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깨달아야 하나님의 행사를 알 수 있다 (제 2 부)

유대인들이 유대 땅에서 쫓겨난 일에 대해 많은 사람이 관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진리를 구하는 사람은 그 일에서 깨우침을 얻는다. 이해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일로 인해 하나님의 공의 성품은 사람이 거스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 사람에게는 그런 이해 능력이 없다. 만약 하나님이 한 그 일이 자기 관념에 맞지 않는다면, 우선 하나님은 공의롭고, 하나님의 성품은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 다음 기도하고 진리를 구해서, 유대인이 대체 무슨 짓을 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렀기에 하나님을 노하게 했는지 봐야 한다. 그래야 철저하게 사람의 관념을 해결할 수 있고,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인식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할 수 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기란 정말 쉽지 않다. 네가 전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렸어도 관계없고, 혹은 하나님의 인도,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여 사역을 했어도 관계없다. 봉헌하고 버린 것도 관계없고, 심지어 사람이 볼 때 네가 공헌이 있어도 관계없다. 어쨌든 이런 것들을 밑천으로 내세우지 마라. 이것이 첫 번째다. 절대 이런 것들을 카드로 내세워 하나님에게 너를 어떻게 대하라고 협박하지 마라. 이것이 두 번째다. 다음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하나님이 하는 말씀과 너를 대하는 태도가 네 관념에 맞지 않고 인지상정에 어긋날 때, 절대 하나님께 대적하거나 대항하지 마라. 이것이 세 번째다. 이 세 가지를 지킬 수 있겠느냐? 이 세 가지는 실제에 관련된다. 사람에게는 이 몇 가지 내적 상태가 쉽게 생겨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왜 이런 내적 상태가 생기느냐? 왜 이런 모습이 나오느냐? 하나님은 인류 전체를 경영하고 만물을 주재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런 것을 밑천으로 내세웠느냐? 공로로 인정해 달라고 했느냐? “내가 이렇게 큰일을 했는데 너희는 어째서 고마운 줄도 모르느냐?” 하나님이 이런 태도를 보였느냐? (아닙니다.) 하나님 마음에는 그런 게 없다. 그렇다면 왜 사람은 조금만 버리고 헌신해도, 조금만 공헌해도 하나님에게 공로를 인정받으려 하느냐? 왜 그런 모습과 태도를 보이느냐? 그 문제는 사실 아주 간단하다. 바로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에게는 왜 그런 모습과 태도가 없겠느냐? 바로 하나님의 본질은 진리이고, 진리는 거룩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정답이다. 사람이 그런 모습과 태도를 드러내는 것은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해결할 수 있느냐? 방금 말한 세 가지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세 가지 중 어느 것도 실행하려면 쉽지 않지만, 해결 방법이 다 있다. 이 세 가지를 들은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이것도 못 하게 하고 저것도 못 하게 하면 꼭두각시처럼 아무 생각 없이 살라는 거잖아.’ 그런 것이냐?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냐? 내가 알려 주겠다. 너에게 그런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은 너를 보호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다. 네가 추구하는 그 방법은 진리에 부합하지 않고, 바른길이 아니다. 이미 앞선 실패의 교훈도 있다. 자신의 버림과 헌신을 밑천이나 카드로 내세워 하나님이 너를 대하는 태도가 마음에 맞지 않을 때 대항한다면, 너의 그런 태도는 진리에 부합하지 않고, 비인간적이고, 정당하지 않다. 