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1 무엇이 진리인가 (제 5 부)
‘수모’란 대체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수모를 참을 필요가 있겠느냐? 이 ‘수모’가 존재하겠느냐?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문제는 해결된 것 아니겠느냐? 그럼 앞으로 누가 “하나님을 믿을 때는 가장 먼저 인내를 배워야 해요. 무슨 일이 있든 참아야 하고 마음속에서 억눌러야 해요.”라고 말하는 걸 들으면 그에게 얘기해 줘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떻게 얘기해야겠느냐? 이렇게 말하여라. “뭘 인내한다는 거죠? 당신이 정말로 굴욕을 견딘다면 당신은 참 불쌍한 거예요.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는 뜻이죠. 당신이 진리를 깨닫는다면 그런 굴욕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배치하신 모든 환경을 기꺼이 받아들이려 할 거예요. 이런 고통은 사람이 마땅히 겪어야 하는 것이지 어떤 굴욕이 아니에요. 이는 하나님의 높여 주심이라고요. 우리가 이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남겨 주셨다는 뜻이에요. 만약 우리에게 고통을 겪을 기회나 자격조차 없다면 구원받을 기회도 없는 거예요. 당신은 그게 굴욕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해야 해요. 자신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그른지 한번 살펴보세요. 그런 굴욕은 존재하지 않아요. 우리는 패괴된 사람이니 이런 고통을 겪는 것은 당연해요. 병에 걸리면 약을 먹고 수술을 하면서 고통을 좀 겪어야 하잖아요! 병을 치료하기 위해 겪는 고통을 굴욕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그건 굴욕이 아니라 병을 치료하기 위한 거죠.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심판과 형벌을 겪는 것은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사람다운 모습을 살아 내며 하나님의 요구대로 살아가기 위해서이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더 제대로, 더 존엄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예요. 우리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이고, 진리 생명을 얻기 위해서라고요. 그걸 굴욕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우리가 다해야 할 책임이자 의무, 걸어야 하는 길로 여겨 받아들여야 해요. 그건 하나님의 높여 주심이죠. 우리는 우리를 높여 주시고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 하나님을 찬미해야 해요. 우리의 행동거지로 보면 우리는 이런 고통을 겪을 자격이 없어요.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멸해져야 한다고요. 만약 우리가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과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이 모든 은혜를 굴욕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너무도 양심이 없는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크게 상하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죠.”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정도의 도리는 아주 얕으니 말하지 않아도 깨달아야 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일깨우면 사람은 이런 일을 깨달아 마음이 좀 넓어지고, 일이 닥쳐도 억지를 쓰지는 않게 된다. 어떤 사람은 마음속으로는 이것이 진리이니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지만 입으로는 정말 억울하다고 말하고, 말하다 보면 하나님을 판단하는 말도 내뱉는다. 너희는 절대 이런 짓은 저지르지 마라. 무슨 일이 닥치든 진리를 향해 구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니 절대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진리, 길, 생명으로 인정한다면 너는 하나님이 배치한 그 어떤 환경도 인위적인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되고, 하나님이 배치한 모든 환경을 네 성품 변화의 기회이자 진리를 받아들이는 기회로 여겨야 한다.
‘수모’의 뜻에 대해서는 교제를 마쳤으니 이어서 다음 부분인 ‘무거운 짐을 짊어지다’란 무슨 뜻인지 교제하겠다. 방금 우리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이 사람 마음속의 욕망과 야심, 자신이 이루고 싶은 목표라고 얘기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들이려면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있겠느냐? 방금 말했듯이 ‘수모를 참는다’는 말은 하나님 집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너는 수모를 참을 필요도, 자신이 몹시 고통을 겪고 있다고 느끼고 속으로 억울해하며 하나님을 흡족게 하기 위해 이 모든 굴욕을 견딘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마치 네가 몹시 고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럴 필요 없다. 그럼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건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만약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 모든 고통을 겪게 하는 것은 사람이 더 큰 책임과 사명을 짊어져서 더 큰 축복과 더 좋은 종착지를 얻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이런 말이 정당하고 합리적이겠느냐? (정당하지 않습니다.) 정당하지 않다. 그럼 어떻게 규정해야겠느냐? 하나님은 사람이 구원받아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고 더 잘 살아가도록 하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하는 것은 과연 사람을 위해서이겠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위해서이겠느냐?