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2 노아와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였는가(1) 제 4 부

방금 닭과 달걀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데, 여기에 등장한 사람은 말씀을 따르고 순종했느냐?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취급했느냐? 마이동풍이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당신은 당신 할 말을 하세요. 나는 내 할 일을 할 테니. 나는 당신이 하는 그런 요구에는 관심 없습니다. 당신에게 달걀만 드리면 되지, 당신이 어떤 달걀을 드시든 내 알 바 아닙니다. 유기농 달걀을 드시고 싶어 하는데 어림없는 소리! 꿈을 꾸시는군요. 닭을 기르라고 해서 이렇게 기르는데, 거기다 요구까지 하다니, 얘기할 자격이나 있습니까?’ 이런 자가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는 사람이냐? (아닙니다.) 이건 뭘 하자는 것이냐? 뒤집어엎으려는 것이다! 하나님 집은 하나님이 말씀하고 사역하는 곳이고 진리가 권세 잡는 곳이다. 만약 하나님이 그 앞에서 직접 얘기했는데도 따르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뒤에서는 하나님 말씀을 실행할 수 있겠느냐? 그건 더더욱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일에서 더욱 불가능한 일까지 이 두 가지 일을 볼 때,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의 하나님이냐? (자기 자신입니다.) 그렇다, 너는 너 자신을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너 자신을 믿고 있다. 그러면서 왜 아직도 여기서 비비고 있느냐? 너 자신이 바로 너의 하나님인데, 뭣 하러 아직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기치를 내거는 것이냐? 그건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이 아니냐? 자신을 속이는 것이 아니냐?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이렇다. 그러면 그가 하나님 말씀을 따를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사소한 일에서도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하나님이 얘기해도 그에게는 먹히지가 않는다. 그는 귀담아듣지 않고, 순종하지 못한다. 이런 자가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구원과는 얼마나 떨어져 있느냐? 너무나 멀리 있어서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하나님의 내면으로 말하자면, 그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그와 신경전을 벌이는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겠느냐? 결코 원하지 않는다. 사람의 뜻에 따라 판단해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마귀 사탄이 너에게 대립하고 사사건건 너와 신경전을 벌이는데 너 같으면 그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 불가능하다. 사람도 그런 자는 구원하려 하지 않고, 친구를 사귀어도 그런 자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닭을 기르는 것처럼 이렇게 사소한 일에도 사람의 본성이 드러나고, 이만한 일에서도 사람은 내가 한 말을 따르지 않았다. 이건 심각한 문제가 아니냐?

이번에는 양에 관한 일을 하나 말해 보려고 한다. 물론 이 역시 사람과 관계된 일이다. 봄이 찾아오자 따뜻한 봄기운에 꽃이 피고, 파릇파릇 풀이 돋고, 초록빛으로 물들며, 모든 것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양들도 겨우내 먹었던 마른 풀이 지겨워서 풀이 새로 돋아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신선한 풀을 먹고 싶어 했다. 마침 이 시기에 새끼를 낳은 어미 양은 싱싱한 풀이 더욱 필요했다. 풀의 질이 좋고 양(量)이 많을수록 어미 양의 젖도 잘 나오고, 그만큼 새끼도 빨리 자라서 보는 사람도 기분이 좋다. 그러면 가을쯤에는 살찐 양을 먹을 수 있겠다는 기대를 품기 마련이다. 사람이 이런 기대를 품으면 어떻게든 좋은 풀을 많이 먹여서 양을 살찌워야 하지 않겠느냐? ‘지금은 초지에 좋은 풀이 없으니 양이 먹어도 빨리 크지 않는구나. 좋은 풀이 어디 없을까?’라고 고민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공을 들여야 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양을 기르는 사람은 어떤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루는 양을 보러 갔는데 새끼 양이 아주 좋아 보였다. 