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추구란 무엇인가(3) 제 3 부

하나님은 사람에게, 말할 때 원칙이 있어야 하며 남들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것이 사람의 외적인 좋은 행위와 관계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조금의 관계도 없다. 예를 들어, 네가 말할 때 다른 이를 속박하지 않고 거짓말하거나 기만하지 않으며, 또 상대를 격려하고 일깨우고 위로해 주는 등 두 측면의 역할을 모두 할 수 있다고 해 보자. 그럼 너는 가까이하기 쉬운 태도로 행할 필요가 있겠느냐? 반드시 가까이하기 쉬워야겠느냐? 반드시 점잖고 예의 바르며, 온화하고 우아한 행위의 틀 속에서 행동해야겠느냐? 그렇지 않다. 네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 상대에게 도움이 되는 전제 조건은 전통문화가 규정한 좋은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요구, 진리에 근거하는 것이다. 네 말에 원칙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면 앉아서 말해도 되고 서서 말해도 된다. 목소리가 커도 상관없고 작아도 상관없다. 또 어투가 온화해도 괜찮고 날카로워도 괜찮다. 최종적으로 긍정적인 성과만 낼 수 있다면 너는 책임을 다한 것이고 상대는 이로움을 얻은 것이니, 이는 진리 원칙에 부합한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하며, 네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 원칙을 근거로 한다면,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너에게서 도움을 받고 수확을 거둔다면 이는 양쪽 모두에게 이로운 일 아니겠느냐? 만약 전통문화의 사상에 구속되어 살아가면서 너도 위장하고 그도 위장한다면, 너는 점잖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그는 연신 굽실거리면서 서로 꾸민다면, 둘 다 좋은 인물은 아닐 것이다. 온종일 굽실거리고 예의를 차리면서 솔직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전통문화가 제창하는 ‘좋은 행위’만을 살아 낸다. 겉으로 볼 때는 규범화된 행위 같지만, 그것은 전부 외식하는 행위요, 사람을 기만하고 미혹하는 행위이자 사람을 속이는 행위이다. 그들에게서는 진심이 담긴 말 한마디도 들을 수 없다. 만약 그들과 친구가 된다면 마지막에는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너는 그들의 좋은 행위에서 어떤 이로움도 얻지 못한다. 그저 위장하고 기만하며, 서로 속고 속이는 법을 배울 뿐이다. 결국 너는 네 인격과 존엄성이 심각하게 모욕받았다고 느끼겠지만, 참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겉으로 점잖고 예의 바르고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양 행동하면서 남의 흠집을 잡아내지 않고, 사람에게 너무 지나친 요구를 하지 않으며, 인내하고 포용할 것이다. 또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넓은 도량을 보이며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를 띨 것이다. 얼마나 오랜 세월 수련해야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겠느냐! 자신에게 이렇게 요구하고,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너무 피곤하지 않겠느냐? 자신에게는 분명 그러한 사랑이 없는데도 크게 사랑하는 척해야 하는데, 이런 식으로 외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너는 점점 이렇게 사는 것이 너무 피곤하다고, 다음 생에 태어나면 우마나 개돼지가 될지언정 사람이 되지는 않겠다고, 사람은 너무 가식적이고 못됐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람은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살아가겠느냐? 전통 관념 속에서 살면서 이러한 관념에 속박되고 결박되며, 사탄의 패괴 성품에 기대 죄 속에서 살아가며 벗어나지 못하고, 출구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람의 모습으로 살지 못하고, 사람과 사람 간에 진심 어린 말 한마디조차 듣거나 얻을 수 없다. 부부나 모녀 사이, 부자 사이 등 가장 친근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마음속에 있는 말이나 따뜻한 말, 위안이 되는 말을 들을 수 없다. 그럼 이 외적인 좋은 행위들은 어떤 역할을 하겠느냐?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상적인 거리와 관계를 잠시간 유지해 줄 뿐이다. 사람들은 이 좋은 행위의 뒤에서 서로 깊은 교류를 할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결국 ‘거리의 미학’이라는 말을 종합해 냈다. 이는 인류의 본모습이 드러난 것 아니겠느냐? 거리에서 어떻게 미학이 생길 수 있겠느냐? 이런 거짓되고 사악한 실생활 속에서 사람은 점점 더 외로워지고 자기 안에 갇혀 있고 억압받고 분노로 속을 끓이고 불만스러워하며 길을 찾지 못한다. 이것이 이방인들의 실제 상태이다. 그러나 지금 너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집에 와서 하나님 말씀의 공급을 받아들였으며, 또한 수시로 설교를 듣고 있다. 그런데도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전통문화가 제창하는 좋은 행위를 좋아한다. 이는 한 가지 사실을 설명해 준다.