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조 사악함과 음험함, 그리고 간사함(1) 제 2 부
이어서 좀 더 가벼운 주제를 교제하겠다. 너희는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하느냐? (좋아합니다.) 그럼 이야기를 들려주겠다. 어떤 이야기가 좋겠느냐? 어떤 주제를 듣고 싶으냐? 평서*를 듣는 걸 좋아하느냐, 아니면 시사, 정치 평론이나 역사를 듣는 걸 좋아하느냐? 그런 이야기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것은 얘기해 봤자 쓸모가 없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모습, 사람의 성품 그리고 일상에서의 여러 내적 상태에 관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참고
밑천을 따지다
— 그러거나 말거나
다섯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중 다쉐(大雪)라는 사람이 말했다. “전 대학을 다니던 몇 해 동안의 캠퍼스 생활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캠퍼스 곳곳에 여러 식물이 심겨 있었고 봄, 가을이 되면 풍경이 참 예뻐서 마음이 상쾌했거든요. 더군다나 그땐 젊다 보니 꿈도 많았고, 순수해서 스트레스도 별로 없었어요. 3년 대학 생활이 그렇게 편할 수 없었어요. 10년, 20년 전의 캠퍼스 생활로 돌아간다면 평생 가장 아름다운 일이 될 거예요….” 여기까지가 다쉐라는 첫 번째 사람이다. 다쉐가 무슨 뜻이냐? 대학생이라는 뜻으로, 다쉐라는 이름은 이렇게 지어진 것이다. 다쉐의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추억과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데 곧이어 샤오옌(小硏)이 입을 열었다. “3년제도 대학인가요? 그건 전문대죠. 대학 본과는 보통 4년제에요. 그래야 대학이라고 할 수 있죠. 제가 4년제 대학을 다녔는데 그 기간 취업 시장에 대학생이 널리고 널려서 취업하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죠. 그래서 졸업하기 전에 대학원에 진학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아직까진 대학원생이 그리 많지 않아서 취업하기 수월하거든요. 예상대로 대학원 졸업 후 괜찮은 보수에 괜찮은 직장을 구해 윤택하게 살고 있답니다. 이게 바로 대학원 진학의 결과인 거죠.” 이 말을 듣고 어떤 정보를 얻을 수 있느냐? 다쉐는 전문대 출신이고, 샤오옌은 대학원 출신의 고소득자로, 사회에서 지위와 명예, 위신을 가진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샤오옌이 신나서 얘기하고 있는데 라오가오(老高)가 이어서 말했다. “너는 아직 어리구나! 사회 경험이 없어. 대학원을 다니든, 박사 공부를 하든 대학에서 좋은 전공을 택하는 것만 못해. 내가 대학에 진학하기 전에 시장 조사를 해 보니 크고 작은 모든 기업에는 경영 인재가 필요하더군. 그래서 대학에 진학해 시장 경영을 전공으로 선택했지. 졸업하고는 CEO라고도 하는 기업 경영자가 됐어. 내가 졸업할 때가 마침 크고 작은 여러 기업들이 나 같은 인재를 필요로 하던 때였고, 시장이 워낙 커서 한 번에 채용되었지. 여러 회사들이 앞다투어 나를 원해서 결국 제일 좋은 외국 기업으로 골라 들어갔고, 곧장 사장으로 취임했어. 고소득이라 5년 안에 차도 뽑았다고. 어때, 똑똑하지? 이런 걸 바로 안목이라고 하는 거야!” 라오가오가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앞의 두 사람에게 오기가 생겼지만 아무 말도 못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은 고위 임원에 식견도 넓으니 우리보다 밑천이 훨씬 나아. 오기가 생기지만 군말 없이 인정해야지.’ 라오가오는 말을 마치고 득의양양해서 이 청년들이 자기만큼 노련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좋아하고 있는데 곧이어 샤오관(小管)이라는 사람이 말했다. 샤오관은 앞의 세 사람의 이야기를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느릿느릿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주위를 둘러보고는 말했다. “요즘 널린 게 대학생인데 그깟 대학 누가 못 가나요? 대학만으로는 턱도 없어요. 장사도 마찬가지죠. 기업의 고위 임원이라고 해 봤자 철밥통도 아녀서 안정적이지 않아요. 중요한 건 철밥통입니다! 그럼 평생 걱정 없이 살 수 있죠!” 이 말을 들은 다른 사람들이 “철밥통이라고요? 요새 누가 그런 걸 따져요. 그것도 옛말이라고요!”라고 하자 샤오관이 답했다. “옛말? 훗, 안목이랑 식견이 없으시네. 그러니 옛말 타령이나 하지! 철밥통이 소득은 좀 적을지 몰라도 삶이 안정적이고 권력이 있어서 제힘이 닿지 않는 곳이 거의 없죠. 제가 공무원 준비할 때만 해도 아직 젊은데 왜 정부 기관에 들어가려 하느냐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결국, 공무원에 합격하고 나니 그 이후론 친척이고 친구고 취업이나 소송과 관련해서는 다 저를 찾아요. 어떻습니까? 대단한 권력이죠? 소득은 적어도 관사에, 관용차에 당신들보다 처우는 훨씬 좋죠. 이외에도 외식을 하거나 장을 본 비용까지 청구할 수 있고 차비나 항공비는 무료라고요. 당신들은 안 되죠. 밥벌이가 든든하지 않은 당신들보단 제가 훨씬 낫죠!” 그 말을 듣고 나서 모두 불편해하며 말했다. “대우는 좋지만 평판은 좋지 않죠. 어딜 가서도 등쳐 먹고 갑질하잖아요.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게 아니라 국민을 못살게 굴고 나쁜 짓만 일삼죠.” “실속이 있는데 평판이 좀 나쁘면 어때요?” 모두 갑론을박하던 차에 마지막 한 사람이 결국 참지 못하고 일어나 말했다. “보세요. 