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추구란 무엇인가(4) 제 1 부

일단 한번 돌아보겠다. 지난번 예배 때는 어떤 내용을 교제했느냐? (지난번 예배 때는 ‘진리 추구란 무엇인가’라는 화제에 관해 교제하셨습니다. 먼저 ‘사람이 좋고 옳다고 여기는 것이 진리가 아닐진대, 사람은 왜 그것들을 진리로 여겨 추구하는 것이냐?’라는 질문에 세 가지 측면의 원인을 나열하셨습니다. 그중 첫 번째 측면의 원인에 대해 중점적으로 말씀하셨는데,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에는 과연 어떤 것들이 있는가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지난번 예배 때는 주로 첫 번째 측면의 원인에 대해 교제하면서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들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였다. 첫 번째는 좋은 행위였고, 두 번째는 좋은 덕행이었다. 또 좋은 행위로는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온화하고 우아한 것, 점잖고 예의 바른 것,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 상냥하고 친절한 것, 가까이하기 쉬운 것 등 여섯 가지 예를 들었다. 좋은 덕행에 대해서는 따로 교제하지 않았다. 어떤 문제들은 교제를 마친 후 돌이켜 보면서 교제한 진리와 원칙을 다시 한번 정리하고 종합해서 윤곽을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진리를 쉽게 깨달을 수 있다. 지난번에 교제한 내용에는 큰 항목이 있었고, 예로 든 세부 조목이 있었다. 언뜻 많아 보이지만, 사실은 큰 항목 안에서 몇몇 세부 내용을 교제한 것뿐이다. 이 세부 내용들은 또 몇 갈래로 나뉘는데, 이렇게 분류하여 교제하면 윤곽이 좀 더 분명해진다. 한편, 좋은 행위로 여섯 가지 예를 들었지만, 하나씩 구체적으로 교제하지는 않았다. 그중 교양 있고 사리 밝은 태도는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고 좋다고 여기는 전형적인 예로서, 이 예를 상대적으로 많이 교제했다. 나머지는 이것과 유사하니, 너희가 동일한 방식으로 해부하고 분석하면 된다.

오늘은 본격적으로 교제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짤막한 이야기를 하나 해 주겠다. 너희는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느냐? (좋아합니다.) 이야기를 듣는 것은 그리 피곤하지 않고, 신경을 집중할 필요가 없으며, 압박감이 상대적으로 작은 데다가 재미도 있다. 그러니 잘 들어 보아라. 이 이야기가 전하려는 내용이 무엇인지 들으면서 왜 이 이야기를 했는지, 이 이야기가 내포하고 있는 구체적인 중심 사상은 무엇인지, 이 이야기를 통해 사람이 어떤 실제적인 것들을 얻을 수 있는지 묵상해 보아라. 그럼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이는 샤오샤오와 샤오지의 이야기이다.

샤오샤오와 샤오지의 이야기

샤오샤오는 최근 눈이 불편했다. 시야가 뿌옇고 빛에 대해 민감하고, 바람이 불면 눈물이 나고 이물감이 느껴지는 등의 증상이 나타났는데, 눈을 비벼도 소용이 없었다. 샤오샤오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여태까지 눈에 질환이 생겼던 적이 없는데. 시력도 괜찮았고. 그런데 오늘은 왜 이럴까?’ 거울에 비춰 봐도 예전과 다른 것 같지 않았다. 그저 좀 눈이 충혈되고 실핏줄이 보일 뿐이었다. 샤오샤오는 답답하고 마음이 다소 편치 않았다. 처음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증상이 점점 더 자주 나타나자 자기도 모르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병원에 가 볼까? 아니면 비슷한 증상에 대해 찾아볼까? 자료를 찾는 건 너무 번거로워.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확신할 수도 없고. 아무래도 병원에 가 보는 게 속 시원하겠어. 의사 말을 들어 보면 확실히 알 수 있겠지.’ 그래서 그는 병원에 갔지만, 검사를 마친 후에도 이렇다 할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 의사는 통상적인 조치로 안약을 처방하면서 눈을 보호해야 하니 과로하지 말라는 당부만 할 뿐이었다. 눈에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집에 돌아온 후, 그는 의사의 당부대로 매일 정해진 시간에 안약을 정량 사용했고,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증상이 좀 완화되었다. 가슴을 누르고 있던 바윗덩어리가 마침내 사라진 것 같았다. 약으로 치료가 가능할 정도면 큰 병이 아니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효과는 오래가지 않았고, 시간이 흐르자 그의 눈은 다시 예전 상태로 돌아갔다. 