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추구란 무엇인가(4) 제 2 부

우리는 좋은 행위 중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온화하고 우아한 것, 점잖고 예의 바른 것,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 상냥하고 친절한 것, 가까이하기 쉬운 것 등의 몇 가지를 열거했다. 이제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을 예로 들어 구체적으로 교제하겠다.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인류의 삶 속에서 무척 정상적인 현상이다. 이와 같은 일은 일부 동물 무리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니 당연히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들 사이에서는 더 잘 드러나야 할 것이다. 인류는 이 부분을 다른 동물들보다 더 제대로,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지켜야지, 대충 흉내만 내서는 안 된다. 사람은 다른 생물에게 없는 양심과 이성을 지녔기에,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행위를 더 제대로 해내야 하며, 이 부분에서 인간의 인성이 다른 생물의 본질보다 낫다는 사실을, 인간은 다른 생물과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 줘야 한다. 그런데 인간이 정말 그렇게 하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 그렇게 하더냐? (여전히 그렇지 않습니다.) 일반 서민들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사회의 상류층, 혹은 궁중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요즘 몇몇 국가에서 사극 드라마가 자주 방영되면서 여러 황실의 복잡하고 어수선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황실 사람들은 민간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장유유서를 강조하며, 황실에서는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을 백성들보다 더 깊이 있고 세부적으로 교육한다. 황실에서 나이가 어린 사람들은 백성들보다 더 연장자를 공경하고 존중하며, 관련된 예법도 무척 많다. 또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행위에 대한 요구가 무척 높아서 조금만 부족해도 안 된다. 표면적으로 볼 때, 그들은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한다는 전통문화의 요구를 다 지킨다. 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잘, 제대로 해내고 표면적으로 얼마나 그럴듯하며 흠잡을 수 없는 모습을 보이든, 그 흠잡을 수 없는 행위 뒤에는 각종 권력의 교차와 세력의 각축전이 숨겨져 있다. 아들과 아버지, 손자와 할아버지 간에, 노비와 주인, 신하와 군주 간에, 표면적으로는 모두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 준칙을 지키고 있지만, 황권과 각종 세력이 얽혀 있기에 이 외적 행위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며, 황권 계승과 각종 세력 다툼의 마지막 결과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물론, 이 좋은 행위는 황권을 노리거나 권력에 야심을 가진 자들을 전혀 제약하지도 못한다. 백성들은 모두 선조 때부터 내려온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한다는 규범을 지키며, 이 규범의 제약 아래에서 살아간다. 이익이 얼마나 얽혀 있든, 이익 분쟁이 일어날 때 어떤 싸움을 벌이든, 얼마 후에는 함께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황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더 큰 이익과 권세에 얽혀 있기에 다툼 끝의 마지막 결과는 승자는 왕이 되고 패자는 역적이 된다. 즉, 상대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 것이다. 승자든 패자든 그들은 모두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규범을 지킨다. 그러나 각자의 세력과 욕망, 야심이 다르기 때문에, 또는 실력이 다르기 때문에 결국 누구는 살아남고 누구는 패망한다. 이는 무엇이 결정한 것이겠느냐?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한다는 규범이 결정한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이 결정한 것이겠느냐? (사람의 사탄 본성이 결정한 것입니다.) 내가 한 이 말은 무슨 의미겠느냐? 이러한 규범, 사람들 사이에서 기발한 소위 좋은 행위들이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사람이 어떠한 길을 걸을 것인가는 그가 교양 있고 사리 밝은지, 상냥하고 친절한지,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지에 달린 것이 아니라 본성에 달려 있다. 요컨대, 인류에게 생겨난 이런 좋은 행위와 관련된 논조를 하나님 집에서는 제창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좋은 행위라고 여기는 것들은 그저 좋은 행위와 모습일 뿐, 진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 좋은 행위, 모습이 있다고 해서 진리를 실행한다는 것은 아니며,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좋은 행위’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도, 하나님 집에서 제창하는 것도, 나아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과 요구에 맞지도 않는다면, 하나님에게는 사람의 행위에 대한 요구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따르는 신자들의 행위에 대해 여러 말을 한 바 있다. 