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추구란 무엇인가(6) 제 2 부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라, 이것은 덕행에 대한 전통문화의 요구 중 가장 깊이가 얕은 것이다. 인류 사회는 이런 사상을 제창하며 주입하고 있지만, 사람의 패괴 성품과 온 인류의 사악한 흐름의 성행으로 인해, 사람이 특정 시기에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을 수 있을지라도, 혹은 그런 좋은 덕행을 갖추었을지라도 한 가지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바로 패괴 성품이 사람의 사상과 행위를 끊임없이 주도하는 동시에 사람의 처신과 추구도 주도하고 통제한다는 것이다. 한때의 좋은 덕행은 사람의 추구에 영향을 주지 못하고, 사람이 사악한 흐름을 떠받들고 숭상하고 따르는 것 또한 바꿔 놓지 못한다. 그렇지 않더냐?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과거에 사람들이 부르던 “길가에서 돈 한 푼을 주웠다네.”라는 노래는 지금 한 곡의 동요로서 추억이 되었다. 사람은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이 최소한의 좋은 행위조차 해내지 못한다. 사람은 좋은 덕행을 제창함으로써 사람들의 추구와 패괴 성품을 바꿔 놓고, 인류의 타락과 갈수록 나빠지는 사회 기풍을 막으려 시도하지만, 결국 그 목표는 이뤄지지 않는다.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라는 덕행은 그저 사람의 이상 세계에만 존재할 뿐이다. 사람은 그것을 하나의 이상, 아름다운 인간 세상에 대한 동경으로 바꿔 놓았다. 사람의 정신세계에 존재하는 그것은 미래 세계에 대한 기대를 담고 있지만, 사람의 실생활이나 진정한 인성과는 하나도 맞지 않는다. 또 사람이 처신하는 원칙, 가는 길, 추구하는 것, 갖춰야 하는 것, 도달해야 하는 것과도 전혀 맞지 않으며, 정상 인성을 드러내고 나타내는 것이나 사람들과 함께하고 일을 처리하는 원칙과도 맞는 부분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의 덕행을 평가하는 이 기준은 고금을 막론하고 성립하지 않는다. 특히 사람이 제창한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사상과 관점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그것을 신경 쓰는 사람도 별로 없다. 그것은 사람의 처신 방향이나 추구를 바꿀 수 없고, 사람의 타락이나 이기심,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과 늘 사악함을 향해 가는 발전 추세를 바꾸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라는 이 얕디얕은 요구는 이미 풍자적인 의미의 우스갯거리가 되어, 이제 어린아이들조차 “길가에서 돈 한 푼을 주웠다네”라는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탐관오리가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그것은 큰 풍자거리가 되었다. 돈 한 푼을 주우면 경찰 아저씨에게 갖다주지만, 100만 위안, 1,000만 위안을 주우면 자기 주머니에 넣는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이 현상으로 볼 때 사람이 제기한,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라는 덕행의 요구는 이미 패배를 선포한 것이다. 즉, 사람은 최소한의 좋은 행위조차 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최소한의 좋은 행위조차 해내지 못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사람이 최소한 해내야 하는, 다른 이의 물건을 주웠을 때 숨겨서 자기가 갖지 않는다는 것조차 사람들은 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사람은 일을 그르치면, 솔직한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게다가 죽어도 인정하지 못한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최소한의 행위조차 해내지 못하는데, 무슨 자격으로 도덕을 논하겠느냐? 양심과 이성조차 원하지 않는 자가 도덕을 논할 자격이 있겠느냐? 공직자, 권력이 있는 자들은 사람들로부터 더 많은 이익을 착취하고 빼앗으며, 본디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점거하고자 머리를 쥐어짜는데, 법으로도 제약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어쩌다가 지금 이 지경까지 이르렀느냐? 이 모든 것은 사람에게 사탄의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사탄의 본성이 지배하고 주도하는 상황에서 갖가지 기만행위와 남을 해치는 행위가 나타났다. 외식하는 자들은 국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기치를 든 채 비열하고 몰염치한 짓들을 수도 없이 저지른다. 이는 뻔뻔스러운 것 아니겠느냐? 현재 외식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악인이 활개치고 좋은 사람이 억압받는 세상에서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라는 이치는 사람의 패괴 성품을 전혀 제약하지 못하고, 사람의 본성 본질과 사람이 걷는 길을 절대 바꿔 놓지 못한다.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라는 화제에 대해 이런 이야기들을 교제했는데, 이해가 되느냐?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라는 논조가 패괴된 인류에게 어떤 의의가 있겠느냐? 이 부분의 덕행을 도대체 어떻게 인식해야겠느냐?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라는 것은 사람이 처신하고 가는 길과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가는 길을 바꿔 놓지 못합니다.) 그렇다.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라는 것으로 사람의 인성을 판단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것으로는 사람의 인성을 판단할 수는 없고, 그것을 통해 사람의 덕행을 판단하는 것도 옳지 않다. 그것은 그저 한순간의 행위일 뿐, 절대 한 사람의 본질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라는 덕행의 주장을 제시한 사람, 소위 사상가나 교육가들은 이상주의자다. 그는 인성을 알지 못하고, 사람의 본질을 알지 못하며, 전 인류의 타락 정도나 패괴 정도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가 제시한 덕행의 주장은 매우 공허하고 전혀 실제적이지 않으며, 사람의 실제 상황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이 덕행의 주장은 사람의 본질, 사람이 드러내는 갖가지 패괴 성품, 그리고 패괴 성품의 주도 속에서 사람에게 생겨나는 관념, 관점, 행위와 어떤 관계도 없다. 이것이 한 가지 측면이다. 다른 한 가지 측면은, 정상적인 사람에게는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것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네 부모는 너를 낳아 주고 길러 줬다. 