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추구란 무엇인가(2) 제 3 부

진리 추구와 구원받는 일은 직접적인 관계가 있으므로 진리 추구에 관련된 화제는 사소하지 않다. 비록 자주 하는 평범한 화제이기는 하지만, 이것과 관련된 진리는 매우 많다. 이 화제는 사실 사람의 앞날이나 운명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런데 수시로 교제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은 진리를 추구할 때 반드시 이해해야 하는 각각의 진리와 문제들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다. 그저 사람이 좋다고 여기는 갖가지 행위와 방법, 비교적 진취적이고 긍정적이라고 여기는 일부 사상이나 관점 등을 진리로 여겨 되는대로 추구할 뿐이다. 이는 틀려도 크게 틀린 것이다. 많은 사람이 좋고 옳고 바르다고 여기는 것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부 진리가 아니다. 어떤 것들은 기껏해야 진리에 부합할 뿐, 진리라고 할 수 없다. 많은 사람이 진리 추구라는 일을 크게 오해하고 있으며, 내면에 그릇된 인식과 편견이 수없이 많다. 그렇기에 분명히 교제하는 한편, 사람에게 여기에서 깨달아야 할 진리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알려 줄 필요가 있다. 방금 교제한 진리 추구와 관련된 이런 구체적인 내용을 통해 너희는 뭔가 생각이 있게 되었느냐? 계획이나 계산이 있느냐? 이런 교제를 통해 무엇이 진리 추구인지 구체적으로 정의한 후, 많은 사람이 지금껏 자신이 행동하고 드러낸 것들과 앞으로 하려고 하는 것들에 막막함을 느끼고 언짢아한다. 심지어는 희망이 없어졌다고, 도태될 위험에 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진리를 분명하게 교제했는데 오히려 힘을 잃은 것이다. 그런 상태가 올바르냐? 정상적이냐? (비정상적입니다.) 만약 네가 지금까지 진리를 추구했다면, 이런 교제를 듣고 나서 검증을 얻었을 것이다. 그럼 더욱 힘이 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힘을 잃었다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이겠느냐? 힘을 잃은 근본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진리를 분명하고 확실히 교제할수록 사람에게는 더욱 길이 생긴다. 그런데 왜 길이 생기는 상황에서 힘을 잃겠느냐? 여기에는 문제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겠느냐? (진리 추구가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추구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추구하려고 하지 않기에 힘을 잃은 것이다. 그럼 여태까지 해 온 것들은 어떻게 되겠느냐? (정죄됩니다.) ‘정죄된다’라고 말하기에는 좀 부적절한 감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결과겠느냐? 어떻게 되는 것이겠느냐?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매우 간단하다.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을 추구하고 있으며, 여전히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기대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러하다. 사람은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면 마음이 언짢아진다. 그럼 이때 사람에게 올바르고 정확한 실행의 길이 있겠느냐?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서 소극적이 되고 책임을 내팽개치고 자포자기하는 게 옳겠느냐? 이것이 올바른 실행의 길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올바른 실행의 길이 아니다. 이런 일이 임했을 때, 자신의 문제를 발견했다면 제때 바로잡아야 한다. 진리 추구란 무엇인가에 관한 교제를 통해 여태까지의 네 행동이 진리 추구와 무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마음이 언짢든 그렇지 않든 지금까지의 잘못된 실행의 길과 방식, 추구의 길을 가장 먼저 바로잡아야 한다. 얼른 바로잡아야 한다. 여태까지의 행동이 부정되고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며, 전부 힘쓰는 일이 되어 진리 추구와는 상관이 없다는 얘기를 들으면 속으로 ‘아이고, 사람은 정말 어리석고 눈이 멀었구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일을 간파하지도 못하다니. 여태까지 줄곧 그렇게 하는 게 진리를 실행하고 추구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알겠네. 소위 ‘진리 추구’라는 것은 다 사람의 좋은 행위이고, 육체의 각종 본능, 자질, 재능에 기대어 한 일이라는 사실을 말이야. 그건 진리 추구의 본질이나 정의, 요구와 거리가 아주 멀어. 아예 관계가 없다고. 이 일을 어쩌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큰 문제이니 해결해야 한다. 해결의 길은 무엇이냐? 문제가 나왔다. 여태까지 옳다고 생각한 행위와 행동이 전부 부정되고 하나님께 기억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진리 추구라고 정의하지 않는다면, 대체 진리 추구란 무엇이겠느냐? 진리 추구의 정의에 대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세히 읽어 보고, 그 정의에서 실행의 길을 찾은 후, 그것을 자기 삶 속의 실제로 만들어야 한다. 여태까지 진리 추구를 실행하지 않았다면 지금부터는 진리 추구의 정의를 근거로 삼고, 처신하는 근본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럼 진리 추구의 정의는 무엇이냐?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것이다. 이 이상은 더 명확하게, 분명히 말할 수 없다. 여태까지 사람이 행한 것은 전부 무엇이더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삼았느냐? 돌아보아라. 그랬느냐? (그러지 않았습니다.)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 격으로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 이렇게 오랜 세월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 말씀을 읽고 교제했는데, 설마 정말 아무런 성과도 없는 것이냐?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한 일이 하나도 없는 것이냐? 여기에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것’이란 도대체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이겠느냐?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겠느냐? 사람의 어떤 문제, 어떤 측면의 성품 본질을 대상으로 하겠느냐? 사람은 진리 추구의 정의를 이해하기는 했지만, 여태까지 자신의 행동이 왜 인정받지 못하는지, 왜 진리를 추구하지 않은 것으로 정의되는지 알지도, 이해하지도, 깨닫지도 못한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저희는 하나님의 이름을 받아들였을 때부터 지금까지 많은 것을 버렸습니다. 가정과 일, 자기 앞날까지 버렸지요. 어떤 사람은 좋은 일자리를 그만뒀고, 어떤 사람은 화목한 가정을 버렸으며, 어떤 사람은 좋은 사업과 막대한 수입, 유망한 앞날까지 내려놓았습니다. 이것들을 다 내려놓았어요. 이 밖에도, 저희는 하나님을 믿은 후로 겸손과 인내, 포용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남과 함께 지낼 때면 싸우지 않았고, 교회에 무슨 일이 있든 최선을 다해 임했으며, 형제자매들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든 온 힘을 다해 사랑하는 마음으로 도왔습니다. 남에게 어떤 피해도 주지 않고, 남의 이익에 어떤 해도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요. 이런 행동들이 진리 추구와 무관하다는 말씀입니까?” 잘 생각해 보아라. 사람이 버리고 헌신하고 지불하고 포용하고 인내하고 나아가 고난을 겪은 이것들은 전부 무엇과 관계가 있겠느냐? 전부 어떻게 이룬 것이더냐? 무엇을 근거로 했겠느냐? 무엇을 원동력으로 이루었겠느냐? 돌아보아라. 이는 사람이 깊이 생각해 볼 만한 일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깊이 생각해 볼 만한 일이니, 오늘 우리가 토론하고 살펴보도록 하자. 사람이 줄곧 좋고 옳고 고매하다고 여긴 그것들이 과연 진리 추구와 관계가 있는지 보자.