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당연히 사람을 위해서이다. 최대 수혜자는 사람이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이 그 안에서 어떤 이득을 얻을지와는 관련이 없고, 사람이 이런 고통을 겪어서 얼마나 큰 복을 받을지와는 더더욱 관련이 없다. 너는 참을 필요도, 그런 ‘원대한 이상과 포부’를 가질 필요도, 그렇게 버릴 필요도 없다. 사실 너는 무엇을 버리지도, 잃지도 않았다. 결국에는 오히려 사람이 얻는 게 가장 많다. 사람은 처신하는 여러 측면의 준칙을 깨달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제정한 이 모든 규칙과 법칙에 순응하며 질서 있게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살아가는 방식은 오늘날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에 비해 어떻겠느냐? (좋습니다.) 오늘날 살아가는 방식보다 좋다. 그럼 두 가지 중 어떤 것이 더욱 행복하고 진정한 피조물답게 살아가는 것이고, 더욱 인류가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이겠느냐? (전자입니다.) 당연히 전자이다. 너는 이런 고통을 겪고 나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동시에 많은 진리를 깨달았고, 진리를 깨달은 것을 토대로 어떻게 처신하는지 배웠으며, 네 인성 안에서 진리가 생명이 되었으니, 네게 값어치가 생긴 것 아니겠느냐? 원래 사람은 진리를 전혀 갖추지 않은 값어치 없는 싸구려이고, 개미만도 못하며 살아갈 자격이 없다. 하지만 이제 너는 진리를 깨달았고 진리를 근거로 말하고 행동하며, 하나님이 네게 무엇을 시키든 다 따르고 그대로 이행하며, 하나님이 어떻게 안배하든 다 순종한다. 그런 네가 여전히 하나님을 판단하겠느냐?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겠느냐? 누가 네게 하나님을 거역하라고 지시한다면 네가 따르겠느냐? (따르지 않습니다.) 누가 하나님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려 너를 미혹한다면 네가 믿겠느냐? (믿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다. 따라서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너는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인류는 완전히 하나님의 권세 아래 산다. 그럼 이런 인류도 오늘날 사람이 겪는 그런 고통을 감내할 필요가 있겠느냐? 마음속에 증오나 고통이 있겠느냐?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런 고통이 없다. 이런 사람은 무슨 일이든 원칙을 가지고 처리하지 함부로 처리하지 않는다. 그 밖에, 일이 닥치면 하나님이 주관하기 때문에 사탄은 너를 해치지 못한다. 너는 진정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런 인류마저 멸하겠느냐? 이런 인류가 스스로 자신을 멸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없다. 그건 오늘날의 이 패괴된 인류와는 완전히 다른 부류의 사람이다. 오늘날의 사람은 마음속에 증오와 고통이 가득해 언제 어디서든 자살하거나 싸우고 살인할 수도, 나쁜 일을 저질러 세상에 재난을 불러올 수도 있다. 반면 하나님에게 구원받고 진리를 얻어 생명으로 삼은 이 인류는 함께 화목하게 어울릴 수 있고 싸우거나 증오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할 수 있다. 사람은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하나님이 하는 모든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고 한 방향을 향해 노력한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너도 진리를 깨닫고 그도 진리를 깨달으며, 너희와 그들 모두 진리를 깨닫는다면 모두가 같이 있을 때 다른 관점이 있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면 모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진리에 기대어 살아갈 수 있고 사람의 마음이 합하게 된다. 이런데도 사람과 사람이 서로 싸우고 죽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없다. 사람이 고통을 견딜 필요가 있겠느냐? 고통이 사라진다. 이런 인류는 행복하게 살아가고, 다투거나 서로 싸우고 죽이지 않는다. 그럼 하나님이 맡긴 만물을 사람은 어떻게 관리하겠느냐? (화목하게 어울려 지냅니다.) 화목하게 어울려 지내는 한편, 하나님이 제정한 규칙과 법칙대로 관리한다. 이 모든 규칙과 법칙, 그리고 생물이 모두 인류에게 속하고 쓰이며 인류를 위해 복을 창조한다. 이런 인류는 얼마나 좋으냐! 그때가 되면 인류의 생존 환경을 모두 사람이 맡아 관리하게 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규칙과 법칙을 모두 사람에게 정해 주고 신경 쓰지 않는다. 만약 어느 날 늑대 한 마리가 토끼를 먹고 있는 것을 보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는 먹도록 허락해야 한다. 늑대에게 토끼를 먹지 않고 풀을 먹게 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그러면 어떤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겠느냐? (법칙을 위배하는 것입니다.) 법칙을 위배하는 것이다. 토끼는 풀을 먹고 늑대는 고기를 먹는다. 너는 그들의 천성을 존중해야 하고 그들이 자유롭게 살게 해야 하지 인위적으로, 별도로 그들의 활동이나 생활에 참견할 필요가 없다. 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하나님이 다 정해 놓았다. 어떤 지역에 비가 많이 내리고 기후가 적절하지 않으면 동물들은 이주해야 하는데, “이 지역은 관리를 좀 해야겠어요. 어째서 늘 비가 그렇게 많이 올까요? 동물들이 늘 이주하느라 얼마나 힘들겠어요!”라고 말한다면 이는 우매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부분이 우매하겠느냐? 그 기후는 하나님이 정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기후를 정하여 그 동물들을 그 지대에 살게 했으니, 동물들이 이주하는 것도 하나님이 그것들에게 정해 놓은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런데 너는 왜 막으려고 하느냐? 네가 괜히 웬 호의를 베푸느냐? 