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조 두각을 드러내고 자신의 이익과 야심을 충족하기 위해 본분을 이행할 뿐, 하나님 집의 이익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심지어는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넘기며, 하나님 집의 이익을 대가로 개인의 명예를 얻는다(1) 제 1 부
참고 무엇이 진리인가
오늘은 지난번 내용을 이어서 교제하도록 하겠다. 지난번에는 어떤 주제에 관해 교제했느냐? (와신상담은 진리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예전에는 그것이 진리라고 여겼느냐? 여태까지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진리라고, 적어도 그럭저럭 긍정적이고 고무적인 것, 사람들의 열정을 고취시키는 것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부분에서 보자면 사람은 그것을 그래도 진리나 긍정적인 사물에 가까운 것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와신상담’이라는 단어를 긍정적인 축에 속하는 말이라고, 적어도 부정적인 단어가 아니라 긍정적인 단어로, 사람의 삶과 처신에 도움이 된다고 여겼다. 하지만 교제를 통해 그 말에는 매우 큰 문제가 있으며, 생각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너희는 이 단어와 비슷하고 관련 있으며 동일한 역할을 하는 단어, 그러니까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그럭저럭 긍정적이고 좋다고 생각하는 단어를 찾아 분석해 본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는 말을 이 상황에 적용하면 적절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단어는 진리를 구하고 실행하는 측면에 있어 실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번에 우리는 ‘와신상담’에 관해 교제하였다. 그럼 ‘와신상담’과 같은 유형의 다른 단어는 또 어떤 것들이 있느냐? 대체로 비슷한 의미를 갖거나 비슷한 역할을 하는 다른 단어는 또 어떤 것들이 있느냐? 내 방식으로 ‘와신상담’과 비슷한 유형의 단어를 분석해 보는 것도 좋다. 모두 함께 교제한 후 새로운 인식을 얻어 그것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점을 꿰뚫어 본다면 그런 말을 버릴 수 있다. 그러면 앞으로 진리를 실행하고 추구하는 길에서 완전히 하나님 말씀에 근거할 수 있다.
이제 지난 두 차례의 주제를 이어서 교제해 보자. 어떤 주제였느냐? (‘무엇이 진리인가’ 하는 주제였습니다.) 그렇다. ‘무엇이 진리인가’ 하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진리냐? (진리란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준칙입니다.) 너희는 이론과 정의 면에서 이 말을 기억한 것 같구나. 그럼 두 번의 교제를 마친 지금, 너희 내면 깊은 곳 진리에 대한 정의와 인식, 이해는 예전과 달라졌느냐? (달라졌습니다.) 무엇이 달라졌느냐? 단기간에는 실제 체험에 대한 인식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감성적인 인식은 있을 것이다. 너희 자신이 체험하고 인식하고 이해한 대로 말해 보아라. (예전에도 일이 닥치면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에 근거하여 실행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항상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평소에 혈기를 쉽게 드러내는 것처럼 말이지요. 하나님 말씀을 보고 혈기를 드러내는 게 옳지 않다는 걸 깨달았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도 알았지만, 그래도 계속 혈기를 드러냈습니다. 늘 그 근원을 찾지 못했지요. 그러다가 지난번에 하나님의 교제를 듣고 나서야 알게 됐습니다. 사람이 패괴를 드러내는 건 대부분 사탄의 사상에 지배되어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제가 혈기를 드러내는 건 제 내면에 “남이 나를 범하지 않으면 나도 남을 범하지 않으며, 만약 남이 나를 범하면 나도 반드시 남을 범한다.”라는 사탄의 논리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행위는 정당방위라고 여겼지요. 이렇듯 사탄의 사상과 관점에 영향받아 진리를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사탄의 그 논리들은 언뜻 옳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이 전달하는 뜻은 하나님 말씀이 요구한 것에 위배되며, 그릇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진리이고,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해야 완전히 정확합니다.) 훌륭하다. 누가 더 보충해 보아라. (제가 좀 더 보충해 보겠습니다. 저는 예전에도 일이 닥치면 진리를 구하고 실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는 좀 모호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교제를 듣고 나서 진리가 무척 실제적이며, 삶의 다양한 면면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하나님께서 예로 들어 주신 것처럼 중국인이 서양 국가에 가서 커피를 마시게 된 것은 행동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사상, 관점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진리와 관계가 있고요. 이 밖에도 하나님께서 사람이 옳다고 여기는 속어나 성어들을 분석해 주신 것을 통해 언뜻 옳은 것처럼 보이는 제 행위와 행동 방식들, 그리고 그 행위의 배후에 있는 속셈, 사상, 관점이 과연 무엇인지, 이러한 것들에 기대 살아가면 무엇을 살아 내게 되는지 성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진리를 구하고 실행해야 할지가 그렇게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된 느낌입니다.) 두 번의 교제를 통해 많은 사람이 진리의 정의나 진리와 관련된 주제에 기본적인 인식이 생긴 것 같구나. 그리하여 마음속 깊이 자신의 행위가 정말 진리와 관계가 있는지, 자기가 하나님을 믿으며 지키는 것, 듣는 것 중 과연 어떤 것이 진리이고 어떤 것이 진리가 아닌지,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들이 정말 진리가 맞는지, 진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등을 돌아보기 시작한 것 같다. 