그 말들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제기한 진리 측면의 요구와 달리 상대적으로 간단하지만, 그래도 구체적인 내용이 있다. 하나님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어떤 요구를 하겠느냐? 예를 들어, 성도의 품위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 있다. 이는 사람의 행위에 대한 요구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밖에도 방탕하게 행동하지 말 것, 자제할 것, 기이한 복장을 하지 말 것,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지 말 것, 남을 때리거나 욕하지 말 것, 우상을 숭배하지 말 것, 부모에게 효도할 것 등은 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에 대한 행위상의 요구이다. 이는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니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그를 따르는 사람의 행위에 대해 구체적인 요구를 했다. 이 구체적인 요구들은 이방인들이 말하는 좋은 행위와 다르다. 이방인들이 말하는 좋은 행위는 사람을 다른 하등 동물과 구별되는 고등 동물이 되라는 것뿐이다. 반면,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사람이 이방인, 즉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구별되라는 것이다. 동물과 구별되라는 것이 아니다. 예전에는 ‘거룩하게 구별되다’라는 말이 있었다. 이 말은 좀 과장된 감이 있고 정확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제기한, 행위상의 요구였다. 다시 말해 보아라. 어떤 것들이 있느냐? (성도의 품위를 갖춰야 하고, 방탕하게 굴면 안 되며, 자제해야 합니다. 또 기이한 복장을 해서는 안 되고,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셔도 안 되며, 사람을 때리거나 욕해도 안 됩니다. 이 밖에도 우상을 숭배하지 말고 부모에게 효도해야 합니다.) 그 외에 또 있느냐? (다른 이의 물건을 탐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며, 거짓 증거를 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들도 포함된다. 이는 율법에 있는 것으로, 시초에 하나님이 인류의 행위에 대해 제기한 요구이며, 지금 보아도 현실적이고 실제적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요구들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행위를 규범화한다. 그 표면적인 행위들은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표식이다. 만약 네가 그러한 행위와 모습을 갖추었다면, 사람들은 겉모습을 보고 너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며, 최소한 너에게 동조하고 수긍하면서 너라는 사람은 이방인과는 달리 성도의 품위를 갖추었다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모습이 있다고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은 후에도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늘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싸우고 때리며, 심지어는 간음이나 도둑질까지 한다. 행위조차 자제하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못하니, 이방인들은 그를 보고 “저런 자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어째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은 거지?”라고 말한다. 그를 존경하지도, 믿지도 않기에, 그가 복음을 전하면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요구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는 사람, 마음씨가 선량한 사람, 정상 인성을 갖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바로 실행할 수 있으며, 그 행동은 꾸며 낸 것이 아니다. 그는 최소한 양심과 이성에 기대 행동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제기한 그 구체적인 요구들은 인류가 제창하는 좋은 행위와 어떤 차이가 있겠느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무척 실제적이어서 사람이 정상 인성을 살아 내게 합니다. 반면, 전통문화가 요구하는 것은 전부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행위로, 이렇다 할 실제적인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그렇다. 전통문화가 사람에게 요구하는 그 좋은 행위들은 전부 거짓이고 꾸며 낸 것으로, 속임수이다. 겉으로는 더없이 듣기 좋겠지만, 그 속은 다르다. 그것이 바로 가면, 허상이다. 그것은 인성의 본질 속에서 드러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체면과 명성, 지위를 위해 꾸며 낸 것이다. 그것은 쇼를 하는 것이고 외식하는 행동이고,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해 고의로 연극하는 것이다. 사람은 때로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별해 내지 못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의 본모습을 보게 된다. 예를 들어,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은 좋은 외적 행위, 소위 경건한 모습을 수도 없이 보여 주었다. 