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추구란 무엇인가(8) 제 2 부

오늘은 이어서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라는 덕행의 논조에 관해 교제하고 해부하겠다. 이는 사탄이 사람에게 주입한, 남과 함께 지내는 방식 중 하나로서, 남과 함께할 때 너무 각박하게 굴지 말고 여지를 주며 남의 상처를 들추지 말고 체면을 세워 주라고, 기분을 망치지 말고 관용을 베풀라고 말하고 있다. 이 덕행의 논조가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사람들과 함께할 때의 처세 철학이다. 처세 철학 중에 “문제가 보여도 말하지 않아야 좋은 친구다.”라는 말이 있다. 좋은 친구라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상대의 문제점을 간파했어도 말해서는 안 되며,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들추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라는 것이다. 서로 기만하고 숨기고 음모를 꾸미며, 마음속으로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솔직히 말하지 않고, 교활한 수법으로 그 관계를 지키는 것이다. 왜 그런 관계를 지키려 하겠느냐? 이 사회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적을 만들어 자신이 수시로 위험한 상황에 처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상대의 단점을 들추거나 상대에게 상처를 주면 상대가 너의 원수가 되어 너에게 해악을 끼칠 것을 알고, 너 스스로도 그런 상황에 처하는 것을 원치 않기에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라는 처세 철학을 취하는 것이다. 이 점으로부터 봤을 때 이런 관계의 두 사람을 진정한 친구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진정한 친구라고 할 수 없다. 마음을 나눈 사이는 더더욱 아니다. 그럼 이들은 과연 어떤 관계겠느냐? 기본적인 인간관계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인간관계에서는 서로 마음을 나눌 수 없고, 깊이 사귈 수 없으며,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도 없다. 또 자신의 마음에 있는 말, 자신이 본 상대의 문제점, 상대에게 도움이 되는 말을 할 수도 없다. 상대의 비위를 맞추려고 그저 듣기 좋은 말만 찾아서 한다. 다른 사람들의 적의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감히 참말을 하지 못하고 원칙도 견지하지 못한다. 아무도 자신을 위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평안하게 살 수 있지 않겠느냐?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라는 말을 제창하는 이유는 이런 것 때문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남에 대한 경계심이 들어 있는, 완곡하고 간사한 생존 방법으로, 자기 보호에 그 목적이 있다. 이런 식으로 살아가면 누구와도 마음을 나눌 수 없을 것이며, 무엇이든 말할 수 있는 친한 친구가 하나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저 피차간에 서로 경계하고 이용하며 수작을 부리고 원하는 것을 취할 뿐이다. 그렇지 않으냐?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라는 말의 근본적인 목적은 남의 원망을 사거나 상대와 적이 되지 않고,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음으로써 스스로를 지키려는 것이다. 이는 스스로 상처받지 않기 위한 수법이자 방식이다. 이 몇 가지 측면의 본질을 봤을 때, 사람의 덕행 중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라는 요구를 고상하고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 이것이 사람을 어떻게 가르치느냐? 누구에게도 원한을 사거나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마지막에 상처 입는 사람은 너 자신이 된다고 말이다. 또한,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네가 친하게 지내는 친구 누구라도 상처를 주는 순간 그 관계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는데, 그는 친하고 가까운 친구에서 네게 낯선 사람, 적으로 변할 것이다. 사람을 이렇게 가르쳐서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설령 네가 이렇게 행동해서 적을 만들지 않고 몇 명의 원수를 줄여 사람들에게 탄복과 동조를 샀다고 할지라도, 영원히 너와 친구가 될 수 있겠느냐? 이것이 완벽하게 덕행의 기준에 도달한 것이겠느냐? 이는 기껏해야 처세 철학에 불과하다. 이런 논조와 방식을 지키는 것을 좋은 덕행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이는 자식이 밖에서 맞고 왔을 때 부모가 “이 못난 녀석, 왜 똑같이 때려 주지 못한 거냐? 그놈이 너한테 주먹질을 하면 너는 발길질을 했어야지!”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 이것이 올바른 방식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을 뭐라고 하겠느냐? 이는 부추기는 짓이다. 부추기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손해 보지 않고 이익을 점하는 데 있다. 상대가 네게 주먹질을 했다고 해도 기껏해야 며칠 아플 뿐이다. 하지만 네가 상대에게 발길질을 한다면 더 심각한 결과가 초래되지 않겠느냐? 그 결과는 누가 야기한 것이겠느냐? (부모의 부추김이 야기한 것입니다.) 그러니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라는 논조와 이 일의 성질이 비슷하지 않으냐?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라는 논조가 올바른 처세 방식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올바르지 않다. 