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조 두각을 드러내고 자신의 이익과 야심을 충족하기 위해 본분을 이행할 뿐, 하나님 집의 이익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심지어는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넘기며, 하나님 집의 이익을 대가로 개인의 명예를 얻는다(1) 제 3 부
많은 중국인이 서양에 가면, 자신의 전통문화나 자신이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들을 서양인들에게 주입하려고 한다. 하지만 서양인들도 지지 않고, 자신들의 전통문화 역시 역사가 깊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고대 로마나 고대 이집트, 고대 그리스는 전부 ‘고대’라는 말이 앞에 오며, 그들의 문화는 전부 3천 년이 넘는다. 이러한 숫자로 미루어 볼 때, 그 속에는 분명 문화적 깊이가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 문화적 깊이에서 생겨난 것들을 두고 거기에는 전 인류의 삶의 정수가 들어 있다고, 그것은 인류의 삶과 생존, 처신을 종합한 최고의 정수라고 여길 것이다. 이 ‘최고의 정수’는 사람들 속에서 전해져 내려오면서 뭐라고 불리겠느냐? ‘전통문화’라고 불린다. 사람들은 한 세대, 또 한 세대 이 전통문화를 계승해 내려왔고, 모두가 마음속으로 그것을 최고라고 생각하게 됐다. 현재 사람들이 그것을 지키든 지키지 않든 총체적으로 말하자면, 각 종족의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지고지상한 것, 진리로 여긴다. 그렇기에 모든 종족의 사람들은 전통적이고 합리적이며 그 종족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것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두고 서로 토론하고 비교하며 심지어 그것으로 상대를 제압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중국인이 “우리 중국의 백주는 최고죠. 도수도 높고요!”라고 말하면, 서양인은 “백주가 뭐 대단할 게 있습니까? 도수가 너무 높아서 좀만 마셔도 취하잖아요. 간 손상도 심하고요. 우리 서양인들이 마시는 포도주는 도수도 낮고 간에 무리를 주지도 않는답니다. 혈액 순환에도 도움이 되고요.”라고 말한다. 그럼 중국인은 “우리 백주도 혈액 순환에 도움이 돼요. 엄청나게 도움이 되죠. 마시기만 하면 취기가 올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거든요. 당신들의 포도주는 한참 부족해요.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잖아요. 우리의 술에는 음주 문화가, 차에는 차 문화가 있답니다.”라고 말한다. 그럼 서양인은 또 “우리도 차 문화와 커피 문화, 음주 문화가 있어요. 요즘에는 패스트푸드 문화도 있죠.”라고 말하면서 서로 비교한다. 누구도 지지 않으려 하며, 서로의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면서 모두 자신의 것이 진리라고 여기지만, 사실 그것들은 전부 진리가 아니다. 이방인들은 차치하고,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심지어 이 단계 사역을 받아들인 지 20~30년 된 사람들마저도 이러한 것들이 결코 진리가 아님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혹자는 “그럼 그것이 진리와 관계있다고 말하는 건 괜찮습니까?”라고 하는데, 관계있다고 말하는 것도 안 된다. 그것은 진리가 아니며, 진리와 어떤 연관성도, 관계도 없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두 가지 일로, 완전히 다른 부류이다. 구리를 아무리 그럴싸하게 도금하고 맨질맨질하게 닦아 놓아도 그것은 구리일 뿐이며, 금은 문지르지 않고 빛내지 않아도, 광택이 없어도 금인 것처럼 말이다. 그것들은 같은 부류가 아니다.
혹자는 “비교적 좋은 전통문화 교육을 받고 거기에 영향받은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까요?”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두 가지의 일이다. 그래 봤자 생활 방식이 좀 다를 뿐,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나 각종 사상과 관점 그리고 전체 인류가 패괴된 정도는 모두 동일하다. 하나님이 말세에 이 단계의 사역을 행하면서 말씀하기 시작한 배경과 대상은 중국인이다. 30년이 지나 이 말씀들이 아시아의 다른 지역, 유럽, 아메리카 등 각 종족에게 퍼져 나가자 흑인이든, 백인이든, 갈색 인종이든, 황인종이든 모두가 이 말씀을 보고 “이 말씀은 우리를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라고 이야기했다. 하나님 말씀이 드러내고 있는 것은 모든 인류의 패괴 성품이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이렇게 말한다. “이 말씀들은 당신들, 중국인을 대상으로 하고, 중국인의 패괴 성품을 다루고 있군요. 우리에게는 그런 게 없습니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이런 말을 한다. 예전에 한국인들도 이런 오해를 한 적이 있다. 그들은 한국인이 민주 자유 사회제도 아래 살고 있고, 기독교 문화와 수천 년 한민족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니, 그들 민족이 중국인보다 존귀하고 고상하다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 생각했겠느냐? 많은 중국인들이 한국에 들어온 후 어디를 가든 위생 관념 없이 살았으며, 시끄러웠고, 소매치기, 형사 사건 등도 많이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한국 사회 분위기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기에, 한국의 형제자매들은 ‘중국인은 큰 붉은 용의 자손이고 모압의 후손이야. 우리 한국인은 큰 붉은 용에게 패괴되지 않았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말에는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느냐? ‘우리는 큰 붉은 용에게 패괴되지 않았으니 중국인만큼 패괴가 심하지 않아. 