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조 사악함과 음험함, 그리고 간사함(2) 제 1 부
참고 캐나다 모 교회를 처리한 것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를 해결하다
지난번 예배 때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다. 무슨 일이었느냐? (캐나다 교회를 처리한 일입니다.) 이 일이 있은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아직 기억이 생생한 느낌이 들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이 일이 너희의 마음에 크게 와 닿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교회나 일부 사람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내가 상황에 따라 결정해 주고 원칙대로 그들을 처리한다. 캐나다 교회를 처리한 일 역시 기본적으로 이런 배경에서였다. 그럼 너희가 말해 보아라. 캐나다 교회에서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미혹한 사건이 벌어졌는데, 내가 왜 이렇게 처리했겠느냐? 너희 생각은 어떠냐? 많이 놀란 사람들이 있다고 하던데 왜 놀란 것이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이토록 가혹하게 처리하셨는데 그렇게 심각한 문제인가요? 어찌 이렇게 처리하실 수 있나요? 이게 원칙에 부합하나요? 즉흥적으로 그러신 거 아녜요? 이렇게 처리한 결과가 어떤가요? 그들이 한 일이 그렇게 심각한가요? 현지에서 알아봤는데, 그들의 태도나 말, 그리고 현지에서 들은 소식에 따르면 그렇게 가혹하게 처리하지 말았어야 할 것 같은데요?” 이것은 일부 사람들의 생각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처리하신 건 그럴 만한 도리와 생각이 있으실 겁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생각이겠느냐? 이 일을 처리한 데에는 초심이 있고 이유가 있지 않았겠느냐? 그들을 이렇게 처리한 것이 합리적이지 않으냐? (합리적입니다.) 너희가 합리적이라고 하니 오늘은 일단 이 문제를 논의해 보자. 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과연 어디가 합리적인지, 너희는 과연 이 일을 어떻게 보는지, 앞으로 너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너희 생각이 과연 옳은지, 틀리거나 치우친 부분은 없는지 살펴보자. 너희가 언제나 참고 입을 다물고 있으며 아무런 입장도 내보이지 않고 늘 마음이 꼬인다면 가장 좋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그러니 우리는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공감대를 형성하는 원칙이 무엇이겠느냐? 내가 내린 이 결단을 너희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기에 생각과 관념, 반발심을 품고 심지어 오해해서 의구심이나 다른 좋지 않은 생각들이 생겨난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우리가 이 문제를 논의해 보자. 만약 견해가 다르다면 우리에게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것이다. 그럼 어떻게 공감대를 형성하느냐? 의견이 다른 부분은 일단 놔두고 공통점부터 취하는 것은 어떠냐? 대충 타협하는 식으로 내가 한발 양보하고 너희도 한발 물러서는 것이 좋겠느냐? 분명히 안 된다. 이는 서로 합하는 방법이 아니다. 그럼 우리가 공감대를 형성하여 이 일에 대한 인식과 결정을 일치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좋겠느냐? 너희가 진리를 구하고 진리에 공을 들이며 진리를 인식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럼 나는 이 일의 자초지종을 모두에게 분명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누구도 마음속의 응어리를 가지지 마라. 이렇게 하면 이 일에 대한 견해가 일치되어 이 일을 잘 넘길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이런 일을 만나면 내가 또 이렇게 처리할 수도 있고, 그러지 않고 다른 방식을 취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너희는 이 일에서 무엇을 얻어야겠느냐? (진리를 구하는 법을 배우고 하나님이 왜 이렇게 처리하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두 가지 측면을 말해 주었구나. 아주 훌륭하다. 더 있느냐?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원칙을 깨닫고자 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경계이기도 합니다.) 이것도 하나의 측면이다.
