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실제란 무엇인가 (제 3 부)

지금 진리를 추구하고 얻기 위해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무엇이겠느냐? 여태까지 자신이 옳다고 여기던 것, 전통 관념에 속하는 것, 옳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궤변과 말을 먼저 해부하여 본질을 꿰뚫어 본 후 거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을 결박하는 한 겹의 족쇄이다. 이러한 것들은 너희 마음속에 아직 얼마나 남아 있느냐? 완전히 벗어났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들로부터 벗어나는 게 쉽겠느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고자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감정과 연관되어 있다. 만약 네가 항상 감정을 다루면서 부모와 가족들을 생각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면서 진리에만 집중하자고 스스로에게 말하지만 여전히 참지 못하고 부모를 생각한다면, 이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 조상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는 말, 지식, 이론을 해부해야 한다. 이 밖에, 부모를 대할 때 자녀의 의무를 다해 그들을 보살필 것인지 등 모든 것은 네 개인적인 여건과 하나님의 배치에 근거해야 한다. 확실하게 얘기한 게 아니냐? 어떤 사람들은 부모를 떠날 때 자기가 부모에게 너무 죄스럽다고, 부모를 위해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다고 생각하지만, 부모와 함께 살 때 전혀 효도하지 않고 어떤 의무도 다하지 않는다. 이런 자가 정말 효도하는 사람이겠느냐? 이는 입만 놀리는 것이다. 네가 어떻게 행동하든, 혹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획하든 그런 것들은 다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떤 피조물이든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지, 진실로 믿는지 하는 점이다. 어떤 부모는 그런 복과 운명이 있어서 자손이 번창하고 천륜의 즐거움을 누리는데, 이는 하나님의 주재이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준 복이다. 반면 어떤 부모는 그런 운명이 없는데, 이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안배해 주지 않은 것이다. 그들에게는 자녀가 옆에서 지켜 주고 온 가족이 화목하게 지내는 그런 복이 없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배치로, 사람이 강요할 수 없는 부분이다. 어찌 됐든 결론적으로 부모에게 효도하는 일에 있어서 사람은 최소한 순종하는 마음가짐을 지녀야 한다. 환경이 허락하고 여건이 된다면 효도해도 된다. 환경이 허락하지 않고 여건도 되지 않는다면 무리해서는 안 된다. 이것을 뭐라고 하겠느냐? (순종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순종이라고 한다. 이 순종은 어떻게 생겨난 것이냐? 순종의 근거는 무엇이냐? 이 모든 것에 하나님의 안배와 주재가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사람이 선택하려고 해도 그럴 수 없다. 사람은 선택할 권리가 없으며 마땅히 순종해야 한다. 사람은 마땅히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또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배치라는 것을 느낄 때, 네 마음은 한결 편안해지지 않겠느냐? (그럴 것입니다.) 그럼 양심의 가책을 느끼겠느냐? 언제나 가책을 받는 일은 없을 것이며,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주를 이루지도 않을 것이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날 수도 있다. 인성에는 정상적인 생각이나 본능이 있는데, 이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병에 걸린 것을 보았을 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괴로워하고, 자신이 어머니 대신 아플 수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한다. “어머니의 병이 낫기만 한다면, 제 수명이 몇 년 줄어도 상관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인성의 긍정적인 일면이자 사람의 본능이다. 그러니 어머니가 병이 난 것을 보고 마음이 괴로울 때, 그 고통스러운 심정이 문제가 되겠느냐?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정상 인성에 갖춰져야 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네 마음이 괴로운 것은 좋은 일인데, 그것은 네게 마음과 인성이 있다는 의미이다. 이 세상에서 어머니는 하나님이 네게 안배해 준, 너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어머니가 병에 걸려 괴로워하는데 아무렇지도 않다면 네가 사람이겠느냐? 네가 “저는 어머니에게 아무 감정이 없습니다. 어머니가 괴로워해도 마찬가지고요. 하나님이 괴로워하셔야 저도 괴로울 겁니다!”라고 말한다면, 이 말이 진심이겠느냐? 그것은 진실하지 않고 가식적이다. 네 어머니는 너를 낳아 주고 지금까지 키워 주었으며, 너와 가장 가깝고 너를 가장 아끼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녀가 병에 걸렸을 때 조금도 괴롭지 않다면 네 마음은 얼마나 강퍅한 것이냐! 이는 정상이 아니니 이런 사람이 되기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괴로워하는 것은 매우 정상적이다. 하지만 괴로움 때문에 본분을 이행하지 않고 하나님을 원망한다면 이것이 정상이겠느냐? (비정상입니다.) 어째서 비정상이겠느냐? 네 생각은 진리에 부합하지 않고, 정상 인성에 갖춰져야 할 것이 아니기에 비정상인 것이다. 사람은 사탄 본성을 지닌 채 패괴 성품으로 살아가니 진리에 어긋날 수 있고, 양심과 이성을 잃을 수도 있다. 갑자기 정신병에 걸린 것처럼 말이다. 이는 비정상적이다. 그럼 무엇 때문에 이런 상황이 생기겠느냐? 사람의 패괴 성품 때문이다. 패괴 성품을 드러내는 순간,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고,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생각이나 하나님을 거역하는 생각이 갑자기 튀어나올 수 있다. 바로 이런 것이다.

