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추구란 무엇인가(15) 제 3 부

앞에서 “군자의 말 한마디는 천금과 같다.”라는 사상 관점의 잘못된 점을 분별하고 분석했다. 이어서 사람의 언행 측면에서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지 살펴보겠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어떤 사람으로 살라고 요구하느냐? (정직한 사람으로 살라고 요구하십니다.) 맞다. 정직한 사람으로 살고, 거짓말하지 말고, 기만하지 말고, 간사하게 굴지 말고, 수단 부리지 말아야 한다. 일을 처리할 때 하나님 말씀과 진리 원칙을 구해야 한다. 아주 간단하다. 딱 이 몇 가지뿐이다. 말을 정직하게 하지 못한다면 스스로 고쳐야 한다. 허풍을 떨고, 거짓말을 하고, 주제넘은 소리를 했다면 스스로 반성하고 인식한 뒤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자신의 실제 상태와 마음속 인식, 그리고 사실에 부합하는 말을 해야 한다. 그 밖에 다른 사람에게 약속한 일은 할 수 있으면 하고, 할 수 없으면 빨리 상대에게 알려 줘야 한다. “미안한데 저는 잘 못할 것 같아요. 할 수도 없고요. 저는 그럴 능력이 없으니까 일을 그르치지 않으려면 얼른 도와줄 다른 사람을 찾아요.”라고 말이다. 꼭 뱉은 말을 지키고 신의를 지키려고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정직한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말과 행동이 정직해야 하며 거짓으로 꾸미거나 기만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매사에 진리 원칙을 구하면 된다. 이렇게 간단하다. 얼마나 쉬우냐. 하나님의 요구에 사람의 위장을 요하는 요소가 있느냐? 요구하는 수준이 너무 높아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고 사람이 본능을 뛰어넘게 하는 요소가 있느냐? (없습니다.) 네 자질로 할 수 없는 일, 네 이해 능력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일, 혹은 신체적 에너지와 체력이 부족해서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하나님은 힘닿는 데까지만 최선을 다하라고, 전력을 쏟아부었으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말한다. 너는 “이미 전력을 다했습니다만 하나님의 요구에 달하지 못했습니다. 제 능력은 이것밖에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만족하셨는지 모르겠어요.”라고 하겠지만, 사실 그 정도면 하나님의 요구에 달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무리한 짐을 지게 하지 않는다. 네가 백 근을 짊어질 수 있다면 하나님은 절대로 백 근이 넘는 짐을 네게 주지 않는다. 하나님은 네가 압박감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이렇게 대한다. 게다가 너는 무엇에도 구애될 필요가 없다. 그 누구에게도 구애될 필요 없고, 그 어떤 사상 관점에도 구애될 필요 없다. 너는 자유롭다. 어떠한 일이 임했을 때 네게는 선택할 권리가 있다.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해도 되고 네 개인적 의사에 따라 실행해도 된다. 물론 사탄이 네게 주입한 사상 관점을 고집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자유롭게 선택해도 된다. 단, 선택을 했다면 자기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하나님은 그저 네게 길을 알려 줬을 뿐, 반드시 어떻게 해야 한다고, 혹은 어떻게 해서는 안 된다고 강요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길을 알려 준 이후의 선택권은 너 자신에게 있다. 너는 충분한 인권과 선택권을 가졌다. 너는 진리를 선택할 수도, 사람의 의사를 선택할 수도 있으며, 당연히 사탄의 사상 관점을 선택할 수도 있다. 무엇을 선택하든 최종 결과는 너 혼자 감당해야 한다. 대신 감당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네가 선택하는 동안 하나님은 전혀 간섭하지 않으며 그 어떤 강제적인 일도 하지 않는다. 무엇을 선택하든 근거가 되는 것은 너의 의사이다. 네가 올바른 길을 택하고 진리를 택했다고 해서 마지막에 이르러 하나님이 너를 크게 칭찬하거나, 큰 이득을 보게 해 주거나, 네게 행복감과 본인이 대단히 고귀해진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 주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만약 네가 사람의 뜻을 택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곧장 네게 징계와 저주가 임하도록 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네가 사탄에게서 주입받은 사상 관점에 따라 행동하고 제멋대로 굴더라도 하나님은 곧바로 재난을 내려 너를 징벌하지 않는다. 네가 선택하는 순간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선택한 후에도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하나님은 그저 관찰할 뿐이다. 그 모든 일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고 그것의 발생 원인, 경과, 결과를 지켜본다. 물론,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사람을 평판하고 사람의 결말을 정할 때는 네가 개인적으로 매번 했던 선택에 따라 네가 걸은 길의 성질을 규정하고, 네가 걸은 길을 통해 네가 어떤 사람인지 종합해 보고, 네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고서 어떤 결말을 맞이해야 할지 규정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하나님이 사역할 때는 절대로 어떠한 의견, 논조, 사상 관점이 사람들 사이에서 일종의 기풍을 형성하게 함으로써 사람의 생각을 제한하고 통제하지 않으며, 그로 인해 사람이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요구대로 행동하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역하는 방식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충분한 자유와 선택할 권리를 준다. 