먼저 사람이 버리고 대가를 치른 부분에 대해 살펴보겠다. 사람이 어떤 배경과 환경에서 버리고 대가를 치렀든, 그 원동력은 어디에서 왔겠느냐? 정리해 보면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사람은 사상과 관념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을 위해 버리고 헌신하고 대가를 치러야 해. 그러면 하나님이 좋아하시겠지. 하나님은 사람이 안일을 탐하고 세상을 추구하면서 입으로만 하나님의 이름을 받아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셔. 하나님을 따르는 자가 된 후에도 여전히 변화 없이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고.’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사람의 주관적인 소망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옳다. 사람이 무엇 때문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새 사역을 받아들였든, 사람의 주관적인 소망은 그렇게 하는 것을 인정하고, 오직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이 좋아한다고, 하나님이 기뻐하고 만족할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착실하게 공들이고 노력하면서 어떤 보답도 바라지 않고 헌신하고, 화복을 묻지 않고 대가를 치르며, 한결같이 희생하고 대가를 치르고 헌신하고 봉헌하면 하나님이 틀림없이 기뻐할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한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매진한다. 또 모든 것을 불사하고 자신이 버릴 수 있는 것들을 버리고, 바칠 수 있는 것들을 바치며, 감내할 수 있는 고통을 감내한다. 사람은 이런 행동을 하지만, 누구도 고개를 들고 하나님께 “하나님, 제 이런 행동을 원하십니까? 하나님, 제가 헌신하고 노력하고 고난을 겪고 대가를 치르는 것을 인정하십니까?”라고 묻지 않는다. 사람은 하나님께 이렇게 묻는 법이 없다. 하나님이 어떤 반응,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사람은 일방적으로 대가를 치르고 바치고 헌신하면서 그렇게 고생해야만 하나님이 기뻐하고 만족할 거라고 여긴다. 심지어는 만두를 먹는 것조차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만두를 먹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대신 옥수수빵을 먹는 것이다. 그는 만두를 먹는 것은 안일을 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옥수수빵, 마른 전병, 장아찌 같은 걸 먹어야 마음이 편해진다. 또 자신의 마음이 편해지면 하나님도 만족할 거라고 여긴다. 자신의 느낌과 희로애락을 하나님의 느낌, 하나님의 희로애락으로 여기는 것이다. 황당하지 않으냐? 사람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진리로 여겨 대하고 하나님께 강요하며, 이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라고 말하는 자들이 많다. 사람은 모두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렇게 생각한 이상, 무의식중에 그런 말과 행위, 행동을 너무 쉽고 자연스럽게 진리라고 정의하게 된다. 또 진리라고 확신한 이상, 그것은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실행의 원칙이 된다. 사람이 그렇게 실행하고 지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게 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된다고도 생각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면, 그 고생이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 올바른 대가를 치른 것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만족하고 기억하는 것 아니겠느냐? 사람은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생각하는 ‘진리’와 하나님 말씀 사이의 간극, 차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관념과 상상으로 인성과 도덕, 품격에 부합한다고 여기는 모든 좋고 고매하고 올바른 것을 일률적으로 진리라고 규정한다. 그러고 나서 그 방향으로 행동하고 열심히 실행하며, 스스로에게 엄격하게 요구한다. 그리하여 사람은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고, 영락없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당연히 틀림없이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의 말씀, 진리와 사람이 관념적으로 좋고 옳고 긍정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어떤 관계도 없다. 그런데도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읽고 받드는 동시에, 자신이 관념적으로 좋고 옳고 아름답고 선하고 긍정적이라고 여기는 것들, 사람이 제창하는 그러한 것들을 통틀어 진리나 긍정적인 사물로 여기며, 지치지도 않고 추구한다. 또 자신에게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그것을 추구하고 이루라고 요구한다. 사람은 지치지도 않고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것을 진리로 삼은 후 그것들이 요구하는 기준과 방향대로 추구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이미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고, 진리 실제를 살아 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진리 추구에 관한 사람의 그릇된 인식 중 한 부분이다. 이 그릇된 인식은 사람이 관념적으로 좋고 옳고 긍정적이라고 여기는 사물을 기준으로 하며, 그것으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와 하나님 말씀의 요구, 기준을 대신한다. 사람은 관념적으로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들을 진리로 삼으며, 거기에서 더 나아가 지키고 추구하기까지 한다. 이것이 하나의 문제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사람의 사상과 관점상의 문제다. 사람이 그러한 일을 할 때, 그 원동력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그러한 생각과 그릇된 인식을 갖도록 부추기는 근본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하나님이 그것들을 좋아할 거라고 여기고 그것을 하나님께 강요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통문화는 근검절약을 제창하며, 근검절약은 사람의 미덕이라고 가르친다. “고생을 해 봐야 뛰어난 사람이 된다.”라는 말을 미덕으로 보기도 하고, “일을 할 때 주인 말대로 하지 않으면 지쳐 죽어도 공이 없다.”라는 말도 있다. 각 민족과 사람들이 좋고 옳고 긍정적이고 진취적이라고 여기는 것을 그들은 다 진리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것들을 진리로 여기며, 하나님이 선포한 모든 진리를 대신한다. 또 그들은 사람이 인정한, 사탄에게 속하는 것들을 진리나 하나님의 요구 기준으로 여기며, 사람이 상상하는 것, 옳다고 생각하는 이상(理想), 방향, 목표를 향해 추구한다. 이는 단단히 틀린 것이다.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서 비롯된 그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부합하지 않으며, 전적으로 진리와 어긋난다.