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추구란 무엇인가(10) 제 3 부

이어서 다음 덕행의 말,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에 관해 교제하도록 하겠다. 이 호기로워 보이는 말은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특히 정과 의리를 중요시하는 사람은 이 말을 좌우명으로 삼아 널리 친구를 사귄다.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라는 덕행의 말은 시대와 계층을 막론하고, 어디서든 그럭저럭 통용되는 말로서 인성의 양심과 이성에 상대적으로 부합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말은 사람이 양심적으로 신봉하는 ‘의리’에 부합한다. 의리를 중요시하는 사람은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고자 한다. 벗이 아무리 어렵고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을지라도 기꺼이 나서서 벗을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할 것이다. 이것은 남을 위해 헌신하는 정신이다.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라는 덕행의 말이 사람에게 주입한 것은 기본적으로 ‘의리’이다. 또 그 말이 사람의 인성에 대해 제기한 요구 기준과 그 말의 정수는 의리를 중요시하라는 것이다. 그럼 여기에서 ‘의리’란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의리의 기준은 무엇이겠느냐? 친구를 위해 자기 이익을 버리고, 친구를 만족시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며, 친구가 필요로 하는 것이 있으면 기꺼이 나서서 도와주고, 목숨을 버려야 한다면 목숨을 내놓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친구요, 진정한 의리라고 할 수 있다. 의리의 또 다른 해석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고 바치며 내놓는 등 생사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목숨을 내줄 수 있는 벗, 생사를 함께하는 벗이며, 진정한 의리이다. 도덕적 행위의 요구 가운데 친구에 대한 정의는 이렇다. 반드시 어떤 희생도 감수해야 진정한 친구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친구를 대할 때 사람이 신봉해야 하는 덕행의 준칙이며, 친구를 사귀는 일에서 덕행 측면에 대한 요구이다.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라는 덕행의 말은 사람에게 몹시 의롭고 호기롭고 위대하고 고상한 느낌을 주며, 감탄과 동조를 이끌어 낸다. 그렇게 하는 자는 마치 세상의 음식을 먹지 않는, 돌 속에서 태어난 비인류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모두가 이런 자들이 협객이나 검객처럼 매우 정의롭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순수하고 호기로운 사상 관점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쉽고,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 들어가기도 쉽다. 너희도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라는 말에 공감하지 않느냐? (공감합니다.) 비록 요즘 시대에는 벗을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하려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많은 이가 여전히 자신의 벗은 자신을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하기를, 의리를 중시하는 사람이기를, 의리가 있어서 자기가 어떤 고난에 처하든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도움의 손을 내밀어 주기를, 모든 것을 불사하고 스스로의 몸도 돌보지 않은 채 자기를 위해 어떤 일이든 해 주기를 바란다. 친구에게 이런 요구를 한다면, 여전히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라는 말의 사상 관점에 영향받고 속박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느냐? 여전히 그 낡은 전통적 사상 관점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현대인들은 종종 한탄하며 말한다. “사회 분위기가 갈수록 나빠지고 있어. 사람들 마음도 예전 같지 않고, 시대가 달라져서 친구 사이도 예전 같지 않지. 의리를 중시하는 사람도 없고 인간미도 없어. 사람들 관계는 갈수록 소원해지고 있고.” 오늘날, 친구 간의 의리를 중시하는 사람이 무척 적기는 하지만, 사람은 여전히 의협심과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할 수 있는’ 옛 시대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그들이 보여 준 품격을 숭상한다. 