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추구란 무엇인가(3) 제 1 부

지금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이 점점 바빠지면서 다들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고,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다. 이는 어떻게 된 일이겠느냐? 사실 이는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많은 일을 밝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 갈수록 책임감이 커지고 본분 이행을 참답게 대하고 사역을 더욱 꼼꼼하게 하게 되면서 이행해야 할 본분이 점점 더 많아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본분 이행이 점점 더 바빠지는 것이다. 이 밖에,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 중 다수가 매일 본분을 이행하는 것 외에도 하나님 말씀을 읽고 진리를 교제하며 스스로를 반성해야 하고, 문제가 임하면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하며, 어느 정도 업무 지식을 쌓아야 한다. 그래서 항상 시간이 부족하다고, 하루하루 너무 바쁘게 지나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밤에 하루 동안 무엇을 했는지 되짚어 보면 이렇다 하게 가치 있는 일을 하지 않은 것 같고, 성과도 크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자신의 분량이 너무 보잘것없어 보이고, 부족한 점은 너무 많게 느껴져 한시바삐 분량을 키우고 싶어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역이 언제쯤 끝날까? 언제쯤 마음을 평온히 하고 제대로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서 진리를 갖출 수 있을까? 일주일에 한두 번의 예배에서 얻는 건 한계가 있어. 더 많이 예배에 참석하고 설교를 들어야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하면서 기다리고 기대한다. 그렇게 3년, 5년이 눈 깜빡할 새에 지나가자 시간이 너무 빠르다고 느끼게 된다. 혹자는 10년 넘게 하나님을 믿었는데도 이렇다 할 체험 간증을 말하지 못해 마음이 조급해지고,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하면서 한시바삐 진리를 갖추고자 한다. 그래서 시간이 너무 빠듯하다고 느끼는데, 많은 사람이 이렇게 생각한다. 본분 이행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모두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고 생각한다. 반면,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 안일과 누림을 탐하는 사람은 시간이 빨리 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하나님의 날은 대체 언제쯤 옵니까? 사역이 막바지에 이르렀다고 늘 말씀하시는데, 왜 아직 안 끝나는 겁니까? 하나님의 사역은 언제쯤 전 우주로 확장됩니까?”라고 투덜거리는 사람도 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시간이 너무 늦게 간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진리에 관심이 없으며, 언제나 세상으로 돌아가 자신만의 삶을 꾸리고 싶어 한다. 이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과 완전히 다른 내적 상태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본분 이행이 아무리 바빠도, 문제가 임하면 진리를 구해 해결할 줄 알며, 설교를 듣고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으면 구하고 교제한다. 또 매일 마음을 평온히 하고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체험 간증 영상을 보면서 얼마간 수확을 얻는다. 이런 자는 본분 이행으로 아무리 바빠도 전혀 생명 성장에 영향을 끼치지 않고, 생명 진입에 지장을 주지도 않는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이렇게 실행한다. 하지만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본분 이행으로 바쁘든 바쁘지 않든, 어떤 문제가 닥치든 진리를 구하지 않으며, 마음을 평온히 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거나 인식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래서 본분 이행으로 바쁘든 한가하든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 사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할 마음을 갖고 진리를 갈망하며 자신의 생명 진입과 성품 변화에 부담을 느낀다면, 사역이 아무리 바빠도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다가가고 기도할 것이며, 성령의 깨우침과 빛을 얻어 생명이 끊임없이 성장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자신의 생명 진입과 성품 변화에 어떤 부담도 느끼지 않거나 관심이 없다면, 수확이 없을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어떤 패괴를 드러냈는지 언제 어디서든 반성해야 한다. 예를 들어, 본분을 이행할 때 패괴를 드러냈다면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한편, 스스로를 돌아보고 패괴 성품을 인식하며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이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로, 업무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것이 어렵겠느냐? 이는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지에 달려 있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 성장에 흥미가 없으며, 마음속으로 이런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만이 생명 성장에 마음을 쓰고자 하고, 현실에 존재하는 문제를 수시로 묵상하며, 어떻게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되새긴다. 사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곧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이다. 본분을 이행하면서 늘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한다면, 그렇게 몇 년간 실행한 후 적잖은 문제를 해결할 것이고, 본분 이행에 합격점을 받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패괴를 드러내는 일이 훨씬 줄어들며, 본분을 이행할 때도 진실한 체험을 많이 해서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다. 그럼 이런 사람은 본분을 이행할 때부터 하나님을 증거할 때까지 어떻게 체험했겠느냐?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는 체험을 했다. 그러므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본분 이행이 아무리 바빠도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며, 원칙대로 본분을 이행할 수 있고, 진리를 실행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 진입의 과정이자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과정이다. 