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 제 3 부

방금은 하나님의 경륜으로부터, 또 하나님의 입장으로 사람은 왜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해 얘기했다. 이제 또 다른 면으로 살펴보면 상대적으로 간단하다. 자신의 입장에서, 즉 사람의 입장으로 왜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지 얘기하겠다. 가장 간단하게 말하면, 사람이 율법 아래에서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 율법 지키는 것만을 추구한다면, 최종의 결과는 어떻게 되겠느냐? 최종의 결과는 사람이 율법을 지키지 못해 율법에 의해 정죄당하는 것으로 끝날 것이다. 은혜시대에 들어와 사람이 많은 것을 깨닫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 대한 많은 정보와 사람됨에 있어서의 규칙, 계명을 알게 되었으며 이치상 얻은 것도 많았지만,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 여전히 하나님의 더 많은 보호와 은총, 축복, 은혜를 받길 바랐다. 사람의 관점은 여전히 하나님에게 요구만 할 뿐 추구하는 목표와 방향은 여전히 육적인 삶과 안일 그리고 육적으로 더 나은 삶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추구하는 목표가 진리와 상반되고 배치되어 여전히 진리 추구에 이르지 못했다. 즉, 진리가 사람의 생존 근거가 되는 실생활로 진입하지는 못한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율법, 혹은 은혜시대의 계명과 틀에 박힌 것들은 깨달았지만 여전히 진리를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실제 상황이다. 사람이 이런 실제 상황에서 살면 늘 자신도 모르게 방향을 잃을 수 있다. 사람이 흔히 얘기하는 “헤맨다. 방황한다.”라는 말처럼 말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헤매는 현실 상황에서 사람은 종종 공허함에 빠져 의지할 곳을 잃게 된다. 사람이 왜 살아가는지, 사람의 미래는 어떤지 알지 못하고, 실생활 속에서 수많은 사람과 일, 사물을 어떻게 대하고 어떤 방식으로 대처해야 올바른 것인지는 더더욱 알지 못한다. 심지어 하나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 신자들이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의 큰 은혜와 축복을 누리면서 지위, 재물, 진로, 출세, 아름다운 결혼, 화목한 가정도 함께 추구한다. 현대 사회에 들어서는 육적인 것, 인생, 안락을 누리며 호화로운 집에서 사치스러운 차를 타는 것,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것, 인간의 비밀과 미래를 탐구하는 것을 추구한다. 인간은 수많은 율법과 행동 준칙의 규범과 단속을 받아들인 상태에서 미래와 인간의 비밀, 인간의 모든 미지의 일들을 탐구하는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와 함께 사람은 자주 공허함, 우울함, 울분, 번뇌, 불안, 공포를 느끼고 심지어 많은 일을 대할 때 자신의 혈기, 기분을 자제하기 어려워한다. 일부 사람들은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나 가정불화, 가정 변고, 혼인 변고, 사회적 차별 등 모든 순조롭지 못한 환경에 처할 때면 슬럼프에 빠지거나 우울증, 억압에 빠진다. 심한 경우 극단적인 정서에 휩싸이거나, 최악의 경우 극단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생명을 끊는 사람도 있다. 물론 고립이나 고독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면 사회에서 무엇이 나타나겠느냐? 은둔형 외톨이, 우울증 등 현상이 현대 크리스천의 삶에서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결국 인간이 진리가 무엇인지, 사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삶의 이유는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잡다한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할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결하고 벗어나야 하는지, 이 모든 일을 어떻게 꿰뚫고 간파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더 기쁘고 평안하게 하며 창조주의 주재와 지배하에 사는지 모르는 데 있다. 인간은 그런 능력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진리를 선포하지 않고 어떻게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며 일을 처리해야 하는지 사람에게 알려 주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은 자신의 노력, 자신이 습득한 지식과 파악한 삶의 요령, 깨달은 게임의 법칙 그리고 처신의 법칙이나 처세의 철학, 삶의 경험과 연륜, 심지어는 책에서 배운 것에 의지했지만 실생활에서 많은 난관에 직면했을 때 여전히 무력한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실생활의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성경을 봐도, 예수에게 기도해도, 심지어는 여호와에게 기도한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고대 선지자의 예언을 살펴본들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세계를 여행하거나, 달과 화성을 탐사하거나 미래를 예지하는 선지자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 봐도 사람의 마음은 여전히 안정을 찾지도, 기쁨이나 위로를 얻지도 못하고, 가고 있는 방향과 목표 역시 막막하고 공허한 느낌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인간은 여전히 이렇게나 공허하게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상태로 살다 보니 인간은 많은 오락거리를 발명했다. 