패괴된 인간은 누구나 감정을 갖고 있으며 수시로 감정에 통제되어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못하거나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한다. 하나님에게 순종하려면 반드시 감정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가장 심하게 진리 실행을 가로막는 것이고 반드시 떨쳐 버려야 하는 감정은 무엇이냐? 어떤 감정이 정상 인성에 갖춰져야 할 것으로,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 또 어떤 감정이 패괴 성품에 속하겠느냐? 이러한 것들을 분명히 분별해야 한다. 예를 들어, 네 자식이 다른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자 너는 자식을 감싸고, 네 자식을 때린 자의 가족을 찾아 따지러 간다고 하자. 이것이 정상 아니겠느냐? 그 아이는 네 자식이니 네가 감싸는 것은 정당하며, 이는 정상적이다. 하지만 만약 네 자식이 다른 집 아이를 때리고 착한 아이를 괴롭혔는데, 너는 보고도 못 본 체하며 네 자식이 능력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뒤에서 사람을 때리라고 가르치기까지 한다면, 다른 사람이 따지러 왔을 때 여전히 자식을 감싼다면 이런 행동이 옳겠느냐? 옳지 않다.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이것이 바로 감정의 문제이다. 어째서 감정의 문제라고 하겠느냐? 다른 사람이 네 자식을 괴롭히는 건 안 된다고 생각하고, 네 자식이 조금이라도 피해를 입으면 너는 즉시 가서 해결하고 짚고 넘어가려고 하는데 네 자식이 다른 집 아이를 괴롭히는 건 왜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게다가 너는 자식이 남의 집 아이를 때리도록 부추기기까지 하는데 이는 악독함 아니겠느냐? 성품 측면에서 볼 때 이런 사람은 악독하다. 그럼 감정 측면에서 본다면 어떻게 설명해야겠느냐? 감정은 어떤 특징을 보이느냐? 그것이 긍정적일 리는 없다. 육적인 관계에 집중하고 육적인 기호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편을 들고 잘못을 감싸 주고 익애하며 오냐오냐하고 방임하는 것, 이런 것은 전부 감정에 속한 것들이다. 어떤 사람은 감정에 너무 치우쳐서 어떤 일이 닥치든 정에 휘둘린다. 마음속으로 분명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지 못하며, 나아가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지도 못한다. 늘 감정의 속박을 받는다면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그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수많은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는 것은 감정 때문이다. 그들은 감정을 몹시 중요하게 여기며, 1순위에 둔다. 그들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겠느냐? 그럴 리가 없다. 감정의 본질이란 무엇이냐? 바로 패괴 성품의 일종이다. 감정적인 모습을 몇 가지 단어로 표현하자면 편들기, 감싸기, 육적인 관계 지키기, 불공정함 등을 들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감정이다. 사람이 감정이 있어 감정에 기대 살아가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하나님은 왜 사람의 감정을 가장 혐오하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늘 감정에 얽매여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하나 그러지 못하기에 감정으로 고통받는다. 또 수많은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도 실행하지 못하는데, 이 또한 감정에 얽매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집을 떠나 본분을 이행하지만 마음속으로 늘 가족을 그리워하고 밤낮으로 생각하느라 본분조차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문제 아니겠느냐? 어떤 이는 누군가를 짝사랑하는데, 마음속에 오직 그 사람뿐이라 본분 이행에 지장을 준다. 이 또한 문제 아니겠느냐? 또 어떤 이는 누군가에게 탄복하고 그 사람을 숭배한다. 다른 사람 말은 안 듣고 오직 그 사람 말만 듣는데, 심지어 하나님이 한 말씀마저도 듣지 않는다. 설령 누가 진리를 교제해 줘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직 그 사람의 말, 그 우상의 말만 들을 뿐이다. 