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조 진리를 멸시하고 공공연하게 원칙을 위배하며 하나님 집의 안배를 무시한다(1) 제 5 부
또 질문이 있느냐? (하나님, 하나님을 시험하는 게 어떤 건지 좀 더 교제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사람의 어떤 모습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어떻게 할지 모르고, 또 하나님을 인식하지도 알지도 못해 항상 하나님에게 무리한 요구를 갖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아프면 하나님에게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이 병은 제가 고치지 않고 하나님이 낫게 해 주시는지 보겠습니다.’ 결국 한참을 기도해도 하나님이 행사하지 않자 그는 말한다. “하나님이 아무것도 안 해 주시는군. 그럼 내가 약을 먹고 하나님이 말리는지 봐야지. 약 먹을 때 목에 걸리거나 물이 쏟아지면 그건 아마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막는 거겠지.” 이런 게 시험이다. 예를 들어, 너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할 때는,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본분에 어떤 게 필요하고 뭘 해야 하는지 다 같이 교제하고 의논해서 결정한 다음, 해야 할 때 가서 하면 된다. 만약 중간에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것은 하나님의 주재다. 하나님이 만약 너를 막을 생각이라면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행사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 사람이 하나님에게 기도를 한다고 치자. “하나님, 저는 오늘 복음을 전하러 나가는데 제가 외출하는 것이 당신 뜻에 맞습니까? 오늘 복음 대상이 받아들일지 말지, 당신이 과연 어떻게 주재하실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제게 안배해 주시고 이끌어 주시고, 이런 것을 저에게 보여 주십시오.” 너는 이렇게 기도를 마치고는 거기 가만히 앉아서 말한다. “하나님이 왜 말씀을 안 주시지? 아마 내가 본 하나님 말씀이 너무 적어서 보여 줄 수가 없으신가 보군. 그렇다면 얼른 나가자. 만약 나갔다가 넘어지면 그건 아마도 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이고, 만약 나가서 모든 게 순조롭고 하나님이 막지 않으면 그건 아마도 전도하러 가라는 하나님의 뜻일 거야.” 이게 바로 시험이다. 왜 이런 걸 시험이라고 하겠느냐? 하나님 사역은 실제적이다. 사람이 이행해야 할 본분과 본인의 하루 생활을 어떻게 안배할지는, 정상 인성의 생활이라면 원칙을 따르면 된다. 하나님이 과연 어떻게 할지, 하나님이 과연 어떻게 이끌지 테스트할 필요가 없다. 네가 해야 할 일은 가서 하면 될 것이다. ‘하나님이 과연 이 일을 하라고 허락하실까? 이걸 하면 하나님이 날 어떻게 처리하실까? 이 일은 이렇게 하는 게 맞을까?’라면서 더 생각하지 마라. 옳은 일이 분명하다면 너는 하기만 하면 된다.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기도하는 것은 괜찮다. 하나님께 이끌어 달라고, 그날 하루를 이끌어 주고 그날 이행할 본분을 이끌어 달라고 기도해도 괜찮은 것이다. 순종하는 마음, 순종하는 태도를 갖추면 된다. 예를 들어, 손으로 전기를 만지면 감전되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너는 고민한다. ‘괜찮아. 하나님이 지켜 주실 테니 한번 시도해 봐야겠어. 하나님이 지켜 주실 수 있을지, 하나님이 지켜 주시면 어떤 기분일지 한번 보자.’ 그러고는 너는 전기에 손을 대는데, 결국 전기가 통하고야 만다. 이것이 바로 시험이다. 옳지 않은 일이고 해서는 안 될 일임을 뻔히 알면서도 그 일을 해서 하나님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살피는 것이 바로 시험이다. 이런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은 사람이 요염하게 꾸미고 화장을 진하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셔. 그럼 내가 그렇게 꾸민 다음 하나님이 내면에서 꾸짖으시면 어떤 기분일지 볼 거야.” 이렇게 해서 화장을 끝낸 다음 거울을 본다. “세상에, 정말 살아 있는 귀신 같네! 그런데 거울 속 내 모습을 눈뜨고 보기가 좀 민망하고 역겹긴 해도 다른 느낌은 없는걸.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느낌도 없고, 하나님 말씀이 즉시 임해서 날 치고 심판하는 것 같지 않은데.” 이런 행위가 무엇이냐? (시험입니다.) 너는 가끔 본분을 대충 이행할 때가 있고, 속으로 본인이 그렇게 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면 회개하고 뉘우치면 될 일이다. 그런데도 너는 언제나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제가 건성으로 대했습니다. 저를 징계해 주십시오!” 네 양심이 어떤 작용을 하는 것이냐? 양심이 있다면 자기 행위에 책임을 지고 그 행위를 거둬들여야 한다.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가 없다. 그 기도는 시험이 된다. 진지한 일이 웃음거리가 되고 시험이 된다. 하나님은 이를 혐오한다. 사람은 일을 만나서 속으로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구할 때, 또한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요구, 방식에서 자주 시험을 하게 된다. 이런 시험은 주로 무엇을 뜻하느냐? 