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3 노아와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였는가(2) 제 2 부
하나님의 분부를 받은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이 얼마였느냐? (백 이십 년입니다.) 백 이십 년이란 세월 동안 노아는 방주를 만들고 각종 살아 있는 생물을 모으는 일 한 가지만 했다. 비록 한 가지밖에 안 되는 많지 않은 일이라고는 하지만 그 한 가지 일의 분량은 엄청났다. 그렇다면 그 일을 한 목적은 과연 무엇이었느냐? 왜 방주를 만들려 했느냐? 그 일의 목적과 의의가 무엇이냐? 바로 하나님이 홍수로 이 세상을 멸할 때 각종 생물들을 살려 두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노아가 한 일은 하나님이 세상을 멸하기 전에 각종 살아 있는 생물을 살아남도록 하기 위한 준비 작업인 것이다. 하나님 입장에서 이것이 무척 다급한 일이 아니었겠느냐? 하나님의 어투에서, 또 하나님이 분부한 이 일의 본질로부터 노아는 하나님이 매우 다급하고 하나님의 뜻이 절박하다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었느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너희에게 “역병이 닥쳐서 바깥에 널리 퍼졌다. 너희가 당장 해야 할 일은 얼른 식량과 마스크를 사는 것이다. 이 몇 가지만 가서 해라.”라고 한다면, 너희는 무슨 뜻인지 알아차릴 수 있지 않느냐? 이 일이 절박하지 않으냐? (절박합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기다렸다 해야 하느냐? 내년, 내후년, 그다음 해까지 기다려야 하느냐? 그러면 안 된다. 이것은 급한 일이고 큰일이다. 모든 일을 제쳐 두고 이 일부터 처리해야 한다. 이 뜻을 알아차리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던 일을 얼른 멈춰야 한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이 방금 분부한 이 일은 하나님이 조급해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속으로 조바심을 내고 걱정하는 이 일을 서둘러 이행하고, 서둘러 처리해야 하며, 다 완성한 다음 다른 일을 하는 것, 이런 게 순종이다. ‘전염병이 찾아왔어? 전염될 거라고? 전염되면 되는 거지. 우리가 전염되는 것도 아닌데 뭘. 전염되면 그때 얘기하지. 마스크와 식량을 사야 한다고? 마스크는 아무 때나 가도 있는데, 착용하든 안 하든 관계없어. 식량은 아직도 있는데 뭐가 문제야? 뭐가 그리 급한가? 전염병이 닥치면 그때 다시 얘기하자. 하고 있는 일로 바쁘단 말이야!’ 네가 이렇게 분석한다면 이것이 순종이냐? (아닙니다.) 이를 두고 뭐라고 하느냐? 통칭은 패역이고, 구체적으로 말하면 무심하게 대하는 것, 저항하고 분석하고 연구하는 것이고, 그럴 리가 없다며 속으로 무시하는 것, 그 일이 진짜라고 믿지 않는 것이다. 이런 태도에 참된 믿음이 있느냐? (없습니다.) 전반적인 상태, 즉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대하는 태도는 언제나 질질 끌고, 무심하게 대하고, 소홀히 대하면서 속으로 전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다. ‘당신이 진리와 관계된 말씀을 하시고, 고차원적인 설교를 하시면 얼른 받아 적고 잊지 않겠지만, 식량과 마스크를 사는 사소한 일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속으로 거절할 수도 있고, 비웃을 수도 있고, 무심하고 신경 쓰지 않는 태도로 당신을 대할 수도 있습니다. 귀로만 들으면 되죠. 우리가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든 당신은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당신과 상관없는 일입니다.’ 노아가 하나님 말씀을 이런 태도로 대했느냐?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어디서 알 수 있느냐? 이 부분을 우리는 얘기해야 한다. 그러면 너는 노아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증명할 만한 사실이 있다.
공업이라고 할 만한 게 없고 무슨 일이든 사람의 두 손으로 하고 이루어야 하는 그 시대에는 어떤 수작업도 힘이 들고 시간도 많이 걸렸다. 노아는 하나님의 부탁과 하나님이 얘기하는 모든 일을 들었을 때 일의 심각성과 사태의 위급함을 느꼈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멸할 것임을 알았다. 왜 멸하려 했겠느냐? 인류가 너무나 사악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인류를 혐오하게 되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인류를 혐오한 것이 하루 이틀이었겠느냐? 하나님이 즉흥적으로 “나는 오늘 이 인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이 인류를 멸할 것이니 너는 어서 가서 방주를 만들거라.”라고 했겠느냐? 