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추구란 무엇인가(14) 제 4 부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덕행에 관한 말에는 분별이 필요한 부분이 하나 더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네게 부탁한 일이 네 에너지와 시간, 세월을 그리 많이 필요로 하지 않으며, 네 자질로 이를 수 있는 범주 안에 있다면, 또는 네게 적당한 환경과 조건이 갖춰져 있다면 양심과 이성에서 출발하여 힘닿는 데까지 도와주고, 과하지 않고 선을 벗어나지 않은 타인의 요구를 충족시켜 줘도 된다. 하지만 그가 부탁한 일이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하며 네 세월을 많이 빼앗아 간다면, 심지어 그 일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네 평생의 책임과 의무, 네가 이행해야 할 피조물의 본분이 무로 돌아가고 그런 일로 대체된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마땅히 거절해야 한다. 그것은 네 책임이나 의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평생 짊어지는 책임과 의무 중 부모를 봉양하고 자식을 키우며 사회와 법률의 테두리 안에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 외에 가장 중요한 것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데 에너지와 시간, 세월, 인생을 쏟아야 하는 것이지 누군가가 부탁한 일로 시간과 에너지, 세월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창조하고 생명을 주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하고 책임을 다하도록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은 하나님의 부탁이다. 오직 하나님의 부탁만이 진정한 부탁일 뿐, 다른 사람의 부탁을 수락하는 것은 전부 본업에 충실하지 않은 것이다. 누구든 네게 자신이 부탁한 일을 위해 충성과 에너지와 세월을 바치라고, 나아가 네 청춘과 일생을 바치라고 요구할 자격이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에게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라고 요구할 자격이 있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어떤 사람이 부탁한 일이 네 시간과 에너지, 세월을 너무 많이 허비하게 하여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데 영향을 끼치며, 심지어는 올바른 인생길을 걸어가는 데 지장을 주고, 네 인생의 방향과 목표를 바꿔 놓는다면, 그것은 네게 좋은 일이 아니라 재앙이다. 만약 그것이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하고, 나아가 네 청춘을 빼앗아 가며, 네가 진리와 생명을 얻을 기회를 박탈한다면 그런 성질에 속하는 모든 부탁은 단순히 어떤 사람에게서 나온 게 아니라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이 일은 이렇게 이해하면 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네게 부탁을 했는데 그 일이 네 시간과 에너지를 너무 많이 필요로 하고 빼앗아 간다면, 심지어 네 청춘과 일생을 바치게 하고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시간까지 빼앗아 간다면, 그자는 네 친구가 아님은 물론이요, 네 적, 원수라고까지 할 수 있다. 너는 하나님이 준 부모, 자녀, 가족들에게 평생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 외에 모든 에너지와 시간을 오직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데 바치고 써야 한다. 그 누구도 네게 어떤 일을 부탁한다는 핑계로 네 시간과 에너지를 독점하고 빼앗아 갈 자격이 없다. 만약 네가 권유를 듣지 않고 어떤 사람의 부탁을 받아들여 많은 시간과 에너지, 세월을 소모한다면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시간은 상대적으로 줄어들 것이며, 심지어 빼앗기고 점유될 것이다. 본분을 이행하는 시간과 에너지, 세월을 빼앗겼다는 것은 어떤 의미겠느냐? 진리를 추구할 기회가 줄어들었다는 의미이다. 진리 추구의 기회가 줄어들었다는 것은 구원받을 확률이 줄어들었다는 것과 같은 말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네게 행복한 일이겠느냐, 아니면 재앙이겠느냐? (재앙입니다.) 분명히 재앙이다. 이는 다음의 상황과 같다. 한 여자아이가 남자 친구를 사귀었는데 그가 “너는 하나님을 믿어도 되지만, 반드시 나를 기다려 줘야 해. 내가 출세해서 돈을 벌고 지위를 얻어 너를 위해 집과 차, 커다란 다이아 반지를 사게 되면 그때 너와 결혼할게.”라고 말했다고 해 보자. 여자아이가 “그럼 나는 그 몇 년 동안 일단 하나님을 믿거나 본분을 이행하지 않을게. 먼저 너랑 같이 노력해야겠다. 네가 돈을 벌어서 잘나가는 사장이 되고 소원을 성취하면, 나는 그때 본분을 이행하러 갈게.”라고 말한다면, 이 여자아이는 똑똑한 것이겠느냐, 아니면 어리석은 것이겠느냐? (어리석은 것입니다.) 너무도 어리석다! 그가 출세하도록 도와서 돈과 권력, 명예와 이익을 얻게 해 주면, 네가 잃어버린 세월을 누가 보상해 주겠느냐? 너는 피조물이 이행해야 할 본분을 이행하지 못했다. 그 손실을 누가 보상하고 메워 주겠느냐? 또 너는 하나님을 믿는 몇 년 동안 얻어야 할 진리와 생명을 얻지 못했다. 