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격한 본분 이행이란 어떤 것인가 (제 4 부)

사람의 본분 이행이 합격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이냐? 본분을 이행하는 길과 방향, 속마음, 근원, 원칙 등 이 몇 가지가 옳다면 사람이 이행하는 본분은 합격이다. 많은 이들이 이론상으로는 잘 알지만 막상 일이 닥치면 어리둥절해진다. 어쨌든 너희에게 한 가지 원칙을 알려 주겠다. 바로 일이 생겼을 때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 독단적으로 행동하면 안 되느냐? 먼저,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본분을 이행하는 원칙이 아니다. 또 한 가지, 본분은 사적인 일이 아니다. 네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네 개인의 일을 하는 것도, 개인적인 경영을 하는 것도, 네 개인의 장사를 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 집에서는 무슨 일을 하든 모두 네 사업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집의 사역이고, 하나님의 사역이다. 너는 항상 이 점을 인지하고 인식해야 한다. “이건 저 자신의 일이 아닙니다. 저는 본분을 이행하고 있고, 제 책임을 다하고 있고, 교회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건 하나님이 제게 맡기신 부탁입니다. 제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제 본분이지 사적인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사람이 가장 우선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네가 본분을 사적인 일로 여겨서 일할 때도 진리 원칙을 구하지 않고 자신의 속셈, 관점, 의도에 따라 행동한다면 잘못을 저지르기 쉽다. 네가 본분을 사적인 일과 확실히 구분해서 그것이 본분임을 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님 요구를 구하고, 원칙을 구해야 합니다.) 그렇다. 만약 일이 닥쳤을 때 진리를 알지 못하고, 생각은 있지만 아직 명확하지 않을 때는 진리를 깨달은 형제자매를 찾아 교제해야 한다. 이것이 진리를 구하는 것이고, 본분을 대할 때는 이런 태도를 가장 먼저 갖춰야 한다. 네 생각에 이렇게 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해서 그렇게 규정하고 또 결정짓지 말아라. 그러면 쉽게 문제가 생길 것이다. 본분은 너 본인의 일이 아니다. 하나님 집의 일은 그 크기에 상관없이 어느 한 사람의 일이 아니다. 본분에 관계된 이상 그건 네 사적인 일, 너 개인의 일이 아니며, 진리에 관계되고, 원칙에 관계된다. 그러니까 네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 진리를 구하고 원칙을 구하는 일이다. 진리를 모른다면 먼저 원칙부터 구하도록 해라. 진리를 알고 나면 원칙을 정하기가 쉬워진다. 원칙을 모르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방법이 있다. 잘 아는 사람을 찾아가 교제하면 된다. 자기만 안다고,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그러면 잘못을 저지르기가 쉽다. 늘 본인이 결정하려 하는 것은 어떤 성품이냐? 그건 바로 교만하고 독선적인 성품이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난 대학생이니까 수준이 당신들보다 높아. 나는 이해 능력이 있지만, 당신들은 분량도 작고 진리도 잘 모르니까 뭐든 내 말을 따라야 해. 나 혼자서 결정하면 된다고!’ 이런 관점은 어떠냐? 네가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다면 문제가 된다. 너는 결코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다. 언제나 자기가 결정하려 하고 조화롭게 협력하지 않는데 어떻게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겠느냐? 그런 식으로 본분을 이행해서는 절대 합격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너는 늘 남들이 네 말을 듣도록 구속하려 하고,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해도 귀담아듣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고집이자 교만하고 독선적인 성품이다. 그런 식으로는 본인도 본분 이행을 제대로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본분 이행에도 영향을 준다. 이것이 교만한 성품으로 인한 결과다. 하나님이 왜 사람들에게 조화로운 협력을 요구하느냐? 우선은 그것이 사람의 패괴 성품을 드러내어 자신을 인식하고 패괴 성품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의 생명 진입에 유익이 된다. 또 하나는, 조화롭게 협력하는 것이 교회 사역에도 유리하다. 모두가 진리를 잘 모르고, 다들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조화롭게 협력하지 못하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어서 교회 사역에 지장을 줄 것이다. 이것은 심각한 결과다. 요컨대 본분 이행에 합격하려면 반드시 조화롭게 협력하는 법을 익혀서 일이 생겼을 때 진리 교제를 통해 해결할 줄 알아야 한다. 이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교회 사역에도 유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선민의 생명 진입에도 유리하다. 어떤 사람들은 이 부분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조화로운 협력을 너무 번거롭게 여긴다. 어떤 때는 진리를 교제해도 결과를 얻기 힘들고 하니, 대뜸 이런 질문을 던진다. “본분 이행에 합격하려면 꼭 조화롭게 협력해야 합니까? 일이 생겼을 때 다같이 교제하면 꼭 결과를 얻습니까? 제가 보기에 그건 다 형식에 지나지 않고, 그런 규례를 지키는 건 별로 도움이 안 됩니다.” 이런 관점은 옳으냐, 옳지 않으냐? (옳지 않습니다.) 이런 관점은 어떤 문제를 드러내느냐? (본분을 이행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습니다.) 성품이 교만하고 독선적인 사람들은 진리 교제를 원하지 않고, 늘 자신이 결정을 내리려고 한다. 그런 교만하고 독선적인 사람이 남들하고 조화롭게 협력할 수 있느냐? 하나님이 본분 이행에서 조화로운 협력을 요구하는 이유는 사람의 패괴 성품을 해결해서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는 중에 하나님 사역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고 패괴 성품에서 벗어나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래야 합격한 본분 이행에 이를 수 있다. 다른 사람과 협력하지 않고 언제나 독단적으로 행동하며 남에게 네 말만 들으라고 하는 것이 본분을 대할 때 지녀야 할 태도냐? 본분을 이행하는 태도는 네 생명 진입과 관련된다. 