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1 무엇이 진리인가 (제 3 부)
2)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다
와신상담의 두 번째 모습은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이다.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 역시 세상 사람들이 권장하는 일종의 사상과 정신이고 사물을 대하는 태도이다. 사회와 세상에서는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것이고, 인류가 비교적 밝고 발전적이고 긍정적이라고 여기는 사상이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분석하려는 것이겠느냐?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이 뭐가 나쁘겠느냐? 왜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고 하겠느냐? 그것은 진리와 아예 무관하다. 무관하다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진리를 실행하려면 너는 완전히 하나님 말씀의 원칙대로, 하나님의 요구 기준과 세칙대로 해야지 소위 사람의 뜻이 담긴 주장과 정신, 기개와 같은 방식과 방법, 일을 처리하는 태도나 관점을 섞어선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로, 이런 것과 무관하다. 그럼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이 왜 나쁘겠느냐? 왜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하겠느냐? 이는 분석해 볼 만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우선 이 말의 문자적인 의미를 설명해 보자. 그러면 좀 더 이해하기 쉽다.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은 자신의 책임이나 중책, 혹은 이어받거나 받아들인 사명을 위해 모든 치욕과 고통, 굴욕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의 기본적인 의미는 이럴 것이다. 그럼 보통 어떤 상황이나 배경에서 이 말을 쓰겠느냐? 누가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가 현재 처한 형편은 그의 사명을 완수하여 그가 이루려는 목표를 이룬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서 보통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다고 말할 때는 어떤 하찮은 사람이 지위나 후광은 아예 없고, 권세는 더더욱 없는 배경에 놓이고, 이런 배경 아래 자신의 책임과 자신이 완수해야 할 사명까지 짊어지기 위해 기죽지도, 타협하지도, 포기하지도 않는 것을 가리킨다. 이 역시 일종의 정신이 아니겠느냐? 이런 정신의 핵심은 무엇이겠느냐? ‘참는 것’과 ‘짊어지는 것’이다. ‘참는 것’은 인내하거나 견디는 것을 가리키는데, 참는 동시에 중책이나 책임을 담당하거나 짊어져야 하고, 뭇사람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고 부탁한 사람의 기대를 저버려서도 안 된다. 이는 어떤 정신이겠느냐? (고수하는 것입니다.) 그런 뜻도 있지만 그건 가장 기본적이고 얕은 차원의 뜻이다. 또 어떤 게 있겠느냐? 우리 이렇게 분석해 보자. 수모를 참는 것에서 ‘수모’는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굴욕이나 치욕을 가리킵니다.) 주위 사람이 주는 치욕으로 인해 굴욕당하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가 사람에게 치욕을 가져오고 굴욕당하는 느낌을 받게 하겠느냐? (조롱이나 비방, 비아냥거림입니다.) 그렇다. 조롱이나 비방, 조소, 농락, 비아냥거림이 그렇다. 그럼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에서 ‘무거운 짐’은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책임이나 부탁을 가리킵니다.) 책임이나 부탁에는 보통 어떤 것들이 있겠느냐? 사명이나 중책이 있는데, 여기서 중책은 남이 맡긴 것일 수도 있고, 자신이 이루려고 분투하는 목표나 자신이 생각하는 사명일 수도 있다. 사람이 자신이 이어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명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출세해서 가문을 빛내는 것입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모두 맞다. 그런 것은 기본적으로 사람 자신이 지향하는 것들로, 그런 목표를 이루고 실현하기 위해 그는 기존의 환경에서 주위 사람이 그에게 주는 굴욕이나 조롱, 비방, 비아냥거림, 심지어 심한 희롱까지 견딜 수 있다. 그럼 그가 이 모든 것을 견디는 동력은 무엇이겠느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나중에 대장군이 되기를 지향하는데, 그가 권력을 얻기 전 어느 날 지역의 불량배 한 무리가 그에게 치욕을 주며 “네가? 장군이 되겠다고? 지금 말 한 필도 없는 네가 어떻게 장군이 되겠다는 거야? 장군이 되려면 먼저 내 가랑이 아래로 기어가라!”라고 말하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껄껄거린다. 그는 생각한다. ‘내가 장군이 되려고 하는 게 잘못도 아닌데 저들은 왜 나를 희롱하고 비웃는 거지? 하지만 일단은 능력을 과시하면 안 돼. 오늘 이 상황을 보니 저들 말대로 하지 않으면 얻어맞고 말겠어. 자칫하면 목숨을 잃겠다고. 그러면 난 장군이 못 되잖아? 내 이상을 위해서라면 가랑이 아래로 기어가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그래도 나는 여전히 나잖아?’ 이렇게 생각한 그는 ‘쿵’ 하고 무릎을 꿇은 뒤 두 손을 땅에 대고 마치 개처럼 그 불량배의 가랑이 아래로 기어간다. 기어갈 때 그의 마음은 칼에 찔리듯 괴롭고 고통스러우며 원망으로 가득 찬다! 그는 속으로 ‘언젠가 내가 정말로 장군이 되면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겠어!’라고 생각하지만 겉으로는 남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참아야 한다. 