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추구란 무엇인가(11) 제 2 부

지난 시간에는 전통문화 중 어떤 덕행의 논조에 대해 교제했느냐? (세 가지를 교제하셨습니다. “물 한 방울의 은혜라도 넘치는 샘물로 보답하라.”,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마라.”,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였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그 세 가지 덕행의 요구와 논조에 대해 교제하고, 그 논조의 본질에 대해서도 교제하였다. 덕행과 관련된 논조의 본질에 대해서는 어떤 것들을 교제하였느냐? (하나님께서는 덕행의 논조와 진리의 차이점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덕행의 논조는 사람의 행위를 제약하며, 사람이 규례를 지키게 하는 데 그칩니다. 반면,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는 사람이 깨달아야 할 진리 원칙을 가르쳐 주고, 실행의 길을 알려 주며, 일이 임했을 때 실행 원칙과 방향을 알려 줍니다. 덕행의 논조는 진리와 이런 측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지난번에는 덕행 측면의 논조가 주로 사람에게 몇몇 행위와 규례들을 지키게 한다고, 그것은 규례로 사람의 행위를 제약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고 했다. 반면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대부분 정상 인성으로 이를 수 있는 것에 근거하여 사람에게 실행의 길을 가리켜 주는데, 이 다양한 실행의 길을 원칙이라 한다고 교제하였다. 다시 말해, 문제가 닥쳤을 때, 하나님은 네게 정확하고 긍정적인 실행의 길, 그리고 그런 일을 할 때의 실행 원칙과 목표, 방향을 알려 준다는 것이다. 규례가 아니라 이러한 원칙을 지키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진리 실제를 살아 내며, 걷는 길은 옳을 것이다. 오늘은 다시 덕행의 논조에 또 어떤 본질적인 문제들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덕행 측면의 수많은 논조는 사람의 생각을 옭아맬 뿐만 아니라 미혹하고 마비시킨다. 한편, 더 급진적인 논조는 사람의 목숨을 요구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지난번에 교제한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라는 피비린내 나는 논조가 그러하다. 이 논조는 사상적으로 사람을 통제하고 옭아맬 뿐만 아니라 사람의 목숨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사람이 자기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게 하고, 나아가 혈기에 기대 매우 충동적이고 쉽게 함부로 목숨을 바치게 한다. 이것이 목숨을 요구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아직 인생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인생의 바른길을 찾지도 못했는데, 함부로 소위 ‘친구’를 위해서, 혹은 어떤 은혜 때문에 자기 목숨을 내놓고, 자기 목숨을 한 푼어치도 안 되는 싸구려로 보는 것이다. 이는 전통문화가 사람에게 가르친 사상 때문에 벌어진 결과이다. 사람의 사상을 옭아맬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덕행의 논조 중 긍정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또한, 함부로 사람의 목숨을 요구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이 논조들은 더더욱 긍정적인 작용을 하지 못하고 도움도 되지 않는다. 이 밖에, 사람은 이러한 사상에 미혹되고 마비되어 자신의 허영과 체면을 위해서, 사회 여론에 질책받지 않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덕행의 요구대로 행동한다. 이미 완전히 이 덕행 측면의 각종 논조, 사상에 결박되고 통제되고 속박되어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이다. 사람은 그저 체면을 더 살리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 남들에게 우러름 받고 좋은 평가를 받으며 비방받지 않기 위해서, 또 조상을 빛내기 위해서 기꺼이 덕행과 관련된 논조의 속박 아래 살면서 자유롭게 선택하지 못한다. 사람의 이러한 사상 관점, 그리고 사람이 덕행의 논조에 통제되는 현상을 통해 볼 때, 이 논조가 어느 정도 사람의 행위를 단속하고 제약하기는 하지만,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킨다는 사실과 사람에게는 패괴 성품이 있고 사탄 본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은폐한다. 그것은 외적인 행위로 포장하여 사람이 표면적으로 체면과 학식, 품격이 있고 선량하고 존귀하고 고상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래서 사람은 남들의 표면적 행위로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 고상한지 천박한지, 착한 사람인지 악인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모두가 덕행 측면의 각종 요구로 상대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가늠하고 판단하지만, 외적인 덕행으로 사람의 패괴 본질을 간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덕행의 포장 이면에 숨겨진 각종 음험함과 악독함을 꿰뚫어 보지도 못한다. 이렇게 사람은 덕행을 포장지 삼아 더 깊숙이 패괴 본질을 숨긴다. 예를 들어, 겉으로 볼 때 무척 현명하고 어질고 정숙하고 유덕해 주변인들에게 칭찬받고 감탄을 자아내는 여성이 있다고 해 보자. 그녀는 적절하게 행동하고 예의를 알며 남과 함께할 때 따지고 드는 게 아니라 참고 양보한다. 또 부모에게 효도하고 남편을 돕고 자식을 가르치며, 고난을 견딜 줄 알기에 모범적인 여성이라고 할 만하다. 그녀의 겉모습에서는 어떤 문제도 발견할 수 없지만, 그녀가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떤 것들을 생각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과 야심이 무엇인지 말하는 법이 없고, 말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그녀는 현명하고 어질고 정숙하고 유덕한 여성이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녀가 자기 마음과 추태를 있는 그대로 털어놓고 드러낸다면, 현명하고 어질고 정숙하고 유덕한 여성이 될 수 없을 것이며, 사람들에게 질책과 미움까지 받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숨기고 포장한다. 현명하고 어질고 정숙하고 유덕하다는 표면적 행위에 가려져 사람들이 오직 그녀의 좋은 행위만 보고 칭찬한다면 그녀의 목적이 이뤄지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위장하고 기만하든 그녀가 정말 남들이 추켜세우는 것처럼 그렇게 좋은 사람이겠느냐? 