네가 매일 어떤 일을 만나고, 얼마나 많은 사역을 하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가에 관계없이, 하나님은 네가 그 일들을 대하는 태도가 어떤지를 보려 한다. 네가 그 일들을 하는 태도, 행동 방식은 무엇과 관계가 있느냐?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지 아닌지와 관계가 있고, 네 생명 진입과도 관계가 있다. 하나님은 네 생명 진입을 보고, 네가 가는 길을 보려 한다. 네가 가는 길이 진리를 추구하는 길이고 네가 생명 진입이 있다면, 본분을 이행할 때 다른 이와 조화롭게 협력할 수 있고, 본분 이행은 쉽게 합격할 수 있다. 그런데 본분을 이행하면서 늘 자기가 밑천도 있고, 업무도 잘 알고, 경험도 있고, 하나님 마음도 잘 헤아리고, 남들보다 더 잘 추구한다는 점을 강조한다면, 그래서 너 혼자 결정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다른 사람과 의논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려 하면서 자기 경영을 하고, 독불장군이 되고자 한다면, 이는 생명 진입의 길을 가는 것이냐? 아니다. 이것은 지위를 추구하는 것이고, 생명 진입의 길이 아닌 바울의 길을 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생명 진입의 길, 진리 추구의 길을 가도록 하는 것은 이런 식이 아니고 거기에는 이런 태도도 없다.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기준은 무엇이냐? (범사에 진리를 구하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 본분 이행에 합격하려면 네가 하나님을 얼마나 오랫동안 믿었는지, 네가 얼마나 많은 본분을 이행했는지, 하나님 집에 얼마나 많은 공적을 세웠는지, 본분을 이행하면서 얼마나 많은 경험을 가지게 되었는지 등과 상관없다. 하나님이 보는 것은 한 사람이 가는 길, 다시 말해 진리를 대하는 태도와 일 처리 원칙, 방향, 근원, 출발점 등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것들을 본다. 그것이 네가 가는 길을 결정한다. 만약 본분 이행 과정에 이런 긍정적인 것들을 네게서 전혀 볼 수가 없고, 네가 일하는 원칙, 길, 근거가 자신의 생각, 의도, 간계에 있고, 출발점도 자신의 이익, 체면, 지위를 지키는 데 있으며, 일하는 방식은 독단적이고, 자기 스스로 결정하며, 다른 사람과 절대 상의도 하지 않고, 조화로운 협력도 하지 않으며, 잘못을 저지르고도 충고도 듣지 않고 더욱이 진리도 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편에서는 어떻게 보겠느냐? 너의 그러한 본분 이행은 합격점에 이르지 못하고 너는 아직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 들어서지 못했다. 그것은 네가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진리 원칙을 구하지 않고 항상 자기 뜻에 따르며 하고 싶은 대로 하기 때문이다. 이는 많은 이들이 본분 이행에 합격하지 못하는 원인이다. 그럼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느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본분 이행에 합격하기가 어렵겠느냐? 사실 어렵지는 않다. 자세를 낮추고 조금이나마 이성을 갖추며 적절한 위치에 설 수 있으면 된다. 네 학력이 얼마나 높든, 과거에 어떤 상을 받고 어떤 것을 이뤘든, 네 신분과 수준이 얼마나 높든, 그런 것들을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 자신의 권위적인 자세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한 영예가 아무리 높아 봤자 하나님 집에서는 진리보다 높을 수 없다. 그 허황된 것들은 진리가 아니고, 진리를 대신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너는 이 문제를 똑똑히 알아야 한다. 만약 네가 “나한테는 은사가 있어. 나는 머리가 잘 돌아가고 반응도 빠르지. 배우는 것도 빠르고 기억력도 매우 뛰어나. 나는 내 마음대로 결정할 자격이 있어.”라고 말하며, 늘 이러한 것들을 밑천으로 삼고 보물처럼 대하고 긍정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이러한 것들이 네 마음을 점령해 뿌리를 내리면 진리를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진다. 그리고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너는 먼저 네가 좋아하는 것, 언뜻 좋아 보이는 것, 보물처럼 여기는 것들을 내려놓고 부정해야 한다. 그러한 것들은 진리가 아니며, 오히려 네 진리 진입을 가로막을 수 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본분을 이행하면서 진리를 구하고, 진리대로 실행하여 본분 이행에 합격점을 받는 것이다. 본분 이행에 합격점을 받는다는 것은 곧 생명 진입의 길에 막 들어선 것과 같기 때문이다. ‘들어섰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입문을 의미한다. 어떤 일을 하든 입문하는 것이 있고,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것들이 있다. 본분 이행에 합격점을 받는 것은 생명 진입을 이루는 길이다. 만약 네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방식만 그저 보기에 적절하지만 진리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합격한 본분 이행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노력해야겠느냐? 반드시 진리 원칙의 방향으로 노력을 기울이고 구해야 한다. 진리 원칙을 갖추는 것이 핵심이다. 행위와 성격만 좋아지고 진리 실제를 갖추지 못했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네게 은사와 특기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본분 이행에 써야 제대로 쓰는 것이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려면 인성과 성격을 개선할 필요도 없고, 혹은 은사와 특기를 내려놓을 필요도 없다. 그러한 것들은 필요치 않다. 핵심은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본분 이행 과정에서는 패괴 성품을 드러내는 것은 피하기 힘들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반드시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해야 한다. 그러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네가 어떤 측면의 은사와 특기를 갖추었든, 어떤 업무적인 지식을 지니고 있든 그런 것을 본분 이행에 쓰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그래야 제대로 본분을 이행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본분을 이행함에 있어 양심과 이성을 갖추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진리를 구해 패괴 성품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본분을 이행하면서 생명 진입을 이룰 수 있고, 본분 이행에 합격점을 받을 수 있다.

