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조 사악함과 음험함, 그리고 간사함(1) 제 4 부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모습에는 주로 어떤 게 있느냐? 그가 무엇이 옳고 진리에 부합하는지 뻔히 알면서 일할 때는 언제나 원칙과 진리를 어기고 오로지 개인의 이익과 지위만 충족시키기를 선택하는 것,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성품의 가장 주된 모습이다. 그가 글귀와 도리를 얼마나 이해했든, 설교를 얼마나 그럴싸하게 하든, 남들에게 얼마나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든 일할 때 그가 택하는 원칙과 방식은 오직 하나, 영락없이 진리를 어기고 자신의 이익을 지키며 진리에 끝까지 대항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택하는 일 처리의 원칙과 방식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이 상상하는 하나님과 진리는 과연 무엇이겠느냐? 진리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그저 말만 번지르르하게 할 수 있으면 된다는 식이지 결코 실행하려 하지는 않는다. 입으로만 떠들어서 하나님 선민의 우러름을 받고 이를 틈타 교회 리더직을 차지하여 하나님 선민을 장악하는 목적을 이루려고 한다. 그들이 도리를 전하는 것을 이용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진리를 경시하고 농락하며 유린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진리를 이렇게 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들은 그저 진리를 이용할 뿐이다. 그들의 마음속에 진리는 하나의 구호이자 훌륭한 이론에 그친다. 사람을 미혹하고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는 데에 쓸 수 있고, 아름다운 사물에 대한 사람의 갈망을 채워 줄 수 있는 훌륭한 이론인 것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 진리를 실행하고 살아 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이 통할 리 없고 가능하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직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통할 수 있어야 진리라는 것이다. 그들은 입으로는 진리를 이야기하지만 속으로는 이를 진리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 일을 어떻게 검증할 수 있겠느냐? (그는 진리를 실행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전혀 실행하지 않는다는 점은 하나의 측면이다.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현실 생활에서 일이 생겼을 때 그가 이해한 그런 도리가 결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도리를 말하는 것도 청산유수지만 막상 일이 일어나면 그의 행동은 치우쳐 버린다. 진리는 실행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사람의 관념과 상상, 사람의 기준, 취향에는 부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냐? 적어도 사람들이 납득해야 그의 지위를 다질 수 있다. 하지만 현실 생활에서 그가 하는 일은 몹시 치우쳐 있어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어째서 진리를 깨닫지 못하겠느냐? 그는 마음속으로 진리를 싫어하고 진리를 인정하지 않으며 사탄 철학에 따라 일하기를 좋아하고 인위적인 방법으로 일을 처리하려고만 한다. 처리하고 나서 남들이 수긍하고 자기 위신만 세워지면 그만인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어떤 장소에서 누군가의 실속 없는 이론을 들을 땐 귀를 곤두세우지만 진리 실제나 사람의 여러 가지 내적 상태 등의 구체적인 내용을 들으면 자기에게 하는 말 같아서 마음에 찔리니 반감을 품고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에게 요즘 내적 상태가 어떤지, 발전은 있었는지, 본분 이행에 어려움은 없는지 교제해 보라고 하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네가 다시 이런 측면의 진리를 교제하면 그는 졸아 버린다. 듣기 싫은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너와 사담을 나눌 땐 몸을 앞으로 바싹 기울이고 듣지만 진리를 교제하기만 하면 구석에 숨어서 꾸벅꾸벅 존다. 진리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어느 정도까지 진리를 사랑하지 않겠느냐? 좋게 말하면 흥미가 없는 것이고 힘쓰는 자가 되면 충분하다는 것이며, 나쁘게 말하면 진리를 싫어하고 진리에 대해 강한 반감이 들어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리더가 되면 적그리스도이고, 일반적인 따르는 자가 된다 해도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사람, 적그리스도의 싹이다. 겉으로는 머리도 좋고 은사도 있어 좋은 재목으로 보이는데 본성 본질을 보면 적그리스도이니 실상은 이런 것이다. 