절대 그렇지 않다. 그녀에게 과연 패괴 성품이 없겠느냐? 패괴 본질이 없겠느냐? 간사함이 없겠느냐? 교만함이 없겠느냐? 강퍅함이 없겠느냐? 사악함이 없겠느냐? (있습니다.) 분명 있겠지만 전부 가려져 있다. 이것이 진실이다. 중국 역사에는 고대 성현으로 추앙받는 자들이 있다. 이는 무엇을 근거로 정한 것이겠느냐? 제한적이고 근거 없는 기록이나 전설에 기대 그들을 성현으로 추켜세운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사실 그들이 뒤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제 이 문제들을 밝히 알 수 있겠느냐? 일부 사람들은 밝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너희는 많은 설교를 들었기에 인류의 패괴 본질과 본모습을 상대적으로 밝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진리를 얼마간 깨닫기만 하면 사람과 일을 어느 정도 간파할 수 있다. 현명하고 어질고 정숙하고 유덕한 여성의 외적 행위와 덕행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한들, 그녀가 아무리 잘 위장하고 포장한다고 한들, 그녀가 교만한 성품을 드러내지 않겠느냐? (드러낼 것입니다.) 반드시 드러낼 것이다. 그녀에게 강퍅한 성품이 없겠느냐?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현명하고 어질고 정숙하고 유덕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바로 그녀가 몹시 독선적이고 강퍅하다는 의미이다. 사실 그녀는 속으로 자기 주제와 결점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덕이 있는 양 스스로 뽐내니 이것이 강퍅함 아니겠느냐? 교만함 아니겠느냐? 이 밖에, 그녀가 스스로 현명하고 어질고 정숙하고 유덕한 사람이라고 허풍을 떠는 것은 전부 높은 명성을 남기고 조상을 빛내기 위해서이다. 이런 식의 생각과 추구는 무척 황당하고 사악하지 않으냐? 그녀는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와 포상을 얻었지만, 그녀가 어떤 속셈과 생각을 품고 있는지, 어떤 떳떳하지 못한 짓들을 했는지 등은 줄곧 마음속에 숨겨 둔 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녀를 간파해서 평가하고 판단하고 저버릴까 봐 몹시 두려워하면서 말이다.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간사함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그녀의 외적 행위가 아무리 적절하고 보기 좋더라도, 덕행 측면에서 아무리 고상하더라도 그녀에게는 패괴 성품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들어 본 적이 없고, 진리를 깨닫지 못한 이방인들이 그것을 간파하지도 알아차리지도 못할 뿐이다. 그녀가 이방인은 속일 수 있겠지만,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을 속이지는 못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녀는 사탄에게 패괴되어 패괴 성품과 패괴 본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이다. 설사 그녀의 덕행이 아무리 훌륭하고 아무리 기준에 부합할지라도, 그녀에게 패괴 성품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고, 달라지지도 않는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기만 하면 그녀를 분별할 수 있다. 하지만 사탄은 이 덕행 측면의 논조들을 이용하여 사람을 미혹하며, 당연히 사람의 사상을 마비시키고 옭아맨다. 그리하여 사람은 이 덕행의 요구 기준에 부합하는 자를 좋은 사람, 바른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게 된다. 하지만 진실은 정반대이다. 어떤 사람들은 표면적으로 덕행의 논조에 부합하는 좋은 행위를 좀 갖추었지만, 인생의 바른길을 걷지는 않고 그릇된 길을 걸으며, 죄 속에서 살면서 외식하는 길을 걷고, 사탄의 함정에 빠진다. 사람의 패괴 성품과 패괴 본질은 좋은 덕행을 좀 갖추었다고 해서 절대 달라지지 않으며, 표면적인 덕행은 그저 남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장식일 뿐, 실제 본성과 성품은 여전히 본모습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사람의 행위와 겉모습에서부터 손을 써 사람을 속박하고 통제함으로써 사람이 좋은 행위로 스스로를 위장하고 포장하는 한편, 사탄이 인류를 패괴시켰다는 사실을 좋은 행위로 덮어 버리게 한다. 물론,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다는 사실도 덮어 버린다. 사탄의 목적은 사람을 이러한 덕행의 논조로 통제하여 사람이 착한 일을 많이 하고 나쁜 일을 적게 하게 하는 것이며, 나아가 통치 계급의 일에 반항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에 대한 통치 계급의 통치와 통제에 더 도움이 된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사람은 이 덕행의 논조들을 받아들여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이론적 근거로 삼은 후,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멀리하고 그것들에 거부감을 갖게 된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르쳐 준 긍정적인 사물, 혹은 진리를 사람이 이해하고 깨닫는 것은 무척 힘이 들게 되고, 각종 거부감과 관념이 생기게 된다. 덕행의 사상을 지니면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더욱 어려워지며, 패괴 성품을 인식하고 변화되는 것의 난이도가 더욱 올라간다. 그러므로 덕행 측면의 갖가지 논조와 사상은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을 심각하게 가로막으며, 당연히 진리를 받아들이는 정도에도 지장을 준다. 사탄은 덕행의 논조를 주입하는 방식으로 사람이 갖가지 그릇되고 부정적인 사상 관점을 갖게 하고, 사람이 이 사상 관점들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게 한다. 사람이 이 덕행과 관련된 논조의 사상을 이론적 기초로 하고 기준으로 삼아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한다면 패괴 성품이 줄어들거나 바뀌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어느 정도 더 심해지며 원래보다 더 심각하게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할 때, 하나님 말씀이 사람에게 공급해 줄 때, 가장 큰 방해물은 사람의 패괴 성품이 아니라 사탄에게서 비롯된 사탄의 각종 철학과 덕행의 논조, 그리고 사탄에게 속하는 각종 사상 관념이다. 이는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킨 결과이며, 각종 덕행의 논조가 패괴된 인류에게서 발휘한 부정적인 역할이다. 이는 사탄이 덕행에 관한 말을 퍼뜨리고 제창함으로써 달성하려는 진짜 목적이기도 하다.