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들을 진리로 여기는 상황에 대해 몇 가지 사례를 들면 추상적이지 않고, 너희가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여성은 하나님을 믿은 후에 더 이상 화장을 하거나 액세서리를 하지 않으며, 화장품과 액세서리를 한쪽에 치워 두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단정해야 하니 치장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집에 있는 차를 몰지 않고 자전거를 타면서 차를 타는 건 안일을 탐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은 여유가 있는데도 고기를 먹지 않으며, 항상 고기를 먹으면 나중에 고기를 먹을 수 없는 상황이 닥쳤을 때 소극적으로 변하고 연약해져서 하나님을 배반할 거라고, 그러니 미리 고난을 겪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밖에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 겉보기에 단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자신의 단점이나 나쁜 습관을 돌아본 후 말투를 바꾸고 성질을 자제하며, 저속하지 않고 우아하게 바뀌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은 후에 자제하고 제약하며, 남들에게 좋은 사람, 단정한 사람으로 보여야 한다고, 이것이 바로 대가를 치르는 것이고 하나님이 흡족해하는 것이며 진리 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가끔 치장을 하고 쇼핑을 할 때마다 마음속으로 가책을 느끼며, 하나님을 믿으면 화장하거나 치장하고 좋은 옷을 입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화장하거나 치장하고 좋은 옷을 입으면 하나님이 혐오하고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원시 인류를 좋아하며, 산업과 현대 과학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또 시대적 흐름 같은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에 대한 추구를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진리 추구라고 여긴다. 이는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읽었겠느냐?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여기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여기지 않는 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행동과 태도는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들을 진리로 삼은 것이며, 사람이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들로 진리를 대신하고 일방적으로 실행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실행한 후에는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고, 자신은 진리 실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은 후로 드라마나 뉴스를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심지어는 쇼핑조차 한 적이 없다. 복음을 전하고 본분을 이행하느라 건초 더미 속에서 잔 것도 여러 차례요, 개집 옆에서 묵은 것도 몇 날이나 된다. 찬밥을 먹고 탈이 난 것도 여러 번이고, 수면 부족과 영양 부족으로 살이 몇 킬로그램이나 빠졌으며, 수많은 고난을 겪었다. 그는 이러한 것들을 마음에 담아 두고 하나하나 기억해 둔다. 이런 일들을 왜 그렇게 정확히 기억해 두겠느냐? 이러한 행위와 행동이 진리 실행이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거라고, 이 좋은 행위들은 모두 하나님께 인정받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원망하지 않고 거침없이 실행하며, 지치지도 않고 되새기고 반복하고 되돌아보며 마음이 충실해진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련이 임할 때,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이 사람의 뜻에 맞지 않을 때, 하나님의 요구와 행사가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을 때, 사람이 옳다고 여기는 그런 것들과 사람이 치른 대가, 실행은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하며, 사람이 자신에게 닥친 상황에서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인식을 얻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이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과 방해물이 된다. 그 원인을 따져 보자면, 사람이 옳다고 여기는 것들이 전혀 진리가 아니고, 사람이 실행하는 것 또한 진리 추구가 아님을 끝까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 사람이 얻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그저 좋은 행위일 뿐, 진리나 생명을 얻지는 못한다. 그런데도 사람은 그 좋은 행위가 바로 진리 실제라고 착각하며, 마음속으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것들이 바로 진리이자 긍정적인 사물이라고 확신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확신은 마음속에 뿌리를 내린다.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그런 것들을 숭상하고 맹신할수록 진리를 배척하게 되고, 하나님의 요구나 말씀과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 이와 동시에 사람이 치른 대가가 많을수록 자신은 밑천이 많으며, 구원받고 하나님의 약속을 얻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는 악순환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문제의 근본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문제의 원흉은 과연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자신의 관념을 긍정적인 사물로 여겨 하나님 말씀을 대신한 것입니다.) 사람이 관념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한쪽에 치워 두며,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진리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은 후 하나님 말씀을 읽기는 하지만, 여전히 관념과 상상에 기대 추구하고 선택하고 있으며, 하나님 말씀이나 요구대로 하나님을 믿는 길을 걷고 있지는 않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이 관념과 상상에 기대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문제의 근본 원인은 과연 어디에 있겠느냐? 사람의 관념과 상상은 어디에서 생겨났겠느냐? 어디에서 비롯되었겠느냐? 대부분 전통문화와 사람의 유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종교계에 물들고 영향받은 것도 있다. 이러한 것들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사람이 사상과 관점으로 좋고 옳고 긍정적이라고 여기는 것들에는 또 무엇이 있느냐? 예를 들어 보겠다. 사람은 종종 “좋은 사람은 일생이 편안하다.”, “성실한 사람은 오래간다.”라는 말을 하곤 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또 “착한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생기고, 나쁜 일을 하면 나쁜 결과가 생긴다. 응보를 받지 않은 것이 아니라 때가 되지 않은 것이다.”, “불의를 많이 행하면 반드시 자기 무덤을 파게 되어 있다.”, “하늘이 너를 멸할 때는 반드시 먼저 네 멋대로 굴게 한다.”, “고생을 해 봐야 뛰어난 사람이 된다.”, “모든 게 다 쓸모없고, 오직 공부만이 최고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 헛소리들은 너무 역겨워서 듣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른다. 하지만 사람은 이 말들을 정말 열심히 익힌다. 어째서 그렇게 열심히 익히겠느냐? 나는 왜 익히지 않겠느냐? 나는 이러한 말, 이러한 견해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너희는 입만 벌렸다 하면 이런 말을 줄줄 읊으며, 열심히 늘어놓는다. 이는 너희가 이러한 것들을 매우 좋아하고 숭상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너희는 그 공허하고 허무맹랑하며 진실하지 않은 것들을 숭상하는 동시에 그것들을 좌우명으로, 일 처리의 원칙과 준칙, 근거로 삼은 후,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들은 골자가 똑같다고, 하나님 말씀은 대체로 그러한 의미를 지닌다고, 좋은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이 올바르냐? 