그건 네가 하나님이 어떻게 하는지 보려 한다거나 하나님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보려 한다는 말이다. 너는 하나님을 테스트하고 싶어 한다. 그것으로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 증명하고, 하나님이 했던 어떤 말씀이 맞는지, 정확한지, 들어맞는지, 하나님이 이룰 수 있는지를 증명하려 한다. 그런 게 다 시험이다. 그런 행동은 너희에게서 자주 나타나지 않느냐? 예를 들어, 어떤 한 가지 일이 있는데 그 일을 하는 게 옳은지,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있다. 여기에는 네가 그 일에서 한 행동이 시험인지 아니면 긍정적 행동인지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다. 한 가지 방법은 네가 겸허하게 진리를 구하는 마음을 갖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일 앞에서 저는 이렇게 처리하고 이렇게 생각하는데 결과적으로 지금 이렇게 되었습니다. 저도 이렇게 하는 게 맞는지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태도는 어떠냐? 이는 진리를 구하는 태도이고, 그 안에는 시험의 요소가 없다. 그런데 이런 경우가 있다. 네가 “이 일은 우리가 다 같이 교제한 다음 결정했습니다.”라고 했는데 누군가 물었다. “이 일을 누가 맡고 있나요? 이 일을 주로 결정한 사람이 누굽니까?” 그러자 너는 대답했다. “우리 다같이 했습니다.” 너의 속셈은 이것이다. ‘만약 저 사람이 일을 원칙에 맞게 처리했다고 하면 내가 한 일이라고 하고, 원칙에 맞지 않다고 하면 이 일을 누가 했고 누가 결정했는지 알려 주지 말아야지. 그러면 책임을 추궁해도 내가 당하지는 않을 거고, 창피를 당해도 나만 당하지는 않을 거야.’ 네가 이런 속셈을 품고 말했다면 그게 바로 시험이다. 이런 사람도 있다. “하나님은 사람이 세속을 따르는 것을 혐오하셔. 인류의 기념일, 축제 같은 걸 혐오하셔.” 그걸 알고 있다면 사정이 허락하는 한 가급적 그런 일을 피하면 된다. 하지만 만약 네가 일부러 어떤 축제 기간에 세속을 따르느라 행사를 챙기고, 그럴 때 이런 속셈을 품는다면 어떻겠느냐?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징계하시는지, 또 나를 상대해 주시는지 볼 거야. 하나님이 날 어떤 태도로 대하시는지, 얼마나 혐오하시는지 한번 보자. 하나님은 혐오하신다고, 또 거룩하신 분이고 사악을 증오하시는 분이라고 하던데, 그분이 과연 어떻게 사악을 증오하시는지, 또 날 어떻게 징계하시는지 봐야지. 만약 하나님이 내가 행사를 치를 때 구토나 설사, 현기증이 생겨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하신다면 하나님이 정말 이런 일을 혐오하시는 거야. 말씀으로만 그러시는 게 아니라 그게 사실로 일어나게 하신 거야.’ 네가 늘 이런 장면을 보고 싶어하는 건 어떤 행위이며, 어떤 속셈이냐? 그게 바로 시험이다.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 네가 하나님을 시험할 때 하나님은 네게서 모습을 감추고 얼굴을 가릴 것이다. 네가 기도해도 소용없다. “제가 정성을 다해도 안 됩니까?” 이렇게 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도 안 된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을 시험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악을 증오하는 하나님이다. 네가 이런 사악한 마음과 생각을 가질 때 하나님은 네게서 모습을 감추고 너를 깨우쳐 주지 않을 것이며 너를 한쪽에 내버려둘 것이다. 그러면 너는 계속 어리석은 짓을 하고 방해와 교란을 일삼다가 결국 드러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사람이 마주하게 될 결과다.
(하나님,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기자재를 관리하고 있는데, 이 본분에 늘 가볍고 데면데면한 태도로 임했습니다. 형제자매들이 지적하고 책망해 주면서, 하나님이 전에 말씀하셨던 기침 시럽 약을 몰래 마신 형제의 사례도 교제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징계하지도 않고 나무라지도 않다가 그가 약을 다 훔쳐 마신 뒤 도태시키셨다고 하면서요. 하나님의 성품은 사람이 거스를 수 없다는 말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하나님이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니까 당연히 그를 대하듯 저를 대하지는 않으실 것이라는 일종의 관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여전히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교제와 연관을 지어 보니, 제가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 대해 의심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고, 또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그런 모습이 있고, 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말고를 기준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어떤 일을 대할 때의 일시적인 태도가 어떤가를 기준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생활의 사소한 일에서 나타내고 드러내는 좋지 않은 습관들, 무책임한 행동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네가 자기가 이행하는 핵심적인 본분에 노력을 기울이고 책임을 다할 수만 있으면 된다. 