그가 가랑이 아래로 지나가자 그 무리는 흡족해하며 그를 봐주고 발로 차 버린다. 그는 일어서서 몸에 묻은 흙을 털고 말한다. “잘 찼어요. 앞으로 형님이라고 부를게요.” 그가 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겉으로 드러내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왜 그는 그렇게 하겠느냐? 그의 목적은 오직 하나다. ‘나는 살아남아야 해. 내가 이 모든 것을 견디는 건 언젠가 장군이 되어 높은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야. 오늘 내가 이런 고생을 견디고 이런 치욕을 당하는 건 그럴 만한 가치가 있어. 앞으로 난 더 노력하고 분발해야 해. 어떤 어려움에 부닥치든, 얼마나 큰 고통과 굴욕을 당하든 반드시 장군이 되고야 말겠어! 장군이 되고 나서 제일 먼저 할 일은 바로 저놈을 죽여서 가랑이 아래서 당한 치욕을 씻는 거야!’ 그가 나중에 장군이 되든 말든, 당시에는 ‘참는 것’이 그에게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이 안에는 계략이나 음모가 있지 않겠느냐? (있습니다.) 음모가 있다. 그는 부득이하게 참는 것인데, 무엇을 위해 그러겠느냐? 언젠가 이 모든 굴욕을 씻기 위해서이다. 그가 참는 것에는 “푸른 산이 있는 한 땔나무 걱정은 없다.”, “군자가 원수를 갚는 데는 10년 걸려도 늦지 않다.”와 같은 계략이 가득하다. 이 몇 가지 계략이 그가 가랑이 아래서 당한 치욕을 견디게 한다. 그 이후로 장군이 되려는 그의 욕망은 더욱 커지고 강렬해져서 절대 포기하지 않게 된다. 그럼 그는 무엇을 위해 굴욕과 치욕을 견디겠느냐? 정의의 사업을 지키기 위해서겠느냐, 아니면 진정한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겠느냐? 자신의 야심을 위해서이다. 그럼 이는 긍정적이겠느냐, 아니면 부정적이겠느냐? (부정적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여기서 ‘참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이익과 욕망, 야심이 부추겨서 참는 것이다. 이렇게 ‘참는 것’ 안에 진리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진리는 없다. 정상 인성은 있겠느냐? (없습니다.) 이는 정의로운 것도, 올곧은 것도 아니고 결점이 없는 것은 더더욱 아니며 욕망과 음모, 음해로 가득하다. 긍정적인 것이 아니다.
이 사악한 인류가 권장하는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사상과 정신은 기본적으로 방금 했던 이야기 속에서 말한 것과 같다. 즉, 한 사람이 큰일을 성취하려면 반드시 보통 사람은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참는 것은 주로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치욕을 당하는 것입니다.)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참는 것이 사람에게 살아 내도록 하는 게 진실한 것이겠느냐, 아니면 거짓된 것이겠느냐? (거짓된 것입니다.) 핵심은 여기에 있다. 사람이 자신의 야심과 이상을 위해 살아 내는 것과 하는 말, 드러내는 행위는 모두 위장한 것이고, 부득이한 것이며, 이 모든 욕망과 이익, 그리고 사람이 말하는 지향과 목표라는 전제하에 부추김을 당하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 내는 이런 것은 모두 임시방편일 뿐 정직하거나 진실한 것, 공개적으로 드러내거나 솔직한 것은 하나도 없다. 모두 임시방편이다. 이는 모두 계략이 아니겠느냐? 임시방편은 바로 당분간 일단 이렇게 참고 잠시 아부하고 구슬리고 속이면서 자신의 진실한 신분과 마음, 생각, 관점, 심지어 증오까지 포장하여 상대방이 보지 못하게 하고, 대신 상대방에게는 자신의 연약하고 무능하며 나약하고 겁이 많은 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 자신의 진실한 면을 전부 감추겠느냐? 언젠가 대업을 이루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 되어 남을 통제하고 지배하기 위해서이다.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다.”라는 말을 실행해 내거나 나타낸 것은 어떤 것이겠느냐? 거기에 정직한 태도가 있겠느냐? 자신에 대한 진실한 인식이나 뉘우침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이 “당신 주제에 장군이 되려는 거야?”라고 하면 그는 생각해 보고는 “저는 안 돼요. 저는 장군이 되지 않을 거예요. 농담이에요.”라고 말한다. 이게 참말이겠느냐, 아니면 거짓말이겠느냐? (거짓말입니다.) 그는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나 정도는 돼야 장군이 될 수 있지!’ 그는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겉으로 이렇게 말하면 되겠느냐? (안 됩니다.) 왜 안 되겠느냐? 얻어맞지 않기 위해, 실력을 보존하기 위해 그는 말한다. “그건 농담이에요. 감히 정말로 장군이 되겠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당신이야말로 대장군 같네요. 당신은 미래의 대원수예요. 장군보다도 더 위라고요!” 이게 참말이겠느냐? (아닙니다.) 참말은 어디에 있겠느냐?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렇다. 마음속에 담아 두고 말하지 않는다. 왜 말하지 않겠느냐? 말하면 얻어맞을까 봐 두려워 말하지도, 드러내지도 않고 아무도 모르게 하여 자신의 실력을 영원히 보존하려는 것이다. 실력을 보존한다는 건 무엇이겠느냐? 자신의 진실한 능력을 남에게 보이지 않고, 자신의 진실을 싸매 탄로 나지 않게 하여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경계하거나 자신에게 불리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 역시 와신상담의 진실한 함의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와신상담하고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자신의 목표와 욕망, 증오를 절대 잊어선 안 되고, 남들에게 자신의 실제 모습과 실력을 절대 보여 줘선 안 된다. 