그러니 이런 각도에서 볼 때, 그것은 사람에게 일종의 부추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것이 사람에게 남들과 함께할 때 지혜를 갖고 사람을 분별하라고, 올바른 방식과 방법으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지혜로운 방식으로 남과 함께하라고 가르치겠느냐? 좋은 사람, 인성을 갖춘 사람을 만나면 진심으로 대하고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주되, 도와줄 수 없으면 포용을 보이며 올바로 대하라고, 상대의 결점을 참아 주고 너에 대한 상대의 오해와 판단을 참아 주며 상대의 장점과 뛰어난 점을 받아들이라고 가르치겠느냐? 그것이 이렇게 사람을 가르치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그 가르침으로 사람이 마지막에 얻게 되는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사람을 정직하게 바꿔 놓는 것이겠느냐, 아니면 간사하게 만드는 것이겠느냐? 사람이 간사하게 변한다. 마음과 마음 사이에 벽이 높아지고, 사람과 사람 간에 거리가 멀어지며, 관계도 복잡해진다. 이는 사람의 인간관계가 복잡해지는 것과 같다. 사람들 사이에 마음과 마음의 소통이 사라지고, 상호 간에 경계심이 생겨난다. 이러면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가 정상적이겠느냐? 사회 분위기가 좋을 리 있겠느냐?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라는 말은 분명히 틀린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가르치면 정상 인성을 살아 내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광명정대하고 마음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 될 수 없으며, 절대 긍정적인 성과를 얻을 수 없다.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라는 말에는 때리고 들추는 두 가지 동작이 나온다. 하나는 때리는 것이고, 하나는 들추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정상적으로 지내려면 남을 때려서 되겠느냐? (안 됩니다.) 때리는 것이 사람들과 함께할 때 보여야 할 정상 인성의 태도나 행위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을 때리는 것은 분명히 옳지 않은 행위이다. 얼굴을 때리든 때리지 않든 전부 옳지 않다. 그러므로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라’는 말은 아예 옳지 않다. 이 말의 주장대로라면 얼굴을 때리는 것만 안 되고 다른 곳을 때리는 것은 괜찮아 보인다. 얼굴을 때리면 맞은 사람의 얼굴이 빨개지거나 부어오르고 상처가 나서 남들 보기에 좋지 않고 품격이 떨어지기 때문이며, 남을 대하는 네 방식이 너무 거칠고 천박하고 고상하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 다른 곳을 때리면 고상하겠느냐? 그 역시 고상하지 않다. 사실, 이 말의 중점은 어디를 때리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때리다’는 단어에 있다. 사람들과 함께 지낼 때 때리는 방식으로 문제를 대하고 처리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옳지 않다. 그것은 인성의 양심과 이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혈기에서 비롯된 것이며, 당연히 진리를 실행하는 것도, 진리 원칙을 지키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은 대놓고 남의 체면을 깎아내리지는 않으며 말할 때도 좀 요령을 부린다. 얼굴을 때리지는 않지만 뒤에서 수작을 부리는데,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악수를 하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발길질을 하고, 앞에서는 좋은 말을 하지만 뒤에서는 음모를 꾸미며 약점을 잡고 기회를 노려 복수하거나 죄를 뒤집어씌워 모함하거나 헛소문을 퍼뜨려 중상모략하거나 분쟁을 만들고 남을 이용해 해치는 것이다. 이 음험한 수작들이 얼굴을 때리는 행동보다 과연 얼마나 낫겠느냐? 얼굴을 때리는 성질보다 더 심각하지 않겠느냐? 더 음험하고 악독하고 비인간적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라’는 말은 처음부터 아무 의미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 관점은 아예 그릇되었으며 거짓되고 위선적인 성질을 지닌, 외식하는 수단이므로 더더욱 증오스럽고 역겹고 혐오스럽다. 이제 우리는 사람을 때리는 것이 혈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네가 뭐라고 사람을 때린단 말이냐? 법적으로 권한을 부여받았느냐, 아니면 하늘이 네게 그런 권리를 주었더냐? 그런 것도 아니면서 왜 사람을 때리려 하느냐? 만약 사람들과 정상적으로 지낼 수 있다면, 올바른 방식으로 함께하고 사귀면 된다. 하지만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없다면, 혈기를 내세우고 무력을 쓸 게 아니라 헤어지면 그만이다. 이는 인성의 양심과 이성의 범위 안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혈기를 내세우면 얼굴이 아니라 다른 곳을 때린다고 할지라도 문제가 심각해진다. 이는 정상적으로 지내는 것이 아니다. 이는 원수들이 함께 지내는 방식이지 사람들 사이에서 정상적으로 지내는 방식이 아니며, 인성과 이성의 범위를 뛰어넘은 것이다. 그럼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에서 ‘들추다’라는 말은 좋겠느냐? 이 ‘들추다’는 단어에 하나님 말씀에서 사람을 드러내고 폭로하는 그런 의미가 들어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인류의 언어를 통해 이 ‘들추다’는 단어에 그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악의적으로 남을 폭로하는 성질을 갖고 있는데, 사람의 문제점이나 결점, 또는 아무도 모르는 일, 행위, 그리고 배후의 음모나 생각, 관점을 폭로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에서 ‘들추다’는 단어의 뜻이다. 