본분을 이행하느라 바빠서 진리를 추구할 시간이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어떤 사역을 하든, 문제를 발견하는 즉시 진리를 구해 해결하며, 진리를 깨닫고 얻을 수 있다. 이는 절대적인 일이다. 많은 사람이 매일 예배에 참석해야만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단단히 틀린 것이다. 예배에 참석하거나 설교를 듣는 것만으로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니다. 진리를 깨달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해야 하며, 또한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핵심은 진리를 구하는 데 있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문제가 임하든 진리를 구하지 않는다. 반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본분 이행으로 아무리 바빠도 문제가 닥치면 진리를 구한다. 그러므로 본분을 이행하느라 너무 바빠 예배에 참석할 시간이 없고, 그래서 진리 추구에도 지장이 있다고 투덜대는 사람들은 분명 진정으로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며, 그릇되게 이해하고 영이 통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읽거나 설교를 듣고도 왜 본분 이행 과정에서 실행하지 못하고 적용하지 못하겠느냐? 왜 하나님 말씀을 실생활에 적용하지 못하겠느냐? 이는 그들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충분히 말해 준다. 그러므로 본분 이행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을 마주하든 진리를 구하지 않고 실행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 이 사람들은 전부 봉사자들이다.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나 자질이 너무 떨어지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자신의 삶조차 제대로 계획하지 못한다. 두세 가지 일이 있으면 어떤 일을 먼저 처리하고 어떤 일을 나중에 처리해야 할지 모르며, 두세 가지 문제가 닥치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이런 사람이 진리에 이를 수 있겠느냐?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불가능할 것이다. 자질이 너무 떨어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나 결국 하나님을 10년, 20년 믿고도 체험 간증을 전혀 말하지 못하고, 어떤 진리도 얻지 못하는데, 그 주요 원인은 바로 자질이 너무 떨어지는 데 있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지 여부는 본분 이행으로 바쁜지, 시간이 없는지에 달린 게 아니라 마음으로 진리를 사랑하는지에 달려 있다. 사실, 사람이 가진 시간은 누구나 똑같다. 다만 개개인이 사용하는 곳이 다를 뿐이다. 진리를 추구할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 육적인 누림에 시간을 쓰거나 표면적인 일로 바빠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른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그렇다. 이는 생명 성장에 지장을 주는 큰일이다.

지난 두 번의 예배에서 ‘진리 추구란 무엇인가’라는 주제 및 그 주제와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 교제했다. 먼저 지난번 예배 때 이야기한 내용을 짚어 보도록 하자. 지난번에는 ‘진리 추구란 무엇인가’에 관해 정확한 정의를 내리는 한편, ‘진리 추구란 무엇인가’에 관련된 세부 문제와 사람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교제했다. 지난번 예배 때 교제한 마지막 내용은 무엇이었느냐? (하나님께서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사람이 좋고 옳다고 여기는 것이 진리가 아닐진대, 사람은 왜 그것들을 진리로 여겨 추구하는 것이냐?”) 사람이 좋고 옳다고 여기는 것들이 진리가 아닐진대, 사람은 왜 그것들을 진리로 여겨 지키면서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이 문제에 관해 지난번에 세 가지 내용을 교제하였다. 첫째, 사람이 추구하는 그것들은 진리가 아니다. 그런데 사람은 왜 그것들을 진리로 여겨 실행하겠느냐? 사람이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들이 사람의 눈에는 진리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이 좋고 옳다고 여기는 것들을 진리로 여겨 추구한다. 정확한 말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럼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은 모두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들을 진리로 여겨 지키면서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완벽한 대답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둘째, 사람은 왜 자신이 좋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진리로 여겨 지키면서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겠느냐?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사람은 복받으려는 욕망이 있으며, 욕망과 야심을 품고 자신이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들을 추구하면서 그것이 곧 진리 실행이고 진리 추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이다. 셋째, 정상적인 양심과 이성을 갖추었다면,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 사람은 본능적으로 양심과 이성에 기대 일을 처리하게 되며, 몇몇 규례와 법칙, 규율 등을 지킬 수 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양심 안에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인성에 부합한다고 여기는 것들을 진리로 삼아 지킨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전부 사람의 양심과 이성의 범위 안에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 집에서 정상적으로 힘을 쓰는데, 이는 다 정상적인 양심과 이성을 갖추고 기꺼이 하나님 집에서 힘을 쓰며, 하나님 집의 안배에 순종하고, 복을 얻기 위해 고생하면서 어떤 대가라도 치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양심과 이성의 범위 안에서 도달할 수 있는 것들을 진리 실행, 진리 추구라고 생각한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주로 위의 세 가지 내용으로 귀결된다. 지난번에 우리는 이 세 가지 내용에 대해 대략적으로 교제하였다. 오늘은 이 세 가지 내용에서 남겨진 문제들에 대해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교제하겠다. 또 각각의 내용과 관련된 문제들을 해부하고, 각각의 내용과 진리 추구의 차이, 충돌을 분석함으로써 진리 추구란 무엇인지, 도대체 어떻게 실행하는 것이 진리 추구인지에 관해 더 정확하게 알게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사람이 실생활에서 정확하게 진리를 실행하고 추구하는 데 더 큰 추진 작용을 할 것이다.