예를 들면, 현대 전자 게임, 번지점프, 서양인이 즐기는 서핑, 등산, 스카이다이빙, 중국인이 좋아하는 각종 연극, 노래와 춤, 그리고 동남아의 트랜스젠더 쇼가 있으며, 심지어 사람의 정신세계나 육의 정욕을 채우는 것들을 보기도 한다. 하지만 어떻게 보고 즐기든 사람의 마음 깊은 곳은 여전히 미래에 대한 막막함으로 가득하다. 수차례 세계를 여행해도, 달이나 화성에 간다 해도, 돌아와서 앉으면 완전 녹초가 되니 가기 전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심지어 안 가느니만 못해 괴로워하거나 불안해한다. 인간은 인간이 이토록 공허하고 무기력하고 헤매는 것, 미래와 미지의 일을 탐구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놀 줄도, 살아갈 줄도 모르고, 인생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줄 모르며, 사람의 취미와 기호가 너무 단순하고 광범위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이 얼마나 많은 취미를 키우고 얼마나 많은 오락거리를 경험하든, 그리고 세계의 얼마나 많은 곳을 가보든,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나 삶의 목표와 방향은 여전히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결국 사람의 전체적인 감정은 공허함, 무료함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무료함과 공허함 때문에 전 세계의 미식을 맛보고자 어딜 가든 계속 먹기만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어딜 가든 항상 놀기만 한다. 마음껏 놀고먹고 즐기지만 먹고 마시고 즐긴 후에는 더욱 공허해진다. 이러면 어떡해야 하겠느냐? 이런 감정은 어째서 도통 사라지지 않는 것이냐? 사람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어떤 사람은 아편을 피우거나 엑스터시를 복용하는 등 마약을 하기 시작하거나 각종 물질로 자기 자신을 자극한다. 결과는 어떠하더냐? 사람의 공허함을 해결하는 데 효과가 있는 방법이 있더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더냐? (없습니다.) 없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감각에 의지해 살아가고 진리를 깨닫지 못해 인간의 허무함, 불안, 방황 등의 문제가 어째서 생겨나는지,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는지도 모르고, 육적으로 즐기고 나면, 육의 정신세계가 충족되고 채워지면, 마음의 공허한 느낌도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더냐? 사실은 그렇지 않다. 만약 이런 설교를 듣고 이치로 받아들여 전혀 추구하지도 실천하지도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근거, 준칙으로 삼지 않으면 네 삶의 방식과 인생관은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네 생명과 생명의 형식, 생명의 존재 가치가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명이 존재하는 형식과 가치가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네가 깨달은 이치는 언젠가 정신적 지주나 슬로건, 이론, 그리고 적당한 때에 네 내면세계의 공허한 감정을 채워 주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란 의미다. 만약 네가 추구하는 방향과 목표가 바뀌지 않는다면 너는 하나님 말씀을 전혀 듣지 못했던 사람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네가 추구하는 방향과 목표는 여전히 오락거리, 육의 안락을 찾는 것으로, 세계 여행, 비밀 탐구 등의 방식으로 너의 공허함과 방황을 해결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네가 걷는 길이 틀림없이 그들과 똑같을 것이다. 그들은 세계의 미식을 맛보고, 세계의 부귀영화를 누린 후에도 공허함을 느끼니 너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네가 참도와 하나님 말씀을 지키면서도 추구하지 않고 실행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들처럼 늘 공허와 불안, 분노, 억압을 느끼게 될 것이다. 진정한 기쁨과 진정한 행복, 진정한 자유는 물론 진정한 평안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네 결말이 결국 그들과 같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결말을 어떻게 보느냐? 하나님은 네가 하나님 말씀을 얼마나 읽고, 설교를 얼마나 들었는지를 보지 않는다. 하나님이 이런 것들을 보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네가 얼마나 많은 진리를 추구하여 얻었는지, 진리를 얼마나 실행할 줄 알고, 삶에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삼는지, 네게 이런 체험과 간증이 있는지를 본다. 네 일상생활이나 하나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이런 간증과 실증이 전혀 없다면, 하나님은 너를 이방인처럼 간주할 것이다. 그렇게 간주하면 그만이겠느냐? 아니다. 그렇게 간주하면 그만인 것이 전혀 아니라, 그로 인해 너의 결말이 정해지는 것이다. 네가 걸었던 길로 인해 하나님이 너의 결말을 정한다. 너의 추구와 목표, 진리에 대한 태도, 네가 진리 추구의 길을 걸었는지 여부 등 일련의 모습을 바탕으로 너의 결말을 정하는 것이다. 어째서 이렇게 정하겠느냐?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수없이 듣고 나서도 하나님 말씀을 준칙으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마지막에 구원받을 수 없을뿐더러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람이 남게 된다 한들 어쩌겠느냐? 만물의 주인이 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대신해 만물을 다스릴 수 있겠느냐? 