만약 두 사람이 함께 어울리며 서로 마음이 통하고 마음의 벽이 없다면, 또 상대가 자신으로부터 이로움과 도움을 얻었으면 하며, 앉아서 문제를 솔직히 털어놓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면 이는 정당한 일이지 단점을 들추는 것이 아니다. 만약 네가 상대의 문제를 발견했는데 상대가 네 지적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아예 입을 닫고 분쟁이나 충돌을 피하면 된다. 네가 그를 도와주고 싶다면, 그의 의견을 구하며 먼저 “저는 당신의 문제점을 발견했고, 의견을 말해 주고 싶은데 당신이 받아들일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당신이 받아들이겠다면 말하겠습니다. 하지만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지금은 말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물어봐도 된다. 그가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적절한 말을 하죠. 저는 다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라고 한다면 이는 인정받은 것과 같다. 그때 하나씩 문제점을 교제해 주면 된다. 상대가 전부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도움을 얻는다면 너희는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솔직하게 서로를 대하는 태도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올바르게 함께하는 방식이지 약점을 들추는 것이 아니다. 그럼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에서 ‘약점을 들추지 말라’는 말은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사람의 결점이나 상대가 가장 피하고 싶어 하는 문제를 말하지 말고, 문제의 본질을 폭로하거나 그렇게 노골적으로 들추지도 말며, 표면적인 부분, 모두가 자주 이야기하는 부분, 상대도 인식하고 있는 부분만 말하라는 것이다. 그가 예전에 저지른 잘못이나 민감한 부분은 들추지 말고 말이다. 이렇게 행동한다면 상대에게 어떤 유익이 되겠느냐? 그에게 원한은 사지 않고 그의 적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네 행동은 그에게 어떤 도움도, 유익도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에서 ‘약점을 들추지 말라’는 것은 솔직하게 대하는 게 아니라 교활하고 간사하며 수작을 부리는 것으로, 검은 속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사람들과 올바르게 지내는 방법이 아니다. 이방인은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는 말을 도덕적으로 고상한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로 여기는데, 단언컨대 이는 남과 함께하는 간사한 방법이자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법이지, 절대 정당한 방식이 아니다. 약점을 들추지 않는 것 자체가 솔직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약점을 들추는 데는 다른 속내가 있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서로 약점을 들추는 모습을 볼 수 있느냐? 예를 들어, 사회에서 두 후보가 어떤 자리를 두고 경합할 때, 서로의 약점을 들춘다. 한 사람이 “당신은 예전에 어떤 나쁜 일을 저지르고 얼마를 유용했습니다.”라고 하면 다른 한 사람은 “당신은 지난날, 몇 사람을 해쳤습니다.”라고 한다. 이런 일들을 서로 들춰내는데, 이것이 약점을 들추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정치 무대에서 서로 약점을 들추는 자는 정적이고, 서민들 가운데서 서로 약점을 들추는 자는 원수이다. 평범한 서민들은 이것을 가리켜 ‘마음이 맞지 않는다’고 한다. 붙어 있기만 하면 말싸움을 시작하고 서로 약점을 들추고 판단하고 정죄하며, 심지어는 없는 얘기를 지어내고 악독한 말로 상대를 중상모략하고 의심스러운 일이 있으면 함부로 폭로하고 정죄한다. 그럼 서로 많은 것을 들춰내지만 약점은 들추지 않는다면, 이를 고상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없다. 그런데 사람은 이것을 고상한 덕행으로 여겨 추앙하니, 역겹기 그지없다!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라는 말은 긍정적인 인도 역할을 아예 하지 못한다. 그것은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 ‘원한을 덕으로 갚으라’, ‘현명하고 어질고 정숙하고 유덕하라’와 비교할 때, 이 좋은 덕행들만큼 사람들에게 동조를 얻지 못한다.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라는 덕행의 논조는 부정적인 부추김 역할을 할 뿐, 긍정적인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한다. 세상에 태어나 사람으로 처신하는 올바른 방식이나 원칙이 무엇인지 알려 주지 못하고, 이러한 정보를 전혀 갖고 있지도 않다. 그것은 그저 사람에게 남을 때릴 때 얼굴은 때리지 말라고 알려 줄 뿐이다. 마치 얼굴만 때리지 않으면 다른 곳은 어디든 함부로 때리고 상처 입히고 장애를 만들고 반죽음 상태로 만들어도 괜찮은 것처럼, 숨만 붙어 있는 한 다 괜찮은 것처럼 말이다. 사람이 서로 싸울 때, 원수나 정적이 만나서 서로 함부로 들춰도 약점만 들추지 않으면 된다는 것은 어떤 풍습이더냐? 너희는 여태까지 이 말에 무척 동조하지 않았느냐? (그랬습니다.) 예를 들어, 두 사람 사이에 분쟁이 발생해서 싸우게 되었다고 해 보자. 한 사람이 “당신 아이, 당신 남편 자식이 아닌 거 알고 있다고.”라고 하고, 상대는 “당신네 그 사업, 어떤 수법으로 돈을 벌고 있는지 다 알아.”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그 둘이 싸우는 내용을 비판하면서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상대의 약점,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일까지 들추면서 난리를 치는 건 예의에 어긋난 일입니다. 