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추구란 무엇인가(1) 제 2 부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늘 함부로 행동하고 제멋대로 구는 사람들이 있다. 기분이 좋으면 일을 좀 하고, 기분이 안 좋으면 성질을 부리면서 “나는 오늘 기분이 별로야. 그러니까 밥도 안 먹을 거고, 본분도 이행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 그와 상의하러 왔다가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멋대로 굴면 안 돼요.”라고 말하면 그는 뭐라고 하겠느냐? “저도 이래선 안 된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저는 어릴 때부터 먹고 살 걱정 없고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집안에서 자랐어요. 할아버지, 할머니는 물론, 고모, 이모들까지 저를 무척 귀여워하셨죠. 부모님은 더더욱 저를 아끼셨고요. 저는 온 집안사람들이 애지중지하는 보물이었어요. 가족들은 무슨 일이든 다 제 뜻을 따라 주고 저를 사랑했고요. 그래서인지 이렇게 제멋대로인 성격이 되었네요.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할 때도 다른 사람과 상의하거나 진리를 추구하지 않게 돼요. 하나님께 순종하기도 힘들고요. 이게 제 잘못인가요?”라고 말한다. 이런 식의 인식이 올바르냐? 이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그에게 편식을 한다든가, 이기적으로 굴면서 다른 사람은 생각해 주지 않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문제점을 지적하면, 그는 “저는 어릴 때부터 이랬습니다. 습관이 돼서 다른 사람을 신경 써 본 적이 없죠. 저는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집에서 태어났고, 부모님이며 조부모님 모두 저를 무척 아껴 주셨거든요. 저는 온 집안 가족들의 보물 같은 존재였죠.”라며, 추잡한 궤변을 늘어놓는다. 이는 부끄러움도 모르는 뻔뻔한 행동 아니겠느냐? 부모가 너를 아끼면 다른 사람들도 다 너를 아껴야 한다더냐? 네 가족이 너를 사랑하고 귀히 여기면, 하나님 집에서 제멋대로 행동해도 된다더냐? 그것이 이유가 된다더냐? 이것이 자신의 패괴 성품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겠느냐?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임하든, 어떤 패괴 성품이나 인성 생활상의 문제가 생기든, 그는 객관적인 이유를 찾아 모면하고 해명하고 설명한다. 진리를 구하는 법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법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스스로를 반성하는 법도 없다. 반성하지 않는데 자신의 문제점과 패괴를 인식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자신의 패괴를 인식하지 못하는데 회개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회개하지 못한다면 어떤 상태로 살아가겠느냐? 스스로를 용인하는 상태로 살아가지 않겠느냐? 패괴를 드러냈지만 악을 행하지는 않았고 행정 법령을 거스르지도 않았다고, 진리의 원칙에 어긋나기는 해도 고의는 아니었으니 정상참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보여야 할 상태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진실로 회개하지 않고, 늘 그런 상태로 살아가는데 돌아설 수 있겠느냐? 영원히 불가능하다. 돌아서지 않는 사람은 손으로 행하는 악을 진정으로 내려놓지 못한다. 손으로 행하는 악을 진정으로 내려놓지 못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겠느냐? 진정으로 진리를 실행하여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안 봐도 선하다. 너는 손으로 행하는 악을 내려놓지 못하고 진리를 실행하여 실제에 진입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네가 하나님의 마음을 돌리고 싶다 한들, 성령 역사를 얻고 하나님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어 과오를 사함 받고 패괴를 해결하고 싶다 한들 가능하겠느냐? (불가능합니다.) 그것이 불가능한데 네 믿음이 구원받는 성과를 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스스로를 용인하고 만족스러워하는 상태로 사는 사람은 진리 추구와 10만 8천 리는 떨어져 있다. 사람이 손으로 하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 두 다리로 뛰어다니는 것 등이 모두 하나님을 믿는 일과 관련이 있다고 해도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하는 것과는 무관하니, 그 결과는 분명하다. 진리 추구나 진리 실행과 무관하다면 자신을 반성하지도, 인식하지도 않을 것이고, 자신의 패괴가 어느 정도인지, 어떻게 회개해야 할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면 진실한 회개를 하는 것도, 하나님의 마음을 돌리는 것도 더욱 어려워진다. 사람이 이런 상태로 살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돌리고,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고 인정받고자 한다면 그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서 ‘인정’이란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하나님이 너의 모든 행동을 허락하고 칭찬하며 기억한다는 뜻이다. 이 몇 가지에 이르지 못했다면, 한 가지 사실이 입증된다. 바로, 네 행동과 네가 치른 대가, 그리고 네가 드러내고 나타낸 것들이 전부 진리 추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네가 어떤 생각이었어도, 설령 좋은 행위를 보였을지라도 그것은 네 인성 안에 아직 약간의 양심과 이성이 있다는 의미일 뿐, 그 좋은 행위는 진리를 추구하는 모습이 아니다. 네 출발점과 속셈, 사상과 동기가 모두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에 근거하여 이렇게 말하겠느냐? 네 모든 생각과 행동의 목적이 진리 추구에 있지 않고, 진리와는 무관하다는 점에 근거한다. 만약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하나님께 인정받고 칭찬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 모든 생각과 행동은 하나님께 인정받고 칭찬받을 수 없을 것이다. 단언컨대, 그 일련의 태도와 행동은 사람의 좋은 행위라고 할 수 있을 뿐, 진리 실행이 아니며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는 더더욱 아니다. 일을 처리할 때 함부로 행동하고 늘 제멋대로 구는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도, 책망과 훈계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면서 늘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책망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데 대해 핑계를 댄다.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말할 것도 없이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이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성품이다. 