지난번 예배 때는 “물 한 방울의 은혜라도 넘치는 샘물로 보답하라.”,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마라.”,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라는 세 가지 덕행의 논조에 대해 중점적으로 교제했으니, 오늘은 “부귀에도 미혹되지 않고 가난에도 그 뜻이 흔들리지 않으며 위세나 무력에도 그 뜻이 꺾이지 않는다.”라는 말에 관해 교제하겠다. 이 논조 또한 사람들 가운데서 생겨난 것으로, 패괴된 인류에게서 비롯된 사상 관점이다. 물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류에 대한 사탄의 패괴와 미혹에서 비롯되었다. 이 논조 역시 예전에 교제한 다른 덕행의 논조와 글귀만 다를 뿐, 동일한 작용을 하고 동일한 성질을 갖는다. 이 말들은 다 무척 호기로운 말인데, 몹시도 기개 있고 호탕해 보이며, 사람을 고양시키는 것 같다. 하나님 말씀을 들어 본 적이 없고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면, 이 말들이 사람의 마음을 몹시 흥분시키고 피 끓게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또 이 말들을 듣는 순간 힘이 생겨 주먹을 쥐고,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며, 내면의 격앙된 심정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이것이 바로 중국 문화이자 용의 정신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지금 너희는 이런 느낌이 드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느냐? (지금은 이 말들이 좋지 않고, 긍정적이지도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째서 예전과 다른 느낌을 받는 것이겠느냐? 사람이 나이가 들고 너무 많은 고난을 겪어서 젊은 시절의 경망스럽던 예기가 사라졌기 때문이겠느냐? 아니면 얼마간 진리를 깨달은 후 이 덕행의 논조들이 몹시 공허하고 실제적이지 않으며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겠느냐? (주된 이유는 그 논조들이 진리에 부합하지 않고 비실용적이기 때문입니다.) 정확하다. 이 덕행의 논조들은 너무 공허하고 실제적이지 않다. “부귀에도 미혹되지 않고 가난에도 그 뜻이 흔들리지 않으며 위세나 무력에도 그 뜻이 꺾이지 않는다.”라는 덕행의 논조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분석하고 해부한 다음 예전에 교제한 몇 가지 측면의 원칙과 연결시켜 이 논조 안에 숨겨진 사탄의 간계와 황당한 점을 중점적으로 폭로해 보아라. 해부할 수 있겠느냐? 먼저 이 말의 정확한 뜻이 무엇인지 이야기해 보아라. (그 말은 맹자가 제시한, 사내대장부가 되기 위해 갖춰야 할 세 가지 조건으로, 현대에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부귀영화는 그의 마음을 어지럽힐 수 없고, 가난하고 비천한 처지는 그의 강인한 의지를 흔들어 놓을 수 없으며, 권력과 폭력의 위협은 그를 굴복시킬 수 없다.’라고요.) 전에 말한 현명하고 어질고 정숙하고 유덕해야 한다는 덕행의 논조가 여성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면, 이 논조는 말할 것도 없이 남성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부귀영화를 누리는 삶이든 빈곤한 처지든, 아니면 권력이나 폭력을 직면한 상황이든, 다양한 환경에 있는 남성들에 대한 요구이다. 그럼 남성에 대한 요구에는 전부 몇 가지가 있느냐? 강인한 의지를 갖고 불굴의 마음을 지니라고, 또 권력과 폭력 앞에서 굴복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이 요구들이 정상 인성을 겨냥해 제시한 것인지, 사람이 처한 실생활 속 환경을 겨냥해 제시한 것인지 보아라. 그러니까 남성에게 이런 요구를 제시하는 것이 공허하지는 않은지, 실제적인지 보라는 것이다. 전통문화가 여성에게 제시한 덕행 측면의 요구는 현명하고 어질고 정숙하고 유덕해야 한다(賢良淑德)는 것이었다. 원문을 보면 현(賢)은 현명함을, 량(良)은 선량함을, 숙(淑)은 정숙함을, 덕(德)은 덕행을 갖추고 덕행이 좋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하나 다 더없이 유한 요구이다. 남성은 현명하고 어질고 정숙하고 유덕할 필요가 없고, 여성은 강인한 의지와 불굴의 마음을 지닐 필요가 없다. 그러니 권력이나 폭력을 마주하면 굴복해도 된다. 다시 말해, “부귀에도 미혹되지 않고 가난에도 그 뜻이 흔들리지 않으며 위세나 무력에도 그 뜻이 꺾이지 않는다.”라는 덕행 측면의 요구는 여성에게 충분한 운신 공간을 주며, 매우 관용적이고 포용적이다. 이 관용과 포용이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다르게 이해할 수는 없겠느냐? (그것은 일종의 차별입니다.) 내 생각도 그렇다. 사실 이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다. 여성은 그렇게 강인한 의지가 없다고, 조신한 여자이고, 칠칠치 못한 존재라고, 자녀를 낳고 가르치고 남편을 도우며 집안일을 잘 처리하고 남과 싸우거나 시비를 따지지 않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성에게 사업을 하고 강인한 의지를 가지라고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여성은 그 요구에 부합할 수 없다고 말이다. 그러므로 여성에 대한 이 요구들은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말 그대로 차별이고 비하라고 하는 것이다. “부귀에도 미혹되지 않고 가난에도 그 뜻이 흔들리지 않으며 위세나 무력에도 그 뜻이 꺾이지 않는다.”라는 덕행의 논조는 남성을 대상으로 하며, 남성에게 강인한 의지와 불굴의 마음을 가지라고, 또 권력과 폭력에 굴복하지 않는 사내대장부의 기개를 가지라고 요구한다. 이 요구가 옳으냐? 합리적이냐? 남성에 대한 요구를 보면, 이 덕행의 논조를 제시한 사람은 남성을 무척 높이 평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성에 대한 요구가 여성보다 높았으니 말이다. 여기에서 성별의 본질 면에서 보든 아니면 남성의 사회적 지위와 본능 면에서 보든 남성은 여성보다 높아야 한다는 생각을 알 수 있다. 이 덕행의 논조는 이런 각도에서 출발해 만들어진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분명 양성평등을 이루지 못한 사회의 산물이다. 이 사회에서 남성은 끊임없이 여성을 차별하고 비하하며, 여성의 생활 반경을 축소시키고, 여성의 존재 가치를 무시한다. 또 끊임없이 남성의 가치를 끌어올리고, 남성의 사회적 지위를 높여 남성의 권리가 여성의 권리를 압도하게 한다. 이것이 사회에 가져온 작용과 결과는 무엇이냐? 이 사회는 남성이 주도권을 쥐고 이끌어 나가는 가부장적 사회이다. 여성은 남성의 지휘와 압제, 통제 아래 있어야 한다. 이와 동시에 남성은 다양한 직업에 종사할 수 있지만, 여성이 종사할 수 있는 직업 범위는 어느 정도 축소되고 제한되어야 한다. 남성은 사회의 모든 권리를 충분히 누려야 하지만, 여성이 누릴 수 있는 권리 범위는 몹시 제한적이다. 남성이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 선택하지 않는 일, 하면 차별받는 일은 여성에게 던져 줘도 된다. 예를 들어, 세탁이나 요리, 서비스업, 수입이 적고 사회적 지위가 낮은 직업이나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직업은 여성에게 남겨 준다. 