약용량을 늘리자 증상이 좀 완화된 것 같았지만, 며칠 안 가 다시 처음처럼 불편해졌다. 게다가 상태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증세는 점점 더 빈번해졌다. 샤오샤오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마음이 답답해졌다. ‘이제 어떡하지? 의사한테 처방받아 온 약으로 해결이 안 되잖아. 내 눈에 정말 뭔가 큰 문제가 있는 걸까? 그냥 무시하면 안 될 것 같아.’ 더 이상 병원에 가지 않기로 결심한 샤오샤오는 의사에게 눈과 관련된 자문을 구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기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자기 증상과 관련된 동영상이나 자료를 검색해 봤는데, 대부분 그런 문제가 나타나는 건 눈을 너무 혹사해서라고, 눈 건강에 신경 쓰고 올바르게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 말들이 의미도 없고, 자기 문제를 해결해 줄 수도 없다고 생각한 샤오샤오는 계속 자료를 찾았다. 그러던 어느 날, 눈에 그런 증상이 나타나는 건 안구 충혈이나 녹내장의 전조일 수 있고, 백내장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는 자료를 보았다. ‘녹내장’, ‘백내장’이라는 단어를 본 샤오샤오는 머리가 웅 하고 울리는 듯하더니 눈앞이 캄캄해져 쓰러질 뻔했다. 심장이 미칠 듯이 뜀박질했다. ‘하나님, 이게 어떻게 된 건가요? 설마 제가 정말 녹내장이나 백내장에 걸리는 겁니까? 백내장에 걸리면 수술을 해야 하고, 녹내장에 걸리면 시력을 잃을 가능성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저는 끝장 아닌가요? 저는 아직 젊습니다. 정말 눈이 멀어 장님이 된다면 남은 세월을 어떻게 살아간단 말입니까? 더는 희망이 없는 것 아닐까요? 어둠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닐까요?’ ‘녹내장’, ‘백내장’이라는 단어를 보자 더는 앉아 있을 수가 없었고, 마음은 더욱 심란해졌다. 샤오샤오는 더 의기소침해지고 우울해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앞으로의 날들을 어떻게 직면해야 할지 서글프고 막막했다. 샤오샤오는 그 일로 완전히 절망에 빠졌고, 삶의 의욕을 잃었으며, 본분을 이행할 때도 힘을 내지 못했다. 그는 더 이상 병원에 가고 싶지도, 다른 이에게 자신의 눈 문제를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물론, 자기가 곧 녹내장이나 백내장에 걸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될까 봐 두렵기도 했다. 기운을 잃은 샤오샤오는 그렇게 소극적인 상태 속에서, 또 막막함 속에서 하루, 또 하루를 보냈다. 자신의 미래를 예측할 용기가 나지 않았고, 앞날을 계획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에게 미래는 너무도 잔인하고 가슴 아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매일 소극적이고 절망적인 상태로 살면서 기분이 극도로 저하되었다. 기도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도 싫었으며, 다른 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건 더더욱 원치 않았다. 마치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 때, 샤오샤오는 문득 생각했다. ‘이런 상태는 안 좋은 것 같아. 앞날이 막막하고 게다가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지 않아 내가 이런 병에 걸렸는데, 왜 열심히 본분을 이행해야 하지? 인생은 아주 짧다고. 그런데 나는 왜 눈 상태가 괜찮을 때 내가 좋아하는 일을 더 많이 하고 스스로를 아끼지 않는 거야? 왜 이렇게 힘들게 사는 거지? 왜 나 자신을 괴롭히고 홀대하는 거냐고?’ 그래서 샤오샤오는 매일 먹고 자고 일하는 시간 외에 남는 시간을 모두 게임을 하고 동영상이나 드라마를 보는 등 인터넷을 하는 데 쏟아부었다. 외출할 때도 끊임없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매일 온라인 세계에 빠져 지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눈이 점점 더 불편해지고 증상이 심각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면 안약을 한 방울 떨어뜨려 증상을 좀 완화시킨 뒤 다시 인터넷에 빠져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보았다. 이런 방식으로 마음속 깊은 곳의 공포와 두려움을 달래고 시간을 때우며 하루하루를 보낸 것이다. 