중국인은 우리보다 더 심하게 패괴되었지. 반면 우리는 중국인보다 나아.’라는 뜻이 숨어 있다. 그들의 말 중 이 ‘낫다’라는 단어는 무슨 의미겠느냐? (행위가 비교적 좋다는 뜻입니다.) 한 가지 측면에서 보면 행위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들은 마음속 깊이 유사 이래 대한민족이 만들고 받아들인 전통문화는 고상하다고, 중화민족의 문화와 전통보다 고상하고, 이런 전통문화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과 종족은 중국 전통문화에 영향받은 사람들보다 고상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이 “너희 이 천한 것들”이라고 이야기한 대목을 보면, 그 대상이 중국인이라고 여긴다. 중국의 형제자매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는 인류를 지칭합니다.”라고 말하면, 그들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는 우리를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그 말씀의 함의에는 한국인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고, 이렇게 생각한다. 어떤 측면에서 보든 그들이 일을 바라보는 관점과 각도는 진리에 기반하지 않으며, 객관적이고 공정한 시각을 유지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한 민족과 전통문화라는 배경 아래에서 문제를 바라볼 뿐이다. 그렇기에 그들이 어떻게 보든, 그 결과는 모두 진리에 어긋난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바라보든, 그 출발점은 항상 ‘우리, 대한민족은 뭐든 맞아. 뭐든 표준적이고 뭐든 옳지.’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잘못된 각도와 출발점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고 모든 일을 판단하는데, 그 결과가 옳겠느냐, 그릇되겠느냐? (그릇됩니다.) 분명 그릇될 것이다. 그럼 모든 사물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겠느냐? (진리가 되어야 합니다.) 진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기준이다. 그들의 기준 자체가 잘못되었다. 그들은 잘못된 각도와 관점으로 만사와 만물을 판단하니, 그 결과는 분명히 틀렸을 것이며, 공정하거나 올바르지도, 나아가 객관적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외부에서 온 사물을 받아들이기가 무척 힘든 것이며, 사상이 더없이 극단적이고 보수적이고 편협한 데다가 혈기대로 하는 것이다. 그들의 혈기는 어디에서 비롯되었겠느냐? 무엇을 말하든 다 ‘우리, 대한의 민족’이라고 하면서 꼭 ‘대(大)’ 자를 붙였다. ‘대’ 자를 붙이는 것은 무슨 의도겠느냐? 이 ‘대’ 자는 교만함을 의미하지 않느냐? 세계 각국을 돌아다녀 봤을 때, 혹은 지도에서 한국이 얼마나 큰지 봤을 때, 한국이 정말 다른 나라들보다 크다면 ‘대’ 자를 붙일 만할 것이며, 그렇게 불러도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구상의 평범한 나라들과 비교했을 때, 한국이라는 나라는 크지 않다. 그런데 왜 ‘대’ 자를 붙이는 것이겠느냐? 이 밖에, 한 나라가 크든 작든 거기에서 만들어진 규범과 전통문화는 모두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며, 결코 진리로부터 비롯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진리를 받아들이기 전까지 사람이 받아들이는 모든 사상은 사탄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사탄에게서 생겨난 모든 사상과 관점, 전통문화 같은 것들은 사람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느냐? 미혹과 패괴, 결박, 속박을 가져다주었고, 패괴된 인류의 사상을 편협하고 극단적으로 변화시켰으며, 일을 바라보는 관점을 단편적이고 편파적이며, 나아가 그릇되고 황당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인류를 패괴시킨 결과이다. 이로 인해 많은 나라, 심지어 일부 종족의 사람들이 “하나님이 중국에서 성육신하셨다.”라는 말을 들을 때, 가장 먼저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되었느냐? 딱 한마디, “말도 안 돼!”라는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그들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곳은 어디겠느냐? (이스라엘입니다.) 그렇다. 이스라엘이다. 사람은 규례에 끼워 맞추고 관념을 지키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사역한 곳이니 하나님은 마땅히 이스라엘, 혹은 그들이 숭배하는 어떤 강력한 제국, 아니면 그들의 관념과 상상 속의 어떤 고대 문명국가에 나타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중국은 그런 나라가 아니기에 하나님이 중국에서 성육신했다고 증거하면 받아들이기 아주 힘든 것이다.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이번에 구원받을 기회를 잃기에 충분하다. 이는 누가 초래한 일이겠느냐? (그들 자신이 초래한 일입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이런 관념이 있고 패역이 생겼는데도 진리를 구해 해결하는 법이 없기에 결국 스스로를 망친 것이고, 이 유일한 구원의 기회를 잃게 된 것이다.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할 때 생기는 수많은 상상과 관념, 심지어 숭배 대상은 하나같이 매우 그릇되고 황당하기 그지없다. 미국을 좋아하는 한 한국 여성이 미국에 거주하면서 미국인을 만나 상대로부터 “곧 새해네요. 중국인은 새해에 뭘 먹나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저는 중국인이 아니에요. 