일부 능력 있는 사람은 무리 안에서 거의 말을 하지 않고 과묵하며, 설사 말을 하더라도 끝맺지 않아서 남들은 그가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도저히 짐작할 수도, 알아들을 수도 없다. ‘말을 왜 저렇게 심오하게 하지? 속마음을 말하는 게 왜 저렇게 어렵지? 어떻게 된 일일까?’라고 생각할 뿐이다. 사실 그가 마음속에 생각이 있더라도 말하지 않는 것은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이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일을 처리할 때 늘 여지를 둔다. 늘 여지를 두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일부 능력자나 대단한 인물이 보고 나서 질투하여 그를 겨냥하고 해칠까 봐 두려운 것이다. 무리 안에서 늘 남을 칭찬하고 남이 훌륭하다고 말하며 누구든 자기보다는 낫다고 하는 사람이 가장 음험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너는 도저히 그의 속내를 알 수 없다. 겉으로는 별말 안 하는 걸 보고 너는 그 사람이 야심이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너는 틀렸다. 그런 사람 중 일부는 바로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사람이다. 이는 마치 영화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런 장면과 비슷하다. 어떤 사람이 외부에서 자주 선행을 하고 해진 옷을 입으며 무리에서 늘 괴롭힘을 당한다. 이는 그가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모습이다. 집에 돌아온 뒤 그는 한 밀실에 들어가는데 밀실의 벽에는 지도가 한 장 걸려 있고 지도 위 지역의 80%는 이미 그가 보낸 하수인에 의해 감시와 통제를 당하고 있다. 그러나 외부에서 자주 그와 접촉하는 사람은 여전히 그를 괴롭히고 그에게 이런 야심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언젠가 지도 위의 모든 지역이 그에 의해 통제되어 그의 목표가 완전히 달성되면 그를 괴롭히던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한다. “알고 보니 마귀였어요. 저 녀석은 야심도 크네요! 이렇게 오랫동안 위장했는데 아무도 그를 간파하지 못했어요.” 그럼 그는 말한다. “나는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진 거야. 내가 이렇게 참지도, 당신들의 경계심을 늦추지도 않고 무엇이든 당신들에게 알려 줬다면 이렇게 큰 사업을 이룰 수 있었겠어?” 악인이나 지극히 큰 야심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겠느냐? 한편으로, 그들의 인내력과 의지력은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다. 그 밖에 그들의 음모도 보통 사람을 뛰어넘어서 일반인이 그들과 어울리면 우롱당하기 일쑤다. 우롱이란 무엇이겠느냐? 아무도 그를 간파하지 못하고 그가 표면적으로 하는 말이나 행동만 알 수밖에 없다. 그가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그의 행동과 말에서 어떤 실마리를 찾을 생각은 하지도 마라. 이게 바로 그에게 우롱당하는 것 아니겠느냐? 인내력과 의지력 자체는 긍정적인 말이지만 그의 음모가 그의 인내력과 의지력을 부정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들은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야심과 욕망을 가지고 있다. 보통 사람도 야심과 욕망을 가지고 있지만 얻지 못할 것 같으면 포기하고 그 고생을 하려 하지 않는다. 그 밖에, 누구와 싸워야 하든 다 드러내 놓고 싸우지 그런 음모는 없다. 반면 그 부류의 악인들은 커다란 야심을 가지고 있고 늘 음모와 계략을 쓰며, 언제까지나 그의 야심과 욕망을 포기하지 않은 채 끝까지 투쟁하고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교과서에도 월나라 왕 구천이 와신상담한 이야기가 실려 있고 부모들도 아이들을 그렇게 교육한다. 일부 아이들은 듣고 나서 생각한다. ‘보통 사람이 되는 것도 꽤 좋은데 왜 꼭 그렇게 큰 야심이 있어야 하지? 와신상담하는 고생을 누가 견딜 수 있겠어? 그건 보통 사람이 견딜 수 있는 고생이 아니야.’ 야심 있는 사람에게만 그렇게 고생을 견딜 의지가 있다. 거기에는 음모가 있다. 그러나 이 인류 가운데서는 이런 정신을 권장한다. 예를 들어, “얼마나 큰 고생을 견디고 굴욕을 당하든, 처지가 얼마나 열악하든 사람은 절대 자신이 지향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이 있다. 이 사회는 와신상담하는 것이나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과 같은 사상을 권장하여 사람이 자신의 행복과 목표를 위해 분투하도록 채근하고 격려하는데, 왜 우리는 그것이 잘못됐다고 비판하겠느냐? 인류 전체가 모두 사탄에 의해 패괴됐다. 인류 가운데 목표가 진리나 올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겠느냐? (없습니다.) 따라서 인류가 와신상담하고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질수록 사탄 세력은 더욱 날뛰고, 이 인류의 투쟁과 학살은 더욱 많아지며, 인류는 점점 더 사악해지고, 사회도 갈수록 암담해진다. 반대로 만약 네가 하늘의 안배와 이 모든 자연법칙에 순응할 수 있다면, 모든 걸 순리에 맡기고 이 법칙을 존중하며 하늘의 안배를 기다린다면 너는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도 없고, 각성하고 깨달아서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할 수 있기만 하면 된다. 그 밖에, 사람은 모든 일을 할 때 최소한 양심에 따를 줄 알아야 하고, 좀 더 뛰어나다면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제정한 법칙대로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럼 사람이 가면을 쓰고 중책을 짊어질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 이렇게 교제하고 나니 너희는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이 대체 어떤 행위인지 깨닫지 않았느냐?