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조 사악함과 음험함, 그리고 간사함(3) 제 1 부
참고 선물
본격적인 교제에 앞서 해 줄 이야기가 하나 있다. 어떤 이야기냐? 혹여 이 이야기가 사람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거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생명에 진입하고, 하나님을 알아 가는 측면에 아무런 도움이나 유익도 주지 않는다면 이야기하는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야기를 들려주려면 그 이야기 자체에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어야 하고, 이야기할 만한 가치와 의미가 있어야 한다. 그럼 오늘 들려주는 이 이야기가 너희에게 유익이 되고 도움이 되는지 잘 들어보아라. 개중엔 실화인 이야기도 있고 실화를 가공하여 꾸며 낸 이야기도 있는데 실화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어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는 아니다. 꾸며 낸 이야기이든, 정말 있었던 일이든, 사람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렇다면 사람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이런 이야기를 왜 너희에게 들려주려고 하겠느냐?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렇다. 너희가 거기서 진리, 곧 실생활에서는 인식하기 아주 어려운 일부 진리를 깨닫게 해 주려는 것이다. 이야기를 하는 방식을 통해 사람이 진리와 하나님을 좀 더 현실에 가깝게 인식하고,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사람과 오래 그리고 자주 접하다 보면 별의별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이 다 생긴다. 이야기는 올 봄에 있었던 일이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니 날씨가 날로 따뜻해졌다. 땅 위에 여러 식물들이 싹트기 시작했고 햇볕을 쬐고 비를 맞으며 하루하루 자라났다. 이런 식물에는 자연산인 것도 있고 재배한 것도 있으며, 동물이 먹는 것, 사람이 먹는 것, 동물과 사람이 모두 먹을 수 있는 것이 있다. 이것이 봄날의 풍경이다. 온통 푸르고 생기 가득한 풍경 말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어느 날 나는 생각지도 못한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 어떤 선물이겠느냐? 산나물 한 봉지다. 보낸 사람은 “이건 냉이라, 드셔도 돼요. 몸에 좋대요. 달걀에 볶아 드셔도 돼요.”라고 말했다. 이건 좋은 일이다. 그런데 전에 사 두었던 냉이와 비교해 보니 문제가 있었다. 어떤 문제인지 짐작이 되느냐? 내가 ‘비밀’을 알게 된 것이다. 어떤 비밀이겠느냐? 해외의 냉이와 중국의 냉이가 다르게 생긴 것이다. 여기에 문제가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같은 종이라면 똑같이 생겼어야 하는데 이제 보니 다르게 생긴 것이다. 가장 먼저 어떤 생각이 들었겠느냐? 이게 과연 냉이일까?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럼 선물한 사람에게 어찌 된 일인지 물어봐야 하지 않겠느냐? 나중에 그에게 물었다. “냉이라더니 확실한 것이냐?” 그는 생각해 보더니 “흠, 냉이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라고 대답했다. 자기도 모르는데 어떻게 냉이라며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느냐? 어찌 남에게 감히 줄 수 있겠느냐? 내가 함부로 먹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이틀 후 과연 진짜 냉이가 아니란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선물한 사람이 뭐라고 했겠느냐? 그는 “냉이가 아닌 걸 어떻게 아셨어요? 저도 긴가민가했거든요. 괘념치 마시고 그냥 드시지 마세요.”라고 했다. 이런 걸 먹어도 되겠느냐? (먹으면 안 됩니다.) 먹어선 안 된다. 만약 내가 “네가 잘 모르긴 하지만 성의를 봐서 위험해도 한번 먹어 보겠다.”라고 한다면 이렇게 해도 되겠느냐? (안 됩니다.) 이런 행동은 어떤 성질이냐? 