예를 들어, 현대인들은 벗을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한 옛사람의 역사 속 이야기, 특히 의리를 중시하는 강호인들 이야기를 드라마로 보면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의리를 중시하고 인간미 넘치던 그 시대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는 그 사상 관점이 사람들 마음속에서 긍정적인 사물로 떠받들어지고 있다는 의미 아니겠느냐? 좋은 사람으로 처신하며 좋은 사람이 되는 높은 도덕 기준으로 신봉되고 있다는 의미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현대인들은 스스로에게 그렇게 요구하지 못하고, 또 그렇게 해내지도 못하지만, 여전히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기를, 그런 사람과 사귀고 친구가 되어 자기가 어려운 일에 부닥쳤을 때 상대가 자기를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해 주기를 바란다.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라는 덕행의 말에 대한 사람의 태도와 관점을 보면, 의리를 중시하는 그런 사상 관점에 깊이 영향받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런 사상 관점에 영향을 받은 이상, 사람은 당연히 의리를 중시하고 신봉하는 사상 관점 속에서 살아가기가 쉬우며, 그런 사상 관점에 통제되고 지배되어 그것으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기가 쉽다. 이와 동시에, 그런 사상 관점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기가 쉽다. ‘그 사람은 의리를 중시할까? 의리를 중시한다면 좋은 사람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사귈 가치가 없지. 좋은 부류가 아닐 테니까.’라고 말이다. 물론, 너 역시 의리를 중시하는 사상에 영향받아 네 행위를 지배하고 속박하고 평가 내리기 쉬우며, 그것을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준칙이나 방향으로 삼기 쉽다. 예를 들어, 그런 사상 관점에 깊이 영향을 받은 상황에서는 형제자매들과 교류할 때 양심으로 네 행동을 판단하게 된다. 여기에서 양심이란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사실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의미하는 것은 의리이다. 가끔 형제자매들을 돕는 것도, 형제자매들을 동정하는 것도 의리 때문이며, 가끔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고 힘을 쓰는 것, 혹은 대가를 치르고 헌신하거나 한순간 어떤 다짐을 하는 것도 사실 전부 의리를 중시하는 사상에 지배되어 생긴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사람이 그런 사상 관점에 무척 깊이 영향받았으며, 이미 그것들에 속박되고 동화되어 있음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설명해 주지 않겠느냐? 속박되고 동화되어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의리를 중시하는 사상 관점이 사람의 행위를 지배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미 사람의 생존 철학, 생명이 되었다는 것 아니겠느냐? 또 사람은 그것을 단단히 붙들고 놓지 못하며 긍정적인 사물로 여긴다는 것 아니겠느냐? 어째서 긍정적인 사물로 여긴다고 하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본분을 대충 건성으로 이행하지 않고 많은 대가를 치르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것은 상당 부분 의리를 중시하는 사상에 지배된 것이고, 거기에 의리라는 성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양심을 지녀야 합니다. 대충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하면 안 돼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크나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큰 붉은 용이 그렇게 광적으로 탄압하고 박해하는 위험한 환경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가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도록 구원해 주셨죠. 우리는 양심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서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해야죠!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니, 하나님께 충성을 다해 그 사랑에 보답해야 합니다. 배은망덕하게 굴면 안 된다고요!” 또 어떤 사람들은 위험을 감내하고 대가를 치러야 하는 본분이 임하면 “다른 사람이 안 가면 제가 가겠습니다. 저는 위험이 두렵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당신은 왜 위험이 두렵지 않나요?”라고 물으면, 그는 “사람으로서 그 정도 기개도 없어서 되겠습니까? 하나님 집에서는 저를 박하게 대하지 않았고, 하나님은 제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따르기로 한 이상 제가 가진 힘을 바쳐야죠. 위험도 감내해야 하고요. 