당신들은 대학생에, 대학원생에, 기업 고위 임원에 공직자인데 저는 여러분만큼 경험이 있지는 않아요. 저는 보잘것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한마디 해야겠어요. 제가 ‘모(母)’에 찾아갔을 때는….” 이 말을 듣고 모두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모(母)’라뇨? 우리는 공무원 시험 준비해서 공무원, 대학원 준비해서 대학원생, 기업 고위 임원에 올라서 CEO인데, ‘모(母)’가 뭐예요? 그게 무슨 뜻이죠?”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들이 대학이나 대학원을 나오고, 기업 고위 임원, 공무원이었던 것은 되고, 제가 모교를 찾아가는 건 안 된다는 건가요?” 얼마나 초조했는지 보아라. 가방끈이 짧은 이 사람도 허영심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했다. “모교를 찾아간다고 하면 다 알죠. ‘모(母)’가 아니라 모교라고 했으면 됐잖아요.” 그러고는 다들 그의 모교가 고등학교인지, 기술학교인지 아니면 대학인지, 대학원인지 물었다. 그는 대답했다. “저는 대학이나 대학원을 다닌 적도 없고, 공무원을 준비해 본 적도 없어요. 초등학교 다닌 걸로는 안 되나요? 당신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말을 마치고는 스스로도 얼굴이 달아올랐다. 자기 약점이 드러나 숨길 수가 없는 것이다. 원래는 위장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과 만날 때는 자신의 학력을 전혀 밝히지 않았는데 이번에 들통난 것이다. 더는 낯을 들 수 없어 문을 박차고 자리를 뛰쳐나갔다. 그가 나가자 남은 네 명은 영문을 몰라 약속이나 한 듯 말했다. “초졸이잖아요. 왜 자리를 피하시나요? 초졸인데 이렇게 대단하시네요!”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이것이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이 이야기엔 다섯 사람이 등장한다. 그들이 무슨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느냐? (학력입니다.) 학력이란 사람들에게 과연 무엇을 의미하느냐? (사회적 지위입니다.) 학력이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관련된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이런 사회적 지위를 이야기하려 하느냐? 왜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을 밝혀 이야깃거리로 삼겠느냐? 그들이 뭘 하고 있는 것이냐? (자신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 이야기의 제목을 뭐라고 해야겠느냐? (학력 싸움입니다.) 제목을 ‘학력 싸움’이라고 하면 너무 노골적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지위 자랑은 어떻겠습니까?) 너무 직접적이다. 함축적이지 않고 그다지 심각하지도 않다. 만약 주 제목을 ‘밑천을 따지다’로 하고 부제를 ‘그러거나 말거나’로 한다면 어떻겠느냐? 풍자적인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 ‘밑천을 따지다’는 모든 사람이 학력이나 사회적 지위 등 자신의 밑천을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그럼 ‘그러거나 말거나’는 무슨 뜻이겠느냐? (남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렇다. 그 안에는 ‘대학원 다니는 게 대수야? 나보다 학력이 높아서 어쩌라고?’라는 성품이 있다. 아무도 남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밑천을 따지는 것이다. 사람들에게서 이런 대화를 자주 듣지 않느냐? 자기 집이 잘산다고 과시하는 사람이 있고, 자기 가족의 내력이 대단하다고 과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황제나 유명 인사가 자기 성씨 출신이라고 과시하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출신 대학을 언급하며 얼마나 찬란했는지 이야기한다. 심지어 뷰티샵에서 마사지를 하는 여종업원조차 이렇게 말한다. “저는 유명 마사지사에게서 마사지를 배워서 전문가의 지도와 자기 점검을 통해 결국 일급 프로 마사지사에 합격했어요. 2000년대 그 몇 해는 제겐 가장 찬란한 시기였죠….” 이 ‘찬란한’이라는 단어는 잘못 골랐다. 그렇지 않으냐? 서비스업종의 마사지사가 ‘가장 찬란한 시기’라는 말을 하다니 정말이지 허풍이 심하다. 이 주제는 현실 생활에서 사람들에게서 자주 듣는 대화, 자주 보이는 행위, 사람이 표출하는 성품을 주로 다룬다. 사람은 왜 이런 밑천을 이야기하려 하느냐? 여기에 어떤 성품이나 동기가 있느냐?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명예로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명예로운 일인지는 논할 것도 없다. 이런 일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에게 유익이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너희도 이야기하느냐? (그렇습니다.) 아무 유익이 없는 걸 알면서도 왜 이야기하려 하느냐? 사람은 왜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길 좋아하느냐? (이런 것은 사람이 과시하는 밑천이기 때문입니다.) 과시하는 목적은 무엇이냐? (사람들에게 우러름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아무도 평범한 보통 사람이 되길 원치 않는다. 초등학생조차 ‘모(母)’에 찾아가 보고 싶다고 난리법석이니 모두가 이런 문학적인 말로 남을 속이고 무디게 해서 우러러보게 만든다. 남들이 우러러보게 만드는 목적이 무엇이겠느냐?