사명을 맡기거나 신뢰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만물을 네게 맡기면 너는 지금의 인류처럼 하나님이 창조한 생령을 멋대로 도살하고,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을 함부로 남용하며, 하나님이 인류에게 베풀어 준 만물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지 않겠느냐? 분명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럼 이 세상을, 만물을 네게 맡긴다면, 결국 만물이 직면하게 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진정으로 다스리는 이가 없으니 만물은 사탄에 의해 패괴된 인간에게 거의 다 파괴되어 사라질 것이다. 결국, 만물과 만물의 생령 그리고 사탄에 의해 패괴된 인간은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곧 하나님에 의해 멸망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나서 하나님 말씀 속의 많은 이치만 깨달은 후 만물의 주인이라는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지 못한다면,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결코 어떤 일도 맡기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공들여 창조한 만물이 사탄에 의해 패괴된 인간에게 남용되거나 짓밟히는 것을 두 번 다시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6천 년간 경영한 인류가 이러한 인류의 손에 망가지는 것 역시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이 공들여 창조한 만물이 하나님께 구원받은 한 무리의 사람에게 다스려지면서 계속해서 생존하고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 인도를 받으며, 만물의 규율과 하나님이 세운 법칙에 따라 살아가는 것만을 보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이런 중책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오직 한 부류의 사람이다. 이 부류가 바로 내가 말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즉,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엄격히 하나님 말씀에 근거를 두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부류의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신뢰할 수 있으며, 그들의 생존 방식은 사탄이 인류를 패괴시킨 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나 방식,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태도, 처신이나 일 처리는 완전히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완전히 진리를 준칙으로 삼을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진정 계속해서 생존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며, 하나님이 만물을 그의 손에 맡기기에 적합한 부류의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어야만 하나님의 사명이라는 중책을 감당할 수 있다. 하나님은 절대로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나 하나님 말씀을 전혀 듣지 않는 사람의 손에 만물을 맡기지 않는다. 이런 사람에게는 절대 그 어떤 사명도 맡기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본분조차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니 하나님의 사명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만약 하나님이 만물을 그들에게 맡겼는데 그들이 그 어떤 충성심도 보이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일하지 않으며, 기분이 좋을 때는 일하고, 기분이 나쁠 때는 먹고 마시며 즐기러 가 버린다면, 항상 마음속이 공허하고 불안하여 어쩔 줄 모르며, 하나님의 사명에 그 어떤 충성심도 없다면, 이런 사람은 절대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네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패괴된 인류의 결함과 패괴된 인류가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지 안다면 진리 추구부터 시작해서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이런 방향에서부터 시작하여 이런 목표와 방향을 향해 추구하면 언젠가 하나님이 너의 노력과 대가를 기억하고 열납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란 사람은 삶의 가치가 생기고,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것이니,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게 된다. 네게 노아가 방주를 짓던 것처럼 그토록 오랜 시간을 견지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생애 동안만은 견지해야 한다. 네가 120살까지 살 수 있겠느냐? 아무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현대인의 수명이 그 정도는 아니다. 오늘날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방주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쉽다. 방주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느냐? 그 당시에는 현대화된 공구가 없어서 오로지 인력에만 의존해야 했다. 게다가 주위 환경도 열악해서 소요 시간이 길었던 반면 보조 인력은 턱없이 적었다. 지금 너희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방주를 짓는 것보다 훨씬 쉽다. 전체적인 환경으로 보나 개인적인 삶의 세부적인 환경으로 보나, 너희의 진리 추구에 너무나도 유리하고 편리하다.