하지만 예수가 와서 진리를 선포하고 구속 사역을 행할 때,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그들은 예수를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는 사람의 좋은 행위와 외적인 행동이 그의 본성 본질을 의미하지 않으며, 양자 간에는 어떤 관계도 없음을 의미한다. 반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반드시 지키라고 요구한 그 규정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양심과 이성을 갖췄다면 실행할 수 있는 것들이고, 실제적으로 살아 낼 수 있는 것들이다. 사람들 앞에서든 뒤에서든 너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 또 네 인성 본질이 무엇이든, 하나님의 요구대로 반드시 해야 한다. 네 패괴 성품이 아무리 심각해도, 하나님을 따른다면 자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한동안 체험하면 진실로 진입하게 되고 참된 변화가 생긴다. 그 참된 변화야말로 실제적인 것이다.

정리해 보자. 사람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 몇 가지가 있었느냐? 규칙을 지키고 제약받고 존엄성 있게 살 것, 남들에게 존중받을 것, 위장하지 말 것 등은 사람의 행위 측면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다. 즉, 하나님은 사람이 남들 앞에서든 뒤에서든, 어떤 환경에서든, 어떤 사람을 직면하든 마땅히 이런 실행과 실제를 갖춰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실제는 정상인이 갖추어야 할 부분이며, 사람으로서 해야 할 최소한의 행동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목소리가 무척 크지만 그는 남을 욕하지도 않고, 상스러운 말을 하지도 않으며, 사실 그대로를 정도에 맞게 말하면서 남을 공격하지도 않는다. 설령 그가 누군가를 나쁘다거나 좋지 않다고 말해도 다 사실이다. 그의 표면적인 언행이 이방인들이 제창하는 ‘상냥하고 친절하며 온화하고 우아한 것’에는 맞지 않지만, 그가 하는 말에 원칙과 근거가 있기에, 존엄과 인격을 갖추고 살 수 있게 된다. 이것이 ‘규칙을 지킨다’는 것이다. 모르는 일은 함부로 말하지 않고, 간파하지 못한 사람을 마음대로 평가하지 않는다. 설사 겉으로 볼 때 온화하지 않으며 이방인이 말하는 ‘교양 있고 규율을 지키는’ 행위 기준에는 맞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있고 언행을 제약받기에, 그가 살아 내는 것은 인간이 말하는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온화하고 우아한 것, 점잖고 예의 바른 것’ 등의 행위보다 훨씬 뛰어나다. 이런 모습이 제약받고 규칙을 지키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뭐라고 하든,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제기한 이런 좋은 행위와 관련된 하나님의 요구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중 어느 것이 사람이 실제로 살아 내는 것에 관한 구체적인 규정이 아닌 것이 있더냐? 그중 어느 것이 사람더러 위장하라고 하는 것이 있더냐? 없지 않더냐? 의구심이 든다면 말해도 좋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저는 남을 때리거나 욕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요구가 좀 위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끔 남을 욕하는 사람들이 있어도 하나님은 정죄하지 않으시니까요.”라고 말한다. 남을 욕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요구에서 ‘욕하다’라는 단어는 무슨 의미이냐? (패괴 성품대로 자신의 불쾌한 정서를 발산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정서를 발산하고 상스러운 말을 하는 것, 이것이 욕한다는 의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이 듣기 좋지는 않지만, 상대의 패괴 본질에 부합한다면 그것은 욕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며 수많은 악을 행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 보자. 네가 그에게 “그렇게나 많은 악을 행했으니 너는 나쁜 놈이다. 사람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욕을 했다고 할 수 있겠느냐? 패괴 성품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정서를 발산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성도의 품위에 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 말은 사실에 부합하니, 욕하는 거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 그렇게 볼 수 없다. 사실에 부합하고, 있는 그대로 말했으며, 가리거나 숨기는 것도 없었다. 비록 ‘교양 있고 사리 밝으며 온화하고 우아한 것’에는 부합하지 않지만, 사실에는 부합한다. 욕을 들은 사람은 그의 말을 자신에게 대입하여 반성한 후, 자신이 옳지 않은 행동을 하고 너무 많은 악을 행했기에 욕을 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아 마음속으로 자신을 증오할 것이다. ‘나는 정말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구나! 이런 짓은 얼간이나 하는 거야. 나는 정말 사람이 아니야! 그렇게 욕한 건 옳은 일이고 좋은 일이었어!’ 이렇게 받아들인 후 자신의 본성 본질을 인식하고, 얼마간의 경험과 체험을 통해 진실한 회개를 하게 되며, 그 후부터는 본분을 이행할 때 원칙을 구할 줄 알게 된다면, 이는 욕을 듣고 정신을 차린 것 아니겠느냐? 그럼 이 욕과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한 ‘욕하지 말라’는 항목의 ‘욕’은 다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떻게 다르겠느냐? ‘욕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요구의 ‘욕’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한 측면으로는 욕하는 내용과 단어가 상스러우면 안 된다. 