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고 사람들 가운데 한자리나 지위를 차지할 수 있으며, 머리에는 후광이, 말에는 권위가 생겨서 다른 사람에게 추앙받고, 명성이 생기는 것이다. 만약 이런 것을 던져 버리고 평범한 보통 사람이 되려면 무엇을 갖추어야겠느냐? 먼저, 올바른 관점을 가져야 한다. 그 올바른 관점은 어디서 비롯되겠느냐? 하나님 말씀을 읽어서 사물을 대할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나님 뜻에 합하는 것인지, 정상 인성에 갖춰져야 하는 것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올바른 관점이다. 그렇다면 보통의 평범한 정상인으로서 이러한 사회적 지위, 사회적 밑천 혹은 출신 등 다양한 측면을 어떻게 대해야 가장 적절하고 올바른 관점이겠느냐? 너희가 알고 있느냐? 만약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은 사람이 자기가 많은 진리를 깨달았고 하나님의 도(道)를 준행하는 사람이라고, 또 하나님과 본분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사회와 무리 속에서 사람이 갖는 지위와 자기 신분을 중요하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몹시 애지중지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밑천과 대단한 이력, 자기 신분을 늘 과시한다면 이 사람이 과연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겠느냐?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럼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아니다. 밑천을 따지는 것이 진리를 깨닫고 사랑하는지 여부와 어떤 관계가 있느냐? 어째서 신분을 애지중지하고 밑천을 따지는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거나 깨달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겠느냐? 진정으로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그런 사회적 지위와 개인의 밑천, 신분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사회적 지위에는 무엇이 있느냐? 출신 가정, 학력, 명성, 사회에서 쌓은 업적, 개인의 재능 그리고 민족이 있다. 그렇다면 이런 것을 어떻게 대해야 네가 진리를 깨달은 사람임을 입증할 수 있겠느냐?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이런 측면에서 너희는 이론적으로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을 테니 일단 생각나는 대로 말해 보아라. ‘아, 아직 충분히 생각해 보지 않았으니 대답하면 안 되겠다.’라고 생각하지 마라. 충분히 생각해 보지 않았어도 일단 있는 그대로 말해 보아라. 충분히 생각하고 나서야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글쓰기라고 한다. 지금은 네게 글을 쓰라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다. 일단 너희가 이론적인 측면에서 말해 보아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사람의 학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얼마나 높은지 보지 않으시고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하는지,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합격한 본분 이행을 하는지를 주로 보신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사회적 지위나 학력은 좋지만 영적인 이해력이 없고 진리 추구의 길을 걷지 않으며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고 악을 멀리하지도 않는 사람은 결국 그렇게 도태될 것이고 하나님 집에 굳게 서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학력, 지위가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느냐는 것입니다.) 아주 좋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다. 왜 가장 기본적이라고 하겠느냐? 통상적으로 모두가 이야기하는 것이 보통 이런 주제와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 밖에 다르게 인식한 사람은 없느냐? 보충해서 말해 보아라. (만약 사람이 진리를 추구한다면 명예와 이익, 지위를 추구하는 것은 실제로 사람에게 속박이자 족쇄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추구하면 할수록 공허함을 느끼고 명예와 이익, 지위가 사람에게 주는 위해와 고통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것을 인식하고 나서 사람이 그런 것들을 밑천으로 삼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가엽게 느껴질 것입니다.) (진정으로 진리를 사랑하고 깨달은 사람은 이런 사회적 지위, 명예를 대할 때 하나님 말씀에 따라 판단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고 어떻게 요구하시는지, 하나님은 사람이 무엇을 추구하길 바라시는지, 사람이 이런 것을 추구하여 결국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결과와 일치하는지를 볼 것입니다.) 너희가 말한 것도 사실에 가깝지만 진리와 큰 관계가 있느냐? 너희 스스로 평가할 수 있겠느냐? 