하나님이 말씀하고 선포한 진리가 그런 의미겠느냐? 전혀 아니다. 그것들과 아무 관계도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진리에 대한 태도를 바로잡아야 하며, 이 밖에도 진리에 대한 인식을 고쳐야 한다. 즉, 사람이 진리를 정하는 기준을 고치고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진리를 받아들이기가 매우 힘들고, 진리 추구의 길을 걸을 수도 없다. 진리란 무엇이더냐? 개괄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전부 진리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보았을 때 진리란 무엇이냐? 예전에 말한 적이 있다. 뭐라고 했느냐? (“진리는 처신하고, 일 처리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준칙입니다.”(<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8조(3)> 중에서)) 그렇다. 진리는 처신하고, 일 처리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준칙이다. 그럼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들이 진리와 관계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그것들은 어디에서 왔겠느냐? (사탄의 처세 철학에서 왔습니다. 또 전통문화가 사람에게 주입한 사상이기도 합니다.) 그렇다. 정확히 말해서 그 근원은 사탄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럼 사람에게 그러한 생각을 주입한 명인이며 위인들은 누구겠느냐? 사탄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 조상들은 모두 사탄, 살아 움직이는 사탄이다. 중국인이 제창하는 말들을 보아라. “멀리서 벗이 찾아 주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엎어진 김에 쉬어 가라.”, “부모가 계실 때는 멀리 나가 놀지 마라.”, “모든 선행 중 효가 으뜸이다.”, “불효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중 자손이 없는 것이 가장 크다.” “죽은 사람이 가장 귀하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착한 말을 한다.” 등의 말을 세밀히 분석해 보면, 진리가 한 마디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전부 헛소리이고 그릇된 말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인 후에도 이러한 헛소리, 그릇된 말을 진리로 삼는다. 말해 보아라.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으냐? 사람에게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그릇된 자들로,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전혀 없다. 그럼 너희는 이제 이 많은 하나님 말씀을 읽고 진리에 대해 얼마간 인식이 생겼느냐? (네.) 진리는 어디에서 오느냐?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진리는 하나님에게서 온다.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면 전부 믿지 마라. 사탄의 처세 철학이나 전통문화에서 온 것은 진리가 아니다. 사람이나 일을 바라볼 때, 처신하고 행동할 때 그것을 근거나 준칙으로 삼아선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면 전통문화에서 비롯되었든, 어떤 명인에게서 비롯되었든, 지식에서 비롯되었든, 사회에서 비롯되었든, 또 어떤 시대에서 전해졌든, 어떤 종족에게서 비롯되었든 전부 진리가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하필 진리가 아닌 그런 것들을 진리로 여기며 진리 대신 추구하고 실행한다. 그러면서 늘 자신이 진리를 실행하고 있으며, 머지 않아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전혀 다르다. 네가 그러한 것들을 따라 추구하고 실행하면 하나님의 요구와 진리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

사람은 사람이 좋고 긍정적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진리로 생각해 추구하는데, 이 일은 그 자체로 황당하기 그지없다. 사람은 왜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이고 수많은 하나님 말씀을 읽은 후에도 사람이 좋다고 여기는 것들을 진리로 삼아 추구하겠느냐?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이는 사람이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진리에 대해 어떤 진실한 인식도 없다는 것을 충분히 말해 준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방금 언급한 “그것들이 진리가 아닌데 사람은 왜 계속 그렇게 실행하면서 진리를 실행한다고 생각하겠느냐?”라는 질문의 한 가지 원인이다. 다른 측면의 원인은 사람의 패괴 성품과 관련이 있다. 사람은 관념적으로 좋고 옳고 긍정적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진리라고 생각한다. 또 그것을 기초로 자신만의 계산을 하면서 사람이 하나님을 만족게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면 사람에게 약속한 복을 베풀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계산은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은 그릇된 인식을 품은 채 이러한 것들을 지키고 추구하는 한편, 욕망과 야심을 갖고 하나님과 거래한다. 이것이 또 다른 측면의 원인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러한 측면의 원인은 예전에 수시로 교제했으니, 지금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겠다. 그럼 이제 너희에게 묻겠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위해 버리고 고생하고 헌신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에 사람의 속셈과 목적이 들어 있지 않겠느냐? (들어 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원하는 것도, 바라는 것도 없습니다. 어떤 배경에서든 버리고 헌신하고 대가를 치를 뿐입니다. 제 개인적인 야심이나 욕망 같은 건 없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어떻게 대하시든 상관없습니다. 상을 주시든 주지 않으시든 저는 하나님의 요구대로 행동하고 바치며 버리고 대가를 치르고 고난을 겪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사람은 태어나지 않았다. 혹자는 “그런 사람은 딴 세상에나 있을 겁니다.”라고 말하는데, 딴 세상에 있다고 해도 불가능하다. 그 역시 패괴 성품과 욕망, 야심이 있을 것이고, 하나님과 거래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의 두 번째 원인은 바로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것들을 진리로 삼은 후 자신만의 계산을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는 계산은 무엇이겠느냐?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사람에게 약속한 복과 아름다운 종착지를 얻으려는 것이다. 그는 사람이 긍정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분명 옳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대로 행동하고 추구하면서 그렇게 실행하면 분명히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거라고 여긴다. 이것이 바로 그의 계산이다. 두 번째 원인은 전적으로 자신의 욕망과 야심을 충족시키며, 하나님과 거래한다는 것이다. 그가 하는 거래를 끊어 버리고, 그의 욕망과 야심을 무너뜨리며, 내려놓고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라고 하면 그는 바로 힘을 잃는다. 어째서 힘을 잃겠느냐? 자신의 앞날과 운명이 모두 사라졌으며, 복받을 희망도 없어졌다고,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가 실행한 것, 추구한 것이 진리가 아니라 그의 상상 속 긍정적인 것들인데도 불구하고 욕망과 야심이 물거품이 되었을 때, 그는 더 이상 대가를 치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말해 보아라. 