오늘은 ‘왜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주로 두 가지 면을 교제하였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경륜과 바람, 그리고 염원에 대해 간단히 교제하는 한편, 사람의 입장에서 사람 자신의 문제를 해부함으로써 진리 추구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설명했다. 이 두 가지 방면 중 어떤 면으로 보든, 진리 추구는 사람에게 무척 중요하면서 시급한 문제이다. 또 어떤 면으로 보든 진리 추구는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 하나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이 선택해야 할 삶의 길이자 목표이다. 그것을 하나의 이상이나 염원으로 간주해서는 안 되고, 진리 추구의 모든 표현을 정신적 위안으로 간주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실제로 자신의 실생활 속에서 실행하는 원칙과 근거로 삼아 자신의 인생 목표와 생존 방식을 변화시켜야 한다. 물론 자신의 삶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진리 추구의 과정에서 미시적으로는 네가 가는 길과 너의 선택이 옳은 것이고, 거시적으로는 진리 추구로 인해 마침내 네 패괴 성품이 벗겨져 구원을 받는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보기에 하나님 눈의 눈동자이자 손안의 보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하나님나라의 기둥에 지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앞으로 너는 이런 인류 가운데 일원으로서 큰 복을 받을 것이다. 그야말로 ‘전무후무’하게 좋은 일이 끊이지 않을 것이니, 네 머리로는 생각도 못 할 일이다. 어찌 되었든 지금은 먼저 진리 추구라는 목표를 확정해야 한다. 이 목표를 확정한다고 네 정신세계의 공허함이나 네 마음속 깊은 곳의 억압과 울분, 방황과 막막함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이런 것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목표를 향해 처신하고 일을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단순하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단순하지 않으냐? 너희는 감히 단순하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사실 무척 단순하다. 사람에게 진리 추구의 의지가 있는지에 달렸다. 만약 진정 네게 그 의지가 있다면 구체적인 실행의 길이 없는 진리가 어디 있겠느냐? 무엇이든 다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방면의 진리를 실행하든 모두 구체적인 근거가 있고, 어떤 사역을 하든 모두 구체적인 실행 원칙이 있다. 진정 의지가 있는 사람은 이 결실에 이를 수 있다. “그래도 막상 일이 닥치면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은 네가 구하지 않았을 뿐이다. 구하면 길은 있다.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라는 말씀도 있지 않으냐? 네가 구하였느냐? 문을 두드렸느냐? 하나님 말씀을 읽고 진리를 묵상하였느냐? 네가 열심히 묵상한다면 깨달을 수 있다. 진리는 모두 하나님 말씀 안에 있으니, 네가 읽고, 묵상해야 한다. 게으름 피우지 말고 정성을 다해야 한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일정 시간 진리를 구해야 한다. 때로는 인내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은 네게 환경을 마련하여 그 환경에서 모든 것을 드러내고, 네게 하나님 말씀을 깨우쳐 주어 네 마음을 밝히며 구체적인 실행 원칙이 생기게 한다. 이렇게 하면 너도 깨닫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니 진리 추구는 그렇게 추상적이지도, 그렇게 어렵지도 않다. 개인적인 일상생활이든, 본분 이행이든, 교회 사역이든, 사람 간의 교류든, 어떤 면에서든 진리를 구해 네 실행 방향과 실행 준칙을 인도받을 수 있으니,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다. 이제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예전보다 수월해졌다. 하나님 말씀이 무척 많고, 너희가 들은 설교도 무척 많으며, 각 방면의 진리 교제도 많기 때문이다. 영이 통하는 사람이라면, 자질을 갖춘 사람이라면 진작 알아들었을 것이다. 영이 통하지 않는 사람, 자질이 떨어지는 사람만이 늘 이도 저도 깨닫지 못하겠다고 말하고,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하며, 일이 닥쳤을 때는 갈피를 잡지 못한다. 진리를 교제하고 나면 마음속이 뚜렷해지지만 얼마 후면 다시 흐릿해지는 것이다. 이는 매일 무위도식하고 모든 일에 무관심하며 게으름을 피우고 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네가 구하고자 할 때, 관련된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으면 쉽게 깨달을 수 있다. 그 말씀들은 모두 평이하고 이해가 쉬운 백화문(白話文)이라서 지능에 문제가 없는 정상인이면 다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들은 많은 일을 설명하여 네게 알려 준다. 너 자신이 진리 추구를 중요한 일로 여기지 않으면 몰라도, 마음속으로 진정 진리 얻기를 갈망한다면, 진리 추구를 진정 생명의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긴다면, 그 어떤 일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고, 진리를 깨닫거나 실행하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다.