동물들이 이주하면 어떤 이점이 있겠느냐? 많은 동물이 한 곳에서 반년 동안 머물면서 풀을 다 먹어 치웠는데 비가 내리지 않아서 동물들이 이주하려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계속 비가 내리면 땅이 젖어 머물 수 없게 되고 풀도 빗물에 잠겨서 동물들은 떠나야 한다. 한 번 이주하면 동물들이 몸을 단련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풀에게도 자랄 틈을 준다. 동물들이 다른 곳에서 풀을 거의 다 먹으면 그 지역에 또 눈이 내려 동물들을 ‘몰아내야’ 하고 동물들은 서둘러 이주해야 한다. 떠나서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면 그곳에는 비가 내리지 않고 풀도 자라서 또 먹을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이 생태계는 자연스럽게 계속 균형을 유지한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뿔말은 늘 사자에게 잡아먹히잖아요. 얼마나 불쌍해요! 뿔말을 좀 더 똑똑하게 만들 수는 없을까요?” 괜히 웬 호의를 베푸느냐? 네가 착하다는 걸 보여 주려는 것이냐? 그건 지나치게 호의적인 것이다. 뿔말이 교활해지면 사자는 굶주리게 된다. 사자가 굶주리는 것은 안쓰럽지 않으냐? 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자는 나빠요. 사슴과 얼룩말을 물잖아요. 얼마나 피비린내 나고 잔인해요!” 네가 사자를 없애 버리면 얼룩말이나 사슴이 너무 많아져서 결국 어떻게 되겠느냐? 풀을 다 먹어 버려서 초원은 사막이 된다. 네가 견딜 수 있겠느냐? 이런데도 그 호의를 베풀겠느냐? 그럼 너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그들이 자유롭게 살도록 놔둬야 한다. 동물들 간의 관계는 그렇다. 하나님이 이미 이 모든 법칙을 정해 놓았으니 너는 원하든 않든 받아들여야 하고, 법칙대로 해야 한다. 법칙을 위반하면 너는 생존할 수 없다. 이 모든 법칙을 이해하면 너는 이 모든 법칙을 존중할 것이고, 이 모든 법칙대로 이 사물들을 바라볼 것이며, 그 안에서 이 모든 것을 주재하는 하나님의 지혜를 보게 될 것이다. 그 밖에, 이 모든 법칙은 타고나는 것인데, 이 타고나는 것은 어떻게 생겨났겠느냐? (하나님께서 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정한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안배해 놓았다. 인류는 과학과 생물, 다양한 학과를 연구했다. 이토록 오랜 세월 연구했지만 간단한 도리나 규칙만을 깨달았을 뿐, 누구도 그 도리와 현상 속에서 하나님의 주재와 지혜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왜 이 모든 생태와 먹이사슬이 그토록 정밀하고 기묘하게 생겨났는지에 대해 인류는 단지 어떤 현상을 규명하거나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사실을 공표할 뿐이고, 이 모든 것이 자연적으로 형성된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비롯됐다는 것을 정리해 내거나 간파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연적으로 형성됐다는 말대로라면 이토록 오랜 세월 동안 어째서 사람으로 변하는 원숭이를 한 마리도 보지 못했겠느냐? 이 모든 법칙은 다 하나님이 정한 것인데, 원숭이가 사람으로 변하는 것과 관련이 있겠느냐? (관련이 없습니다.) 그런 일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이 모든 법칙과 규칙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다. 사람이 만약 운 좋게 살아남는다면 그때 사람은 이 모든 규칙과 법칙을 존중하고 지키고 관리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부분은 사람이 이 모든 규칙과 법칙 속에서 최대 수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예비하고 정해 놓은 것이고, 사람은 무엇이든 이미 이루어진 것을 누릴 뿐이다. 모든 만물 가운데 오직 사람이라는 피조물만이 가장 복 있다. 사람은 언어와 생각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고, 언어로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잘 알아들을 수 있다. 무엇보다 행복한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장 큰 밑천을 주어 사람이 구원받아 하나님 앞에 올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이 하는 이 모든 것, 하나님이 정한 이 모든 규칙과 법칙은 사람이 관리하고 지켜야 한다. 이 모든 규칙과 법칙을 연구하고 파괴하고 짓밟고 왜곡하기만 하는 인류는 멸절될 것이다. 사람은 이토록 많은 고통을 겪었는데, 사람이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추구하고 갈망하는 그 아름다운 종착지가 과연 존재하겠느냐?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단지 사람의 욕망과 야심일 뿐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려는 것과는 다르고, 전혀 상관없는 별개의 일이다. 따라서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에서 ‘무거운 짐을 짊어지다’의 뜻은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네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종착지나 마음속의 야심과 욕망이 이루려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네가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고 얼마나 큰 굴욕을 견뎠든, 결국 네가 갈망하는 종착지와 네가 욕망 속에서 이루려는 것,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얼마나 큰 복을 누리려는지 등 그런 것은 다 성립하지 않는다. 그건 하나님이 네게 주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또 어떤 문제가 있느냐?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은 사람이 굴욕을 견디며 실력을 보존한 다음 자신이 이루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굴욕을 당하는 것이다. 그 목표는 무엇이겠느냐? 사람 자신의 마음속 이상, 나아가 욕망이다. 