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추구란 무엇인가(7) 제 1 부

그동안 우리는 전통문화 중 덕행 측면의 각종 논조에 대해 교제하였고, 몇몇 구체적인 논조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럼 이 화제, 이 내용들이 과연 진리와 관계가 있느냐? (관계가 있습니다.) 이 화제와 이 내용들이 진리와 무관한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 않겠느냐? 그런 사람은 자질이 너무 부족하여 하나도 분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금 교제하는 이 화제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만약 이렇게 교제하고 해부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덕행 측면에서 사람이 상대적으로 긍정적이라고 생각하는 이 논조들을 진리로 여겨 계속 지키지 않겠느냐? 먼저, 많은 사람이 그것을 긍정적인 사물,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하는, 인성에 부합하는 것, 인성의 양심과 이성, 필요, 관념 등에 부합하는 것으로 볼 게 분명하다. 이 화제를 교제하기 전까지, 거의 모든 사람이 덕행과 관련된 각종 논조를 진리에 부합하는 긍정적인 사물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교제하고 해부했는데, 너희는 이 덕행의 논조와 진리를 구분할 수 있느냐? 이러한 측면에서 분별이 되느냐? 혹자는 “저는 잘 구분이 안 되지만, 어쨌든 교제를 통해 그것들이 진리와는 차이가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대신할 수 없으며, 나아가 긍정적인 사물이나 진리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 말씀이나 요구, 진리 준칙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더욱 말할 필요도 없고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요구, 진리 준칙과 어떤 관계도 없습니다. 그것이 인성의 양심과 이성에 부합하든 부합하지 않든, 요지는 지금 제가 마음속으로 그것을 숭배하지 않고 진리로 여기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이 전통문화가 사람의 마음속에서 더 이상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덕행의 논조에 관해 들을 때,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진리와 구분하는데, 그것을 사람의 양심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볼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진리와 차이가 있으며, 절대 진리를 대신할 수 없다. 사람이 이 덕행에 관한 논조의 본질을 이해하면 더는 그것을 진리로 여겨 지키거나 숭배하거나 추구하지 않게 된다. 이는 최소한의 성과이다. 그럼 이러한 것들을 이해하면 사람의 진리 추구에는 어떤 긍정적이고 올바른 역할이 있겠느냐? 긍정적이고 올바른 역할은 분명히 있다. 다만, 그 역할이 얼마나 클지는 네가 진리를 어느 정도로, 얼마나 깨달았는지에 달려 있다. 이러한 점에서 봤을 때, 전통문화 가운데 사람이 숭상하고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는 것들을 해부하는 일은 꼭 필요하다. 그것은 적어도 사람이 순수하게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추구할 때 옆길로 새지 않으며 불필요한 정력 낭비를 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성과를 낼 수 있다.

지난번에 교제하고 해부한,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마라.”, “기꺼이 남을 도우라.”,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 “원한을 덕으로 갚으라.”라는 네 가지 덕행의 논조에 이어서, 오늘은 다른 것을 교제하도록 하겠다. 중국의 전통문화는 사람의 덕행에 관해 많은 논조를 명확히 제시했다. 어떤 시대, 어떤 시기에 나온 것이든, 그것들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려져 있다. 시대가 발전하면서 갖가지 새로운 사물들이 하나씩 생겨남에 따라 덕행 측면에서도 새롭고 다른 논조들이 수없이 생겨났다. 이 논조들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품격과 행위에 대한 요구이다. 지난번에 교제한 그 네 가지 덕행의 논조에 대해 너희는 어느 정도 이해하지 않았느냐? (이해했습니다.) 이제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논조에 관해 교제하겠다.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논조는 중국 전통문화 중에서 사람의 덕행을 평가하는 매우 전형적인 기준이다. 사람의 인성이 어떤지, 덕행이 어떤지를 판단하는 기준 중 하나는 바로 그가 남에게 은혜를 입고 도움을 받은 후 보답하는지, 은혜를 반드시 보답하는 사람인지를 보는 것이다. 