이를 판단하는 근거가 무엇이냐?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를 근거로 한다. 이는 진리를 대하는 측면이다. 또 다른 측면으로 보면, 많은 경우 사람은 진리와 직접 마주하지 않는다. 진리에 관련되지 않는 일도 있고 어떤 측면의 진리와 관련되는지 생각지 못하는 일도 있다. 그렇다면 사람이 직접 대면하는 이는 누구냐? 직접 대면하는 이는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느냐? 어떤 모습에서 그들의 사악한 성품을 알 수 있느냐? 그들이 하나님에게 진실하게 기도하고 하나님과 진실하게 교제하느냐? 정직한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 진실한 믿음을 지니고 있느냐? (그러지 않습니다.) 진실하게 의지하거나 맡기고 있느냐? 진실하게 경외하느냐? (그러지 않습니다.) 이는 정말 실제적인 문제이지 절대 형식적으로 하는 말이나 입버릇처럼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네가 이 말이 실제적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너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이다. 너희에게 이런 사람의 모습에 관해 예를 들어 주겠다. 어떤 사람이 예배 때 주먹을 쥐고 맹세했다. “저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직장도 그만두겠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끝까지 하나님을 따르겠어요!” 그렇게 소리친 후 하나님에게 헌신하려고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에게 많은 복을 받을 수 있을까? 뭐라도 해서 하나님께 보여 드려야겠어.’ 그러다가 결국 그와 같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지? 그럼 하나님과 거리를 좀 둬서 하나님 눈에 띄지 말아야겠어.’ 이는 어떤 내적 상태이냐? (경계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계하기 위해서다. 이 경계 속에는 어떤 성품이 있느냐? 사악함이다. 일할 때 항상 하나님을 경계하고, 하나님께 들통 날까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냐? 이것은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것이 아니냐? 이런 내적 상태는 너무 소극적이고 비정상적이다. 비록 그 역시 남들을 따라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겠지만 하나님의 심판과 폭로의 말씀만 들으면 도망가거나 재빨리 위장하며 덮어 감추려고 절충안을 찾고 은폐하려 애쓴다. 있는 힘껏 도망치고 경계하면서 마음속으로 계속 하나님과 싸우는 것이다. 그들은 일할 때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구하지도 않으면서 자기가 불평 없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을 더 많이 보여 주려 한다. 가식과 외식을 통해 모두의 지지를 얻으려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했는지, 하나님은 이 부류의 사람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이 부류의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며 정의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자기 마음속에 하나님은 누군지도 그는 잘 모른다. 전부 상상이고 판단이다. 하나님의 행사가 관념에 부합하지 않으면 속으로 정죄하기까지 한다. 비록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내면은 의심으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사악한 성품이다.
어떤 적그리스도는 항상 하나님을 시험한다. 그들은 그때그때 상황을 봐 가면서 행동하니 쉽게 말해 두고 보는 것이다. 두고 본다는 게 무슨 말이냐? 예를 들어 보겠다. 가령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직장을 그만뒀습니다. 앞으로 당신께서 저를 보살펴 주시길 원합니다. 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맡기고 제 평생을 당신께 바치겠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나서 그는 하나님이 어떤 축복을 주는지, 초자연적인 계시를 주거나 더 큰 은혜를 주는지, 최소한 자기가 세상에서 일할 때보다 더 많이 받고 더 좋은 것을 누리게 해 주는지 지켜본다. 이는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도와 봉헌이 무엇이겠느냐? (거래입니다.) 이 거래 속에 사악한 성품이 들어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는 적은 밑천으로 큰 이득을 얻는 방식으로 하나님에게 은혜와 축복을 받아 내려 한다. 이것이 목적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국내 여건이 너무 안 좋아요. 큰 붉은 용의 체포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어요. 두 사람만 모여서 예배드려도 위험할 정도예요. 4인 가족이 함께 예배드리는 것도 위험하고요. 