하나님은 그를 따르는 사람의 입에서 상스러운 말을 듣기를 원치 않으며, 그런 단어를 듣기 좋아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사실의 진상을 폭로할 때 좀 듣기 힘든 말이 나온다면 이런 상황은 예외로 친다. 이는 욕을 하는 게 아니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 욕하는 행위의 본질은 무엇이겠느냐? 혈기를 드러내는 것 아니겠느냐? 만약 정상적인 교제와 일깨움, 소통을 통해 제대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왜 욕으로 대신하겠느냐? 그것은 옳지 않으며, 그렇게 하는 건 부적절하다. 긍정적인 행동과 비교했을 때, 욕하는 것은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정서를 발산하고 혈기를 드러내는 것에 속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어떤 일을 처리하든 정서를 발산하고 혈기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처리하기를 원치 않는다. 사람이 혈기를 드러내고 정서를 발산할 때, 통상적으로 보이는 행위는 말로 욕하고 공격하는 것이다. 듣기 거북한 말, 남에게 상처 주고 화풀이하는 말을 해서 말이 끝난 후에는 상대만 더럽히고 상처 주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더럽히고 상처를 주는데, 이는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 일을 대할 때 보여야 할 태도나 방식이 아니다. 더군다나 패괴된 인류는 언제나 남에게 보복하고 자신의 정서나 불만을 발산하며 혈기를 드러내려는 마음을 품은 채 걸핏하면 상대를 욕하려 한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일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드러내는 행위는 욕하는 것이다. 욕하는 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욕하려 한다. 이는 사탄의 행위 아니겠느냐?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해도 자기 집에서도 욕을 하려 하는데, 이는 불쾌한 감정을 발산하는 것 아니겠느냐? 혈기를 드러내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혈기를 드러내고 불쾌한 감정을 발산하는 것은 총체적으로 말하면 혈기를 부리는 방식으로 어떤 일을 대하고 처리하며, 혈기를 부리는 태도로 모든 일을 직면한다는 것이다. 그중 한 가지 행위, 태도가 바로 욕하는 것이다. 남을 욕하는 것의 본질이 이러할진대, 욕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요구는 좋은 일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욕하지 말라고 한 데는 일리가 있지 않겠느냐?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사람에게 남을 때리거나 욕하지 말라고 요구한 목적은 사람이 늘 정서와 혈기 속에서 살지 않도록 제약하기 위함이다. 정서와 혈기 속에서 살아가면 어떻게 욕하든 패괴 성품만을 드러내게 된다. 어떤 패괴 성품이겠느냐? 최소한 흉악한 성품, 교만한 성품이 드러난다. 패괴 성품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따르는 사람이 이런 방식으로 주변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을 대하기를 원치 않는다. 여기에 내포된 뜻은, 하나님은 사람이 남을 욕하고 때리는 방식으로 주변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을 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욕하는 것으로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데 지장이 생긴다. 최소한 욕하는 행위는 긍정적인 행위가 아니며, 정상 인성에 갖춰져야 할 행위도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남을 때리거나 욕하지 말라는 요구를 한 것이다. ‘욕하는 것’ 안에는 정서와 혈기가 들어 있다. 그럼 정서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원한과 저주를 품고, 다른 사람이 잘되기를 원치 않는 마음, 상대가 자기 뜻대로 보응을 받고 나쁜 결과를 맞이하기를 바라는 마음 등 부정적인 것들이다. 이것이 정서 안에 있는 세부 내용이다. 그럼 혈기란 무슨 의미이냐? 사람이 극단적인 방식,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방식, 사악한 방식으로 정서를 발산하면서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일이나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사라지거나 재앙이 임해 자기 뜻대로 남의 불행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는 의미다. 이것이 혈기이다. 혈기에는 무엇이 들어 있느냐? 증오, 원한, 저주, 좋지 않은 바람 등이다. 이것들이 다 혈기 안에 들어 있다. 그중 긍정적인 것이 하나라도 있더냐? (없습니다.) 사람이 이런 정서와 혈기로 살아가면 어떤 상태가 되겠느냐? 곧 미치광이가 되지 않겠느냐? 욕하면 할수록 더 화가 나고 독해지며 욕하고 싶어지다가 결국 손을 뻗어 상대를 때리고 싶어진다. 또 사람을 때릴 때는 치명적인 공격을 하고 싶어진다. 치명적인 공격을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은 ‘나는 너를 끝장내고 죽여 버릴 것이다!’라는 뜻이다. 사소한 정서, 부정적인 정서 하나 때문에 혈기가 팽창되고 폭발하여 결국 한 생명을 없애고 죽여 버리려는 것이다. 이것이 정상 인성에 지니고 갖춰져야 할 부분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어떤 몰골이냐? (마귀의 몰골입니다.) 