만약 네가 생각하기에 본인이 이런 기자재 종류의 관리에 대해 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또 최선을 다해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그건 무엇을 뜻하느냐? 하나는 관리에 능하지 못하다는 뜻이고, 또 하나는 네가 그 사역을 하기에 그리 적합하지 않다는 뜻이다. 네가 이 사역에 언젠가 큰 화를 초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 다른 사람을 추천해서 교회에서 그 일을 담당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너를 대신하게 하고, 그런 다음 너는 네가 잘할 수 있고 관심 있는 일을 하고, 네가 관심 있고, 잘할 수 있는 본분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것이 낫다. 또한 사람이 만약 정말 진리를 사랑하고,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 존엄성 있게 살면서 남들에게 혐오받지 않고 존중받고 싶다면, 일 하나하나를 제대로 하겠다는 결심이 있어야 한다. 또한 만약 잘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징계를 내리고 역사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서 말할 의지가 있어야 한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관리한다면 제대로 관리할 수 없다. 사람이 한 사람을 교육하는 것은 기껏해야 그 사람을 한 방면의 인재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가는 길, 그 사람의 인생관, 그 사람이 일생에서 선택하는 목표 및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 등과 관련해서는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다. 하나님 말씀, 하나님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이 말씀이 어떻게 실현되는 것이냐? 사람이 자기도 방법이 없기에 하는 수 없이 하나님이 역사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하나님이 역사하도록 할 수 있고, 또 하나님이 역사하려고 하겠느냐? 먼저 의지가 있고, 이런 바람이 있어야 한다. “이 일은 내가 늘 제대로 하지 못했어. 형제자매들도 만족하지 못하고 나 스스로도 만족하지 못해. 그렇지만 잘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내 안에서 역사해 달라고 기도하자.” 하나님이 네 안에서 역사하기를 바란다면, 우선 한 가지, 고통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너를 징계할 때, 하나님이 너를 꾸짖을 때 너는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이 내면에서 순종하고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어떤 일이든 잘할 수 있는 시발점이다. 사람은 누구나 완전한 구원에 이르기 전에 하나님의 공의와 전능에 대해 의심을 품는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보통의 패괴된 사람은 의심은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할 수 있고, 진리를 추구해서 조금씩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마음속 주관적인 바람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것이다. 하지만 적그리스도는 그와 정반대다. 그의 주관적인 바람은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 인정하는 것이 아닌 반발하는 것이다. 그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보통의 패괴된 사람의 나은 점은 어디에 있느냐? 그는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긍정적 사물을 받아들이고, 긍정적 사물을 좋아한다. 다만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에 가끔 어쩔 수 없고,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도달하지 못하거나 이르지 못해 속으로 늘 소극적이고 연약한 마음이 들고, 하나님이 더 이상 자신을 원치 않고 혐오한다고 느낀다. 이런 느낌은 좋은 것이냐? 이 느낌이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것은 네가 구원받을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네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하나의 징표이기도 하다. 사람이 만약 이런 느낌도 없다면 진리를 얻고 구원받을 희망이 아주 희박하다. 바로 네가 이런 느낌을 받기 때문에 너는 아직 양심이 있고 존엄성과 인격이 있고, 또 이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만약 이런 것도 없으면 너는 정말 적그리스도, 불신파이다. 지금 너는 단지 불신파의 모습이 있고, 불신파의 몇 가지 표출과 성품만 지니고 있을 뿐, 불신파는 아니다. 하나님이 볼 때 너는 그를 믿는 사람이고 그를 따르는 자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길에서, 추구와 관점에서, 개인 생활의 면면에서 여전히 수많은 문제와 결함을 가지고 있더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들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 해결하기는 어렵지 않다. 