철없던 시절에 너는 부모에게 먹을 것, 입을 것을 요구할 줄만 알았지만, 철이 들고 사리를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부모를 사랑하고 이해하며 그들이 마음고생을 하거나 속을 태우지 않게 하고, 덜 고생하고 덜 힘들게 하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능한 한 스스로 하게 된다. 이러한 것들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네가 사람이고, 양심과 이성이 있는 한 해낼 수 있고 해내야만 한다. 이는 언급할 만한 가치도 없는 일이다. 그것을 사람의 고귀한 품격이라는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작은 일을 두고 떠벌리며 견강부회하는 격이다. 이렇게 정의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무엇을 알 수 있느냐? 정상 인성의 범위 안에서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은 정상 인성을 갖췄다는 한 가지 표지이다. 즉, 그 사람의 이성이 정상이며, 정상 인성 안에서 사람이 생각하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을 모두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더없이 정상적인 일 아니겠느냐? 정상 인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했는데, 좋은 덕행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 일을 제창할 필요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럼 인성이 고상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인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인성이 있는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는 없다. 어떤 사람에게 인성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과 입장, 그리고 문제 처리 방식이나 방법이 상대적으로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다는 의미이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것을 보여 주는 한 가지 표지는 무엇이겠느냐? 그 사람에게 양심과 염치가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표지는 바로 그 사람에게 정의감이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며 편식하고 자극적인 음식을 좋아하는 등의 나쁜 생활 습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쁜 생활 습관 외에, 그에게는 장점도 있다.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원칙과 최저선이 있고, 염치를 알며, 정의감이 있는 등 긍정적인 면이 비교적 많고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면은 적은 편이다. 거기에다 그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며, 더 쉽게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만약 그 사람이 사악한 것을 사랑하고 명리와 지위를 추구하며 돈과 부자의 삶,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을 좋아한다면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과 인생관, 가치관은 모두 부정적이고 어두울 것이며, 그는 염치를 모르고 정의감이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인성이 없을 것이며, 진리를 받아들이거나 하나님께 구원받는 것도 분명 쉽지 않을 것이다. 이는 사람을 판단하는 간단한 원칙이다. 사람의 덕행을 판단하는 것은 인성을 지녔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다. 사람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려면 그의 인성을 보아야지, 덕행을 보아서는 안 된다. 덕행은 표면적인 부분에 많이 치중되어 있으며, 사회 풍조와 사회 배경,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몇몇 행동과 태도는 부단히 변화하기에 덕행만 봐서는 사람의 인성이 어떤지를 판단하기가 무척 힘들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사회 공중도덕을 열심히 지키고, 어디를 가든 규율을 지키며 일거수일투족 자제하고, 정부의 규정을 지킨다고 해 보자. 그는 공공장소에서도 큰 소리로 떠들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이익을 침해하지도 않으며, 남을 존중하고 돕고, 연장자를 도와 보호하고 어린이를 보살펴 준다. 이렇게 많은 장점을 갖고 있다면, 이것이 정상 인성을 살아 낸 좋은 사람이라는 의미가 될 수 있겠느냐? (그런 의미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라는 말을 착실히 행하고, 언제나 사람들이 선전하고 제창하는 그 덕행을 고수할 수도 있지만 그의 인성은 과연 어떻겠느냐?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덕행을 갖추었다고 해도 이는 그의 인성이 어떤지를 설명해 주지 못하며, 그 덕행으로 그의 인성이 좋은지 나쁜지를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럼 그의 인성을 어떻게 판단해야겠느냐?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덕행으로 만들어진 포장을 벗겨 버리고, 정상 인성으로 최소한으로 이를 수 있는, 사람 눈에 좋은 행위, 덕행을 제거한 뒤 그가 처신하는 원칙과 최저선, 진리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등 가장 중요한 모습을 보아야 인성 본질이나 내면에 있는 본성과 관련된 것들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사람을 바라보면 상대적으로 객관적이고 정확하다.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라는 덕행의 논조는 여기까지 교제하겠다. 이해가 되었느냐? (이해가 됩니다.) 나는 너희가 정말 이해한 것 같지 않아 늘 걱정이 된다. 그저 약간의 이치만 이해했을 뿐 본질적인 것들은 여전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몇 마디 더 하는 것이다. 너희가 이해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면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느낌은 어디에서 오겠느냐? 너희의 표정에 기쁨이 비치면 마음속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런 성과를 낼 수 있으면 내가 몇 마디 더 하는 것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라는 덕행의 요구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교제한 것 같다. 