사탄의 본성과 성품을 지닌 사람은 의심할 여지 없이 사탄에 속하는 자이며, 마귀이자 사탄의 후예, 큰 붉은 용의 자손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마귀이자 사탄, 큰 붉은 용의 자손임을 인정하며, 자신을 인식할 때 아주 그럴듯하게 말하지만, 막상 패괴 성품을 드러내 누군가가 폭로하고 책망하고 훈계하면, 자신을 위해 온 힘을 다해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여기에서 사람은 철저히 드러난다. 자신에 대한 인식을 말할 때는 그렇게 그럴듯하게 말하는 사람이 왜 책망과 훈계 앞에서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겠느냐? 이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일이 흔히 있지 않으냐? 이런 일을 분별하기가 쉬우냐, 쉽지 않으냐? 사실 분별하기 쉽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인식할 때 자신이 마귀이자 사탄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회개도, 변화도 없다. 그럼 자신을 인식하는 그 말은 과연 진실한 것이겠느냐, 아니면 거짓된 것이겠느냐? 진실한 인식이겠느냐, 아니면 외식하며 남을 기만하는 것이겠느냐?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가 진실로 자신을 인식했는지를 알려면 그가 말하는 인식만 들어서는 안 된다. 책망과 훈계가 임했을 때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봐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핵심이다.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고, 또한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의심할 여지 없이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을 지니고 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패괴를 드러냈든 남들이 책망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책망하고 훈계하는 이가 어떤 사람이어도 안 된다. 그 스스로 자신에 대한 인식을 말하는 것은 괜찮으며, 무슨 말을 해도 상관없다. 그러나 만약 다른 사람이 폭로하고 질책하고 책망한다면, 아무리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말해도 그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가 드러낸 패괴 성품 중 어떤 측면에 대해 폭로하든 그는 극도로 반항하고, 한결같이 자신을 위해 궤변을 늘어놓고, 진정한 순종은 조금도 없다. 이런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곤란해질 것이다. 교회의 누구도 그를 건드리지 못하고, 그에 대해 말하지도 못한다. 좋은 점을 말하면 기뻐하지만, 안 좋은 점을 말하면 화를 낸다. 만약 누군가 그를 폭로하면서 “당신은 좋은 사람이지만, 너무 함부로 행동하고 늘 제멋대로입니다.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런 부족한 점과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린다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면, 그는 “저는 악을 행하지도 않았고 죄를 짓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저를 책망하는 거죠? 저는 어릴 때부터 집안에서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부모님과 조부모님 모두 저를 무척 아꼈죠. 저는 가족들이 애지중지하는 보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집에서는 아무도 저를 아껴 주지 않네요. 정말이지 사는 게 재미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저의 이런저런 단점만 보면서 저를 책망하고 싶어 하죠. 대체 저더러 어떻게 살아가라는 겁니까?”라고 한다. 이것은 무슨 문제겠느냐?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보자마자 알아챌 것이다. 그는 부모와 가족들에게 지나치게 사랑을 받아 응석받이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모르고 독립적으로 살아가지도 못한다. 가족들의 지나친 사랑으로 인해 하늘 높은 줄 모른 채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제멋대로인 태도가 인이 박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반성할 줄도 모른다. 너는 하나님을 믿는데도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진리를 실행하지도 않는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어서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겠느냐? 진정한 사람의 모습을 살아 낼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최소한 진리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인식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변화할 수 있다. 언제나 관념과 상상에 기대 하나님을 믿고, 평안과 쾌락만을 바라며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진실로 회개하지 못하고 생명 성품의 변화를 이루지도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진리를 깨달아야 하고, 자신을 인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어떤 일이 임하든 진리를 구하며, 어떤 패괴 성품을 드러내든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고 진리를 교제함으로써 해결해야 한다. 만약 누군가 너에 대해 지적한다면, 혹은 너 스스로 성찰해서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입해 반성하고 돌아보고 자신을 인식한 다음 문제를 바로잡고 회개할 수 있다면, 사람다운 모습을 살아 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반드시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늘 집안에서 사랑받는 기분에 도취되고, 가족들에게 소중히 여겨지는 보물 역할을 하려고 한다면, 그런 식으로 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느냐? 네가 집안에서 아무리 소중한 보물일지라도 진리 실제가 없으면 애완동물에 불과하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진리 추구만이 가치 있는 일이다. 진리를 깨달으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게 되고, 진리를 깨달으면 어떻게 사는 것이 진실한 행복인지,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인지 알게 된다. 가정환경이 어떻든, 특기나 은사 등 자신이 어떤 장점을 지녔든, 그것들은 다 진리 실제를 대신할 수 없고,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데 대한 핑계가 될 수도 없다. 오직 진리를 얻어야만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 낼 수 있으며, 아름다운 종착지를 얻을 수 있다. 사실이 그러하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리더 일꾼이 된 후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고, 마침내 빛을 발하게 됐다고 생각해 흐뭇해한다. 