캐나다 교회를 처리한 일을 분명히 이야기하려면 발단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어디서부터 말하면 좋겠느냐? 먼저 이들이 출국한 시점부터 이야기하겠다. 너무 뒤로 간 셈이냐? 너희는 웃기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것이 지난 일을 들추는 것이겠느냐? 아니다. 내가 말해 주는 이 방면의 도리를 들어 보면 너희는 내가 왜 여기서부터 이야기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일단 외국으로 온 모든 사람에게 부탁이나 사명, 책임이 있었는지는 차치하고 작은 측면부터 이야기하겠다. 모든 사람이 출국하는 것이 우연한 일이겠느냐? (아닙니다.)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네게 해외에 나가서 본분을 이행하겠다는 뜻이 생긴 것에서부터 외국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사람의 협력이라는 측면을 제외하면 사람이 순조롭게 출국하는 일이 누구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 네게 어떤 연줄이 있는지에 달린 것도 아니고, 네가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수속이 완벽한지에 달린 것도 아니다. 외국에 온 모든 사람은 공통된 인식이나 체험이 있었을 것이다. 다들 무엇을 체험했느냐? 사람이 순조롭게 출국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재한 것이지 사람이 재주가 있거나 능력이 대단해서가 아니다. 이는 한 나라 안에서 이쪽 지방에서 저쪽 지방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출국하는 것이며, 온갖 복잡한 수속이 요구된다. 특히 큰 붉은 용이 광적으로 탄압하고 체포하며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철저히 감시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 출국 수속은 그리 간단하게 처리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이들이 순조롭게 해외에 올 수 있었던 것이 전부 하나님의 주재이고 하나님의 전능을 나타낸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출국할 수 있는지, 수속이 순조롭게 진행되는지, 처리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지는 모두 하나님에게 달려 있으며, 하나님의 손이 지배하고 안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일을 믿지 않거나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사실이다. 사람의 협력과 하나님의 주재가 있었기에 이 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만약 네가 출국한 일에 대해 정의를 내린다면 이 일을 누가 촉진해서 성사시켰다고 하겠느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한 일이다. 사람이 자랑할 만한 건 하나도 없으니 마땅히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렇다면 너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본분을 잘 이행해야 합니다.) 열심히, 마음 편히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여러모로 봤을 때 결국 네가 출국해서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것은 네게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안배와 인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정의 내릴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왜 제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건가요? 하나님께서도 인도하시긴 했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셨어도 저는 대학원생에 영어도 8급이라 토플(TOEFL) 시험은 문제없습니다. 출국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거든요.” 이런 조건은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해당한다. 가령 어떤 사람은 돈이 많아서 투자 이민 수속을 밟을 수 있겠지만 이런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럼 이들의 출국에는 하나님의 주재나 허락이 없겠느냐? 여기에도 마찬가지다. 개별적인 경우는 접어 두고, 외국에 나가 생활하면서 앞으로 진심으로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사람들에 관해 얘기해 보자. 이 경우는 온전히 개인의 뜻만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너는 한편으로는 사명을 띠고 출국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인도로 출국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네가 출국하는 목적은 무엇이냐? (본분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네 수속을 준비하면서 시간이 얼마나 걸리고 대가를 얼마나 치렀든, 하나님이 어떻게 주재했든 아무튼 너는 출국해서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게 되었다. 네가 해외로 나온 일에는 사명이 있으며, 너는 책임과 막중한 임무를 짊어지고 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네가 해외로 나온 그 목표는 아주 분명할 것이다. 첫째, 너는 삶을 즐기려고 해외로 이민 온 것이 아니다. 둘째, 너는 삶의 돌파구를 찾으러 외국에 온 것이 아니다. 셋째, 너는 또 다른 라이프 스타일을 찾으러 외국에 온 것이 아니다. 넷째, 너는 소소한 삶을 살기 위해 외국에 온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겠느냐? 