눈이 불편하고 증상이 심각해졌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샤오샤오는 무의식적으로 주변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도 다 나처럼 눈을 쓰는데 왜 저들은 충혈되거나 수시로 눈물을 흘리거나 이물감을 느끼지 않는 거지? 왜 나만 이런 병에 걸린 거야? 하나님은 사람을 너무 차별하시는 것 아닐까? 나는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 헌신했는데, 하나님은 왜 나를 지켜 주지 않으신 거야? 하나님은 불공평해! 다른 사람들은 왜 다 그렇게 운이 좋은 걸까?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말이야. 그런데 왜 나는 아닌 거야? 왜 하필 나한테 이렇게 안 좋은 일이 생긴 거냐고!’ 샤오샤오는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 인터넷에서 놀 거리를 찾아 그 원망과 분노를 풀어 버리려 했다. 그는 눈병이 하루빨리 사라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무리 인터넷에 몰입해도, 기분을 해소하려고 할수록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더 줄어들었고 자신이 너무 운이 나쁘다고 생각되어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원망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이 흘렀지만, 샤오샤오의 눈병은 전혀 좋아지지 않았다. 그는 점점 더 기분이 안 좋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샤오샤오는 더더욱 막막했고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계속되었지만, 아무도 그를 도울 수 없었고 그 또한 어떤 도움을 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막막하고 의기소침하고 무기력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었다.

이것이 샤오샤오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 이제 샤오지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

샤오지 역시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샤오샤오와 같은 문제에 직면했다. 두 눈의 시야가 흐릿해지고 수시로 붓기가 느껴졌으며, 시리고 이물감이 들었다. 눈을 비벼도 전혀 좋아지는 감이 없었다. 샤오지는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나는 항상 눈이 좋았고, 안과에 가 본 적도 없어. 그런데 요즘 들어 왜 이러는 걸까? 설마 눈에 문제가 생긴 걸까?’라고 생각했다. 거울에 비춰 봐도 예전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그저 눈이 좀 화끈거렸고, 눈을 세게 깜빡이면 시린 느낌이 심해지면서 눈물이 났다. 샤오지는 눈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생각했다. ‘눈에 문제가 생겼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야. 무시해서는 안 돼. 하지만 그렇게 불편한 느낌은 없고, 내 삶이나 본분 이행에 지장을 주지도 않잖아. 가뜩이나 교회 사역이 바쁜 시기인데 병원에 가면 본분 이행에 지장이 생길 거야. 좀 한가해지면 검색부터 해 보자.’ 그렇게 결정한 그는 본분을 이행하는 틈틈이 관련된 정보를 찾았고, 자기 눈에 큰 문제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저 눈을 많이 써서 불편한 느낌이 드는 것뿐이었다. 눈을 올바르게 사용하고 적절히 관리하며 제대로 신경 쓰면 정상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여기까지 확인한 샤오지는 무척 기뻤다. ‘큰 문제가 아니라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겠네. 올바르게 눈을 쓰고 관리하라고 하니까, 올바른 방법을 찾아서 눈을 원래대로 회복시키자.’ 샤오지는 다시 관련 정보를 찾아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골랐다. 그리고 그 후로는 정상적으로 생활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 외에도 눈 건강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고, 자료에서 본 대로 매일 눈을 관리했다. 그렇게 노력하는 한편, 증상이 좀 완화되지 않았는지 주의를 기울였다. 한동안의 노력과 시도 끝에 샤오지는 몇몇 방법들이 주효하다고 생각했다. 