그 정도 의리는 반드시 지니고 지켜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이런 현상과 사람의 그런 표출은 어느 정도 의리를 중시하는 사상 관점에 지배된 것 아니겠느냐? 이런 사상 관점에 지배된 사람이 내리는 판단과 선택, 그리고 드러내는 태도는 대부분 진리 실행과 전혀 관계가 없다. 그것은 한순간의 감정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고, 한순간의 정서나 소망일 뿐이다. 그것은 진리 원칙을 지키는 것도, 본분을 이행하려는 주관적인 바람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며,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은 더더욱 아니기에, 보통 그 의리는 오래가지 못하고, 몇 번 지속되지 못하며, 긴 시간 유지되지 못한 채 얼마간 시간이 흐르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힘을 잃게 된다. 혹자는 ‘전에는 어떻게 그렇게 힘이 넘쳤을까? 어떻게 그렇게 기꺼이 하나님 집을 위해 그 위험한 사역을 맡은 거지? 지금은 왜 이렇게 힘을 잃은 걸까?’라고 생각하는데, 그때는 그저 순간적인 충동이나 소망, 또는 다짐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불가피하게 어느 정도의 의리가 그 안에 섞여 있었다. 여기까지 이야기했는데, 그럼 그 ‘의리’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겠느냐? 간단히 말하자면, 한순간의 정서와 기분이다. 즉, 어떤 특수한 환경과 배경 속에서 사람에게 생겨나는 정서이다. 이 정서는 무척 고양되고 올바르며 긍정적이라서 긍정적이고 올바른 판단, 선택을 하게 한다. 또 호기로운 말을 하게 하고, 분발하려는 마음을 갖게 한다. 하지만 그 바람은 진리를 사랑하고 깨닫고 실행하는 참된 내적 상태가 아니다. 그저 의리를 중시하는 사상 관점에 지배되어 생겨난 하나의 정서일 뿐이다. 이것이 간단한 설명이다. 깊이 있게 말하자면, 내가 보기에 의리는 사실 혈기의 표출이다. 혈기의 표출이란 무엇을 의미하느냐? 예를 들어, 사람이 한순간 기분이 좋아져서 하루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았는데 배도 안 고프고 피곤하지도 않다면 이것이 정상이겠느냐?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한 끼만 안 먹어도 배가 고프고, 밤새 잠을 설쳐도 정신이 오락가락하며 기력이 빠진다. 하지만 한순간 흥분하고 정서가 고양되어 배고픔도 피곤도, 기력이 빠진 것도 느끼지 못한다면 이는 비정상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생명 성품의 자연스러운 모습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비정상적인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엇이겠느냐? 바로 혈기다. 혈기란 또 무엇이냐? 사람이 한때의 기쁨이나 분노 등 비정상적인 정서로 인해 비이성적인 상황에서 과격한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격한 행위에는 어떤 것들이 있겠느냐? 어떨 때는 기분이 좋아져서 자기 집에 있는 가장 귀한 보물을 다른 사람에게 주기도 하고, 어떨 때는 화가 나서 단칼에 다른 사람을 죽여 버리기도 하는 것, 이것이 혈기 아니겠느냐? 이런 것은 다 사람이 비이성적인 상황에서 보이는 극단적인 행위로, 이것이 바로 혈기이다. 어떤 사람은 본분을 이행하기 시작할 때, 기분이 좋아서 끼니때가 되었는데도 허기를 느끼지 않고, 쉴 때가 되었는데도 피곤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 어떤 고생이든 마다치 않겠습니다!”라고 외치지만, 기분이 나빠지면 아무것도 하고 싶어 하지 않고, 누구를 봐도 못마땅해하며, 심지어는 믿음을 포기하려 한다. 이것이 다 혈기이다. 이런 혈기는 어떻게 생겨나겠느냐? 사람의 패괴 성품에서 생겨나는 것 아니겠느냐? 근원적으로 봤을 때,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도 실행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각종 그릇된 사상에 영향을 받게 되고, 그릇되고 부정적인 사상에 영향을 받으면서 갖가지 비이성적이고 비정상적인 정서가 생겨난다. 또 비정상적이고 비이성적인 정서 속에서 사람은 혈기에 속하는 갖가지 판단과 행위를 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냐?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라는 사상 관점의 본질은 무엇이냐? (혈기입니다.) 그렇다. 혈기이다. 그럼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는 행동이 이성적이냐? 원칙에 부합하느냐? 사람이 지켜야 할 긍정적인 사물이냐? 결코 아니다.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는 그 일은 비이성적이다. 그것은 충동이고 혈기이다. 이 일은 반드시 이성적으로 대해야 한다. 벗을 위해서 어떤 희생도 감수하지 않고 의리를 중요시하지 않는다면 안 되겠느냐? 그저 힘닿는 데까지 친구를 도와주면 안 되겠느냐? 어떻게 하는 것이 옳겠느냐? 어째서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라는, 의리를 무척 중시하는 것 같은 그런 사상 관점이 옳지 않은 것이겠느냐? 무엇이 잘못되었겠느냐? 이 일은 분명히 말할 필요가 있다. 