한국인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럼 한국인은 새해를 기념하지 않나요?”라고 하면 “우리, 한국인은 설을 쇠지 않아요.”라고 하고, 또 “저는 한국인도 중국인처럼 새해를 기념하는 줄 알았어요.”라는 말을 들으면 발끈해서 말한다. “우리는 중국인과 달라요! 당신은 우리가 설을 쇤다고 생각하나 본데, 그게 맞겠어요? 그건 우리 한국인의 존엄성을 심각하게 모욕하는 말이에요!”라고 한다. 한국인이 정말 설을 쇠지 않느냐? (쇱니다.) 사실 한국인도 설을 쇤다. 그럼 그녀는 왜 한국인이 설을 쇠지 않는다고 했겠느냐? 이 일에 관해 논의해 보도록 하자. 도대체 설을 쇠는 게 맞느냐, 안 쇠는 게 맞느냐? 너희는 이 일을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느냐? 사실 외국인에게 있어 설날을 축하하는 것 그 자체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삶 속에서 중요한 날을 기념하는 특별한 의식이다. 전통문화의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인류에게, 설을 쇠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고,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그런데 그녀는 왜 설을 쇤다고 인정하지 못했겠느냐? 설을 쇤다고 인정하는 순간, 서양과는 거리가 생기며 아주 전통적인 동양 사람이라는 딱지가 붙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동양의 전통적인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심어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상대가 그녀를 동양의 전통이 없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심지어 동양의 전통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사람으로 여겼으면 한다. 그래서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며, 파란색 렌즈를 끼고, 서양인과 같은 복장을 한 채 서양 여성처럼 그렇게 쿨하고 자유롭고 독립적이고 식견 있어 보이려 한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 봐 주기를 원한다. 이 사상에 지배되어 일이 닥쳤을 때 일 처리 방식이 이 사상을 따르게 된 것이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한국인은 설을 쇠냐고 물어봤을 때, 그녀는 “우리, 한국인은 설을 쇠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만약 주변에서 누가 “우리는 설을 쇠는데 왜 아니라고 한 거예요?”라고 말한다면 그녀는 뭐라고 하겠느냐? “바보 같군요. 설을 쇤다고 하면 그 사람이 저를 전통적인 한국인이라고 생각할 거 아니에요.”라고 말한다. 그녀는 사람들이 그녀를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으로 봐 주기를 바란다. 만약 네가 그녀에게 “당신은 이곳에서 태어났군요. 그럼 당신의 가족들은 이곳에서 몇 대째 살고 있나요?”라고 물으면 그녀는 “우리는 선조 때부터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어요.”라고 답할 것이다. 그녀는 이것이 신분과 지위의 상징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런 거짓말도 불사하고, 들킬까 봐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이는 어떤 사상이냐? 이것이 거짓말할 가치가 있는 일이냐? 이런 위험을 무릅쓸 가치가 있는 일이냐? 그렇지 않다. 이렇게 사소한 일 한 가지에서 사람의 사상과 관점이 드러난다. 어떤 사상과 관점이 드러나겠느냐? 한 중국 여자아이는 예쁘장하게 생겼지만, 굳이 머리를 노란색으로 염색하고 파마를 하며 색색깔의 렌즈를 끼고는 외국인인 척하는데, 보는 사람이 다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다. 이런 사람들은 왜 굳이 외국인이 되려고 하는 것이겠느냐? 외모를 그렇게 꾸미면 혈통이 달라지겠느냐? 혈통이 달라진다고 할지라도, 다음 생에는 백인종으로 태어나거나 존중받는 종족으로 태어난다고 할지라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 너희는 이 일을 꿰뚫어 볼 수 있느냐? 사람이 꼭 폼이 나야 하고 기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자기가 숭배하는 어떤 민족이나 종족의 일원인 척 가장하는 것은 무슨 이유겠느냐? 그것은 한 가지 사상에 지배된 것 아니겠느냐? 어떤 사상에 지배되어 있겠느냐? 그 한국 여성은 미국인이 탁구를 치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한다. “탁구가 뭔가요? 탁구는 중국인이나 치는 거죠. 우리는 테니스나 골프를 친답니다.” 언행이 이 정도 수준에 도달한 자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위장하는 사람 아니겠느냐? 무엇이든 위장하니 삶이 너무도 피곤할 것이다! 너희는 이렇게 처신하지 않느냐? 어떤 중국인은 서양에서 수십 년간 살아서 고향에 돌아오면 중국어를 하지 못한다. 이는 일을 망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혹자는 “사람은 근본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도 근본을 잊지 말라고 하셨고요. 하나님이 곧 사람의 근본이지요.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이고, 사람의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피조물인 사람은 하나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근본을 잊지 않는 것이지요.”라고 말한다. 이런 것 아니겠느냐? 모든 상황에서 구할 만한 진리가 있지만, 사람은 진리를 구하지 않는다. 사람이 지키는 것은 전통문화뿐이다. 이는 어찌 된 일이냐? 혹자는 “우리는 근본을 잊지 않았습니다. 어디를 가든 우리 스스로가 중국인임을 인정하지요. 우리 나라가 가난하고 낙후되어 있다는 것까지도 말입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근본을 잊지 않습니다.”