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추구란 무엇인가(12) 제 2 부

지난번에 교제한 덕행 측면의 논조와 본질에 근거해서 보면, 전통문화 속 덕행의 논조는 인류의 패괴 성품과 패괴 본질을 덮으며, 당연히 사탄이 인류를 패괴시켰다는 사실 역시 덮는다. 오늘 교제한, 남성과 여성에 대한 전통문화의 정의는 이 덕행 논조의 또 다른 본질을 분명히 보여 준다. 어떤 본질이겠느냐? 덕행 측면의 이 논조들은 인류의 사상을 미혹하고 오도하고 옭아맬 뿐만 아니라 또 자연스럽게 각종 사람과 일, 사물에 대한 잘못된 개념과 관점을 주입한다. 이는 사실이며, 사탄이 제창한 덕행 논조의 또 다른 본질이다. 이 말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느냐? 방금 교제한, 여성과 남성에 대한 덕행 측면 논조의 정의를 보면 이 점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충분히 설명된다. 덕행 측면의 논조는 행위상의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 표면적인 좋고 나쁨과 옳고 그름만을 논할 뿐 사람과 일, 사물의 정과 반, 좋고 나쁨, 시비를 알려 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사람이 인성에 부합하는 올바른 것, 도움이 되는 행위나 처신의 준칙, 원칙을 지키게 하지 않는다. 그 덕행의 논조들이 인성의 자연법칙에 위배되든 그렇지 않든, 사람이 그것을 지키고자 하든 그렇지 않든, 그것들은 사람이 옳고 그름과 시비를 분별하지 못하게 하고 고집스럽게 규칙을 지키게 한다. 만약 지키지 못한다면 이 사회는 너를 비난하고 정죄할 것이며, 심지어는 너 자신조차 스스로를 비난할 것이다. 이는 전통문화가 인류의 사상을 옭아매고 있다는 사실적인 증거 아니겠느냐?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는 전통문화가 인류의 사상을 옭아매고 있는 것을 진실로 구현한 것이다. 전통문화에서 새로운 논조와 요구, 규정이 생겨나는 순간, 사회적으로 여론과 흐름,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럼 너는 그 분위기나 흐름에 휘말릴 수밖에 없으며, 감히 ‘No’라고 말하거나 거부하지 못한다. 어떤 의문이나 다른 주장은 더더욱 제기할 수 없다. 그저 그 아래 몸을 맡겨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사회로부터 미움받고 손가락질받을 것이며, 심지어는 사회 여론에 비난받고 이 인류에게 정죄될 것이다. 비난받고 정죄당한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더는 얼굴을 들고 사람들 앞에서 살아가지 못한다. 존엄을 잃었기 때문이다. 너는 사회도덕을 지키지 못했고, 네게는 도덕도, 전통문화가 요구한 덕행도 없기에 어떤 사회적 지위도 없다. 사회적 지위가 전혀 없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이 사회에서 살아갈 자격이 없다. 다양한 측면에서 네 인권은 박탈될 것이며, 심지어 생존권, 발언권, 의무를 다할 권리마저 가로막히고 제약받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류에게 형성되는 전통문화의 영향이자 위협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 피해자이며, 당연히 이와 동시에 집행자이다. 너는 사회 여론에 해를 입고, 당연히 사회의 각 부류 사람에게서도 해를 입었으며, 동시에 전통문화를 받아들인 너 자신에게서도 해를 입었다. 결국, 이 전통문화들에 해를 입은 것이다. 이러한 전통문화가 인류에게 미친 영향이 무척 크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여성이 현명하고 어질고 정숙하고 유덕함을 갖추지 못했으며 좋은 여자가 아니라는 소문이 났다고 해 보자. 어떤 직장에 가든, 어떤 사람들 사이에 있든 그녀의 이야기가 전해져서 사람들이 시시비비를 가리며 그녀를 판단하게 되면, 그녀는 모두에게 좋은 여자로 인식되지 않는다. 일단 이런 상황까지 오면, 그녀는 사회에서 발붙이기도, 살아남기도 몹시 어려워진다. 심지어는 어쩔 수 없이 실명을 숨기고 새로운 도시나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사회 여론의 세력이 대단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 무형의 힘은 누구에게나 일종의 학대이고 유린이며 억압이다. 예를 들어, 중국의 사회 환경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살아남기가 매우 힘들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하나님을 믿은 후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려면 가정을 돌보지 못할 수도 있는데, 이방의 마귀들은 그것을 두고 “살림을 내팽개쳤다”, “가정을 버렸다”, “다른 사람을 따라 달아났다” 등의 헛소문을 퍼뜨린다. 이 주장들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뜬구름 같은 헛소문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죄명이 씌워지는 순간, 네 처지는 무척 힘들어진다. 네가 물건을 사러 가면 가게 주인은 불편한 기색을 보일 것이며, 네가 가게에서 나가면 그는 뒤에서 “저 여자, 종교에 빠져서 여자가 해야 할 일은 안 하고, 살림도 내팽개친 채로 온종일 밖을 쏘다닌대. 여자가 제대로 살림은 안 하고 바보같이 어디를 돌아다닌담? 여자라면 삼종사덕(三從四德)을 지키고 현모양처가 되어야지.”라고 수군거릴 것이다. 그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겠느냐? 무척 화가 나지 않겠느냐? 네가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는 게 그와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그는 그 일을 심심풀이 삼아 떠들고 중요한 문제인 양 비판하며 소문을 낸다. 이는 하나의 사회 현상 아니겠느냐? 