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너에게는 조금의 실제도 없다는 것 말이다. 너는 왜 여전히 그렇게 억압받고 외로우며 가련하고 비굴하게 사는 것이냐? 단 하나의 이유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조금의 변화도 없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자면, 너는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지 않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지 않으며, 여전히 패괴 성품과 전통 관념에 기대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외롭게 사는 것이다. 너에게는 친구가 없고 마음을 나눌 사람도 없다. 너는 다른 이로부터 당연히 받아야 할 격려나 인도, 도움, 이로움을 얻지 못하며, 너 자신 역시 다른 이에게 격려와 인도, 도움을 주지 못한다. 최소한 이런 행위에서도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지도, 진리를 준칙으로 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문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것은 진리나 하나님 말씀과 까마득히 멀리 떨어져 있다!

방금 사람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 관해 교제하였다. 하나님은 사람이 말하고 행동할 때 원칙을 갖고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요구한 것이다. 이것을 기초로 한다면 인류가 종합해 낸 그 좋은 행위들이 정말 가치가 있는지, 소중히 여길 만한 것들인지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소중히 여길 만한 것들이 아닙니다.) 소중히 여길 만한 것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행해야겠느냐? (버려야 합니다.) 어떻게 버려야겠느냐? 버리려면 구체적인 실행의 길과 절차가 필요하다. 먼저, 자신에게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온화하고 우아한 것’ 등 전통문화가 제창하는 행위와 모습이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야 한다. 성찰의 방식과 내용에는 어떤 것들이 있겠느냐? 자신이 평소에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사탄의 어떤 요소들이 자기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혈액과 뼛속까지 침투했는지 살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릴 때부터 응석받이로 자랐고 규율도 잘 모르는 사람이 있다고 해 보자. 그래도 그는 인성이 나쁘지 않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라서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할 때 진심을 다하며, 고난을 겪고 대가를 치를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단점이 있는데, 식사할 때 반찬을 고르고 쩝쩝거린다는 것이다. 그 소리에 너는 괴롭고 제대로 밥을 먹을 수가 없다. 너는 여태까지 그런 사람을 몹시 경멸하며, 가정 교육이 되지 않았고 규율을 모른다고, 교양 없고 사리 밝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또 그런 사람은 비천하고 품격 없다고, 하나님이 택하는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이며,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닐 거라고 무시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 근거는 무엇이냐? 너는 그의 본질을 간파했느냐? 그의 본질에 근거하여 판단했느냐? 너는 무엇에 근거하여 판단했느냐? 너는 분명 중국 전통문화의 각종 논조로 사람을 판단했다. 그럼 네가 이 문제를 발견했을 때, 오늘 교제한 진리에 근거하여 어떻게 생각해야겠느냐? ‘이런, 나는 여태까지 그를 무시하면서 늘 그의 교제를 듣기 싫어했어. 그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만 보면 그게 아무리 옳아도, 그가 교제하는 말이 아무리 실제적이어도, 그가 밥 먹을 때 쩝쩝거리고 반찬을 고르는 것만 떠올리면서 그가 하는 말을 듣기 싫어했지. 언제나 그를 교양도 자질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교제를 듣고 나서 내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 사람을 본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어. 그의 나쁜 생활 습관과 좋지 않은 행위,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가정 교육이 부족하거나 보기에 좋지 않은 부분을 인성 본질이 드러난 것으로 생각한 거야. 지금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서 판단해 보니, 그건 다 인성 본질과 관련 없는 작은 문제라는 걸, 원칙적인 문제는 결코 아니라는 걸 알겠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스스로를 성찰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이러한 일을 밝히 알 수 있다. 그럼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겠느냐? 길이 있느냐? 그에게 당장 그 나쁜 습관들을 고치라고 한다면 되겠느냐? (안 됩니다.) 