즉, 남성은 직업과 사회적 지위를 선택할 때, 남성의 권리를 충분히 누릴 수 있고 사회가 남성에게 부여한 특권 또한 누릴 수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남성이 먼저고 여성은 그다음이다. 심지어 여성에게는 아예 선택의 여지나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다. 여성은 그저 수동적으로 기다리고 선택받을 뿐이며, 마지막에는 수동적으로 이 사회에서 도태되고 버림받는다. 그래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상대적으로 유하지만, 남성에 대한 요구는 상대적으로 가혹하고 각박한 것이다. 하지만 남성에 대한 요구든 여성에 대한 요구든, 이 덕행의 요구가 나온 출발점과 목적은 사람이 사회와 민족, 국가에 더 열심히 봉사하게 하는 것이며, 당연히 최종적으로 통치 계층이나 통치자에게 봉사하게 하는 것이다. “부귀에도 미혹되지 않고 가난에도 그 뜻이 흔들리지 않으며 위세나 무력에도 그 뜻이 꺾이지 않는다.”라는 덕행의 논조는 간파하기가 무척 쉽다. 이 덕행의 요구를 제시한 사람은 남성에게 일종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눈에 남성은 강인한 의지와 불굴의 마음을 지녀야 하고, 권력과 폭력에 굴복하지 않는 기개를 지녀야 했다. 이 몇 가지 요구를 통해서 이 말을 한 사람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지 않겠느냐? 바로 이 사회의 쓸모 있는 남성과 강인한 의지를 지닌 남성이 사회와 민족, 국가에 더 열심히 봉사함으로써 마지막에는 권력자에게 더 열심히 봉사하게 하는 것이며, 남성이 사회에서 자신의 가치와 역할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남성만이 사내대장부라고 불릴 수 있다. 만약 남성이 이 몇 가지 요구에 부합하지 못한다면, 도덕 학자와 통치자들 눈에는 사내대장부로 보이지 않는다. 그저 범인(凡人)이나 천민으로 불리며 차별받을 뿐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요구하는 강인한 의지와 불굴의 마음, 그리고 권력과 폭력에 굴복하지 않는 기개를 갖추지 못한 남성은 평범하기 그지없고 포부도 없는 사람이며,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갈 뿐 사회나 민족, 국가에 자신의 가치를 기여하지 못하고, 통치자나 국가, 민족에 중용되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사회에서 인정받지도 중시되지도 못하며, 권력자에게도 중요한 인물이 아니다. 그런 남성은 통치자나 도덕 학자들에게 범인이나 천민, 남성 가운데서의 말종으로 보일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너희는 이 논조를 인정하느냐? 이 논조가 적절하냐? 남성에게 공평하냐? (불공평합니다.) 남성은 반드시 마음에 천하와 나라, 민족의 대업을 품어야 하는 것이냐? 평범하게 본연의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냐? 눈물을 흘릴 수 없고, 정 때문에 힘들어해서도 안 되며, 사사로운 마음을 가져서도 안 되고, 가족들이 소소한 일상을 보내도록 지켜 줘서도 안 되는 것이냐? 반드시 마음에 천하를 품어야 사내대장부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냐? 반드시 사내대장부라고 불려야 남성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냐? 남성에 대한 정의가 반드시 사내대장부여야 하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상들은 남성에 대한 모욕이자, 남성에 대한 무형의 인신공격이다. 공감하느냐? (그렇습니다.) 남성은 강인한 의지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냐? 불굴의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냐? 권력과 폭력 앞에서 살아남기 위해 허리를 굽혀 보전을 꾀해서는 안 되는 것이냐? (그래도 됩니다.) 여성이 갖추지 않은 것이라면 남성 역시 갖추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니겠느냐? 스스로를 좀 풀어 주고, 사내대장부가 아니라 평범한 남성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느냐? (그래도 됩니다.) 그러면 사람이 자유를 얻고, 남성으로 살아가는 길이 넓어지며, 남성으로 사는 것이 그리 피곤하지도 않고,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현재, 적잖은 국가가 “부귀에도 미혹되지 않고 가난에도 그 뜻이 흔들리지 않으며 위세나 무력에도 그 뜻이 꺾이지 않는다.”라는 전통문화의 사상으로 남성들을 옭아매고 있다. 사회에서 남성이 결정권을 갖는 가부장제가 중심이 되는 이들 국가는 가정에서 사회에 이르기까지, 또 사회에서 국가에 이르기까지 모두 남성들이 주도권을 잡고 어디에서든 우선시되며 우세를 지니고 우월감을 갖는다. 또한, 남성에 대한 사회, 민족, 국가의 요구 기준도 무척 높다. 이는 남성에게 극도의 압박감을 가져다주며, 수많은 부작용을 야기했다. 어떤 남성은 실업자가 된 후 차마 가족들에게 알리지 못해 매일 가방을 메고 출근하는 척 집을 나서지만 실제로는 거리를 돌아다니는데, 때로는 깊은 밤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간다. 그러면서 가족들에게는 회사에서 야근했다고 말하고 이튿날에도 별 수 없이 거리를 떠돈다. 이런 전통문화의 사상과 남성의 사회적 책임, 사회적 포지션은 남성에게 압박감과 굴욕감을 주고 남성의 인성을 왜곡한다. 그리하여 수많은 남성이 난관에 부딪혔을 때 초조함과 억압감을 느끼며, 나아가 무너지게 만든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그들은 자신이 남성이며 남성은 마땅히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고, 남성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남성은 울어서도 괴로워해서도 실업자가 되어서도 안 된다고, 사회에서는 우뚝 서야 하고 집에서는 기둥이 되어야 한다고, “남자는 울지 않는다.”라는 이방인들 말처럼 나약해지거나 어떤 결함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 관점은 전부 도덕 학자들이 남성의 포지션을 잘못 설정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며, 또한 그들이 남성의 지위를 계속 끌어올렸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 사상 관점들은 남성에게 갖가지 혼란과 번뇌, 고통을 가져다줬을 뿐만 아니라 남성들의 마음속 굴레가 되어 사회에서 남성의 위치와 처지, 상황을 점점 더 난처하게 하고 있다. 남성의 압박감이 커짐에 따라 그로 인한 부작용도 점점 확대되고 있다. 심지어 어떤 남성들은 남성의 포지션에 대한 곡해로 인해 늘 스스로를 대단한 남자로 여기면서 남성은 큰사람, 여성은 작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매사에 나서려고 하고, 주도권을 잡으려 하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여성에게 가정 폭력을 행사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들은 인류가 남성의 포지션을 잘못 설정한 것과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세계의 많은 국가에서 남성이 여성보다 높은 지위를 갖고 있다. 