이는 마귀의 본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요괴가 사람을 집어삼키려 할 때의 몰골과 같은데, 마귀의 본성이 드러나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자를 바로 미치광이라고 한다. 어느 정도까지 미쳤겠느냐? 사람의 육체와 영혼을 삼키려는 마귀로 변한다. ‘욕하는 것’으로 초래되는 가장 심각한 결과는 단순한 일이 180도 바뀌어 누군가의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일이 두 사람의 사소한 마찰에서 시작된다. 서로 욕하다가 폭력을 쓰고, 그 후 살기를 품고, 그것이 실제로 이뤄져 한 사람은 죽임을 당하고 다른 한 사람은 살인죄로 사형을 판결받는다. 결국 둘 다 함께 망하는 것, 이것이 마지막 결과이다. 욕도 다 하고 정서도 발산하고 혈기도 전부 드러내고 둘 다 지옥에 빠진다. 바로 이런 결과가 생긴다. 정서를 발산하며 혈기가 팽창되고 폭발하면 이런 결과로 이어진다. 이는 좋은 결과가 아니라 끔찍한 결과이다. 보아라. 단순히 부정적인 정서 하나에서 비롯된 행위가 사람에게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결과를 보는 것도, 직면하는 것도 원치 않지만, 갖가지 불쾌한 정서 속에서 살아가는 데다가 혈기에 얽매이고 통제되기에 혈기가 수시로 팽창되고 폭발하여 마지막에 이런 결과가 초래된다. 보아라. ‘욕하는’ 행위가 단순해 보이느냐?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이 하는 욕이 이런 결과에까지 이르지는 않겠지만, 그러니까 욕하는 것의 후속 효과가 다 그런 나쁜 결과가 초래되는 것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욕하는 것의 본질은 이러하다. 그것은 정서의 발산이자 혈기의 팽창, 폭발이다. 그러므로 욕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요구는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며, 해로운 점은 단 하나도 없다. 또한, 이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러한 요구를 한 의의 중 하나이다. 남을 욕하지 말라는 요구를 진리 실행이나 진리 추구와 같은 선상에 둘 수는 없지만, 사람은 그 요구를 지켜야만 한다.

다른 사람을 욕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요구에, 사람이 자제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겠느냐? 화를 낼 때, 사람은 대부분 자제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남을 욕하지 말라는 요구에 도달할 수 있겠느냐? 남을 욕하기 전에, 특히 자제하지 못할 때, 빨리 기도해야 한다. 한참 기도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면 화가 누그러질 것이며, 효율적으로 스스로를 제약하고 정서와 혈기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가끔 다른 사람이 네게 모욕감을 주는 말을 할 때, 혹은 뒤에서 너를 판단하거나 의도적 혹은 부지불식간에 네게 상처 줄 때, 너한테서 이득을 보고 네 물건을 훔쳤을 때, 나아가 네 실질적인 이익에 해를 끼쳤을 때, 이러한 일들이 임할 때면 너는 ‘그는 나한테 상처를 줬어. 나는 그를 증오해. 그에게 욕하고 싶고 보복하고 싶어. 심지어는 때리고 싶다고. 뒤에서 뭔가 꼼수를 부려 혼내 주고 싶단 말이야.’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는 불쾌한 정서에서 비롯된 것 아니겠느냐? 불쾌한 정서로 초래되는 결과는 네가 이런 일을 하고 싶게 하는 것이다. 너는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날 것이고, 그가 너를 괴롭히고 있다고 느낄 것이며, 네 존엄과 인격이 모욕받았다고 생각해 마음이 편치 않고 보복하고 싶을 것이다. 이것이 부정적인 정서가 가져온 혈기의 충동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보복하고자 하는 행위는 무엇이겠느냐? 혈기를 드러내려는 것 아니겠느냐? 이럴 때는 마음을 차분히 하고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며 자제해야 한다. 곰곰이 생각하며 진리를 구하고, 지혜로운 방식으로 일을 처리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마음이 혼란해지거나 원한과 정서, 혈기가 생기는 상황을 피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둘이서 온종일 함께 사역하니, 피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피할 수 없다고 해도 보복해서는 안 되고 자제해야 한다. 어떻게 자제해야겠느냐? 먼저 ‘내가 그렇게 행동하면 하나님은 분명 좋아하지 않으실 거야. 그러니 그렇게 해서는 안 돼. 원한, 보복, 증오 등은 전부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으시는 거야.’라고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는데 네가 하고 싶고 자제하지 못하겠다면 어떻게 해결해야겠느냐? 당연히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밖에, 만약 네 분량이 너무 작고 혈기는 너무 커서 도저히 정서와 혈기를 자제하지 못하고 보복하고 싶다고 해도 절대 남을 욕해서는 안 된다. 일단 그 자리를 피하고 다른 사람이 대신 나서서 해결하게 해야 한다. 마음속으로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하며 관련된 하나님 말씀을 몇 구절 암송한다면, 그렇게 기도한다면 혈기가 서서히 가라앉으면서 남을 욕하는 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뿐더러 패괴까지 드러내 하나님을 욕되게 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렇게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느냐? 너희가 보기에 이 방법이 어떠하냐? (좋습니다.) 하나님이 말한 ‘남을 때리거나 욕하지 말라.’라는 행위 규범은 여기까지 교제하겠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지키게 한 좋은 행위에 관해 교제했다. 