그러면서 그는 특기를 발휘해 제대로 한번 재능과 포부를 펼치고 실력을 과시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지식과 품격을 갖추었으며, 지도자로서의 카리스마와 태도, 마인드, 리더십을 지니고 있다. 학교에서는 모범생으로 학생회장을 맡았고, 회사에 들어간 후에는 임원이나 대표가 되었으며, 하나님을 믿은 후로는 하나님 집에서 리더로 선발되었다. 그래서 그는 ‘하늘은 내 편이야. 이래서 능력 있는 사람은 조용히 살기가 힘들다니까! 대표 자리에서 내려온 지 얼마나 됐다고 하나님 집에 오자마자 또 리더 일꾼 자리에 앉게 됐네. 평범하게 살고 싶어도 그게 안 돼. 이건 하나님의 높여 주심이야. 하나님께서 내게 안배해 주신 일이라고. 그러니 순종해야 해.’라고 생각한다. 리더가 된 그는 경험과 지식, 리더십, 지도자로서의 카리스마를 제대로 발휘한다. 그는 자신이 능력과 패기를 갖춘, 타고난 인재이자 능력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문제가 있다. 카리스마를 타고난 이 능력자, 인재, 지도자들이 교회에서 가장 잘하는 일이 무엇이겠느냐? 바로 독립 왕국을 세우고 권력을 독점한 채 독선적으로 구는 것이다. 리더가 된 후 그는 명예와 지위를 위해 일하고 뛰어다니고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일절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바쁘게 다니면서 사역하면 하나님의 뜻에 맞을 것이며, 패괴 성품도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회에서는 늘 그를 필요로 하고, 형제자매들도 그를 원하며, 어떤 일이든 그가 없으면 안 된다. 그는 혼자 거뜬히 한몫을 할 수 있고, 권력을 독점할 수도 있다. 그에게는 독립 왕국을 세우는 비법이 있다. 뭔가 독창적이고 색다른 일들을 시도하는 것이다. 특히 감투를 쓰고 거드름 피우고 지위를 점하고 남을 훈계하는 데 매우 능숙하지만, 딱 하나 그가 못하는 중요한 일이 있으니, 바로 리더가 된 후 남들과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 자신을 인식하는 것, 자신의 패괴를 발견하는 것, 형제자매들의 건의를 듣는 것이다. 사역에 대해 상의할 때 누군가 다른 의견을 내면 그는 받아들이지 않을뿐더러 핑계를 대면서 “여러분의 그 제안은 단편적입니다. 저는 교회 리더입니다. 여러분의 의견을 따라서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다행이겠지만, 일이 생기면 책임은 저 혼자 져야 하죠. 대부분의 경우 여러분은 의견을 내도 됩니다. 이 형식은 유지해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마지막에 어떻게 할지는 제가 결정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많은 형제자매가 사역과 관련된 어떤 토론이나 교제에도 참여하지 않게 되며, 그 역시 사역상의 어떤 문제도 형제자매들과 교제하지 않게 된다. 그저 자기 혼자 결정하고 결론을 내릴 뿐이다. 그런데도 그에게는 이유가 많다. 그는 ‘교회는 리더의 교회나 마찬가지야. 리더는 대장이라고. 형제자매들이 어느 방향으로 갈지, 어떤 길을 걸을지는 리더가 결정해야 해.’라고 생각한다. 자연스럽게, 형제자매들의 생명 진입과 그들이 걷는 길, 추구하는 방향은 그에게 통제된다. ‘지도자’가 된 후 그는 권력을 독점하고 독립 왕국을 세우며, 일 처리에 투명성이 사라진다. 또 부지중에 일부 사람들을 억압하며, 진리를 추구하고 깨닫는 능력이 있는 형제자매들을 배척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행동이 교회 사역과 하나님 선민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모든 일에 그렇게 논리적이고, 언제나 이유와 핑계가 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어떻게 되겠느냐? 오직 자신의 지위와 권력 독점 상황을 지키고자 행동하게 된다. 그는 가정과 사회에서의 행동 원칙, 방식, 방법을 하나님 집으로 가져와서는 그게 바로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인식하고 반성하는 일은 결코 없다. 설령 누군가 그런 행동은 진리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지적해도, 하나님의 깨우침과 징계, 채찍질이 임해도 그는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 무엇이 문제겠느냐? 리더가 된 날부터 그는 본분을 자신의 사업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진리를 추구하지 못하고 적그리스도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사업을 하면서 스스로의 모든 행동이 진리를 추구하는 거라고 여겼다. 그는 진리 추구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 그는 하나님 집과 형제자매들의 이익을 지킨다는 기치를 들고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지킨다. 그런 것들이 다 진리를 추구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지위에 올라 행동하고 드러낸 패괴 성품을 조금도 인식하지 못한다. 설령 그것이 패괴 성품이고 하나님이 혐오하는 것임을, 흉악하고 강퍅한 성품임을 은연중에 느낄지라도 그는 곧 ‘아냐. 나는 리더잖아. 그러니까 리더로서의 존엄성을 지켜야 해. 형제자매들에게 내가 패괴 성품을 드러낸 걸 들켜선 안 된다고.’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수많은 패괴를 드러냈고, 지위와 권력을 지키기 위해 원칙에 어긋나는 일을 수없이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달아도 남들의 폭로 앞에서 궤변을 늘어놓거나 차단하는 수법으로 더 많은 사람이 그 일에 대해 알지 못하게 막는다. 권력과 지위가 생긴 후로 그는 스스로를 신성불가침의 위치에 올린 채 자신은 위대하고 올바르다고, 자신에게 비난하거나 의구심을 품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자리를 차지한 후로는 자신과 다른 어떤 목소리도, 형제자매들의 생명 진입과 교회 사역에 도움이 되는 어떤 건의나 제안도 거부하고 반대했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데 대한 그의 핑계는 무엇이겠느냐? 바로 ‘나는 지위와 신분이 있는 사람이야. 내 신분과 지위가 내 존엄성을 결정하지. 그건 신성불가침한 거라고.’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와 핑계가 생겼는데 그가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없다. 그는 시종일관 지위를 점한 채 말하고 행동하며, 지위의 복을 탐한다. 이는 스스로를 불 위에 올려놓고 태우는 것이니,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이런 사람은 가련하지 않으냐? 가련하고 가증스러우며, 또 몹시 역겨워 구역질이 난다! 그는 리더가 된 후 스스로를 성인(聖人)인 양 꾸몄다. 성인,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올바른 사람. 이 호칭은 무엇이더냐? 멍에이다. 이런 멍에를 쓴 사람은 더 이상 진리를 추구할 수 없다. 누구든 이런 멍에를 썼다는 것은 진리 추구와 아무 상관이 없어졌다는 의미이다. 이 부류의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주된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사실, 지위에 얽매여 마음속으로 늘 ‘나는 리더고, 지도자야. 나는 신분과 지위가 있는 사람이야. 존엄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나한테 교만한 성품이나 사악한 성품이 있어서는 안 돼. 솔직하게 내 패괴 성품을 교제할 수는 없지. 