중국의 전통문화나 인류의 전통문화에서, 사람은 은혜에 반드시 보답하는 것을 덕행 판단의 중요한 기준으로 여긴다. 은혜에 보답할 줄 모르는 자가 있다면, 그는 배은망덕한 사람인 것이다. 그는 양심이 없는 사람, 사귈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보일 것이며, 사람들에게 멸시와 혐오, 버림의 대상이 될 것이다. 반면, 어떤 사람이 은혜에 보답할 줄 안다면, 즉 남에게 은혜를 입거나 도움을 받은 후에 그것을 잊지 않고 힘닿는 데까지 자기 방식으로 상대에게 보답한다면, 양심과 인성을 갖춘 사람으로 보인다. 어떤 사람이 다른 이에게 이득을 얻고 도움을 받은 후 은혜에 보답하지 않거나 고맙다는 말 한마디로 감사의 뜻을 표한 후 더는 어떤 행동도 보이지 않는다면, 은혜를 베푼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마음이 불편하지 않겠느냐? ‘이 사람은 도와줄 가치가 없구나. 좋은 작자는 아닌 것 같아. 내가 그렇게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저런 반응이라니, 정말이지 양심도 이성도 없는 사람이야. 사귈 가치가 없구나.’라고 생각하지 않겠느냐? 그가 앞으로 그런 부류의 사람을 또 만나면 도와주겠느냐? 적어도 도와주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너희가 이런 상황에 맞닥뜨린다면, 정말 도와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지 않겠느냐? 지난번 경험을 떠올린 후 교훈을 얻을 것이다. ‘함부로 남을 도와주면 안 되겠어. 은혜를 반드시 갚는 사람이어야 도와줄 거야. 배은망덕한 사람이라서 도와줘도 어떤 보답도 받지 못한다면 안 도와주는 게 낫겠어.’라고 말이다. 너희는 이런 관점을 갖고 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남을 도와줄 때, 도움을 주는 그 일을 마음속으로 어떻게 바라보겠느냐? 도움을 받는 사람에게 어떤 기대나 요구를 하지 않겠느냐? “저는 당신을 무상으로 도와준 것입니다. 저는 당신에게서 어떤 이득도 얻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당신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제 책임입니다. 당신이 저와 어떤 사이든, 앞으로 제게 보답을 하든 말든 저는 평범한 사람의 기본적인 의무를 지키는 것이니 보답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보답을 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겠느냐? 설령 있다고 해도 사실이 아니라 만들어 낸 것이다. 중국 역사 소설에는 허구로 만들어 낸 영웅들이 무척 많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 큰 붉은 용이 만들어 낸 영웅들은 더욱 거짓되어 인물은 실존할지 몰라도 실제로 그런 영웅담이 존재한 적은 없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논조, 사람의 덕행을 판단하는 이 기준이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어떤 사람들에게서 온 것인지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어쩌면 아직 잘 이해되지 않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이 패괴된 인류는 모두 한 가지 이상, 인류 사회에 대한 하나의 기대를 품고 있다. 그 기대는 무엇이겠느냐? “모두가 조금씩 사랑을 보여 준다면 세상은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라는 기대 외에, 사람은 자신이 보여 준 사랑과 자신이 치른 대가에 대한 보답과 보상을 받기를 바란다. 그중 하나는 물질적인 의미의 보상이다. 예를 들어, 돈이나 물질적인 혜택을 받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정신적인 측면의 보상이다. 즉, 명예와 관련된 혜택을 얻어 정신세계가 충족되는 것이다. ‘모범 노동자’나 ‘도덕적 모범’, ‘도덕적 롤 모델’ 같은 호칭 등등 말이다. 인류 사회에서 이는 거의 모든 이가 이 사회와 세상에 거는 기대일 것이다. 모두 좋은 사람이 되어 바른길을 걷기를,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의 손을 뻗어 도움과 이로움을 주기를, 그 상대가 이득을 얻는 한편 마음속으로 자신을 기억해 주기를, 자신이 그에게 이득을 주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물론, 자신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상대도 도움의 손길을 뻗어 주기를 바란다. 도움이 필요할 때 사랑을 베풀어 주는 사람이 있기를 바라는 한편, 사랑을 베푸는 사람은 어려움을 겪을 때 자신도 남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람은 이 사회, 이 세상에 그런 기대를 한다. 사실 그 최종 목적은 인류가 조화롭고 화목하고 평화롭고 안정적인 사회에서 살아갔으면 하는 것이다. 그럼 그 기대는 어떻게 생겨났겠느냐? 