가정에서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남성들은 출근해서 돈만 벌어 오면 그만이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반면, 여성은 집안의 모든 일을 전담하면서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어도 따지거나 원망하지 못하며, 남들에게 하소연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 여성의 지위가 어느 정도로 낮더냐? 가정에서 밥상의 좋은 음식은 모두 남자가 먼저고 여자는 뒷전이며, 호적상에도 남자는 세대주, 여성은 세대원으로 나온다. 이렇게 사소한 일 하나에서도 남녀의 지위 차이를 알 수 있다. 남녀의 분업이 다른 이유는 성별이 다르기 때문인데, 가정에서 남녀의 지위에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 것은 불공평하지 않으냐? 이는 전통문화 교육이 초래한 일 아니겠느냐? 사회에서 여성들만 남성이 더 존귀하고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남성들까지도 자신이 여성보다 고귀하고 우위에 있다고 여긴다. 남성들은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할 수 있고, 사회와 민족과 국가를 위해 더 큰 역량을 발휘할 수 있지만, 여성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이는 사실 왜곡 아니겠느냐? 이런 식의 사실 왜곡은 어떻게 생긴 것이냐? 사회 교육과 전통문화에 물들고 영향받은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것은 전통문화의 교육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인류 가운데서 현실 사회에서든 한 민족이나 국가에서든, 어떤 기형적인 문제가 생겨나더라도 그 원인은 전부 사회학자들이나 통치자들이 부정확한 사상을 제창했기 때문이며, 그것은 한 사회, 민족, 국가의 지도자가 제창한 부정확한 사상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만약 그들이 제창한 사상, 관점이 어느 정도 긍정적이고 진리에 가깝다면,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문제는 상대적으로 적을 것이다. 반면, 만약 그들이 제창한 사상이 치우치고 인성을 왜곡한다면 사회에서, 한 민족이나 국가에서 기형적인 일들이 무척 많이 발생할 것이다. 사회학자들은 가부장제를 제창하고 남성의 가치를 제고시키는 반면 여성의 가치와 존엄은 깎아내린다. 그럼 그 사회에서는 분명 남녀의 사회적 지위가 벌어지고 큰 차이가 나는 현상이 나타날 것이며, 이에 따라 각종 불평등 문제가 생겨날 것이다. 예를 들어, 직업의 불평등, 사회적 지위의 불평등, 사회 복지의 불평등, 가정 내 양성 간 지위 격차와 분업 격차 등이 있을 것인데, 이 모두 기형적일 것이다. 이 기형적인 문제들의 발생은 앞서 말한 사상 관점의 제창자들과 관계가 있으며, 그것은 정치가나 사회학자들이 초래한 것이다. 만약 인류가 처음부터 이런 일에 대해 올바른 관점과 견해를 가졌더라면 각 나라, 혹은 각 민족에서 나타나는 이 기형적인 문제들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을 것이다.

방금 교제한 내용을 통해 볼 때, 남성을 대하는 올바른 관점은 무엇이겠느냐? 그러니까 남성이 어떤 태도와 인성, 추구, 사회적 지위를 지니는 게 정상이겠느냐? 남성은 자신의 사회적 책임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남성과 여성 사이에 성별의 차이 말고 사회적 책임과 지위의 차이가 있어야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남성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올바르고 객관적이며 인성적이고 진리 원칙에 부합하겠느냐? 이것이 바로 현재 우리가 분명히 이해해야 할 문제이다. 이제 도대체 어떻게 남성을 대해야 하는지에 관해 이야기하겠다.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책임을 구분해야겠느냐?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평등해야 하지 않겠느냐? 남성의 지위를 지나치게 높이고 여성을 깎아내리는 것이 공평하겠느냐? (불공평합니다.) 그럼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도대체 어떻게 대하는 것이 공평하고 합리적이겠느냐? 그 원칙은 무엇이겠느냐? (양성평등을 실현하고, 남성과 여성을 공평하게 대해야 합니다.) 공평하게 대한다는 것은 이론적 기초이다. 어떻게 실행해야 공평성과 합리성을 실현할 수 있겠느냐? 이는 현실적인 문제가 아니겠느냐? 먼저, 남녀의 지위가 평등하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남녀의 사회 분업 역시 평등해야 하며, 자질과 업무 능력을 고려하여 안배하는 것이 적절하다. 특히 인권 면에서는 더더욱 평등해야 한다. 남성이 누리는 것은 여성도 누려야 사회에서 남녀의 지위 평등을 보장할 수 있다.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지 말고 해당 업무를 할 수 있고 지도자 자리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맡기는 것이다. 이 원칙이 어떠하냐? (좋습니다.) 이는 양성평등을 구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소방대원을 모집하는데 남성 두 명과 여성 두 명이 지원했다면 누구를 채용해야겠느냐? 공평하게 대하라는 것은 이론적 기초이자 원칙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겠느냐? 방금 말했듯이 능력과 자질에 근거하여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에게 시켜야 한다. 이 원칙대로 채용하되, 그들 중 누구의 신체적 능력이 좋은지, 둔하지 않은지 보아야 한다. 소방 업무는 위급 상황에서 빠른 행동력을 요구한다. 거북이나 늙은 소처럼 너무 굼뜨거나 둔한 사람이라면 일에 지장을 줄 것이다. 각자의 스펙을 보고 자질이나 능력, 경력, 그리고 소방 업무에 대한 직무 적성 등 여러 측면을 고려하여 결론을 내렸는데, 남성 한 명과 여성 한 명이 비교적 업무에 적합했다. 남성의 경우 키가 크고 몸이 건장하며 소방 업무 관련 경력이 있었고, 몇 차례 소방 구조 업무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 여성의 경우 민첩한 데다가 엄격한 훈련을 받아 소방 상식과 업무 절차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며 자질이 있어 다른 직장에서도 뛰어난 실력으로 포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에 그 둘을 뽑았다. 이것이 적절하지 않으냐? (적절합니다.) 이는 쟁쟁한 사람들 가운데서 뛰어난 자를 뽑으면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사람을 채용할 때 속으로 반드시 남성, 혹은 여성을 써야겠다고 규정하지 않고, 남녀 구분 없이 업무만 감당할 수 있다면 누구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든, 남성을 뽑든 여성을 뽑든, 공평하게 대한다는 큰 원칙 외에 구체적인 실행 원칙은 바로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 감당할 수 있는 사람에게 시키는 것이다. 그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이렇게 하면 더는 ‘남존여비’의 사상 관점에 속박되거나 얽매이지 않을 수 있고, 어떤 낡은 사상 관점도 그 일에 대한 네 판단과 선택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네 사상 관점으로 볼 때 성별을 떠나 업무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에게 일을 시켜야 한다. 