그것이 어느 부분에서 진리와 충돌하는지, 왜 진리의 수준까지 오를 수 없는지, 하나님이 사람의 행위와 덕행에 대해 과연 어떤 요구를 했는지 직접적으로 알려 주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것들을 모두 다루기는 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하나님 집에서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덕행을 제창하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하나님 집에서는 도대체 어떤 관점을 지니고 있더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것은 정상 인성에 갖춰져 있어야 하고 정상 인성으로 해내야 하는 부분이므로 제창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것은 사람의 덕행과 관련된 태도로, 처신의 원칙이나 추구 관점, 가는 길, 인성의 좋고 나쁨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덕행이 인성을 대표하더냐? (대표하지 않습니다. 어떤 덕행은 정상 인성에 갖춰져 있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 집에서는 인성을 얘기할 때 진리 추구라는 대전제하에서 인성과 사람에 대한 분별을 얘기한다. 기본적으로 사람의 덕행이 어떤지를 판단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그 사람이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지 판단하지 않는다. 그런 것을 관찰하지 않는다. 그저 사람의 인성이 어떤지, 긍정적인 사물과 진리를 사랑하는지, 하나님과 진리를 대하는 태도는 어떤지를 관찰할 뿐이다. 어떤 사람이 사회에 있을 때는 늘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믿은 후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지 않는다면, 제물을 관리할 기회가 생겼을 때 제물을 훔치거나 함부로 사용하거나 심지어 팔아먹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면, 이런 자는 어떤 존재겠느냐? (악인입니다.) 하나님 집의 이익과 관련된 일에서 그는 단 한 번도 일어서서 지키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있지 않더냐? (있습니다.) 그럼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라는 논조로 그의 인성을 판단하는 것이 적절하겠느냐? 적절하지 않다. 혹자는 “그는 예전에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품성이 고귀하고 사람들에게 많은 동조를 받았지요. 그런데 왜 하나님 집에 오니 변했을까요?”라고 하는데, 정말 변했겠느냐? 사실 변하지 않았다. 그는 겨우 그 정도의 덕행과 좋은 행위를 지녔을 뿐, 그 외에 그의 인성 본질은 원래부터 그러했으며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어디를 가나 그렇게 처신한다. 그저 예전에는 사람들이 진리로 그의 인성을 판단하는 게 아니라 덕행의 기준으로 판단했기에 변했다고 생각되는 것이지, 실은 변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그는 원래는 그러지 않았습니다.”라고 하는데, 그가 과거에 그러지 않았던 것은 그런 일들이 임하지 않았고, 그런 배경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밖에, 사람들 또한 진리를 깨닫지 못해 그를 분별하지 못한 것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판단할 때 한 가지 측면의 좋은 행위만 보고 인성 본질을 보지 않는다면 마지막에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사람을 간파할 수 없을뿐더러 좋은 외적 덕행에 가리고 미혹된다. 사람을 간파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언제나 상대를 잘못 믿고 발탁하여 쓰게 되며, 사람에게 미혹되고 기만당한다. 어떤 리더 일꾼은 사람을 발탁하고 쓸 때 늘 이런 잘못을 저지른다. 좋은 외적 행위나 덕행을 지닌 사람에게 속아 그들에게 중요한 사역을 맡기거나 중요한 물품을 보관하게 하는 것이다. 그 결과 문제가 생겨 하나님 집에 어느 정도 손해를 끼치게 된다. 문제가 생긴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리더 일꾼이 그 사람의 본성 본질을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의 본성 본질을 간파하지 못한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리더 일꾼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사람을 판단하거나 분별하지 못하며, 사람의 본성 본질을 밝히 알지 못하고, 그들이 하나님과 진리, 하나님 집을 과연 어떤 태도로 대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째서 모르겠느냐?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리더 일꾼들의 관점이 틀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관념과 상상으로 사람을 보았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진리 원칙으로 사람의 본질을 본 것이 아니라 사람의 덕행, 외적 행위와 모습으로 바라본 것이다. 그들은 사람을 볼 때 원칙이 없었기에 상대를 잘못 믿고 써서 속고 기만당하고 이용당했으며, 그 결과 하나님 집의 이익에 손실을 끼쳤다. 이는 사람을 볼 줄 모르고 사람을 간파하지 못해 생긴 결과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려면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공과는 바로 사람을 분별하고 바라보는 법이다. 이는 오랜 공과이자 가장 기본적인 공과이다. 사람을 간파하고 확실하게 아는 법을 배우려면 먼저 하나님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사람은 다른 이를 바라보고 판단할 때 어떤 그릇된 사상과 관점에 통제되고 주도되는지, 그것들이 사람을 판단하는 하나님의 기준과 충돌하지는 않는지, 어디에서 충돌하는지 알아야 한다. 네가 사람을 판단하는 방식과 준칙은 하나님의 요구에 근거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느냐? 진리에 의거하느냐? 그렇지 않다면, 너는 언제나 경험과 상상, 나아가 사회에서 제창하는 사회 공중도덕이나 네 눈으로 관찰한 것에 근거할 것이다. 그럼 네가 분별하려는 그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고, 간파할 수도 없다. 네가 그를 믿고 쓴다면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해야 하며, 하나님의 제물과 교회 사역, 그리고 하나님 선민들의 생명 진입에 해를 끼칠 가능성을 피할 수 없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려면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공과는 바로 사람을 분별하는 법이다. 물론, 이는 사람이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측면의 진리이기도 하다. 사람을 분별하는 법을 배우려면 오늘 교제한 화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즉, 어떤 것이 사람의 좋은 덕행이고 좋은 인품인지, 어떤 것이 정상 인성에 갖춰져야 할 부분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이 두 가지를 분명히 분별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이 두 가지를 분명히 분별해야 사람의 본질을 확실히 간파하고 알 수 있으며, 마지막에 누가 인성이 있는 사람이고 누가 인성이 없는 사람인지 확신할 수 있다. 분별할 줄 알려면 먼저 무엇을 갖추어야겠느냐? 하나님의 말씀과 이 부분의 진리를 깨달아 사람을 바라볼 때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해야 한다. 이는 진리를 추구할 때 마땅히 실행하고 갖춰야 할 진리 원칙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이 화제를 교제하는 것은 아주 필요한 일이다.
