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추구란 무엇인가(3) 제 2 부

교양 있고 사리 밝다는 것은 사람의 전통 관념으로, 진리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그것이 진리와 충돌한다면, 사람은 과연 무엇을 갖추어야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어떤 실제를 살아 내야 진리에 부합하고 하나님의 요구에 합할 수 있겠느냐? 알고 있느냐? 이렇게 교제하면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이 진리에 부합하지 않고, 그저 좋은 외적 행위에 불과하다고 하신다면, 저희는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살면 더 자유롭게, 어떤 속박이나 규례의 제약도 없이 원하는 대로 하고 살아갈 수 있겠지요. 얼마나 자유로울까요! 사람의 좋은 행위와 결말이 관계가 없다니 더 자유롭게 살아도 되겠습니다. 교양이니 규율이니 뭐니 하는 것들 다 필요 없겠네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이는 그릇된 이해로,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그럼 이런 오류를 범하는 사람이 없겠느냐? “교양 있는 사람도 하나님을 대적하고 배반할 수 있다면, 저는 교양 있는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교양 있는 사람을 무시할 것입니다. 또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 온화하고 우아한 사람, 점잖고 예의 바른 사람,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사람,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을 경멸하겠습니다. 그런 태도를 갖춘 사람을 보면 코웃음을 치면서 공개적으로 꾸짖을 것입니다. ‘그건 바리새인의 행위로, 사람을 미혹하는 짓입니다. 그것은 진리 추구가 아니며, 진리 실행은 더더욱 아니죠. 우리를 기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당신의 기만과 속임수에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너희는 이렇지 않으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지 않다니 되었다. 그런 비이성적인 일을 저지른다면, 그것은 너무 큰 잘못이다. 그릇되게 깨닫는 사람들은 진리를 순수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깨닫는 능력 없이 규례만 지키기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럼 어째서 이 문제를 교제하고 해부하겠느냐? 진리 추구가 좋은 외적 행위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며, 좋은 행위를 하고 규율을 알고 교양 있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네가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며, 진리에 근거하여 일을 처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즉, 네 행동은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에 부합해야 한다. 진리에 부합하고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는 행위는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과 같지 않으며, 전통문화나 전통 도덕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기준과도 같지 않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두 가지의 일이다. 하나님 말씀은 곧 진리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사람의 선악과 시비를 판단하는 유일한 준칙이다. 반면, 전통문화 중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의 기준은 진리 원칙의 기준에 한참 못 미친다. 하나님이 언제 네게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 교양 있고 고상하고 저속한 느낌이 없는 사람이 되라고 하더냐? 하나님의 어느 사역 단계에서 그렇게 말하더냐? 하나님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더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럼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에 어떤 말과 요구를 제시했느냐?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라 하였다. 그럼 여기에서 하나님 말씀의 근거는 무엇이겠느냐? 어떤 진리를 준칙으로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할 수 있겠느냐? 이것을 이해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사람의 행위 측면에 대한 하나님 말씀의 요구 기준은 무엇이냐? 너희가 명확한 하나님 말씀을 찾을 수 있느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상당히 많다. 너희가 적절한 처신을 하고, 품행이 바르고, 충심으로 본분을 이행하기 바란다. 또한 진리와 인성을 갖추고,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생명까지 포기할 수 있는 사람, 이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너희의 부족함, 패괴, 패역 때문에 이런 바람을 가지게 된 것이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과오는 사람을 지옥으로 끌고 갈 것이다> 중에서)) 그 말씀들은 다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관한 원칙과 요구이다. 그러면 구체적인 실행 측면에는 어떤 말씀이 있느냐? (다음과 같은 하나님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시시각각 마음을 평온히 해야 한다. 일이 임했을 때 조급해하거나 고집을 부리거나 과격하게 굴거나 가식을 떨거나 위장해서는 안 된다. 이성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야말로 정상 인성이 갖추어야 할 태도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길> 중에서)) 그것은 구체적인 실행이자 사람의 외적 행위, 행동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과 요구이다. 그것을 하나님 말씀의 근거로 볼 수 있지 않겠느냐? 이 정도면 충분히 구체적이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다시 한번 읽어 보아라. (“너는 시시각각 마음을 평온히 해야 한다. 일이 임해도 조급해하거나 고집을 부리거나 흥분하거나 가식을 떨거나 위장해서는 안 된다. 이성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야말로 정상 인성이 갖추어야 할 태도이다.”) 그 몇 가지를 적어 두어라. 이는 앞으로 일을 처리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이다. 즉, 사람에게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이성적으로 직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알려 주는 것이다. 양심과 이성에 기대 일을 처리하는 것을 기초로 진리 원칙을 구할 수 있다면,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 원칙이 있을 것이고, 실행의 길이 있을 것이다.