이런 현상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지 않으냐? 예를 들어, 예전에 너와 사이가 무척 좋았던 동료가 있었다고 해 보자. 그런데 그는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을 듣고는 뒤에서 쓸데없는 소리를 한가득 지껄였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네게서 멀어지고 너와 관계가 안 좋아졌다. 네 업무 태도는 예전과 다를 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쓸데없는 말들이 사람들 귀에 들어가는 순간, 네가 회사에서 발붙이고 살아가기는 힘들어지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너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예전과 달라지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들은 뭐라고 이야기하겠느냐? “여자가 살림이나 제대로 하지, 무슨 종교를 믿는대?” “남자가 무슨 종교를 믿어?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나 종교를 믿지! 그런 건 여자들이나 하는 거라고. 사내대장부라면 사업에 전념해야지!” 이런 말을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말들이 어디에서 왔겠느냐?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그들과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신앙의 자유가 있으니 그들은 간섭할 권리가 없다. 그럼 그들은 왜 너에 대해 이야기하겠느냐? 네가 하나님을 믿은 후로 왜 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겠느냐? 어느 정도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들이 이렇게 비난하는 근거는 불가피하게 전통문화의 사상 관점,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국가와 정부의 태도와 관계가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너에 대해 비난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들은 되는대로 지껄이고 시비를 일으키며 함부로 정죄하는 것이다. 뭐라고 하든, 그들이 비난하고 판단하는 근거,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을 대하는 그들의 견해와 태도는 상당 부분 전통문화와 무신론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여성, 혹은 남성으로 행동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것 외에, 전통문화의 주요 사상적 정수는 무엇이겠느냐? 하늘도 없고 하나님도 없다는 것이다. 즉, 무신론의 사상 관점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신앙을 가진 사람, 특히 참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몹시 배척한다. 만약 네가 미신이나 사이비를 믿거나 어떤 종교 활동을 한다면 아마도 그들은 너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네가 미신 행위를 해도 그들은 네게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네가 하나님을 믿고 매일 하나님 말씀을 읽으며 복음을 전하고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순간, 그들은 너와 공존하지 못한다. 그들이 너와 공존하지 못하는 근원은 무엇이겠느냐? 정확히 말해서 그들은 이방인이고, 모두 사탄을 따르며, 사탄에게 속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그들은 전통문화의 사상 관점, 큰 붉은 용의 정책과 법률에 근거해서 일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는 객관적인 사실이다. 어떤 사람과 일, 사물이 전통문화 사상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바로 국가가 탄압하고 체포하는 대상임을 알게 됐을 때, 그들은 상대를 멸시하고 되는대로 지껄이며, 비난하고 정죄할 것이다. 또 정부에 협조하여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감시하고 신고할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근거는 무엇이겠느냐? 대부분 전통문화와 무신론 사상, 그리고 큰 붉은 용의 사악한 정책에 근거한다. 예를 들어,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판단하며 이렇게 말한다. “여자가 제대로 살림은 하지 않고 어디를 싸돌아다니는 거야?” “남자가 사업에 전념하지는 않고 무슨 종교를 믿는대? 제대로 된 남자라면 큰 포부를 지녀야지. 사내대장부라면 사업에 뜻을 둬야 하는 거라고!” 보아라. 이 속된 말들은 분명히 전통문화에서 비롯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전통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평범하고 속된 사람들은 신앙을 추구하지는 않고 육적으로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만 추구한다. 그들의 사상은 사악한 흐름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전통문화에 깊이 결박되고 얽매여 자기도 모르게 전통문화의 영향 아래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러한 관점으로 모든 사람과 일을 대하는 것이다. 이는 현대 사회의 모든 곳에서 발생하는 일로, 매우 일반적이다. 사탄의 손아귀에 있는 세상에서, 사악하고 음란한 시대는 바로 이러하다.