어리석은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어리석은 짓이다. 다행히 나는 먹지 않았고 추궁하지도 않았기에 이 일은 유야무야되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 들에는 여러 야생 식물들이 자라났다. 큰 것, 작은 것, 꽃 핀 것, 피지 않은 것 등 가지각색의 오색찬란한 식물들이 자라나면서 갈수록 많아지고 무성해지며 형태를 갖춰 갔다. 어느 날 같은 사람에게서 선물을 또 한 봉지 받았는데 이번엔 냉이가 아니라 쑥이었다. 그가 또 한 번 크게 선심을 써서 한 봉지 선물한 것이다. 건네면서 이렇게 당부하기도 했다. “드셔 보세요. 쑥인데 냉한 체질에 좋대요. 이것도 달걀에 볶아 드시면 돼요.” 내가 살펴보니 호초(蒿草)가 아니겠느냐? 중국의 여러 지역에서 나는 쑥은 잎에서 독특한 향이 나는데 이자가 준 것에서는 향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쑥이라고 하는 것일까? 잎 모양은 비슷한데 정말 쑥일까? 선물해 준 사람에게 물어봤는데 뜻밖에 그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모르겠다는 한 마디로 깔끔하게 책임을 전가했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왜 아직 안 드셨어요? 쑥인지는 모르겠지만 드셔 보세요. 제가 먹어 보니 맛있더라고요.”라고 말했다. 자기도 모르는 걸 권하는데 내가 어떡하면 좋겠느냐? 억지로라도 먹어야겠느냐? (아닙니다.) 선물한 사람도 뭔지 모른다고 하니 절대 먹어선 안 된다. 맛만 보려고 모험을 한다면 괜찮을 수도 있다. 먹어 본 사람이 괜찮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괜찮다는 것만 믿고 덮어놓고 먹는 것은 어떤 행동이냐? 맹목적인 행동이 아니냐?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맹목적인 일을 하느냐? 덤벙대고 경솔한 사람이어야 이런 짓을 한다. 그는 ‘맞든 틀리든 비슷하면 그만이지.’라고 생각한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내가 이렇게 해야겠느냐? (안 됩니다.) 왜 안 되느냐? 먹을 게 얼마나 많은데 굳이 왜 위험을 무릅쓰며 정체불명의 식물을 먹어야 하느냐? 기근이 들어 양식이 없을 때는 모험을 하며 여러 산나물을 캐 먹어 볼 수도 있다. 이럴 땐 먹어도 된다. 하지만 지금이 그런 때이냐? (아닙니다.) 먹을 게 얼마나 많은데 어째서 산나물을 캐 먹어야 하느냐? 전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상상 속의 작은 유익을 위해 이런 모험을 할 필요가 있느냐?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먹지 않기로 한 것이다. 다행히 내가 먹지 않았고 추궁하지도 않아서 이 일은 또 유야무야되었다.
한동안 지나 이 사람이 또 선물을 보내왔다. 벌써 세 번째다. 이번 선물은 굉장히 독특하다. 그것은 땅에서 자라는 것도, 나무에서 열리는 것도 아니다. 그럼 무엇이냐? 새알 두 개가 쇼핑백에 반듯하게 포장되어 있었는데, 거기엔 ‘하나님께 바치는 새알’이라고 적혀 있었다. 웃기지 않느냐? 쇼핑백을 열어 보니 새알 두 개의 껍데기 색이 예뻤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색이었다. 어떤 새가 낳은 것인지 알 수 없어 인터넷을 뒤져 보려고 했지만 단서가 잡히지 않았다. 같은 무늬에 같은 색깔인 새알이 많아서 크기와 색깔로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너희 생각에 선물한 사람에게 무슨 알인지 물어볼 필요가 있겠느냐? (물어볼 필요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그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너희 짐작이 맞다. 이번에도 그는 모를 것이다. 그래서 물어보지 않았다. 물어보면 그의 체면이 깎일 것이고 ‘내 호의, 내 배려심을 의심하시는 것도 모자라 검색까지 하시다니. 뭘 찾아보고 그러시나, 드시라면 드실 것이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먹어야겠느냐? 아니면 먹지 말아야겠느냐? (먹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에게 준다면 먹겠느냐? (안 먹습니다.) 나도 먹지 않겠다. 새가 낳은 알은 전부 시간이 지나면 부화하여 번식하기 마련인데 먹어 버리면 너무 잔인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새알 사건도 그렇게 유야무야되었지만 이런 일이 계속 생기고 있다.