인격이 너무 비천한 거죠. 무슨 일이 있어도 체면은 지켜 줘야 합니다. 이제 상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라고 말한다면, 이 비판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긍정적인 역할을 조금이라도 하겠느냐? 진리에 조금이라도 부합하는 내용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그는 어떤 사상 관점을 갖고 이런 비판을 했겠느냐? 정의감 있는 사람이 진리를 깨달아 그런 비판이 나온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이 비판은 무엇을 기초로 나왔겠느냐? 전부 전통문화 중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라는 사상에 영향을 받아 나온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비판은 전부 전통문화의 이런 사상 관점에 기반하여 나온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이의 시선으로 우리가 방금 이야기한 두 사람의 싸움을 본다면, 이 일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것이겠느냐? 이는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너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지켜야 할 원칙은 무엇이냐?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것이다. 형제자매 사이에 분쟁이 생기면 반드시 포용하고 인내하며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먼저 스스로를 반성하고 인식한 후,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로 문제를 해결하여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고 육을 저버리며 진리 원칙대로 사람을 대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너희는 이 문제를 밝히 알아야 한다.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라는 말은 인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처세 철학의 마지노선일 뿐, 사람의 패괴 행위를 결코 제약하지 못한다. 이 말에는 어떤 의미도 없으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이 규례를 지킬 필요는 없다. 사람들과 함께 지낼 때는 하나님 말씀과 진리 원칙을 근거로 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 할 부분이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전통문화의 관점과 사탄의 철학도 믿는다면,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라는 전통문화의 사상으로 다른 이를 판단하고 제약하거나 스스로에게 요구한다면, 이는 황당하고 그릇된 행동이며, 그런 자는 불신파이다.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라는 말은 친구들과 함께할 때의 사탄 철학으로, 인간관계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말은 가장 깊이가 얕은 규례이자 처세 철학으로, 진리 원칙의 기준에 한참 못 미친다. 사람이 이렇게 얕은 규례를 지킨다면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할 것이고, 어떤 의미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형제자매 간에 분쟁이 발생했을 때는 어떤 원칙으로 그 일을 대하고 처리해야겠느냐? 전통문화의 규례를 지켜야겠느냐, 아니면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를 원칙으로 해야겠느냐? 너희의 관점을 말해 보아라. (먼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그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한 것과 혈기로 서로를 공격하는 것의 성질을 해부하고 인식해야 합니다. 그것은 패괴 성품을 드러낸 것에 속합니다. 그다음 그들에게 관련된 실행의 길을 교제해 주는 한편, 사랑으로 대하고 양심과 이성을 갖추며 남에게 도움이 되는 언행을 보여야지,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결점이나 잘못이 있다면 올바르게 대하고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주되, 도와줄 수 없어도 공격하거나 판단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사람을 도와주는 하나의 형식이다. 그럼 어떤 말을 해야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 그들의 분쟁을 해결할 수 있겠느냐? (그들이 교회에서 다투는 것 자체가 성도의 품위와 하나님의 요구에 맞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상대의 문제점을 발견했을 때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주되, 도와줄 수 없다면 다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다가 교회 생활에 교란을 줄 수 있어요.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교회에서 행정 법령에 따라 처분을 내릴 겁니다.”라고 교제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교회 생활을 교란하는 사람에게 원칙대로 처분을 내리는 법을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생겼을 때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어떤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처리해야 할지에 관해서는 여전히 잘 모르는 것 같다. 여전히 하나님 말씀과 진리 원칙을 어떻게 운용하여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모르는 듯하다. 