그 진리와 생명은 또 누가 보상해 준단 말이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추구하기는커녕 다른 이의 부탁과 바람,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서 몇 년의 세월을 허비한다. 하지만 결국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본분을 이행하며 진리를 얻을 기회를 놓쳐 하나님께 칭찬받지 못한다. 이 손실과 대가는 너무도 크다! 다른 사람의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좋다’는 말을 듣기 위해, 인품이 고상한 사람, 신용이 있고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기 위해, 또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을 실천하기 위해 하나님 믿기를 포기하고 피조물의 본분 이행을 포기하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일 아니겠느냐? 또 어떤 사람들은 양다리를 걸친다. 한편으로는 사람을 만족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에너지를 나눠 얼마간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남의 비위를 맞추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에게 잘 보이려고 한다. 그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사람은 만족시켰지만 피조물의 본분은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하게 된다. 네가 입은 손해는 너무도 크다! 너는 다른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함으로써 그로부터 좋은 평가를 듣고, 신용이 있고 덕행이 고상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진리를 얻지 못했고,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했으며, 열납되지도 못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한 바가 아니며, 사람에게 맡긴 일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네가 다른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은 외도에 속하며, 본업을 소홀히 한 것이니 어떤 가치도, 의미도 없다. 이는 결코 기억할 만한 선행이 아니다. 너는 다른 사람을 위해 많은 에너지와 시간, 세월을 들였지만 하나님께 기억되기는커녕 진리를 추구할 최적의 기회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소중한 세월을 잃어버렸다. 처음으로 돌아가 진리를 추구하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려고 할 때는 나이가 들어 에너지도, 체력도 쇠한 데다가 병까지 걸려 있을 텐데, 여기에 의미가 있겠느냐? 또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겠느냐? 남은 그 세월을 진리 추구와 피조물의 본분 이행에 쓰기란 무척 힘들 것이다. 체력이 딸리고 기억력도 떨어지며 에너지도 부족할 테니 말이다. 예배 때면 수시로 졸고, 본분을 좀 이행하려고 해도 늘 난관에 봉착하며 병에 시달릴 테니, 그때는 후회하게 된다. 네가 남에게 부탁을 받고 최선을 다한들 상대에게서 무엇을 얻겠느냐? 기껏해야 상대를 회유하고 좋은 평가를 들을 뿐이다. 사람의 좋은 평가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것이 하나님의 인정을 의미하겠느냐?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러니 사람의 좋은 평가는 한 푼 값어치도 없다. 좋은 평가를 듣기 위해 그렇게 큰 고통을 겪고, 또 구원받을 기회를 잃어버리는 게 가치가 있겠느냐? 그러니 사람은 지금 무엇을 깨달아야겠느냐? 누가 네게 부탁을 하든, 어떤 일을 부탁하든 그것이 피조물의 본분 이행이나 하나님이 네게 맡긴 부탁과 관련이 없다면, 너에게는 거절할 권리가 있다. 그것은 네 의무가 아니고, 더욱이 네 책임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만약 제가 거절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저를 보고 덕행이 부족하다고, 친구라고 할 수 없고 의리도 없다고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데, 그런 것을 염려한다면 가서 그 부탁을 들어주어라. 그리고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 보아라. 또 어떤 이는 다른 사람이 부탁한 일을 다 끝내지 못했는데 본분 이행으로 인해 그 부탁을 계속 들어줄 수 없게 되면 이렇게 고민한다. ‘이 일을 중도에 그만두는 건 좋지 않아. 사람으로서 신용이 있어야지. 시작이 있었으면 끝도 있어야 하는 법이라고. 용두사미가 되어서는 안 되잖아. 내가 해 주겠다고 한 일을 중간에 그만두면 상대한테 뭐라고 말하겠어? 그건 너무 품격이 없는 거야!’라고 말이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체면을 내려놓지 못하겠다면, 그 사람을 위해 일을 처리해 주어도 된다. 일을 다 처리한 후에 네가 무엇을 얻었는지, 그 신용을 지키고 그런 품격을 가진 것이 과연 가치가 있는지, 큰일에 지장을 주지는 않았는지 살펴보아라. 