그 작은 문제들은 이미 오래 쌓여 고치기 힘들며, 하루 이틀 새에 바꿀 수 없다. 행위적인 문제라면 그래도 해결하기 쉽다. 하지만 생활 습관과 관련된 문제는 시간을 들여야 고칠 수 있다. 다만 이 문제들은 인품과 관련이 없고, 인성 본질과도 관련이 없으니, 지나치게 물고 늘어지지 마라. 사람마다 각자의 생활 습관과 생활 방식이 있다. 진공 상태에서 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 조금씩 문제가 있고, 어떤 문제든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면 고쳐야 한다. 그러면 남들과 화목하게 함께 지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이상적이지는 않을 수도 있다. 지역별로 생활 습관이 다르니 서로 포용해야 한다. 이는 정상 인성에 마땅히 갖추어야 할 부분이다. 사소한 문제를 따지지 말고, 포용하는 태도를 취해라. 사람을 대할 때는 이렇게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이것이 바로 포용의 원칙이며, 이런 일을 처리하는 원칙이자 방법이다. 사람의 사소한 문제에 근거하여 그의 본질과 인성을 규정해서는 안 된다. 그 근거는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 사람에게 어떤 문제나 결함이 있든, 그것들은 그 사람의 본질을 대표하지 않으며, 그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거나 나아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의 장점을 봐야 한다. 또한, 하나님 말씀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 근거하여 사람을 봐야 한다. 그렇게 하면 사람을 공평하게 대할 수 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겠느냐?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해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모든 사람을 바라볼 수 있겠느냐? 상대가 양심과 이성을 갖췄는지, 선량한 사람인지 아니면 악인인지를 보면 된다. 그와 접하면서 그에게 사소한 문제와 결점이 많지만 인성은 무척 선량해서 남들과 함께할 때 포용하고 인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면, 다른 사람들이 소극적이고 연약할 때 사랑으로 공급하고 도와준다는 것을 알게 됐다면, 이것이 바로 사람을 대하는 그의 태도이다. 그럼 그는 하나님을 어떤 태도로 대하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그의 태도를 보면 그 사람에게 인성이 있는지를 더 제대로 판단할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이 행한 것에 순종하고 구하고 갈망하는 태도를 보이며, 본분을 이행하고 사람들과 함께하는 과정에서나 행동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는다. 함부로 날뛰거나 제멋대로 굴지 않고, 되는대로 행동하거나 말하지도 않으며, 하나님이나 하나님 사역과 관련된 일이 임하면 무척 신중한 모습을 보인다. 그에게 이러한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의 인성에서 드러낸 것들에 근거하여 그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어떻게 판단해야 하겠느냐?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서, 그리고 사람에게 양심과 이성이 있는지, 진리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는 어떤지에 근거해서 판단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측면으로 판단하고 나면 그 사람의 행위에 몇몇 문제나 결점이 있어도 그는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이라는 것을, 하나님을 대할 때 순종하고 경외하는 마음이 있으며 진리를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하나님은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본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보는 이상, 너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판단한다면 그는 진정한 형제자매이니 올바르게 대해야 한다. 편견을 갖거나 색안경을 끼고 대해서는 안 되고, 전통문화의 논조에 근거하여 대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 말씀으로 그를 판단해야 한다. 그의 행위에 나타난 결점을 대할 때, 네게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마땅히 그를 도와 그가 어떻게 하는 것이 적절한지 알려 줘야 한다. 그가 받아들이기는 해도 바로 고치지는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포용해야 한다. 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네게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의미이다. 너는 그를 대하는 태도에서 진리를 구하는 한편, 자신의 부족한 점을 반성하고 인식해야 한다. 그러면 올바르게 사람을 대할 수 있다. 반대로, 만약 네가 “그 사람은 문제점이 아주 많은 데다가 교양도 없고 규율도 몰라. 사람을 존중하는 법도, 예의도 모르지. 그는 이방인이야. 나는 그 사람하고 사귀고 싶지 않아. 보고 싶지도 않고. 그가 무슨 말을 하든, 그 말이 아무리 옳아도 나는 듣기 싫어.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누가 믿겠어? 