하루는 어떤 곳에서 쑥같이 생긴 호초가 난간에 놓여 햇볕에 말려지고 있길래 한 자매에게 그것의 용도를 물었다. 그녀는 “저번에 그 사람이 당신께 보낸 쑥이잖아요? 쑥에는 제습과 몸을 따뜻하게 해 주는 효능이 있어요. 당신은 추위를 타시잖아요? 그가 햇볕에 말렸다가 물에 끓인 다음 족욕으로 몸을 따뜻하게 해 드릴 거래요.”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 것 같으냐? 두 어절이다. (어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 어이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자의 배려심이 너무 크고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데 왜 어이가 없겠느냐? 왜냐하면 이 사람에겐 지각하지 못한 전례가 몇 번 있었는데 이번에는 방식을 바꿨기 때문이다. ‘드시라고 드렸는데 드시지 않으니 그럼 뜨거운 물에 족욕이라도 하시라고 말려 드릴게요. 그래야 저도 고생한 보람이 있죠.’라는 뜻이다. 이런 광경을 보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나중에 나는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 당장 약국에 가면 원하는 만큼 살 수 있을 정도로 쑥은 충분하다고, 포장도 다양하고 생산지도 다양한 데다가 가공도 그가 보내온 것보다 훨씬 깔끔하게 되어 있다고 말이다. 길가에 가서 뽑을 필요도, 난간에 놓고 햇볕에 말릴 필요도 없다. 이건 헛수고가 아니겠느냐? 그가 다 말려서 나한테 주는 걸 내가 원하겠느냐? (원하지 않으십니다.) 원할 리 없다. 한동안 지나자 난간에서 호초가 사라졌다. 내 말이 그에게 전달되어서 그가 보내지 않은 까닭이다. 나중에 들에 들풀이 무성해져서 귀하다고 생각되지 않자 더 이상 아무도 선물을 보내지 않았다. 아마도 이 기간에는 새알도 다 부화해서 건질 게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지금까지 새알과 산나물을 더는 받지 못했다.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이야기에서 네 가지 사건을 언급했는데 모두 내게 물건을 선물한 내용이었다. 그중 두 번은 정체불명의 산나물을 보낸 일이고, 한 번은 알 수 없는 새알이고, 나머지 한 번은 말린 ‘한약’이었다. 이 이야기가 웃기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 일 자체만 놓고 볼 때 너희는 듣고 어떤 느낌이 들었느냐? 이 속에 사람이 인식하고 배워야 하거나 교훈 삼아야 할 것이 없느냐? 너희는 듣는 동안 어떤 생각이 들었느냐? 특정인을 겨냥해서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겠느냐? 결코 아니다. 특정인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면 내가 왜 들려주었겠느냐?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것이 그저 한담이겠느냐? (아닙니다.) 너희에게 한담으로 들리지 않았다면 내가 왜 이야기했겠는지 알겠느냐? 이 사람이 왜 이런 일을 했느냐? 그가 이런 일을 한 성질은 무엇이고, 취지는 무엇이냐? 이 속에 어떤 문제가 존재하느냐? 이것을 실제에 결부시켜야 하지 않겠느냐? 실제에 결부시켜 사람과 일 자체의 성질을 꿰뚫어 보면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말해 보아라. 이런 일을 한 사람이 선의로 했겠느냐, 아니면 악의를 가지고 했겠느냐? (선의로 했습니다.) 일단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는 선의였다. 그의 선의 속에 어떤 문제가 존재하느냐? 선의로 한 행동이라면 배려심이 있는 것이냐?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만약 사람의 선의에서 비롯된 행동이라면 거기에 패괴 성품의 불순물은 절대 없는 것이냐? 그렇지 않다. 너희에게 묻겠다. 네게 부모에 대한 효심이 있다면 어째서 부모에게는 이것들을 먹어 보라고 보내지 않느냐? 네가 만약 상사나 지도자를 아껴서 그들에게 마음을 쓴다면 어째서 그들에게는 이것들을 먹어 보라고 선물하지 않는 것이냐? 어째서 그럴 엄두를 내지 못하느냐? 왜냐하면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되기 때문이다. 네 부모나 지도자, 상사에게 해가 될까 봐 걱정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에게 해가 되는 건 걱정되지 않느냐? 이게 무슨 심보냐? 네 선의 속에 무엇이 담겨 있느냐? 하나님을 기만하고 싶은 것이냐? 하나님을 희롱하고 싶은 것이냐? 하나님이 영체라면 네가 감히 이렇게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육신이 정상 인성을 갖고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지 않으니 이런 짓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네게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있느냐? 네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런 일을 한 것이 진정한 배려심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것은 배려심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만하고 희롱한 것이니 당돌하기 짝이 없구나! 