라고 하는데, 이것이 옳으냐? 이 모든 문제는 첫째로 인류에 대한 소위 ‘전통문화’의 영향과 교육이 너무 심해서 생겨났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사람은 이렇게 오랫동안 설교를 들었지만, 무엇이 진리인지 자세히 묵상하거나 구하기는커녕 늘 자기가 지금 갖고 있는 것, 이미 배운 것, 먼저 주입되어 머릿속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전통문화나 낡은 것들로 진리를 사칭한다. 이것이 두 번째 측면이다. 세 번째 측면에서 보자면, 사람은 설교를 들은 후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진리를 구하지 않고, 전통적인 시선, 사람이 관념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 지식과 학문으로 하나님 말씀을 평가한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많은 설교를 들었음에도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소위 ‘일 처리 원칙’이나 소위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원칙 등은 늘 몇몇 옳은 지식과 속담, 속어에 근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이는 잘못을 저질러 교회 리더나 형제자매에게 책망받을 때, 이렇게 생각한다. ‘흥,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다.’, ‘웃는 낯에 침 뱉으랴.’라는 말도 있잖아. 이 정도의 단점은 나조차도 웃으면서 참고 받아들이는데, 당신은 왜 끝없이 까발리는 거지?’ 겉으로 보면 순순히 듣고 순종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는 내면 깊은 곳에서 전통 관념으로 반박하며 거부하고 있다. 그가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그는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다.”, “웃는 낯에 침 뱉으랴.” 등의 말이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이자 옳은 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렇게 각박하게, 끝없이 책망하고 폭로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다.
앞에서 교제한 내용을 통해, 너희는 진리에 대해 좀 더 깊은 인식이 생겼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말씀해 주셨는데, 실행 과정에서 어떤 원칙들을 지켜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전통문화나 지식, 관념들이 없으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어떻게 일을 처리해야 할까요? 이런 것들에 지배되지 않으면 어떻게 입을 열어 하나님 말씀을 전할까요? 이러한 것들이 없으면, 하나님 말씀을 전할 근거가 사라지는 것 아닐까요? 그럼 저희에게 남는 건 뭐가 있을까요?” 너희에게 정말 이러한 것들이 없어진다면 진리를 구하는 것도, 진리를 받아들여 하나님에게 돌아가는 것도 쉬워질 것이다. 예전에 너는 입만 열었다 하면 사탄의 철학이며 문화, 지식을 내뱉었다. “시대의 흐름을 잘 아는 자가 걸출한 인물이다.”, “웃는 낯에 침 뱉으랴.”,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다.” 등을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이것들은 다 옳지 않아. 전부 부정당하고 정죄된 것들이라고. 그럼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얼른 성실하고 착실하게 하나님 말씀을 읽고, 하나님 말씀 가운데서 근거를 찾자.’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을 따르면서도 입만 열었다 하면 이러한 속어나 속담, 그리고 전통문화가 가져온 것들, 관점들을 말한다. 일이 닥쳤을 때 있는 그대로 하나님을 높이고 증거하며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 “하나님은 저렇게 말씀하셨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도 이렇게 말하지 못하고, 누구 입에서도 이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은 자연스럽게 입에서 나오지 않으면서 이 속담들은 자연스럽게 나온다면, 과연 무엇이 네 마음속을 채우고 있겠느냐? 전부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들이다. 어떤 사람은 팀장이 그의 사역을 검토할 때 이렇게 말한다. “뭘 검토합니까? 사람을 쓸 때는 의심하면 안 되고, 의심할 거라면 사람을 써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항상 저를 의심하면서 왜 저를 쓰시죠? 다른 사람한테 시키세요.” 그는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이 그를 감독하고 지적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본분을 이행하면서 많은 고생을 했지만, 원칙을 구하지 않아 사역에 방해와 교란을 초래하다가 결국 교체되었다. 게다가 크게 책망받고, 정죄하는 말을 듣자 불복하는 마음이 들었다. ‘옛말에 ‘공로는 없어도 노고는 있고, 노고는 없어도 피로는 있다’고 하잖아? 이 정도 일쯤 잘못했다고 해서 뭐가 문제야?’ 그 속어가 먼저 주입되어 그의 마음속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그의 사상을 지배하며 영향을 주었기에, 이런 환경 속에서 이런 내적 상태가 생겨나자 그는 이 말을 근거로 하나님 집의 처분에 반항하고 불복하게 되었다. 그러니 그가 순종할 수 있겠느냐? 진리를 받아들이기가 쉽겠느냐? 겉으로는 순종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마지못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반항하지 않을지 몰라도 마음속으로는 거부하는데, 이것이 진실한 순종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대충 흉내만 내는 것일 뿐, 진실한 순종이 아니다. 