이것이 공정하지 않겠느냐? 일단, 너는 이 일을 처리할 때 남성이나 여성에게 편견이 없으며, 여성 중에도 걸출한 인재가 많고, 그런 사람이 꽤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너는 이러한 식견으로 인해 여성의 업무 능력이나 사회에서 발휘하는 가치가 남성보다 못하지 않다고 확신한다. 이러한 식견과 인식을 갖고 일을 처리하면 이 사실에 근거하여 정확한 판단과 선택을 내릴 수 있다. 즉,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고 성별에 대한 모든 편견이 사라지면, 네 인성은 이 부분에서 비교적 정상적일 것이며, 공정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너는 남존여비라는 전통문화의 사슬을 끊고 더는 그것에 사상이 얽매이지 않을 것이며, 영향을 받지도 않을 것이다. 사회에서 어떤 사조나 풍조가 유행하든 상관없이 요컨대 너는 이미 그런 풍조에서 벗어나 거기에 얽매이거나 영향받지 않고 사실과 진상을 직시할 수 있다. 물론, 더 좋은 것은 하나님 말씀과 진리 원칙대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게는 ‘남자는 사내대장부여야 하고, 여자는 조신한 여인이어야 한다’는 사상 관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네 사상 관점은 사람들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진보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상대적으로 진보한 것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노인이든 젊은이든, 네게서 공평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 이는 사람에게 해가 되는 게 아니라 은연중 유익이 된다. 만약 네가 계속 전통문화의 관점을 고수하며 “자고로 남자는 여자보다 지위가 높았지요. 각 분야의 걸출한 남성 인재가 여성보다 많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남자가 여자보다 뛰어나고, 사회적 가치도 여자보다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사회적 가치가 높으면 사회적 지위도 높아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 이 사회에서는 남성이 결정권을 가져야 해요. 남성이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해야 한다고요. 여성은 남성의 말을 듣고, 남성은 여성을 단속하고 지배해야 하는 거죠.”라고 말한다면, 이런 사상 관점은 너무 뒤처지고 진부한 것이며, 진리 원칙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네가 이런 사상 관점을 지니고 있다면 여성을 무시하거나 억누르기만 할 것이며, 반드시 사회적 흐름에 규탄받고 도태될 것이다. 양성평등은 이미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올바른 관점으로,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부합한다. 사람을 공평하게 대해야지, 남성을 우러러보고 여성을 경시해서도, 여성의 가치나 업무 능력과 자질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이는 각국의 의식 있는 민중 사이에서 이미 기본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한 사실이다. 만약 네 주된 사상이 여전히 전통문화에 영향을 받아 마음속으로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다고 생각한다면, 일을 처리할 때 너도 모르게 남성에게 더 많은 시선을 주고 그들을 선택함으로써 남성에게 상대적으로 더 많은 기회를 줄 것이다. 설령 업무 능력이 좀 부족한 남성일지라도 여성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남성이 하는 일을 여성은 할 수도 없고 따라잡을 수도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네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는 치우친 관점이며, 네가 내린 판단과 최종 결정은 네 생각에 따라 치우칠 것이다. 예를 들어, 방금 말한 소방대원 채용에 대해 너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여성이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을까? 여성의 힘이 얼마나 된다고. 여성이 민첩해 봤자 어디에 쓰겠어? 엄격한 훈련을 받았다고 해도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할걸.’ 그런데도 너는 사람을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는 생각이 나서 결국 남성 두 명, 여성 한 명을 채용했다. 사실 여성 한 명을 채용한 것은 보여 주기식이었고 대충 형식만 따른 것으로, 여심 달래기용으로 체면을 살려 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 처사가 어떠하냐? 너는 이렇게 채용했을 뿐만 아니라 업무를 분장할 때도 여성을 무시하는 관점을 지닌 채 별 볼 일 없는 일, 쉬운 일들만 주면서 스스로 인간미가 있다고, 여성을 돌봐주고 대우하고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 여성이 보기에 너는 그녀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준 것이다. 왜 그렇겠느냐? 너는 여성이 연약하고 쉽게 무너지며, 여성은 작은 사람이고 남성은 사내대장부이니 남성이 여성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네 이런 생각은 어떻게 생겨난 것이냐? 전통문화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제 근원을 찾은 것이다. 네가 아무리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하겠다고 말해도, 네 이러한 처사를 통해 볼 때, 너는 여전히 ‘남존여비’의 전통문화 사상에 속박되고 얽매여 있으며, 그 사상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이는 네 행동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러한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진리를 구해 이 사상의 본질을 꿰뚫어 봐야 한다. 또 일을 처리할 때 이러한 전통문화의 사상에 영향을 받거나 통제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내던지고 저버려야 한다. 다시는 전통문화의 사상 관점에 근거하여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한, 어떤 판단이나 선택을 내릴 때 전통문화에 근거할 게 아니라 하나님 말씀과 진리 원칙에 근거하여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해야 한다. 그러면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으며, 하나님이 인정하는 진정한 피조물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계속 사탄에게 통제받고 사탄의 권력 아래에서 살 뿐,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살지 못할 것이다. 사실이 이러하다.