이 일을 분명히 말하면, 사람은 그런 사상 관점을 철저히 내려놓게 된다. 사실, 이 일은 무척 간단하다. 너희는 명확히 말할 수 있겠느냐? 너희가 이 일에 대해 관점이 없고 할 말도 없다는 것은 한 가지 사실을 의미한다.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라는 말을 해부하기 전까지 너희는 모두 이 말을 신봉하거나 숭배하는 사람이었고,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는 사람이나 그런 친구를 둔 사람을 무척 부러워했다. 그런 친구가 있다는 것은 행복이자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냐? 너희는 이 일을 어떻게 보느냐? (저는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는 것은 원칙 없이 사람을 대하는 것이며,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이 어떠하냐? 그것이 이러한 사상 관점의 속박과 제한을 해결해 줄 수 있겠느냐? 네가 이런 일을 대하는 방식과 원칙을 바꿔 놓을 수 있겠느냐? 이런 일에 대한 네 그릇된 관점을 바로잡을 수 있겠느냐? 만약 불가능하다면, 그 말은 무엇이겠느냐? (도리입니다.) 도리를 말하는 것이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 도리라면 말하지 마라. 도리는 어떻게 생겨나느냐? 그런 사상 관점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또 그런 사상 관점이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주는 부정적인 영향과 피해를 알지 못해서 생겨나는 것이다. 너는 그 문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에 그저 허술한 도리로 질문에 답하고 그 문제의 해결책을 찾을 뿐이다. 결국, 도리는 네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며, 너는 계속 그런 사상 관점에 지배되고 영향받으며 살게 된다.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라는 사상 관점은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느냐? 이 질문은 사실 어렵지 않으며 무척 간단하다. 세상에 사는 사람 중에 태어날 때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은 없다. 누구나 위로는 부모가, 아래로는 자녀가 있다. 누구든 가족이 있고,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말이 무슨 의미겠느냐? 너는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면서 자신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위로는 부모를 봉양하고 아래로는 자녀를 부양하는 것은 가정에서의 네 책임이다. 또 사회에서는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 예를 들어 노동자, 농민, 상인, 학생, 지식인 등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네가 다해야 할 책임과 의무는 적지 않다. 즉, 너는 평생 네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 외에도 할 일이 무척 많으며, 해야 하는 일, 다해야 하는 의무도 매우 많다. 하나님을 믿는 바른길을 걷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너는 하나의 개체로서 수행해야 할 가정에서의 책임과 사회적 의무가 엄청 많다. 너는 홀로 존재하지 않으며, 네 어깨에 놓인 책임은 신나게 친구들을 사귀거나 말 잘하고 도움이 되는 이를 만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보다 더 크고 중요한 책임은 가정과 사회에 있다. 가정에서의 책임과 사회에서의 의무를 다 제대로 수행해야 이번 생에서 완전하고 완벽하게 처신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 가정에서 네가 다해야 할 책임에는 어떤 것들이 있겠느냐? 자녀로서 너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모를 봉양해야 하며, 부모가 병이 나거나 어려움에 처하면 힘닿는 데까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가장으로서 너는 피땀 흘리고 고통을 감내하며 가족 모두를 먹여 살리는 등 가장의 중임을 맡아야 할 것이다. 또 자녀를 성인으로 키우고, 바른길을 걷도록 교육하며, 사람으로 처신하는 이치를 깨닫게 해야 한다. 그렇기에 가정에서의 네 책임이 무척 많다고 하는 것이다. 너는 부모를 봉양하고 자녀를 부양하는 책임을 맡는 등 해야 할 일이 무척 많다. 그럼 사회에서는 어떤 책임이 있겠느냐? 법과 규율을 준수하는 한편, 사람들과 함께 지낼 때는 원칙을 가져야 한다. 직장에서는 최선을 다해 일을 해내고, 또 네 사업을 잘 경영해야 할 것이다. 너는 8~9할의 시간과 에너지를 이러한 일에 쏟아부어야 한다. 다시 말해, 가정과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맡든, 어떤 길을 걷든, 무엇을 추구하고 동경하든, 사람이 맡아야 할 책임은 누구에게나 무척 막중해서 거의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정과 사회에서의 책임을 통해 볼 때, 너라는 사람, 네 생명이 이 인간 세상에 태어난 가치는 무엇이겠느냐? 