많은 사람이 조금 감성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만약 너희에게 설교를 시킨다면 그것은 권면의 설교가 될 것이다. 어째서 권면의 설교라고 하겠느냐? 권면의 설교는 사람에게 권하는 일련의 말이지 실제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 들어 보면 전부 맞는 말이고 일리가 있어 사람의 인정 도리, 이성적 요건에 부합하지만 진리와 크게 관계는 없다. 단지 사람의 얕고 감성적인 인식에 불과한 것이다. 네가 만약 다른 사람과 이런 말을 교제한다면 사람의 문제나 고충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그래서 권면의 설교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의 고충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기에 진리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히 지식과 명예, 지위를 숭배할 것이며, 또한 지식과 명예, 지위의 통제와 속박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너희는 사람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 출신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묵상해 보아라. 어떤 태도를 가져야 옳겠느냐? 먼저 하나님 말씀에서 하나님이 이 일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진리를 깨달아 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럼 하나님은 한 사람의 출신 가정이나 사회적 지위 그리고 후천적인 학력과 그가 사회에서 쌓은 부를 어떻게 바라보겠느냐? 네가 만약 무슨 일이든 하나님 말씀에 따라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일을 바라보는 네 관점은 분명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있을 것이다. 그 거리가 멀지 않다면 작은 오차일 뿐이니 문제 되지 않겠지만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위배된다면 진리에 부합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이 봤을 때 하나님이 사람에게 무엇을 얼마나 주는지는 하나님이 정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회에서 어떤 지위를 갖는지도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지 절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힘들고 가난하게 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구원의 희망이 없겠느냐? 그가 신분이 낮은 사회 하층민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지 않겠느냐? 그의 사회적 지위가 낮다고 설마 하나님 눈에도 그의 지위가 낮겠느냐?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이것은 무엇과 관련되느냐? 그가 걷는 길, 그의 추구, 진리를 대하고 하나님을 대하는 그의 태도와 관련되는 것이다. 사회적 지위가 매우 낮고 가정 형편이 궁핍하며 학력도 좋지 않은 한 사람이 착실하게 하나님을 믿고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보기에 그런 사람의 신분이 높겠느냐, 아니면 낮겠느냐? 귀하겠느냐, 아니면 천하겠느냐? 귀하다. 이런 면에서 봤을 때, 한 사람의 신분의 높고 낮음, 귀천은 무엇에 달려 있느냐? 바로 하나님이 어떻게 보는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를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본다면 너는 값지고 귀하므로 귀중한 그릇이겠지만, 하나님이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진심으로 하나님에게 헌신하지 않는 모습을 본다면 너는 쓸모없고 귀하지 않을 테니 비천한 그릇일 것이다. 네 학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아무리 높아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깨닫지 못하면 네 신분은 높아질 수 없다. 설령 너를 옹호하고 추대하며 숭상하는 사람이 많다고 해도 너는 천한 존재일 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째서 사람을 이렇게 보겠느냐? 사회적 지위가 높고 많은 사람에게 추앙받으며 심지어 높은 위엄을 자랑하는 이토록 ‘존귀’한 사람이 어째서 하나님의 눈에는 비천해 보이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을 보는 관점과 사람이 사람을 보는 관점은 어째서 정반대인 것이냐?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사람과 대립하는 것이겠느냐? 절대 아니다. 하나님은 진리이자 공의이지만 사람은 패괴된 인간이라 진리나 공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판단할 땐 하나님의 기준이 있다. 하나님의 그 판단 기준이 바로 진리이다. 이렇게 말하면 다소 추상적일 수 있으니 다르게 말해 보자.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하나님과 진리, 긍정적인 사물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를 바탕으로 한다. 이렇게 말하면 추상적이지 않을 것이다. 