의 이익, 하나님 집의 이익과도 관계가 있는 것이다. 복음 확장 사역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자신이 이행하는 본분과 다른 사람이 이행하는 본분을 올바로 대해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로 대하는 것이겠느냐?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하는 것이다. 적어도 고의로 파괴하고 교란하는 행위나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알면서도 일부러 범해서는 안 된다. 어떤 행동이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끝끝내 고집하고 누구의 충고도 듣지 않는다면 이는 악을 행하는 것, 죽음을 자초하는 것으로, 마귀가 정체를 드러낸 것이다. 형제자매들이 빨리 분별하게 한 후, 악인을 교회에서 제명해야 한다. 만약 악을 행한 사람이 고의가 아니라 한때의 어리석음으로 그런 행동을 한 거라면 이 일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가르치고 도와줘야 하지 않겠느냐? 가르쳤는데도 듣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형제자매들이 함께 질책해야 한다. 만약 그가 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지만 열심히 하지 않는데, 당장은 대체할 사람이 없고 모두가 계속 그에게 시키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모두 함께 그를 책망하고 훈계하고 경고해야 한다. “당신은 하나님의 높여 주심 덕분에 이 본분을 이행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계속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고 교란하며 본분을 내팽개친다면 양심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죠. 당신은 본분 이행에 적합하지 않습니다.”라고 말이다. 이러면 어떻겠느냐? 만약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떠나보내라. 너희는 이렇게 할 용기가 있느냐? 대다수는 감히 그러지 못한다. 많은 사람이 교회 사역을 보호하는 일에 나서서 정의를 지키는 것을 겁낸다. 이는 진리를 견지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 어떤 사람은 겁쟁이가 되어 교회 사역이 교란되고 방해받는 것을 보고도 미적지근한 태도를 취한다. 마치 자기와 무관한 듯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러면 안 된다고 질책하거나 경멸하고 무시하면, 짜증을 내며 생각한다. ‘당신이 뭔데? 무슨 근거로 나를 질책하는 거야? 뭘 근거로 나를 무시하는 건데? 여기에 대해서 분명히 말해 보자고.’ 그는 그 일을 마음에 담아 두고 눈에 새겨 두며, 거기에 대해 말을 하거나 태도를 밝히지 않고는 못 배긴다. 교회 사역이 가로막히고 교란되고 파괴되는데 그는 느낌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모른 척한다. 이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이기적이고 비열한 사람입니다.) 그냥 이기적이고 비열할 뿐이겠느냐? 이 문제는 너무도 심각해서 한마디로 요약할 수 없다. 이런 사람은 인성이 없다고, 절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사실상, 적그리스도는 이렇게 행동하며, 거짓 리더도 당연히 예외는 아니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집의 이익이 무엇인지 개념이 없고, 교회 사역이 가로막혀도 보지 못한다. 누가 교회 사역을 교란하여 엉망으로, 난장판으로 만드는데 그는 보고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대충 뜨뜻미지근하게 한마디 하거나 좀 타이르고는 끝이다. 전혀 분노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에게 정의감이 있겠느냐? 이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이런 자는 배은망덕한 것으로, 변절자이고 파렴치한이다!