진리 추구에서 가장 단순한 점은 무슨 일이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한 측면이다. 다른 측면으로는 자신의 본분과 본분 내의 일, 그리고 좀 더 거창하게는 하나님에게 받은 사명과 네 직책, 네 본분 이외의 중요한 사역을 해야 한다. 하나님이 안배한 것이고, 너를 지명하여 하라고 한 것이라면, 너는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것이 얼마나 어렵든, 설령 힘이 들고 심지어 박해받아 목숨이 위태롭더라도 주저하지 말고 충성을 다해 죽기까지 순종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진리 추구의 실질적인 모습이자 노력이며 진실한 실행이다. 어렵겠느냐? (어렵지 않습니다.) 나는 어렵지 않다고 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의 마음에는 진리 추구에 대한 갈망, 결심,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이런 힘이 있으면 어떤 일이 닥쳐도 어려울 것이 없다. 그저 사람에게 믿음이 없어 흔히 하는 말처럼 자신감이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렇게 되면 다 끝난 것이다. 만약 사람이 벽에 바르지 못하는 진흙 같아 옳은 일에는 무기력하면서 먹고 마시며 노는 일에는 힘이 넘치고, 또 난관에 부딪힐 때는 소극적이고, 진리를 교제할 때는 기운이나 활력이 하나도 없다면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은혜시대나 율법시대에 인간에게 진리 추구를 요구하면 조금 곤란하고 어려웠을 것이다. 그 시대 인간의 배경이 달랐고, 사람에게 바라는 하나님의 기준 역시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과거 시대에 노아, 아브라함, 욥, 베드로 같은 유명한 인물 외에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나님도 그 두 시대의 사람을 질책한 것은 아니었다. 그 시대에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구원에 이르는지에 대한 기준을 알려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시대의 이 단계 사역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다방면으로 실행해야 할 진리를 명확하게 알려 주었음에도 인간이 더 이상 실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요구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싫어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 진리를 추구하는 지금의 이런 시기에 사람에게 진리를 추구하라고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시의적절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에게 진리를 추구할 충분한 조건과 기반이 마련되어 있다. 사람이 결국 진리를 얻지 못하면 그 사람의 문제는 너무나도 심각하다. 그런 사람은 어떤 징벌을 받든지, 어떤 결말을 맞아 어떻게 죽든지 마땅한 것이니 불쌍히 여길 가치도 없다. 하나님에게는 사람을 가련하게 여긴다거나 동정한다는 것 같은 개념이 없다. 하나님은 사람에 대한 요구에 따라 그의 성품과 그가 정한 규율과 법칙을 바탕으로 사람이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를 판단한다. 태도와 결말이 어땠는지에 따라 사람의 현생과 내생이 어떨지를 정하는 것이다. 이토록 간단하다. 마지막에 살아남은 사람이 얼마나 되든, 징벌을 받는 사람이 얼마나 되든 하나님은 이를 개의치 않는다. 이 말에서 너희는 무엇을 깨달았느냐? 이 말이 너희에게 어떤 정보를 전해 주고 있는지 알겠느냐? 너희가 충분히 영리하고 슬기로운지 살펴보겠다. 너희가 답을 하지 못하니 너희를 ‘어리석다’는 단어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어째서 너희를 어리석다 하는지 말해 주겠다. 하나님은 살아남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멸망하고 징벌을 받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이것이 너희에게 무엇을 알려 주느냐? 바로 하나님이 사람의 수를 정해 놓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너는 쟁취할 수 있다. 너와 타인 혹은 너희와 그들이 결국 살아남느냐, 아니면 징벌받느냐는 하나님이 이미 정해 놓은 사람의 수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역하고 이렇게 말씀한다.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고, 모두에게 충분한 기회를 준다. 네게 충분한 기회를 주고, 충분한 은혜를 베풀고, 충분한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베푼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것이다. 네가 진리를 추구할 수 있고 하나님을 따르는 길에 들어서면, 얼마나 큰 고통을 겪든 얼마나 많은 난관을 만나든 진리를 받아들이고 패괴 성품이 정결케 되면, 구원받게 된다. 네가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고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 되고 합당한 자격을 갖춘 만물의 주인이 되면 너는 살아남을 수 있다. 