하늘이 네게 준 책임과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것이다. 네 생명은 너에게만 속하지 않는다. 물론 타인에게 속하는 것도 아니다. 네 생명은 네 사명과 책임을 위해 존재하며, 네가 인간 세상에서 이행해야 할 책임과 의무, 사명을 위해 존재한다. 네 생명은 네 부모에게 속하지 않고, 배우자에게도 속하지 않으며, 당연히 자녀에게도 속하지 않고, 나아가 후손들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그럼 네 생명은 누구에게 속하겠느냐? 세상 사람들의 시선으로 보면, 네 생명은 하나님이 준 책임과 사명에 귀속된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네 생명은 마땅히 하나님에게 속해야 한다. 하나님이 네 모든 것을 주재하고 안배한다. 그러니 세상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자기 생명을 허락해서는 안 되며, 의리 때문에 함부로 아무에게도 네 생명을 바쳐서는 안 된다. 즉, 자신의 생명을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에게 네 생명은 가치가 없으며, 특히 사탄이나 이 사회, 이 패괴된 인류에게는 무가치하다. 하지만 네 부모나 가족들에게 네 생명은 더없이 소중하다. 네 책임이 그들의 생존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더 중요한 점은 만물과 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와 네 생명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네 생명은 하나님이 주재하는 뭇 생명 중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다. 어쩌면 너는 자기 생명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고, 혹은 자기 생명을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사실 너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는 부모나 가족들에게 네 생명은 무척 소중하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너는 그들에게 책임이 있고, 그들 또한 네게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또 너는 이 사회에 책임이 있다. 사회에 대한 네 책임은 이 사회에서의 네 역할과 관련이 있다. 모든 사람의 역할과 모든 생명체는 하나님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간주되며, 또한 하나님이 인류와 이 세상, 이 지구, 이 우주를 주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하나님 눈에는 모든 생명이 모래알보다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고, 개미만도 못할 정도로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그것이 생명, 살아 있는 생명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재 속에서 그의 역할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해도 그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누군가가 너무 쉽게 벗을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한다면, 이런 생각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언제든 벗을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하며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고, 가정과 사회에서의 책임은 물론, 자기 어깨에 짊어진, 하나님이 준 사명과 본분조차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안 될 일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것은 대역무도한 짓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풀어 준 것 중 가장 귀한 것은 사람의 숨결, 이른바 생명이다. 그런데 네가 함부로 자기 생명을 네가 맡겨도 괜찮다고 생각되는 벗에게 허락한다면, 이는 하나님이 보기에 대역무도한 짓이 아니겠느냐?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짓이 아니겠느냐?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가 아니겠느냐?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위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명백히 가정과 사회에서 다해야 할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네게 준 사명을 거부하는 것으로, 대역무도한 짓이다.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평생 짊어져야 할 책임, 즉 가정에서의 책임과 사회적 책임, 그리고 하나님이 준 사명이다. 이러한 책임과 사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만약 네게 생명이 없다면, 한때의 의리와 혈기 때문에 함부로 자신의 생명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 준다면, 네 책임이 존재하겠느냐? 