사람은 이 사회 배경 속에서 안전감도, 행복감도 느끼지 못하기에 자연히 사람의 덕행이 어떤지, 사람의 인품이 고귀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하려면 남에게 도움을 받은 후 은혜에 반드시 보답하는지를 보면 된다는 주장이 생겨난 것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사람의 덕행을 판단하는 기준 중 하나인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주장이 생겨났다. 이 논조가 생겨난 이유가 무척 기괴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지금, 인류는 모두 진리를 구하지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은 채 진리를 싫어하게 되었고 혼돈의 상태에 처해 있다. 모두가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지만, 자신이 이행해야 할 책임과 본분이 무엇인지 모르고, 어떤 위치와 입장에서 사람과 일을 바라보아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이 밖에, 사람은 이 사회가 다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무엇인지, 어떤 입장과 시선으로 이 사회를 바라보고 대해야 하는지 역시 알지 못하며,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에 대해 정확한 논조나 결론을 갖지 못한다.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실행해야 할 올바른 길을 찾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갈수록 어둡고 공포스러워지며 분쟁, 원한으로 인한 살인, 전쟁, 각종 불평등 대우로 점철된 이 세상 앞에서 인류는 모두 구세주가 오기를 기대하고 바라지만, 진리에는 또 관심이 없으며, 주동적으로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사역을 찾지도 않는다. 설령 하나님이 발한 음성을 들었다고 해도 구하지 않으며, 받아들이는 일은 더더욱 없다. 사람은 그렇게 무력하게 살아가면서 이 사회가 너무도 불공평하다고, 심지어는 안전하지 않다고 느낀다. 모두가 이 사회, 이 세상에 염증과 증오를 느끼지만, 그와 동시에 또 이 사회가 언젠가 좋아지기를 바란다. 사회가 좋아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사람들이 더 이상 서로 싸우지 않고 원한으로 인해 살인하지 않으며, 화목하게 함께하는 것이다. 모두가 억압과 고통, 속박 없이 자유와 해방감, 편안함, 행복감을 느끼며 살고, 정상적으로 남들과 함께하며, 남을 공평하게 대하는 것 말이다. 물론, 자신도 공평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이 세상, 이 인류에게는 공평함이 없기에 사람들 사이에 분쟁과 원한으로 인한 살인이 존재하며, 서로 화목하게 지내지도 못한다. 이런 현상은 시대를 막론하고 언제나 존재한다. 이 잔혹한 사회 배경, 상황 속에서 이러한 문제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분쟁과 원한으로 인한 살인, 그리고 사회에 나타나는 갖가지 불평등이나 억울한 일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런 문제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또 사람은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어떤 입장과 각도, 방식으로 해결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마음속에 아름다운 미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미래에는 사람들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고 모두가 이 사회와 사람들 사이에서 공평한 대우를 받는 것이 포함된다. 사람은 누구나 ‘당신이 나를 존중해 준다면 나는 그 열 배로 당신을 존중하겠다. 당신이 나를 도와준다면 나는 보답할 것이다. 당신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사회의 많은 사람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사회적인 책임을 다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는 지난날 내가 도와준 사람들 역시 손길을 내밀어 나를 도와줬으면 한다. 이 사회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사회여야 한다.’라고 바란다. 사람은 이렇게 해야만 행복하고 화목하게 살 수 있으며, 평화롭고 안정적인 사회에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야만 인류의 분쟁이 뿌리 뽑히고 해결되며, 그 후에는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인류 사회에 대한 기대나 꿈꾸는 미래가 실현될 거라고 말이다.