네게 설령 천 가지, 만 가지 이유가 있다 해도 너의 그런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진리에 전혀 부합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에 속한다. 사람이 갖춰서는 안 되는 태도다. 이것이 두 번째다. 네가 만약 그런 태도를 고집한다면 결코 진리를 깨달을 수 없고, 얻을 수도 없다. 진리를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네가 손해를 보고, 피조물이 지녀야 할 존엄과 본분을 잃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세 번째다. ‘난 내 태도를 버리지 않을 거야. 누가 날 어쩌나 보자고! 내 생각엔 내가 옳아. 그러니 내 생각을 밀고 나가겠어. 내 생각이 이치에 맞으니 끝까지 밀어붙이자!’라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그렇게 밀고 나간다면, 너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네가 밀고 나가거나 계속 그렇게 고집을 부린다고 해서 자신의 태도를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절대로 네 그런 강경한 태도 때문에 자신의 태도를 바꾸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오히려 너의 그런 거역과 끝까지 대항하는 태도를 보고 그에 상응하는 태도로 너를 대한다. 이것이 네 번째이다. 이는 가장 중요한 사항이다. 네 가지 중에 너희가 이해하지 못하는 항목이 있느냐? 공허하고, 사람의 실제 상태에 맞지 않고, 사람의 생활에서 실제적인 면에 별 도움이 안 되는 그런 항목이 어느 하나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모두 도움이 됩니다.) 어느 하나 공허한 이론에 그치고 실행의 길이 아닌 항목이 있느냐? (없습니다.) 이 네 항목은 사람이 현실 생활에서 진리 실제에 어떻게 진입하는가 하는 것에 도움이 되느냐? (도움이 됩니다.) 이 네 가지를 확실히 인식하고, 거기에 따라 실행하고 체험한다면, 너는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것이다. 이 네 가지는 네가 많은 시험 가운데 있을 때나 다양한 사람과 일, 사물을 만났을 때 보호받도록 해 줄 것이다. 네가 그런 패역한 상태를 드러낼 때, 이 몇 가지 진리를 생각하고 거기에 대조해 본 다음 그에 따라 실행하면 된다. 처음에 실행하지 못할 경우, 기도해야 한다. 동시에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는지 인식하고, 자신이 어떤 패괴된 내적 상태에 처해 있고, 어떤 패괴를 드러냈기에 실행하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하는지 반성하고 인식해야 한다. 네가 이렇게 진리를 구하면 네 내적 상태는 정상을 유지할 것이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진리 실제에 진입하게 될 것이다.

어느 방면의 일이든, 진리를 모르면 네가 행하는 것은 관념 상상 아니면 거역과 대적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백 퍼센트 확실하다. 어떤 때는 겉보기에 네가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고, 나쁜 짓도 하지 않고, 교란이나 방해도 하지 않은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한 일이 진리에 부합한다고 볼 수는 없다. 어떤 때 너는 관념 상상대로 일하기도 한다. 그런데 비록 교란이나 파괴를 일으키지 않더라도 그것이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네가 한 그 일은 하나님 뜻에 부합하지 않는다. 또 어떤 때 너는 속으로 하나님에게 관념을 갖기도 한다. 비록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지만 마음속으로 하나님은 이렇게 해야 하고, 저렇게 해야 한다면서 계속 네 관념 상상을 고집하고 계속 하나님을 규정한다. 그러면 네가 겉으로는 별다른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내적 상태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방금도 말했지만, 너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일종의 관념과 규정을 가지고 있다. 