이 밖에도 어떤 사람은 마음속에 우상이 있어 다른 사람이 자신의 우상에 대해 말하거나 터치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누가 그 우상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면 화를 내면서 어떻게든 변호해 주려고 하고, 그 주장을 뒤집어 놓으려고 한다. 또 자신의 우상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걸 용납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우상의 명성을 지키면서 잘못된 것도 맞다고 하며, 사람들이 사실을 말하지도, 폭로하지도 못하게 한다. 이는 불공정한 것인데, 이것을 가리켜 감정이라고 한다. 감정의 대상이 가족에만 국한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감정의 적용 범위는 무척 넓다. 그것은 하나의 패괴 성품으로, 가족 간의 혈연관계라는 범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 대상은 상사일 수도 있고, 네게 은혜를 베풀거나 도움을 준 사람일 수도 있고, 너와 가장 사이가 좋거나 마음이 맞는 사람일 수도 있고, 네 동향 사람이나 친구일 수도 있으며, 네가 앙모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 감정을 떨쳐 버리려면 그것이 부모나 집을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간단한 것이겠느냐? 그렇게 간단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감정을 떨쳐 버리는 게 그렇게 쉽겠느냐? 많은 사람이 30살쯤 되면 독립적으로 살아가면서 별로 집을 그리워하지 않으며, 40살 정도가 되면 완전히 정상이 된다. 사람은 미성년자일 때 집을 무척 그리워하면서 부모 곁을 떠나지 못한다. 아직 독립적으로 생존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집과 부모를 그리워하는 것은 정상으로,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일을 하는 태도와 관점에 감정의 불순물이 섞여 있는 것이 바로 감정의 문제가 된다. 너와 부모는 육적으로 혈연관계가 있으며, 함께 오랜 세월을 살았으니 네가 부모를 그리워하는 것은 정상이다. 어떤 사람들은 부모를 전혀 그리워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어쩌면 집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돼 무엇을 보든 새롭고, 간신히 부모의 잔소리에서 벗어나 아무도 관여를 하지 않으니 기분이 좋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기분이 좋다고 해서 감정이 없다는 뜻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저는 오랜 세월 하나님을 믿으면서 얼마간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본분을 이행할 때 감정에 전혀 얽매이지 않죠. 저는 감정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이 말이 실제적이겠느냐? 딱 봐도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이 하는 말이다. 사람이 설교를 많이 들으면 얼마간 글귀와 도리를 알게 되며, 영적인 이론을 말할 수도 있게 된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분량이 생겼고 적잖은 진리를 깨닫게 됐어. 이제 체포되어도 유다가 되지 않을 거라는 최소한의 믿음과 의지가 있다고. 이게 바로 분량 아닐까?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의 열정을 떠올려 봐. 내 인생을 하나님께 바치기 원했잖아. 그 열정과 맹세는 지금도 전혀 변하거나 퇴색하지 않았어. 이러면 성장한 것 아니겠어?’ 이는 표면적인 현상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다 표면적인 현상이다. 사람이 진실로 성장하고 싶다면 반드시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도리와 영적인 이론을 말할 수 있다고 해서 진실한 변화가 생기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진리를 전혀 실행하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겠느냐? 설교를 듣고 도리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 반드시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해야 하며, 진리를 깨닫고 실행해야 한다. 그래야 실제가 생긴다. 진리를 실행해야 더 깊이 있게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아야 진리를 얻을 수 있으며, 진리를 얻어야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다.