사람은 충분한 인권과 선택권을 누릴 수 있다. 어떠한 환경이 임할 때마다 사람은 사탄의 사상 관점을 받아들여 일의 성질을 판별하고 판단할 수도 있고, 하나님 말씀과 진리 원칙에 근거해 일의 성질을 판별하고 판단할 수도 있다. 사실이 이렇지 않으냐? (맞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하는 일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다.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기 때문에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걷고, 진리를 얻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기고, 하나님께 진실로 순종할 수 있게 되어 구원받는다. 반면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 언제나 제멋대로 굴고 자기 뜻대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은 진리를 싫어해서 진리를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저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이 무섭고 하나님의 징벌이 임할까 봐 무서워서 마지못해 하나님 집에서 생색내기용 일을 조금 하고, 힘을 조금 쓰고, 좋은 행위를 조금 한다. 그들은 진리를 받아들이거나 하나님의 도를 준행해 본 적이 없으며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하는 길에 들어서지도 못했기에 항상 진리를 깨닫지도,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구원받을 기회를 놓치고 만다. 이러한 부류는 봉사자가 대부분이다. 악을 행하지도, 방해하고 교란하지도, 적그리스도나 악인처럼 하나님 집에서 도태되고 제명되지도 않았어도 결국 가까스로 ‘봉사자’라는 칭호나 얻을 수 있을 뿐,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 그조차 장담하기 어렵다. 그 밖에 또 다른 부류로는 사탄에게 속한 자들이다. 그들은 사탄에게서 온 각종 사상 관점을 완고하게 고집하면서 죽어도 진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죽을 각오로 진리 및 하나님 말씀과 대립한다. 더 나아가서는 모든 긍정적 사물 및 하나님과 양립할 수 없는 관계가 된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고, 악행을 수없이 많이 저지르고, 완전히 사탄 역할을 한 까닭에 누군가는 교회에서 제명당하고 누군가는 출교 처분을 받고 제적당한다. 어떤 사람은 제적과 출교 처분을 받지 않았다 해도 마지막에는 하나님에 의해 도태된다. 그들이 구원받을 기회를 잃는 것은 진리와 하나님의 구원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이르러 이 세상이 멸망될 때 그들은 사탄과 함께 멸망된다. 보아라, 하나님이 사역하는 방식은 이렇게나 자유롭고 모든 것을 흘러가는 대로 둔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역사하여 사람을 인도하고, 깨우치고, 돕는다. 때로는 일깨우고, 위로하고, 권면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 중 사람에게 널리 긍휼을 베푸는 부분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널리 긍휼을 베푸는 동안 사람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누리고 충분한 해방과 자유를 누린다. 무엇인가에 구애되는 느낌이나 무엇인가에 결박당한 느낌은 전혀 없었고, 어떠한 의견 혹은 사상 관점의 제한을 받는 느낌은 더더욱 없었다. 하나님은 한편으로 이렇게 사역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행정 법령과 규정, 각종 제도로 사람을 단속하고, 사람의 패괴와 패역을 책망하고 훈계하고, 심판하고 형벌한다. 더 나아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징계와 채찍질이 임하고, 하나님 말씀의 폭로와 질책 등등이 임한다. 그러나 사람은 이러한 것들을 누리는 동시에 하나님이 널리 베푸는 긍휼과 큰 진노도 누린다. 하나님이 가진 공의 성품의 또 다른 면인 큰 진노가 사람에게 나타날 때도 사람은 거기에 구애되고, 결박당하고, 제한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움과 해방감을 느낀다. 하나님의 공의 성품 중 어떠한 면이 사람에게 임하고 행해지든, 사람이 느끼는 것은 사실상 항상 하나님의 사랑이며, 사람에게 나타나는 성과는 항상 긍정적이다. 사람은 수확을 얻고, 당연하게도 최대 수혜자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사역한다. 아예 강요하지 않고, 강박하지 않고, 억압하지 않고, 결박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에게 해방감과 자유로움, 홀가분함과 유쾌함을 느끼게 한다. 사람이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이든, 아니면 공의와 위엄이든 결국 하나님에게서 얻는 것은 진리이다. 인생의 의의와 가치를 깨닫게 되고, 사람이 마땅히 걸어야 할 길과 사람됨의 방향 및 목표를 깨닫게 된다. 사람이 얻는 것이 너무나도 많다! 사람은 사탄의 권력 아래에서 살며 사탄에게 주입받은 각종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에 결박당하고, 제한당하고, 손상을 입는다. 그것은 몹시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스스로 거기에서 벗어날 힘이 없다.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왔을 때 어떤 태도로 하나님을 대하든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는 항상 변함이 없다.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이 바뀌지 않는 까닭이다. 