방금 우리는 사람의 이익이란 무엇인지, 사람의 이익의 본질은 무엇인지, 사람은 왜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지, 사람이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성질은 무엇인지, 하나님의 이익의 성질은 무엇인지, 어떻게 정의하는지 등에 관해 개괄적으로 이야기하였다. 하나님의 이익은 가장 정의로운 사업이다. 마땅히 이렇게 대해야 한다. 하나님이 그의 이익을 지키는 것은 절대 이기적인 게 아니고, 그저 하나님의 존엄과 영광을 지키기 위한 것만도 아니라 하나님 사역의 진도와 성과, 정의로운 사업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이는 가장 정의롭고 정당한 행위이자 행동 방식이다. 하나님에게는 행사이다. 지음 받은 인류는 하나님의 이러한 행사에 어떤 관념도 가져서는 안 되며, 나아가 어떤 질책이나 판단도 해서는 안 된다. 그럼 하나님의 이익이 모든 것 위에 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이기적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은 이러한 측면의 진리에 대한 사람의 이해를 기초로 성립된다. 이는 의도적으로 한쪽 편을 들어 주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편파성이 없으며 정당하다. ‘하나님 집의 이익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심지어는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넘기며, 하나님 집의 이익을 대가로 개인의 명예를 얻는다’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본질이다. 이익에 대한 그들의 태도와 행동은 이런 성질을 띤다. 그들은 절대 하나님 집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는다. ‘절대’란 무슨 의미겠느냐?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이런 개념이 없으며,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어느 정도로 심각하겠느냐?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넘기고, 하나님 집의 이익을 대가로 개인의 명예와 이익을 얻을 정도로 심각하고, 그의 이익은 지고지상해서 하나님의 이익을 대신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하다. 그의 이익이 아무리 사악해도, 아무리 정당하지 않고 부정적이어도 그는 쟁취하려 한다. 누구를 희생시키고 어떤 대가를 치르든 그는 자기 이익을 얻어 내고 쟁취하려고 한다. 이는 어떤 행위겠느냐? (적그리스도의 행위입니다.) 적그리스도의 행위이다. 사탄은 이렇게 행동한다. 사탄은 이 인류, 한 국가, 한 종족을 통치하면서 몇 명의 목숨이든 희생시켜 통치를 공고히 한다. 사탄의 이익은 무엇이겠느냐? 권세와 통치의 지위이다. 그럼 사탄은 통치 지위를 어떻게 얻고, 그 통치를 어떻게 공고히 하겠느냐? (모든 대가를 불사합니다.) 모든 대가를 불사한다. 즉, 이런 행동 방식과 수법이 외부에 정당하게 보이든, 정당하지 않게 보이든 신경 쓰지 않고 학살, 탄압, 당근과 채찍, 협박과 회유 등 모든 수법을 쓰고, 어떤 사람의 목숨이든, 얼마나 많은 사람의 목숨이든 희생시켜 자기 지위를 공고히 하고 권력을 손에 넣는 것이다. 이것이 사탄의 행위이다. 그리고 적그리스도도 이렇게 행동한다.

오늘 교제한 이 말씀들이 너희 입맛에 맞느냐? (오늘 말씀을 듣고 큰 수확이 있었습니다. 특히, 지식과 지식인에 대한 해부를 듣고 크게 느낀 바가 있었습니다. 여태까지 저는 지식인들이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는 말을 그리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하나님께서 지식에 대해 해부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조금씩 대조해 보았습니다. 이를 통해 제가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지도, 알아듣지도 못하며, 사람과 일을 바라볼 때 지식의 관점에서 살피고 분석하여 치우치게 이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이었지요. 지금은 지식인의 본질에 대해 어느 정도 꿰뚫어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지식인에 관해 한 이야기는 절대 어느 한 사람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너희가 스스로에게 대조해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방향을 바로잡고 진입할 희망이 생길 테니 말이다. 열심히 추구해 보아라. 진리를 깨닫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데서, 조금씩 간단하고 단편적이며 얕은 진리를 깨닫고, 또 글귀와 도리가 아니라 진리를 깨닫게 되면 점차 영적인 이해력이 생길 것이다. 진리와 실제를 깊이 생각하면 차츰 진리를 깨닫게 된다. 언제나 도리 측면에서 분석하고 논리와 머리로 분석하면 도리와 이론만을 이해하게 될 뿐이다. 그것은 영원히 진리가 될 수 없고, 네게서 영원히 도리의 기초에 머물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혹자는 “몇몇 하나님 말씀은 왜 봐도 이해가 되지 않을까요? 문법이나 문장 구조로 판단하면 아무리 봐도 잘 이해가 되지 않고 그다지 잘 받아들여지지도 않습니다.”라고 말하는데, 너희는 이 문제를 어떻게 설명하겠느냐? 지금 이해할 수 있겠느냐? 내가 설명해 주겠다. 인류가 탄생한 후로 하나님은 인류에게 말씀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 한마디, 한 단락은 언어일 뿐 문장이 아니다. 