덕행 측면의 논조는 사람에게 잘못된 개념과 관점을 주입할 뿐만 아니라 사람이 특수한 환경과 배경 속에서 극단적인 사상을 따르고 극단적인 행위를 하도록 교사하고 종용한다. 예를 들어, 예전에 말한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라는 논조는 사탄이 사람의 덕행을 규범화함으로써 벗을 대하는 일에 대해 제시한 요구이다. 이 덕행의 논조는 분명 사람이 벗을 대하는 일에 있어 비이성적이고 현명하지 않은 사상 관점을 갖게 하며, 나아가 벗을 위해 함부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게 한다. 이는 사탄이 덕행 측면에서 인류에게 제시한 일종의 극단적이고 과한 요구이다. 사실,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와 비슷한 덕행 측면의 논조는 더 있다. 그것들 역시 사람에게 극단적인 행위를 하라고 요구하며, 전부 비인도적이고 비이성적인 논조이다. 사탄은 사람에게 전통문화의 사상 관점을 주입하는 동시에 사람이 이 비이성적인 사상과 비인도적인 논조를 따르도록 요구하며, 이 사상과 행동을 엄수하게 한다. 이는 인류에 대한 일종의 우롱이자 학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논조에는 어떤 것들이 있겠느냐? 예를 들어,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 “봄날의 누에는 실을 다 뽑아내야 죽고, 초는 다 타 버려야 눈물이 마른다.”라는 말이 있다. 이 두 문장은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보다 더 분명히 목숨을 소중히 여기지 말라고, 목숨은 그렇게 버리는 거라고, 남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할 때가 되면 목숨을 너무 아끼지 말고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 “봄날의 누에는 실을 다 뽑아내야 죽고, 초는 다 타 버려야 눈물이 마른다.”라는 말을 실행하라고 알려 주고 있다. 이 두 가지 덕행 논조의 표면적인 의미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을 것이다. 이것들이 과연 무엇을 퍼뜨리고 고취시키겠느냐? 누구를 위해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것이겠느냐? 누구를 위해 “봄날의 누에는 실을 다 뽑아내야 죽고, 초는 다 타 버려야 눈물이 마른다.”라는 말을 실행하라는 것이겠느냐? 사람은 ‘그렇게 행동하는 게 의미가 있나?’라고 반성하고 성찰해야 한다. 이런 논조는 먼저 네 사상을 미혹하고 마비시키며, 네 시선을 어지럽힌다. 이어서 네 인권을 박탈하고, 네게 잘못된 방향을 가리키며, 그릇된 정의와 관점을 준다. 그다음에는 이 나라와 사회, 민족, 또는 사업이나 사랑을 위해 네 청춘과 목숨을 버리게 한다. 인류는 그렇게 얼떨떨하고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얼떨결에 자기 목숨을 사탄에게 건네준다. 그것도 기꺼이, 아무 원한이나 후회도 없이 말이다. 목숨을 바치는 순간, 사람은 모든 것을 깨닫고 자신의 행동이 무가치했으며 속아 넘어갔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고 후회해도 소용없다. 그는 평생 그렇게 사탄에게 미혹되고 우롱당하고 학대당하고 짓밟히고 유린당하다가 마지막에는 가장 소중한 목숨까지 빼앗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류가 전통문화 중 덕행 논조의 교육을 받아들인 결과이다. 이는 사탄의 권력 아래에서 살면서 사탄에게 미혹되고 우롱당한 사람의 가련한 결말을 여실히 보여 준다. 사탄이 인류를 대하는 갖가지 수법을 형용하는 말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먼저 마비시키고 미혹한다. 또 어떤 것이 있느냐? 말해 보아라. (우롱하고 학대하고 짓밟고 유린합니다.) 그다음에는 종용하고 속이고 목숨을 요구하며, 마지막에는 사람을 우롱하고 집어삼킨다.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면 이런 결과가 벌어진다. 사람은 사탄의 권력 아래에서 살면서 사탄 성품으로 살아간다. 만약 하나님이 진리를 선포하고 심판과 형벌 사역을 행해 인류를 구원하지 않았다면, 인류는 전부 사탄에게 학대당하고 잡아먹혀 멸망에 이르지 않았겠느냐?