아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들은 후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 하나님이 이 인류를 증오한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절실한 마음으로 이 인류를 멸해 인류가 새로이 시작하도록 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는 또 다른 인류를 만들길 원치 않았다. 노아를 다음 시대의 주인인 인류의 조상으로 운 좋게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려 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이 뜻을 깨달은 후, 마음속 깊이 하나님의 절실한 뜻과 절박한 마음을 느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할 때 주의 깊게, 자세하게, 진지하게 듣는 것은 물론, 그의 마음에는 한 가지 정서가 더 있었다. 어떤 정서이냐? 바로 조바심이다. 이것은 진정한 피조물이 창조주의 절박한 마음을 느꼈을 때 가져야 할 심정이다. 그러니 방주를 만들라는 하나님의 분부를 받은 후 노아는 속으로 어떻게 생각했느냐? 이런 생각을 한 것이다. ‘오늘부터는 그 어떤 일보다도 방주 만드는 일이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야. 나는 창조주의 마음의 소리를 들었고, 창조주의 절박한 마음을 느꼈어. 그러니 시간을 끌지 말고, 되도록 빨리 그분이 얘기하시고 그분이 원하시는 방주를 만들어야 해.’ 노아의 태도는 무엇이었느냐? 감히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어떻게 이행했느냐? 미루지 않고 최선을 다해, 가급적 빨리 하나님이 얘기하고 분부한 모든 세부 사항대로 처리하고 이행했다. 조금도 건성으로 대하지 않았다. 어쨌든 노아는 창조주의 분부에 순종하는 태도를 보였다. 무심히 대하지 않고, 속으로 저항하지도 않고, 본체만체하지도 않았다. 세세한 내용을 하나하나 기억하는 동시에 창조주의 뜻을 깨닫는 데 마음을 기울였다. 하나님의 절박한 뜻을 깨닫는 순간 그는 더욱 서둘러서 하나님이 부탁한 그 일을 가급적 빨리 완성하기로 결정했다. 가급적 빨리란 어떤 것이냐? 예전 같으면 한 달이 걸리는 일을 시간을 최대한 단축해서 아마도 3~5일 더 일찍 완성하는 것이었고, 전혀 질질 끌지 않으며 뒤로 미루는 일도 없이 모든 진도를 최대한 밀고 나가는 것이었다. 물론 작업을 할 때는 최선을 다해 손실과 착오를 줄이고 최대한 가급적 다시 작업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한편, 모든 작업과 제작 공정을 제때 완성하고, 제때 잘 마무리하고, 품질을 보증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꾸물대지 않기’의 실제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이 ‘꾸물대지 않기’는 어떤 것을 전제로 도달한 것이냐? (하나님의 분부를 들은 것입니다.) 이런 전제와 배경 아래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노아가 ‘꾸물대지 않기’에 도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냐? 어떤 이들은 노아에게 참된 순종이 있어서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가 내면에 어떤 것을 갖추었기에 그런 참된 순종에 도달할 수 있었느냐? (하나님 마음을 헤아렸습니다.) 그렇다. 마음이 있다는 건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마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고, 마음이 없는 사람은 빈껍데기에 불과한 바보다. 그는 하나님 마음을 헤아릴 줄 모른다. 그의 마음가짐은 이런 것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조바심을 내든 내 알 바 아니야. 나는 내 스타일대로 할 거야. 어쨌든 놀거나 게으름 피우는 것도 아니잖아.’ 그는 이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 뿐, 조금도 적극적이거나 능동적이지 않다. 그는 하나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이 아니며, 하나님의 마음을 어떻게 헤아려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에게 참된 믿음이 있겠느냐? 분명 없을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렸고, 참된 믿음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할 수 있었다. 그러니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힘을 좀 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서 최선을 다하고 충성을 다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사람의 내면에 양심과 이성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사람이 마땅히 갖춰야 할 태도이며, 노아는 이를 갖추었다. 그 시대에 그렇게 큰 방주를 만드는데 만약 서두르거나 조급해하지 않고 질질 끌어 작업 효율이 전혀 없다면, 방주를 만드는 데 몇 년이나 걸렸겠느냐? 백 년이면 완성할 수 있었겠느냐? (아닙니다.) 