이제 보니 합격한 본분 이행은 진리를 구하고 진리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과 떼려야 뗄 수 없구나.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하면 합격한 본분 이행에 이를 수 없다. 합격한 본분 이행은 이렇게 해석하고, 이렇게 정의하기로 하자.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요구가 높으냐, 높지 않으냐? 사실 높지 않다. 하나님은 그저 너에게 일을 할 때 올바른 태도와 속마음, 관점을 지닐 것을 요구하며, 그런 바탕이 있어야 성령 역사를 얻을 수 있다. 그러면 너는 자신을 더욱 깊이 인식해서 시련과 연단을 받아들이고, 진리에 더욱 깊이 진입해서 성품 변화에 이를 수 있다. 너를 시련하고 연단하기 전, 하나님은 네가 진리를 깨달은 상태에서 너에게 심판과 형벌을 내린다. 그런데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 이 두 가지 단계는 모두 무엇을 기반으로 하느냐? 네가 합격한 본분에 이르는 것, 다시 말해 너에게 생명 진입이 생기는 것이다. 네 생명 진입은 네가 교회에서 하는 사역, 교회에서 지고 있는 책임과 무관하지 않다. 네가 만약 온종일 집에서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서 입으로만 본분 이행을 논하고 생명 진입을 논한다면, 그것은 비현실적이고 효과가 없다. 마치 탁상공론처럼 하루 종일 합격한 본분 이행을 말하고,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봉헌도 헌신도 없고, 고생도 하지 않고, 고난도 겪지 않는다면, 설령 찬양을 부르거나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서 이따금씩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해도 그것은 별다른 작용을 하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합격한 본분 이행에 이르는 것은 구원받는 일과 관계가 있느냐, 없느냐? 사람이 심판과 형벌을 받는 일과 관계가 있느냐, 없느냐?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고자 한다면 사람은 합격한 본분 이행에 이르러야 한다. 하나님은 왜 사람에게 이런 기준을 제시하며 합격한 본분 이행에 이를 것을 요구하느냐? 그건 바로 네 본분 이행을 가지고 네가 생명에 진입한 정도를 가늠하려는 것이다. 네가 합격한 본분 이행에 이른다면 그것은 네 생명 진입 정도가 이미 심판과 형벌을 받을 수 있는 기준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너에게 하려는, 온전케 하는 사역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뜻이다. 이런 것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사람에게 제시한 조건이 무엇이냐? 네가 이행하는 본분이 하나님 눈에 반드시 합격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네 생명 진입에 기본적인 길과 방향이 생겨서, 하나님이 이를 보고 인정한다면, 이미 합격이다. 하나님은 무엇을 통해 검증하느냐? 주로 네가 이행하는 본분을 통해 검증한다. 네가 본분 이행에 합격하면 하나님은 너를 인정하고, 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가 너에게 심판과 형벌을 시작한다. 마치 너를 엄격하게 단속하기 시작하듯, 네가 저지른 잘못이 무엇이든 모두 징계할 것이다. 이것은 좋은 일이다. 네가 하나님 검증을 통과하면 이제는 위험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옳은 사람이니 이렇다 할 악한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우선은 하나님이 너를 지켜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관적인 면에서는, 네가 가는 길, 네 인생 목표와 방향이 이미 참도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너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 것이고, 치우친 길로 들어서는 일도 없을 것이다. 다음 단계는 하나님이 반드시 너를 온전케 해서 그 복이 네게 임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이 복을 이어받기 원하고, 온전케 되는 길을 가기 원한다면, 먼저 합격한 본분 이행에 이르러야 한다. 하나님은 네가 하나님 집에서 보인 여러 가지 모습, 너에게 맡긴 임무, 부탁, 사명을 통해 네가 진리를 대하고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를 본다. 하나님은 너의 그 태도들을 통해 너란 사람이 과연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본다. 네가 가는 길이 진리를 추구하는 길이라면 너는 본분 이행에 합격할 것이고, 틀림없이 생명에 진입하고, 또 정도 차이는 있지만 성품에도 변화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모두 네가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도달하는 것들이다. 하나님이 본격적으로 온전케 하기 전까지, 너는 사람의 역량으로 이 정도만 도달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이 사역하지 않으면, 너는 이 정도만 도달할 수 있게 되고, 그 이상 노력하면 무척 힘이 들 것이다. 너는 스스로 최선을 다해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이를테면 의지로 극복하고,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고, 버리고, 감정에 대응하고, 세상을 포기하고, 사악한 풍조를 인식하고, 육을 배반하고, 충실하게 본분을 이행하고, 분별하고, 사람을 따르지 않는 등 이런 일들을 이루어 내면 그때는 하나님께 온전케 될 자격이 생긴다.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개입하지 않고, 그저 계속해서 너에게 진리를 공급하고, 진리를 깨닫도록 양육하고, 붙들어 준다. 어떤 방면의 진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진리 실제에는 어떻게 진입하는지와 같은 문제를 너에게 알려 주는 것이다. 네가 이런 진리를 깨닫고 진입해서 하나님에게 합격증을 받으면 구원받을 희망은 80%가 된다. 하지만 80%에 이르기 전까지는 사람의 심혈과 에너지를 전부 쏟아야 하고, 이번 생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저는 지금 하나님을 20년째 믿고 있는데, 에너지를 모두 쏟은 것 아닌가요?” 그런 건 햇수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람도 있다. “저는 지금 하나님 믿은 지 5년이 됐는데, 이제는 진리를 조금 깨달아서 어떤 게 합격한 본분 이행인지 알고 있습니다. 지금 그 방향으로 노력하고 있고, 길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평온하고 위안을 받는 기분입니다.” 이런 느낌은 기본적으로 맞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구원받을 확률이 80%에 도달했느냐? 아니다. 이제 몇 %냐? 10%~15%다. 본분 이행이 합격에 이르는 과정에서 너는 아직도 많은 훈계와 책망을 겪고, 많은 상황을 겪어야 한다. 긍정적인 면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네게 많은 것을 보고 깨닫게 해 준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네가 사람과 일, 사물을 보며 깨닫는 과정, 그러니까 그런 실제 상황 속에서 진리를 알게 한다. 사람과 일, 사물 가운데서 진리를 알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네가 만약 그런 것들을 겪지 않으면 진리에 대한 너의 인식은 영원히 문자와 도리, 구호에만 머물게 된다. 일단 인생에서 여러 가지 상황을 겪고 나면 네가 전에 인식했거나 이해하고 깨달았다고 기억되는 그런 도리는 실제로 변할 것이다. 이런 실제가 바로 진리 실제의 일면이자 네가 깨닫고 진입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아직 합격한 본분에 이르지 않았다면, 그가 구원받을 확률은 얼마나 되느냐? 기껏해야 10~15%에 불과하다.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절대 진실로 순종할 리 없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 원칙에 따라 일할 수 있겠느냐? 진지하고 책임 있게 본분을 대할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 일을 할 때는 언제나 자기 마음대로 대충대충 처리하고, 사심도 많이 섞이고, 자기 취향에 따라 처리할 게 뻔하다. 설령 네가 많은 도리를 얘기할 줄 알고, 이론을 말하고 구호를 외칠 줄 안다 해도 그것이 네게 진리 실제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므로 네가 구원받을 확률은 높지 않다. 참된 구원에 이르고, 사탄 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려면, 앞으로는 여러 진리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노력을 기울이는 목적이 무엇이냐? 더욱 정확하고 확실하게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 위해서다. 진리에 진입해야 바른 인생길을 걸어갈 수 있다. 