어떤 것들이 있었느냐? (성도의 품위를 지킬 것, 방탕하게 굴지 말 것, 제약받을 것, 기이한 복장을 하지 말 것, 남을 때리거나 욕하지 말 것,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지 말 것, 우상을 숭배하지 말 것, 부모에게 효도할 것, 도둑질하지 말 것, 남의 물건을 탐하지 말 것, 간음하지 말 것, 거짓 증거를 하지 말 것 등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있었다. 그럼 말해 보아라. 율법에 언급된, 도둑질하거나 남의 이익을 탐하지 말라는 요구가 오늘날에도 성립하지 않느냐? 아직 유효하지 않으냐? (성립하고 유효합니다.) 그럼 은혜시대의 계명은 어떠하냐? (역시 성립합니다.) 그럼 하나님이 언급한 그 구체적인 요구들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겠느냐? 그 구체적인 요구들은 어떤 측면의 실행과 관계가 있겠느냐? 만약 하나님이 그러한 요구를 하지 않았더라면 사람이 알 수 있겠느냐?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은 알지 못한다. 하나님이 언급한,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하는 그런 구체적인 요구들은 사실 다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과 관계가 있다. 그런 구체적인 요구들을 제기한 목적은 사람이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에 대해서, 또 무엇이 옳고 그릇되었는지에 관해서 정확하게 분별하고 감별하게 하기 위함이며, 하나님은 간음이라는 행위를 혐오하며 그것은 수치스럽고 사람에게 경멸받는 부정적인 사물임을, 사람은 마땅히 제약받아 그런 일을 하지 말고 그런 일에서 과오를 범하지 말아야 함을 알려 주기 위함이다. 또한, 남의 이익을 탐하고 도둑질하는 등의 행위는 전부 부정적인 사물임을,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사람에게 알려 주기 위함이다. 그러한 일들을 좋아하고 또 행한다면, 너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한 사람의 인성이 좋은지 나쁜지, 긍정적인 인물인지 부정적인 인물인지 어떻게 구분하겠느냐? 먼저 오직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야만 정확하게 사람을 분별할 수 있고, 사람과 일, 사물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이 언급한,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하는 그 요구 기준들에 근거해야만 사람을 분별하고 간파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손버릇이 좋지 않은 어떤 사람이 남의 물건 훔치기를 좋아한다고 해 보자. 그 사람의 인성이 어떻겠느냐? (좋지 않습니다.) 도둑질은 심각한 악행이니 도둑질하는 사람은 악인에 속한다. 모두가 경계하고 멀리하며 그를 도둑으로 여길 것이다. 도둑은 사람들 마음속에서 부정적인 이미지이고, 도둑질은 부정적인 사물로서 범죄 행위이다. 확실히 그렇지 않으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간음하기를 좋아하는데, 그것이 긍정적인 사물인지 부정적인 사물인지 모르는 자들이 있다고 해 보자. 그럴 때는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판단해야 정확하다.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진리이다. 지금 법률적으로, 도덕적으로 간음죄에 대해 어떤 새로운 주장이 있든 그것은 전부 진리가 아니다. “간음하지 말라.”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며, 진리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간음하지 말라.’라는 요구를 했으니 사람들은 간음하기 좋아하는 자를 내치고 멀리해야 한다. 그런 자는 인성이 있는 사람이 아니며, 최소한 인성 면에서 판단했을 때 좋은 사람이 아니다.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 그런 인성을 지닌 사람은 수치스러운 사람이고 모두가 혐오하는 대상이며, 사람들 사이에서 무시당하고 멸시받는 사람, 모두에게 버림받는 사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간음하는 것이 부정적인 사물이고, 간음하는 사람은 부정적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사회의 흐름이 얼마나 사악해지든, 간음하거나 음란을 저지르는 행위는 모두 부정적인 사물이고,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은 부정적인 인물이다.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이 일을 밝히 알아야지, 사회의 사악한 흐름에 현혹되거나 유혹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밖에도 더 구체적인 요구가 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우상을 숭배하지 말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남을 때리거나 욕하지 말고 성도의 품위를 지키라는 등의 요구를 했다. 이 구체적인 요구들은 다 하나님이 인류의 행위를 규범화하는 기준이다. 즉, 하나님이 사람에게 진리를 공급하기 전에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일이 옳고 긍정적인지, 어떤 일이 그릇되고 부정적인지 알게 하며, 어떻게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어떤 좋은 행위를 갖춰야 정상 인성이 있는 사람인지, 정상 인성이 있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어떤 일들을 하고 어떤 일들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알게 하여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하는 그런 요구들은 모든 정상인이 실제로 살아 내야 하는 것들이며, 또한 모든 사람이 실제로 모든 일을 직면하고 처리하는 근거이다. 