네가 양심과 이성을 갖추고, 진리를 추구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한다는 이런 기본 조건만 갖춘다면, 이런 문제들은 전부 해결할 수 있다. 그건 단지 시간 문제일 뿐이다. 네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고 하나님에게서 오는 채찍질과 징계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첫 번째 관문은 통과한 것이다. 두 번째 관문은 네가 하나님 말씀을 읽고, 교제를 듣고, 형제자매의 체험 간증을 듣고, 너 역시 자신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법, 자신에게 일이 닥칠 때마다 생기는 각종 내적 상태를 해결하는 법을 배우고, 하나님 말씀으로 문제를 해결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늘 하나님 앞에 나아와 자신의 상황, 자신의 내적 상태, 그리고 자신이 직면한 문제를 하나님에게 얘기하며 하나님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하나님의 책망과 훈계, 채찍질과 징계, 심지어 너에 대한 하나님의 드러냄과 태도를 진심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네 마음은 하나님에게 닫혀 있지 않고 열려 있어야 한다. 네 마음이 열려 있는 한, 네 양심과 이성이 발휘될 수 있고, 진리가 네 내면에 들어와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런 문제들은 해결할 수 없는 게 아니며, 모두 해결될 수 있다. 이는 별로 큰 문제도 아니다. 사람이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흔한 일로, 모든 패괴된 인류에게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상태다. 하나는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하나는 무슨 일이든 무성의하거나 건성으로 하며 책임지지 않고, 빈둥거리는 내적 상태나 빈둥거리는 상태를 지니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패괴된 인류의 정상적 상태다. 그런 건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보다는 정도가 훨씬 가볍고, 하나님은 사람의 그런 점들은 보지 않는다. 하나님이 만약 사람에게 시시콜콜 따지고 든다면 사람이 말 한마디 잘못해도 원하지 않을 것이고, 전에 사소한 잘못이 있어도 원하지 않을 것이며, 사람이 젊고 혈기 왕성해서 일할 때 덤벙대도 좋아하지 않고 그 사람 또한 하나님에게서 버림받고 도태되는 대상이 될 것이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를 통해 사람을 정죄하고 사람의 결말을 규정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은 또 다른 일이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고 성품이 변화해서 구원받는 과정에서 사람의 그런 정상적 상태는 하나님이 보기에 가장 흔하고 가장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걸 보지 않는다. 하나님은 뭘 보느냐? 하나님은 네게 긍정적인 추구가 있는지, 네가 진리와 긍정적 사물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성품 변화를 추구하는 일에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를 본다. 하나님은 네 마음속에 그런 소망이 있는지, 네가 향상하려고 노력을 기울이는지를 본다. 네가 그런 것들을 갖춘 다음,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증오할 줄 알고, 또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에게 죄를 뉘우치며 회개할 줄 안다면, 하나님은 그걸 보고 네가 희망이 있고 도태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너는 하나님의 공의 성품,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모두 빈말인 줄 아느냐? 바로 하나님은 그런 본질이 있기 때문에 각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 태도가 있을 것이다. 이 태도는 가장 실제적이며, 조금도 공허하지 않다.
최근에 얘기한 적그리스도의 본질은 모두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그것은 우선 사람이 적그리스도를 알고 분별해서 적그리스도를 규정하고 그를 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 하나는, 누구나 적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적그리스도 성품이 있지만, 진짜 적그리스도만이 도태되고 버림받는 대상이고, 적그리스도 성품이 있는 보통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대상이지 도태시키려는 대상이 아님을 모든 사람이 알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에게 적그리스도의 본질, 적그리스도의 여러 성품을 교제하는 목적은 사람을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구원하고 길을 알려 주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자신에게 어떤 패괴 성품이 있는지 분명히 알게 하고, 또한 인류는 하나님의 원수라고 했던 하나님의 말씀이 과연 무슨 뜻인지, 하나님이 왜 그렇게 말씀했는지, 사람이 과연 어떤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고, 어떤 대적과 패역을 드러내었기에 하나님이 그와 같이 