인류가 퍼뜨리는 전통문화는 전부 어떤 것이냐?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 말은 주로 일할 때 근면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고, 죽을 때까지 마음과 힘을 다하라고 요구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이렇게 봉사하라는 것이겠느냐? 당연히 이 사회와 국가, 민족을 위한 것이다. 그럼 이 사회와 국가, 민족은 도대체 누가 통제하고 있느냐? 의심할 여지도 없이 사탄과 마왕이 통제하고 있다. 그럼 사탄과 마왕은 전통문화를 이용해 사람을 미혹시킴으로써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하겠느냐? 먼저, 국가의 발전과 민족의 부흥을 이루려고 하고, 그다음으로는 사람이 조상의 이름을 빛내고 천추에 명성을 남기게 한다. 사람은 이것이 더없이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해 마왕에게 감사하면서 기꺼이 이 민족과 사회,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하지만, 사실 그것은 사탄과 마왕을 위해 힘쓰는 것이고, 사탄과 마왕의 통치, 지위를 위해 힘쓰는 것이며, 사탄과 마왕을 위해 자신의 소중한 생명을 내놓는 것이다. 피조물의 본분을 잘 이행하기 위해 뜻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람답게 살아가라고 가르쳐 주지 않고, 국가와 마왕, 사업을 위해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치라고 요구한다면 이는 사람을 미혹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사람으로 하여금 국가와 민족을 위하게 하는 거라며 번지르르한 말을 당당하게 늘어놓지만, 사실 그것은 사탄과 마왕의 통치, 지위를 위해 자신의 일생과 목숨을 바치라는 것이다. 이는 사람을 미혹하고 우롱하고 해하는 것 아니겠느냐? 전통문화가 내놓은 갖가지 논조는 사람에게 실생활 속에서 정상 인성을 살아 내고 사람의 책임과 본분을 이행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전반적인 사회의 틀 속에서, 다시 말해 사탄의 권력 아래에서 어떤 덕행을 보여야 한다고 요구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덕행의 논조도 인류가 사회와 민족을 위해서, 특히 국가를 위해서 충성을 다하게 하기 위해 제시된 일종의 신조이다. 이 신조는 사람에게 민족과 국가, 사회를 위해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치라고 요구한다. 근면 성실하게 죽는 그 순간까지 최선을 다한 사람만이 덕행을 갖춘 사람, 덕행이 고상한 사람이며, 모두가 존경할 만한 사람, 자손 대대로 기억할 만한 사람이다.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에서 ‘온몸을 바치다’라는 말은 근면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말에는 문제가 있지 않겠느냐? 사람의 본능이나 인성이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을 생각해 보면, 문제는 크지 않다. 이 말은 사람에게 일하고 사업을 대할 때 근면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라고 요구하는데, 이런 태도는 틀리지 않으며, 정상 인성의 기준에 상대적으로 부합한다. 사람은 일할 때 이런 태도를 보여야 한다. 이는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부분이다. 다시 말해, 어떤 일을 할 때 근면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고,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으면 된다는 것이다. 정상 인성과 양심, 이성을 갖춘 모든 사람에게 이는 더없이 정상적인 일이며, 과하지 않은 요구이다. 그런데 과한 것은 무엇이겠느냐? ‘죽을 때까지’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죽을 때까지’에 문제가 있다. 너는 근면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데 그치지 말고 네 목숨까지 바쳐야 한다. 죽어서야 끝나는 것이고, 죽기 전까지 멈춰서는 안 된다. 즉, 네 목숨과 인생을 바치되 사심을 갖지 말고 평생 포기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만약 중도에 포기해서 죽을 때까지 버티지 못한다면 좋은 덕행이라고 할 수 없다. 이는 전통문화 중 사람의 덕행을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데, 자기가 원할 때 능력 범주 안에서 근면 성실하게 최선을 다했지만 죽을 때까지 버티지는 못하고 중도에 포기했다면, 다른 일을 찾거나 쉬면서 몸과 마음을 보양하여 천수를 누린다면, 이는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친 것’이 아니며, 그 사람은 좋은 덕행을 갖춘 것이 아니다. 이 기준이 어떠하냐? 올바르냐? (옳지 않습니다.) 이 기준은 분명 정상 인성의 본능과 정상 인성의 마땅한 권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에게 근면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라고 요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죽을 때까지 멈추지 말라고 한다. 이런 요구를 한 것이다. 