도리만 말하고 구호만 외칠 줄 알았지 본분을 이행하는 일에서는 진리 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함부로 행동한다면 그것은 진리 실제가 없는 것이고, 진리 실제와는 차이가 너무나 크다. 본분을 이행하면서 많은 일을 겪은 후 자신이 진리를 잘 모르고 부족한 점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진리에 공을 들이기 시작한다면, 점차 도리를 말하고 구호만 외치던 상태를 벗어나 참된 인식을 얻을 것이다. 또 정확하게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께 진실로 순종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사람이 구원받을 희망이 점점 늘어나고 구원받을 확률도 그만큼 높아진다. 그 희망은 무엇에 따라 늘어나느냐? (사람이 진리를 아는 만큼 늘어납니다.) 진리를 아는 정도는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를 실행하는 것이다. 진리를 실행해야 진리를 알 수 있고, 진리를 실행하지 않으면 영원히 진리를 알 수 없다. 글귀와 도리만 아는 것은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니다. 네가 진리를 많이 실행할수록 실제가 생기고 변화가 생긴다. 그리고 진리를 인식할수록 구원받을 희망은 늘어날 것이다. 네가 본분 이행 과정에서 긍정적인 면으로는 자신의 본분을 올바로 대하며 어떤 환경이 임하든 자신의 본분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으며, 다른 이들이 모두 믿지 않고, 본분을 이행하지 않을지라도 너는 본분을 지키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본분을 지켜 나가며 충성을 다한다면, 너는 진정 본분을 본분으로 여기고 완전히 충성을 다한 것이다. 이런 기준에 이를 수 있다면 기본적으로 이행한 본분이 합격인 셈이다. 이것이 긍정적인 면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이르기 전에 부정적인 면에서 다양한 시험을 견뎌 내야 한다. 만약 한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시험을 견디지 못해서 본분을 포기하고 도망쳐서 본분을 저버린다면, 이것은 어떤 문제냐? 그건 바로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다. 하나님의 부탁을 저버리는 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배반이다. 하나님을 배반하고도 구원받을 수 있느냐? 그것으로 끝이다. 일말의 희망도 없다. 그가 예전에 이행한 본분도 봉사에 지나지 않았는데, 배반하는 순간 그마저도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 반드시 본분을 잘 지켜야 한다. 본분을 지키면 희망이 있다. 충실하게 본분을 이행하면 구원에 이를 수 있고,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 본분을 지키는 일에서 모든 사람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무엇이냐? 바로 시험에 임했을 때 굳게 설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시험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돈, 지위, 남녀, 감정 등이 있다. 또 어떤 것이 있느냐? 일부 본분은 위험 부담이 있고, 심지어 생명의 위험마저 도사리고 있다. 이런 본분을 이행하다가는 감옥에 잡혀갈 수도 있고 박해받아 죽을 수도 있다. 너는 그래도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느냐? 꿋꿋이 버틸 수 있느냐? 이런 시험을 쉽게 이겨 내느냐 마느냐는 그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지,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마주한 이런 시험들을 점차 분별하고 인식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그 본질을 인식하고, 그 안에 숨은 사탄의 계략을 인식하고, 또한 자신의 패괴 성품, 자신의 본성 본질, 자신의 연약함을 인식하고, 늘 하나님에게 자신이 그 시험들을 이겨 낼 수 있도록 지켜 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시험을 이겨 낸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본분을 지킬 수 있고, 저버리거나 도망치지 않게 될 것이고, 이로써 구원받을 확률은 50%가 된다. 이 50%가 도달하기 쉬우냐? 한 걸음 한 걸음이 고비에다 위험한 상황이니 도달하기가 쉽지 않다! 진리 추구가 이토록 어려운 걸 알고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 않겠느냐? 그건 어떤 사람이냐? 그건 불신파나 하는 소리다. 사람은 생존을 위해서는 머리를 쥐어짜고 어떤 고통도 감수할 수 있다. 또한 재난 속에서도 굳세게 살아가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만약 하나님 믿으며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 그런 의욕이 있다면 틀림없이 완벽하게 효과에 이를 수 있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위해 노력하려 하지 않는 사람은 못난이다! 진리 추구는 사람이 노력했다고 도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람의 노력에 성령의 역사가 더해져야 가능한 일이고, 하나님이 여러 가지 상황을 마련해 사람을 시련하고 연단하고, 또 성령이 역사하여 사람을 깨우치고 빛 비추며 인도해야 가능한 일이다. 사람이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아무리 고생해도 당연한 것이다. 높은 산에 오르기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는 등산대원들은 극한에 도전하기 위해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심지어 생명도 도외시한다. 하나님 믿고 진리를 얻는 일이 등산보다 어려우냐? 복은 받고 싶은데 고생은 하기 싫다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이는 못난이다. 진리를 얻고자 추구하는 일은 의지가 없이는 불가능하고 수고 없이는 불가능하다. 진리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만 얻을 수 있다.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방면의 진리와 관계된 합격의 정의, 합격의 기준, 하나님이 합격이라는 기준을 제시한 연유,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것과 생명 진입의 관계 등을 사람이 모두 이해한 후,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본분을 지키며 포기하지 않고, 또한 각종 시험을 견딜 수 있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배치한 여러 가지 환경 속에서 하나님이 요구하는 다양한 진리를 이해하고 인식하고 진입할 수 있다면, 하나님 편에서는 기본적으로 합격인 것이다.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데에 이르렀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 세 가지에 이른 것이다. 첫째는 본분을 대하는 태도가 올바르고, 어느 때라도 본분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는 본분 이행 과정에서 각종 시험을 이겨 내고 넘어지지 않는 것이다. 셋째는 본분 이행 과정에서 여러 가지 진리를 깨닫고 실제에 진입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에 모두 도달해서 합격하면,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여 온전케 되는 첫 번째 조건인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것이 완벽해진다.

합격한 본분 이행에서 ‘합격’이라는 이 두 글자에 관계된 내용은 전에도 일부 얘기한 적이 있다. 예전에 얘기했던 ‘합격’은 기본적으로 어떻게 정의했느냐? (원칙대로 일 처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얘기하는 ‘합격’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요구 기준으로 상승했다. 하나님은 왜 사람에게 본분 이행에 반드시 합격해야 한다고 요구하느냐? 이것은 사람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뜻에 관련되고, 사람을 구원하고 온전케 하는 하나님의 기준과 관련이 있다. 네가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데에 이르지 못하면 하나님은 너를 온전케 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케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따라서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관건은 사람의 본분 이행이 합격인지 아닌지를 보는 것이다. 본분 이행에 불합격한다면 사람을 온전케 하는 하나님의 사역은 너와는 무관하다. 