이 일에서 그들 스스로의 문제는 과연 무엇이겠느냐? 모두 패괴 성품이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들에게 모두 패괴 성품이 있다면, 서로 다툴 때 어떤 패괴 성품을 드러내는지, 그 근원은 무엇인지 보아라. 그리고 그들이 드러내는 패괴 성품을 찾은 후 하나님 말씀으로 폭로하고 해부하여 그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스스로를 인식하게 해라. 그러려면 그들에게 어떤 내용을 중점적으로 교제해야겠느냐? 너는 이렇게 말하면 된다. “당신들이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인정한다면 다투지 마십시오. 다투는 것은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을 대해서는 안 되며, 이방인이 남을 대하는 방식으로 형제자매를 대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관용과 포용, 인내를 보이고 서로 사랑하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상대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상대의 행동에 불만이 있다면 합리적인 방식, 효과적인 방식으로 관용과 포용, 인내의 마음을 갖고 교제해야 합니다. 상대가 수용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인다면 아주 좋은 일이겠지만, 상대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해도 당신은 책임을 다한 것이니 혈기로 상대를 공격할 필요는 없습니다. 형제자매 간에 서로 다투고 약점을 들추는 것은 성도의 품위에 맞지 않을뿐더러 하나님의 뜻에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보여야 할 태도가 아닙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당신의 행동에 일리가 있고, 상대에게 질책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개인적인 편견을 내려놓고 마음을 평온히 한 후 솔직하게 상대의 질책과 문제를 직면하십시오. 절대 혈기에 속하는 방식으로 반격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지금 당신들 둘 다 혈기가 끓어올라 자제할 수 없는 상태라면 먼저 그 자리를 피하고 마음을 가라앉히십시오. 사탄의 함정과 시험에 빠지는 것을 피하려면 계속 그 문제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혼자 조용히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 말씀으로 자신의 문제를 풀어 보려고 노력하십시오. 두 사람이 모두 마음을 가라앉히고 평온하게, 이성적으로 대할 수 있을 때, 혈기로 말하고 행동하지 않을 수 있을 때, 다시 논쟁하던 문제에 관해 교제하십시오. 공감대를 형성하고 하나님 말씀 안에서 합일이 되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사실 사람이 다투면 그것은 둘 다 패괴 성품과 혈기를 드러내는 것으로, 사탄의 행위에 속한다. 누가 옳고 틀리고 없이 모두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만약 네가 하나님 말씀과 진리에 근거하여 이 문제를 바라보고 처리했다면, 그 다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한쪽이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했다면 다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두 사람이 서로 약점을 들추고 얼굴을 때린다면, 둘 다 혈기가 넘치는 사람으로, 좋은 작자들이 아니며, 누가 옳고 틀리고의 차이는 없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근거는 무엇이냐? 그 일을 할 때의 관점과 입장이 무엇인지, 동기가 무엇인지,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했는지, 진리에 부합하는지 등이다. 단언컨대, 너희가 다투는 동기는 상대를 굴복시키거나 무너뜨리고 싶어서일 것이다. 너희는 듣기 거북한 말로 상대를 폭로하고 상처를 준다. 그 폭로가 옳든 옳지 않든, 너희의 쟁점이 맞았든 틀렸든, 너희는 그 일을 대할 때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지 않았다. 또 너희가 드러낸 것은 혈기이고, 너희의 일 처리 방식과 원칙은 100% 혈기에 기댄 것이며, 사탄의 패괴 성품에 지배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 말에 일리가 있든, 누가 우세에 있고 열세에 있든, 사실 둘 다 틀린 것이고 책임이 있는 것이다. 너희의 일 처리 방식은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신의 문제점을 돌아보아야 한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고 문제를 냉정하게 대할 수 있어야 평화롭게 앉아서 교제할 수 있다. 두 사람이 하나님 말씀과 진리 원칙에 근거하여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한다면 어떤 일에서 보이는 생각과 관점의 불일치가 아무리 클지라도 진정한 갈등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갈등을 처리하는 근거가 하나님 말씀과 진리 원칙이라면, 두 사람은 마지막에 마음이 통할 것이며, 그 갈등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너희는 이렇게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느냐? (그러지 못합니다.) 너희는 행정 법령으로 제재 방법을 쓰는 것 외에 결코 진리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럼 이 사건을 처리하는 중점은 무엇이겠느냐? 갈등을 그만두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방식으로 갈등을 해결하고 합일을 이루라는 것이다. 갈등을 해결하는 근거는 무엇이겠느냐?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렇다. 하나님 말씀에서 근거를 찾아야 한다. 