일단 첫 번째 내용에 대해 교제하겠다. 첫 번째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에 관한 교제이다. 왜 이 내용을 교제하겠느냐? 이 내용과 관련된 문제에는 어떤 것들이 있겠느냐? 먼저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만약 예배 때 이 내용을 정식으로 구체적으로 교제하지 않은 채, 너희 스스로 묵상하거나 시간을 들여 체험하고 인식한다면 정확하게 알 수 있겠느냐? 이 내용이 어떤 진리들과 관련되어 있는지 알 수 있겠느냐? 묵상해 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일단,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이라는 말을 사전적으로 묵상하고, 너희가 어디까지 인식할 수 있는지 보겠다. 먼저, 이 말을 통해 교제하려는 중점 내용은 무엇이겠느냐? 너희는 알아채지 못했느냐? 이 말이 추상적이냐? 오묘하냐? (사람 내면의 관념과 상상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개괄적인 말이다. 예를 들어 보아라. (사람은 관념적으로 버리고 헌신하고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기만 하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밖에도 사람은 부모에게 효도하기, 남편을 내조하고 자녀를 가르치기 등의 전통문화를 좋은 것으로 여깁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너희는 중점을 파악했느냐? 여기에서 어떤 부분이 주제와 관련되어 있느냐? (버리고 헌신하며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입니다.) (그 밖에도 부모에게 효도하기, 남편을 내조하고 자녀를 가르치기 등이 있습니다.) 그렇다. 또 어떤 것들이 있느냐? (표면적인 경건함과 인내, 포용이 있는데 바리새인들과 같습니다.) 겸손과 인내, 포용은 행위상의 구체적인 모습, 설명과 관련된다. 우리가 이 측면의 내용을 교제할 바에는 구체적인 설명을 통해 자세히 교제하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문제를 놓고 교제하면 더 정확하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지금 너희는 어떤 맥락도 잡지 못하고 있으니 내가 바로 교제하겠다. 괜찮겠느냐? (네.) 중국의 5천 년 문화는 ‘넓고 깊으며’, 무척 다양한 속담, 성어가 있다. 또한, 공자, 맹자 등 유명한 ‘고대 성현’들도 수없이 많다. 그들은 중국의 유가 학설을 만들었고, 이는 중국의 전통문화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의 전통문화를 보면 세대를 거듭하며 사람들이 종합한 것, 고전에서 비롯되거나 그렇지 않은 것, 민간에서 유래된 것, 명인들의 말이나 어휘, 논조가 무척 많다. 어쩌면 너희가 전통문화를 좋아하지 않거나 이미 이 저속한 전통문화에서 벗어나서 혹은 나이가 너무 어린 탓에 중국의 이 ‘넓고 깊은’ 전통문화를 심도 있게 공부하고 연구하지 않아서 아직 이러한 것들을 제대로 알거나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는 오히려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했어도 사상과 관념이 전통문화에 시나브로 물들고 전염되어 결국 부지중에 그러한 것들로 살아가게 된다. 조상 대대로 전해진 것, 즉 선조 때부터 내려온 이 전통문화들은 사람의 말과 일 처리, 행동 방식에 수많은 논조를 제시했다. 사람마다 전통문화의 각종 논조를 다르게 이해하고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고는 하나, 그런 전통문화를 기본적으로는 인정한다. 이러한 현상으로 미루어 봤을 때, 인류가 생활하고 생존하고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원천은 전통문화이다. 종족마다 신봉하는 도덕 기준과 도덕 준칙의 견해는 서로 다르지만, 대략적인 의미는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오늘은 그 일부에 대해 구체적으로 교제하고 해부하도록 하겠다. 인류가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들을 전부 다루고 해부할 수는 없겠지만 대략적인 내용은 기본적으로 이러하다. 그것은 진리 추구의 정의와 관련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한다는 두 가지 내용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나는 바라보는 것이고 하나는 행동하는 것이다. 즉, 사람은 관념적으로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들로 세상 사람들과 일을 대하며, 그것을 기초로 삼고 근거와 준칙으로 삼아 처신하고 행동한다. 그럼 이 좋고 옳은 것들에는 과연 무엇이 있겠느냐? 전반적으로 보자면,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은 그저 좋은 행위 및 좋은 인성, 도덕, 인품이라는 두 가지를 요구할 뿐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기본적으로 이 두 가지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하나는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인품과 도덕이다. 인류는 인성을 살아 내는 것과 행동을 판단하는 기본적인 기준으로 이 두 가지를 만들었다. 