지금 어떤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하면서 걸어가는 길도 맞고, 방향도 맞는데 그래도 합격한 본분 이행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사람이 깨달은 진리가 너무 적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대신해서 집안일을 분담하고 싶어도 그만한 분량이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언제쯤 분량이 생겨서 정말 부모 대신 집안일을 분담할 수 있느냐? 그가 일을 좀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어른들이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될 때, 그때는 집안일을 분담할 수 있다. 그러면 가능하다. 지금 너는 일은 어느 정도 할 수 있지만, 여전히 힘을 쓰고 봉사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 네가 깨달은 진리가 너무나 얕고, 실행해 낼 수 있는 진리도 너무 적고, 파악할 수 있는 원칙도 너무 적고, 늘 모색하는 과정에 있고, 늘 몽롱한 상태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너는 자신이 하는 일이 과연 하나님 뜻에 부합하는지 아닌지 확신하기 어렵고, 속으로도 늘 불확실하다. 그러면 네가 이행하는 본분이 합격한 것으로 볼 수 있느냐? 아직은 아니다. 깨달은 진리가 너무 적고, 생명 진입도 아직 하나님이 요구하는 정도에 이르지 못하고, 분량도 너무 작기 때문이다. 분량이 너무 작다는 건 무슨 말이냐? 누군가는 진리를 깊게 깨닫지 못했다고 하는데, 사실 진리를 깊게 깨닫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미숙한 인성, 혹은 형편없는 자질, 너무 많은 소극적인 부분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예를 들어 지금 너에게 본분 한 가지가 임했는데, 네가 할 줄 모르는 일이다. 그러면 너는 스스로를 하나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는 무능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소극적이고 연약해질 것이다. 하나님의 안배도 잘못된 것 같고, 자기는 아무것도 못하니까 분명 도태될 거라는 생각에 본분을 이행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이것은 분량이 작은 모습이 아니냐? 또한 지금 결혼 안 한 젊은 형제자매가 많은데, 멋진 남성이나 아름다운 여성과 마주치면 마음이 흔들리고, 둘이 눈이라도 맞으면 감정이 싹틀 것이다. 이렇게 정이 생겨서 연애라도 하게 되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이것이 바로 시험에 빠진 것이다. 분량이 작지 않으냐? 이게 바로 분량이 작은 것이다. 또 있다. 사람들 중에는 특별한 은사를 받아서 하나님 집에서 특별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그것을 밑천이 생긴 것으로 생각하고 거드름을 피우려 하며 자기를 자랑하려 한다. 그렇게 자랑하게 되면 행동에 원칙이 없어진다. 다른 사람의 칭찬 몇 마디에 그는 더욱 원칙 없이 행동하고, 우쭐해서 본분을 망각한다. 이 역시 시험에 빠진 것이다. 이것도 분량이 작은 모습이 아니냐? 분량이 작은 사람은 작은 일에도 넘어질 수 있다. 일례로 하나님 집에서 연기자로 활동하는 사람이 있는데, 외모도 그런대로 괜찮고 인기도 좀 있다. 영화를 몇 편 찍고 나자 그는 나름 유명해진 기분이었다. ‘이 정도 명성이면 나쁘지 않지. 세상에서라면 사인해 달라고 하는 사람들도 생기지 않았을까? 하나님 집에서는 왜 아무도 사인해 달라는 사람이 없지? 아무래도 괜찮은 영화를 하나 더 찍어야 하겠군.’ 그런데 다음 영화 주연에는 발탁이 되지 않자 그는 본분 이행을 그만두고 싶었다. 다 시시했다. 늘 주연을 맡거나 유명 배우가 되고 싶었는데 그렇게 되지 않으니까 의기소침해지고, 기분 상하고, 심지어 본분을 내팽개칠 생각마저 한다. 이것은 분량이 작은 것이다. 분량이 작으면 중책은 감당하기 힘들다. 설령 하나님이 너에게 본분을 준다 해도 못 미더울 것이다. 잘못된 생각 하나, 뜻처럼 되지 않는 일 하나 때문에 본분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등질 수 있는데, 이건 분량이 작은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분량이 너무나도 작다. 분량이 이렇게 작은데, 이런 모습은 합격한 본분 이행과 얼마나 차이가 나느냐? 어느 부분에서 차이가 나느냐?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는 정도에서 차이가 난다. 어떤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하는 동안 집안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 병이 나면 예배도 본분도 중단하는데, 이삼일 본분을 포기하는 것은 별일이 아니지만, 그러다 가족은 죽으면 더 이상 못 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본분 이행은 생명을 얻는 큰일에 관계되고 구원받는 기회는 이번 한 번뿐인데, 그 생각은 미처 못 하고 감정이나 가족을 본분, 구원받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 역시 분량이 작은 것 아니냐? 분량이 너무나 작다! 이것은 인생에서 올바른 일이 무엇인지, 본연의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분량의 크기가 나이에 달렸느냐? 아니다. 패괴된 인류는 성별, 나이, 출신 지역, 국가를 막론하고 패괴 성품은 누구나 같고, 누구나 사탄 본성이 있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할 수 있고, 온갖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진실로 회개할 수 있겠느냐? 영원히 회개하지 못한다. 그는 달라질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병이 나면 입으로는 하나님께 의지한다고, 죽음도 두렵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본분을 이행하지 않으면 죽을 게 뻔하니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게 아니라 얼른 가서 본분을 이행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현재 가장 바쁘고 가장 중요한 본분, 하나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본분을 골라 얼른 신청했다.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그는 늘 ‘과연 이 병이 나을 수 있을까? 나을 수 있겠지, 내가 생명도 내놓았는데 안 나을 수가 있겠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의 병은 죽을병이었고, 그가 본분을 이행하든 안 하든 죽을 운명이었다. 그가 본분을 이행하러 왔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한다.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그의 분량과 이러한 출발점으로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그런 사람은 진리도 추구하지 않고, 인성도 나쁘며 마음속에 늘 자신만의 타산이 있다. 병이 재발하거나 몸이 조금이라도 불편하다고 느껴지면 바로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긴 하신 걸까? 날 보살펴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걸까?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그럼 나도 이 본분을 이행하지 않을래.’라고 생각한다. 몸이 약간만 불편해도 본분을 포기하려고 한다. 이것이 분량이 있는 것이냐? (분량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다양한 사람이 여기 모여 설교를 듣고 있고, 또는 가정과 사업을 내려놓고 하나님 집의 어떤 부분에서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며, 자기가 파악한 업무나 자기가 배운 것과 관련된 일련의 사역들을 하고 있지만, 사실 모든 이가 다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아니며, 모두가 본분을 기꺼이 이행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본분을 이행하는 모든 이가 어느 정도의 분량을 지닌 것은 더더욱 아니다. 겉으로 보기엔 다 아주 바쁘게 보내며, 진정한 믿음을 토대로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일하며 헌신하는 것 같지만, 사실 각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은 수시로 연약해지며, 수시로 본분을 포기하려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또한 늘 자신만의 타산이 있으며, 하나님의 사역이 빨리 끝나 복받을 수 있기를 더욱더 기대한다. 바로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이러한 연약함과 패역, 작은 분량, 무지한 생각, 행위 등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언젠가 네가 이러한 문제들을 모두 해결하여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때면, 어떤 문제가 생기든 네 본분 이행에 영향을 받지 않게 되면 된 것이고, 네 분량이 자란 것이다. 사람이 최후에 어떤 길을 가고 어느 만큼 갈 수 있는지는 구호를 얼마나 외쳤는지와도 관계가 없고, 일시적인 기분과 염원이 어땠는지와도 관계가 없다. 그것은 사람의 추구, 진리를 사랑하는 정도에 달려 있다.