비록 네가 자신의 관념 상상 때문에 하나님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한 적은 전혀 없다고 하더라도 너의 내적 상태는 네가 계속해서 속으로 하나님을 규정하고 오해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결론은 무엇이냐? 그건 바로 네가 계속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이 사실 아니냐? (사실입니다.) 어느 날 유대인이 유대 땅에서 쫓겨난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나면, 너는 너의 그 관념 때문에 하나님이 한 일에 아멘 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한 일을 보고도 하나님을 찬미하거나 경외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한다. 오히려 마음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원망이 생겨나고, 심지어 조금은 반발심이 생겨날 것이다. 너는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러시면 안 됩니다. 당신이 그렇게 하시는 건 사람 뜻과 너무 맞지 않습니다! 어찌 피조물을 이렇게 대하십니까? 어찌 당신 선민을 이렇게 대하십니까? 저는 당신의 행사를 보고 찬미할 수 없고, 찬양하는 소리도 못 내겠습니다. 마음이 무척 괴롭고 처량합니다. 제가 마음속으로 무한히 숭상하던 하나님은 제가 의지할 만한 분이 아닌 것 같아요. 제가 믿는 하나님은 이러시지 않습니다. 제가 믿는 하나님이라면 당신의 피조물을 이렇게 대하면 안 됩니다. 제가 믿는 하나님은 이렇게 냉정하고 잔혹하지 않습니다. 제가 믿는 하나님은 인류를 아기처럼 부드럽고 자상하게 대하십니다. 사람에게 넘치는 행복과 포근함을 주시지, 이렇게 차갑고 쌀쌀맞지 않습니다.” 네 내면 깊은 곳에 이렇게 서러움이 생겨날 때, 그 순간 네 눈앞에 발생한 그 사실은 네가 보기에 하나님이 한 것이 아니다. 너는 인정하지 않고, 아멘 하지 않고, 찬송은 더더욱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너의 그런 정서, 그런 내적 상태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냐, 아니면 하나님에 대한 대항이냐? (대항입니다.) 당연히 그것은 진실한 순종이 아니다. 여기에 순종은 없고, 원망과 대항, 불복, 심지어 분노만 있을 뿐이다. 설마 이것이 피조물이 창조주를 대할 때 지녀야 할 태도란 말이냐? 아니다. 너는 속으로 갈등할 것이다. ‘이건 하나님이 하신 일인데, 왜 나는 마음속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걸까? 하나님이 하신 일인데, 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지? 하나님이 하신 일인데, 왜 이렇게 사람 뜻에 맞지 않을까? 하나님이 하신 일인데, 왜 그 안에는 살육과 유혈 사건이 가득할까?’ 이 순간 네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그 하나님과 현실 속에 진실로 존재하는 창조주가 서로 모순이 되고, 충돌이 일어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어느 하나님을 믿어야 하느냐? 이 순간 네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관념 속의 하나님을 믿어야 하느냐, 아니면 눈앞에서 실제로 행하는 이 하나님을 믿어야 하느냐? (눈앞에서 실제로 행하는 하나님입니다.) 사람은 주관적인 바람으로는 실제로 행하는 이 하나님을 믿고 싶어 한다. 하지만 사람의 관념과 사욕, 사람의 정 때문에 자기 내면 깊은 곳의 그 하나님을 숨기고, 눈앞에서 실제로 행하는 이 하나님을 마지못해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러면서도 사람 내면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창조주가 행한 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여전히 자신을 감춘 채 자기만의 작은 세계에 살면서 내면 깊은 곳에서 상상한 그 하나님과 기쁘게 교류하고 함께한다. 반면 참된 하나님은 사람에게 계속 막연한 존재로만 남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이런 생각마저 한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안 계셨으면 좋겠어. 내가 속으로 상상하는, 사랑이 넘치고 사람에게 따스함을 느끼게 해 주시는 그분이야말로 나의 하나님, 참된 하나님이야. 지금 이 실제 하나님은 내가 상상하는 하나님이 아니야. 그분이 한 일은 너무 실망스럽고, 따스함도 느껴지지 않아. 