하나님은 계속 진리를 선포해 자신의 성품을 드러내고 본질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람에게 역사함으로써 사람은 하나님의 자애와 긍휼을 충분히 누렸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위엄도 충분히 누렸다. 이러한 환경에서 사는 인류는 행복한 존재이다. 만약 이러한 환경에서도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못하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아 결국 진리를 얻지 못함으로써 구원받을 기회를 잃고, 심지어 일부는 징벌을 받고 사탄과 마찬가지로 멸망된다면, 이유는 오직 하나일 것이며 그것은 사실이기도 하다. 너희가 생각하기에는 어떤 사실일 것 같으냐? 사람은 본성에 따라서 각기 다른 길을 걷고 각기 다른 결말을 맞이한다. 최종적으로 각 부류 사람의 결말이 정해질 때가 바로 사람이 각기 부류대로 나누어질 때이다.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면 사탄이 아무리 많은 부정적 사물을 주입해도 마지막에 하나님이 말씀하고 역사할 때 그는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걷고자 한다. 만약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싫어하면 하나님이 아무리 많은 말씀을 해도, 하나님 말씀이 아무리 간곡해도, 하나님이 아무리 많은 사역을 하고 커다란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도,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싫어하는 성품이 사람의 내면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이 점은 변하지 않는다. 악인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는 단순히 진리를 싫어하는 것만이 아니라 본질이 사악하며, 진리를 증오한다. 그는 하나님과 대립하는 자이자 사탄 진영에 속한 자이다. 하나님을 믿더라도 결국에는 사탄에게 돌아간다. 이 세 부류의 사람은 똑같이 사탄에게 패괴되었고, 사탄의 각종 언사와 사상 관점에 미혹되고 제한당했다. 그런데 어째서 마지막에 어떤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냐? 주로 사람이 어떤 길을 걷는지, 그리고 과연 진리를 사랑하는지, 이 두 가지 측면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어떤 사람은 진리를 사랑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냐? 어째서 어떤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걸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걷지 못하며, 심지어 공개적으로 하나님에게 대들고 진리를 헐뜯는 사람도 있는 것이냐? 어째서 이런 것이냐? 본성 본질이 이를 결정하지 않느냐? (맞습니다.) 똑같이 사탄에게 패괴되었어도 사람의 본질에는 차이가 있다. 보아라, 하나님의 사역에는 지혜가 있지 않으냐? 하나님은 인류를 명확히 알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사람에게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를 준 것이냐? 어째서 강제적으로 주입하지 않는 것이냐? 하나님은 사람을 각기 부류대로 나누려 하고 모든 사람을 드러내려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하는 일에는 모두 원칙이 있다. 사람에게 어떤 사역을 하는지는 그 사람이 어떤 부류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의 부류는 무엇을 보고 알 수 있느냐? 무엇에 따라 갈리는 것이냐?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 사람이 걷는 길을 보고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냐? (맞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좋아하는 것과 사람이 걷는 길을 근거로 그 사람이 어떤 부류인지 구분한다. 그런 다음 사람의 부류에 따라 구원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를 결정하고, 구원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에 따라서 사람에게 그에 맞게 역사한다. 단것을 좋아하는 사람, 매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 짭짤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 새콤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칠 때, 다양한 음식을 놓아두면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할지 알려 주지 않아도 매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매운 것을 먹고, 단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단것을 먹고, 짭짤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짭짤한 것을 먹는 것과 같다. 사람에게 자유롭게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며 진리를 사랑할지, 어떤 길을 걸을지, 그 선택권은 본인 손에 쥐어져 있다. 그러나 사람이 마지막에 구원받을 수 있을지, 최종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사역에 원칙이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에는 원칙이 있다. 가장 큰 원칙은 사람이 추구하는 것과 걷는 길에 따라서 사람을 각기 부류대로 나누고, 모든 것을 흘러가는 대로 두는 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밝히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는 권병이 있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권병은 어디에서 나타나는 것인가요? 왜 하나님은 사람에게 강제적으로 주입하는 사역을 통해 권병을 나타내시지 않나요?” 하나님의 권병은 그렇게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사람이 하나님의 권병을 보게 하지 않는다.