만약 그 일이 네 본분 이행에 지장을 주고 진리를 얻는 데 영향을 미쳤다면, 너는 거기에 목숨을 건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만약 네가 그 덕행 측면의 말과 요구를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 굴레와 결박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그것들을 분별하고 그 본질을 꿰뚫어 보며 그것들을 저버리기로 마음먹고 그런 것에 기대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 덕행 측면의 말이 가져오는 굴레와 결박에서 벗어날 희망이 있을 것이며, 피조물의 본분을 잘 이행하고 진리를 얻을 희망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많이 교제했는데, 이제 사람의 덕행을 판단하는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과 기준이 좀 분별이 되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정리해 보겠다. 이 말의 옳고 그름을 몇 가지 측면에서 분별해야겠느냐? 첫째, 단언컨대 이 말은 하나님 말씀과 진리에 부합하지 않으며, 사람이 지켜야 할 진리 원칙도 아니다. 그럼 이 일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누가 부탁을 하든, 너에게는 “저는 당신을 돕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거절할 권리가 있다. 만약 그 당시에는 그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해도 이제 깨달음을 얻어 그 부탁을 들어주고 싶지 않다면, 들어줄 필요도 의무도 없다고 여긴다면 그 일은 거기에서 마무리 지어라. 이는 하나의 실행 원칙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즉, “아니요.”라고 말하며 거절해도 된다. 둘째,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은 어디에 문제가 있느냐? 만약 네가 받은 부탁이 간단한 일, 겸사겸사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귀고 교제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니 최선을 다한다느니 인품이 고상하다느니 등을 논할 계제가 못 된다. 그것은 한 사람의 덕행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남을 도와 사소한 수고를 했다고 해서 덕행과 신용이 있다는 의미가 될 수 있겠느냐? 꼭 그렇지는 않다. 어쩌면 그 사람은 배후에서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많은 악행을 저질렀는데, 남을 도와 사소한 수고를 했다고 해서 인품이 고상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례는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을 무너뜨린다. 그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며, 한 사람의 덕행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도 없다. 이는 평범한 일에 대한 대처법이다. 그럼 특수한 일은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만약 네가 받은 부탁이 특수한 큰일, 네 능력 범위를 벗어나는 일, 무척 힘들고 고생스럽게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일이라면 거절해도 된다. 난감해할 필요가 없다. 이 밖에, 만약 누가 너에게 불합리하고 불법적인 일, 타인의 이익에 해가 되는 일을 부탁한다면 더더욱 도와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주로 무엇을 분별해야겠느냐? 한 측면으로는, 남이 부탁한 그 일이 네 책임과 의무인지, 네가 받아들여야 하는 일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다른 측면으로는, 그 일을 받아들인 후 처리하든 처리하지 않든, 잘 처리하든 잘못 처리하든 그것이 최선을 다하는 것이나 사람의 인품과 관계가 있는지가 분별의 초점이 된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네가 부탁받은 그 일이 어떤 성질을 띠는지, 합리적이고 합법적인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이 세 가지 측면에서 분별해야 할 것이다. 그럼 방금 교제한 내용을 묵상하고 정리하여 너희의 생각과 관점을 말해 보아라.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덕행의 말에 관한 제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사람은 남의 부탁을 들어줄 의무가 없으니 거절해도 됩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지니는 권리입니다. 그다음, 남의 부탁을 받아들였다고 할지라도 처리하든 처리하지 않든, 잘 처리하든 잘못 처리하든 그것이 인품과 관련이 없으며, 사람의 인품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부탁받은 일이 법을 어기고 죄를 짓는 것이라면 더더욱 들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부탁을 들어준다면 그것은 악행에 속하며, 징벌받을 것입니다. 이 몇 가지를 통해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관점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무엇이 잘못되었겠느냐? 먼저, 사람에게 이런 일을 대하고 처리하도록 요구하는 이 말의 원칙이 잘못된 것이다. 