여태까지 얼마나 근면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어떤 일을 했는지와는 상관없이 중도에 포기하고 그만두는 순간, 너는 덕행이 훌륭한 사람이 아니다. 반면, 네가 적당히 성실한 태도를 보이면서 최선을 다하지는 않았지만 죽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면, 너는 좋은 덕행을 지닌 사람이다. 이는 전통문화 중 사람의 덕행을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전통문화 중 사람의 덕행을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이다. 그렇다면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요구 기준이 정상 인성의 필요에 부합하겠느냐? 그것이 사람에게 공평하고 인도적이겠느냐? (공평하지도, 인도적이지도 않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냐? (그것은 정상 인성의 범주 안에서 제시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사람이 선택하기를 원치 않으며, 양심과 이성에 어긋난 것입니다.) 이 기준의 주된 의미는 사람에게 개인의 선택과 바람, 이상을 버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네 자질과 재능이 이 사회와 이 인류, 민족, 국가, 통치자에게 봉사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면 마땅히 무조건 복종해야지 다른 선택을 해서는 안 된다. 너는 사회와 민족, 국가를 위해서, 심지어는 통치자를 위해서 죽는 날까지 네 일생을 바쳐야 한다. 네 평생의 사업에 두 번째가 있어서는 안 되며, 어떤 다른 선택지가 있어서도 안 된다. 너는 민족과 인류, 사회, 국가, 나아가 통치자를 위해서만 살아가야 한다. 오직 그것들에 봉사해야지 어떤 개인적인 바람을 가져서는 안 되며, 사심은 더더욱 품어서는 안 된다. 너는 네 청춘과 정력을 바쳐야 하며, 나아가 목숨까지 바쳐야 한다. 그래야 훌륭한 덕행을 지닌 사람이다. 이 인류가 이런 훌륭한 덕행을 뭐라고 부르느냐? ‘대의’라고 한다. 그럼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논조는 또 어떤 형태로 전해지느냐? 사람들이 수시로 언급하는 “큰 협객은 나라와 백성을 위한다.”라는 말이 있지 않으냐? 소위 ‘큰 협객’이라면 마땅히 나라와 백성을 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정과 부모, 아내, 아이, 형제, 자매를 위한 것이겠느냐? 사람의 책임과 본분을 다하기 위한 것이겠느냐? 그런 것을 위한 게 아니다. 반드시 국가와 민족에 충성하고 몸을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논조의 또 다른 형태이다.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요구에서, 근면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라는 것은 그저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논조에 불과하다. 이런 논조로 사람을 유인하여 기꺼운 마음으로 ‘죽을 때까지’를 실행하게 하는 것이다. 그럼 죽을 때까지 몸 바치는 대상은 누구겠느냐? (국가와 민족입니다.) 그럼 누가 국가와 민족을 대표하느냐? (통치자입니다.) 그렇다. 통치자이다. 어떤 사람, 어떤 독립된 단체도 국가와 민족을 대표할 수는 없으며, 오직 통치자만이 국가와 민족의 대변인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논조가 표면적으로는 국가와 민족, 통치자를 위해 죽는 순간까지 근면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실제로는 사람이 통치자와 마왕을 위해 죽을 때까지 목숨을 바치게 한다. 이 논조가 적용되는 대상은 사회나 이 인류 중 변변찮은 사람이 아니다. 그 대상은 사회와 인류, 국가, 민족, 특히 통치자에게 중대한 기여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어떤 왕조, 어떤 시기, 어떤 민족에게나 다 특별한 은사와 능력, 재능을 지녀 사회에 ‘판매’되고 통치자에게 이용당하며 추앙받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특별한 재능과 능력이 있으며, 또 사회와 민족, 국가, 통치자의 통치 범위 안에서 그 재능과 특기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통치자의 눈에 더 훌륭하게 인류를 통치하고 사회를 안정시키며 민심을 안정시키도록 보좌할 수 있는 사람들로 보인다. 이런 사람은 종종 통치자에게 이용당한다. 통치자는 이들이 나를 버리고 대의를 품으며, 의협심을 발휘하여 큰 협객이 되기를, 마음속에 오직 국가와 백성만 품으며 언제나 국가와 백성을 걱정하기를, 심지어는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치기를 바란다. 그들이 정말 그렇게 하면서 국가와 백성을 위해 근면 성실하게 최선을 다한다면, 심지어 죽는 그 순간까지 그러고자 한다면, 그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어떤 한 통치자의 유력한 조력자이며, 나아가 어떤 시기 어떤 민족이나 사회, 심지어 전 인류의 영예로 인정받을 것이다. 만약 어떤 시기, 사회에 이런 사람들이 있다면, 혹은 소위 ‘큰 협객’이라고 칭할 만한 의사들이 있어 사회와 인류, 국가, 민족, 통치자를 위해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친다면, 그 시기는 인류에게 찬란한 역사의 시기로 남을 것이다.