국내 여건상 하나님을 믿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죠. 정말 문제가 터지면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이렇게 되면 믿은 보람이 없는 거잖아요?” 그러고는 ‘해외로 나갈 방법을 찾아야겠어. 예전에야 여건이 좋았으니 편하게 살려고 외국에 가기 싫었던 거지. 온 가족이 모여 살면 얼마나 좋아? 거기에 하나님을 믿어서 복도 받으면 일거양득이고 말이야. 그런데 지금 보니 분위기도 안 좋고 재난도 닥쳤으니 빨리 해외로 떠나야겠어. 해외에서도 본분은 이행할 수 있고, 본분을 이행하다 보면 복받을 기회도 있겠지.’라고 생각해서 결국 해외로 도피하고 만다. 이를 무엇이라고 하느냐? 이것을 기회주의라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타산을 하기 마련이고 거래하려는 심리가 있다. 이것이 사악함이 아니겠느냐? 너희 가운데 이런 사람이 없느냐? ‘세상에서 남에게 괴롭힘을 당하면 부모나 가족이 지켜 주지만 하나님을 믿어서 체포되면 하나님이 지켜 주실까?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아. 장담 못 한다면 어쩌지? 부모님은 절대 지켜 줄 수 없을 텐데 말이야. 하나님을 믿어서 체포되면 일반인은 꺼내 줄 수 없어. 만에 하나 큰 붉은 용의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유다가 되면 내 보잘것없는 목숨도 끝나는 거잖아? 아무래도 해외에서 하나님을 믿는 게 좋겠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느냐?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다면 “저희를 모함하시는군요. 저희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 않겠느냐? 이런 사람이 분명 적지 않을 것이다. 너는 차차 알게 될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의 주된 특징이 무엇이냐? 첫째, 그는 긍정적인 사물을 인정하지 않고 진리가 있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사설과 궤변, 사악하고 부정적인 사물이 진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측면의 모습이다. 예를 들면 “행복은 스스로 잡아야 한다.”, “권력이 있어야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논리이다. 그는 권력이 생기면 아부하는 자, 뇌물을 바치는 자, 온갖 지위의 복과 즐거움이 찾아오고 남에게 괴롭힘을 당하거나 이끌려 다닐 필요 없이 자기가 남을 이끌 테니 이것이야말로 확실한 도리라고 생각한다. 이런 심산은 어떠냐? 이것이 사악함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적그리스도는 그의 사탄 논리와 사설, 궤변으로 진리를 대신한다. 이것이 사악함의 한 측면이다. 먼저, 그는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긍정적인 사물의 존재와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밖에 이 세상에 긍정적인 사물도 있고 부정적인 사물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도 일부 있겠지만, 그가 긍정적인 사물을 어떻게 대하고 진리의 존재를 어떻게 대하겠느냐? 그는 여전히 이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가 택한 삶과 하나님을 믿는 길은 여전히 부정적이고 진리에 합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자기 이익만 챙긴다. 긍정적인 사물이든, 부정적인 사물이든 자기 이익만 지킬 수 있다면 전부 옳은 것이고 지고지상한 것이다. 이것이 사악한 성품이 아니겠느냐? 또 한편으로, 사악한 본질을 지닌 이 부류의 사람은 태생적으로 하나님의 낮춤과 감춤, 하나님의 신실함과 선함을 멸시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멸시한다. 예를 들어, 너희가 봤을 때 나는 매우 평범하지 않으냐? 평범하다. 그런데 말하지 못할 게 뭐가 있느냐? 나 스스로도 평범함을 인정한다. 나는 한 번도 내가 비범하거나 위대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항상 인정해 왔고 또한 이 사실을 직시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초인이나 위인 따위가 되고 싶지 않다. 그게 얼마나 피곤하겠느냐! 나란 평범한 사람을 대수롭지 않게 보고 늘 관념을 가지는 사람이 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내 앞에 나아와 내 겉모습이 어떻든 어느 정도 경건한 모습을 보인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나와 대화할 땐 그래도 공손하게 말하지만 속으로는 나를 경멸한다. 그의 말투나 몸가짐을 보면 알 수 있다. 겉으로는 공경하는 모습을 보일 때도 있지만 내가 뭐라고 하든 그는 아니라며 부인하기만 한다. 예를 들면 내가 오늘 날씨가 몹시 덥다고 하면 그는 “아뇨, 어제가 훨씬 더웠죠.”라고 한다. 부정하지 않았느냐? 네가 뭐라든 그는 아니라고만 한다. 이런 사람이 있지 않더냐? (있습니다.) 내가 “오늘 음식이 짜구나. 소금을 많이 쳤느냐, 아니면 간장을 많이 넣었느냐?”라고 물으면 그는 “모두 아닙니다. 