또한, 이 말로 한 사람의 덕행을 판단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이 밖에도, 이 말로 한 사람의 덕행을 판단하고, 사람을 결박하고 속박하는 한편, 사람을 이용하여 일을 처리하게 함으로써 상대가 시간과 에너지, 대가를 지불해 가면서 남을 위해 이행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원치 않는 책임을 다하게 하는 것은 사람에게 일종의 굴레이다. 그러니 이 또한 잘못된 것이다. 이 몇 가지 잘못된 점은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의 존재 가치와 정확성을 무너뜨린다. 간단하게 정리해 보겠다. 첫째,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은 다른 사람의 부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려 준다. 즉, 누군가가 네게 부탁을 하면 그 일이 합리적인지 비합리적인지,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상관하지 말고 부탁을 받은 이상 신용을 지켜야 하고 그 일을 제대로 잘 처리하여 상대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신용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이 말은 사람이 분별없이 이렇게 실행하게 한다. 이것이 첫 번째 잘못된 점으로, 원칙을 어긴 문제이다. 둘째,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을 실행할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덕행을 판단한다면, 그 판단 기준 또한 잘못된 것 아니겠느냐? 만약 누군가에게 나쁜 일, 악행을 부탁받아도 최선을 다한다면, 이 사회는 혼란스러워지지 않겠느냐? 셋째, 늘 이 말을 사람의 덕행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는다면 자연히 일종의 사회적 분위기, 사회적 여론, 사회적 압박이 형성되어 사람의 사상을 결박하고 속박하게 될 것이다. 이는 어떤 결과를 야기하겠느냐?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과 이런 사회적 여론이 존재하기에, 너는 사회적 압박에 어쩔 수 없이 이런 일이 임했을 때 그렇게 행동해야만 한다. 네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스스로 원한 것이 아니고, 네 능력 범위 안에서 행동하는 것도 아니며, 네 의무를 다하는 것도 아니다. 너는 부득불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네 내면 깊은 곳의 필요도, 정상 인성의 필요도, 정 유지에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인 압박이 야기한 것으로, 도덕적 굴레이다. 만약 네가 다른 사람의 부탁에 승낙만 하고 막상 행동하지는 않는다면, 네 부모나 가족, 동료, 친구는 너를 질책하며 “이게 뭐니? 대체 뭘 한 거야?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도 있잖아. 승낙은 해 놓고 왜 안 하는 거야? 들어주기로 했으면 지켜야지!”라고 말할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너는 꿀리는 데가 있어 순순히 그 부탁을 들어주러 간다. 부탁을 들어주고 싶지 않고, 그런 능력도 없으며, 그 일을 처리할 수 없음에도 억지로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온 가족이 너를 도와 적잖은 돈과 에너지를 소모하고 고생을 하면서 간신히 그 일을 마무리 짓는다. 너에게 부탁을 한 사람은 기분이 좋겠지만, 너는 마음속으로 온갖 고통을 겪은 터라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다. 기꺼운 마음에서 우러나온 게 아니라고 할지라도 너는 그 일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다음번에 비슷한 일이 닥쳐도 너는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너는 체면을 중히 여기고 허영심이 강하며, 여론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너를 질책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신을 질책할 것이다. ‘부탁을 들어주기로 해 놓고 가만히 있다니, 무슨 짓이야? 나조차도 나 자신이 별 볼 일 없어 보여. 이건 도덕성이 없는 것 아니야?’라며 너 스스로를 옭아매니, 네 사상은 이미 속박당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실 그 일은 너와 아무 상관도 없다. 그 일을 해 봤자 어떤 이익이나 도움도 얻지 못하니, 안 해도 전혀 상관이 없다. 그저 몇몇 사람에게 질책을 들을 뿐이다. 그게 또 뭐가 어떻단 말이냐? 그것은 네 운명을 조금도 바꾸지 못한다. 다른 사람이 네게 어떤 요구를 하든, 그것이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거절해도 된다. 위의 세 가지에 근거하여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을 해부했는데, 이 말의 본질이 분명히 파악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누군가에게 부탁을 받을 때 지켜야 할 원칙은 무엇이냐? 실행 원칙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진리 측면의 근거는 무엇이냐? 방금 나는 가장 중요한 점을 이야기했다. 즉, 사람은 평생 부모를 봉양하고 자식을 키우며 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 외에 다른 사람이 부탁한 일을 들어줄 어떤 의무도 없으며, 누군가가 부탁한 일을 위해 살아가야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가치와 의미는 오직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데 있다. 