말씀하고 정죄하는지를 분명히 알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기 때문에, 인류를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 하나님이 이미 택한 사람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지칠 줄 모르고 이렇게 말씀하고 사역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사역하는 것은 단지 사람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를 알게 하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얼마나 진심 어리게 거듭 충고하는지, 또 얼마나 애쓰는지 알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 걸 아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사람이 그걸 안다 해도 단지 속으로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조금 생길 뿐, 패괴 성품은 하나도 해결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이렇게 진심 어리게 거듭 충고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고자 공을 들이고 다짐했다는 것이지 사람에게 농담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류에게 알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려는 것은 구원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어느 방면의 진리든 하나님은 한 측면, 한 각도에서만 얘기하지 않고, 한 가지 방식으로만 얘기하지 않는다.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방식, 다양한 언어로 정도를 달리하며 사람에게 알려 준다. 이로써 사람이 사람의 패괴 성품과 자신을 인식하고, 그럼으로써 사람이 추구해야 할 방향을 깨닫고 사람이 어떤 길을 가야 할지를 알게 하는 한편, 사람이 사탄의 패괴 성품을 포기하거나 바꾸고,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처세술, 생존의 길,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과 방법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르쳐 주고 알려 준 방식과 방법, 방향과 목표에 따라 살도록 한다.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하는 것은 사람에게 인정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고심을 알게 하려는 것도,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하기가 무척 쉽지 않다는 걸 알게 하려는 것도 아니다. 너는 이런 걸 인식하지 않아도 된다. 오로지 하나님이 하는 말씀 중에서 자신이 실행해야 할 것을 찾아내고, 진리와 하나님 뜻을 깨닫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그런 다음 진리 원칙에 따라 살아가고, 처신하고 행동하고, 또한 하나님이 맡긴 부탁을 완수해서 구원에 이르면 된다. 그러면 하나님도 만족할 것이고, 사람이 구원받는 일도 철저하게 성공을 거둘 것이고, 사람은 거기서 유익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가끔 말에 도리가 많고, 행동이 너무나 가벼우며, 항상 건성으로 임하고, 불량 습성이 너무 심각한 경우, 특히 젊은 사람들이 규칙을 지키지 않고, 늦잠을 자거나 조금 비합리적이고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생활 습관을 갖는 경우, 그런 건 강요하지 말고 천천히 고치도록 해라. 네가 진리를 추구하기 원하고 하나님 말씀에 노력을 기울이면서 자주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에게 마음을 연다면 하나님은 역사할 것이다. 사람의 힘, 사람의 방법으로는 누구도 다른 사람을 바꾸지 못한다. 네 부모라 해도 널 바꿀 수 없다.
오늘날 네가 하나님 집에 오게 된 것은 하나님이 한 일이다. 네가 이 시대, 이 사악한 조류 속에서도 이곳에 와서 착실하게 설교를 듣고, 돈 한 푼 벌지 않고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이 한 일이다. 하나님은 왜 이런 일을 하느냐? 네 어디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 것이냐? 그건 바로 네게 조금이나마 정의감이 있고 또 양심이 있기 때문이다. 네가 사악한 조류를 싫어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고, 또한 하나님나라의 강림을 바라고 그리스도가 다스리고 진리가 다스리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네게 그런 바람이 있고, 하나님이 너의 그런 면들을 좋게 보았기에 너를 하나님 집으로 데려온 것이다. 너는 하나님이 너의 그 나쁜 버릇이나 나쁜 습관들을 못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네 문제점들은 하나님 눈으로 다 보았고, 하나님은 다 알고 있다. 하나님은 다 알면서 왜 내버려두느냐? 많은 경우 이런 일들은 사람 마음속에서 갈등을 일으킨다. ‘나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구원하실 수 있을까? 나 같은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을까? 이렇게 사악하고 패괴되고, 징계에도 불복하고 패역하고, 또 하나님을 대적하고 의심하는데, 하나님은 어째서 나를 선택하셨을까?’ 뭘 그렇게 걱정하느냐? 