특히나 그분의 심판 형벌도 그렇고, 그토록 많은 사람을 정죄하고 도태시킨 일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아.’ 이런 건 어떤 사람들 입에서 나오는 소리냐? 모두 불신파들이 내뱉는 소리,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내뱉는 소리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행사를 모를 때, 사람의 상상과 하나님의 실제 사역이 모순을 일으켰을 때를 배경으로 생겨나는 갖가지 내적 상태다. 그렇다면 이런 내적 상태는 어째서 생겨날까? 우선 사람에게는 패괴 성품이 있다. 또 한편으로, 사람의 관념 상상에 맞지 않는 사실이 하나 나타났을 때, 사람의 꿈과 환상이 깨져 자신의 속셈과 복을 바라는 욕망이 채워질 수 없을 것 같을 때, 사람은 결국 어떤 선택을 하느냐? 도피하고, 타협하고, 보류한다. 심지어 절충안을 택하는 사람도 있다. “저는 둘 다 받아들입니다. 원래부터 제 마음속에 있던 그 하나님도 하나님이신데, 그분은 또한 사랑이 있는 분입니다. 또 눈앞에서 큰일을 하시고, 권병이 있는 이분도 역시 하나님입니다. 저는 둘 다 받아들이고, 어느 분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사람은 늘 이렇게 양다리를 걸친 상태로 살아간다. 속으로 늘 자기 상상 속 하나님에게 도취되어 막연한 하나님을 위해 뛰어다니고, 헌신하고, 봉헌하고, 사역하고, 어떤 대가라도 치러서 본분을 이행하고, 심지어 생명도 바치고 자신의 모든 걸 바칠 수도 있다. 사람의 태도가 어떻고, 또 내적 상태가 어떤지를 떠나, 사람 마음속에 이런 하나님이 존재하는 동시에 진정한 창조주에게는 사람이 하는 이 모든 것이 선행이냐, 아니면 악행이냐? 순종이냐, 아니면 대적이냐? 당연히 선행도 아니고, 기념할 가치도 없다. 또한, 사람에게 진정한 순종도, 진정한 봉헌도 없고, 대적과 거역, 대항만 가득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사람이 이런 내적 상태를 지니고 늘 이런 상태로 살기 때문에, 꿈에서 깨어나 현실 생활 속에서 살게 될 때는 현실 생활 속의 이 하나님이 한 일이 사람의 심리적인 요구와 정신적인 필요를 전혀 채워 줄 수 없고, 언제나 상처를 주고, 쌀쌀하고 야속한 느낌을 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심지어 이렇게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은 대체 사랑일까? 사람을 사랑하시기는 할까? 하나님은 사람을 걱정하고 자기 몸처럼 사랑하신다고 하던데, 어디가 그렇다는 거지? 왜 내 눈에는 안 보이지?’ 이러면 큰일이다! 사람이 늘 이런 내적 상태로 살다 보면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갈등은 점점 깊어지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도 점점 멀어진다.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는 하나님의 일을 보고 사람은 생각한다. ‘나의 하나님께서 세상이 놀랄 일을 하셨구나. 이분이 바로 내가 정말 믿고자 하는 하나님이고, 바로 나의 하나님이야. 이분의 피조물로 살아가야지. 이분이야말로 나의 창조주야.’ 그런데 사람이 현실 생활 속에서 어려움을 만나 소극적이고 연약해질 때 상상 속의 그 하나님이 사람에게 수시로 도움이 되지 못하고 수시로 사람의 필요를 채워 주지 못하면,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믿음은 그것 때문에 약해지고 심지어 사라진다. 사람의 이런 내적 상태와 태도, 모습은 모두 어떻게 초래된 것이냐? 그것은 사람이 이 창조주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네가 그를 알지 못하는 것이 유일한 원인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과 하나님 사이가 멀어지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온갖 갈등과 오해가 빚어지는 근원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 먼저, 사람의 관념을 해결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모든 사역을 현실 생활 속에서 느끼고, 체험하고, 구하고, 헤아려서 하나님이 너에게 안배한 모든 일에 완전히 순종하고, 하나님이 너를 위해 마련해 준 모든 사람과 일, 사물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순종의 목적이 무엇이냐? 이 모든 진리를 인식하고 깨닫기 위함이다.