그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고통을 겪는 것이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을 위해서이겠느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고통을 겪으며 추구하고 이루려는 목표는 긍정적인 것이겠느냐, 아니면 부정적인 것이겠느냐? (긍정적인 것입니다.) 욕망과 관련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럼 이 긍정적인 목표는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진정한 사람이 되어 더 잘 살아가는 것입니다.)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진정한 사람이 되어 더 잘 살아가는 것이다. 또 무엇이 있느냐? 구원받는 사람이 되어 더 이상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는 것이다. 너희는 욥이나 베드로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냐? (되고 싶습니다.) 그럼 그것이 목표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 목표가 욕망과 관련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 목표는 정당한 추구이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목표이자 길이다. 이는 정당한 것이다. 따라서 이 정당한 추구 목표를 위해 겪는 고통은 수모를 참는 게 아니라 사람이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 것이며 마땅히 걸어야 하는 길이다. 마음속으로 자신이 굴욕을 견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길에 오를 수 있겠느냐? 오를 수도 없고 이 목표를 이룰 수도 없다.
이제 와서 보면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다.”라는 말이 진리겠느냐? (아닙니다.) 그것은 진리도 아니고, 사람이 일을 처리하고 처신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준칙도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구원받으려면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져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 말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어느 부분이 옳지 않으냐?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게 아닌데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그건 어떤 사람이 살인과 방화 등 수많은 나쁜 짓을 저질러 드디어 ‘국민이 추대하는 지도자’가 됐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말과 비슷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바로 그런 뜻이다. 분명 사악한 길을 걸었는데 오히려 긍정적인 인물이 되었으니 이는 모순적이다. 어떤 사람이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져 드디어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다고, 드디어 시련 속에서 굳게 섰다고, 드디어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했다고 말한다면 이 중에서 어느 말이 옳겠느냐? (모두 옳지 않습니다.) 모두 옳지 않다.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마을 전체에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면 이 말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이런 의혹을 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옳을까? 이 말은 옳지 않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려면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하는 경우가 많잖아.’ 이 말을 여기에 쓰는 게 옳지 않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어째서 옳지 않겠느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져 이루는 성과는 긍정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적용하는 게 옳겠느냐? 이 말이 어째서 옳지 않은지 한번 분석해 보자.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복음을 전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얻고 많은 성과를 거두고 하나님의 이름을 전파했어요.”라는 말이 옳은지 그른지 모르겠느냐? 우리가 오늘 교제한 모든 조항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이 말을 여기에 쓰는 건 옳지 않지만, 만약 복음을 전할 때 어떤 사람들이 복음 전파 대상에게 맞거나 욕을 먹고 집 밖으로 내쫓기는 것을 연상한다면 그건 수모를 참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그건 무엇이겠느냐? (복음을 전하면서 마땅히 겪어야 하는 고통입니다.) 그렇다. 이는 사람이 마땅히 견뎌야 하는 고통이자 사람의 책임과 의무이며, 하나님이 사람에게 한 부탁이다. 이는 여자가 아이를 낳을 때 몹시 고통스러운 것과 마찬가지다. 그건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아이에게 “엄마가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면서 너를 낳았단다.”라고 한다면 그 말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그녀도 고통을 겪었는데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 게 옳지 않겠느냐? 그건 그녀가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이다. 예를 들어, 늑대가 몇 시간을 쫓은 끝에 겨우 토끼 한 마리를 잡았는데, 늑대가 “나는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면서 토끼 한 마리를 잡아먹었다.”라고 한다면 그 말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토끼를 먹기 위해서 늑대는 어느 정도 대가를 치러야 한다. 토끼가 도망가지 않고 늑대에게 잡아먹히기를 기다릴 리 없다. 그렇게 쉬운 일이 있겠느냐? 