이제 “군자의 말 한마디는 천금과 같다.”라는 덕행의 논조를 분별할 수 있게 되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도 깨달았느냐?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깨달았느냐?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기를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바로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일이 임하면 진리 원칙에 따라서 처리하고 위장하지 마라. 표면적인 행위에만 집중하지 말고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 네가 걷는 길이 옳고, 네가 추구하는 처신 원칙이 옳고,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에 부합하면 된다. 이것이 간단하지 않으냐? (간단합니다.) 사탄은 진리가 없고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않기 때문에 사람이 좋고 옳다고 생각하는 논조로 사람을 미혹한다. 사람에게 군자가 되고, 좋은 행위를 하고, 소인배가 되지 말고, 나쁜 짓을 하지 말라고 한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의 관념과 기호에 부합하기 때문에 사람이 쉽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사람은 금방 그것에 미혹된다. 그것이 사람에게 시키는 일은 그저 표면적인 좋은 행위에 불과하다. 네가 뒤에서 얼마나 나쁜 짓을 하든, 네 패괴 성품이 얼마나 심각하든, 네가 악인이든 아니든, 사탄이 만든 논조와 사탄의 요구에 따라서 겉모습만 잘 위장하면, 사람들 사이에서 좋은 사람으로 통하기만 하면, 너는 좋은 사람이 된다. 이 요구 기준은 명백히 사람을 부추겨 간사한 사람 혹은 나쁜 사람이 되게 하고, 가면을 쓴 채로 처신하게 하며, 바른길을 걷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탄이 사람에게 주입한 모든 사상 관점이 사람을 계속해서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날 하려는 사역은 사람에게 사탄의 온갖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에 대해 분별력을 심어 주어 그것을 간파하고 버릴 수 있게 한 다음 사람을 각종 잘못된 길에서 바른길로 데려오고, 사람이 원칙을 가지고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게 하는 것이다. 그 모든 원칙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진리 원칙이다. 사람이 진리 원칙을 깨달은 뒤에 그런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할 수 있게 되고, 진리 원칙의 실제에 진입하면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의 생명이 차츰차츰 사람의 내면에 만들어진다.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생명으로 삼으면 더는 사탄에게 미혹되어 잘못된 길, 사탄의 길, 돌아오지 못할 길로 향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사람은 사탄이 어떻게 미혹하고 패괴시키든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는다. 이 세계가 어떻게 변하든, 세월이 얼마나 흐르든, 사람이 생명으로 삼은 것이 하나님 말씀이기에 그 생명은 썩지도, 쇠망하지도 않는다. 생명이 썩지도 쇠망하지도 않기에 사람도 그 생명과 공존하며 쭉 살아간다. 이는 좋은 일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너무나도 큰 복을 누린다!