이방 사회에는 <내일은 더 좋아질 거야>라는 노래가 있다. 사람은 언제나 내일이 더 좋아지기를 바란다. 이 생각이 틀리지는 않지만 정말 내일이 더 좋아지겠느냐? 그럴 리 없다. 점점 더 나빠질 뿐이다. 사람이 점점 더 사악해지고 세상은 점점 더 어두워지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은혜를 반드시 보답하는 이는 점점 적어지고 있으며, 반대로 배은망덕한 자, 은혜를 원수로 갚는 자들은 오히려 점점 많아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사실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이는 어떻게 초래된 것이겠느냐? 도덕가나 교육가, 사회 학자들이 제시한,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덕행의 준칙이 왜 인류에게 어떤 제약의 역할도 하지 못하는 것이겠느냐?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것을 알겠느냐?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사람이 원한으로 인해 죽이고 싸우는 근원이 덕행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사람은 무엇이 처신의 원칙인지 모른다. 즉, 어떻게 처신하는 게 옳은지, 처신의 원칙이나 길이 무엇인지 모른다. 게다가 사람은 누구나 패괴 성품과 사탄 본성이 있고, 이익을 위해 살아가며, 오직 이익만을 추구한다. 그렇기에 싸우고 원한으로 인해 살인하는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패괴된 인류가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덕행의 준칙을 실행할 수 있겠느냐? 가장 기본적인 양심과 이성조차 잃어버린 인류가 어떻게 은혜를 반드시 보답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늘 이 인류를 인도하며, 햇빛, 공기, 먹거리, 물 등 생존의 여러 조건을 예비해 주었다. 그런데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느냐?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진실한 사랑을 깨달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느냐?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크나큰 은혜를 누리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한두 번만 만족시켜 주지 않으면 머리끝까지 화를 내며, 하늘은 불공평하다고 원망의 말을 쏟아 낸다. 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감정 아니겠느냐? 설령 소수의 몇몇이 어떤 사람들을 상대로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논조를 실행한다고 해도 그것이 또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물론,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덕행의 논조를 제시한 사람의 출발점은 좋았을 것이다. 그의 목적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원한을 풀고 분쟁을 멀리하며 서로 돕고 화목하게 지내고 감화시키고 온정을 나누는 것, 한 명이 어려움에 부딪히면 모두가 도와주는 것이다. 사람이 이런 상태에 진입한다면 이 사회는 얼마나 아름답겠느냐?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사회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 이 사회는 패괴된 사람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패괴 때문에 사회는 점점 더 어둡고 사악해질 것이며, 사람의 이상 속 조화로운 사회는 영원히 실현될 수 없을 것이다. 어째서 실현될 수 없겠느냐? 근본적으로, 그리고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사람의 패괴 성품 때문이다. 사실, 한때의 좋은 행위나 좋은 덕행, 남에 대한 사랑, 도움, 지원 등은 인류의 패괴 성품을 전혀 해결하지 못한다. 물론, 더 중요한 것은 인류가 어떻게 처신하느냐 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또한, 인류가 어떻게 인생의 바른길을 갈 것인가 하는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는데, 이 사회가 사람이 관념적으로 소망하는 조화로운 사회가 되는 게 가능하겠느냐? 그것은 그야말로 막연한 공상이다. 도덕가들은 도덕경을 선전하는 방식으로, 혹은 가르치는 방식으로 사람들이 좋은 덕행을 통해 남을 돕고 감화시키게 함으로써 이 사회에 영향과 변화를 주고자 시도했다. 그런데 그들의 이런 소망과 생각이 과연 옳겠느냐? 분명 잘못되었다. 이는 실현될 수 없는 생각이다. 어째서 이렇게 말하겠느냐? 그들은 사람의 행위와 사상, 관점, 덕행만을 이해했을 뿐, 사람의 본질이나 패괴 성품, 패괴된 근원,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방법 등 더 심층적인 것들에 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어리석은 도덕적 행위 준칙이 생겨난 것이다. 이어서 그들은 이런 논조, 이런 덕행의 준칙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한 세대 한 세대에 영향을 주며, 인류의 행위 준칙과 방향, 목표를 바꿔 놓고자 했다. 이와 동시에 이 사회의 기풍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의 관계를 조금씩 바꿔 놓았다. 