방금 그 “일이 임해도 조급해하거나 고집을 부리거나 흥분하거나 가식을 떨거나 위장해서는 안 된다. 이성적으로 일을 처리해야 한다.”라는 말대로 하기가 쉽겠느냐? 사실 한동안 훈련하면 할 수 있다. 만약 정말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한 가지만 하면 된다. 일이 임했을 때, 또는 다른 사람과 사귈 때 최소한 다음의 한 가지는 지켜라.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면서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 이는 가장 기본적인 한 가지이다. 이것을 근거와 준칙으로 실행하고 지키면 기본적으로 남에게 큰 피해는 주지 않을 수 있고, 자신도 큰 손해는 보지 않을 것이다.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남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구체적인 내용이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타인의 이익에 해를 끼치면서 자신을 만족시켜서는 안 되며, 자신의 기쁨과 행복이 남의 고통 위에 세워져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이 ‘도움이 되는 것’의 가장 기본적인 이해는 무엇이겠느냐? 적어도 인성의 양심, 이성으로 네 행위를 판단했을 때, 다른 사람이 봐 줄 정도는 되어야 하며, 인성의 양심과 이성에 부합해야 한다. 정상 인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이 수준에 도달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이 집에서 쉬고 있는데 네가 들어와 주변을 살피지 않고 노래를 부르거나 음악을 틀어 놓는다면 이것이 적절한 행동이겠느냐? (적절하지 않습니다.) 이는 다른 이의 고통 위에 네 기쁨을 세운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읽거나 진리를 교제하고 있는데 네가 굳이 그에게 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면, 이것이 타인을 존중하는 것이겠느냐? 다른 이에게 도움이 안 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최소한 다른 이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른 이가 말하고 일할 때 방해하지 않는 것, 이는 정상 인성이 할 수 있는 일 아니겠느냐? 만약 네가 이 정도도 하지 못한다면, 양심과 이성이 없어도 너무 없는 것이다.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겠느냐? 더더욱 불가능하다. 진리를 실행하려면 최소한 양심과 이성을 갖춰야 한다. 진리를 추구하려면 적어도 언행에 있어서 양심과 이성의 기준에 부합해야 하고, 주변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야 하며,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방금 말한 것처럼, 최소한 행위 면에서 적절하게 행동하고, 남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남에게 이익을 준다는 뜻이겠느냐? 사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상호 간의 공간을 존중하여 다른 사람이 방해받거나 교란되거나 간섭받지 않게 해 주는 것이며, 네 행위로 인해 피해를 보거나 고통받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도움이 되는 것이다. 너희는 어떻게 이해했느냐? 도움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네게서 많은 이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당한 권익과 권리를 누리는 것이며, 또한 네 제멋대로인 행동과 정당하지 않은 행위로 인해 그 권익과 권리가 간섭받거나 박탈당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지금 너희는 사람이 어떻게 처신하고 일을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해 요구하는 하나님 말씀에 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지만, 나는 너희에게 가장 기본은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남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자 한다. 이것이 일 처리의 원칙이다.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했느냐? (네.) 혹자는 말하고 일할 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은 교양 있고 사리 밝다고 말하는데, 이는 기만 아니겠느냐?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것에는 배울 만한 공과가 있지 않겠느냐? 이는 일종의 행위이자 태도지만, 그렇게 하기가 쉽겠느냐? 진리를 좀 깨달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원칙에 부합하고 다른 이에게 도움과 이로움이 되는지 알 것이다. 하지만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기대 일을 처리할 것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어떤 일이 닥치든 진리를 구하는 법 없이 자신의 기호대로 행동하고, 다른 사람의 감정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일 처리에 원칙이 있겠느냐? 밝히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너희는 수시로 예배하고 하나님 말씀을 읽는다. 만약 정말 진리를 얼마간 깨닫게 된다면, 진리 원칙대로 실행하고 여러 가지 일을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실행하면 어떤 느낌이 들겠느냐? 다른 사람들은 또 어떤 느낌을 받겠느냐? 열심히 묵상하면 어떻게 실행해야 남에게 도움이 될지 알게 된다. 너희는 평소 어떤 일이 임하든, 어떻게 하는 것이 정상 인성이나 진리 실행과 관련되는지, 이 현실적인 문제들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이 임했을 때, 너희에게 어떻게 실행하고 일을 처리해야 남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물어보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명확한 길이 없는 것처럼 느낀다. 내가 예배 때 교제한 것은 전부 이 현실적인 문제들이다. 너희는 이 문제들을 접할 때면 언제나 따라가지 못하고 머리가 백지가 된다. 이것이 차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너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무엇을 얻었느냐? 약간의 도리와 구호를 얻었을 뿐이니, 빈궁하고 가련하기 그지없구나!