돌아본 후에 사람은 과연 무엇이 진리인지, 어떤 것들이 진리이고 어떤 것들이 진리가 아닌지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설교를 듣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면서 어느 정도 수확을 거뒀고,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하나님 말씀은 진리가 분명하다는 것, 하나님의 요구가 바로 진리이고,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 전부 진리라는 것을 말이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마음으로 이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지만, 실생활 속에서는 여전히 진리와 무관한 말, 진리에 어긋나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자주 하곤 한다. 혹자는 심지어 사람들이 옳고 좋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진리로 대한다. 특히 사탄에게서 비롯된, 언뜻 옳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궤변과 마귀적인 말들을 분별하지 못해 마음에 받아들인 것으로도 모자라 그것들을 긍정적인 사물로 여긴다. 예를 들어, “이에는 이, 눈에는 눈.”, “그 사람의 방법으로 그 사람을 다스린다.”, “명철보신이 살 길이다.”, “남이 나를 범하지 않으면 나도 남을 범하지 않는다.” 등 수많은 사탄의 철학을 진리로 여겨 지키고,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으면서 마음속으로 아주 의기양양해한다. 그러다가 하나님 말씀을 읽고 나서야 사탄에게서 비롯된 그런 것들이 사실 진리가 아니며, 언뜻 옳은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사람을 미혹하는 사설이자 궤변임을 인식하게 된다. 그것들은 다 어디에서 왔느냐? 일부는 학교 교육에서 왔고 교과서에서 배운 것이다. 또 일부는 가정에서 교육받은 것이고, 일부는 사회에서 영향받은 것이다. 요컨대, 전부 전통문화에서 비롯되었으며, 사탄의 교육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것들이 진리와 관계가 있겠느냐? 전혀 관계가 없다. 하지만 사람은 그것을 분별하지 못한 채 진리로 여기니, 문제가 너무 심각하지 않으냐? 사탄의 이러한 것들을 진리로 여기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사람이 그것을 지키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릴 수 있겠느냐? 그것을 지키면 정상 인성을 살아 낼 수 있겠느냐? 그것을 지키면 양심과 이성대로 살아갈 수 있겠느냐? 양심과 이성의 기준에 이를 수 있겠느냐? 사람이 그것을 지키면 하나님에게 인정받을 수 있겠느냐? 전부 불가능하다. 불가능한데, 사람이 지키는 그것들이 과연 진리겠느냐? 그것들이 사람의 생명이 될 수 있겠느냐? 사람은 자신이 옳고 좋다고 여기는 처세 철학과 생존의 길, 생존 법칙, 심지어 전통문화 등 부정적인 것들을 진리로 여겨 지키는데, 그로 인해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인류는 그러한 것들을 몇천 년 동안 지켜 왔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변화가 생겼느냐? 인류의 현재 모습에 조금이라도 개선된 바가 있느냐? 패괴된 인류는 여전히 점점 더 사악해지고 점점 더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지 않느냐? 하나님은 각 단계 사역을 통해 적잖은 진리를 선포했고, 사람은 모두 그러한 진리에 권병과 능력이 있음을 보았다. 그런데 인류는 왜 하나님을 부정하고 대적하는 것이냐? 왜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냐? 이는 인류가 사탄에게 너무 심하게 패괴되었음을 충분히 보여 준다. 패괴된 인류는 사탄 성품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할 뿐,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문제의 근원은 인류가 사탄의 철학과 사탄의 지식을 너무 많이 받아들인 데 있다. 사람의 영혼 깊은 곳에 사탄의 각종 사상과 관점이 침투하여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성품이 생겼다. 하나님을 믿는 많은 사람에게서 이런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람은 하나님 말씀에 권병과 능력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진리를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는 한편, 입으로는 “하나님 말씀은 진리입니다. 진리는 지고지상하지요. 또 진리는 저희 마음속에 있습니다. 저희는 진리 추구를 생존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라고 인정하지만, 실생활 속에서는 여전히 사탄의 명언과 사탄의 철학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하나님 말씀과 진리를 한쪽에 치워 둔 채 사람의 그 신학 지식과 영적인 도리 같은 것들을 진리로 여겨 지키고 실행한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대다수 사람의 실제 상태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너희가 계속 이대로 지키며 뿌리 깊게 박힌 사탄의 전통문화들을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해부하거나 인식하지 못하고, 그것을 근본적으로 분별하거나 꿰뚫어 보거나 버리지도 못한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한 가지는 분명하다. 바로 하나님을 오랜 세월 믿어도 무엇이 진리인지,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모두가 입으로는 영적인 도리와 신학 이론, 아주 듣기 좋은 말, 진리에 부합하는 도리를 언급하지만, 사실 행동하고 살아 내는 모습은 오히려 영락없는,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이겠느냐?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님에게 정죄받고 저주받게 된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바리새인으로, 영원히 하나님에게 인정받을 수 없다.