내 존엄성과 명망을 지켜야 하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람들이 나를 우러러보고 숭상하게 해야 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늘 그런 것들에 마음이 얽매여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하고, 자신을 반성하거나 인식하지도 못한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그들을 망친 것이다. 그럼 그들의 마음가짐과 관점이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당연히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들이 평소 본분을 이행하면서 보이는 모습, 예컨대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제멋대로 결단을 내리고 위장하고 기만하는 등등의 행동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분명 진리 추구가 아니다. 그럼 그들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이유,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그들은 리더가 신분과 존엄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설사 패괴 성품이 있을지라도 폭로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그 관점은 너무 황당하지 않으냐? 패괴 성품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폭로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데, 이것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겠느냐? 리더가 되어서도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네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겠느냐? 네 패괴가 어떻게 정결케 되겠느냐? 만약 네 패괴가 정결케 되지 않고, 계속 패괴 성품으로 살아간다면, 너라는 리더는 실질적인 사역을 하지 못하는 거짓 리더일 것이다. 너는 리더가 되어 지위가 생겼지만, 그것은 그저 사역과 본분이 다른 것일 뿐, 신분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또한, 지위가 있고 남과 다른 본분을 이행한다고 해서 네가 다른 사람보다 존엄성이 더 있으며, 존귀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 된 것도 아니다. 만약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염치를 모르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지나치게 뻔뻔한 것 아니겠느냐? 리더가 아닐 때는 진지하게 남을 대하고, 솔직하게 자신의 패괴를 드러내며, 자신의 패괴 성품을 해부하더니, 리더가 되고 나서는 사람이 완전히 바뀌었다. 어째서 이렇게 말하겠느냐? 그는 가면을 썼다. 본모습은 가면 뒤에 있고, 가면 겉에는 어떤 표정도 드러나지 않는다. 울지도, 웃지도 않으며, 희로애락도, 칠정 육욕도 없다. 당연히 패괴 성품은 더더욱 드러나지 않는다. 언제든 똑같은 표정, 똑같은 상태이다. 실제 내적 상태와 마음속 사상, 생각은 모두 가면 뒤에 숨겨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다. 어떤 리더는 늘 자신에게 신분과 지위가 있다고 생각해서 책망과 훈계가 임하면 존엄성을 잃을까 봐 몹시 겁내며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입에 발린 말을 하고, 자신의 패괴 성품을 숨긴다. 그러면서 자신은 지위가 있으니 남들보다 존귀하고 성결하다고, 진리를 추구할 필요가 없다고, 진리 추구는 다른 사람의 일이라고 착각한다. 이 생각은 잘못된 것으로, 일말의 염치도 이성도 보이지 않는다. 이 부류 사람들은 이렇다. 이 부류 사람들이 보이는 태도의 본질을 볼 때, 그들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은 지위와 명리를 좇으며, 사역을 하면서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지킨다. 또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면서 그것이 바로 진리 추구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바울처럼 언제나 자신이 그동안 어떤 사역을 하고 어떤 본분을 이행했는지, 교회 사역을 하면서 어떤 일들을 처리했는지, 하나님 집의 사역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종합한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항상 그런 것들을 계산한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딤후 4:7~8)라고 했던 바울처럼 말이다. 이 말의 의미는, 달려갈 길을 마치고 싸워야 할 싸움을 끝냈으니 이제 구원받을 승산이 얼마나 될지, 자신의 공로가 얼마나 큰지, 자신이 받을 상이 얼마나 될지 계산해 보고, 하나님께 상을 요구하겠다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면류관을 주지 않으면, 그는 마음속으로 하나님은 공의로운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불복하며,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다고 원망할 것이다. 이 부류 사람의 이런 마음가짐과 성품을 봤을 때, 그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겠느냐?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겠느냐? 그가 하나님의 배치대로 따르겠느냐? 이는 안 봐도 뻔한 것 아니겠느냐? 그들은 달려갈 길과 싸워야 할 싸움을 진리 추구라고 생각하면서 진리를 전혀 구하지 않으며,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를 갖추지 않았다. 이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방금 교제에서는 주로 사람의 어떤 문제들을 폭로했느냐? 구체적으로 사람의 어떤 패괴 성품에 대해 주로 폭로했느냐? 한 가지는 진리를 싫어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점이다. 이는 매우 구체적인 모습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부분이 있다. 바로 모든 사람의 성품과 본질 안에 존재하는 한 가지, 강퍅함이다. 이 모습 역시 무척 구체적이고 분명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는 사람이 주로 드러내는 두 가지 패괴 성품이다. 이 구체적인 모습과 관점, 태도 등은 사람의 패괴 성품 안에 진리를 싫어하는 성분이 있음을 실제적이고 정확하게 설명해 준다. 물론,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성품 안에 강퍅한 모습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했든, 하나님의 사역 과정에서 사람의 어떤 패괴 성품이 드러났든, 사람은 시종일관 받아들이지 않고 반항한다. 물론 눈에 띄게 반항하거나 경시하는 태도로 거부하는 것 외에도 한 가지 모습이 더 있다. 바로 하나님의 사역이 자신과 무관한 양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바로 ‘당신은 당신 좋을 대로 말하시라. 나와는 무관하다. 당신이 어떻게 심판하고 드러내든 나와는 상관없다. 나는 받아들이지도, 인정하지도 않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이런 태도를 강퍅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강퍅한 모습이다. ‘나는 내 마음대로 살아갈 거야. 자유롭고 즐겁게 살아갈 거라고. 설령 나한테 당신이 말한 교만함이나 간사함, 진리를 싫어하는 태도, 사악함, 흉악함 등등의 모습이 있다고 한들, 그게 뭐? 나는 성찰하거나 인식하지 않을 거고, 받아들이지도 않을 거야. 