중국 역사에서 국가와 백성을 위해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친 큰 협객은 몇이나 되느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말해 보아라. (굴원, 제갈량, 악비 등이 있습니다.) 중국 역사상 국가와 백성을 걱정하고, 나라와 민족, 백성의 생존을 위해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친 명인들은 실제로 여럿 존재한다. 또 중국 국내외 역사를 보면 정치권에든 민간에든, 정치인이든 협객이든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전통문화의 논조를 지킨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요구를 충실히 지키고 또 국가와 백성을 위하고 걱정하는 사상을 충실히 지켰다. 또 이런 덕행의 논조를 준수하며, 스스로에게 그렇게 행동할 것을 엄격히 요구했다. 물론 한편으로는 명예를 위해서, 앞으로 누군가가 자신들을 기억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랬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문화 사상에 물들고 영향받아서 그런 행위를 보였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럼 인성의 측면에서 봤을 때, 사람에 대한 전통문화의 이런 요구가 적절하겠느냐? (적절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적절하지 않으냐? 한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갖고 있든, 얼마나 많은 은사와 재능을 지니고 얼마나 높은 학식을 갖추고 있든 그의 신분과 본능은 사람의 신분과 본능이며, 그는 이 범주를 뛰어넘지 못한다. 그저 다른 사람보다 좀 더 은사와 자질을 갖췄고, 보통 사람보다 일을 바라보는 관점이 고명하며, 일 처리 방식과 방법이 좀 더 다양하고 융통성 있고 효율적이고 성과를 낼 뿐이다. 이 정도에 그친다. 하지만 그의 일 처리 효율과 성과가 아무리 좋아도 그 신분과 지위는 여전히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 어째서 평범한 사람이라고 하겠느냐? 육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 생각이 아무리 영민하고 은사와 자질이 아무리 뛰어나도 영원히 지음 받은 인간의 생존 규칙을 따라야 한다. 개를 예로 들어 보겠다. 크든 작든 뚱뚱하든 말랐든, 무슨 품종이고 나이가 몇 살이든 개는 다른 개를 만났을 때 보통 냄새를 맡아 상대의 성별과 성격, 자신에 대한 태도를 판별한다. 이런 교류 방식은 개의 생존 본능이자 규칙, 법칙으로, 이는 하나님이 정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 또한 하나님이 정해 놓은 규칙 속에서 생존한다. 머리가 아무리 영민하고 학식이 아무리 높아도, 자질과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도, 수완이 아무리 좋고 아무리 큰 사업을 해도 너는 매일 6~8시간은 잠을 자야 하고 세끼 식사를 챙겨 먹어야 한다. 한 끼만 굶어도 배가 고프고 물을 좀 적게 마시면 목이 마르다. 또 자주 운동을 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으며, 나이가 들면 눈이 침침해지고 각종 질병에 걸린다. 이는 정상적인 생로병사의 자연법칙으로,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다. 이 규칙은 누구도 깨뜨리거나 벗어날 수 없다. 이 점에 근거하면, 네 능력이 어떻든, 자질과 재능이 어떻든 너는 여전히 평범한 사람이다. 네가 날개를 달고 하늘을 두어 바퀴 돈다고 해도 결국에는 땅에 떨어질 것이며, 두 다리로 걸어야 한다. 또 피곤하면 쉬어야 하고, 배고프면 음식을 먹어야 하며, 목마르면 물을 마셔야 한다. 이는 사람의 본능이다. 이 본능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니 너는 영원히 바꿀 수도, 벗어날 수도 없다. 네 능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이 규칙을 어길 수 없으며, 이 범주를 뛰어넘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어떤 능력이 있든 사람의 신분과 지위는 바뀌지 않고, 피조물의 신분과 지위는 바뀌지 않는다. 설령 네가 인류 가운데서 특별하고 뛰어난 공을 세운다고 할지라도 너는 여전히 사람이다. 위험을 마주하면 여전히 공포를 느낄 것이고, 당황해서 다리에 힘이 풀릴 것이며, 심지어는 대소변을 지릴 것이다. 어째서 그런 모습을 보이겠느냐?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인 이상 너는 사람이 지녀야 하는 이런 모습을 갖는다. 