너희는 어떤 상황에서 본분을 포기할 수 있느냐? 죽음이 임했을 때겠느냐, 아니면 삶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겠느냐? 일부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할 때 요구가 많다. 하나는 바람이나 뜨거운 태양을 마주하지 않을 만큼 사역 환경이 편안해야 하고, 조금도 고생하는 건 안 된다. 또 한편으로는 자기 남편(아내)과 계속 같이 있으면서 둘만의 생활을 즐기고, 여가나 휴가 같은 사생활도 보장되어야 한다. 이렇게 모든 것이 만족스러워야 하는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만족스럽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아서 계속 대립각을 세우고 또 관념을 퍼뜨려 다른 사람들을 교란한다. 진리를 깨달은 일부 사람들은 이 사람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 불신파라는 사실을 분별하고 그를 멀리한다. 하지만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분량이 작고 분별하지 못해서 그에게 교란당한다. 너희가 볼 때 악을 행하는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서 제명해야 하느냐, 그렇지 않으냐? (제명해야 합니다.) 이렇게 일관적으로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하는 자는 반드시 교회에서 제명해야 한다. 그래야 분량이 작고 무지하고 우매한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다. 너희는 어떤 상황에서 본분을 포기하고 훌쩍 가 버릴 수 있느냐? 예를 들어, 네가 복음을 전하다가 뛰어난 외모에 분위기 있는 말투를 지닌 사람과 마주쳤다고 해 보자. 그가 볼수록 마음에 들었던 너는 속으로 생각했다. ‘본분 이행만 아니었다면 이런 짝을 만나면 정말 좋겠다!’ 이런 생각은 위험하다. 시험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일단 생각을 많이 하면 연애를 하겠다고 마음먹게 된다. 그리고 막상 쫓아다녀 사귀어 보면 그 역시 마찬가지로 패괴된 사람이고 남들하고 다를 바 없지만, 그때는 후회해도 소용없다. 사람은 일단 남녀 관계라는 시험에 빠지면 쉽게 빠져나올 수 없다. 1, 2년, 3~5년 내에는 돌아오기가 쉽지 않다. 이 3~5년이라는 시간을 망치게 되면 진리를 얼마나 덜 깨닫고, 네 생명이 얼마나 손해를 보고, 생명의 성장이 얼마나 지체되겠느냐! 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세상에서 돈을 많이 벌어서 명품을 걸치고, 좋은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을 보면 마음이 동해서 자기도 돈을 벌고 싶어 하는데, 이것도 시험이 임한 것이다. 어떤 일이 생겼을 때 마음이 흔들리거나 본분을 포기하고 싶어 하는 자는 모두 시험을 이겨 내지 못하는 사람으로, 위험하다. 이는 분량이 작은 모습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맛있는 것을 먹는 걸 보면 기분이 나빠지고 씁쓸한 생각이 들며, 누군가 좋은 결혼 상대를 찾은 것을 보면 또 마음에 달가워하지 않는다. 너와 나이도, 생김새도 고만고만했던 사람이 너보다 잘 차려입고 명성까지 얻은 것을 보면, 너는 괴로워하며 예전에 자신도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 졸업해서 일자리를 찾았더라면 저 사람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일을 만날 때마다 너는 몇 날 며칠을 괴로워한다. 이런 시험은 네 입장에서는 속박이 되고 시달림이 된다. 이것은 분량이 작은 것이다. 너희가 복음을 전할 때 적당한 이성을 만나고, 킹카나 퀸카를 만난다면 반드시 피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피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게 무슨 의미겠느냐? 너의 분량이 각종 시험을 이겨 낼 수준에 이르지 못해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네가 피할 수 없으면 너의 마음이 점유되고 홀리게 된다. 네 마음속으로 그 일을 생각하고, 머릿속에 그 일을 떠올리며, 심지어 꿈에서도 그 일을 꿈꾸고, 다른 이와 대화할 때도 그 일을 화제에 올릴 것이다. 본분 이행 시에도 영향을 받고, 진리를 교제할 때 다른 사람은 할 말이 많은데 너는 말수가 점점 줄어들 것이며, 하나님을 믿는 일에도 관심이 없어질 것이다. 이것이 꼬임에 넘어간 것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시험에 빠진 것이다. 그러면 위험하다. 어떤 이들은 반드시 연애를 하고 이성과 함께해야만 시험에 빠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상황이 거기까지 발전하면 이미 돌려세울 방법이 없다. 너희는 그런 일을 마주했을 때 똑같은 상황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느냐? (모르겠습니다.) 모른다는 건 분량이 작다는 의미이다. 왜 모른다는 것은 분량이 작은 것이라고 하겠느냐? 하나는, 네가 이런 일을 만난 적도 없고, 이런 일을 만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너는 스스로를 파악하지 못한다. 또 하나는 이런 일을 만났을 때 너에게는 이런 문제에 대응하는 올바른 태도와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할 줄 모른다면, 너는 수동적인 사람이다. 수동적이라는 것은 분량이 작아서 우매하고 무지하다는 뜻이다. 네가 먼저 남을 꾀어 내지는 않겠지만, 남이 먼저 너를 꾀어 낼 수도 있다. 이것은 너에게 시험을 가져오는데 이걸 이겨 내지 못하면 문제는 심각하다. 예를 들어, 상대가 너에게 돈과 지위를 주거나 너를 유혹할 더 나은 대상이 있다면 그걸 이겨 내기가 쉽겠느냐? 네가 이겨 낼 확률이 얼마나 되느냐? 어떤 사람이 마음에 드는 누군가를 만났다고 한다. 그런데 상대가 자기한테 초콜릿 두 조각을 주니까 마음이 흔들려서 사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분량이 겨우 이 정도다. 이게 하나님 믿은 지 얼마 안 돼서 그런 것이냐? 꼭 그런 건 아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믿은 지 10년이 되어도 이런 비슷한 일을 만나면 시험에 들기도 한다. 그런 일을 처음 만나 한 번은 시험에 들 수 있지만, 두세 번 만나도 또 시험에 드는 것은 어찌된 일이냐? 분량이 작고, 정말 깨닫지 못한 진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왜 깨닫지 못하느냐?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언제나 흐지부지해서 그렇다. 그에게는 이런 일이 대수롭지 않다. 그의 생각은 이렇다. ‘정말 괜찮은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결혼을 안 하나? 지금은 단지 적당한 짝을 못 만나고, 내 눈에 차는 사람이 없어서 그냥 이렇게 지내는 것뿐이지.’ 그냥 그렇게 지내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도 아니고, 구원받고 온전케 되는 길을 가려는 자세도 아니다. 그는 그냥 그렇게, 되는대로 살려고 한다. 하루살이처럼 그때그때 발길 닿는 대로 가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더는 나아갈 수 없는 날이 오면 그때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이다. 그는 사람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마음,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하려는 사역에는 관심이 없다. 또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여러 가지 진리도 진지하게 대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누군가는 말한다. “매번 설교 잘 듣는 사람한테 어쩌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고 하십니까?” 단지 예배 의식을 지키고 설교를 듣는 것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르다. 설교를 듣는 사람은 너무나 많다. 하지만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 진리 추구의 길을 가는 사람은 더 적다. 