네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네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네가 개인적으로 노력을 쏟고, 개인적으로 추구하여 얻은 것이다. 이는 네가 받아야 하는 것이자 받아 마땅한 것이지, 하나님이 특별히 네게 베푼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네게만 특별히 인도하고 양성하며 더 많이 말씀하거나 특별 대우를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자연계와 마찬가지로 적자생존이다. 각종 동물이 후대를 낳는데 얼마나 낳고 죽든 하나님이 정해 놓은 규율과 법칙에 따라 살아남으면 살고, 살아남지 못하면 죽는다. 그리고 다시 낳는다. 낳은 후에는 남을 수 있는 만큼 남는다. 운이 좋지 않은 해에는 하나도 살아남지 못하고, 운이 좋은 해를 만나면 많이 살아남는다. 만물이 결국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은 어떠하냐? 하나님은 동일한 태도를 가진다. 하나님은 이토록 공평하게 모든 이에게 기회를 주고, 이토록 공평하고 대가 없이 모든 사람에게 말씀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을 후대하고 발탁하며 인도하고 보살피며 보호한다. 결국, 네가 진리 추구로 인해 살아남아 하나님이 원하는 기준에 도달하게 되면 얻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냥 그렇게 허송세월하며 자신의 운명을 탓하고 비현실적인 이상만을 추구한다면, 또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감각에만 의지해 살아가며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바른길을 걷지 않는다면, 결국 너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네가 항상 허송세월하려 하고 하나님이 네게 역사해도 외면하며, 하나님이 너를 인도하고, 기회를 주며, 징계하고, 깨우치며, 붙들어 주어도 전혀 반응하지 않으니 하나님은 너를 목석이나 어리석은 자로 보고 네게 관여하지 않는 것이다. 언제든 네가 진리를 추구하면 하나님은 네게 역사하고 너의 과오를 기억하지 않는다. 네가 추구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너를 억지로 몰아세우지 않으며 강요하지 않는다. 네가 추구하면 얻을 것이고, 추구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모두 자신에게 달려 있으며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다. 사역이 끝나면 하나님은 너에게 답안지를 요구하고, 진리의 기준으로 너를 평가할 것이다. 네가 간증이 전혀 없다면 도태되어 살아남지 못한다. 너는 “저는 많은 본분을 이행했습니다. 많은 힘을 들이고 많이 헌신하고 노력했습니다!”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그렇다면 너는 진리를 추구했느냐?”라고 말씀한다. 깊이 생각해 보니 20, 30년이나 40, 50년 동안 하나님을 믿었지만 진리를 추구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나님은 “스스로 추구하지 않았다고 하니 그만 갈 길 가 보거라.”라고 말씀한다. 너는 이렇게 말한다. “얻어야 할 사람이 하나 줄고, 만물의 주인이 하나 줄어들면 하나님은 아쉽지 않으세요?” 그 정도에 이르렀는데 하나님이 아쉽겠느냐? 하나님은 충분히 오래 인내하고 기다렸다. 너에게 걸었던 기대는 이미 한계에 다다라서 실망했다. 하나님은 더 이상 너를 위해 애쓰지 않을 것이고, 너로 인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너 때문에 더는 그 어떤 상처나 고통도 받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겠느냐? 만물의 결말이 다가왔고,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경륜도 매듭을 짓고 하나님이 안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어느 한 사람으로 인해 기뻐하거나 또한 가슴 아파하거나, 슬퍼하거나, 눈물 흘리지 않을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어느 한 사람이 살아남았다고 해서, 만물의 주인이 되었다고 해서 기뻐하지도 않을 것이다. 어째서겠느냐? 하나님은 이런 인류를 위해 너무 오랜 시간 너무 많은 것을 지불했다. 하나님에게는 안식이 필요하며 6천 년의 경륜을 매듭지어야 한다. 더 이상 마음 쓰지 않고 계획하지 않으며, 더 이상 사람에게 말씀하지 않고 그 어떤 사역도 하지 않는다. 미래의 사역과 이후의 날들은 다음 시대의 주인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너희에게 알려 주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너희가 마지막에 남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마지막에 누가 남을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으니 모든 사람이 쟁취할 수 있다. 쟁취하는 유일한 방법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허송세월하거나 무지몽매하지 말아야 한다. 언젠가 하나님이 너의 그 어떤 노력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네가 어떤 길을 걷고 너의 결말이 어떤지 개의치 않는다면, 너의 결말은 결정된 것이다. 