자녀 교육 문제를 예로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은 아이가 말을 듣지 않고 할 일을 하지 않으면 “옛사람들 말이 맞습니다. 자식을 키우기만 하고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잘못이에요.”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이 일을 대하지 않는다. 그의 마음속에는 사람의 말만 있을 뿐, 하나님 말씀은 없다. 그러니 그에게 진리 실제가 있겠느냐? 없다. 그는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조금 이해했으니, 진리로 자녀를 가르침으로써 아버지가 된 책임을 다해야 하지만, 그렇게 실행하지 않았다. 자녀가 잘못된 길에 들어서는 것을 보면서 탄식하듯 “자식을 키우기만 하고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잘못이다.”라고 말했을 뿐이다. 이는 어떤 말이냐? 누구의 명언이냐? (사탄의 명언입니다.) 하나님이 이 말씀을 한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이 말은 어디에서 왔느냐? (사탄에게서 왔습니다.) 사탄에게서 왔고, 이 세상에서 왔다. 사람은 그렇게 진리를 ‘추구하고’, 그렇게 진리를 ‘사랑하며’, 그렇게 진리를 ‘높이는데’ 왜 이런 일이 닥쳤을 때 사탄에게 속하는 말을 하는 것이냐? 그러면서 당당하게 “보십시오. 제가 진리와 하나님을 얼마나 경외하고 경모하면 입을 열자마자 ‘자식을 키우기만 하고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잘못이다’라는 말이 나왔겠습니까. 이 얼마나 위대한 진리입니까! 만약 제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라고 하는데, 이는 기만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 말이 진리겠느냐? (아닙니다.) ‘자식을 키우기만 하고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잘못이다’는 어떤 말이냐? 어디가 잘못되었느냐? 이 말의 의미는 자녀가 말을 듣지 않거나 철이 들지 않은 것은 아버지의 책임이고, 부모가 제대로 교육하지 않은 데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정말 그러하냐?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부모는 착실하게 처신하는데도 아들은 양아치가 되고 딸은 창녀가 된다. 그럼 화가 난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자식을 키우기만 하고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잘못이라고 했어. 다 내가 그를 버릇없게 만들었어!” 이 말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어디가 잘못되었느냐? 만약 네가 이 말의 잘못된 점을 깨닫는다면 진리를 깨달았다는 의미이고,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만약 네가 이 안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이 일에 대해 분명히 말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너희는 진리에 대한 해석과 정의를 들었으니, 이 말을 듣고 ‘이 말은 옳지 않아. 이 말은 세상적인 표현이라고.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니 그렇게 말하면 안 돼.’라고 느낄 수 있다. 이는 네가 말하는 방식만 바꿔서 이 일에 대해 얘기했을 뿐, 진리를 이해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너는 “자식을 키우기만 하고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잘못이다.”라는 말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모른다. 이런 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말해야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겠느냐? 먼저 이런 일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옳은지 말해 보자. 하나님 말씀은 뭐라고 했느냐? 하나님 말씀에 이 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내용이 있느냐? 하나님은 수많은 진리를 선포하여 사람이 생명으로 삼게 하였다. 그런데 자녀를 교육할 때는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치면 안 되는 것이냐? 하나님 말씀은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한다. 어른이든 아이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진리이고, 사람의 생명이 될 수 있으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사람을 이끌어 인생의 바른길에 오르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 일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그럼 “자식을 키우기만 하고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잘못이다.”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겠느냐? (사람이 걷는 길은 그의 본성 본질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 밖에, 그가 이번 생에서 어떤 징벌을 받을지, 혹은 어떤 축복을 받을지는 그의 전생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식이 바른길을 걷지 않는 것은 부모가 제대로 교육하지 않아서이다.”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는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신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네 말대로라면 자식이 바른길을 걷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주재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냐? 하나님은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바른길을 걷게 한다. 하지만 사람은 사탄 본성이 있어 모두 자기만의 선택이 있으며 자기가 좋아하는 길을 선택할 뿐,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하기를 원치 않는다. 만약 네 말이 진리에 부합한다면, 이 일을 분명히 해석하여 사람들을 승복시켜야 할 것이다.