사람을 보더니 달려와서 사람 다리에 앞발을 올리며 위로 올라와 말을 걸려고 했다. 개중에는 뿔이 자란 새끼 양도 있길래 두 뿔을 잡고 놀아 주었다. 그 새끼 양은 괜찮아 보였지만 비쩍 마르고 야위어 있었다. 나는 ‘새끼 양은 살도 보드랍고 털도 길지 않지만 뜨끈뜨끈한데 통통하게 살이 오르면 더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양을 기르는 사람에게 물어봤다. “풀이 별로 안 좋지 않으냐? 이 초지의 풀은 양들이 먹기에 부족하지 않으냐? 땅을 갈고 새 풀을 좀 심어서 양들이 충분히 먹게 해 줘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자 그가 말했다. “싱싱한 풀이 부족해서 지금 마른 풀도 먹이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내가 “이 계절에 아직도 마른 풀을 먹이다니! 어미가 새끼를 낳았으니 싱싱한 풀을 먹여야지 어떻게 아직도 마른 풀을 먹이냐? 해결할 방법은 생각해 봤느냐?”라고 묻자 그는 핑계를 잔뜩 늘어놓았다. 내가 초지를 좀 갈라고 했더니 그는 안 된다고 했다. 초지를 갈면 양이 당장 먹을 게 없다는 것이었다. 너희는 이 얘기를 듣고 무슨 생각이 드느냐? 부담을 조금 느끼지 않느냐? (어떻게든 좋은 초지를 찾거나 다른 곳에서 싱싱한 풀을 베어 와야 합니다.) 해결할 방법은 있다. 너는 자기 배가 부르다고 다른 일은 나 몰라라 할 게 아니라 방법을 좀 생각해야 한다. 양도 배불리 먹어야 한다. 나중에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또 말했다. “이 초지를 갈아서 새로 풀을 심을 수는 없느냐? 가을에 심더라도 내년에는 양들이 싱싱한 풀을 먹을 수 있지 않겠느냐? 그리고 다른 곳에도 초지가 두 군데 있으니까 매일 양을 몰고 가서 싱싱한 풀을 먹이면 되지 않겠느냐? 두 초지를 번갈아가며 이용하면 양들이 신선한 풀을 먹을 수 있잖으냐?” 내가 한 말은 실천하기 쉽지 않겠느냐? (쉽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남 일이라고 쉽게 얘기하지 마십시오. 항상 실천하기 쉽다고 하는데 어디 그렇게 쉽나요? 많은 양이 이리 뛰고 저리 뛰어서 몰고 가는 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여간 힘든 게 아니라고요.” 양을 몰고 가라고 하는 것뿐인데도 이렇게 힘들고 핑계나 어려움도 이렇게 많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알았다고 했다. 며칠 뒤 다시 찾아가 봤더니 풀이 거의 사람 허리만큼 자라 있었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양이 풀을 먹고 있을 텐데 어떻게 풀이 이렇게 높이 자랄 수 있지?’ 사정을 알아보니 아예 그곳에 양을 풀어놓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또 핑계를 댔다. “그 초지에는 천막이 없어서 양들이 거기 있으면 햇볕을 많이 받아요.” 내가 말했다. “천막을 하나 만들어 주면 되지 않느냐? 양이 몇 마리나 된다고 그러냐? 너희가 여기서 지내면서 하는 일이 뭐냐? 이런 일에 신경 써야 하는 거 아니냐?” 그가 말했다. “우리를 만들 사람을 못 구했어요.” 내가 “다른 일에는 사람을 잘만 구하던데 이만한 일에는 왜 사람을 못 구한단 말이냐? 사람을 구해 보기나 했느냐? 먹는 것만 밝히고 기르는 것은 나 몰라라 하다니, 어쩜 그렇게 이기적이냐? 양고기는 먹고 싶어 하면서 양에게는 싱싱한 풀도 안 먹이다니, 어쩜 그렇게 비도덕적이냐!” 이렇게 닦달하자 천막이 설치돼서 양들은 싱싱한 풀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양이 싱싱한 풀을 먹는 게 쉽겠느냐? 이렇게 간단한 일도 실행에 옮기는 게 그렇게나 힘들다. 매번 사람들은 핑계를 댄다. 핑곗거리나 어려움이 하나라도 있으면 내가 가서 처리할 때까지 손 놓고 기다린다. 나는 늘 확인하고 지켜보고 닦달해야 한다. 닦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양을 기르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길래 이마저도 내가 걱정해야 하느냐? 어떤 일이든 너희를 위해서 준비하는 건데, 너희가 말을 좀 따르게 하는 게 어째서 이렇게도 힘드냐? 네게 칼산에 오르고 불구덩이에 뛰어들라고 했느냐? 아니면 이 일이 너무 어려워서 시행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냐? 이건 네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니냐? 모두 네 힘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고, 네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일이다. 너에게 지나친 요구를 한 것도 아닌데 너는 어째서 해내지 못하느냐? 무엇이 문제겠느냐? 내가 방주를 만들라고 하더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네게 시킨 이 일을 방주 만드는 일과 비교하면 얼마나 차이가 나느냐? 차이가 너무나 크다. 이건 하루 이틀이면 되는 일이다. 한 마디면 되는 일이고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다. 