이것 외에는 누구를 위한 일도 전혀 의미가 없으며, 전부 헛수고이다. 그러므로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은 다른 사람에 대한 강요이지 하나님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이 말은 절대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너를 이용하고 도덕적으로 옭아매고 통제하고 결박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하나님의 부탁이나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과 전혀 관계가 없다. 이해했느냐? (이해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전체 우주에서 피조물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부탁, 사람의 본분에 충성하는 것 외에 네가 충성을 바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나 사람은 없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은 처신의 원칙이 아니라 잘못된 것이고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네게 부탁을 한다면 어떻게 실행해야겠느냐? 네가 받은 부탁이 약간의 수고만 하면 되는 일이라면, 간단히 몇 마디 하거나 조금만 움직이면 끝낼 수 있는 일, 네 자질로 해낼 수 있는 일이라면 인성과 사랑 차원에서 출발해 도와줘도 된다. 이는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다. 이것이 첫 번째 원칙이다. 하지만 상대가 부탁한 일이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하고, 심지어 많은 세월을 허비하게 한다면 네게는 거절할 권리가 있다. 설령 상대가 부모라고 할지라도 네게는 거절할 권리가 있으니 그에게 충성을 다하거나 그가 부탁하는 일을 들어줄 필요는 없다. 이는 네 권리이다. 이 권리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느냐? 하나님이 네게 준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원칙이다. 세 번째 원칙은 다음과 같다. 만약 누군가가 네게 어떤 일을 부탁했는데 그것이 많은 시간과 에너지, 세월을 필요로 하지 않을지라도 네 본분 이행에 교란과 영향을 주거나 본분 이행의 다짐과 하나님에 대한 충성을 망쳐 놓는다면 마땅히 거절해야 한다. 또한, 네가 부탁받은 일이 진리 추구에 영향을 미치거나 네 진리 추구의 다짐과 발걸음을 교란하고 방해하여 중도에 그만두게 한다면 더더욱 거절해야 한다. 네 본분 이행과 진리 추구에 영향을 주는 일이라면 다 거절해야 한다. 이는 네 권리이다. 너에게는 “아니요.”라고 말할 권리가 있으니 그 일을 위해 시간과 에너지, 세월을 소모할 필요는 없다. 본분을 이행하고 진리를 추구하고 구원받는 데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고 이로움도, 도움도 안 되는 일은 다 거절해도 된다. 이것이 원칙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원칙이다. 그럼 이 몇 가지 원칙에 근거하여 판단했을 때, 사람이 인생에서 받아들여야 할 부탁은 오직 어디에서 오겠느냐?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그렇다.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온다.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말은 상대적으로 좀 공허하고 요원하다. 실제로 그 부탁은 무엇이어야겠느냐? (본분이어야 합니다.) 그렇다. 바로 네가 교회에서 이행하는 본분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네게 직접 “가서 복음을 전하거라.”라든가 “가서 리더가 되어라.”라든가 “가서 문서에 관한 사역을 하여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직접 너에게 알려 주지는 않지만, 하나님 집의 안배를 통해 네게 본분을 맡긴다. 하나님 집의 안배는 전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고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직접 네게 알려 줄 필요가 있겠느냐? 하나님이 주재하고 지배하는 이 모든 사람과 일, 사물을 너는 이미 체험하여 진실로 느꼈다. 네가 체험한 이런 것은 하나님의 사역과 경륜, 진리와 관계가 있다. 이것이 바로 피조물의 본분 아니겠느냐? 이는 부탁을 받아들이는 측면에서 바라본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사람이 마땅히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이 맡긴 부탁 외에 다른 일은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에게 일편단심 충성을 바치라고 할 자격이 있으며, 사람은 그럴 자격이 없다. 네 조상이나 부모, 고위 상사를 포함한 모두가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그런 자격이 없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여기에는 최고의 진리가 있다. 