누가 옳고 틀렸는지, 누가 높고 낮은지, 누구 말에 일리가 있는지를 분석할 게 아니라 사람의 생각과 관점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즉, 어떤 일을 대하는 잘못된 생각과 관점, 방식과 방법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서 근거를 찾고 진리 원칙을 깨달아야 문제가 진정으로 해결되며, 사람들과 진정으로 화목하게 지내고 합일을 이룰 수 있다. 그러지 않고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라는 전통문화와 방식으로 처리한다면 문제를 영원히 해결할 수 없다. 최소한 사람의 생각과 관점에 존재하는 갈등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말씀 안에서 근거를 찾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부 진리이며, 서로 모순되는 내용이 없고, 모든 사람과 일, 사물을 판단하는 유일한 준칙이다. 만약 모두가 하나님 말씀 안에서 근거를 찾고, 하나님 말씀 안에서 일을 바라보는 관점이 통일된다면,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기가 쉽지 않겠느냐? 모두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있겠느냐? 다툼이 있겠느냐?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라는 말과 생각과 관점으로 사람들을 제약할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어떤 갈등이 있든, 서로 다른 관점이 얼마나 되든 전부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서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분별하고 해부하면 진리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게 되면, 패괴된 인류의 생각과 관점은 대부분 전통문화와 사람이 숭배하는 명인, 위인들로부터 왔지만 그 근원은 결국 사탄의 철학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그릇된 생각과 관점은 사실 해결하기 쉽다. 어째서 해결하기 쉽다고 하겠느냐? 하나님 말씀으로 판단하면 사람의 이러한 사상 관점이 모두 그릇되었으며, 제대로 설 수 없고 성립할 수도 없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것들을 내려놓기가 쉬워지고, 문제는 그에 맞춰 해결된다. 문제가 해결된 후에는 어떤 성과를 내게 되겠느냐? 모두가 자신의 의견과 개인의 주관적인 생각과 관점을 내려놓을 수 있다. 네가 그것을 아무리 고상하고 옳다고 생각할지라도, 그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리 오래 이어져 내려왔을지라도,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부정하고 포기해야 한다. 마지막에 모두가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사람에게서 온 모든 것을 부정하게 된다면, 사람들 사이의 생각과 관점은 통일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생각과 관점이 통일된다면, 사람들 사이에 또 갈등이 생기겠느냐? 기껏해야 음식이나 생활 습관이 달라 약간의 의견 불일치가 생기는 정도일 것이다. 사람의 패괴 성품이나 사람이 걷는 길, 사람의 본질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여 서로 합일을 이룰 것이다. 네가 동양인이든 서양인이든, 노인이든 젊은이든, 남자든 여자든, 지식인이든 공장 노동자나 농민이든,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로 함께한다면 사람들 사이에 다툼과 충돌이 생길 리 있겠느냐? 그럴 리 없다. 그럼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라는 하찮은 요구를 수면 위로 가져와서 사람들의 분쟁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함께할 때의 좌우명으로 삼아 지킬 수 있겠느냐? 이 얕은 규례는 인류에게 어떤 가치도 없으며, 사람이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생각해 보아라.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것은 진리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사람이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하니, 철저히 저버려야 마땅하다.

위에서 교제한 내용을 통해, 하나님 말씀과 진리는 모든 사람과 일, 사물을 판단하는 준칙임을, 인류의 전통문화와 도덕경은 하나님 말씀과 진리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며 언급할 가치도 없음을 확신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떠받드는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라는 ‘고상한’ 도덕적 요구를 이제 어떤 관점과 시각으로 대해야겠느냐? 그런 말을 계속 숭배하고 준행해야겠느냐?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포기해야겠느냐? 먼저, 일이 임했을 때 혈기를 내세우거나 충동적으로 굴지 말고 모든 사람과 일을 올바르게 대해야 한다. 냉정을 찾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 말씀 안에서 진리 원칙을 구하며 실행의 길을 찾아 정확히 하나님 말씀대로 사람과 일을 대해야지,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라는 덕행의 주장에 속박되거나 얽매여서는 안 된다. 이렇게 살아가면 훨씬 편안하고 즐겁지 않겠느냐? 만약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패괴 성품의 얽매임에서 벗어날 수 없고, 사람들 사이에서 남들과 함께 지내기가 무척 어려울 것이다. 네가 그를 괴롭히지 않아도 그는 너를 괴롭히려고 하고, 너는 다른 사람과 잘 지내고자 하지만 그는 수시로 너에게 시비를 건다. 네가 누군가를 경계하고 피하면, 꼭 누군가 너를 따라다니고 너한테 엉겨 붙는다.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삼지 않는다면 결국 마지막에는 상대와 끝까지 싸울 수밖에 없다. 