우리는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 중 하나인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이라는 행위 기준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이 안에는 사람의 구체적인 관념과 상상, 이러한 측면의 행위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법이 어느 정도 들어 있다. 요컨대, 지금 보면 이러한 측면의 행위와 태도는 진리, 진정한 인성과 관계가 없다. 진리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같은 선상에 놓고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측면의 행위는 하나님이 요구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기준에 전혀 부합하지 않으며, 어울리지도 않고 어떤 관계도 없다. 이러한 것들은 그저 사람의 행위일 뿐이다. 사람이 이 행위를 아무리 잘 해내고 제대로 실행해도 그것은 하나의 행위일 뿐, 진정한 정상 인성조차 될 수 없다.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이라는 논조는 사람의 외적 행위에 대한 포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스스로를 포장하고 미화하기 위해 열심히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 그리하여 남들에게 우러름과 존중을 받고,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지위와 몸값을 올리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진정한 사람이 갖추어야 할 도덕이나 인격, 존엄에조차 이르지 못한다.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은 전통문화에서 비롯된 논조이다. 이는 또한 패괴된 인류가 스스로 만들어 낸,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행위이자 태도이다. 이러한 행위와 태도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점을 받고 몸값을 높이며 존중받고 뛰어난 사람이 되어 무시당하거나 괴롭힘 받지 않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인성이나 도덕, 인품과 전혀 관계가 없는 이 외적 행위를 사람은 그렇게나 대단하고 중요하게 생각한다. 말해 보아라. 거기에 기만적인 성분이 얼마나 크겠느냐! 그렇기에 하는 말인데, 만약 네가 현재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이 되고자 추구하면서 자신의 행위를 규범화하고 있다면,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을 목표로 열심히 추구하고 실행하고 있다면, 당장 걸음을 멈추라고 권하고 싶다. 그런 행위와 행동은 점점 더 스스로를 꾸미고 외식하게 할 뿐이며, 정직한 사람, 순수하고 솔직한 사람이 되는 길에서 점점 더 멀어질 뿐이다. 너는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이 될수록 더 꾸미게 될 것이며, 점점 더 꾸미고 심하게 위장할수록 사람들은 너를 간파하거나 이해하기 힘들어질 것이고, 네 패괴 성품 역시 더 깊이 감춰질 것이다. 그러면 진리를 받아들여 구원받기가 매우 힘들어진다. 이 몇 가지를 고려했을 때,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이 되고자 추구하는 길이 진리를 추구하는 길이겠느냐? 이것이 올바른 추구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 부정적인 성질이나 효과 외에,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측면의 행위 배후에는 타인과 자신에 대한 기만성이 더 많이 존재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의 배후에는 남에게 밝힐 수 없는 수많은 비밀이 감춰져 있으며, 다른 사람이 알아서는 안 되는 비열하고 지저분하고 사악하고 밝히기 힘든 각종 그릇된 사상과 관념, 관점, 태도, 생각이 숨어 있다.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의 좋은 행위 배후에는 더욱 심각한 패괴 성품이 숨겨져 있다. 교양 있고 사리 밝다는 외적 행위에 가려진 그는 스스로의 패괴 성품을 직면할 용기도, 인정할 자신도 없다. 스스로의 패괴 성품, 그릇된 인식, 사악한 생각과 속셈과 목적, 나아가 흉악하고 악독한 생각들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용기나 자신은 더더욱 없다. 배후에 숨겨진 이 많은 것들을 사람들은 보지 못한다. 눈에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좋은 행위를 갖춘 소위 ‘호인’이 보일 뿐이다. 이것이 하나의 기만책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의 모든 행위와 태도, 추구, 본질이 다 기만책으로, 그는 남을 속이고 또한 자신을 속인다. 이런 사람의 마지막 결말은 무엇이겠느냐?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이 되기 위해 하나님을 버리고 참도에서 등 돌려 하나님에게 내쳐지게 된다.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좋은 행위의 뒤에 숨겨진 것은 온통 위장하고 기만하는 행동, 행위이며, 또한 사람의 교만함, 사악함, 진리에 대한 혐오, 흉악함, 강퍅한 성품이다. 그러므로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자일수록 더욱 기만성을 지니고 있으며,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이 되고자 추구하는 자일수록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진리와 하나님 말씀을 혐오한다. 너희가 보기에도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좋은 행위에 관해서는 일단 여기까지 교제하도록 하겠다.