예를 들어, 네가 다른 사람의 좋은 물건을 보고 네 것으로 삼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지만 또 ‘하나님은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다른 사람의 이익을 탐하지 말라고 하셨어. 그러니까 나는 훔치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했다고 해 보자. 이는 도둑질하는 행위가 제약된 것 아니겠느냐? 제약받는 동시에 사람의 행위가 규범화된 것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그런 요구를 하기 전까지, 사람은 다른 사람이 좋은 물건을 갖고 있는 것을 보면 가져다가 자기가 쓰려고 했다. 그런 행동이 옳지 않다거나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것은 하나님이 혐오하는 행위이며, 부정적인 사물이고, 나아가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러한 사실을 몰랐고, 그런 개념도 없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도둑질하지 말라는 요구를 한 후로, 사람의 사상에는 이런 일에 대한 선이 생겼다. 이 선을 통해 그는 도둑질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도둑질을 하는 것은 부정적인 일, 나쁜 일, 악행을 하는 것과 같아 수치스러운 일이고, 반면 도둑질을 하지 않는 것은 인성과 도덕을 지키는 것이고, 그런 사람은 인성을 갖춘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사람의 부정적인 행위와 행동을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하여 사람이 정상 인성 속에서 살아가면서 정상적인 행위와 태도를 갖게 했고, 최소한 사람, 정상인으로 보이게 한 것이다. 보아라.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하는 하나님의 그 요구들에는 무척 큰 의미가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의미가 있다. 하지만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하는 그런 구체적인 요구들은 지금 말하는 진리와 거리가 멀어 진리와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오래전, 율법시대에 그러한 요구는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하는 율법에 불과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가장 단순하고 직설적인 말로 사람이 어떤 일들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 규칙을 세워 준 것이다. 그러다가 은혜시대에 이르러 이는 그저 하나의 계명이 된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이는 사람이 자신의 행위와 사물을 판단하는 하나의 준칙에 불과한 것이다. 이 준칙은 진리와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없고, 또 진리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것 역시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할 때 반드시 갖춰야 할 조건이다. 어떤 사람이 그러한 규칙을 지키고 율법과 계명을 지키며,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하는 하나님의 요구와 행위 준칙들을 지킨다면, 그는 진리를 실행하고 추구하기 위한 기본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며, 방탕하게 행동하고, 게다가 간음하고, 다른 사람의 이익을 탐하고 수시로 도둑질을 한다면, “그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니, 분명히 진리를 실행할 수 있을 것이고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이 성립하겠느냐? (성립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성립하지 않겠느냐? (그는 가장 기본적인 하나님의 요구조차 해내지 못하니, 진리를 실행하지도 못할 것이며, 그를 가리켜 진리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렇다. 그는 가장 기본적인 자제조차 하지 못한다. 이 말에 숨겨진 뜻은, 그는 사람이 가장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양심과 이성조차 지니지 않았다는 뜻이다. 즉, 그에게는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이 없다는 것이다. 양심과 이성이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하나님의 말씀, 사람에 대한 요구, 하나님이 정한 규칙을 들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은 나쁜 일이니 훔치지 말라고 하면 그는 ‘왜 훔치지 말라고 하는 거야? 나는 이렇게 가난한데, 남의 것을 훔치지 않고 어떻게 살겠어? 훔치지도 않고 남의 이익을 빼앗지도 않고 부자가 될 수 있겠냐고?’라고 생각한다. 이는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갖추지 못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사람의 행위를 제약하는 하나님의 요구들을 지키지 못하니, 정상 인성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다. 정상 인성을 갖추지 못한 사람을 가리켜 진리를 사랑한다고 한다면, 그것이 가능하겠느냐? (불가능합니다.) 그는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지도 않고, 도둑질하거나 간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도 따르지 못하며 오히려 싫어한다. 그런 그가 진리를 사랑할 수 있겠느냐? 진리는 그러한 행위 준칙보다 훨씬 높다. 그런데 그가 도달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진리는 단순한 행위 준칙이 아니다. 