여기에는 이치를 따지고 소극적으로 굴고 대항하는 것만 있을 뿐, 순종은 없다. 그럼 이치를 따지고 소극적으로 굴고 대항하는 태도는 어떻게 생겨났겠느냐? 바로 “공로는 없어도 노고는 있고, 노고는 없어도 피로는 있다.”라는 말에서 생겨났다. 이 말로 인해 그에게 어떤 성품이 생겼느냐? 불복과 강퍅함, 대항, 이치를 따지는 성품이 생겼다. 이렇게 교제하니, 너희는 진리에 대해 더 깊이 있는 인식이 생기느냐? 이 부정적인 것들을 명확하게 해부하고 분별하며, 마음속에서 파헤친다면, 일이 닥칠 때 진리를 구하고 실행할 수 있을 것이다. 낡은 것들을 버렸기 때문이다. 너는 더 이상 그것에 기대 본분을 이행하거나 하나님을 섬기거나 따르지 않는다. 또한, 그것들은 더 이상 네 처신의 원칙도, 본분 이행 때 지켜야 할 원칙도 아니며, 이미 비판받고 정죄받았다. 네가 다시 그것을 가져다 쓴다면, 네 내면 깊은 곳이 어떻겠느냐? 똑같이 그렇게 기쁘겠느냐? 똑같이 그렇게 의기양양하겠느냐? 분명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정말 네 내면에서 제거되었다면, 너는 하나님 말씀 가운데서 도대체 무엇이 진정한 원칙인지, 하나님의 요구는 무엇인지 구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일을 할 때 주인 말대로 하지 않으면 지쳐 죽어도 공이 없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이 말은 옳으냐? 절대 옳지 않다. 어느 부분이 옳지 않으냐? ‘일을 할 때 주인 말대로 하지 않으면’이라는 구절에서 ‘주인’이란 누구를 가리키느냐? 고용인, 사장, 상사를 뜻한다. 이 ‘주인’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옳지 않다. 하나님은 네 고용인이 아니고 네 사장도 아니며, 네 상급자는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은 네 하나님이다. 상급자, 사장, 상사는 모두 사람과 같은 부류로, 동등하고 본질이 같다. 즉, 모두가 패괴된 인류이다. 너는 그의 말을 듣고 그에게서 돈을 받으며 그가 시키는 대로 하고, 그는 네가 일한 만큼 돈을 주면 그것으로 끝이다. ‘지쳐 죽어도 공이 없다’는 구절에서 ‘공’이란 무엇을 의미하느냐? (공로를 의미합니다.) 공로, 보수이다. 네가 일을 하는 출발점은 보수를 받는 것이다. 여기에는 충성심이나 순종도, 진리를 구하고 경배하는 것도 필요 없다. 이러한 것이 없이 그저 일종의 거래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며 진리를 추구할 때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들이다. 만약 네가 ‘일을 할 때 주인 말대로 하지 않으면 지쳐 죽어도 공이 없다’는 말을 진리로 삼는다면 이는 단단히 틀린 것이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이해하라고 하면 반응이 뒤처지고 영민하지 못하게 군다. 하나님 말씀을 아무리 먹고 마셔도 한두 가지 진리도 이해하지 못하며, 하나님 말씀 한두 마디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민간에서 전해지는 즉흥시나 속어, 속담 등 사람들이 자주 말하는 것들은 무척 빨리 받아들인다. 아무리 멍청한 사람이라도 무척 빨리 받아들인다. 이는 어찌 된 일이겠느냐? 네가 어떤 종족이든, 네 피부색이 어떻든, 결국 모두 사람으로, 모두가 같은 부류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과 다른 부류일 뿐,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같은 부류에 속한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면 전 인류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 인류 가운데 누가 어떤 일을 하든, 그게 아무리 지위가 낮은 사람일지라도, 모두의 관념에 맞는다면 다들 아주 빨리 받아들일 수 있다. 사람의 사상과 관점, 사유 방식, 이해 정도와 경로는 기본적으로 동일하며 대동소이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누군가가 관념적인 말,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말을 하면 무척 빨리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진리란 무엇인지, 진리가 아니지만 진리를 사칭하는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이런 것을 어느 정도 깨달았느냐? 이런 것들 중 너희 마음속에는 또 어떤 것이 있느냐? 지금 당장은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지식에 속하지 않으며, 책을 넘기는 것처럼 뒤적여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일이 닥쳤을 때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이고,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통제하고 싶어도 통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그것들이 네 생명이 되어 뼛속에 깊이 뿌리내려져 있다는 뜻이다. 네게 생각해 내라고 하면 생각해 내지 못하지만, 말하지 말라고 하면 참지 못하고 일이 닥쳤을 때 그 치우친 관점이 튀어나온다. 이것이 사실이다. 천천히 체험해 보아라. 지금부터 사람들이 자주 말하는 것들,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주의를 기울여 보아라. 예전에, 큰 붉은 용의 독소와 사탄의 처세 철학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그것들은 문자적인 의미를 보면 분별하기가 쉽다. 그것이 확실히 진리가 아니라 큰 붉은 용의 독소이고, 안에 간계가 들어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분별하기가 쉽기에, 너희에게 해부해 보라고 하면 그럭저럭 해부할 것이다. 너는 이렇듯 명확하게 사탄에게 속하는 것들은 버렸지만, 네 내면에는 여전히 “큰일을 위해 치욕을 참는다.”, “와신상담”, “웃는 낯에 침 뱉으랴.”, “도에 맞으면 돕는 이가 많고, 도에 어긋나면 도움을 얻기가 힘들다.”, “군자는 무례한 대접을 받지 않는다.” 