무슨 일을 하든 다 어느 정도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건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제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다.”라는 말을 철저히 무엇으로 구분했느냐? (부정적인 것으로 구분했습니다.) 부정적인 것이나 부정적인 의미의 단어로, 사탄의 논리나 사탄의 처세 철학으로 구분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나 긍정적인 사물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만약 누가 “저는 복음을 전한 지 오래됐어요. 그야말로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진 거죠!”라고 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 복음을 전하는 건 네 책임이고, 네가 마땅히 겪어야 하는 고통이다.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고 해도 너는 살아가면서 고통을 겪지 않느냐? 그건 바로 사람이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이고 정당한 것이다.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다.”라는 말은 하나님 집에서는 거의 근절되었다. 만약 누가 또 이런 말을 한다면 너는 어떻게 이해하겠느냐? 만약 누가 “저는 감옥에서 유다처럼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어요. 그건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진 거죠!”라고 한다면 그 말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왜 옳지 않겠느냐? 유다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라는 것은 그 얼마나 정의로운 말이고 정의로운 목표냐? 근데 어째서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게 아니겠느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유다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유다가 되는 게 정당한 것이냐? 유다가 되지 않은 것을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그 말은 허튼소리가 아니겠느냐? 하나님을 위해 증거하는 것은 너의 사명이고 피조물이 굳게 서야 하는 간증이자 입장이다. 사탄은 사람의 칭송을 받을 자격이 없다. 사람이 경배해야 하는 이는 하나님이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불변의 진리다. 사탄이 너를 굴복하도록 한다면 너는 응당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서서 목숨을 내놓아 유다처럼 되지 말아야 한다. 이는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이 말을 명확히 했으니 만약 또 누가 자신이 어떻게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졌는지를 말한다면 너희는 그 일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그에게 오늘 설교한 내용을 들려주면 깨달을 것이다. 그게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3)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 투지
와신상담의 세 번째 모습은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 투지이다.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은 어떤 성품이겠느냐? 교만한 성품이다.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실수하지도, 틀린 말을 하지도,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는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고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것, 자신에게 결함과 흠이 있다는 것, 자신도 실수하거나 틀린 말을 할 때가 있다는 것, 자신도 실수할 수 있고 그릇된 길을 걸을 수도 있다는 것, 자신은 보통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럼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것은 대체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실패하거나 좌절을 겪거나 그릇된 길을 걷더라도 인정하지 않고 완강하게 계속해 나가는 것, 실패해도 기죽지 않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며, 아무리 많은 사람이 지적하고 정죄해도 뉘우치지 않고 자신의 방향과 목표를 향해 분투하고 노력하고 추구하면서 어떤 대가도 따지지 않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정신이다. 이런 정신은 상당히 고무적이지 않으냐?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말은 보통 어떤 상황에 쓰이겠느냐? 여러 가지 상황에 쓰이는데, 패괴된 인류가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이런 말과 이런 정신이 존재한다. 그럼 사탄에게 속하는 인류가 이런 말을 만들어 낸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영원히 자신과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잘못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고, 자신의 취약하고 나약하고 무능한 면만을 보는 게 아니라 자신의 능력 있고 위대하고 용맹스러운 면을 보게 하려는 것이며, 자신을 깔보지 않고 자신이 능력 있다고 생각하게 하려는 것이다. 