방금 우리는 “재물을 주어도 갖지 마라.”라는 첫 번째 논조에 관해 교제했다. 이는 분명 한 측면의 덕행이며, 사람의 품격과 일시적인 행위가 가져다주는 좋은 인상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사람이 인성을 지녔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두 번째 “기꺼이 남을 도우라.” 역시 마찬가지다. 논조로 보면 이 말 역시 사람들이 환영하고 좋다고 여기는 행위이다. 이런 좋은 행위를 지닌 사람은 당연히 좋은 덕행과 인품을 가진 사람으로 떠받들어진다. 종합하자면, 그들은 기꺼이 남을 돕는 사람이고, 품격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이다. ‘기꺼이 남을 돕는 것’은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것’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 기꺼이 남을 돕는 것 또한 어느 정도는 사회 풍조 속에서 생겨난 좋은 행위이다. ‘기꺼이 남을 돕는 것’을 사전적으로 풀이해 보면, 남을 돕는 것을 자신의 의무가 아니라 기쁨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는 남을 돕는 것을 ‘책임’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즐거워서 ‘기꺼이’ 행한다. 이러한 점을 보면 남을 돕는 목적이 무엇이겠느냐?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마음속에 번뇌와 고통이 많기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 돕고 베풀고 도움의 손을 내밀며 힘닿는 데까지 좋은 일을 함으로써 마음속으로 행복과 기쁨, 평안,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며, 그로 인해 삶이 그렇게 공허하거나 고통스러워지지 않고 더 충실해지려는 것이다. 즉, 자신의 덕행을 쌓는 것으로써 영혼과 사상의 경지를 정화시키고 승화시키는 목적을 이루려는 것이다. 그럼 이것은 어떤 성질의 행위겠느냐? 이러한 면에서 해석하면 기꺼이 남을 돕는 사람이라고 해서 좋은 사람은 아니다. 최소한 그는 도덕적인 각도에서, 혹은 양심이나 인성의 각도에서 출발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거나 사회에서, 가정에서 책임을 다한 것은 아니다. 그저 기쁨과 정신적인 위안, 영혼의 위로, 더 행복한 삶을 위해 그 일을 한 것이다. 이런 덕행이 어떠하냐? 성질을 보았을 때, 이런 덕행은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으려면 최소한 이기적인 부분이 없어야 한다. 그럼 ‘기꺼이 남을 돕는 것’은 어떠하냐? 이 ‘기꺼이’라는 말을 보면 그 행위에 이기적인 불순물과 비열한 속셈이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남을 돕는 것은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며, 그의 행위는 사욕 없는 봉헌도 아니다. 그는 자신의 기쁨을 위해 남을 돕는다. 이는 결코 제창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예를 들어, 한 노인이 거리에서 실수로 넘어졌다고 해 보자. 그 상황을 보고 ‘나는 요즘 계속 기분이 별로였지. 저 노인이 넘어진 것은 나한테 기회야. 이 기회에 기꺼이 남을 도와주면서 기쁨을 얻자!’라고 생각한 너는 다가가서 그 노인을 부축해 주었다. 일어선 노인은 너를 칭찬하며 “착한 아이구나. 너는 정말 좋은 사람이구나. 네 앞날에 평안과 기쁨이 가득하기를 바라네. 건강하게 오래 살렴!”이라면서 좋은 말을 잔뜩 늘어놓았다. 그의 말에 너는 순식간에 번뇌가 사라지며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남을 돕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며 그다음부터는 할 일이 없을 때마다 거리를 돌아다니며 넘어지는 사람을 보면 얼른 다가가 부축해 주었다. 이런 사상에 지배되어 드러낸 좋은 행위를 인류 사회에서는 기꺼이 남을 돕는 훌륭한 전통이라고, 기꺼이 남을 돕는 훌륭한 전통의 고상한 품격을 계승한 거라고 정의한다. 기꺼이 남을 돕는 행위의 이면을 보면, 도움을 주는 사람들은 종종 자기 자신을 도덕적 최고점에 올려 두고, 엄청난 선인으로 여긴다. 사람들이 칭찬하면 할수록 그는 더더욱 남을 돕고 베풀려고 하며, 남들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서 자신의 영웅주의 심리, 중생을 계도하겠다는 마음, 남들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 거기에서 만족을 느끼는 심리를 충족하려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욕구를 가지고 있지 않더냐? 남들에게 필요한 사람이 됐을 때, 자신이 무척 쓸모 있는 사람 같고, 살아가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 아니겠느냐? 사람은 존재감을 드러내야 기쁨을 느낀다. 이는 사람이 생존하는 이치이다. 사실, 기꺼이 남을 돕는 것은 어떤 각도에서 보든, 사람의 덕행을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다. 기꺼이 남을 돕는 일은 사실 대부분의 경우에 무척 쉽다. 네게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사회적 책임을 어느 정도 다한 것이다. 네게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도 아무도 책임을 다하라고 추궁하지 않으며, 사회 여론도 너를 질타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칭찬해 마지않는 좋은 행위들을 행해도 그만, 행하지 않아도 그만이다. 기꺼이 남을 도우라는 논조로 사람을 결박하여 남을 도우면서 기쁨을 느끼는 법을 배우게 할 필요는 없다. 기꺼이 남을 돕는 것 자체는 일시적인 좋은 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하든, 아니면 공덕심이라는 각도에서 이 일을 대하든 마지막에 어떤 결과가 발생하겠느냐? 한 번 좋은 사람이 되어 레이펑(雷鋒) 정신을 떨치는 데 만족하며, 그것을 기쁨과 위안으로 삼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사상적 경지를 끌어올리는 것, 오직 그것뿐이다. 본질이 이러하다. 너희는 여태까지 기꺼이 남을 도우라는 논조를 어떻게 인식했느냐? (여태까지는 사람 내면의 그 이기적이고 비열한 속셈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책임지는 일이 있다면 너는 어깨가 무거울 것이고, 그 일을 행할 때 어려움이 있다면 고통과 희생을 겪으며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그래도 해낼 수 있지만, 그 일을 할 때 그렇게 기쁘지는 않을 것이다. 네가 대가를 치르며 일을 마무리 지었다고 해도 마지막 결과 역시 네게 어떤 기쁨이나 위안을 가져다주지는 않겠지만, 그것은 네 책임이자 네가 해야 할 일이기에 너는 해낼 수 있다. 이것과 ‘기꺼이 남을 돕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인성이 있어 보이느냐? (사람으로서의 책임과 본분을 다하는 것이 더 인성이 있어 보입니다.) 