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 제 1 부

지난 시간에는 주로 덕행에 관한 여러 가르침에 대해 교제했다. 전통문화가 제시하는 다방면의 덕행에 대해 우리는 조목조목 분석하고 해부하며 폭로하였다. 그리고 분석과 해부와 폭로를 통해 사람은 전통문화 중 긍정적인 사물로 여겼던 많은 덕행의 가르침을 분별하고 그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이 이러한 덕행의 가르침에 대해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면 마음속으로 혐오하고 버리게 되며, 현실 생활에서 그런 것들을 점점 내려놓게 된다. 또 전통문화를 인정하고 맹신하고 고수하는 태도를 내려놓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요구와 사람이 갖추어야 할 진리 원칙을 마음으로 받아들여 마음속 전통문화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 그러면 사람다운 삶을 살아 내면서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인류의 전통문화가 내세우는 덕행에 관한 각종 가르침을 해부하는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러한 덕행 이면의 그 본질이 과연 무엇인지, 사탄은 어떻게 덕행의 많은 가르침을 통해 인류를 패괴시키고 미혹하며 통제하는지를 분명하게 분별하고 인식하게 하여 무엇이 진리이고 긍정적인 사물인지 마음속으로 명확히 분별하게 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 그러한 덕행의 가르침 이면의 그 본질과 그것의 정체, 사탄의 간계를 꿰뚫고 나면 사람은 무엇이 진리인지 정확히 알게 된다. 전통문화와 그것이 사람에게 주입하는 덕행에 관한 가르침을 진리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진리가 아니며, 진리를 대신할 수도 없을뿐더러, 더욱이 진리와 하등의 관계도 없다. 전통문화는 어떤 측면에서 보든, 그것의 구체적인 가르침과 요구가 무엇이든 간에 인류에 대한 사탄의 교육, 주입, 미혹, 세뇌를 의미할 뿐이다. 그것은 사탄의 간계 그리고 사탄의 본성 본질을 의미할 뿐, 진리나 하나님의 요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네가 덕행 측면에서 아무리 열심히 실행하고 실천하고 파악한다 한들 그것이 곧 네가 진리를 실행하고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 네가 인성과 이성을 지닌 사람임을 의미하지도 않으며 네가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덕행에 관한 어떤 가르침이든, 어떤 요구이든, 어떤 부류의 사람을 향한 것이든, 또 사람의 어떤 모습에 관한 것이든, 그것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하나님이 사람에게 실행하라고 요구하는 진리나 지켜야 하는 원칙과 하등의 관계도 없다. 그동안 너희는 이 문제에 대해 묵상해 보았느냐? 이 점을 확실히 알았느냐? (네.)

전통문화의 갖가지 가르침에 대해 세부적으로 교제하고 구체적으로 해부하지 않으면 사람은 그러한 가르침이 모두 허구이자 기만이며 성립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그리하여 사람은 마음속으로 계속 전통문화의 많은 가르침을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지켜야 할 신조나 법칙의 일부로 간주한다. 또한 전통문화 중에서 사람이 보기에 좋은 행위와 덕행을 진리로 여겨 지키며 심지어 그것을 진리와 동일시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사람이 그것을 옳고 긍정적인 것으로 여기며, 심지어는 진리로 여겨 선전하고 내세움에 따라 사람을 미혹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교란하고 가로막는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가장 현실적인 문제이자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문제이다. 사람은 좋고 긍정적으로 보이는 덕행에 관한 가르침을 진리로 여기곤 하며, 심지어는 예배 장소에서도, 혹은 하나님 말씀을 교제할 때도 전통문화의 가르침이나 단어를 인용하여 교제하거나 이야기한다. 이는 정말 심각한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나 현상이 하나님 집에서 일어나서는 안 됨에도 불구하고 이런 현상이 자주 발생하고, 또 이런 문제도 자주 보인다. 이는 한 가지 문제점을 보여 준다. 즉, 전통문화와 덕행에 관한 가르침의 본질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 사람은 늘 전통문화 중 덕행의 가르침을 긍정적인 것으로 대함으로써 진리를 대신하고 대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자주 나타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전통문화 중 “선의로 남을 도우라.”, “인내는 고귀하고 화합은 귀하다.”,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욕을 해도 허물은 들추지 말라.”,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 “물 한 방울의 은혜라도 넘치는 샘물로 보답하라.”, 그리고 널리 알려진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등의 가르침은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 처신의 신조로 자리 잡았으며 사람이 고상한지를 가늠하는 준칙이자 기준이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여전히 전통문화의 가르침과 이론 등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일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이는 한 가지 심각한 문제를 입증한다. 즉, 전통문화가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입증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탄이 인류에게 주입한 그런 다방면의 내용들은 이미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 뿌리내려 인류의 모든 생활 범위와 생활 환경 속에서, 그리고 모든 인류 사회에서 주류를 이루며 우위를 점하고 있다. 