이제 “자식을 키우기만 하고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잘못이다.”라는 말에 관해 교제해 보도록 하자. 먼저 명확히 해야 할 점이 있다. ‘자녀가 바른길을 걷지 않는 것은 부모와 일정 부분 상관이 있다’는 말이 틀렸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이든, 그가 걷는 길은 그가 어떤 사람인가에 의해 결정된다. 이는 분명한 사실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길을 걷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다. 그가 어떤 길을 걷고 어떤 사람이 되든 그것은 그 자신의 일이며, 예정된 것, 타고난 것으로, 본성과 관계가 있다. 그럼 부모의 교육이 어떤 역할을 하겠느냐? 사람의 본성에 영향을 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부모의 교육은 사람의 본성에 영향을 줄 수 없고, 사람이 어떤 길을 걷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도 없다. 부모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오직 무엇뿐이냐? 일상생활 속 자녀의 단순한 행위들, 깊이가 얕은 사상과 처신의 도리들은 부모와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 자녀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부모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 책임은 바로 자녀가 바른길을 걷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부모는 자녀가 열심히 공부하고, 성인이 된 후 두각을 드러내며, 나쁜 일을 하지 않고, 나쁜 사람이 되지 않도록 가르치는 한편, 자식의 행위를 규범화하여 연장자를 보면 인사하는 등 예의를 알려 줘야 한다. 이렇게 행위와 관련된 것들을 가르치는 것이 부모가 다해야 할 책임이다. 자녀의 생활을 돌보고, 자녀에게 기본적인 처신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 부모가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이 정도다. 하지만 사람의 성격은 부모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부모는 성격이 굼떠서 무슨 일을 하든 느릿느릿하지만, 자식의 성격은 매우 급해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그는 열네다섯 살이 되면 사회에 나가 분투하며, 어떤 일이든 자기가 알아서 해서 부모를 필요로 하지 않는 등 매우 독립적이다. 이것이 부모가 가르친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사람의 성격과 성품, 나아가 그의 본질과 관계되는 것, 추후에 그가 선택할 길 등은 부모와 아무 관계도 없다는 것이다. 혹자는 “그게 어떻게 아무 관계도 없습니까? 어떤 집은 학자 가문이나 세가입니다. 예를 들어 한 세대가 그림을 배우면 다음 세대도 그림을 배우고, 그다음 세대도 그림을 공부하지요. 이는 ‘자식을 키우기만 하고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잘못이다’라는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합니다.”라고 반박하는데, 이 말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이 사례로 이 문제를 설명하는 것은 옳지도, 정확하지도 않다. 그것은 전혀 다른 두 가지의 일이기 때문이다. 세가가 영향을 주는 것은 한 가지 측면의 기술뿐이다. 그러한 가정 환경에서는 모두 똑같은 것을 배울지도 모른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 역시 똑같은 것을 선택한 것 같지만, 근원을 따져보면 그것은 하나님이 예정한 것이다. 그가 그런 가정에서 태어난 것 역시 하나님이 주재한 일 아니겠느냐? 부모에게는 자식을 성인으로 키울 책임이 있을 뿐이다. 자식은 외적 행위나 생활 습관 등에서 부모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받지만, 성인이 된 후 평생 추구하는 목표와 운명은 부모와 아무 관계가 없다. 어떤 부모는 평범하고 성실한 농민인데 자녀가 관직에 오르기도 하고, 큰 사업을 하기도 한다. 어떤 부모는 각각 변호사와 의사로 능력이 뛰어난데 자녀는 변변치 않아서 아르바이트조차 구하지 못한다. 이것이 부모가 교육한 것이겠느냐? 아버지가 변호사인데 자식을 안 가르치고, 자식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겠느냐? 절대 그럴 리 없다. 어떤 아버지도 “저는 이만큼 성공했지만, 제 아들은 저처럼 성공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너무 피곤한 일이거든요. 그냥 소나 키우면서 살면 좋겠어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분명히 아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앞으로 자신 같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을 것이다. 