너는 세상을 추구하기 위해 외국에 온 것이 아니라 사명을 띠고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 본분을 이행하러 온 것이다. 이런 점에 근거해 봤을 때 네가 해외에 와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이겠느냐? (본분 이행입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 집에 와서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찾고 하나님 집의 안배대로 착실하고 분수에 맞게 네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옳다. 그리고 너는 누군가에게 협박당해 온 것도, 납치당해 온 것도 아니다. 네가 기꺼이 원해서 온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 보더라도 네가 해외에 왔으면 네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이게 맞지 않느냐? 사람에게 하는 이런 요구가 높으냐? (높지 않습니다.) 요구가 높지도 않고 과하지도 않다. 이건 억지를 부리는 것이 아니다. 그럼 내가 앞서 이야기한 내용에 따르면 사람은 자기 본분을 어떻게 대하고 본분을 어떻게 이행해야만 하나님이 네게 한 부탁 앞에서 떳떳할 수 있겠느냐? 이 일을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렇게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제 난 평범한 사람이 아니야. 내 어깨에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고. 어떤 책임이냐고? 하나님이 주신 부탁과 책임이지. 하나님이 나를 외국으로 인도하셨으니 나는 하나님의 복음 확장에 피조물로서 이행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해. 그게 내 본분이야.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내가 어떤 본분을 이행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거야. 그다음으로는 어떻게 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야 나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저버리지 않게 될지 고민하는 거야.’ 이렇게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과하겠느냐? 거짓된 생각이라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이는 이성과 인성,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각해 봐야 하는 일이다. 어떤 사람들이 “막상 외국에 와서 보니 생각했던 거랑 달라서 후회돼요.”라고 한다면 이런 인간을 뭐라고 하겠느냐? 이런 자는 인성이 없고 신의를 저버리는 자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외국에 와서도 본분에 몰두하고자 한다. 이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계속해서 캐나다 교회의 일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 가겠다. 캐나다 교회의 그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이 캐나다에 간 것이 우연이겠느냐?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왜 필연이라 하겠느냐? 하나님이 진작에 구분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필연’에는 하나님의 주재가 있다. 하나님이 네가 어떤 나라에 가도록 주재해서 일이 이렇게 성취된 것이다. 캐나다 교회의 그 사람들도 사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 아래 외국에 온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캐나다라는 나라로 인도하였고, 교회에서는 그들 각자의 재능과 그들의 업무, 특기 등 여러 요소에 따라 그들을 각 사역의 직위로 배치해 자기 본분을 이행하게 했다. 처음 그들이 본분을 이행할 때는 좀 경직되어 있었다. 여기서 ‘경직’이란 서툴다는 뜻의 경직이 아니라 비록 많은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러 왔지만 진리를 추구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왜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하겠느냐? 일이 생겨도 진리를 구하지 않고, 일할 때도 원칙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상부에서 무엇을 안배해 주거나 무엇을 하라고 알려 주어도 그들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본분을 이런 태도로 이행한 것이다. 이렇게 건성으로 하다 보니 본분을 이행하는 그들의 내적 상태도 난장판이 되고 엉망이 되어 버렸다. 이들의 교회 생활과 생명 진입은 늘 변변찮았고, 본분 이행의 성과도 별로였다. 진리를 교제해도 실제가 없었으며 거짓 리더나 적그리스도도 전혀 분별하지 못했다. 즉,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그곳에 적그리스도 옌 씨가 나타났고, 그들은 적그리스도와 한패가 되었다. 한패가 되었다는 게 무슨 말이겠느냐? 이 적그리스도는 26살 청년으로 사역한 지는 2년 반이 되었다. 그동안 많은 자매를 꾀었는데 아마 열 명은 될 것이다. 이들 중에는 그의 맘에 드는 자매도 있었고, 눈에 안 차는 자매는 상대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은 하나같이 적그리스도를 숭배하는 자들이었다. 2년 반 전, 캐나다 교회 사람들은 본분을 썩 잘 이행하지 못했고 모두들 의욕이 없는 상태였다. 상부에서 어떤 사역을 안배하든 그들은 건성으로 임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아서 사역이 실행되기가 쉽지 않았다. 상부에서 책망하면 그들은 고개를 떨구고 풀이 죽었다. 상부와 연락도 거의 안 하고 사역하는 태도도 무척 의기소침했다. 