몇 대에 걸쳐 쉬지 않고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먼저 이 고정적 물체인 방주를 만드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그 외에 각 종류의 살아 있는 생물을 모으고 기르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살아 있는 이런 생물들을 모으기가 쉬우냐? (쉽지 않습니다.) 다 쉽지 않다. 따라서 노아는 하나님 분부를 듣고 하나님의 절실한 뜻을 깨달은 후, 이 일이 쉽지 않고 간단하지 않음을 느꼈다. 그는 하나님이 흡족하고 안심하도록, 하나님의 다음 단계 사역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도록 반드시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이 일을 잘 해내고 하나님이 맡긴 부탁을 잘 완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노아의 마음이었다. 이것은 어떤 마음이었느냐?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마음이었다. 방주를 만드는 태도에서 볼 때 노아는 절대적으로 믿음이 큰 사람이었다. 그가 하나님 말씀에 대해 백 년 동안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무엇 덕분이었느냐?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었다. 노아는 절대적으로 순종할 수 있었다. 이 절대적인 순종 안에 담긴 세부적인 요소가 무엇이냐? 헤아림이다. 너희는 이런 마음이 있느냐? (없습니다.) 너희는 도리를 얘기하고 구호를 외칠 줄만 알지 실행할 줄 모른다. 어려움이 닥치면 이행하지 못한다. 얘기할 때는 꽤 분명하게 얘기하면서도, 실제로 해야 할 때는 조금만 어려운 점이 있어도 소극적이 되고, 조금만 고생스러워도 불평하며 내팽개치려 한다. 8~10년이 되어도 폭우가 내리지 않으면 소극적이 되고 하나님을 의심할 것이다. 20년이 지났는데도 폭우가 내리지 않으면 계속 소극적이지 않겠느냐? 노아는 방주를 만든 지 백 년이 지나도 소극적이거나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계속 방주를 만들었다. 노아 말고 누가 이렇게 할 수 있겠느냐? 너희에게 부족한 부분이 무엇이냐? (정상 인성을 갖추지 못하고 양심이 없습니다.) 그렇다. 너희는 노아와 같은 인품이 결여되었다. 노아가 진리를 얼마나 깨달았느냐? 너희보다 많이 깨달았겠느냐? 너희가 들은 설교는 너무나도 많다. 성육신의 비밀, 하나님의 세 단계 사역의 내막, 하나님의 경륜, 인류 전체에 대한 가장 깊은 비밀, 최고의 비밀을 모두 알게 했는데, 너희는 어째서 아직도 노아와 같은 인성을 갖추지 못하고, 아직도 노아가 해내는 일을 해내지 못하는 것이냐? 너희의 믿음, 너희의 인성은 노아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한다! 너희에게는 참된 믿음이 없고, 인성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양심과 이성도 없다고 할 수 있다. 비록 너희가 설교를 많이 들어서 진리를 깨달은 것처럼 보이지만, 인품과 사람의 패괴 성품은 설교를 많이 듣고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서 즉시 바뀌는 게 아니다. 이런 일들을 분별할 줄 모른다면, 사람은 자신이 고대 성도들보다 별로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부탁도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친히 하시는 말씀도 듣고 있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키는 일은 우리도 진지하게 대하고 있어. 다 같이 교제하고, 그런 다음 계획하고 배치하고 이행하는 일을 하고 있어. 옛 성현들과 별로 차이가 없다고!’ 지금 보면 차이가 크냐, 작으냐? 너무나 차이가 나며, 주로 인품에서 너무나 차이가 난다. 요즘 사람들은 패괴가 너무 깊고, 너무나 이기적이고 비열하다! 이익만 밝힐 줄 알지, 좋은 일을 해서 선행을 예비하기가 너무나 힘들다! 본분을 이행하려 해도 의지가 없고, 수고하려 해도 견디지 못하고, 대가를 치르고 싶어도 치르지 못하고, 진리를 실행하려 해도 실행해 내지 못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하지 못한다. 이 얼마나 형편없는 인성이냐! 진리를 얼마나 깨닫고 갖추어야 채워질 수 있단 말이냐?
지금까지 노아가 하나님 마음을 헤아린 일에 대해 교제했는데, 이것은 그의 인성에서 가장 소중한 부분이다. 또 어떤 게 있느냐? 하나님 말씀을 들은 노아는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하나님의 계획도 알게 되었다. 이 계획은 단순히 방주를 만들어 기념한다든가 놀이 장소 혹은 커다란 구조물을 지어서 지표로 삼는다는 그런 계획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얘기한 사건으로부터 노아는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즉, 하나님이 이 사악한 인류를 혐오해서 홍수로 인류를 멸하려고 뜻을 굳혔고, 다음 시대에 살아남게 되는 사람은 이 방주에 의지해야 홍수로부터 안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의 주된 사건은 무엇이냐? 바로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게 해서 그와 함께 각종 살아 있는 생물들을 살려 두고, 이 인류는 멸하려 했다. 