가르친 후에는 어떻게 됐겠느냐? 자식은 여전히 그대로고, 그의 운명 역시 그대로다. 누구도 바꿀 수 없다. 여기에서 어떤 사실을 알 수 있느냐? 자식이 걸어가는 길은 부모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부모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자식에게도 하나님을 믿으라고 가르치지만, 아무리 말해도 자식이 믿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 또 어떤 부모는 하나님을 믿지 않지만 자식은 믿는다. 그 자녀는 하나님을 믿은 후로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며 진리를 받아들여 하나님에게 인정받고 운명이 바뀌었다. 이것이 부모가 교육한 결과겠느냐? 절대 그렇지 않다. 이는 하나님이 예정하고 택한 바와 관계가 있을 뿐이다. “자식을 키우기만 하고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잘못이다.”라는 말에는 문제가 있다. 부모에게 자녀를 가르칠 책임이 있다고는 하나 자녀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부모가 아니라 사람의 본성이다. 교육으로 사람의 본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절대 해결할 수 없다. 사람이 평생 어떤 길을 걷느냐 하는 것은 부모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정한 바이다. ‘사람의 운명은 하늘이 정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인류가 체험을 통해 종합해 낸 것이다. 상대가 미성년자일 때, 너는 그가 어떤 길을 걸을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성인이 되면 사상이 생기고, 문제를 사고하게 되어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일을 할지 선택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고위 관리가 되겠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변호사가 되겠다고 하며, 어떤 사람은 작가가 되겠다고 하는 등 각자 다른 선택을 하고, 자신만의 생각을 갖는다. 누구도 “부모님이 가르쳐 줄 때까지 기다릴 겁니다. 부모님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될 거예요.”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런 바보는 없다. 성인이 되면 사상이 활성화되고, 조금씩 성숙해지며, 눈앞에 놓인 길과 목표가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럼 그가 어떤 부류이고 어떤 집단에 속하는지가 조금씩 수면 위로 드러나고 나타난다. 이때, 모든 사람의 성격이 점차 명확해지고, 성품도 점차 분명해지며, 그가 추구하는 길이나 인생 방향, 그가 속하는 집단 역시 점차 확실해진다. 이는 다 무엇에 근거한 것이겠느냐? 근원을 따져보면 하나님이 예정한 것이지, 부모와는 상관이 없다. 이제 이 부분이 확실히 이해가 되느냐? 그럼 부모와 관계있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생김새, 키, 유전자, 유전병 등이 부모와 약간 관계가 있다. 어째서 ‘약간’이라고 하겠느냐? 100% 그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가족은 모든 세대가 같은 병에 걸렸지만, 그의 세대에 이르러 그 병이 사라졌다. 이는 어찌 된 일이겠느냐? 혹자는 “그건 그 사람의 성격이 좋아서입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사람의 생각일 뿐이다.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겠느냐?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입니다.) 그렇다. 그럼 ‘자식을 키우기만 하고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잘못이다’라는 말이 정말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이제 분명해졌을 것이다. 분별하지 못하면 안 된다. 진리가 없으면 어떤 일도 밝히 알 수 없다.
일상생활 속에서, 사탄에게서 비롯된 이 언뜻 옳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관점들은 모두의 머릿속에 적잖이 존재한다. 내면에 도사리고 쌓여 있다가 일이 닥치면 표출하는 것이다. 혹자는 “사내대장부는 여자와 싸우지 않는 법입니다. 제가 얼마나 고상한지 보십시오. 저는 사내대장부고, 당신은 연약하고 속 좁은 여자이니, 저는 당신과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데, 그는 이 말을 무엇으로 여기는 것이냐? (진리로 여깁니다.) 진리로 여기고 진리 실행의 원칙으로 여긴다. 