그래서 전통문화가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원칙과 태도, 관점과 방식, 방법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치면서 통제하고 있다. 설사 사람이 하나님 말씀의 정복과 폭로, 심판, 형벌을 받아들였다 해도 전통문화의 그러한 것들은 마음속 깊은 곳과 정신세계에 여전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즉, 그러한 것들이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방향, 목표, 원칙, 태도, 관점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사탄에게 완전히 사로잡혔음을 의미하는 것 아니겠느냐? 이 사실을 말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바로 그런 사실을 의미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목표와 방식, 만사 만물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는 전부 사탄이 주입하고 내세우는 전통문화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러한 전통문화는 사람의 생명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도, 심지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는 올바른 관점과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나서도 전통문화의 수많은 사상이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과 정신세계에서 여전히 주도적이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전통문화의 방식과 관점 그리고 태도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사역을 바라보게 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을 평가하고 분석하며 연구하게 한다. 이것이 사실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정복되고, 하나님의 사역에 정복되며, 하나님의 행사, 본질, 하나님의 커다란 능력, 지혜에 정복되어도 전통문화는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여전히 중요한 자리를 점한다. 심지어 그 어떤 것도 그 자리를 대신하지 못한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정복된 상황에서도 그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전통문화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 이는 정말 무섭고 슬픈 일이다. 사람은 전통문화를 고수하면서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진리와 여러 관점을 받아들인다.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을 따르는 것 같아도 전통문화와 사탄이 가져다준 수많은 사상과 관점, 일을 바라보는 관점은 여전히 사람의 마음속에서 굳건하고도 대체할 수 없는 자리를 점하고 있다. 사람은 매일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며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지만,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기본적인 관점과 원칙, 방식은 여전히 전통문화에 근거한다. 그렇기에 일상생활에서 계속 전통문화에 조종되고 지배되고 통제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처럼 떠나지 않아 사람이 벗어날 수 없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사람은 전통문화와 사탄이 인류에게 주입한 각종 사상과 관점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 파내고 해부하고 폭로해서 인식하고 간파하고 내려놓고 저버린 후 하나님이 말씀하고 가르치고 알려 준 방식대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여전히 어떤 상태로 살아가고 있더냐? 마음속 깊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며,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거스르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어떤 대항력도 없이 사탄이 가르쳐 준 방식대로 사람들과 지내고 처신한다. 사람에게는 진리를 갈망하는 마음이 있으며, 간절히 하나님을 바라는 마음을 갖고자 한다. 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고자 하며, 진리 원칙을 위배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종종 자기 생각과 다르게 일이 흘러가며, 몇 번씩 노력해도 자기가 바란 것과 다른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사람이 아무리 발버둥 치고 노력해도,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려는 다짐과 바람이 아무리 커도, 결국 실생활 속에서 실행할 수 있는 진리와 지킬 수 있는 진리 준칙이 거의 없다. 이는 사람이 마음속 깊이 가장 고민하는 일이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이겠느냐? 한 가지는 전통문화가 사람에게 가르쳐 준 각종 사상과 관점이 여전히 사람의 마음을 점하고 있으며, 사람의 언행과 사상,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방식, 방법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통문화를 인식하고 해부하고 폭로하며, 또 분별하고 간파하여 최종적으로 영원히 저버리게 되려면 과정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일이다. 전통문화가 이미 사람의 마음 깊은 곳, 심지어 사람의 전부를 점하고 있어 사람은 오늘날까지 살아가고 처신함에 있어 자기도 모르게 진리에 어긋나고 전통문화의 통제와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진리를 철저히 실행하고 얻으려면 먼저 전통문화의 여러 사상과 관점을 깊고 구체적으로 파헤치고 해부하며 인식해야 한다. 