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의 목표는 긍정적인 것이겠느냐, 아니면 부정적인 것이겠느냐? (부정적인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리더가 되고자,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여 상을 얻고자, 혹은 온전케 되고자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진다고 한다면 이런 말들이 성립하겠느냐? (성립하지 않습니다.)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은 완전히 사탄 철학이고, 그 안에는 진리가 없다. 들어 보면 다 치우친 말이다. 그 사람이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하나님의 안배를 기다리고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한다고 한다면 이 말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무엇이 옳지 않겠느냐? 얼토당토않은 말이다. 네가 수모를 참는 것도, 억울함을 당하는 것도 하나님에게는 필요하지 않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과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은 어떤 실질적인 차이가 있겠느냐?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서 벗어나려는 것입니다.)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은 바로 사람이 자신의 계획과 지향, 염원, 추구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과 추구 목표에 부합하겠느냐? (부합하지 않습니다.) 부합하지 않는다.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을 통해 사람이 도모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도모하는 것은 개인의 이익이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배치하고 주재하는 운명과는 관련이 없다.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사람들은 모두 속셈이나 목적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한 학부 졸업생이 어느 회사에 인턴으로 막 들어갔을 때 기존의 직원들이 이렇게 말했다. “학부 졸업생은 입사 후 3년간 차 심부름을 해야 해요.” 그러자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학사 학위밖에 없지만 당신들에게 숙이고 들어가지는 않을 거야!’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지만 감히 밖으로 드러내지는 못했고, 겉으로는 웃는 얼굴을 하며 매일 고분고분하고 얌전한 태도로 굽실거려야 했다. 누가 트집을 잡아도 참아야 했다. 그는 무슨 목적으로 참았겠느냐? 언젠가 출세해서 기를 펴면, 매니저나 사장의 비서가 되면 자신을 괴롭힌 사람들을 밟아 주려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해야죠. 그러지 않으면 평생 수모를 당할 텐데 누가 그런 고생을 하고 싶겠어요? 게다가 사람이 패기가 없어서야 되겠어요? 사람은 높은 곳으로 가고,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게 인지상정이죠. 장군이 되려 하지 않는 병사는 훌륭한 병사가 아니라고요.” 이런 말들이 좌우명이 되었는데, 그것들은 전부 사탄의 논리이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몇 년 동안 매일같이 누구나 공손하게 대하며 참아야 했다. 어느 날 사장이 그에게 말했다. “지난 3년간 실적이 나쁘지 않았군. 다음 주부터 영업 사원으로 일하게.” 그는 듣자마자 기분이 상했다. ‘3년을 버텼는데 겨우 영업 사원이나 하라니! 영업 총괄 책임자가 될 줄 알았는데!’ 하지만 입으로는 발탁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해야 했다. 목적을 이루지 못했으니 계속 참아야 했다. 그는 또다시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고생스럽게 사장 뒤를 따라다니면서 술 상대를 해 주고 웃는 얼굴로 대했다. 그렇게 버티자 10년째 되는 해에 드디어 목적을 이뤘다. 어느 날 사장이 그에게 말했다. “자네는 일을 잘하니 실무 책임자로 발탁하겠네.” 그는 이 말을 듣고 드디어 고생이 끝났다며 기쁨에 겨워했다! 이는 어떤 결과이냐? 그가 보기에는 출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이 모든 일을 기꺼이 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누구를 위해 이 모든 일을 했느냐? (자신을 위해서 했습니다.) 그 자신을 위해서 했다. 여기에는 긍정적인 것도, 취할 만한 것도 없고 찬미하고 칭송할 만한 것은 더더욱 없다. 그러나 현재 사회에서는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꼬리를 내리고 처신하는 이런 정신을 떠받든다. 그러니 사람들이 떠받드는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다.”라는 말은 어떠냐?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바람직하지 않으냐? 사람이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은 다 자신만의 속셈과 동기가 있기 때문이고, 자신의 야심과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이지 올바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다. 따라서 취할 만한 점이 조금도 없고, 전혀 칭송하고 칭찬할 만하지도 않으며, 기억될 만한 점은 더더욱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고대 황궁에서 있었던 일을 살펴보자. 어떤 황제가 죽자 황후는 자기 아들이 아직 어리니 황위를 계승해도 결코 조정을 장악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들이 진정으로 황제가 되어 집권할 수 있도록 황후는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며 죽은 황제의 남동생과 결혼했고, 그 둘이서 함께 아들을 길렀다. 