만약 만만찮은 사람이 괴롭힌다면, 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군자가 원수를 갚는 데는 10년 걸려도 늦지 않다.”라는 태도를 취하면서 적절한 기회가 왔을 때 복수하고, 교묘한 수법으로 그를 무너뜨리고자 할 것이다. 분풀이를 하는 동시에 모두에게 정의감이 있다는 칭찬을 들으며, 너는 정인군자요, 그는 소인배라는 생각을 심어 줄 수 있도록 말이다. 이 방식이 어떠하냐? 이것이 올바른 처세의 길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이해했구나. 그럼 군자와 소인배 중 누가 좋은 사람이겠느냐? (둘 다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방인들이 우러러보는 군자들한테는 모두 ‘위(僞)’라는 글자를 붙여서 ‘위군자’라고 해야 한다. 그러니 너희는 절대 군자가 되지 마라. 군자란 모두 위장한 것이다. 그럼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이 바른길이겠느냐?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않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않는’ ‘참 군자’가 되면 되겠느냐? (안 됩니다.) 군자니, 명인이니 하는 것들은 전부 거짓이고 기만으로, 그들은 다 위군자이니 지옥에나 떨어지라 해라! 그럼 어떻게 처신해야겠느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사람이다. 이 길이 옳지 않겠느냐? (옳습니다.) 그럼 누가 늘 네 약점을 들춘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저를 폭로한다면 저도 당신을 폭로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서로 겨냥하는 것이 좋겠느냐? 이것이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며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취해야 할 방식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도리상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많은 사람이 이 시험과 함정을 이겨 내지 못한다. 상대가 네 약점을 들추고, 너를 겨냥하거나 뒤에서 너를 판단하는 것을 듣지 않았다면 모를까, 일단 듣게 되면 참지 못하고 심장 박동이 빨라지며 혈기가 솟구쳐 ‘감히 나를 폭로해? 당신이 나를 건드렸으니,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당신이 내 약점을 들췄으니, 나는 당신 상처를 들추겠어!’라고 생각할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옛말에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고 했죠. 저는 당신의 약점을 들추지 않겠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당신을 손봐 주겠어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당신의 그 콧대를 꺾어 놓을 테니, 누가 한 수 위인지 봅시다!”라고 말한다. 이런 방식들이 좋으냐? (좋지 않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누가 뒤에서 자신을 폭로하고 판단하거나 자신에 대해 나쁜 말을 한 것을 알게 됐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반응은 분노이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라 밥도 먹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할 것이다. 설령 잠들었다고 해도 꿈속에서까지 그를 욕할 것이다! 이는 혈기가 너무 강한 것이다! 사람은 이 정도의 일조차 이겨 내지 못한다. 이는 혈기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며, 패괴 성품으로 초래된 결과이다. 패괴 성품이 사람의 생명이 되었다면 주로 어떤 부분에서 드러나겠느냐?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일이 임했을 때 먼저 사람의 정서에 영향을 미치며, 그 후 혈기가 폭발한다. 이와 동시에 사람은 혈기 속에서 살면서 패괴 성품으로 그 일을 바라볼 것이고, 마음속에 사탄의 철학과 관점이 생겨나 어떤 방식, 방법으로 상대에게 복수할지 고민하게 되면서 패괴 성품을 남김없이 드러낼 것이다. 이런 문제를 대하는 사람의 생각과 관점, 그리고 거기에서 생겨나는 방식과 방법, 나아가 사람의 정서와 혈기는 모두 패괴 성품에서 비롯된다. 그럼 그 패괴 성품에는 어떤 것들이 있겠느냐? 먼저 흉악함이 분명 있을 것이고, 그다음으로 교만함과 간사함, 사악함, 강퍅함,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성품이 있을 것이다. 이 중에서는 교만함이 가장 가벼운 패괴 성품이다. 그럼 사람의 정서와 생각을 가장 강하게 주도하고 사람이 마지막에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하게 하는 주된 패괴 성품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흉악함과 강퍅함,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성품이다. 이런 패괴 성품들은 사람을 단단히 옭아맸는데, 이는 사람이 사탄의 멍에 속에서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럼 사탄의 멍에는 어떻게 생겨나겠느냐? 패괴 성품에서 생겨나지 않겠느냐? 네 패괴 성품이 너에 대한 갖가지 사탄의 멍에를 만들어 낸다. 예를 들어, 누가 뒤에서 너를 판단하고 욕하고 네 약점을 들추는 등의 일을 했다는 것을 들었을 때, 너는 사탄의 철학과 패괴 성품이 네 생명이 되어 너의 생각과 관점, 정서를 주도하게 하며, 그로 인해 일련의 행위가 나타난다. 이 패괴 행위가 나타나는 주요 원인은 네게 사탄의 본성과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환경에 있든, 네가 사탄의 패괴 성품에 결박되고 통제되고 좌우되는 한, 네가 살아 내고 드러내고 나타내는 것, 혹은 네 정서와 생각, 관점, 일 처리 방식, 방법은 모두 사탄에게 속한 것이다. 그것은 모두 진리에 어긋나고, 하나님 말씀이나 진리와 적대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과 진리에서 멀어질수록 너는 사탄의 그 멍에에 통제되고 얽매일 것이다. 