사람에게는 무엇이 있느냐? 진실한 믿음이 있느냐? (없습니다.) 한발 더 나아가서, 사람에게 충성심이 있느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든 저희는 따를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든 소극적으로 변하거나 낙담하거나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포기하는 일은 더더욱 없습니다. 설령 하나님이 저희를 원치 않으셔서 저희가 힘쓰는 봉사자라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며 구원받을 희망이 없다고 하셔도 저희는 주저 없이 따를 것입니다. 또 계속 본분을 이행할 거고요. 이것이 충성심이 있는 것 아닙니까? 믿음이 있는 것 아닙니까? 충성심과 믿음이 있다는 건 진리를 추구하는 것 아닐까요? 그래도 어느 정도는 진리를 추구한다는 뜻 아닙니까?” 말해 보아라. 이것이 진리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진리를 추구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겠느냐? 사람의 모든 ‘활로’가 막혀 버렸으며, 목숨을 살리는 지푸라기마저 사라졌다는 뜻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겠느냐? 방법이 있겠느냐? 사람에게 방법이 있든 없든 이 말을 듣고 어떤 느낌이 들겠느냐? 마음이 차갑게 식는다. ‘설마 복받을 희망이 조금도 없다는 건가?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런 상황에서 사람은 누구나 갈피를 잡지 못한다. 내가 한 말들이 너희의 모든 ‘활로’를 빼앗아 갔으니, 나는 너희가 어디로 가는지 지켜보겠다. 어떤 이는 “힘쓰는 것도 옳지 않고, 거래를 해도 안 되고, 그릇된 인식이 있어도 잘못되었고,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까지 틀렸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옳은 것입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셔도 저희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계속 본분을 이행할 것입니다. 이것을 진리 실행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말하는데, 이 문제는 확실히 알아야 한다.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며, 무엇이 진리 실행인지에 관해 늘 그릇된 인식을 가진 채 버리고 헌신하고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을 진리 실행이자 하나님께 순종하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틀려도 크게 틀린 것이다. 진리 실행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지만, 반드시 원칙이 있어야지, 절대 사람의 관념과 상상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참된 마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마음이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야말로 진리 실행이다. 만약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면서 늘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 하고, 자신의 야심과 욕망을 충족시키려 한다면 이는 진리 실행이 아니라 진리를 우롱하고 짓밟는 것이며, 그런 자는 외식하는 사람이다. 그럼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복받으려는 속셈과 욕망이 무너지고 어떤 기대도 원동력도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계속 본분을 이행한다면, 이것을 진리 추구, 진리 실행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진리 추구란 무엇인가’라는 정의에 근거하여 판단해 보면, 이것은 진리 추구가 아니며, 진리 추구의 기준에 전혀 미치지 못한다. 이제 진리 추구에 대해 정확한 정의를 내렸으니, 그 정의에 따라 사람의 모든 행동과 태도를 엄격하게 판단해야 한다. 사람이 복받으려는 기대가 전혀 없는데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계속 본분을 이행하는 이 태도에서 무엇을 판단할 수 있느냐? 사람이라는 피조물은 인성 안에 타고난 좋은 점 두 가지가 있다. 이 두 가지를 제대로 쓸 수 있다면 최소한 하나님을 따를 수는 있을 것이다. 너희는 그 두 가지가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양심과 이성입니다.) 그렇다. 인성 안에는 가장 귀한 두 가지가 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 또 사람의 자질이 떨어지고 진리나 하나님의 요구를 전혀 인식하거나 거기에 진입하지 못한 상황에서 사람이 제자리를 지키는 것, 여기에 도달할 수 있는 기본 조건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갖춰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답은 아주 분명하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복받으려는 욕망과 야심이 전혀 없으며, 복받으려는 욕망이 무너진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따르고 본분을 이행한다면, 무엇에 근거하고 있겠느냐? 사람의 원동력은 무엇이겠느냐? 근거도 원동력도 없다.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다. 지금의 상황이 그러하다.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네가 이해하고 있는 도리들은 소용이 없으며, 진리 실제에 진입했다는 의미가 결코 될 수 없다. 너는 앞날과 운명을 추구하기 위해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기특한 점은 앞날과 운명에 대한 추구와 복받으려는 욕망이 정죄되고 무너졌을 때도 기꺼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따르고 본분을 이행한다는 것이다. 너는 진리를 얻지 못했음에도 하나님을 따른다. 무엇에 근거한 것이겠느냐? 양심과 이성에 근거한 것이다. 양심과 이성은 사람이 정상적으로 생존하고 살아가고 사람과 사물을 대하게 해 준다. 그럼 양심과 이성에 기대 본분을 이행하는 것과 진리 실행의 차이는 무엇이겠느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사람이나 일을 바라볼 때, 처신하고 행동할 때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한다. 하지만 양심과 이성에 기대 행동하는 사람들은 진리를 추구하지는 않아도 하나님 집에서 힘을 쓰고 본분을 이행할 수 있기에 남을 수 있으며, 나쁜 전과도 없다. 그가 기대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그는 사람이나 일을 바라볼 때, 처신하고 행동할 때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삼지 않고, 진리를 준칙으로 삼지 않는다. 양심과 이성을 기준으로 삼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점을 봤을 때 네가 양심과 이성만으로 본분을 이행한다면, 진리 추구와 거리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양심과 이성에 기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힘쓰는 데 만족하는 것이며, 제대로 힘쓰고, 방해하거나 교란하지 않고, 잘 따르고 순종하고, 모범적인 행동과 좋은 인간관계가 있고, 나쁜 전과가 없는 것 등을 기준으로 한다. 이것을 진리 추구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사람에게 좋은 행위가 얼마나 되든, 패괴 성품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패역과 관념, 오해 및 각종 소극적인 상태도 인식하지 못하고 해결할 수 없다면, 진리 실행의 원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드러내는 패괴 성품을 하나도 해결하지 못한 채 교만하고 독선적이고 제멋대로이고 교활하고 간사하게 군다면, 심지어 때로는 소극적이 되고 연약해지며 하나님을 의심하는 등의 상태가 시종일관 계속된다면, 하나님께 진실로 순종할 수 있겠느냐? 그런 패괴 성품이 존재하는데, 하나님의 사역을 진실로 체험할 수 있겠느냐? 오직 좋은 행위 하나가 진리를 추구하는 모습이겠느냐? (아닙니다.) 사람의 내면에 있는 것 중 최고는 무엇이겠느냐? 오직 양심과 이성뿐이다. 이 두 가지만이 긍정적인 것이고, 사람에게서 칭찬할 만한 부분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다 진리와 상관이 없다. 