즉,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충성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 진리를 분석할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는 없다. 사람의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으며, 피조물이 창조주께 충성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최고의 진리이니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깨달아야 할 진리는, 사람이 하나님께 충성하고 하나님에게서 얻는 것은 전부 진리, 생명, 길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얻는 것은 더없이 풍성하고 풍족하며 넉넉하고 가득하다. 사람이 진리와 생명, 길을 얻으면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네가 하나님께 충성하면서 바치는 시간과 에너지, 대가는 모두 긍정적인 보답을 받을 것이며, 너는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20~30년간 따른 사람들도 있고, 3~5년, 혹은 10년 가까이 따른 사람들도 있다. 나는 대다수가 후회하지 않고, 많든 적든 어느 정도 수확을 얻었으리라 믿는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따르면 따를수록 자신에게 부족한 점이 너무 많다고, 진리는 정말 소중하다고 생각하면서 진리를 추구하겠다는 의지가 점점 더 커질 것이다. 또 너무 늦게 받아들였다고, 3~5년, 혹은 10년 더 일찍 받아들였다면 얼마나 많은 진리를 깨달았겠냐고 생각할 것이다! 지금 어떤 사람들은 너무 늦게 받아들인 것을 후회하고, 하나님을 믿는 몇 년 동안 진리를 추구하지 않은 채 헛되이 세월 보낸 것을 후회하고, 그동안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요컨대, 사람이 하나님을 얼마나 오래 믿었든 다 얼마간 수확을 얻었고, 진리 추구가 너무도 중요하다고 느낀다. 이것이 두 번째이다. 즉, 사람은 하나님께 충성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진리와 길과 생명을 얻고 구원받아 사탄의 권력 아래에서 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 만약 사람이 영원히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다면, 마지막에 어떤 종착지를 맞이하겠느냐? (구원받고 살아남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면서 마지막에 구원받으면 침륜과 멸망에 빠지지 않고 새로운 인류가 되어 살아남는 종착지를 얻게 된다. 즉, 계속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이 계속 살아가면 하나님을 볼 희망이 있으니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냐! 하나님께 충성하는 일에서 사람이 이 세 가지 진리를 깨닫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사람을 따르고 사람에게 충성한다면 어떤 좋은 점이 있겠느냐? 사람에게 충성하면 상대는 너를 덕행이 훌륭한 자라고 말할 것이고, 너는 높은 명성을 얻게 될 것이다. 겨우 이 정도의 좋은 점이 있을 뿐이다. 진리 생명을 얻을 수 있겠느냐? 결코 얻을 수 없다. 네가 어떤 사람에게 충성하면 그는 네게 무엇을 주겠느냐? 기껏해야 그가 출세할 때 덕을 좀 볼 뿐이다. 그렇게만 되어도 훌륭하다. 겨우 이 정도이다. 그것이 또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 그것 역시 공허하지 않겠느냐? 진리와 무관한 것들은 아무리 많이 얻어 봤자 소용이 없다. 이 밖에, 네가 사람을 따르고 사람에게 충성하면 상대의 희생양, 부장품으로 전락하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 네가 충성하는 그 사람이 바른길을 걸어가지 않는다면, 그를 따르는 너는 어떻게 되겠느냐? 바른길을 걸어갈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를 따르는 너 역시 바른길을 걸을 수 없다. 너는 그를 따라 악을 행할 것이며, 지옥에 떨어져 징벌받을 것이다. 그럼 끝장이다. 네가 어떤 사람에게 충성하면, 설령 좋은 일을 숱하게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다. 네가 마왕이나 사탄, 또는 적그리스도에게 충성한다면 사탄의 앞잡이, 조력자에 속할 것이며, 사탄을 위해 부장품이나 희생양이 되는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이방인들은 “임금을 모심이 마치 호랑이 곁에 있는 것과 같다.”라는 말을 한다. 마왕에게 아무리 충성해도 그것은 결국 너를 이용한 후 삼켜 버릴 것이며, 너를 희생양으로 삼을 것이다. 네 보잘것없는 목숨은 한 치 앞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왕과 사탄에게 충성한 결과이다. 마왕과 사탄은 영원히 네게 올바른 인생의 방향과 목표를 가리켜 줄 수 없고, 네가 올바른 인생길을 가도록 인도하지도 못한다. 또 너는 그것에게서 절대 진리나 생명을 얻을 수 없다. 네가 그것에게 충성한 결과는 그것과 함께 파멸을 맞이하여 그것의 부장품이 되거나 그것에 의해 곤경에 빠지고 해를 입고 삼켜지는 것이다. 다 지옥에 떨어지는 결말이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든, 그가 명인, 위인, 어떤 대단한 인물이든 그에게 충성하거나 인생을 바칠 가치는 없다. 그는 그렇게 할 자격이 없으며, 네 운명을 지배하고 조종할 능력도 없다. 