설교를 들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론을 이해함으로써 본인의 관념 상상을 키우는 일에만 열중한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설교를 들으면 진리를 추구하고 받아들이는 일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설교를 들으면 자신을 반성하며 자신의 상태에 맞춰 보는가 하면,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일에 집중한다. 진리 실제 부분을 파악하고, 실행과 체험에 열중해서 진리를 얻는다. 그러므로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설교를 듣는 것은 생명을 얻기 위함이다. 그는 진리를 깨달아 자신을 바꾸기 위해서 진리를 마음속으로 받아들인다. 진리를 실행할 때 그가 속으로 알고 있는 진리는 그에게 도움이 된다. 진리를 깨달으면 길이 생긴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설교를 들을 때도 흐리멍덩하게 듣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듣고 나서 알아들었냐고 물으면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다 알아들었습니다. 하나 하나 확실하게 적어 뒀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본인에게 어떤 도움이 되었느냐고 물으면 그는 어쨌든 도움이 되긴 됐다며 얼버무린다. 정말 도움이 되었을까? 아니다. 그 진리를 얻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왜 얻지 못했느냐?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어떻게 얻을 수 있었겠느냐? 이런 사람이 있다. “왜 못 얻었다는 겁니까? 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거죠? 열심히 듣고 이렇게 받아 적기까지 했는데요.” 어떤 사람은 형식적으로 적기만 할 뿐, 진리를 갈망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이 진리를 교제했다고 해서 꼭 받아들였다고 할 수는 없는데, 그 사람의 마음이 진리를 정말로 갈망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진리를 정말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떤 것이냐? 하나님 말씀을 읽은 다음, 말씀을 자신의 내적 상태, 자신의 행동, 하나님 믿는 원칙, 하나님이 맡긴 부탁과 책임, 자신이 걸어가는 길과 결부시켜 자신에게 맞춰 보고 반성해야 하며, 그것들을 명확히 분별해서 진리를 깨닫고, 거기에다 실행하고 진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이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방금 분량이 작은 사람들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람은 진리를 점차 깨닫는 과정에서 우매함과 무지함, 두려움, 연약함 등과 같은 분량이 작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연약함이란 무엇이냐? 너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요소가 극히 적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특별히 작은 것을 말한다. 너는 도리적으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고 주재한다는 것을 믿지만, 막상 일이 닥치면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에 마음 놓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며, 순종하지도 못한다. 이것이 바로 연약함이다. 사람의 우매함과 무지함, 두려움, 패역과 같은 부정적인 요소는 오직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진리를 구하면서 점차 해결하거나, 혹은 정도는 다르지만 개선이 가능하다. 개선이란 어떤 것이냐? 이런 부정적 요소를 점진적으로 해결해서 너의 본분 이행 효과가 점점 좋아지고, 일에 부딪혀도 예전보다 잘 버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에 비슷한 일이 생겼을 때 너는 분량이 작은 관계로 연약해지고 소극적으로 변했다. 심지어 그것이 본분을 이행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주었다. 너는 기분 나빠 하고, 내팽개치고, 무성의한 태도를 보이고 충성심도 없었다. 지금은 비슷한 일이 생겨도 본분에 대한 너의 충성도가 줄어들지 않고, 마음이 힘들거나 연약해지더라도 스스로가 진리를 구해 해결할 수 있다. 즉, 개인의 생명 진입 문제가 더 이상 본분 이행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되고, 너의 정서와 내적 상태, 너의 연약함이 네가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너의 책임, 본분, 의무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된다. 이것은 일 처리 능력, 그리고 외부 사물에 대한 대응 능력이 강해진 것이 아니냐? 이것이 바로 분량이 자란 것이다. 어떤 사람은 주연을 맡기면 신나서 경쾌하게 걷다가도 단역을 맡기면 달가워하지 않고 언짢아서 고개를 떨구고 걷는다. 복음을 전할 때 늘 앞에 나서려 하지만 진리를 교제할 줄 모르는 사람도 있다. 그는 훈련은 하지 않으면서 늘 높은 자리에 얼굴을 내밀려고 한다. 이것이 참된 순종이냐? 이것이 올바른 본분 이행 태도냐? 그릇된 생각, 잘못된 내적 상태는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만 한다. 그래야 나중에는 어떤 일이 닥쳐도 진리를 구하고 진리를 실행하는 경지에 오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생명 체험이 생겨난 것이다. 네가 여러 가지 일을 분별하게 되면 면역력이 생겨서 언제 어떤 일을 만나든 본분 이행에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사소한 일이나 기분, 사람과 일, 사물과 같은 환경적인 변화 때문에 본분 이행이 지장받는 일이 없어지는 것이다. 또 네가 죄를 이기고 다양한 환경, 다양한 정서를 이기는 능력이 커진다. 이것이 바로 분량이 자란 것이다. 그렇다면 분량은 어떻게 자란 것이냐? 그것은 사람이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고 서서히 진리 실제에 진입함으로써 도달한 효과다. 네가 진리를 일부 깨달으면 이런 진리는 네 생명으로 변하고, 사람됨의 근본으로 변하고, 네 사물 보는 관점이 되고,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된다. 그러면 너는 강해져서 여간해서는 연약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전에 너는 리더를 맡으면 뛸 듯이 기뻐하다가도 교체가 되면 한두 달을 소극적으로 지냈다. 무슨 일을 맡겨도 하기 싫어하고, 무슨 일을 맡겨도 소극적인 정서로, 무성의한 태도로 대하고, 심지어 내팽개치곤 했다. 지금 너는 교체하겠다고 하면 이렇게 대답한다. “교체된다고 해도 저는 아무렇지 않습니다. 단 하루도 소극적으로 지내지 않을 겁니다. 오늘 교체되고 내일 뭔가를 해야 한다면 이어서 하겠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를 받아들이고 순종하겠습니다.” 이것이 강해진 것이다. 이런 강인함은 어떻게 생겨난 것이냐? 네가 만약 진리를 추구하지 않았다면, 일이 닥쳤을 때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고 원칙대로 일 처리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런 분량이 생겼겠느냐? 이방인들의 처세술로 살아간다면 너는 영원히 강해질 수 없다. 진리에 따라 살아야만 체면과 지위, 허영을 점차 내려놓을 수 있다. 그러면 결국 어떤 일도 너를 넘어뜨릴 수 없고, 어떤 일도 네 본분 이행에 지장을 주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분량이 생긴 것이고, 강해진 것이다. 강해지고 분량이 자라면 본분 이행이 점점 합격에 가까워지지 않겠느냐?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동시에 일정한 분량을 이미 갖춘 것 아니겠느냐? 이 분량에는 어떤 것이 포함되느냐? 분량이 생기면 하나님을 진실로 믿고, 진실로 순종하고, 진실로 충성하게 된다. 또 자신의 본분을 바르게 대하게 된다. 범사를 하나님에게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멀어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분량이 자라난 모습이다.