사회적 지위가 높고 학력도 좋고 교육 수준이 높고 교양 있으며 가족 내력도 휘황찬란한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이 사람은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반감과 혐오, 증오를 품는다. 그는 하나님과 관련된 일이나 하나님과 관련된 주제, 하나님의 사역이라면 치를 떨면서 눈을 매섭게 뜨고 심지어는 손찌검까지 하려 한다. 하나님이나 진리와 관련된 주제를 언급하기만 하면 반감을 품고 적대시하며 야만성을 한껏 드러낸다. 그럼 이런 사람이 가치 있겠느냐? 하나님 눈에 그의 학력, 소위 사회적 지위와 사회적 명성의 가치가 얼마나 되겠느냐? 한 푼의 가치도 없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어떻게 보겠느냐? 이런 사람의 성질을 어떻게 규정하겠느냐? 이런 사람은 마귀 사탄이고 가장 쓸모없는 천박한 자이다. 지금 볼 때 한 사람의 신분의 귀천을 정의하는 근거가 무엇이냐? (하나님과 진리, 긍정적인 사물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그렇다. 먼저 하나님의 태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태도를 알고 사람을 규정하는 하나님의 원칙과 기준을 알고 나서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원칙과 기준에 따라 사람을 판단해야 가장 정확하고 가장 적절하며 가장 공평하다. 이제 사람을 판단하는 근거가 생겼으니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해야겠느냐? 예컨대, 학력이 무척 좋아서 어딜 가도 환영받고 모든 사람의 평판이 좋으며 사람들에게 누구보다 전망이 있어 보이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눈에도 반드시 귀하게 여겨지겠느냐?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을 어떻게 판단해야겠느냐? 한 사람의 귀천은 사회적 지위나 학력에 근거하지 않고, 더욱이 민족에 근거하지도 않는다. 국적에 근거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그럼 무엇을 근거로 해야겠느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와 하나님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를 근거로 해야 합니다.) 그렇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 미국으로 온 너희가 어느 날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고 해서 너희의 신분이나 지위가 달라졌느냐?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달라지지 않았다. 너는 여전히 너다. 네가 하나님을 믿고도 진리를 얻지 못한다면 너는 여전히 멸망의 부류다. 어떤 천박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지도 않고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으며 세속만 좇고 미국 국적을 취득한 뒤 “당신 중국인들”, “중국에서 온 당신들”이라고 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런 사람이 고귀하냐, 아니면 비천하냐? (비천합니다.) 너무나 비천하다! 미국 국적을 얻자마자 고귀해진 것처럼 구는데 너무 천박하지 않으냐? 너무나도 천박하다. 어떤 사람이 평정심을 가지고 명예와 이익, 사회적 지위, 부, 학력을 대할 수 있다고 하자. 물론 이 평정심이란 네가 이 일을 이미 경험해 봐서 무감각해졌다는 말이 아니라 네게 판단 기준이 생겨서 이런 일을 네 생명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지 않는다는 말이다. 네가 이런 일을 판단하고 바라보는 기준과 원칙 그리고 네 가치관이 이미 바뀌어 그 일을 올바르게 대할 수 있고, 평정심을 가지고 그 일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증명하느냐? 네가 이른바 사회적 지위, 사람의 신분 등 이런 외적인 것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은 너희가 아마 이르지 못하겠지만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으면 이런 일을 꿰뚫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보겠다. 어떤 사람이 부유한 형제자매를 만났는데 명품으로 치장한 모습과 귀티 나는 외모를 보고는 어떤 말을 하고 어떻게 지내야 할지 몰라 저자세로 굽실거리며 아부하고 비위를 맞추며 온갖 추태를 다 부린다면 이는 천박하게 구는 것 아니겠느냐? 이런 경우 그를 지배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돈 많은 여자를 만나면 누님이라 부르고, 돈 많은 남자를 만나면 형님이라 부르며 늘 들러붙어서 자신을 추천하고 싶어 한다. 반면 가난하거나 보잘것없는 시골 출신의 고학력도 없는 사람을 보면 깔보고 상대하기 싫어하며 태도가 달라진다. 교회에 이런 분위기가 있지 않으냐? 있다. 너희는 이 일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 중에 일부는 이미 이런 모습을 표출했기 때문이다. 형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고, 누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모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으니 사회적 풍조가 심각하다. 이런 사람의 모습을 보면 그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며 진리 실제가 하나도 없다. 너희 중에도 이런 부류의 사람이 상당수 있다. 만약 변화하지 않는다면 결국 도태되고 말 것이다. 이런 잘못된 관점은 참도를 받아들이는 데 지장을 주진 않지만 사람의 생명 진입이나 본분 이행에 지장을 줄 것이다. 