물론 전통문화의 이런 것들이 각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사람마다 고수하는 전통문화의 가르침은 다르다. 즉, 사람마다 중시하는 주안점이 다르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은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라는 말을 숭상하며 의리를 매우 중시한다. 그에게 의리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기에 목숨과도 같이 여기며 오직 의리를 위해 살아간다. 은혜를 매우 중시하는 사람도 있다. 남에게 은혜를 입으면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마음에 새기고 보은을 생의 가장 중요한 일, 일생의 사명으로 여기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외모적으로 남에게 좋은 인상을 주어서 존귀하고 고상하며 체면이 서는 사람이 되는 것을 중시한다. 사람들 가운데서 남들의 중시와 존중을 받으며 사람으로부터 좋은 평가와 평판을 받으려 한다. 사람들이 칭찬하고 누구든 그를 보고 엄지를 치켜세우길 바라는 것이다. 사람마다 덕행, 전통문화의 다방면에 관한 가르침을 추구하는 주안점이 다르다. 명예와 이익을 중시하는 사람, 지조를 중시하는 사람, 정절을 중시하는 사람, 보은을 중시하는 사람, 의리를 중시하는 사람, 어진 행동을 중시하는 사람, 예의를 중시하여 누구에게나 예우하고 매너를 지키는 사람 등등, 사람들이 중시하는 것은 저마다 다르다. 그러므로 네게 미치는 전통문화의 영향과 통제를 인식하고 네 마음속 깊은 곳에 어느 정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자신이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어떤 방면을 중시하는지, 좋아하는 글자가 ‘예(禮)’인지 ‘인(仁)’인지, ‘신(信)’인지 ‘인(忍)’인지 해부해야 한다. 어떤 방면에서 전통문화가 네게 미치는 영향이 가장 큰지, 네가 전통문화를 추구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다양한 방면으로 자신의 실제 모습을 통해 해부해야 하는 것이다. 네가 추구하는 전통문화의 정수가 바로 네가 어떤 사람인지를 나타내고, 네가 어떤 사람인지가 어떤 것이 너의 생명을 차지했는지를 알려 준다. 네 생명에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네가 인식하고 해부하며 간파하고 등지며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것들을 파헤쳐서 간파하면 사람과 전통문화 사이에 단절이 생기고 전통문화를 진정으로 버려 결국 전통문화와 철저히 결별함으로써 마음속 깊이 확실하게 제거할 수 있게 된다. 그러고 나서 전통문화를 철저히 등지고 도려내어 그것이 네 생명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하고, 대신 하나님 말씀과 진리가 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점점 주도권을 가지고 생명이 되게 하고, 하나님 말씀과 진리가 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하면, 또한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이 네 마음속의 보좌에 올라 왕권을 잡고 너의 전인을 점유하게 하면 네 삶의 고뇌가 적어지지 않겠느냐? 점점 줄어들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것이 수월해지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더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지금 내가 보니 너희는 매일 본분을 이행하느라 분주하다. 하나님 말씀을 읽어야 할 뿐만 아니라 진리도 교제해야 한다. 보고 듣고 기록하며 쓰느라 시간과 체력 소모가 많고 치른 대가와 받은 고통도 적지 않다. 어쩌면 깨달은 이치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본분을 이행하면서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고 원칙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어떤 방면의 진리이든 수없이 듣고 교제했지만, 막상 일이 닥쳤을 때는 하나님 말씀을 체험할 줄도, 실행할 줄도, 적용할 줄도 모르고 진리를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 몰라 구하고 교류해야 한다. 어째서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것이겠느냐? 하나님 말씀에서 진리를 깨닫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왜 그렇게 힘들겠느냐? 그 중요한 이유로 사람에게 미치는 전통문화의 영향이 너무 크다는 사실을 배제할 수 없다. 일찍부터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그것은 사람의 생각과 정신을 통제하고 있다. 이러한 전통문화가 있어 사람의 패괴 성품이 물 만난 고기처럼 여지없이 발휘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전통문화와 사람의 패괴 성품은 긴밀히 연계되어 서로 보완하면서 자연스럽게 상호작용한다. 패괴 성품이 전통문화와 만나면 물 만난 고기처럼 기세를 떨치는데, 그것은 패괴 성품이 좋아하고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전통문화라는 것을 잘 보여 준다. 그래서 수천 년간 전통문화의 영향 속에서 인류는 사탄에 의해 점점 깊이 패괴되었고, 사람의 패괴 성품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팽창한 것이다. 전통문화의 은폐와 포장하에 사람은 패괴 성품이 갈수록 심각해졌을 뿐 아니라 점점 위장에 능해졌다. 사람의 교만함, 간사함, 사악함, 강퍅함, 진리를 싫어함 등의 성품은 점점 깊이 은폐되고 감춰졌다. 심지어 그것이 드러나는 방식도 점점 영악해져 사람들이 간파하기 어려워졌다. 그러니 이런 전통문화의 영향과 교육, 미혹과 통제 속에서 인간 세상이 점점 어떤 세상으로 변했겠느냐? 귀신과 마귀의 세상으로 변하였다. 그리하여 사람은 인간다운 모습과 인성을 잃어버린 채 살게 되었다. 반대로 전통문화를 고수한 인류, 진작부터 전통문화가 영향을 미치면서 스며들어 그것에 점유당한 인류는 갈수록 자신이 위대하고 고상하며 비범하다고 여기고 기고만장해한다. 