설탕이 많이 들어갔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내가 뭐라든 그는 항상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다른 말을 하지 않게 된다. 말이 통하지 않고 공통분모도 없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일에 관한 나의 말을 들으면 “이쪽이 전문이시니 그럼 들어 보겠습니다.”라고 하지만 내가 외부적인 일을 이야기하면 들으려 하지 않는다. 마치 내가 외부적인 일은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그가 상대하지 않으면 나야 좋다. 조용히 있고 싶으니 다른 사람이 상대해 주는 것 따위는 필요치 않다. 내 할 일을 하면 된다. 내게도 직책이 있고 삶의 방식이 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사람의 이런 태도가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그가 보기에 내가 위인이나 능력자처럼 생기지 않고 언행도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니 이렇게 생각한다. ‘어째 하나님처럼 보이지 않지? 날 봐. 내가 하나님이었으면 누구보다 어울렸을 텐데.’ 하나님은 어울리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어울려야 한다고 네가 요구한 것뿐이다. 나는 내가 어울린다고 한 적이 없고 어울리길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어딜 가든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귀찮을 일이 없으니 차라리 모르는 게 좋다. 예수가 당시 유대 지역에서 그토록 많은 말씀과 사역을 했던 것을 생각해 보아라. 예수를 따르던 제자에게 어떤 패괴 성품이 있었든 예수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가 하나님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였다. 이것이 정상적인 관계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보고 “저 사람은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라고 했고, 심지어 예수를 오랫동안 따르던 일부 사람들도 항상 이런 태도를 취했다. 이는 육신을 입은 하나님이 보통의 정상인으로서 항상 마주하는 일이자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처음 만났을 때 매우 친절했고 헤어질 땐 엎드려 울기까지 했다. 하지만 실제로 함께 지낼 때는 영 아니어서 내가 참아야 할 때가 많았다. 왜 참아야 했겠느냐? 왜냐하면 어리석은 자, 교화되지 않는 자, 봉사하게 해야 하는 자, 말이 통하지 않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참아야 할 때가 있고, 어떤 사람들은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해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적대적인 성품을 지녀서 너무나도 역겹다. 어느 정도까지 적대하겠느냐? 예를 들면 귀여운 강아지를 보고 내가 “이 녀석을 얼룩 고양이라고 부르자!”라고 한다면 많은 사람이 이 이름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겠느냐? 그저 이름일 뿐이니 내가 먼저 이름을 지어주면 따라 부르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적대적인 성품을 가진 사람들은 따라 부르지 않고 “얼룩 고양이라니 무슨 이름이 그래요? 얼룩 고양이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 보네요! 이런 이름 말고 영어 이름으로 지어야죠.”라고 말한다. 그러면 나는 “난 영어 이름 지을 줄 잘 모르니 너희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도록 해라. 내가 양보하겠다.”라고 한다. 내가 왜 양보하겠느냐? 이렇게 사소한 일에 다툴 필요가 있겠느냐? 양보하지 않고 기어이 다투려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양보한다고 해서 내가 틀렸다고 생각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이 내가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원칙인 것이다. 내가 너와 다투지 않는다고 해서 너를 두려워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는 다투지 않지만 속으로는 네가 불신파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내가 개와 교류할지언정 너 같은 사람과는 교류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교류할 사람은 생활 반경에서 꼭 교류해야 할 일부 사람들 외에는 형제자매, 하나님 집의 사람들뿐이다. 이것이 나의 원칙이다. 이방인과는 한 사람도 교류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 집에서 불신파인 네가 하나님 집에 우호적이라면 교회의 친구가 되어 교회에 도움을 주거나 힘을 내고 일을 처리해 주는 것은 괜찮다. 교회가 너를 수용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느 형제자매를 대하는 것처럼 너와 교류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 사역이 무척 바빠 그런 일까지 대응할 시간이 없다. 몇 년간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성육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어느 정도 개념을 잡아야 하지만 경외하는 마음이 전혀 없이 이방인처럼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놈들을 무엇이라 하느냐? 바로 태생이 마귀이고 하나님의 원수이다. 사탄 마귀에 속하는 자와 깊이 교류하면 화근이 되고 재앙만 있을 뿐이다.