네가 만약 정말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면 어째서 먼저 맛을 보고 먹어 봐서 아무 문제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하나님에게 주지 않느냐? 네가 맛보지도 먹어 보지도 않고 바로 하나님에게 주는 것은 하나님을 희롱하는 게 아니겠느냐? 네가 이렇게 하고도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렀다 생각하지 않느냐? 하나님이 이 일을 잊어버리겠느냐? 너는 잊어도 하나님은 잊지 않을 것이다. 너는 아무 생각 없이 이런 일을 했느냐? 네가 먹어 보지도 않고 과학적 근거도 없이 감히 하나님에게 주는 것이 책임감 있는 모습이냐? 혹여 하나님에게 해가 되었다면 네가 어떻게 책임지겠느냐? 설사 법적으로는 처벌받지 않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영원히 너를 징벌할 것이다. 이렇게 허름한 물건을 이방의 지도자나 공직자에게는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내밀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에게는 보내니 그 저의가 무엇이냐? 내 가치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느냐? 네가 만약 산나물 한 봉지를 네 사장에게 선물한다면 그가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내 가치가 이 정도밖에 안 되나? 다른 사람들은 돈이나 명품을 주는데 이 사람은 풀때기를 주네?’ 네가 그걸 내밀 수 있겠느냐? 분명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걸 보낸다면 어떤 게 걱정되겠느냐? 너는 먼저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사장님이 뭘 좋아하시지? 이게 필요하실까? 필요 없는데 드리면 날 난처하게 하지 않으실까? 회사에서 날 구박하고 괴롭히지 않으실까? 최악의 경우 구실을 찾거나 꼬투리를 잡아서 날 자르지 않으실까?’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네가 사장한테 잘 보이려면 일단 무엇을 선물해야 하느냐? (그가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가 좋아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그가 지금 컵 한 개가 필요하다고 해서 네가 2, 3천원짜리 컵 하나를 사 주면 되겠느냐? (안 됩니다.) 금이나 은 정도는 되어야 선물을 내밀 수 있는 것이다. 자기도 사기 쉽지 않은 것을 왜 그에게 주느냐?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잘 보이려는 목적이 무엇이냐? 먼저, 최소한 그가 너를 비바람으로부터 막아줄 수 있다. 그는 수중의 권력으로 너를 보호하고 안정적인 일자리와 수입을 보장해 줄 수 있다. 아무리 못해도 그가 너를 곤란하게 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네가 정체 모를 산나물 한 봉지를 그에게 주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자기 사장한테도 그렇게 하지 않는데 나물을 보낸 그는 나한테 왜 이러는 것이냐? 그가 뒷일을 생각했겠느냐? 분명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당신께서는 우리를 괴롭히지 않으실 것입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단순한 문제더냐? 내가 그를 곤란하게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냐? 그런 것이냐? 그가 왜 감히 이런 선물을 했겠느냐? (그는 자신이 선의로 그런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그는 선의로 그의 추악하고 사악한 부분을 가렸다. ‘저는 당신에게 선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거든요! 산더미만 한 나물 보이시죠? 누가 캐 드린 겁니까? 제가 캐 드린 게 아닙니까?’라는 뜻이다. 이게 무슨 태도냐? 이게 무슨 마음가짐이냐? 이 선의가 인성에 부합하느냐? 인성에도 부합하지 않는데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진리와 동떨어져도 한참 동떨어졌다! 이게 무슨 선의냐? 진정한 선의겠느냐?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태도의 선의냐? 어떤 불순물과 어떤 본질을 지닌 선의겠느냐? 세상물정 모르는 너희 같은 젊은이들도 직속상관에게 선물할 때는 훗일을 생각해서 아무거나 줘서는 안 된다는 걸 아는데, 세상에 닳고 닳은 사, 오십대가 이따위 물건을 선물한 것은 무슨 성질인 것 같으냐? 우리가 토론해 볼 만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과연 어떤 성질이겠느냐? 그는 자기도 무엇인지 모르는 나물을 내게 먹으라며 주었다. 그러다 내가 그 산나물이 아닌 것 같다고 하니 얼른 먹지 말라고 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또다시 나보고 먹으라며 다른 산나물을 보냈다. 내가 먹지 않으니 그가 뭐라 했느냐? “드셔 보세요. 제가 먹어 보니 맛있더라고요.”라고 했다. 