아무도 자신을 하찮고 보잘것없는 한낱 작디작은 피조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을 자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모두가 유명인, 위인, 성인(聖人)이 되려 한다. 전통문화의 영향으로 인해 사람은 자기 자신은 물론 세상과 인류를 뛰어넘고자 한다. 너는 이방인이 부른 노래 한 구절을 들어봤을 것이다. “더 높이 날고 싶어요. 더 높이”, 그리고 “난 한 마리 작은 새. 훨훨 날고 싶지만, 아무리 날아도 높이 날 수 없죠.”라는 구절도 있다. 이는 이성적이지 못하고 인간성과 지성을 상실한 말들이 아니더냐? 이 역시 날뛰는 사탄의 포효가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사탄의 광적인 포효 소리인 것이다. 그러니 어떤 방면이든 전통문화의 독성이 일찍부터 사람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게 되어 하루아침에 없앨 수 없다. 나쁜 습관이나 버릇을 고치는 것처럼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사람의 사상과 관점을, 사람의 패괴 성품을 모두 파헤쳐야 한다. 진리에 따라 전통문화의 독성의 뿌리를 생명으로부터 철저히 제거해야 한다. 그런 다음 네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과 요구에 따라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으로써 하나님 말씀의 진리가 너의 생명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너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정상 궤도에 들어설 수 있다.

전통문화의 이러한 면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앞서 우리는 많이 해부하고 폭로하며 교제했다. 얼마나 많은 내용을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교제했는지와는 상관없이 결국 목적은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나 생명 진입 중 존재하는 여러 난관과 문제를 해결하여 사람의 진리 추구에 장애물과 걸림돌이 되는 모든 것을 제거하는 데 있다. 그중 전통문화의 여러 가르침과 사상 및 관점이 가장 핵심적인 장애물이자 걸림돌이며 난관이다. 전통문화의 이러한 면에 관한 교제는 오늘까지 기본상 나누었다. 그렇다면 진리 추구와 관련된 주제는 모두 교제한 것이냐? (아닙니다.) 전통문화에 대해 교제하고 해부하는 것이 진리 추구와 관련이 있느냐? (관련이 있습니다.) 진리 추구와 관련하여 전통문화는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서 만나는 가장 큰 난관이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가로막는 가장 큰 난관인 전통문화에 대해 교제했으니, 오늘은 “왜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교제하겠다. 왜 진리를 추구해야 하느냐? 이 문제에 대해 예전에 교제해 보았느냐? 왜 이 문제에 대해 교제하려 하겠느냐? 이것이 중요한 문제이냐? (중요합니다.) 왜 중요하겠느냐? 너희의 생각을 말해 보거라. (제가 이해하기로 진리 추구는 사람의 구원과 직결됩니다. 저희 모두의 패괴 성품은 무척 심각합니다. 어려서부터 전통문화의 교육을 받은 저희는 심각하게 중독되어 있습니다. 만약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사탄으로부터 비롯되는 부정적인 것들을 분별하지도, 진리를 실행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어떤 행동이 긍정적이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인지 알지 못하며, 자기도 모르게 패괴 성품에 따라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으면 결국 여전히 살아 있는 사탄과 다름없으니 하나님의 구원 대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무척 중요합니다. 또 진리를 추구해야만 사람의 패괴 성품이 정결케 되고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잘못된 관점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얻어야만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있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게 패괴 성품에 따라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두 가지를 말했구나. 내가 물은 질문이 무엇이었느냐? (왜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입니다.) 이 질문이 단순한 문제이더냐? 언뜻 왜냐하면, 그러므로의 단순한 문제처럼 들린다. 그렇다면 너희는 모두 진리 추구가 한편으로는 구원과 관련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방해하고 교란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과 관련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그렇게 말하니 이 문제가 무척 단순해 보이는구나. 그렇게 단순하겠느냐? 너희의 생각을 말해 보거라. (저는 “왜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이론적으로 대답하는 것은 단순하지만 진정으로 실행하고 실제에 진입하는 것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몇 가지 문제가 들어 있느냐? 진리 추구의 의미는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제외하고 또 무엇이 있느냐? (진리 추구의 중요성입니다.) 그렇다. 진리 추구의 중요성을 포함하여 몇 가지 문제가 들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왜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가 단순한 질문이더냐?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럼 그런 몇 가지 문제를 가지고 다시 묵상해 보거라. 왜 진리를 추구해야 하느냐? 먼저 진리 추구란 무엇인가를 되돌아보자.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겠느냐?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것입니다.) 맞느냐? ‘모두’라는 단어가 빠졌다. 