황후가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진 목적은 무엇이냐? 아들의 황위를 위해서이다. 아들의 황위가 보장되면 그녀의 신분은 황태후가 된다. 이런 것을 두고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그녀는 어떤 수모를 겪었느냐? 정조를 지키지 않고 선황이 죽자마자 시동생에게 시집가는 바람에 평판이 나빠졌다. 사람들이 다 뒤에서 그녀를 욕하고 판단했고, 심지어 역사서에서도 그녀를 나쁘게 평가했다. 그녀가 그런 것을 신경 썼겠느냐? 사실 시동생에게 시집가기 전에 그녀는 그 일의 결과를 이미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했겠느냐? 아들의 황위와 자신의 황태후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 그녀는 그런 오명을 감수하고 기꺼이 그런 고생을 견딘 것이다. 이게 바로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이다. 그녀는 그 모든 굴욕을 견딤으로써 무엇을 얻었느냐? 더 큰 이익을 얻었다. 그게 바로 그녀가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진 목적이다. 그녀가 더 큰 이익을 얻는 순간 그 모든 오명은 별것도 아니게 된다. 그녀는 그 오명으로써 자신과 아들의 권세와 지위를 얻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진 것은 긍정적인 것이냐, 아니면 부정적인 것이냐? (부정적인 것입니다.) 만약 그녀의 행위만 본다면 그녀는 자신을 버릴 줄 알았고, 그녀가 겪은 굴욕과 고생은 그녀의 아들이 보기에는 사심 없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칭송하며 “너무도 위대한 어머니예요!”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그녀의 욕망과 야심, 진정한 목적을 본다면 사람들은 그녀를 욕해야 하고, 그녀의 행동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심판과 형벌, 책망과 훈계, 시련과 연단, 심지어 하나님의 저주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정죄를 받아들인다면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는 확실하다.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다.”라는 말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적용하면 전혀 성립하지 않고 정죄된다. 이 말을 여기에 적용하면 왜 옳지 않겠느냐? 이런 행위를 여기에 적용하면 옳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겠느냐? 단지 말로만, 도리적으로만 이 말이 옳지 않다고 인정해서도 안 되고, 여기에 관련된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예전에 너는 하나님의 온전케 함이나 구원을 받아들이려면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와신상담하는 법을 익혀야 하고, 월나라 왕 구천의 정신을 배워야 하며 실패를 입에 올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그야말로 얼간이이고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없는 것이다. 이제 내가 이렇게 교제했으니 너는 ‘이 말은 형편없는데 난 예전에 늘 이 말을 썼어. 난 왜 그렇게 멍청했을까?’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이해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너는 이 말의 어느 부분이 옳지 않은지 깨달아야 한다. 어느 부분이 옳지 않은지 정말로 깨달으면 너는 이 말을 철저히 이해한 것이다. 네가 이 말을 절반만 간파한다면, 부정적인 그 절반만 간파하고 사람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라고 생각하는 측면은 간파하지 못했다면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내가 방금 교제한 것을 듣고 나니 너희는 나의 이 방식대로 이런 일들을 해부하고 분석할 수 있지 않겠느냐? 왜 하나님 집에서는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행동 방식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왜 이런 행동 방식과 정신은 하나님 집에서는 정죄되고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하겠느냐? (하나님, 제가 이해한 바로는 하나님 집에서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는 것, 심지어 교체되거나 정죄되는 것은 결코 굴욕을 당하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역 방식이고, 우리가 진리 추구의 바른길에 오르도록 이끌기 위한 것입니다. 이는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과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사람이 만약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의 높여 주심이라는 것,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께서 지극하게 보살펴 주시고 지켜 주시고 사람을 구원하고 계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이 옳으냐? (옳습니다.) 만약 심판과 형벌이라는 일을 간파하지 못하면 마음에 반발심과 불평이 생기고, 사탄 철학인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다.”라는 말을 실행하면서 속으로는 ‘아이고, 난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해. 월나라 왕 구천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고.’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고는 자신의 책상 위에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다.”라는 말을 새겨서 자신을 채찍질하고 격려하며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을 것이다. 이러면 골치 아프지 않겠느냐? 물론 오늘 이렇게 교제하고 나면 너희는 절대 이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너희는 또 다른 말을, 예를 들어 내가 아직 분석한 적 없는 “재능을 감추고 때를 기다린다.”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지 않겠느냐? 이는 같은 성질이 아니겠느냐? 이런 것들은 모두 중국의 전통문화에 속한다. 이런 것들은 사탄의 독소가 아니겠느냐? 모두 사탄의 독소이고, 사탄의 처세 철학에 속한다.