또 어떤 방법들은 이론적으로는 괜찮아도 실제로 적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방법들은 적어도 그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샤오지는 그동안의 노력을 종합해 자신에게 맞는 눈 관리 방식을 몇 가지 선택한 다음, 매일 본분 이행에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 올바르게 눈을 쓰는 연습을 하고 눈 관리를 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자 정말 눈 상태가 점점 좋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예전에 나타나던 충혈이나 눈 시림, 화끈거림 등의 증상이 점점 완화되고 있었고, 증상이 나타나는 빈도도 줄어들었다. 샤오지는 한시름 내려놓으며 ‘하나님의 인도에 감사드립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총이자 인도하심입니다.’라고 생각했다. 눈에 문제가 생기는 일이 점점 줄어들고 증상도 완화되었지만, 샤오지는 눈 관리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올바르게 눈을 쓰고자 노력했다. 얼마 안 가 샤오지의 눈은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샤오지는 눈 관리 방법을 알게 됐고, 어떻게 올바르게 눈을 쓰는지, 또 어떻게 올바르게 생활하는지를 배웠다. 인생 경험에 올바른 생활 상식이 하나 더 늘어난 것이다. 샤오지는 무척 기뻤다. 우여곡절과 비일상적인 일을 겪었지만, 마지막에는 그로 인해 귀한 삶의 경험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주변에서 눈이 불편하다고, 눈이 붓고 시리다는 말을 할 때마다 샤오지는 자신의 경험과 방법을 있는 그대로 알려 주었다. 샤오지의 도움 덕에 눈에 증상이 나타난 사람들도 올바른 눈 사용법과 관리법을 배우게 되었다. 샤오지는 무척 기뻤으며, 주변 사람들도 샤오지에게서 많은 도움을 얻었다. 그렇게 샤오지와 주변 사람들은 일상적인 시간을 보내면서 인성 생활에 반드시 갖춰져야 할 상식을 갖추게 됐으며, 모두 함께 사역하고 본분을 이행하면서 즐겁고 행복하게 지냈다. 샤오지는 눈에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소극적으로 변하거나 막막해하지 않았고, 자신이 불운하다며 원망하는 법도 없었다. 자료를 검색할 때 그 역시 샤오샤오가 본 것과 같은 무서운 정보를 보았지만, 가슴에 담아 두지 않고 긍정적이고 올바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똑같은 일이 벌어졌는데, 샤오샤오는 계속 의기소침해져서 무기력과 막막함 속에 빠졌고, 샤오지는 낙담하거나 막막해하거나 나아가 하나님을 원망하기는커녕 그 가운데서 도움이 되고 긍정적이며 올바른 생활 태도를 얻어 자신은 물론 남들에게까지 도움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샤오샤오와 샤오지의 이야기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이해가 되느냐? 샤오샤오와 샤오지, 이 두 사람 중 너희는 어느 쪽이 마음에 드느냐? (샤오지가 마음에 듭니다.) 그럼 샤오샤오는 왜 별로이냐? (그는 일이 임했을 때 올바로 대하지 못하고 소극적으로 대항했습니다.) 소극적으로 대항하는 것은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일이 임했을 때 진리를 구해 해결하는데, 그는 진리를 구하지 않고 소극적으로 대항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는 스스로 파멸을 초래하는 것이다. 지금은 정보 기술이 발달한 시대지만, 이 사탄의 세상에는 도처에 거짓말과 기만이 존재하며, 온통 거짓말과 기만으로 점철되어 있다. 사람은 이 혼잡하고 어수선한 세상 속에서 어떤 일을 대하든, 어떤 정보를 대하든 지혜와 예지, 예민함을 발휘하여 분별해야 한다. 또한, 갖가지 정보를 엄격하게 선별하고 올바른 입장을 가져야지, 어떤 정보도 너무 쉽게 믿거나 나아가 너무 쉽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사탄의 세상 속에서 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게다가 거짓말하는 사람이 어떤 책임도 지지 않으며, 말한 것으로 끝이다. 이 세상에 거짓말을 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없고, 기만행위를 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없다. 사람의 마음은 예측하기 어렵고, 거짓말하는 사람들 뒤에는 항상 속셈과 목적이 있다. 예를 들어, 네가 병원에 가면 의사는 이렇게 말한다. “환자 분의 병은 치료가 시급합니다. 지금 치료하지 않으면 향후 암으로 발전할 수 있어요!” 그럼 간이 작은 사람은 덜컥 겁을 먹고 “아이고, 암으로 발전할 수 있다면 빨리 치료해야겠네요!”라고 말한다. 그 결과, 치료하면 할수록 상태가 점점 심각해지다가 결국 정말 입원하게 된다. 사실, 암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은 아직은 암이 아니라는 의미지만, 너는 그것을 지금 당장 암으로 간주하고 치료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소리로 잘못 받아들였다. 