다시 한번 읽어 보거라.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것이다.”입니다.) “왜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 이 문제는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즉, 어떻게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느냐인 것이다. 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해야 하는지, 왜 그렇게 하는 것을 추구해야 하는지, 이것이 문제의 근원이 아니냐? 이것이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이 문제의 기본적인 방향은 명확해졌다. 그럼 이제 다시 원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왜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 이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여기에는 진리 추구의 의미와 가치가 포함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인간의 본질과 본능을 토대로 볼 때 인간은 진리가 생명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점 또한 포함된다. 물론 이 문제는 인류의 미래와 생존과도 관련되는 것이다. 진리 추구는 단순하게 말하자면 사람의 구원, 사람의 패괴 성품의 변화는 물론 사람의 일상생활 중 여러 형태의 살아 냄, 드러냄, 언행과도 관련된다. 만약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확률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해 저항하고 배반하며 저버릴 확률이 100%이다.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에 대해 저항하고 배반할 수 있으며 교회 사역과 하나님 집의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이는 사람의 일상생활에서 찾아볼 수 있고 이해할 수도 있는 가장 단순하면서 기본적인 이유 중 일부이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교제할 ‘왜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관해서는 핵심 부분 몇 가지만 이야기하겠다. 가장 기본적인 몇 가지 방면의 내용은 앞서 교제한 바 있어 사람이 이치를 깨달았고 인식할 수도 있는 것이니 오늘은 기본적이고 단순한 문제가 아닌 주된 몇 가지 방면에 대해서만 교제해도 충분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진리 추구에 관한 화제를 교제하려 하겠느냐? 물론 여기에는 사람은 간파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며, 이해하지 못하지만 사람이 이해하고 깨달아야 하는 중요한 문제들이 있다.

왜 진리를 추구해야 하느냐? 우리는 사람이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는 기본적인 방면이나,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이치에서부터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방면에서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의 뜻에서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즉, 근본에서부터 이야기하는 것이다. 근본에서부터 이야기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느냐?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것에서부터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인간이 생겨났을 때부터, 하나님의 숨결을 받은 생명체인 인간이 피조되었을 때부터 하나님은 인류 가운데 한 무리의 사람들을 얻고자 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깨달아 이해하고 준수하며 하나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이 창조한 동식물과 숲, 바다와 강, 호수, 산과 시내와 평원 등의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 계획을 세우고 나서 하나님은 그의 계획에 따라 인간에게 희망을 걸었다. 언젠가는 인간이 하나님이 정한 방식과 법칙, 규칙에 따라 이 인류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만물을, 그리고 만물 속에 살아가는 수많은 생물을 체계적으로 다스리기를 바랐던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과 기대가 생겨났지만 하나님의 최종 목표가 실현되려면 십 년, 이십 년도, 백 년, 이백 년도, 그렇다고 천 년, 이천 년도 아닌 육천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걸려야 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다양한 시기와 시대, 기원 그리고 하나님의 사역 단계를 거치며 영겁의 세월과 천지가 개벽하는 변화도 겪어야 했다. 인류는 최초의 소수의 인류일 때부터 갖은 간난고초를 겪고, 세상의 상전벽해를 거치면서 인구가 점점 증가했고, 경험이 쌓였으며, 농업, 경제, 생존 방식, 생활 방식도 점차 바뀌고 변하면서 다양한 방식이 탄생했다. 일정한 시기와 시대가 되어야만 이 인류는 하나님이 심판하고 형벌하며 정복할 수준에, 그리고 하나님이 진리와 그의 말씀과 뜻을 선포할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 이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인류와 세상 만물은 물론 밤하늘의 우주 역시 상전벽해를 겪었다. 이 일련의 변화는 모두 하나님의 경영에 따라 점진적으로 나타났다. 인류가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정복과 형벌, 심판을 받고 그의 말씀을 공급받는 수준에 도달하려면 기나긴 시간이 걸려야 했다. 허나 괜찮다. 하나님은 기다릴 수 있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자 바람이기 때문이었다. 이 계획과 하나님의 바람을 위해 하나님은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실로 오랜 세월을 기다렸다.