그것은 그저 사람이 진리를 추구할 때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조건에 불과하다. 네가 인성의 정상적인 이성과 양심을 갖추고 있다면 진리를 듣고 깨달을 수 있다면, 일이 임했을 때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갖춘 양심과 이성은 바로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너는 피조물이며, 하나님이 너를 택했으니 너는 마땅히 하나님을 위해 바치고 헌신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라는 것이다. 이 ‘마땅히’는 오직 네 양심과 이성이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느냐? 네 일 처리의 원칙과 방식은 무엇이냐? 네 패괴 성품을 너는 저버렸느냐? 해결했느냐? 이러한 것들은 앞에서 나온 ‘마땅히’와 관계가 없다. 마땅히 무엇을 하고,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한다는 등의 기초에 머무르면서 ‘마땅히’의 범위 안에서 살아갈 뿐이라면, 이는 양심과 이성의 작용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네 양심이 네게 ‘하나님은 나를 구원해 주셨어. 그러니 하나님을 위해 헌신해야 해. 하나님은 내 목숨을 구해 주시고, 두 번째 생명을 주셨어. 그러니 마땅히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해야 해.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나는 피조물이야. 그러니 마땅히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해야 해.’라고 말한다면, 이것이 양심과 이성의 작용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이 양심과 이성의 영향 속에서 생기는 갖가지 행동과 실행법, 태도, 관점은 그저 양심과 이성이 본디 할 수 있는 범위 안에 머물러 있을 뿐, 진리 실행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집에서 제게 본분을 이행하게 한 것은 저를 높여 준 것입니다. 게다가 먹을 것, 입을 것을 주고 머물 곳도 신경 써 주면서 제 삶의 구석구석을 돌봐 줍니다. 저는 이렇게 많은 하나님 은혜를 누렸으니 그 사랑에 보답해야 합니다. 본분을 이행할 때 하나님을 대충 건성으로 대해서는 안 되고, 방해하고 교란하는 일을 저질러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하나님 집에서 어떻게 안배하든 저는 순종하기 원하고, 무슨 일을 시키든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런 태도는 괜찮다. 이는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이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을 진리 실행으로 승격시킬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진리 실행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양심이 아무리 고상하고 이성이 아무리 정상적이더라도, 모든 일을 양심과 이성에 기대서 하면, 아무리 합당하고 봐줄 만하며 탄복을 자아낼 정도로 해냈더라도, 사람의 좋은 행위에 머물러 있을 뿐이고, 사람의 좋은 행위라는 범위로 규정될 뿐, 진리 실행에는 전혀 미치지 못한다. 네가 이성에 기대 사람들과 사귈 때 부드럽게 말하고, 남을 공격하지 않고, 화내지 않고, 강요하지 않고, 통제하지 않고, 괴롭히지 않고, 약점을 잡지 않는 것 등은 전부 정상 인성의 이성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것이 진리 실행과 관계가 있겠느냐? 관계가 없다. 이는 사람의 이성이 도달할 수 있는 부분으로, 진리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

어째서 양심과 이성에 기대 일을 처리하는 것과 진리 실행이 무관하다고 하겠느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네게 은혜를 베풀어서 네가 그와 사이가 좋은데, 그가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인 후 네게 복음을 전했다고 하자. 이는 하나님이 그를 통해 너에게 복음을 전한 것과 같다. 너는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을 받아들인 후 그에게 더욱 고마워서 늘 보답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 그에게 한발 양보하고, 그에게 무슨 말을 하든 예의를 차리며, 그에게 존중과 겸양, 관용의 태도를 보인다. 그가 어떤 나쁜 일을 하든, 그의 인품이 어떻든 너는 인내하고 포용해 주며, 심지어는 그가 어떤 어려움에 부딪혀 도움을 요청해도 무조건 그를 도와준다. 왜 그렇게 하겠느냐? 이는 무엇의 작용으로 나온 행동이겠느냐? (양심이 작용한 것입니다.) 이는 사람의 양심이 작용하여 나온 행동이다. 이 양심의 작용은 긍정적이라거나 부정적이라고 말할 게 못 된다. 그저 너라는 사람이 그래도 양심과 인성을 좀 갖추었으며, 누군가 너에게 은혜를 베풀면 고마워하고 보답할 줄 안다고 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았을 때, 너라는 사람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 하지만 진리로 가늠한다면 결론은 달라진다. 만약 그 사람이 악을 행해서 교회의 제명 대상이 되었는데도 네가 계속 양심으로 판단하면서 “그는 내게 복음을 전해 주었어. 그 은혜는 평생 잊지 못할 거야. 그가 없었으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테니까. 그가 지금 악을 행하기는 했지만, 나는 그를 폭로할 수 없어. 설령 그가 옳지 않은 일을 행했다는 사실을 알게 돼도 말할 수 없다고. 그는 내 은인이니까. 그에게 보답하지는 못할지언정 공격할 수는 없잖아. 다른 사람들이 윗선에 보고하겠다면 그러라지. 나는 가만히 있을 거야. 그의 상처에 소금을 뿌릴 수는 없어. 그랬다간 어떤 사람이 되겠어? 양심도 없는 사람이 되지 않겠냐고. 양심 없는 사람은 짐승 아니겠어?”라고 말한다면 어떻겠느냐? 이런 배경에서 양심이 어떤 작용을 하겠느냐? 양심의 작용이 진리에 어긋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이 일에서 알 수 있듯, 때로 양심의 작용이 감정에 얽매이고 흔들려 진리의 원칙에 어긋나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바로 양심의 작용은 진리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며, 어떨 때는 양심대로 행동해도 진리에 어긋날 수 있다는 점이다. 만약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에 근거하여 살아가지 않고 양심에 기대 행동한다면, 과연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어떨 때는 정말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 양심대로 행동하면 결코 틀릴 일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려면 양심대로 행동하는 것으로는 한참 부족하다. 진리에 근거해 행동해야 하나님의 요구에 도달할 수 있다. 네가 양심을 진리로 여겨 모든 것의 위에 둔다면, 진리는 어디에 놓겠느냐? 너는 양심으로 진리를 대신한 것이다. 이는 진리를 대적한 것 아니겠느냐? 진리에 맞선 것 아니겠느냐? 양심에 기대 살아가면 진리를 어길 수 있고, 진리를 어기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은 후에 양심을 기준으로 말하고 일하며, 양심에 기대 처신한다. 양심에 기대 일을 처리하는 것이 과연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겠느냐? 양심이 진리를 대신할 수 있겠느냐? 양심에 기대 일을 하는 것과 진리를 실행하는 것의 차이는 도대체 어디에 있겠느냐? 혹자는 늘 양심에 기대 일 처리하기를 고집하면서 자신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관점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양심의 느낌이 진리를 대신할 수 있겠느냐?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잘못을 저지른 것이냐? (진리에 어긋난 것으로, 하나님을 대적한 것입니다.) 그렇다. 그는 양심의 느낌을 진리와 동일시했는데, 그러면 진리에 어긋나기가 쉽다. 이런 사람은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언제나 양심을 기준과 준칙으로 삼으며 양심에 얽매이고 통제된다. 이와 동시에 그의 이성 역시 양심에 통제된다. 