기꺼이 남을 돕는 것 자체는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특정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사회 여론, 사회 공중도덕, 나아가 어떤 국가의 법률이 사람의 덕행과 사회적 책임에 제기한 요구일 뿐이며, 그것을 통해 덕행이 있는지, 인성이 어떤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꺼이 남을 돕는 것은 인류 사회가 사람의 사상적 경지를 끌어올리기 위해 제기한, 사람의 행위를 제약하는 논조에 불과하다. 이 논조는 사람이 좋은 행위를 하게 할 뿐이며, 그 좋은 행위의 판단 기준은 사회 공중도덕과 사회 여론, 나아가 법률이다. 예를 들어, 공공장소에서 도움이 필요한 이를 보았을 때 그에게 가장 먼저 다가가 도와줘야 할 사람이 너라고 해 보자. 그런데 네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은 너를 어떻게 보겠느냐? 교양이 없다고 욕할 것이다. 이것이 사회 여론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사회 공중도덕이란 무엇이겠느냐? 이 사회가 선전하고 제창하는, 진취적인 것이자 풍조이다. 물론 구체적인 내용에는 많은 것이 포함된다. 예를 들어, 사람은 마땅히 약한 자들을 도와주어야 하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면 도움의 손을 내밀어야지, 수수방관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이러한 덕행을 지녀야 한다. 이를 사회 공중도덕이라고 한다.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보고도 못 본 척 수수방관하며 강 건너 불 보듯 한다면, 이것은 사회 공중도덕이 없는 것이다. 그럼 법적으로는 사람의 덕행 측면에 어떤 요구를 하겠느냐? 여기에는 특수한 경우가 있다. 중국의 법률은 사람의 사회적 책임이나 사회 공중도덕에 대한 명문화된 규정이 없다. 그저 모두가 가정 교육이나 학교 교육, 사회에서 빈번하게 들은 것들에 영향을 받아 얼마간 알게 되었을 뿐이다. 반면, 일부 서양 국가는 법적으로 이 부분에 명문화된 규정이 있다. 예를 들어, 길을 걷다가 넘어진 사람을 보았을 경우, 최소한 다가가서 “Are you OK? Do you need help?(괜찮으세요? 도움이 필요하신가요?)”라고 물어야 한다. 만약 그 사람이 “I’m OK. Thank you.(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한다면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 즉, 그 책임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가 “I need help, please.(저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부탁합니다!)”라고 말한다면 너는 그를 도와주어야 한다. 돕지 않는다면 법적인 책임을 물게 된다. 이는 몇몇 국가가 사람의 덕행에 대해 법적으로 명문화된 규정을 통해 제기한 특수한 요구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회 여론, 사회 공중도덕, 심지어 법률이 사람의 덕행에 제기한 요구들은 사람의 행위에 국한되는데, 그 행위의 기본 준칙은 바로 사람의 덕행을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이다. 겉으로 볼 때, 이 덕행의 기준이 판단하는 것은 사람의 행위, 즉 사람이 사회적인 책임을 다했는가 하는 것이다. 한편 본질을 볼 때, 그것이 판단하는 것은 너라는 사람의 인품이 어떠한가 하는 것이다. 사회 여론이든 사회 공중도덕이든, 혹은 법률이든 그것이 판단하는 것, 혹은 요구하는 것은 사람이 행하는 일, 사람의 행위에 국한된다. 행위를 통해 그 사람의 덕행과 인품을 판단하는 것, 바로 이것이 범위이다. 기꺼이 남을 돕는 것은 이런 성질을 갖는다. 기꺼이 남을 도우라는 측면에서 서양은 법적 규정을 통해 요구하고, 중국은 전통문화로 교육하고 물들인다. 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사실 그 성질은 동일하다. 즉, 다 같은 논조로 사람의 행위와 덕행을 제약하고 규범화한다. 하지만 서양의 법률이든 동양의 전통문화든, 그것은 그저 사람의 덕행과 행위에 어느 정도 요구를 하고 규범을 제기한 것에 불과하며, 그 준칙은 사람의 덕행과 행위를 규범화하는 데 그친다. 그것들 중 사람의 인성에 관한 것이 있더냐? 사람이 마땅히 어떤 행위를 갖춰야 한다고만 규정하고 있는데, 이것을 사람의 인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겠느냐? (불가능합니다.) 기꺼이 남을 도우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몇몇 악인들도 기꺼이 남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속셈과 목적이 있다. 마귀가 좋은 일을 할 때는 더더욱 그러하다. 말해 보아라. 기꺼이 남을 돕는 사람들이 모두 정의감이 있고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겠느냐? 중국의 그 의협심 있는 사람들, 부자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을 돕는 사람들, 나아가 수시로 장애인이나 사회의 취약 계층 등을 도와주는 소위 ‘기꺼이 남을 돕는’ 인사들이 모두 인성을 지닌 사람들이겠느냐? 모두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고 정의감이 있는 사람들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껏해야 인품이 상대적으로 좋은 사람에 불과하다. 기꺼이 남을 돕는 정신에 지배되어 자신이 기쁨과 위안을 얻고 충분히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일들을 수도 없이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이런 행위가 있다고 해서 인성이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의 신앙이 무엇인지, 그들의 정신세계 추구가 무엇인지 아직 알 수 없고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그럼 ‘기꺼이 남을 돕는’ 그들의 좋은 덕행을 봤을 때, 그들을 인성과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소위 ‘기꺼이 남을 돕는’ 재단이나 복지원 등은 장애인이나 사회 취약 계층을 돕지만, 기껏해야 사회적인 책임을 다할 뿐이다. 더 좋은 사회 여론을 조성하고 자신들의 지명도를 높이며 기꺼이 남을 돕는 심리를 만족시키기 위해 그런 일을 하니, ‘그들은 인성이 있는 사람이다’라는 주장은 전혀 성립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들이 기꺼이 남을 도울지는 몰라도, 도움을 받는 상대가 정말 꼭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겠느냐? 기꺼이 남을 돕는 일이 그 자체로 정의로운 일이겠느냐? 꼭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사회의 크고 작은 일들을 많이 보면 이해하게 될 것이다. 어떤 것은 순수하게 ‘기꺼이 남을 돕는’ 일이다. 하지만 기꺼이 남을 돕는 일 중 많은 것들이 내면에 밝힐 수 없는 비밀과 사회의 어두운 면을 숨기고 있다. 어찌 됐든 ‘기꺼이 남을 돕는 것’에는 속셈과 목적이 들어 있다. 