하나님만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 너는 하나님이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행하기만 하면 충분하다. 그런 일에 얽매이지 말고, 그런 일 때문에 소극적이 되지도 마라. 아무도 너에게 그런 걸로 흠을 잡거나 꼬투리를 잡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런 걸 하나도 보지 않는다. 만약 이런 지엽적인, 생활의 사소한 일 때문에 생겨난 나쁜 습관이나 버릇, 혹은 불량 습성 때문에 네가 올바른 길을 추구하고 진리를 추구하지 못하게 교란을 받는다면 손해가 아니냐? 그럴 만한 가치가 없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지금 아마도 이런 내적 상태에 빠진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는 성격이 너무 급하고 무슨 일을 해도 너무 허술하고, 배우기를 싫어한다고, 또 나쁜 습관이 있는데, 아침에 일어나기 싫어하고 밤에는 자기 싫어하고, 게임도 좋아하고, 때로는 말을 옮기거나 우스갯소리를 하기 좋아한다고 한다. 이런 그를 하나님이 구원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네가 너 자신에 대해 그토록 많은 관념과 상상을 가지고 있는 건 문제가 아니냐? 너는 어째서 구해 보지 않느냐? 하나님이 과연 어떤 관점이고, 하나님 말씀에서 과연 어떻게 말씀했느냐? 하나님 말씀에 이런 것이 문제라고 한 적이 있느냐? 어떤 사람은 본인이 꾸미기를 좋아해서 늘 자제해야 한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본인이 고기를 좋아하고 식탐이 너무 많다고 하는데, 이런 것들은 모두 사소한 문제다. 그런 버릇이나 성격, 혹은 생활 습관은 기껏해야 인성의 작은 결점일 뿐 패괴 성품으로 볼 수 없다. 사람이 진정으로 해결해야 할 것은 패괴 성품이다. 작은 것에 집중하다가 큰 것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 마라. 자신에게 패괴 성품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걸 반성하고 분별하는 데 집중하고, 거기에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하고, 자신의 패괴 성품을 미워하기 시작하면, 너의 그 사소한 결점들은 서서히 고쳐져서 더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노는 걸 좋아하는 일부 젊은 사람들은 본연의 일을 제대로 완수하면 조금 놀아도 된다. 젊은 여성들은 예쁜 걸 좋아하고, 꾸미고 화장하는 걸 좋아하는데, 그래도 된다. 요란하고 괴상한 옷차림이라든가 야하고 짙은 화장처럼 너무 심하지만 않으면 다 괜찮다. 아무도 제한하지 않는다. 그런 건 문제가 아니다. 너는 그런 생활 습관, 삶의 질에 대한 요구, 그리고 성격상의 사소한 문제 등으로 인해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지 않고, 그런 것 때문에 진리를 위배하게 되지는 않는다. 진정으로 네가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들고 네가 하나님 앞에 오는 것을 가로막고, 네가 하나님을 거역하게 만드는 건 네 패괴 성품이다. 사람이 패괴 성품을 발견하고, 인식하고, 증오하고, 또 사람이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하려는 이런 주관적인 바람이 있을 때, 그런 사소한 결점은 모두 해결될 수 있다. 네 패괴 성품이 해결되고, 네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장 큰 문제도 해결되는데 너의 그 사소한 결점들이 문제겠느냐? 그때가 되면 너는 어떻게 처신하고 어떻게 생활하고, 뭘 먹고 마시고, 어떻게 쉬고, 본분을 어떻게 이행하고, 사람들과 어떻게 어울릴지와 같은 이런 작은 일들에 조금씩 원칙이 생길 것이다. 그때가 되면 너는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것이 사람의 일생에서 중요한 일이고, 패괴 성품이 해결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비로소 사람답고 존엄성 있게 살 수 있다. 네가 지금 사소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남들은 너를 훌륭한 청년이라고 칭찬하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나님 믿는 사람 같다고 칭찬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네가 그래도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네 표면적인 행위가 아무리 좋아도 소용없다.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패괴 성품도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너는 여전히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고, 구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좋은 행위만 있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건 자신을 속이는 것이 아니냐?