이 진리 원칙을 이해한다면 사람을 따르고 사람에게 충성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이 네게 부탁한 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관해 실행해야 할 세 가지 원칙이 있다. 사람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의 가치와 의미에 관해서도 세 가지를 교제하였다. 전부 이해했느냐? (네.) 어쨌든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을 해부하는 목적은 너희가 이 말의 황당함과 그릇됨을 깨닫고 이 말을 내려놓게 하는 데 있다. 하지만 내려놓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일에서 사람이 갖춰야 할 실행 원칙과 하나님의 뜻까지 이해하고 파악해야 한다.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덕행의 말에 관한 주요 내용은 기본적으로 이렇다. 다만 서로 다른 몇 가지 측면과 입장에서 해부한 후, 하나님이 사람에게 알려 준 실행 원칙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사람이 깨달아야 할 진리는 무엇인지 등을 구체적으로 교제했을 뿐이다. 이러한 것들을 이해했다면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덕행에 관한 말을 어떻게 분별해야 할지 기본적으로 파악한 것이다.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측면의 화제를 분석하는 것은 사실 간단해서 사람이 분별하고 인식하기 쉽다. 이 말 역시 도덕가들이 제시한, 사람을 마비시키고 사상을 미혹하며 정상적인 사유를 교란하는 말이다. 이 말은 정상 인성의 양심에서 비롯된 것도, 정상 인성의 이성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더욱이 정상 인성의 필요에서 온 것도 아니다. 이런 것들은 소위 사상가, 도덕가들이 내놓은 외식하는 말로,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헛소리에 속하고, 더욱이 부도덕하다. 어째서 부도덕하다고 하겠느냐? 이는 정상 인성의 필요도, 사람의 자질 범위 안에서 이룰 수 있는 것도, 사람이 다해야 할 의무도, 사람이 이행해야 할 본분도 아니기 때문이다. 소위 도덕가들은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을 처신의 기준으로 삼아 사람들에게 엄격히 요구함으로써 사회적으로 하나의 분위기와 여론을 형성했으며, 사람들이 그 사회 여론에 억눌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아가게 했다. 그렇게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사탄의 그런 사상에 결박되었다. 사람의 사상이 결박되면 사람의 손발이 그런 말과 사회 여론에 결박될 것은 분명하다. ‘결박’이란 무엇이냐? 사람이 일할 때 자기 생각대로 선택하지 못하고, 자유롭게 인성의 바람과 요구를 따르지 못하며, 양심과 이성의 요구 내에서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왜곡된 사상과 사람이 분별하거나 벗어날 수 없는 일종의 사상, 이론, 사회 여론에 속박되고 결박되어 부지중에 그런 사회 환경과 분위기 속에서 살면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그런 말의 치우친 점과 잘못된 점을 인식하지 못하며, 그런 말이 사람의 사상을 결박하여 야기하는 위해와 결과를 알지 못한다면, 영원히 전통문화와 사회 여론이 가져오는 속박과 결박, 압박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이러한 것들에 기대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사람이 이러한 것들에 기대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모르고, 처신의 방향과 목표, 원칙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수동적으로 그런 전통문화 중 덕행의 각종 말에 미혹되며, 그런 그릇된 이론에 오도되고 통제되는 것이다. 사람이 진리를 깨달으면 이 사설과 궤변들을 분별하고 저버리기가 쉬우며, 더 이상은 사탄이 만든 사회 여론과 분위기, 사회 환경에 결박되거나 얽매이거나 억눌리지 않게 된다. 그러면 인생의 방향과 목표가 완전히 달라져 하나님의 요구와 말씀대로 살아가고 생존할 수 있으며, 더는 사탄의 각종 학설과 전통문화의 궤변에 미혹되거나 결박되지 않는다. 사람이 전통문화 중 덕행 측면의 각종 말을 철저히 내려놓을 때가 바로 사탄의 패괴와 미혹, 결박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이다. 이것을 기초로 네가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한 것과 사람에게 제정해 준 실행 원칙을 깨달을 때 인생 목표가 완전히 달라지고, 새로운 인생을 얻게 될 것이다. 새로운 인생을 얻으면 너는 새로 태어난 사람, 새사람이다. 네 사상에는 더 이상 사탄이 주입한 각종 사설과 궤변이 존재하지 않는데, 이는 사탄에게 속하는 그런 것들을 진리로 대신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은 하나님 말씀의 인도하에서 진리가 사람 내면에서 생명이 되어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을 인도하고 지배하므로 인생의 바른길에 오르고 빛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으로 거듭난 것 아니겠느냐? 자, 오늘은 여기까지 교제하도록 하겠다.

2022년 7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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