이는 큰 사건이 아니냐? 그건 집안의 잡다한 일, 어느 한 개인이나 종족에 관계된 사소한 일이 아닌, 중대한 일에 관계된 일이다. 중대한 일이란 무엇을 말하느냐? 바로 하나님의 경륜에 관계된 일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큰일을 하려 하는데, 이 일은 인류 전체와 관계가 있다. 또한 하나님의 경영과도 관계가 있고, 인류를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 인류 전체의 운명과도 관계가 있다. 이것이 노아가 하나님으로부터 그 일을 부탁받은 동시에 알게 된 세 번째 정보이다. 하나님 말씀에서 이 일을 들은 다음 노아의 태도는 어땠느냐? 믿었느냐, 아니면 의심했느냐, 아니면 전혀 믿지 않았느냐? (믿었습니다.) 그 믿음은 어느 정도였느냐? 그가 그 일을 믿었다는 건 어떤 사실에서 알 수 있느냐?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바로 실행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믿는 태도로 하나님 말씀을 대했다는 뜻입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나서 그것을 이행한 정도, 실행한 정도에서 궁극적인 기정사실에 이르기까지, 그 일련의 모습을 볼 때, 노아는 하나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를 절대적으로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냐? 그는 어째서 의심하지 않았느냐? 어째서 그 일을 분석하지 않고 속으로 연구하지 않은 것이냐? 이것은 무엇과 관계가 있느냐?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관계 있습니다.) 그렇다. 그것은 노아가 하나님에게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 얘기한 모든 일, 모든 말씀을 대할 때 간단하게 듣고 받아들이면 끝이 아니라 내면 깊이 참된 인식과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하나님이 비록 홍수가 언제, 몇 년 뒤에 닥칠지, 규모는 얼마나 될지, 하나님이 세상을 멸한 뒤에는 또 어떻게 될지, 이런 세세한 내용은 알려 주지 않았지만, 그는 하나님이 말씀한 것을 기정사실로 믿었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어떤 이야기나 전설, 주장, 글을 대하듯 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할 것이라고, 하나님이 이루려고 결심한 일은 아무도 바꿀 수 없다고 내면 깊이 믿고 확신했다.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이 이루려는 일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는 오직 하나, 즉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분부에 순종하고, 하나님이 협력하라고 하는 일에 잘 협력하면 된다는 것, 이것이 노아의 태도였다. 바로 노아에게 이런 태도가 있었기에, 즉 그가 분석도 연구도 의심도 하지 않은 채 마음속 깊이 믿고 하나님이 요구하는 바, 하나님이 이루려는 사실에 협력하기로 결심했기에 궁극적으로 방주가 완성되고 각종 살아 있는 생물이 수용되어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할 것이라고 했을 때, 본 적도 없고 그 일이 언제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이렇게 그 안에 모르는 일들이 많다는 이유로, 그가 의문을 품고 감히 완전히 믿지 못했다면, 방주를 만드는 마음가짐과 믿음에 영향이 가고 조금 달라지지 않았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떻게 달라졌겠느냐? 방주를 만들 때 하나님이 요구한 규격대로 하지 않고 날림으로 제작할 수도 있고, 또 하나님이 요구한 살아 있는 생물들을 모두 방주 안에 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나님이 암수 한 쌍을 구해야 한다고 하면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건 암컷만 있어도 되겠지요. 못 찾는 건 그냥 두겠습니다. 홍수로 세상을 멸하는 날이 언제가 될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이렇게 방주를 만들고 각종 살아 있는 생물을 모으는 큰일은 백 이십 년이 걸렸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참된 믿음이 없었다면 노아가 백 이십 년을 지속할 수 있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외부 세계의 간섭, 가족들의 온갖 원망을 앞에 두고, 하나님 말씀을 사실로 믿지 않는 사람에게 그 일은 완성하기 매우 힘든 일이었다. 하물며 백 이십 년을 지속하려면 오죽하겠느냐. 지난 번 너희에게 그 시간이 기냐고 물었더니 다들 그렇다고 했다. 너희에게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느냐고 물어보다가 결국에는 보름은 버틸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마저도 버틸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이 없어서 나는 무척이나 실망했다. 