이 중 하나는 사람에게 표면적인 좋은 행위를 갖추라고 요구하고, 다른 하나는 좋은 덕행을 갖추라고 요구한다. 이 두 가지로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로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를 판단하기 때문에 사람의 행위를 판단하는 기준과 도덕 기준도 그에 따라 생겨났다. 이와 동시에, 사람은 자연스럽게 덕행이나 행위에 대한 각종 논조를 듣게 된다. 구체적으로 어떤 논조가 있는지 알고 있느냐? 간단한 예를 들어 보겠다. 사람의 행위를 판단하는 기준과 논조에는 어떤 것이 있더냐? ‘교양 있고 사리 밝다.’, ‘온화하고 우아하다.’라는 말은 표면적인 행위에 대한 것이다. 이 밖에, ‘점잖고 예의 바르다.’라는 말도 포함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나머지도 대부분 비슷하니, 이것들로 유추하면 어떤 어휘, 어떤 논조가 사람의 행위 측면을 판단하는 기준인지, 어떤 논조가 도덕적인 측면을 판단하는 기준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어질고 덕이 있다.’라는 말은 표면적인 행위에 대한 기준이겠느냐, 아니면 도덕에 대한 기준이겠느냐? (도덕과 품행 측면의 기준입니다.) ‘도량이 넓고 크다.’라는 말은 어떠하냐? (그 또한 도덕적인 측면의 기준입니다.) 그렇다. 이것들은 도덕적인 측면, 사람의 인품, 덕성과 관련이 있다. 사람의 행위와 관련이 있는 논조에는 주로 ‘점잖고 예의 바르다.’, ‘온화하고 우아하다.’, ‘교양 있고 사리 밝다.’ 등이 있다. 이런 것들은 다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들이다. 사람은 전통문화의 논조에 근거하여 이것을 긍정적인 것이라고, 적어도 양심과 이성에 부합하며, 부정적인 사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 언급한 것들은 사람이 옳고 좋다고 공인한 것들이다. 그럼 사람의 표면적인 행위와 관련된 논조 중 방금 내가 말한 세 가지 외에 또 어떤 것들이 있느냐?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 있습니다.)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한다.’, ‘상냥하고 친절하다.’, ‘가까이하기 쉽다.’ 등은 모두 상대적으로 익숙하며 잘 알고 있는 말들이다. ‘교양 있고 사리 밝다.’, ‘온화하고 우아하다.’, ‘점잖고 예의 바르다.’,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한다.’, ‘상냥하고 친절하다.’, ‘가까이하기 쉽다.’ 등 이런 모습을 갖춘 사람은 전부 사람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좋은 사람, 착한 사람, 인성이 있는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행위에 근거해 남을 평가하며, 표면적인 행위를 보고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가늠한다. 어떤 사람이 교양과 인성을 갖추고 있는지, 사귀고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를 볼 때 사람은 언제나 전통문화의 사상과 관점, 겉으로 보이는 행위와 모습으로 판단하고 판별하고 가늠한다. 사람에게 물질세계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더냐? 전혀 없다. 사람은 그저 행위를 통해 판단하고 판별하며, 다른 사람과의 교류, 대화, 협력을 통해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혹은 어떤 사람인지 관찰하고 규정할 뿐이다. 네가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 교양 있고 사리 밝은지, 온화하고 우아한지,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지 등을 명확한 판단 기준으로 삼았든 그렇지 않든, 네 판단 기준은 기본적으로 이 몇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사람은 다른 이의 내면세계를 간파하지 못할 때, 그의 행위와 행동을 관찰하고, 이 몇 가지 행위 준칙으로 그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혹은 귀한 사람인지 천한 사람인지 판단한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것들이 판단 기준이 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방금 정리한 이 몇 가지 논조를 보았을 때, 인류는 모두 어떤 평가 기준을 가지고 있겠느냐? 인류가 관념적으로 옳고 좋다고 여기는 내용에는 어떤 것들이 있겠느냐? 일단 덕행 측면은 차치하고, 사람의 행위와 태도에서 드러나는 좋고 옳고 긍정적인 것들에 대해 교제하고 해부하면서 이것들이 정말 긍정적인 것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방금 우리가 예로 든 여러 논조 중 진리와 관련된 것들이 있더냐? 진리에 부합하는 내용이 있더냐?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고, 그런 행위와 겉모습을 갖춘 사람이 되기를 추구한다면, 그것이 진리 추구겠느냐? 그가 추구하는 것과 진리 추구가 관계가 있겠느냐? 사람이 그러한 행위를 갖추는 것이 진리를 실행하고 추구하는 것이겠느냐? 그러한 행위와 태도를 갖춘 자가 진정한 의미의 좋은 사람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이는 너무도 뻔한 사실이다.