이것이 바로 자연법칙으로,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 뛰어난 공을 숱하게 세웠다는 이유로 절대 초인이나 이인(異人), 범인이 아닌 존재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친다고 할지라도 너는 정상 인성으로 사는 사람이기에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엄청난 압박을 받을 것이다! 언제나 스스로에게 국가와 백성을 걱정해야 한다고, 마음속에 온 민족과 국가를 품어야 한다고 요구하면서 마음이 넓을수록 무대도 그만큼 커진다고 생각하는데, 정말 그렇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비범한 생각을 지녔다는 이유로 절대 비범한 사람이 될 수는 없으며, 특별한 은사나 재능이 있다는 이유로, 혹은 인류에게 대단한 기여를 했다는 이유로 평범한 사람과 달라지거나 그들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또 정상 인성의 법칙과 생존 규칙을 따를 필요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인류에게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요구를 하는 것은 매우 비인도적이다. 설령 어떤 사람이 범인을 뛰어넘는 재능과 생각, 안목과 판단력을 지녔다고 할지라도, 나아가 범인을 뛰어넘는 일 처리 능력과 사람을 바라보고 통찰하는 능력을 지녔다고 할지라도, 범인보다 어떤 부분이 뛰어날지라도 육으로 사는 한 계속 정상 인성의 생존 규칙과 법칙을 따라야 한다. 반드시 정상 인성의 생존 규칙과 법칙을 따라야 하는 상황에서 그에게 비현실적이고 인성에 부합하지 않는 요구를 하는 것이 인도적이겠느냐? 이는 그의 인성에 대한 일종의 유린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늘이 내게 이런 은사와 재능을 주셨으니 나는 범인과 다르다. 또 나는 보통 사람이 아니니 마음에 천하와 백성, 민족, 국가, 세계를 품어야 한다.” 말해 두겠는데, 마음에 그런 것들을 품는 것은 부담을 더하는 일이다. 그것은 통치 계급과 사탄이 더해 준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마음에 품는 것은 죽음의 길에 오른 것이다. 네가 마음에 천하와 백성, 민족, 국가, 통치자의 이상과 바람을 품고자 한다면 일찍 죽을 것이다. 마음에 그러한 것을 품는다는 것은 스스로를 화약통이나 화약 포대 속에 두는 것과 같다. 이는 무척 위험한 일로, 아무 의미도 없다. 마음에 이런 것들을 품을 때, 너는 스스로에게 ‘나는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야 해. 국가와 민족의 대업을 위해서, 인류를 위해서 기여할 거야. 내 목숨을 이 인류에게 바칠 거라고.’라고 요구할 것이다. 하지만 그 웅장한 뜻이 가져다주는 것은 요절, 비명횡사, 또는 멸망이다. 보아라. 마음에 천하를 품은 역사 속 명인 중 몇 명이나 제명에 죽었더냐? 어떤 이는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어떤 이는 통치자에 의해 극형에 처해지고, 어떤 이는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으며, 어떤 이는 밧줄에 목이 졸려 죽었다. 마음에 천하를 품는 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겠느냐? 사람이 국가의 대업과 민족의 부흥, 나라와 인류의 운명을 짊어지고 품을 수 있겠느냐? 마음에 부모나 자녀,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 자신의 책임과 하늘이 준 사명만 품어도 훌륭하다. 그것으로도 이미 네 책임을 다한 것이다. 국가와 백성을 걱정하거나 큰 협객이 될 필요는 없다. 언제나 마음에 천하와 민족, 국가를 품으려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야심이 지나치게 크고 자기 주제를 모르는 사람이다. 네게 그렇게 큰 배포가 있느냐? 야심이 너무 큰 것 아니냐? 네 야심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이냐? 마음에 그런 것들을 품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네가 누구의 운명을 지배하고 주재할 수 있겠느냐? 너 자신의 운명조차 어쩌지 못하는데 마음에 천하와 민족, 인류를 품으려 하다니, 그것은 사탄의 야심 아니겠느냐? 그렇기에 재능이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논조를 지키는 것은 파멸을 자초하는 것이고, 죽음의 길을 걷는 것이다! 또 국가와 백성을 걱정하고, 민족과 나라를 위해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치려는 것은 파멸을 자초하는 짓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이 사랑스럽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랑스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련하고 가소로우며, 정말 너무도 어리석다!