예전에 중국의 여러 교회에서 사역할 때, 막 사역을 시작하던 시기에 하나님 집에서 일부 형제자매에게 소양과 지식을 학습하도록 안배했다. 당시 어떤 상황이었겠느냐?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었고 비교적 외진 지역에 사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들은 교육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았고 아는 글자도 적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말씀에서 언급하는 ‘자질이 떨어진다’,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뜻’ 등과 같은 고정적인 용어를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나중에 하나님 집에서 형제자매에게 여유 시간에 소양과 지식을 학습해도 된다고 알려 줬다. 최소한 일부 고정적인 구절이나 용어, 혹은 명사가 무슨 뜻인지는 알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글자나 단어 자체의 뜻도 이해하지 못할 텐데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면 어떻게 진리를 실행하겠느냐? 그 뒤로 형제자매는 공들여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는 좋은 일이었지만 일부 치우친 사람은 빈틈을 파고들었다. 어떤 리더는 예배 시간에 소양과 지식을 학습하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 소양과 지식을 익히면 어떤 이점이 있는지, 익히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특별히 이야기하고, 이런 이치에 대해 잔뜩 말했다. 이런 것은 진리가 아니니 너무 많이 말할 필요가 없다. 이런 일들은 말만 하면 다들 이해할 수 있으니 예배 시간에 진리로 여겨 교제하지 않아도 된다. 일부 리더는 예배 시간을 많이 할애해 이런 것을 진리로 여겨 교제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수법까지 생각해 내어 일부러 비교적 생소한 글자들을 가지고 형제자매를 시험하기도 했다. 형제자매가 대답하지 못하면 그의 소양이 뛰어나 보이지 않겠느냐? 그 기간에 일부 거짓 리더는 실제적인 사역은 하지도 않고, 생명 체험이나 진리, 하나님의 말씀은 교제하지도 않으면서 오로지 소양을 쌓는 일에 대해서만 교제했다. 이를 뭐라고 하겠느냐? 이게 바로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문제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내가 왜 이 일을 언급하겠느냐? 너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겠느냐? 너희는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느냐? 이렇게 하려는 사람이 있느냐? 만약 이렇게 한다면 너희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이런 성어에 대해 얘기하는 걸 보고 속으로 벼르며 준비를 시작한다. ‘알고 보니 진리 교제가 이렇게 쉬운 일이었구나. 성어만 교제하면 되는 거였어. 당신이 성어를 교제하신다면 나는 속담이나 방언, 속어, 이언을 교제하겠어.’ 이는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영적인 이해력이 있겠느냐? (영적인 이해력이 없습니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고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그는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당신은 여기에 앉아서 쓸데없는 한담이나 하고, 성어 두 개로 우리를 속이고 있어. 당신처럼 교제하는 건 나도 할 수 있다고!’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아무렇게나 흉내 내는데, 이렇게 흉내 내는 리더는 교체돼야 한다. 이렇게 하는 사람은 교체돼야 한다. 내가 왜 이 일을 언급하겠느냐? 너희가 그렇게 하기 전에 먼저 너희에게 그릇된 길을 가지 말라고 일깨워 주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얘기하는 건 괜찮지만, 네가 이렇게 얘기한다면 알아듣게 얘기할 수 있겠느냐? 너는 알아듣게 얘기하지 못한다. 그럼 나는 왜 이런 속어나 성어에 대해 얘기하겠느냐? 어떤 전제하에 얘기하는 것이겠느냐? 사람은 진리의 정의와 개념을 깨달은 것을 토대로 사람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많은 것을 더 깊이 분석하더라도 닿을 수 없고, 어떻게 묵상해야 하고 어떤 일과 연결시켜야 하는지를 스스로 알지 못한다. 너희가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고사성어를 좀 들려주는 것이다. 그럴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은 진리에 관해 자신은 이미 대학교에 진학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어째서 이런 초등학교 수업 같은 내용을 보충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진다. 이건 초등학교 수업이 아니라 대학교 수업인 셈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너희는 아직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계속 초등학교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자신이 대학교에 진학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가 대단히 괜찮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느낌은 옳지 않다. 