방금 전통문화에 속하는 좋은 행위의 논조 중 하나,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에 관해 교제하였다. 다른 몇 가지는 일일이 교제하지 않겠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좋은 행위에 관한 모든 논조는 그저 사람의 외적 행위와 이미지에 대한 포장일 뿐이다. 듣기 좋은 말은 포장이고, 적절해 보이는 말은 사실 위장으로, 허상을 통해 사람의 호감과 좋은 평가, 존중을 얻어 내는 것이다. 그다음에는 마음속 어두운 면, 패괴 성품, 진면목을 모두 숨기고 포장하기 시작한다. 이 좋은 행위들의 후광 뒤에는 패괴된 인류의 패괴된 진상과 교만하고 간사하고 흉악한 성품, 그리고 진리를 혐오하는 사악한 인류가 숨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어떤 사람이 보이는 외적 행위가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이든, 온화하고 우아한 것이든, 아니면 상냥하고 친절한 것이든, 가까이하기 쉬운 것이든,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든 상관없이 그것은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는 표면적 행위일 뿐이다. 사람은 좋은 행위를 통해 다른 이의 본성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 비록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온화하고 우아한 것, 상냥하고 친절한 것, 가까이하기 쉬운 것 등의 좋은 외적 행위가 무척 좋게 느껴질지라도, 온 세상이 이것들에 호감을 가질지라도, 사람의 패괴 성품이 이 좋은 행위의 뒤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사람은 진리를 싫어하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한다. 또 창조주가 한 말을 싫어하고 창조주를 대적하는 사람의 본성 본질은 실제로 존재한다. 여기에는 조금의 거짓도 없다. 사람이 아무리 잘 위장해도, 사람의 행위가 아무리 적절하고 괜찮아 보여도, 아무리 보기 좋고 아름답게 포장해도, 또 아무리 기만적인 면을 갖고 있어도, 패괴된 인류는 모두 사탄의 성품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앞서 언급한 표면적인 행위 뒤에서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고, 창조주를 거역하고 대적한다. 물론 인류는 이 좋은 행위들을 겉옷이나 은폐물로 삼는 동시에 매일 매시 매분 모든 일에서 패괴 성품을 드러내며 패괴 성품과 죄악 속에서 살아간다. 이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사람에게 적절한 행위와 듣기 좋은 말, 꾸며 낸 겉모습이 있을지라도, 사람의 패괴 성품은 전혀 줄어들지 않으며, 외적 행위가 있다고 해서 어떤 변화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외적 행위에 가려진 채 패괴 성품이 계속 드러나며,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발걸음은 멈추는 법이 없다. 물론 흉악하고 사악한 성품에 지배되어 야심과 욕망, 사치스러운 요구 또한 끊임없이 확장되고 커진다. 보아라. 점잖고 예의 바르며, 상냥하고 친절하고, 가까이하기 쉬운 겉모습을 지닌 사람 중 살아 내는 이미지와 처신하고 일 처리하는 근거가 긍정적인 자가 있더냐?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부합하는 자가 있더냐? 교양 있고 사리 밝고, 온화하고 우아한 사람 중 진리를 사랑하는 자가 있더냐? 하나님의 말씀에서 인생의 방향과 목표를 찾고자 하는 자가 있더냐? 인류의 구원에 기여한 자가 있더냐? 이런 사람을 하나라도 찾을 수 있겠느냐? (찾을 수 없습니다.) 사실, 인류 가운데서 지식과 문화적 소양, 사상, 지위, 명망이 있는 사람, 그러니까 소위 교양 있고 사리 밝고, 상냥하고 친절하고, 가까이하기 쉬운 사람이 내세우는 이론일수록 더 쉽게 남들을 미혹한다. 그들은 행하는 악도 더 많고, 하나님을 더 심각하게 대적한다. 명망과 지위가 있는 사람일수록 더 심각하게 남을 미혹하고 광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인류 가운데 명인, 위인, 사상가, 교육가, 문학가, 혁명가, 정치가 등 ‘가(家)’가 붙은 사람 치고 교양 있고 사리 밝고, 가까이하기 쉽고, 상냥하고 친절하지 않은 사람이 있더냐? 사람들에게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찬사를 듣고 존중받는 외적 행위를 지니지 않은 자가 있더냐? 그러나 사실 인류에 대한 그들의 기여는 무엇이더냐? 그들이 인류를 옳은 길로 인도하더냐, 아니면 그릇된 길로 인도하더냐? (그릇된 길로 인도합니다.) 그들이 인류를 창조주의 권세 아래로 이끌더냐, 아니면 사탄의 발아래로 이끌더냐? (사탄의 발아래로 이끕니다.) 그들이 인류에게 창조주의 주재와 공급, 인도를 누리게 하더냐, 아니면 사탄의 유린과 해악, 능욕을 마주하게 하더냐? 역사적인 영웅, 명인, 위인, 달인, 초인, 권력자 중 수천수만의 사람을 죽여 권력과 지위를 얻지 않은 사람이 있더냐? 인류에 대한 기만과 미혹, 유인으로 명망을 얻지 않은 자가 있더냐? 표면적으로 보면 그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들을 접할 때 가까이하기 쉽고 무척 부드러우며 남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 있는 것 같고, 말할 때는 상냥하고 친절하다. 하지만 그 뒷면의 모습은 완전히 다르다. 어떤 자는 계략을 써서 남을 해치고, 어떤 자는 간계를 부려 남을 괴롭히고 손봐 주며, 어떤 자는 기회를 잡아 남에게 보복한다. 많은 정치가가 숱한 사람을 해치고 망쳐 놓았다. 