지금 너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냐? 바로 진리를 많이 갖추는 것이다. 진리를 많이 갖추고, 많이 듣고, 많이 체험하고, 많이 깨달아야만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하나님 말씀을 들어 근거로 삼을 수 있고, 진리 원칙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다. 이래야만 잘못된 길에 들어서지 않게 되고, 사람의 뜻과 사탄이 네게 주입한 사상 관점으로 하나님 말씀과 진리 원칙을 대체하지 않게 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너희에게 가장 중요한 일, 가장 급하게 해야 하는 일은 바로 진리를 갖추고 하나님 말씀을 많이 깨닫는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 말씀에 공을 들여야 한다. 하나님 말씀에는 아주 많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고, 진리 항목도 아주 많다. 각 항목의 진리를 서둘러 갖추어야 한다. 만약 이를 갖추지 않아서 일이 임했을 때 하나님 말씀을 들어 근거로 삼지 못하고 자기 뜻대로 처리한 결과 원칙을 어기고 과오를 남기게 된다면, 이는 곧 오점이다. 일이 임했을 때 진리를 구할 줄 모르고 그저 자기 뜻대로 처리하여 자기 목적을 이루고, 자기 뜻을 따르거나 개인적인 불순물이 들어 있는데도 어떻게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해야 할지,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자신과 대조해 봐야 할지 모르면, 자신을 인식할 수가 없고 진실로 회개할 수도 없다. 네가 진실로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에게 어떻게 보이겠느냐? 이는 성품이 강퍅하고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다. 너는 이 일로 또 오점을 하나 남기고 또 심각한 과오를 저지른다. 오점과 과오가 잔뜩 쌓이면 네게 이로운 점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이로운 점이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과오를 해결해야겠느냐? 앞서 “과오는 사람을 지옥으로 끌고 갈 것이다”라는 말씀을 선포했었다. 이는 곧 과오와 사람의 결말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사람은 어째서 항상 과오를 범하느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저는 그때 나쁜 짓을 할 생각이 없었어요.” 이것이 이유가 되느냐? 네가 그럴 생각이 아니었으면 과오가 아닌 것이 되느냐? 반성할 필요도, 회개할 필요도 없어지느냐? 고의가 아니었다면 과오이냐, 아니냐? 고의는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고 행정 법령을 거스른 것은 사실이 아니냐? (맞습니다.) 사실이라면 그것은 과오이다. 무슨 이유를 대도 소용없다. 네가 “저는 아직 어리고, 소양이 부족하고, 사회 경험도 별로 없습니다. 그게 잘못된 일이라는 걸 몰랐어요. 저한테 알려 주는 사람도 없었고요.”라고 하거나 “그때는 환경이 너무 위험했어요. 급한 마음에 그렇게 했던 거예요.”라고 한다고 해서 이것이 이유가 되느냐? 이러한 것들은 전부 이유가 못 된다. 네게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할 기회가 있었으면, 사실 진리를 구할 기회도 있었을 것이다. 너는 진리를 행동의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그렇다면 너는 왜 진리를 구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사람의 뜻에 따라 행하기를 택한 것이냐? 네가 진리를 너무 얕게 깨달았고, 평소에 진리 추구와 하나님 말씀을 갖추는 데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밖에 또 한 가지 원인, 한 가지 상황이 있는데 이 역시 사실이다. 즉, 너는 평소에 일을 처리할 때 마음속에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이 없고, 하나님 말씀이 네 마음속에서 주인 역할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너는 제멋대로 구는 것에 익숙하다. 습관적으로 너만 옳다고 생각하고, 무슨 일에서든 스스로 주인이 되고, 네 기호에 따라서 일을 처리한다. 네가 하나님에게 하는 기도는 그저 과정을 거치고 형식적일 뿐이다. 하나님 말씀은 네 마음속에서 지위를 얻지 못하고 주권을 잡지 못한다. 하나님은 네 마음속에서 지위를 얻지 못하고 주권을 잡지 못한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 자연스럽게 스스로 주인 노릇을 하다가 결국 진리 원칙을 어기면, 이것이 과오가 아니냐? 이미 모양이 형성되었으니, 그것은 과오이다. 이러한데 무슨 핑계를 대느냐? 그 어떤 핑계도 성립되지 않는다. 과오는 과오이다. 과오가 늘어나서 하나님 집의 이익과 교회 사역에 해를 끼치다가 결국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면 네가 구원받을 기회는 날아간다. 이것이 바로 “과오는 사람을 지옥으로 끌고 갈 것이다”의 정확한 말이며, 사실이 바로 이러하다. 이는 사람의 패괴 성품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사람의 패괴 성품 때문에 갖가지 행동 방식이 생기고, 사람의 갖가지 행동 방식이 사람이 걷는 길을 구성하고, 사람이 잘못된 길을 걸으면 본분을 이행하다가 중요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각종 과오를 범한다. 네 과오가 지나치게 많아지고 거듭 쌓이면 구원받을 기회가 사라진다. 사람은 왜 항상 과오를 범하느냐? 근본적인 원인은 사람이 아예 하나님 말씀을 갖추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혹은 하나님 말씀을 너무 적게 갖추었고, 일을 처리할 때 하나님 말씀이나 진리 원칙을 거의 근거로 하지 못해서 결국에는 항상 과오를 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과오를 범하고도 번번이 자신을 용서하며, 이유와 핑계를 댄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저는 좋은 의도였어요. 그때는 상황이 급박해서, 누구누구 때문에, 이런저런 객관적인 원인 때문에….” 