그가 그럴 주제나 되겠어? 그에게 그런 자질이 있겠냐고.”라고 말한다면 이는 어떤 태도겠느냐? 이렇게 사람을 대하는 것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돕는 것이겠느냐?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 것이겠느냐?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는 것이겠느냐?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겠느냐? 네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겠느냐? 하나님을 믿으면서 최소한의 사랑조차 없다면, 그런 사람에게 진리 실제가 있겠느냐? 네가 언제나 자신만의 관념을 고집하며, 사람과 일을 바라볼 때 여전히 자신의 느낌과 인상, 기호, 관념에 근거한다면 이는 네가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사탄의 철학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이며, 진리를 사랑하거나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독선적인 사람들은 어떻게 교제하든 자기 관점을 고집한다. ‘나는 점잖고 예의 바른 사람,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사람이 될 거야. 그게 왜? 나는 적어도 좋은 사람이라고. 이렇게 처신하는 게 뭐가 나빠? 최소한 사람들이 나를 존중하기는 할 거 아냐.’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네가 좋은 사람이 되겠다면 나는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 그렇게 위장한다면 진리 생명을 얻을 수 있겠느냐? 그렇게 좋은 사람으로 처신하는 것이 네 인격이나 처신의 목표, 방향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는 알아야 한다. 그런 식으로 해서는 진리를 깨달을 수 없으며,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도 없다. 결국 마지막에는 진리도 생명도 얻을 수 없고, 하나님의 구원도 얻지 못할 것이다. 오직 이러한 결과뿐이다.

방금 사람의 관념 속 좋은 행위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이 관념 속 좋은 행위를 어떻게 분별하여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지에 관해 교제하였다. 너희는 길이 생기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어떻게 해야겠느냐? (먼저 스스로에게 이러한 행위가 있지는 않은지 돌아본 후, 자신이 평소에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근거와 준칙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그렇다. 먼저, 자신이 여태까지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측면에서 오늘 내가 교제한 것과 충돌하거나 어긋나는 부분이 없는지 밝히 알아야 한다. 또 사람과 일을 바라볼 때 자신의 각도와 관점이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지, 전통문화의 기준이나 어떤 명인, 위인의 말에 근거하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 말씀과 진리에 근거하고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 그다음, 전통문화의 사상과 관점, 명인이나 위인의 사상과 관점이 진리에 부합하는지, 진리와 어느 부분에서 충돌하며 어디가 틀렸는지 성찰해야 할 것이다. 이는 성찰의 2단계 세부 내용이다. 그럼 3단계는 무엇이겠느냐? 네가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관점과 방법, 근거, 준칙이 모두 사람의 뜻에서 나왔고, 사악한 사회 흐름과 전통문화에서 비롯되었으며, 진리와는 위배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어떻게 해야겠느냐? 관련된 하나님 말씀을 찾아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 중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측면의 진리 원칙을 찾아야 한다. 주로 하나님 말씀의 내용에 근거하되,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 말씀의 진리 원칙에 근거해야 한다. 이 진리 원칙은 네가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근거, 준칙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사람은 먼저 자신의 관점과 관념, 견해와 태도를 부정해야 한다. 이는 사람의 잘못되고 그릇된 관점과 관련이 있으니 먼저 그것을 파헤쳐 인식하고 철저히 해부해야 할 것이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관련된 하나님 말씀 가운데서 정확한 가르침을 찾아 묵상하고 교제한 뒤 진리 원칙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다음은 사람이 어떻게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하느냐에 달려 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사람이 진리 원칙을 알았다고 해서 곧바로 받아들이고 순종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패역과 패괴 성품은 한순간에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패괴 성품이 있어 설령 하나님 말씀의 뜻을 이해했다고 할지라도 바로 실행할 수는 없다. 