잘못된 느낌이다. 너희는 대학교에 진학하려면 아직 멀었다. 그래서 내가 다시 일깨워 주겠다. 너희는 방금 말했던 그런 일을 절대 저질러선 안 된다.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데까지만 착실하게 교제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마구 지껄이지 마라. 진리 교제는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는 게 아니다. 너와 그렇게 시간을 낭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너는 아무렇게나 흉내 내서도 안 된다. 내가 와신상담에 대해 얘기하는 걸 보고 너는 월나라 왕 구천에 대해 얘기하거나 현대사, 고대사에 대해 얘기하는데, 그런 것들을 얘기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들으려는 사람이 있겠느냐? 설사 들으려는 사람이 있다 한들 그건 진리가 아니다.
방금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고,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을 실행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고 말했다. 그럼 이토록 ‘좋은’ 말과 ‘위대한’ 정신을 어째서 실행하면 안 되겠느냐? 대체 어디가 잘못됐겠느냐? 어째서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정신을 갖춰선 안 되겠느냐? 도리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도, 하나님이 그를 따르는 사람에게 준 행동 원칙도 아니다. 왜 이 말이 진리도, 실행 원칙도 아니라고 하겠느냐? 우선,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에서 ‘수모’라는 단어를 살펴보자. ‘수모’는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굴욕이고 당하는 치욕이다. 그럼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는 것, 사람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 치욕을 당하거나 굴욕을 견디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인내하면서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저는 마음속의 화나 분노, 원한, 언짢음을 억누르고 참으면서 잠자코 있어야 해요. 이런 것이 제게는 다 치욕이지만, 저는 그냥 억누르고 있는 거예요.”라고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 이게 진리 실행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무엇을 행한 것이냐? 패역이고 허위이고 위장이다.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기 위해 네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어떤 고통을 견디는 게 아니다. 너는 어떤 굴욕도 견딜 필요 없다. 너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네게 치욕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치욕이 아니다. 너에 대한 하나님의 폭로와 심판, 형벌, 시련이나 연단은 네게 치욕을 주는 게 아니라 네 패괴 성품의 표출을 폭로하는 동시에 네가 자신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자 네가 그것을 벗어 버리고 저버려 하나님의 요구대로 행동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성과를 이루겠느냐? 너는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으며 하나님이 흡족해하고 칭찬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럼 이런 것을 이루는 과정에서, 이 기간에 네가 견뎌야 할 것들 중에 굴욕이 하나라도 있겠느냐? 하나님이 네게 주는 치욕이 하나라도 있겠느냐? (없습니다.) 너에 대한 하나님의 폭로, 예를 들어 하나님이 폭로하는 너의 교만함과 사악함, 간사함, 강퍅함, 혹은 흉악함 중 사실이 아닌 게 하나라도 있겠느냐? (없습니다.) 전부 다 사실이다. 하나님이 너를 폭로하거나 네게 하는 말씀은 어떤 방식이든 전부 다 사실이다. 사람이 인식할 수 있든 없든, 사람이 얼마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든 그런 것은 모두 사실이지 없는 사실을 꾸며 내거나 허풍을 치는 게 아니며 너를 모함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럼 네게 치욕을 주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네게 치욕을 주는 게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네게 일러 주는 것이다. 네가 악인의 길을 걷지 않고 사탄을 따르지 않고 인생의 바른길을 걸을 수 있도록 주의를 주는 것으로, 네게 미치는 영향과 이루는 성과는 긍정적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행하는 성질은 완전히 정당한 것이고 너를 구원하기 위한 것으로, 전적으로 진리에 부합한다. 이는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고통이자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기 위해, 진정한 피조물이 되기 위해 받아야 하는 고통이다.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는 적극적으로 이런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이지 굴욕적으로 견디는 게 아니다. 이런 고통은 치욕도, 풍자도, 비방도 아니고, 하나님의 희롱은 더더욱 아니며, 전부 사람이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을 거역하며 진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로 인해 사람에게 이런 고통이 생겨났다. 