먼저 교양 있고 사리 밝다는 말에 대해 살펴보자. 우선, ‘교양 있고 사리 밝다.’ 이 말 본연의 뜻이 무엇인지 말해 보아라. (교양이 있고 예의를 안다는 뜻입니다.) 교양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어느 정도 규율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어떤 규율을 알고 있겠느냐? 구체적으로 이야기할수록 이 일, 이 측면의 본질을 더 분명히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규율을 안다는 것은 무엇이더냐? 예를 들어 보겠다. 식사를 할 때, 연장자가 먼저 자리에 앉지 않으면 아랫사람이 앉을 수 없는 것, 연장자가 말을 하지 않으면 아랫사람이 입을 열 수 없는 것, 연장자에게 남겨 둔 음식을 연장자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먹지 못하는 것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식사할 때 말하거나 치아를 보이거나 크게 웃지 않는 것, 쩝쩝 소리를 내지 않고 접시에서 이것저것 집지 않는 것 등이 있다. 연장자가 식사를 마치면 아랫사람은 얼른 식사를 중단하고 일어나야 하며, 연장자가 떠난 후에야 다시 자리에 앉아 밥을 먹을 수 있다. 이것이 규율을 지키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규율은 모든 집, 모든 가문의 대가족 사이에 정도만 다를 뿐 다 존재한다. 또 정도만 다를 뿐 모두 이러한 규율들을 지키고 거기에 제약받는다. 가문마다 서로 다른 규율이 있다. 이 서로 다른 규율은 누가 정한 것이냐? 각 가문에서 서로 다른 시대에 살던 조상이나 명망 높은 연장자들이 정한 것이다. 특히 큰 명절이나 기념일을 보낼 때면 이러한 규율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어 모두가 반드시 지켜야 하고, 어기는 사람이 있어선 안 된다. 만약 규율을 깨거나 어기는 사람이 있으면 가법으로 매서운 벌을 받으며, 심한 경우 사당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이것을 가리켜 규율이라고 한다. 우리가 방금 말한 것들은 한 가정 또는 한 가문에 존재하는 한 부분의 규율에 불과하다. 이러한 규율이 교양 중의 하나 아니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양을 갖췄는지를 알려면 식사하는 태도를 보면 된다. 식사할 때 쩝쩝거리고, 반찬을 고르면서 계속 다른 사람에게 반찬을 집어 주고, 먹으면서 말하고 큰 소리로 웃는 것, 혹은 젓가락으로 다른 사람을 가리키며 말하는 것 등은 다 교양 없는 태도이다. 교양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은 그의 행위가 남들에게 질책받고 의구심이 제기되며 경멸당한다는 뜻이다. 그럼 교양 있는 사람은 어떠하냐? 식사할 때 말하지 않고 소리 내어 웃지 않으며 반찬을 고르지 않고 남에게 음식을 집어 주지 않는 등 규율을 무척 잘 지킨다. 사람들은 그의 행위와 태도를 보고 교양이 있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교양을 갖췄기에 존중과 우러름, 호감을 얻는다. 이는 ‘교양 있다’는 말의 한 가지 내용이다. 그럼 그 교양이라는 것은 대관절 무엇이냐? 방금 말했듯, 그 교양은 그저 사람의 행위와 관계가 있을 뿐이다. 좀 전에 예로 든 사례가 그러하다. 식사할 때 장유유서를 지켜야 하고, 규율에 따라 자리를 잡아야 하며, 잘못 앉아서는 안 된다. 어른이든 아이든 할 것 없이 모두 가문의 규율을 지켜야 하며, 누구도 어겨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면 규율을 무척 잘 지키는 것 같고 매우 우아하며 고상하고 존귀해 보이지만,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결국에는 표면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이것이 패괴 성품과 관련이 있겠느냐? 없다. 이는 그저 사람의 표면적인 행위에 대한 판단 기준일 뿐이다. 어떤 행위겠느냐? 주로 사람의 언행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식사할 때 말을 하면 안 된다든가, 음식을 씹을 때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든가, 자리에 앉을 때도 순서가 있다든가, 평소에 어떻게 서 있고 어떻게 앉아야 한다든가 하는 것들은 전부 행위, 표면적인 행위일 뿐이다. 그럼 사람이 이러한 규율을 정말 지키고 싶어 하겠느냐? 사람은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어떻게 느끼고 있느냐? 이 하찮은 규율을 지키는 것이 사람에게 도움이 되겠느냐? 생명 성장을 가져올 수 있겠느냐? 이 하찮은 규율들을 지키는 것은 어떤 문제겠느냐? 일을 바라보는 관점과 생명 성품에 변화가 생기는 것 등의 문제와 관련이 있겠느냐? 전혀 관련이 없다. 그것은 그저 사람의 행위와 관련이 있을 뿐이고, 사람의 행위에 대해 요구를 할 뿐이다. 즉, 사람에게 어떤 것들을 하고 어떤 규율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설사 이러한 규율을 증오하고 경멸할지라도 가족이나 조상들 때문에, 그리고 가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속박 아래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사상적으로 이러한 규율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하는지, 어떤 관점과 태도가 있는지 아무도 따져 보지 않는다. 이런 정해진 범위 안에서 좋은 행위를 보이고 이 규율들을 지키기만 하면 그만이며, 그런 너는 교양 있는 사람인 것이다. ‘교양 있고 사리 밝다.’