내가 이렇게 믿는데 당신이 나를 어쩔 수 있겠어?’라는 것이 바로 강퍅한 태도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신경 쓰거나 거들떠보지 않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든, 일깨워 주든 경고해 주든 권면해 주든, 어떤 방식으로 말하든, 하나님 말씀의 근원과 목적이 무엇이든 사람은 일절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이런 태도를 일컬어 강퍅하다고 한다. 즉,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을 거들떠보지 않고,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진심과 애쓰는 마음은 더더욱 거들떠보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사역하든 사람은 협력하려는 의지가 없고 진리에 공을 들이려 하지도 않는다. 설령 하나님이 심판하고 드러낸 것이 전부 사실이라고 인정할지라도 마음속으로 후회하지 않고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결국, 수많은 도를 들어도 “어쨌든 나는 진심으로 믿었어. 어쨌든 내 인성은 나쁘지 않지. 어쨌든 나는 일부러 악을 행하지 않았다고. 어쨌든 나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버리고 고생하고 기꺼이 대가를 치렀어. 그러니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실 거야.”라고 한다. 이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라는 바울의 말과 같지 않으냐? 바로 이러한 태도이다. 이런 태도의 이면에 숨겨진 성품은 무엇이겠느냐? 강퍅함이다. 그럼 강퍅한 성품이 쉽게 변화하겠느냐? 길이 있겠느냐? 가장 단순하고 직접적인 방법은 바로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어떻게 바꿔야겠느냐? 자신의 강퍅한 태도에서 생겨난 상태, 마음가짐을 해부하고 인식하며, 자신의 어떤 행동과 말, 자신이 고수한 어떤 관점과 속셈,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과 생각이 강퍅한 성품에 지배되었는지 보아야 한다. 네가 드러낸 모습과 상태에서 시작해 성찰하고 해결한 뒤 바로잡되, 조금이라도 성찰했다면 한시바삐 바로잡아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자기 기호와 기분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은 제멋대로인 행동이다. 이런 성품에는 진리를 싫어하는 성질이 얼마간 들어 있다. 만약 네가 자신이 이런 사람이고 이런 패괴 성품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도 반성하거나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은 채 목을 빳빳이 세우고 자신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가리켜 강퍅하다고 한다. 네가 설교를 듣고 문득 ‘나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 나도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지. 그게 바로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이구나. 그런 게 진리를 싫어하는 거라면 이 부분의 성품을 해결해 봐야겠다.’라고 깨닫는다면, 어떻게 해결해야겠느냐? 먼저, 자신의 우월감과 제멋대로인 태도, 하고 싶은 대로 하는 태도를 내려놓아야 한다. 기분이 좋든 나쁘든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봐야 할 것이다. 네가 육을 버리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실행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너를 어떻게 보겠느냐? 네가 정말 그 패괴된 행위를 해결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이 바로 적극적이고 주동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협력하는 태도이다. 너는 의식적으로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을 버리며,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과 강퍅한 성품을 해결하고 있다. 이 두 가지 부분의 패괴 성품이 다 해결되면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마음은 흡족해질 것이다. 너희가 여태까지 교제한 내용을 이해하여 육을 버릴 수 있다면 내 마음은 무척 기쁠 것이며, 앞에서 한 말들도 헛되지 않을 것이다.

강퍅함은 패괴 성품에 속하는 문제로 본성 안에 존재하며,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 사람에게 강퍅한 성품이 있으면 보통 이치를 따지거나 궤변을 늘어놓기를 좋아하고, 자기 의견을 고집하며, 새로운 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때로는 마음속으로 자기 생각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허영과 체면을 위해 자기 뜻을 고수하며, 끝까지 우겨 댄다. 이 강퍅한 성품을 인식했다고 할지라도 바꾸기는 쉽지 않다. 강퍅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반드시 사람의 교만함과 간사함, 흉악함, 진리를 싫어하는 태도 등의 성품을 인식해야 한다. 자신에게 교만함과 간사함, 흉악함, 진리를 싫어하는 태도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진리를 실행하고자 하나 육을 버리기는 싫을 때,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나 늘 자신의 논리를 내세우고 어려움을 이야기할 때, 강퍅한 문제를 쉽게 인식할 수 있다. 강퍅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정상인의 이성을 지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네가 하나님의 양이 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어떻게 들어야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낸 문제 중 어떤 것들이 너와 관련 있는지 듣고 생각해야 한다. 너와 관련 있는 문제를 발견했다면 받아들여야지, 그것은 다른 사람의 문제, 모두의 문제, 인류의 문제이고 너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여긴다면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 말씀의 폭로 가운데서 하나님이 들춰낸 패괴 상태나 그릇된 관점이 너에게는 없는지 돌아봐야 한다. 예를 들어, 사람이 드러내는 교만한 성품의 모습을 폭로한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생각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교만한 모습이 없을까? 나는 패괴된 인류니까 분명 나한테도 그런 모습이 있을 거야. 그러니까 내가 어떤 부분에서 교만한 모습을 보이는지 반성해야 해. 사람들은 나를 보고 교만하다고, 늘 현실을 모르고 높은 자리에서 떠든다고, 남을 억압하는 말을 한다고 하지. 정말 나한테 그런 성품이 있는 걸까?’ 반성을 통해 마침내 하나님 말씀의 폭로가 100% 정확하며, 너 자신은 교만한 사람임을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 말씀의 폭로가 100% 정확하고, 네 상황과 조금의 오차도 없이 부합하며, 돌아보면 볼수록 정확하게 느껴진다면,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패괴 성품의 본질을 분별하며 인식해야 한다. 