너희는 일상에서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할 것이다. 네가 어느 사람들과 합류하든 너를 달갑게 보지 않는 사람이 있다. 네가 그를 건드리거나 그의 미움을 산 적도 없는데 그가 네게 험담을 하고 너를 판단하며 헐뜯는다. 너는 영문을 모르는데 그는 너를 눈엣가시처럼 보고 너와 어울리지 않으며 괴롭힐 생각만 한다. 이게 어찌 된 일이겠느냐? 너는 그에게 무슨 잘못을 했는지도 모르는 채 이유 없이 그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이런 악인이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이런 자가 바로 적수이다. 이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다. 너는 아직 그와 교류하지 않았는데 그가 너를 보고 눈에 거슬려서 너를 괴롭힐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앙숙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너는 앙숙과 함께 지낼 수 있느냐? 같은 길을 갈 수 있느냐? 결코 그러지 못할 것이다. 그럼 너는 이런 사람과 다투고 시비를 따지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왜 따지지 않느냐?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긍정적인 사물, 올바른 것, 인류 중에 비교적 좋은 것, 다시 말해 인간이 동경하고 좋아하는 긍정적인 것을 싫어하고 이에 반감을 갖는다. 이런 자에게 뚜렷하게 보이는 성품이 바로 사악함이다. 그는 사악한 자이다. 예를 들어 여자 친구를 구하는 어떤 남자는 ‘외모가 어떻든 슬기롭고 착해서 잘 지낼 수만 있으면 돼. 특히 인성이랑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잘살든 못살든, 잘생겼든 못생겼든 혹은 병이 있든 죽을 때까지 나와 함께할 거야.’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올바른 사람이라면 모두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이런 관점을 싫어하고 반대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사악한 사람입니다.) 그럼 너희가 말해 보아라. 사악한 사람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겠느냐? 이런 말을 듣고 나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느냐? 너를 비웃을 것이다. “바보스럽네. 지금이 어느 시댄데 아직도 그런 사람을 찾고 있나요? 우유 빛깔 금수저를 찾아야죠!” 일반인은 올바르고 슬기로운 여자를 찾아 결혼해서 한평생 착실하게 살아간다. 온 가족이 똘똘 뭉쳐 평생 청렴하게 사는 것이다. 사악한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하겠느냐? (하지 않습니다.) 그는 “요즘 같은 세상에 여자 친구를 열 명도 못 사귀어 보고 서너 명의 처첩도 못 거느리면 남자라고 할 수 있나요? 헛산 거죠!”라며 늘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다. 올바르고 슬기롭고 착한 여자, 특히 인성과 신앙을 가진 여자를 찾는다는 네 말이 그에게 통하겠느냐? (통할 수 없습니다.) 너를 비웃기만 할 것이다. “정말 바보스럽기 짝이 없으시네! 요즘 세상에 남한테 간섭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뭘 하든 자기 마음이죠. 서양에 가봐요. 훨씬 자유롭다고요. 참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뭐 하러 그렇게 자기를 옭아매나요? 정말 바보스럽군요!” 그의 관점은 이런 것이다. 그렇다면 네가 그에게 긍정적인 사물, 즉 인류의 가장 아름다운, 진리에 속하고 정의에 속하는 긍정적인 사물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그가 듣고 어떻게 느끼겠느냐? 그는 반감을 품고 속으로 너를 욕할 것이다. 그리고 너를 속으로 경계하고 피해야 할 사람으로 이해할 것이다. 결이 다른 사람이니 같은 길을 가지 않는 것이다. 그는 네가 그와 같은 사람에 대해 반감을 품는 것을 알고, 또한 너 같은 사람을 속으로 무시한다. 그가 아무리 잘난 체하고 제멋대로여도 너와는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다. 네가 그에게 진리를 교제해서 바른길로 가라고 할까 두려워 심한 반감을 갖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마음속 깊이 모든 긍정적인 사물을 업신여긴다. 그래서 너희가 복음을 전할 때 이런 부류의 사람을 만나면 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전해 봤자 적그리스도라 구원을 얻지 못한다. 너희가 어째서 여기 앉아 설교를 듣겠느냐?