무슨 원인이 있었든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일을 처리하지 않고, 진리를 준칙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으면 과오가 생기게 되며, 하나님을 대적하게 된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근거로 한다면 네 결말은 반드시 앞서 말했던 “과오는 사람을 지옥으로 끌고 갈 것이다”처럼 될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품이 지나치게 강퍅하고 불량기가 너무 심각한데, 언제나 일종의 요행 심리를 품고서 이렇게 생각한다. ‘자그마한 과오쯤은 별것 아니니 하나님께서 벌하지 않으셔.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인걸. 항상 사람을 너그럽게 용서하시고 인내하시지. 하나님의 날까지는 아직도 많이 남았어.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진리는 나중에 기회가 있을 때 추구하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꽤 간곡하고 절박한 투이기는 했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며 구원받을 기회는 아직도 많은걸.’ 그는 항상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절실한 심리도, 하나님을 몹시 원하는 마음도, 진리를 향한 갈망도 없다. 언제나 강퍅한 마음을 품고서 진리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하나님 말씀의 요구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와 내적 상태로 본분을 이행하면 결국 어떻게 되겠느냐? 과오와 오점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오점이 계속해서 나오고 과오가 끊임없이 생기는데도 정작 자기는 대충대충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이런 사람은 위험하다. 하나님이 지금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앞으로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이러한 내적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은 아주 위험하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보배처럼 사랑하지 않고, 구원받을 기회와 본분을 이행할 기회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더욱이 하나님이 그에게 마련한 모든 환경을 보배처럼 여기지 않는다. 언제나 해이하고, 대충대충 하고, 무슨 일을 하든 아무렇게나 하고, 방만하고, 정신이 딴 데 팔려 있다. 이러한 사람은 아주 위험하다.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잘한다는 착각에 빠져서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일을 처리할 때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하나님의 깨우침과 인도가 있어. 가끔은 하나님의 징계도 있고. 내가 기도할 때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셔!’ 하나님의 은혜는 풍성하기에 당연히 네가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고 결코 바닥나는 법이 없다. 하지만 그래 봤자 무슨 소용이냐? 하나님의 은혜는 진리를 뜻하지 않는다.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린다고 해서 진리를 갖춘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가엾게 여겨 아끼지만, 그렇다고 제멋대로 굴게 내버려두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과 피조물 하나하나를 가엾게 여겨 아끼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일하는 데에 원칙이 없다거나, 하나님에게 공의 성품이 없다거나,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고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너는 하나님이 한 번도 네게 노한 적이 없고, 네게는 항상 상냥하고 자상하며, 너를 몇 배로 보살피고, 아끼고, 소중히 여긴다고 느낀다. 너는 하나님의 온정과 공급, 도움을 느끼고 심지어 하나님의 편애와 은총도 느낀다. 너는 하나님이 누구보다도 너를 가장 사랑하며, 다른 사람은 버려도 너를 버릴 리 없다고 생각한다. 너는 자신에 차 있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생긴 것처럼, 더는 본분을 이행하면서 고생하고 대가를 치를 필요가 없는 것처럼, 성품 변화를 추구할 필요도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너를 버릴 일은 절대로 없을 것처럼 말이다. 네가 이렇게 자신하는 데에 하나님 말씀의 근거가 있느냐? 언젠가 네가 정말로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는 날이 오면 너는 당황할 것이다. ‘설마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건가?’ 그러면 네 결말이 어떨지는 너 스스로도 잘 알 것이다. 진리는 추구하지 않고 지나치게 독선적인 사람에게는 절대로 좋은 결과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이 사람을 보배처럼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고, 가엾게 여겨 아끼고,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심지어 사람 중 일부를 특별 대우하거나 일부에게 은총을 베푸는 목적 혹은 그 성질은 절대로 총애나 익애가 아니고, 네가 잘못된 길과 나쁜 길을 걷게 하려는 것도 아니며, 네가 진리와 참도를 등지게 하려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일을 하는 목적은 너를 붙들어 주어 바른길을 걷게 하고, 네가 하나님을 대단히 원하는 마음을 갖게 하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더욱 깊어져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기게 하는 것이다. 만약 네가 항상 하나님의 총애를 누리려고 하고 하나님의 애완동물이 되고자 한다면 나는 네가 틀렸다고 말할 것이다. 너는 하나님의 애완동물이 아니다. 