또 혹자는 정인군자처럼 준수하게 생겼지만, 하는 짓은 영 수상한 데다가 늘 위장하며 남들과 함께할 때 무척 간사하고 음흉하게 굴어 많은 사람이 간파하지 못하는 이를 보면서 “저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정직하고 선량하며 남에게 우호적인 사람, 남과 척을 지지 않는 사람이 되려는 생각뿐입니다. ‘진짜 소인배가 될지언정 거짓 군자가 되지는 마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비슷한 의미를 지닌 하나님 말씀도 있고요.”라고 말하는데, 이 말이 어떠하냐? ‘진짜 소인배가 될지언정 거짓 군자가 되지는 마라’는 말을 보아라. 사람에게 일이 닥치면 내면에 있던 속담이며 명언, 성어들이 튀어나오고,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데, 거기에서 진리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런데도 마지막에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를 깨우쳐 주셨군요.”라고 한다. ‘진짜 소인배가 될지언정 거짓 군자가 되지는 마라’는 말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옳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안다. 그런데 어디가 옳지 않으냐? 거짓 군자의 잘못은 ‘거짓’에 있다. 사람은 누구나 거짓으로 꾸며 낸 군자는 되기 싫어하고 진짜 소인배가 되기를 원한다. 사람이 진짜 소인배에 동조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그는 진실하기에 소인배라고 할지라도 모두에게 인정을 받는다. 그럼 너희는 무엇이 되고 싶으냐? 진짜 소인배가 되고 싶으냐, 아니면 거짓 군자가 되고 싶으냐? (모두 원치 않습니다.) 어째서 이 두 부류가 되고 싶지 않으냐? (둘 다 진리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거짓 군자가 되라거나 진짜 소인배가 되라고 한 적이 없다. 관련된 근거를 찾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했다. 그럼 정직한 사람과 진짜 소인배는 어떤 차이가 있겠느냐? ‘소인배’라는 단어는 부정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무척 진실한데, 어째서 좋지 않으냐?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 진짜 소인배와 거짓 군자 두 부류 모두 긍정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근거는 무엇이냐? 소인배란 무엇이냐? 통상적으로 소인배는 어떤 단어와 연결되느냐? (비열함과 연결됩니다.) 그렇다. 하나님 말씀은 ‘비열함’을 어떻게 형용하고 정의하느냐? 하나님 말씀은 ‘비열함’을 긍정적인 단어로 정의하느냐, 부정적인 단어로 정의하느냐? (부정적인 단어로 정의합니다.) 그것은 부정적인 단어로, 하나님에게 정죄되는 말이다. 일 처리와 관점이 비열한 사람은 모두 소인배다. 일반적으로 소인배의 성품과 본질의 또 다른 측면의 정의는 무엇이겠느냐? 이기적인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부류는 이기적이고 비열하다. 설령 그가 드러내는 것이 진실한 것, 진짜 성품일지라도 그는 역시 소인배다. 거짓 군자는 간사하고 사악해서 늘 스스로를 위장하고, 남들에게 허상을 보여 주며, 화려하고 우호적인 모습만을 보여 준다. 또 자신의 진짜 성품과 생각, 관점을 꼭꼭 숨겨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고, 그를 파악하지 못하게 한다. 이런 사람은 어떤 성품을 지닌 것이냐? (간사하고 사악한 성품을 지닌 것입니다.) 그야말로 사악한 무리이다. 그러니 군자든 소인배든 이 두 부류는 다 좋은 사람이 아니다. 하나는 내면이 나쁘고, 다른 하나는 외면이 나쁘나 사실 그 성품은 동일하다. 둘 다 더없이 사악하고 이기적이고 간사하다. 이렇게 사악하고 간사한 두 부류가 정직한 사람이 되고자 추구하는 자들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러므로 네가 이 두 부류 중 어떤 부류가 되든 하나님이 요구하는 좋은 사람, 정직한 사람은 아니다. 너는 하나님이 혐오하는 사람일 뿐, 하나님이 되라고 요구한 사람이 아니다. 그럼 말해 보아라. ‘진짜 소인배가 될지언정 거짓 군자가 되지는 마라’는 말이 진리겠느냐? (아닙니다.) 앞에서 말한 내용으로 볼 때, 이 말은 진리가 아니다. 많은 사람이 거짓 군자를 공격하고 정죄함으로써 좋은 사람 행세를 하며 ‘진짜 소인배가 될지언정 거짓 군자가 되지는 않겠다’고 말한다. 그 소인배의 비열함이 꽤나 정의롭고 진실한 양, 정의의 힘이라도 지닌 양 말이다. 소인배 주제에 무슨 정의를 좇는단 말이냐? 너는 정죄되어 마땅한 사람이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이런 단어, 이런 것들이 적잖이 존재한다. 또 많은 사람이 이런 관점을 지킨다. 전통문화든, 민간의 속담이든, 혹은 집안의 가훈이나 가규든, 한 나라의 법률 제도든, 사람은 언제나 사회에서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고 널리 퍼진 것들, 나아가 사회에서, 인류 가운데서 오랫동안 긍정적인 사물로 여겨져 전파되고 제창되던 것들을 다음 세대, 또 그다음 세대에게 가르친다. 어떤 말들은 사람이 마음 깊은 곳에서 실행의 원칙이나 생존의 원칙으로 삼는다. 