오늘은 무엇이 진리이며 무엇이 옳은 말인지 교제하고 구분하였다. 너희는 무엇을 알게 되었느냐? (진리 원칙에 근거하여 일을 바라보아야지 평상시의 표면적인 좋은 행위와 영적인 도리를 진리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좋은 행위와 옳은 말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것은 아무리 옳아도 진리가 아니며, 나아가 진리와 무관하다. 만약 네가 늘 그것을 지키고 진리로 여겨 대한다면, 영원히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또 영원히 진리를 얻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한 가지 측면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 영적인 도리가 사람으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영적인 도리가 옳은 말로 구분되기는 하지만, 사람의 패괴 성품을 변화시키는 성과를 내지는 못한다. 사람의 패괴 성품을 변화시키려면 도대체 무엇에 기대야겠느냐? 어떤 사람은 진리에 기대야 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진리를 깨닫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진리를 실행해야 한다고 한다. 이런 말이 옳으냐? 문자적으로 보면 모두 옳은 면이 있다. 하지만 이는 전부 가장 얄팍한 도리이다. 이러한 도리는 너를 구해 주지 못하고, 네 어려움을 해결해 주지도 못한다. 네게 일이 닥쳤을 때, 사람들은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겠지만, 너는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저는 어려움이 있어 내려놓지를 못하겠어요!”라고 말할 것이다. 이러한 도리가 진리 실행의 길이 되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 말씀을 많이 먹고 마시라고 한다. 이 말을 적잖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이 네 어떤 문제를 해결해 주더냐? 하나님 말씀을 많이 먹고 마셔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런데 어떤 측면의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셔야겠느냐? 어떻게 대조해야겠느냐? 대조한 후에는 어떻게 해결해야겠느냐? 실행의 길은 무엇이냐? 어떤 측면의 진리로 네 그 어려움을 해결해야겠느냐? 이는 현실적인 문제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현실적인 문제이다. 그래서 옳은 도리는 사람의 실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해 주지 못하고, 사람의 패괴 성품은 더더욱 해결해 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사람의 패괴 성품을 해결해 주겠느냐? 오직 진리만이 사람의 패괴 성품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 못하거나 진리를 구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면, 패괴 성품을 해결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패괴 성품을 해결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해야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체험해야 패괴 성품이 정결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반드시 진리를 추구해야 하고, 하나님의 사역에 협력해야 한다. 그래야 성과를 낼 수 있다. 만약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오직 영적인 도리를 이해하는 데만 집중하면서 영적인 도리가 진리가 맞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그것을 진리로 여겨 받아들이면 패괴 성품을 해결할 수 있겠느냐? 이 밖에, 만약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면, 네가 패괴 성품을 드러낼 때 분별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 말씀에 대조할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어쩌면 너는 함부로 규례에 끼워 맞출 수도 있는데, 그러면 패괴 성품을 더더욱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패괴 성품을 해결하려면 무엇이 가장 중요하겠느냐? 진리를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지금, 많은 사람이 도리를 진리로 여기며,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 못한다. 방금 예로 든 감정 문제처럼 말이다. 그 어머니의 첫 번째 행동은 자식이 괴롭힘당하지 않게 지키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정당하다. 하지만 너희는 ‘그건 감정이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 돼. 그런 행동은 비판받고 정죄되어야 한다고.’라고 볼 것이다. 너희는 진리와 관련이 없고 무관하지만 사실 사람이 본능적으로 해야 하는 일을 전부 진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규정한 후 저버린다. 그러면서 이 원칙을 지키는 것이 진리 실행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자기 자식이 다른 집 아이를 괴롭히는 것을 좌시한 두 번째 행동처럼 정말 패괴 성품의 표출이나 진리 실행과 관련되는 일이 있을 때는 ‘악을 행한 것만 아니라면 큰 문제는 아니야.’라고 생각한다. 왜 이런 생각과 인식을 갖게 되었겠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대부분의 경우, 진리를 깨닫지 못해 옳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선택한 후 스스로 진리를 실행했다고 여기는 것이다. 많은 경우 진리를 깨닫지 못해 규례에 끼워 맞추고 규례를 지키고, 일이 닥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규례를 지키는 것을 진리 실행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는데 생명 성장을 이룰 수 있겠느냐? 진리를 깨닫고 실제에 진입할 수 있겠느냐? 많은 사람이 글귀와 도리를 말할 수 있으면 진리를 깨달은 것이며, 하나님을 믿는 데 합격점을 받은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여전히 많은 일에서 패괴 성품을 드러내겠느냐? 또 왜 실제적인 문제를 마주했을 때 해결하지 못하겠느냐? 