등의 말들이 많이 존재한다. 이런 것들은 너희 내면 깊은 곳에서 여전히 인정받고 있을 것이다. ‘정말 귀한 말들이야. 평생 사람으로 살아가는 존엄은 이 말들 속에 다 들어 있어.’라고 생각할 것인데, 이러한 것들을 아직 파헤치지 못했다. 이것들을 철저히 파헤치고 그것에 대한 분별력이 생기면 앞으로 전통문화에 속하는 것들이 튀어나올 때, 그것이 자연적인 반응이든 아니면 객관적인 조건 반사든, 너는 그것이 잘못되었으며 결코 진리가 아님을 바로 깨달을 것이다. 그때, 진리에 대한 네 인지와 인정 정도는 지금보다 높아진다. 지금보다 높아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겠느냐? 어느 정도 분량을 갖추고, 분별력이 커지며, 진리에 대한 체험이나 인식이 지금보다 깊어지고, 도대체 무엇이 진리인지 느끼게 된다는 뜻이다. 지금 너는 ‘사탄에게서 온 것들, 이 세상 모든 종족의 문화 배경에서 나타난 각종 전통문화는 다 옳지 않아.’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는 두루뭉술한 표현으로, 구체적으로 어떤 항목이 옳지 않은지, 어디가 옳지 않은지는 아직 모를 것이다. 그러니 하나씩 해부하고 인식한 다음 그것을 내려놓고 정죄하며, 철저히 그것과 단절하여 그것에 따라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너희는 그저 주관적인 의지로 이 속어와 속담, 명언, 흔히 설파되는 말들이 하나님 말씀과 전혀 무관하며, 진리가 아니라는 것만 알 뿐이다. 하지만 일이 닥치면 여전히 자기도 모르게 이 말들을 근거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스스로를 제약하며, 자신의 행위를 이끌 것이다. 그 말들이 네 사상과 관점을 견제하고 지배할 텐데 그러면 매우 골치 아픈 일이며, 네 진리 진입에 영향을 줄 것이다. 언젠가 사탄에게서 비롯된 이런 것들이 마음속에 나타나기는 해도 네가 그것을 분별하고 그것에 따라 살지 않고 진리 원칙에 근거하여 실행할 수 있다면, 그때는 진정으로 분량이 생긴 것이다. 지금 네게는 이러한 분량이 있느냐? 아직 없을 것이다. 만약 너희가 모두 맞다고 공인하는 말이 있고, 표현 방식이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하나님 말씀 중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면 너는 그 말도 진리라고, 하나님 말씀과 똑같다고 착각할 것이다. 네가 이러한 일을 간파하지 못하고, 계속 사람의 말을 지키며 버리려 하지 않는다면, 이 말은 네 진리 진입에 영향을 주게 된다. 이 말은 하나님 말씀이 아니며, 진리를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계속 교제하고 있다. 이건 너희를 진지하게 대한다는 뜻이다. 너희에게 진리를 이해시키려면 반드시 사람의 다양한 사상과 관점, 좋은 행위, 좋은 마음, 사람이 기대 살아가는 옳은 가르침, 상식에 맞는 행동 방식, 그리고 전통문화의 사상과 관점들을 모두 가져와 해부하고 분별하여 그것이 정말 진리에 부합하는지, 진리와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만약 네가 그것을 진리라고 생각한다면, 그 근거는 무엇이냐? 만약 네가 사탄의 이론과 학설에 근거하여 그것을 진리로 규정했다면, 너는 사탄에게 속하는 존재다. 또 이러한 것들이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사탄에게서 비롯되었을 것이니, 그 본질이 도대체 무엇인지 해부해 보아야 한다. 특히, 전통문화 가운데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고 구전되는 숱한 가르침과 관점들에 대해 올바른 인식과 태도를 지녀야 한다. 그래야 사람은 과연 무엇이 진리인지 진정으로 이해하고 인식할 수 있으며,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도대체 무엇인지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진리’라는 말이 과연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다. 또한 인류에게는 소위 도덕 윤리에 부합하고, 인성에 부합하고, 세상 물정에 부합하는 관점과 가르침, 사람이 의지해 살아가는 사상과 관점, 가르침이 있는데, 하나님은 왜 진리를 선포하여 사람을 구원하는지, 그리고 하나님은 진리만이 사람을 구원하고 변화시킨다고 말씀했는데, 왜 이렇게 말씀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여기에는 분명 구할 만한 진리가 있다. 적어도 한 가지, 사람이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상과 관점, 가르침은 패괴된 인류에게서 비롯되었으며, 패괴된 인류가 종합한 것이고,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속하는 것으로, 진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하자면, 이러한 것들은 본질적으로 진리를 거부하고 적대시한다. 그것은 진리를 대신할 수 없으며, 더더욱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영원히 진리가 아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에게 잘못된 것으로 정의되고 정죄받으며, 결코 진리가 아니다. 또한, 하나님의 행사와 진리 선포는 이러한 것들과 전혀 관계가 없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는 패괴된 인류의 처세술, 사람의 전통문화, 사상과 관점, 좋은 행위, 도덕과 존엄성, 긍정적인 사물에 대한 정의와 어떤 관계도 없다. 하나님의 진리 선포는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본질을 발현한 것이지, 인류가 종합한, 사람이 생각하는 각종 긍정적인 사물과 가르침에 근거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 말씀이고 진리이며, 인류가 의지해 생존해야 할 유일의 법칙이자 토대이다. 반면, 이른바 사람의 각종 ‘신조’에서 비롯된 것들은 전부 그릇되고 황당한 것이고, 하나님에게 정죄된 것으로,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의 원천이나 근거는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통해 그의 성품과 본질을 발현한다.