방주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이냐? 백 년이 넘게 걸리는 일이다. 내가 장담하건대 만약 너희가 노아와 같은 시대에 태어났다면 너희 중에는 하나님 말씀을 따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을 것이다. 노아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분부한 대로 조금씩 조금씩 방주를 만드는 동안 너희는 옆에 서서 노아를 비웃고 조롱하고 비아냥대며 그의 발목을 잡을 자들이다. 너희는 분명 그런 부류다.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는 태도는 전혀 없으면서 오히려 하나님이 네게 특별한 은총과 축복, 깨우침을 주길 바란다. 어쩌면 그렇게 염치가 없느냐? 너희가 볼 때 내가 얘기한 일들 중에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한 가지라도 있느냐?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한 가지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이런 것은 모두 너희 사람의 일이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너희에게 관여하지 않아도 되는데 내가 왜 관여하려 하겠느냐? 나는 의무가 아니라 단지 너희를 위해 관여할 뿐이다. 너희 중에는 이 일을 걱정하는 사람도 없고, 이 책임을 다하는 사람도 없고, 이런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도 없다. 그러니 내가 많이 신경 써야 하고, 너희는 말씀을 따르고 협력하면 된다. 이는 아주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너희는 이조차도 못 한다. 그러고도 사람이냐?

더 심한 일도 있었다. 어떤 곳에 건물을 짓는데, 높이도 높고 공간도 크고 안에 놓을 물건도 많은 편이라 물건을 쉽게 나르려면 적어도 문이 양문형이어야 하고 높이도 2.4m는 돼야 했다. 정상인이라면 모두 이 점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꼭 단문형에 높이도 1.8m인 문을 설치할 것을 고집했다. 남들이 아무리 제안해도 듣지 않았고, 누가 말해도 소용없었다. 이건 얼간이가 아니냐? 머저리도 그런 머저리가 없었다. 나중에 누가 내게 이 일을 알려 주어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반드시 양문형 문을 달아야 하고, 문 높이도 더 높여야 한다.” 그는 마지못해 알았다고 했다. 겉으로는 동의했지만 그가 뒤에서 뭐라고 했겠느냐? “문을 그렇게 높이 내서 뭐 하려고? 좀 낮으면 어때서?” 나중에 가서 봤더니 문 한 짝은 더 냈는데, 문의 높이는 그대로였다. 문의 높이를 높이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겠느냐? 높일 수가 없었겠느냐, 아니면 지붕에 닿아서 그런 것이었겠느냐? 어찌 된 일이었겠느냐? 그는 단지 말을 따르기가 싫었던 것이다. 그의 뜻은 이러했다. ‘당신이 결정해서야 되겠습니까? 여기서는 내가 어른이니 내가 결정해야지요. 내가 다른 사람들 말을 들을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내 말을 들어야 합니다. 당신이 뭘 압니까? 당신이 건축을 압니까?’ 내가 건축을 모른다고 해서 비율도 볼 줄 모르겠느냐? 건물도 높은데 그렇게 낮은 문을 달면, 키가 190cm인 사람은 들어갈 때 허리를 굽히지 않으면 문틀에 머리를 박을 텐데, 그게 무슨 문이란 말이냐? 내가 건축에 정통할 필요는 없다. 말해 보아라, 내 의견이 합리적이고 실용적이지 않으냐? 그는 이런 실용성은 모르고, 그저 아는 것이란 규례를 지키는 것뿐이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동네는 문이 전부 그런데, 어째서 당신 말대로 문을 그렇게 높게 내야 합니까? 나보고 하라고 하면 난 이렇게 할 겁니다. 제가 필요 없으면 관두세요. 나는 이렇게 할 거고 당신 말대로는 못 하겠습니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느냐? 너희가 볼 때 이 사람을 계속 쓸 수 있겠느냐? (쓸 수 없습니다.) 쓸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이런 사람은 하나님 집에서 힘은 좀 쓸 수 있다. 비록 즉시 그를 내쫓지는 않았고, 형제자매도 참고 나도 참을 수 있지만, 이런 인성이라면 진리를 깨닫고 말고는 둘째 치고, 그가 하나님 집과 같은 이런 환경에서 일하고 생활하며 계속 지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쫓아낼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교회에서 오래 머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왜 그렇겠느냐? 우선 그가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고 없고는 차치하고, 그런 성품이라면 힘을 좀 쓰는 것에도 거드름을 피우며 자기가 결정하려 할 텐데, 하나님 집에서 그게 통하겠느냐? 그는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스스로를 괜찮게 생각하고 자기가 하나님 집의 기둥이자 대들보라고 생각하며 못된 짓을 일삼고 마음대로 결정하려 한다. 