그들은 이 관계들이 바뀌면 이 사회가 더는 지금처럼 이렇게 불공평하지 않으리라고, 더는 싸움과 원한, 살육으로 점철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이는 평범한 대중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그들은 공평한 사회 생활 환경을 얻었고 더 마음 편히 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최대의 수혜자는 평범한 대중이 아니라 각 시대의 통치자, 통치 계급, 귀족 계층이었다. 이 도덕 학설을 퍼뜨린 소위 명인이며 성인들은 사람들 눈에 꽤 고상해 보이고 인성과 양심에 부합하는 것 같은 이 도덕 학설로 사람을 가르치고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사람의 도덕관을 바꿔 놓았다. 사람이 자각적으로 하나의 문명, 혹은 어느 정도 도덕적 수준이 있는 사회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말이다. 그렇게 하면 먼저 대중의 실생활에 도움이 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회 환경이 더 화목하고 조화로워지며 문명화될 테니 말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는 통치자를 위해 국민들을 통치하기에 좋은 조건을 만들어 준다. 이 도덕적 행위 준칙의 논조는 대다수 사람의 사상과 관념에 부합하며, 아름다운 미래에 대한 인류의 기대와도 부합한다. 물론, 그들이 이것을 퍼뜨리는 가장 큰 목적은 통치자의 통치에 도움이 되기 위함이다. 국민들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화목하게 함께하며 분쟁을 벌이지 않는 것, 모두가 자각적으로 사회의 행위 도덕 준칙을 지키는 것, 이는 사실 통치받는 대중이 이러한 사회 도덕 준칙의 속박 속에서 성실하고 착실하게 살면서 순종하고 말을 듣는 법을 배우며 고분고분한 양민이 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렇게 된다면 통치자의 마음이 상대적으로 평온하고 편안해지지 않겠느냐? 국민들이 반기를 들거나 권력을 빼앗아 갈 걱정이 없는 ‘조화로운 사회’가 나타나지 않겠느냐? 통치자의 정권이 공고해지지 않겠느냐? 이 도덕경의 출처, 이 도덕경이 나타난 배경은 기본적으로 이러하다. 좋은 쪽으로 얘기하자면, 이는 대중의 행위와 덕행을 규범화하여 기본적인 사회 도덕 준칙을 제정해 준 것이다. 즉, 말로는 각각의 개체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본질을 보면 사실상 국가와 사회의 안정을 위한 것이고 통치자가 오랫동안, 혹은 영원히 권력을 잡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소위 도덕가들이 전통문화를 퍼뜨리는 진정한 목적이다. 통치자들은 국민들의 생사를 고려하지 않는다. 가끔씩 생각하는 것 같아 보여도 그것 역시 자신들의 정권을 공고히 지키기 위함이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행복만을 생각하며, 자신들의 권력과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있을지, 영원히 대중을 통치할 수 있을지, 더 많은 나라를 통치하여 언젠가 전 세계를 통치할 수는 없을지 등을 생각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마왕의 속셈이고 목적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조상 대대로 모두 농민이었습니다. 지주의 소작인이었죠. 자기 땅은 한 마지기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해방된 후에 공산당이 지주와 자본가들을 타도하고 우리에게 땅을 나눠 주었습니다. 우리 농민들은 신분이 바뀌어 주인이 되었죠. 이 모든 공은 공산당에게 돌려야 합니다. 공산당은 중국인의 구원자예요. 우리는 은혜를 반드시 보답해야지,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공산당에 반기를 들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말이지 배은망덕한 짓입니다. 그것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되어서 그렇게 비양심적인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근본을 잊어서는 안 되죠.”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말 뒤에 숨겨진 뜻은, 지금 네가 처한 생존 환경이 어떻든, 어떤 대우를 받든, 네 인권이 보장받든 그렇지 않든, 네 생존권이 위협받든 박탈되든, 너는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논조를 기억해야지, 근본을 잊고 배은망덕한 소인배가 되어서는 안 되며, 마땅히 무기한으로, 보수를 바라지 말고, 끝없이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여전히 노예가 되는 것 아니겠느냐? 그들은 지난날 지주의 노예, 자본가의 노예였다고 생각하지만, 그 자본가와 지주들이 정말 백성들을 착취했겠느냐? 그 당시 농민들의 처지가 정말 지금보다 나빴겠느냐? 그렇지 않다. 그것은 공산당이 날조해 낸 거짓말이다. 