너희는 노아만큼 되려면 아직도 한참 멀었다. 그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하고, 그의 믿음의 10분의 1도 갖추지 못했다. 너무나 가련하구나! 우선은 너희 인성과 인격이 너무 저열하고, 또 한편으로 너희에게는 진리를 추구하는 면이 기본적으로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너희는 하나님에 대해 참된 믿음이 생기지 않고, 참된 순종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너희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는 이유, 그러니까 내가 교제할 때 여전히 여기 앉아서 들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냐? 너희는 두 가지를 갖췄다. 하나는, 대부분이 아직은 나쁜 사람보다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고, 좋은 길을 가고자 한다. 그나마 이런 의지와 좋은 바람이 있다. 또 하나는 대부분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 두려움이 어느 정도이냐? 바깥에서 조금이라도 움직임이 있으면 의욕적으로 본분을 이행하다가 바깥이 잠잠해지면 곧 편안함만 즐기면서 본분에 대한 의욕도 눈에 띄게 줄어드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늘 육적인 것을 좇는다. 노아의 참된 믿음과 비교할 때 너희의 그런 모습에 참된 믿음이 있느냐? (없습니다.) 내가 봐도 그렇다. 설령 믿음이 약간 있다고 해도 불쌍할 만큼 작아서 시련의 검증을 버티지 못한다.
나는 사역지침을 내리지는 않지만 사역지침 내용 앞에 다음과 같은 말이 서론으로 들어가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지금 각국의 정세는 심각하고 혼란스러우며 세상의 조류는 갈수록 사악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인류를 징벌하려 하시니 우리는 본분 이행에 합격해야 하고 하나님께 충성을 바쳐야 합니다.”, “지금 전염병이 갈수록 기승을 부리고 상황도 점차 악화되고, 재난이 갈수록 커지고 있어요. 사람들은 병의 고통과 사망의 위협을 마주하고 있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열심히 기도해야만 전염병을 피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피난처예요. 지금 이런 정세와 상황 앞에서 선행을 제대로 예비하고 진리로 무장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올해는 충해가 무척 심각합니다. 인류는 기근에 직면할 것이고, 그러면 곧 사방에서 강도가 끊이지 않아서 사회가 불안정해질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늘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께 지켜달라고 기도하고, 교회 생활, 영 생활을 정상적으로 유지해야 합니다.” 등과 같은 서론 말이다. 이런 식의 서론이 끝나면 바로 구체적인 지침이 등장한다. 지금까지 사역지침 내용 앞에 붙는 이런 서론은 사람의 믿음에 즉각적이고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나는 이게 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사역지침 앞에 이렇게 서론이나 어떤 말을 덧붙이지 않으면 이행할 수 없는 것이냐? 서론을 첨가하지 않으면 사역지침이 사역지침이 아닌 것이냐? 사역지침을 내리는 이유가 사라지기라도 한단 말이냐? 대답은 분명하다. 지금 난 궁금하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과연 무엇이냐?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의의가 과연 무엇이냐? 사람은 과연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는 사실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 창조주가 요구하는 각각의 일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 이것은 고려해 볼 만한 문제가 아니냐? 만약 노아의 기준으로 모든 사람에게 요구한다면, 내가 보기에는 피조물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고, 사람에게는 하나님 앞에 나아올 자격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노아를 대하는 태도, 하나님이 노아를 선택해서 쓴 기준에 따르면, 지금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지닌 믿음과 순종이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어림도 없다! 사람들은 말끝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하는데, 이 믿음과 경배가 사람에게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겠느냐? 