만약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이 아니라면 교회에서 교란을 일으키기 십상이다. 네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나면 이런 일을 판단하는 원칙과 기준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측면이 있다. 즉, 사람의 사회적 지위나 학력이 어떻든, 어떤 가정 배경을 가졌든 네가 인정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은 바로 네 학력, 출신 가정이 네 인품을 바꾸거나 네 성품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그것은 바로 한 사람이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고 후천적으로 어떤 교육을 받든, 그 교육 수준이 높든 낮든, 그리고 어떤 사회적 배경에서 태어나든, 사회적 지위가 높든 낮든 그의 패괴 성품은 다른 모든 사람과 같다.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다. 이는 불가피한 것이다. 네 사회적 지위나 신분은 네가 사탄에 의해 패괴된 인류 중 하나라는 사실을 바꿀 수 없고, 네가 패괴 성품을 지닌, 하나님을 적대하는 패괴된 인류라는 사실 역시 바꿀 수 없다. 이 말이 무슨 뜻이겠느냐? 이는 바로 네가 아무리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아무리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을지라도 네겐 패괴 성품이 있고, 네가 귀하든 천하든, 가난하든 부유하든, 지위가 높든 낮든 너도 똑같은 패괴된 인류라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이고 나면 모두가 평등하며,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공평하고 공의롭게 대한다. 이것은 사람이 가져야 할 한 측면의 인식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고, 인류 중 가장 고귀한 민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사탄에게 패괴되지 않아 패괴 성품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이게 말이 되느냐? 인류사를 통틀어 이런 사실이 있느냐? (없습니다.) 없다. 사실 욥이나 아브라함, 여러 선지자와 옛 성도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도 포함해 모두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 속에 불가피하게 살아왔다. 그것은 모든 인류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탄의 패괴를 거쳤다는 사실이다. 사탄은 사람을 패괴시킬 때 네 교육 수준이 높든 낮든, 네 가족사가 어떠하든, 네 성씨가 무엇이고 족보의 규모가 어떻든 상관하지 않는다. 결국, 결과는 하나이다. 즉, 이 인류 가운데 사는 한 너는 사탄의 패괴를 거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네게 사탄의 패괴 성품이 있고 네가 사탄의 패괴 성품으로 살고 있다는 이 사실은 네 신분, 네 학력으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이 가져야 할 인식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너희가 이를 깨달은 후에 앞으로 또 자신의 은사나 밑천을 과시하는 사람이 있거나 너희 가운데 ‘뛰어난 사람’이 나타나면 어떻게 대하겠느냐? (하나님 말씀에 따라 대하겠습니다.) 그렇다. 그럼 하나님 말씀에 따라 어떻게 대하겠느냐? 걸핏하면 “학력이 정말 대단하시네요. 근데 자랑해서 뭐 하시려고요? 이렇게 밑천 따지시면 본분은 제대로 이행하시겠어요? 학력이 아무리 높아도 사탄에게 패괴된 거잖아요?”라며 그를 얕잡아 보고 비꼬는 게 좋겠느냐? 이는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는 정상적인 인성을 갖춘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대해야 원칙에 부합하겠느냐? 그를 우러러보지 말고 깔보지도 마라. 이게 절충안이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절충이 옳으냐? 옳지 않다. 올바로 대해야 한다. 네가 깨달은 진리로 도울 수 있다면 도와주고, 도와줄 수 없다면 이렇게 하여라. 네가 리더로서 그에게 어떤 본분 이행이 적합해 보인다면 그 본분을 이행하게 하여라. 그가 고학력자라고 해서 무시하지 마라. ‘흥, 학력 높은 게 대수야? 진리는 깨달았대? 내가 학력은 낮아도 리더를 맡고 있다고. 자질이 훌륭한 거지. 네가 나보다 못하니 깔보고 모욕을 주는 거야!’ 이런 걸 악덕하고 인성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올바로 대한다는 것이 무엇이냐? 진리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진리 원칙은 무엇이겠느냐? 남을 공평하게 대하는 것이다. 그를 우러러보지 않고 앙망하지 않으며, 그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며 그 앞에서 굽실대지도 마라. 또 그에게 아첨하지도 말고 그를 짓밟지도, 깔보지도 마라. 그도 자기 신분이 매우 높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를 과시하지도 않았다. 그가 과시할 것을 지레 걱정하여 늘 짓밟기만 한다면 그것이 합당하겠느냐? 합당하지 않다. 이것을 악덕하고 인성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흑백논리처럼 너무 극단적이다. 사람을 올바르고 공평하게 대하는 것, 이것이 원칙이다. 이 원칙은 듣기에는 단순해 보이지만 실행하기 쉽지만은 않다.