이는 글귀와 도리를 말하는 것이 결코 진리를 깨달은 것이 아니며, 도리를 얼마나 많이 말할 수 있든 이는 진리를 얻었다는 의미가 아님을,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실행 원칙을 찾을 수 있어야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은 것임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고 고난을 겪으며 대가를 치르기만 하면 어떤 패괴 성품을 드러내든 큰 문제는 아니라고, 본분을 이행하고 고난을 겪으며 하나님을 원망하지만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충심을 바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경우에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해 호의를 보이지만 사실은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스스로는 자기가 하나님의 이익과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켰다고 생각한다. 이는 어떻게 된 일이겠느냐?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에 대한 실제적인 인식이 없기에 일을 할 때 늘 진리에 어긋나는 것이며, 이와 동시에 자기가 한 일이 옳다고, 자기는 진리를 실행했다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의 가장 큰 문제이다. 단, 문제이긴 해도 해결 방법은 있다. 유일한 방법은 바로 문제에 부닥치고 패괴 성품을 드러낼 때마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진리를 구해 확실히 하는 것이다. 너에게 패괴 성품이 존재하는 한, 여러 가지 내적 상태가 생겨날 수 있다. 사람은 서로 다른 환경과 내적 상태 속에서 살아가면서 여러 생각과 관점, 속셈을 드러낸다. 이것이 바로 사람 내면의 실제 내적 상태이다. 사람의 생각과 관점, 속셈을 보면 그의 성품을 알 수 있고, 그의 본성이 어떤지도 알 수 있다. 이렇게 스스로를 돌아보고 다른 사람을 분별하면 쉽게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식하고 패괴 성품의 본질을 꿰뚫어 보아야 완전한 자기 인식의 성과를 낼 수 있다. 그러고 나면 자연히 어떻게 진리를 구해 패괴 성품을 해결해야 할지 길이 생길 것이다.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으면 패괴 성품이 정결케 되며, 사람의 패괴 문제가 쉽게 해결된다. 만약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영원히 생명 성품의 변화를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너희는 모두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니 진리에 집중해야 한다.

사람의 본성을 해결하려면 행동이 아니라 근원부터, 사람의 성품부터 파헤쳐야 한다. 또한 객관적인 이유, 조건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진리와 대조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는 모두 사람의 패괴 성품에 초점을 맞추어 선포된 것이다. 방금 이야기한 ‘감정’을 예로 들어 보겠다. 사람은 가끔 부모를 보고 싶어 하거나 집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감정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하나님이 말하는 감정과 같은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이해하는 그 감정은 하나님이 말하는 감정과 같은 선상에서 논할 수 없다. 네가 말하는 그 감정은 패괴 성품이 아니라 사람의 정상적인 내적 상태에 속한다. 만약 육적인 가족을 우상으로 여겨 대한 나머지 네가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없게 되면 이는 감정에 너무 치우친 것으로, 패괴 성품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는 진리를 순수하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와 연관된다. 너는 집을 그리워하거나 부모에게 잘해 주려는 마음을 감정으로 여긴 것인데, 이는 진리를 치우치게 이해한 것 아니겠느냐? 사실 네가 이해한 것은 표면적인 현상일 뿐 진리가 아니며, 진리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이 말하는 감정이란 무엇이냐? 방금 이야기한, 어머니가 자식을 대하는 두 번째 행동 방식인 편들어 주고 두둔하는 내적 상태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폭로하는 감정이며, 그 어머니가 이 일에서 드러낸 패괴 성품이다. 그 두 가지 행동 방식은 완전히 다르지 않으냐? 첫 번째 행동 방식은 정상적인 현상으로 책망하거나 깊이 파헤치거나 해부할 필요도, 나아가 대조해 보거나 어떤 측면의 진리를 실행하거나 뭔가를 내려놓을 필요도 없다. 그럼 이런 행동이 정당하겠느냐? 반드시 그렇게 해야겠느냐?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두 번째 행동 방식은 성품과 관련이 있다. 나타내는 어떤 감정이 패괴 성품과 관련이 있겠느냐? (편들어 주는 것, 두둔하는 것, 육적인 관계를 지키는 것, 공정함을 잃은 것 등이 패괴 성품과 관계됩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하나님이 말하는 ‘감정’이라는 두 글자에 포함된 내용이다. 만약 네가 이 정도까지 인식하고 진실로 자신에게 대조해 볼 수 있다면, 이런 패괴 성품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감정에 통제되지 않아야 네 모든 행동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될 것이다. 네가 인식한, ‘감정’에 포함되는 이 내적 상태들이 하나님이 말하는 ‘감정’이라는 두 글자와 완전히 부합한다면, 그것이 바로 네가 인식한 진리이다. 네게 감정에 대해 교제하라고 할 때, 그 어머니의 첫 번째 행동 방식을 교제한다면 이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만약 네가 그 어머니의 두 번째 행동 방식을 교제하며 그녀의 패괴 성품을 해부한다면, 이는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네가 교제하고 체험하고 인식한 것들이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에 부합하고, 모순되거나 어긋나는 부분이 없으면, 이는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 말씀의 뜻을 파악하고 인식하고 실행하고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너는 진리와 생명을 얻은 것이다. 이 말의 뜻인즉슨, 이미 진리 실제에 진입했다는 것이다. 그때 다시 비슷한 일을 봤을 때 분별할 수 있을 것이고, 어떤 표출이 정상이고 어떤 표출이 패괴 성품인지 마음속으로 완전히 분명해질 것이다. 그러면 네 일 처리가 정확하고, 진리에 부합하며, 진리 실제를 갖추게 되지 않겠느냐? 일 처리가 정확해지고 진리를 깨닫게 되면, 네가 교제하는 인식과 체험 또한 남에게 도움이 되고,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 실제의 일면이다.