네가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할 수 있다고, 실패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으며 지위가 높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럴 수 있다고, 네가 그런 결심과 의지, 야심과 욕망만 있으면 다 이룰 수 있다고, 사람은 보잘것없지 않고 위대하다고 생각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방인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있다. “네 마음의 크기가 네 무대의 크기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무척 좋아한다. “어머, 그럼 제가 십 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원하면 가질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벤츠 한 대를 원하면 가질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마음이 이렇게 크면 물건을 바로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은 황당한 이론이다. 솔직히 말하면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라는 말을 믿거나 인정하는 사람은 지극히 오만한 사람이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어떤 말씀과 정반대되느냐?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신을 인식하고 착실하게 처신하라고 한다. 사람은 패괴 성품과 결점, 하나님을 대적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 사람은 모두 완벽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어떻게 처신하라고 훈계하느냐? (착실하게 처신하라고 하십니다.) 착실하게 처신하고 성실하게 피조물의 본위를 지키라고 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실패를 입에 올리지 말라고 하더냐? (그러지 않으십니다.) 그러지 않는다. 그럼 사람이 그릇된 길을 걷거나 패괴 성품을 표출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느냐? (인정하고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받아들이고 인정한 다음 인식하고 돌아서서 진리를 실행하라고 한다. 그런데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은 자신의 문제나 잘못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고, 자신의 잘못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며, 또한 죽어도 뉘우치거나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는 더더욱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의 운명이란 대체 무엇인지, 하나님이 어떻게 지배하고 안배하는지 구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구하지 않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오히려 운명을 자신의 손에 쥐고 스스로 결정권을 가지려 한다. 그 밖에,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신을 인식하고 정확하게 가늠하고 평가하며 무언가를 할 수 있으면 착실하고 성실하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잘해 내라고 하지만, 사탄은 사람에게 교만한 성품을 충분히 이용하고 발산하며 초인이나 위인, 심지어 초능력을 가진 사람,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사람이 되라고 한다. 그렇다면 사탄의 철학은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바로 틀려도 틀린 게 아니고, 불복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 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언젠가 지위가 높은 사람이 되고 염원과 목표도 실현된다는 것이다. 그럼 이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 것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도 있지 않겠느냐?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자신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은 평범한 사람이고 그릇된 길을 걸을 수도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 외에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갖은 방식과 음모로 자신의 야심과 욕망을 실현시킨다.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 것에 운명을 기다리고 운명에 순종하는 사람의 태도가 담겨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 사람은 운명을 완전히 자신의 손에 쥐고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다스리려 하며, 자신이 앞으로 어느 길로 갈지, 복을 누릴지 아니면 어떻게 생활할지를 모두 스스로 결정하려 한다. 이방인들이 하는 말 중에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게 무슨 말이냐? 수많은 사람이 오랜 세월, 심지어 평생을 준비하지만 죽을 때까지도 기회를 얻지 못한다. 기회는 어떻게 오는 것이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네게 예비하지 않았다면 네가 아무리 준비한들 소용이 있겠느냐? (소용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네게 줄 생각이 없고 네 운명에 없다면 네가 몇 년을 준비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나님이 네가 그토록 오랜 세월 준비한 것을 봐서 너를 불쌍히 여기고 네게 기회를 좀 내려 주겠느냐? 하나님이 그렇게 하겠느냐?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네게 예비해 놓으면 네게 기회가 있고, 네게 예비하지 않으면 네게는 기회가 없는데, 네가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고 해서 소용이 있겠느냐? (소용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저는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을 거예요. 운명은 제 손에 달려 있다고요!” 독한 말을 내뱉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지는 그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여자는 아들을 낳고 싶었지만 연달아 딸을 낳았고, 남들이 그녀의 운명에는 아들이 없다며 그만 낳으라고 말려도 그녀는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럴 리 없어요. 