적그리스도 옌 씨가 리더가 되고 나서 그들의 상황은 날로 나빠져서 많은 사람이 허송세월하게 되었다. 어쩌다 그런 지경에 이르렀겠느냐? 이는 무엇과 관계가 있느냐? 객관적인 원인은 리더와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좋은 리더가 없었기 때문이다. 리더조차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친목만 도모하며 나쁜 짓만 일삼았다. 그럼 주관적인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그들이 전부 진리를 추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무리 속에서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고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것이 쉽겠느냐?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는 사람과 불신파들 속에서 나쁜 짓을 일삼고 건성으로 임하며 상부에 대항하는 것은 쉽지 않겠느냐? (쉽습니다.) 이런 무리 속에서 내리막길을 가고 타락하여 이방인처럼 되는 일은 쉽지 않겠느냐? 너무나 쉽다. 그들이 가는 길은 이런 길이었다. 본분 이행이라는 핑계로 하나님 집의 쌀을 축내고 하나님 집의 방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 그들을 부양하는데 그들은 하나님 집에서 속임수로 먹고 마시는 것도 모자라 천국에 들어가 상을 받기를 기대했다. 그들은 이토록 기만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적그리스도가 교회 사역을 교란했을 때 아무도 상부에 문제를 보고하지 않고 오직 한 여성만이 그 문제를 거짓 리더에게 보고했다. 결국 이 일은 해결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눈뜬장님이었다. 교회에 이렇게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고도 보고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리더 일꾼을 교체하는 원칙은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에 분명히 나와 있었지만 그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고 모두 적그리스도를 따라 허송세월했다. 이들 불신파 중에는 하나님을 믿은 지 오래된 사람은 20년이 넘었고 기간이 짧은 사람도 최소 5년은 되었다. 그런데 아무도 보고하지 않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무엇이냐? 여러 팀의 팀장과 부팀장이 모두 이 적그리스도와 내통한 것도 모자라 서로 질투하며 다퉜다는 것이다. 남녀가 연애하는 일은, 보통 성인이나 노인들은 한눈에 알 수 있다. 이런 남녀 간의 일은 누구에게나 민감한 일이어서 한눈에 알 수 있는데도 아무도 보고하지 않았다. 아무도 일어나 그들을 질책하거나 폭로하지 않았고, 그들을 분별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이 적그리스도 무리라는 걸 알고, 속으로 ‘난 절대 너희를 따르지 않을 거야. 윗선에 보고해서 너희를 교체시키겠어. 아니면 정의감이 있는 형제자매를 모아서 너희를 파면시키겠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한 사람이 있었느냐? 없었다. 이 사건이 폭로되기 직전까지 아무도 보고하지 않았다. 이들은 어떤 인간들이냐?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냐? (아닙니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이들은 눈앞에서 이런 큰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지각하지 못했다. 그러니 그들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었겠느냐? 그들은 어떤 태도로 본분을 대했겠느냐? 밥을 얻어먹으려 빌붙은 것이 분명하다. 그저 하루하루 되는대로 산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집은 빌붙기 좋은 곳이니 문제를 보아도 아무 소리 하지 말고 미움을 사지 말자고 생각했다. 괜히 ‘윗사람’에게 미운털이 박히면 큰일이라고, 그러면 좋은 결과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너는 남에게 미움을 살까 봐 미움받을 짓을 하지 못하면서 감히 하나님에게 미움을 살 짓은 하느냐? 하나님에게 미움을 사면 좋은 결과가 있겠느냐?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처리하겠느냐? 나쁜 결과가 따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나쁜 결과가 따를 것이다. 물론 그가 남에게 미움 살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 주된 이유는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사악한 사람이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것 외에도 어리석은 짓을 적잖이 저질렀다. 캐나다 교회에 사람은 얼마 없었지만 그들의 야심은 결코 작지 않았다. 본분 이행에 별 성과가 없는 게 분명한데도 사역 범위를 확대하려 했고, 집 매물을 물색하다 결국 쓸데없이 계약금을 지불한 것이다. 지금은 그들 중 대부분이 격리되었다. 너희가 보기에 이것이 어떤 무리 같으냐? 짐승의 무리이고 얼간이의 무리가 아니냐? 분명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그렇게 제물을 낭비했다.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는 사람이나 정의감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오로지 마귀 무리뿐이었다! 정말이지 분통 터지는 일이다!