어떤 사람은 자질이 떨어져서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면서 항상 자신은 양심이 없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어떤 말이 정확하겠느냐? (자질이 떨어진다는 말이 맞습니다.) 때로 어떤 사람은 한 가지 본분을 이행하면서 기본적인 업무 지식은 파악해도 더 깊이 있는 것들은 갖추지 못한다. 그런 것들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리더는 그에게 대충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하며 몸을 사린다는 꼬리표를 붙이지만 사실 그는 업무 관련 지식이 부족하고, 아직 배우지 못한 것일 뿐 이미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도 리더는 그에게 대충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한다고 했는데 이는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는 용어를 남용하고 함부로 꼬리표를 붙인 것이다. 용어를 남용하고 함부로 꼬리표를 붙이는 원인은 과연 무엇이겠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 아니냐? 어떤 사람은 그렇다고 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자질이 떨어지고 너무 어리석어 초래된 거라고 할 것이고,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인성이 너무 악하고 속셈이 바르지 못해 초래된 거라고 할 것이다. 어떤 말이 맞겠느냐? 사실 이 세 가지 내적 상태 모두 존재하므로 구체적인 상황에 근거하여 판단해야 한다. 만약 진리를 깨닫지 못해서 초래된 건데, 자질이 부족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라고 한다면, 이 말은 맞지 않다. 또 분명히 인성이 너무 악하고 속셈과 목적이 있어서 초래된 건데, 자질이 부족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사실 왜곡이며, 악인이 속임수로 빠져나가게 하기 쉽다. 이 밖에도 진리를 깨닫지 못해서 초래된 일을 두고 인성이 악해 초래된 것이라 한다면, 이는 일을 정확하게 바라보지 못한 것으로, 좋은 사람을 악인으로 대하고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 많은 사람이 이런 일을 분별하지 못하고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도 못한다. 그들은 함부로 규례에 맞추고, 자기 뜻대로 결론을 내리면서 자기는 분별력이 있다고, 일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이는 교만하고 독선적인 것 아니겠느냐? 인성이 좋지 않고, 개인의 속셈과 목적을 지니고 함부로 꼬리표를 붙여 사람을 정죄하는 것은 악인의 성질에 속한다. 실제로 그런 사람은 매우 적으며, 대부분은 그저 진리를 깨닫지 못한 탓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함부로 규례에 맞추고 영적 용어를 남용한다. 예를 들어, 인성에 분명히 문제가 있어 몸을 사리면서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해 보자.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이를 가리켜 자질이 떨어진다고 할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분명히 정의감이 있어서 원칙에 어긋나는 일을 보면 바로 이야기해 교회의 이익을 지키지만,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종종 교만하고 독선적이라는 꼬리표가 붙으며, 심지어는 악인으로 여겨지기도 하니, 그야말로 좋은 사람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다. 또 분명히 분량이 작아서 한순간 감정에 얽매여 좀 연약해진 사람들이 있는데,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그들을 보고 감정에 휘둘리며 하나님에게 진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규정한다. 진리가 없는 사람은 바로 이렇다. 배경을 따지지 않고, 실제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일괄적으로 함부로 규례에 맞추며, 어떨 때는 이렇게 말했다가 어떨 때는 저렇게 말한다. 이런 사람이 진리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문제를 해결할 때 상황에 맞게 대처할 수 없다. 마치 배가 아픈데 굳이 머리를 치료하는 것처럼 문제의 근원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문제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 말씀이 무엇을 말하고 가리키는지 알지 못한다. 이것은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지금 너희가 깨달은 진리는 많으냐, 적으냐? (적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이런 일이 닥쳤을 때 왜 순종할 수 없을까요?”라는 질문을 듣는다면, 사람은 종종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이 옳으냐? 옳을 때도 있고 옳지 않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 옳지 않다. 이는 함부로 꼬리표를 붙이는 것이다. 영적 용어들을 좀 파악했다고 함부로 적용하고 사용하면 많은 문제가 생긴다. 어떤 것은 곡해하는 것이고 어떤 것은 판단하는 것인데, 이는 부정적인 결과를 야기하고, 심지어는 혼란이 벌어지게 한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뭔가 배우면 함부로 적용하고 사용하기에 문제가 생기기가 가장 쉽고, 원칙적인 잘못을 저지르기도 쉽다. 반면, 이해 능력이 있는 사람은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원칙적인 문제는 아니며, 거기에서 교훈을 얻을 수도 있다. 만약 사람이 그릇되게 이해하고, 하나님 말씀을 읽어도 곡해하며, 설교를 들어도 치우치게 이해한다면, 게다가 툭하면 트집을 잡고 시비를 건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길어지면 함부로 굴어 교회 사역에 교란을 가져올 수 있다. 그 결과는 심각하다.