이제 “부귀에도 미혹되지 않고 가난에도 그 뜻이 흔들리지 않으며 위세나 무력에도 그 뜻이 꺾이지 않는다.”라는 덕행에 관한 이 논조의 본질에 대해 분명히 이해가 되었느냐? 이 논조가 나온 사회적 배경에 대해서도 이해했느냐? (그렇습니다.) 남성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고 남성에게 더 큰 권리를 주기 위해서는 남성에게 더 높은 요구를 해야 하며, 사람들 마음속에 사내대장부라는 남성의 이미지를 심어야 한다. 이 이미지가 바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부귀에도 미혹되지 않고 가난에도 그 뜻이 흔들리지 않으며 위세나 무력에도 그 뜻이 꺾이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이 덕행의 논조를 제시한 도덕 학자들은 한 측면으로는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사나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 즉, 남성의 정의를 알려 준 것이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그들은 남성이 사회에서 위험한 일에 용감히 맞서고, 자신만의 견해를 내세우며, 사회적 지위를 공고히 하고, 사회의 주요 권세를 손에 넣어야 한다고 제창한다. 이 ‘남존여비’의 사상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일부 국가나 민족이 이러한 문제를 어느 정도 개선했다고는 하나, 이 사상은 많은 나라, 많은 민족 사이에서 여전히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국가와 사회의 흐름을 통제하고 주도하는 한편,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분업과 사회적 지위, 가치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데, 오늘날까지도 별로 변한 것이 없다. 다시 말해, 수많은 국가와 민족에서 여성은 여전히 차별받으며 배척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무척 비통한 일로, 세상의 가장 큰 불평등이다. 여성이 차별받고 배척당하는지, 여성과 남성이 평등한지는 한 국가와 민족이 진보했는지 낙후되었는지를 가늠하는 분명한 기준이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창조한 남성과 여성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떤 올바른 관점을 가져야 할지에 관해 교제하였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모두 정상 인성을 지니고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갖춘 존재인데, 이는 남성과 여성의 공통점이다. 남성과 여성은 성별의 차이 외에 생각이나 본능 면에서, 갖가지 일을 대하는 반응이나 자질, 재능 등 여러 면에서 기본적으로 비슷하다.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어도 기본적으로는 거기서 거기이다. 그들의 생활 습관이나 생활 규칙 또는 사회나 세상의 흐름, 사람과 일, 사물, 하나님이 지은 만물을 대하는 갖가지 사상 관점, 태도는 기본적으로 동일하며, 신체 반응이나 사상적 반응 등 특수한 일들이 임했을 때의 반응 역시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이것들이 왜 일치하겠느냐? 남성이든 여성이든 모두 유일무이한 창조주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닌 생명의 숨결과 자유 의지, 종사할 수 있는 각종 활동, 생활 법칙 등은 전부 창조주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렇기에 이러한 현상을 통해 볼 때, 남성과 여성은 성별의 차이와 각자 잘하는 것, 업무가 다른 것 외에 나머지는 크게 다를 게 없다. 예를 들어, 남성이 할 수 있는 수많은 일을 여성도 할 수 있다. 과학자 중에는 여성이 있고, 비행기 조종사나 우주 비행사 중에도 여성이 있으며, 대통령이나 정부 관료 중에도 여성이 있다. 이는 성별의 차이 외에, 남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비슷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체적인 수용 능력이나 감정의 표출 역시 남성과 여성이 거의 비슷하다. 가족이 죽었을 때, 여성은 금방이라도 죽어 버릴 것처럼 몹시 가슴 아프게 운다. 남성 역시 부모나 배우자가 죽었을 때 세상이 놀랄 만큼 큰 소리로 통곡한다. 또 이혼을 하게 된 여성은 낙담하고 기운을 잃으며 괴로워하고, 심지어는 자살을 선택하기도 한다. 만약 남편이 아내에게 버림받았다면 그 역시 기운을 잃을 것이며, 심지어는 몰래 이불을 뒤집어쓰고 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남성이라는 이유로 차마 다른 사람 앞에서 이러한 괴로움을 호소하지 못하고 겉으로는 강인한 척 꾸미지만, 곁에 아무도 없을 때면 그 역시 정상적으로 눈물을 흘린다. 특수한 일 앞에서 남성과 여성은 모두 감정적으로 변해 울어야 할 때 울고 기뻐해야 할 때 기뻐한다. 이 밖에, 하나님 집에서 다양한 본분을 이행하고 여러 종류의 사역을 하는 인원을 보면, 여성에게는 발탁되고 양성되고 중용될 기회가 있고, 남성 역시 마찬가지로 발탁되고 양성되고 중용될 기회를 얻는다. 기회는 같고 대등하다. 또 여성이 일상생활 속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드러내는 각종 패괴는 남성이 드러내는 패괴와 다를 것이 없다. 심지어 어떤 여성들은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하는 악인, 적그리스도다. 남성도 그렇지 않겠느냐? 사람의 패괴 성품은 동일하니 말이다. 만약 악인이라면 똑같이 악을 행하고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할 것이며, 독립 왕국을 세울 것이다. 그럼 제명할 때,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겠느냐? 구분하지 않고 똑같이 제명한다. 너희가 보기에 제명당한 사람 중에 남성이 많더냐, 여성이 많더냐? 비슷하다. 악을 행하고 교란하고 방해하는 자는 모두 적그리스도, 악인에 속하며, 남성이든 여성이든 상관하지 말고 제명해야 한다. 혹자는 “여성은 교란하고 방해하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여성이 그런 일을 하면 얼마나 남부끄럽겠습니까? 체면을 생각해야죠! 작은 여자가 어떻게 그렇게 큰 악행을 저지르겠어요? 말도 안 됩니다. 그녀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남성은 간이 큽니다. 태생이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적그리스도이고 악을 행하는 사람이니, 저지른 악행이 얼마 안 돼도 출교시켜야 합니다. 제대로 알아보지 않았더라도 출교시켜야 한다고요.”라고 말하는데, 하나님 집에서 이렇게 행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집에서는 이렇게 행하지 않는다. 하나님 집에서는 원칙에 근거하여 사람을 정리하며, 남녀 구분을 짓지 않는다. 여성의 체면도, 남성의 체면도 봐주지 않고 공평하게 대한다는 것이다. 네가 남성이고 악을 행했으며, 제명이나 출교의 원칙에 부합한다면 하나님 집에서는 원칙대로 너를 정리할 것이다. 한편, 네가 여성인데 교란하고 방해하는 일을 저질렀으며, 악인, 적그리스도라면 마찬가지로 제명되고 출교될 것이다. 네가 여성이고 눈물을 흘리면서 운다는 이유로 너를 제명하지 않거나 출교시키지 않는 일은 없다. 하나님 집에서는 원칙대로 일을 처리해야 한다. 여성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복받기를 추구하고 복을 받으려는 욕망과 속셈을 품는다면, 남성에게는 그런 마음이 없겠느냐? 남성에게도 있다. 그런 마음은 동일하다. 복받으려는 야심과 욕망은 남성이 여성보다 못하지 않다. 그럼 하나님을 거역하는 정도는 여성과 남성 중 누가 더 심하겠느냐? 모두 같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야 진상을 알게 됐네요. 남성과 여성 모두 똑같이 패괴된 거였어요! 여태까지는 남성은 사내대장부이니 군자가 되어야 한다고, 무슨 일을 하더라도 광명정대해야 하고 모두의 앞에 공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여성처럼 옹졸하게 굴고 사소한 것 하나까지 끝도 없이 따지면서 뒤에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고, 일 처리도 공개하지 못하는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제 보니 남성 중에도 나쁜 사람이 적지 않네요. 심지어 더 심각하고 더 많은 악행을 저지른 사람도 있고요.” 이제 이 일들에 대해 제대로 이해한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모든 사람의 패괴 성품은 동일하며, 그저 인성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남성과 여성을 이렇게 대해야 공평하다. 여기에 편견이 있느냐? (없습니다.) 남존여비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느냐?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들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어떤 사람의 좋고 나쁨을 가늠할 때는 먼저 그의 성별을 볼 게 아니라 인성이 어떤지를 봐야 한다. 그다음 그가 다양한 부분에서 드러내는 패괴 성품에 근거하여 그의 본질을 판단하면 된다. 사람을 이렇게 보면 정확하다.