오늘 내가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글을 쓰고 보고하는 것이냐, 아니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냐?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이야기하고 진리를 말하며 너희가 필요로 하는 화제를 다루는 것이다. 이것은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글이란 무엇이고 말이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이 두 가지는 차이가 있다. 글에 필요한 몇 가지 요소와 관련된 지식은 사람에게서 비롯되었다. 하나님은 말씀할 때 그러한 것들을 지키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저 그가 말하려는 진리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야기해 주기만 하면 되고, 사람이 진리를 듣고 이해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심지어는 문장 부호조차 필요하지 않다. 인류는 문장 부호와 글, 문법, 글에 필요한 요소들을 발명했다. 이러한 것은 모두 지식 범주에 속하며, 하나님은 그런 것을 지킬 필요가 없다. 이 밖에, 언어는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긍정적인 사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든 모두 옳으며, 문법적인 문제를 파고들거나 대조해 보고 해부할 필요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너는 그저 하나님의 이 말씀 한 편, 한 단락, 한 구절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진리는 무엇인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한 진리 원칙은 무엇인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알려 준 실행의 길은 무엇인지 이해하면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는 피조물인 사람이 마땅히 갖춰야 할 이성이다. 하나님이 말씀하고 행사할 때는 사람이 만든 틀이나 지식에 속하는 규범, 순수한 지식적인 것들을 따를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이러한 것들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은 수많은 말씀을 했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든 전부 진리이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 체험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 읽을수록 전부 진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 안에 담긴 진리가 무엇인지 사람은 묵상하고 구하고 체험해야 한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말씀을 한다. 기억하여라. 하나님은 말씀한다. ‘말씀하다’라는 단어를 다르게 풀면 ‘한담하다’, ‘이야기를 하다’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얘기하려는 본질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의 뜻과 진리, 그리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다. 바로 이런 내용이다. 말씀의 성질은 대화의 방식으로 마음과 얼굴을 마주하고 명료하게, 분명히 이야기하는 것이다. 때로는 입말이나 방언을 사용할 수도 있고, 때로는 문학적인 어휘를 사용할 수도 있다. 글을 쓰면 첫 번째 단락에 발단을 쓰고, 중간에 사건의 전개와 경위를 쓰며, 마지막에 클라이맥스와 결말을 써야 한다. 완벽하게 이 형식에 맞춰 써야 글이라고 할 수 있고, 교사들이 첨삭하면서 상, 중, 하로 등급을 매길 수 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해 이렇게 등급을 매길 수 있겠느냐? “이 말씀 한 편은 내용이 좋고 수준 높은 문법을 활용했으며 신적인 언어를 쓴 데다가 문장 구조가 완벽합니다. 반면 이 말씀 한 편은 별로네요. 산만한 감이 있고 구조도 그리 안 좋습니다. 어떤 문장은 문법에 맞지 않고, 심지어 몇몇 단어는 사람이 봤을 때 용법이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보면 되겠느냐? (안 됩니다.) 이는 치우치게 바라본 것으로, 이렇게 하면 영원히 진리를 얻을 수 없다. 하나님 말씀의 행간에서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 그 안에 있는 진리는 무엇인지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 현명하다. 그런데 너는 이러한 것조차 보지 못한 채 온종일 “하나님의 말씀은 왜 글이 아닌 거죠? 하나님 말씀은 연설문 같아야죠. 하나님은 입만 열어도 멋진 글이 나와야 하는 겁니다.”라고 말하는데,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 피곤한 일이다. 너희가 듣기에도 피곤하고 말하는 사람도 피곤하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한 말씀, 욥에게 한 말씀, 베드로에게 한 말씀, 모세와 요나에게 한 말씀을 보아라. 하나님 말씀이 간단명료하지 않더냐? 그렇게 비범하고 추상적이고 위대하며 엄격한 어구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사탄이 욥을 시험할 때, 하나님이 사탄에게 한 말씀을 보아라.