사실상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에게 달라고 요구하고, 인류가 하나님을 분명하게 거역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성육신을 멸시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런 것들은 모두 인류가 진리를 멸시하고 공공연하게 원칙을 위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느냐? 사실상 그런 것인데, 바로 이런 본질이다. 매번 사역지침에 이런 말이 있을 때마다 사람의 ‘믿음’은 커진다. 매번 사역지침이 내려오고, 사람이 사역지침의 요구와 의의를 이해한 다음 사역지침에 따라 이행할 수 있게 될 경우, 사람은 자신이 조금 더 순종할 수 있게 되었다고, 자신에게 순종이 생겼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상 사람에게 믿음과 참된 순종이 과연 있느냐, 없느냐? 만약 노아의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사람이 말하는 이런 믿음과 순종은 과연 무엇이냐? 사실상 일종의 거래이다. 어디 믿음이나 참된 순종이라고 할 수 있느냐? 여기서 사람이 말하는 참된 믿음은 무엇이냐? “말세가 왔으니 하나님이 어서 일하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정말 복받았어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멸하실 때를 만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저는 운 좋게 살아남을 수 있고, 치명적인 재난에 고통받지 않을 거예요. 하나님은 너무 좋은 분이시고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세요. 하나님은 너무나 위대하고 사람을 정말 높여 주셨죠. 하나님은 정말 하나님이시고 하나님만이 이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소위 참된 순종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은 모두 옳습니다. 하나님이 하라시는 대로 해야죠. 안 그러면 재난에 떨어지고 그것으로 끝입니다. 아무도 당신을 구해 줄 수 없어요.” 네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고 네 순종도 참된 순종이 아니다. 모두 남을 속이는 것이다.
노아가 방주를 만든 일은 지금 세상 사람들이 대부분 알고 있지 않느냐? 하지만 그 내막을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 노아의 참된 믿음과 순종을 이해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 노아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또 누가 알고 누가 관심을 가지느냐?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난번 이 두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교제한 다음, 다시 성경에 나오는 노아와 아브라함 이야기의 자세한 내용을 찾아 읽어 본 사람이 있느냐? 너희는 노아, 아브라함, 욥, 이 세 인물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감동을 받았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 사람을 부러워하느냐? (그렇습니다.)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으냐? (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 행위의 본질, 그들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그들의 믿음과 순종을 너희는 자세히 교제해 본 적이 있느냐? 이런 사람이 되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느냐? 나는 욥의 이야기를 진작부터 읽었고, 노아 이야기, 아브라함 이야기도 조금 알고 있다. 이 세 인물의 이야기에서 그들이 나타낸 모습, 하나님이 그들에게 한 말씀과 행동, 그리고 그들의 여러 가지 태도를 볼 때마다, 속으로 생각할 때마다 나는 눈물 날 것 같은 감동을 받는다. 그렇다면 너희가 볼 때 감동적인 부분은 무엇이냐? (하나님 교제를 듣고 알게 되었습니다. 욥은 시련을 받았을 때 하나님이 자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고통받는 게 싫어서 그는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했습니다. 이 부분을 볼 때마다 욥이 특별히 하나님 마음을 헤아리고 있다는 생각에 무척 감동을 받습니다.) 또 어떤 게 있느냐?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동안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여전히 하나님 마음을 헤아렸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백 살 때 아들을 하나 얻어서 무척이나 반갑고 기뻤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아들을 바치라고 했을 때 하나님 말씀에 따르고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저희는 노아와 아브라함의 인성, 그들의 양심과 이성이 없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보고 무척 감탄했습니다. 