이것이 죽음을 자초하는 것 아니겠느냐? 암으로 간주하고 치료하면 치료가 거듭될수록 더 빨리 죽을 뿐인데, 네가 살아 있는 날이 길겠느냐?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현재 네 병은 암이 아니다. 그런데 왜 치료하지 않을 경우 암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의사가 있겠느냐? 그들의 목적은 돈을 버는 데 있다. 즉, 네가 큰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고 치료받게 하려는 것이다. 작은 병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치료받지 않을 테고, 그럼 돈을 벌 수도 없을 테니 말이다. 많은 의사가 진찰을 하면 귀신이 사람을 물고 늘어지듯 환자를 물고 늘어지면서 절대 놓아주지 않는다. 이는 많은 의사가 환자를 대하는 일상적인 수법이다. 먼저 그는 자신이 얼마나 유명하고 진찰을 잘하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치료했고 무슨 질환을 고쳤는지, 의사 경력이 얼마나 되는지 늘어놓으며 네 신뢰를 사서 착실히 앉아 자신의 치료를 받게 한다. 그 후, 너에게 곧 어떤 큰 병에 걸릴 거라고, 치료하지 않으면 죽을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하지만 정말 그 병 때문에 죽겠느냐? 반드시 그러리란 법은 없다. 사람의 생사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으니, 의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결정하는 것이다. 의사는 사람을 속일 때 종종 이런 수법을 쓴다. 간이 작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여기저기 의학적 조언을 구하고 의사에게 확진을 받고자 하며, 의사가 암 발병 가능성이 있다고 하면 바로 믿고는 한시바삐 치료를 받아 암으로 죽는 일을 피하고자 한다. 이는 제풀에 놀란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의사에 관한 일은 말하지 않겠다. 샤오샤오와 샤오지 두 사람에 관해 계속 이야기해 보자.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물을 바라보는 그들의 각도와 관점, 입장은 완전히 다르다. 샤오샤오는 그야말로 소극적인 자다. 반면, 샤오지는 일이 임했을 때 올바로 대할 줄 알며 정상 인성의 이성과 판단력을 갖추고 긍정적인 방식으로 직면하면서 본분 이행을 이어 나갔다. 이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부류이다. 샤오샤오는 일이 임하자 자포자기하면서 올바른 방식이나 방법을 찾아 대처하지 않았다. 게다가 상황을 분별하지도 못한 채 바보 같고 어리석고 고집스럽고 강퍅했으며, 또한 무척 악독했다. 그는 무슨 병에 걸리거나 어려움이 닥치거나 좋지 않은 일이 임하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모두 그런 일이 닥치기를 바랐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보호해 주지 않았다고 원망하며 분노를 발산하고자 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분노를 발산하고 화풀이할 용기는 없어 자기 자신에게 발산하고 화풀이했다. 이는 흉악한 성품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좀 임했다고 원망하고 증오하며 질투하는 것이 바로 흉악함이다. 샤오지는 일이 임했을 때 정상 인성의 이성과 판단력을 보였고, 정상 인성에 마땅히 지녀야 할 지혜와 선택을 보여 주었다. 비록 샤오샤오와 같은 병에 걸리기는 했어도 마지막에 샤오지는 문제를 해결했고, 샤오샤오의 문제는 줄곧 해결되지 못한 채 악화되기만 했다. 샤오샤오의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그것은 육적인 질병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성품이 드러난 것이다. 그의 완고함과 강퍅함, 어리석음, 악독함이 드러났다는 말이다. 이 둘에게는 이런 차이가 있다. 만약 너희가 이 둘의 생활 방식과 일을 대하는 태도, 방법을 더 세부적으로 인식하고 이해한다면, 앞으로도 계속 교제하며 스스로에게 대입해 보고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샤오지처럼 긍정적인 측면에서 진입하여 삶을 올바로 대하는 한편,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샤오샤오 같은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옳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마땅히 이렇게 추구하고 실행해야 한다.