일전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 하는 어떤 리더에게 같이 있으면 사역을 논의하기 편할 테니 관련된 팀장과 팀원을 데려가도 좋다고 했다. 들으면 바로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어려운 말이 아니었다. 결국, 그가 데려간 몇몇 관계자들은 ‘내력’이 대단했다. 차를 따라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발을 씻겨 주고 등을 밀어 주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 아첨꾼들이었다. 이 리더가 어느 정도로 역겨웠겠느냐? 전염병을 앓고 있는 사람 하나가 있었는데 날마다 그에게 아부를 떨고 아첨하며 그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면서 시중을 들었다. 그는 전염될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이렇게 아첨을 받는 기분을 만끽하고 싶어 했다. 결국, 전염병을 앓던 그 사람이 그곳에서 발병하는 바람에 그 리더 역시 드러나고 말았다. 그러니 진리를 깨달았든 그렇지 않았든 절대 나쁜 짓은 하지 말고, 야심과 욕망에 따라 행동하지 말며, 요행 심리를 갖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고 온 땅을 감찰하기 때문이다. 온 땅에는 무엇이 포함되겠느냐? 물질적인 것은 물론 비물질적인 것까지 포함된다. 머리를 굴려 하나님을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의 권병과 전능을 판단하지 마라. 사람은 피조물이라 그 생명이 미미하기 짝이 없는데 어찌 창조주의 위대함을 판단할 수 있겠느냐? 어찌 만유를 창조하고 모든 것을 주재하는 창조주의 전능과 지혜를 판단할 수 있겠느냐? 무지한 짓이나 악한 일은 절대로 하지 마라. 악을 행하면 언젠가는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너를 드러내는 날엔 너는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할 것이고, 그때 가서 너는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 처신할 때는 자신을 정확히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어떤 일에서 하나님이 아직 너를 드러내기 전에 너 스스로 하나님 말씀에 비춰 보고 먼저 자기를 반성하고 파헤쳐서 문제를 찾은 다음 진리를 구해 해결하는 것이 좋다. 하나님이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지 마라. 일단 하나님이 너를 드러내면 너는 수동적이 되지 않겠느냐? 그때는 이미 과오가 형성된 것이다. 하나님이 너를 감찰하기 시작해서부터 네가 드러나기까지 네 신분, 너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에 큰 변화가 생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너를 감찰해서부터 네가 드러날 때까지 그 기간에 네게 기회를 주고 희망을 걸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한 사람에게 희망을 건 순간부터 마지막에 그 희망이 허사가 될 때까지 하나님의 심정이 어떻겠느냐? 그 격차가 너무 크다. 이는 네게 어떤 결과를 야기하겠느냐? 가벼우면 너란 사람은 하나님이 혐오하는 대상이 되어 한쪽에 방치될 것이다. 방치된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느냐? 남겨서 쓰고 지켜보겠다는 말이다. 그럼 심한 경우엔 어떤 결과가 기다리겠느냐? 하나님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자는 화근이다. 봉사할 자격조차 없다. 이자는 절대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에게 이런 생각이 들면 네 결말은 완전히 없어질 것이다. 그땐 네가 머리를 조아리며 피를 흘려도 소용없다. 하나님은 이미 네게 충분한 기회를 주었지만 네가 계속 회개하지 않고 지나치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람에게 어떤 문제가 존재하고 어떤 패괴 표출이 있든 하나님 말씀에 따라 자기를 반성하고 인식하거나 형제자매에게 조언을 구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네가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너 스스로 미리 문제를 찾아 해결한다면 이는 자기반성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성과이다. 이것이 최선이다. 절대 하나님에게 드러나 도태되고 나서야 후회해서는 안 된다. 그때는 후회해도 늦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드러내면 그때 하나님은 크게 노하겠느냐, 아니면 널리 긍휼을 베풀겠느냐? 이는 확실하게 말하기 어렵고, 미지수다. 나는 이를 보증해 주지 않을 것이다. 네 길은 너 스스로 가거라. 내 책임이 무엇인지 너희는 아느냐? 내가 하고 싶은 말, 내가 해야 할 말을 빠짐없이 너희에게 전부 알려 주는 것이다. 문자의 방식이든, 이야기하는 방식이든, 아니면 작은 프로그램을 만들든 어쨌든 여러 방식을 통해 하나님이 너희에게 깨닫게 하고자 하는 진리를 전하고 이와 함께 내가 본 문제를 알려 주는 것이다. 너희에게 경계하고 지적하고 권면하며, 공급하고 도움을 주고 너희를 붙들어 주며, 때로는 엄한 말도 하는 것이 내 책임이다. 남은 길을 어떻게 가야 하는지는 너 스스로의 일이다. 너는 내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내가 네게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신경 쓰지도 마라. 이런 건 모두 부질없다. 앞으로 네 결말이 어떨지는 나와 상관없다. 