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어서 그런 게 아니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할 때 성령이 네게 역사하면 네 마음이 감동과 격려를 받게 되고, 정의와 진리를 추구하여 구원받기 위해 자기를 바치고 고통받으며 헌신하고자 하게 된다. 사악한 사람들은 남들이 정의, 진리,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다는 말을 들으면 공허하다고 여기고, 말도 안 되는 구호라고 생각해 이런 사람들을 경시한다. 그러니 이 부류의 사람을 만나면 너희는 아무것도 교제하지 마라. 너희는 그들과 다른 사람이니 멀리하면 그만이다. 내가 이 부류의 사람을 만났을 때 나에 대한 태도와 말투가 저렇다면 그를 책망하고 훈계해야겠느냐?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거들떠보거나 상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네가 상대한다고 그가 바뀌겠느냐? 너는 그를 바꿀 수 없다. 그저 그를 한쪽에 내버려두면 그만이다. 이 부류의 사람은 하나님을 믿어도 오래가지 못한다. 그는 첫째로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둘째로 긍정적인 사물에 반감을 가지며, 셋째로 하나님을 경시하고, 하나님의 성품과 모든 사랑스러운 점을 마음속에서 가장 천대하고 멸시한다. 이로 인해 그는 영원히 하나님의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정해진다. 이 부류의 사람이 어디에 있든, 그가 솔직하든 간사하든 그에게 이런 모습이 있다는 것은 분명히 그의 성품에 사악한 부분이 있음을 결정한다.
적그리스도가 권력을 잡은 곳의 교회 생활과 하나님 선민의 본분 이행 성과는 좋지 않고, 하나님 집의 사역도 가로막힌다. 그러니 적그리스도를 해결하거나 출교하지 않는다면 교회 사역이 얼마나 큰 손실을 입고, 얼마나 많은 하나님 선민이 곤경에 빠지겠느냐! 거짓 리더는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못하고, 사무적 업무도 진척이 느리고 효율이 떨어진다. 또한, 자질이 뛰어나고 진리를 추구하는 훌륭한 사람을 양성하여 쓰지도 못한다. 그리고 적그리스도는 어떻겠느냐? 적그리스도가 권력을 잡으면 명예와 이익, 지위만을 위해 일하고 실제적인 사역은 조금도 하지 않으며 교회 사역을 직접적으로 방해하고 교란한다. 적그리스도는 오로지 파괴적인 일만 하니 사탄과 똑같다. 적그리스도는 진리를 사랑하고 추구하는 사람을 보면 불쾌한 마음이 든다. 이 불쾌함은 어디서 비롯되겠느냐? 이들의 사악한 성품에서 비롯된다. 즉, 그들의 본성 속에 있는, 정의와 긍정적인 사물, 진리를 싫어하고 하나님을 적대하는 사악한 성품 말이다. 그래서 그들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을 보면 “가방끈도 짧고 볼품없이 생겼는데 진리는 잘 추구하네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어떤 태도이냐? 무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형제자매는 특정 분야에 은사와 특기가 있어 해당 분야의 본분을 이행하고 싶어 한다. 사실, 그의 여러 여건으로 봐도 적합한데 적그리스도는 이런 형제자매를 어떻게 대하겠느냐? 그는 속으로 ‘네가 그 본분을 이행하려면 일단 나와 가까이 지내야 돼. 나와 한배를 타야 그 본분을 이행하는 걸 허락하겠어. 그러지 않을 거면 꿈도 꾸지 마!’라고 생각한다. 적그리스도는 이렇게 행동하지 않느냐?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 어느 정도 정의감과 인성이 있고 잘 추구하는 사람에 대해 적그리스도가 왜 그렇게 반감을 품겠느냐? 왜 이들에게 항상 대립하겠느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좋은 모습을 보이는 사람, 늘 소극적이지 않고 마음씨가 좋은 사람을 보면 그는 불쾌해한다. 공정하게 일하고 원칙에 따라 본분을 이행하며 진리를 깨달으면 실행하는 사람을 보면 적그리스도는 성질을 부리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그들을 혼내고 괴롭히려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을 꿰뚫어 보고 적그리스도의 음험함과 사악함을 간파하여 그를 폭로하고 고발하려 한다면 적그리스도는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 미운털이 박힌 눈엣가시 같은 그를 제거하고 이 사람을 저버리도록 형제자매를 선동할 것이다. 교회에서 아무 위신도 없고 지위도 없는 평범한 형제자매가 적그리스도에 대한 분별력만 조금 가지고 있을 뿐 아무런 위협도 주지 않는데 적그리스도는 왜 항상 그를 꼴 보기 싫어하고 미운털이 박힌 눈엣가시로 대하는 것이겠느냐? 이런 사람이 적그리스도의 무엇을 방해한다는 것이냐? 적그리스도는 왜 이런 사람을 포용하지 못하느냐? 적그리스도 안에 사악한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이 진리를 추구하고 바른길을 걷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며, 바른길을 가려는 사람을 적으로 삼고 못살게 군다. 그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 너를 제거하려 하고, 네가 소극적으로 변하고 연약해지도록 억압하거나 네 약점을 잡아 사방에 소문내서 모두가 너를 저버리게 하려 한다. 그러면 그는 기뻐한다. 