양심에 통제되었는데 진리를 구하고 진리대로 실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그럼 양심이 진리를 대신할 수 있겠느냐?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을 대할 때 양심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고, 양심을 진리로 여겨서도 안 된다면, 하나님을 대할 때 양심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옳습니까?”라고 묻는데, 이는 생각해 볼 만한 문제이다. 어쨌든 양심은 진리를 대신할 수 없다. 진리 없이 양심에 기대 하나님을 대한다면, 사람의 기준으로 볼 때는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준만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다. 기껏해야 진리를 어기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을 뿐이다. 어떤 사람은 “사람을 대할 때 양심적으로 행동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라고 하는데, 이 말이 과연 옳으냐? 도리나 이론상으로 보면 옳지 않다. 그렇지 않으냐? 그럼 진리로 판단하면 어떻겠느냐? 너희가 보기엔 옳으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양심으로 하나님을 대하라고 하더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무엇이더냐? 하나님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라고 요구했느냐? 네게 양심이 있다면, 진심은 있느냐? 양심은 있지만 진심은 없다면 그것은 안 된다. 하나님을 대할 때 진심이 있어야 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요구이다. 성경에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30)라는 구절이 있다. 하나님의 요구는 무엇이더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더냐? (사람의 진심입니다.) 그렇다. 하나님이 “너희는 너희의 양심과 이성을 다해서, 또 너희의 본능으로 나를 사랑해야 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더냐? 하나님이 그렇게 말했더냐?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말하지 않았겠느냐? (양심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양심은 무엇이냐? (인성의 최소 기준입니다.) 그렇다. 양심과 이성은 인성의 가장 기본적인, 최소한의 기준이다.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인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어떻게 판단하겠느냐? 무엇으로 판단하겠느냐? 가장 기본적인 최소 기준은 바로 그 사람에게 양심이 있는지, 이성이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인성을 지녔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다. 그럼 한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이냐?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지를 보려면 그에게 양심과 이성이 있는지를 보면 된다는 말이 진리겠느냐? 이 말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도대체 사람의 무엇이겠느냐? (진심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진심을 원한다. 그 진심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가더냐?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진심을 보여 주는 것이더냐? 기도할 때 입으로는 하나님께 진심을 바치겠노라 말하지만, 나중에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거나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진심이겠느냐? 그것은 진심이 아니라 기만이다. 그럼 이 진심이 드러나는 행위는 무엇이겠느냐? 구체적인 실행은 무엇이겠느냐? 알고 있느냐? 순종하는 태도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태도가 있는 것이 진심이다. 이것이 양심보다 훨씬 높지 않겠느냐? 사람의 양심과 이성은 진심과 근본적으로 다르며, 거리가 있다. 사람의 양심과 이성은 그저 사람의 생존과 정상적인 생활, 인간관계를 유지해 주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에 불과하다. 만약 양심과 이성을 잃는다면 사람은 가장 기본적인 생존이나 정상적인 생활, 인간관계조차 지속하지 못할 것이다. 양심과 이성이 없는 자 또는 악인과 사귀려는 사람이 있더냐? (없습니다.) 아무도 그들과 사귀려 하지 않는다. 그들과 사귀는 사람은 어떤 느낌을 받느냐? 역겹고 혐오스러운 느낌, 심지어는 두렵고 속박되고 결박되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사람은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조차 갖추지 못했다. 사람들조차 그들과 사귀려 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겠느냐? (구원하지 않으십니다.) 악인에게 원망을 사면 이런 말을 듣게 된다. “적절한 상황이 오면 나는 너를 죽이고 없애 버릴 것이다!” 그가 정말 그런 짓을 할 것인지와는 무관하게,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악인이라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 겁을 먹는다. 그러니 그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그에게 양심이나 이성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에게 인성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인성이 없는 그런 악인과 누가 감히 사귀려 하겠느냐? 그에게 정상적인 인간관계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의 인간관계는 어떤 상태겠느냐? 모두 그를 두려워하고, 그에게 제약당하고 속박된다. 그는 누구를 만나든 괴롭히며 짓밟고 싶어 한다. 이런 사람에게 정상 인성이 있겠느냐? 양심과 이성이 없는 이런 사람과는 아무도 사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정상인의 삶조차 영위하지 못하는 자는 마귀, 짐승과 같다. 그는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서 날뛰고 물어뜯으며 이 사람 저 사람 못살게 군다. 결국 모두 그를 멀리하고 피한다. 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이냐! 정상적인 인간관계조차 이루지 못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제대로 서지 못하는 자는 어떤 존재겠느냐? 이렇듯 인성조차 없는 사람이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겠느냐? (추구할 수 없습니다.) 인성이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짐승이자, 마귀이다. 하나님이 선포하는 진리는 짐승이나 마귀가 아닌 인류에게 베풀어 주는 것이다. 양심과 이성이 있는 자만이 사람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 너희가 다시 말해 보아라. 사람이 양심과 이성을 갖추면 정상 인성을 오롯이 살아 낼 수 있겠느냐? 아직은 힘들다고 할 수 있다. 사람에게는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진리를 추구해야만 패괴 성품을 없애고 정상 인성을 살아낼 수 있다. 혹자는 “저는 양심과 이성을 갖추었습니다. 제가 악을 행하지 않는 한 진리 실제가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는데, 이 말이 옳으냐? 사람이 양심과 이성을 갖추었다고 해서, 또 양심과 이성에 기대 살아간다고 해서 진리를 추구한다는 뜻은 될 수 없다. 그럼 양심과 이성은 대관절 무엇이더냐? 양심과 이성은 사람이 진리를 추구할 때 갖춰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인성의 상징이자 인품에 불과하다. 이 두 가지에 기대 살아간다고 해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아니며, 진리 실제를 갖추었다는 의미는 더더욱 될 수 없다. 방금 이야기한 사례로 봤을 때, 사람이 양심과 이성에 기대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면 진리와 원칙에 어긋나기 쉽다. 