오로지 너 자신의 추구와 관계된다. 오늘 나는 흉금을 털어놓고 명확하고 분명하게 얘기했다. 내가 말한 한 마디 한 마디, 내가 할 필요가 있는 말, 내가 해야 하는 말, 내가 했던 말을 너희는 잘 듣고 알아들었느냐? 여기에 추상적이거나 너희가 알아듣지 못할 말은 없다. 너희가 모두 알아들었다면 나는 책임을 다한 것이다. 너희는 내가 말을 마친 후에도 너희를 지켜보면서 몸소 끝까지 책임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너희는 모두 하나님을 오래 믿었고 몇 살 먹은 어린아이가 아닌 어른이다. 너희가 하는 일은 리더가 책임지지 내가 책임지지 않는다. 내겐 내 사역의 범위가 있고 내 직책의 범위가 있다. 나는 너희를 따라다니면서 재촉할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내겐 그럴 의무가 없다. 너희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뒤에서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어떤 길을 가는지는 나와 무관하다. 왜 나와 무관하다고 하겠느냐? 너희가 하나님 집에서 분수에 맞게 본분을 이행하면 하나님 집에서는 너희를 끝까지 책임진다. 너희가 본분을 이행하고 대가를 치르며 진리를 받아들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고자 하면 하나님 집에서 너희를 이끌고 너희에게 공급하며 먹여 살린다. 너희가 만약 본분을 이행하기 싫어하고 밖에 나가 일하여 돈을 벌고자 하면 하나님 집에서는 문을 활짝 열어 환송할 것이다. 그런데 너희가 하나님 집에서 교란하고 악행이나 못된 짓을 한다면 하나님 집에는 행정 법령이 있고 사역지침이 있으니 누구든 악을 행하면 그 원칙에 따라 처리할 것이다. 알겠느냐? 너희는 모두 하나님을 오래 믿었고 하나님 말씀도 적잖이 읽었으며 예배에서 설교도 다년간 들었는데 어째서 조금도 회개하지 않고 변화하지 않느냐? 여러 해 동안 설교를 들어서 진리를 일부 깨달았지만 회개하지 않고 본분도 대충 이행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런 자는 위험인물이다. 너희에게 한 가지 실상을 알려 주겠다. 너희는 절대 내가 너희를 지켜보고 돌봐 주기만을 바라지 마라. 내가 손수 가르쳐 주어야 실질적인 일을 좀 해서 성과가 약간 생기고, 너희를 챙겨 주지 않고 재촉하지 않으면 건성으로 하여 사역 진전 속도가 느리다면 너희는 끝장이다. 이는 너희가 조금의 충성심도 없이 본분을 이행하는 힘쓰는 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내 직분을 다하면 내가 너희를 돌볼 의무는 없다. 왜냐하면 이런 일은 성령이 역사하고 있고 너희를 감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다 했고 해야 할 말도 다 했다. 또 내 직분을 지켰고 내 책임도 다했다. 남은 것은 너희 각자가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만약 너희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일관되게 건성으로 하며 회개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징벌을 받고 도태되어 나와 무관하게 될 것이다.
방금 우리가 다룬 이야기를 통해 한편으로는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 출신 그리고 학력 등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바라보는 기준과 원칙이 무엇인지 다루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일을 어떻게 대하고 그 일의 본질을 어떻게 꿰뚫어 볼 것인지에 대해 다루었다. 이런 일의 본질을 꿰뚫어 보게 되면 비록 네 마음속에 이런 것들이 있더라도 그것에 속박받지 않고 그것에 기대어 살지 않을 것이다. 이방인이 자신의 대학 시절이나 석박사 시절의 화려한 이력을 과시하는 것을 본다면 너는 어떤 관점과 태도를 취하겠느냐? 만약 네가 “당신이 대학 본과를 나온 게 대순가요? 저는 대학원 졸업한 지 벌써 몇 년 됐거든요.”라고 말한다면, 이런 마음을 갖는다면 골치 아파진다. 이는 네가 하나님을 믿고 나서도 별로 변화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그가 네 학력을 묻거든 이렇게 대답하여라. “저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해서 작문도 잘 못해요.” 그러면 그는 네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보고 너를 상대하지 않을 것이니 잘된 일이 아니겠느냐? 시간을 아껴서 하나님 말씀을 더 읽고 본분을 더 이행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다. 이방인이나 불신파랑 그런 한담을 나눠서 뭐 하겠느냐? 네 학력이 낮고, 이렇다 할 사회적 지위도 없다고 했을 때 다른 사람이 너를 무시한다면 어쩌겠느냐? 괘념치 말고 속박받지도 마라. 남들이야 입만 살아서 자기 맘대로 지껄이든 말든 상관없다. 그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 차질만 생기지 않으면 된다. 사실 이것은 사소한 주제이지만 일상에서 사람을 통해 나타난다. 사람은 이런 밑천을 무척이나 중요시해서 마음속에 이런 것들이 항상 존재하고 있다. 이는 사람의 언행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생명의 진입에 지장을 주고 하나님 믿는 바른길을 택하는 데 지장을 준다. 좋다. 이런 유형의 주제는 앞으로 다시 다루지는 않겠다. 이제 저번에 교제했던 주제로 돌아가서 계속해서 적그리스도의 여러 모습에 대해 교제하고 해부해 보자.
*평서(評書): 중국 민간 문예의 일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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