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의 본질이 있으며, 하나님은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이므로 하나님이 선포한 모든 말씀은 진리이다. 패괴된 인류가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규정하고 정의하고 바라보고 인식하든, 하나님 말씀은 영원히 진리이며, 이 사실은 언제까지고 바뀌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이 얼마나 되든, 이 패괴되고 사악한 인류에게 어떻게 정죄받고 버림받든, 한 가지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바로 하나님 말씀은 영원히 진리이며, 사람은 그 사실을 영원히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인류는 모두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사람이 추앙하는 전통문화와 과학 지식은 영원히 긍정적인 사물이나 진리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할 것이다. 이는 절대적인 사실이다. 인류의 전통문화와 생존의 길은 시간이 바뀌고 오래되었다고 해서 진리로 변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 말씀 역시 인류가 정죄하고 망각했다고 해서 사람의 말이 되지는 않는다. 진리는 영원히 진리이며, 이 본질은 언제까지고 달라지지 않는다. 여기에는 어떤 사실이 존재하느냐? 사람이 종합한 그 속담들의 기원은 사탄이고 사람의 상상과 관념이며, 혹은 사람의 혈기와 패괴 성품에서 비롯된 것으로, 긍정적인 사물과 어떤 관계도 없다. 반면,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 본질의 발현이자 하나님 신분의 발현이다.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 말씀들을 선포했겠느냐? 왜 이 말씀들을 진리라고 하겠느냐? 만물의 모든 법칙과 규율, 근원, 본질, 본모습, 비밀은 다 하나님이 주재하며 하나님 손안에 있기에 그 모든 규율과 본모습, 사실, 비밀은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있다. 하나님은 만물의 모든 근원을 알고 있고, 그 근원이 과연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 오직 하나님 말씀이 만물에 대해 내린 정의만이 가장 정확하다. 또한,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인류가 살아가는 기준이자 원칙이며, 인류가 의지해 생존하는 진리이자 법칙이다. 반면, 인류가 사탄에게 패괴된 후 의존해 살아가는 사탄의 법칙과 이론들은 한 가지 측면에서는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한다는 사실에 위배되고, 또 다른 측면에서는 하나님이 만물의 법칙과 규율을 주재한다는 사실에 위배된다. 사탄에 속하는, 사람의 각종 이론은 다 사람의 관념과 상상 속에서 생겨난 것이자,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사탄은 어떤 역할을 하겠느냐? 먼저, 사탄은 진리를 사칭한다. 두 번째로 사탄은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한 이 모든 규율과 법칙을 교란하고 파괴하고 짓밟는다. 그렇기에, 사탄에게서 온 것들은 사탄의 본질과 너무도 어울리며, 사탄의 사악한 속셈과 위선, 위장, 영원불변한 야심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다. 패괴된 인류가 사탄에게서 비롯된 그 철학과 이론을 분별하든 못 하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것을 떠받들고 퍼뜨리고 추종하든, 패괴된 인류가 그것을 얼마나 오래 추앙하고 숭배하고 전해 왔든, 그것이 진리로 바뀌지는 않는다. 그것의 본질과 근원, 원천은 사탄이고, 하나님과 진리에 적대하는 사탄이기에 영원히 진리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영원히 부정적인 사물이다. 진리와 대조해 보지 않았을 때, 그것은 선하고 긍정적인 것을 사칭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리로 폭로하고 해부하면, 그것은 완벽하지 않으며 굳게 설 수 없고, 아주 빨리 정죄되고 버려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는 하나님이 지은 인류의 정상 인성의 필요에 부합하지만, 사탄이 사람에게 주입한 것들은 인류의 정상 인성의 필요에 위배된다. 그것은 정상적인 사람을 비정상으로 만들며, 과격하고, 편협하고, 교만하고, 어리석고, 사악하고, 강퍅하고, 흉악하게 만든다. 심지어는 안하무인이 되는데, 그게 심각해지면 정신이 이상해져서 자기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며, 정상적인 사람, 평범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고, 반드시 초인이나 비범한 사람, 고급 인간이 되려고 한다. 그것은 사람의 인성과 본능을 왜곡한 것이다. 진리는 사람이 더 본능적으로 정상 인성의 규율과 법칙, 그리고 하나님이 제정한 모든 규율대로 생존하고 살아가게 한다. 하지만 그 이른바 속어나 사람을 미혹하는 가르침들은 사람의 본능에 위배되며, 하나님이 예정하고 제정한 법칙에서 벗어나게 한다. 심지어는 사람이 정상 인성의 궤도에서 벗어나 극단적인 일, 정상인이 행해서도, 상상해서도 안 되는 일을 하게 만든다. 이 사탄의 법칙들은 사람의 인성을 왜곡할 뿐만 아니라, 사람이 정상 인성과 정상 인성의 본능을 상실하게 한다. 예를 들어, 사탄의 법칙은 “운명은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 “행복은 자신의 두 손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의 주재와 사람의 본능에 위배된다. 사람의 몸과 본능이 한계에 이르렀을 때, 혹은 운명이 중요한 순간에 다다랐을 때, 이 사탄의 법칙들에 기대면 버텨 낼 수가 없다. 많은 사람이 압박감을 느끼며 한계를 뛰어넘고, 정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뛰어넘는다. 결국 어떤 사람은 정신이 분열된다. 