캐나다 교회 인원수는 그다지 많지 않아서 몇백 명밖에 되지 않는다. 이들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직무를 소홀히 하며 패거리를 짓고 허송세월하고 있었으니 분통 터지는 일이 아니겠느냐? 사역에 효율이 없고 진척도 없었다. 모두가 옥신각신하며 조화롭게 협력하지 않았다. 리더와 일부 사람은 나쁜 짓을 일삼는데 아무도 마음을 졸이거나 속을 끓이지 않았다. 괴로워하거나 이 일로 기도하는 사람도 없었고, 상부에 구하거나 도움을 요청하는 이도 없었다. 이렇게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아무도 일어나서 “우리가 이런 식으로 본분을 이행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이행하는 이 본분은 하나님이 부탁하신 건데 하나님을 실망시켜 드리면 안 됩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부족함이 없었다. 인원수도, 각종 설비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럼 무엇이 부족하겠느냐? 부족함은 좋은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도 교회 사역에 부담을 느끼거나 하나님 집 사역을 지키지 않았다. 나서서 목소리를 내거나 분별 측면의 진리를 교제하여 모두가 일어나 거짓 리더와 적그리스도를 분별하고 폭로하게 하는 이도 없었다. 이렇게 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이들 얼간이가 눈이 멀어 보지 못한 것이냐, 아니면 자질이 떨어지거나 나이 들어 노망이 든 것이냐? (아닙니다.) 그 어떤 원인도 아니다. 그럼 실상은 무엇이냐? 그들은 모두 적그리스도와 한패여서 서로 보호하고 아첨하며 아무도 누구를 폭로하지 않았다. 모두가 마귀의 소굴에서 뒹굴고 있었다. 본분이나 하나님의 부탁이 그들의 마음속에 있었겠느냐?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되는대로 살면서 마음에 아무런 죄책감을 갖지 않았다. 그들 마음에 죄책감이 없었다는 것은 어떤 현상이냐? 성령이 역사하지 않고 하나님이 버린 것이다. 하나님이 버렸다는 말은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다. 즉, 본분과 진리, 하나님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 그리고 그들의 생각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싫어하게 되었다는 말이고, 그들에게 더 이상 이 본분을 이행할 자격이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가책, 징계가 보이지 않았고 아무런 양심의 발견도 없었으며 나아가 깨우침과 빛 비춤, 책망과 훈계, 심판과 형벌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런 것은 그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그들은 무감각해졌고 마귀와 다를 바 없었다. 하나님 집에서 다년간 설교를 들으며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는 말씀,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방법에 관한 말씀도 들었는데, 그동안 그들이 진리를 구하고 받아들였느냐? 적그리스도를 분별했느냐? 적그리스도의 여러 모습에 대해 토론을 벌였느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만약 정말 그랬더라면, 틀림없이 몇 명이나마 일어나 적그리스도를 폭로하고 고발했을 것이고, 이 지경까지 엉망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한 무리의 바보, 못난이들이다! 그들의 실상과 그런 모습들, 그리고 그들에 대한 규정을 근거로 해서 나는 그들을 B조로 보내서 격리 반성을 하게 했다. 이것이 과한 처사였느냐? (아닙니다.) 하나도 과하지 않다. 과하지 않다면, 가장 적당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이는 그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어떤 기회겠느냐? 그들이 정말 인성이나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어서 회개하고 뉘우친다면 교회로 돌아올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회개의 마음조차 없다면 평생 격리되고 심지어 교회에서 제명당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는 것이다. 곧바로 제명하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만약 이들이 “저희가 나쁜 짓 좀 했다고 이렇게 화를 내시고 격리시키시는군요. 그래도 지금껏 본분을 이행하면서 공로는 없다 해도 나름대로 수고했는데 왜 이건 생각해 주지 않으시죠?”라고 말한다면, 사실 그들을 격리시킨 것만으로도 충분히 관용을 베푼 것이다. 그들의 모든 행동에 따르면 제명당해 마땅하다. 그들의 이런 태도를 보면 너무나도 위험하다! 그럼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겠느냐? 두 가지 단계로 나누어야 한다. 먼저 그들을 격리시킨 다음, 격리 동안 그들의 상황과 각자의 태도를 참작해서 교회에 계속 머물게 하거나 제명하는 것이다. 이 정도면 그들에게는 충분한 관용이 아니겠느냐?
그 캐나다 교회 사람들이 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저질러서 그들의 행동에 따라 격리한 것은 너무나도 큰 관용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일부 사람들은 이렇게 처리한 것에 이견을 갖느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께서 이렇게 처리하신 것이 옳긴 하지만 그래도 문제가 없는 건 아녜요. 그 캐나다 교회 사람들은 자업자득이고 인과응보지만 당신께서 이렇게 처리하신 것은 일벌백계하려는 것이 아닌가요?”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올바르냐?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일부 사람들이 “이렇게 처리하는 게 맞죠. 닭을 죽여 원숭이에게 보여 주는 것처럼, 산을 두드려 범을 놀라게 하는 것처럼 일벌백계해야 해요.”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이는 이방인의 말이 아니냐? 이는 일을 바라보는 이방인의 관점이다. 