이게 무슨 태도냐? (경솔하고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그렇다. 너희도 이런 태도가 느껴지느냐? (느껴집니다.) 이게 선의겠느냐? 여기엔 선의조차 없다! 돈도 들이지 않고 대충 물건을 구해 와서는 비닐 봉투에 담아 먹으라고 준 것이다. 풀을 뜯어 양이나 토끼를 먹이더라도 ‘먹고 중독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이런 생각까지 하지 않겠느냐? 짐승을 먹일 때도 이런 모험은 하지 않는데 어떻게 대충 나물을 구해 나한테 먹으라고 주느냐? 이게 어떤 성품이냐? 어떤 성질의 문제겠느냐? 너희가 확실히 알 수 있겠느냐? 생각해 보아라. 나를 이렇게 대하는 사람이 그의 부하, 그의 눈에 평범해 보이는 사람은 어떻게 대하겠느냐? 함부로 희롱할 것이다. 이게 어떤 성품이냐? 사악하고 흉악한 것이다. 이런 자를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사람의 몸과 목숨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내기 정도로 생각한다. 지나고 나면 아무런 느낌도 없고 양심에 가책도 전혀 느끼지 않는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이런 짓을 저지르니 정말 이상하기 짝이 없다.
내가 이야기를 시작할 때 했던 말을 너희는 아마 염두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산나물은 사람이 먹는 게 있고, 짐승이 먹는 게 있으며, 사람과 짐승이 모두 먹을 수 있는 게 있다.”라고 했다. 이는 ‘명언’이다. 이 말엔 유래가 있는데,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아느냐? 여기엔 ‘사연’이 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몇 가지 선물을 보낸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이 사람은 재배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세 가지 종류의 옥수수를 재배했다. 어떤 종류겠느냐? 사람이 먹는 것, 짐승이 먹는 것, 사람과 짐승이 모두 먹을 수 있는 것, 이렇게 세 가지 종류다. 이 세 가지 옥수수 이야기는 굉장히 재밌는데 들어보았느냐? 들어보지 못했구나. 나도 처음 들었는데 정말 희한한 일이다. 결과적으로 재배를 맡은 사람이 무책임해 이 세 가지 옥수수가 섞이는 바람에 짐승한테 줄 것을 사람에게 나눠 주고, 사람에게 줄 것을 짐승에게 나눠 먹였다. 다들 먹어 보고는 곡식 맛이 아니라 여물 맛이 난다며 맛이 이상하다고 했다. 이 사람이 일을 어떻게 한 것이냐? 무책임하게 본분을 이행하는 바람에 사람이 먹는 것과 짐승이 먹는 것이 뒤섞여 아무도 알아볼 수 없으니 종자를 새로 사서 다시 심어야 했다. 이 일을 어떻게 한 것이냐? 이런 부류의 사람이 일을 할 때 원칙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일할 때 진리를 구하겠느냐? (구하지 않습니다.) 이런 태도로 일하고, 이렇게 불손하고 무책임하게 사람을 대하는데 이런 부류의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어떻게 바라보겠느냐? 진리는 어떻게 대하겠느냐? 그들의 마음속에서 진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되겠느냐? 하나님의 신분은 얼마나 중요하겠느냐? 그들이 알겠느냐? (모릅니다.) 이렇게 중요한 일은 알아야 하지 않느냐? 어째서 그들은 모르느냐? 이는 성품과 관련이 있다. 이것이 어떤 성품이냐? (사악함입니다.) 사악하고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이다. 그들은 이런 행동이 어떤 성질인지 의식하지 못한다. 전혀 묵상하지도 구하지도 않으며 행동한 뒤 성찰하지도 않는다. 대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선의만 있으면, 좋은 의도이기만 하면 그 누구의 감독이나 질책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이미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겠느냐? 어떤 사람은 말한다. “당신께서 하신 이야기는 잘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은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일이 닥쳤을 때 당신은 어떤 태도를 지니십니까? 이런 짓을 저지른 사람을 당신은 어떤 태도로 대하십니까? 분노하십니까? 혐오하여 버리십니까? 반감을 가지십니까? 아니면 좋아하십니까?” (증오하십니다.) 이런 일은 증오해야 마땅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너희에게 만약 이런 일이 닥친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느냐? 만약 선의를 가진 한 사람이 계속해서 네게 정체불명의 것을 선물하면서 “몸에 좋으니 드셔 보세요. 보양식이니 드셔 보세요. 먹으면 예뻐지고 기운도 나니 드셔 보세요. 정말이니까 제 말 들으세요.”라며 끈질기게 권했는데 검증 결과 아무런 효험도 없는 것으로 밝혀진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느냐? (저라면 이런 부류의 사람과 다시는 상종하고 싶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에게 진절머리가 나고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에게 혐오감과 반감이 들 것이다. 