네가 그의 말을 듣지도, 따르지도 않고 계속 진리를 추구하고 바른길을 가며 좋은 사람이 되면 그는 불안해하고, 네가 본분을 이행하면 괴로워하고 불쾌해한다. 이건 어떻게 된 일이겠느냐? 네가 그에게 잘못이라도 했느냐? 그러지 않았다. 네가 그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고 그의 이익을 침해하지도 않았는데 그가 왜 너를 이렇게 대하겠느냐? 이는 적그리스도 같은 자들의 본성이 사악하고 선천적으로 정의와 긍정적인 사물, 진리를 적대한다는 것을 보여 줄 뿐이다. 네가 그에게 도대체 왜 그러냐고 물으면 그 자신도 모른다. 그는 그냥 너를 못살게 구는 것이다. 네가 동쪽으로 가자 하면 그는 기어이 서쪽을 향하고, 네가 저 사람은 별로라고 하면 그는 굳이 대단히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또 네가 이런 복음 전파 방식이 아주 좋다고 하면 그는 한사코 안 좋다고 하고, 네가 믿은 지 1, 2년밖에 안 되어서 소극적이고 연약해진 자매가 있으니 붙들어 주어야 한다고 하면 그는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당신보다 강해요.”라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그는 매사에 네 반대편에 서서 대립하는 것이다. 그가 너에게 대립하는 원칙이 무엇이냐? 네가 옳다고 하는 모든 것을 그는 틀리다고 하고, 네가 틀리다고 하는 모든 것을 그는 기어코 옳다고 하는 것이다. 그의 행동에 진리 원칙이 있느냐? 진리 원칙은 전혀 없다. 그는 네게 망신을 주고, 네 민낯이 드러나게 하며, 너를 무너뜨리고, 얼굴을 들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연약해지고 믿지 않게 되면 그의 목적이 달성되어 그의 마음속에 기쁨이 넘칠 것이다. 왜 그러겠느냐?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의 사악한 본질이다. 만약 형제자매가 하나님을 찬미하고 증거하면서 그를 내버려두고 신경 쓰지 않는다면 그가 좋아하겠느냐?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어떤 기분이 들겠느냐? 질투할 것이다. 아무개가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보통 사람은 “저도 꽤 괜찮은 사람이에요. 저도 칭찬해 주세요.”라고 반응하는 게 정상이다. 좀 옹졸할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증거하는 말을 들으면 ‘이들은 이렇게 체험과 간증이 있어서 다들 그를 지지하는구나. 이들은 이렇게 인식하고 있는데 내겐 왜 그런 인식이 없을까?’라고 생각한다. 속으로 부러워하고 탄복하는 것이다. 반면 적그리스도에게는 특징이 하나 있다. “이건 하나님께서 하신 거예요. 하나님의 징계, 하나님의 행사, 하나님의 안배예요. 기꺼이 순종하고 싶어요.”라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누군가의 말을 들으면 그는 씁쓸해한다. “뭐든 다 하나님이 하신 거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주재하시는지 보기라도 했나요? 하나님이 어떻게 안배하시는지 느꼈나요? 그런데 왜 저는 모르겠죠?” 한편으로는,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욥을 칭찬한 일을 대하는 것이 사탄과 같고, 하나님이 한 사람을 얻었을 때 사탄에게 어떤 마음이 들었으면 적그리스도도 똑같은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는 사탄의 성품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만약 진리를 깨닫고 그를 분별하게 되어 그를 따르지 않고 저버린다면 그는 당황한 나머지 성을 낸다. ‘이 사람을 내가 결코 얻지 못한다면 그냥 멸해 버리겠어!’ 그래서 욥에게 시련이 닥쳤을 때 하나님이 사탄에게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라고 일러둔 것이다. 이 말을 하지 않았다면 사탄이 사정을 봐주었겠느냐?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 절대 사정을 봐주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적그리스도는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형제자매와 어느 정도 믿음이 있고 충성심을 가지고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을 어떤 태도로 대하느냐? 생명 체험을 이야기하며 하나님을 증거하고, 형제자매와 늘 진리를 교제하는 사람들을 또 어떤 태도로 대하느냐? (질투하고 증오합니다.) 그들의 태도는 무엇에 의해 정해지느냐? 그들의 사악한 성품에 의해 정해진다. 그래서 그들이 아무 이유 없이 한 사람을 억누르고 증오하며 아무 이유 없이 일부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을 자주 볼 때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성품은 아무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고질적이며 태생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적그리스도 부류의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형제자매가 하나님을 증거하지 못하게 하면서 그 자신은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겠느냐? (그러지 못할 것입니다.) 