또 어떤 말들은 사람이 그 관점에 동조만 할 뿐 그렇게 실행하려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네가 그렇게 실행하려고 하든 그러지 않든, 네 내면 깊은 곳은 이런 말들을 처신의 실행 원칙으로 삼는다. 결국 이런 것들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데 큰 방해가 되며, 백해무익하다. 현대인이 자주 언급하는 말을 예로 들어 보겠다. “생명은 고귀하고 사랑은 더욱 귀하나 자유를 위해서라면 둘 다 버리리.”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자유를 추구하고 봉건 전통 제도에서 벗어나려는 동서양의 지사들에게 제창되고 추앙받는 명언이다. 여기에서 사람이 추구하는 중점은 무엇이냐? 생명이냐? 아니면 사랑이냐? (둘 다 아닙니다. 자유입니다.) 그렇다. 자유다. 그럼 이 말이 진리겠느냐? 이 말의 뜻은 자유를 추구하기 위해 생명도, 사랑도, 나아가 사랑하는 사람까지도 버리고 아름다운 자유를 향해 달려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 자유를 어떻게 보았느냐? 그들이 생각하는 이 자유를 어떻게 해석했느냐? 전통을 부수는 것, 낡은 관습을 부수는 것, 봉건 군주제를 부수는 것을 자유라고 해석했다. 또 있느냐? (정권에 통제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권력이나 정치에 통제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이러한 자유이다. 그럼 그들이 말하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말하는 자유와 같은 점이 있느냐?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 중에도 이런 관점을 지닌 자가 있을지 모른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정말 좋아. 자유롭고 마음이 편안하지. 관습이니 하는 것들을 따지지 않아도 되고, 전통문화의 형식을 취하지 않아도 되잖아. 관혼상제 같은 것도 신경 쓸 필요가 없고. 모든 풍습을 내려놓을 수 있으니 정말 자유로워!’라고 말이다. 정말 이렇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도대체 자유란 무엇이냐? 너희는 지금 자유로우냐? (어느 정도 그렇습니다.) 그럼 그 어느 정도의 자유는 어떻게 얻은 것이냐? 그 자유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진리를 이해하고, 사탄의 흑암 권세를 깨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탄의 흑암 권세를 깨뜨리면 어느 정도 해방감을 느끼고 자유롭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내가 해부해 주지 않는다면, 너희는 스스로가 정말 자유롭다고 생각할 것인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진정한 자유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육체의 공간적, 물질적 자유와 해방이 아니다. 진리를 이해한 후 마음속으로 각종 사람과 일, 사물, 세상에 대해 올바른 관점을 갖고, 올바른 인생 방향과 목표를 추구하여 사탄의 권세와 사상, 관점에 속박되지 않을 때 마음이 자유로워지는데, 이것이 바로 진정한 자유이다.
어떤 이방인 젊은이는 자기가 자유를 좋아한다고, 한 마리의 새처럼 구속받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삶을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집안의 지긋지긋한 규칙이나 가르침들을 몹시 경멸했다. 그는 수시로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나는 아주 전통적인 가정에서 태어났어. 가족도 많고 집안 규율이며 전통도 무척 많아. 심지어 가족 사당도 있다니까? 거기 가 보면 세대마다 위패가 모셔져 있어. 하지만 나는 그 전통들을 깨부수고 집안의 규율이나 가풍, 세속의 영향에서 벗어났지. 어때? 나라는 사람은 전통과는 거리가 멀어.” 그러자 친구는 “그래 보여. 넌 전통과는 아주 거리가 멀어 보여.”라고 말했다. 그것을 어디에서 알 수 있겠느냐? 그는 혀와 코에 피어싱을 하고, 귀도 4, 5군데나 뚫고, 배꼽에도 피어싱을 했으며, 팔뚝에는 뱀 문신을 새겼다. 뱀은 중국인들이 불길하게 생각하는 동물인데 하필 그 동물을 새겨 넣어 보는 사람이 움찔할 정도였다. 이는 전통과 거리가 먼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전통과 무척 거리가 멀다. 또한, 그가 하는 말에는 전위적인 분위기가 드러났다. 누구든 그를 보고 “저 친구, 대단하네! 전통과는 거리가 멀어. 아주!”라고 말했다. 그는 전통과 거리가 먼 것을 이런 부분에서만 드러내면 안 되겠다고, 더 실질적이고 남들에게 자신이 전통적이지 않다는 걸 더욱 잘 보여 줄 수 있는 상징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보통 피부색이 노란 중국인 여자 친구를 사귀는 것을 보고 그는 굳이 백인 외국 여자 친구를 사귀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더더욱 그가 정말 전통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모든 부분에서 여자 친구를 본받아 여자 친구가 하는 말을 따라 하고,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얼마 후 그의 생일날, 여자 친구는 그에게 커다란 상자에 담긴 신비한 선물을 내밀었고, 그는 신이 나서 포장을 뜯기 시작했다. 