지금 너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지금 하나님이 아직 인간에게 마음을 쓰고 인간을 위해 계획하며,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을 염려하고 근심하고 있을 때 사람은 최대한 빨리 선택을 내리고 추구 목표와 방향을 정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안식할 날이 오고 나서 계획하면 안 된다. 만약 그때가 되고 나서야 진정으로 아쉬워하고 후회하며 몹시 원망한다면 모든 것이 늦었다. 너를 구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하나님도 구해 줄 수 없다. 그때, 하나님의 계획이 진정으로 끝나는 그때, 마침표를 찍는 그 순간, 하나님의 계획이 매듭을 짓는 그 순간 하나님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안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은 6천 년간의 경륜의 성과를, 살아남은 인류가 그를 대신해 만물을 다스리는 것을 누려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누리고자 하는 것은 살아남은 인류가 그가 정한 법칙과 규칙에 따라, 그가 창조한 사계절, 만물, 인간의 규칙에 따라 하나님의 어떠한 뜻도, 어떠한 염원도 거스르지 않고 체계적으로 만물을 다스리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더 이상 인류를 위해 마음을 쓰거나 그 무엇도 하지 않고 안식과 위로를 누릴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그날이 속히 올 것이다. 만약 아담과 하와 시대의 수명으로 본다면, 사람에게 수백 년의 세월이 남았을 수 있으니 긴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든 시간으로 본다면, 지금 100세 이상 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설령 네가 90세, 100세까지 살 수 있다고 한들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겠느냐? 많지 않다. 설사 네가 20살 초반이고 90살까지 살 수 있어 70년을 더 살 수 있다고 해도 이는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던 시간보다 길지 않다. 하나님에게 6천 년은 눈 깜빡할 시간이고, 사람에게 60년, 80년, 100년이 하나님에게는 몇 초에 불과하다. 길어 봐야 몇 분 정도의 시간이니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간다. 생각해 보거라. 사람은 바른길을 가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서 틈만 나면 “인생은 고달프다. 눈 깜빡할 사이에 늙어 버리고, 눈 깜빡할 사이에 자손이 번성하고, 눈 깜빡할 사이에 삶의 끝자락에 도달해 있다.”라고 말한다. 거기에 진리까지 추구해야 한다면 어떻겠느냐? 시간은 더 부족하게 된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 공허한 세계에서 사는 사람도 허송세월하면서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고 생각하는데, 네가 진리를 추구한다면 어떻겠느냐? 하나님이 마련한 모든 환경, 사람, 일, 사물은 네가 한동안 체험하기에도 충분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러야 네가 그런 조그마한 인식과 깨달음, 체득을 얻을 수 있겠느냐? 쉽지 않다. 네게 정말 그런 인식과 체득이 생기게 되면 너는 알게 될 것이다. ‘아, 사람이 평생 진리를 추구해서 얻는 것이 많지 않구나!’ 현재 많은 사람이 간증문을 쓰고 있다. 내가 보니 20, 30년을 믿은 사람이 쓴 것도 모두 10년 전, 20년 전 실패하고 쓰러진 체험들이었다. 그는 최근 몇 년이나 현재의 생명 진입 체험을 쓰고 싶었지만 그런 체험이 없다. 그의 체험이 너무 적어서 안타까울 정도이다. 어떤 사람은 간증문을 쓸 때 예전에 실패하고 쓰러졌던 일을 돌아봐야 하는데, 기억력이 안 좋으면 다른 사람의 도움까지 받아 가며 회상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은 지 10년, 20년 심지어 30년이나 되는데 얻은 것이라고는 고작 그것뿐이니, 쓰는 것이 고역이다. 때로는 억지로 연결하여 짜깁기하는 경우까지 있으니, 사실 결코 생명 체험이라고 할 수 없으며, 생명과 무관한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사람은 이토록 불쌍해진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런 것이다. 나는 너희 중 누구에게도 그런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사역이 끝나고 나서 하나님께 참회하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전 자신을 알았습니다.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할지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런 날 말이다. 늦었다! 하나님은 네게 대꾸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더 이상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지, 네게 어떤 패괴 성품이 있는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어떤지, 사탄에 의해 얼마나 심각하게 패괴되었는지, 네가 어떤 사람인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때가 되면 너는 가슴이 사무치도록 후회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한번 예상해 보거라. 