지금까지 교제한 내용이 너희가 듣기에 다소 깊이가 있느냐?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 이해할 수 있겠느냐? (네.) 이론적인 면은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론적으로 이해했다고 해서 진리를 깨닫고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깨닫고 받아들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느냐? 일상생활에서 늘 성찰해야 하는데, 무엇을 성찰해야 하느냐? (자신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런 내적 상태와 모습이 있는지, 또 자신이 하나님께 어떤 관념이나 오해가 있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맞다. 너에게서 어떤 패괴가 드러나고, 어떤 상상 관념이 있는지, 그런 것들을 성찰해야 한다. 자신을 성찰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건 간단하다. 먼저 다른 사람부터 보면 된다. 다른 사람은 너를 비추는 거울이다. 다른 사람이 이 측면의 성품이나 상태를 드러냈을 때, 역으로 자신에게 그런 관념 상상이나 상태가 있지 않은지, 자신을 성찰하고 거기에 자신을 맞춰 보면 된다. 만약 그런 게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꺼내서 털어놓고 해부해야 하느냐, 아니면 ‘꽃 피우고 열매 맺을 때까지’ 꼭 지키고 있어야 하느냐? (털어놓고 해부해야 합니다.) 꺼내고 해부해서 모두에게 유익이 되도록 해야 한다. 모두가 이를 통해 패괴된 내적 상태를 정확히 인식하고, 진리를 깨닫고,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여 함께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관념을 해부하고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상태를 해부하는 목적이 무엇이냐? (사람의 관념과 소극적인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입니다.) 거기서 벗어나려는 목적은 무엇이냐? 진리를 얻기 위해서다. 관념을 해결하려는 목적은 네가 그 관념의 잘못된 점을 인식하고, 그것이 네가 지녀야 할 것이 아님을 인식하기 위한 것이다. 너는 그것을 고수하지 말고 내려놓아야 한다. 그런 다음 무엇이 올바른 것이고,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이고, 무엇이 진리인지 능동적으로 구해야 한다. 그리고 긍정적인 사물과 진리를 받아들여 네가 지녀야 할 실행 원칙과 사상 관점으로 삼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변화가 생긴 것이고, 진리를 얻은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방면의 진리를 근거로 유대인이 유대 땅에서 쫓겨난 일을 바라볼 것이냐? 이 일에 대해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관념은 무엇이냐?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유대 땅에서 쫓아내선 안 되고 마땅히 유대인을 보호해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대적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도 하나님은 유대인의 죄를 영원히 사해 주셔야 하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관념이다. 너무나 황당하지 않으냐? 하나님이 사람의 관념대로 하면, 그래도 공의 성품이 있는 것이냐? 비록 쫓겨나게 돼서 사람의 마음이 조금 언짢을 수도 있겠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이미 선을 넘은 행동이고, 사탄이 하는 짓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어떻게 노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대하실 수 있지? 이런 사랑의 방식이라면 사람이 받아들일 수가 없어. 사람 뜻에 너무 어긋나잖아! 이제 보니 이건 사랑도 아니야. 하나님이 유대인을 이렇게 대했다면, 하나님에게는 사랑이 없는 거야.’ 하나님의 사랑을 부인했는데, 이것은 사람의 관념이다. 사람의 관념은 무엇이냐?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규정합니다.) 그렇다. 사람이 한 가지 일을 규정하는 것은 사람의 관념이다. 그것은 진리에 부합하지 않고, 진리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사람은 무엇을 규정했느냐? 하나님이 일하는 방식을 규정했다. 하나님은 꼭 어떻게 해야 하고,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의 행사이고, 하나님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일하는 방식을 사람이 규정한다면, 그 규정이 바로 사람의 관념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하나님이 일하는 방식을 뭐라고 규정했느냐? 사람이 뭐라고 규정했길래 속으로 하나님이 그 일을 행한 것에 대해 마음이 편치 않고, 하나님에게 오해와 반발이 생겼느냐? (사람은 하나님이 유대인에게 모든 은혜와 축복을 내려 주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의 상상과 관념, 사람의 예상을 벗어나 유대인을 쫓아내고, 그들을 떠돌아다니게 하시니까 사람은 그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커다란 관념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행한 방법에 대해 많은 사람이 관념이 생기고 오해를 품었다. 다시 말해, 사람은 하나님의 그 방법에 대해 마음이 불편하고 하나님이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관념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규정이 아니냐? 하나님이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 무슨 근거로 하나님이 그러면 안 된다고 하느냐? 네 생각에는 그러면 안 되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했다면, 설마 하나님이 아니란 말이냐? 하나님이 한 일이 틀렸고,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말이냐? 이것이 사람의 어리석은 부분이 아니냐? 사람은 너무나 어리석고 무지하고, 너무나 교만하고 독선적이다. 너무나 쉽게 하나님에게 관념이 생기고, 하나님을 규정한다. 이런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너무나 위험하고, 아주 쉽게 도태될 것이다.