포장을 하나하나 벗겨 내자 초록색 모자가 나왔다.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녹색 모자(역자 주: 바람난 아내의 남편을 비유하는 표현)’가 상징하는 바를 알지 않느냐? 이 얼마나 전통적인 상징이냐? 모자를 본 그는 화가 나서 “이게 무슨 선물이야? 누구한테 하는 선물이야?”라고 말했다. 기뻐할 줄 알았던 남자친구가 화를 내자 여자친구는 그 이유를 생각하지 못하고 알 수도 없었다. “얼마나 힘들게 구한 모자인데 그래. 자기한테 잘 어울릴 거야.”라고 말했다. “녹색 모자가 무슨 의미인지 알아?” “그냥 모자잖아? 녹색 모자가 얼마나 예쁜데.” 그녀는 계속 그에게 모자를 써 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리 권해도 쓰지 않았다. 서양인이 ‘녹색 모자’의 의미를 알겠느냐? (모릅니다.) 이 일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고 밝혀야 하지 않겠느냐? 너희는 모두 대답을 하지 못하는데, 왜 이 일에 대해 분명히 말하지 못하는 것이냐?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냐? 너희는 이 남자와 같다. 전통적이지 않고, 전통을 내려놓고 사탄의 전통문화 관념에서 벗어나 진리와 자유를 추구한다는 기치를 들고 있지만, 녹색 모자 하나에 꽂혀 있다. 그 남자는 여자친구가 모자를 쓰라고 해도 계속 거절하다가 결국 이렇게 말했다. “나한테 이 모자를 꼭 씌우려고 하는데, 내가 이 모자를 쓰면 비웃음당한다고!” 이것이 바로 문제의 초점이자 근원이며, 이것이 바로 전통이다. 이 전통은 색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물건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 물건이 사람에게 전달하는 암시와 관점에 있다. 녹색 모자는 도대체 무엇을 암시하느냐? 무엇을 의미하느냐? 사람은 이 색상의 모자에 부정적인 꼬리표를 붙여 놓았다. 그래서 거부하는 것이다. 왜 거부하겠느냐? 왜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느냐? 네 내면에 전통 사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 전통 사상 자체는 진리가 아니라 물질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 사회와 종족이 그것을 은연중에 부정적인 사물로 변질시켰다. 예를 들어, 사람은 하얀색을 거룩함의 상징으로 생각하고, 검은색을 흑암과 사악함의 상징으로 생각하며, 붉은색은 경사스러운 일, 피비린내, 그리고 열정의 상징으로 생각한다. 과거, 중국인들은 결혼할 때 빨간 옷을 입었으며, 혼인을 경사라고 여겼다. 또 서양인들은 결혼할 때 예쁘고 깨끗한 흰색 옷을 입는데, 이는 거룩함을 의미한다. 결혼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서로 다르다. 한쪽은 빨간색으로 대표되고, 한쪽은 흰색으로 대표된다. 이 두 가지는 결혼이라는 일에 대한 축복의 태도를 의미한다. 민족마다, 종족마다 같은 것을 가져다 서로 다른 용도로 사용하며, 그렇게 그들의 문화 배경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문화 배경이 만들어지면 뒤이어 전통문화가 탄생한다. 그렇게 서로 다른 사회, 서로 다른 종족에 서로 다른 풍속이 생겨나고 그 풍속은 그 종족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중국인은 ‘녹색 모자’의 암시에 영향을 받았다. 이것이 그들에게 주입되어 어떤 결과가 빚어졌느냐? 모든 남성이 녹색 모자를 쓸 수 없게 되었고, 여성도 쓰지 않게 되었다. 여성이 녹색 모자를 쓰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사실 이 전통문화는 남성에게만 해당한다. 남성이 녹색 모자를 쓰는 것은 부정적인 상징으로 해석되지만, 여성과는 관계가 없다. 하지만 이 같은 전통문화가 탄생하는 순간, 배경과 무관하게 해당 종족의 모두가 이 사물에 대해 차별을 하게 된다. 이렇게 차별이 생기면 그 대상은 은연중에 아무 잘못 없는 한 사물에서 부정적인 사물로 변질된다. 사실 그 사물은 아무 잘못이 없으며, 긍정과 부정의 구분도 없다. 그것은 그저 하나의 물질, 색깔, 형태를 띤 물건에 불과하다. 하지만 전통문화에 의해 이렇게 해석되고 영향을 받아서 결국 무엇으로 변했느냐? (부정적인 사물로 변했습니다.) 부정적인 사물로 변했다. 부정적인 사물로 변해서 사람들이 그것을 합리적으로 대하거나 쓸 수 없게 되었다. 보아라, 중국의 시장에는 빨간색, 분홍색, 노란색 등 갖가지 색상의 모자가 있지만, 녹색 모자는 없다. 사람들이 이 전통 사상에 속박되고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전통문화 중 한 가지가 사람에게 미친 영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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