그들은 저희가 본받아야 할 모범이기도 합니다.) (지난 번 하나님께서 교제하실 때 노아가 백 이십 년 동안 방주 만드는 일을 지속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일을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완성함으로써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저희가 본분을 대하는 태도와 대조해 볼 때 저희는 꾸준히 하는 태도가 전혀 없어서 속으로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 감동을 받기도 했습니다.) 다들 감동받았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 화제는 잠시 접어 두겠다. 노아와 아브라함의 이야기에 대한 교제가 끝나면 그때 다시 교류해 보기로 하자. 너희에게 내가 감동받은 부분이 어딘지 알려 줄 것이고, 그리고 우리가 감동받은 부분이 같은지 아닌지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방금 하나님에 대한 노아의 참된 믿음에 대해 교제했는데,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다는 기정사실에서 하나님에 대한 그의 참된 믿음을 볼 수 있었다. 노아의 참된 믿음은 그의 일거수일투족, 그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하나님이 분부한 일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 나타난다. 여기에서 하나님에 대한 노아의 참된 믿음을 충분히 볼 수 있다. 이 믿음은 어느 누구도 의심할 수 없고,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믿음이다. 하나님이 시킨 일이 그의 관념에 맞든 안 맞든, 그가 생활하면서 하려고 계획한 것이든 아니든, 또 그의 생활 내용과 어떤 충돌을 일으키든, 나아가 얼마나 어려운 일이든, 그의 유일한 태도는 받아들이고, 순종하고, 이행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노아가 방주를 만들어서 살아 있는 여러 생물을 구하고 자신의 일가족을 구한 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이 홍수를 내려 인류를 멸하기 시작했을 때 방주는 노아의 일가족과 살아 있는 여러 생물을 싣고 물위를 떠다녔다. 하나님은 40일 동안 폭우를 내려 세상을 멸하였고, 노아의 가족 여덟 명과 방주에 들어간 살아 있는 여러 생물들만 살아남고 그외의 사람들과 생물들은 모두 멸망되었다. 이 사실은 사람에게 무엇을 알려 주느냐? 노아에게 참된 믿음이 있고 하나님에 대한 참된 순종이 있었기 때문에, 즉 노아가 하나님에게 진실로 협력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고자 하는 일을 이루어 현실로 바꿀 수 있었다. 하나님은 노아의 이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맡긴 중요한 부탁을 저버리지 않고 완성했다. 노아가 하나님의 부탁을 완성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의 분부 때문이다. 또 하나는 주로 노아 본인의 참된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 때문이기도 하다. 가장 귀중한 이 두 가지를 갖추었기 때문에 노아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또한 참된 믿음과 절대적인 순종을 갖추었기 때문에 그는 비로소 하나님이 보기에 마땅히 살아남아야 할 사람, 살아남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노아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이 혐오하는 대상이었다. 그 말은 곧 그들은 모두 하나님이 지은 만물 가운데서 살아갈 자격이 없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노아가 방주를 만든 일에서 우리는 무엇을 봐야 하느냐? 하나는 노아에게 있는 고귀한 인품, 그가 갖춘 양심과 이성을 보았고, 또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참된 믿음과 순종을 보았다. 이것은 모두 본받을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하나님의 부탁을 대할 때 이런 믿음과 순종이 있었기 때문에 노아는 하나님이 보기에 마음에 드는 대상, 하나님이 사랑하는 피조물이 되었다. 이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자 복받은 일이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얼굴빛 속에서 살아갈 자격이 있고, 하나님이 볼 때 살아갈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살아갈 자격이 있는 사람이란 어떤 뜻이냐? 하나님이 인류에게 누리도록 베풀어 준 모든 것을 누릴 자격이 있고, 하나님 얼굴빛 속에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고, 진정한 피조된 인간,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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