현재, 이러한 사실과 진상이 조금씩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숱한 백성들의 피와 땀을 착취한 자본가의 이야기, 백모녀(白毛女) 이야기 등은 전부 날조해 낸 허구로, 결코 사실이 아니다. 그것을 날조하고 지어낸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사람들이 지주와 자본가들을 증오하게 하고, 영원히 공산당을 칭송하며 순종하게 하기 위함이다. 지난날, 수많은 사람이 <공산당 없이는 새로운 중국도 없다>라는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는 수십 년간 중국 각지로 퍼져 나갔지만, 지금은 아무도 부르지 않는다. 공산당이 날조하고 지어낸 사례는 너무도 많으며, 전부 객관적인 사실에 어긋난다. 최근, 사실과 진상을 폭로하고 공개적으로 드러내 그 진상을 밝히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다.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덕행의 준칙은 어느 시대에서든 인류 사회에서 사람의 행위를 제약하거나 인성을 판단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물론, 이보다 더 중요한 역할은 이러한 논조로 통치자가 민중을 더 잘 통치하는 데 일조하는 것이었다. 이 논조들의 목적은 어느 정도 사람의 행위와 덕행을 제약하고, 사람이 이런 도덕적 행위 준칙의 틀 속에서 문제를 생각하고 대하며, 이러한 도덕적 행위 준칙으로 판단하고 선택하게 하는 데 있다. 그것은 사람에게 짊어져야 할 책임을 다하고 가정에서부터 사회에 이르기까지 책임을 지라고 훈계하는 게 아니라 정상 인성의 규율과 소망을 심각하게 위배하면서 사람에게 어떤 생각을 어떻게 하라고,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강요한다. 또 그것은 무형의 방식, 무형의 틀로 사람을 이끌고 속박하고 결박하며, 사람은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한다고, 어떻게 해서는 안 된다고 알려 준다. 그 목적은 이런 사회 여론, 사회 도덕 준칙으로 사람의 사상과 일을 대하는 관점, 처신하고 일하는 방식과 방법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와 같은 도덕 행위의 논조는 사람이 이 사회, 이 인류 가운데서 다해야 할 책임이 과연 무엇인지 알려 주지 않는다. 그저 이런 방식으로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속박하고 강요할 뿐, 사람이 원하는지는 신경 쓰지 않고, 사람에게 임한 일이 어떤 상황, 어떤 배경에서 벌어진 것인지도 상관하지 않는다. 고대 중국에는 다음과 같은 일이 무척 많았다. 예를 들어, 굶어 죽을 지경이 된 거지를 어떤 집안에서 거두어 먹여 주고 입혀 주고 무예나 각종 지식을 가르쳐 준 다음 그가 성인이 되면 돈벌이 수단으로 삼아 악행, 살인 등 그가 원치 않는 일을 시키는 것이다. 그가 입은 은혜를 생각한다면, 그가 그들 덕에 목숨을 구하게 된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가 압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일들을 생각한다면, 이것이 좋은 일이겠느냐, 나쁜 일이겠느냐? (나쁜 일입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전통문화에 물들어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표면적으로 볼 때, 그가 악을 행하고 다른 사람을 해치며 살수가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보통 악을 행하고 남을 죽이는 짓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의 내면 깊은 곳을 본다면, 주인의 지시대로 악을 행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에는 보은의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 특히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중국 전통문화의 영향 아래에서 사람의 마음은 어쩔 수 없이 이런 사상에 물들고 지배된다. 그가 일하는 방식과 방법, 그리고 의도와 출발점은 분명 이런 것들에 통제될 것이다. 이런 일이 임했을 때, 그가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이 집안에서 나를 구해 줬으니 나는 이 집안에 은혜를 입은 거야. 은혜에 보답해야지, 배은망덕하게 굴어서는 안 돼. 내 목숨은 저들이 구해 준 거니까 저들을 위해 바쳐야 해. 저들이 뭘 시키든 해야 한다고. 설령 그게 악을 행하고 사람을 죽이는 일일지라도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고 온 힘을 다해 보답해야 해. 이렇게 큰 은혜에 보답하지 않으면 사람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겠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집안사람들이 살인이나 나쁜 일을 시킬 때마다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어떤 의문도 품지 않는다. 