그러면 진실로 후회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을 때는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셔야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 또 패괴 성품을 해결할 때는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폭로를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릴 수 없을 것이다. 네가 똑똑한 사람이고, 하나님 말씀이 폭로한 것들이 기본적으로 정확하다는 것을 안다면, 혹은 절반이라도 옳다고 인정할 수 있다면, 한시바삐 받아들여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스스로를 반성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이 폭로한 말씀이 전부 정확한 사실이자 진상이며, 조금의 오차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진실로 스스로를 반성할 수 있고, 자신에게 갖가지 패괴 성품이 존재하며 자신은 확실히 교만하고 독선적이라는 사실을, 일말의 이성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이 심각하게 패괴되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고자 할 것이다. 그러면 후회하는 마음이 생기고, 자신을 부정하고 증오하게 되며, 여태까지 진리를 추구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된다. ‘나는 왜 하나님 말씀을 읽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하나님 말씀에 대한 내 이런 태도는 교만함 아닐까? 나는 어째서 이렇게 교만한 걸까?’ 이렇게 수시로 반성하면 얼마 후 자신이 정말 무척 교만하며, 하나님 말씀을 진리이자 사실이라고 완전히 시인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자신에게는 조금의 이성도 없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로, 반성할 때마다 아주 조금씩 인식하고 아주 조금씩 깊이를 더할 뿐이다. 단기간 내에 자신의 패괴 성품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반드시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고 많이 기도하고 자신을 많이 반성해야 조금씩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 진실로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사람은 모두 몇 번의 실패와 좌절을 겪은 후 하나님 말씀을 읽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자신을 반성한 다음에야 자신의 패괴된 본모습을 밝히 알고, 자신이 정말 깊이 패괴되었으며 진리 실제가 전혀 없다고 여기게 된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며 일이 임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고 진리를 구하면 조금씩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언젠가, 마침내 확실히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자질은 좀 낫지만, 이건 하나님께서 주신 거야. 나는 늘 뽐냈어. 말할 때는 남들을 뛰어넘고자 했고, 모두가 내 뜻대로 따라 줬으면 했지. 정말 비이성적이었어. 또 교만하고 독선적이었던 거야! 나는 반성을 통해 내 교만한 성품에 대해 알게 됐어. 이건 하나님의 깨우침이자 은총이야.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해!’라고 말이다. 자신의 패괴 성품에 대해 알게 된 것이 좋은 일이겠느냐, 나쁜 일이겠느냐? (좋은 일입니다.) 그러고 나면 어떻게 해야 이성적이고 순종적인 언행을 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남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서 다른 이를 억압하지 않고 공평하게 대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자신의 자질과 은사, 특기를 올바로 대할 수 있을지 등등을 구하게 된다. 이렇게, 교만한 성품은 낙숫물이 댓돌을 뚫듯 조금씩 조금씩 해결된다. 그 후, 너는 사람들과 함께 지낼 때, 함께 협력해서 본분을 이행할 때, 다른 이의 관점을 올바르게 대하며 열심히 잘 들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이의 관점이 옳다고 생각한 순간, 깨달을 것이다. ‘이제 보니 내 자질이 가장 훌륭한 건 아니었구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다 장점이 있었어. 나보다 전혀 못하지 않잖아. 여태까지 나는 항상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자질이 뛰어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자아도취이고 견문이 좁은 거였어. 우물 안 개구리였던 거지.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너무 비이성적이고 염치없는 거야! 교만한 성품이 내 눈을 가리고 내 귀를 막았구나. 남들의 말은 듣지도 않고 내가 훌륭하고 옳다고 생각했어. 나는 사실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지 않아!’ 그 후로 너는 자신의 부족한 점과 보잘것없는 분량을 진실로 깨닫고 인식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다음부터 남들과 교제할 때는 상대의 관점에 귀 기울이며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너무 많구나. 내 자질이나 깨닫는 능력은 기껏해야 평범한 수준이었어.’라고 깨닫게 된다. 이는 어느 정도 자기 객관화가 된 것 아니겠느냐? 이렇게 체험하고 늘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반성하면 자기 자신을 진실로 인식하게 된다. 또 인식이 점점 깊어져 자신의 패괴된 본모습을 간파하게 되고, 빈궁하고 가련하며 추하기 그지없는 자신을 깨닫게 된다. 그때면 자기 자신을 싫어하고 패괴 성품을 증오할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자신을 저버리기도 쉽다.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자신이 드러낸 패괴를 반성해야 한다. 특히 다양한 환경에서 패괴 성품을 드러낸 후 수시로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하면 자신의 패괴된 본질을 간파하기가 쉽고, 마음속으로 패괴와 육체, 사탄을 증오하게 되며,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에 공을 들이게 된다. 그러면 교만한 성품은 점점 줄어들 것이며, 너는 조금씩 그것을 벗어 버리고 점차 이성을 갖추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순종하기도 상대적으로 쉬워질 것이다. 남들의 눈에 너는 예전보다 착실하고 신중하며 객관적으로 말하는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또 다른 이의 말을 귀담아듣고, 다른 이에게 말할 시간을 주며, 다른 이의 말이 옳을 경우 쉽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 밖에도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게 그리 힘들지 않을 것이며, 누구와 협력하든 조화롭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면 이성과 인성을 갖춘 사람이 되지 않겠느냐? 이것이 바로 이 부분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길이다.