무슨 사명을 논할 수 있겠느냐? 너는 분명 하나님이 준 생명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겨 아끼는 것이 아니라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허락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네 목숨을 바친 것이고, 가정과 사회에 대한 책임을 전혀 생각지 않거나 저버린 것이다. 이는 부도덕하고 불공평한 행동이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알려 주려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자신의 생명을 함부로 타인에게 바치거나 허락하지 말라는 것이다. 혹자는 “부모님에게 드려도 안 됩니까? 배우자에게 줘도 안 되는 겁니까?”라고 묻는데, 안 된다. 어째서 안 되겠느냐? 하나님이 네게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이 이어지게 한 것은 가정과 사회에 책임을 다하고, 하나님이 맡긴 사명을 완수하게 하기 위함이지, 생명을 갖고 장난치면서 함부로 타인에게 허락하고 맡기고 타인을 위해 내어 주고 바치라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 생명이 없으면, 가정에서의 책임과 사회적 책임, 그리고 사명을 다할 수 있겠느냐? 그것들을 완수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가정에서의 책임과 사회적 책임이 없어졌는데 사회에서의 역할은 남아 있겠느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사회에서의 역할이 사라졌는데, 사람의 사명이 남아 있겠느냐? 남아 있지 않다. 사람의 사명과 사회에서의 역할이 사라졌는데, 하나님이 주재하는 대상이 존재하겠느냐? 하나님이 주재하는 것은 생명체, 생명을 지닌 인류이다. 사람의 사회적 책임과 생명이 모두 사라지면, 사회적 역할 역시 전부 무로 돌아가 버린다. 이는 하나님이 주재하는 인류와 하나님의 경륜을 없애 버리려는 것 아니겠느냐? 네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이는 대역무도한 짓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것은 대역무도한 짓이다. 네 생명은 오직 네 책임과 사명을 위해서만 존재하며, 네 생명의 가치는 오직 네 책임과 사명에서만 드러난다. 이것 외에, 벗을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하는 것은 네 책임이나 사명이 아니다. 하나님에게 생명을 받은 한 사람으로서 너는 하나님이 준 책임과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그런데 벗을 위해서 어떤 희생도 감수하는 것은 하나님이 준 책임과 사명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적인 일 처리이고 일방적인 생각으로, 네 생명에 무책임한 사상이다. 물론, 그것은 사탄이 사람에게 주입한, 사람의 생명을 멸시하고 유린하는 하나의 사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든, 아무리 마음을 나눈 친구일지라도, 심지어 목숨을 나눈 친구일지라도 함부로 그를 위해 희생을 감수하겠다고 약속해서는 안 되며, 가볍게 그런 마음을 품거나 그를 위해 네 인생과 목숨을 바치겠다는 생각을 해서도 안 된다. 너는 그에게 어떤 책임도, 의무도 없다. 만약 너희가 서로 의기투합하고 성격이 맞으며 같은 길을 걷는다고 해도, 서로 도우며 못 할 말이 없는 지기가 된다고 해도, 그 관계는 어떤 희생이든 감수하는 것을 기초로 이뤄진 것도, 의리를 기반으로 한 것도 아니다. 너는 그를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할 필요가 없고, 네 목숨은 물론, 피 한 방울도 바칠 필요가 없다. “그럼 제 의리를 어떻게 보여 줘야 할까요? 저는 인성과 마음속으로 늘 의리를 지키려고 하는데 어떡하죠?”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정말 의리를 지키고 싶다면 네가 깨달은 진리를 상대에게 알려 주는 한편, 상대가 연약해졌을 때 수수방관하지 말고 붙들어 주어라. 또 상대가 잘못된 길, 그릇된 길로 들어서면 일깨우고 타이르고 잡아 주어라. 상대의 문제를 발견했을 때는 도와줄 의무가 있지만, 그를 위해 어떤 희생을 감수할 필요도, 그에게 네 생명을 허락할 필요도 없다. 그에 대한 네 책임은 그저 돕고 붙들고 일깨우고 격려해 주며, 때로 용서하고 포용하는 것일 뿐,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아니다. 소위 의리라는 것을 지킬 필요는 더더욱 없다. 내가 보기에 의리는 혈기이며, 그것은 진리에 속하지 않는다. 사람의 의리를 하나님이 준 생명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쓰레기에 불과하다. 그것은 사탄이 사람에게 주입한 혈기이자 간계로서 사람이 의리 때문에 한순간의 충동으로 평생 잊지 못하고 후회할 일을 수도 없이 저지르게 하는데, 이는 옳지 않다. 그러니 의리를 중시하는 사상을 내려놓는 것이 좋다. 의리로 살아갈 게 아니라 진리와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가야 하며, 최소한 인성과 양심, 이성으로 살아가야 한다. 모든 사람과 일을 이성적으로 대하고, 양심과 이성에 기대 모든 일을 제대로 해내야 할 것이다.