하나님이 네게 은총을 베풀거나 너를 특별 대우하는 것은 절대로 총애나 익애가 아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일을 하는 목적은 네가 하나님 말씀을 보배처럼 사랑하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하에 굳세어지고, 각오와 의지력을 갖고서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걷고, 바른 인생길을 걷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확실하게 말하건대, 하나님이 이러한 진리를 선포할 때 공급과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사랑을 누린 네가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할 수 있고, 네 위치에 똑바로 서서 하나님 말씀을 많이 갖추는 한편 하나님 말씀을 더욱더 보배처럼 사랑할 수 있고, 본분을 이행하면서 진리 원칙을 구할 수 있고, 노력해서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에 이른다면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다. 반대로 네가 만약 하나님의 은총과 특별 대우를 이용하고, 하나님이 너를 가엾게 여겨 아끼는 것을 무시하고, 네 고집대로만 하면서 제멋대로 굴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면서 착각에만 빠져 있을 뿐 하나님 말씀을 갖추지 않고, 진리에 이를 의지도 없으며,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여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너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가 물거품이 되었을 때, 다시 말해 네가 언제나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릴 때, 너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 자비가 조만간 바닥나게 될 것이다. 네가 그것을 바닥내는 그날, 즉 하나님이 그 모든 은혜를 거두어 가는 날이 오면, 네가 하나님이 함께한다는 느낌조차 받지 못하게 되면, 너는 네 내면이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될 것이다. 내면이 어두워지고, 가라앉고, 불안해지고, 초조해지고, 공허해지고, 앞길이 막막하고, 겁이 나고, 두려운 나날을 보내게 된다. 이는 무서운 일이다. 그렇기에 사람은 하나님이 준 모든 것과 자기가 마땅히 이행해야 하는 본분을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워야 하는 동시에 보답할 줄 알아야 한다. 사실, 하나님이 네게 요구하는 보답이 하나님을 위해 대단한 공헌을 하라거나 하나님을 대단히 힘 있게 증거하라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네가 바른길을 걷는 것, 하나님이 걸으라고 한 길을 걷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이 누리기에 충분하다. 하나님은 그 은혜를 사람에게 베푸는 데에 인색하지 않고, 그 은혜를 사람에게 베푼 것을 후회하지도 않는다. 누구에게 은총과 축복을 베풀든 그것은 하나님이 기꺼이 원해서 하는 일이고, 모두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신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베푼 것을 전혀 후회하지도, 아까워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그 호의와 은혜를 모른 채 번번이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반복적으로 하나님을 실망하게 하고, 하나님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고 얼마나 오래 기다리든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의 고심을 알아주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만 최대한 많이 누리려 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얼마나 누리든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할 줄도, 마음을 하나님에게 돌려 드리거나 하나님을 따를 줄도 모른다고 치자. 말해 보아라. 사람이 하나님을 이렇게 대하면 하나님의 마음이 흡족하겠느냐? (흡족할 리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어떻게 진실한 태도를 보여야 하나님이 흡족하겠느냐? 회개하고 실질적인 행동을 해야 하며,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야 한다. 온갖 이유와 핑계만 붙들고 있지 마라. 하나님의 은혜와 관용, 인류를 가엾게 여겨 아끼는 마음은 네가 자신을 방임하는 데에 핑계나 근거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든, 사람을 위해 어떠한 심혈을 기울이든,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든, 궁극적인 목적은 오직 하나이다. 바로 사람이 바른길을 걷고 바른길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바른길이란 무엇이냐?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많이 갖추는 것이다. 사람이 걷는 길이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면 하나님이 너를 위해 치른 대가와 모든 기대가 보답받는다. 말해 보아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높으냐? (높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높지 않다. 게다가 하나님은 충분한 인내심과 사랑을 가지고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네가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면 하나님은 네게 고작 약간의 은혜와 축복만 베풀지 않는다. 진리와 생명 측면, 그리고 네가 걷는 길에서 너에게 공급하고, 너를 붙들어 주고, 인도한다. 하나님은 네게 더 크게 역사하려고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역을 하기에 앞서 하나님은 귀찮아하지도 않고 사람을 인도하며, 붙들어 주고, 사람에게 은혜와 축복을 베푼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처음에 품었던 뜻도, 특별히 원해서 하는 일도 아니지만, 어쩔 수가 없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이 ‘서럽더라도’ 사람을 위해 어떤 대가든 치르고, 모든 대가를 아끼지 않고 이러한 사역을 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이 모든 사역을 하면서 궁극적으로 사람에게서 보고자 하는 것은 사람이 돌아오는 모습이다.