또 무엇이 있느냐? 화를 내고, 마음 아파하며 괴로워해야겠느냐?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 그렇지 않으냐? “이 사람은 아마 진리를 깨닫지 못해 이런 짓을 저질렀을 겁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많지만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 사람과 사람 간에 구별이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구별이 있다. 마치 다음의 경우처럼 말이다. 사람끼리 왕래하고 물건을 주고받을 때 상대방이 잇속을 차리게 되더라도 개의치 않고 공평하고 합리적인 것을 구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오래 지낼 수 있게 된다. 그는 인성이 있어서 조금 손해 보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반면 인성이 없어서 잇속만 차리길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오로지 이득을 얻고 잇속만 차리기 위해 남들과 왕래한다. 그는 너에게서 조금이라도 득을 볼 수 있으면 너에게 잘 보이려 하면서 관계를 다지지만 득 볼 일이 없으면 여지없이 내팽개치고 널 진심으로 대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인성이 없는 것이다.
오늘 이야기에서 선물을 보낸 그런 부류의 사람을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런 사람들은 왜 선물을 보내느냐? 이게 우연이겠느냐? 몇 년에 한 번이라면 우연이겠지만 한 계절에 똑같은 일이 네 번이나 일어났는데 우연으로 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의 이런 행동은 우연으로 볼 수 없다. 그의 성품이 일시적으로 패괴를 표출하거나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그의 이런 행동의 성질이 무엇이겠느냐? 방금 우리는 그가 이렇게 한 것에 대해 태도가 불손하고 무책임하며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경솔하고 충동적으로 행동하며, 성품이 야만적이라고 했다. 그러면 그는 왜 이런 행동을 했겠느냐? 왜 이런 것들을 남들에게는 주지 않고 나에게만 줬겠느냐? 내 신분, 지위가 달랐기에 이런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선물을 준 그의 속셈과 이런 행동의 성질을 알 수 있지 않겠느냐? 목적이 무엇이었겠느냐? (잘 보이려는 것입니다.) 그렇다. 그가 잘 보이려 한 행동을 가장 정확하게 정의하는 단어가 무엇이냐? ‘약다’이다. 환심을 사고, 잔머리로 이득을 보는 것이다. 아주 교묘하게 환심을 사서 그가 파 놓은 함정에 자기도 모르게 걸려들어 그가 뭘 해도 좋게 느껴진다. 사실 그는 전혀 진정성 없이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으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 한다. 그는 이런 짓을 하면서 어떤 대가가 따를지는 꼼꼼하게 따져 보지도 않는다. 그냥 거저 주운 것을 네게 주면서 그가 배려심이 넘친다는 생각에 미소로 화답하게 만든다. 이게 무슨 뜻이겠느냐? 그가 돈 한 푼 쓰지 않고 네가 큰 이익을 얻은 것처럼 느끼게 만드니 이는 대놓고 너를 바보 취급하는 것이다. 이런 뜻이 아니겠느냐? 그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한다. ‘돈 한 푼, 힘 한 번 쓰지 않고 성의 없이 선물 하나 보내서 날 기억하게 하고, 내게 호의, 배려심, 충성심이 있고, 내게 사랑이 있다고 여기게 만들겠어.’ 자기가 이런 사람이라고 너를 오해하게 만드니 이것이 바로 약다는 것이고 잔머리를 굴린다는 것이다. 아무 대가나 진정성도 없이 싸구려 호의로 이익이나 혜택은 최대한 취하려 하는 것은 약은 짓이다. 너희는 이럴 수 있느냐? 모두가 그럴 수 있다. 단지 너희가 그와 똑같은 일을 하지 않았을 뿐, 기회가 생기면 너희도 그렇게 할 것이다. 이것이 이런 부류의 사람과 왕래하면서 내가 내린 첫 번째 결론이다. 즉, 이런 부류의 사람은 아주 약다는 것이다. 그들이 믿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득이 되고 복을 줄 수 있어서 따를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을 따른다. 이 일은 이런 부류 사람의 믿음을 완전히 폭로해서 그의 진상이 무엇인지 드러냈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충성, 순종을 너무 단순하게 이해해서 약빠르게 행동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칭찬을 받아 복을 받으려는 개인의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진정성이 있겠느냐? 그리고 경외심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이것이 첫 번째 결론이다. 내 말이 맞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게 누명을 씌우는 것이냐? 크게 비난하는 것이냐? 절대 아니다. 그의 본질에 따라 말하면 이보다 훨씬 심각하다. 최소한 그는 하나님을 기만하고 희롱했다.