반대로 만약 네가 패괴 성품의 속박과 통제에서 벗어나 그것을 저버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 말씀이 알려 준 방식과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고 문제를 해결한다면, 조금씩 사탄의 멍에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거기에서 벗어난 후에는 패괴 성품에 통제되어 사탄에게 속하는 낡아빠진 사람의 모습을 살아 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으로 하는 새사람의 모습을 살아 낼 것이다. 네 모든 삶의 방식이 달라진다. 하지만 만약 네가 사탄의 성품에서 비롯된 정서나 생각, 관점, 행동을 따른다면,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 “군자가 원수를 갚는 데는 10년 걸려도 늦지 않다.”, “진짜 소인배가 될지언정 거짓 군자가 되지는 않겠다.”, “원한을 갚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다.” 등을 신봉할 것이며, 이 일련의 사탄 철학과 각종 수단이 네 마음속에서 네 행동을 지배할 것이다. 네가 이런 사탄 철학을 근거로 일을 처리하면, 일 처리 성질이 달라져서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된다. 너는 그런 부정적인 생각과 관점들을 근거로 일을 처리하면, 분명 하나님의 가르침과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미 멀어진 것이고, 사탄의 멍에에 빠져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일상생활 속에서 거의 항상 사탄 성품으로 살아가며, 사탄의 멍에 속에서 살아간다. 사람이 겪는 고통의 근원은 사탄 성품에 통제되어 벗어나지 못하는 데에 있다. 죄 속에서 살아가며 무엇을 해도 고통스러운 것이다. 설령 상대를 이긴다고 할지라도 고통스럽다. 다음으로 상대해야 할 적이 누구인지, 똑같은 방식으로 그를 이길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마음이 두렵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럼 패배한 측은 어떻겠느냐? 당연히 그 역시 고통스럽다. 남에게 괴롭힘을 당했으니 존엄성도 인격도 없이 살아간다고 생각할 것이다. 남에게 괴롭힘 당하는 기분은 그리 좋지 않다. 그래서 늘 기회를 노리고 상황을 봐서 복수하려고 하는데,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방식으로 상대에게 본때를 보여 주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심리를 갖고 있는 것 역시 고통스러운 일이다. 요컨대, 복수하는 사람이나 복수를 당하는 사람이나 모두 사탄의 멍에 속에서 살면서 끊임없이 악을 행하고, 방법을 찾아서 현재 처지에서 벗어나려고 하며, 동시에 평안과 기쁨과 안전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은 패괴 성품에 통제되어 사탄의 멍에 속에서 살면서 사탄이 준 각종 방식과 생각, 관점으로 주변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해결하려고 하는 한편, 하나님으로부터 평안과 기쁨을 얻으려고 한다. 하지만 언제나 사탄의 패괴 성품에 결박되어 있고, 사탄의 멍에에 갇혀 자각적으로 저버리거나 벗어나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과 진리 원칙을 멀리하기에, 늘 하나님에게서 온 위안과 기쁨, 평안, 행복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어떤 내적 상태로 살아가겠느냐? 진리를 추구하려고 하나 그렇게 하지 못하고, 본분을 잘 이행하려고 하나 하나님의 요구에 미치지 못하는데, 딱 거기에 걸려 있는 것이다. 이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사람은 모두 자기도 모르게 사탄의 패괴 성품 속에서 사람 같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간다. 또 늘 어두운 구석에서 살아가면서 떳떳하지 못한 사악한 방식으로 자신이 직면한 수많은 어려움을 해결하려 한다. 사실, 사람은 마음속 깊이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고 빛을 동경하며, 사람답게 존엄성을 갖추고 살아가기를, 진리를 추구하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기를, 하나님 말씀을 자신의 생명과 실제가 되게 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언제나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며, 수많은 이치를 이해했음에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사람은 이 진퇴양난 속에서 줄다리기를 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데, 딱 거기에 걸려 있는 것이다. ‘걸려 있다’는 말은 고통과 극도의 괴로운 느낌을 준다. 사람은 마음속으로 빛을 동경하는 바람이 있으며, 하나님 말씀과 바른길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진리를 받아들이지는 않으며,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지도 못하며 줄곧 사탄의 패괴 성품으로 인한 결박과 통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진정한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현재 상황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어떻게 말하든,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를 얻으려면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 말씀을 조금씩 체험해야 한다. 그리하여 덕행의 주장이 사람의 생각과 관점, 진리 추구에 미치는 영향을 해결해야 한다. 이것이 핵심이며, 이런 문제들은 반드시 해결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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