그럼 그의 이런 행위와 행동, 어떤 의문도 품지 않는 태도는 전부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생각과 관점에 지배된 것 아니겠느냐? 그는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덕행의 준칙을 이행하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사례에서 무엇을 알 수 있느냐?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논조가 좋으냐? (좋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원칙이 없습니다.) 사실, 보은하는 사람에게도 원칙이 있다. 그의 원칙은 바로 은혜에 반드시 보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반드시 보답해야 하며, 보답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고, 정죄당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물 한 방울의 은혜라도 넘치는 샘물로 보답하라.”라는 말이 있는데, 하물며 이는 물 한 방울의 은혜가 아니라 목숨을 구해 준 은혜이니 더더욱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보은의 원칙이 무엇인지, 보은의 마지노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자기 목숨을 그 집안사람들이 구해 주었으니, 마땅히 그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고, 그들이 무엇을 시키든, 심지어 그것이 악을 행하고 남을 죽이는 일일지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그런 보은은 원칙과 선을 잃어버리고 악인의 앞잡이가 되는 행위로, 스스로를 망치는 짓이다. 그의 그런 보은 방식이 옳으냐? 당연히 옳지 않다. 이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그 집안사람들이 그를 구해 주고 살려 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보은을 할 때도 원칙과 선이 있어야 하며, 적정선을 지켜야 한다. 그들이 목숨을 구해 줬다고 해도, 네가 사는 것은 악을 행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악을 행하고 남을 죽이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의미와 가치, 그리고 사명이 될 수 없다. 또한, 은혜를 갚기 위해 살아서도 안 된다. 그는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말을 사람이 살아가는 의미와 가치로 잘못 해석했는데, 이는 틀려도 단단히 틀린 것이다. 이는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덕행의 준칙에 영향을 받은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가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말에 영향을 받아 오도된 것이냐, 아니면 올바른 실행의 원칙과 길을 얻었느냐? 말할 것도 없이 오도된 것이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만약 이 덕행의 준칙에 관한 논조가 없었더라면 사람 스스로 간단한 시시비비를 판단할 수 있지 않았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집안에서 나를 구해 주기는 했지만, 그들이 나를 구해 준 목적은 이 집안의 장사와 미래를 위해서인 것 같아. 나를 자신들의 도구로 만들려는 거지. 그들의 장사에 영향을 주고 방해물이 되는 사람이 있으면 나를 시켜서 해치우고 죽이려는 거잖아. 이걸 위해서 나를 구해 준 거야. 그들은 나를 죽음의 언저리에서 구해 줬지만, 한편으로는 내게 악행, 살인 범죄를 저지르게 하고 있어. 이건 나를 지옥으로 밀어 넣는 것 아니겠어? 더 큰 고통을 겪게 하는 것 아니겠냐고? 이럴 거면 차라리 그때 나를 구해 주지 말고 죽게 두는 게 나았을 거야. 이건 나를 정말로 구해 주려는 게 아니야!’ 그 집안이 사람을 구해 준 이유는 선행을 하여 상대가 제대로 살아가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들의 목적은 사람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남을 곤경에 빠뜨리고 해치고 죽이는 데 쓰기 위함이다. 그럼 이것이 과연 은혜를 베푸는 것이겠느냐, 아니면 악을 행하는 것이겠느냐? 이는 분명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하는 것이다. 그 은인은 악인이 된다. 악인에게 보답할 가치가 있겠느냐? 보답을 해야겠느냐? 보답할 필요는 없다. 그럼 그들이 악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멀리하고 피하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도망가야 하는데, 이래야 지혜로운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악인들은 이미 저를 통제하고 있어서 도망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도망갈 방법이 없다고요!”