그들은 무수히 많은 사람의 머리와 선혈을 밟고 그 지위와 권세를 얻었다. 하지만 공공장소에서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모습은 가까이하기 쉬운 외양과 상냥하고 친절한 행위이며, 온화하고 우아하고, 교양 있고 사리 밝고, 예의 있고 겸손한 태도이다. 겉으로 봤을 때 그들은 점잖고 예의 바르며 온화하고 우아하지만, 그 뒤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독식하며 수도 없이 남의 것을 빼앗고 사람을 우롱한다. 또 앞에서는 온갖 사탕발림을 늘어놓지만 뒤에서는 나쁜 짓을 일삼는다. 그러면서도 염치도 부끄러움도 모른 채 강단에 올라 설교하면서 어떻게 해야 가까이하기 쉽고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이 될 수 있는지, 국가와 인류에 기여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 국민을 위해 일하고 국민의 공복이 되며 국가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지를 가르친다. 이는 몰염치한 것 아니겠느냐? 전부 후안무치하고 욕심이 끝도 없는 인간 말종이다. 요컨대, 겉으로 볼 때 전통적인 도덕관념에 맞는 사람, 좋은 행위를 갖춘 사람이 되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도, 진정한 피조물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렇듯 좋은 행위를 추구하는 이면에는 어둡고, 차마 남에게 밝힐 수 없는 비밀이 수도 없이 감춰져 있다. 사람이 어떤 부분의 좋은 행위를 추구하든, 그 이면의 목적은 더 많은 사람에게 호감을 사고 존중받는 것이며, 자신의 몸값을 높여 존귀한 사람, 믿을 만하고 의지할 만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만약 너도 이렇듯 좋은 행위를 갖춘 사람이 되기를 추구한다면, 그 성질은 명인이나 위인들과 다를 바가 없지 않겠느냐? 좋은 행위를 갖춘 사람이 되기만을 추구할 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지도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면, 네 성질은 그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럼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너는 진리를 버릴 것이며 구원받을 기회를 잃을 것이다. 이는 가장 어리석은 행위로, 바보나 할 만한 선택이고 추구이다. 너희는 오랫동안 동경했던 무대 위의 초인이나 위인, 명인, 또는 가까이하기 쉽고 상냥하며 친절한 사람, 점잖고 예의 바르고 온화하고 우아하며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 겉으로 보기에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기를 바란 적이 있느냐? 그런 사람을 숭배하고 추종한 적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지금까지도 그런 사람을 추종하거나 숭배하고 있다면, 알려주겠다. 너는 죽음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네가 숭배하는 사람은 모두 외식하는 악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악인을 구원하지 않는다. 네가 악인을 숭배하며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결국 파멸할 것이다.

가까이하기 쉬운 것, 상냥하고 친절한 것 등 좋은 행위의 이면에 숨겨진 본질은 바로 두 글자, ‘위장’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좋은 행위’들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생겨난 것이 아니며,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해서 생겨난 것도 아니다. 그럼 어떻게 생겨났겠느냐? 사람의 속셈과 간계에서 나왔으며, 위장과 포장, 그리고 기만에서 비롯되었다. 사람이 이 ‘좋은 행위’들을 고수하는 목적은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함이다. 그게 아니라면 사람은 절대 자신이 손해 보는 일을 하지 않고, 본심에 어긋나게 살지도 않는다. 본심에 어긋나게 사는 것이란 어떤 것이겠느냐? 사람의 본모습은 스스로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솔직하고 무던하고 온유하고 선량하고 어질지 않다. 사람은 양심과 이성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어떤 목적이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살아간다. 사람의 본모습은 어떠하냐? 흐리멍덩하다. 만약 하나님이 율법과 계명을 주지 않았더라면 사람은 무엇이 죄인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과거의 인류는 그렇지 않았더냐? 하나님이 율법과 계명을 반포한 이후에야 사람은 죄에 관해 어느 정도 개념이 생겼다. 하지만 옳고 그름이나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에 관해서는 여전히 개념이 없다. 이런 배경 속에서 사람이 자신의 언행과 관련된 정확한 원칙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정상 인성에 갖추어야 할 행동과 좋은 행위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 수 있겠느냐? 진실로 좋은 행위는 무엇을 토대로 생겨나는지, 어떤 도를 지켜야 사람다운 모습을 살아 낼 수 있는지, 이러한 것들을 사람이 알겠느냐? 알지 못한다. 