정말 그때가 되면 괴롭지 않겠느냐? (괴로울 것입니다.) 어째서 괴롭겠느냐? 그것은 네게 더는 기회가 없고, 네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으며, 하나님이 더 이상 너로 인해 마음 쓰지 않고, 네가 더 이상 하나님이 염려하는 사람도, 하나님의 피조물도 아니며, 너는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도 아니라는 뜻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언젠가 네가 정말 그런 처지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을 지금 상상하면 아연실색하지 않겠느냐? 성경에 쓰여 있듯, 그때가 되면 사람은 가슴을 치고 이를 갈며 죽도록 울 것이다. 죽도록 울어도 소용없다. 모든 것이 너무 늦어 버렸다! 하나님은 더 이상 너의 하나님이 아니며, 너는 더 이상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니다. 너와 하나님은 아무 관계도 아니며, 하나님은 너를 원하지 않는다. 네가 어떻게 되든 하나님과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네가 존재하지 않으니 하나님은 너를 염려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네 믿음의 길은 끝난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버림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면 너는 지금 이 순간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하나님이 너를 형벌하든, 심판하든, 훈계하고 책망하든, 심지어 저주하고, 꾸짖든 모두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이는 적어도 하나님이 너를 그의 피조물로 인정하고, 하나님이 네게 기대를 걸고, 적어도 하나님의 마음속에 네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를 꾸짖길 원하고, 저주하길 원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마음속으로 너를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런 염려는 사람의 목숨으로도 바꿀 수 없다. 너희는 어리석어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알았다면 너희는 진정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체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래도 너희가 정말 어리석지는 않길 바란다. 이런 일을 듣고 깨달았으면 허송세월하지 마라. 진리 추구는 인생의 큰일이다. 진리 추구보다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없고, 진리를 얻는 것보다 가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을 따라 지금까지 오는 것이 쉬웠느냐? 어서 진리 추구를 중요한 일로 삼거라! 말세의 이 사역은 사람에게 하는 하나님의 6천 년 경륜 중 가장 중요한 사역이다. 진리 추구는 하나님이 택한 사람에게 거는 최고의 기대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바른길을 걷기를 바란다. 이 바른길이 바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저버리지 말고, 하나님이 네게 실망하지 않게 하며,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이 너를 마음속으로 내쳐서 더 이상 너를 염려하지 않고 증오조차 하지 않게 만들지 마라. 그 지경까지 가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오늘은 어떤 주제를 교제했느냐? (‘왜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라는 주제입니다.) 왜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 이 주제는 다소 무거운 주제였다. 그렇지 않으냐? 어째서 무거웠느냐? 그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미래와 생명 그리고 다음 시대에 존재하는 형식에 있어서 무척 중요하다. 그러니 너희가 오늘 다룬 주제를 두 번씩 더 들어서 깊은 인상을 남기기를 바란다. 네가 예전에 진리를 추구했든, 네가 진리 추구를 원하든 상관없이 오늘 ‘왜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교제한 후로는 굳은 결의로 진리 추구를 선택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최선의 선택이다.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주 좋다. 오늘은 왜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해 교제했다. 다음은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를 주제로 교제하겠다. 이 주제를 너희에게 미리 알려 줬으니 스스로 묵상해 보고, 마음속으로 이 주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살펴보면서 예습해 보아라. 오늘 교제는 여기까지 하겠다.

2022년 9월 3일

성경은 개역한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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