유대인이 유대 땅에서 쫓겨난 일에 대해 많은 사람이 관념과 의견을 품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다. 내가 너희에게 가장 간단한 방법을 하나 알려 줄 테니 너희의 그 어려움이 해결될 수 있는지 잘 들어 보아라. 가장 간단한 그 방법은 바로 이것이다. 사람은 먼저 자신이 하나의 피조물이고,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순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점을 알아야 하고, 늘 관념이 생겨서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대역무도한 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람은 반드시 창조주가 피조물을 대할 때는 기본적인 원칙이자 최고의 원칙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어떻게 대하든 전부 그의 경륜에 근거하고 그의 사역의 필요에 근거한다. 그는 누구에게 자문할 필요가 없고, 누구의 동의도 구할 필요가 없다. 그는 행하고 싶은 대로 행하고, 대하고 싶은 대로 대한다. 그가 어떻게 행하고 어떻게 대하든 모두 진리 원칙에 부합하고, 창조주가 일하는 원칙에 부합한다. 피조물은 오로지 창조주께 순종해야지, 어떠한 선택도 해서는 안 된다. 이는 피조물이 마땅히 지녀야 할 이성이다. 만약 이런 이성을 갖추지 못하면 사람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 사람은 반드시 창조주는 영원히 창조주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에게는 모든 피조물을 마음대로 지배하고 주재할 권력과 자격이 있으며, 거기에 이유는 필요치 않다. 이는 그의 권병이다. 피조물은 창조주가 행한 일이 옳은지 그른지, 어떻게 해야 적합한지 평가할 권리도 자격도 없다. 창조주의 주재와 안배를 받아들일지 말지 선택할 자격이 있는 피조물은 없으며, 창조주에게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어떻게 주재하고 안배해 달라고 요구할 자격이 있는 피조물도 없다. 이것은 최고의 진리이다.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무엇을 하고 어떻게 하든 피조물인 인류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바로 창조주가 행한 이 모든 것에서 구하고 순종하고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최종적인 결과는 바로 창조주가 자신의 경륜을 이루고 자신의 사역을 성취하여 그의 경륜이 아무 방해 없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한편, 피조물은 창조주의 주재와 안배를 받아들이고 창조주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그 가운데서 진리를 얻고 창조주의 뜻을 깨달으며 창조주의 성품을 알게 되는 것이다. 너희에게 또 하나 알려 줄 원칙이 있다. 창조주가 무엇을 하고 어떠한 태도를 보이든, 큰 행사를 하든 작은 일을 하든, 그는 창조주라는 것이다. 반면 피조물인 인류는 무엇을 하든, 얼마나 큰 재능과 은사가 있든 결국엔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피조물인 인류는 창조주의 은혜와 축복을 얼마나 많이 받았든, 창조주의 긍휼과 자비 또는 은총을 얼마나 많이 받았든 자신이 남보다 뛰어나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또한,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생각해서도 안 되고, 자신이 고급 피조물이 되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이 너에게 아무리 많은 은혜를 베풀고, 은사를 주고, 일찍이 은총을 베풀거나 특별한 재능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너의 밑천이 아니다. 네가 피조물이라면 영원히 피조물이다. 너는 영원히 ‘나는 하나님 품속의 아기이니 하나님은 영원히 날 버리지 않으실 거야. 하나님은 언제까지나 나를 사랑으로 대하실 거고, 나를 보호해 주실 거야. 또 나를 살살 어루만지시고, 작고 낮은 소리로 따뜻하게 위로하며 격려해 주실 거야.’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바꿔 말해, 창조주의 눈에 너는 다른 피조물과 같다. 하나님은 마음대로 너를 쓸 수 있고, 또 마음대로 너를 지배할 수도 있으며, 마음대로 너를 각종 사람과 일, 사물 속에 배치해 어떤 역할을 맡게 할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마땅히 갖춰야 할 인식이고 이성이다. 이 말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차 정상적이 될 것이고, 또 하나님과 가장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위치를 바로잡고 자신의 위치에 똑바로 설 것이며, 자신의 본분을 잘 지킬 것이다.