라는 것은 사람의 행위에 대한 여러 가지 요구에 불과하며, 그것은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하는 데 쓰일 뿐이다. 그 행위에는 앉는 자세, 서 있는 자세, 몸짓, 오관의 움직임은 물론이고 눈으로 어떻게 보는지, 입은 어떻게 움직이는지, 고개를 어떻게 갸웃거리는지 등이 포함된다. 이는 표면적인 행위에 대해 기준을 제시할 뿐, 사람의 마음이나 성품, 인성의 본질이 어떤지와는 관계가 없다. 이것이 바로 ‘교양 있고 사리 밝다.’라는 것의 기준이다. 이 기준을 갖추었다면 너는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이고,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좋은 행위를 갖춘 것이다. 그런 너는 사람들 눈에 우러러보고 존중할 만한 이로 보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 말은 사람의 행위에 대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행위의 기준이 대체 어떤 쓸모가 있겠느냐? 주로 사람이 교양을 갖추었는지, 규율을 아는지, 남들과 함께 지낼 때 존중받고 우러름을 받는지, 사람들의 탄복을 자아내는지 등을 판단하는 데 쓰인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진리 원칙에 전혀 부합하지 않으며, 어떤 의미도 없다.

좀 전에는 사람의 교양 측면에 관해 중점적으로 이야기했다. 이는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의 한 가지 요구 사항이었다. 그럼 여기에서 ‘사리 밝다’란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예절과 예의를 안다는 것입니다.) 좀 부족한 감이 있으나 그 또한 한 측면의 내용이다. ‘사리 밝다’란 사리에 밝고 이치를 따진다는 뜻 아니겠느냐? 이 측면으로 확장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예절과 예의를 알고 사리에 밝다는 것이다. 그럼 전반적으로 봤을 때, 사람이 ‘교양 있고 사리 밝은’ 행위를 갖추었다면, 보통 어떤 태도를 보이겠느냐? 너희는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을 본 적이 있느냐? 너희 집의 연장자, 친척, 혹은 친구 중에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이 있느냐? 그들의 특징은 무엇이냐? 규율이 무척 많다. 말에 신경을 많이 쓰고 우악스럽거나 상스럽지 않으며 남에게 상처를 주지도 않는다. 앉아 있으면 앉아 있는 대로, 서 있으면 서 있는 대로 자태가 있으며, 여러 측면에서 행위가 더없이 우아하고 품격 있어 보여 모두 그를 좋아하고 부러워한다. 그들은 사람을 만나면 바로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추며, 인사치레 말을 하고, 공공 규칙이나 질서를 철저히 지킨다. 사회 하층민 같은 습성이나 불량기도 없다. 요컨대, 남들을 편하게 해 주고 동조를 얻는 외적 행위를 보인다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으니, 무슨 일을 하든 규율이 있다. 밥을 먹을 때는 밥 먹는 규율, 잠을 잘 때는 잠자는 규율, 길을 걸을 때는 길 걷는 규율, 심지어는 외출하고 집에 돌아오는 것에도 규율이 있다. 이런 사람과 함께 있으면 무척 조심스러워지고 구속받는 기분이 든다. 너는 그가 언제 규율을 적용할지 모른다. 실수로 규율을 어기면, 몹시 경솔하고 무식해 보이며, 반대로 상대는 고상해 보인다. 웃을 때조차 아주 우아해서 치아를 보이지 않고, 다른 사람 앞에서 우는 경우도 없다. 깊은 밤 혼자 있을 때 이불 속에서 울 뿐이다. 이처럼 무슨 일을 하든 다 규율이 있다. 이것을 가정교육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예의지국, 대가족 속에서 살아가는데, 규율이 무척 많고 가정교육도 엄격하다.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좋은 행위는 어떻게 말하든 한 가지 행위일 뿐이다. 이는 사람이 자라온 환경에 영향을 받은 한편, 자신의 행위에 대한 높은 기준과 엄격한 요구로 인해 조금씩 완성된 좋은 외적 행위이다. 이 행위가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든, 결국 그것은 사람의 표면적인 행위와 관련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이 표면적인 행위를 좋은 행위라고 여길지라도, 동경하고 인정할지라도, 그것은 사람의 성품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표면적인 행위가 아무리 훌륭해도 사람의 패괴 성품을 덮을 수는 없고, 패괴 성품의 변화를 대신할 수도 없다. 설사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의 행위가 매우 모범적이며 남들에게 존중과 우러름을 받을지라도 그의 패괴 성품이 드러날 때, 그 좋은 행위는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한다. 그의 행위가 아무리 고상하고 성숙해도 진리 원칙과 관련된 일이 임했을 때, 그 좋은 행위는 어떤 역할도 할 수 없으며, 진리를 더 깨닫게 해 주지도 못한다. 한편, 그는 관념적으로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이 긍정적이라고 여기며, 그것을 진리로 여겨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고 의구심을 제기하기에,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을 근거로 자신의 언행을 판단하게 된다. 이는 또한 그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이제 다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해야 한다는 ‘진리 추구란 무엇인가’에 관한 정의에 대해 살펴보자. 