앞에서 교제한 현상들로 볼 때, 남성과 여성은 성별의 차이 외에 본능의 발현이나 각종 패괴 성품의 표출, 본성 본질 면에서 다를 바가 없다. 사람의 육의 본질과 사람의 성품,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을 지을 때 사람에게 부여한 본능, 의지력, 자유 의지는 모두 같다. 그러므로 사람은 남성과 여성을 대할 때 표면만 봐서도 안 되고, 더욱이 이 세상이 교육한 전통문화의 사상에 근거해서도 안 되며,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 왜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야겠느냐? 왜 전통문화의 그 사상 관점으로 보면 안 되는 것이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인류에게는 수천 년의 역사가 있고, 학설과 서적도 무척 많습니다. 설마 인류의 관점과 주장 중 옳은 것이 하나도 없단 말입니까? 진리가 전혀 없단 말입니까?”라고 묻는데, 이 말은 무엇이 그릇되었느냐? 인류는 피조물에 속하며, 사탄에게 수천 년간 패괴되었고, 사탄 성품으로 점철되었다. 그 결과 인류 사회가 이토록 어둡고 사악해졌다. 누구도 그 근원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사탄을 분별하지 못하며, 하나님을 진실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패괴된 인류의 관점은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오직 창조주만이 이 모든 것을 손바닥 보듯 훤히 꿰고 있다.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진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만 얻을 수 있다. 인간 세상의 문화는 전부 사탄의 패괴로 인해 나타난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해 본 적이 없고, 또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자도 없다. 그러므로 인류의 전통문화 속에서는 진리가 생겨날 수 없다. 진리는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며, 그리스도가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사탄에게 패괴된 후 사탄의 본성과 성품을 갖게 되었으며, 누구나 명인과 위인을 숭배하고 사탄을 따르게 되었다. 인간은 어떤 일을 대할 때나 정의할 때 항상 자신만의 속셈과 목적을 지닌다. 이 속셈과 목적이 누군가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든, 아니면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든 다 패괴 성품에 지배받는다. 그러므로 패괴된 인류가 정의한 일과 제창한 사상에는 반드시 사탄의 간계가 들어 있다. 이것이 한 가지 측면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할 때, 사람에게 어떤 능력이 있든, 지음 받은 인류의 기능과 본능, 본질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인류는 어떤 한 사람이 만든 것도, 소위 위인이나 마왕, 사탄, 또는 악령이 만든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류는 사람의 본능이나 기능, 본질을 결코 알지 못한다. 그럼 사람의 본능과 기능, 그리고 본질은 누가 가장 잘 알고 있겠느냐? 오직 창조주만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인류를 창조한 이가 바로 인류의 기능과 본능, 본질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존재이다. 물론, 인류를 정의하고, 남성이나 여성의 몸값, 신분, 본질을 규정할 자격을 지닌 존재이기도 하다. 이는 객관적인 사실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으로 인간을 지었는지, 인간을 지을 때 사람에게 어떤 본능을 주었는지, 그 육의 기능과 법칙은 무엇인지, 그가 어떤 일에 적합하고 어떤 일에 적합하지 않은지, 나아가 그의 수명이 얼마나 될지 등을 하나님은 이미 오래전에 정해 놓았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가 지은 인류를 가장 잘 알고 있으며, 그 외에는 누구도 지음 받은 인류를 더 잘 알지 못한다. 이것이 사실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류를 정의하고, 남성이나 여성의 신분, 지위, 가치, 기능, 그리고 사람이 걸어야 할 올바른 길을 규정할 자격을 갖는다. 하나님은 그가 지은 인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인류가 어디에 이를 수 있는지,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 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지음 받은 인류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창조주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직접 인류를 인도하고 공급하고 목양할 수 있다. 그 밖에 패괴된 인류의 논조는 전부 사람을 미혹하는 것인데, 특히 전통문화는 사람을 오도하고 마비시키고 옭아매기만 할 뿐이다. 물론, 그것은 일종의 속박이자 통제이기도 하다. 또 한 측면으로는,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했는데, 하나님이 사람에 대해 가장 걱정하는 것은 그들이 올바른 인생의 길을 걸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런데 사회나 민족, 국가는 오직 통치 계급의 이익과 정권을 공고히 하는 것만 고려할 뿐, 일반 민중의 삶이 어떠한지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 결과, 극단적이고 혼란스러운 일들이 발생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올바른 길을 걷도록 인도하지 않으며, 사람이 평생 가치 있고 광명정대하게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게 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그들의 통치와 사업, 야심, 욕망을 위해 봉사하도록 이용할 뿐이다. 그들이 어떤 주장과 사상 관점을 제시하든 그것은 전부 사람을 미혹시키기 위한 것이고, 사람의 사상을 옭아매 통제함으로써 사람들이 그들에게 봉사하고 충성을 바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인류의 미래와 앞날을 고려하지 않으며, 인류가 어떻게 해야 더 잘 생존할 수 있을지 역시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행사는 완전히 다르다. 하나님은 그의 계획대로 행사하며, 인류를 창조한 후 사람이 사람됨의 진리와 원칙을 더 많이 깨닫도록 인도함으로써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킨 진상을 분명히 알게 한다. 또한, 이것을 기초로 하나님이 사람을 훈계하고 가르치는 진리 원칙에 따라 사람이 올바른 인생의 길을 걷게 한다.

전통문화 중 덕행 측면의 이 갖가지 틀은 파급 범위가 무척 넓다. 그것은 다양한 측면에서 사람의 사상에 영향을 주며, 또한 사람의 사상을 미혹하고 옭아맨다. 오늘 교제한 것은 성별에 대한 전통문화의 치우친 주장과 관점으로, 이는 성별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큰 지장을 주었으며, 남성과 여성이 보편적으로 수많은 속박과 결박, 제약, 차별 등의 고통을 마주하게 했다. 이는 전부 사람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며, 전통문화가 사람에게 가져다준 영향이자 결과이다.

2022년 5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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