저는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을 거예요!”라고 했다. 열 번째에도 딸을 낳자 결국 그녀는 받아들이며 말했다. “보아하니, 저는 이번 생에 정말로 아들이 없는 운명인가 봐요.” 이런데도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겠느냐? 여전히 자신이 있겠느냐? 이 여자가 감히 자식을 더 낳을 수 있겠느냐? 감히 그러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장사를 하면서 2년 안에 50만 위안을 벌려고 계획하고는 첫해의 상반기에 돈을 벌지 못하자 “괜찮아요. 상반기에 돈을 못 번 게 뭐 대수인가요. 하반기에는 분명 벌 수 있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1년이 좀 지났는데도 돈을 못 벌었지만 그는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저는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아요. 저는 모든 것이 사람의 손에 달려 있다고 믿어요. 기회는 널렸다고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2년이 되었을 때도 50만 위안은커녕 5만 위안도 벌지 못했다. 그는 기간이 너무 짧고 자신의 경험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2년간 또 공부하러 갔다. 4년이 지났지만 50만 위안을 벌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본금조차 거의 다 잃었다. 그런데도 그는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으며 “저는 재산이 많은 운명인데 어떻게 50만 위안을 못 벌겠어요?”라고 말했다. 8~10년이 지났을 때도 여전히 50만 위안을 벌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겠느냐? 그에게 올해 얼마를 벌 계획이냐고 물으면 그는 말한다. “아이고, 먹고살 수만 있으면 되죠.” 이래도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겠느냐? 실패한 것이다. 왜 실패했겠느냐? 정한 액수가 너무 높아서 실패했겠느냐? 그런 것이겠느냐? 아니다. 사람의 재산과 자녀, 일생 동안 어떤 고통을 겪고 언제 어디에 갈지는 모두 사람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벼슬길에 오르고자 하지만 아무리 기회가 많아도 그의 몫은 없다. 그가 능력이 없는 탓이겠느냐? 그는 능력도 있고 계산도 밝으며 아첨도 잘하는데 관직에 오르는 게 왜 그렇게 어렵겠느냐? 그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나 그가 얕보는 사람 중에서도 관직에 오르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말솜씨도 좋고 재능과 학식도 갖춘 그는 벼슬길에 오르고 싶은데 왜 그토록 어렵겠느냐? 젊었을 때 늘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평사원으로 남은 그는 결국 받아들이고 이렇게 말한다. “사람의 운명은 하늘이 정해요. 운명에 있는 것만 가질 수 있고, 없는 건 애써도 얻을 수 없어요.” 고분고분해지지 않았느냐?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 정신은 어디로 갔느냐? 사람은 사실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 정신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사람의 욕망과 야심을 조장한다.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긍정적인 영향이나 지도가 아니라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영향이다. 사람은 원래 하늘 높고 땅 두꺼운 줄 모르고, 하늘의 뜻이나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도 알지 못하는데 이런 정신적 버팀목까지 얻게 되면 미혹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사람의 최종적인 말로는 무엇이겠느냐? 한바탕 헛수고를 하고, 불필요한 일을 수없이 많이 한다.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육체와 마음에 많은 손실과 상처를 입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욕망과 야심, 목표를 이루기 위해 분명 많은 악을 행했을 것이다. 이 악이 사람의 내세에 가져오는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징벌뿐이다. 패괴 성품이 사람에게 가져오는 것은 사람에게 야심과 욕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야심과 욕망이 사람을 지배해 하도록 하는 것 중에 정당한 게 있겠느냐? 진리에 부합하는 게 있겠느냐? (없습니다.) 무엇밖에 없겠느냐? 악을 행하는 것밖에 없다. 이 악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남을 음해하고 곤경에 빠뜨리고 해치고 속이는 것이다. 결국, 남에게 빚을 너무 많이 져서 다음 생에 환생하면 짐승이 될지도 모른다. 빚을 많이 지고 많이 속이고 곤경에 많이 빠뜨린 사람의 집에서 짐승이 되어 말도 못 하고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설사 환생해서 사람이 되어도 평생 동안 끝없이 고통받으며 빚을 갚아야 한다. 바로 이런 나쁜 결말을 맺는다.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말이 그에게 지시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야심과 욕망은 조장되지 않았을 것이고, 2~3년 안에 실현되지 못했다면 그는 포기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탄이 그렇게 부추기자 그의 욕망은 갈수록 커졌고, 커지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를 지배하여 사악한 길에 오르게 했다. 사악한 길에 오르면 좋은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사람다운 일을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그는 자신의 목표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이루기 전까지 절대로 그만두지 않으며 어떤 나쁜 짓이든 저지를 수 있다. 보아라, 자식이 재산을 얻기 위해 부모를 살해하는 일도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이익을 위해 자기 손으로 가족과 친구를 살해하는 일이 너무도 많다. 