언제나 한 차례 전쟁을 겪어야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 사람에게는 패역 성품이 있고, 편견과 제멋대로인 습성, 강퍅함, 거만함, 독선, 자만, 그리고 수많은 이유와 핑계가 있다. 사람은 자신의 몸값과 지위, 명예, 체면 등을 내려놓지 못한다. 그러므로 관념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것들을 내려놓으려면 이러한 이익과 네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버려야 한다. 이것들을 모두 버리고 내려놓아야 비로소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할 희망과 기회가 생기며, 진리 원칙대로 실행할 수 있다. 자신을 내려놓고 부정하는 것은 가장 깨기 힘든 관문이다. 일단 이 관문을 지나가면 네 마음속에는 그리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또한 네가 진리를 깨달아 좋은 행위의 본질을 간파하면 사람과 일에 대한 관점이 바뀔 것이고, 조금씩 이 전통문화와 관련된 것들을 내려놓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잘못된 관점을 바꾸고, 일을 처리하는 방식과 방법을 바꾸며, 일 처리의 근원과 동기를 바꾸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패괴 성품이 있는데, 이는 가장 바꾸기 힘든 부분이다. 사람이 일을 바라보는 관점과 생활 방식은 모두 패괴 성품에서 비롯되었다. 패괴 성품 때문에 너는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제멋대로 행동하게 되고, 남을 무시하면서 자신의 명성과 지위를 지키고, 사람들 사이에서 우러름 받고 얼굴을 드러내는 데에만 집중하게 되는 한편, 항상 앞날과 운명 등을 생각하게 된다. 이는 전부 패괴 성품에서 비롯된, 네 이익과 관련된 것들이다. 네가 이것들을 하나씩 깨부수고 간파하고 부정하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것들을 조금씩 내려놓아야 비로소 오롯이,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여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에 관해서는 모두가 알고 있으며, 이해하기도 쉽다. 사람의 이성과 사유, 그리고 의지, 이상에 따르면 여기에 도달할 수 있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이 말을 지키고자 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 사람이 진리를 실행할 때는 그것이 몹시 힘들다. 실제로 진리 실행을 가로막는 걸림돌과 문제는 외부 환경의 어려움만이 아니다. 주된 원인은 사람의 패괴 성품과 관련되어 있다. 패괴 성품은 사람이 마주하는 갖가지 어려움의 근원이다. 패괴 성품을 해결하면 사람의 각종 문제와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 사람이 진리를 실행할 때 마주하는 모든 어려움은 패괴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 말씀을 실행할 때, 진리 실행이라는 실제에 진입할 때, 너는 점점 더 의식하게 될 것이다. ‘나한테는 패괴 성품이 있어. 나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패괴된 인간이고, 사탄에 의해 심각하게 패괴되어 사탄 성품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야.’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여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자 한다면, 부정적인 사물을 인식하고 간파하는 것은 생명 진입의 1단계이자 첫걸음에 불과하다. 어째서 많은 사람이 얼마간 진리를 깨닫고도 실행하지 못하며, 수많은 글귀 도리를 말할 줄 알아도 진리 실제에 통 진입하지 못하겠느냐? 그들이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해서겠느냐? 그렇지 않다. 반대로, 그들은 진리에 대한 여러 측면의 이론과 글귀를 제대로 알고 있고, 심지어는 물 흐르듯 줄줄 읊는다. 당연히 의지와 좋은 마음가짐, 바람도 있어서 진리에 공을 들이고자 한다. 그런데 왜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고, 진리 실제에 도통 진입하지 못하겠느냐? 이는 사람이 알고 있는 그 글귀와 이론들을 도통 실생활에 적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 이 문제는 어디에서 비롯되겠느냐? 사람의 패괴 성품이 중간에서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그러므로 영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 진리 추구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실패하고 좌절하고 진리를 실행하지 못할 때마다 맹세하고 다짐한다. 하지만 수없이 다짐하고 맹세했는데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그 단계에 계속 머물러 있게 된다. 계속 거기에 막혀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진리를 실행할 때, 늘 노력하겠다고 다짐하고 맹세하면서 매일 스스로를 독려하는데, 그렇게 3~5년간 노력해 봤자 결국 어떻게 되겠느냐? 여전히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실패로 끝난다. 그들이 알고 있는 그 정도의 도리는 아무 데도 쓸 데가 없다. 