그럼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외적 행위의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 진리와 조금이라도 연관성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연관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충돌한다. 어디에서 충돌하겠느냐? (그 말들은 사람이 좋은 외적 행위에만 집중하고, 내적인 속셈과 패괴 성품은 간과하게 합니다. 또 사람이 이 좋은 행위들에 미혹되어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반성하지 않고, 사람 내면의 패괴 성품을 간파하지도 못한 채, 행위에 근거하여 맹목적으로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고 숭배하게 합니다.) 전통문화의 논조를 받아들이면 그런 결과가 생긴다. 그래서 사람은 좋은 행위를 보고 그것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는 먼저 그러한 행위가 좋고 올바르다고 생각하여 긍정적인 사물로 여기며, 그것을 기초로 그러한 행위를 진리로 삼아 대한다. 그 후, 그것을 준칙으로 자신을 옭아매고 다른 이를 판단하며, 그것을 근거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한편, 처신하고 일을 처리한다. 이것이 진리와 충돌하지 않겠느냐? (충돌합니다.) 일단 ‘교양 있고 사리 밝다.’라는 말이 사람을 미혹하는지 여부는 차치하고 이 말 자체에 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교양 있고 사리 밝다.’라는 말은 우아하고 고상하다. 누구나 이 말을 좋아해 옳고 좋은 것, 준칙으로 여긴다. 그것을 기초로 남을 판단하고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한편, 이 말을 기준으로 처신하고 일을 처리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판단할 때, 그는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지 않는다. 무엇을 근거로 하겠느냐?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일까? 겉으로 보이는 행위에 교양이 드러날까? 규율을 알고 있을까? 사람을 존중할 줄 알까? 예의가 있을까? 남과 이야기할 때 겸손한 태도를 보일까? 양보 같은 좋은 행위를 보일까? 이런 사람일까?’ 그가 이러한 의문과 견해를 갖게 된 근거는 무엇이겠느냐? 먼저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이 준칙에 근거했다. 이것을 근거로 삼은 것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어째서 옳지 않겠느냐? 가장 쉬운데도 너희는 답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이 그렇게 판단하지 않으며, 사람에게 그렇게 판단하라고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람이 그렇게 판단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만약 사람이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과 일을 판단한다면, 그것을 기준으로 사람과 일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진리와 하나님 말씀에 어긋난 것이다. 이는 전통 관념과 진리가 충돌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무엇을 근거로 남을 판단하게 하느냐? 무엇에 근거하여 사람과 일을 바라보게 하느냐?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사람을 바라보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사람에게 인성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 한 가지이다. 이 밖에, 그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는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지, 진리에 순종하는지에 근거해야 한다. 이것이 구체적인 내용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군가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판단할 때 무엇에 근거하느냐? 교양이 있는지, 규율을 지키는지, 식사할 때 쩝쩝거리지는 않는지, 음식을 가리지는 않는지, 연장자가 자리에 앉은 후에 착석하는지 등을 보며 판단한다. 이는 ‘교양 있고 사리 밝은’ 행위 준칙으로 판단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렇게 판단하는 것이 정확하겠느냐?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부합하지 않습니다.) 결코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럼 이런 판단의 마지막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이를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에게 진리를 교제하라고 하면 그는 집안 규율이나 가정교육, 좋은 행위로 다른 사람을 양육하며, 이러한 것들을 주입한다. 그리고 결국 사람들을 좋은 행위로 끌고 가기에 사람의 패괴 본질에는 어떤 변화도 생기지 않는다. 