두 사람이 한 가지 이익을 가지고 싸워야 할 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그들의 신념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이것이다. “저는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아요. 이번에는 절대 실패해선 안 돼요. 이번 기회를 놓치면 이번 생에는 이렇게 좋은 기회를 다시 만나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이번에는 꼭 이겨야 해요. 반드시 얻어야 한다고요. 누구든지 제 길을 가로막는다면 가차 없이 죽여 버릴 거예요!” 결국 어떻게 되겠느냐? 사람을 죽여서 자신의 목표와 욕망은 실현하고 충족했을지 모르지만 악을 행하여 큰 화를 초래하게 된다. 그는 이번 생에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고 참소를 당할 수도 있고, 아무런 지각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이 아무런 지각도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일에 대해 정의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에게는 처리 방법이 있다. 그는 이번 생에서는 목적을 달성하고 뜻을 이뤘을 수도 있지만 다음 생에서는 이번 생에 했던 일 때문에, 어쩌면 한 가지 악행 때문에 참혹한 대가를 치러야 할 수도 있다. 한 번의 생에서, 두 번이나 세 번의 생에서, 아니면 영원히 그래야 할 수도 있으니 그 대가는 너무도 참혹하다! 그럼 이런 결과는 어떻게 생겨났겠느냐? 한마디 말이나 한 가지 신념이 그에게 가져온 것이다. 그는 이번 기회를 얻으려 했고 패배를 인정할 수도, 포기할 수도, 실패할 수도 없었다. 그가 이번 기회를 꽉 잡으려고 한 결과, 큰 화를 불러왔다. 큰 화를 불러온 뒤에 견뎌야 할 결과는 1~2년 안에 갚거나 다 메울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대가는 너무도 크지 않으냐? 사람은 한 생에 겨우 80~90년을 살고, 적으면 50~60년을 산다. 네가 얻은 이익이든, 지위든, 돈이든 그런 물질적인 것들을 의식적으로 누릴 수 있는 기간도 기껏해야 20~30년이다. 그러나 그 20~30년 동안 누리기 위해 너는 영원히 대가를 치러야 할 수도 있다. 그 대가는 너무 크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주재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개인적인 욕망과 일시적인 사리사욕을 위해서 일종의 관념이나 사탄의 논리에 지배당해 어리석은 짓을 저지를 수 있고 영원히 후회를 남길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영원’은 이번 생의 20~30년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이번 생뿐 아니라 내세에서까지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이런 일들을 이해할 수 없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더라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이런 일들을 이해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눈에 띄는 악을 행하지 않았고 겉으로 봐도 살인이나 방화를 저지르지도, 공개적으로 남을 모함하지도 않았을 수 있지만 남몰래 많은 수작을 부렸다. 이런 악이나 눈에 띄는 그런 악이나 하나님이 보기에는 성질이 같다. 성질이 같다는 건 무슨 뜻이겠느냐? 하나님이 보기에 하나님이 이런 일을 정죄하는 원칙은 같고, 같은 방식과 같은 진리로 정죄한다는 뜻이다. 네가 하는 모든 일은 어떤 이유에서 비롯됐든, 하나님 집에서 했든 아니면 세상에서 했든 하나님에 의해 모조리 정죄된다. 만약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런 일을 저지른다면 최종적으로 하나님이 네게 주는 결말이 이방인과 다르겠느냐? 말해 보아라, 네가 예전에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고 교회를 위해 몇 년간 봉사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사정을 봐주고 그의 공의로운 성품을 바꾸겠느냐? 너희는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내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말하겠느냐?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때 행한 악도 악이고, 네가 진리를 깨닫고 나서 행한 악도 악이다. 하나님이 보기에는 모두 악이고, 악은 다르지 않고 다 똑같다. 진리에 부합하지 않으면 모두 악이고, 하나님에게는 성질 면에서 차이가 없다. 똑같이 악이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이 행한 악에 대해 똑같이 책임지고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다. 네가 의심하든, 믿든 하나님은 그렇게 하고 그렇게 정의한다. 내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말하겠느냐? 너희에게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주려는 것이다. 너는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으니 나는 하나님의 마음에 든 대상이야. 나는 많은 진리를 깨달았으니 악을 좀 행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규정하거나 정죄하지 않으실 거야. 난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진리를 실행하기 위해 고통받는다는 명분으로 악을 행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정죄하지 않으시겠지?’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틀렸다. 하나님이 악을 정죄하는 원칙은 똑같다.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무리에서든 하나님은 인종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님이 택한 자든 아니든 구분하지 않는다. 이방인이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하나님은 다 한결같이 대한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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