지금 너희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는 무엇이냐? (패괴 성품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다. “나는 밝은색 옷이 좋은데 하나님 집에서 그런 옷을 좋아하지 않으니 난 저버릴 거야.” 저버릴 필요 없이 입고 싶으면 입도록 해라. 이런 사람도 있다. “나는 화장하는 게 좋아. 매일 예쁜 모습으로 사람들을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시간이 있으면 그래도 된다. 이런 사람도 있다. “난 맛있는 음식을 좋아해. 매운 것도 좋고 신 것도 좋아.” 조건이 되고 기회가 되고 시간이 되면 그런 욕구를 채워도 좋다. 그런 욕구를 채우지 않고 자제하고 저버리더라도 네 패괴 성품은 해결될 수 없다. 네가 자제한다고 뭘 어쩔 수 있겠느냐? 네 육이 크게 고통받지만 너는 마음속으로 여전히 억울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럼 추가로 너에게 어떤 부정적인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너는 네가 하나님을 위해 큰 고통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네가 진리를 갖추게 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 너한테는 아무것도 없고,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네가 옷을 우아하고 단정하고 수수하게 입어서 형제자매 같아지고, 또 착실해지더라도, 너에게 본분을 이행하라고 할 때 진리 원칙도 못 찾고, 심지어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한다면,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이냐? (아닙니다.) 따라서 어느 관점에서 보더라도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진리를 깨달아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것이 기본이다. 사소한 문제나 표면적인 행위에 공을 들이지 말고, 거기에 얽매이지 말고, 속으로 늘 가책과 죄책감을 느끼면서 항상 그 일을 크게 생각해서 해결하려 하지 마라. 결국 패괴 성품은 결코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본인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패괴 성품이 있는지는 너 자신도 모르고, 눈곱만큼도 알지 못한다면 이건 일을 그르치게 되는 것이 아니냐? 네가 자신의 패괴 본질을 인식하게 되었을 때 그런 사소한 일들은 문제가 되지 않고, 네가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제에 진입해서 진리 원칙에 따라 행동하게 되면서 그런 작은 문제들은 자연히 점점 사라질 것이다. 급하거나 느긋한 성격, 말이 많거나 적은 성격 등은 모두 문제가 아니다. 그건 성격 문제다. 말이 또박또박한 사람도 있고, 말이 어눌한 사람도 있고, 대범해서 사람 많은 자리에서 대담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있고, 소심해서 사람이 많으면 감히 말을 못하는 사람도 있다. 성격이 외향적인 사람도 있고, 내성적인 사람도 있다. 이런 건 모두 문제가 아니다. 어떤 게 문제냐?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 성품, 이것이 문제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다. 이것이 사람의 모든 패괴 성품의 근원이다. 네가 패괴 성품 문제를 해결한다면, 다른 문제들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 질문이 있느냐? (하나님,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영 생활은 정상적이지만 속으로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추구하려는 마음이 그렇게 크지 않고, 스스로 내적 상태가 옳지 않다고 느낄 때는 한 이틀 열심히 추구하다가 며칠 지나면 속으로 다시 느슨해지는, 이런 내적 상태가 늘 반복되는데, 스스로도 이것이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이라고 인식하지만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어쩔 수가 없다. 사람의 생명 진입이 원래 그런 것이다. 너는 지금 늘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하는데, 한 가지 실수를 범했다. 예를 들어 어떤 여자들이 남편을 찾을 때 그녀들의 기준은, 외모는 보통이어도 괜찮은데, 반드시 낭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이 처음 만난 시간과 장소를 기억하고, 자기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등등도 기억해야 한다. 중요한 날짜는 모조리 기억해야 하고, 또 가끔 “자기야, 사랑해!”라고 해 줘야 하고, 가끔 선물도 사 줘야 한다. 그리고 상대에게서 이런 것도 확인할 것이다. “우리 처음 사귄 날짜가 언제지? 밸런타인데이는 언제게?” 이렇게 항상 낭만과 자극을 찾는 것이다. 생활이 좀 평범해지면 그게 싫어서 남편을 원망한다. “사람이 둔하긴, 낭만도 모르고 말이에요. 당신이랑 사는 건 정말 재미없어요! 이번 생은 당신 옆에서 썩고 있잖아요!” 많은 여성들이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느냐? 누구 남편은 낭만적이라서 여자를 잘 달래 주고 아내를 공주처럼 아낀다는 말을 들으면 그게 못내 부럽고, 그 사람의 남편을 빼앗아 오지 못하는 걸 한스러워하면서 평범하고 일상적인 생활에 거부감을 갖는다. 너도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사역하고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는 그렇게 아슬아슬하고 자극적인 대목이 없고, 하나님 역시 너에게 서프라이즈를 만들어 주지 않는다. 그저 일상적이고 평범하다. 이것이 실제적인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는 느낌이 필요하지 않다. 