어떤 일이 닥쳐도 간파하거나 밝히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근거로 삼지 못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일을 바라봐야 할지 알지 못하며, 하나님의 말씀 중 어떤 측면의 진리가 그 일과 관계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조급해서 스스로를 증오하는 한편, 하나님께 기도하며 힘과 믿음을 더해 달라고 하며, 마지막에는 스스로를 독려한다. 이런 자는 어리석은 자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린아이와 다를 바가 없다. 실제로 사람이 일상생활 속에서 진리 추구라는 일을 대하는 모습은 이렇게 유치하지 않더냐? 사람은 늘 다짐과 맹세, 자제, 자기 독려를 통해 진리를 실행하고자 스스로를 다독이지만, 진리의 실행과 진입은 사람이 자기를 독려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정말 내가 알려 준 방식대로 착실히 한 걸음 한 걸음 진입하고 실행해야만 성과를 볼 수 있고, 진리를 추구하여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 이것 외에 다른 지름길은 없다. 얼마간 열의가 있고 헌신하려는 소망이 있으며 큰 다짐과 원대한 목표가 있다고 해서 진리가 네 실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실생활 속에서, 사람과 일, 사물 속에서 구하고 진입하고 실행하고 순종하는 이 기본적인 공과들을 모두 배워야 한다. 그러고 나면 진리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체험과 경험, 인식이 생긴다. 그러지 않으면 몇 년을 노력하고 스스로를 독려해도, 내면의 공허함을 채워 줄 약간의 도리밖에 얻지 못할 것이다. 그것으로 한순간 정신적인 만족은 얻겠지만, 정말 실속 있는 것은 얻지 못한다. 정말 실속 있는 것을 얻지 못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겠느냐? 네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네가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관점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 너는 대충 있는 대로, 막막하게 살아갈 뿐이다. 일이 임해서 네 관점과 원칙, 입장을 밝혀야 할 때가 오면 무지와 어리석음, 공허함, 그리고 막막함이 더 또렷하게 드러날 것이다. 너는 평소에 올바른 도리와 구호를 입에 침이 마르게 늘어놓으면서 무엇이든 아는 것처럼 굴지만, 막상 일이 임해서 네게 진지하게 따져 태도와 입장을 밝혀 보라고 하면 할 말이 없다. “제가 왜 할 말이 없겠습니까? 저는 그냥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럼 왜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한단 말이냐? 이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 확신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 왜 확신하지 못하겠느냐? 네가 그 일을 할 때, 그렇게 행동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그 일을 하는 원칙은 무엇인지 명확하게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일을 바라보고 행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했는지도 명확하게 한 적도 없다. 그래서 일이 임했을 때, 더없이 당황하면서 무능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혹자는 인정하지 못하고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대학생이에요. 저는 석사라고요.”라고 말하고, “저는 철학가입니다. 저는 교수예요. 저는 고급 지식인이라고요.”라고 말하며, “저는 교양인이에요. 저는 언변이 뛰어나요.”라고 말하고, “저는 인재예요.” 혹은 “저는 능력 있는 사람이에요.”라고 말한다. 이런 것들을 밝히는 게 소용이 있겠느냐? 그것은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기껏해야 네게 얼마간 지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 하나님 집에서 쓸모가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네가 지니고 있는 그 지식들은 적어도 진리가 아니며, 네 분량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네 분량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느냐? 그것들은 네 생명이 아니며, 신외지물(身外之物)인 것이다. 그럼 네 생명은 무엇이겠느냐? 사탄의 논리와 철학을 근거로 하고 준칙으로 한 생명인 것이다. 네 지식과 문화적 소양, 머리는 이러한 것들을 제압하지 못하며, 통제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임했을 때 너의 뛰어난 재능과 풍부한 지식은 어떤 역할도 할 수 없다. 또는 네가 어떤 한 측면의 패괴 성품을 드러낼 때, 네 인내와 교양, 지식 등이 전혀 역할을 하지 못해 막막하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이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않은 자의 난처한 모습이다. 진리에 진입하는 것이 쉽겠느냐? 난이도가 높겠느냐? 무엇이 어렵겠느냐?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리 어려울 게 없다는 사실이다. 다짐하고 맹세하는 데 골몰하지 마라. 그래 봤자 아무 소용 없다. 다짐하고 맹세할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에 공을 들이고,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했는지, 하나님 말씀 중 어떤 대목이 현재 네 내적 상태와 관련 있는지 묵상해라. 