여태까지 강퍅한 성품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제 이 문제를 들어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길에 대해 교제하도록 하겠다. 패괴 성품을 해결하려면 먼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사람의 패괴된 본질을 폭로한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네가 드러낸 패괴와 패괴 상태, 패괴 속셈과 모습을 인식하고 해부함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다면, 이는 패괴 성품을 인식한 것이며, 이미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과정에 들어선 것이다. 반대로, 이렇게 실행하지 않는다면 강퍅한 성품이 해결되기는커녕 네 패괴 성품 또한 제거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은 모두 여러 측면의 패괴 성품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패괴 성품부터 해결해야겠느냐?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사람의 강퍅함이다. 강퍅한 성품은 사람이 하나님께 다가가고 순종하며 진리를 구하는 것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강퍅함은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교제할 때의 가장 큰 걸림돌이며,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정상적인 관계에 가장 큰 지장을 준다. 강퍅한 성품을 해결하면 다른 패괴 성품은 쉽게 해결된다. 패괴 성품을 해결하려면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인식할 수 있는 패괴 성품부터 해결하는 것이다. 인식이 많아질수록 더 많이 해결할 것이고, 인식이 깊어질수록 더 철저하게 해결할 것이다.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것은 이런 과정이다. 즉,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하며, 패괴 성품의 본질을 해부하여 육을 버리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다. 패괴 성품의 본질을 인식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또한,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대충 “저는 패괴된 인류이자 마귀, 사탄의 후예이며, 큰 붉은 용의 자손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적대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원수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진정으로 자신의 패괴를 인식했다고는 할 수 없다. 자신은 이렇다 할 인식이 없고 아마 다른 사람의 말을 따라 했을 것이다. 진실로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사람의 지식과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자기가 느낀 패괴 성품의 해악과 그 결과를 밝히 아는 것이다. 또 패괴 성품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해한다는 사실을, 패괴 성품은 사탄에게서 비롯되었고 사탄에 속하는 독소이자 사탄의 철학이라는 사실을, 진리와 하나님을 완벽히 적대한다는 사실을 밝히 아는 것이다. 이 문제를 밝히 아는 것이 패괴 성품을 인식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마귀이자 사탄이라는 것을 인정한 후에도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가 잘못된 일을 저지르고 진리에 어긋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이것 역시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마귀이자 사탄이라고 하지만, 만약 네가 “당신은 무슨 근거로 자신이 마귀이자 사탄이라고 하는 겁니까?”라고 묻는다면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그가 자신의 패괴 성품도, 자신의 본성 본질도 인식하지 못했음을 말해 준다. 만약 그가 자신의 본성이 마귀의 본성임을 인식했다면, 자신의 패괴 성품이 사탄의 성품임을 인식할 것이며, 그리하여 자신이 마귀이자 사탄임을 인정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본성 본질을 인식한 것이다. 자신에 대한 진실한 인식은 언제나 하나님 말씀의 폭로와 심판,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실행과 체험을 통해 생겨나며, 또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생겨난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 자기 인식은 전부 공허하고 실질적이지 않다. 근원을 찾지 못했고, 본질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인식하려면 반드시 구체적인 일에서 자신이 어떤 패괴 성품을 드러냈는지, 어떤 속셈이 있는지, 어떻게 한 것인지, 어떤 불순물이 들어 있는지, 왜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지 등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일들을 분명히 말할 수 있어야 자신을 인식한 것이다. 어떤 이는 책망과 훈계가 임했을 때, 자신이 마음속으로 진리를 싫어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추측하고 오해하고 하나님께 경계심을 가졌음을 인정하며, 사람을 심판하고 폭로한 하나님 말씀이 전부 사실임을 인정한다.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인식이 없고 하나님의 뜻도 알지 못하기에 이런 식의 자기 인식은 깊이가 얕다. 자신의 패괴를 인정했을 뿐 문제의 근원을 찾지 못했는데, 하나님을 추측하고 오해하고 경계하는 문제들이 해결되겠느냐?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을 인식하려면 자신에게 패괴와 어떤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그치지 말고, 진리를 깨달아 근본적으로 패괴 성품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야 자신의 패괴된 본모습을 밝히 알 수 있고, 진실한 회개를 할 수 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을 인식하는 동시에 진리를 구하고 깨달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런 식의 자기 인식이라야 성과를 낼 수 있다. 진리를 사랑하는 자는 사람을 폭로하고 심판하는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마다 먼저 사람을 폭로한 하나님 말씀이 사실이자 실제에 부합한다는 것을 믿고, 또 사람을 심판하는 하나님 말씀이 진리이며 하나님의 공의를 대표한다는 것을 믿는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최소한 이러한 것들을 인식할 수 있다. 만약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고, 사람을 폭로하고 심판하는 하나님 말씀이 사실이자 진리임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자신을 인식할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만약 네가 하나님의 말씀이 전부 진리임을 굳게 믿는다면,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하든, 말씀하는 방식이 어떠하든 전부 믿을 것이며, 설령 마음속으로 이해되지 않을지라도 믿고 받아들일 것이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스스로를 반성하고 인식하기가 쉽다. 스스로를 반성할 때는 반드시 진리에 근거해야 한다.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이다. 어떤 사람의 말도, 어떤 사탄의 말도 진리는 아니다. 사탄은 갖가지 지식과 학설, 이론을 이용해 수천 년 동안 사람을 패괴시켰다. 사람은 무감각해져서 자신을 전혀 인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설과 궤변을 숭상하고 진리를 거부한다. 이런 인류는 구제 불능이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임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근거하여 자신을 인식한다. 이렇게 하면 진실한 회개를 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추구하지 않은 채 오직 사람의 지식에 근거해 반성하고 죄짓는 행위를 인정할 뿐, 자신의 패괴된 본질은 시종일관 간파하지 못한다. 이런 식의 자기 인식은 헛수고로, 어떤 성과도 낼 수 없다. 반드시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스스로를 반성해야 한다. 그러고 나면 조금씩 자신이 드러낸 패괴 성품에 인식이 생길 것이고, 자신의 부족한 점과 인성 본질, 일을 보는 관점과 인생관, 가치관 등을 진리에 근거하여 판단하고 인식할 수 있을 것이며, 정확한 평가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조금씩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인식은 생명 체험에 따라 계속 깊어진다. 진리를 얻기 전까지는 사람의 본성 본질을 완전히 간파할 수 없다. 만약 사람이 정말 자신을 인식한다면, 패괴된 인류가 정말 사탄의 후예이자 화신임을 깨닫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자격도,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받을 자격도 없다고 생각할 것이며,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완전히 엎드릴 것이다. 이 정도까지 인식한 자가 바로 진실로 자신을 인식한 사람이다.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사람이 진리를 실행해 실제에 진입하고자 한다면, 자신을 인식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사람은 누구나 패괴 성품을 갖고 있으며, 자기도 모르게 패괴 성품에 얽매이고 통제되어 진리를 실행하거나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한다. 그래서 진리를 실행하여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려면 반드시 먼저 자신을 인식하고, 패괴 성품을 해결해야 한다.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과정이 있어야만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하나님을 알 수 있으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진리를 얻게 된다.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과정은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과정이다. 그럼 패괴 성품은 어떻게 해야 해결되겠느냐? 먼저, 자신의 패괴된 본질을 인식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자신의 패괴 성품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사탄의 어떤 헛소리와 궤변을 받아들여 생겨났는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이 근원적인 것들을 철저히 인식하고 분별하면, 패괴 성품으로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게 되며,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대 살아가고자 할 것이다. 또 일단 패괴 성품을 드러내는 순간, 마음속으로 알아차려 거부하고 육을 버릴 것이다. 이렇게 실행하고 체험하면 패괴 성품을 조금씩 벗어 버리게 된다.