라고 말하는데,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논조는 종종 이런 결과를 초래한다. 좋은 사람은 너무 적고 악인은 너무 많기 때문에 좋은 사람을 만나 은혜에 보답한다면 상관없지만, 악인의 손에 떨어진다면 악마나 사탄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과 같다. 그는 너를 계략에 빠뜨리고 농락할 것이다. 그의 손아귀에 들어가면 좋은 결말을 맞지 못한다. 이런 사례는 자고로 너무도 많았다. 그럼 이제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논조가 사람으로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준칙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은혜를 입는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너희의 관점은 무엇이냐? (누가 저희를 도와주든 상황에 따라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해야 합니다. 어떨 때는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어떨 때는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설령 받아들인다고 할지라도 원칙과 선 없이 보답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사기당하고 악인에게 이용당하는 일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대한다면 원칙이 있는 것이다. 이 밖에, 간파할 수 없을 때, 실행할 길이 없을 때는 반드시 길을 열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한편으로는 시험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탄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때로는 하나님이 사탄을 힘쓰게 하여 사람을 도울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하나님에게 감사해야지, 사탄에게 은혜를 보답해서는 안 된다. 이는 원칙적인 문제이다. 악인이 은혜를 베푸는 시험이 임하면 먼저 마음속으로 네게 이로움과 도움을 준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 네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다른 길은 없는지 분명히 한 후, 융통성 있게 처리해야 한다. 하나님이 너를 구하려는 것이면 어떤 사람을 힘쓰게 하든 너는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은혜를 완전히 사람에게 돌리거나 심지어 보은하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다른 이에게 바쳐서는 안 된다.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알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핵심이다. 은혜를 베풀어 너를 돕고 구해 준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보답하되, 자신의 현실적인 조건과 역량을 고려해야 한다. 가령 너를 도와준 사람의 마음가짐이 그릇되었다면, 너를 음해하고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것이라면, 굳이 보답하지 않아도 된다. 어쨌든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니, 네 양심에 가책이 되지 않고 마음가짐이 올바르다면 문제 될 것은 없다.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황일지라도 네 행동은 최소한 인성의 양심과 이성에 부합해야 한다. 즉, 이성적으로 그 일을 대하면 언제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모두 성인이고, 큰 붉은 용의 나라에서 수많은 일을 겪었는데, 너희가 겪은 탄압과 박해, 학대, 능욕이 적더냐? 너희는 심하게 패괴된 인류의 현황을 똑똑히 보았다. 그러니 어떤 시험이 임하든 지혜롭게 대해야지, 사탄의 간계에 당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일이 임하든 진리를 구하고 기도와 교제를 통해 마음속으로 원칙을 깨달은 다음에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 교회에서는 인원 정리 사역을 하면서 수많은 악인과 불신파, 적그리스도가 드러나 제명되고 출교되었는데, 이는 많은 사람이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교회에조차 이렇게 많은 바보, 악인, 불신파가 존재하는데, 이방인들은 어느 정도로 패괴되고 사악할지 뻔하지 않겠느냐? 사람에게 진리가 없고 지혜가 없으면 어떤 일도 꿰뚫어 볼 수 없어 사기당하고 사탄이나 악인에게 농락될 뿐이다. 그러면 사탄의 앞잡이가 된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원칙이 없는 사람은 어리석은 일만 저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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