이어서, 지난번 예배 때 교제한 내용을 되짚어 보도록 하겠다.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 중 첫 번째 내용은 좋은 행위였다. 우리는 이에 관해 여섯 가지를 나열했는데, 전부 전통문화가 제창하는 것이자 실생활 속에서 사람이 좋아하는 ‘좋은 행위’였다. 말해 보아라. 어떤 것들이더냐?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온화하고 우아한 것, 점잖고 예의 바른 것,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 상냥하고 친절한 것, 가까이하기 쉬운 것 등이 있었습니다.) 더 많은 예를 들지는 않았다. 각국의 전통문화에는 중국 전통문화에서 종합해 낸 이 여섯 가지 대표적인 좋은 행위와 다른 것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하나씩 열거하지는 않겠다. 지난 시간에는 이 여섯 가지에 관해 구체적인 내용을 교제하고 해부하였다. 종합적으로 보자면, 이 겉면의 좋은 행위들은 인성 안에 있는 긍정적인 것들을 의미하지 않으며, 어떤 사람의 성품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또한,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제를 살아 낸다는 의미 역시 절대 될 수 없다. 이는 사람이 볼 수 있는 외적 행위, 간단히 말해 사람의 외적 태도에 불과하다. 그런 겉면의 태도와 표출은 그저 사람들이 서로 교제하고 함께 지내며 생활할 때의 예절과 관련된 것일 뿐이다. 예절과 관련된 것이란 무슨 의미겠느냐? 가장 표면적인 것, 사람이 편하게 보는 것으로, 사람의 본질이나 사상, 관점, 긍정적인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를 의미하지 않으며, 나아가 사람이 진리를 대하는 태도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표면적 행위에 대한 인류의 이 요구와 판단 기준들은 그저 사람이 이해하고 해낼 수 있는 예절과 관련된 것일 뿐, 사람의 본질과는 어떤 관계도 없다. 어떤 사람이 겉보기에 얼마나 상냥하고 친절하든, 얼마나 가까이하기 쉽든, 겉으로 살아 내는 행위가 얼마나 호감과 존중, 경모, 숭배를 받든, 이런 것들은 그가 인성을 갖춘 사람이라는 의미가 될 수 없으며, 그의 본성 본질이 선량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며 정의감 있다는 의미도 될 수 없다. 물론, 그가 진리를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사람이 종합해 낸 그런 좋은 행위들은 그저 인류가 다른 생물과 구별되기 위해 제창한 외적 태도이자 살아 냄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온화하고 우아한 것, 점잖고 예의 바른 것 등의 좋은 행위는 한 사람이 외적으로 꽤 단정하고 예의가 있으며, 교육 수준이 높고 교양을 갖췄다는 것을, 동물처럼 규율도 모르는 것은 아님을 의미할 뿐이다. 사람은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면 손이나 티슈로 입가를 닦아 청결을 유지한다. 반면, 개는 밥을 먹고 물을 마신 후 네가 입을 닦아 주려고 해도 싫어한다. 동물은 그러한 것들을 모른다. 그럼 사람은 어째서 알겠느냐? 사람은 ‘고등 동물’이기 때문에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런 좋은 행위들은 인류라는 생물종의 행위를 규범화하는 데 사용되며, 인류라는 생물이 다른 하등 생물들과 차이를 갖게 해 줄 뿐, 사람으로서 처신하고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다시 말해, 네가 표면적으로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온화하고 우아한 것’과 같은 몇 가지 요구 기준과 좋은 행위를 갖추었다고 해도, 그것이 네가 인성과 진리를 갖추었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절대 그런 의미가 될 수 없다. 이와는 반대로, 그것은 그저 너라는 사람이 체계적인 행위 교육과 예의범절 교육을 받은 후 말과 표정, 행동거지 등의 여러 측면에서 어느 정도 규범화되었으며, 동물보다 나아져서 어느 정도 사람다운 모습을 갖게 됐다는 뜻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는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며, 심지어는 진리 추구와 어떤 상관도 없다고 할 수 있다. 네가 그런 좋은 행위들을 갖췄다고 해도, 그것은 네가 진리 추구의 조건을 갖췄다는 것은 아니며, 이미 진리 실제에 진입하여 진리를 얻었다는 의미는 더더욱 될 수 없다. 그런 의미는 전혀 없다.