사람으로서는 가정에서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한다. 또 어떤 사회단체나 집단에 있든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책임을 다하며 사회의 법률과 규칙, 제도를 지키고, 이성적으로 일을 처리하되 허풍을 떨어서는 안 된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사람이 해야 할 것을 하는 게 적절하다. 가정과 사회, 국가, 국민을 위해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칠 필요는 없다. 하나님 집에서 뜻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해 네 본분을 이행하면 그만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이 요구한 진리 원칙을 지키는 것으로 충분하다. 온종일 마음에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 선민, 하나님의 경륜, 3단계 사역, 인류 구원 사역을 품을 필요는 없다. 그러한 것들은 품지 않아도 된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너는 평범한 사람, 하찮은 존재이며, 하나님 손안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네가 지켜야 할 입장과 네 책임은 네 본분을 성실하게 잘 이행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배치한 모든 것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이 요구가 높으냐? (높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네게 목숨을 바치라고 요구하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은 네게 목숨을 바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덕행의 논조는 ‘사람에게 능력과 배포, 의협심이 있으면 마땅히 떨치고 일어나 국가와 민족을 위해 온몸을 바쳐야 하며,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또 가정과 가족을 버리고 자신의 책임을 버리며, 스스로를 이 사회와 인류 가운데 두고 민족의 대업과 국가 부흥의 대업, 전 인류를 구원하는 대업을 짊어져야 한다. 죽을 때까지!’라고 요구한다. 이는 극단적인 요구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극단적인 사상을 받아들인 사람은 스스로를 무척 위대하게 생각하게 된다. 특히 특별한 재능이나 큰 야심, 욕망을 지닌 사람은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겨 대대손손 명성이 전해지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이번 생에 어떤 사업을 해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요구하며, 전통문화의 관점을 몹시 중시하고 숭상한다. 전통문화가 제시한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 “태산같이 무거운 죽음도 있고, 깃털같이 가벼운 죽음도 있다.”라는 말처럼 반드시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태산같이 무거운 죽음’이란 무엇을 가리키느냐? 사소한 이익을 위해 죽는 것도, 범인의 일상을 보내기 위해 죽는 것도,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기 위해 죽는 것도, 자연법칙을 따르다가 죽는 것도 아니다. 인류의 대업과 민족의 부흥,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또 인류의 흐름을 이끌기 위해서 죽는 것이다. 인류의 이 비현실적인 생각은 스스로를 첨예한 투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이런 식으로 해서 사람이 좋은 날들을 보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날은 없다. 첨예한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가는 순간,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추구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과 달라진다. 그는 큰 뜻을 펼치고 대업을 이루고자 하며, 떨치고 일어나 큰일을 하고자 한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그렇게 조금씩 정치에 참여하게 된다. 오직 정치계라는 무대만이 사람의 욕망과 야심을 충족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정치권은 너무 어둡습니다. 저는 정치에 참여하고 싶지 않지만 인류의 정의로운 사업을 위해 뭔가 기여하고 싶다는 소망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강호의 문파에 가담한다. 또 혹자는 “저는 강호의 문파에 가담하지 않고 홀로 다니는 협객이 되겠습니다. 제 특기를 발휘해 부자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고, 탐관오리와 토호, 악질 지주, 악당들을 집중적으로 처단하며, 평범한 민중과 가난한 자들을 구제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들이 어떤 길을 가든 다 전통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바른길이 아니다. 사람의 논조가 아무리 사회적 흐름과 민중의 입맛에 맞아도 어쩔 수 없이 전통문화에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인류는 늘 국가와 백성에 대한 걱정, 마음에 천하를 품는 것, 큰 협객, 국가적 대의 등을 추구 목표로 삼아 그것을 위해 헌신하고,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치기 때문이다. 사실이 이러하다. “저는 평생 농민으로 살고 싶습니다.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치면서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느냐? “저는 평생 소와 양을 치며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느냐? 이 논조를 이런 데다가 쓰는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사람은 모두 야심과 비현실적인 욕망을 품고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말을 쓴다.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이 훌륭한 말을 이용해 내면의 욕망과 야심을 가리려는 것이다. 물론,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논조는 사람으로 하여금 국가와 백성을 걱정하고, 마음에 천하를 품겠다는 비현실적이고 변태적인 생각과 행동을 하게 했다. 이 논조가 얼마나 많은 의인과 지사들을 해쳤는지 모른다.

클릭하세요! 하나님에게서 온 기쁜 소식이 당신과 당신의 가족에게 임할 것입니다.

카카오톡으로 대화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