이제 너희는 묵상해 보아야 한다. 너희가 늘 말하는 글귀와 도리, 영적인 이론이 정말 진리겠느냐? 너희가 깨달은 것이 과연 진리겠느냐, 아니면 도리겠느냐? 너희가 깨달은 것 안에 과연 진리 실제는 얼마나 있겠느냐? 이 문제들을 분명히 한다면, 정말 자신을 제대로 알고, 자기 주제를 알게 된다. 예를 들어, 너희는 정직한 사람이 되는 방법에 대한 진리를 꽤 많이 교제했다. 그런데 정말 그것에 대해 이해했느냐? 너희 모두 어느 정도 교제하고 인식을 이야기할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에는 얼마나 진입했느냐? 지금 너희는 정말 정직한 사람이냐? 분명히 말할 수 있느냐?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마음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 숨기지도, 가리지도, 피하지도 않는 거죠. 이것이 바로 정직한 사람의 기준입니다.” 이 말이 어떠하냐? 진리에 부합하느냐? (부합하지 않습니다.) 글귀와 도리는 말할 수 있어도, 실행의 세부 내용이나 구체적인 문제와 관련되면 할 말을 잃는다. 이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 못했지만 늘 ‘나는 꽤 많은 진리를 깨달았는데 하나님이 써 주시지를 않네. 만약 하나님이 나를 써 주셔서 내가 교회 리더가 된다면, 나는 모든 형제자매가 진리를 깨닫게 할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너무 거창한 것 아니겠느냐? 네게 정말 이런 능력이 있느냐? 허풍을 떨고 큰소리를 치는 사람이 정직한 사람이겠느냐? 진리를 깨닫지도 못했으면서 큰소리를 치고, 허풍을 떠는 사람은 가련하지 않으냐? (가련합니다.) 너희가 지금 많은 설교를 들었지만 계속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언젠가 바리새인과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이고, 그러면 현대판 바리새인이 될 것이다. 이런 가능성이 없겠느냐? (있습니다.) 이런 가능성은 무척 크다. 사람은 내면에 사탄 본성이 뿌리 깊이 박혀 있어 지식을 좀 배우고 소양이 좀 쌓이고 옳은 이론을 얘기하거나 고매한 설교를 할 수 있으면, 바리새인이 되기가 너무 쉽다. 바리새인이 되지 않고, 바리새인의 길을 걷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진리를 깨닫고 실제에 진입하기를 추구하는 것이며, 네가 이해한 도리를 진리 실제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진정으로 정직한 사람이 되는 진리를 깨달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과연 정직한 사람이란 무슨 의미인지,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정직한 사람에 대해 어떤 요구 기준을 제시했는지, 사람은 이 요구 기준 중 어떤 것들을 실행할 수 있는지, 하나님이 말하는 정직한 사람은 어떤 모습인지,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은 과연 어떤 측면의 패괴 성품을 겨냥한 것인지 등을 너희 스스로 묵상해 보고, 시간이 있으면 교제해야 한다. 이런 것들을 깊이 파헤쳐 볼 가치가 있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실행하도록 요구하는 말씀과 진리들은 사람의 어떤 행동 방식이나 행위가 아니라 사람의 사탄 본성과 사탄 성품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렇기에 그 말씀들이 진리라고 하는 것이다. 단순히 사람의 행위를 바꿔 놓고 사고방식을 가르치는 데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학설일 것이다.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다. 교육가라면 누구나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일부 행위를 바꿔 놓을 수 있으며, 실천과 종합을 통해 조금씩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의 지식은 너무도 많다. 하지만 이것들은 전부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패괴 성품도, 사람이 죄짓는 근원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사람의 패괴를 정결케 하고 해결할 수 있으며,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사람의 사탄 본성을 철저히 해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진리이다.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의 진정한 의미는 과연 무엇이겠느냐? 이는 묵상하고 생각하며, 수시로 함께 교제해 볼 가치가 있다. 언제 어느 때든 잊지 마라. 사람의 행위만을 바꿔 놓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지식이나 법률에 불과하다. 