그것은 이름을 알리고 남들 앞에 드러나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사회의 공중도덕을 지키고 법을 어기지 않기 위한 것일 수도 있으며, 더 좋은 사회적 평판을 얻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어떤 측면에서 보든 그것은 사람의 표면적인 행위일 뿐이며, 기껏해야 좋은 덕행으로, 하나님이 요구한 정상 인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기꺼이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무척 평범하고 야심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고, 사회적으로 유명한 인물일 수도 있으며, 마음씨가 꽤 좋은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음씨가 상대적으로 악독한 사람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든 다 될 수 있고, 누구든 한순간은 기꺼이 남을 돕는 행위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꺼이 남을 도우라는 덕행의 논조는 절대 인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기꺼이 남을 도우라는 덕행의 논조는 사실 인성의 본질을 대표하지 않으며, 사람의 본성 본질과 큰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그것을 통해 인성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인성을 어떻게 판단해야 적절하겠느냐? 적어도 그가 남을 돕고 책임을 다할 때 자신이 행복한지에 근거하여 판단해서는 안 된다. 양심과 이성에 근거하여 자신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남을 돕는 것이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또는 자신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줄지 등을 고려하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것들을 고려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남을 도우며 상대가 고통받지 않게 해 준다면, 그러니까 어떤 사심이나 목적 없이 순수하게 남을 돕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실로 인성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남을 돕는 목적이 스스로가 기쁨이나 명성을 얻기 위해서라면 이기적이고 비열한 성질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진실로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사람들을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자는 오직 자신의 기분을 충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남을 도우며, 보답을 바라지 않고, 다른 속셈이나 목적도 없다. 그렇게 할 때 어려움이 있다거나 사람들의 판단을 마주한다고 해도, 심지어는 위험에 맞닥뜨린다고 해도 그는 그것이 사람의 본분, 책임이라고 인식한다. 만약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하나님께도 죄스러운 일이며 평생의 한이 될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며, 최선을 다한 후 하늘의 뜻에 순종한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평가하든, 고마워하든 우러러보든 상관없이 마음을 다해 그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으면, 그는 만족한다. 이렇게 일을 처리하는 자가 바로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이며, 이런 일 처리가 바로 품격이나 덕행이라는 범위의 행위에 그치지 않고 인성을 갖춘 모습이다. 기꺼이 남을 돕는 것은 한 가지 측면의 행위일 뿐이며, 어떨 때는 특수 상황 속에서 보이는 행위에 불과하다. 이런 일시적인 행위는 기분이나 정서, 사회 환경, 당시 배경에 따라서, 또 그 일을 하는 것이 자신에게 어떤 이익이나 피해가 되는지에 따라서 좌우된다. 인성이 있는 사람은 남을 도울 때 이러한 것들을 보고 판단하지 않는다. 그의 판단 기준은 더 긍정적이고 옳으며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에 부합한다. 심지어 때로는 도덕적인 기준과 모순되거나 충돌하는데도 입장을 지키며 행하기도 한다. 도덕적인 준칙과 사상 관점은 일시적인 행위를 제약할 뿐이다. 그 행위의 좋고 나쁨은 사람의 기분, 정서, 선악, 또는 한때의 선하고 악한 마음에 따라 변화하며, 당연히 사회 풍조나 사회 환경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여기에는 불순물이 무척 많다. 그것들은 전부 표면적인 것으로, 과연 인성이 있는지를 판가름할 수 없게 한다. 하지만 사람의 인성 본질, 사람의 추구, 인생관과 가치관, 걸어가는 길, 처신하고 일 처리하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근거로 인성이 있는지를 판단하면 상대적으로 훨씬 정확하고 실제적이다. 말해 보아라. 인성과 덕행을 판단할 때 근거가 되는 것 중 어떤 것이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덕행을 판단하는 기준이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아니면 인성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어떤 기준이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사실, 인성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진리에 부합한다.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사람의 덕행을 판단하는 것들이 기준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말 한마디에 변할 수 있고 사람의 거래와 이익, 기호, 추구, 정서, 사악한 사상, 패괴 성품 등의 불순물이 무척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류와 불순물이 너무 많아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을 판단하는 준칙이 될 수 없다. 그 안에는 사탄이 사람에게 주입한 갖가지 것들이 있으며, 사람의 사탄 패괴 성품으로 인해 생겨난 수많은 추가 조건들도 있기에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종합적으로 봤을 때, 덕행 측면의 그 준칙들이 사람 눈에 도달하기 쉬워 보이든 어려워 보이든, 수준이 높아 보이든 낮아 보이든, 아니면 평범해 보이든 상관없이 그것들은 사람의 행위를 제약하고 규범화하는 논조에 불과하며, 사람의 덕행과 인품의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요구한, 진리로 사람의 인성을 판단하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사람이 인성 안에 최소한으로 갖추고 도달해야 할 기준조차 없고, 거기에 도달하지도 못한다. 사람이 사람을 판단할 때 덕행 측면의 모습에 치중하는 것은 전적으로 전통문화의 요구에 근거하여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판단할 때 덕행과 관련된 특정 모습 하나만을 보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의 인성 본질을 중요시한다. 인성 본질에는 어떤 것들이 포함되겠느냐? 사람의 기호, 일을 바라보는 관점, 인생관, 가치관이 포함되며, 사람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정의감이 있는지,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는지,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에 순종할 수 있는지, 어떤 길을 선택했는지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것들에 근거하여 사람이 지닌 인성 본질을 보아야 정확하다. 기꺼이 남을 도우라는 논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교제한 것 같다. 지금까지 덕행에 대한 요구 두 가지를 교제하였다. 이제 덕행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덕행과 하나님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어떻게 다른지, 그 기본적인 분별의 원칙을 모두 알겠느냐? (네.)