사람은 사탄 본성과 사람의 본능 때문에 위장을 통해 자신을 포장할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체면과 존엄성을 갖추고 살아가려 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문화적인 소양이 있고 사리 분별이 되며 온화하고 우아한 것, 점잖고 예의 바른 것,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 상냥하고 친절한 것, 가까이하기 쉬운 것 등의 기만책이 생겨났다. 이런 속임수, 남을 기만하는 수법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생겨난 후, 사람은 이 기만책의 범위 안에서 선택적으로 그중 한 가지, 또는 여러 가지를 고수한다. 어떤 사람은 상냥하고 친절한 것, 가까이하기 쉬운 것을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온화하고 우아한 것을 선택하며, 어떤 사람은 점잖고 예의 바른 것,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을 선택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이 몇 가지를 모두 선택한다. 그러나 이런 ‘좋은 행위’를 갖춘 사람을 나는 한 가지 단어로 규정한다. 그것이 무엇이겠느냐? 바로 자갈이다. 자갈이란 무엇이냐? 강에서 오랜 세월 강물에 씻기고 마모되어 모서리가 사라지고 반들반들해진 돌멩이다. 자갈은 발로 밟아도 배기지 않으나, 자칫 방심하면 미끄러져 넘어질 수 있다. 이 돌멩이들은 겉모양이 무척 예쁘지만, 막상 집에 가져가면 아무 쓸모가 없다. 버리자니 아까워서 버리지도 못하고 갖고 있지도 못하는, 이런 것이 바로 자갈이다. 내가 볼 때, 표면적으로 좋은 행위를 갖춘 사람들은 온화하고 자신을 잘 꾸미지만,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 듣기 좋은 말을 하지만 실제적인 일은 하나도 하지 않는다. 이러한 자들이 바로 자갈이다. 네가 그에게 진리와 원칙에 대해 교제하면, 그는 온화하고 우아한 것, 점잖고 예의 바른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 네가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는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 네가 그에게 처신할 때는 원칙이 있어야 하며, 본분을 이행할 때는 원칙을 구해야지, 자기 뜻대로 행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 그는 어떤 태도를 보이겠느냐? 그는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 원칙에 부합하느냐 하는 것은 또 다른 일입니다. 저는 그저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이 되어 사람들에게 좋은 말을 듣고자 할 뿐입니다.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서 사람들에게 동조를 얻으면 그만이죠.”라고 말한다. 그는 좋은 행위에만 집중할 뿐, 진리에는 집중하지 않는다. 그는 평소에 노인과 연장자, 연륜이 있는 사람, 명망이 높은 사람을 존중하는 한편, 어리고 약한 사람들은 아끼고 보살피면서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사회 규칙을 엄격하게 지킴으로써 고상함을 드러낸다. 하지만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 자신의 이익과 충돌할 때, 그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태도를 한쪽에 치워 둔 채 ‘앞뒤 안 가리고’ 누구의 ‘제약’도 받지 않으며 자신의 이익을 지킬 것이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의 좋은 행위가 그를 접하고 알게 되고 친해진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그가 이렇듯 남들에게 인정받는 좋은 행위를 갖춘 동시에, 자기 이익에 조금이라도 손해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으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떤 사람의 ‘제약’도 받지 않은 채 자신의 이익을 쟁취해 낸다는 것이다. 그가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태도는 자신의 이익에 영향이 가지 않는 것을 기초로 하는 일시적인 행위일 뿐이며, 행동의 범위 안에만 머물러 있다. 자신의 이익에 전혀 관련이 없고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 상황에서는 그렇게 할 수 있겠지만, 이익이 눈앞에 보일 때, 그가 마지막으로 쟁취하는 것은 역시 자신의 이익이다. 그래서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그의 태도는 그 자신의 이익 추구에 영향을 주거나 제약하지 못한다.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그런 행위는 특정 상황 속에서, 자신의 이익에 영향이 가지 않는 조건하에서 실행할 수 있는 좋은 행위일 뿐, 사람의 생명에서, 혹은 뼛속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이러한 행위를 얼마나 실행하든, 얼마나 오래 고수하든 사람이 의지해 살아가는 패괴 성품을 전혀 변화시킬 수 없다. 다시 말해, 이 좋은 행위들이 없을지라도 사람은 똑같이 패괴 성품을 드러내며, 이 좋은 행위들을 갖춘 후라도 사람의 패괴 성품은 전혀 줄어들거나 변하지 않고, 오히려 더 깊이 감춰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좋은 행위의 배후에 숨겨진 본질적인 것들이다.