그러면 반드시 문제가 생기고 오래 머물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집에서 굳이 내쫓지 않더라도 오래 머물다 보면 하나님 집에서 언제나 진리와 원칙만 얘기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 흥미를 잃는다. 그는 자기 방식대로 행동하지도 못하고,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지 않고, 늘 자기가 결정하려고 하지만 그게 통하지도 않고 사사건건 제한을 받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형제자매들이 대부분 진리와 원칙을 깨달을 텐데, 그가 제멋대로 굴 때, 그가 늘 어른 행세를 하며 자기가 결정하려 하고 원칙대로 일하지 않을 때 많은 이들이 멸시하는 시선으로 쳐다보면 그가 견딜 수 있겠느냐? 그때가 되면 그는 자신이 이 사람들과는 맞지 않는다고, 자신은 태생적으로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고, 자기가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고 느낄 것이다. ‘어쩌다 실수로 그만 하나님 집에 발을 들였을까? 이제 보니 내가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구나. 힘만 좀 쓰면 재난을 피하고 나중에 복을 받을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아닐 줄이야!’ 그는 태생적으로 하나님 집의 사람이 아니라서 한동안 지내다 보면 흥미와 의욕을 잃고, 쫓아낼 필요도 없이 제 발로 나가게 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당신은 어째서 뭐든 다 관여하십니까? 쓸데없이 참견하는 것 아닙니까? 쓸데없이 참견해서 위신을 세우고, 존재감을 드러내고, 사람들에게 당신은 못하는 것이 없다는 걸 보여 주려는 것 아닙니까?” 너희가 볼 때 내가 관여하지 않아도 되겠느냐? 사실 나는 그런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원래 리더 일꾼의 책임이다. 하지만 내가 만약 관여하지 않으면 일을 그르칠 것이고, 앞으로의 사역에 지장을 줄 것이다. 만약 너희가 해결할 수 있고, 내 말을 따른다면 내가 관여할 필요가 있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관여하지 않으면 너희는 사람다운 모습으로 살 수 없고, 제대로 생활할 수 없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 내가 가장 간단한 일을 하나 얘기해 보겠다. 위생이나 생활 환경 관리와 같은 사소한 일을 너희는 어떻게 했느냐? 내가 어떤 곳에 갈 때 만약 미리 알려 주지 않는다면, 그곳은 지저분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너희가 내 눈앞에서 정리해야 하고, 그 와중에 기분도 썩 좋지 않고 마음도 편치 않을 것이다. 내가 만약 미리 알려 준 경우는 가 보면 그래도 괜찮아 보인다. 하지만 너희가 뒤에서는 어떤지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이런 것들은 모두 사소한 일이고 정상 인성의 가장 간단하고 기본적인 한 부분이다. 너희는 모두 이렇게 나태한데 본분을 정말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나는 중국에 있을 때 어떤 곳에서는 십 년을 살면서 그곳 사람들에게 이불 개기와 말리기, 청소하기를 가르쳤고, 또 집 안에서 어떻게 난로에 불을 지피는지 가르쳤는데 십 년을 가르쳐도 안 됐다. 내가 가르칠 줄 몰라서 그런 것이었겠느냐? 그게 아니라 그 사람들의 불량 습성이 너무 심했다. 나중에는 더 이상 가르치지 않고, 어디 가서든 이불이 개켜져 있지 않은 것을 보면 고개를 돌리고 가 버렸다. 어째서 고개를 돌리고 가 버렸겠느냐? 나는 냄새 나는 것이 싫고 역겹다. 딱 봐도 개돼지 우리만도 못한 곳인데 그런 곳에 내가 뭐 하러 머물겠느냐? 나는 그런 곳에서는 지내지 않는다. 사람은 이런 사소한 문제도 고치기 어렵다.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데까지 나아갈 경우, 지금 분명히 말하자면 너희는 그 근처에도 갈 수 없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주로 얘기한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니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따르라는 것은 네게 분석하고, 연구하고, 토론하고, 검토하고, 원인을 규명해서 그렇게 된 까닭을 알아내라는 것이 아니라 시행하고 집행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네게 말씀하고, 임무를 지시하고 일을 맡긴 다음 너의 행동과 네가 어떻게 차근차근 시행하는지를 보려고 한다. 하나님은 네가 이해했는지, 네가 이 일에 대해 속으로 무슨 호기심이나 의문을 품었는지는 신경 쓰지 않는다. 하나님은 네가 실행에 옮기고 있는지, 네게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는 태도가 있는지를 본다.