방금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마라.’, ‘기꺼이 남을 도우라.’라는 덕행에 관한 전통문화의 요구 두 가지를 교제하였다. 이 두 가지 측면의 교제를 통해 뭔가 깨달은 바가 있느냐? (사람의 덕행과 인성 본질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이러한 덕행을 지녀 봤자 도덕 품격 면에서 어느 정도 좋은 행위와 태도를 보이게 될 뿐, 인성이 있고 사람다운 모습을 살아 낸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 점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좋은 덕행이 있다고 해서 꼭 인성을 갖춘 사람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을 것이다. 사실이 그러하다. 사람은 모두 사회의 사악한 흐름을 따라가면서 조금씩 양심과 이성을 잃었기에 사람다운 모습으로 살아가는 자가 몇 안 된다. 지난날, 길가에서 돈 한 푼을 주워 경찰 아저씨에게 갖다주던 사람들이 지금 모두 좋은 사람이 되었겠느냐? 꼭 그런 것은 아니다. 한때 영웅으로 칭송받던 사람들은 어떤 결말을 맞이하였더냐? 머릿속에 떠오르는 바가 있을 것이다. 한때 기꺼이 남을 도우며, 시상대에서 붉은 꽃을 가슴에 달고 도덕적인 모범, 엄청난 선인(善人)으로 추앙받던 사람들은 나중에 어떻게 되었느냐? 대부분이 좋은 작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름을 알리려는 목적으로 몇 가지 좋은 일을 했을 뿐, 사실 이면의 행동과 삶, 인품은 대부분이 별로였고, 아첨하는 것 외에는 어떤 능력도 없었다. 가슴에서 붉은 꽃을 떼어 내고 사회의 도덕적인 모범이라는 수식어를 걷어 내면, 그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조차 모른다. 말해 보아라.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사회가 그에게 ‘도덕적인 모범’이라는 면류관을 씌우고 해친 것 아니겠느냐? 그는 자신이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한 채 높이 추앙받아 자신이 무척 위대하다고, 평범해질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 상태로 삶이 엉망이 되며, 심지어 어떤 이는 마지막에 술에 절거나 우울증에 걸리거나 자살하기까지 한다. 이런 사람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들은 늘 느낌을 따르고, 영웅이나 모범이 되고자 하며, 이름을 크게 알리고 도덕적 정점에 서려고 한다. 그들은 늘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는데, 먹고사는 현실의 일들을 그들은 귀찮고 고통스럽게 여긴다. 그러한 고통을 직면할 때, 그들은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고, 어떻게 올바른 인생길을 선택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어떤 이는 자극을 좇으며 마약에 취하고, 어떤 이는 공허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선택하며, 어떤 이는 자살은 하지 않더라도 결국 우울증으로 목숨을 잃는다. 이런 사례가 많지 않더냐? (많습니다.) 이는 전통문화의 해악이다. 전통문화는 사람이 인성을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사람이 걸어야 할 바른길로 인도하지 못한다. 이 두 가지를 하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사람을 그릇된 길, 허망한 상상 속 세상으로 이끈다. 이는 사람을 해치는 것, 그것도 심각하게 해치는 것이다. 혹자는 “전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저희는 지금 무척 잘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하는데, 지금 너희가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가 있기 때문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너희를 택하고 지켜 주었기에 운 좋게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여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말씀을 읽고 예배하고 교제하고 본분을 이행하며 정상인의 삶을 살고 정상적인 이성으로 일상생활 속 일들을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너희의 사상 깊은 곳에 여전히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마라.’, ‘기꺼이 남을 도우라.’ 등과 같은 사상 관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와 동시에, 사람에게서 비롯된 사상과 도덕 준칙들 역시 너희를 옭아매고 있다. 어째서 너희를 옭아매고 있다고 하겠느냐? 너희가 선택한 인생길, 일하고 처신하는 원칙과 방향,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원칙, 방식, 준칙 등 모든 것이 정도는 달라도 여전히 이런 사상과 도덕 준칙의 영향을 받으며, 심지어는 그것에 결박되고 통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는 너희가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근거와 준칙이 되지 못했다. 지금 너희는 그저 올바른 인생의 방향을 선택했고, 진리 추구의 길을 걷겠다는 바람과 이상, 기대를 갖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사실, 너희 중 더 많은 사람이 진리 추구의 길,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람에게 예비해 준 올바른 길에 아예 들어서지도 못하고 있다. 혹자는 “그 길에 들어서지 못했다면, 저희는 지금 왜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 것입니까?”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사람의 선택과 협력, 양심, 다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금 너는 하나님의 요구에 협력하여 열심히 공을 들이지만, 공을 들인다는 것이 진리 추구의 길에 들어섰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 이유 중 하나로 너희가 여전히 전통문화가 주입한 사상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오늘 교제하고 폭로한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마라.’, ‘기꺼이 남을 도우라.’