이제 전통문화 중 온화하고 우아한 것, 점잖고 예의 바른 것,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 상냥하고 친절한 것, 가까이하기 쉬운 것 등의 좋은 행위에 관해 어느 정도 교제하고 해부한 것 같다. 이것들은 전부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과 성질이 비슷하며, 어떤 의미도 없다. 사람은 이 좋은 행위들을 버려야 한다. 사람이 가장 추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삼고 진리를 준칙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래야 빛 속에서 살아갈 수 있고, 사람다운 모습을 살아 낼 수 있다. 빛 속에서 살려면 진리에 따라 행동해야 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어 정직한 말을 하고 정직한 일을 해야 한다. 처신함에 있어 진리 원칙을 갖는 것이 바로 근본이다. 사람이 진리 원칙을 잃어버리고 좋은 행위만 강조하면 거짓되고 위장하는 성분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처신함에 있어 원칙을 잃는다면 행위가 아무리 훌륭해도 외식하는 것이 된다. 한순간 남을 미혹할 수 있어도 영원히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행동하고 처신해야 비로소 진정한 토대가 생긴다. 만약 처신함에 있어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을 두지 않고 좋은 행위를 꾸미는 것에만 집중한다면, 그렇게 해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좋은 도리와 행위는 사람의 패괴 성품을 바꿔 놓을 수 없고, 사람의 본질 또한 바꿔 놓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만이 사람의 패괴 성품과 사상, 관점을 바꿔 놓고 사람의 생명이 될 수 있다. 사람의 전통문화, 관념적으로 좋은 행위라고 여기는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온화하고 우아한 것’, ‘점잖고 예의 바른 것’,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 ‘상냥하고 친절한 것’, ‘가까이하기 쉬운 것’ 등은 하나의 행위일 뿐, 생명이 아니고 진리는 더더욱 아니다. 전통문화는 진리가 아니며, 전통문화가 제창하는 모든 좋은 행위 역시 진리가 아니다. 사람이 전통문화를 얼마나 많이 파악하고, 좋은 행위를 얼마나 많이 살아 내든 패괴 성품에 변화가 생기지는 못한다. 그렇기에 인류가 전통문화에 물든 몇 천 년간, 패괴 성품에 변화가 생기기는커녕 패괴가 점점 더 심각해지며, 세상은 점점 더 어둡고 사악해진 것이다. 이는 전통문화의 교육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인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생명으로 삼아야만 진정한 사람의 모습으로 살 수 있다. 이는 부정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럼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행위에 어떤 규범과 요구를 제시하느냐? 율법과 계명에서 규정한 것 외에도 사람의 행위에 대한 예수의 요구가 있고, 특히 하나님이 말세 심판 과정에서 사람에게 제시한 요구와 규정이 있다. 이러한 말씀이야말로 인류에게 가장 귀한 것이고, 가장 기본적인 처신의 원칙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 준칙을 찾는다면, 중국 전통문화 속 ‘좋은 행위’의 그릇된 인도와 미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러면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길과 원칙을 찾은 것이다. 또한, 이는 구원받는 길과 원칙을 찾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나님의 현시점 말씀을 근거로 하고, 하나님이 현재 교제하는 진리를 준칙으로 하여 인류가 관념적으로 좋은 행위라 여기는 기준을 대신한다면, 너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늘 어떤 사람이 되라고, 어떤 길을 걸으라고 요구했지, 단 한 번도 어떤 행위를 갖추라고 따로 요구한 적이 없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간사한 사람이 되지 말고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요구했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추구하며 하나님께 충성하고 순종하고 간증이 있는 사람이 되라고 요구했다. 몇몇 좋은 행위를 갖추면 된다고 요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중국의 전통문화는 사람이 좋은 행위와 좋은 모습에만 집중하게 할 뿐, 사람의 패괴 성품이 무엇인지, 사람이 패괴된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는지 하나도 밝히 알려 주지 못하고, 패괴 성품에서 벗어나는 길은 더더욱 제시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전통문화가 사람에게 어떤 좋은 행위들을 갖추라고 어떻게 제창하든, 인류가 패괴 성품에서 벗어나 정상인의 모습을 살아 내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도덕적인 논조들이 아무리 고상하고 감동적이라도 인류의 패괴 본질은 조금도 바꾸지 못한다. 패괴된 인류는 전통문화에 물들고 영향을 받아 많은 잠재의식이 생겨났다. 잠재의식이란 무엇이겠느냐? 자기도 모르는 새에 전통문화에 물들고 전염되어 어떻게 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 명확한 말과 논조, 규정 또는 인지가 없는 상황에서 본능적으로 보편적인 생각과 행동대로 실행하고 지키는 것이다. 사람은 모두 이런 배경, 이런 상태 속에서 살아간다. 또 사람은 부지중에 잠재의식 속에서 이렇게 생각한다.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건 좋은 거야. 긍정적이고 진리에 부합하는 거지. 온화하고 우아한 건 좋은 거야. 사람다운 모습이 있으니까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진리에 부합하겠지. 점잖고 예의 바른 것,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 상냥하고 친절한 것, 가까이하기 쉬운 것 등은 정상 인성의 모습이야.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부합하는 거라고.’ 하나님 말씀에서 명확한 근거를 찾을 수는 없지만 그는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전통문화의 요구 기준과 비슷하다고, 큰 차이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하나님 말씀을 왜곡하고 곡해하는 것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한 적이 있더냐?