마음속에 추구하는 바가 있다면, 한동안 내가 가는 길이 치우치지 않았는지, 내가 이행하는 본분에 무슨 구멍은 없는지, 사람의 실수로 무슨 손해가 생기지는 않았는지 성찰해 보고, 그 한동안 형제자매들이 본분을 이행하는 일에서 내가 갖추지 못한 새로운 깨달음, 인식은 없는지, 하나님 말씀을 볼 때 치우치게 이해한 것은 없는지, 내가 닿지 못한 부분이나 체험하지 못한 부분, 혹은 소홀히 한 부분은 없는지 등을 교제하기만 하면 된다. 이런 길과 목표, 방향만 모두 정상이고 옳으면 된 것이다. 큰 방향만 옳으면 된다. 자극을 찾지 말고, 서프라이즈를 찾지 마라. 아무도 너에게 그런 걸 주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정상인이 일상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은 평범하다. 네가 이 세상에서 사는 한 무엇도 초자연적이지 않으며 실생활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바로 이렇게 평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평범한 생활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생활은 그래도 차이가 있다. 하나님을 믿으며 본분을 이행하는 동안, 너는 끊임없이 자신의 패괴 성품을 발견하고, 끊임없이 너와 하나님의 관계를 바로잡거나 바꾸고, 끊임없이 네가 깨닫지 못한 진리를 발견하고, 네가 모르고 깨닫지 못한 진리를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이것이 바로 차이다. 이는 이미 상당히 큰 차이인데 그렇다면 너희는 뭘 더 바라느냐? 하나님 집에서, 교회에서, 네 주변에서 발생하는 일이 그래도 적으냐? 처음 사역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그동안 발생한 일들은 사람이 세어 보기에 충분하다. 세월은 정말 빨리 흐른다. 눈 깜짝할 사이에 10년, 20년이 흐르고, 또 순식간에 30년, 50년이 흘러간다. 그러면 사람의 일생이 거의 다 되는데 무슨 자극을 찾느냐? 이런 일들은 충분히 자극적이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 하나하나가 너로 하여금 남다른 것을 발견하고 진리를 발견하고, 모두 너에게 서프라이즈를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바람직하다. 평범하지 않다, 그렇지 않으냐? (네.)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자극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정상 인성으로 살고 이 물질세계에서 사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자극을 찾으려 하지 마라. 자극을 찾고 느낌을 찾는 것은 할 일 없어 하는 짓이다.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며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는 매일 새로이 배워야 할 공과가 있다. 사람들은 묻는다. “그럼 저는 왜 못 배웠나요?” 그렇다면 아마 네가 진도가 좀 늦은 것이다. 네게 매달 배워야 할 공과가 있다면 그것도 충분하다. 네가 발전하고 있고, 진리를 추구하고 있으면 수확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교제하니 문제가 해결되었느냐? (해결되었습니다.) 어떻게 해결되었느냐? 어느 말씀으로 해결되었느냐? (하나님을 믿는 저의 추구 관점이 실제적이지 않고, 추구 방법도 실용적이지 않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자극을 추구하려 하고, 느낌을 추구하려 하고, 그저 관념과 상상대로 하나님을 대하고, 하나님과는 존경하면서도 멀리하는 그런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생명 진입 과정에서 연약해지기도 하고 동시에 성장하기도 하며, 여러 가지 상황을 만나기도 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사실을 등한시했습니다.)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옳다. 상황을 마주하기 전에는 사람은 당연히 해야 하는 대로 본분을 이행하고, 당연히 해야 하는 대로 추구해야 한다. 자극을 찾거나 느낌을 찾지 말고, 예민하게 굴지도 말고, 이렇게 말하지도 마라. “오늘 기분이 왜 이러지? 하나님과 사이가 멀어졌구나. 얼른 기도하자!” 이렇게 예민하게 굴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은 개의치 않는다. 하나님은 너의 그 사소한 일까지 따지지 않는다! 너는 이렇게 말해라. “며칠째 하나님께 기도를 못 드렸습니다. 하지만 일할 때는 속으로 늘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유지했습니다.” 그런 건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이쿠, 본분 이행하느라 바빠서 며칠 동안 하나님 말씀을 못 읽었습니다.” 네가 그 과정을 밟지 않고 소홀히 하긴 했지만,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너는 많은 문제를 발견했고, 몇 가지 패괴 성품을 드러냈고, 또한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교제하는 것을 듣고 커다란 도움을 받기도 했다. 이것이 실제적인 수확이 아니냐? 네가 하나님 말씀을 읽는 것은 진리를 깨닫고 거둬들이기 위한 것이 아니냐? 꼭 그 방식과 형식을 요구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좋다. 오늘은 여기까지 교제하고 다음에 보도록 하자! (하나님,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0년 5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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