두 번째, 이런 부류의 사람에게서 무엇을 보았냐면 사람의 마음이 너무 무시무시하다는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어디가 무시무시하겠느냐? 어째서 사람의 마음이 무시무시하다고 하겠느냐? (이 사람은 복을 받으려는 자신의 속셈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께 잘 보이려 했습니다. 그러면서 무책임하게 행동했고 하나님이 이것을 드시면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 결과가 어떨지는 고려하지도 않았습니다. 자기 가족에게 먹을 것을 줄 때는 뒷일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드릴 땐 뒷일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잘 보이려 했습니다. 그의 이기적이고 비열한 모습과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리가 없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말인즉슨 너를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냐?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꿍꿍이가 너무 무시무시하구나!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자기 가족처럼만 대했어도 속이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정말 무시무시하다. 친구라면 이렇게 대하겠느냐? 역시 그러지 않을 것이다. 친구는 무엇을 먹으면 좋은지 알려 줄 것이다. 만약 이것을 먹고 부작용이 생긴다면 절대 먹지 말라고 할 것이다. 친구도 이 정도는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자가 이렇게 할 수 있겠느냐? 그러지 못한다. 나한테조차 이러는데 너희에게는 더 그럴 것이다. 그의 무서운 점에는 또 무엇이 있느냐? (그의 속셈이 너무 교묘합니다. 그는 겉으로만 열심인 척하는 식으로 속내를 감추는데 사실 그는 싸구려 물건으로 최대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으니 너무 무서운 것 같습니다.) 좋은 관점이다. 방금 그의 이기적인 면을 말했는데 이것이 그의 속셈이다. 너희가 말한 대로 사람 내면 깊은 곳의 이런 인성에서 드러나는 것, 자기가 헤아릴 수 있거나 헤아릴 수 없는 것, 남들이 볼 수 있거나 볼 수 없는 것, 혹은 해석할 수 없는 것, 이런 것들은 어디서 비롯되느냐? 부모가 가르친 것이냐? 학교에서 가르친 것이냐? 아니면 사회에 물든 것이냐? 어디서 비롯된 것이겠느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것이 태생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태생적인 것은 무엇과 관련되느냐? 본성 본질과 관련된다. 그럼 그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가 예전부터 어느 정도 의도한 것이겠느냐? 아니면 갑자기 든 생각이겠느냐?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보고 깨달은 것이겠느냐? 아니면 어떤 상황에서 이렇게 행동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겠느냐? 그것도 아니면 내가 그에게 어떤 암시를 준 것이겠느냐? 모두 아니다. 비록 이런 몇 가지 사소한 일은 겉으로는 평범하게 보이지만 그 이면의 성질은 모두 평범하지 않다. 장본인인 그가 이런 일의 결과가 무엇인지 의식할 수 있었겠느냐? 그는 의식하지 못했다. 왜 그는 의식하지 못했느냐? 예를 들어 네가 노점에서 싸구려 물건을 하나 사서 사장한테 선물한다면 선물을 줄 때 이런 예상을 하지 않겠느냐? ‘사장님이 노점에서 이걸 보시지 않을까? 인터넷에서 이 물건의 가격을 찾아보지 않으실까? 이 물건의 가격을 알려 주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이걸 보고 날 어떻게 보실까?’ 이렇게 예상하지 않겠느냐? 너는 이런 예상부터 해 보고 나서 살 것이다. 만약 이 물건이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예상된다면 그래도 선물하겠느냐? 선물할 리 없다. 만약 그 물건을 선물하는 게 돈도 덜 들고 사장도 좋아하게 할 수 있다면 너는 분명히 선물할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에서 이자는 이런 걸 예상하지 않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했겠느냐? 그는 이래야만 그가 의도한 바를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분석을 통해 이제 이 일의 성질이 도출되었다. 그럼 이 일의 성질을 통해 무엇을 볼 수 있느냐? 