그럼 이런 고통 안에 하나님이 일부러, 별도로 사람에게 가하는 것이나 사람이 받아서는 안 될 고통이 하나라도 있겠느냐? 하나도 없다. 오히려 이런 고통을 적게 받으면 사람은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릴 수 없다. 사람의 패역한 성품이 얼마나 심각하든, 하나님이 사람의 패괴 성품을 폭로하는 것을 사람이 얼마나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든 결국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치욕이 아니다. 사람이 받는 것도 굴욕이 아니라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이자 사탄에 의해 깊이 패괴된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고통이다. 사람은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한다. 왜 받아야 한다고 하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을 몹시 심하게 거역하고 사탄이 되었기 때문에 이런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려면 이 고통을 받아야 한다. 이는 당연한 것이다. 이는 사람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고 반드시 견뎌야 하는 고통이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한 게 아니다. 이는 찬물을 마시면 배가 불편한 것과 마찬가지다. 누구를 원망하겠느냐? 찬물을 원망하겠느냐? (원망하지 않습니다.) 이 고통은 누가 네게 가한 것이냐? (자신입니다.) 너 자신이 초래한 것이다.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이 결과와 과정은 모두 사람이 스스로 초래한 것이므로 결코 굴욕이나 치욕을 당한다고 말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해하지 않는다. 그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뭐라고 생각하겠느냐? ‘하나님 집에서 리더를 맡으라고 나를 발탁하길래 기뻐하면서 리더를 맡았는데 제대로 사역하지 않고 잘못을 범했다는 이유로 나를 다시 교체할 줄은 생각도 못 했어. 난 뭐가 된 거지? 내게 아직 인격이나 존엄이 있나? 내게 아직 사람으로서의 자유가 조금이라도 있나? 내게 아직 자주권이 있나?’ 그는 사람이 이렇게 선택권 없이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해서는 안 된다고, 만약 사람이 절대적으로 순종하면 그건 바보이고 존엄이 없는 사람이라고, 그러면 사람이 너무도 나약하고 억울하게 사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사람이 심판과 형벌,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면 치욕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 밑에서는 눈치를 살펴라.”라는 속담처럼 말이다. 보아라, 사탄 철학이 또 등장했다. 이 명언이 그를 굴복시켰다. 그는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기꺼이 순종하겠느냐, 아니면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겠느냐?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집니다.) 그는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기꺼이 순종하지 않는다. 그는 기꺼이, 순수하게 순종하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순종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어쩔 수 없음이 그에게는 일종의 치욕이다. 이런 사람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진리 실행으로 여기기 때문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그는 순종을 진리로 여기는 게 아니라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을 진리로 여긴다. 이는 성질이 다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비록 기꺼이 순종하는 사람과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사람 모두 복종을 하긴 하지만, 모두 말썽을 일으키지 않고 반항하지도 않으며 겉으로 보기에는 말을 잘 듣고 행동이 올바르고 영리하지만 이 둘의 성질은 다르다. 진심으로 순종하는 사람은 순종을 자신의 직책, 본분과 의무, 천직, 진리로 여긴다. 진심으로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설사 겉으로는 반항하지 않더라도 속으로는 자신이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이 그에게는 최고의 진리다. 그는 수모를 참는 것을 진리 실행으로 여긴다. 순종을 무엇으로 여기겠느냐? 진리 실행이 아닌 치욕을 견디는 것으로 여긴다. 이는 뒤바뀐 것 아니겠느냐? 이를 뭐라고 하느냐? (본말이 전도됐다고 합니다.) 본말이 전도됐다. 그는 진리를 처세 철학으로 여기고, 도리와 사람의 처세 철학을 진리로 여긴다. 이는 흑백이 전도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흑백이 전도된 것이다. 그럼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겠느냐? 사람은 자신이 받는 고통이 치욕도 아니고 누가 자신에게 치욕을 주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럼 사람이 받는 고통은 무엇 때문에 초래됐겠느냐? (사람의 패괴 성품 때문에 초래됐습니다.) 그렇다. 만약 패괴 성품이 없고 진리를 깨달아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완전히 순종할 수 있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다면 너는 이런 고통을 받을 필요가 없다. 그러니 이런 수모는 존재하지 않는다. 알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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