개나 고양이를 키워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녀석들이 꽤 귀여우며, 어느 정도 선을 지킨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어떤 새끼 고양이는 주인 방에 들어가고 싶을 때, 일단 방 앞에서 야옹거린다. 주인이 들어오라는 말을 하기 전까지는 들어가지 않으며, 주인이 “들어와도 돼.”라고 말해야 들어간다. 고양이는 이러한 선을 알기에 문 앞에서 먼저 주인의 동의를 구한다. 이는 일종의 좋은 행위 아니겠느냐? 동물조차도 이러한 면을 갖추었는데, 사람이 그 정도의 좋은 행위를 갖추었다고 동물보다 얼마나 더 낫겠느냐? 이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상식이며, 교육받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정상적인 일이다. 그런 좋은 행위는 사람에게 상대적으로 편하고 안정된 기분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런 좋은 행위를 살아 내는 것이 인성의 품질과 본질을 의미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그저 일을 처리할 때 갖춰야 할 규율과 방식일 뿐, 인성의 품질이나 본질과는 어떤 관계도 없다. 예를 들어, 고양이와 개의 공통점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먹을 것을 주면 친밀함과 감사의 뜻을 드러내며, 그런 행동, 행위를 보일 줄 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다. 고양이는 쥐를 잡는 데 특화되어 있고, 개는 집을 지키는 데 특화되어 있다. 고양이는 언제든 주인을 떠날 수 있으며, 재미있는 곳에 가면 주인을 잊어버리고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개는 영원히 자기 주인을 떠나지 않는다. 개가 너를 주인이라고 인정하면, 나중에 주인이 바뀔지라도 너를 알아보고 주인으로 여긴다. 이것이 바로 품행과 본질 면에서 나타나는 개와 고양이의 차이이다. 이제 사람에 대해 말해 보겠다. 사람이 좋은 행위라고 여기는 것들, 예를 들어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점잖고 예의 바른 것, 가까이하기 쉬운 것 등 몇 가지는 다른 생물보다 고차원적이다. 다시 말해,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생물들보다 고차원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표면적인 행위이자 규율일 뿐이다. 또한,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하여 사람을 다른 생물이나 동물과 다르게 하는 행동에 불과하다. 사람은 그런 좋은 행위들이 있기에 다른 동물들과 다르다고, 혹은 낫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어떤 부분에서는 동물보다 못하다. 예를 들어,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한다’는 말을 보자. 동물계에서 늑대 무리는 사람보다 더 낫다. 늑대 무리는 누구의 새끼든 성체(成體)들이 함께 보살펴 주며, 괴롭히거나 해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이 부분에서 사람은 늑대보다 못하다. 너는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을 어떻게 보느냐? 사람이 정말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평범한 사람은 ‘아이를 사랑하는 것’을 하지 못한다. 사람은 이 부분의 좋은 행위를 갖추지 않았으며, 이런 인성이 없다. 예를 들어, 아이의 부모가 곁에 있을 때, 사람들은 그 아이에게 상냥하고 친절하며 가까이하기 쉬운 태도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부모가 곁에서 사라지면 귀신의 몰골이 드러난다. 아이가 말을 걸어도 신경 쓰지 않으며, 마음에 안 들 경우 학대까지 할 수 있다. 이 얼마나 부덕한 행위이냐! 전 세계 많은 나라에서 아동 유괴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는데, 이는 세계적인 문제가 되었다.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행위를 사람은 갖추지 못했으며, 어린아이를 괴롭히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말해 보아라. 여기에 인성이 있겠느냐? 그러면서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척하니, 전부 외적인 허상이다. 어째서 이 예를 들었겠느냐? 인류가 좋은 행위들을 종합해 내고 사람의 행위에 그런 요구 기준들을 제시했을지라도 사람이 해낼 수 있든 없든, 사람이 좋은 행위를 얼마나 갖추었든, 사람의 패괴된 본질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준칙은 완전히 패괴된 인류의 사상과 관점에서 비롯되며, 패괴 성품에 의해 결정된다. 인류가 종합해 낸 요구 기준을 모두가 공인할지라도, 그것이 좋고 높은 기준일지라도, 사람이 그것을 해낼 수 있겠느냐? (해낼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문제이다. 표면적으로 좀 좋게 행동하여 보상을 받고 모두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고 해도 거기에는 위장과 기만의 불순물이 들어가 있다. 사람은 얼마간 좋은 일을 하는 건 쉽지만 평생 하는 건 어렵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정말 좋은 사람이라면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렵겠느냐? 