이는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기준에 한참 못 미친다. 그러므로 네가 아무리 양심을 갖추고 아무리 이성이 정상적이어도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지 않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지 않는다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양심과 이성이라는 본능의 범위 안에서 아무리 고난을 겪고 힘을 써도 너라는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방금 진리 추구에 대한 사람의 편견과 오해를 세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해부하였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그 세 가지 항목에는 어떤 것들이 있더냐? (첫째, 사람이 관념적으로 좋고 옳고 긍정적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진리로 보고 기준으로 삼아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와 하나님 말씀의 요구, 기준을 대신한 후 추구하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둘째, 사람이 그릇된 인식을 기반으로 욕망과 야심을 품고 하나님과 거래하며,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약속을 주실 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셋째, 양심과 이성에 기대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면 곧 진리를 실행하고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 세 가지를 제쳐 둔다면, 과연 진리 추구란 무엇이겠느냐? 진리 추구에 대한 정의로 돌아가 보자.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진리 추구란 무엇인지, 도대체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지 충분히 설명해 주고 있다. 일전에 진리 추구란 무엇인지에 관해 많이 얘기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겠느냐? 이에 관해서도 예전에, 그리고 지금 이미 많은 교제를 했다. 사람과 일을 바라볼 때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든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것이 바로 진리 추구이다. 이 말과 무관한 것들은 전부 진리 추구가 아니다. 물론,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것’이 사람의 패괴 성품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사람의 일부 사상과 관점, 관념을 겨냥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을 겨냥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진리의 원칙대로 실행할 수 있게 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순종하게 하기 위함이라면,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라면, 마지막에 이루는 성과 또한 당연히 그러할 것이다.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것’이라는 말은 매우 명확하고 분명하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사람에게 주는 길은 실행 과정에서 편견을 버리고 욕망과 야심을 내려놓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사람은 스스로 우월하고 인성과 양심, 이성이 있다는 생각에 가려 살면서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실행 원칙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 네게 어떤 이유가 있든, 어떤 장점과 특기가 있든,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것을 대신하기에는 부족하다.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이와는 반대로, 만약 네가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출발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다면, 또 진리를 실행 원칙으로 삼는다면, 진리를 실행하고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관념과 상상 속에서 살면서 거래하는 속셈으로 일을 처리하거나 늘 자신이 수많은 덕행을 갖추었다고 자처하면서 그것으로 진리 추구와 진리 실행을 대신하는 것은 전부 어리석은 행동이다. 그것은 전부 진리를 추구하는 모습이 아니며, 그렇게 하면 결국 진리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구원받는 길에 들어서지 못하는 결말을 맞이할 것이다. 이해했느냐? (이해했습니다.) 물론,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 중 구원받을 수 없는 자를 제외하고, 일부 사람은 기꺼이 봉사자가 되어 살아남으려 한다. 이것도 괜찮다. 그것 역시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것 이외의 좋은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구체적으로 어떤 길을 선택할지는 너희 자신에게 달렸다. “한참 교제하셨지만,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말씀하셨습니다.)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무엇을 근거로 해야 하느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해야 합니다.) 무엇을 준칙으로 해야 하느냐? (진리를 준칙으로 해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더냐? 진리는 어디에 있더냐? (하나님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척 많다.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이모저모를 전부 알려주었으니 여기에서는 자세하게 말하지 않겠다. 진리 추구란 무엇인지, 너희가 다시 한번 읽어 보도록 하여라. (진리 추구란 무엇인가?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것이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생명의 좌우명으로 삼아 수시로 생각하고 묵상하여라. 자신의 행위와 생활 태도, 일을 바라보는 관점, 속셈과 목적에 대조해 보면 네 실제 내적 상태와 네가 드러내는 성품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 똑똑히 느끼게 될 것이다. 그 후 다시 이 말씀에 대조해 보고 이 말씀을 실행의 원칙, 길, 방향으로 삼아 추구한다면, 이 말씀에 완전히 진입하고 이 말씀을 완전히 살아낼 때, 진리 추구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물론 이 말씀의 실제에 진입했을 때, 너는 이미 진리 추구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진리 추구의 길에 들어섰을 때의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너는 패괴 성품에 방해받고 통제되고 속박되는 번뇌가 날이 갈수록 적어질 것이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너는 패괴 성품을 해결할 길을 찾았으며, 구원받을 희망이 생겼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는 삶이 충실하고 평안하고 기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을 믿어도 여전히 삶이 몹시 공허하며, 의지할 곳이 없다. 심지어는 패괴 성품 속에서 사는 것이 더없이 고통스럽다고 항상 느끼게 되지만 벗어나려 해도 벗어나지 못한다. 시종일관 패괴 성품에 통제되고 속박되고 결박되어 마음이 몹시 힘든데 어떤 길도 보이지 않는다. 힘든 날이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여 구원받으면, 그 고통스러운 날들은 지나간다. 하지만 모든 성과는 너희가 나중에 추구하고 진입하는 것에 달려 있다.

2022년 1월 29일

성경은 개역한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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