책임과 생명에 관한 말, 견해를 이렇게 많이 교제했는데, 이제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라는 도덕적 요구가 어느 정도 분별이 되느냐? 분별이 된다면, 그것을 대하는 올바른 원칙이 생겼느냐? (네.) 만약 정말 누군가 네게 그를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고 요구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어떻게 대답하겠느냐? “제게 당신을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고 요구한다면, 당신은 제 목숨을 가져가려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제 목숨을 가져가려 하고, 또 그렇게 요구하는데, 그것은 가정과 사회에서 책임을 다할 제 권리를 박탈하는 행위입니다. 또 제 인권을 박탈하는 거고, 나아가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하고 열심히 본분을 이행할 기회를 빼앗아 가는 거죠. 그렇게 제 인권을 박탈하는 것은 제 목숨을 가져가려는 거고요! 당신은 제 수많은 권리를 빼앗으면서 당신을 위해 목숨을 버리라고 하는데, 너무 이기적이고 비열한 것 아닙니까? 그러고도 당신이 제 친구라고 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분명 제 친구가 아닙니다. 오히려 제 적이겠죠.”라고 말한다면, 옳지 않겠느냐? (옳습니다.) 이 말이 옳다. 너는 이렇게 말할 용기가 있느냐? 정말 이 점을 인식했느냐? 네 친구 중 누가 항상 네게 그를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고 하고, 네 목숨을 내놓으라고 한다면 한시바삐 그를 멀리해라. 그는 좋은 부류가 아니다. 그가 너를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고 해서 그를 네 친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너는 이렇게 말해라. “당신은 저를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지만, 그것은 제가 요구한 게 아니라 당신이 스스로 원한 것입니다. 당신이 저를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고 해서 제게 똑같은 것을 요구할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비이성적이지만, 저는 진리를 깨닫고 이성이 있기에 이성적으로 이 일을 대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저를 위해 몇 번이나 큰 희생을 감수했다고 해도, 저는 충동적으로 당신을 위해 모든 희생을 불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힘닿는 데까지 당신을 돕겠지만, 절대 하나님이 주신 일생의 책임과 사명을 버리고 당신을 위해 살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 세상에는 책임과 의무, 사명 외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저와 친구가 되고 싶다면, 번거롭더라도 제가 책임을 다하고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돕고 협조해 주십시오. 그런 사람이 바로 진정한 친구입니다. 언제나 당신을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고 하고, 그런 약속을 하게 하고, 당신을 위해 제 목숨을 바치거나 허락하라고 할 거라면, 당장 제게서 떠나가십시오. 당신은 제 친구가 아닙니다. 저는 당신 같은 친구를 사귀고 싶지도, 당신 같은 사람의 친구가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어떠하냐? (좋습니다.) 어떤 부분이 좋으냐? 그런 친구가 없으면 삶이 더없이 홀가분하며, 마음이 편안하다. 어떤 심적 부담도 없고, 의리를 중시하는 사상 관점에 속박되지도 않는다. 만약 정말로 어떤 사람이 “당신은 벗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지 않는군요. 당신 같은 사람하고는 사귈 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당신과는 친구가 될 수 없어요.”라고 한다면, 그 말을 듣고 마음이 괴롭지 않겠느냐? 그 말에 영향을 받지 않겠느냐? 속상하고 소극적으로 변하며, 남에게 버림받아 존재감이 없어졌다고, 인생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겠느냐?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진리를 깨달으면 이 일을 밝히 알 수 있고, 그 말에 얽매이지 않게 된다. 오늘부터 너는 전통문화에 속하는 것들을 내려놓는 법을 배워야 하지 그런 짐을 등에 짊어질 필요는 없다. 그래야 인생의 바른길에 들어설 수 있다. 이렇게 실행할 수 있겠느냐? (네.) 물론, 이 역시 그리 빨리 내려놓을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먼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조금씩 묵상하고 조금씩 진리를 구하며 조금씩 인식한 후 조금씩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진리 원칙으로 사람들과의 관계와 교류를 대하고 처리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너희에게 해 줄 말은 두 가지이다. 첫째, 생명과 책임을 소중히 해라. 둘째, 하나님이 준 본분 이행의 기회와 사명을 소중히 해라. 이해했느냐? (이해했습니다.) 이 일을 밝히 알게 되니 기쁘지 않으냐? (기쁩니다.) 그릇된 사상 관점에 제한되거나 속박되지 않으면 편해진다. 하지만 지금 편하다고 해서 진정으로 편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앞으로 진리 추구의 길에 들어서고 그러한 것들에 괴롭힘을 받지 않아야 진정으로 편해진다.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진실로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게 되어야 진정으로 편하고 자유로운 사람이며, 평안과 기쁨이 있을 것이다. 진리로 살아가고 진리에 기대어 처신하면,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교제하도록 하겠다.

2022년 5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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