지금 대입 시험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 무거운 압박감을 견디고 있다. 사람의 신체적 상황과 심리적 자질은 모두 다르다. 어떤 사람은 이 제도에 적응할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적응하지 못해서 끝내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고 정신이 분열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투신자살을 선택하기도 하는 등 온갖 상황이 발생한다. 이러한 결과는 어떻게 초래되었겠느냐? 사탄이 사람을 미혹하여 명예와 이익을 좇게 하고, 사람을 망가뜨린 것이다. 사람이 만약 하나님이 제정한 규율을 따라 순리에 따라 살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예정해 놓은 방식으로 살면서 하나님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다면, 정신 이상이 생기겠느냐? 그렇게 큰 압박감을 받겠느냐?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사역은 사람이 진리를 깨달아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게 한다. 그럼 사람은 압박감 없이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고, 오직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된다. 인류는 하나님이 지은 존재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의 본능과 사람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제정한 그 규율들로 사람을 인도하고,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공급하지만, 사탄은 그러지 못한다. 사탄은 사람에게 이 모든 것을 위배하게 하고, 초인이나 능력자가 되라고 한다. 이는 사람을 우롱하는 것 아니겠느냐? 사실, 사람은 모두 정상적이고 평범한 존재이다. 그런데 어떻게 초인이나 비범한 사람이 될 수 있겠느냐? 이는 사람을 능욕하는 것 아니겠느냐? 네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네 야심과 욕망이 아무리 커도 초인이나 비범한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네가 스스로를 아무리 엉망으로 망가뜨려도 초인이나 비범한 사람이 되지는 못한다. 사람이 평생 어떤 직업을 가질지는 하나님이 예정해 놓은 일이다. 네가 하나님이 제정한 법칙과 규율대로 생존하지 않고, 사람을 미혹하는 사탄의 허튼소리를 택해 초인이나 비범한 사람이 되기를 추구한다면 시달림을 받아야 하고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사탄의 능욕과 유린, 패괴를 받아들이는 쪽을 선택한다면 네가 감내해야 할 것은 자업자득이고, 그래도 싸다. 그것은 네가 원한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대입 시험을 볼 때 한 번 떨어지면 두 번, 세 번 더 보지만 계속 합격하지 못해서 미쳐 버리고 만다. 이는 자기가 자초한 일 아니겠느냐? 너는 왜 대입 시험을 보려고 하느냐? 사람들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가문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아니냐? 사람들 앞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가문의 이름을 빛내겠다는 이 두 가지 목표를 버려라. 이런 것을 추구하지 말고 올바른 목표로 바꾸면 압박감이 사라지지 않겠느냐? 네가 사탄의 패괴를 받아들이고 그 사상과 관점을 전부 수용한다면, 네 몸은 갖가지 고통에 시달릴 것이다. 그래도 싸다는 건 이럴 때 하는 말이다! 이 결과는 너 스스로 선택한 것이고 너 스스로 초래한 것이지, 하나님이 예정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네게 그렇게 살라고 한 적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명확하게 밝혀 주었는데 네가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하지 않은 것이다. 사람의 몸과 의지력, 심리적 자질이 감내할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사람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의식하지도 못한 채 운명이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운명을 이기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는데, 어떻게 운명을 손에 쥘 수 있겠느냐? 사탄은 이렇듯 갖가지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과 사설, 궤변으로 사람을 패괴시킨다. 사람은 자각하지 못한 채 그것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으니 우리도 시대에 발맞춰 그 긍정적 에너지를 전부 받아들여야 해.’ 이는 전부 마귀적인 말이다. 이방의 마귀 세계에 어떤 긍정적 에너지가 있겠느냐? 전부 부정적인 에너지이자 악성 종양, 시한폭탄이다. 네가 그런 것을 받아들인다면 그에 따른 안 좋은 결과를 감당해야 한다. 사탄에게 시달림 받고 해를 입어야 하는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이런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네가 사탄을 따르는데 좋은 결과가 있을 리 있겠느냐? 사탄은 너를 해치고 네게 독소를 주입할 뿐이다. 하나님은 너를 구하고, 사탄은 너를 해친다. 하나님은 네 병을 치료하고, 사탄은 네게 독을 주입해 병들게 한다. 네가 사탄의 독소를 많이 받아들일수록 진리를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이런 것이다. ‘진리란 무엇인가’, 이 주제는 여기까지 교제하도록 하겠다. 이제 다른 주제를 교제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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