또 진리의 역할은 사람이 죄를 지을 때, 혹은 함부로 행동할 때 진리를 떠올리고 제약받아 더는 죄를 저지르거나 함부로 행동하지 않게 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진리는 그렇게 단순하게 사람의 행위를 제약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사람의 생명이 되어 사람의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다. 진리를 받아들여 생명이 되게 하려면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는 한편, 진리를 인식하고 실행해야 한다. 진리를 받아들일 때 마음속에서는 전쟁이 벌어질 것이며, 사람의 패괴 성품 또한 드러나기 쉽다. 사람이 진리로 패괴 성품을 해결할 때, 진리는 사람의 생명이 될 수 있고, 사람이 처신하고 살아가는 법칙이 될 수 있다. 이는 진리를 사랑하고 인성을 갖춘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인성이 없는 사람들이 여기에 도달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제정한,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하는 그 요구들을 볼 때,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이 제기한 구체적인 규정 하나하나가 쓸데없는 것이냐? (아닙니다.) 의미가 있지 않으냐? 가치가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사람이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지켜야 합니다.) 그렇다. 사람은 마땅히 지켜야 한다. 지키는 동시에, 전통문화가 사람에게 가르친 ‘교양 있고 사리 밝다.’, ‘온화하고 우아하다.’ 등의 논조를 버리고,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하는 하나님의 요구 하나하나를 따라 엄격하게 하나님 말씀대로 처신하며, 하나님의 요구대로 정상 인성을 살아 내야 한다. 물론 엄격하게 그러한 요구대로 사람과 일을 판단하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요구가 진리의 기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사람에게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인도 역할을 한다. 진리 추구란 무엇인가에 관해 정의할 때, 어떻게 이야기했느냐?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포함하는 범주는 무척 넓다. 때로는 말씀 한마디가 한 가지 진리이고, 때로는 말씀 몇 마디, 한 단락이 한 가지 진리를 설명할 수 있으며, 또 때로는 말씀 한 편이 한 가지 진리를 선포할 수도 있다. 진리는 언뜻 간단해 보여도 실은 그렇지 않다. 크게 보자면 하나님이 곧 진리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진리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길이가 길고 내용이 많으며, 전부 진리의 선포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제정한 율법과 계명, 그리고 새 시대에 사람의 행위에 대한 요구들은 전부 하나님의 말씀이다. 비록 몇몇 말씀은 진리와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고, 진리의 수준에 이르지 못하지만, 그것 역시 긍정적인 사물이다. 그것이 사람의 행위를 제약하는 말에 불과해도 사람은 그것을 지키고 최소한 그러한 행위를 갖춰야지, 그 기준 아래로 내려가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반드시 그런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해야 한다. 그러한 것은 전부 하나님 말씀이므로 사람은 마땅히 지켜야 한다. 또 하나님 말씀이기에 마땅히 그 말씀에 근거하여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해야 한다. 이것이 옳지 않으냐? (옳습니다.) 이전에 하나님이 말씀하면 반드시 책임지고, 책임지는 이상 반드시 이루며, 이루어진 것은 반드시 영원까지 지속된다 말한 적이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말씀을 했든, 언제 말씀했든 그것은 진리이며,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시대가 바뀔지라도 하나님 말씀은 바뀌지 않으며, 사라지지도 않는다. 어째서 하나님 말씀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며, 진리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언급하고 제시한 것이 율법이든, 계명이든, 그리고 사람의 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요구든 전부 사라지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 안에 있는 모든 요구는 피조물인 인류에게 도움이 되며,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한다. 또한,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과 사람으로 처신하는 방법에 이롭고 가치가 있다. 그러한 말씀은 다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고, 진정으로 사람답게 살게 한다. 이와는 반대로, 만약 사람이 하나님의 그러한 말씀을 부인하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부인하면서 오히려 사람이 제기한 좋은 행위에 관련된 논조들을 지킨다면, 그 사람은 무척 위험해진다. 그는 인성과 이성을 갖추기는커녕 갈수록 간사하고 거짓된 사람이 될 것이며, 점점 더 많은 기만행위를 할 것이다. 또한, 인성으로 살아 내는 것에는 기만의 성분이 더 많아져서 사람만 속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까지 속이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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