사람과 접촉하면서 사람에게서 보게 된 두 번째 결론은 바로 사람의 마음이 무시무시하다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표출하는 패괴 성품이 의도적이든 어쩔 수 없는 것이든 한 가지 결론을 도출할 수 있지 않겠느냐? 사람의 마음이 무시무시한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너무 무감각하기 때문이냐? 무감각한 사람은 지각하지 못하는데 무감각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 올바르겠느냐? (올바르지 않습니다.) 그럼 우매하기 때문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럼 그 이유는 결국 무엇으로 귀결되어야 하겠느냐? 사람의 사악한 성품에 귀결되어야 한다. 사람의 무서운 점이 무엇인지 알려 주겠다. 바로 사람의 마음속에 마귀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너희는 이 말에 어떤 느낌이 드느냐? 왜 사람의 마음속에 마귀가 살고 있다 하겠느냐? 너희가 이해할 수 있는 게 무엇이냐? 말해 보아라, 이 말이 무섭지 않으냐? 이 말을 듣고 소름이 끼치지 않느냐? 너희는 지금껏 너희 마음속에 마귀가 살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저 패괴 성품이 있다고만 생각했을 뿐 마귀가 그 안에 살고 있는지는 몰랐다가 이제서야 알게 된 것이다. 이건 심각한 문제가 아니냐? 내가 정확하게 보지 않았느냐? (맞습니다.) 문제를 근본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내가 왜 사람의 마음속에 마귀가 살고 있다고 하는지 고민해 보아라. 그리고 양심과 이성을 지닌 사람이 이렇게 하나님을 기만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라. 이게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냐? 이것은 눈을 부릅뜨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지 결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러 이 땅에 왔는데 사람과 하나님은 어떤 관계냐? 수직적인 관계이냐? 친구이냐? 가족이냐? 과연 어떤 관계이냐? 너는 이 관계를 어떻게 처리하고 대하느냐? 네가 하나님과 접하고 함께 지낼 때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느냐?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과 함께 지내야 하느냐? (경외심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경외심은 그다지 현실적이지 않은 것 같다.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으로는 부족하다. 만약 네가 나를 서로 잘 모르고 그저 알고만 지내서 친구라고 할 수도 없는 평범한 사람으로 여긴다면 우리 관계가 어떻게 조화와 융합을 이룰 수 있겠느냐? 양심적인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적절한지 알아야 한다. (존중해야 합니다.) 이는 가장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가령 상대방의 이름도 모를 만큼 아직 서로를 잘 모르는 두 사람이 만났는데 상대방이 얌전한 것을 보고 한 사람이 희롱하려 한다면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냐? 가장 기본적인 존중도 하지 않는다면 인성이 있겠느냐? 사람과 사람이 함께 지내면서 어떤 논쟁이나 갈등이 있든 적어도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 존중은 처신의 가장 기본적인 상식으로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최소한의 존중이 있어야 한다. 그럼 사람과 하나님이 함께 지낼 때는 이것이 있느냐? 만약 네가 이것조차 도달하지 못한다면 네 마음속에 하나님과 너는 어떤 관계가 되겠느냐? 제삼자도 아닌 아무 관계도 아니게 될 것이다. 그러니 선물을 보낸 그가 하나님을 이렇게 대하는 것은 존중이 없는 것도 모자라 하나님을 속이려 한 것이다. 그는 속으로 하나님을 존중할 필요가 없다고, 먹고 건강에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 세심하고 꼼꼼하게 살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들은 그의 고려 대상이 아니다. 술수를 써서 하나님을 속여 환심을 사기만 하면 되고, 하나님을 속이는 것만이 최선이라는 것이 그의 속내다. 사람이 이런 마음을 품는 것이 무시무시하지 않으냐? 정말 무시무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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