이제는 구원받는 이 일이 반드시 일정에 있어야 하고, 더 이상 흐지부지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겠느냐? 각각의 진리를 깨닫는 것은 구원받는 일에 아주 중요하다. 너는 그 어떤 진리도 아무렇게나 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힘만 쓰고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고생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시련이 닥쳤을 때 넘어지지 않고 버틴다고 다가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정말 구원받는 일을 일생일대의 큰일로 생각하고, 진리 얻는 것을 일생일대의 큰일로 생각한다면 어떤 일이든 내려놓을 수 있고, 내려놓기가 쉽다. 만약 구원받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매하고 무지한 것이고, 믿음이 너무 작아서 여전히 위험한 처지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본분 이행에 합격하기가 무척 어렵다. 본분 이행에 합격하려면 사람은 많은 진리를 깨닫고 많은 진리에 진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진리를 깨닫고 진입하는 과정에서, 사람이 이행하는 본분은 점점 합격점에 이르게 된다. 사람의 온갖 연약함, 다양한 정서는 점차 달라지고 여러 가지 내적 상태도 점차 개선된다.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동안 사람 내면에서는 하나님 믿고 구원받는 일에 대한 이상이 갈수록 또렷해지고, 동시에 구원받고자 하는 갈망과 요구는 점점 절실해질 것이다. 절실하다는 건 어떤 뜻이냐? 구원받는 일이 급선무이고 너무나 중요한 일임을 깨닫는 것이다. 패괴 성품을 해결하지 않으면 너무 위험하고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이런 마음가짐을 절실하다고 하는 것이다. 너는 처음에 구원받아 온전케 되는 일에 전혀 개념이 없다. 그러다가 점차 사람은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죄악과 패괴 성품 속에서 사는 것은 자유롭지 않고 너무 고통스럽고, 결국에는 사악한 사탄 조류에 휘말려 혼자서는 굳게 서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네가 얼마나 강하고 굳건하든 끝까지 하나님을 따라간다는 보장이 없으니 반드시 진리를 추구하고 반드시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을 겪어야 진리를 깨달아 자신을 인식할 수 있고, 하나님을 끝까지 따르겠다는 의지가 생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때 비로소 구원받는 일에 절실함을 느낄 것이다. 구원을 받으려면 사람이 진리를 깨닫는 것이 필수적이다. 진리 추구는 사람이 영원히 포기하면 안 되고, 가볍게 보아서도 안 되는 큰일이다. 진리를 추구하느냐 마느냐는 구원받는 일과 직접적으로 관계되고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모든 문제, 모든 어려움은 모두 진리 추구를 통해 해결할 수 있고, 사람의 연약함, 무지와 우매함도 점차 바뀔 수 있다. 여기서 바뀐다는 의미는 무엇이냐? 바로 네가 죄를 이기는 능력이 강해졌다는 뜻이다. 패괴 성품, 사악한 사물에 대해 점점 민감해지고, 마음속으로 이 일에 점점 분별이 생기고 감각이 생긴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이런 의식이 없다. 죄악과 사악함, 그리고 사탄에 속한 것들을 보더라도 마음에 아직 감각이 없는데, 그러면 안 된다. 그건 분량이 부족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각종 범죄 행위, 사탄의 온갖 추한 모습에 대해 아무런 느낌이 없고 아무런 분별도 없고, 진실한 증오는 더더욱 없다. 자신의 행동, 자신이 드러내는 패괴,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패괴 성품, 추악한 요소에 대해서도 전혀 지각하지 못하고 전혀 분별하지 못한다. 그러니 증오는 말할 것도 없다. 그건 분량이 너무나 모자란 것이다. 하지만 얼마나 부족하든, 지금 사람이 얼마나 연약하고 분량이 얼마나 작든, 그건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길을 주고 방향을 주어 사람이 이 문제들을 해결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본분 이행이 합격점에 점점 다가가는 동안, 너 역시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려 노력하고 있다.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죄를 이기는 능력도 점차 강해지고, 사악한 사물을 분별하는 능력도 점점 강해진다. 그 후 너의 연약함, 패역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해결된다. 예를 들면, 네 분량이 작을 때는 어떤 일을 만나면 너는 그것이 좋지 않은 걸 알면서도 거기에 구애를 받고 얽매였다. 심지어 그 속에 빠져들기도 했다. 네가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일부 실행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너는 그 일에 대해 속으로 혐오하게 된 것은 물론이고 하지 않겠다고 거절할 수도 있고, 동시에 다른 사람이 거기에서 빠져나오도록 도울 수도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발전한 것이고 분량이 자란 것이다. 분량이 자랐다는 표징이 무엇이냐? 먼저 본분을 충실하게 이행하며 건성으로 대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욱 진실하고 실제적이며, 하나님에게도 진실로 순종하게 된다. 그리고 사탄의 시험과 교란을 분별하고 이겨 낼 수 있다. 사탄의 미혹과 통제가 더 이상 통하지 않고, 그러면서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구원의 기준에 이른 것이다.

너희는 오늘 이 교제를 통해 자신이 이행한 본분이 합격인지 가늠할 수 있겠느냐? 가늠할 수 있다면, 그것은 네가 이 진리들을 조금은 깨닫고 성장했다는 뜻이다. 아직도 가늠할 수 없다면 그것은 네가 아직 알아듣지 못했고, 아직은 이를 수 없다는 뜻이다. 우선은 가늠할 줄 알아야 하고, 또 한 가지는 어떻게 해야 합격인지 알고, 길을 알아야 한다. 이 두 가지를 반드시 잘 알아야 한다. 전에는 본분 이행에 관한 얘기가 대부분이었고, 합격한 본분 이행에 관한 얘기는 별로 하지 않았는데, 오늘은 주로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기준을 다루고, 합격의 기준 및 그에 관련된 각각의 진리를 자세하게 교제해 보았다. 그리고 본분을 이행할 때 사람이 어떤 문제를 피하고 어떤 원칙을 지켜야 하는지, 어떤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 하는지, 이런 것들은 모두 중요하다. 특히 제물을 훔쳐 먹지 말고, 함부로 연애하지 말고, 사역지침을 어기지 마라. 이런 짓을 저지르면 너는 완전히 끝이고 구원받을 희망이 없다. 그러니 잘못된 길을 가지 말고 악인의 길을 가지 마라. 그런 길을 가면 정말 희망이 없고, 아무도 너를 구해 줄 수 없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지 않으면 너 또한 너 자신을 구할 수 없다. 만약 그 지경까지 간다면 문제가 심각한 것이니 돌려세우기 힘들다. 그러면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것이다.

2018년 1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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