아마도 너희가 이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방인의 관점을 말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말을 하면 역겹지 않으냐? 너희가 이런 말로 이 일을 해석하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말이다. 그런 상황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이렇게 처리한 것은 과연 무슨 의미겠느냐? (원칙대로 처리하신 것입니다.) 원칙대로 처리한 것은 맞다. 이 말이 실제이다. 또 무엇이 있느냐? 이는 그들의 자업자득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외에 무엇보다 간단하게 두 어절로 말할 수 있는데 무엇이겠느냐? (‘당해도 싸다’입니다.) 그렇다. 그들의 소행에 따르면 그들은 당해도 싸다. 자업자득인 것이다. 하나님은 진리 원칙에 합당하게 일하고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 준다. 또한, 사람은 자기가 한 일에 대해 응당한 결과를 감수해야 한다. 잘못을 저지르면 징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합당한 것이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들이 행한 대로 갚아 준다. 이것이 바로 그들에 대한 응보이고, 요즘 말로 하면 원칙대로 그들을 처리하는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그들의 일을 폭로한 것 중에 어떤 게 사실이 아니더냐? 그들의 그런 일에 대한 분석과 정의, 그들에 대한 규정과 관련해서 어떤 말이 사실이 아니더냐? 전부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이러한 모습과 모든 행동에 따라 그들에게 갚아 주면 안 될 이유가 무엇이냐? 산을 두드려 범을 놀라게 하는 것, 일벌백계, 닭을 죽여 원숭이에게 보여 주는 것 등이 캐나다 교회를 처리한 일과 같은 성질이겠느냐? (다릅니다.) 그 일벌백계의 목적이 무엇이냐? 어떤 성질이냐? 일벌백계, 산을 두드려 범을 놀라게 하는 것, 닭을 죽여 원숭이에게 보여 주는 것, 이 말은 기본적으로 같은 성질이다. 과연 어떤 성질이겠느냐? 통치자나 권세자가 그가 생각하는 특정 장소에서 자신의 위신을 세우려 어떤 일을 함으로써 남에게 겁주려는 목적을 이루는 것으로, 이를 일벌백계라 한다. 그가 이렇게 하는 목적이 무엇이냐? 남들이 그에게 복종하고 그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앞에서 경솔하게 행동하고 제멋대로 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럼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이 원칙에 부합하느냐? (부합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하느냐? 통치자의 행동에는 동기가 있다. 그의 동기는 바로 그의 정권을 공고히 하고 그의 권세를 지키는 것이니 그가 그 일을 구실로 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그 일을 하는 성질인 것이다. 캐나다 교회 사건은 이방인의 사탄 철학이 아닌 진리 원칙을 토대로 처리했다.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미혹하며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여 교회를 엉망으로 만들었는데도 많은 사람이 적그리스도를 옹호하니 그들의 이런 성질은 실로 악랄하기 그지없다! 그들은 이렇게 그럭저럭 지낼 바에 교회를 떠나 본인의 삶을 사는 것이 낫다. 이렇게 하면 최소한 하나님 집의 자원은 낭비되지 않을 테니 이 또한 좋은 일이다.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 했느냐? 그들의 양심에는 이런 지각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 집의 재산과 물질을 낭비하고 본분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것도 모자라 적그리스도와 한통속이 되어 함께 악행을 저질렀다. 이 얼마나 심각한 성질이냐! 하나님 집에서 그들을 이렇게 처리한 것은 그들이 자기를 반성하고 인식하게 하여 뉘우치고 회개할 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그들에게 유익하다. 만약 처리하지 않는다면 내년 오늘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배반하고 세상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다행히 적절한 때에 그들을 격리하고 처리해서 더 많은 사람이 악을 저지르고 교회 사역에 더 큰 손실이 발생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이것이 그들에게 구원이겠느냐, 아니면 도태겠느냐? (구원입니다.) 사실 구원이며, 그들을 도와주려는 것이다. 그들이 정신 차리게끔 그들에게 경종을 울려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이렇게 하다가는 침륜되고 멸망되고 구원받을 희망이 사라진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이 점을 깨닫는다면 그들에게 아직 희망이 있을 것이고, 이조차 깨닫지 못해 계속 의기소침하고 타락하며 자포자기하면서 상부에 대항하고 소극적인 정서를 보이며 관념을 분출한다면 문제가 된다. 너희는 그들이 어떻게 하길 바라느냐? (회개하길 바랍니다.) 너희도 그들이 나아지고 회개하기를 바라는데 나는 어떻겠느냐? 내가 그들이 회개하지 않기를 바라고 그들은 없는 게 낫다며 모두 정리해 내보내기를 바라겠느냐? 내가 이런 마음을 가지겠느냐? (아닙니다.) 이런 마음이 아니다. 그들이 나아지고 회개하며 회개하고 나서는 하나님 집에 돌아와 다시 본분을 이행해서 예전 모습과는 달라지기를 바란다. 그런 말이 있지 않으냐?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욘 3:8) 만약 이런 성과에 이른다면 그들에게 이것은 평생에 지울 수 없는 기억이자 흔치 않은 체험일 것이니 이는 잘된 일일 것이다. 이것은 그들 각자의 추구에 달려 있다.
성경은 개역한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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