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욥 2:6) 하나님의 말씀은 간단하고 정제되어 있으며, 더없이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자 본질이다. 하나님은 교활한 술수를 부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위대함과 비범함, 존귀함, 권병, 능력은 꾸며 낸 것이 아니다. 어째서 꾸며 낸 것이 아니라고 하겠느냐? 그는 누군가와 말할 때 거드름을 부리지 않고, 대단한 형상을 꾸며 내지 않으며,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사탄이나 그렇게 하지,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말씀하는 이상 네가 알아듣게 한다. 네가 어린아이라면 어린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이야기할 것이고, 네가 노인이라면 노인들의 말로 이야기할 것이다. 네가 남성이라면 남성들이 자주 쓰는 말로 이야기할 것이고, 네가 패괴된 인류라면 패괴된 인류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 방식과 구조로 이야기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방식은 매우 다양하다. 때로는 유머가 들어가 있고, 때로는 반어법을 사용하며, 때로는 풍자하고, 때로는 해부한다. 또 때로는 엄격하고, 때로는 온화하며, 때로는 네게 감동을 주고, 때로는 책망한 후 위로한다…. 하나님이 이 모든 사역을 하고 이러한 진리를 선포하는 것은 굳어 있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수의 근원이며, 진리의 원천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해도 된다.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은 전부 진리이며, 어떤 방식을 쓰든 상관없다. 늘 하나님의 말씀 방식과 구조 등에 관념을 갖고 연구하고 의혹을 품고 씁쓸해하면서 ‘내가 믿는 하나님은 하나님 같지가 않아. 왜 저러시지? 받아들이고 싶지가 않네. 그분 말씀을 받아들이면 너무 부끄러울 것 같아. 아무래도 다른 누구를 믿어야겠어.’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자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불신파입니다.) 이는 불신파다. 불신파는 대부분 어떤 사람이냐?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이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보면 눈을 부릅뜨고 연구한다. 결과적으로는 확실히 알아내지 못한 채 ‘참도라면, 이렇게 믿어서 과연 복을 받을 수 있을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믿는데, 믿지 않는다면 지옥에 가지 않겠어?’라고 속 좁은 생각을 한다. 그는 ‘다들 하나님 말씀 안에 진리가 있다고 하는데, 뭐가 진리지? 나는 왜 알아볼 수가 없는 거야? 더 살펴보고 들어 봐야겠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어느 날 마침내 ‘듣고 이해한다’. ‘이 말씀들이 드러내고 있는 것은 다 실제 상황이야. 이 말씀들은 진리라고. 언어가 너무 평범하고 일반적이며 대중적이라서 지식계에서 멸시받고 무시당하며 가장 평범한 말로 취급당하는 거지. 어떤 말씀은 너무 수수하기도 하고. 지식계의 유명한 지식인들은 쳐다도 보지 않을 단어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다니 정말 불가사의하네.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늘 이렇게 연구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너는 자기가 하나님보다 낫다고, 오히려 하나님이 너를 믿고 높여 주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 이런 자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이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태도는 영원히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서 하나님을 연구하는 것이며, 이와 동시에 반발하는 것이다. 반발하는 동시에 이렇게 생각한다. ‘당신이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요. 당신은 너무 보잘것없고 하나님 같지 않습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이라면 저는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고, 당신을 멸시하고 연구할 것입니다. 당신을 하나님이 아니라고 분석하여 모두가 당신을 믿지 않게 되면 저는 기쁠 것입니다. 그리고 위대한 하나님을 찾아 믿으면 마음이 한결 편해질 거예요.’ 이런 자를 불신파라고 한다. 불신파는 대부분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 그는 영원히 하나님의 이런 가장 평범한 말씀 속에서 진리를 깨닫지도 얻지도 못한다. 그는 그저 연구할 뿐이다. 이렇게 저렇게 연구하다가 진리를 얻기는커녕 구원받는 큰일에 지장을 주며 스스로를 드러내고 도태시키게 된다. 오늘은 여기까지 교제하겠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안녕!

2020년 1월 17일

성경은 개역한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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