다짐은 아무 소용이 없다. 머리가 깨지고 피를 흘리며 다짐해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사람이나 귀신을 속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 하나님은 네 그런 다짐을 열납하지 않는다. 너는 몇 번이나 다짐했느냐? 너는 혼자 맹세하고 그 맹세를 깨며, 그 후에는 또 맹세하고 깨기를 반복한다. 그러니 네가 어떤 사람이겠느냐? 너는 언제쯤 네가 한 말을 지킬 것이냐? 네가 한 말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다짐도 중요하지 않고, 맹세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느냐? 네가 현재, 지금, 당장 깨달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다. 설령 가장 얕고 보잘것없어 보이며, 네가 가장 중요하지 않게 보는 진리일지라도 당장 실행하고 진입해라. 그러면 바로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 들어설 것이며, 얼마 안 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또한, 이 기초 위에서 곧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 수확이 얼마나 크고 실질적이냐!

너희는 전통문화에 포함된 좋은 행위에 대한 교제를 듣고 느낀 바가 있느냐? 이러한 좋은 행위를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오늘부터 저는 교양 있고 사리 밝으며, 온화하고 우아하며, 점잖고 예의 바른 사람 따위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소위 좋은 사람이 되지도 않을 거예요.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며, 상냥하고 친절하며, 가까이하기 쉬운 사람이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다 정상 인성의 자연스러운 표출이 아니라 위장과 거짓이 들어간 기만행위니까요. 이런 건 진리를 실행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될까요? 저는 정직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정직한 사람이 되는 데서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말할 때 문화적 소양이 부족하거나 규율을 모르거나 지식이 부족해 다른 사람에게 무시당해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거짓 없이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할 것입니다. 처신할 때도, 일을 처리할 때도 위장하거나 꾸미지 않겠습니다. 제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마음속에 있는 말일 것입니다. 속으로 생각한 것을 그대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저는 스스로를 돌아보되,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아니라 도움이 되는 일만 하겠습니다. 말할 때는 제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명예와 체면에 얽매이지도 않을 것입니다. 남들의 우러름을 받으려는 속셈은 더더욱 갖지 않겠습니다. 저는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지만 신경 쓸 것이며, 남에게 상처 주지 않는 것을 최저 기준으로 삼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요구대로 일을 처리하되, 남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 집의 이익에 손해를 끼치는 일 역시 하지 않겠습니다. 오직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일만 할 것입니다. 정직한 사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변화 아니겠느냐? 앞에서 한 말들을 정말 실행한다면, 그에게는 진실로 변화가 생길 것이고, 그의 앞날과 운명에는 전환점이 생길 것이다. 그는 머지않아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걸을 것이며, 진리 실제에 들어서서 구원받을 희망이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는 좋은 일, 긍정적인 일이다. 여기에 다짐과 맹세가 필요하겠느냐?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 앞에서 다짐할 필요도, 자신의 지난 잘못과 과오, 패역을 되뇌며 한시바삐 하나님께 죄를 인정하고 죄를 사해 달라고 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형식은 다 필요하지 않다. 네가 현재, 지금, 당장 정직한 말, 마음속에 있는 말을 하고 실질적인 일을 하며, 거짓말과 기만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성과가 날 것이며, 정직한 사람이 될 희망이 생길 것이다. 일단 정직한 사람이 되면 진리 실제가 생기고, 사람다운 모습으로 살게 된다. 그런 자가 바로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이다.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2022년 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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