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한 적이 없고, 하나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곡해하고 왜곡한 것이다. 하나님은 단 한 번도 그렇게 말씀한 적이 없으니 너희는 절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말씀을 자세히 읽고, 사람의 행위 측면에 대한 하나님 말씀의 요구를 제대로 찾는 한편, 하나님 말씀을 여러 대목 찾아 종합한 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고 교제하여 인식을 얻어 실행하고 체험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 말씀을 실생활 속으로 가져가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근거로 삼게 된다. 사람의 언행은 무엇을 근거로 삼아야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삼아야 한다. 그럼 사람의 언행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은 무엇이냐?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 진실한 말, 솔직한 말을 하여 다른 사람이 유익을 얻게 하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이다. 적어도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되어야지, 기만하거나 미혹하거나 조롱하거나 놀리거나 비방하거나 비웃거나 속박하거나 남의 단점을 까발리거나 남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이 정상 인성의 모습이고 인성의 미덕이다. 하나님이 네게 어떤 어투로 말하라고 한 적이 있더냐? 표준어를 사용하라고 요구한 적이 있더냐? 화려한 수식어와 고상하고 우아한 말을 쓰라고 요구한 적이 있더냐? (그러신 적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표면적이고 거짓되며 가식적이고 실속 없는 것들은 한 번도 요구한 적이 없다. 하나님이 요구한 것은 전부 정상인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것들이며, 언어 행위의 기준이자 원칙이다. 어떤 곳에서 태어났든, 어떤 언어를 쓰든 어쨌든 네가 하는 말, 네 입에서 나온 단어와 내용은 남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 도움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남들이 네 말을 듣고 진실하다고 느끼는 한편, 유익과 도움을 얻어 더는 어려움에 빠지거나 사람에게 미혹되지 않고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진실한 말, 마음속에 있는 말을 하되 남을 기만하거나 미혹하거나 조롱하거나 놀리거나 비방하거나 비웃지 말라고, 또 속박하거나 남의 단점을 까발리거나 남에게 상처를 주지도 말라고 요구했다. 이는 말을 할 때의 원칙 아니겠느냐? 여기에서 ‘단점을 들추지 말라’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사람의 약점이나 잘못, 혹은 단점을 잡아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점이다. 그럼 긍정적인 면에서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말은 어떤 것이겠느냐? 주로 격려하고 일깨우고 인도하고 권면하고 이해하고 위로해 주는 말이다. 이 외에, 특수한 상황에서는 다른 사람의 단점을 들추고 책망 훈계를 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가 진리를 깨닫고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을 가져야 성과가 날 수 있다. 이렇게 실행하면 사람에게 큰 유익이 된다. 이것이 진정한 도움 아니겠느냐? 그 사람에게 유익이 되지 않겠느냐? 예를 들어, 네가 몹시 제멋대로이고 교만한데 스스로 늘 의식하지 못한다고 해 보자. 이런 상황에서 너를 잘 아는 사람이 직설적으로 네 문제점을 지적해 준다면 너는 ‘내가 제멋대로라고? 교만하다고? 다른 사람들은 그런 얘기를 감히 못 하던데, 이 사람은 나를 알고 있네.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진짜인 것 같아. 열심히 반성해야겠다.’라고 생각하며 그에게 “다른 사람들은 다 듣기 좋은 말만 해 주고 칭찬만 합니다. 툭 터놓고 솔직한 말을 해 주는 사람이 없죠. 저한테 존재하는 단점이나 문제점을 짚어 주는 사람도 없고요. 오직 당신만이 제게 툭 터놓고 이런 말을 해 주네요. 정말 다행입니다. 그런 말은 제게 가장 큰 도움이 될 테니까요.”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이 마음을 나누는 것 아니겠느냐? 상대는 자신의 마음에 있는 말, 너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했다. 또 지난날 자신이 그런 일을 겪을 때 가졌던 관념과 상상, 소극성과 연약함, 그리고 진리를 구해 그 상태에서 벗어난 체험 등을 하나하나 교제해 주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나누는 것이며 마음의 소통이다. 요컨대, 말을 할 때의 원칙은 무엇이겠느냐? 마음속에 있는 것, 진실한 체험과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대에게 가장 이로운 말이고, 공급과 도움이 되는 말이며, 가장 올바르고 긍정적인 말이다. 거짓된 말, 상대에게 도움과 이로움이 되지 않는 말은 절대 하지 마라. 그랬다간 상대에게 상처가 될 수 있고 상대를 쓰러뜨려 소극적인 상태에 빠뜨릴 수 있으며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다. 올바르고 긍정적인 말을 하면서 최대한 상대를 도와주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에게 도움과 공급을 주고, 하나님께 진실한 믿음이 생기게 하며, 그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네 체험과 문제 해결 방식, 방법을 통해 도움을 얻고 큰 수확을 거두게 해야 한다. 또 그가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길을 깨달아 생명 진입과 생명 성장을 이루게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원칙 있게 말해 상대에게 도움을 줄 때 얻을 수 있는 성과이다. 이것들 외에도 사람들이 한데 모여 웃고 한담하는 것은 원칙이 없는 것으로, 패괴 성품을 드러낼 뿐이다. 그것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것도 아니고 진리 원칙을 지킨 것도 아니며, 사람의 처세 철학에 불과하다. 또한, 그것은 패괴 성품에 통제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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