혹자는 “저는 사람을 폭로하고 심판하는 하나님 말씀을 읽고 스스로를 반성했으며, 제가 교만하고 간사하고 이기적이고 사악하고 강퍅한 데다가 인성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라고 말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신이 무뢰한, 짐승, 마귀 사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이 진실로 자신을 인식한 것이겠느냐? 만약 그의 말이 남을 따라 한 게 아니라 마음속 진심이라면, 단지 인식의 깊이에 차이가 있을 뿐, 최소한 자신을 인식했다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만약 남을 모방해서 남의 말을 그대로 읊은 것이라면 그것은 진실한 자기 인식이 아니다.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식하려면 모든 일과 모든 내적 상태, 즉 패괴 성품과 관련된 상태, 표출, 태도, 마음과 생각 등의 세부적 부분까지 구체화해야 한다. 그래야 진실로 자기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 사람이 정말 자기 자신을 인식하면 그에 따라 후회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진실한 회개를 하게 된다. 회개하려면 먼저 무엇을 실행해야겠느냐? (잘못을 인정해야 합니다.) ‘잘못을 인정한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 자신에게 어떤 측면의 패괴 성품이 있는지 인정하고 인식해야 한다. 패괴 성품을 가리켜 일종의 ‘잘못’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틀린 것이다. 패괴 성품은 본성에 속하며, 사람을 통제한다. 패괴 성품은 사람이 저지르는 순간적인 잘못과 다르다. 어떤 사람은 패괴를 드러낸 후 바로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기도하는데, 이렇게 말하면 정확하지 않다. 만약 “죄를 인정합니다.”라고 말하면 상대적으로 더 적절할 것이다. 회개할 때의 구체적인 실행법은 자신을 인식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즉, 패괴 성품을 드러내거나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혐오하는 것임을 의식했다면, 관련된 하나님 말씀에서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식하고, 그것이 사탄의 독소와 패괴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정하는 성과를 낼 수 있으며, 진리 실행의 원칙을 찾아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진실한 회개이다. 또 자신이 어떤 패괴를 드러냈든, 먼저 패괴 성품을 인식한 후 진리를 찾아 해결하고,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진실한 회개이다.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이 있지만,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진리를 실행한 간증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식의 자기 인식은 시간이 지나도 아무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그러니 진실한 회개는 말할 것도 없다. 진실한 회개를 하려면 반드시 패괴 성품을 해결해야 한다. 그럼 패괴 성품을 해결하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하고 진입해야겠느냐? 예를 들어 설명하겠다. 사람은 간사한 성품이 있고, 늘 거짓말을 하며 기만한다. 네가 이 점을 인식했다면, 간사함을 해결하는 가장 쉽고 직접적인 실행 원칙은 바로 정직한 사람이 되어 진실을 말하고 실질적인 일을 하는 것이다. 예수는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라고 하였다. 정직한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 말씀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이 간단한 한마디가 바로 가장 효율적이다. 이해하기도 실행하기도 쉽다. 하지만 사람은 너무 심각하게 패괴되어 모두 사탄 본성을 지니고 있고 사탄 성품으로 살아가기에,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몹시 어렵다. 정직한 사람이 되고자 하나 그렇게 되지 못한 채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고 기만행위를 한다. 그 후 인식하고 후회하지만, 여전히 패괴 성품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똑같이 거짓말을 하고 기만행위를 한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겠느냐? 한편으로는, 패괴 성품의 본질이 추하고 비열한 것임을 인식하고 마음속으로 증오해야 한다. 또 한편으로는 진리의 원칙대로 실행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 원칙을 실행할 때, 너는 간사한 성품을 해결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물론 간사한 성품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진리의 원칙대로 실행할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돌아서는 모습이며, 진실한 회개의 시작이다. 하나님은 마음으로 네 행동을 인정할 것이며, 네가 돌아설 때 하나님도 마음을 돌릴 것이다. 사실, 하나님이 마음을 돌리는 것은 사람의 패괴 성품과 패역에 대한 일종의 사면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용서하고 사람의 죄악도, 사람의 과오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이 정도면 구체적이지 않으냐? 이해할 수 있겠느냐? 다시 예를 들어 설명하겠다. 너는 교만한 성품이 있어 어떤 일이 임하든 자기 생각이 몹시 강하고, 늘 네 생각대로 결정하면서 남들이 네 말을 듣고 네 뜻대로 움직이기를 바란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것이 교만한 성품 때문에 비롯된 것임을 인식하고 그것이 교만한 성품임을 인정하게 된다. 이것이 자신을 인식하는 첫 번째 단계이다. 그 후에는 교만한 성품을 폭로한 하나님 말씀 몇 대목을 찾아 자신에게 대입하면서 반성하고 인식해야 한다. 그 말씀을 자신에게 대입했을 때 맞아떨어져서 하나님이 폭로한 교만한 성품이 네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 후 교만한 성품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무엇 때문에 생겨났는지, 사탄의 어떤 독소와 사설, 궤변에 지배되고 있는지 분별하고 파헤쳐서 이러한 문제들을 모두 밝히 깨닫는다면, 그것이 바로 교만함의 근원을 파헤친 것이며, 진실로 자신을 인식한 것이다. 또 네가 자신이 드러낸 그 부분의 패괴 성품을 더 정확하게 정의 내리면, 이는 더 깊이 있고 실질적으로 자신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겠느냐?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진리의 원칙을 찾고, 어떻게 처신하고 어떻게 말하는 것이 정상 인성의 모습인지 알아야 한다. 실행의 길을 찾았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해야 한다. 마음이 돌아서면 진실한 회개를 할 수 있다. 그러면 원칙 있는 언행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모습을 살아 낼 수 있으며, 패괴 성품도 조금씩 벗어 버리게 될 것이다. 그때의 너는 과거의 그 패괴된 사람이 아니라 새사람의 모습,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다시 태어난 사람일 것이다. 이런 자가 바로 생명 성품이 변화한 사람이다.

성경은 개역한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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