하나님은 초기의 무지와 허망 그리고 막막함의 단계를 경험한 인류를 율법시대로 인도하였다. 비록 하나님의 경륜 중 하나의 시대인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면서 인간은 더 이상 양 떼 같은 방만한 삶을 살지 않고 율법의 인도와 가르침, 규정을 따르는 생활 환경으로 진입했지만, 인류는 율법이 알려 주고 설명하며 가르치는 단순한 내용만 알 뿐이었다. 예컨대, 무엇이 절도, 간음, 살인이고, 살인의 책임은 무엇인지, 이웃과 어떻게 지내야 하며 어떤 일을 했을 때 어떤 책임이 따르는지 등 생활하며 이미 알고 있던 것들 말이다. 인류는 아무것도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최초의 상태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알려 준, 사람으로서 숙지해야 할 간단한 율법들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이 반포한 율법 아래에서 살게 된 사람은 규율과 율법을 지키고 따르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사람의 생각과 내면세계에 단속이자 행동 준칙으로서의 율법이 생기게 되었다. 인류가 최초로 사람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규율과 율법을 지키는 것을 알게 된 인류는 그것을 어떻게, 얼마나 엄수하는지를 떠나서 결과적으로 율법 이전의 인류보다는 인간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행위 면에서나 사람의 생활 면에서나 사람의 살아 냄과 일 처리가 어느 정도 규범화되고, 일정한 단속을 받게 되어 사람은 더 이상 그렇게 막막하지도 무지하지도 않았고, 목표 없는 삶을 살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이 인류에게 알려 준 다방면의 가르침이 사람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 내려 어느 정도 자리를 점하게 됨에 따라 인류는 더 이상 의지할 곳 없이, 목표와 방향, 단속도 없이 살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런 인류는 하나님이 계획하고 바라던 인류, 또한 만물의 주인으로서의 인류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하나님은 여전히 기다리고 인내해야 했다. 율법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배할 줄 알았지만 형식적으로만 예배할 뿐,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하나님의 지위와 이미지는 하나님의 진정한 신분과 본질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그러니 이런 인류는 여전히 하나님이 원하는 피조물로서의 인류도,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인류도 아니었다. 이러한 인류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본질과 신분, 지위는 인류의 관리자에 머물렀고, 인류는 이 관리자의 복종자 혹은 수혜자일 뿐이었다. 그러니 하나님은 그렇게 율법 아래 살면서 오로지 율법만 아는 인류를 앞으로 인도해야 했다. 이런 인류는 율법 외에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들은 만물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하나님은 누구인지, 어떤 삶이 올바른 삶인지, 어떻게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처신하며 살아야 하는지, 어떤 삶이 더 의미 있는 삶인지, 어떤 것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지 등은 알지 못했다. 율법 아래에서 살면서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들은 율법 말고는 하나님이 요구하는 진리,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한 것은 일절 알지 못했다. 사실이 이러하니 하나님은 율법 아래 살아가는 인류에 대해 계속 인내해야만 했다. 비록 이러한 인류가 율법 이전의 인류에 비해 크게 발전하여 적어도 범죄가 무엇인지 알고, 율법을 준수하며 그에 따라 율법의 틀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알았지만, 하나님의 요구에는 훨씬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절박한 마음으로 기대하고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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