한번은 우연히 몇몇 사람에게 프로그램 의상에 관한 문제를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주요 원칙은 의상 색깔과 스타일이 점잖고 단정하고, 고상하고, 품격이 있어야 하며 너무 괴상하면 안 된다는 것, 돈을 너무 쓸 필요도, 특별한 디자이너가 있을 필요도 없고, 고급 유명 브랜드에 가서 구입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볼 때, 의상은 입는 사람을 품격 있게 만들고, 점잖고 단정해야 하고, 남 앞에 입고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색깔은 어떤 것이든 괜찮다. 무대에서 별로 밝지도 예쁘지도 않거나 보기에 너무 어두운 몇몇 색만 피하면 나머지는 대부분 다 괜찮고, 어떤 색이든 규례는 없다. 왜 이런 원칙이어야 하겠느냐? 하나님이 만든 만물에는 없는 색이 없다. 꽃과 나무의 색깔도 가지각색이고, 모든 식물이 다 나름의 색을 가지고 있다. 새들도 색이 가지각색이다. 따라서 우리는 색깔에 대해 어떤 관념이나 규정을 가져서는 안 된다. 나는 얘기해 놓고도 그들이 이해하지 못했을까 봐 또 확인했다. 다들 잘 알겠다고 해서 마음이 놓였다. 이제는 내가 말한 원칙대로 가서 시행하는 일만 남았다. 그건 간단하지 않으냐? 그게 거창한 일이냐? 방주를 만드는 일에 비하면 큰일이냐, 작은 일이냐? (작은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일보다 어려운 일이냐? (아닙니다.) 전혀 어렵지 않고 간단하다. 옷에 관한 일이라면 태어나서부터 접하는 것이므로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다. 특히 내가 원칙 범위를 정해 주었으니 사람들이 집행하기가 더 쉬워졌다. 관건은 사람이 내 말을 따르는지, 그대로 하길 원하는지에 달렸다. 얼마 후 프로그램과 영화가 몇 편 만들어졌는데, 주요 인물들의 의상이 모두 파란색이었다. 나는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의 머리가 이상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아주 알아듣기 쉽게 얘기했다. 꼭 파란색 의상을 입혀야 한다고, 파란색 의상이 아니면 출연시키지 말라고 규정한 적도 없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어떻게 된 것이냐? 무슨 지시나 지배를 받은 것이냐? 지금 세상의 흐름이 변해서 다들 파란색 옷만 입는 것이냐? 그것도 아니다. 세상에는 각종 색상과 스타일에 대한 규정이 없으며, 사람들은 어느 색의 옷이나 다 입는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누가 검사했겠느냐? 누가 이 일을 통제했겠느냐? 어느 한 사람이 이 일을 지배하고 있지 않겠느냐? 분명 누군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니 어떤 스타일이든지 간에 옷들이 천편일률적으로 전부 파란색이었던 것이다. 내가 한 말은 전혀 소용없었다. 그는 진작부터 다 정해 놓았다. 어떤 옷이든 전부 파란색이어야 하고 파란색이 아니면 다른 색 옷은 입지 못하게 해 놓았다. 파란색은 영적인 색을 뜻하고, 거룩함을 뜻하고, 하나님 집의 상징적인 색이니 파란색 옷을 입지 않으면 그런 프로그램에 출연하지 못하게 하고 출연할 엄두도 못 내게 했다. 내가 봤을 때 그 사람들은 끝났다. 이렇게나 간단한 일을 내가 일일이 분명하게 얘기해 줬건만, 마지막에는 확인까지 해서 양쪽이 합의를 본 다음에 그 화제를 마무리했건만 결과는 어땠느냐? 내가 한 말이 마치 공기라도 되는 것처럼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자기 멋대로 하고, 자기 맘대로 실행했다. 아무도 내가 한 말을 시행하지도, 지키지도 않았다. 그가 당시 잘 알아들었다고 한 건 무슨 뜻이었겠느냐? 상대를 가지고 논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바깥세상의 길거리 아낙네들처럼 하루 종일 잡담이나 하는데 나와 얘기할 때도 마찬가지로 그런 태도를 보인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이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대하는 태도가 바로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이며, 그 태도는 심히 우려스럽고 일종의 위험한 신호이고 좋지 않은 신호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 신호가 무엇인지 알고 싶으냐? 너희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나는 반드시 너희에게 이 일을 알려 줘야 하니 잘 들어라. 너희의 모습과 너희가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태도로 볼 때, 재난 속에 떨어질 사람들이 많다. 일부는 재난 속에 떨어져 징벌을 받을 것이고, 일부는 재난 속에 떨어져 연단을 받을 것이다. 재난은 피할 수 없다. 징벌받은 자들은 바로 죽음에 이르고 멸망할 것이다. 재난 속에서 연단을 받은 사람들은 만약 재난 속에서 연단을 통해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고, 그런 다음 굳게 설 수 있고, 간증이 있게 된다면 가장 어려운 이 관문은 통과한 셈이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더는 희망이 없고 위험하며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이다. 