남들이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조차 치가 떨릴 정도로 싫어하는 그가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겠느냐? 그는 절대 하나님을 증거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요. 형제자매가 들으면 눈물을 흘릴 정도로 하나님을 잘 증거하는 적그리스도도 있는 걸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건 어떤 유형의 증거겠느냐? 다음과 같은 유형의 ‘증거’가 과연 진실한 증거인지 잘 들어 보아라. 좋은 직장과 좋은 가정을 가진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그 좋은 직장과 가정을 모두 버렸고, 나중에는 온 몸과 마음을 다해 하나님에게 헌신하였다. 마음은 몹시 괴로웠지만 여하간 전부 버린 것이다. 형제자매들이 “전혀 연약해지지 않으셨어요?”라고 묻자 그는 “조금 연약해지긴 했지만 제가 가정과 직장을 버린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당시 전 하루에 2, 3천 위안은 벌어서 월 소득 몇만 위안에 재산이 상당했죠. 하나님을 믿고 나서 본분을 이행하려고 자산 관리를 다른 사람에게 맡겼어요.”라고 답했다. 또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맡긴 후로는 전혀 관여하지 않으세요? 그러면 당신의 몫이 없어지는 거 아녜요? 어떻게 내려놓으셨어요?”라고 묻자 그는 “하나님이 하신 거죠.”라고 답했다. 이것이 너무 애매모호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더 들어 볼 것도 없이 빈말이다. 그리고 그의 소득이 그렇게나 많았다고 하는 말은 허풍이 아니겠느냐? 그가 왜 이런 말을 하겠느냐? 자기가 얼마나 많은 것을 버렸는지 증거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냐? 그는 자기가 어떤 대가를 치렀고, 어떻게 헌신했으며, 얼마나 바쳤는지, 그럼에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던 자신의 ‘화려’한 이력을 증거하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을 증거하는 부분이 있느냐? 하나님이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지 않으냐? 그가 하나님을 증거한다는 말은 거짓이다. 명백히 자기를 증거하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증거한다고 하다니! 사람을 기만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을 증거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자기를 증거하는 것이 외식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런데 어째서 이 말을 듣고 계속 눈물을 흘리며 감동하는 사람이 있느냐? 별 어리석은 사람이 다 있구나!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면 얼마 되지도 않는 자기가 했던 일, 자기가 바쳤던 것, 자기가 들였던 시간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한다. 시간이 지나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으면 새로운 내용을 조금 가미해서 자기를 증거한다. 그보다 뛰어나고, 진리의 빛 비춤을 그보다 더 잘 교제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불쾌한 마음이 든다. 진리에 들인 그의 노력이 남에게 비할 바가 못 되다 보니 뛰어나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가 불쾌해하겠느냐? 아니다. 그는 남들이 그보다 뛰어난 것을 용납하지 않고 남들이 잘난 꼴을 보지 못한다. 남들보다 자기가 잘나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악함이 아니겠느냐? 남들이 너보다 뛰어나고 너보다 진리를 잘 깨닫는다면 남에게 배워야 한다. 이는 좋은 일 아니겠느냐? 모두가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일이다. 인류 역사상 하나님을 따른 사람 가운데 욥이라는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6천 년 경영 사역 중 영광스러운 일이겠느냐, 아니면 망신스러운 일이겠느냐?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이는 영광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이 일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겠느냐? 어떤 관점을 지녀야겠느냐?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경축하며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찬미해야 할 것이다. 이는 좋은 일이다. 이토록 좋은 일을 어떤 사람들은 반감을 품고 혐오하니 이는 비정상이 아니겠느냐? 솔직하게 말하면 비정상이다. 이는 사악한 성품으로 초래된 것이다.
성경은 ‘개역한글’을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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