여기까지 듣고 나니 어떤 생각이 드느냐? 그래도 하나님에게 오해가 생기겠느냐? 누군가는 말한다. “하나님이 이렇게 사람을 대하시는데, 그러면 예전에 늘 사람을 개미 같다 하시고, 하나님 눈에는 구더기만도 못하다고 하셨던 그 말은 이제 보니 이론이 아니라 사실이었네요! 하나님은 사람에게 생각만큼 그렇게 친밀하고 가까운 분이 아니군요.” 사람은 마음이 싸늘해진다. 이건 뜨겁게 타오르는 마음에 찬물을 끼얹어서 사람 마음을 차갑게 식힌 것이나 마찬가지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사람 마음을 차갑게 하는 것이 나으냐, 아니면 계속 하나님에게 오해를 품게 두는 것이 나으냐? (차갑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좀 냉정해져야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조금이나마 인식할 수 있다. 피조물이 갖춰야 할 이성은 바로 모든 것에 있어 진리를 원칙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모든 일을 대할 때는 진리를 근거로 해야 하고, 모든 일을 할 때는 진리를 원칙과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 반면 사람은 마음속으로 늘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로 생각하고 서로 동등한 지위에서 지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현상은 좋은 것이냐? (좋지 않습니다.) 어디가 좋지 않으냐? 사람은 잘못된 자리에 서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너무 많이 오해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오해, 혹은 사람의 집착 때문에 태도를 바꾸지는 않는다. 태도를 바꾸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전과 다름없이 원칙에 따라 사람에게 일하고, 인류의 모든 생활을 주재하고 안배한다. 그런데 사람이 쉽게 관념을 품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한다면, 커다란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에게 친한 척하고 하나님에게 육적으로 줄을 서려 하면서 정을 내세우고, 밑천을 내세우고, 자신의 재주와 능력을 내세우고, 자신의 노력과 과거의 영광을 내세우고, 온갖 이유를 내세운다. 늘 이런 내적 상태 속에서 사는데 그러고도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불가능하다. 너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은 없고 늘 잘못된 관점을 품는다. 피조물의 위치에 서지 못하고 늘 야심을 품고 늘 더 높은 자리를 탐한다. 그 때문에 결국 자신의 본분을 바르게 대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너에게 한 요구, 너에 대한 태도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늘 연단을 받고, 고통받아도 자신의 상상 관념을 내려놓지 못하고, 자기를 하나님이 마음속으로 가장 사랑하고 염려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맞닥뜨린 사실을 통해 하나님은 그렇지 않고, 그것은 네 일방적인 생각이라는 걸 알고 좌절을 당하고 충격을 받아 한바탕 원망하고, 억울해하고, 감정도 꺾이고 만다. 이런 고통을 받는 것이 가치가 있느냐? (가치가 없습니다.) 사람의 일방적인 생각, 사람의 상상 관념은 스스로를 몹시 괴롭히고, 사람에게 최대의 골칫거리이기 때문에 사람은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느냐?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공의롭고, 하나님이 하는 모든 사역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지, 다른 뜻은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사람이 해야 하는 건 바로 피조물의 자리에 서서 창조주의 주재,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고, 창조주가 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며, 거기서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행사를 인식하는 것이다. 사람이 늘 자신의 관념으로 하나님이 한 일을 평가하고 규정하며, 하나님에게 늘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자기 뜻을 따르도록 한다면, 너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는 것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결국 하나님에게 버림받고 도태될 수밖에 없다.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싶다면 해야 할 유일한 일은 바로 창조주가 하는 모든 것에서 구하고, 순종하고,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을 인식해서 하나님께 진실로 순종하고 구원받을 수 있다.

2018년 5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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