알아들었느냐? (잘 알아들었습니다.) 너희 입장에서 이는 좋은 일이겠느냐? 요컨대 내 입장에서 이는 좋지 않은 징조이며, 나는 이것을 좋지 않은 신호로 생각한다. 나는 너희에게 사실을 알려 주었으니, 어떤 선택을 하든 너희 자유다. 이 일은 이제 그만 얘기하기로 하고 반복하지 않겠다. 두 번 다시 얘기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주로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주제로 교제했다. 하나님 말씀을 따르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고, 하나님 말씀을 집행하고 시행해서 실행에 옮기는 것도 무척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저희는 도대체 어떻게 그리스도를 대해야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무척 간단한 일이다. 네가 그리스도를 대하는 태도가 곧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이고, 하나님이 볼 때는 네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곧 그리스도를 대하는 태도이다. 물론 네가 그리스도를 대하는 태도는 곧 하늘의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이다. 네가 그리스도를 대하는 태도는 가장 현실적이고 눈에 보이는 태도이고, 바로 하나님이 감찰하려는 태도이다. 사람들은 과연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하나님이 바라는 것인지 궁금해하는데, 이는 간단하며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진솔하게 대하는 것이고, 둘째는 존중하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존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며, 셋째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귀로 듣는 것이겠느냐, 아니면 다른 무엇으로 듣는 것이겠느냐? (마음으로 듣는 것입니다.) 너는 마음이 있느냐? 마음이 있으면 마음으로 들어라. 마음으로 들어야 알아들을 수 있고 실행해 낼 수 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간단한 것이다. 문자적인 의미로도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이치대로 말해도 쉽게 행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행하는지, 행할 수 있는지 여부는 너희에게 달렸으니 더 이상은 설명하지 않겠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당신은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인데 무슨 이유로 우리에게 당신을 진솔하게 대하라고 하는 겁니까? 무슨 이유로 우리에게 당신을 존중하라고 하는 겁니까? 무슨 이유로 우리에게 당신 말을 들으라고 하는 겁니까?” 여기에도 이유가 있으니 그 이유도 세 가지다. 자세히 듣고 내가 하는 말이 일리가 있는지 없는지 생각해 보아라. 일리가 있으면 받아들이고, 일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길을 찾아도 된다. 첫째, 너는 하나님의 이 단계 사역을 받아들인 다음부터 계속 내가 한 모든 말을 먹고 마시고 누리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고 있다. 둘째, 너 스스로가 너를 전능하신 하나님을 따르는 자이자 그의 신도로 인정했다면 네가 스스로를 이 평범한 성육신 하나님을 따르는 자로 인정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둘째는 네가 스스로를 전능하신 하나님을 따르는 자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셋째가 가장 중요하다. 모든 인류 가운데서 오직 나만이 너희를 사람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하지 않으냐? (중요합니다.) 이 세 가지 중 너희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무엇이냐? 너희가 볼 때 내가 진실하지 않고 객관적이지 않게 얘기했거나 사실이 아닌 것이 하나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방금 얘기한 사항은 전부 여섯 가지인데, 각각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을 테니 너희가 잘 생각해 보아라. 이미 많이 다룬 주제이므로 너희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2020년 7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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