그러므로 사람이 말하는 소위 좋은 기준, 공인하는 기준은 아무도 도달할 수 없다. 그것은 전부 과장이고 거짓이고 허구이다. 표면적으로 어느 정도 행하고 좋은 행위를 갖출 수는 있다고 해도, 즉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온화하고 우아한 것, 점잖고 예의 바른 것,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 상냥하고 친절한 것, 가까이하기 쉬운 것 등과 같은 몇 가지를 사람이 해내고 갖출 수 있다고 해도, 그 또한 단기간만, 혹은 한순간이나 한때의 상황에서 필요할 때만 해낼 수 있을 뿐이다. 지위나 체면, 돈, 이익, 나아가 운명이나 앞날과 관련되는 순간, 사람의 본성과 흉악한 모습이 드러난다. 그것은 교양 있고 사리 밝거나 온화하고 우아하거나 점잖고 예의 바르거나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거나 상냥하고 친절하거나 가까이하기 쉬운 이미지가 아니라 암투를 벌이고 속고 속이고 서로 모함하고 해하는 모습일 것이다. 이런 일은 너무도 많이 일어난다. 설령 친구나 친척, 심지어는 부자지간에도 이익과 지위, 권력 때문에 서로 목숨 걸고 싸우는 지경이다. 여기에서 인간 세상의 참상을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온화하고 우아한 것, 점잖고 예의 바른 것,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 상냥하고 친절한 것, 가까이하기 쉬운 것 등은 한때의 상황에서 나온 산물로, 누구도 진정으로 해내지는 못한다. 심지어는 중국인이 숭배하는 성인이나 명인들조차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설교나 이론은 모두 황당한 것, 그야말로 헛소리에 속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개인의 이익과 관련된 일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여 해결할 수 있으며, 진리를 실행하여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가 갖춘 진리 실제는 인류가 공인하는 그런 좋은 행위의 기준보다 높다. 반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이익이라는 관문을 넘어서지 못하니, 진리를 실행하지도 못한다. 그는 좋은 행위라는 이 규례와 관련된 것조차 지키지 못한다. 그러니 그가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무엇을 근거와 준칙으로 삼겠느냐?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가 아니라 규례, 도리, 사탄의 철학과 법칙을 근거와 준칙으로 삼는다. 그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직 이익만 좇으니 당연히 진리를 실행할 수 없고, 좋은 행위조차 지키지 못한다. 꾸미고 싶어도 꾸미지 못하고,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는 자기 이익을 위해 싸우고 다투고 뺏으며, 음모와 간계를 쓰고 기만행위를 하며, 남을 괴롭히고, 심지어는 죽일 수도 있다. 이 흉악한 일들을 모두 할 수 있다. 이는 본성이 드러난 것 아니겠느냐? 본성이 드러날 때, 사람들은 그가 말하고 일 처리하는 속셈이 무엇인지, 무엇에 근거하는지 쉽게 간파할 수 있으며, 그가 완전히 사탄의 철학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근거가 사탄의 철학이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 “푸른 산이 있는 한 땔나무 걱정은 없다.”, “도량이 좁으면 군자가 아니요, 배짱이 없으면 장부가 아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등 사탄의 논리와 법칙이 그의 내면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다. 사람이 이러한 것들로 살아갈 때,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온화하고 우아한 것, 점잖고 예의 바른 것,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 등의 좋은 행위는 위장의 가면이 되어 허상으로 변한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사람이 살면서 진정으로 기대는 근거와 법칙이 진리가 아니라 사탄이 주입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람이 지닌 최소한의 양심과 도덕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한다. 이익과 얽히는 순간, 그의 본모습이 드러난다. 그때, 사람들은 그의 진면목을 보고 놀라서 말한다. “저 사람, 평소에는 온화하고 점잖고 예의 바른 신사 아니었어? 일이 임하니까 꼭 사람이 변한 것 같네?” 사실 변한 게 아니라 본모습이 드러나고 폭로된 것이다. 이익과 관계가 없을 때, 인간관계가 틀어지지 않았을 때,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은 위장이고 기만이다. 그의 이익에 영향과 위협이 미쳐 더 이상 위장하지 않을 때, 그가 드러내는 생존의 근거와 법칙이야말로 그의 본성이고 본모습이며 본질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어떤 좋은 행위가 있어도, 사람의 표면적인 행위가 아무리 흠잡을 데 없어도 그가 진리를 추구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최소한 그 사람에게 정상적인 인성이 있다는 의미는 아니며, 그가 믿을 만하고 사귈 만한 사람이라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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