이런 행동은 진리에서 멀어지고 하나님 말씀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좋은 행위만 좀 갖췄을 뿐이다. 이 사람의 내면에 있는 패괴 성품이 좋은 행위로 인해 바뀌겠느냐? 그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충성할 수 있겠느냐? 한참 부족하다. 이들은 모두 어떤 사람이 되었겠느냐? 좋은 외적 행위만 보일 뿐,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하며 하나님께 순종하지도 못하는 바리새인이 되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바리새인의 겉모습에 트집 잡을 만한 것이 있었더냐? 안식일을 지켜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말할 때는 점잖고 예의 발랐으며, 규율을 잘 알고 규례를 지켰다. 교양을 많이 갖추었고, 문화적인 지식 또한 높았다. 하지만 위장에 능하고 하나님을 전혀 경외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판단하고 정죄했기에 결국 하나님께 저주받았다. 하나님은 그들을 외식하는 바리새인, 악을 행하는 자들로 규정했다. 마찬가지로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좋은 행위를 처신과 일 처리의 준칙으로 삼는 사람들은 결코 진리를 추구하는 자가 아니다. 그들이 이런 규율로 남을 판단하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 역시 당연히 진리 추구가 아니다. 또한, 그들이 어떤 사람과 일을 평가할 때, 그 평가 기준과 근거는 진리에 부합하지 않고 어긋난다. 그들이 집중하는 것은 사람의 행위와 행동일 뿐, 성품이나 본질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이나 진리에 근거하는 게 아니라 전통문화 중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과 같은 행위적 기준으로 판단한다. 그렇게 판단한 결과, 겉으로 볼 때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좋은 행위를 갖추고 있기만 하면 좋은 사람,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이 된다. 사람이 이러한 정의를 하는 순간, 진리와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게 된다. 그들이 이런 행위적 준칙으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수록 하나님 말씀과 진리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결과가 생긴다. 하지만 그들은 그 상황에서 희희낙락하면서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전통문화 가운데 좋은 논조들을 지키면서 자신이 진리와 참도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지키고 고수하든, 결국 하나님 말씀과 진리를 전혀 체험하거나 경험하지 못하며, 하나님께 전혀 순종하지도 못한다.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경외는 더더욱 없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과 같은 좋은 행위를 지킨 결과이다. 사람이 좋은 행위에 집중하고, 좋은 행위로 살아가는 데 집중하며, 좋은 행위를 추구하는 데 집중할수록 하나님 말씀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되며, 하나님 말씀에서 멀어질수록 진리를 깨달을 수 없게 된다. 이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사람의 행위가 좋아진 것이 성품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겠느냐? 너희는 이러한 측면에서 경험이 있느냐? 너희는 자기도 모르게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이 되기를 추구한 적이 없느냐? (있습니다.) 그 이유는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이 귀하고 고상해 보이며, 신뢰받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 좋은 행위들을 갖추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좋은 행위와 좋은 모습이 있다고 해서 사람의 패괴 성품이 해결되겠느냐? 사람이 나쁜 일을 저지르는 것을 피할 수 있겠느냐? 만약 불가능하다면, 이 좋은 행위가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 그저 겉보기에만 좋아 보일 뿐, 아무 쓸모가 없다. 이런 좋은 행위가 있는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겠느냐? 그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할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좋은 행위는 진리 실행을 대신할 수 없다. 바리새인들처럼 말이다. 그들의 행위는 훌륭했고 더없이 경건했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를 어떻게 대했더냐? 그들이 인류의 구세주를 십자가에 못 박을 거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좋은 외적 행위만 있고 진리를 얻지 못한 사람은 무척 위험하며, 계속 하나님을 대적하고 배반할 수 있다. 이 점을 밝히 알지 못한다면 언제까지나 사람의 좋은 행위에 미혹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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