라는 두 가지 논조의 본질을 너희는 지금 무척 잘 이해하고 있지만, 며칠 후에는 마음이 바뀌어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라는 게 뭐가 안 좋다는 거지? 나는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사람이 좋아. 그런 사람은 적어도 욕심이 없잖아. 기꺼이 남을 돕는 건 또 뭐가 나빠? 적어도 도움이 필요할 때 누군가 손을 내밀어 도와주잖아. 그건 무척 좋은 거라고. 사람에게 필요한 거란 말이야! 게다가 남을 돕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 보든 무척 좋은 일이야. 그건 긍정적인 사물이고 마땅히 해야 할 의무니까 비판해서는 안 돼!’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보아라. 깨달음을 얻은 지 며칠이나 됐다고 잠 한숨 자고 나니 변해서 처음으로 돌아갔다. 다시 전통문화에 얽매이는 상태로 돌아간 것이다. 즉, 사상 깊은 곳에 있는 것들은 시시때때로 네 사상 관점에 영향을 주는 동시에 네가 선택한 길에도 영향을 준다. 또 그것은 네게 영향을 주는 동시에 불가피하게 계속 네 발목을 잡아 네 뜻대로 올바른 인생길, 진리를 추구하는 길,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인생길에 들어서지 못하게 한다. 네가 마음속으로 그 길에 무척 들어서고 싶어 하고 그것을 몹시 갈망하며, 그 일 때문에 초조해서 매일 계획을 세우고 생각하며 다짐한다고 해도, 또 매일 그 일을 두고 기도한다고 해도 현실은 여의찮다. 전통문화가 네 내면 깊은 곳에 너무 깊이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전통문화가 사람의 마음속에 너무 깊이 뿌리내렸다고 하시지만, 그건 사실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 겨우 20대입니다. 70, 80대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것들이 마음속에 너무 깊이 뿌리내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는데, 어째서 너무 깊이 뿌리내렸다고 하겠느냐? 말해 보아라. 네가 사물을 구별하고 기억하기 시작한 이래로, 부모에게 교육받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너는 상대적으로 고상한 사람이 되기를 꿈꾸지 않았느냐? 예를 들어, 많은 사람이 의협심을 다루는 영화나 소설을 보기를 좋아하는데, 이야기 속 피해자 캐릭터를 무척 동정하고 포악한 자, 가해자, 부정적인 캐릭터를 증오한다. 너는 이런 배경 속에서 자라면서 너도 모르게 일반 대중이 공통으로 인정하는 것들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왜 그것들을 받아들였겠느냐? 사람은 천성적으로 진리가 없고, 사물을 분별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너에게는 그런 본능이 없다. 사람은 좋은 것, 올바른 것, 긍정적인 것을 좋아하는 본능을 타고났다. 이 긍정적이고 올바른 것들은 네가 좋은 방향으로 행동하고 싶게 하고 좋은 사람이나 영웅, 위인이 되고 싶게 한다. 네가 사회 여론이나 공중도덕과 관련된 논조를 접할 때, 이러한 것들은 네 마음속에서 조금씩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도덕적인 면에 관한 전통문화의 논조는 네 마음속에 들어가 네 내면세계에 진입한 후 네 마음속에 뿌리내리고 네 삶을 주도하기 시작한다. 그때, 너는 분별하고 저항하고 거부하는 게 아니라 그것들이 네게 필요하다고 마음속 깊이 느낀다. 그렇기에 네 첫 번째 행동은 그 논조에 영합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그 논조들은 사람의 입맛과 관념, 정신세계의 필요에 너무 잘 들어맞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는 그 논조들을 전혀 경계하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가정 교육과 학교 교육, 사회의 영향과 주입 속에서, 거기에 네 상상까지 더해져 차츰차츰 마음속 깊이 그것들을 긍정적인 사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으면서 갖가지 배경과 조건 속에서 열심히 그 논조들과 인성 본능이 좋아하고 옳다고 여기는 것들을 좇게 된다. 그것들은 네 내면에서 점점 형태를 갖추고 뿌리를 내리는 한편, 네 인생관과 추구 목표를 주도하여 사람과 사물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전통문화의 이러한 논조가 사람의 내면에서 형태를 갖출 때,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진리를 대적하는 가장 기본적인 소재가 생겨난다. 마치 자신만의 이유와 근거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사람의 패괴 성품과 패괴 본질을 폭로할 때, 정면으로 호되게 사람을 형벌하고 심판할 때, 사람은 각종 관념을 품으면서 마음속으로 ‘사람들은 늘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욕을 해도 허물은 들추지 말라.’,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고 말해. 그런데 하나님은 왜 저렇게 말씀하시는 거지? 저분이 정말 하나님이실까? 하나님이라면 저렇게 말씀하시지 않을 거야. 하나님이라면 지고지상의 자리에 서서 온화한 어조, 중생을 계도하는 어조, 보살의 어조로 말씀하시겠지. 그런 분이 하나님이셔. 얼마나 온화하고 위대한 모습이냐고!’라고 생각한다. 이 일련의 생각과 관점, 관념이 네 마음속에서 계속 밖으로 튀어나오면, 또 점점 더 자주 튀어나오면, 결국 너는 참지 못하고 부지중에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일을 저지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네 관념과 상상에 의해 망쳐지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나이가 많든 적든 전통문화의 교육을 받고 성년의 사상을 갖고 있는 한, 네 마음속에는 이미 전통문화, 도덕과 관련된 것들이 가득할 것이다. 그것들은 네 내면에서 점점 깊게 뿌리내려 이미 너를 주도하고 있으며, 너는 그것들에 기댄 채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또 네 생명과 본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전통문화와 도덕에 점령되어 있다. 예를 들어, 너는 5~6세 때부터 ‘기꺼이 남을 도우라.’,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마라.’라는 법을 배웠고, 이런 것들에 영향을 받아 네 행위는 완전히 이것들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 지금 중년의 나이가 된 너는 그것들로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이는 네가 하나님이 요구한 기준에서 매우 멀어졌음을 의미한다. 전통문화가 제창하는 그 덕행의 논조를 받아들였을 때부터 너는 하나님의 요구에서 점점 더 멀어졌고, 네 인성의 기준과 하나님이 요구한 인성의 기준 사이의 간극은 점점 더 벌어졌다. 그렇게 너는 하나님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냐? 내가 한 이런 말들을 천천히 묵상해 보도록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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