진리는 사람의 행위를 바꿔 놓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패괴 성품과 생각, 관념을 바꿔 놓고, 사람의 생명이 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진리이다. 지금 이 일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극소수다. 사람의 행위를 어느 정도 규범화하고, 사람을 표면적으로만 그럴듯하게 살아가게 하는 것들은 진리가 아니라 전부 지식, 도리, 사탄 철학임을 대다수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이 이런 것들을 받아들이면 외적 행위는 점점 고상하고 우아하고 단정해지겠지만 마음속은 음험함과 사악함으로 가득해지고, 갈수록 어두워진다. 그런 것은 바로 사탄의 독소이자 이론이며, 사람을 미혹하고 패괴시키는 사탄의 것이다. 그것은 결코 진리도,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도 아니다. 오직 사람을 정직하고 해방되고 자유롭게 해 주는 것, 창조주를 인식하게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며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게 하는 것만이 진리이다. 네가 어떤 관점을 받아들였든, 어떤 길을 걷든, 행위가 좋아지고 인간관계도 점점 좋아져도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나 진실한 믿음은 여전히 보잘것없다면, 너와 하나님의 관계가 아직 갈 길이 멀고 네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면, 네가 고수하고 있는 것은 긍정적인 것이 아니고, 결코 진리도 아니다. 만약 네가 어떤 길, 어떤 생활 방식을 선택하고 어떤 것들을 받아들였는데, 그것들이 너를 진실하고 정직하게 변화시키고,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게 하고, 사악하거나 부정적인 사물을 증오하게 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게 하고, 창조주의 주재와 안배를 받아들이기를 원하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리이고 진정으로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너희는 이런 것을 근거로 판단하면 된다. 어떤 도리들은 많은 사람이 말할 줄 알고 오랫동안 이야기해 왔지만, 아무리 이야기해도 사람 내면의 성품은 변하지 않았고, 내적 상태 또한 전혀 달라지지 않았으며, 사람의 관점과 사유 방식, 일 처리의 출발점, 속셈에 어떤 변화도 생기지 않았다. 그러니 이것들을 한시바삐 버리고 더는 고수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들은 결코 진리가 아니다. 어떤 말들은 처음 실행할 때 무척 힘들고 어려운 것 같고 원칙을 파악하지 못한다. 하지만 한동안 실행하며 체험하고 나면 내적 상태가 좋아지고 마음이 하나님과 가까워졌다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일이 닥쳐도 더는 그렇게 강퍅하거나 패역하지 않고 개인의 속셈이나 욕망이 그렇게 강렬하지 않게 되었으며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상태는 긍정적인 것이다. 그 말들은 진리이고 바른길이다. 너희는 이 원칙대로 분별하면 된다. 무엇이 진리인지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정의해 냈을 때 너희가 그것을 듣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규례나 도리로 여겨 지킨다면 문제가 된다. 이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에게 원칙을 제시해 주면, 너희는 그 원칙에 맞춰 대조하고 체험하고 실행하고 체득해야 한다. 그 원칙에 맞춰 행동하고 처신할 뿐만 아니라 사람이나 일을 바라보고 사람을 판단해야 한다. 이렇게 체험하고 실행하면 과연 무엇이 진리인지 알게 된다. 무엇이 진리인지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이 전부 진리임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생명을 얻을 수 있겠느냐? 생명 성품의 변화를 이룰 수 있겠느냐? 겉으로 보면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사람에게 제시한 요구가 엄격하지 않고 무척 간단하다고 생각될지 몰라도 진리의 함의가 무엇인지, 진리의 실제적인 내용이 얼마나 포함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진리의 글귀와 도리 부분만 이해한다면 영원히 하나님이 요구한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없을 것이다.

2017년 5월 26일

클릭하세요! 하나님에게서 온 기쁜 소식이 당신과 당신의 가족에게 임할 것입니다.

카카오톡으로 대화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