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깨닫고,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는지 깨달으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점을 인식하게 되고, 분량이 조금 생기고, 자라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공급받은 여러 진리를 참답게 대하기 시작하고, 공을 들이기 시작하고, 여러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은 기뻐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더 이상 사람과 함께하거나, 사람을 위로하거나, 일깨워 주거나, 권면하는 것처럼 단순한 일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대신에 진리와 생명 측면에서, 사람이 걷는 길 측면에서 사람에게 더 많이 공급하고, 사람에게 더 크고 구체적인 사역을 한다. 어째서 하나님은 이러한 사역을 하기를 더 좋아하겠느냐? 하나님이 이러한 사역을 하면서 사람에게서 희망을 보고, 사람의 미래를 보고, 사람과 하나님이 한마음 한뜻이 되는 것을 보면, 그것은 사람에게나 하나님에게나 모두 대단히 좋은 일이며, 하나님이 오랫동안 기대하던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 들어서면 사탄과 싸우고 굳게 서서 하나님을 증거할 힘과 실제적 분량이 차츰차츰 더 커진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또 한 명의 창조된 인류가 일어나 하나님을 위하여 사탄과 싸우는 것을 볼 가능성이 커진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사람은 분량이 커질수록 점점 더 굳세지고 간증이 생기며, 하나님을 점점 더 경외하게 되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된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이긴 자들을 얻을 희망이 생기고,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사람들 가운데서 영광을 얻을 희망이 생긴다는 뜻이다. 이는 좋은 일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대이자 하나님이 너희에게 바라고 희망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오래 기대한 일이기도 하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헤아릴 수 있다면 하나님이 요구하는 일에 공을 들이고 대가를 치를 것이며, 하나님이 하려는 일에 힘껏 협력하고, 하나님의 염원을 이루고, 하나님의 마음을 위로할 것이다. 네게 이럴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도 강요하지 않는다. 네가 “왜 저는 그럴 마음이 없죠? 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걸 해내고 싶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걸 해낼 생각만 하면 왜 마음이 거북하고, 불편하고, 순종하기 싫은 걸까요?”라고 말한다면 너는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을 해내지 않아도 된다. 이는 자기가 원해야 하는 일이다. 네게는 선택할 권리가 있다. 너는 자유롭고, 하나님은 사람에게 억지로 시키지 않는다. 너희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그저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는 사실과 너희가 짊어진 책임, 하나님의 기대를 너희에게 충분히 이해시키기 위해서이다. 이에 대해 확실하게 알았느냐? (네.) 확실하게 알았으면 되었다. 알았으면 사람의 마음속에 생각이 있을 것이요, 앞으로 어떤 방면으로 노력하고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지 마음속에 계산이 서고 방향이 정해졌을 것이다.

오늘은 “군자의 말 한마디는 천금과 같다.”라는 덕행의 논조를 교제했다. 앞서 사탄이 제창한 덕행 측면의 논조를 이미 몇 가지 교제했기에 이번 논조를 교제할 때는 분별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웠을 것이다. 덕행에 관한 어떤 논조든 대부분 사탄이 어떠한 의견을 이용해 사람의 행위를 속박하고 제약한 다음 사회에서 일종의 기풍을 형성하고, 기풍을 형성하는 것과 동시에 인류 전체의 생각을 미혹하고, 통제하고, 제한함으로써 인류 전체가 하나님과 대립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대립하게 한 이후, 사탄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모르고 사역할 수가 없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사탄은 이러한 목적을 이루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사탄이 이 모든 일을 저지른 것의 본질이다. 사탄이 제창하는 덕행의 논조는 어떤 측면의 행위 혹은 사상 관점을 대표하든 간에 전부 다 진리와 무관하다. 게다가 진리와 상충되기도 한다. 사탄이 제창하는 덕행의 논조를 사람은 어떻게 대해야 하겠느냐? 간단한 기본 원칙은 사탄이 내놓은 모든 의견은 우리가 폭로하고, 분석하고, 간파하고, 버려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사탄에게서 온 것인 이상, 마음속으로 밝히 알았다면 그것을 정죄하고 버릴 수 있다. 사탄의 것이 교회 안에 존재하면서 하나님 선민을 미혹하고, 패괴시키고, 교란하는 작용을 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선민이 사탄을 버리게 하고, 하나님 선민에게서 더는 사탄의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게 해야 한다. 대신에 하나님 말씀과 진리가 하나님 선민의 마음속에서 주인이 되고 생명이 되게 해야 한다. 그러한 인류야말로 하나님이 얻으려는 인류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교제하겠다.

2022년 7월 9일

클릭하세요! 하나님에게서 온 기쁜 소식이 당신과 당신의 가족에게 임할 것입니다.

카카오톡으로 대화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